목에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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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이동화(아디 활동가),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 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허창영/ 광주교육청 민주인권교육센터, 전임 간사 이 세상에 범죄에 대해 관대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을까?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빵가게의 빵을 훔친 정도의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불의에 분노하고 악행에 치를 떤다.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행사된 폭력에 대해서는 특히 민감하다. 인간의 존엄함이 폭력에 의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결과 앞에서 우리는 모두 감정의 북받침을 느낀다. 그 감정들을 추스르기 위해서는 몇 번이고 가슴 깊이 숨을 들이마셔야 한다. ‘죄는 용서할 수 없지만 사람은 용서 할 수 있는’ 정도의 경지에 오르려면 상당한 수양이 필요하다. 그런데 사람들의 이런 분노감정을 놓고 흥정놀이를 하는 집단이 있다. 학교폭력(학생 간 폭력)과 성폭력으로 재미를 보고 있는 이들이 그렇다. 지난해부터 세간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학교폭력 문제의 전면에는 늘 고통 받고 있는 피해자들을 내세운다. 성폭력 문제도 마찬가지다. 이토록 고통 받고 있는 피해자들이 있는데, ‘가해자에 대한 온정주의가 웬 말이냐’는 식이다. 대책이라고 내놓는 것들에 대해 비판이라도 할라 치면 ‘가해자의 인권만 생각한다.’라거나 ‘네 자식도 당해봐야 한다.’는 험한 말로 대꾸한다. 인간의 존엄함을 짓밟은 폭력 앞에서 서슬 퍼래지는 전형적인 인간의 모습들이다. 개인이야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합리적 대안을 내놓아야 할 의회나 정부기관들조차도 마찬가지다. 학교폭력과 성폭력을 근절하겠다며 호들갑은 떨고 있지만, 그 내용들이 국민의 분노감정에 기댄 한심한 수준이다. 학교폭력에 대해서는 학생생활기록부에 기재한다거나 초기부터 경찰이 개입해 엄벌하겠다는 식의 접근이 대세다. 성폭력에 대해서도 전자발찌를 강화하고 화학적 거세를 해야 한다고 얘기되더니 급기야 물리적 거세까지 제안되고 있다. 문제를 저지른 개인에게만 책임을 묻겠다는 지극히 전근대적인 처벌위주의 접근 방식이다. 극악무도한 개인만 제거하면 인류가 평온할 것이라는 증명 불가능한 정책을 쏟아내면서도 무책임하지는 않은지에 대한 일말의 성찰도 없다. 개인의 분노감정만 자극할 뿐 문제의 본질을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 정부기관에 의해 ‘대안’이라는 웃지 못 할 이름으로 버젓이 자행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정작 이러한 정책들로 학교폭력과 성폭력이 해결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범죄와 관련해 늘 등장하는 애꿎은 CCTV처럼 ‘엄벌’이라는 단어를 잘 팔아먹는 것에만 관심을 보일 뿐이다. 분노한 개인들의 감정을 추스르게 할 빠른 약 처방으로 위기상황을 극복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 - 뉴스1 왜냐하면 그들은 정작 문제의 본질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문제의 본질을 보자면 결국 스스로의 문제점을 파헤쳐야 하는 상황에 부딪힌다. 학교폭력이 발생하는 구조적인 문제, 왜곡된 교육구조가 사람을 어떻게 피폐하게 만드는지를 드러내야하기 때문이다. 이를 감추기 위해 철저하게 개인의 문제로 돌린다.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 학생, 가정에서 또는 심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학생으로 치부하면서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교육구조가 갖는 문제는 교묘히 회피한다. 성폭력 역시 지극히 남성중심의 가부장적인 사회구조 속에서, 남성이 주류인 권력의 관점에서 성폭력이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를 고백해야하는 문제를 회피한다. 그저 정신 나간 어떤 남성의 문제로 적당히 선긋기 한다. 심지어 어떤 여성 의원이 물리적 거세를 운운하면서도 그것이 남성 중심적 정책이라는 일말의 의심도 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지 않은가. 학교폭력의 본질적 문제는 교육에 있다는 점을, 성폭력의 근저에는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사회구조가 존재한다는 점을 고백해야 한다. 그렇지만 고백은 문제를 해결하는 출발점에 지나지 않는다. 출발점에서부터 차근차근 필요한 대안들을 토론하고 지혜를 모아야 한다. 지금의 상황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출발점에 서지도 않은 상황이다. 그러니 학교폭력도 성폭력도 해결방안을 찾는 일은 현재로서는 요원한 일이다. 지금의 상황을 그냥 둔다면 둘 다 판박이처럼 닮은 정책들만 쳇바퀴 돌 듯 반복할 뿐이다. 말만 무성하고 떡고물은 딴 놈이 먹을 판이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170 | 추천: 0
임아연/ 당진시대 기자   불편했다. 승승장구하는 싸이가 배 아파서는 아니다. ‘강남스타일’이 나오기 이전부터 미친 듯이 논다는 싸이 콘서트에서 소리지르고 날뛰면서 놀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모든 대중이 환호하고 박수를 치는 일에 심통(?)부리는 마음이 생겼다. ‘왜?’라는 물음보다 설명하기 힘든 불편함이 앞섰다. 그러다 어느 한 시점이 지나고 나서야 내가 사람들처럼 마냥 환호하지 못하는지 뒤늦게 답을 찾곤 했다. (아, 나는 정말 날카롭지도, 예민하지도 못하다.) 이번에도 역시 얼마 전 싸이의 시청 공연 실황을 중계하는 방송을 보고 알았다. 어떤 지점을 내가 불편해 했는지 맥이 짚이는 공연이었다. 공연에서 싸이는 ‘대한민국의 싸이’임을 강조했다. 인사도 그랬고 애국가로 시작한 공연코드 자체가 그랬다. 마침 그날의 풍경은 2002년 월드컵을 닮아 있었다. 군데군데 태극기가 휘날리는 모습은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그날’의 환희를 재현하는 듯 했다. 아마도 싸이와 놀기 위해 자리에 모인 사람들 역시 인파 속에서 10년 전 추억에 잠겼을 것이고, ‘대한민국’을 외쳐 부르던 그날을 기시감으로 느꼈을지도 모른다. 지난 10월 4일 밤 가수 싸이가 8만여명(경찰 추산)의 시민이 몰린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나는 싸이 ‘강남스타일’의 성공을 대한민국과 연결 짓는 게 불편했다. 그의 노래가 한국의 전통을 알리는 노래도 아닐뿐더러 ‘대한민국’이 그의 노래가 탄생되기까지 하등 도움을 준 게 없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이 그에게 준 건 기껏해야 두 개의 군번 뿐. 그로 인해 수많은 예비역들에게 ‘화끈한 대한민국 남자’로 각인된 이미지 정도일 테다. 한국 사회에서 견고한 리그를 형성하고 있는 예비역들을 팬들로 끌어안을 수 있었다는 게 그의 성공에 장점이 될 수 있었을 런지 모르겠지만, 이것 역시 전적으로 싸이 개인의 선택이었지 대한민국이 그의 성공을 도운 건 아니었다. 김연아가 피겨로 성공하기까지, 대한민국은 스케이팅 훈련을 위한 인프라 구축은 고사하고 그에게 스케이트 한 켤레 사준 적 없으면서 김연아를 대한민국과 등치시키는 것조차 거부감이 들곤 했다. 하물며 국가대표도 아닌 싸이를 국가대표화 하는 이 끈질긴 애국주의가 지겹다. ‘대~한민국’에 울컥하는 대중의 심리를 이용하는 언론도 그렇고, 그걸 이용해 마케팅 하는 소속사도 마찬가지다. 며칠 전 김장훈과의 불화설이 불거졌을 때, 김장훈 역시 싸이를 ‘애국해야 하는 사람’으로 표현했다. 아직까지도 애국은 대한민국을 세계에 알려 나라의 이름을 드높이는 일이라고 여겨진다. 한국이 동아시아 변방의 알려지지 않은 나라였을 때 쓰이던 구호가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지난여름 내한한 레이디가가와 에미넴, 혹은 마이클잭슨 등 수많은 세계적 해외 뮤지션들이 그들의 공연에서 미국인임을 자랑스러워하며 당당하게 ‘아메리카 만세’를 외쳤다면 지독한 미국우월주의자로 비난받았을 게 분명하다. 뮤지션들이 공연에서 자신의 국적을 강조하지 않는다고 해서 대중들이 그들의 국적을 모르는 게 아니며, 애국심에 기대어 그들을 판단하지 않는다. 대중들은 어떤 아티스트이건 그들의 음악과 퍼포먼스를 기대할 뿐이다. 싸이 ‘강남스타일’의 성공은 트렌드인 일렉트로닉 음악과 우스꽝스러운 뮤직비디오 안에 담긴 문화적 코드가 대중의 요구와 맞아 떨어진데다, SNS와 유투브 등 정보통신 발달에 힘입어 뮤직비디오가 국경을 초월해 순식간에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그 안에 어떤 국가적 메시지가 있거나 애국주의 코드가 담긴 것은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국가적 정체성을 의도했었다면 촌스러웠을 뿐, 전 세계 대중들로부터 이렇게 각광받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한국인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성과를 가져왔을 때, 아직도 한국 사회는 습관적으로 국가와 연결 짓고, 애국을 운운한다. 삼성의 제품이 세계에서 인정받는다 한들 삼성이 ‘애국’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야 한다. 인종과 국적을 초월해야 한다. 이제는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국가’라는 허상을 깨야 할 때가 왔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184 | 추천: 0
강기훈의 쾌유와 진실을 위한 후원콘서트를 엽니다 이현정/ 흥사단 민족통일운동본부 부장 얼마 전 한 선배가 브로셔를 건넸다. “우리의 친구 강기훈을 지켜주십시오.” 김기설 유서대필 사건의 피해자 강기훈의 쾌유와 재심개시 촉구를 위한 브로셔. 91년도 한 젊은이의 억울한 사건, 그러나 2012년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모두들 아시다시피 91년도 봄 캠퍼스는 노태우 정권에 항거한 학생들의 분신정국이었다. 당시 시인 김지하는 “죽음의 굿판 당장 걷어치워라”는 논란까지 일으켰다. 결국 위기에 몰린 노태우 정권은 강기훈에게 김기설 유서 대필과 분신 사주의 범죄를 뒤집어 씌웠다. 당연히 재판 중에 증거는 부족했고, 고문 및 강압 등의 가혹행위가 이어졌다. 여기에 92년도에는 검찰이 유일한 증거로 삼았던 국과수 필적 감정 책임자에 대한 뇌물 수수와 허위감정 구속 또한 있었다. 그러함에도 결국 강기훈은 민주화운동을 잠재우기 위한 독재정권의 희생양으로 무참히 짓밟혀 버렸다. 1991년, 1992년이 이러했다.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떠할까? 최근에 드라마 <추적자>를 한 번에 몰아서 보았다. 몇 달 전 드라마였지만, 그렇게 애정을 갖고 다시 볼 수 있었던 것은 그 내용이 우리 사회를 그대로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에게는 무서운 법이 되고, 누군가에는 우스운 법이 되는 현실. 국민은 없고, 권력 투쟁만 있는 정치 현실. 전쟁의 북소리가 들리면 침묵하는 법조계. 심지어 권력의 주인을 위해 온갖 날조가 난무하는 현실. 한 대기업의 떡값은 아무리 받아먹어도 탈이 나지 않아 계속 받아먹는 현실. 드라마는 이 슬픈 대한민국의 현실을 여과 없이 투영하였다. 당시 강기훈 사건의 현실과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강기훈씨 모습 그러나 다행히도 최근에 강기훈 사건이 회자되었다. 2007년 진실과화해위원회가 재심 권고를 내렸고, 2009년 고등법원은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다. 결국 이 사건의 수사와 재판이 모두 억지였음을 자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3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대법원은 재심 개시 결정을 미루고 있다. 한 인간을 잡아가두고 부모는 한을 가슴에 안고 죽었고, 그의 가족은 행복을 송두리째 빼앗겼고, 시대의 양심은 갇혀야만 했다. 그러함에도 현재의 국가권력과 사법부는 이를 덮어두기에 일쑤다. 최근 지난 날 국가권력의 횡포로 억울하게 누명을 쓴 사람들이 명예를 회복하는 사례가 있었다. 물론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과거사도 많지만, 인혁당 사건, 학림사건, 수많은 간첩 혐의 무죄 등이 드러났다. 독재권력 시절, 권력의 횡포에 억울하게 죽어가고 쓰러져간 역사의 진실을 밝혀준 것이다. 이제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도 이러한 수순을 밟을 때이다. 당시 증거가 불충분했고, 고문 등 폭력행위로 이뤄진 조사였기에 대법원은 조속히 재심을 해야만 한다. 사법부는 과거 국가권력에 의해 잃어버렸던 사법부 정의를 꼭 찾아야만 한다. 이게 사법부의 몫이고 ‘개판’이 아닌 ‘재판’을 하기 위한 21세기의 과제이기도 하다. 강기훈씨가 지금 많이 아프다. 현재 간암이라는 병마와 힘겹게 싸우고 있다. 어찌 보면 시대의 아픔을 홀로 짊어지고 싸웠던 그였기에 이 아픔이 찾아왔을 것이다. 당시에는 아무도 잡아주지 못했던 손, 이제는 큰 짐을 짊어졌던 그에게 우리가 손을 내밀어야겠다. 그의 무죄 판결은 개인의 명예회복뿐만 아니라,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명예회복도 되는 것이다. 반갑게도 최근에 강기훈의쾌유와재심개시촉구를위한모임이 결성되었다. 현재 치료비 모금 활동과 대법원 재심 개시 촉구활동을 펼치고 있다. 10월 9일(화) 7시 30분, 서울시립대학교 대강당에서 강기훈의 쾌유와 진실을 위한 후원콘서트가 펼쳐진다. 그를 위한 많은 손길이 모여지기를 바란다. 과거에는 혼자 외롭게 싸웠지만, 이제는 외롭지 않도록 그의 손을 우리가 잡아주자. <추적자>의 맨 마지막 장면, 죽었던 딸 백수정이 백홍석에게 찾아와 “아빠는 무죄야.”의 행복한 대사가 떠오른다. 하루 빨리 강기훈씨의 딸이 그의 앞에서 이렇게 얘기를 해줬으면 좋겠다. “강기훈 아빠는 무죄야. 사랑해~” 강기훈 후원콘서트
2017-07-12 | hrights | 조회: 186 | 추천: 0
송채경화/ 한겨레 기자 나는 평소 음악을 편식하는 편이다. 다양한 음악을 골고루 듣는 게 아니라 평소 좋아하던 노래만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듣는 게 습관이다. 새로운 음악을 듣는 게 귀찮다고 해야 할까. 그러다 보니 매일 아침 출근준비를 할 때나 이동할 때, 잠자기 전에 항상 음악을 틀어놓지만 주의 깊게 음악을 감상해본 적은 많지 않다. 그러던 내게 최근 변화가 생겼다. 이전부터 좋아해왔던 인디밴드가 새로운 앨범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듣고 문득 호기심이 생긴 것이다. 이들은 대체 어떻게 음악을 만들어 내는 걸까. 사실 그동안 나는 음악을 들을 때 주로 멜로디와 가사에만 집중해왔다. 기타나 베이스, 드럼, 건반 등이 그 음악에 어떻게 조합되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조용한 방에서 이들의 음악을 집중해서 듣는데, 그 모든 소리의 조합들이 하나의 ‘앨범’으로 탄생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상상력과 기술적인 과정이 거쳐갔는지가 느껴졌다. 보통의 경우 어느 뮤지션의 히트곡이 그 뮤지션의 전체적인 음악 색깔을 대변한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뮤지션이 공들여서 만든 앨범 하나를 제대로 감상하고 나면 그들이 나타내고자 하는 음악적 색깔이 매우 다양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내가 좋아하는 밴드 3호선버터플라이의 히트곡 <꿈꾸는 나비>만 들으면 이들의 장르는 ‘듣기 편한 모던락 ’이 아닌가 생각되지만, 그들의 앨범 수록곡을 모두 주의 깊게 들어보면 오히려 펑크나 사이키델릭, 아방가르드한 노이즈 음악에 더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후 나는 그들의 음악을 바탕으로 음악적인 세계를 점점 더 넓혀나가는데 있어 큰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 정치부 기자 생활을 하다 보니 문득, 정치도 이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일반인으로서 막연하게나마 느꼈던 ‘정치’에 대한 이미지는 여야 간의 개싸움, 한-미 FTA 같은 대형이슈에 대한 찬반, 누가 대통령이 되는지에 대한 궁금함. 그 정도였던 것 같다. 그러나 1년 전부터 국회를 출입하기 시작하면서 정치라는 소용돌이의 한가운데 서게 됐다. 여야 국회의원들을 직접 만나고 국정감사를 취재하고 총선거를 경험하니 ‘정치’라는 행위가 점점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여야 간의 개싸움 안에 숨겨진 아주 치밀한 정치적 계산들, 대형 이슈가 품고 있는 정치·경제·사회적 파장들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정치라는 행위가 정치인들에게만이 아니라 국민들에게도 얼마나 중요하게 작용하는지를 절실하게 깨닫게 됐다. 그렇다면, 2012년 대선 정국에서 우리 국민들은 과연 정치를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2012년 정치 소용돌이 속 여러 현상들이 품고 있는 다양한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을까. 안타깝게도 많은 국민들은 여전히 내가 이곳에 오기 전에 느꼈던 단순한 이미지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언론의 잘못이기도 하지만 성한용 한겨레 선임기자가 책 <안철수를 읽는다>에서 지적했듯이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들이 정치 혐오증을 통치술로 활용해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대통령은 민생을 위해 열심히 일 하는데, 정치인들은 국회에서 싸움질이나 한다’는 식의 프레임이다. 이러한 정치에 대한 혐오증은 국민들의 정치 참여를 가로막는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내가 어떤 정당의 당원이 되면 결국 나도 정치라는 흙탕물에서 더러워질 것’이라거나, ‘정파성에 매몰돼 비이성적인 사고를 하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느끼도록 한다. 안철수 현상도 결국 이것과 맞닿아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그러나 음악에 몸을 깊숙이 담그지 않고서는 음악을 제대로 즐기기 힘들듯이, 정치에서도 ‘참여의 비용’을 치르지 않고서는 민주주의가 발전하기는 어렵다. 하나의 히트곡이 그 뮤지션의 음악적 색깔을 대변하지 못 하듯이, 표면으로 나타난 어느 한 면만으로 정치 현상의 모든 걸 파악할 수 없기에 유권자들은 정치 속으로 조금 더 몸을 깊숙이 담글 필요가 있다. 이런 의미에서 박상훈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대표는 민주주의의 이상적인 시민상으로 ‘파당성을 감수하되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기반을 갖고 자신의 결정에 책임성을 갖는 참여자’를 꼽는다. 그는 “아무리 현실의 정당이 불만족스럽더라도 현실 밖에서 그것을 탓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노력하는 접근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3호선버터플라이의 대표곡 <꿈꾸는 나비>에는 이런 가사가 나온다. “한 번의 꿈만으로 모든 걸 뒤엎을 순 없어. 그래도 난 꿈을 꿔. 천만번 죽어도 새롭게 피어나는 꿈.” 다음 대통령은 ‘정치에 참여하는 사실을 숨기고 싶어 하는 나라’가 아니라 ‘정치 속으로 뛰어들어 자신의 꿈을 마음껏 꿀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주길 희망해본다. 그리고 이번 대선에서 그런 나라를 만들 대통령을 우리 국민들이 뽑아줬으면 좋겠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245 | 추천: 1
손상훈/ 소셜리서치앤멘토르 기획국장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졌지만 사퇴압력을 받았던 한 대법관이 있다. 그리고 아름다운 퇴진압력을 받는 한 종교지도자가 있다. 한 분은 신영철 대법관이고, 한 분은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스님이다. 위키백과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판사들의 촛불 시위 재판에 외압을 행사한 혐의로 윤리위원회에 회부된 최초의 대법관이고, 국회에서 현직 대법관에 대해 국회 탄핵소추안이 발의된 것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처음이다. 2009년 11월 신영철 대법관 탄핵소추안이 자동폐기 됐다.’ 현재까지 그 분은 여전히 대법관이고 임기는 6년이다. 논란은 끝났고 소나기를 피했으니 헌법에 보장된 임기를 다 채우는 것이 국민을 위한 마지막봉사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다. 지난 2009년 말 상습도박과 성매수 의혹을 제기당해 논란의 중심이 된 총무원장도 처음이다. 2012년 5월 일반 언론에 까지 거론되어온 각종 의혹에 대해 총무원장 스님은 ‘부처님오신날’ 봉축법문을 통해 각종 의혹을 공식 부인하였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지난 3일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스님을 만났다 사진 출처 - 불교포커스 어느 정도 잠잠해지나 싶던 용퇴논란이 최근 다시 제기되고 있다. 지난 5월에 몇 몇 선원수좌들의 성명이었으나, 최근 9월초부터는 선원수좌회, 전국승가대학교직자연합회 등 일부 단체 명의로 ‘질서 있는 또는 아름다운 용퇴’를 촉구하고 있다. 불교계 인터넷 언론에 따르면 ‘조계종 선원수좌회(대표 무여)가 하안거 해제일인 1일 "총무원장은 진정한 개혁의 기틀을 조속히 마련하고 물러나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선원수좌회는 지난 6월 종단의 개혁을 촉구하는 결의문을 발표한 바 있다. 선원수좌회는 8월 29일 직지사 만불전에서 대표자회의를 개최해 △승가공동체쇄신위 제반 주요의제의 지체 없는 실행 △은해사 ㄷ스님에 대한 조속한 처리 △총무원장은 개혁 기틀을 마련하고 물러날 것 △원로회의는 개혁과 쇄신의 증명역할을 할 것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가시적 행동에 나설 것을 결의했다.’ 요즘 신 대법관이나 총무원장 스님의 심기는 어떠할까. 임기를 마치고 떠날 것인가 적절한 시기를 선택해 공직을 사퇴할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하게 되는 상황은 2009년이나 지금이나 비슷해 보인다. 본인 스스로의 판단과 더불어 주변에 지지했던 사람들이 함께 고민하는 상황으로 보인다. 추천이나 선거과정에서 기여했던 충성스러운 관계자들은 당연히 임기를 마치는 영광을 선택하리라 생각한다. 어떠한 풍랑에도 맞서야 하고, 현 지위는 권력재창출과 이익을 대변하는 생존권이라는 절실함도 있을 것이다. 심지어 불교계 일부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는 총무원장 스님이 각종 의혹에 아니라고 했는데 왜 믿지 않느냐는 입장이다. 확인되지도 않는 소문과 ‘뒷담화’, 앙심과 분노에 덧칠하여 재생산되는 불교계의 잘못된 문화 탓이라고도 한다. 답답하고 안타깝다. 보통은 조계종 총무원 같은 행정기관을 모니터하고 비판하는 기능을 하는 불교계 시민사회단체의 일부가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이채롭다. 지난 5월 불교시민사회 한 관계자는 불교인터넷 언론 기고문에서 총무원장의 갑작스런 사퇴는 혁명적 상황을 만들고, 조계종단을 혼란에 빠트린다고 주장하였다. 9월이 되어 사퇴압력을 받는 지금은 어떤 상황판단일까 궁금하다. 대법원 홈페이지에 표현된 신영철 대법관의 소개는 이렇다. (중략) 법관으로 재직하며 종교 분쟁처럼 이해 집단의 대립이 극심한 경우에도 적극적으로 사건을 해결하였고, 기업회계의 투명성과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였으며,(중략) 공공의 이익이 부당하게 훼손되지 않도록 하며, 생명과 가정의 가치를 존중하는 취지의 판결을 다수 선고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위키백과에 따르면 ‘2009년 5월 삼성 에버랜드 전환사채 저가 배정 사건 판결에서 배임죄가 아니라는 견해를 밝혀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6대 5로 이건희 및 에버랜드 전 사장들에게 무죄를 선고하였다.’ 이런 판결을 임기 끝날 때까지 지켜봐야 할까. 신 대법관이 임기를 마저 채우려면 판결로 국민을 봉사하고 있다는 더 확실한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최근 종교적 형평성 논란을 빚어 임명된 김신 대법관의 대법원 홈페이지에는 소개는 이렇다. 이주노동자의 인권 보호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는 등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보호에 기여하는 다수의 판결을 선고한 바 있습니다. 또한 끊임없는 법리 연구와 온화한 재판 진행을 통해 선·후배, 동료 법관 뿐 아니라 법원 직원, 재야 법조로부터도 널리 신망을 받아 왔습니다. 앞으로 어떤 판결을 하는지 눈 밝은 분들의 협동지성이 절실하다. 또한 사퇴 촉구를 받는 대법관이 더 이상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 대법관과 총무원장의 아름다운 용퇴 대법관, 개인의 인권과 임기는 소중한 것이다. 종교지도자인 총무원장의 인격과 잔여임기도 존중되어야 한다. 그러나 최고위 공직자나 종교지도자의 도덕성은 개인으로 머무르지 않는다. 운동경기에서 심판의 오심도 경기에 일부라고 한다. 그러나 대법관과 총무원장은 운동경기도 아니고, 분쟁을 조정하고, 양심과 정신세계를 이끄는 우리사회 몇 안 되는 책임자이다. 이미 불교계 최대 행사인 ‘부처님오신날’ 같은 봉축법회에서 총무원장 본인의 의혹을 해명해야 하는 상황까지 이른 것도 큰 책임이 따른다. 총무원장직을 지금 내려놓는다고 큰 일이 나는 것도 아니다. 현직 총무원장이 바로 사퇴할 경우, 조계종은 1년 남은 원장선거를 조금 일찍 치르게 되는 것이다. 부정부패를 저지르고도 버젓이 직을 유지하려는 종교지도자보다 조계종 행정직 최고 지위를 버리는 모습이 더 나은 모습일 수 있다. 임기를 마친 총무원장이 명예스러운 것이 아니라 도덕적 책임을 지고 아름다운 뒷모습을 보여 주는 게 지도자의 또 다른 모습이다. 지도자 개인이 용퇴를 하려면 지지 세력의 간절한 청을 뿌리치는 용기도 필요하다. 또한, 대통령선거 등 사회의 중요한 일정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선택은 본인들의 몫이다. ‘질서 있는 아름다운 용퇴’ 대법관과 총무원장의 깊은 마음이 궁금하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197 | 추천: 0
홍성준/ 투기자본감시센터 사무처장 오작동 금융씨스템 하의 금융소비자 엊그제 기묘한 법률 초안 두 가지를 만들어 김기준 국회의원에게 제출하였다. 그 하나의 이름은 “금융소비자위원회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제정안”이고, 다른 하나는 “금융감독기구 설치 등에 관한 법률”이다. 대강의 골자는 금융소비자위원회를 금융관료(모피아) 손아귀에서 벗어나 금융소비자들이 만들자는 것이고, 현 금융위원회는 독재이니 민주적으로 개혁을 하자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자본주의 금융씨스템의 이용자다. 즉 금융소비자이다. 지금의 상황은 그 금융씨스템이 오작동을 일으켜 이미 고통을 받고 있거나, 언제가 닥칠 금융피해에 대한 공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점점 더 명확해지는 것은 오작동을 일으키는 지금의 금융씨스템은 설계자체부터가 오류라는 것이고, 설계부터 고치지 않는 한 지금의 상황은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금융씨스템을 둘러싼 집단을 보면 좀 더 명확해 진다. 금융씨스템으로부터 천문학적인 수익을 내는 금융자본과 그런 금융씨스템을 설계한 금융관료과 금융자본을 대리하는 전문가. 그리고 어쩔 수 없이 금융씨스템을 이용을 하고 있지만 수탈당하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는 금융소비자와 이미 모든 것을 잃고 금융씨스템 바깥으로 내쫒긴 금융피해자가 있다. 한국과 세계는 지금 탐욕스러운 금융자본을 규제하고 부패한 금융관료를 척결해야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작금에 진행 중인 글로벌 경제위기의 책임자들이 그들이며, 한국에서도 예외 없이 금융자본과 금융관료에 의한 금융피해가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 이 기묘한 법률안은 바로 이런 상황을, 금융씨스템을 개혁하고자 내놓은 것이다. 법률안 준비주체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은 법률안 준비주체가 지금까지의 경우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으로 준비주체가 지니는 보편성과 정당성에 있다. 그 면면을 보면, 한국 사회 대표적인 금융피해자들인 KiKO사태 피해자나 저축은행 피해자들이 준비에 참가했다. 또, 오랫동안 금융회사에 종사하면서 탐욕스러운 금융자본과 부패한 금융관료에 부패에 분노하여 싸워온 금융노동자들이 민주노총, 한국노총이란 소속조직을 넘어서 참여하였다. 마지막으로, 여의도 점령운동 등 관련 금융자본과 관료에 맞서 오랫동안 싸워온 시민단체(필자가 속한 투기자본감시센터 포함)가 준비하였다. 즉, 금융자본의 더 많은 수익, 이윤축적을 위해 규제완화와 같은 내용을 담은 기존의 금융관련 법률안은 처음부터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또, 부패한 금융관료집단이 기득권 사수 또는 영향력 확대를 위한 법률안도 결코 아니다. 이른바, 우리사회의 99% 입장에서 고민하고 토론하여 준비한 법률안이다. 지난 22일 있었던 금융위원회 개혁 법률 준비를 위한 입법 세미나 모습 사진 출처 - 조세일보 법률안의 주요 내용 이 법률안에는 금융피해자, 금융노동자, 금융관련 시민단체의 그 동안의 경험과 지혜, 원통함이 고스란히 실려 있다. 결론은 최소한 국가의 두 기관에, 금융씨스템에 금융소비자라는 이름으로 시민들이 침투해서 금융자본과 금융관료와 싸우겠다는 것이다. “금융소비자위원회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제정안”의 경우, 국가인권위원회를 모델로 독립적인 헌법기관으로 그 위상을 정하고 있다. 철저하게 금융관료의 손아귀, 더 나아가 정부권력으로부터 예산, 인사, 운영에서 독립적인 기관으로 신설해야 하는 것은 그렇게 해야 ‘금융소비자 보호기능’에 충실할 것이라는 그 동안의 경험이 반영된 것이다. 금융소비자위원회 위원장을 포함 11인을 정부, 국회, 대법원 추천(금융공공성운동과 금융소비자운동 출신 경력자 포함 - 노동자 대표, 소비자 대표)으로 구성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현 국가인권위원회의 실패사례에서 보듯이 보다 강력한 대정부 시정 권고와 시정 요구권을 부여했고, 사무처 설치를 담고 있다. “금융감독기구 설치 등에 관한 법률안”의 경우, 방송통신위원회를 모델로 하여 현 금융위원회를 개혁하자는 것이다. 현 금융위원회는 다수의 금융관료와 약간의 금융자본 대리인으로 구성되어 있어 권한은 막강하지만 구성절차와 권한행사에서 비민주적, 아니 독재이다! 따라서, 현 금융위원회를 금융정책과 감독의 단순한 의결기구(따라서, 금융감독위원회로 개명)로 하여 사무국을 철폐하고, 현 금융감독원은 그대로 유지하자는 것이다. 특히, 금융감독위원장의 국회 인사청문회를 실시하고, 금융감독위원 9인 중 2인은 반드시 야당 추천(금융공공성운동과 금융소비자운동 출신 경력자 포함 - 노동자 대표, 소비자 대표)으로 구성해야 한다. 또한, 상기의 금융소비자위원회 추천 인사를 포함해서 금융분쟁조정위원회 구성을 담고 있다. 한편, 금감원 직원의 금융사 재취업금지를 명문화 하여 부패의 소지를 차단하고자 했다. 그럼에도 몇 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 금융소비자위원회와 금융감독위원회의 위원자격을 철저하게 제한하는 것까지 합의하지 못했다. ‘전문성’이란 미명 또는 허명으로 특정자본 또는 그들을 대리하는 민간전문가(변호사, 교수 등)가 정부가 구성하는 **위원회에 위원으로 참여하여 낳은 부작용을 우리 시민사회는 여러 차례 보아 왔다. 그들은 “회전문 인사”로 특정 자본과 결탁해 있기 때문이다. 특히, 현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에 대한 대중적 불신 중에 여기서도 기인한 바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따라서, 금융소비자보호와 금융감독기구 개편이 목표인 두 법률안으로써 지금까지 늘 보아온 그런 민간 전문가를 철저하게 배제해야 옳다. 그래서 금융소비자 대표와 금융노동자 대표만으로 두 위원회의 위원으로 철저하게 한정해야 한다. 특히, 현병철 국가인권위원장의 무자격논란을 보았을 때, 반드시 금융공공성운동과 금융소비자운동 출신으로 자격을 제한하는 입법을 해야 한다. 만약, 변호사나 교수 중에 해당 위원회 위원이 되고자 한다면 먼저 금융공공성운동과 금융소비자운동에 종사하면 된다. 관련 시민단체도 많고, 금융권은 산별노조 형태라 가입이 쉽다. 또, 실제로 금융권노조와 금융관련 시민단체에서 직함을 가지고 성실한 활동을 하는 교수나 변호사를 찾으면 많다. 즉, 이 문제는 당사자의 의지와 선택의 문제이지 결코 차별이 아니다. 그 외에도, 금융소비자위원회와 현재 금융감독원과의 관계를 보다 명확하게 못한 것, 금융소비자위원회의 권한에 징벌적 손해배상 명령 등의 구제조치를 구체화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이 부분은 나중에 국가권력이 국가인권위원회의 권한(시정권고 등)을 우습게 여기는 폐단을 알기에 더욱 아쉽다. 두려움과 기대 위에서 국가인권위원회를 거론했는데, 그 창설과정을 기억한다. 오랜 군부독재 하에서 만연한 인권탄압, 국제인권기구의 권고, 김대중 대통령의 공약이라는 객관적인 조건 하에 국내 유수의 인권단체들과 기라성 같은 인권운동가들이 약 3년여를 싸워 쟁취한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은 심각한 왜곡을 겪고 있다. 이제, 금융소비자가 시민이 막강한 금융자본과 금융관료와 싸울 수 있는 두 개의 국가기관을 쟁취하고자 한다. 다가올 대통령 선거와 이후 수립될 새 정부라는 정치일정이 우리 앞에 있다. 여기서 맞닥뜨리게 될 금융자본과 금융관료의 온갖 로비와 압력을 생각할 때 미리부터 두려움이 든다. 이에, 시민사회의 역량결집을 호소한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206 | 추천: 1
이상재/ 대전충남인권연대 사무국장   내 신통치 않은 기억력으로도 생각이 나는데 아마 1980년대 중반 정도였던 것 같다. 그즈음 가끔 TV뉴스에 일본 정부가 실시했던 ‘외국인 지문 날인제도’를 거부하는 피켓시위나 기자회견 따위의 장면들이 나왔던 적이 있었다. 뭐 특별한 사회적 문제의식이라곤 거의 없었던 때였다. 매일 학교 가서 그날 주번이 누구인지, 요일, 날짜 등을 치밀하게 계산해서 자리 잡는 것 따위에 온 정열을 쏟았던 복지부동, 무사안일의 시간이 반복되는 시절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외국인 지문 날인제도’에 대해 관심을 가질 리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께서 일본 거주 외국인을 범죄인 취급하며 지문을 등록하는 아주 악랄한 제도라는 설명을 해주셨다. 짧은 순간이나마 차별받는 재일동포의 현실에 설움이 아주 잠깐 복받쳐 왔고, 그때 당시 청소년이라면 누구나 했을 법한 “C8 역시 쪽00다운 짓이야!”라는 말을 뱉으며 극렬한 반일 감정을 지닌 민족주의자로 변하곤 했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그러했듯이 나도 만17세가 되어 동사무소에 가서 주사 아저씨의 친절한 설명에 따라 열손가락을 전부 다 '지문날인’을 하고 말았다. 솔직히 그때 당시야 성인인증을 받았다는 희열에 우쭐함까지 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아침조례 시간마다 펄럭이는 태극기를 바라보며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하고자 다짐했던 대한민국으로부터 예비 범죄자 취급을 당하고 만 것은 사실이었다. 피켓시위를 하던 아저씨 아줌마도, 일본에서의 ‘외국인 지문 날인제도’의 부당함을 설명하셨던 선생님도 열손가락, 특히 엄지손가락은 180도 돌려가며 확실하게 지문 날인을 하며 주민등록증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일본정부를 비판하는 그 엄청난 자신감과 확신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왔던 것일까? 계속적인 반대 운동 때문에 2000년 일본정부는 ‘외국인 지문날인제도’를 완전 폐지했다. 혹시 이전 대한해협을 넘어 간간히 들리는 폐지요구에 대해 이런 속내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을까 싶다. “그래도 우리는 엄지손가락만 한다.” 일본 도쿄 중심가의 황궁 옆에 위치하고 있으며, 도쿄돔 야구장의 2배 크기로 1869년 메이지 천황시절 황군의 혼령들을 위로하기 위해 국가 신사로 지어졌으며 도쿠가와 막부가 무너진 무진전쟁이후 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11개 전쟁 전몰자 중 총 246만여 명이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이곳의 정문을 들어서면 ‘일본 육군의 아버지’라고 불리 우는 ‘오무라 마스지로’의 동상이 서 있으며 그 오른쪽으로는 가미가제 돌격대원의 동상, 야마토(大和) 전함의 포탄, 군마(軍馬), 군견(軍犬)의 위령탑 등이 즐비해 있으며 그 뒤쪽으로는 “군인칙유(천황이 내린 제국 군인의 덕목) 비석과 유슈칸(遊就館)이라는 일종의 전쟁박물관도 볼 수 있다고 하니 특히 한국 사람으로서는 간담이 서늘해 지는 장면이 아닐 수 없겠다. 이쯤 되면 대강 짐작을 했겠지만 이곳은 그 유명한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에 대한 설명이다. 이곳이 동북아 주변국의 집중적인 관심을 끈 시점은 태평양전쟁의 A급 전범 14명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1970년 후반 이후라고 한다. 그 당시 야스쿠니 신사의 참배가 일본의 침략전쟁 정당화로 이어질 것을 우려한 주변국의 강력한 반발로 인해, 1985년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이후로는 신사참배는 한동안 중단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2001년 취임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때부터 다시 일본의 유력한 우익 정치인들이 꾸준히 신사참배를 강행하고 있어 주변국들의 심한 반발을 불러오고 있다. 서춘은 매일신보와 각종 잡지에 친일 논조를 주장하고 친일잡지 ‘태양’을 만든 대표적인 친일언론인이었고 김창룡은 만주에서 독립군을 잡았던 일제관동군출신으로 백범 김구선생 암살의 명백한 혐의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 유학성은 12.12쿠데타의 핵심인물로 1997년 전두환, 노태우와 함께 반란모의참여, 반란중요임무종사, 내란모의 참여 등의 죄목으로 6년 실형을 선고 받았지만 대법원 확정판결 2주전에 사망하고 만다. 세 사람의 공통점은 모두 사후 국립묘지에 묻혀 있다는 것이다.(서춘의 묘는 독립유공자 서훈취소 8년만인 2004년에야 국립묘지에서 이장되어 나갔다.) 현충일을 맞아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돼 있는 유학성 전 의원의 묘지앞에 국군기무사령관(오른쪽 4번째) 등 이름으로 놓인 조화(2007년)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일본 정부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한반도 일제 강점과 태평양 전쟁으로 인한 상처가 여전히 상존하고 있는 현실에서 후안무치(厚顔無恥-얼굴이 두꺼워 부끄러움이 없다.)한 행위임에 틀림없으며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의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광복 60년을 훨씬 넘긴 이 시점에서도 일본 고위관료들에 의해 여전히 무슨 월별행사처럼 침략전쟁 정당화 발언과 위안부 등에 대한 망언이 터져 나오는 참담한 현실 앞에 우리는 놓여있다. 국립묘지(國立墓地)란, 나라(國)에서 세운(立) 묘지(墓地)를 말한다. 친일파와 내란죄로 유죄를 받은 자를 국립묘지에 눕혀놓고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비판하는 우리의 자화상은 왠지 서글프기까지 하다. 오히려 일본의 한반도 강점에 대한 ‘확신범적인’ 당당한 태도는 우리가 빌미를 제공한 것이 아닐까? 하는 확신에 찬 의구심을 가져본다. 마지막 임시정부요인이셨던 조경한 선생은 1993년 임종에 앞서 “친일파가 독립유공자로 바뀌어 함께 묻혀있는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에는 절대 가지 않겠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나라에서 세운 국립묘지에 나라 팔아먹은 자와 반란 가담자가 버젓이 누워있는 신비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광복 67주년을 넘긴 이 시점에서도 여전히 과거사에 대해 혼란스러운 것은 우리의 현대사가 질곡의 순간마다 파내야 될 것을 파내지 못한 ‘삽질’의 역사였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대한민국의 국립묘지는 제대로 된 삽질이 필요하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268 | 추천: 0
전국완/ 중학교 교사   얼마 전 교내 폭력대책자치위원회에 출석하여 반 아이에 대해 진술을 했다. 주변 친구들과의 ‘관계 맺기’에 실패한 그 아이는 자신을 지지하고 응원해 주는 아이가 없다보니 늘 움츠러들어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괴롭힘을 당한 기억도 친구들과의 관계를 힘들게 하는 요인인 것 같았다. 입을 열어 말을 할 때 욕부터 시작하며, 말에는 늘 분노가 담겨 있다. 이런 행동은 ‘두려움’에서 나오는 듯하다. 자신을 좋아하고 지지하는 친구가 없다 보니 일단 자신감이 없어지고, 또 다른 아이들로부터 공격을 받을까봐 미리 공격적으로 방어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한 소외감이 분노로 바뀐 것 같기도 하고……. 요즘 들어서 동료교사들과 자주 이야기하게 되는 것은 바로 우리 아이들이 해가 다르게 심약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으며 약을 처방받아 먹는 아이들을 만나는 일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 원인을 분석해 보면 대부분은 부모님, 친구와의 문제이다. 예전에는 주로 1학년 아이들 사이에 왕따 문제가 주로 발생하다가 2학년부터는 차츰 사라지곤 했다. 그런데 요즘은 그 문제가 학년과 상관없이 고착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초등학교시절 왕따를 당한 학생은 ‘왕따’였다는 이유로 중학교에 들어와서도, 2,3학년이 되어도 계속 기피대상으로 남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삶의 순간에서 ‘친구’란 정말 의미 있는 존재지만, 특히 학창시절에 ‘친구’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환경이다. 몸과 마음에 엄청난 변화를 겪으며 성장통을 앓는 이 시기에 동일한 경험을 하는 또래친구의 존재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조건이다. 내 학창시절을 돌이켜봐도 부모님이나 선생님도 중요하지만, ‘친구’야말로 학교생활의 든든한 빽이다. 마음 맞는 친구들의 울타리 안에서 안정감을 느끼며 비로소 자기를 발현할 에너지를 얻었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중요한 친구 사귀는 방법을, 인간관계는 어떻게 맺고 지켜가야 하는지를 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체계적으로 배운 적이 없다. 예전에는 그래도 그것이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열 명 가까이 되는 식구들과의 일상 속에서 인간관계의 기본을 몸에 익힐 수 있었다. 그리고 방과후 집에 오자마자 책가방은 집에 던져두고 밖으로 몰려나와 온 동네를 쏘다니며 엄마가 ‘이제 그만 들어와 자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때까지 미친 듯이 놀았던 기억이 난다. ‘만세잡기’, ‘여우야 여우야’, ‘우리 집에 왜 왔니’, ‘망까기’, ‘많은공기’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놀이를 하며 우리는 사회생활의 기본적인 매너와 자질을 자연스럽게 체득했던 것이다. 물론 요즘 아이들도 학원에서, PC방에서 또래끼리 ‘놀이’를 한다. 스마트폰으로 카톡을 하고, 게임도 한다. 하지만 이들은 실제 체온이 느껴지는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보다는 ‘가상공간’과 ‘가상인물’과 보내는 시간이 많다. 또한 3~4명 정도 되는 식구들은 모두 바빠서 한자리에서 식사하기도 쉽지 않다. 이런 현실이 분명 아이들의 건강한 ‘관계 맺기’에 큰 장애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10대 소년들의 관계를 날카롭게 다른 영화 <파수꾼> 사진 출처 - 씨네21 거기에다 ‘학교폭력’ 관련 사건이 자주 발생하면서 아이들과 학부모 모두 일말의 ‘불안’을 갖고 있다. 그래서 학교 친구들의 행동을 ‘이건 폭력인가, 아닌가’의 시선으로 보게 되고, ‘피해자, 가해자’라는 단어가 아이들의 일상어가 되면서 친구간의 신의나 우정 대신에 ‘불신’이 자리잡게 된 게 학교 현실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발생되는 학생 사안들을 겪으면서 드는 생각은 ‘아이들을 이대로 놔둬도 될까?’ 하는 위기감이다. ‘관계 맺기’의 미숙함과 실패, 그로 인한 부적응을 사춘기 아이들의 일시적인 성장통으로만 봐선 안 된다. 나이를 먹으면서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이 어른이 되어 직장인이 되고 부모가 되어서 우리 사회에, 그리고 자신의 아이양육에 부정적인 요소로 작용하면서 또 다른 갈등과 상처를 재생산해 나가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OECD 가입국가 중 가장 높은 자살률(청소년 자살률은 세계 1위), 출산률은 세계 꼴찌’ 등의 지표는 우리 사회의 건강수준이 얼마나 위험수위에 왔는지를 말해 준다. 엊그제 본교 교육과정협의회결과가 문자로 통보되었다. ‘2학기부터 스포츠활동 주당 4시간 의무시행으로 인해 주당 1시간이 증가되어…….’ 학교폭력 예방의 일환으로 교과부가 내놓은 대책으로, 또 무작정 밀어부친다. 사춘기 아이들의 에너지를 운동으로 발산시켜 폭력적으로 쓰이는 않도록 하자는 것이다. 스포츠시간을 늘리는 것 자체는 일단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좁은 교실에서 바르게 앉아 힘든 교과수업을 받는 것보다는 뛰면서 땀을 흘리다보면 몸과 마음이 맑아질 수 있으니까. 다만 이게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있을까? 학교폭력의 원인을 찾아서 그것을 근본적으로 교정하고,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려는 고민은 진정성 있게 하고 있는 건지.. 독일에서는 ‘아이들에게 공부 시키지 않기’운동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우리 현실과는 너무 먼 이야기지만 이게 정답일 수도 있다. 학교에서 ‘국영수사과’만 가르칠 게 아니라, 이제 세상살이에 정말 필요한 ‘관계 맺기’에 대한 수업을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연중행사로 치러지는 수련회 시간에만 할 것이 아니라, 정규 수업시간으로 설정해서 레크리에이션도 도입하고 공기놀이, 우리집에 왜 왔니 등을 해 보면 안 될까? 노래방도 들여놓고, 춤추는 시간도 주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대중가요도 실컷 불러보게 하면 안 될까? 몇 년 전부터 교과부가 학생들의 학업부담을 줄여주겠다며 밀어부친 ‘집중이수제’는 결과적으로 실패다. 진정 학업부담을 줄이겠다면 좀 획기적으로 바꾸면 좋겠다. 철없는 소리로 들리겠지만 일반교과목수업은 하루 4~5시간만 하고, 오후에는 동아리 활동을 하게 하면 어떨까? (아이들이 그래도 제일 기다리는 시간이 동아리활동인데, 주 5일제가 되면서 유명무실해져 버렸다.) 그리고 학교나 교육당국만이 아니라, 범시민사회적으로 우리 아이들의 문제를 분석하고 교정하려는 노력이 일어나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아이들의 문제는 다 어른들의 잘못으로 비롯된 것이다. 특히 아이들을 이윤창출을 위한 마케팅의 대상으로만 여기며 ‘물질만능’으로 몰고가는 기업과 이들의 자극적인 상업광고를 무한정 복사해대는 언론매체의 행태는 심각하게 반성해야 될 부분이라 생각된다. 우리의 아이들이 극도의 경쟁과 불신 속에서 ‘강자와 약자’, ‘가해자와 피해자’로서가 아니라 더불어 성장해 가는 ‘친구’로서의 관계망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우리도 좀 ‘운동’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2017-07-12 | hrights | 조회: 224 | 추천: -1
강국진/ 서울신문 기자 최근 어떤 사람이 “재벌가 손자 보육지원이 공정사회에 맞는가. 지금 같은 보육지원 시스템이 과연 지속가능할 것인가 검토해야 한다.”란 말을 했다. 올해부터 시행중인 0~2세 보육료지원정책이 최근 한창 논란을 일으키자 나온 말이다. 문제의 시발점인 작년 12월30일로 가보자.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0~2세 보육료지원 예산이 갑자기 안전으로 올라오자 한 민주당 의원이 문제를 제기했다. 이에 대해 또 다른 어떤 사람이 이렇게 답했다. “보육예산을 대폭 늘렸고 그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대안을 저희들이 검토하고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여야 간사들과 협의했습니다.” 간단한 문제를 내보자. 현행 무상보육을 공격한 사람은 누구이고 방어한 사람은 누구일까. 비판한 사람은 기획재정부 제2차관 김동연이고 방어한 사람은 기획재정부 장관 박재완이다. 물론 김동연도 작년 12월엔 박재완 옆에서 민주당 의원 비판을 열심히 반박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랬던 두 사람이 1년도 안 돼 왜 이렇게 말이 달라졌을까. 물정 모르는 나만 해도 ‘이러다 지방재정 위기온다’는 얘길 처음 들은 게 1월이었는데 그동안 장관과 차관은 신문도 안 봤나? 그래놓고는 이제와서 소득수준에 상관없이 보편적으로 보육료를 지원하는 건 틀렸다며 말을 싹 바꿔버리는 건 공정사회에 맞는 것일까?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며 달을 보라고 했더니 보라는 달은 안보고 손가락만 본다는 말이 있다. 어떤 사안의 핵심이 아니라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이나 형식처럼 본질적이지 않은 것에 더 신경을 쓰는 행태를 꼬집을 때 주로 쓰는 말이다. 하지만 생각을 좀 비틀어보자. 시민들에게 달을 가리키며 시민들의 관심을 특정한 사안에 고정시킬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정부 정치지도자 재벌총수 언론 전문가집단 등 이른바 정치경제적 헤게모니를 쥔 사람들, 쉽게 말해 권력이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사회적 의제를 제시하고 여러 현안을 관통하는 생각틀, 이른바 프레임을 제시한다. 상황에 따라 말이 달라지는 건 이들에게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끊임없이 ‘세금폭탄’을 외치며 결국 종합부동산세를 무력화시킬 때나 2008년 공격적인 소득세·법인세 감세를 추진할 때 현 집권 세력은 ‘감세를 하면 부유층 소비가 늘어나고 그러면 경기가 활성화돼 경제가 좋아진다’는 낙수효과 프레임을 끊임없이 유포시켰다. 줄어든 세금 덕분에 실제로 늘어난 건 부유층 사교육비요 부동산투기라는 증거를 아무리 들이밀어도 이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2008년 당시 신문기사를 조금만 검색해본다면 재정건전성이란 주로 부자감세를 비판하는 이들이 주로 사용했던 담론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이들은 ‘부자감세를 하면 세입이 급감해 재정건전성이 급격히 악화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747이니 줄푸세를 외쳤던 현재권력과 ‘미래권력’은 하나같이 재정건전성 비판에 입을 다물면서 ‘감세야말로 선진화로 가는 길’이라고 했을 뿐이다. 그랬던 이들이 그리스 등 남유럽 위기가 불거지기 시작한 2010년 벽두부터 재정건전성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진단은 전혀 달랐다. 헤게모니를 쥔 세력들은 ‘복지를 늘리면 세출이 급증해 재정건전성이 급격히 악화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부자 감세 할 돈이면 보편복지 할 수 있다는 반론은 외면한 채 대통령까지 나서서 “망국적 복지 포퓰리즘”이라는 치졸한 프로파간다로 공론장을 도배해버렸다. 재정건전성을 우려하며 부자감세를 비판하던 이들이 어느 순간 재정건전성은 안중에도 없이 복지 포퓰리즘만 주장하는 나라 망칠 세력이 됐다. 재정건전성이고 뭐고 ‘닥치고 감세!’라고 하던 집단은 나라를 망치는 복지 포퓰리즘에 맞서 싸우자고 대중들을 선동했다. 그렇게 분위기를 몰아가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뼈아픈 패배를 당했다. 그러고도 민심을 오판한 채 2011년 8월 무상급식 주민투표를 강행했다. 결국 그 날 주민투표는 서울에 거주하는 한나라당 지지자들을 한 명 한 명 투표소에서 전수조사해 이들을 커밍아웃시키는 희한한 이벤트로 끝났다. 보편복지는 집권세력도 거부할 수 없는 대세가 됐다. 일단 선거는 이기고 볼 일이다. 추가 감세까지 철회하며 복지 경쟁에 뛰어들었다. 최근 지방자치단체마다 아우성이 끊이지 않는 ‘무상보육’ 논란은 그 와중에 태어난 사생아였다. 그렇게 집권세력은 한편으론 정당 간판을 바꿔달고 로고 색깔을 빨간색 국그릇 모양으로 바꾸고 보편복지와 반값등록금 경제민주화를 옹호하는 양 포장해 대안담론과 물타기를 했고 다른 한쪽에선 재정건전성을 무기삼아 ‘나라 말아먹는 복지 포퓰리즘’을 외치며 대안담론을 물먹였다. 사생결단 권력의지가 느껴지는 치밀한 역할분담이었다. (민주당과 통합진보당이 삽질과 자리다툼을 거듭하며 지리멸렬했던 건 내 심장 건강을 위해 더 길게 얘기하고 싶지 않다.) 달을 가리키는데 왜 손가락을 쳐다보느냐며 달을 볼 것을 채근하는 것은 문제의 핵심에 집중하라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고 보통 말한다). 하지만 뒤집어보면 달을 가리키는 사람과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을 봐야 하는 사람은 항상 정해져 있다. 만약 해를 가리키면서 달이라고 우기면 어떻게 해야 할까. 뭔가 깊은 뜻이 있으려니 하고 그걸 모르는 우리의 무지를 탓해야 할까? 대통령이 ‘감세만이 살길’이라고 가리키면 거기만 쳐다보고 ‘재정건전성에 나라의 운명이 달렸다’라고 가리키면 재정건전성이 100만큼 중요한지 50만큼 중요한지 토론하는 게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이제는 높으신 선생이 달을 가리킬 때 그가 왜 하필 지금 달을 가리키는지, 달을 가리키는 모양은 예전과 어떻게 다른지, 말투는 어떻게 변했는지, 달을 안쳐다볼 때 반응은 어떤지 그런 것도 함께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달을 가리키는 사람의 머릿속을 들여다보자. 달을 가리킨다고 달만 쳐다보는 바보는 되지 말자.
2017-07-12 | hrights | 조회: 235 | 추천: 1
이동화/ 민변 국제연대위 간사   최근언론보도를 통해서 대한민국내의 전체 이주민의 숫자가 150만 명에 도달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단일민족의 신화에 가려 그동안 그 존재가 미비했던 이주민들도 이제는 그 수치나 역할을 보더라도 상당한 비중을 가지고 있고 정부에서도 앞 다투어 이주민을 대상으로 하는 수없이 많은 정책과 조치를 내놓고 있는 상황이다. 이 와중에 한국 정부는 유엔인종차별철폐위원회(CERD, The Committee on the Elimination of Racial Discrimination, 이하 위원회)에 한국정부가 비준 가입한 인종차별철폐협약(International Convention of the Elimination of Racial Discrimination, 이하 협약)의 이행상황을 담은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이 보고서는 한국정부가 비준한 국제협약 중 하나인 인종차별철폐협약상의 가입국의무사항으로 2006부터 2010년까지의 대한민국 내 이주노동자, 이주아동, 결혼이민자를 포함한 전체 이주민과 귀화인, 난민들의 전반적인 인권상황을 담고, 이에 대한 정부의 입법적, 행정적, 사법적 조치들을 나열하고 있다. 정부가 작성한 보고서이다보니 기본적으로 그 내용은 정부의 정책과 입법조치들‘만’ 담겨있고, 그에 대한 평가도 상당히 후하다. 거칠게 내용을 정리하면 오늘날 한국사회 이주민들은 법과 제도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있으며, 또한 한국 정부는 이주민들이 한국 내에서 차별을 막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이다. 아 증말 김C의 발 같은... 특히 정부는 “합법”이주민에 대해서는 “법률”적으로 “차별”이 존재하고 있지 않으며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인종”을 기반으로 하는 범죄가 “역사”적으로 발생하지 않고 있다고 단언하며 만약 “인종”을 기반으로 하는 범죄가 발생한다 하더라도 현행법상으로 처벌이 다 가능하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보고서에서 한국 정부는 “합법”적으로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에게는 헌법상으로 동일한 권리가 부여되기에 “인종차별”에 대한 정의도, 그에 대한 법률도, 법률에 따른 처벌규정도 불필요하며, “인종”을 기반으로 하는 법률적 상이한 “대우”도 “범죄”도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것이다. 아 놔..증말..그러면서도 인종차별철폐를 위한 정부정책과 조치는 보고서 2/3을 할애하여 구구절절 밝히고 있다. ▲ 2009년 7월, 성공회대 후세인 연구교수의 인종차별피해이후 결성된 ‘성,인종차별대책위원회’ 기자회견 장면. 출처: 사회투자지원재단 희망인프라 홈페이지 정부의 보고서만 놓고 보면 보고서의 2/3를 차지하는 정부의 정책과 조치는 도대체 왜 그렇게 불필요하게 많이 하는지 모르겠다. 앞에서는 차별이 없다고 하면서 뒷부분은 현실적 차별을 막기 위한 조치를 자랑처럼 나열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을뿐더러 조잡하기 그지 없다. 더 큰 문제는 이런 구성상의 문제가 아닌 현실에서 발생하고 있는 한국 내에서 심각하게 야기되고 있는 “인종”을 기반으로 하는 차별들에서는 초점을 맞추지 않고 있으며, 그 심각성에 대한 인식이 아예 없거나 있더라도 눈을 감고 있다는 것이다. 혹시 정부가 한국사회의 문화적 편견을 야기하고 있는 ‘단일민족과 순혈’을 그 근간에 놓고 보고서를 작성하지 않았나 하는 우려가 들 정도이다. 정부보고서 보기 http://minbyun.org/?mid=un2&document_srl=580321&listStyle=&cpage= 올해 8월 21~22일 스위스 제네바에서는 이 정부보고서를 가지고 위원회에서 회의를 열어 한국의 상황에 대해서 심의(Review)를 받고 그 결과로 최종권고(Concluding Observation)를 받는다. 위원회에서 보고서만 놓고 보면 한국 내 이주민의 인권상황은 나쁘지 않고, 상당한 수준으로 나아지고 있다고 오해를 할 것이다. 또한 그 이유가 정부가 역할을 잘 했기 때문이라고 여길 것이다. 이러한 어이없는 결과를 막고 유엔차원에서 한국의 이주민을 비롯한 협약이 규정하고 있는 대상자(난민, 귀화자, 화교 등)들의 정확한 인권현실을 알리기 위해 한국내 인권시민사회단체는 자체의 반박보고서를 준비 중에 있다. 정부가 가지고 있는 재원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인권시민사회단체들이지만 최소한의 상식과 현실에 기반으로 하여 이주민 현장에서의 목소리를 제대로 전달한다면 정부보고서의 내용과는 다른 유엔차원에서의 권고를 받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측하며 다행히 그리 된다면 그 공을 형편없는 보고서를 작성한 정부의 당국자들에게 고스란히 넘기고 싶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209 | 추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