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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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김재완(방송대 법학과 교수), 신하영옥(여성활동가), 윤영전(평통서문예원장),  이문영(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 이윤(경찰관), 정보배(출판 기획편집자), 정재원(국민대 국제학부 교수), 조광제(철학 아카데미 상임위원), 최정학(방송대 법학과 교수), 홍미정(단국대 중동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에너지 강국으로 부상하는 이스라엘 홍미정/ 단국대 중동학과 조교수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이 가자를 포위하고, 공격하는 진정한 이유를 가자 연안에 매장된 석유와 천연가스를 장악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2019년부터 요르단으로 수출하게 될 천연가스는 팔레스타인 가자 연안을 포함하는 지중해안의 레비아탄 유전에서 생산되는 것이다. 요르단에서 가장 강력한 야당으로, 무슬림형제단 분파인 이슬람 행동전선(IAF)은 이스라엘이 통제하는 지중해 수역에서 생산되는 천연가스 수입협정을 거부하면서 “이 천연가스는 팔레스타인 해역에서 훔친 것이고, 이 협정은 시온주의자 적들에게 의존하는 것이며, 시온주의자들의 팔레스타인 점령을 지지하는 것이다.”라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레비아탄 유전지대 사진 출처 - offshore-technology.com 2016년 9월 30일 이스라엘 천연가스 수입협정체결을 반대하는 요르단인 시위대 약 2천 5백 명 정도가 암만 중심가에서 행진하였다. 이것은 최근 몇 년 사이에 조직된 시위들 중에서는 가장 규모가 컸다. 시위대는 “요르단 국민들은 가스협정 파기를 원한다. 요르단 시민들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자금을 시온주의자들에게 제공하지 말 것, 시온주의자 적들로부터 가스를 수입하지 말 것”이라고 쓴 깃발을 들었다. 10월 3일 이슬람행동전선과 노동조합 등 시위조직자들은 요르단 시민들에게 천연가스 수입 협정체결에 맞서 저녁 9시와 10시 사이에 각 가정의 소등을 요청하였다. 이번 대중시위는 암만 도심지뿐만 아니라, 북부의 이르비드와 남부의 케락 등 주요 도시들에서 조직되었다. 요르단 시민들 중 50% 이상이 팔레스타인 출신이며, 이들은 주로 대도시 지역에 거주한다. 이번 요르단 대중시위는 2016년 9월 26일 요르단 국영전기회사와(NEPCO)와 미국회사 노블에너지(Noble Energy)가 체결한 천연가스 거래 협정을 반대하기 위한 것이다. NEPCO는 요르단 전체 수요 전력의 85%를 생산하며, 노블에너지는 지중해안 최대유전 지대인 레비아탄 유전 지분 39.66%를 소유한, 이 유전개발과 운영을 책임진 회사다. 노블에너지는 “NEPCO와의 계약은 15년 동안 매일 3억 입방 피트(850만㎥)를 제공하는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 양은 NEPCO가 필요로 하는 액화 천연가스의 40%를 충족시킬 것이다. 이 협정은 2019년부터 발효될 것이고, 100억 달러 정도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16년 10월 3일 대규모 시위의 대응으로, 요르단 정보장관 무함마드 모나미는 요르단 TV에서 “이 협정으로 요르단은 에너지 예산을 매년 6억 달러 정도 절약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스라엘에 의존하지 않을 것이다. 요르단의 이스라엘 천연가스 구입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영토점령을 지지하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다.”라고 항변하였다. 그러나 요르단 작가 히삼 부스타니는 “적의 가스는 점령을 의미하며, 이스라엘로부터 오는 ‘도둑질한’ 천연가스는 국제가격보다 더 비싸다”고 주장하였다. 이슬람행동전선, 세속주의자와 노동조합 등이 주도하는 이 협정거부 움직임이 쉽게 잦아지지는 않을 것 같다. 2010년 발견된 레비아탄 유전은 최근 10년 동안 발견된 세계 최대의 연안 가스전으로 알려졌다. 미국회사 노블에너지가 레비아탄 유전 지분 39.66%, 3개의 이스라엘 에너지 회사들, 델렉 시추가 22.67%, 아브네르 오일 탐사가 22.67%, 레티오 오일 탐사가 15%를 각각 소유하고 있으며, 이들이 노블에너지가 주도하는 레비아탄 컨소시엄을 구성한다. 올해 가스 협정 체결에 앞서, 2014년 9월 3일 NEPCO는 레비아탄 유전에서 천연가스를 매일 3억 입방 피트씩 15년간 수입하기로 노블에너지와 양해각서(MOU)를 체결하였다. 이 MOU에서 NEPCO는 15년 동안 총 150억 달러를 레비아탄 컨소시엄에게 지불하기로 되어있다. 총액 중 56%인 84억 달러는 로열티와 법인세 등의 명목으로 이스라엘 정부에게, 49억 달러는 미국회사 노블에너지와 델렉 시추 등 3개의 이스라엘 에너지 회사들에게, 17억 달러는 채굴과 운영비용 등으로 할당 되었다. 그러나 2014년 12월 요르단 하원은 이 MOU에 반대하는 결의안을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시켰다. 2016년 11월 7일 새로 출범하는 요르단 의회에서도 지난 9월 체결된 가스협정에 대한 상당한 논란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2016년 9월 26일, 이스라엘 에너지장관 유발 스테이니츠는 “이 가스협정은 극히 중요한 국가의 업적이며, 이스라엘과 요르단 사이의 유대와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강화하는 중요한 초석”이라고 밝혔다. 게다가 이스라엘 회사 델렉 시추의 최고 경영자 요시 아부는 “이 협정 체결은 역사적인 사건이며, 레비아탄 유전을 에너지 지도에서 중요한 행위자로 세운다. 레비아탄 컨소시엄은 이집트, 터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포함하는 추가적인 거래를 추진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은 미국회사 노블에너지가 주도한 컨소시엄을 통하여 역내에서 처음으로 요르단과 천연가스 거래 협정을 체결하였고, 현재 터키, 이집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EU 등과 가스 수출 협상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제 이스라엘은 에너지 자급자족을 넘어선 수출국으로 탈바꿈하게 됨으로써 역내 에너지 강국으로 전환될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이스라엘은 천연가스와 석유가 매장된 점령지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배권을 더욱 확장하고, 팔레스타인인 출입금지정책과 이스라엘 정착촌건설 등을 통해서 영해와 영토에 대한 팔레스타인인들의 주권을 박탈하는 정책을 한층 강화시킬 것으로 예상된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115 | 추천: 0
김재완/ 방송대 법학과 교수 우리나라의 고등교육은 약 87%에 이르는 사립대학이 담당하고 있다. 국가의 고등교육정책이 공적부담을 통한 공교육 중심보다는, 민간재원에 바탕을 둔 사학중심으로 행해진 것에 따른 결과이다. 사학의 양적 팽창과 사학의 높은 의존도는 국가로 하여금 학교법인의 관리·감독을 무디게 만드는 결과를 빚어냈다. 이러한 방임적 사학중심의 교육정책은 사립대학을 운영하는 학교법인으로 하여금 사적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고, 운영자는 학교를 공교육의 현장이 아닌 자신의 전유물이자 왕국으로 여김으로써 온갖 비리를 저질렀다. 그 중심에 상지대가 있고, 상지대 사태는 국가의 그릇된 고등교육정책과 그 운영이 공교육을 어떻게 무너뜨리고 있는지를 적확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1993년 당시 이사장인 김문기는 공금 횡령과 부정입학 관련 금품수수 등의 비리로 구속되어 상지대에서 물러났고, 상지대는 임시이사 체제로 운영되었다. 그러다가 2003년에 새로이 정식이사가 선출되면서 비리재단과의 연결고리를 끊어냈다. 그러나 김문기 측은 임시이사들이 정식이사를 선임하는 내용의 이사회결의가 무효임을 확인해달라는 청구의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대법원은 전원합의체판결로 “임시이사들이 선임되기 전에 적법하게 선임되었다가 퇴임한 최후의 정식이사들(종전이사)에게 이사회결의의 하자를 다툴 소의 이익이 있으며, 임시이사는 임시적으로 그 운영을 담당하는 위기관리자로서, 일반적인 학교법인의 운영에 관한 행위에 한하여 정식이사와 동일한 권한을 가지는 것으로 제한적으로 해석해야 하므로 정식이사를 선임할 권한은 없다.”고 판결(대법원 2007.05.17. 선고 2006다19054 전원합의체 판결 참조)함으로써 비리재단이 복귀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게 된다. 이후 교육부 사학분쟁조정위원회는 상지대의 분규사태를 정상화하는 방안으로 정식이사 8명과 임시이사 1명을 선임했는데, 이사 9명 중 4명은 김문기가 추천한 인물로 구성되었다. 교육부가 상지대의 정상화방안이라는 미명하에 비리재단을 복귀시킴으로써 진정한 정상화를 갈망하는 학내 구성원들의 반발을 불러왔고, 오히려 상지대는 더욱 비정상화의 길을 걷게 된다. 이에 교수협의회와 총학생회 등 상지대 구성원들은 교육부를 상대로 이사선임처분을 취소하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에서 1심과 2심은 “학교법인을 운영하는 이사의 선임으로 교수와 학생 등 대학구성원들의 학교의 운영이나 학문의 자유 등에 관한 권리나 이익이 침해된다고 볼 수는 없으며, 설령 침해될 가능성이 있다 하더라도 이는 지극히 간접적일 수밖에 없고, 또한 학교의 구성원일 뿐 학교법인의 운영에 직접 관여할 수 있는 지위에 있지 않은 원고들로서는 이사선임과 관련하여 종전이사의 지위와 같은 지위에 있다고 할 수 없으므로 학교구성원인 원고들이 종전이사에 준하여 이사선임처분에 대하여 다툴 법률상 이익을 가진다고 볼 수는 없다.”고 판결(서울고등법원 2012.07.11. 선고 2011누40402 판결 참조)함으로써 비리재단의 복귀는 법적으로도 완결되는 듯 했다. 그러나 2015년의 대법원판결에서 서울고법판결을 파기환송함으로써 대반전이 이루어졌다. 이 판결의 핵심은 “임시이사제도의 취지, 교직원·학생 등의 학교운영에 참여할 기회를 부여하기 위한 개방이사 제도에 관한 법령의 규정 내용과 입법 취지 등을 종합하여 보면, 사립학교법과 그 시행령 및 법인 정관 규정은 헌법 제31조 제4항에 정한 교육의 자주성과 대학의 자율성에 근거한 대학교 교수협의회와 총학생회의 학교운영참여권을 구체화하여 이를 보호하고 있다고 해석되므로, 교수협의회와 총학생회는 이사선임처분을 다툴 법률상 이익을 가진다.”는 것이다(대법원 2015.07.23. 선고 2012두19496, 19502 판결 참조). 이로써 대학교 운영의 주체, 다시 말해 학교민주주의의 주체는 근본적으로 대학구성원인 교수와 학생들이라는 사실을 재차 확인해 주었다. 사학의 비리재단에 의해 촉발된 분규로 최대의 피해를 입는 당사자는 대학구성원인 교수와 학생들이다. 대학의 진정한 정상화와 민주화를 부르짖는 교수들과 직원들은 부당한 파면과 해고 등으로 내몰리며 교권을 유린당하고 비리재단의 입맛에 맞는 이사와 교수, 직원들로 그 자리가 메워짐으로써 학생들의 정상적인 수업권은 침해당한다. 더욱이 교육부의 인위적인 대학구조조정의 칼날은 상지대 구성원들의 교육인권을 갈가리 찢어내고 있다. 교육부의 대학구조조정은 학령인구감소로 인해 대학입학정원이 줄어들 것이므로, 그 불균형한 수급을 맞추기 위해 인위적으로 대학숫자를 줄이고자 하는 것에 있다. 그 수단으로 교육부가 설정한 기준에 의한 대학평가를 통해 부실대학을 지정하고 지정된 대학에 대한 정부재정지원 및 사업의 제한, 국가장학금 수혜와 학자금 대출의 제한으로 고등교육시장에서 전면 퇴출시키는 방법을 사용한다. 이러한 대학구조개혁평가라는 미명하에서 상지대는 D등급을 받아 부실한 대학으로 지정되고 말았다. 파행적이고 부실하게 된 대학운영의 책임이 비리재단인 학교법인의 그릇된 운영으로 인해 빚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실질적인 내용과 과정은 무시한 채 정부재정지원을 중단함으로써 대학주체인 교수와 학생들의 교육인권을 벼랑으로 내몰고 있다. 고등교육에 있어 사학의 양적 팽창과 이에 대한 높은 의존도는 분명 정부의 고등교육정책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에 필연적으로 사악한 비리사학이 양산되었고, 고등교육을 위한 시민의 지출비용은 가파르게 상승하기만 해왔으며 고등교육은 그 본질적인 의미를 잃어버린 채 전문기술 내지 직업학교로 전락하고 있는 등의 총체적인 고등교육 황폐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전적으로 그에 대한 책임은 교육의 공공성을 방기한 국가에게 있음에도, 그 피해와 책임은 고스란히 대학구성원과 시민에게 지워지고 있다. 인제대 고영남 교수의 지적처럼, 공적인 학교제도를 보장하고 일정한 범위에서 사립학교의 운영을 감독·통제할 권한과 책임을 지는 교육부가 대학구조개혁평가를 통해 자신의 부작위와 무능을 교육주체들에게 떠넘기고 있는 것이다. 이제라도 국가는 고등교육정책의 나침반을 교육의 공공성 강화라는 지점으로 되돌려 놓아야만 한다. 현재와 같은 인위적인 대학구조조정의 수단을 폐기하고, 대학의 자율성과 대학주체의 교육인권을 드높이기 위한 고등교육의 본질을 되찾는 방안을 모색하고 수립해야 할 것이다. 그 출발점으로 사학의 비리재단부터 철저하게 퇴출시켜야만 한다. 상지대가 보여주고 있는 비리재단과의 처절한 싸움과 그 결과는 고등교육의 정상화와 공공성 강화의 향방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바로미터이다. 상지대의 정상화 투쟁은 비단 상지대 자체의 문제만이 아니라 고등교육, 더 나아가 전반적인 교육정책에서 교육부와 학교법인의 독단적인 지배 권력으로부터 잃어버린 교육주체들의 교육인권을 되찾아 주는 상징적인 깃발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깃발이 모든 교육현장에서 나부껴야만 교육복지를 통한 시민복지국가로 성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133 | 추천: 0
정재원/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 인터넷 문화에 익숙한 층들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일이기는 하지만 최근 가장 뜨거운 이슈 중 하나가 바로 메갈리아/워마드와 관련되어 촉발된 소위 ‘여혐/남혐’ 논쟁이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현상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동안 그 어떤 심각한 문제들에 대해서도 커다란 저항을 하지 않았던 남성들이 유독 이 상황에 있어서는 매우 강한 저항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 예로 메갈리아 등의 운동을 맥락적으로 이해하고 지지한다고 표명한 한 정당 내 모 위원회와 한 진보적 주간지, 그리고 일부 지식인들에 대해서도 무차별적인 공격이 이어지고 있는데, 각각 대규모 탈당과 절독자들이 급증하는 등 그 어떤 사안에서조차 쉽게 행동하는 것을 주저했던 남성들이 대거 행동으로 나선 것은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반발은 한 마디로 기득권을 지키려는 이들의 역겨운 모습이 드러난 것에 불과하며, 한국 사회 진보를 가로막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지점이 어디인지를 보여 주는 사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이러한 여성 혐오 현상은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극단적으로 가부장적이고 남성중심적인 한국 사회에서 극단적으로 억눌리고 희생되어 왔던 여성들이 조금씩 남성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시작하자 그동안 기득권을 누려 왔던 많은 남성들이 강하게 반발해 온 역사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양성 간 불평등을 부추기는 법과 제도, 관습과 문화들이 많지만, 특히 군가산점제나 여성 징병제 등 남성들이 피해를 입고 있는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군대와 관련된 사안에 있어서는 그 어떤 합리적 논의가 불가능할 정도로 반발이 거셌다. 사진 출처 - 미디어오늘 1990년대 중반 이후 온라인 문화가 발달하면서부터는 사실상 남성/여성을 근거로 비판할 사안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온라인 댓글 문화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남성들은 각종 여성비하적 여성혐오적 용어를 만들어 내며 여성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같은 사안에서도 남성에게는 별다른 비난이 가해지지 않고 혐오와 비하의 용어도 붙여지지 않는 반면, 여성에게는 엄청난 비난이 가해지고 신상이 털리거나 오랜 기간 동안 집요한 공격의 대상이 될 정도로 그 어떤 사회적 불만의 표현보다 훨씬 더 강한 어조로 반발을 보여 왔다. 심지어 일부 사안들의 경우 직접적 협박도 서슴지 않는 등 매우 폭력적인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이러한 한국 고유의 극단적 경쟁 사회가 19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의 영향 하에서 한층 더 불안정해지면서 특히 하층 계급 남성들의 불만은 지배 권력, 자본 권력으로 향하지 않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게 향하게 되었는데, 남성기득권을 제약하는 가장 큰 집단인 여성을 향한 적대감은 한층 더 강하게 나타났다. 특히 전반적인 여권의 상승으로 인해 이러한 불만은 하층계급 남성만이 아니라 충분한 부와 권력을 누리고 있는 상층과 중간계급 남성들에게서도 나타났는데, 바로 이들이 이데올로그가 되어 이러한 불만을 조직화하고 여론화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굳이 강남역 살인 사건과 같은 극단적 사건이 아니더라도 이제 여성혐오 문제는 이주자들에 대한 적대와 혐오에서 보이는 파시즘적 양상과 유사한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고, 한국사회의 가장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극우적인 자들을 제외하더라도 많은 이들의 이러한 격렬한 반발은 메갈리아 등으로 상징되는 일부 페미니스트 집단들의 글쓰기나 운동 방식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 자체까지 부정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부 논자들이 이야기하듯, 전체적인 맥락에 대한 치밀한 분석 없이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으로 이들을 ‘여자 일베’라고 칭하는 데에는 반대하지 않을 수 없다. 일베로 상징되는 남성우월주의적/여성혐오적 발언과 행동이 난무해도 아무런 제재도 반발도 없는 끔찍한 상황에서 처음으로 정면으로 저항하는 집단이 생겨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정당한 모습이다.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사회운동단체가 아니다 보니 회원들의 정제되고 절제되지 않은 표현들이 나오는 현상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일 수 있다. 비유하자면 이렇다. 과거 독재정권의 폭압 정치 속에서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는 이데올로기들을 저항 이데올로기로 삼아 저항하던 조직들이 있었고, 심지어 이들이 한때 한국사회의 저항 운동의 주류를 이루기도 했었다. 그들 중 주류는 저항 민족주의라는 이름하에 우파 민족주의적 주장과 구별되지 않는 주장들을 하다못해 일부는 북한이라는 타국 지배 집단, 그것도 뒤틀어진 가짜 좌파 지배 집단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저항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화염병 시위로 상징되는 그 저항 수단 역시 지금의 눈으로 볼 때, 아무리 대항 폭력이라는 이름으로 정당성을 부여하더라도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외국의 경우에도 대안 부재 속에서 심지어 극단적 이슬람과 같은 종교가 저항 이데올로기가 되기도 하고, 체제전환 국가들에서는 자유주의나 민족주의가 저항 이데올로기로 기능하기도 한다. 분명 현재 메갈리아 등의 투쟁 방식에는 문제가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내용적으로도 빈곤계층이나 하층계급 남성들에 대한 비하 역시 맥락상 이해가 전혀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이는 위에서 비유한 것처럼 강한 억압적 지배와 폭력적 탄압에 맞서면서 과격해질 수밖에 없는 운동의 초기 모습이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하나하나의 과격하거나 다듬어지지 않은 언사들에 초점을 맞추어 과도한 비판을 가하는 것은 불필요하다. 최소한 진보적인 관점을 가진 이들이라면 이 사태에서 무엇이 핵심이고 본질인지에 대해 명확한 정치적 입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책무이다. 그러나 현실은 너무나 답답하다. 언제나 지역과 학벌과 학력 등등으로 가르고 배제하고 물어뜯던 이러저러한 남성 집단들이 똘똘 뭉쳐 반발하고 있는 현 상황 속에서 진보적 입장을 갖는다는 이들조차 일베와 같은 편에서 사태를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심각한 남성 중심적 사회인지에 대해 다시금 깨닫게 해 주고 있다. 마치 인종주의자들이 이주민들이 범죄를 저질렀을 때 이를 범죄의 문제가 아니라 이주민의 문제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과 유사하게 여성에게는 전혀 다른 잣대를 들이대는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여성 차별적이고 여성억압적 모습이 이제야 수면 위로 적나라하게 나타나게 된 것은 어쩌면 메갈리아와 같은 집단의 존재로 시작된 것이기에 우리는 이들의 긍정적 기능이 확대되도록 지지해야 한다. 그런데 현재 일부 남성들의 찌질한 대응들에는 가장 핵심적인 토대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한다. 한국의 남성들은 진보와 보수, 좌우를 막론하고 현실의 삶 속에서는 성산업과 성매매에 대해 관대할 뿐 아니라 심지어 다양한 수준의 성매매 업소 출입을 정당화하는 이들이 많다. 정치나 다른 분야에 있어서는 비판적이고 진보적인 관점을 보이는 이들 중 상당수가 오히려 성매매 산업을 옹호하고 이에 반대하는 운동에 대해 반발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이렇게 여성들 중 가장 심각한 인권 사각지대에 놓인 여성에 대해서조차 남성성욕중심적 사고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이 소위 ‘일반’ 여성들의 상황이나 권리, 주장들에 대해서 과연 제대로 된 이해가 가능할까? 따라서 최소한의 양심을 갖고 있는 진보와 평등을 지향하는 사람들이라면 현재 인터넷상에서 벌어지는 말 하나하나에 흥분하고 분노하는 등으로 엉뚱한 힘을 낭비하지 말고, 실 공간에서의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 불평등과 혐오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수많은 여성 문제들의 핵심에는 바로 성매매 산업을 둘러싼 추악한 권력과 자본과 폭력집단, 그리고 압도적 다수 남성들의 침묵을 포함하는 공동의 범죄 행위가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여성에 대한 일상적인 차별과 억압 뿐 아니라, 여성을 쉽게 살 수 있는 사회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가 발생하는 것은 별도의 현상이 아니라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현상이다. 폭행이나 살인 뿐 아니라 성산업으로의 유입 등 다양한 총체적 위협 속에 살아가야 하는 여성들의 작은 반란에 남성들도 동참해야 한다. 그리고 분노의 화살은 소수자나 약자가 아닌 여성들을 포함한 사회의 약자들을 착취하는 집단들에게로 향해야 할 것이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101 | 추천: 0
신하영옥/ 여성운동연구활동가 네트워크 ‘젠더고물상’ 열흘이 지나도록 기침이 멎질 않는다. 처음엔 가벼워 곧 끝나려니 했는데, 당사자인 나나, 옆의 가족까지 잠을 설치는 날들의 연속이다. 괴롭고 미안하다. 며칠 전 병원엘 갔더니 에어컨 바람이나 선풍기 바람이 원인일 수 있다고 한다. 약을 복용하고 있는 데도 나을 기미가 없어 오늘은 기어이 주사까지 맞고 왔다. 매일같이 오가는 학교와 집은 온도차가 엄청나다. 추우리만치 에어컨 바람을 쐬다 집에 가면 그냥 선풍기 바람만으로는 견디기 힘들다. 물에 적신 옷을 걸치고 선풍기를 틀어야 그나마 견딜 만하다. 그 상태로 깜빡 잠이 들면 한 밤중엔 추워지게 되는데, 그것이 감기의 화근일 수도 있지 싶다. 여튼, 살인적인 더위다. 살아가는 햇수에 비례해 온도계 수치도 올라만 가고 있다. 한 친구는 기온이 내려가는 밤이면 창문을 열면 그나마 잘 수 있는 아파트에 살고 있다. 그러나 올해는 그 라인 전체 가구들이 에어컨을 설치한 덕분에 위아래층의 에어컨 실외기의 더운 공기들이 들어와 잠을 잘 수가 없게 되었단다. 도저히 견딜 수 없던 친구도 결국 에어컨을 사러 갔지만 열흘 뒤에나 구입 가능하다는 답변만 듣고 왔다. 수요가 공급을 초과하는 사정이다. 그리고 우리는 ‘악순환’을 말했다. 더위를 견디기 위한 현대적 처방들이 더위를 더욱 증가시키는 순환고리에 대해. 오늘 병원 가는 길, 누군가 ‘아줌마’ 하고 부른다. 설마? 하며 돌아보니 다부진 체격에 지쳐 보이는 한 할아버님이 나를 응시하신다. ‘네?’ 하고 응답하니 ‘선풍기 파는 곳이 어디요?’ 하고 물으신다. 그 근처엔 없는 걸로 알지만, 혹시나 중고가전제품 파는 곳이 근처인지라 알려 드리고 가던 길에 그 상가를 들여다보니 문이 잠겨있다. 그 옆 만물상에 들어가 선풍기가 있는지 물어보자 없단다. 뒤에서 걸어오시는 할아버님이 보인다. 그냥 갈 수가 없었다. 잘못된 정보를 제공한 것 같아 미안하고, 또 목소리에서 절박함이 묻어났기 때문이다. 마침 내가 가는 병원 옆에 대형마트가 있어 동행하게 되었다. 할아버지의 아내가 갑자기 쓰러지는 병이 있으신데 오늘 또 발병을 하셨고, 쓰러지시면서 갈비뼈와 선풍기가 동시에 부서졌다는 것. 병원 측에서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나 입원이 불가하다 하여 현재 응급처치 후 집으로 가야 할 상황이지만 선풍기도 없이 찜통더위에 염증이라도 생길까, 아픈 아내가 더위까지 어찌 견딜까 싶어, 아내를 병원에 둔 채 급하게 선풍기를 구하려고 하신 거다. 걱정과 절박성이 담긴 표정으로 선풍기를 구입해야 하는 상황을 설명하시는 할아버지를 보면서, 문득 에어컨을 생각하다 바로 그쳤다. 에어컨이 있다면 선풍기가 절박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대형마트 입구를 알려드리고 병원으로 향하는 맘이 저리다. 80이 넘으셨다는데, 넉넉하지 않을 듯 뵈는데다 아내의 지병과 당장의 치료까지. ‘힘드시겠다...’는 생각. 그러나 당신은 정작 자신의 힘듦보다는 할머니의 치유로 은유되는 선풍기에만 관심이 온통 집중되셨다. 에어컨이 옵션이 아니라 아파트의 한 부품이 되고, 생필품이 되고, 그 바람이 병을 만드는 시대에, 선풍기 한 대가 아내의 치유와 회복이 핵심 과제인 할아버지를 생각하면서 ‘뭔가 이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뭔가 아닌 것이 무엇이었을까? 사진 출처 - 전자신문 오늘 지인이 검찰의 출두명령을 받았다. 지난 총선에서 특정후보를 지지하는 말을 전화상으로 했다가 ‘들통 난’ 것이다. 문자로는 가능하나 말로는 안 되는, 이상한 선거법 덕분이다. 그는 이제 ‘전과자’가 될 것이다. 정치인을 비교, 선택, 유통 및 홍보하는 정치적 소비행위를 적극적으로 한 덕분이다. 표현이 소비되고, 소비가 곧 표현인 요즘에 말이다. ‘선거’는 대의제에서 ‘민주주의의 꽃’으로 불린다.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선거라는 과정을 통해 유권자들이 정치소비의 주체가 될 수 있어야 가능하다. 즉 그동안 정치적 대상으로 존재하던 유권자들이 이 과정에서만큼은 정치적 주체로서 정치의제와 정치인을 비교, 선택, 지지, 선전과 홍보를 통한 권장 등을 통해 정치를 소비하는 주체가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민주주의는 다양한 사람들이 그 다양한 만큼의 의사표명이 가능하고 그 표명된 의사들이 소통, 유통, 합의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결국 자본주의에서 상품에 대해 소비하는 형태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나의 삶을 정치적 의제화 하고 실행에 옮길 사람, ‘대표’라 불리지만 ‘대리’를 의미하는 사람을 선택하는 과정은 상품의 소비과정에서 ‘적극적 유통’으로서의 과정이 삭제되어 있다. 즉 ‘좋으니 선택해봐’라는 권장과 홍보의 과정이 그것이다. 그것에는 일대일, 일대다, 면대면의 대화, 전화, 메일, 문자 등 인간의 언어로 사용되는 모든 기호적 방법들이 동원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글로는 가능하되 말은 안 된다는 것은 인간의 직접소통을 단절시켜버림으로써 공동체를 해체하는 동시에 선택을 위한 정보획득의 기회를 막는 결과를 가져온다. 가장 열려있어야 할 민주적 과정이 어쩌면 가장 은밀하고, 은폐되고, 닫혀버린 공간이 되는 것이다. 이쯤이면 민주주의를 조롱하는 것이 아닐까? 민주주의조차 그 범위를 정해주고자 하는 오만이다. 거침없는 소통이 권장되는 영역들은 따로 있는 것 같다. 에어컨과 관련해 장황히 떠든 것은 그러한 맥락 속에 있다. 상품의 소비와 관련된 말들의 소통은 무한정 장려되면서 의식을 파고 들어와 필요 이상의 물건들을 소비하게 하고, 그로인해 우리 삶이 상품에 의해 역으로 소비되도록 만들어내는 말들, 그로인해 더위를 비롯해 ‘못 살겠는’ 상황이 강화되는 그런 환경이 되도록 만드는 말들의 소통이 그것이다. TV를 켜면 정규방송과 켜켜이 홈쇼핑 채널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외 방송채널들은 프로그램 진행 과정에서, 프로그램들 사이에서 홈쇼핑을 틀어댄다. 먹방, 쿡방을 위시해 ‘건강 염려증’을 유발하는 방송에서 어떤 음식이 좋다고 하면 그 옆의 홈쇼핑에선 어김없이 그 상품을 판매한다. 주부라는 정체성도 가진 나는 ‘가사노동을 간편하게 해주는’ 상품들에 눈을 뺏긴다. ‘사고 싶다’는 충동이 이는 순간이다. 대부분 찌든 때를 순식간에 없애주지만 안전성이 입증되지 않은 제품이거나, 한 번 쓰고 버리는 일회용 청소제품들이다. 어느 순간 그런 것들에 ‘혹’하고 눈을 뺏기는 자신이나 일회용품을 권장하는-실은 반복적 방송을 통해 세뇌시키는-그 현실에 화가 났다. 더위가 맹승을 떨칠 때, 그 주범의 하나인 에어컨을 ‘없으면 올 여름 거의 죽음’이라는 협박을 통해 소비할 것을 강요할 때도 화가 난다. 상품소비의 달콤한 강요는 딸 또래 아이들이 어떤 옷을 가졌는지 고려 없이 무의식적으로 옷을 사들이고 그로인해 넘쳐나는 옷을 정리할 줄 몰라 쌓아두는 습관을 갖게 하는 원인일 수도 있다. 모든 소비상품은 일회용품처럼 취급되면서 쓰레기는 넘쳐나지만, 그것들이 당장 눈에 보이지 않도록 즉각 치워버리는 고도의 ‘양심회피’ 전략으로 인해 우리는 또 다른 쓰레기들을 양산하는 삶을 반복한다. 결국 그 결과는 ‘살인적 더위’를 넘은 그 무엇으로 우리에게 돌아올 것이다. 레바논의 쓰레기 사태를 보면서, 저 많은 쓰레기들이 어디서 왔을까?란 경악과 동시에 쓰레기 재앙이 우리 모두의 현실이 될 날이 곧 올 것만 같은 불안에 포위되었었다. 상품의 소비는 이제 공급이 수요를 조종함으로써 수요는 공급의 노예가 된다. 상품의 선택은 따라서 자발적 선택의 모습을 띄고 있지만 ‘은폐된 강요와 협박’의 결과로 나타난다. 그 과정에 ‘말’과 ‘말의 유통’은 아주 적극적으로 권장된다. 그러나 정치의 소비에 있어서 그것은 반대의 과정을 강요받게 되고, 따라서 정치는 적극적으로 소비되지 못하고 수요가 줄어듦으로써, 수요자가 없는 공급현장은 공급자들끼리 수요자가 되는 현상을 만들어내고 있다. 정치는 정치인들끼리만 소통, 유통, 소비하는 것이 된다. 상품소비의 영역에선 결코 권장되어선 안 되는 말들의 자유를 넘은 과도한 소통은 인간과 지구를 병들게 하고, 정치소비의 영역에선 결단코 권장되어야 할 말의 유통/소통들은 은폐되거나 폐쇄됨으로써 정치적 인간으로서의 존재와 정치적 의제로서의 지구를 병들게 한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이다. 규제되거나 제거되어야 할 것은 일회용품을 비롯한 과도한 상품광고와 판매를 주도하는 쇼핑방송이다. 반면, 세뇌라도 좋으니 적극 권장되고 열려야 할 것은 정치를 소비하라는 주문과 말들이 유통되는 선거 과정이다. 그러나 우리는 반대의 세상에서, 나와 우리 스스로에 ‘반대하는’ 삶을 살도록 주문받고 있다. ‘너 자신을 상품으로만 소비하라’, ‘너는 정치적 존재가 되어선 안 된다’ 등등. 에어컨의 자리를 선풍기로 대체하고, 문자를 비롯한 모든 종류의 소통기호가 유통될 수 있을 때 우리는 어쩌면 자신을 ‘위한’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열 수도 있지 않을까? 상품소비를 규제하고 정치소비를 권장하는 삶의 양식으로의 전환이 절실하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121 | 추천: 0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더 빨리, 더 높이, 더 멀리, 더 힘차게, 더 정교하게, 더 조화롭게, 더 정확하게, 결국에는 더 아름답게, 인간의 맨몸으로 수행할 수 있는 그리고 표현할 수 있는 최고도의 경지를 추구하면서 세계 각지의 젊은이들이 모여 경연을 펼친다. 적어도 지난 4년 동안 말 그대로 뼈를 깎는 노력을 경주하여 훈련함으로써 해당 종목에서 타고난 인간 몸의 잠재성을 누가 최고도로 실현했는가를 경쟁적으로 실연해 보인다. 지구 반대편에서 텔레비전을 통해 중계 장면을 보는 데도 과연 인간의 몸이 저렇듯 뛰어나고 탁월할 수 있는가를 실감하면서 감탄해마지 않는데, 경연이 펼쳐지는 현장에서 직접 관람하면 그 감흥의 밀도와 강도가 얼마나 더할 것인가 싶다. 올림픽의 모든 종목에서는 그 어떤 기계적인 장치도 동원되지 않는다. 동원되는 각종 도구들은 제 스스로는 그 어떤 작동도 하지 않고, 오로지 인간의 맨몸에 의해 직접 다루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순전히 수동적인 것들뿐이다. 이번 러시아의 도핑 문제나 박태환의 우여곡절의 사건에서 잘 알 수 있듯이, 올림픽의 근본 전제는 인간이 타고난 순수한 맨몸의 자연성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나로서는 올림픽이라는 온 인류의 스포츠의 제전(祭典)이 갖는 유독(惟獨)한 매력은 바로 이같이 일체의 인공적인 기계성, 특히 기계의 자동성을 완전히 벗어난 상태로 인간 몸이 지닌 순전한 위력들을 온갖 방식으로 표현해 낸다는 데 있다고 믿는다. 올림픽이 갖는 매력에 대한 이러한 필자의 믿음은 현실 세계가 이른바 고도과학기술로써 전혀 새롭게 규정됨으로써 ‘맨몸으로서의 인간’과 ‘맨몸에 입각한 인간성’이 거의 망실 내지는 삭제되다시피 되고 말았다는 위기의식과 짝하고 있다. 컴퓨터-디지털 기술을 기반으로 한, 스마트폰, 네비게이션, 사물 인터넷, 증강현실, 빅 데이터 분석, 인조지능 및 인조감정 등과 결합되는 각종 로봇들이 전 세계를 뒤덮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야말로 몸이 증발해버린 시대가 된 것이다. “몸이 증발하고 있다.” 필자는 불행히도 이 명제를 제시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자동화된 기계의 세상, 자신의 몸을 자동화된 기계의 인공지능적인 체계에 맞추지 않으면 의미 있게 생존한다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은, 클라우스 슈밥이 제시한 이른바 “제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대한 몸 철학적인 명제다. 제리 카플란은 ‘인공지능 시대의 부와 노동의 미래’라는 부제를 단 책 제목을 ‘인간은 필요 없다’라고 달았다. 인간은 필요 없다는 카플란의 생각이 사회경제적인 차원에서의 것이 몸이 증발하고 있다는 필자의 생각은 존재론적인 차원에서의 것이라 점에서 다르긴 하지만, 지시되는 내용이 섬뜩하기는 둘 다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로서는 ‘필요 없는 인간’ 또는 ‘증발하는 몸’ 등, 현재 진행형의 전 인류적인 사태에 대한 진단에 대해 불행하다고 또는 비극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지척에서 들이닥치는 열차 앞에서 맨몸으로 팔을 벌리고 마주 서서 “나 돌아갈래!” 하고서 외치던 영화 <박하사탕>의 남자 주인공의 절규가 바로 우리 모두의 절규가 아니겠는가, 하는 상념이 함께 떠오른다. 그런데 “과연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 하는 물음과 함께 “과연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물음이 떠오르면서, 설사 돌아갈 곳이 있다 할지라도 돌아갈 수 없을 터이고, 돌아갈 수 없기에 돌아갈 곳이 없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일종의 종말론적인 상념이 압박해 온다. 오늘이 8월 17일, 리우 올림픽이 아직 한창이다. 몸이 증발하고 인간이 필요 없는 종말론적인 상황을 맞이하여 올림픽이 어떤 묵시록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닐까, 올림픽이 혹시 인류 구원의 한 가닥 암시적인 실마리라도 던져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서 잠시 기대를 걸어보는가 싶은 순간, 절망에 가까운 현실 인식이 확 다가온다. 맨몸의 운동감각적인 순수한 세계를 따로 떼 내어 올림픽이라는 대대적인 괄호 속에 집어넣어 마치 골동품을 완상(玩賞)하듯이 임시로 잠시 온 인류가 휴식을 취할 뿐, 올림픽이 끝나면 곧바로 누가 더 먼저 더 빨리 더 정확하게 더 깊숙이 더욱 강력한 인공지능을 비롯한 고도과학기술의 세계 속에 들어가 부와 권력을 획득할 것인가를 치열하게 다투어야 할 것이다. 맨몸의 운동감각적인 세계는 인위적이기 이를 데 없는 환상의 세계가 되고, 인공지능적인 탈(脫)운동감각적인 가상의 세계가 오히려 자연스럽기 짝이 없는 실재 현실의 세계가 되어 온 인류를 지배하는, 정확하게 뒤집어진 의미의 체계가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고도로 자동화되어 정밀하기 이를 데 없고 그래서 오히려 최고도로 반(反)인간성을 한껏 드러내지 않고서는 발달할 수 없기에 결국에는 인간의 살아있는 맨몸들을 공략하여 볼모로 삼는 오늘날의 고도과학기술의 체계, 더군다나 그 체계가 본격 자본주의의 이윤증대 중심의 체계 및 사드 미사일을 정점으로 하는 군사기술의 체계와 정확하게 결합하여 복합통일의 거대체계를 이루고 있으니, 여기에 인간 또는 인간성이라 일컬을 수 있는 운동감각의 근원적인 영역은 아예 뿌리 뽑히고 있는 것이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이런 현실 인식의 생각을 하게 되면서 올림픽의 의미를 그야말로 고대 그리스 올림픽의 정신을 바탕으로 되살려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말하자면, 비극적으로 전개되는 온 인류의 역사적인 존재 때문에 자연의 존재 전체를 향해 제(祭)를 올리는 것이 바로 올림픽이라는 생각이다. 올림픽은 순수한 맨몸이 아니고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감각운동의 세계를 온 인류에게 보여준다. 그럼으로써 맨몸의 감각운동의 세계 즉 순수 자연의 세계야말로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가장 탁월한 세계임을 웅변하는 인류 전체의 ‘제전’(祭典)인 것이다. 정치경제적인 배후의 국가적인 경쟁과 자본주의적인 음모의 구도를 짐짓 싹 제거하고서 보면, 올림픽은 종말론적인 반(反)인간의 시대를 맞이한 온 인류가 모여 잃어버린 자신들의 순수한 인간성을 되살리고자 순전하기 이를 데 없는 자연의 맨몸들로써 그야말로 애원하듯 빌면서 온갖 형태의 제(祭)를 올리는 것으로 다가온다. 말하자면, 올림픽에 참가하면서 올림픽을 관람하면서 온 인류는 암암리에 계시를 받는다. 도구 사용자는 도구를 닮게 된다는 말이 예부터 전해져 온다. 예컨대 자율주행 자동차를 타고 다니면 자동기계로서의 인간으로 변해갈 것이라는 이야기다. 온갖 자동기계들이 생산과 소통의 작업 현장에서 다양하게 활용되면, 그 덕분에 노동자인 우리 인간들은 더 자유로워지고 더 시간적인 여유가 많아지고 그럼으로써 제 자신의 존재를 더 깊고 넓게 향유할 수 있어야 하는 게 원칙이다. 그런데 왠지 사태는 오히려 정반대의 과정을 밟고 있는 것 같으니 어떻게 된 것인가? 핵심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고도의 자동장치 및 구조적인 시스템이 너무도 강력하게 깊숙이 그리고 폭넓게 치고 들어와 사람들을 오히려 시스템 자체가 굴러가기 위한 보조적인 수단인 양 부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모든 고도과학기술들이 그런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테러나 폭동 그리고 각종 심각한 인사 사고들은 어쩌면 이처럼 막다른 단단한 벽을 향해 고속으로 치닫는 반(反) 내지는 탈(脫) 인간적이고 전반적인 상황에 대한 집단무의식적인 반발일지도 모른다. 그런 까닭에, 일체의 반(反)인간적인 매개 장치들을 제거한 상태로 맨몸과 맨몸이 부닥치면서, 운동감각적으로 생생하게 살아있는 서로의 자연적인 생명력을 한껏 느끼면서, 그럴수록 서로의 생명력을 극단적으로 발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올림픽의 각종 장면들이 어찌 감동적이지 않겠는가. 비록 종말론적인 비극의식이 가미된다고 할지라도. 한반도 남쪽 미군의 사드 배치의 결정에서 드러나는, 인간 생명의 근본적인 말살을 가능적으로 염두에 둔 탓에 인간 생명을 살린다는 핑계를 대지 않을 수 없는 종말론적인 비극의식이 가미된다고 할지라도.
2017-08-07 | hrights | 조회: 93 | 추천: 0
미국/터키-카타르 동맹, 어디로 가나? 홍미정/ 단국대 중동학과 조교수 ■ 터키 군사쿠데타 시도를 강력 비난하는 카타르 카타르 전임 국왕 하마드 빈 칼리파 알 싸니(재위: 1995년 6월 27일–2013년 6월 25일)는 2016년 7월 15일 터키에서 발발한 군사쿠데타 시도를 강력하게 비난하였다. 그는 “카타르는 합법적인 터키정부와 연대한다. 미국과 서방국가가 이 쿠데타의 배후다. 이 국가들과 사우디 외무장관 아델 알 주바이르가 공모하고 협력했다.”고 강조하였다. 이 때 하마드는 3년 전 2013년 7월 3일 사우디가 후원한 이집트 군부쿠데타를 상기한 듯이 보였다. 이 쿠데타는 카타르 국왕 하마드가 후원했던 무슬림형제단 출신의 이집트 대통령 무함마드 무르시(재임: 2012년 6월 30일-2013년 7월 3일)를 축출시켰다. 한걸음 더 나아가 2013년 12월 이집트는 무슬림형제단을 테러리스트 단체로 규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2015년 5월 이집트 법원은 무함마드 무르시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이렇게 곧 닥쳐올 불운을 내다보듯, 하마드 국왕은 이집트 쿠데타 발발 일주일 전 2013년 6월 25일 돌연히 아들 타밈에게 양위하였다. 이때 하마드 국왕이 아들에게 양위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이집트 쿠데타의 여파로 아마도 심각한 정치적인 위기에 직면했을 것 같다. ■ 터키-카타르의 국제적인 네트워크: 무슬림 형제단 후원 2011년 이후 아랍의 봄 동안 카타르와 터키는 사우디와 아랍에미리트에 맞서 이집트, 시리아, 리비아, 튀니지 등에서 강력한 반정부 세력이었던 무슬림형제단 연계 세력들을 후원하면서 정치변동을 이끌었다. 무슬림형제단 연계 세력들은 사우디와 아랍에미리트 내에서도 강력한 정치개혁을 요구했다. 카타르는 사우디와 동맹이었던 이집트 대통령 호스니 무바라크를 대체한 무슬림형제단 출신 무함마드 무르시를 지원하였으며, 사우디는 무함마드 무르시를 축출시킨 압델 파타 알 시시가 이끄는 군부쿠데타를 후원했다. 사우디가 후원한 이집트 군부쿠데타 성공은 카타르와 무슬림형제단의 역내 영향력을 급격하게 약화시켰다. 2013년 12월 이집트, 2014년 3월 사우디와 아랍에미리트도 각각 무슬림형제단을 테러리스트 단체로 규정하고, 자국 내 무슬림형제단 연계 세력들을 탄압하였다. 이에 터키와 카타르는 자신들이 역내에서 소외되었다는 것을 발견하였고, 강력한 정치·경제·군사적인 협력관계를 발전시켰다. 부유하지만, 인구나 영토적인 측면에서 초미니 국가인 카타르와 인구나 영토적인 면에서 대국인 터키 동맹은 무슬림형제단의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활용함으로써 역내에서 사우디를 능가하는 강력한 영향력을 확보할 수도 있다. 사우디(알 사흐와), 아랍에미리트(알 이슬라흐), 쿠웨이트(이슬람 입헌운동), 바레인(알 이슬라흐), 요르단(이슬람 행동전선), 리비아(리비아 돈), 팔레스타인(하마스) 등 아랍 각국에서 무슬림형제단 연계 세력은 각각 강력한 정부 반대파를 구성하고 있다. 더욱이 현재 무슬림형제단 연계 세력은 미국에서도 가장 잘 조직된 이슬람 공동체이며, 수 백 개의 모스크와 벤처기업 등을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터키-카타르 경제 협력 강화 인구 7천 5백만 명의 지역 강국 터키는 자국민 30만 명이 채 안 되는 초미니 걸프 부국 카타르와 경제협력을 비롯한 전방위적인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카타르와 터키 사이의 무역 규모는 2000년 3천8백만 달러, 2014년에 8억 달러, 2015년에는 15억 달러로 급증했다. 2015년 8월 현재 터키에서 카타르 투자는 2백억 달러를 넘어섰고, 터키에 투자한 국가들 중 2위를 차지했다. 이러한 추세가 유지된다면, 몇 년 내에 터키에서 카타르 투자가 1위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게다가 200여 개의 크고 작은 터키 회사들이 카타르에서 주로 건설, 전자, 무역업 분야에서 활약하면서, 약 140억 달러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장기적으로 이러한 터키-카타르 협력관계는 2009년 카타르가 제안했으나 시리아 대통령 바샤르 아사드가 거부한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즉 카타르에서 출발하여 시리아와 터키를 거쳐 유럽으로 가는 파이프라인 건설로 발전할 수도 있다. 이것은 유럽시장을 겨냥한 이란과 러시아 천연가스 수출 정책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다. 러시아를 방문한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오른쪽)이 9일(현지시간) 상트페테르부르크 콘스탄틴 궁에서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만나 악수하고 있다. 군부의 쿠데타 시도 이후 첫 외국 방문지로 러시아를 선택한 에르도안은 이날 푸틴과 정상회담을 하고 지난해 터키 전투기의 러시아 전폭기 격추 사건으로 훼손됐던 양국 관계를 전면 복원하기로 합의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 터키-카타르 합동군사기지 창설과 미국 2016년 4월 28일, 터키는 카타르에 합동군사기지를 창설하기로 카타르와 공식 협정을 체결하였다. 터키 국방장관 이스멧 일마즈와 카타르 국방장관 칼리드 알 아티야가 이 협정에 서명하였다. 이 합동군사기지는 터키가 최초로 설립하는 해외군사기지다. 터키 총리 아흐메트 다부토글루(재임:2014년 8월 28일–2016년 5월 24일)는 이 협정 체결에 대하여 “카타르 안보와 안정은 터키의 안보, 안정과 같다. 우리는 안정되고 안전한 걸프를 원한다. 터키와 카타르는 하나의 운명체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이 협정이 양국 사이에 대규모 방위산업 협력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합동군사기지는 여단 규모가 될 것이고, 3천 명 정도의 지상군을 터키여단장이 지휘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카타르 알 우데이드 공군기지에는 미중부군(US Central Command, CENTCOM) 전방사령부가 있으며, 1만 명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 미중부군 전방사령부 옆에 터키군 기지 설립 계획은 미국의 사전 동의 없이 이루어졌을 것 같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월 29일 터키 대통령 에르도안은 “미중부군 사령관이 쿠데타 음모자들을 편들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게다가 카타르의 전임 국왕 하마드는 미국을 터키 군부쿠데타의 배후라고 비난하였다. 이것은 터키-카타르의 역내 정책과 미국의 역내 정책이 마찰을 빚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친미국가 카타르 정치에서 미국 영향력의 깊이를 의심하게 만든다. 이를 뒷받침하듯 터키 대통령 에르도안은 2016년 8월 9일 러시아를 방문하여 푸틴 대통령을 만난다. 이번 에르도안의 러시아 방문은 7월 15일 쿠데타 이후 처음으로 하는 외국 여행이다. 터키 관리들과 미디어들은 미국이 터키쿠데타의 배후라고 강력히 주장하였으며, 실제로 미국은 이 쿠데타 발발 초기에 매우 모호한 태도를 취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러시아는 이 쿠데타 발발 초기부터 쿠데타 시도를 강력하게 비난함으로써 에르도안의 좋은 친구임을 보여 주었고, CIA가 이 쿠데타 시도의 배후라고 주장하였다. 이제 터키-카타르 군사동맹은 미국과는 복잡하고 미묘한 관계지만, 러시아와 강력한 협력관계를 구축한다면, 이란, 사우디, 아랍에미리트, 이집트 등 역내 강국들에 맞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로 인해서 역내 불안정성은 더욱 심화·격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 하늘이여 불쌍한 중생들을 도우소서! -
2017-08-07 | hrights | 조회: 115 | 추천: 0
김재완/ 방송대 법학과 교수 정부는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활동을 2016년 6월 30일자로 사실상 종료시켰다. 세월호진상규명법 제7조 제1항은 “위원회는 그 구성을 마친 날부터 1년 이내에 활동을 완료하여야 한다. 다만, 이 기간 이내에 활동을 완료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위원회의 의결로 한 차례만 활동기간을 6개월 이내에서 연장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조항에 대해, 정부는 세월호진상규명법이 2015년 1월 1일에 시행되었으므로 그 기간의 연장이 가능한 시한이 6월 30일까지이고, 따라서 특조위의 조사활동 기간은 끝났다는 입장을 취한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부의 해석은 지나치게 형식적이고 자의적이다. 실제 특조위의 상임위원 임명은 2015년 3월 5일이었고, 국무회의에서 특조위의 예산이 통과된 것은 같은 해 8월 4일이었다. 이때 어느 시점에서 “위원회는 그 구성을 마친 날부터”에 해당된다고 보아야 할까? 우선 특조위의 조사활동 등이 실제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예산 지원이 있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위원회의 구성을 마친 시점은 활동을 개시할 수 있는 준비를 완료한 날로 해석해야 한다. 이렇게 해석할 때, 특조위의 구성 완료 시점은 2015년 8월 5일이 된다. 따라서 정부의 주장처럼 특조위의 조사활동시한이 이미 끝난 것이 아니라, 현재 아직 1년도 되지 않은 것이다. 사진 출처 - 뉴스1 그러나 근본적으로 세월호진상규명법상의 특조위 조사활동 및 백서 발간 기간의 활동시한 1년 9개월은 사안의 중대성에 비해 너무나 짧은 것이다. 세월호참사에서 정부는 생명안전에 대한 감독책임을 다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행태가 기업과의 먹이사슬로 연결되어 있는 등 총체적이고 구조적으로 뿌리박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한 참사 이후 국가는 국민의 시선을 탈출한 선장, 청해진 유씨 일가와 구원파에게 향하도록 조장함으로써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연출을 시작했다. 유족에 대한 금전배상 프레임과 진상규명 활동에 적극적인 유족들을 폭도나 종북세력으로 몰아가기, 특조위를 예산을 낭비하는 세금도둑으로 매도하기, 정부의 특조위 구성과 업무 방해하기 등으로 책임회피와 은폐를 위한 연출은 정점을 찍었다. 이재승 건국대 법전원 교수는 세월호참사를 세 단계에 걸친 국가범죄로 규정한다. 첫째는 구조적 원인의 측면에서 생명안전에 대한 국가감독책임의 총체적 방기와 기업의 부패가 결합한 국가․기업범죄라는 것, 둘째는 참사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해경 및 구조본부의 조직적 부작위와 무책임은 전형적인 국가범죄라는 것, 셋째는 참사 이후의 상황에서 정부, 호위세력, 그 매체들의 ‘희생자 다시 때리기’와 책임 부인은 국가․사회범죄라는 것이다. 사안의 심각성과 중대성에 비추어 볼 때, 실제적으로 특조위에게 주어진 물리적인 시간은 매우 짧은 것일 수밖에 없다. 한편 특조위 및 소위원회의 업무는 참사의 원인 규명, 참사의 원인을 제공한 법령, 제도, 정책, 관행 등에 대한 개혁 및 대책 수립, 재해·재난의 예방과 대응방안 마련 등 안전한 사회 건설을 위한 종합대책 수립, 피해자 지원대책의 점검 등이다. 세월호진상규명법의 궁극적인 목적은 참사의 진실을 규명하여 안전사회를 구축함으로써 재발을 방지하자는 것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예산 지원 삭감 및 인력 감축, 업무방해 행위 등의 기만적․폭력적 행태로 인해 특별법의 목적과 취지에 부합하는 결과를 도출하지도 못한 채 특조위의 활동은 사실상 그 생명을 다하게 되고 말았다. 세월호참사를 하나의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 거대한 국가․기업․사회범죄로 만든 것은 바로 국가 자신이다. 그리고 지난 총선에서 시민은 의회가 국가의 잘못을 바로 잡아 주도록 야권에 힘을 실어 줌으로써 희생자를 애도하는 정치의 모습도 보여 주었다. 의회는 충분하고 실질적 조사가 가능하도록 기간을 보장해주어야 한다. 여야의 정치적 합의에 의한 수개월의 연명에 그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진실규명과 재발방지를 통해 피해자의 인권을 충족하고, 시민의 생명안전이 온전해 질 수 있는 정치적․제도적․문화적 구축을 위해서 그에 걸맞은 활동조건과 시간이 충분히 보장되는 근본적인 개정이 필요하다. 다시 한 번 또 다른 세월호참사가 일어난다면, 그 안에 당신 또는 당신의 가족이 있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2017-08-07 | hrights | 조회: 95 | 추천: 0
이문영/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 얼마 전 톨스토이와 관련한 작은 책을 냈다. 제목은 <톨스토이와 평화>. 이 자리를 책을 홍보하는 불순한 목적으로 이용할 생각은 없다. 다만 책을 쓰게 된 문제의식을 칼럼의 독자들과 나누고픈 생각이다. 다음 달이면 톨스토이 탄생 188주년을 맞게 되니 맞춤 맞기도 하다. 한국사람 중 톨스토이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파지는 그 두꺼운 책을 정작 끝까지 읽어낸 사람은 얼마 없더라도, 아마 이름 정도는 누구나 알 것이다. 걔 중에는 고전영화 <전쟁과 평화> 속 상큼하기 이를 데 없는 오드리 헵번의 모습을, <안나 카레니나> 속 소피 마르소의 처연하게 아름다운 모습을 떠올릴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마음대로 사랑하고 마음대로 떠나버린 첫사랑 도련님과 정든 밤을 못 잊어...” 운운하는 오래된 유행가 <카추샤의 노래>를 흥얼거릴 사람이 있을지도. 그런데 이런 작가 톨스토이의 모습에는 인생의 스승, 삶의 지혜를 전해주는 현자(賢者)의 이미지가 어김없이 덧씌여져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사진 속의 그는 한결같이 흰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르고 소박한 러시아 농민복을 입은 모습이다. 그 할아버지 톨스토이에게서 우리는 성자나 구도자를 발견한다. 특히 2003년 MBC 교양프로그램 <느낌표>에서 『톨스토이 단편선』이 고전베스트로 뽑힌 이후로 “바보 이반 이야기”, “사람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같은 교훈적 우화가 큰 인기를 끌면서 이런 인상이 더욱 강해졌다. 성자 톨스토이의 이미지는 무엇보다 평화주의자 톨스토이로부터 비롯한다. ‘악에 대항하지 말라’던 그의 비폭력주의, 바보 이반이 보여주는 바보 같은 사랑, 물질에 대한 집착과 탐욕을 들어내고 진정한 믿음으로 영혼의 곳간을 채우라는 그의 설교가 무한경쟁에 내몰려 그 어느 때보다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위안이 되는 모양이다. 그것도 나쁘지만은 않다. 하지만 톨스토이는 그러한 비폭력이, 그러한 사랑이, 그러한 믿음이, 그리하여 마침내 진정한 평화가 어떻게 가능하다고 말했을까. 톨스토이는 이 모든 것이 ‘악에 대한 투쟁’ 속에 가능하다고 했다. 그가 직접 밝힌 바 있듯이, 흔히 알려진 그의 무저항주의는 악에 ‘폭력으로’ 대항하지 말라는 의미에서의 무저항인 것이지, 결코 악에 대한 투쟁을 포기하라는 수동적인 무저항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때의 악은 ‘혁명을 목전에 둔 차르 통치 하 제정 러시아’라는 구체적인 사회 조건 속에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사회악이었다. 톨스토이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폭력을 제도화하는 국가, 인간에 의한 인간의 노동 착취를 합법화하는 경제 질서, 그리고 그러한 폭력을 신의 법칙으로 정당화하는 기성 종교 등을 만악의 근원으로 여겼다. 이에 따라 그는 차르 정부, 군대, 경찰, 사법기관, 농노제나 자본주의 소유 구조, 그리고 러시아 정교회와 평생에 걸쳐 간단없이 가열차게 싸웠다. 악의 실행자들에 대한 톨스토이의 증오, 그들의 기만과 위선을 폭로하는 그의 언어는 너무나 강렬하고 신랄해서, 이 사람이 과연 ‘화내지 말라’, ‘원수를 내 몸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그 누구보다 충실히 따르고자 했던 그 톨스토이가 맞는지 헷갈릴 정도다. 또 그는 차르 전제정부를 넘어 모든 국가 권력을 부정했을 뿐 아니라, 애국심과 민족주의를 전쟁이라는 최고의 악을 초래하는 또 다른 악의 근원으로 매섭게 질타했다. 자연히 톨스토이는 보수 극우세력은 물론, 민족주의자나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 모두와 불화했을 뿐 아니라, 당대 국제 평화주의자들에게조차 제대로 이해받지 못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톨스토이, 즉 사랑과 용서, 무소유, 무저항을 설교하는 성자(聖者) 톨스토이의 후광 뒤에는 이렇게 탈국가, 탈민족을 외치던 근대의 이단아, 적그리스도라 불릴 정도로 파격적인 신앙을 설파하며 기성 권력과 맹렬히 싸운 전사(戰士) 톨스토이가 서 있다. 톨스토이의 유토피아는 국가로 대표되는 모든 제도화된 폭력의 거부 위에, 나아가 그러한 구조적 폭력은 물론, 정당방위로서의 개별적 폭력조차 허용하지 않는 견결한 비폭력주의에 기반한다. 이러한 절대적 평화주의는 어떤 의미에서는 그 무엇보다 전투적이고, 따라서 불온한 평화주의로, 안전한 이상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톨스토이 사상의 이 불온함, 과격함, 위험성은 그가 평생 추구했던 ‘평화’를 오히려 생동하게 만든다. 평화는 너무나 당연해 진부해진 단어다. 그러나 인류는 한 번도 평화를 제대로 실행한 적도, 따라서 제대로 누린 적도 없다. 일본의 메이지 사상가 나카에 조민(中江兆民)의 말을 빌리자면, “언사로는 극히 진부해도 실행으로는 신선한” 것, 그것이 평화다. 다시 조민의 말. “자, 그 실행으로는 신선한 것이 이론으로는 진부한 것은 과연 누구의 죄인가.” 평화 잘못도 있고, 우리 잘못도 있다. 톨스토이의 급진성, 그의 과격함, 그의 모순은 평화의 규범성, 상투성을 뒤흔들어 그것을 살아 숨쉬게 만든다. 그럼으로써 우리를 자꾸 생각하게, 돌아보게 만든다. 그런 톨스토이를 도덕 타령, 사랑 타령이나 하는 고리타분한 성인군자로만 알고 끝난다면, 그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2017-08-07 | hrights | 조회: 102 | 추천: 0
정재원/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 국민투표 결과 영국이 마침내 유럽연합 탈퇴를 선언했다. 이른바 브렉시트. 국민투표 전은 물론 유럽연합 탈퇴로 끝난 투표 결과 이후 수많은 논란과 다양한 전망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특히 브렉시트 발 세계 경제 위기에 대한 우려가 많은 이들에게 커다란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는데, 이는 ‘경제 악화 시 내부의 분열을 추동하는 자들로 인해 국가가 패망한 사례들이 있다’며 국민을 협박하는 대통령 담화문을 필두로, 연일 기업인들과 그들의 입인 언론들을 통해 임금 동결 등의 근거로 활용되고 있는 상황이다. 어찌 되었든 많은 이들이 브렉시트가 한국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 걱정을 하고 있는데, 일부 전문가들과 지식인들은 향후 영국 경제 자체에 대한 관심이 큰 반면, 또 다른 지식인들과 활동가들은 브렉시트가 진보적인 것인지 아니면 반대로 반동적인 사안인지에 대해 혼란스러운 논쟁을 전개하고 있다. 물론 이런 논쟁은 한국에서만의 논쟁은 아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몇 가지 잘못된 관념적 근거로 인해 논쟁은 엉뚱하게 전개되기도 한다. 단순히 향후 예측이나 논쟁 자체가 문제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가장 올바른 입장을 취하고 있어야 할 진보적인 집단들이 잘못된 정세 판단을 하고 있고, 그것을 근거로 한국에서의 상황에 잘못 적용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하기 때문에 잘못된 정세 인식에 근거한 브렉시트 분석은 피해야 한다. 사실 유럽연합 탈퇴 혹은 잔류 중 무엇이 좌파적인 대안인지를 논하는 것이나 아직 닥치지도 않은 경제 예측에 근거한 논쟁 같은 것은 큰 의미를 갖지 못 한다. 물론 브렉시트로 인한 영국 자체의 경제적 전망이 아닌, 그것이 세계 경제와 한국 경제에 미칠 수 있는 영향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와 분석, 그리고 대처 방안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외적 변수들을 악용하여 경제 위기를 과장함으로써 민중을 협박하고 이를 통해 자신들의 기득권을 강화하려는 위정자들의 논리에 맞서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브렉시트를 둘러싼 논란들에서 올바른 입장을 취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즉 한국적 맥락에서 브렉시트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사진 출처 - 뉴스1 일단 영국 특유의 정치적, 역사문화적 요인들을 제외하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영국인들이 유럽연합 탈퇴에 더 많은 투표를 한 근본적인 원인은 신자유주의로 인한 고통을 겪어 온 다수 노동대중의 불만에서 기인한 것이긴 하지만, 이는 신자유주의 혹은 세계화에 대한 좌파적 반대와는 전혀 거리가 멀다. 따라서 브렉시트가 민중의 기득권 계급에 대한 반란, 신자유주의와 세계화에 대한 반대라는 주장은 절반만 사실이다. 설사 고통받는 노동 대중의 반란이라는 것이 문제의 본질이라 할지라도, 이들의 그 반란의 방향이 엉뚱한 데로 향해 있고, 그 불만의 해소를 위해 극우적 선택을 한 것이라면 그런 주장은 쉽게 해서는 안 된다. 여타의 공동체와는 달리 진보적인 측면도 갖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유럽연합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산물이다. 그리고 유럽연합 내 중심부 주도 국가 지배 계급의, 유럽 주변부 국가들과 노동대중들에 대한 횡포와 착취는 가히 절정에 달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노동 대중의 불만과 저항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노동 대중, 특히 하층 계급들의 불만과 저항은 언제나 진보적이고, 그들의 대안은 언제나 비진보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는 받아들여야 한다.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것이 극우적 대안으로 유럽 곳곳에서 나타나는 상황에서, 우리는 너무 한 쪽만을 보고 지지와 비판의 양극적 선택이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비유하자면, 자의든 타의든 그 어느 때보다 신자유주의 정책을 강하게 추진함으로써 신자유주의 국가화에 정점을 찍은 김대중-노무현 정권 하에서 고통 받았던 대중들이 이명박 후보를 대안으로 삼은 결과를 낳았는데도 신자유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노동대중의 반란이라는 것 자체에만 집중하여 찬양하고 있는 것과 유사하다. 또한 전문가들조차 갑작스럽게 고립주의라는 용어와 개념을 마구 쓰고 있지만, 고립주의라는 이름의 극우민족주의나 국가주의를 주장하는 이들이 승리하여 설사 그들의 의도대로 정치가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영국은 신자유주의의 주요 주도자의 역할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시리아 난민 문제 등 최근 이민의 문제가 부각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미 그 이전부터 유럽 제 국가들 내부에서는 신자유주의 정책의 확대로 인한 민영화, 노동 유연화와 구조적 실업 증가, 그리고 복지 축소 등으로 인해 사회불평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유럽연합의 중심부 국가들에서도 상황이 이러할진대, 남유럽이나 동유럽 주변부 국가들의 경우, 그 상황은 한층 더 심각했다. 바로 이러한 토대 위에 이민자 문제가 불을 붙인 것이다. 따라서 이민자 문제만으로 대중의 불만이 극우화된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노동대중은 사회 불평등으로 인한 불만을 이미 다양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게 품어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제 인정해야 할 것이다. 이와 유사한 현상은 유럽 곳곳의 극우파 약진은 물론 미국의 트럼프 현상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영국의 브렉시트 국민투표가 기존의 신자유주의 글로벌 체제에 되돌릴 수 없는 균열을 가져왔다는 식의 좌파적 주장 역시 희망사항일 뿐이다. 2008년도 미국발 금융위기 당시 다수의 진보좌파 진영에서는 신자유주의가 종언을 고했다는 주장을 너무나 쉽게 하곤 했다. 이는 자본주의 위기론이나 미국 패권 붕괴론만큼이나 참으로 자주 등장하는 단골 메뉴인데, 이는 신자유주의를 이론으로만 배웠거나 단선적이고 피상적으로만 인식하는 데에서 오는 오류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신자유주의 글로벌 체제는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끊임없이 그 모습을 바꿔가며 유지될 것이고, 유럽연합 전체가 해체되지 않는 한 영국과 일부 유럽 국가가 탈퇴한다고 하더라도 현재 국제경제체제는 큰 변화 없이 유지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브렉시트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는 물론 나아가 미국과 유럽이 주도하는 세계자본주의체제에는 커다란 변화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분명 신자유주의에 반하는 것처럼 보이는 각종 극우주의와 국가주의적 정치가 전 세계에 강력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러나 그 극우주의 정치는 변신을 거듭하는 자본가 중심의 신자유주의 정책과 절묘하게 결합될 것이다. 신자유주의에 반하는 것이라고 과도한 찬사를 보내는 그 틈으로 극우주의 정치를 키워주는 오류는 이제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어디까지가 신자유주의이고 어디까지가 자본주의 시장 경제체제인지조차 구분하지 못 하는 상황에서 신자유주의가 만악의 근원이라며 다른 반동을 보지 못 해서는 안 된다. 바로 그것이 또 다른 자본의 독재를 허용하는 지름길이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100 | 추천: 0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 ‘수요산책’이란 말에 전혀 걸맞지 않은 철학의 근본 문제를 불쑥 끄집어 올려 죄송합니다. 하지만 인권연대의 식구들 모두 한 번쯤 들어봄직하다 싶어 제시합니다. 1.철학적 사유에서도 정확한 방법이 있었으면 좋으련만, 하고서 평소에 안타까워하는 심정이었다. 물리학과는 달리 철학은, 수학이라고 하는 장구한 역사를 통해 비교적 연속적으로 발전되어 온 바 객관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할 수 있는 공인된 도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여러모로 정교한 방향으로 발달해 온 실험 장치들이 있어 직관을 넘어선 뚜렷한 관찰을 반복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곤 했던 것이다. 철학적 사유를 해 나갈 때 뚜렷한 방법이 있다면, 달리 말해 어떻게든 역사적인 검증 과정을 거친 나머지 상호주관적인 권위를 갖고 있는 그런 방법이 있다면, 그래서 내가 그 방법을 젊을 때부터 숙지해 온 데다 많은 적용을 거쳐 그 성과를 확인한 경험이 누적되어 있다면, 이제 새로운 주제 영역을 선정해서 그 영역을 대상으로 철학적인 방법을 적용하여 기술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이 강력한 권위를 가진 철학적 방법은 더군다나 오늘날 이른바 ‘포스트 시대’에 이르러서는 무망해 보인다. 상호주관적인 권위를 가진 철학적 방법이 없다는 것은 철학적 사유를 외롭고 고독하게 만든다. 결국에는 자기 나름의 방법을 안출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들뢰즈(Gille Deleuze, 1925~1995)와 가타리(Pierre-Félix Guattari, 1930~1992)는 한통속의 공저인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통해 철학의 작업을 개념을 창조하는 것이라는 취지의 말을 했지만, 오히려 철학이란 사유의 방법을 창안하는 것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개념미술을 주창하는 일파에서 예술작품 하나가 제작되는 것과 예술론 하나가 창안되는 것이 동시적인 일이라고 한 것처럼, 한 사람의 철학자가 탄생한다는 것은 하나의 특정한 철학적 사유의 방법이 탄생하는 것과 동시적인 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철학이 이성적인 분석을 빼놓을 수는 없고, 그럴 수 있기 위해서는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개념들을 활용하지 않을 수 없다. 기존의 많은 철학자들이 창안하여 활용한 바 있는 개념들이란 그들 각자가 그 당시 놓인 철학사상적인 맥락에서 주어진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조성한 것임에 틀림없다. 물론 그 개념들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성했는데도, 오히려 그 개념들 때문에 새로운 문제들이 생겨나기도 했을 것이다. 예컨대, 대다수 사람들이 태양을 신으로 확신하는 신화의 시대에 제시한 이성 즉 로고스가 오늘날 첨단 과학의 시대에 제시될 법한 이성과 동일한 의미를 지닐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수 천만 명이 죽어나가는 대대적인 전쟁을 겪으면서 제시한 인간 개념이, 수 십억 명의 노동자들의 활동을 이윤으로 바꾸어내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자본주의적인 복잡 미묘한 수탈의 네트워크를 염두에 두면서 제시한 인간 개념과 동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정신병적인 고착에 의거한 편집증적인 경향을 지님으로써 다른 사람들과 거의 차단된 삶을 영위하는 인간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욕망과 감정 그리고 판단과 의지 및 행동에 관련된 개념이, 다른 사람들과 대체로 무난하고 원활한 관계를 맺고서 살아가면서 평상심을 유지하는 경향을 지닌 인간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욕망과 감정 그리고 판단과 의지 및 행동에 관련된 개념과 같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철학적 사유를 전개할 때 제 스스로 붙들고 씨름하는 문제의 성격과 한계를 염두에 두고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왕의 전해오는 개념들을 각자 나름으로 비틀어 또다시 갱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작업은 결국 자기 나름의 철학적 사유의 방법에 의거해서 수행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철학적 사유의 고독이 비롯되고, 그 철학적 사유의 고독이 각종 철학적인 표현의 수행조차 외롭고 고독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고 철학적 대화와 토론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 반대로,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철학적 대화와 토론이 불가피하다. 다만, 비록 쉽지는 않겠지만, 거기에서 각자 설정하고 있는 문제의 성격과 한계를 대화자에게 정확하게 드러낼 수 있는 기본 역량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2. 철학적 사유를 해 나가는 데 있어서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특정한 부분과 보편적인 전체와의 관계다. 특정한 부분에 집착하여 거기에서 발원하는 뭇 중요한 철학적 개념들이 마치 보편적인 전체에 관해서도 크게 분석적인 위력을 발휘한다고 믿는 것도 문제이거니와, 보편적인 전체를 한꺼번에 포괄하여 그 추상적이고 근본적인 얼개를 제시하기만 하면 그것이 특정한 부분들에 곧바로 크게 분석적인 위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라 믿는 것도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는 추상으로의 상승의 길과 구체로의 하강의 길을 동시에 오르내리면서 항상 주위를 주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요컨대, 특정한 부분의 영역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과 그에 따른 기술을 할 경우, 거기에 이미 늘 보편적인 전체에 관련된 잠정적인 요인들이 지평적인 바탕으로서 작동하고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하고, 그와 동시에 보편적인 전체에 대한 추상적인 분석과 그에 따른 기술을 할 경우에는 거기에 이미 늘 특정한 부분의 영역에서 치고 올라오는 구체성의 위력이 어떻게 추상적인 개념들과 그 구조를 채우거나 그것들에서 벗어나는가를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다. 보편적인 전체를 그 추상적인 얼개를 드러내어 들여다보고자 할 경우, 아무래도 체계적인 비판을 수행하는 이성이 크게 요구될 것이고, 특정한 부분을 그 구체적인 내용을 드러내어 들여다보고자 할 경우, 아무래도 집중적인 관찰을 수행하는 직관이 크게 요구될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성적인 비판과 직관적인 분석의 재빠른 상호 교환적인 수행이야말로 철학적 사유를 하는 데 기초가 된다고 할 것이다. 따지자면, 이는 일종의 철학적 사유의 방법이다. 설사 이러한 추상과 구체의 오르내림, 부분과 전체의 상호 적용과 검토, 그리고 이성적인 비판과 직관적인 분석의 재빠른 상호 교환 등이 제법 철학적 사유의 일반적인 방법으로 제시된다고 할지라도, 앞서 제시한 바 철학사상적인 맥락에 따라 그 의미를 달리하는 제반 철학적 개념들을 이제 제 나름의 문제 틀에 따라 독창적으로 갱신하여 활용하는 데 따른 어려움은 여전한 것이다. 더욱이 전통적으로 전래되어 오는 개념들을 본인이 어떻게 다르게 비틀어 갱신할 수밖에 없는가를 드러내기 위해, 그렇게 갱신할 때 그 이전의 개념들이 어떤 의미로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일일이 밝히면서 비교해야 하는 거친 수고를 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그 어려움은 예사로 배가되는 것이다. 에드워드 후설 사진 출처 - 구글 3. 그런데 현상학의 비조(鼻祖)인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은 ‘엄밀한 학으로서의 철학’을 건립하고자 하면서 다음과 같은 기묘한 말을 한다. “미리 주어진 어떠한 것도 받아들이지 않고 전해져 내려오는 어떠한 것도 그 출발점으로 삼지 않으며 아무리 위대한 대가라도 그 명성에 현혹되지 않고.” 이는 나중에 저 유명한, 심지어 ‘있음과 없음’ 그리고 ‘…임과 …아님’에 관련된 일체의 판단을 괄호로 묶어 무력하게 만드는 ‘판단중지’(Epoche)라는 기묘한 철학적 방법을 형성하는 바탕이 된다. 후설의 이 ‘판단중지’는 마치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가 ‘방법적 회의’라는 철학적 방법을 내세워 사유하는 자아를 제외하고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일체의 것들을 철학적 사유를 전개해 나가는 바탕에서 제거해버린 것과 같다. 오히려 그보다 더 심하다. 왜냐하면, 데카르트는 사유하는 자신의 정신을 실체로 여긴데 반해, 후설은 사유하는 자신의 순수한 자아마저 제거해버리는 모험을 감행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철학적 사유를 하는 자신의 존재마저 방법적으로 짐짓 제거해 버린 뒤 후설이 발견한 것은 ‘찰나’였다. 말을 하자니 ‘찰나’라고 하지만, 이 지경에서는 그 어떤 개념은 말할 것도 없고 그 개념을 담아내는 기표에 해당하는 그 어떤 언어적인 기호조차 불가능하다. 종이를 불태우면 검게 타 바스라지면서 무한극소의 연기와 재만 남듯이, 일체의 존재를 불태운 뒤 남는 극미한 흔적뿐이다. 이를 일컬어 후설은 ‘의식의 내실적 영역’(reelle Sphäre des Bewußtseins)이라는 어려운 말을 하고, 또 ‘현상학적인 잔여’(das phänomenelogische Residuum)라고 달리 일컫기도 했다. 굳이 표현하자면, 이는 극단적으로 극미한 순간에 그런데도 무한소의 두께를 지니고서 무한한 너비로 펼쳐져 있는 일종의 ‘환(幻)의 풍경’이라 할 것이다. 후설은 워낙 근본적인 이러한 철학적 방법을 안출하여 동원함으로써 존재가 근본적인 것이 아님을 그 나름 밝혀냈다. 그러니 어찌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암송하는 불교철학자들의 관심을 끌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싶다. 그러나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극미한 찰나의 얇디얇은 ‘환의 풍경’ 대신에 굳건하기 이를 데 없는 삼라만상의 이 지독한 안정된 지속성, 비유컨대 원자의 구조를 밝혀내어 양자역학의 선구자로 군림하게 된 닐스 보어(Niels Bohr, 1885~1962)가 자신의 출발점으로 삼은 ‘물질의 안정성’ 내지는 ‘원자의 안정성’을 연상케 하는바, 사물의 옹골찬 지속성이 오히려 무한 두께를 지니고서 광대무변하게 도사리고 있다. 그럼으로써 생각하는 자아가 돌아오고, 생각하는 자아가 터로 삼고 있는 하나의 몸이 돌아오고, 하나의 몸과 뭇 사물들이 펼치는 관계의 대향연이 돌아온다. 이 ‘사물 관계의 대향연’을 바라보는 태도(관점)를 후설은 ‘자연적 태도’라고 했고, 이 ‘사물 관계의 대향연’이 벌어지는 세계가 굳건하게 유지된다고 믿는 것을 ‘자연적 태도의 일반정립’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그러한 자연적 태도의 일반정립을 에포케 함으로써 앞서 말한 현상학적인 절대 잔여인 극미한 환의 풍경이라고 했던 것이다. 양극이다. 한쪽 극(極)에는 ‘극미한 환의 찰나적인 풍경’이 도사리고 있고, 다른 한쪽의 극(極)에는 ‘옹골찬 사물들 간에 벌어지는 관계의 대향연’이 도사리고 있다. 두 극 중 어느 한 극이 다른 극에 비해 워낙 근본적이어서 덜 근본적인 극을 더 근본적인 극으로 환원하는 일이 가능할 것인가? 아니면, 두 극 중 어느 극이 더 근본적이라고 할 수 없고 그와 동시에 두 극 모두 근본적이라고 하기에는 워낙 서로 모순적이어서, 알고 보면 아직은 알 수 없는 제3의 어떤 극이 기묘하게 대립된 방향으로 분기되어 나온 탓에 두 극이 성립하게 된다고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릴 것인가? 혹은 아니면, 아직은 알 수 없는 제3의 그 어떤 극이 이 두 극이 극적(劇的)으로 충돌하여 이른바 변증법적인 종합을 이룸으로써 생겨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릴 것인가? 이 같은 물음들이 철학적 사유에 있어서 근원적인 문제를 함축하고 있음을 확신하면서 이에 접근할 수 있는 새로운 출발점이라 여겨지는 ‘제3의 극’을 찾기 위한 분석에 돌입하게 된다. 첫째, 가장 넓은 의미에서 본 그러한 의식을 벗어난 자가 원리상 존립할 수는 없다. 따라서 위 양극의 근본 사태는 어떻게든 의식과의 관련을 벗어날 수 없다. 둘째, 전자의 극인 ‘극미한 환의 찰나적인 풍경’이 의식되는 방식은 최대한으로 의식에 의거한 방식이고, 후자의 극인 ‘옹골찬 사물들 간에 벌어지는 관계의 대향연’이 의식되는 방식은 최대한 의식으로부터 분리된 방식이다. 말하자면, 전자의 경우에는 의식이 한껏 앞으로 나가 있고, 후자의 경우에는 의식이 한껏 뒤로 물러나 있다. 셋째, 두 경우 모두 워낙 극단적이기에 분명 추상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둘이 순전히 정신적이라거나 또는 물질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정신이나 물질이란 개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지경에 들어서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세 가지 정도의 분석에 입각해서 ‘제3의 새로운 극’을 모색하고자 한다. 그 일책은 의식이 너무 한껏 나가 있는 것도 아니고 너무 한껏 뒤로 물러나 있지 않은 지경을 오히려 두 극에 비해 더욱 근본적인 사태로 확인하는 것이다. 그 근본적인 사태는 다름 아니라 ‘지금·여기’이다. 이때 ‘지금’은 열려 있으면서도 일정하게 지속하기에 결코 찰나의 순간도 아니고 무한정한 연속도 아니다. 또한 이때 ‘여기’는 두툼한 질적 부피가 상하좌우로 펼쳐지면서 열려 있으면서도 일정하게 제한되고 있기에 무한정한 텅 빈 공간이 아니다. ‘지금’과 ‘여기’는 혼연(渾然)한 일체를 이루고 있어, 방금처럼 사유를 통해 억지로 구분할 수는 있으나 그 존립에 있어서 따로 분리될 수는 없다. 이러한 ‘지금·여기’를 일컬어 ‘현존’(現存, existence)이라고 한다. ‘현존’은 ‘본질’(本質, essence)과 크게 구분되는 것으로 여겨져 왔지만, 오히려 ‘존재’(存在, being)와의 관련에서 보아야 한다. 4. [존재] 플라톤(Platon, 기원전 427~347)은 존재를 본디 형상(形相, eidos)인 ‘이데아’에 귀속된 것으로 보고,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기원전 384~322)는 존재를 감각적으로 드러나는 속성(屬性, symbebecota)들의 바탕으로 작동하는 제1실체로서의 ‘기체(基體, hypokeimenon)’에 귀속시켰다. 그리고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는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라 존재를 일반적으로 실체에 귀속시키면서 궁극적으로는 근원적이며 단순한 실체인 ‘신’에 귀속시켰다. 근대로 들어서면서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는 존재를 ‘사유 자체’에 귀속시켰고, 이를 넘겨받은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존재를 구성된 현상계로서의 자연에 귀속시켰다. 그러면서 이러한 존재를 근원적으로 가능케 하는 근본 역량인 ‘초월론적인 통각’(transzendentale Apperzeption)이라는 근원적인 주체와 ‘사물 자체’(Ding an sich)를 존재 너머의 세계, 이른바 ‘초월론적인 예지계’를 논리적인 요청에 의해 설정하게 되었다. 칸트가 남겨놓은 이러한 분리된 이중의 세계라는 난제를 헤겔(G.W.F. Hegel, 1770~1831)이 등장해 해결하면서 존재를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 자신을 전개하면서 결국에는 절대지에로 포섭되어 완결되는바 ‘구체적 보편자인 절대 정신’에 귀속되는 것으로 여겼다. 이후,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은 ‘존재 전체’(Seinsganz)를 넘어서면서도 포괄하는 ‘절대적인 의식의 흐름’(absoluter Bewußtseinsstrom)을 제시하게 된다. 그러면서 의식을 전혀 실체가 아닌 것으로 여겼다. 아울러 이 의식에서부터 시간이 근원적으로 형성되어 나온다는 것을 입증해 보였다. 이러한 후설의 시간의식 이론 내지는 의식시간 이론은 근원적인 심층 자체에서 볼 때 ‘의식이 곧 시간이고 시간이 곧 의식임’을 밝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시간을 근본 형식으로 하지 않는 존재는 성립할 수 없는 것임을 주장한 것이기에, 이미 그의 제자인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의 존재론을 마련해 놓은 것이라 할 것이다. 하이데거는 자신 이전의 모든 철학자들이 논구해 온 존재는 실은 존재(das Sein)가 아니라 존재자(das Seiendes)임을 역설했다. 그리고 존재에 대해서는 오로지 존재의 의미를 탐구할 수 있을 뿐임을 강조하면서 그 존재의 의미를 시간으로 보았다. 이는 “존재(Sein)를 시간(Zeit)으로부터 파악해야만 하고, 존재가 [여러모로] 양식화되고 파생될 때 그 다양한 양식들과 파생들이 실로 시간에 견주어 이해되어야 한다면, 그와 더불어 존재 자체(das Sein selbst) - 다만 ‘시간 속에서’ 존재하는 것인 존재자(Seiendes)가 결코 아닌 - 는 그 ‘시간적인’(zeitlichen) 성격에서 명백하게 될 것이다.”라는 1) 하이데거의 말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그렇다면 이렇게 발전되어 온 존재에 대한 철학사적인 논변들을 바탕으로 우리는 과연 무엇을 얻는가? 하이데거의 관점에서 후설을 재해석하게 되면, 후설이 말한 ‘존재전체’를 ‘존재자 전체’로 읽게 되고, 후설이 말했다고 할 수 있는 ‘존재 너머의 의식’과 ‘의식≒시간’을 ‘존재자 너머의 존재≒시간’으로 읽게 된다. 이를 우리 나름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존재의 규정을 얻기 위해 후설의 시간론과 하이데거의 역사성에 관한 논변들을 실마리로 삼아 다음 몇 가지 사안들을 추출해 내는 동시에 일종의 귀결을 얻고자 한다. (1) 후설이 극미한 간극으로 일어나는 의식의 ‘파지’와 ‘예지’의 작용에서 시간을 ‘근원적으로 종합’해내는 의식은 근본적으로 축적 작용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2) 후설이 ‘절대적인 의식의 흐름’에서 ‘초월론적인 역사성’(transzendentale Geschichte)을 그 근본 성격으로 해서 발생적인 구체적 자아를 건립할 수 있었던 것은 의식의 축적 작용에 의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3) 하이데거가 현존재 자체(das Dasein als solches)가 생기(生起, Geschehen)할 때 현존재 자체의 존재구도(Seinsverfassung)로서 ‘역사성’(Geschichtlichkeit)을 제시하고 이를 근거로 해서 ‘세계역사’(Weltgeschichte)가 가능하다고 한 것 2)은 후설이 말한바 의식의 축적작용에 의거한 시간의 구성적인 발생에서 시간이란 그저 맹목적으로 그리고 평면적으로 흘러가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 축적에 의거한 것임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4) 지금·여기의 현존은 극단적으로 미분화해서 보면 한 순간의 극미한 ‘길이’의 흐름이지만, 그 미분적인 흐름조차 근본적으로 축적에 의거해서 밀려 응축됨으로써 이미 늘 밀도와 강도를 자아내는 방식으로 존립한다. 하물며 현존의 활동을 통해 이루어지는 주체의 활동과 그 성과는 어떻게든 축적되어 밀려 응축됨으로써 이미 늘 밀도와 강도를 자아내는 방식으로 존립하는 것이다. (5) 이를 바탕으로, 우리 나름으로 ‘존재란 현존의 축적에 의거한 시간적인 밀도이다.’라고 말하게 된다. 또한 동시에 ‘존재를 지평적인 바탕으로 해서 지금·여기에서의 현존이 발휘된다.’라고 말하게 된다. 따라서 현존에 입각해서 볼 때, 존재는 ‘축적에 의거한 시간적인 밀도’를 계기로 해서 현존에서의 과거로 작동하고, 또한 ‘지금·여기에서의 현존에 활동에 대한 지평적인 바탕’으로서 현존에서의 미래로 작동한다고 말하게 된다. 1) Sein und Zeit, 18쪽. 2) 같은 책, 20쪽.
2017-08-07 | hrights | 조회: 207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