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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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김재완(방송대 법학과 교수), 신하영옥(여성활동가), 윤영전(평통서문예원장), 이광조(CBS PD), 이문영(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 정보배(출판 기획편집자), 정재원(국민대 국제학부 교수), 조광제(철학 아카데미 상임위원), 최정학(방송대 법학과 교수), 홍미정(단국대 중동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윤영전/ (사)평화연대 이사장  효골의 문중 춘제(春祭)에서 선대의 효열비(孝烈碑)앞에 섰다. 내 고조 선대 조부모의 효와 열행에 대한 공적비다. 일찍이 광주지(光州誌)와 향교지에 효열기록과 함안대종회 족보와 호남편람에도 올라있다. 선대의 충효가전이 가훈이고 수백 년도 넘은 문중에서 직계조모 이하 삼대(三代)가 효행가문(孝行家門) 일원으로 살아오고 있다.  내가 태어난 곳은 조선조 성종 때의 행정구역으로는 광주군 효우(孝友)동이다. 무등산 자락으로 이어진 지명이 효천(孝泉)으로, 또한 효지(孝池)와 효덕(孝德)동이다. 1950년도부터는 초등학교 명칭도 효지(孝池)학교에서 효덕(孝悳)학교로 오늘에까지 이어 오고 있는 효골의 고장이다.  이렇게 지명이 효(孝) 자(字)로 있어, 고을 이름을 효(孝)골이라 했다. 심지어 성(性)까지도 효골 윤 씨라 부르기도 했다. 효우동이나 효골이기에 효자 효녀 효부 효손의 기록이 광주고을의 자료집에 게재되어 있다. 효골에 나의 7대 조부 함안윤씨(咸安尹氏) 광훈(光訓)이 효자(孝子)로, 조모인 나주임씨(羅州林)가 열부(烈婦)로 기록되고 있다. 함안(咸安)윤씨는 파평(坡平)윤씨의 장자(長子)계 가문이기도 하다.  효열 실행이 자료에만 있는 게 아니다. 60년 전, 어린 시절에 백부 추강(秋崗)과 부친 동강(東崗)이 선대의 효열비를 건립하려고 석물을 준비하고 비문을 짓고 쓰는 모습을 눈여겨보았다. 당시에는 석공을 정하여 몇 달이나 사랑채에서 숙식하면서 2천자가 넘는 비문을 손수 돌에 새기었다. 참으로 힘든 효열비 건립이었다. 요즘 같으면 기계로 7일이면 가능한 비문 작업이었다.  거의 6개월 만에 효열비를 완성하여 대로에 세웠다. 많은 효골사람들이 비문을 보고, 지극한 효열의 사연에 감탄하기도 했다. 이에 우리 가문의 효열행이 널리 알려졌다. 그로부터 100년이 지난 후에도 3대 효열가문이 계속 이어졌다. 나의 양조모는 효열비 선대의 고손이 되는 며느리이다. 양반가에 시집와서 3개월 만에 부군의 급병으로 17살에 청상과부가 되어 67년을 사셨다가 운명하셨다. 사진 출처 - 경남도민일보  재가(再嫁)하지 않고 양자를 입적해 8남매 손자녀를 양육하여 열녀로 표창되었다. 여기에 양자인 부모님도 생부모와 양부모에 효도하여 효자 효부가 되고 손자인 필자도 20년 전에 효자로 표창되어 지난해 파평윤씨 대종회에서 표창을 받았다. 또한 두 손자며느리가 효부와 열부로 표창 받아 직계로 3대가 7인의 효 가문을 이루었다.  이렇듯 효골에 효 열행 후손들이 이어져갔다. 예전에 효부가 드물게나마 있었지만 현대에까지 이어져 온 것은 아무래도 지명인 효에 대한 연관성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바로 내 집안의 효행이기에 효행 표창을 받은 우리 가문은 그저 조신하며 살아가야 했다. 양조모의 오랜 수절과 후손들 양육은 아무래도 고조 시부모들의 행적에 영향을 크게 받았을 터이다.  내 부친과 나의 효자표창은 물론, 손자며느리까지 효행을 이어간다는 것은 드문 일이다, 시대의 변화에 차츰 효행이 외면당하고 있는 편이다. 그러나 충효가전의 유훈은 지켜가야 한다. 그러기에 효에 대한 실천을 은근히 독려한 면도 없지 않다. 필자도 백부와 부친이 선대의 효열비를 건립하는데 열심히 바라보았었다.  한 세대 전에 효부열녀인 양조모님을 효골 도선산 광유재(光裕齋)옆에 이장하고 정성스럽게 열녀비를 세워드렸다. 5년 전에는 나주 봉황 선산에 부친의 효자비도 세웠다. 이처럼 효가 이어져 자랑스러운 가문이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중압감이기도 하다. 가문은 조선조 성종 계비인 제헌왕후(齊獻王后) 윤비의 15대 후손이다. 양반가 시대도 아니기에 운신의 폭이 좁다. 허나 효는 필요덕목이 아닐까?  효열의 후손들은 절제하고 겸손하며 행실에 있어서도 제약이 뒤따른다. 효는 친 조부모님에 대한 효도뿐만이 아니다. 형제간이나 집안 일가 간에는 물론, 이웃 간에도 효도는 마땅한 행실이다. “효자 집안에 효자 난다”고 하지만 “효자 집안에서 그런 불효 행실을 할 수 있느냐?”는 주변의 시선도 따갑다. 효행의 실천은 도덕과 윤리에 충실한 모범이기에 효행가문의 삶은 고난의 연속일 터이다.  이제는 선대의 효열에 대한 기준과 현실의 차이가 크기만 하다. 가령 후손들 중에 예전 같은 청상과부로 남는 일이 쉽지 않다. 현대의 흔한 이혼들이 후손들에게 다가오고 있는 현실이다. 당사자들이 좀 더 신중하면 극단적인 결정을 쉽게 내지지도 않을 터이다. 사별이라면 어찌 할 수도 없다. 효행은 가화만사성의 근간이다.  이제는 효열가의 기준을 달리하는 방법밖에 없다. 청상과부에게 절개나 정절을 지키라고 하기보다 효에 대한 정성을 다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간 양반에 대한 비난과 원성이 높았다. “양반이 밥 먹여주느냐? 돈이 없으면 양반도 없다. 돈이 제일이다” 라는 소리가 높더니 배금주의가 고개를 들었다. 너무나도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고 돈과 권력 앞에 무력한 사회이기는 하지만, 돈과 권력만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지 않은가?  나는 그동안 생각했다. 효열가문 후손의 삶은, 무엇보다도 윤리도덕을 바탕으로 실천하는 길이리라. 아무리 돈과 권력이 세상을 좌우 한다지만, 양심과 인간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특히 정의와 진실 앞에 정정당당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부정과 불의에 침묵하지 않고, 공동선을 향한 길로 가려는 의지가 필요하다. 그래서 정의사회를 이루고 효의 실천에 다가가는 평화로운 사회가 오지 않을까.  현대에 와서 효열에 대한 인식이 점점 쇠퇴하고 효를 행하려는 자에게도 부담을 안겨주기도 한다. 그러나 효야 말로 오늘날의 우리사회의 가장 큰 덕목이요 버팀목이다. 효를 근본으로 알고 바른 행실로 가는 사회와 가정은 곧 평화와 화목을 이룬다. 도덕과 효보다 돈과 권력에 함몰되어 있는 사회와 가정은 공동선을 이루는데 큰 걸림돌이 된다.  성년이 되어서 윤문대종회를 출입하면서 종훈이 “충효가전”이었다. 여기에 장자계 대종회장을 맡으면서 실훈을 “충효덕학”으로 정하고 효자 효부 열녀를 널리 표창했다. 갈수록 귀한 효와 열행에 대한 표창자 찾기다. 아울러 개인적으로 모교 초등학교에 효행장학생을 뽑아 매년 졸업식에 표창을 하면서 효행을 실천하고 있다.  부족한 효자로 살고 있는 필자가 오늘의 효열에 대한 생각을 해보았다. 사라져 가는 효열정신이 구시대적 발상이 아닌, 살아가는 귀감이 근본이라고 믿는다. 삼대효열가문으로 살아가기가 순탄하지 않았고 앞으로 더욱 어려울 터이다. 그러나 그 길이 충효가문의 전통을 이어가야 하기에 어떠한 난관에도 효행을 실천해 나갈 것이다. 이 길이 효정신이 사라져가는 현실에 효 정신을 살리는 길이 아닐까.   * 윤영전(尹永典) 아호: (九巖 孝崗) 당호: 전호당(傳孝堂)     작가(수필 소설 서예) 칼럼니스트. 한국작가회의 회원     저서: 수필집(도라산의 봄)소설집( 못다핀 꽃) 에세이집(평화, 아름다운 말)             고희문집(인연,아름다운 만남) 수필선(강물은 흐른다) 구암가곡선집(CD)     편저: (평화통일 삶을 살다) (한반도 평화통일디자인) (통준사 평화통일)
2018-04-18 | hrights | 조회: 36 | 추천: 2
신하영옥/ 여성운동연구활동가 네트워크 ‘젠더고물상’  “하나, 국가는 고용, 복지, 재정 등 모든 생활영역에서 성별에 따른 차별과 폭력을 제거한다.”  “하나, 국가는 실질적 평등을 실현하기 위하여 적극적인 조치를 실시한다.”  “하나, 선출직과 임명직 등의 공직 진출에서 여성과 남성의 동등한 참여를 보장한다.”  지난 3월 19일 여성계는 26일 발표를 앞둔 개헌안에서 ‘성 평등’ 조항이 빠진 것에 대해 ‘명백한 퇴행’이라며 대통령 개헌안을 규탄하는 위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전문에 성차별과 폭력제거의 내용을 추가하여 헌법이 추구하는 가치가 성 평등에 있음을 명시하였고, 실질적 평등실현을 위한 적극적 조치와 남녀동수의 조항을 추가 신설하도록 요구했다. 이번 개헌이 국민의 절반인 여성의 시민권이 실질적으로 발현되는 방향으로 추진되어야 함을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여성들의 이러한 요구와 주장은 결국 대통령의 개헌안에 반영되지 못했다. 청와대의 입장은 이러하다.  “(전략) 여성계의 강력한 요구 중 하나는, 공직 진출 시 여성/남성의 동등한 참여 보장을 개헌안에 넣어달라는 것이다 (중략) 현 개헌안처럼 ‘국가는 성별•장애 등으로 인한 차별상태를 시정하고 실질적 평등을 실현하려 노력한다.’라는 조항이 이를 포괄 (중략) 헌법은 간결해야 한다는 원칙 때문이다.”(진성준 청와대 정무비서관. 3. 23)  라고 밝히면서 “여성계가 이 문제를 꼭 좀 이해해주실 것을 당부”하였다. 여성들은 2016년 중반부터 여성의 관점에서 헌법을 공부하는 모임을 시작으로 2017년 1월 ‘헌법개정여성연대’를 구성하여 성평등 조항 조문작업을 진행하여 <헌법과 젠더>를 발행하였다. 또한 국회, 정당, 시민,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토론회 및 집담회 개최와 언론기고활동, SNS활동 등을 2018년 2월까지 활발히 펼쳐왔다. 무엇보다 ‘페미니스트 대통령’이라는 문 대통령의 주장을 믿으려했다. 그러나 3월4일 여성대회가 있는 그 날, 성평등 조항 삽입이 어려울 것이라는 ‘비보’를 전달받은 여성들은 정해구 개헌특위 위원장을 비롯하여 정세균 국회의장을 만나 입장을 전달하고, 세 번의 입법청원과 기자회견을 여는 등 바쁜 3월을 보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표된 개헌안은 포괄적 차별금지 조항에 성별 포함, 그리고 난데없는 여성노동보호조항이 추가된 것이 전부였다.  왜 이런 결과가 초래되었을까? 개헌안을 보면서 소위 ‘진보남성들의 연대의 허위’를 본다. 정해구 위원장을 비롯하여, 내로라하는 진보를 자처하는 남성들, 평소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우려하고, 고민하고, 실현을 위한 방안을 주장하셨던 남성들이 포진해있는 개헌특위의 민낯을 보게 된다. 민주주의는 항상 주장하듯이 간단하다. 1인 1표를 행사하게 하면 된다. 핵심은 ‘실질적’인 행사가 실현되도록 하는 것이다. 인구의 절반인 여성들의 시민권이 실질적으로 유리천장, 미투운동에 대한 ‘펜스 룰’ 같은 여성 억압적이고 차별적인 관행과 문화, 제도에 의해 실현되고 있지 못할 때 우리는 그 구조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없다. 빈민, 농민, 노동자만이 민중이 아니다. 권력과정, 즉 정치결정과정에서 밀려난 집단은 민중이다. 여성은 정파가 아니다. 여성은 민중이라는 ‘계급’이다. 국민의 절반이지만 소수자이고, 국민의 절반이지만 권력과정에 접근권이 결여되고, 자주 살해되고, 일상적으로 성/폭력에 시달리는, 여전히 탄압받는 민중이다. 남성보다 더 많이 일하지만 평가는 60%밖에 못 받는 빈민이다. 국가가 전쟁에 필요한 군인과 경제에 필요한 노동자를 생산하지만, 그 생산은 평가절하 되어버리므로 자신의 노동에서 소외되는 노동계급이다. 여성들의 ‘그 생산’은 다만 군인과 노동자의 수의 감소, 즉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만 ‘장려’받는 국가존속의 도구이자 수단으로 대접받는, 특별한 착취를 받는 계급으로서 민중이다. 여성이 정파라고, 여성주의가 여성우월주의라고 말하는 이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면, 여성으로서 일주일만 살아보라고 말하고 싶다. 여성은 민중도, 착취 받고 소외받는 계급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면, 여성으로 한 달만 살아보라 말해주고 싶다. '성차별 해소를 위한 개헌여성행동'의 범여성계 단체 회원들이 지난 3월 19일 오전 서울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 사진 출처 - 경향신문  개헌이 ‘국민주권’을 실현하려는 뜻을 담고 있었다면 무엇보다 국민의 절반인 여성을 염두에 두었어야 한다. ‘국민’이라는 말도 마땅치 않다. 국민은 국가의 구성원이라는 의미, 즉 국가가 호명하는 존재로서 수동적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인민주권’ 혹은 ‘시민권력’이 더 적확하다. 이러한 점에서도 현 정부를 비롯하여 개헌특위에 포함된 ‘진보남성들’의 불완전한 민주의식 혹은 의지를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여성운동계는 왜 개헌 관련한 전선을 광범위하고 강고하게 구축하지 못했을까?’하는 의구심이다. 약 2년 여간 연구와 발간, 토론회, 언론홍보 등을 활발히 전개해 왔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그 기간 동안 여성들은 강남역, 여성혐오대응운동, 미투운동 등 다양하지만 일관된 ‘여성도 사람’이라는 ‘여성운동’을 강력히 펼쳐왔다. 그러나 여성들이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음에도, 여성운동이 존재했음에도, 개헌이라는 과제를 향한 ‘블럭’으로 세력화되지는 못하였다. 무엇이 문제였는가? 왜 사회와 국가에 대한 여성들의 분노가 조직되지 못하였는가? 왜 국가와 한판 피터지게 싸워야 할 시점에 이 모든 여성들의 운동이 분절되고, 분화되고, 심지어 적대하면서 분노의 조직화를 이루지 못하였을까? 무엇이 여성운동의 전진을 가로막고 있는가? 외부인가, 내부인가? 이 문제는 앞으로 여성운동이 치열하게 파고들어 해결점을 찾아야만 한다. 어쩌면 원인은 여성운동 내부에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는 변하고 있는데 오히려 사회변화를 추동해야 할 운동이 정체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야 할 때이다.  이제 공은 국회로 넘어갔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으로 기댈 곳은 ‘여성 국회의원들’ 뿐이다. 국회개헌특위에서 역할을 제대로 못했다면, 이제라도 그 역할, 여성들을 대표하는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국회 내에서 강고한 ‘전선’을 형성하고, 그 힘으로 다시 여성들을 결집해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기대하고 또 기대해본다. 더 이상 여성계의‘이해’와 ‘양해’를 바라지 말라. 그리고 더 이상 그러한 이해와 양해의 자세로 타협하지 말라. 우리는 역사 이래 지금까지 이해하고 양해했다. 그 결과가 더 많은 이해와 양해의 요구라면 더는 그 짓을 하고 싶지 않다. 이해와 양해의 덫을 이번 여성 국회의원들이 끊어주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달려갈 준비는 되어있다.
2018-04-04 | hrights | 조회: 94 | 추천: 4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성(性)은 성(聖)스러운 것이다. 어리석은 성은 천박한 성으로 귀결되고, 성 외의 것으로 거래되는 성은 추잡한 성으로 노출된다. 천박하고 추잡한 성은 성의 세계를 위협하고 왜곡하여 성스러운 성의 불가능성을 유포시키는 독소다.  성은 근본적으로 폭력적이다. 성스러운 것치고 폭력적이지 않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성스러움은 인격을 충분히 파괴시킬 때, 그런 뒤 인격을 새롭게 재탄생시킬 때, 그때 각자에게서 성립하기 때문이다.  인격은 근본적으로 사회적이다. 성스러움은 사회성을 초월함으로써 사회의 맹목성을 치유한다. 사회와 인격을 아예 떠나있는 곳에서는 성스러움이 없다. 성스러움은 항상 사회와 인격을 ‘먹이’로 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와 인격은 성스러움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 성스러움 자체는 맹목적이다. 사회 역시 맹목적이다. 사회의 맹목성은 성스러움의 맹목성으로써 치유된다. 성스러움의 맹목성에는 희열과 그에 따른 환희가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격이 성립되는 조건은 사회다. 하지만 인격과 그에 따른 인권의 절대적 가치가 사회 자체로부터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인권의 절대적 가치는 사회가 바탕으로 삼고 있는 성스러움에서 주어진다. 인격의 절대적인 권리 즉 인권은 성스러움과 결합되어 있는 희열과 그에 따른 환희의 필연적인 가능성에 있다.  사회의 바탕으로서 작동하는 성스러움은 이미 늘 사회 속에 스며들어 있다. 그럼으로써 성스러움은 사회의 맹목성을 알게 모르게 눈치 챈 자들이 발악적으로 사회관계를 악용한 끝에 생겨나는 그 천박하고 추잡한 부패와 그에 따른 악취를 몰아내는 역할을 한다. 부, 권력, 명예 등을 둘러싼 사회관계가 얼마나 발악적이던가.  사회는 성스러움이 자신을 파괴하고자 하는 측면을 주로 주목하고 자신을 치유하는 측면을 보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사회는 알게 모르게 성스러움과 투쟁을 벌인다. 그 결과, 한 사회가 현실적으로 성스러움을 상실했다고 해서, 그 사회에서 성스러움이 근본적으로 제거된 것은 아니다.  현실적으로 사회가 성스러움과의 투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을 때, 그때 사회는 성스러움을 마치 납골당에 시신을 보관하듯이 따로 분리해 내어 종교를 비롯한 각종 이름을 붙여 법적으로 따로 관리한다. 일부일처제나 성매매도 그 하나의 이름이다. 그런 만큼 성스러움은 부패한 형태를 띠게 된다.  성스러움 자체를 둘러싼 근원에서의 투쟁은 크게 성(性)과 신(神) 사이에서 생겨난다. 국가가 주권을 내세워 이 투쟁에 개입하는 것은 그 상층에서의 일이다.  성스러운 성의 역사는 인류의 기원과 동일한 기원을 지녔다. 완전한 직립은 진짜 인간의 탄생을 알린다. 직립은 손을 만들었고, 손은 도구의 사용에 의해 하나의 욕망에서 새로운 다른 욕망을 만들어내도록 했다. 그런가 하면, 직립은 자궁 및 여성기 입구의 축소를 가져와 여성을 긴 기간 육아에 매달리지 않으면 안 되게끔 했고, 아울러 남성의 목숨을 건 노동의 대가를 함께 분배받지 않으면 안 되도록 했다. 이를 매개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성을 통한 희열과 그에 따른 환희라고 하는 전혀 새로운 욕망을 만들어냈다. 생명을 중심으로 한 생존과 생식의 욕망이라는 하나의 욕망에서 관능의 욕망이라는 새로운 다른 욕망을 만들어낸 것이다. 생명에의 욕망에서 생명을 넘어서는, 때때로 생명을 아랑곳하지 않고 심지어 생명을 파괴하기까지 하는 관능의 욕망을 만들어낸 것이다.  성스러움은 근본적으로 생명과 직결된 것이다. 생명을 가능케 하면서 동시에 생명을 불가능하게 할 때, 그 무엇은 성스럽다. 하지만, 우선 성스러움은 성스러움을 온몸으로 느끼고 표현하는 자들이 없이는 그 자체로 성립할 수 없다. 성스러움이 그 자체의 절대성을 갖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다. 인간 없이는 성스러움은 없다. 성스러움 없이는 인간도 없다.  생명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이중성에 의한 자연의 성스러움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 자연이 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자연의 성스러움은 외적인 성스러움이었고, 관능의 욕망을 통한 성의 성스러움은 내적인 성스러움이었다. 이 둘이 한데 결합되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신들은 예사로 육욕적이고 관능적이고 폭력적인 것이 이를 잘 나타낸다. 사진 출처 - 구글  성스러움은 함부로 쉽게 대상화될 수 없다. 이름은 대상화하는 기본 수단이다. 성스러움이 신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면 성스러움은 대상화되어 급기야 마치 인간과 사회를 완전히 벗어나 있어 그 자체로 절대적으로 성스러운 것인 양 천상에 봉인된다. 성의 성스러움은 제대로 된 이름을 가진 적이 없다. 아니, 가질 수가 없다.  성의 성스러움은 인간의 몸속 깊이 곳곳에, 인간들이 모이는 사회의 몸속 깊이 곳곳에, 인격이 성립하는 영역 깊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고 은폐되어 있다.  성이 워낙 성스럽기 때문에 그 성스러움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일부일처제라는 관행적 제도 속에 성을 묶어 놓은 것이 아니다. 일부일처제는 생명의 장치이지 성의 장치가 아니다. 기원에서 보자면, 일부일처제는 생명의 보존을 위한 것으로서 그 자체 성을 관리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성을 북돋우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일부일처제는 성을 관리함으로써 동시에 생명마저 관리하는 강력한 장치가 되었다.  일부일처제는, 마치 신을 성당이나 교회당에 감금해서 한정시킨 것처럼, 성의 성스러움을 가정 감금해서 한정시킨다. 성이 생명의 자물쇠에 의해 잠긴 것이다. 하지만 성은 생명을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고, 그래서 가정의 틈새로 흘러 바깥으로 나온다. 하지만, 그렇게 흘러나온 성은 이미 생명의 맹목성에 한껏 오염되어 부와 권력과 명예와 뒤섞여 어리석게 거래된다. 천박하고 추잡한 성이 이른바 ‘성폭력’이 되어 골방과 길거리에 넘쳐나고 심지어 가정으로 되돌아가 생명마저 더럽힌다.  성교는 성의 목적도 도달점도 아니다. 성교는 성스러운 성의 필수적인 수단도 아니다. 성스러운 성의 정체를 아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곳을 향해 가는 길이 전혀 없는지 아니면 너무나 많은지 아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알몸을 성스러움의 현신으로 확인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고 성교를 일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확실한 것은 인간이 성스러운 성을 포기하고서는 또는 성스러운 성을 함부로 재단해서 어딘가에 안치하고서는 천박하고 추잡한 인간일 수는 있으나 성스러운 인간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아무도 성스러운 인간이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 자신의 사회적 인격이 갖는 그 절대적 권리가 성스러움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누구나 성스러운 인간이기를 포기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살을 에는 듯 겨울의 폭풍이 매섭다. 지난 가을에 거둔 곡식들과 간간히 잡아 절여 말려놓은 고기들이 위안이 된다. 차가운 밤바람을 마다 않고 가운데 거대한 화톳불을 지피고자 다들 모인다. 어느덧 둘러앉은 악사들이 텅 빈 다양한 나무통들을 멋진 리듬으로 두들기자 다들 일어나 겹겹의 원을 그리면서 춤을 춘다. 그 중 몇몇은 속을 파내어 잘 말려 박제로 만든 짐승의 대가리를 뒤집어쓰고 있다. 다들 신비의 약초를 씹으면서 남녀노소 모두 모여 춤을 춘다. 몸속에서 알 수 없는 강렬한 기운이 올라온다. 두둥둥 타다닥 타닥타다닥, 점점 음악의 리듬이 절로 빨라진다. 하늘에서는 수없이 많은 별들이 춤추면서 내려앉고 거세지는 불길에서 터져 나오는 불티들이 지상의 별인 양 바람에 날리면서 모두의 몸들을 감싼다. 다소 멀리 떨어진 주변의 우거진 나무들과 풀들이 한껏 다가와 함께 도취된다. 다들 괴성을 질러대다 어느새 알 수 없는 신음에 이어 비명을 울린다. 멀리서 짐승들이 울부짖는 소리로 화답한다. 서서히 다들 제 스스로를 벗어나면서 모두가 모두를 향해 알몸의 신들이 된다. 수십 수백 만 년 전부터 우리 인간들이 성스러운 성을 향해 초월해 가고자 했던 것이다.  성을 둘러싼 모든 투쟁의 밑바탕에는 성의 성스러움을 향한 바람이 작동하고 있다. 여성해방 투쟁이건, 동성애자 권리 투쟁이건, 성 매매자 권리 투쟁이건, #미투 및 #위드유 투쟁이건, 그것들은 모두 다 저 밑바탕에서 성의 성스러움의 위력이 분출된 것이다. 현실적으로 그런 측면이 전혀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인데, 만약 그것이 사회의 틀 내에서 생존을 중심으로 한 생명에의 욕망으로 회귀하려는 속성을 띠고 있다면, 그런 만큼 기존의 거래 관계 속으로 편입되고 마는 것이다. 성의 성스러움은 근본적으로 생명을 넘어서면서까지 제 자신을 분출하기 때문이다. 인간 생명이 신성한다면, 그 바탕에 성의 성스러움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2018-03-14 | hrights | 조회: 203 | 추천: 4
홍미정/ 단국대학교 중동학과 조교수  2018년은 팔레스타인에 이스라엘 국가가 건설되면서 발발한 전쟁으로, 대규모 난민이 발생하는 등 팔레스타인 대참사가 시작된 지 70년이 되는 해다. 2018년 2월 23일, 미 국무부는 이스라엘 국가 건설 70주년을 기념하여 올해 5월에 텔아비브 소재 미국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이전하겠다고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우리는 미국 대사관 예루살렘 이전이라는 역사적인 조치를 취하게 되어 매우 기쁘다. 이스라엘 국가 건설 70주년이 되는 5월, 예루살렘에 새로운 대사관을 열 것이다.” 트럼프가 미국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옮기기로 결정한 것은, 이스라엘에게 예루살렘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하도록 승인해준 것이다.  2018년 2월 28일 라말라 소재 미국대표부 건물 앞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은 트럼프의 예루살렘에 대한 정책에 맞서, 미국은 점령세력의 일부이며, 예루살렘 문제에서 손을 떼야한다고 주장하고, 팔레스타인으로부터 모든 미국 정부 직원들 추방과 미국 대표부 폐쇄를 요구하는 시위를 하였다.  2017년 12월 24일 이스라엘 주택 장관 요아브 갈란트는 ‘이스라엘 수도 통합된 예루살렘의 땅 위에 주택 건설’이라는 이름으로 동예루살렘에 30만호의 새로운 점령촌 주택건설 계획을 발표하였다. 현재 동예루살렘에 약 22만 명의 이스라엘 점령민들이 거주한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스라엘의 동예루살렘에 30만호의 주택건설은 팔레스타인인들에게는 대재앙이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공세적인 점령정책들은 2017년 12월 6일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수도’라는 트럼프선언의 후속조치이며, 곧 트럼프가 내놓을 ‘세기의 협정’으로 가는 길을 준비하는 것으로 보인다.  2월 25일, 성묘교회 앞 기독교 최고 지도자들의 공동 성명 발표 사진 출처 - Custodia Terræ Sanctæ  이와 함께,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계속해서,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의 현실을 변화시켜서 이슬람과 기독교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작년 7월 16일 이스라엘은 알 아크사 모스크 내부에서의 총격 사건을 빌미로, 알 아크사 모스크 입구에 전자검색대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이에 맞서는 9일 동안 계속된 팔레스타인인들의 비폭력 시위 결과 7월 25일 이스라엘은 전자검색대를 제거한 바 있다. 올해 2월 25일 기독교회 재산에 대한 이스라엘의 막대한 세금 부과와 부동산 정책에 맞서 예루살렘 기독교인들이 비폭력 저항운동을 전개하였다. 결국 이스라엘은 2월 28일 기독교회 재산에 대한 막대한 세금 부과 시도를 철회하였다. 올해 2월 25일 성묘교회는 이스라엘의 기독교 재산에 대한 새로운 세금 부과 정책과 기독교회가 개인들에게 매각한 토지를 이스라엘 정부가 수용하는 입법 추진에 맞서 무기한 문을 닫았다. 예루살렘 시장 니르 바라카트는 징벌적이고, 소급법적인 세금을 부과하려고 시도하였다.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시당국은 기독교회에게 예배 장소가 아닌 부동산에 대하여 5천 3백만 달러 이상의 미납 세금을 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맞서 예루살렘의 프란체스코 가톨릭지도자, 그리스 정교회 지도자, 아르메니아 교회 최고 지도자들은 공동성명에서 이스라엘을 비난하면서 예루살렘 성지의 기독교인들에 대항하는 제도적이고, 전례 없는 공격이라고 주장했다. 사실, 현재까지 교회와 국가 사이의 문제는 1757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 오스만 3세가 내린 칙령인 현상 유지 협정에 따라왔다. 동예루살렘은 오스만제국 통치, 영국 통치(1917년 12월 30일-1948년 5월 14일), 요르단의 통치(1948년 5월 28일-1967년 6월 5일), 1967년 이후 현재까지 이스라엘의 점령 통치 기간 동안에도 1757년 술탄 오스만 3세의 현상유지 협정에 따라, 동예루살렘 소재 기독교 교회들은 세금을 낸 적이 없다. 현재  이스라엘은 교회 지도자들과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예루살렘 소재 기독교회 재산에 엄청난 금액의 세금을 새로 부과하고, 은행 계좌를 동결하며, 매각한 기독교회 부동산을 이스라엘 국가가 수용하는 정책을 추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정책은 예루살렘의 역사적이고 종교적인 현실과 특징들을 변경시키는 조치다. 2월 27일 이러한 정책에 맞서, 수 백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성묘교회 밖에서 세금 징수 결정을 반대하는 시위를 조직하였다. 같은 날, 이스라엘 총리 네타냐후가 이런 정책들을 철회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문을 폐쇄한지 3일 만인 28일부터 성묘교회는 문을 다시 열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국가를 건설한 시온주의 운동의 핵심지역이다. 시온주의 목표는 예루살렘(시온)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유대 국가를 건설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국가 선언과 동시에 발발한 1948~1949년 전쟁 이후, 예루살렘은 서예루살렘(이스라엘 통치)과 동예루살렘(요르단 통치)으로 분할되었다. 1950년 1월 23일, 이스라엘의회는 예루살렘(서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라고 선언했다.  그런데 시온주의의 핵심 지역인 시온산과 기독교 성지들, 이슬람 성지들, 유대인들이 기도하는 통곡의 벽은 모두 동예루살렘에 위치한 구도시에 있다. 이스라엘은 1967년 6월 전쟁에서 요르단 통치하의 동예루살렘을 장악하였다. 1967년 6월 27일 이스라엘은 예루살렘 경계를 재조정하고, 동예루살렘과 서예루살렘을 하나의 행정구역으로 통합시키면서, 요르단 법률을 폐기하고 수정 법률을 제정함으로써, 이스라엘 법을 동예루살렘영역으로 확장하여 적용시켰다. 1967년 6월 28일, 이스라엘 의회는 통합된 예루살렘 영역을 이스라엘의 수도라고 선언하였다 예루살렘 구도시 성지들 사진 출처 - PASSIA(http://www.passia.org/)  그러나 현재 국제법상으로 동예루살렘은 불법적인 이스라엘 점령지고, 1967년 11월 유엔 안보리 결의 242호 등은 동예루살렘으로부터 이스라엘의 완전한 철수를 요구한다. 동예루살렘 구도시에는 성묘교회(예수 무덤교회)를 비롯한 다수의 기독교 성지들과 알 아크사 모스크를 비롯한 다수의 이슬람 성지들이 있으나, 유대인들이 주장하는 유대교 성지는 가시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 7월 30일 제정한 ‘이스라엘 수도, 예루살렘 기본법’에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라고 명시함으로써, 1967년 전쟁으로 점령한 영토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하는 1967년 11월 22일 공포된 유엔 안보리 결의 242호와 1980년 6월 30일 공포된 유엔안보리 결의 476호 거부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1980년 8월 20일 공포된 안보리 결의 478호는 ‘점령종결’, ‘예루살렘 지위 변경 무효’, ‘이스라엘 수도, 예루살렘 기본법 무효’를 명시하였다.  1980년 9월 초 유네스코는 요르단이 제안한 예루살렘 구도시와 그 벽을 세계 문화유산 목록에 등록했다. 이후 유네스코는 예루살렘 구도시 소재 세계 문화유산을 훼손하는 이스라엘의 행위를 비난했다. 이렇게 유엔은 이스라엘의 동예루살렘 합병을 인정하지 않고, 예루살렘 성지의 특성과 지위를 변경시켜 온 모든 조치와 행위들이 무효라는 입장을 분명히 한다.  그러나 1984년 이스라엘은 알 아크사 모스크 서쪽 벽(일명 알 부라끄 벽/통곡의 벽)을 유대교 유적이라고 주장하면서, 일방적으로 이스라엘 국가 재산으로 등록하였다. 이후, 2018년 현재까지 이스라엘은 동 예루살렘에서 이슬람과 기독교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는 동시에, 동예루살렘을 유대화시키는 정책을 꾸준히 추진해 오고 있다. 게다가 미국 정부의 예루살렘 정책은 이스라엘의 점령 정책을 추인할 뿐만 아니라, 유인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2018-03-07 | hrights | 조회: 273 | 추천: 4
  이문영/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부교수  다가올 3월 18일 러시아 대선이 열린다. 2월 8일 확정된 대선후보 명단에는 최종적으로 8명이 이름을 올렸다. 무소속으로 출마한 현 대통령 푸틴을 비롯, 러시아 공산당과 좌파전선이 지지하는 후보 파벨 그루디닌, 대표 야당 중 하나인 통합민주당 <야블로코>의 그리고리 야블린스키, 돌발 발언으로 유명한 우파 자유민주당 당수 블라디미르 지리놉스키, 러시아의 ‘패리스 힐튼’이라 불리는 방송인 크세니야 소브착 등이 그 중 주목받는 후보다.  하지만 현재 러시아 대선의 관전 포인트는 ‘과연 누가 러시아의 새로운 리더가 될 것인가’가 아니다. 푸틴의 대선 승리는 ‘천재지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이라는 단서가 달릴 만큼 이미 현지에선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다. 러시아 3대 여론조사기관인 폼, 브치옴, 레바다센터의 최근 지지율 조사가 이를 잘 보여준다. 현재 탑 3에 해당하는 후보는 푸틴, 그루디닌, 지리놉스키. 폼의 조사에 따르면 3인의 지지율은 각각 66.5%-6.3%-6%, 브치옴에 따르면 69.5%-7.5%-5.3%다. 비판적 성향이 강한 레바다센터는 최근 대선후보 지지율 발표가 아예 금지됐는데(!), 그럼에도 이런 레바다센터가 조사한 푸틴 지지율조차 64%에 달한다. 나머지 후보들은 다 지지율 1% 미만이니, 사실상 모든 후보가 요즘 유행하는 말로, ‘잔잔바리’인 셈이다. 푸틴에 대적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러시아판 <짝>이랄까, 아무튼 커플매칭 오락프로 <돔-2>를 진행한 소브착의 대권 도전은 안 그래도 선거에 흥미를 잃은 이들에게 대선을 더욱 희화화하는 부작용을 낳았다. (선거 흥행을 노린 푸틴의 권유로 대선에 나왔다는 루머와 달리, 생각보다 그녀가 매우 진지하긴 하지만 말이다.)  그나마 푸틴의 가장 강력한 적수로 꼽혔던 반정부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는 작년 12월 25일 러시아 선관위로부터 ‘대선후보 등록거부’라는 엄청난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았다. 횡령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은 그에게 대통령 피선거권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다. 횡령이 사실이었는지, 정치적 보복은 아니었는지, 사실이었다 해도 실형이 아닌 집행유예에도 이 규정이 적용되는지, 등등에 대한 논란이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후 그는 전국의 지지자들과 함께 대대적인 대선 보이콧 운동을 선포하고, 현재 격렬한 거리시위로 체포와 석방을 반복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 이런 나발니조차 전국적인 지지율 면에서 전혀 푸틴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나발니도 탐탁지 않지만, 푸틴이 더 싫어서, 또 별다른 대안도 없어서 그를 지지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따라서 3월 18일이 지나면, ‘천재지변이 일어나지 않는 한’ 아마 우리는 ‘러시아 대선, 푸틴 승리’라는 외신을 접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푸틴은 2012년부터 6년 중임제로 바뀐 대통령제에 따라 2024년까지 집권이 가능해진다. 2000년 러시아 3대 대통령으로 정치적 커리어를 시작해 이후 8년 통치(4년 연임), 2012년부터 2024년까지 12년 집권(6년 연임)하면, 그는 총 20년간 러시아를 다스린 셈이 된다. 사실 2008년부터 2012년에도 아바타 대통령 메드베데프를 내세워 실세 총리를 지냈으니, 이번 대선에서 이길 경우 사실상 그의 집권기간은 총 24년이 되는 셈이다. 스탈린이 1922-1953년까지 31년, 브레즈네프가 1964-1982년까지 18년 장기 집권했다(둘 다 죽을 때까지 했다). 푸틴이 스탈린에 이어 역대 2위 최장기 국가원수가 되는 셈이다(그도 죽을 때까지 하지 말란 보장도 없다). 사진 출처 - http://rusnsn.info  2017년 레바다센터는 ‘러시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러시아 시민들에 던졌다. 전국단위의 이 설문조사에서 스탈린과 푸틴이 나란히 1, 2위를 차지했다. 현재 러시아에는 ‘스탈린 신화’와 ‘푸틴 현상’이라는 이름 아래, 스탈린과 푸틴이 서로가 서로를 대신하며, 서로가 서로를 더해가며, 어떤 미디어스타보다 더 큰 인기를 누리는 진기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푸틴 통치가 해를 더할수록, 예전 스탈린의 정치적 악행에 대한 강력한 터부가 살금살금 무너지고, 급기야는 스탈린에 대한 호감이 소련 붕괴 후 정점을 찍었다. 스탈린의 귀환과 푸틴의 재선... 2018년, 러시아는 정말 어디로 가고 있는가.  
2018-03-06 | hrights | 조회: 208 | 추천: 5
윤영전/ 평통서문예원장  한국이 정부수립이후 최초로 해외에 군대를 파견했다. 당시 월남인 베트남에 파병한지 올해 2월9일로 53주년이다. 한국이 해외에 최초로 파병한 경우이기 때문에 특별하게 기념하고 있다. 53년 전, 필자는 해외 최초 파병의 대열에 일원으로 베트남에 참전하였다.  1965년 1월 초순, 요란한 전언통신문 벨이 울려, 나는 수화기를 들었다. “해외파병요원 지원자 모집”이었다. 처음에는 어느 나라일까? 알 수 없었다. 잠시 후에 파병지는 월남이고 지원자 신청마감은 1월10일까지였다.  나는 당시 원주 부대에 서무계로 제대 4개월을 앞둔 제대말년 육군병장이었다. 2년여 전에 입대하여 오직 제대할 날짜만을 달력에서 하루씩 지워가고 있던 때였다. 파견지역이 전쟁터라니 어쩜 죽을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에 멈칫거렸다.  제대하면 복학해 공부를 할 것이었다. 9살에 6.25 전쟁을 직접 바라보았다. 그 후 톨스토이의 ‘전쟁과 사랑’이란 영화를 보면서 호기심도 작용했다. 해방정국에서 내 맏형이 건준에 가입해 재판도 없이 죽임을 당하고, 형 때문에 둘째형과 아버지도 부역을 하였기에 신원조회에서 통과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해외파견은 철저한 신원조회가 요구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지원한 것은 신원조회를 뛰어넘자는 것이었다. 전쟁 참전에 죽고 사는 것은 다 하느님의 뜻이라며 결단하였다. 1차로 지원을 했는데 과연 신원조회에 통과할 지가 의문이었다. 일단 전언통신문을 정리하여 결재를 올리고 부대원에 공람을 돌렸다. 130여 명 중에 단 2명이 지원을 했다. 그런데 부대장과 군종신부는 나의 지원을 철회하란다. 이유는 지금 월남 사이공 수도가 구정공세로 함락될지도 모를 위험한 전쟁지역이고 살아온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허나 나는 가겠다고 주장했다.  일단 지원자를 중심으로 부대편성을 하면서 나는 서무사병계 직무를 맡았다. 파견부대는 양평의 광탄으로 이동하여 참전교육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부대에 1군사령부 인사참모가 찾아와 나의 지원을 취소하라고 했다. 내 신원조회로 부모님과 할머님이 나의 파병지원 사실에 놀라서 수소문해 철회를 종용한 것이었다.  집에서 22살 맏형이 죽고 둘째형이 군에서 부상당했기에 나까지 죽음에 보낼 수 없다고 했다. 나는 “한번 결심한 파병은 철회하지 않는다” 고 단호히 말해 인사참모도 “가면 죽은 다는데 어찌 꼭 가려하나? 고집을 어쩔 수 없네”하며 돌아갔다.  걱정하던 신원조회는 합격이었다. 이제는 현리에서 2천명이 결단식을 갖고 2월7일 서울운동장에서 박 대통령도 참가한 ‘한국군최초해외파견’ 평화의 사도 “비둘기부대” 국민환송식이 파병가족과 국민들이 참가한 가운데 성대하게 열렸다. 전선 없는 월남에 목숨 걸고 참전하는 지원자에게 성대한 환송식을 해준 것이다. 사진 출처 - 구글  나는 2월11일 부산 제3부두에서 해군 엘에스티 3대에 선발 600명이 공해를 항해하여 14일 만에 붕타우에 도착했다. 끝없는 2주간의 항해는 참으로 지루했다. 그러나 붕타우의 등대를 발견하고 이미 파견된 붕타우 이동외과병원 간호장교들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그리고 4시간 사이공 강변을 항해하여 항구에 도착했다.  당시 월남의 정부수반 판칵수, 국방장관 티우 중장과 키 공군사령관과 실세 권력자 칸 소장도 함께 우리 다이한 비둘기대원을 환영했다. 다음날 사이공에서 26킬로 떨어진 벵아 지안옛 베트콩기지를 2천명 비둘기대원들의 숙영지가 되었다. 비둘기부대원들은 첫날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한 달 후에 본대 1,400명이 US메이카 호에 본대와 합류해 2천명이 집합한 단 본부 앞에서 조문환 단장은 훈시를 했다. 경례하고 “경계철저” 그리고 “살아서 돌아가자”였다. 설명은 “이곳은 한국이 아닌 우방국이다. 내나라 지키다가 죽어간 것도 서러운데 이국에 와서 죽어갈 필요가 없다”는 진실의 훈시였다.  난 조문환 장군의 훈시에 감명이었다. 흔히들 전시에 죽어간다. 전선도 없는 전쟁월남전은 제네바협정 17도선에 북은 월맹, 남은 월남이었다. 당초 프랑스 80년 전쟁 베트콩이 17도 이하 월남에서 3분의 1을 점령하고 있는 현실이었다. 그러기에 비둘기부대는 월남에 자유와 평화를 위한 부대라고 대외적으로 명명했지만 결국 전투병 파견위한 사전부대였다. 64년 10월 붕타우 이동외과병원 의료진은 순수한 병원치료지원으로, 30여명의 태권도 교관요원이 함께 파견되었다. 월남의 수도 사이공이 공격을 당하는 전선 없는 전쟁터가 실상이었다.  월남에 파견된 후 첫 교전은 4월2일이었다. 단 본부를 향해 박격포탄 80여발을 선제공격하였다. 그날이 비둘기대원을 위문하는 “또순이” 한국의 영화 2편을 상영해 이국의 향수를 달래준 영화였었다. 밤 10시30분 취침, 나는 당직근무를 서고 있었다.  단 본부를 겨냥한 박격 포탄이 떨어져 나는 바로 비상벨을 눌렀다. 처음 겪는 실제상황 전쟁이었다. 미처 외곽진지를 구축하지 못했지만 허나 그들이 부대에 접근하면 총을 쏠 준비를 했다. 격전을 벌이면 죽어갈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1시간여 교전은 아군 8명 중경상 차량 파손 등이었고 그들은 베트콩 1명 사살, 수십 명 중상을 상부에 보고했다. 그날이 한국군 해외파견 최초 작전을 벌여 승리했다는 전사를 기록했다. 전투부대 파병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작전의 하나였다. 그해 8월 9월에 맹호와 청룡, 백마가 퀴논 나트랑 캄란에 파병되었다.  10월 전투에서는 슬픈 소식이 연이었다. 주로 월남군과 미군이 담당하던 베트콩 소탕작전을 전개하게 되었다. 소탕작전에서 아군이 수백 명씩 전사했다. 무리한 작전을 폈다. 나는 천주교신자로 군종신부와 교우 함께 탄산누트공항 영안실에서 전사한 맹호 청룡전우 유골함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그들 연혼이 저 세상에서 영면하기를 기도해 주었다. 조 장군의 훈시가 떠올랐다. 죽지 말고 살아서 돌아가자는 그 말이었는데 늘어난 전사자 영혼미사는 귀신 잡는다는 해병 청룡전우들이 많았다. 일부 죽음은 지휘관의 무모한 작전의 소탕전도 있었다.  당시 우리는 한국의 조 장군과 채 사령관이 미주월사령관 웨스트모렌드 장군보다 더 멋있었다는 것에서 자부심을 느꼈다. 분명 월남의 장병들보다 월등한 체격과 담력이었다. 그들은 태권도와 인삼에 관심을 가졌다. 헌데 다이한 장병들 특히 해병 청룡 백마까지 베트콩소탕작전에서 민간인을 첩자로 몰아 우리 사망자와 같은 숫자 6천여 명을 학살한 사실이었다. 수교 후에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이 방문해 특별 사과한 사실도 있다.  이는 지난 한국전쟁에서 미군 등 외국 군인들의 우리 민간인 학살한 사실과 같다. 이는 전과에 전전 긍긍하여 마치 민간인을 베트콩으로 또는 첩자로 과잉 분류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한국군도 9년 동안 33만 명이 파병되고 6천 여 명이 전사하고 부상자가 2만 여 명이고 고엽제 유사환자 까지 2만 여명 등이 있어 안타까웠다.  나는 베트남에 파견되어 남루한 후회를 했다. 내나라 남북으로 분단되어 통일도 못하면서 월남의 민족통일을 방해하는 미국의 용병으로 파병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프랑스와 80년 전쟁을 이겨내고 민족통일로 가는 길에 17도선 남북으로 나뉘어 다시 외세 미국을 비롯한 한국 필리핀 등과 전쟁을 치렀다. 진정 월남인들은 말한다. 제발 우리는 “공산 사회주의도 싫고 자본 민주주의도 아닌 전쟁 없는 우리의 민족주의로 통일되어 평화롭게 살기를 원한다”고 했다.  그들의 주장은 옳았다. 1961년 5월16일 박정희 군사정변은 사월혁명 후 민주정부를 뒤엎은 군사정권이었다. 박 정권은 경제적으로 난관이었다. 서독 광부와 간호원 파견에 이어 한국전쟁에서 미군 5만4천여 명의 전사자에 낸데 보은이란다. 미군의 월남전 희생에 동참할 것을 제의하여 파병이 결정된 용병이었다.  미군은 한국군 10년간 파병 33만 명에 대한 전투수당 기타 파병에 따른 모든 경비를 지급하는 협정을 맺었다. 허나 고엽제에 관한 보상은 빠져 있었다. 그간 미국에 고엽제 보상을 법적 제기했으나 64년 한미 월남파견 각서에 들어있지 않다며 패소했다. 내 주변에도 참전한 전우들 중에 고엽제 환자들이 있다.  미국은 한국전에서 무승부였다면 월남 전쟁에서는 완전 패배였다. 한편 한국은 베트남전에 참전해 한때는 적국이었다. 허나 그들은 드디어 1973년 세계 막강 미국을 이겨내고 민족주의 정신으로 통일을 이루어낸 강국이 되었다.  다행이도 한국과도 수교를 하여 많은 교류와 협력이 이루어지고 상호 우호국이 되었다. 필자도 베트남 참전 전우들과 수교 후에 3차례나 하노이 호치민시 붕타우 지안 나트란 캄란을 관광하면서 전쟁 아닌 평화의 삶을 보면서 한없이 부러웠다.  자주 국립묘지 찾아, 함께 참전했다 숨진 전우들 묘소 앞에서 명복을 빌었다. 또한 조문환 장군묘 앞에서는 그때 “죽지 말고 살아서 돌아가자”는 그날의 훈시를 기억하면서 감사한 마음이었다. 몇 년 전, 운명한 채명신 주월사령관이 잠든 사병묘 앞에서 장군 묘를 사양하고 사병과 함께 한 정신에 대해 감사하며 명복을 빌었다.  베트남 찬전 53년을 되돌아보면서 베트남은 호치민 같은 민족지도자가 존재했기에 세계 강국인 미국을 이겨내는 유일한 나라가 되었다. 우리는 언제 한반도 주변 열강들에 패권이 아닌 진정한 평화에 다가가는 그날이 언제나 올까. 수치스러운 분단 73년, 우리의 8천만 소원인 남북평화통일이 오는 그날을 염원해 본다.   * 윤영전(尹永典) : 한국작가회의 소설가. 한국문인협회 수필가. (사)평화연대 이사장. 서예작가
2018-02-21 | hrights | 조회: 212 | 추천: 1
정재원/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  2000년대 초반 시베리아 횡단 여행 중 울란-우데라는 생소한 도시에서 잠시 머물 때였다. 당시 유일했던 한국 식당에서 여독을 풀고 있을 때, 그 식당에서 일하시는 고려인 할아버지가 매우 반갑게 우리를 맞아 주었다. 즐거운 대화를 하던 중 그 할아버지는 그 곳에 얼마 전에 촬영 왔던 한국 방송국 기자들 이야기를 하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그 식당에서 만취해 폭탄주를 만들면서 휴지를 천장으로 던져 나중에 청소하기 너무 어려웠다는 이야기부터 같은 남자라서(?) 이해는 한다만, 너무 노골적으로 성매매 업소를 찾더라는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한국 언론인들의 추악한 면모를 보여주는 이야기를 듣다 창피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이러한 추악한 면모들은 아주 일상화된 것이라는 걸 직접 깨닫게 된 건 그 후 오래지 않아서였다. 러시아에 나와 있던 각종 언론사 지사장들은 물론 러시아로 취재차 출장 나오는 각급 언론인들의 현지에서의 생활은 가히 상상을 초월했다. 현지 법 상으로 불법은 물론이고, 부패한 권력과 범죄 집단과의 연계 속에서 영업하던 한인 성매매 업소들에서 공관 직원들, 파견 사원들, 교민 업자 등으로부터 거의 매일 접대를 받았고, 유흥은 심지어 낮에도 벌어졌다. 한국에서 정관계 인사들이 러시아를 방문할 때, 기자들이 함께 오는 경우에는 현지 한국인 성매매 업소들에는 비상이 걸린다. 언론사 지사장들이든 한국에서 오는 언론인들이든 마찬가지다. 손님들 중에 가장 질 낮은 사람들이 바로 언론인들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보수정당 인사들이 업소를 대거 방문했을 때, 정치인들과 수행원들, 기업인들, 그리고 언론인들은 불법업소 몇 곳을 통째로 빌렸다. 간판도 달지 못한 채, 은밀하게 영업하던 불법업소들이었다. 접대를 위해 현지 공관원들도 총동원되었다. 이런 질펀한 술판에 대해 한 진보 언론사 기자가 폭로를 했다. 하지만 너무 아쉬웠다. 기사의 초점은 공관원들의 접대 때문에, 영사 업무가 완전히 마비되었다는 것에 맞춰져 있을 뿐이었다. 언론인들이 접대 받는 문화와 불법 성매매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필자가 러시아에서 한인 성매매 업소들과 싸우고 있을 때, 그 진보 언론사 기자가 다른 건으로 취재차 왔다는 말을 듣고 만나려고 했지만, 그 기자를 담당하는 기업인의 말을 듣고는 만남 자체를 포기해야 했다. 그 기자가 먼저 ‘여자 나오는 술집’에 가자고 했다는 거다. 러시아 땅에서 벌어지는 한국인들의 성매매에 대해 러시아 사람들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며 의아해한다. 러시아에도 언론이 있지만, 이런 문제는 한국 사람들 사이의 문제이니, 너희 나라 언론인들에게 말해주라는 거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언론인들은 적어도 성매매 문제에서는 공범이었고, 범죄에 대해 침묵했다. 심지어 이런 이야기가 한국에서 보도되지 못하도록 방해하기도 하였다.  이런 범죄와 일탈이 비단 언론인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특정 고위층이나 상류층만의 문제도 아니다. 어쩌면 대한민국 다수 남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정치인, 검사, 국가정보원 요원, 군인, 기업인 등 우리 사회를 이끌어간다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글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하다. 문제는 이런 폐습을 폭로하고 바로 잡아야 할 책무를 지닌 언론인들이 한 술 더 뜬다는 거다.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적폐의 참호를 구축하고 있다. 사진 출처 - 뉴시스  최근 언론 적폐를 청산하기 위한 여러 방송사들의 싸움이 눈물겹게 펼쳐지고 있다. 하지만, 수없이 외쳤던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에 기반을 둔 감시와 비판 기능의 회복만으로 언론개혁과 적폐청산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명박근혜 정권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처럼, 한국은 여전히 정권의 향배에 따라 언론의 역할이 크게 달라지는 언론환경 자체가 매우 추악한 나라이다.  그래서 적폐청산을 위해 싸우는 언론인들이 일상의 삶 속에서도 같은 정신으로 정의롭지 못한 일에 맞서고 있는지가 중요한 관건이 될 것이다. 러시아에 취재 왔을 때, 여자 나오는 술집을 찾아다니던 기자 중에는 지금 언론자유를 위해 싸우는 용감한 언론인도 있다. 이 기자와 함께 러시아를 찾은 다른 기자는 해외에서 경험(?)한 숱한 성매매 경험을 자랑스럽게 떠벌리기도 했다. 유감스럽게도 그 기자는 이라크 파병 당시, 반전, 평화를 위해 목숨을 걸고 이라크 전장까지 취재하러 왔던 매우 ‘의식 있는’ 기자였다.  이건 단순히 도덕성의 문제만은 아니다. 일상에서는 언론인 특유의 술 문화와 스트레스 따위를 핑계로, 성매매 업소를 출입하며, 성매매종사 여성을 착취하며, 술값마저 감시해야 할 권력에 기대는 적폐적 관행은 그대로 둔 채, 남들의 적폐만을 청산하자고 외치는 것은 전형적인 모순이다. 적폐 청산은 전방위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또 다른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뿐이다. 여성을 단지 수단으로만 여기고, 일상적으로 성매매라는 범죄행위와 단절하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우리 언론계에 자리하고 있다면, 그건 새로운 적폐가 될 가능성이 높다.
2018-02-07 | hrights | 조회: 236 | 추천: 6
김재완/ 방송대 법학과 교수  법원행정처는 사법부의 업무에 필요한 제반 행정을 담당하는 기관이다. 사법권의 독립 하에 둔 독자적인 행정기관으로서, 인사와 회계 등에 있어 외부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는 목적을 가진다. 그런데, 사법부 내에서 법원행정처가 인사와 재정을 모두 가지고 있음으로써 오히려 막강한 내부 권력기관이 되기도 한다. 한편 사법부 내에는 국제적인 인권문제와 수평적인 사법부의 구조마련 등 대법원의 개혁을 추구하는 자체 학술단체로 국제인권법연구회가 존재한다.  지난 2017년 2월경 국제인권법연구회는 법관의 인사제도에 대한 개혁을 요구했다. 그 작업으로 판사들에게 설문조사를 시작해, 판사들의 인사제도 개혁에 대한 의지와 목소리를 하나로 묶어내고자 했다. 이러한 행동을 법원행정처는 위험한 것이라고 판단했고, 당시 처장은 국제인권법 소속의 한 판사를 법원행정처로 인사이동 시키는 한편, 학회의 활동을 중지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담긴 문건을 받은 해당 판사는 사직서를 제출하면서 반발했고, 법원행정처는 논란이 확대될 것을 염려해 해당 판사를 다시 일선 법원으로 인사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때부터 법원 내부에서는 판사들의 뒤를 조사하는 이른바 동향파악 파일이 존재한다는 것이 널리 퍼졌고, 드디어 올해 22일에 대법원 추가조사위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 판결 선고 관련 각계 동향’ 문건을 제시하며, 이른바 판사 블랙리스트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청와대 민정라인이 개입하여 대법원을 압박해 원세훈 전 국정원장 사건을 전원합의체에 회부시키게 했고 결국 파기환송을 이끌어 냈으며, 이를 위해 담당판사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보고하는 등 민감한 내용의 정보 및 의견이 교환된 것으로 해당 문건에서 드러났다. 또한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임 시에 법원행정처가 사법개혁의 목소리를 내온 진보적 성향의 판사모임 소속 법관들을 따로 분류해서 이들의 동향 및 성향을 세부적으로 파악한 내용을 담은 내부 문건들도 존재하였음이 밝혀졌다. 그리고 여기에는 2010년에 해체한 우리법연구회와 현재의 국제인권법연구회의 모임에 참석한 판사들과 그들의 발언 및 논의 내용 등은 물론이고, 해당 판사 각 개인의 가정사와 소셜네트워크 활동 등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까지도 담겨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권력의 검은 손길이 공정하고 엄정해야 할 사법부를 마리오네트(marionette)로 만든 것이다. 이러한 사법의 마리오네트는 수직적 사법행정체계에 기인한 바가 크다.  법원의 수직적 사법행정체계는 뿌리가 깊고 단단한 기수문화와 이에 따른 경직성, 그리고 우월적 지위를 가진 권력기관과 긴밀히 내응하는 출세욕을 가진 판사들 사이의 검은 커넥션을 가능하게 만들어 왔다. 구체적인 한 예로 사법행정위원회 위원 후보자들에 대해 별도의 추천기준을 만들어 리스트화 한 것에서도 그러한 점들은 잘 드러난다. 이것은 소위 왕당파라고 불리는 제어 가능한 판사들만을 위원으로 만들기에 용이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편향성과 불공정성 등의 시비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서, 주도면밀하게 진보 성향(인권, 노동, 젠더)의 판사들과 여성 및 장애를 가진 판사들도 분류하고 분석해 추천순위에 형식상 올려놓음으로써 문제가 없어 보이도록 하는 모습도 연출한다.  사법부는 행정부, 입법부와는 달리 국민으로부터 선출된 권력이 아니다. 그들은 오로지 법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과 자격을 가지고 임명되고, 양심에 따라 재판하는 사법 권력을 가지며 그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만큼 더욱더 공정하고 엄정한 사법권력의 집행과 행사가 요구된다. 그런데 그 권력의 행사가 국민의 편에 서지 않고 행정부의 부당한 권력과 지시에 따르는 것이라면, 사법부의 독립과 법관의 양심은 훼손되고 망가져서 결국 국민에게 해악을 끼치는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만다. 국민에게 신뢰를 잃은 사법부는 좀비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현재의 사법부의 모습이다. 사법부가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고 제자리를 찾는 길은 사법부 스스로가 개혁하는 길밖에는 없다. 그 출발은 법원의 수직적 사법행정체계를 타파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
2018-02-07 | hrights | 조회: 167 | 추천: 5
신하영옥/ 여성운동연구활동가 네트워크 ‘젠더고물상’  13일에 ‘제천화재사건’이 ‘여성학살’이라는 여성들의 시위가 홍대 앞에서 있었다. 인터넷 카페 ‘여초연합’ 회원들은 남성 건물주와 소방당국, 여성 피해자들을 비하하는 게시글을 올린 누리꾼들에 대한 진상규명 및 처벌을, 여성목욕탕 화재 피해자들의 신고전화 녹취록 요구 및 여성안전권 확보를 위한 제도마련을 주장했다(헤럴드경제. 1. 15). 제천화재사건 이후 이 사태가 여성혐오로 인한 구조적 참사라는 글들이 SNS에 올라오자, “그렇게 꼬우면 대신 죽어주든가” 라는 댓글을 비롯해서, ‘김치국’ 등의 사망자들을 폄하하거나 비아냥거리는 댓글들이 올라왔다. 그 수준은 말하면 무엇 하랴. 그 때문에 사건에 직접 연루된 이들에 대한 처벌 뿐 아니라 비하성 댓글을 올린 누리꾼들에 대한 처벌 또한 요구하는 것이다.  제천화재가 여성학살이라는 위 집회가 있은 다음날인 14일, 인천의 부평역 근처 여자화장실에서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던 여성이 남성에게 망치로 머리를 폭행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여성은 수술을 받았고 겨우 의식을 되찾은 상태지만 재수술을 받아야 하는 상태라고 한다. 당시 바로 옆 남자화장실에 있던 이는 여자화장실 문을 열고 핏자국을 보고, 가해남성도 봤지만 도망을 쳤다. 결국 이 여성은 상해를 입은 상태로 스스로 경찰에 신고를 해야 했다.  “2년 전 강남역 노래방 화장실에서 벌어진 20대 여성 살해 사건처럼 심야 시간대의 묻지마 폭행의 불안감이 커지고 있습니다.”(SBS 1. 15 저녁 8시뉴스)  2년 전 강남역 살해사건은 ‘여성혐오 살해’라고 여성주의자들이 명명한 바 있으나 여전히 ‘묻지마 범죄’로 불리우고 있다. 그 ‘묻지마 범죄’는 왜 항상 여성을 향해 있는가? 왜?  제천화재의 경우, 총 29명의 피해자 중 23명이 여성이고, 2층 여탕에 있던 여성은 전원 사망했다. 여탕은 소방안전점검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비상구가 막혀있었으며, 안전요원이 배치되어있지 않았다. 여탕에 있던 피해자들의 긴급구조 요청에도 소방당국은 신속히 대처하지 않았다. 2층 유리창을 깨라는 거물 밖 시민들의 요구도 즉각 이루어지지 않았다. 긴박한 순간에 20여명이 대피할 수 있었던 비상구를 집중공략 했다면, 어차피 나중에 깨고 말 2층 유리창을 일찍 깼더라면, 안전요원이 있었더라면, 여탕 비상구가 막히지 않았더라면. 아니 소방당국이 비상구를 집중공략 했더라면. 이런 ‘그랬더라면......’은 결코 사실을 되돌릴 수 없는 하나마나한 아쉬움 혹은 미련이다. 그러나 여성들만 유독 대량 사망한 이번 사건에선 결코 하나마나한 미련이 아니라 짙은 의혹과 질문이 된다. 왜?, 왜 그랬을까?, 왜 그렇게 밖에 안 되었을까?, 여성들만 왜?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기혼 여성들은 종종 친정어머니와 목욕탕에 간다. 특히 깔끔한 노인엄마를 모시는 경우 더욱 그렇다. 딸이 따라가야 몸을 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제천이 친정인 나도 어쩌면 피해자가 될 수 있었을 일이다. ‘운이 좋았다!’ 는 느낌이 들 수밖에 없다. 현 거주지가 부평인 나로 인해 나와 함께 사는 내 딸에게도 역시나 그런 ‘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 두 사건을 ‘구조적인 여성혐오로 인한 살해’라고 명명하는 것에 대해 많은 이들이 불편함을 넘어 불쾌해 한다. “죽이고 싶던 것도 아니고 구조를 진행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생긴 문제”라면서 “여성혐오라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 “이번 참사는 구조적인 차원의 문제인데, 모금운동이나 소방관에 대한 위로가 진행되는 게 맞지 않냐”. “여성이 많이 죽은 것은 안타깝지만 이런 식으로 접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라고 ‘비판’ 하거나 ‘일갈’했다고 ‘보도’ 한다. 너무 ‘여성혐오에 짜 맞추는 억지’라는 것이다. 어떤 사건이 어떤 계층에서만 지속적으로 발생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무엇으로 봐야 할까?  아주대의료원 권역외상센터의 이국종 교수는 오래전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응급실에 오는 환자들 대부분이 저소득층 이며 이는 이들이 몸 노동을 주로 하는, 사고발생 위험이 높은 직종에 근무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결과라고 했다. 사회적 저소득층인 노동계급이 소득을 얻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노동, 즉 몸을 파는 업종이 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사무직이나 관리직에 있는 고소득층에 비해 위험에 노출되는 비율이 훨씬 높을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적인 결과라는 것이다. 때문에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응급의료기관이 더 많아져야 하지만, 한국사회에서는 비용에 비해 효용(수입)이 낮은 응급의료기관이 축소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었다. ‘재난에도 계급성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다. 저소득층이 왜 응급실에 많이 오는가를 사회구조적 측면, 특히 자본주의적 경제구조에서 잘 파악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여성들이 왜 ‘표적’ - 묻지마 가 아닌 - 범죄의 희생자가 되고 한 사태나 사건에서도 더 많이 죽어나가는가에 대해서 사회구조적인 측면에서 고찰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여성들이 주장하는 여성혐오 범죄라는 명명이 함의하는 바이다. ‘재난에도 성별이 존재’ 한다는 것이다. 그 당시 소방관 개개인들에게 책임을 묻자는 것도, 남성들을 대상으로 시비를 걸자는 것도 아니다. 다만 성별화된 범죄나 사회악이 지속적으로 재생산 된다면 그것에 대해 왜 그런지를 고민해보고, 연구해보고, 대안을 논의해보자는 것이다. 모든 인권사안은 그렇게 발전 혹은 발견되어 왔다. 권력을 쥔 자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그 보이지 않는 집단의 항의와 저항을 통해 드러나고, 속성이 까발려지고, 드디어 인정받게 되는 과정을 거쳐서 인권의 대열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위 두 사례는 분명히 가부장제 사회구조가 만들어 낸 그러나 비가시화 된 ‘외면’ 혹은 ‘무시’ 나아가 ‘멸시’가 만들어낸 집단적, 구조적, 체계적인 범죄이다. 그것을 까발리는 것은 이 사회구조를 유지하고 재생하고 있는 우리 모두의 몫이다. 성숙한 시민의식이자 시민성, 책임이다. 지금은 시민권을 주장하기에 앞서 시민성을 발현하는 것이 필요한 때다.
2018-01-24 | hrights | 조회: 358 | 추천: 11
- 엄마는 페미니스트 두 번째 이야기 정보배/ 출판 기획편집자  2017년 12월 31일자로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다. 대학을 졸업하고 임금노동자로 일한 시간을 합해 보니 21년 6개월. 대학 졸업 후 어떤 식으로든 일을 하지 않고 쉬었던 시간은 1년 6개월 정도이니 22년 가까이를 어쨌든 밥벌이를 한 것이다. 직장생활 22년이면 뭔가 대단한 통찰을 얻을 것이라거나 높은 직위에 오를 것이라 기대한 것은 당연히 아니다. 어쩌다 보니 그 시간 동안 출판계에서 일했다. 여러 방향에서 그 경험을 정리해 볼 수 있겠지만, 노동자로서 나의 경험을 몇 가지 들추어본다.  직장생활을 하는 내내 두 가지 바람이 있었다. 노동조합이 있는 회사에서 일해보는 것과 내 방(사무실)을 갖는 것. 아쉽게도 둘 다 이루지 못했다. 운이 나빠 그런 건지, 능력이 안 돼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다녔던 열 군데의 회사 중에 내가 그만둔 뒤에 노동조합이 생긴 곳은 단 곳. 제대로 노사협의회가 운영된 곳은 두 곳이었다. 나머지 회사는 규모가 크건 작건 노사협의회가 (형식적으로 신고돼 있을지 몰라도)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익을 위해 또는 회사의 운영에 목소리를 낼 시스템이 없다는 말이다. 달리 말하면, 출판계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환경이 나아질 토대가 마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얼마 전 다니던 회사의 노사협의회 노측대표단이 마련한 ‘성평등 조직문화 만들기’ 강연이 있었는데, 강연에 앞서 조직에서 남녀불평등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한 사전 설문조사가 있었다. 이 설문조사의 답변들이 경영진에게 전달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꼭 전달되기를 바란다) 남녀임금격차, 승진에서의 차별, 불쾌감을 느끼게 하는 아래위로 훑어보는 행위, 남자 위주의 경영진 구성 등등이다. 솔직히 남자직원들의 답변은 어떤 것일지 궁금하다.  직장생활 8년차쯤부터 나는 후배가 아니라 선배의 위치에 있다는 자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 무렵 내가 다니던 회사는 지극히 남성중심적인 조직문화를 갖고 있었고, 여자 간부직원은 단 한 명이었다. 갓 서른을 넘긴 당시에 나는 여자 간부의 존재가 소중하다고 느꼈다. 조직 안에서 여자 간부의 존재는 실무적인 차원에서 다양성을 확보하는 것 외에도 그 자체로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다. 여자도 승진할 수 있다는 롤모델이라는 점.  당시 남자 간부직원 몇몇이 부서의 회식비로 단란주점 영수증을 부서 총무를 맡고 있던 막내 편집자에게 처리하라며 넘긴 사실을 알게 됐다. (편집자 후배들은 이 사실을 알면 난리칠 거라고 생각해 내게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다른 루트로 이 사실을 며칠 지나 알게 됐다.) 그 편집자 후배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차였다. 나는 그 후배에게 부서회비는 부서의 모든 직원이 나눠서 사용하게 되어 있는 것인데 몇몇 남자 간부직원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여직원들에게 아무런 동의도 없이 술집에서 사용한 것을 묵인하면 안 된다고 얘기했다. 후배는 이 문제가 불거져서 부서의 선배인 남자 간부직원과 부딪혀야 하는 상황을 무척 어려워했다. “00아, 우리 사무실을 한번 봐봐. 여기부터 저기까지 몇 십 명의 직원 중에 남자가 몇 명이야? 몇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여자야. 지금껏 남자중심으로 만들어져서 통용되고 있는 이런 조직 문화와 분위기를 우리가 바꾸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 같아? 네 후배, 그 다음 후배 여직원이 들어와도 똑같을 거야. 지금 불편하고 닥칠 상황이 무섭다고 피하면 그렇게 돼. 누가 대신 바꿔주지 않아.”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명의 남자 간부직원이 그 비용을 회사에 올리지 않고 나눠서 개별 처리하기로 했다는 얘기를 전해들었다. 이 경험으로 바로 조직 문화가 바뀌거나 하진 않았을 것이다. 다만 여태까지 해왔던 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경험을 당사자와 다른 조직원들이 공통으로 갖게 되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변화는 작은 경험이라도 조직원 전체가 공통으로 가지게 되었을 때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직원이 70명이 넘고 매해 한두 명은 육아휴직을 들어가는 회사에 근무하던 때. 매해 두 명 정도는 임산부 직원이 있는 그 회사에는 직원휴게실이 없었다. 생리통으로 몸이 불편해도, 임신 중이라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도, 출산 후 복직해서 모유수유 중이라 유축을 해야 하는 상황에도 사무실 의자 말고는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이 없다는 말이다. 비단 여직원을 위한 휴게실이 아니더라도 직원휴게실이 있어야 하는 건 상식적인 노동조건이다. 휴게실이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나의 제안에 회사 대표는 회사 회의실도 부족한데 왜 그런 것이 필요하다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 제안을 한 지 3년이 지나 그 회사는 더 성장했고 상장을 준비하는 과정에 있다. 상장에 필요한 조건이든 다른 이유에서든 올해는 직원휴게실을 만든다고 한다. 긍정적인 변화다. 부디 회사가 직원들에게 시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을 뒤늦게 마련한 것에 대해 미안함을 갖길. 사진 출처 - 구글  1994년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일이 아니라 회식 문화다. 첫 직장에서는 단란주점에서 회식을 하는데 남자임원이랑 춤을 추라며 내 등을 떠미는 상급 간부직원이 있었다. 움직이지 않는 내게 몇 번이나 채근했고 결국 나는 화를 냈고 춤을 추지 않았다. 나이 어린 여직원을 자신의 상급자에게 떠밀다니, 그는 여직원을 뭐라고 생각했을까. 그런 행위를 상급자에게 충성하는 사회생활의 기본자세라 여겼을까. 견디기 힘든 것 중에 하나는 술문화다. 나는 체질상 술이 맞지 않았고 대학 2학년 때부터 거의 술을 마시지 않게 됐다. 그 뒤로는 맥주 한 잔을 마시는 데도 서너 시간이 필요하다. 당연히 회식자리에서 원샷, 술잔 돌리기 같은 것은 내게 죽음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술을 못 마신다는 내 말은 거의 무시당했고, 술을 못 마신다는 이유만으로 야유와 비웃음과 협박에 가까운 언사를 들었다. 어떤 때는 그래, 마시면 어떻게 되는지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주지, 하는 마음으로 몇 잔 마시고 인사불성 되어서 회식자리 파토내고 집으로 실려 간 적도 있다. 이렇게 한바탕 눈으로 사실확인을 하고 나면 더 이상 회식자리에서 술을 강권하지는 않았다. 대신 여전히 당신은 술자리에 어울리지 않고 따라서 술자리에 필요도 없고 분위기 망치는 인간 취급을 당했다. 이 정도로 무식한 술자리 문화는 이제는 찾아보기 힘들어졌기를. 뭔 이런 옛날 얘기를 하나라며 웃을 수 있는 지금이기를.  지금이 예전보다 나아 보이는 것은, 나이와 성별에 따른 차별적인 태도나 언행을 타인에게 보여서는 안 된다는 의식이 사회적으로 점차 확산되고 있고, 현실에서 차별에 항의하는 용감한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정말로 현실을 바꾸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한두 사람의 노력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걸, 바뀌더라도 아주 조금 아주 천천히 바뀌기 때문에 인내가 필요하다는 걸 깨달은 22년 간의 시간이었다.
2018-01-10 | hrights | 조회: 209 | 추천: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