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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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권용선(수유너머104 연구원), 김재완(방송대 법학과 교수), 신하영옥(여성활동가), 윤영전(평통서문예원장),  이문영(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주무관), 정보배(출판 기획편집자), 조광제(철학 아카데미 상임위원), 최정학(방송대 법학과 교수), 홍미정(단국대 중동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홍미정/ 단국대 중동학과 조교수 □ 우파 시온주의 정치인들의 反아랍 경향  최근 몇 년 동안, 이스라엘에서 우파 시온주의자들과 아랍계 소수자들의 관계는 점점 더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유대민족 국가법’ 제정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인종차별 정책으로 이스라엘 내에서 유대인/아랍인 분열이 더욱 강화된다면, 이스라엘 정치와 사회에 폭발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이스라엘 중앙통계국 분류에 따르면, 2018년 7월 이스라엘 전체 인구는 840만 명 정도다. 전체 인구의 74.2%(623만 명)는 유대인이며, 전체 인구의 21.4%(약 181만 명)를 차지하는 아랍계 소수자들은 무슬림 약 150만 명, 기독교인 16만 8천 명, 드루즈 13만 9천 명으로 구성된다. 나머지 4.4%는 ‘기타’로 분류된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은 단일한 종족, 종교, 문화 공동체라기보다는 여러 종족과 다양한 종교와 문화 집단으로 이루어진 모자이크 사회다.  이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고위급 정치인들은 흔히 인종차별적인 메시지를 유포시킨다. 2019년 9월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는 크네세트(의회)선거 유세에서 “만약 당신이 리쿠드 당에 투표하지 않는다면, 아랍인들이 우리 모두를 전멸시킬 것이다. 아랍들은 여성, 어린이, 남성 등 우리 모두를 파괴시키기를 원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랍인들을 적으로 돌리는 선거 메시지를 통해서 역사적 팔레스타인 땅에 대한 유대인 독점을 주장하는 우파 시온주의 리쿠드당으로 유대인 유권자들을 결집시키려고 시도했다. 2019년 10월 라디오 방송에서, 이스라엘 공안부장관 길라드 에르단은 “아랍인들은 천성적으로 폭력적이다. 유대인들은 법정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지만, 아랍인들은 칼을 빼든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反아랍 정서는 이스라엘 주류 정치의 특징이다. 아랍어 사용지역 □ 인종차별적인 유대민족 국가법  이러한 이스라엘 정치인들의 인종차별적 주장은 앞서 2018년 7월 기본법으로 제정된 ‘유대민족 국가법’에 이미 반영되었다. 우파 시온주의자들이 이 법 제정을 주도하였다. 사실상 헌법으로 작용하는 이 법은 이스라엘의 민주적인 특성과 인종적 소수자들을 무시하면서, 이스라엘 국가에 대한 유대인의 독점권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기본법: 유대민족을 위한 민족국가로서의 이스라엘 2018년 7월 19일, 이스라엘 의회(크네세트)는 여러 시간의 논쟁 끝에 다음을 명시한 기본법, ‘유대민족 국가법’을 120명 의원 중 찬성 62표 대 반대 55표, 기권 2표로 통과시켰다. 1. 세 가지 기본 원칙 1) 이스라엘 땅은 이스라엘 국가가 건설된 유대인들의 역사적 고향이다. 2) 이스라엘 국가는 유대인들의 천부적, 문화적, 종교적, 역사적 자결권을 실행한다. 3) 이스라엘 국가 내에서 민족적 자결권을 행사할 권리는 유대인들에게만 있다. 2. 국가의 이름은 이스라엘이다. 3. 통합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다. 4. 이스라엘의 공식 언어는 히브리어다. 아랍어는 이스라엘 국가 내에서 특별한 지위를 갖는다. 5. 이스라엘은 유대인 이민과 귀환을 위해 개방될 것이다. 6. 이스라엘은 유대 정착촌 개발을 민족의 가치로 간주하며, 정착촌 건설과 강화를 고무시키고 촉진시키는 조치를 취할 것이다.  이 법은 이스라엘 내 소수자들을 배려하는 평등이나 민주주의를 언급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점령지에서 이스라엘 정착촌 건설과 강화를 규정함으로써, 1967년 전쟁으로 이스라엘이 점령한 팔레스타인(동예루살렘, 서안, 가자)과 시리아 지역(골란고원)으로 이스라엘 국가 영역의 확장을 꾀하였다.  이러한 인종차별 정책의 법제화는 특히 군복무를 하는 등 이스라엘 국가에 충성해온 아랍계 소수자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아랍계 소수자들은 텔아비브 시내에서 시위를 조직하는 등 유대민족 국가법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2018년 8월 11일, 유대민족 국가법에 반대하여 북부 갈릴리, 남부 네게브 등 전국에서 온 수 만 명의 아랍계 이스라엘 시민들이 “우리는 이등 시민이 아니다. 유대민족 국가법은 공식적인 인종차별주의”라고 쓰인 현수막을 들고 텔아비브 시내에서 행진했다. 이 시위대에게 고등 아랍 감시 위원회의장 무함마드 바라카는 “국가의 목표를, 한 인종 집단의 소유물로 만드는 조항이 있는 헌법은 오늘날 이 세상에 없다. 모든 시민과 거주자들의 평등권 조항을 포함하지 않는 헌법은 세상에 없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내 아랍계 소수자들은 이스라엘이 모든 시민권자들이 동등한 권리를 갖는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2018년 8월 7일, 유대민족 국가법 반대 시위를 주도한 드루즈 공동체의 종교 지도자 셰이크 모아파크 타리프는 “이스라엘 국가에 대한 의문의 여지가 없는 우리의 충성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유대인들과 동등하게 간주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 유대인들을 대신해서 아랍인들을 공격하는 드루즈  드루즈들은 동예루살렘이나, 서안 소재 이스라엘 검문소, 가자/이스라엘 경계 등 점령지, 즉 팔레스타인인들과 직접 부딪히는 지역에서 이스라엘을 수호하는 국경 경찰이나 군인들로 3년간 의무 복무를 한다. 즉 상대적으로 위험한 지역에서 유대인들을 대신해서 드루즈 아랍인들이 다른 아랍인들과 맞서 싸운다.  예를 들면, 드루즈 출신 준장 가산 알리안은 2014년 7월 8일-8월 26일까지 7주 동안 진행된 이스라엘의 가자 공격을 지휘하였다. 이 공격으로 1,400명의 팔레스타인인들과 13명의 이스라엘 군인들이 희생되었으나, 이 희생된 군인들도 대부분 아랍인들이었다. 또 2017년 7월 14일(금), 동예루살렘 알 아크사 모스크 입구에서 권총과 사제 총으로 무장한 아랍계 이스라엘인들 3명이 이스라엘 국경 경찰관 2명을 사살했다. 이 3명의 아랍계 이스라엘인들은 이스라엘 북부 아랍도시 출신이고, 사살된 2명의 이스라엘 국경 경찰관은 드루즈들이다. 결국 이 사건은 아랍인들이 드루즈 아랍인 이스라엘 군인들을 사살한 사건이었다.  드루즈들은 1956년 5월 ‘유대인과 드루즈 협정’에 따라, 이스라엘 군대에 의무병으로 징집된다. 따라서 드루즈를 제외하고, 유대인과 협정을 체결하지 않은 아랍계 이스라엘 시민들은 의무 징집 대상이 아니다. ‘유대인과 드루즈 협정’ 체결 당시. 이스라엘 총리 데이비드 벤구리온은 “드루즈들과 유대인들 사이의 협정은 단지 종이 위에 쓰인 글이 아니다. 드루즈 전사들의 피로 이루어진 신성화된 것이다.”라고 찬양했다. 이스라엘 국가에 피를 받친 드루즈들의 충성은 이후 이스라엘의 인종차별적인 정책과 유대인 독점권을 강화하는데 활용되어 왔다.  게다가 2018년 7월 드루즈 출신 크네세트 의원 가운데 이스라엘 우파 시온주의당 소속인 아유브 카라(리쿠드)와 하마드 아마르(이스라엘 베이테누)는 유대민족 국가법 제정에 찬성표를 던졌다. 아유브 카라는 서안에 이스라엘 정착촌 건설을 찬성하는 인물이며, 크네세트 부대변인, 총리실 장관, 2017-2019년 통신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2019년 9월 선거에서 재선된 하마드 아마르의 선거 슬로건은 ‘이스라엘 국가에 대한 충성 없이 시민권 없음은 드루즈 공동체에게 당연한 것이다’였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유대민족 국가법’ 제정 등 이스라엘의 소수자 차별과 배제 정책은 이스라엘의 필요성에 따라 진행되는 것이며, 소수자들의 이스라엘 국가에 대한 충성도와는 관계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아랍계 이스라엘인들의 정치적 통합 강화  드루즈 정치인들과 우파 시온주의자들의 적극적인 연대에도 불구하고, 이에 맞서는 아랍인들 사이의 정치적 통합은 아랍인들의 정체성을 강화시키면서 강력한 정치 세력화를 이끌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아랍계 소수자들의 적극적인 정치참여는 민주주의와 평등한 국가로 가는 희망의 불씨가 될 수 있다.  크네세트 총 120석은 전국 단일 선거구에서 비공개 단일 정당 명부 비례대표로 선출된다. 유권자들은 선호 정당에 투표를 한다. 각 정당들은 최소 득표율 3.25%를 넘어야한다. 이는 대부분의 경우 최소 4석 규모의 정당을 의미한다. 이로 인해서 정당들 사이에서는 의석 확보를 위한 연합이 이루어진다. 뿐만 아니라, 아랍계 소수자들은 유대 시온주의자들이 결성한 거대 정당에 이름을 올려 크네세트에 진출하기도 하였다.  전체 인구의 약 21.4%를 차지하는 아랍계 소수자들이 최근 10년간 배출한 크네세트 의석은 각각 11-16석에 이른다. 특히 2015년 선거에서는 주요 4개의 비시온주의 아랍 정당들이 공동명부를 작성해서 통합 세력으로 선거에 참여함으로써, 446,583표(10.54%)를 얻어서 공동명부로 13석(유대인 1석 포함)을 획득하고, 이스라엘 내 3대 정당으로 발전하였다. 이 때 전체 아랍인들은 크네세트 총 의석의 13%인 총 16석을 획득하였다. 이 선거에서 드루즈가 5석(리쿠드 1석, 시온주의자 연합1석, 쿨라누 1석, 이스라엘 베이테누 1석, 아랍 공동명부 1석), 즉 유대인들이 주도하는 시온주의 정당들에서 4석, 비시온주의 아랍정당들 공동명부 1석을 획득하는 선거 돌풍을 일으켰다. 이 때 아랍계 유권자의 투표율은 역대 최고로 63.7%였고, 드루즈 중 81%가 시온주의 정당들에 투표한 반면, 드루즈 이외의 아랍인들 중 19%가 시온주의 정당에 투표했다.  가장 최근에 실시된 2019년 9월 선거에서 아랍인들은 공동체별로 드루즈 3석(블루앤화이트1석, 이스라엘 베이테누1석, 공동명부 1석), 기독교인 2석, 베두인 1석, 수니무슬림 8석을 획득하였다. 드루즈 2석은 시온주의당 소속이었고, 드루즈 1석, 기독교인 2석, 베두인 1석, 수니무슬림 8석은 모두 공동명부 소속이었다. 그 결과 470,211표(10.60%)를 얻은 공동명부는 13석(유대인 1석 포함)을 획득함으로써 블루앤화이트(33석), 리쿠드(32석)에 이어 3대 정당 자리를 유지하였다. 이 때 드루즈를 제외한 아랍계 투표자들 중 82%가 공동명부에 투표한 것으로 드러났다. 아랍계 소수자들이 투표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가한다면, 공동명부 의석수는 훨씬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 정부의 강력한 유대화 정책 및 아랍계 소수자 분열 정책과 아랍계 소수자들 사이에서 서로 다른 정치적 견해에도 불구하고, 아랍계 소수자들은 크네세트 선거에서 비시온주의 정당들이 연합하여 공동명부를 작성함으로써 통합세력의 힘을 맛보았다. 앞으로 아랍계 소수자들은 ‘유대민족 국가법’ 제정 등 이스라엘의 강력한 인종차별적 정책에 대한 대응으로 통합을 더욱 강화하면서 이스라엘 내에서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부상할 것으로 보인다.
2019-12-03 | hrights | 조회: 177 | 추천: 0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대표  최근 심사가 계속 혼란스럽다. 이른바 ‘태극기 부대’와 ‘전광훈 무리’ 그리고 자유한국당 세력이 거동해 대대적인 광화문 집회를 연 뒤부터다. 솔직히 충격이 컸다. 정권에 대항하는 대대적인 시위는 ‘우리’에게만 해당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60년 4.19 혁명, 79년 부마항쟁, 80년 5월의 봄과 5.18 민주 항쟁, 87년 6월 항쟁 그리고 2016년 촛불 혁명 등, 면면히 이어져 온 민주화를 위한 대투쟁은 역대 군사독재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었고 또 그 잔재를 일소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일들은 말 그대로 투쟁이었기에 참가자들로서는 직간접적으로 목숨을 건 불안하고 위험한 것이었다.  그런데 전혀 반대 성격을 띤, 그러니까 민주화 투쟁의 성과인 민주정권을 오히려 타도하자는 대규모 집회 시위가 발생한 것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현상인가, 이 묘한 광기가 어디에 어떻게 잠복해 있다가 이렇게 분출하는가, 전반적인 성격으로 보아 분명 파시즘적인 대중 동원이 분명한 것 같은데 무조건 그렇게 예단해버릴 수도 없을 것 같으니, 도대체 이 기이한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여러 물음이 떠오르면서 심지어 불안한 느낌에 휩싸이기까지 했다. 게다가 조국 사태를 기화로 대학가에서조차 이에 편승하는 것 같은 시위들이 생겨났으니 더욱 심사가 복잡했다.  ‘우리’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을 것인데, 처음 생각대로 결국, 반동적 성격을 띤 대규모 집회 시위라고 규정하게 되었다. 반동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동하는 운동이 자신에게 가해질 때 부정적인 방향으로 튀어 오르는 반작용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반동인가가 문제다. 몇 가지로 추슬러 보았다. 첫째는 촛불 정권이 내세운 ‘적폐 청산’ 작업에 대한 반동이다. 둘째는 정부 주도의 남북평화 기조의 형성에 대한 반동이다. 셋째는 민주화 투쟁과 성취의 전유(專有)에 대한 반동이다. 이 셋이 상호 강화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적폐는 크게 보아 두 가지가 맞물린 것이다. 하나는 권력에 편승한 부정부패이고, 다른 하나는 이에 대한 사법기관의 편파적이고 불공정한 처리다. 그 핵심은 신성해야 할 국가 권력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뿌리를 내린 특정 이익 세력에 의해 근본적일 정도로 크게 훼손되었다는 사실이다. 적폐 청산은 바로 국가 권력을 특정한 세력으로부터 독립시켜 철저하게 보편적인 중립성을 갖추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재벌 기업이나 보수 언론 및 검찰과 법원 등이 카르텔을 형성하여 국가 권력 이상의 위력을 발휘하는 것을 뿌리에서부터 싹을 잘라내겠다는 것이 적폐 청산의 취지다.  각성한 시민들의 대대적인 봉기로 세워진 민주정권은 그 정당성에 따른 자신감으로써 적폐 청산이란 ‘엄청난’ 구호를 내걸고 기존의 사회 권력에 선전포고를 한 셈이다.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이 구속 기소되고, 헌정 사상 처음으로 전직 대법원장이 구속 기소되었다. 재벌 기업의 총수들이 줄줄이 부패 혐의로 기소되기도 했다.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 현실이 되어 눈앞에 전개된 것이다.  그동안 이들이 그렇게 불법적인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은 일반 대중의 사회집단 심리적인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일반 대중들 역시 적당한 기회주의적인 태도로 부당한 사회 정치적인 권력에 알게 모르게 편승함으로써 하부에서 그들을 옹호하는 두터운 층을 형성한 것이다. 여러 기업의 고위 임원을 비롯해 저 스스로 사회 엘리트로서 자부하는 사람들, 기존의 사회 형태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지점에서 충분히 자신의 삶을 긍정할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 그리고 권위주의적인 종교 권력에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예속되었던 사람들을 위시해 이들처럼 자신의 존재를 심리적으로 맡길 영웅적인 대리인을 필요로 하는 많은 사람 등이 이 일반 대중에 속한다. 이들은 ‘적폐 청산’이라는 구호만으로도 그들이 그동안 살아온 삶과 그 존재의미가 삭제당한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니 적당한 기회만 주어진다면 이들은 반동적인 행위를 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어제까지만 해도 핵미사일 공격이니 사드 배치니 하면서 적대적인 분단과 그에 따른 절체절명의 위협이 난무하다가 남북뿐만 아니라 북미 간에 전혀 예상치 못한 평화 분위기가 삽시간에 불어 닥쳤다. 그리고 이를 현 민주정권의 수장인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최대한 확대 심화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였다. 앞서 말한 그동안의 현 상태에 충분히 만족하거나 만족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여기던 위 일반 대중들은 이 급작스러운 대대적인 분위기 반전에 일종의 아노미 심리 상태에 빠져든 셈이다. 그들은 남북분단과 한반도 내전으로 인해 적대적인 이데올로기가 만연한 냉전 상태에 맞추어 삶을 이행했고 그런 가운데 나름 자부할 수 있는 자신의 삶과 존재를 형성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남북분단에 따른 모순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러한 적대적인 상태를 체화하여 알게 모르게 그 분단 상태를 즐기고 누려온 사람들이다. 그런데 적폐 청산을 주도하면서 자신의 사회적인 존재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저 정권의 수장이 이제 그동안 철천지원수라 여겼던 적의 수장을 이 땅에 불러들이는가 하면 적진에 올라가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면서 파안대소하는 모습으로 희희낙락하듯 한다. 그들은 이를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다고 여긴다.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려는 자, 주사파, 공산주의자, 빨갱이, 나라 팔아먹는 놈, 심지어 찢어 죽일 놈 등 그들로서는 최고의 악담이자 저주라고 여기는 욕설들을 마음껏 퍼붓게 된다. 그런데 이런 분통 터지는 심정을 대낮 수도 서울의 한복판에서 안심 놓고 분출하여 마음껏 외칠 기회가 주어졌으니 게다가 모이라는 동원령이 떨어졌으니 어찌 마다할 수 있겠는가.  그동안 그들은 군사독재 국가건 시장 자유주의에 의한 잔인한 자본주의 국가건 저들 스스로 애써 세우고 지키고 발전시켜 왔다고 믿었기에 단 한 번도 나서서 나라를 비판해 본 적이 없다. 따라서 관제 데모를 제외하고는 대대적인 집단 시위를 해 본 적도 없다. 말하자면, 부당한 정권에 맞서서 정치적으로 대대적인 집단 시위를 할 때, 각자가 어떻게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서 공동체적인 위력을 공유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가 확장 심화하는가를 경험해 본 적이 없다. 어쩌면 민주화 투쟁을 위해 떨쳐 일어서서 ‘산 자여 따르라!’ 하고서 거대한 물결을 형성하는 ‘우리’의 존재 방식을 내심 부러워했을 수 있다. 비판적인 힘을 발휘해 무소불위의 정치권력을 감히 분쇄하고자 하는 저 ‘황당한’ 뚝심이 어디에서 나온단 말인가, 하고서 의아해했을 수도 있다. 오랜 세월 억압받으면서도 순응해 왔기에 순응을 자연스럽게 여기고 저항이니 비판이니 하는 데서 건립되는 삶의 의미를 거의 경험하지 못했고, 그래서 그저 이렇게 살다 가면 되겠거니 했는데 그게 아니라고 부추기도 독려하고 끌어내고 밀어주는 이상한 동지들이 나타난 것이다. 더군다나 태극기를 들고 나가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진정한 애국자임을 확신할 수 있고, 더불어 미국 국기를 들고 흔드는 것만으로도 세계 최고의 제국 시민이 된 것 같은 정확한 착각이 일기도 하는 데다, 수시로 텔레비전에 나오는 스타 정치인들이 함께 행진의 발을 맞추고 나를 향해 위대한 행동을 한다고 찬양하니 어찌 존재가 발양하지 않을 것이며 충동적인 흥분과 광기를 마다할 것인가. 더군다나 지금껏 절대적인 성역이라 여겼던 현직 대통령 이름을 마음껏 짓밟아 욕할 수 있으니 이 쾌감이라니. 그야말로 뜻하지 않게 대통령 이상으로 기세등등한 ‘완장’을 찬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대대적인 집단 시위에 참여하게 되자 동원이 아니라 자발적인 봉기라 여기게 되고 봉기라 여기지 않을지라도 적어도 자발적인 동원이라고 여기게 된다. 이에 집단적 충동에 의한 카니발적인 쾌감에 빠져들게 된다. 자유한국당 정치인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그동안 마주한 경험이 없는 엄청난 인파를 눈앞에 두게 되니 그들 모두가 나 때문에 흥분하는 것 같고,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고, 내가 아니면 누가 저들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는가 하는 ‘위대한’ 착각이 나를 사로잡는다. 연단에 나서서 기염을 토하게 되니, 정치적 인생이란 바로 이 맛이구나 하면서 더없는 환희가 밀려온다. 선전 선동이야말로 정치인의 본령임을 몸소 체험하게 되고, 그래서 마약처럼 광장이 그리워진다. 정권 담당자의 일거수일투족이 마치 제 무덤을 파는 것 같고, 승리하여 최고 권력을 거머쥘 날이 멀지 않다는 정확한 오인이 자리를 잡는다. 사진 출처 - 노컷뉴스  그들 ‘광화문 세력’들은 가상적인 초자아에 길들어 있는 자들이다. 숭배할 대상이 있어야 하고 자발적으로 순응할 대상이 있어야 하고, 그 대상을 중심으로 형성된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되는 금기의 체계가 있어야 하고, 아울러 역설적으로 그 금기의 체계를 위반하는 적들이 있어야 한다. 독재가 있어야 하고, 제국이 있어야 하고, 제국 속의 제국이 있어야 하고, 그것들은 영원해야 하고 본질상 완전해야 한다. 그 완전하고 영원한 본질적인 가치를 의심해 본 적이 없고, 그래서 심지어 그 가치가 완전하고 영원하고 본질적이라는 사실을 굳이 반성해서 자각할 필요조차 없다. 따라서 진실과 정의와 진리를 알게 되면 그들도 깨닫고 열린 마음으로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는 자가 되리라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그래서 그들의 대대적인 준동을 바라보는 마음이 불안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그들을 치유 내지는 처리할 방법은 폭력뿐이다. 그들의 자아는 제국 속의 제국이고, 그 제국을 지배하는 원리는 폭력이기 때문이다. 미시적 파시즘의 물방울들이 모여 제법 큰 잠정적 파시즘의 강물을 형성한 셈이다. 잠정적인 파시즘의 강물이 현실화되어 범람하기 전에 그 흐름을 제어할 수 있는 국가 권력의 댐을 건설해야 한다. 국가 권력의 원천은 합법적인 폭력이다. 파시즘적인 폭력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은 민주적인 합법적 폭력 즉 민주적인 국가 권력뿐이다. 대내적으로 제대로 된 국가 권력을 행사할 수 있으려면, 대외적으로 국가 주권이 확고해야 한다. ‘광화문’의 저들이 미국 국기를 흔드는 것은 대한민국의 주권을 정확하게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것이고, 저들이 태극기를 흔드는 이유는 남북 간의 평화를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광화문 세력’의 등장은 한편으로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역사가 이처럼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임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게 된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
2019-11-27 | hrights | 조회: 66 | 추천: 2
이윤/ 경찰관  1990년대 중반, 수사업무를 시작한 지 3년쯤 지났을 때 나에겐 수사관으로서의 엉뚱한 자신감이 있었다. 내가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죄가 없는 사람도 죄가 있는 것처럼, 죄가 있는 사람도 없는 것처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증거를 조작하거나 고문을 하지 않고 단지 글쓰기만으로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다.(생각만 했다. 진짜)  조서는 그런 힘을 지녔다. 다음 질문에 대한 답들을 비교해보자. 문: 당신이 그 자전거를 훔쳤나요. 답1: 아니요, 저는 그 자전거를 훔치지 않았습니다. 답2: (주위를 둘러보며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아... 아니요. 저는... 그걸 안... 가져갔는데요. 답3: (화난 듯 눈을 크게 뜨고 큰 목소리로) 왜 저에게 그런 걸 물어봐요? 네? 제가 그랬다는 증거라도 있나요? 경찰이 이래도 되는 거예요? 참! 이거 생사람 잡으시네.  답들은 모두 범행을 부인하는 내용이다. 다만 답1은 단순한 범행 부인일 뿐 답을 하는 사람에 대한 평가의 여지가 없는 중립적 답변인데 비하여, 답2는 범인이 범행을 들키자 불안해하는 모습이라고 평가될 수 있고, 답3에 대해서는 뻔뻔한 범인이 딱 잡아떼며 오히려 화를 내는 모습이라고 느껴질 것이다. 아마 답2나 답3을 조서에서 읽으면 피의자가 부인한다는 사실보다는 진술한 사람의 인성과 성격, 심리상태에 대한 평가가 개입되어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구나.’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는 답1과 같이 말했는데 조서에 답2나 답3처럼 쓰는 것은 왜곡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피의자가 이 정도의 변형에 대해 내가 말한 것과 다르다며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까? 또 확실하게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고 자신할 수도 없다. 답2나 답3으로 말한 것을 답1처럼 쓰는 것은 왜곡이라고 할 수 없다. 정리해서 취지만 기록한 것이니까. 수사관은 왜곡의 경계에 이르지 않는 작은 변형으로 얼마든지 피의자에 대한 인상을 바꿀 수 있다.  조서(調書)란 녹취록과 달리 ‘조사한 사실을 기록한 문서’다. 따라서 말한 그대로 써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수사관이 관찰한 진술자의 행동이나 태도를 쓰는 것도 가능하다. 수사기관이 쓰는 조서에는 진술조서나 피의자신문조서 뿐만 아니라 압수조서나 검증조서도 있는데 기재되는 내용이 진술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조서는 수사관이 경험한 내용을 작성하는 일종의 보고서라고 할 수 있기에 피의자가 말한 모든 것을 그대로 기재할 필요는 없다. 그러다보니 말한 사람의 기억과 진술이 조서를 작성하는 수사관을 거쳐 문자화되는 과정에서 뉘앙스가 조금씩 달라지기도 한다.  조서는 수사관의 개인적 관점과 판단, 의견에 의해 오염될 수 있기 때문에 증거로 사용하기에는 위험하다. 조서 작성 후 진술자에게 읽어보게 하고, 매 장마다 간인하고, 서명날인하게 하였다고 하더라도 다르지 않다. 일부 유명하신 분들 외에는 그렇게 꼼꼼하게 늦은 시간까지 읽어보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 분들도 조서의 트릭에서는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조서에 나의 의도 및 기억이 원래의 그것과 다르게 기재되지 않도록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진술거부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진술거부권은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이므로 누구라도 수사기관에서 이를 행사할 수 있다.  수사기관이 글로 쓴 보고서일 뿐인 조서를 조심해야 하는 이유는 조서의 증거능력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검사가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에 대해 피고인에 의해 법정에서 진술한 내용대로 기재되어 있음이 인정되면(실질적 성립진정) 내용을 부인해도 증거능력이 인정된다. 경찰이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에 대해 피고인이 법정에서 ‘말한 대로 기재되어 있지만 그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고 할 경우(내용 부인)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그래서 경찰에서 자백한 누군가를 기소하기 전에 검찰에서는 경찰 작성 조서와 같은 내용으로 다시 조서를 작성한다고 한다. 그래야 그 자백을 유죄판결의 증거로 사용하기 쉬워지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 - KBS  이런 증거능력의 차이 때문에 자백을 받으려는 검사의 욕구가 경찰보다는 클 것이다. 자백을 받으려는 욕구가 크면 부인하는 상대방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괴롭히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가족들의 계좌나 행적을 표창장까지 모두 조사하고, 사업장의 모든 자료들을 압수수색하고, 친구와 거래 상대방을 뒤져 위법한 무엇 하나라도 건지려 한다. 자신의 괴로움은 물론이고 자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까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현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어진 피의자는 없는 죄도 인정하게 된다. 이 때 어쩔 수 없이 했던 소극적 인정이 조서에는 적극적 인정으로 기재될 수 있다.  피의자신문조서의 증거능력을 인정하는 것은 세계에 유례가 없다고 한다(경향신문, 19. 5. 21). 15년 전 읽은 논문에 의하면 전 세계에서 4개국(한국, 일본, 중동과 북유럽에서 1개씩)만 인정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것은 세계에서 유일무이하다거나 1등을 해도 별로 자랑스럽지 않다.  다행히 패스트트랙으로 12월 3일 국회 본회의에 부의되는 형사소송법 개정안에는 검사작성 피의자신문조서의 증거능력을 경찰작성 피의자신문조서의 증거능력 정도로 약화시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개정되면 수사기관이 피의자 신문과정에서 어떻게든 자백을 받아 조서에 기재하려고 하는 동기가 사라질 것이고, 결백한 사람이 억울하게 유죄판결 받을 가능성도 줄어들 것이다. 2020년에는 꼭 개정된 형사소송법이 시행되길 바란다.
2019-11-20 | hrights | 조회: 456 | 추천: 11
이재환/ 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주무관  지역화폐가 유행이다. 민간 부문에서 공동체 구성원 간 회원제처럼 거래되는 대안화폐로 시작된 국내의 지역화폐가 최근에는 관의 주도로 법정화폐와 교환이 가능한 형태로 크게 확산되고 있다.  지난해까지 70여 곳에서 운영했던 지자체 지역화폐는 올해 현재 160여 곳으로 확산되었다. 확산의 배경에는 소상공 자영업자 살리기 차원의 적극적인 중앙정부 지원이 있다. 지역 내 골목상권과 전통시장 등에서만 사용이 가능한 대신 소비자가 지역화폐를 구매하면 지자체별로 3~11%의 선할인, 캐시백, 포인트 적립 등의 혜택을 제공하는데, 이 인센티브의 상당수를 올해부터 국비로 지원하고 있다.  급속히 확대되고 있는 지역화폐를 바라보는 시각도 점차 다양해지고 있다. 국가 차원의 통화 질서를 교란한다는 다소 공상적인 지적부터 기본소득의 지급 매개로 활용한다면 복지와 지역경제 살리기라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정책적 선택도 나오고 있다.  그 중에서 최근 현실적인 상황에 맞부딪치고 있는 지역화폐 관련 논란거리가 있다. 바로 ‘혈세 퍼주기’이다. 최근에 터져 나오는 지역화폐 관련 이슈를 보면 일부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다. 더 나아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표현을 정말 오랜만에, 맞춤형으로 떠올리게 한다.  이제 김영민 교수식으로 보다 근본적으로 물어야 한다. 지역화폐란 무엇인가?  지역화폐의 대전제는 이렇다.  1. 지역 내 소비의 부가 외부로 유출되는 역외유출을 막아 지역에 돈이 돌게 하여 순환경제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함이다.  2. 지역을 생각하는 협력적 소비가 지역공공체성 강화로 이어져 지역의 사회적 자본을 키운다.  2번이 전통적인 지역화폐(대안화폐)가 견지하는 공동체 활성화 및 자급자족 지향과 궤를 같이한다면, 1번은 경제적 효과에 초점을 맞춰 최근 특히 우리나라 지자체에서 폭발적으로 확산되는 지향점이다.  지역화폐는 바야흐로 양적경쟁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자치단체장의 지시가 떨어지면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이 ‘발행규모 000억 원’ 부터 걸고 나선다. 그러기위해선 쉽고 빠른 도입에 초점이 맞춰질 수밖에 없다.  지역화폐라고 하면 명칭 그대로 지역의 특성을 면밀히 파악하고 지역 주민의 이해와 요구가 충분히 모아진 후 도입이 이뤄져도 성공여부를 장담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다이내믹 코리아의 진가는 지역화폐 도입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발행액에 초점이 맞춰진 실적 올리기 방법은 이제 표준화모델이 되어가고 있다. 묘수라고 할 것도 없다. 구매 인센티브의 폭을 늘릴 수 있는 만큼 늘리는 것이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전국적으로 지자체 지역화폐의 구매 시 혜택은 3~6% 선할인이 평균적이었다. 혜택을 받는 기준도 1인당 월 30~50만원 수준이었고, 법인은 구매만 가능하고 할인은 못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과거 상품권 유통시장에서 벌어졌던 각종 폐해를 극복하고 지자체 예산으로 지급되는 인센티브가 과도한 재정투입으로 이어져 지역화폐의 지속가능성을 저해시키는 것을 경계한 기준이 이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중앙정부의 지원을 지렛대삼아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건 지자체의 지역화폐가 나오기 시작했다. (굳이 ‘지자체’ 지역화폐라고 강조하는 이유는 수 십 년 전부터 공동체형 지역대안화폐 활동을 벌여온 민간영역 분들의 수고가 떠올라서다. 그 분들이 최근 느끼는 자괴감도 함께 떠올려진다) 이어 발행(판매) 실적이 경쟁적으로 발표된다.  그런데 슬슬 이구동성으로 묻기 시작한다. 중앙정부의 지원이 언제까지 갈 것인가? 지원이 끝난 후에도 소비자 혜택을 유지할 수 있는가?  답은 나와 있다. 공짜 점심은 계속 될 수 없다.  앞서 1, 2의 대전제를 수용하기 위해서는 사용자의 신뢰 획득이 관건이다. 통화의 기본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그런데 최근 일부 지자체에서 파격적인 인센티브 도입 이후 재정의 문제로 혜택범위가 급감하자마자 사용자들이 보여준 반응은 대체로 ‘혜택이 좋아 잘 썼는데 이제 빠염(bye)~’이 주류다. 일부는 ‘이제 혜택 좀 보려고 했는데 벌써? 니들이 그렇지~’ 이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지역화폐는 불편한 돈이다. 온라인쇼핑몰에서도 백화점에서도 대형마트에서도 스타벅스에서도 못 쓰는 돈이다. 동네 골목가게나 전통시장, 마을기업이나 협동조합에서 쓰는 돈이다. 그래서 인센티브를 준다. 촉진의 역할이다.  이 인센티브는 지역화폐 활성화를 위한 중요한 요인이다. 예산을 들여서라도 마중물 효과를 보기 위해 필요하다. 전통시장현대화사업으로 전국의 시장에서 어기영차 지붕을 올렸지만 손님이 찾아왔다는 이야기는 듣기 힘들다. 하지만 지역화폐는 매우 직접적인 효과가 나타나는 소프트웨어다. 골목상권 살리기를 위해 그간 무수히 쏟아 부은 예산보다 훨씬 효과적인 재정정책이 지역화폐 인센티브 예산이다.  그렇다고 꼬리가 몸통을 흔들어선 안 된다. 인센티브가 지역화폐 사용의 주목적이 되어선 안 된다. 혜택이 떨어지면 쉽게 떠나고 다시 돌아오는 것도 힘들다. 이것이 지속가능성과 관련한 지역화폐의 더 큰 위기징후이다.  지역화폐의 존재이유는 내가 쓰는 이 돈이 우리 집 가계에도 좋고 동네경제와 지역공동체를 살릴 수 있다는 인식이 함께 공동체에 쌓일 때 유효하다. 왜 지역화폐를 쓰냐는 질문에 할인이 가장 큰 이유가 된다면 지역화폐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지역경제 활성화는 지역화폐의 중간 목표이다. 궁극적인 지향은 공동체를 강화하고 사회적 자본을 쌓는 수단으로 지역화폐가 활용되는 것이다. 이것이 진짜 지역화폐의 지속가능성이며 경쟁력이다.  한편에서는 인센티브를 강조하다 삐끗했지만 다른 부가서비스를 강화해 다시 소비자와 지역민들의 발길을 돌려세우겠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건투를 빌면서도 ‘꼬리가 몸통을 흔들어서도 안 되겠지만 사실 꼬리로 몸통을 흔들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부가서비스가 아무리 좋더라도 본 상품이 좋아야 손님이 온다.  어쨌건 다시 김영민 교수식 표현을 빌자면, “테이블을 당수로 쪼개고 목젖을 끄집어내 줄넘기를 하면서…” 까지는 아니더라도 지역화폐에 대한 진중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싶다. 자칫하다간 댕댕이에게 죽을 먹일 수도 있겠다 싶어서다. 먼저 논의할 지점은 ‘왜 지역화폐를 해야 하나?’겠다.
2019-11-13 | hrights | 조회: 53 | 추천: 1
윤영전/ (사)평화통일연대 이사장  내 나고 자란 고향의 효골에는 ‘잇고개’가 마치 관문처럼 있다. 약간 구불구불한 이 고개를 넘어 학교와 시내를 오갔기에 내게는 만남과 이별, 그리고 기쁨과 안타까움이 교차하는 고개였다. 특히 내 두 할머니와의 아련한 추억이 담겨 있는 고개이기도 하다.  두 할머니는 친가와 양가 사이의 동서 간이었다. 양할머니가 18살에 갓 시집을 오셨는데, 양할아버지가 나의 친할머니 친정의 지붕 일을 하시다가 그만 낙상하셔서 병을 얻어 두 달을 사시다가 운명하셨다. 신혼의 단꿈도 접은 양할머니는 자식도 없이 청상(靑孀) 과부가 되시었다.  집안 어른들은 양할머니가 홀로 사시는 모습을 안타까워했다. 양반가의 체면에 재가를 권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희생을 하며 살아 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양할머니는 15년을 당신의 친정과 시댁을 오가면서 남편의 묘소를 돌보고 제사를 지내며 망부(亡夫)에 대한 도리를 다하였다. 끝내 개가를 하지 않고 수절한 할머니에게 문중은 당신의 시아주버니의 둘째 아들인 조카를 양자로 결정하였다.  할머니는 긴 세월을 기다려 양아들을 맞이했다. 아들을 서당에 보내고 기르며, 바느질과 길쌈을 하여 모은 돈으로 논밭을 사들여 살림을 늘려가니 사는 보람을 가질 수 있었다. 아들이 서당에서 공부를 잘해, 군 백일장에 나갔는데 ‘국화’라는 제목으로 장원하여 자식 둔 재미를 보셨다. 그 아들이 열아홉 살이 되자 혼인을 시키고 그렇게 바라던 손자들을 손수 받으시면서 마치 자신이 낳은 자식처럼 총애를 하시었다. 손자들이 어머니 젖을 물리고 나면 바로 양할머니의 차지가 되어, 손자 키우는 재미에 세월이 가는 줄을 모르셨다.  할머니가 홀로 된 처음에는 남편의 죽음이 나의 친할머니 때문이라고 원망도 했었지만, 대신 귀한 아들을 양자로 받아 고마운 마음이 되었고, 더구나 손자를 셋이나 낳고 큰 손자는 똑똑하고 공부도 잘해 군청에 근무해 기쁘기만 했다. 두 할머니는 서로에게 섭섭함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고마움과 기쁨을 안겨 언제나 다정한 모습으로 큰집과 작은집을 왕래하시었다.  이런 두 할머니를 나는 어려서부터 존경했다. 손자들은 무엇이든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먼저 양할머니, 그 다음이 친할머니였다. 친할머니는 핏줄을 이어 준 할머니요, 양할머니는 나를 헌신적으로 길러주신 분이지만 정(情)은 길러준 양할머니에게 먼저 갔다. 동생에게 어머니의 젖을 빼앗긴 나는 나오지도 않는 할머니의 젖을 빠느라 퍽도 귀찮게 하던 손자였다.  여느 집안에나 있는 일이지만, 우리 집안도 지금까지 형제간에 알게 모르게 시기와 경쟁을 했었다. 처음 경쟁은 집이었다. 큰댁이 넓은 집터에 집을 지어 살았는데, 양할머니와 어머니는 샘이 나셨다. “우리도 큰댁과 똑같은 집을 짓고 살자”며 큰 결의를 하듯 말씀을 하시었다. 그러고는 열심히 모은 돈으로 집터를 사고, 큰댁을 지은 목수에게 똑같이 일을 맡겨 새 집으로 이사를 했다.  이리 이사한 다음에는 자식번성 경쟁이었다. 아들이 많아야 자식 농사에 성공한 것처럼 여기던 그 때에 두 할머니의 보이지 않는 경쟁의식을 엿볼 수가 있었다. 세월이 가면서 큰집과 우리집 손자녀들이 무려 17명이나 되어 두 할머니는 든든하고 기쁘게 생각하셨다.  그러나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듯이, 양할머니에게 비운이 몰려왔다. 스물두 살의 큰손자가 1949년 3월, 재판도 없이 죽임을 당해 아픔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이어서 둘째 손자가 6․25한국전쟁에 참전하여 부상을 입었다. 그리고 셋째인 내가 집안에 알리지도 않고 월남전에 지원하여 두 할머니는 가슴 졸이며 15개월 동안 정화수를 떠놓고 무운장구를 빌어야 했었다.  어느 날 효골 집에 신문사 기자가 한국군월남 참전을 취재하러 왔었다. ‘혹 손자에게 불행한 소식이 있어서 전하려 온 게 아닌가?’ 깜짝 놀라신 할머니의 모습이 내 사진과 함께 신문사회면에 나기도 했다. 내가 두 할머니의 간절한 기도로 월남에서 무사히 귀국하여 고향에 돌아올 때도, 두 할머니는 잇고개에서 몇 시간을 기다리셨다. 내가 두 할머니께 엎드려 큰절을 올리니 덩실덩실 춤을 추시며 온 동네를 다니며 “우리 손자가 사지(死地)에서 살아왔다”며 기뻐하셨다. 사진 출처 - 구글  그 뒤 내가 고향을 떠날 때마다 잇고개를 넘으면, 두 할머니는 이제 가면 언제 오느냐며 아쉬운 작별을 하시곤 했었다. 내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한없이 바라보고 계셨다. 나는 그럴 때마다 두 할머니들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마음이 아프기만 했다. 그로부터 수 년 후 이미 팔순을 넘기신 두 할머니는, 잠시 고향을 찾은 손자에게 “서울이 좋다고 하던데 우리도 데려가면 안 되느냐?”고 물으셨다. 그때 서울에는 두 할머니의 손자녀가 살고 있었기에 서울 한 번 가 보는 게 소원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그때는 감히 노인들을 서울에 모실 수가 없었다. 기차를 무려 12시간이나 타야 하는 먼 길이었다. 지금 같으면 자동차로 몇 시간이면 되고 서울 이곳저곳을 구경시켜 드릴 수 있었을 터인데 두 할머니의 소원을 들어 드리지 못한 게 지금도 큰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문중에서는 양할머니가 65년을 개가하지 않고 수절하며 양반가의 체면을 살렸다고 열부(烈婦) 표창을 주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도 두 어버이를 지극 정성으로 봉양한 효행으로 효자·효부상을 받으셨고 10년 전에는 나와 아내에게도 두 할머니와 부모님을 잘 모셨다하여 효자상과 효부상을 주었다. 한 집안에서 삼대(三代)가 효열(孝烈) 표창을 받은 일은 백 년만인데, 백 년 전에는 고조부모가 효열상을 받은 일이 있었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몇 년 전 “할머니의 소원(유언)을 말씀해 달라”는 나의 요구에 “소원은 무슨 소원이냐 ”하시고는 도선산 앞에 세워진 고조부모의 효열비(孝烈碑)를 눈여겨보시면서 당신이 생각하신 속마음을 말씀하셨다.  “비록 두 달도 함께 살지 못해 정도 들지 않았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할아버지의 묘와 쌍봉분(雙封墳)으로 하고, 여유가 있으면 표식이나 해주면 좋겠다.”는 소박하고 진지한 말씀이었다.  나는 할머니의 말씀을 깊이 새기고 실천을 다짐하면서, 8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신 지 10년째 되던 해 도선산 자락에 쌍봉분을 만들고 비문을 짓고 내가 직접 글씨를 써서 묘비를 세워 드렸다. 양할머니를 당당히 우리 후손들에게 말할 수 있었고 손자로서는 응당 해드리는 게 도리였다. 그리고 이듬해 생가 할머니에게도 묘비를 세워 드려 손자녀들의 정성을 올렸다.  요즘은 효열 정신이 구시대적 사고라고 치부해 버린다. 나만 잘살면 그만이고 눈앞에 보이는 순간의 만족이 최고라는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사고가 만연하다. 효열 정신이 퇴색하니 부부의 도리도 무너져 이혼율이 하늘을 찌를 듯 높아가고 있는 것 같다. 부모 형제간에도 갈등이 늘어만 간다. 이 모두가 효열에 대한 정신이 점점 사라져 가서는 아닐지 하는 마음이 나만의 생각일까!  내가 이제 할머니들의 나이에 가까이 들어 느끼는 감정은 시대적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두 할머니의 순수하고 정감이 넘치는 그 모습들이 한없이 그리워진다는 것이다. 오직 희생정신으로 자식 사랑과 손자 사랑, 그리고 우애와 양보의 미덕을 끊임없이 몸소 보여준 두 할머니들이었다.  나는 가끔 고향을 찾아서 잇고개에서 두 할머니가가 주신 정다운 내리사랑 모습을 떠올린다. 그저 손자가 무탈하게 잘되기만을 바라시던 두 할머니의 사랑이 한없이 그리워지기만 한다. *윤영전(尹永典) 소설가. 수필가. 서예초대작가. 칼럼니스트 소설집(못다핀 꽃) 수필집(도라산의 봄. 강물은 흐른다) 에세이집(평화, 아름다운 말) 고희문집(인연, 아름다운 만남) 희수기념문집. 서초문학상, 국회통일상, 서예초대작가 한국작가회의 소설가. 한국문인협회 수필가. 평통서문예원 원장. 산영수필문학회장 역임 효열상(윤씨문중) 근묵회 회장.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사)평화통일연대 이사장.
2019-11-06 | hrights | 조회: 69 | 추천: 2
권용선/ 수유너머 104 연구원  그는 말했다. “예전에 정치 저널리스트라는 명칭은 그로티우스, 푸펜도르흐, 보댕, 몽테스키외, 블랙스톤, 벤담, 마블리, 사바리, 아담 스미스, 루소와 같은 위대한 저술가들에게 부여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정치에 관계하고 있는 모든 어설픈 저술가들을 지칭하고 있다. 뛰어난 사상가이자, 예언자이며, 사상적인 선지자였던 정치 저널리스트가 이제는 현실의 바람에 흔들리는 깃대가 되어버렸다.”(발자크, 「저널리즘」 중에서. 한국어 번역본의 제목은 「기자의 본성에 관한 보고」) 그의 시대에 신문기자는 모두 정치 저널리스트에 속했다. 이들 조직은 “기사는 한 문장도 쓰지 않으며 아무 것도 제대로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모든 일에 관여하는” 사장, 주필, 사주, 편집장과 무대 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테너가수처럼 행동하는 논설위원, 연극의 조연과 같은 역할을 담당하는 전문기자, 편집장이나 사주의 명령에 따라 ‘자크의 요리사’처럼 짧은 기사들을 이리저리 오려붙이는 편집기자, 의원들을 성공시키거나 명성을 실추시키며 정치드라마를 연출하는 국회 출입기자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구독자를 잡기 위해 각양각색의 말들을 쉴 새 없이 쏟아내던 크고 작은 사이즈의 신문, 잡지, 팸플릿들, “먼저 때려라! 변명은 나중에 하면 된다.”는 구호를 공유했던 정치 저널리즘의 행동양식, 발자크의 눈에 비친 루이 필립 시대의 저널리즘이 존재하는 방식이었다. 몇 가지 세부만 살짝 바꾼다면, 같은 방식으로 우리시대의 저널리즘에 대해 풍자하거나 냉소하는 일도 어렵지 않아 보인다.  법무부 장관 자리를 둘러싸고 온 나라가 들끓었던 지난 시간 동안 ‘검찰개혁’이라는 구호로 수렴된 ‘사법개혁’의 절박함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한국사회가 지닌 온갖 ‘개혁할 거리들’을 우리 앞에 펼쳐 놓았다. 너무 많은 이슈들이 한꺼번에 장관후보자를 매개로 쏟아져 나왔고, 속보와 단독 타이틀을 단 기사들의 홍수 속에서 정작 중요한 것과 사소한 것, 법적 판단의 층위와 도덕적 기대의 차원, 사실과 전언과 정황은 구분되지 않았다. 분초를 다투며 쏟아지는 기사들 대부분은 사건 (혹은 상황)을 이해하고 판단할 시간을 독자들에게 배려하지 않았고, 어느 순간 사람들은 선결정된 자신의 입장을 지지할 기사들을 취합함으로써 각자의 방식으로 사실과 정의의 서사를 스스로 구성하기 시작했다. 미디어를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미디어가 되거나 ‘다른’ 미디어의 목소리를 찾기도 했다. 전선은 복잡해졌고, 평소라면 선명한 대립의 입장에 섰던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적어도 언어적 차원에서는 그랬다. 돌이켜보면, 아무 것도 확인된 것은 없었고, 결정된 것도 없었지만, 검찰과 언론의 공조로 만들어진 프레임 속에서, 유죄추정의 분위기는 빠르게 확산되었다. 프레임은 법적인 판단과 근거 이전에 도덕성의 문제를 제기하는 식으로 짜였고, 여기에 장관 후보의 정무 감각이나 업무 수행능력에 대한 토론과 판단은 주변화 되었다. “고양이를 죽이는 것은 팩트가 아닌 뉘앙스”(권석천, 「검찰청의 편집자들」 중에서)라는 비유는 단순한 비유 이상이었던 셈이다. 사진 출처 - freepik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청문회가 열리기 전에 있었던 기자들과 장관 후보의 간담회, 비슷한 질문들에 대한 비슷한 답변과 사과가 다람쥐 쳇바퀴처럼 장시간 반복되었던 기이한 풍경이 여전히 씁쓸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기자들 누구도 현장의 분위기나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주목하지 않았고,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각자의 스마트 폰에 적혀 있는 질문들을 ‘읽고’ 있었다. 누가 저들에게 질문을 지시하는 걸까, 모든 언론사들이 간담회장을 수습기자들의 필드워크 장소로 활용하기로 약속이나 한 걸까, 누구든 핵심을 찌르는 묵직한 질문 하나쯤 던져줄 때가 되지 않았나. 이런 생각이 두서없이 떠올랐었다. 기자들은 당당해보이지도, 날렵해보이지도, 영리해보이지도, 사려 깊어보이지도 않았다. 저들은 왜 기자가 되고 싶었을까.  일전에 만났던 한 주간지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예전엔 그래도 내가 쓴 기사랑 타사 기자들이 쓴 걸 크로스 체킹할 시간이 약간이라도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불가능해요. 속보, 단독 기사들이 매분매초 튀어나온다고요. 머뭇거리는 순간 도태될지도 몰라요. 물론, 아주 가끔 정말 제대로 된 기사들이 나오기도 해요. 하지만 포털 메인에는 이런 양질의 기사들이 노출될 확률이 제로예요. 절대로 노출되지 않아요.” 사정이 이러니 기자들만 탓할 수도 없다. 광고주를 의식하며 감각적인 제목으로 클릭수를 늘리려는 언론의 욕망과 가벼운 내용으로 최대치의 정보를 얻으려는 유저들의 이해가 맞물려 돌아가는 디지털 환경은 이제 저널리즘 환경의 상수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뉴욕타임즈의 발행인 설즈버거의 말처럼, 포털 사이트가 플랫폼이 되는 언론 환경은 뉴스를 저널리즘이 아니라 단순 콘텐츠 수준으로 전락시킬 뿐이다. 우리는 이제 지식과 통찰과 결기가 느껴지는 제대로 된 뉴스들 만날 수 없게 되어버린 걸까?  지금으로부터 약 20여 년 전, 언론인 리영희 선생은 동료, 후배 기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괴로움’이 없어요. 어려운 시대 특히 변혁의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들인 기자들이 괴로워 할 줄 모릅니다. 그러다보니 공부를 하지 않습니다. 주요한 정치적 국면마다 보도 내용과 전망, 예측이 수천 번, 수만 번 틀렸어도 반성할 줄 모릅니다.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핵심은 어떤 것인지 천착하려는 각고의 노력과 의식이 없습니다. 이익집단의 파수병으로 안주하려는 경향이 너무 강합니다. 자기가 서있는 자리가 그야말로 소중하다고 생각한다면 그에 걸 맞는 인내와 각오, 그리고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기획대담; 리영희-김주언」<미디어오늘> 1997. 2. 3) 발자크의 시대로부터 180여 년, 리영희 선생이 활동했던 ‘검열’의 군사독재 시절로부터 수십여 년, 왜 저널리즘에 대한 그들의 걱정이 여전히 유효하게 느껴지는 걸까. 마음이 무겁다.
2019-10-23 | hrights | 조회: 172 | 추천: 7
홍미정/ 단국대 중동학과 조교수 □ 예멘 내전 구도  2015년 3월 이후 계속되는 예멘 내전은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미국과 유럽의 자금지원을 받는 ACLED 발표에 따르면, 2015년 3월부터 2019년 6월 중순까지 민간인들과 전투원들을 합쳐 9만 1천 6백 명의 예멘인들이 사망했다. 유엔 관계자에 따르면 예멘의 인권 상황은 세계 최악이며, 3천만 명에 가까운 예멘 주민의 3분의 2인 2천만 명이 굶주리고 있다.  사우디가 주도하는 아랍연합과 북서부 예멘에 기반을 둔 후티의 5년에 가까운 분쟁이 국제적인 관심을 끌고 있다. 2012년 2월 21일 압드라보 만수르 하디는 단독후보로 출마한 대통령 선거에서 2년간의 과도기간 동안 예멘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임기 만료 후에도 대통령직을 계속 유지하였다. 결국 2014년 9월, 후티 반군이 수도 사나를 점령했다. 2015년 1월 22일, 후티는 하디대통령을 사임시켜 가택 연금하고, 혁명위원회를 구성하여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게 만들었다. 2월 하디는 아덴으로 탈출해 사임을 철회하고, 후티의 정권 탈취를 맹비난하였다. 2015년 3월 25일 후티가 아덴을 공격하자, 하디는 보트를 타고 사우디로 탈출하였다. 이 때 사우디가 아랍연합군을 조직하여 하디정부를 복귀시키고, 사나와 주요 도시들로부터 후티 전사들을 축출하기 위하여 군사공격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예멘 내전을 사우디가 주도하는 아랍연합 대 후티의 구조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실제 내전 상황은 조금 더 복잡하다. 하드라마우트에 기반을 두고 활동하는 아라비아반도의 알카에다와 예멘 ISIL도 서로 경쟁하면서, 영토 장악을 위하여 후티 혹은 하디 정부 세력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다. 알카에다는 사우디와 예멘의 북부경계-중부내륙-남부해안가를 남북으로 잇는 상당한 영토를 장악하고 있다.  특히 주목할 것은 2019년 8월 남부예멘에서 사우디가 후원하는 하디정부와 UAE가 후원하는 남부과도위원회 사이에서 오래 계속된 긴장이 폭발하면서, 사우디와 UAE의 지역 동맹들 사이에서 전투가 발발했다는 것이다. UAE는 사우디가 주도하는 아랍연합군의 중요한 일원이기도하다. 전통적으로 매우 강력한 역내 동맹으로 알려진 사우디와 UAE 사이에서 진행되는, 아덴을 포함한 남부예멘 지배권 투쟁은, 역내 정치 변동 방향을 예측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할 것이다. 결국 중동 역내에서 사우디가 약화되고, UAE가 부상할 것인가? □ 남부과도위원회/하디정부의 분쟁  2019년 8월 15일 UAE가 지원하는 예멘의 남부과도위원회는 남부예멘의 독립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로써 남부과도위원회의 목표는 분명해졌다. 그것은 1967-1990년까지 남부예멘지역에 존재했던 ‘예멘 인민민주공화국 영역(남예멘)’에 ‘독립 연방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남부독립 국가건설을 반대하는 하디정부와 남부과도위원회 사이의 투쟁이 격화되었다.  이제 남부과도위원회의 주요한 적은, 주로 서북부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후티 반군이라기보다는, 2015년 후티에게 축출되어 아덴에 통치기반을 세우고, 사우디에 망명 중인 하디정부다.  사우디와 UAE는 명목상으로는 사나와 서북부 지역에서 후티를 축출하고,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하디정부를 복원시키기 위하여 2015년 결성된 아랍연합군의 동맹국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사우디와 UAE는 남부 분리 독립 문제를 놓고 서로 대립하고 있다. 최근 하디정부는 아랍연합군에서 UAE를 배제시킬 것을 사우디에게 요구하였다.  올해 8월 초부터 아덴에서 사우디가 지원하는 친 하디정부 세력들과 UAE가 지원하는 남부과도위원회세력들이 예멘 남부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전투를 벌이고 있다. 이 전투는 8월 1일 아덴 근처, 남부과도위원회 제1지원 여단장 무니르 알 야피에 대한 미사일 암살 테러 공격으로 촉발되었다. 남부과도위원회에 소속된 UAE 지원군과 사우디의 지원을 받는 하디정부에 충성하는 세력 간에 나흘간의 전투가 벌어졌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후티운동에 맞서 협력하는 아랍연합 소속인 사우디와 UAE 사이에 균열이 명백하게 드러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게다가 후티가 이 미사일 테러 공격을 자행했다고 즉시 밝혔으나, 남부과도위원회는 이 공격의 책임을 하디정부에게 돌렸다. 8월 6일 기자회견에서 남부과도위원회 부의장 하니 빈 브레이크는 ‘하디정부 및 무슬림형제단과 연계된 이슬라흐 당이 협력하여 아덴의 지배권을 완전히 장악하려는 계획의 일환으로 이번 테러 공격을 자행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이제 남부과도위원회가 하디정부를 아덴에서 추방할 명분이 분명해졌다. 흥미로운 것은 후티가 스스로 테러 행위를 자행했다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빈 브레이크가 끝내 이 테러 공격에 대해 후티를 비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슬라흐 당은 1990년 사우디의 자금지원을 받아 창설된 정치 단체로 하시드부족 연맹 및 무슬림형제단과 연계되어 있다. 하시드부족 연맹은 과거 살레 대통령 통치 시절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부족으로, 북부지역에 기반을 두었다. 빈 브레이크가 하디정부와 이슬라흐 당을 연계해서 책임을 물은 이유는 하디 정부의 부통령이자 정부군 지휘관인 알리 모신 알 아흐마르 장군이 하시드 부족연맹 출신으로 이슬라흐 당의 창설 멤버이며, 북부지역에 위치한 마레브와 알 자우프 소재 이슬라흐 당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디 정부군은 알 아흐마르 가문이 속한 북부 하시드 부족연맹과 이슬람주의자 세력인 이슬라흐 당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활동한다. 이러한 하디정부군의 특성 때문에 남부주민들은 하디대통령이 남부지역 아비얀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북부지역 이익을 대변하는 인물로 간주한다.  반면에 남부지역 이익을 대변한다는 과도국가위원회 지도부에서는 남부지역 라히즈와 알 달레 출신들이 영향력을 발휘한다. 사실 남부의 분리추구 의식은 1986년, 1994년의 주요한 두 번의 예멘내전에서 창출되고, 전임 통치자인 살레의 통치기간 동안에 실행된 남부 차별 정책으로 인해서 강화되어 남부지역에 뿌리깊이 존재한다. 남부분리주의자 군벌을 주도하는 세력은 주로 무장한 살라피, 사회주의자 및 예멘 인민민주공화국 재건을 추구하는 세력들이다. 또 지방에서 활동하는 과도국가위원회 연대 세력은 지역기반으로 지방 출신 전사들을 집결시키고, 각 지방에서 하디정부군과의 전투하고 있다. □ 남부과도위원회의 전투력 증강  2019년 8월 10일 하디정부의 내무부장관 아흐마드 마이사리는 “UAE는 남부과도위원회가 하디정부의 수도인 아덴을 장악하도록 도왔다. UAE는 남부과도위원회에게 400대 이상의 장갑차와 쿠데타 민병대를 지원했으며, 수천 명의 용병들을 고용하여 아덴 전투에 참가시켰다.”고 주장하면서 UAE를 비난했다. 이 전투에서 40명이 사망하고, 260명이 부상당했다.  2019년 8월 1일, 무니르 알 야피에 대한 암살 테러공격 직후, 남부과도위원회 세력들은 아덴과 아덴 주변 지역들 라히즈, 아비얀, 타이즈 등의 통제권을 장악하였다. 8월 9일~10일 라히즈 소재 하디정부군들, 즉 제4 지구 사령부와 헌병사령부가 남부과도위원회에 합류하였고 내무부 산하 부대들, 즉 라히즈 경찰청과 아덴, 라히즈, 아비얀의 특수부대도 남부과도위원회의 편에 섰다. 이로써 남부과도위원회가 아덴 주변 지역 하디정부군들을 흡수하면서 승기를 잡았다.  하디정부군에 맞서는 전투를 주도하는 남부과도위원회의 핵심부대인 보안벨트군은 야피 부족연맹으로부터 병사 대부분을 충원하며 아덴, 아비얀, 라히즈, 달레에 배치된다. 이외에 주요 지역에 기반을 둔 사브와니 정예부대와 하드라미 정예부대가 남부과도위원회 연계 세력들로 활동한다. 사브와니 정예부대는 아덴 동쪽 385㎞에 위치하고, 석유가 풍부하게 매장된 사브와 출신의 병사들로, 하드라미 정예부대는 하드라마우트 출신의 병사들로 구성된 지방군대다. 보안벨트, 사브와니 정예부대와 하드라미 정예부대는 남부 분리 독립을 추구하는 남부과도위원회의 중추세력들이며, 부족과 지역을 기반으로 전사들을 집결시키고, 각기 해당지역에서 전투에 참가한다. 따라서 이들 부대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하나의 지휘체계를 갖고 있지 않다. 8월 말경에 남부과도위원회가 사브와 지역 장악을 시도하면서, 하디정부군과 사브와니 정예부대 사이에 일진일퇴의 격전이 발발하였다.  사실 보안벨트, 사브와니 정예부대, 하드라미 정예부대 등은 2016년 후티 반군의 활동을 막아내기 위한 아랍연합군의 일부로 UAE의 후원을 받아 남부에서 창설되었다. 그러나 2017년 5월 하디정부로부터 분리 독립을 추구하는 남부과도위원회가 창설되면서 이 부대들은 남부과도위원회의 주력군이 되었고, 하디정부에 대항하는 독립 투쟁 전선에서 활약하게 되었다. □ 남부과도위원회의 독립국가 건설 가능성  남부가 통합된 예멘공화국으로부터 분리 독립하려는 움직임은 남부가 분리 독립을 요구하면서 촉발된 1994년 내전 이후 계속 되었다. 긴장이 고조되면서 2007년 남부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파벌들과 인물들이 이끄는 느슨한 연합으로 준군사조직인 남부운동이 출현하였다. 남부운동은 예멘공화국으로부터 ‘남부 탈퇴’와, 예멘공화국 창립 이전의 독립국가인 ‘예멘 인민민주공화국’으로의 복귀를 요구했다. 2017년 남부운동은 전임 아덴주지사 아이다루스 알 주바이디가 이끄는 남부과도위원회를 설립하였다. UAE와 동맹을 맺은 남부의 정치인들, 부족지도자들, 군부인물들로 구성된 남부과도위원회는 남부운동의 강력한 분리 독립 움직임을 계승하였다.  2019년 8월 15일, 남부과도위원회는 “오늘날 남부주민들의 승리로 인해 새로운 국면의 역사적인 순간을 맞이했다. 1994년 내전이후, 북부가 남부를 점령하여 25년간 통치하는 동안 남부 주민들의 투쟁은 엄청나고, 희생으로 가득 찼다. 이제 남부 독립 연방 국가를 회복시키려는 남부 주민들의 목표는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다.”는 정치 선언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UAE가 지원하는 남부과도위원회에 맞서 하디정부를 지원하는 사우디의 대응은 매우 미온적인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9월 21일 사우디 정부는 리야드에서 망명중인 하디정부의 고문인 무타히르 아드난에게 사우디를 떠나도록 요구하였다. 그 이유는 ‘무타히르 아드난이 아랍연합을 비난하면서, 아랍연합이 남부과도위원회 세력들의 아덴 점령을 지원한 UAE를 응징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우디는 예멘 문제로 UAE와의 불화가 심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 같다.  사우디와 UAE는 중동 역내에서 군사적으로나 외교적으로 한편임에도 불구하고, 예멘 내전에서 양국의 이해관계는 결코 동일하지 않다. 외견상 사우디나 UAE 양 측은 북부지역을 장악한 후티에 맞서 가능한 한 협력관계를 유지하면서, 남부지역에서는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미국은 예멘 전쟁을 끝내기 위하여 후티와 대화를 시도하는 반면, 남부 예멘에서 사우디와 UAE 사이에 놓인 불화에 적극 개입하여 해결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이러한 미국의 정책은 예멘에서 사우디의 영향력 약화로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남부예멘에서는 사우디가 UAE에게 밀리고 있는 형국이다. 미국에게는 사우디보다는 UAE가 예멘에서 영향력을 확보하는 것이 중동 역내정책을 조정하는데 유리한 것처럼 보인다. 이로 인해서 남부 예멘에서는 사우디가 후원하는 하디정부가 더욱 약화되고, UAE가 후원하는 남부과도위원회의 영향력이 한층 강화되면서 남부독립국가 건설을 이끌 것으로 보인다.
2019-10-08 | hrights | 조회: 227 | 추천: 2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대표  국가의 구성요소를 주권, 인구, 영토로 보는 것이 상례다. 이 중 핵심 요소는 주권이다. 주권이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주권에서 지배를 뺄 수는 없다. 지배는 근본적으로 신체의 자발성에 제약을 가하는 것이다. 현실에서 실현되는 자유는 신체의 자발성을 근거로 해서 이루어진다. 지배와 자유가 대립하는 이유다.  민주주의 국가의 주권은 기본적으로 모두가 모두를 지배하고, 모두가 모두에 의해 지배받는 데서 성립한다. 달리 말하면, 지배받는 인민이 지배하는 것이 민주주의다. 민주주의의 발상지인 그리스 아테네에서 민주주의를 지지했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민은 지배할 줄도 알고 지배받을 줄도 아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민주주의 국가에 사는 사람은 평소에 지배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해서 실행에 옮길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그와 동시에 그는 평소에 지배받아야 한다는 의무가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해서 늘 실행에 옮기고 있어야 한다. 미리 말하자면, 이같이 지배의 권리와 피지배의 의무를 정확하게 인식해서 균형을 잡고자 하는 마음가짐이 정치의식이다.  그런데 누구나 외부의 강압은 물론이고 간섭조차 배제한 상태에서 자신의 신체를 자발적으로 움직이고자 하는 타고난 욕망을 지니고 있다. 말하자면, 누구나 지배받지 않으려는 욕망을 타고나는 것이다. 그 바탕은 생명이다. 생명은 무제약적인 본능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생명의 무제약적인 본능이 충돌을 일으키면 근대철학자 홉스가 말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이 일어난다. 이를 극복하여 가능한 한 모두가 평화 속에서 복지를 누리고자 형성하는 것이 국가다. 따라서, 지배받지 않고 지배하기만 하려는 사람이나 지배하지 않고 지배받기만 하려는 사람은 국가의 일원으로서 자격이 없다.  국가가 국가로서 모든 국민에게 권위를 가질 수 있는 바탕은 원칙상 서로가 서로에 의해 지배하고 지배받기로 한 공공의 계약이다. 공공의 계약이 현실화된 것이 법이다. 법은 지배의 권리와 피지배의 의무간의 균형 잡힌 동시성을 바탕으로 국민의 사회적인 행동이 갖는 정당성과 부당성을 규정한다. 이러한 법 앞에서 예외가 있어서도 안 되고 불평등이 있어서도 안 된다.  현실적으로 국민의 평화와 복지를 위해 누군가가 법을 제정해야 하고 누군가가 법에 따라 국가의 일을 집행해야 하고, 또 누군가는 법 위반을 감시하고 처벌해야 한다. 즉 입법과 행정 및 사법을 담당할 사람들을 정해야 한다. 이들은 모든 국민이 가지는 지배의 권리를 위임받아 그 권한 내에서 권력을 행사한다. 이들에게서 지배할 권리와 지배받을 의무는 직접적이다. 그 반면,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국민은 평소 지배할 권리는 간접적으로 행사하고, 지배받을 의무는 직접 지켜야 한다.   이러한 직간접 권리 간의 불균형에 따라, 지배할 권리를 직접 발휘하는 소수가 지배할 권리를 간접적으로 발휘하는 대다수의 국민을 오로지 지배받을 의무를 지닐 뿐 지배할 권리를 갖지 않는 것처럼 착각할 수가 있다. 이 문제가 드러날 가능성이 높은 영역이 사법 영역이다. 사법적인 권력을 지닌 소수는 임시로 선출된 국민의 대표가 아니라, 저 자신의 능력으로 그러한 권력을 소유한 것으로 자타에 의해 인정을 받기 때문이다.  법은 국민의 행동을 대상으로 일치와 위반을 겨냥한다. 하지만 사법 권력은 근본적으로 국민의 행동 중 법 위반의 경우만을 다룬다. 법 위반의 행동을 하는 국민에 대해 강제적인 폭력을 동원해 처벌을 가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이고 기능이다. 강제적인 폭력에 의한 처벌을 가할 수 없는 국가는 국가로서 존립할 수 없다. 그 강제적인 폭력을 수행하는 일차적인 국가기구가 경찰과 검찰이고, 그 이차적인 국가기구가 법원이다. 그 배후의 국가기구로서 군대가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강제적인 국가기구들의 바탕에는 전체 국민이 있다.  국가가 수행하는 강제적인 폭력의 일차적인 실현은 법정에의 기소이고 최종적인 실현은 판결과 판결의 집행이다. 기소를 전담하는 검찰과 판결을 전담하는 법원, 그리고 검찰에 속한 검사들과 법원에 속한 판사들은 선출된 국민의 대표가 아니다. 적어도 법 위반을 둘러싼 지배의 권리와 그에 따른 권력은 국민이 행사하는 것이 아닌 셈이다. 국민이 아닌 데 국민의 생활 즉 국가 구성에 의한 삶을 실현하는 데 필요하다면, 그것은 국민을 위한 도구다. 검찰과 법원이 그러하다. 말하자면, 검찰과 법원은 원칙상 비인격적인 도구다. 그래서 모든 정규직 공무원이 그러하듯이, 선출하지 않고 법령에 따라 쓸 만한 도구인가를 판정해 선발하는 것이다.  비인격적인 도구는 그 도구를 사용하는 자들이 어떤 자들인가에 따라 그 기능을 달리 발휘할 수 있고 그 효과가 달라질 수 있다. 누군가가 자신이 지닌 생활 도구를 잘못 사용해 저 자신을 다치는 것은 다른 누구에게 호소할 수 없다. 하지만, 검찰과 법원은 철저히 그들 자신이 아닌 국민의 안녕과 평화를 위한 도구이다. 도구를 사용하는 자는 도구를 잘 관리하고 잘 사용해야 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그래서는 안 되지만, 만약 도구가 주인을 아랑곳하지 않고 혹은 그저 눈치만 살피면서 도구 자신을 위해 도구인 자신을 활용하게 되면, 그 도구는 폐기 처분해야 마땅하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도구는 하위의 도구들을 필요로 한다. 컴퓨터라는 도구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모니터도 있어야 하고 자판과 마우스가 있어야 한다. 검찰과 법원이라는 도구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검사들과 판사들이 있어야 한다. 검사들과 판사들은 저 스스로 오로지 법의 도구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법이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것이기에 검사들과 판사들은 국민을 위한 도구다. 만약 그들이 개인적으로 지닌 그들 자신의 인격에 따라 검찰을 인격으로 된 기관으로 생각한다면, 그리하여 검찰을 인격의 집합체로 생각해 이해(利害)관계를 다투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더욱이 그런 생각을 국가적으로 실현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위헌적인 근본 오류이고 그 자체로 범법이다. 강제적인 폭력인 국가 공권력의 배후인 군대가 군대 자체를 인격의 집합체로 생각해 그 자신의 이해(利害)를 다투는 식으로 행동한다면, 바로 그것이 쿠데타인 것과 동일하다.  국가는 국민의 공동인격체이지만, 검찰은 국민의 도구이지 인격체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검사인 한에서 검사는 인격체가 아니다. 그것은 검찰도 검사도 그 자신의 이해 여부를 다툴 수 있는 기구도 기관도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검찰이 마치 그 자체로 살아있는 인격체인 양 활동한다면, 그런 활동의 기미만으로도 그런 검찰은 폐기해야 하는 것이다. 검찰이 쥐고 있는 것이 칼이 아니라, 검찰이 곧 칼이다. 그 칼을 사용하는 주인은 어디까지나 국민이다. 칼이 주인을 해하는 경향을 보인다면, 당연히 부러뜨려 내버리고 새로운 칼을 마련해야 한다. 민주 시민은 지배할 권리를 언제든지 직접 행사할 태세를 갖추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2019-10-01 | hrights | 조회: 145 | 추천: 3
이 윤/ 경찰관  한국에는 경찰관 노동조합이 없다. 경찰관 노조라고? 사람들에게 이건 착한 악마라거나 날씬한 돼지만큼 역설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지금까지 경찰은 노동운동을 탄압하는 대기업 사주나 정권 편에 있었기 때문이다. 경찰은 농성 중인 근로자들의 파업현장에 투입되어 노동자들에게 폭행을 가하고 체포하였으며, 노조 지휘부들을 수배하고 검거하였다. 7,80년대에 노동운동가는 공산주의자로 오해받기도 했고, 그들을 검거하여 수사하는 것도 호국경찰을 표방하는 경찰의 일 중 하나였다. 2009년 쌍용차 파업 현장에 대한 경찰의 진압, 2019년 민주노총의 국회 앞 집회 도중 차로 점거 및 경찰관 폭행을 이유로 위원장 포함 3명 구속 등 노조와 경찰이 서로 대립하는 입장인 것은 지금까지도 달라지지 않았다. 노조 잡는 경찰이 자신들의 노조를 만들어 권익을 지키겠다고 하면 음주운전을 단속하는 경찰이 음주운전을 하겠다는 것과 같이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 경찰조직에 노조를 설립하는 것이 가당한 일인가? 가당한 일이다. 오히려 그런 이유로 경찰관들에게 노조가 필요하다.  경찰관을 포함한 모든 공무원들에게는 정치적 중립 의무가 있다.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 어느 한 쪽에 치우침 없이 공정해야 한다. 그런데 지금과 같은 중앙집권적 조직체계 내에서는 저 높은 곳에 있는 누군가의 지시에 의해 정치적으로 편향되거나 이해관계 일방 당사자에게만 유리한 직무를 수행할 수도 있다. 이 때 자신의 양심과 판단에 기하여 그 지시를 거부할 수 있는 공무원은 많지 않다. 용감한 누군가가 지시를 거부한다면 그 사람은 징계에 이은 소송 등 장기간의 외로운 싸움을 견뎌낼 각오를 해야 한다.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걸고. 그런 경우 노동조합이 있다면 그 사람을 조직의 부당한 조치로부터 보호해 줄 수 있을 것이다.  노조라는 보호막은 경찰관들을 법과 원칙, 상식과 양심에 따라 근무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노조가 관찰자가 되므로 조직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부패에 대한 자정기능 효과도 기대된다. 경찰관과 경찰조직을 상대로 막말하는 정치인에 대해서는 노조차원에서 사과를 요구할 수 있고, 경찰과 치안에 관련된 정부의 각종 개혁 작업에 대해 일부 지휘부의 입장이 아닌 경찰관 전체의 공식 입장을 제시할 수 있어 정책의 현실성과 실행가능성이 향상될 것이다. 그리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안전하게 보호한다는 경찰의 기본 업무에 충실하도록 노조가 돕고 인도할 것이다.  아쉬운 점은 2017년부터 2018년까지 1년간 활동한 경찰개혁위원회에서 마련한 권고안에 경찰관 노조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는 것이다. 노조가 있다면 개혁 작업은 훨씬 쉽고 빠르게 진행될 수도 있다. 사진 출처 - 세계일보  한국 외의 다른 많은 나라들에는 경찰관 노조가 있다. 2005년 미국 L.A.의 한 경찰서 형사반장으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L.A. 경찰관 노조는 매년 시의회와 임금협상을 한다. 뉴욕 경찰은 계급별로 노조가 있어 새로운 제도 도입 시 협상하고, 업무환경 개선, 임금 협상 등을 한다. 유럽 대부분의 국가에는 경찰노조가 설립되어 있으며, 영국을 제외한 나라들에서 노동3권이 모두 보장된다. 종종 프랑스 경찰이 파업 중 시위를 한다는 기사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유럽 전역의 경찰노조를 아우르는 유럽경찰노조연합과 유럽경찰노조연맹도 있다.  경찰관 노조가 필요하다고 하면 ‘경찰이 파업할 때 치안은 누가 유지하느냐’, ‘경찰이 파업하면서 총기를 사용하면 위험하다’라는 우려도 있지만 걱정하지 마시라. 아직 한국 공무원들은 법적으로 단체행동권까지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니 경찰관 노조가 생기더라도 파업을 할 가능성은 없다.  요즘 경찰관들은 ‘경찰관에게만 인권이 없다’라는 자조적인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주취자로부터 욕을 먹거나 폭행을 당하고, 시위현장에서 똥물을 뒤집어쓰고 매를 맞으면서도 경찰관이라는 이유만으로 인내심의 한계까지 참아낸다. 참혹한 범죄현장과 변사사건 처리에서 받는 심리적 충격은 켜켜이 누적된다. 그러다보니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PTSD)나 우울증에 시달리는 경찰관도 많다. 최근 4년간 한 해 평균 22명의 경찰관이 자살하였으며, 일반 공무원보다 자살률이 1.7배가량 높다고 한다. 자신의 인권이 보호받을 가치가 있음을 알아야 다른 사람의 인권도 소중하게 여길 줄 알 것이다. 이제 경찰관 노조 설립도 고려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2019-09-23 | hrights | 조회: 1407 | 추천: 50
윤영전/ (사)평화통일연대 이사장  산자수려하고 공기 좋은 괴산(槐山)에서는 가을이면 ‘홍명희(洪命熹) 문학제’가 열린다. 마치 노란비단자락을 깔아놓은 듯 황금들판이 눈부시다. 마을 곳곳에는 빨간 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가을정취가 더욱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괴산은 <임꺽정(林巨正)> 저자 벽초(碧初) 홍명희 작가의 고향이다. 벽초 탄생을 기념하는 문학행사는 인산리 생가마을에서 열렸다. 이백 오십년도 더된 고가는 그동안 관리소홀로 헐릴 뻔했는데 그곳 유지들이 뜻을 모아 예전모습으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전통한옥이 한 백 칸도 넘는 생가에는 한때 수십 명의 식솔들을 거느릴 정도로 지난날의 사대부가 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 풍산 홍씨인 벽초는 증조부가 이조판서를 지낸 홍우길(祐吉)이고 조부는 정2품 중추원 참의를 지낸 홍승목(承穆)이었다.  벽초 그는 1888년 7월 3일 금산군수를 지낸 부친 홍범식(範植)과 모친 은진 송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우고 신학문을 접한 뒤, 일본 도쿄에 유학하여 서양문학과 다양한 분야의 독서를 탐닉한 수재였다고 한다.  당시 절친하게 지낸 춘원, 육당과 함께 조선의 삼재(三才)로 알려지기도 하였다. 그런데 삼재들의 모습이 각각 떠오름에도, 춘원과 육당의 친일행적에 대하여 아쉬움이 크기만 했었다. 그러나 벽초 만은 분단 조국의 통일의 염원을 저버리지 않았다.  벽초는 1910년 1월에 유학해 졸업을 앞두고 귀국했다. 그해 8월 29일 부친이 경술국치에 항거 자결로 순국하자, 그 충격으로 민족문제에 눈뜨기 시작했다. “나라를 찾아라! 친일하지 말라!”는 아버지 유언을 그는 평생 동안 좌우명으로 삼았고, 가훈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1919년 3월 괴산에서 3.1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옥고도 치렀다. 1924년 동아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과 시대일보사장에 이어 1926년 민족의 교육기관인 오산학교 교장을 지냈다. 이어서 항일단체인 신간회를 창립하여 독립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다가 카프맹원에 연류 되어 1년 6개월 수형생활을 해야만 했다.  해방이후 조선문학가 동맹위원장으로 추대되고 1948년 백범과 평양남북연석회의에 참석 후 남쪽의 정세가 긴박해 북에 잔류했다. 이어 북한의 초대 내각부수상과 IOC위원 올림픽위원장 인민회의 부위원장과 조국평화통일위원장을 지냈다. 1986년 3월 5일 통일조국을 보지 못하고 81세에 운명하였다. 그는 평양근교 애국열사릉에 잠들었다고 한다.  그는 식민지시대에서 일제에 타협하지 않는 애국지사였다. 만해가 독립운동가요 민족시인이듯, 벽초 또한 해방운동지도자요 남북근대문학사상 최고의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필생의 역작, 대하소설인 ‘임꺽정’도 남북 동포들이 애독하는 소설로 영원히 남아 있다. 또한 작품으로 ‘학창산화’(學窓散話)가 1926년 ‘조선도서사’에서 발행되기도 했었다.  필자는 어렸을 때부터, 양주 백정의 아들인 임꺽정이 의적이라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고, 60년대 말에 ‘임꺽정’이란 영화를 관람하면서 임꺽정의 정의로운 행동에 크게 감동했었다. 나도 그와 같은 의로운 사람이 되어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소설 <임꺽정>이 세상에 나온 뒤 금서와 저작권 문제로 송사에 휘말리기도 했었다. 그런데 사계절 출판사에서 북의 소설 <황진이>를 쓴 벽초의 손자인 홍석중 작가와 저작권계약을 맺고 벽초 탄생기념으로 임꺽정 소설 전권을 출판하게 되었다. 이는 남북문학작품교류에 큰 장을 열었고 남북의 독자들이 자유롭게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임꺽정 행사는 벽초의 생가가 있는 인산리에서 선산이 있는 제월리로 이사를 했다. 그곳은 괴강이 유유히 흘러 산수화  같은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제월광장에는 벽초의 문학비가 세워져 있었고 비 앞의 통일노둣돌에다 많은 문인들의 친필이 새기어있었다. 나도 ‘한반도 평화통일 기원’을 노둣돌 한 장에 손수 써 놓았다.  금서였던 북쪽 작가의 글이 일부 해제되면서 홍명희 문학비가 세워졌다. 그런데 지역 보수단체들이 이념과 사상을 문제 삼아 강제 철거했다가 4년 후에야 다시 세워졌다고 한다. 탈냉전 시대가 끝난 지 오래지만 문학에도 여전히 이데올로기 갈등이 일고 있는 현실에, 마음이 아팠다. 더구나 벽초의 부친 홍범식은 경술국치에 목숨까지 바쳐 순국을 했는데도, 조국분단의 아픔에 아랑곳하지 않아 안타깝기만 하다.  광장에는 임꺽정 소설에 등장한 인물의 모습이 담긴 걸게 만장이 펄럭이고 풍물놀이패가 신명나게 판을 벌였다. 마치 임꺽정 소설에 나오는 서민들의 큰잔치처럼, 참석한 문인들도 막걸리를 나무며 덩실덩실 춤을 춘다. 벽초의 임꺽정을 그리움에서 어우러진 두레의 판이었다.  <임꺽정>은 벽초의 탁월한 사실주의적 표현으로 남북의 역사소설에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다. 비록 대하장편 열권이지만 봉단편, 양반편, 의형제편, 화적편 등 여섯 분류의 편들이 각각의 장편소설이다. 그는 많은 분야의 독서와 조선조실록을 탐독했기에 임꺽정 시대의 실상을 잘 묘사한 최고의 역작이었다.  소설 <임꺽정>이 미국 마가릿 미첼 작가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처럼 작가가 세상에 내놓은 단 한편의 불변의 명작이라는 것 또한 대단했다. 진정 벽초의 소설 <임꺽정>은 분단조국에서 오직 통일만을 꿈꾸고 실현하려는 의지의 민족작가가 쓴 소설임을 강조하고 싶은 대목이었다. 벽초 홍명희 문학비 사진 출처 - 구글  이날 벽초의 문학을 평론한 강 교수와 자리를 함께하면서, 내 외가가 나주풍산 홍씨라 했더니 그는 홍명희 선생의 조부가 나의 외가인 전남 나주 풍산리에서 이곳 괴산으로 양자를 왔다고 했다. 그렇다면 벽초 작가는 내 외가의 형님 되는 희(熹)자 항렬이었다. 나는 그의 문학비 앞에 더욱 다가가서 묵상을 올렸다.  이 땅에 분단만 아니었다면 벽초는 물론 남북의 문인들이 자유롭게 왕래하고 교류하였다면 보다 한반도 문단이 발전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노둣돌에 새긴 글처럼 한반도에 평화와 통일이 오고 마는 그날만을 더욱 기원하기로 다짐하였다.  나는 벽초 작가의 고향에서 그동안 써온 소설과 수필을 생각하며 자신을 돌아보았다. 단 한편의 작품이라도 당신처럼 격조 있는 작품으로 사랑받는 글을 써야 한다고 다짐했다. ‘임꺽정’의 정의로움과 앞으로 우리가 이루어야 할 평화와 통일을 기원하고 생각하면서!!
2019-09-18 | hrights | 조회: 242 | 추천: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