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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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이동화(아디 활동가),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 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신종환 / 공무원 시청 주변에는 내가 자주 보는 동물 친구들이 몇 있다. 시청 직원 주차장 뒤쪽에는 해조류 도매업을 하는 노부부의 창고 겸 작업장이 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창고 앞에는 2m 조금 안되는 줄에 고양이가 묶여 있었다.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아 슬쩍 물어보니 갑자기 죽었다고 했다. 나처럼 오가며 고양이를 이뻐하던 집배원 아저씨는 아마 안 묶인 채 살다가 어느날부터 묶여 그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죽었을 거라고 했다. 또 어느 날인가부터는 내 손바닥만한 바둑이 새끼 고양이가 창고 앞에 나타났다. 어디서 났냐고 물었더니 창고 쥐 잡는 용으로 얻어왔다고 했는데 누가 봐도 상태가 좋아보이지 않았다. 속으로 왜 병원에 안데려가나 욕하면서도 그대로 있으면 죽을 것 같아 허락을 구하고 병원에 데려가 주사를 맞히고 약을 타서 하루에 세 번 귀에 발라주고 안약은 하루에 두 번 넣어주라고 했다. 틈틈이 가보니 점점 건강해지는 것 같았던 고양이는 다음 예방접종을 맞히기로 한 전날 내 앞에서 차에 깔려 죽고 주인 아저씨와 삽으로 시청 주차장 앞에 고양이 간식과 묻어 주었다. 그리고 며칠 뒤 노랑 고양이가 다시 생겼고 나는 무심코 아주머니한테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했다. 정도 붙이기 전 고양이는 얼마 되지 않아 비오는 날 창고 문앞에서 죽어있는 채로 발견되었다. ‘이제 저집이랑은 상종도 하지 말아야지’하던 어느날 또 고양이가 나타났다. 또또 속으로 온갖 욕을 했지만 이번 친구는 제법 오래 살았고 정신 차리고 보니 트럭에 꼬리가 찝힌 친구를 내가 병원에 데려가고 수술 시키고 있었다. 미역집 아줌마는 지금도 이름없이 야옹이라고 얘를 부르고 나는 병원 데려가던 날부터 얘 이름을 맘속으로 또또라고 지었고 또또는 아직 잘 지낸다. 시청 뒤편 인근 게스트하우스로 가는 골목에는 1m 안되는 줄에 매인 콜리 믹스로 보이는 강아지가 있었다. 똘똘이 자유롭지 못한 개 특유의 발랄함에 마음이 안좋아서 출퇴근 때마다 간식을 주고는 했는데 어느날 마주친 주인이 얘 이름은 똘똘이라며 마음에 들면 데려가 키우라고 했다. 아저씨의 태도에 속으로 ‘음 주인이 시발놈이군.’ 하고 좀더 자주 가서 놀아주던 어느날인가 똘똘이는 혈뇨를 보더니 배가 부풀어 올랐다. 딴에는 챙겨준다는 생각인지 집주인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사료 대신 잔반을 주길래 그러지 말라고 하고는 내가 곧 병원에 데려간다고 했다. 다음 날 똘똘이는 보이지 않았고 짐작대로 죽었다. 그러고 일주일 즈음 뒤에 누가 봐도 믹스인 강아지가 똘똘이 주인 아저씨 옆에서 발랑 거리고 있길래 나도 모르게 “개를 또 데려 오셨어요?” 라고 묻고 아저씨는 모르는 개인데 자기 따라온다고 데려고 키우라고 했다. 더운 날이고 열심히 내게 달려들어 냄새 맡고 핥아내는 친구에게 물이랑 먹을 거라도 주려고 잠시 차로 간 사이 이친구는 없어졌다. 한시간 내내 보이는 사람마다 물어보니 여길 갔다 저길 갔다 제보가 있어 찾아보았지만 보이지 않았고, 나는 혹시 주인이 있을까봐 올릴 수 있는 곳에 전부 그 친구의 사진과 발견장소 등을 적었지만 연락은 오지 않고 그 날 저녁 속초시 동물보호소 사이트에서 그 친구의 사진을 볼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마주친 시간은 아주 잠시였지만 마음이 무거워 저녁도 넘어가지 않아 이런 부분에는 마음이 너그러운 엄마를 부엌으로 불러 사진을 보여주며 입양하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엄마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집에 어르신 견(각각 12세, 11세) 둘이 있어 안되는 걸 알지 않느냐고 했고 나도 알고는 있어서 조금 질질 짜고는 이내 포기했다. 지금도 다른 친구들의 사진을 보면 불쌍하다는 생각은 들지만 그렇게 마음이 아프지 않은데 그 아이의 사진을 보면 마음 한구석이 뭉개지는 느낌이 든다. 뭉개지는 마음을 느끼면서도 왜 이전에 떠난 친구들에게는 그런 마음이 들지 않을까 고민했는데, 아마 난 그때 그 아이가 내게 전적으로 스스로를 기대고 있고 세상에서 그 아이를 책임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나라는 걸 있어서였던 것 같았다. 그러니까, 그 아이는 몰랐지만 그 아이에겐 내가 전부였던 셈이다. 다른 친구들도 나에게 기댔지만 그때는 ‘내가 주인도 아닌데’라는 핑계로 도망갈 구석이 있었다. 돌돌이(유기동물 보호센터) 속초시 유기동물 센터는 안락사를 하지 않아 아마도 아직 거기 그대로 있을 그 친구를 생각하면 비슷한 처지에 있고 또 있을 것이고 있다가 죽었을 것들을 생각하다가 그런 친구들이 전국에 있고 또 전세계에 있을 것이고 그보다 못한 애들도 있을 거란 생각이 줄을 이어 잠시 질식하는 느낌에 둘러쌓이다 의도적으로 잊어버리고 그대로 산다. 하지만 마음에 흔적은 남고 생각이 꼬리를 물다 보면 결국 익히 듣게 되는 한국의 비극과 세상을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학생 시절 언론과 인터넷에서 읽은 내용이 떠오른다. 북유럽 몇몇 국가에서 교도소에서 수감자들에게 고양이를 기르게 했고 이후 수감자들의 폭력성과 스트레스가 유의미하게 감소했다는 내용. 사회인이 되기 전 나는 그런 글들을 읽으며 사랑은 각자의 삶에 의도치 않게 어떤 존재가 비집고 들어와 비중을 차지하고 그 존재에게 자기를 비추게 되면서 자연히 스스로와 타자를 연결지을 줄 알고 그 범위를 확장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사랑 자체는 그래서 순간이 주는 강렬한 열감보다는 고통에 의미있는 이름을 붙일 줄 알게 되는 감각적인 자각이라고 생각했고 몇몇 의미있는 경험과 배움이 더해지면 그게 다른 존재들에게까지 확장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은 일부분은 맞아떨어져서 사람 말고 말 못하는 친구들에 대한 관심은 그래도 예전보다는 많아졌고 처우도 나아졌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죽음의 평등을 정당성의 근거삼아 스스로의 조롱을 자랑스럽게 전시하는 이들, 나아가 전장연의 시위에 육두문자를 서슴지 않고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폭격에도 팔레스타인인들이 자초한 일이라는 사람들이 의견을 숨기지 않는다. 지금도 뭉개지고 있을 사람들, 사람 아닌 것들을 생각하면 짙은 염세가 마음에 드리우고 세상은 결국 망할 것이고 그래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다가 로마노 과르디니가 그래서 본인의 책 ‘삶과 나이’에 올바른 성년은 의미를 무력화하는 붕괴 과정의 한가운데서 의미를 지탱하려고 노력한다고 썼구나 싶다. 피 없이는 현실이 움직이지 않고, 한편으로는 피로 인해 변한 곳에서는 사랑이 싹틀 여지가 마련된다는 뜻으로 보인다. 요원한 긍정적 내일에의 길에 사람들이 그래서 기꺼이 피나는 발로 발자국을 겹쳤으려니 해서, 같이 가지는 못해도 그 궤적의 의미를 생각하고 잊이 않아보려 한다.
2024-06-18 | hrights | 조회: 13 | 추천: 0
김형수 / 장애인학생지원네크워크 사무국장 1. 아플 때의 풍경. 본인은 2년 전에 은평구로 전입신고한 장애인 중년 남성 1인 가구이다. 서대문구에서 20년을 넘게 살다가 은평구 노후 안착을 고민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의료접근성이었다. 연희동에서의 마지막 해를 보내는 크리스마스 이브 날 나는 대상포진을 발견했다. 그 이전부터 통증은 있었으나 뇌병변장애의 일상적인 경직이 주는 통증과 구별하기가 어려워서 발견이 늦었다. 얼른 병원을 가야했지만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피부과와 가정의학과, 내과 등은 모두 계단을 올라야 하고 혼자서 진료침대에 오르는 건 고역이며 무엇보다 진료를 받으러 간 내 질환보다 내 장애를 직관하고 더 당황스러워 하는 의료진 앞에서 내 장애로 불안해 하지 말라고 되레 내가 설득해야 하는 문제를 겪는다. 그래서 은평구로 이사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이 의료협동조합(살림병원)에 가입하여 조합원 인사를 하는 김에 '내 장애가 여기 있소' 미리 공개하고 장애인 주치의 제도를 신청한 것이다. 그러나 덜컥 갑자기 한밤중에 코로나 확진으로 열이 오르니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한밤중에 몸을 움직여 갈 수 있는 응급실이 있는지, 장애인 주치의는 이한밤 중에 요청할 수 있는지, 아니면 119를 불러야 하는지, 정작 심히 아프니 아무 생각도, 아무런 해결책도 떠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섣불리 움직였다가 낙상 사고가 나지 않을지 그게 더 두려웠다. 가까스로 병원을 가더라도 의료진들이 내 장애에 대해 익숙할지 그것도 알 수 없다. 아플 때 심야에 활동지원을 요청하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제도지만 일상같이 병원을 진료를 본다고 해도, 서울시 병원 안심 동행 서비스 이용은 가능한지도 알 수 없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도 안전을 안심할 수 없으니 결국 부정확한 자체 진단을 내리고 불안한 자가 치료를 할 수 밖에 없다. 2. 병원 갔을 때의 풍경. 그렇게 겨우 코로나로부터 회복하고 나니 이번에는 발들이 문제였다. 왼쪽 발목은 걷기가 힘들었고 오른쪽 발가락은 알 수 없는 통증이 심했다. 파스와 연고로 버티다 버티다 드디어 병원을 갔다. 인권적인 진료로 유명하고 기본적인 장애인편의시설은 잘 갖추었지만 건물 뒤편에 있는 주차장에 장애인주차구역은 딱 한 곳이라 서둘러야 한다. 간 김에 건강검진이 가능한지 물어보았다. 마침내 혼자 소변검사를 위한 샘플을 만들었다. 아무리 인권활동을 하더라도 진자처럼 목발을 휘저으며 온몸을 땅바닥으로 쏟아질 듯 병원 안으로 들어서는 것은 늘 익숙하지 않은 긴장을 만든다. 보통 목발이 딱딱 들어서는 순간 병원 접수처는 일순간 침묵이 흐르고 오만가지 대답을 준비해야 하는 시선들이 내 몸에 꽂혀 든다. 난 휴지를 팔지 않고도, 보호자 없이도, 당신들의 특별한 도움이 없어도 의사 앞에서 꼬꾸라지지 않고 또박 또박 아픈 증상을 진술할 수 있음을 최선을 다해 증명해야 한다. 일상적인 아픔은 병원을 잘 가지 않는다. 코로나에 걸려도, 정기 건강검진을 받아야 함에도 병원을 잘 가지 않는 장애인들이 대부분 그러할 것이다. 처음으로 코로나에 걸려서도 내원하지 않은 후유증으로 관절염과 욕창을 얻고 나서야 집 밖을 나서 동네 병원으로 향했다. 굳이 장애인 주치의 제도를 이용하지 않은 이유는 정확한 치료를 하려면 어치피 다시 병원을 가야할 번거로움이 있고, 장애인 주치의를 부른다고 바로 통증 완화과 질병을 위해 개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다시 시간을 조율해야 하며, 무엇보다 외부 사람을 위해 내 집안을 완전히 개방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다. 필요할 때, 급할 때 가서 기다리더라도 30분 거리 안에 1차 진료를 마음 편히 받는 곳이 있다는 것은 우리의 건강할 권리를 위해서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럼에도 여전히 병원 문을 여는 것은 경직된 일이지만 장애인 주치의가 우리집을 방문한 지 1년만에 찾아간 병원에서 아무도 내가 접수처에 도착할 때까지 신경쓰지 않았고 웃음띤 수다를 멈추지 않으셨다. 이제 진료실까지 넘어지지 않고 의사 선생님과 눈인사를 하며 등받이 없는 진료 의자에 무사히 안착하는 것이 남았다. 작년 정기검진을 놓친 이후 몸 여기저기 아픈 곳이 많았다. 무리한 강의로 말미암아 발목 관절염과 코로나 후유증 면역 저하로 치유가 쉽지 않은 발가락 욕창을 진단하셨다. 그리고는 한마디에 덧붙이셨다. “휠체어는 아직 타기 싫으시죠?” 솔직히 당황스럽기 보다 놀라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보통의 의사들은 이제는 휠체어를 타야 한다고 다소 단정적으로 진단 내리거나 내 장애로 인한 2차적인 질병을 잘 모를 때가 많다. 덧붙인 의사 선생님의 한마디에는 적어도 장애에 대한 충분한 경험과 공감이 묻어남을 신뢰할 수 있다. 사실 의사 선생님은 내 장애보다도 내가 진료가 용이하게 신고 간 벗기 쉬운 신발에 더 관심을 가지셨다. 더구나 머리조명까지 이마에 차고서 맨손으로 내 발가락을 꼼꼼히 소독하신다. 진료용 라텍스가 끼기가 귀찮아서일까? 아니면 감각에 민감한 내 장애의 경직을 이해하기 때문일까? 전부 알 수는 없지만 약국까지 가기 어려운 사정을 헤아려서인지 일주일 분의 소독재료까지 챙겨 주신다. 그래서 나도 용기를 내보았다. ‘건강검진도 미리 받을 수 있을까요’ 혼자 사는 장애인에게 정기검진은 위 대장 내시경을 제외하더라도 너무나도 큰 일이다. 그 중에서 자기 소변을 검사용으로 만드는 것이 가장 곤란할 것이다. 공식적인 활동지원사 옆이라도 민망하고 간호사 선생님이 직접 지원을 해도 부끄럽기 그지 없을 뿐 아니라 다들 혼자 뭐라도 하겠다 하면 그 불안 가득한 눈빛 때문에 더 긴장하여 검사를 위한 샘플을 얻기 힘들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우리 동네 의료조합은 장애에 대하여 자연스럽고 화장실도 신식은 아니더라도 장애인 위한 필수적인 환경은 갖추었으니 드디어 자력으로 성공해 냈다. 혼자서 소변 샘플을 안전하게 만들어 냈다. 무엇보다 많이 이동하며 검사하는 사람마다 내 장애를 설명하지 않아도 되니 무엇보다 안심이다. X-레이도 혼자 찍고 심지어 키를 재는 기계에도 스스로 올라갈 수 있었다. 아쉬운 하나는 키를 잴 때 장애로 굽어진 무릎을 누군가 눈치껏 꾹 눌러 주었다면 내 키가 오센티는 더 높아지지 않았을까? 장애인의 온당한 권리는 다른 것에 있지 않다. 다른 사람처럼 본인 동네에서 일상을 누리며 필요한 지원을 민망하지 않게 자연스럽게 생활하는 것에서 받을 수 있음에 있다. 매년 오는 장애인의 날은 바로 당신 옆에서, 당신의 일터에서 이를 존중하고 고민하는 것에 그 의의가 있다. 호들갑스러운 감동이나 위선이 아니라. 지역 사회 어디서나 어느 진료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장애인이든 우리 병원의 환자이며 내 환자이며 내 지역 주민이라서 정중히 거절할 수도 피할 수도 차별할 수도 없다는 의료인과 의료 기관의 책임의식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의료 종사자들의 의무적인 장애인 인권교육을 실증있게 할 것인가도 중요한 문제이다. 그 책임 의식이 장애인에 대한 익숙함을 숙지하고 그 익숙함이 장애인에 대한 의료전문성을 높일 것이다. 장애인에 대한 의료전문성이 높다는 것은 장애인을 존중하고 의료기관을 깊이 신뢰해서 어떤 물리적 어려움이 있더라도 쉬이 병원을 올 수 있게 하여야 장애로 인한 차별과 2차 질환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당장 물리적인 접근성이 떨어지더라도 당장 의사소통이 어렵더라도 지금 당장 장애인들이 병원 앞에 올 수 있는 믿음을 주어야 한다. 본 쪽글은 지난 5월 중순 은평구에서 열린  제2회 장애인 건강권 세미나 - 장애인의료접근성 향상을 위한 지역사회 변화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의 토론문을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2024-05-28 | hrights | 조회: 109 | 추천: 2
정한별 / 사회복지사  오는 6월부터 장애의 정도가 극히 심한 발달장애인에게 일상생활 훈련, 취미활동, 긴급돌봄, 자립생활 등을 전문적·통합적으로 지원하는 통합돌봄서비스가 시작된다. 정부의 아이돌봄사업 예산은 점점 늘어나고 있고, 노인장기요양보험·노인맞춤돌봄 서비스 예산 역시 점점 증가하고 있다. 바야흐로 돌봄의 시대이다.   “대체로 무엇이 엄청나게 강조된다는 것은 그것이 엄청나게 위협받고 무시당해왔다는 반증일 때가 많다”* 스웨덴과 한국의 차이: 사회적 인식   제도는 점점 발전하고 있는데, 돌봄 현실은 녹록지 않다고 느껴지는 일은 왜일까.스웨덴의 아동보육 제도는 단순히 공공보육의 확대가 아닌, 아동이 적절하고 건강한 돌봄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에 있다고 한다. 즉, 정책의 핵심이 시설, 기반의 확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돌봄을 통한 아동의 건강한 성장, 가족의 건강한 유지 그 자체에 있는 것이다. 이런 방향성에 기초해, 보통의 주 양육자인 부모가 자신의 자녀를 최대한 잘 돌볼 수 있도록 국가가 지원한다. 자녀를 돌볼 수 있는 육아휴직을 기본적으로 사용하고, 어린이집과 시간제 근무를 부모 모두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돌봄은 엄마가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같이 하는 것이라는 인식, 아이가 건강한 돌봄을 받을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야 한다는 인식이 사회적으로 자리 잡혀 있다.   반면에 한국의 아동보육 제도는 부모가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하는데, 보다 신경을 쓴다. 부모를 대신하는 다양한 보육 제도를 늘리고, 보육기관에서 보육을 받을 수 있는 시간을 늘리고, 보육 비용을 지원하는 식인 것이다. 물론 한국에서도 육아휴직, 탄력근로 모두 제도로서 규정되어 있다. 다만, 제도가 있는 것과 제도를 쓸 수 있는 것은 서로 다르다. 최근 한 언론에는 직장인 대다수가 10년도 넘은 가족돌봄휴가 제도를 쓰는 일이 어렵다는 기사가 실렸다.**  돌봄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 구성원들의 인식이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 낸다. 이는 단순히 복지(제도)의 확장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사소한 것들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클레이 키건의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아일랜드의 막달레나 세탁소(수용소)의 이야기를 전한다. 소설의 주인공 펄롱은 석탄, 목재상이다. 윌슨이라는 미망인이 미혼모인 펄롱의 어머니와 펄롱을 진심으로 돌본 덕에 펄롱은 딸 다섯과 아내와 함께 나름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자라났다. 펄롱은 딸들을 도시의 유명한 여학교에 보내고, 사람들과도 잘 어울리며 살고 싶은 소박한 소망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어느날 우연히, 펄롱은 석탄 배달을 간 수녀원에서 헐벗은 채 청소를 하는 소녀들을 보게 된다. 당시, 수녀원은 어린 미혼모 등을 세탁소에서 일을 시키고 그의 아기들은 해외에 판매 한다는 소문이 파다한 곳이 었다. 펄롱은 세탁소에서 목격한 일들로 내적 갈등을 겪지만, 펄롱의 주변 사람들, 심지어 아내마저도 ‘다들 그렇게 모른 채 하고 살아간다. 우리랑은 아무런 상관 없는 일 아니냐’ 며 펄롱에게 세탁소에 대한 관심을 끊으라고 책망한다. 하지만, 펄롱은 윌슨부인이 아무런 관련도 없던 자신의 어머니와 자신을 돌봐 줬던 것처럼, 수녀원 석탄 광에 갇힌 소녀를 돕게 된다.   펄롱은 사람들이 사소하게 여기는 것들, 자신과는 상관 없다며 침묵으로 동조하던 일들이 결코 사소하지 않으며, 그 사소하다고 여기는 것들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결코 사회가 안전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엘리너 루즈벨트의 세계인권선언 10주년 연설문과도 맥이 닿아 있다. “작은 곳에서부터 인권이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다면, 그 어느 곳에서도 인권의 의미를 찾을 수 없을 것 입니다.” 돌봄은 때론 사소하다고 치부된다. 이에, 돌봄노동의 의미는 격하되고 돌봄을 제공하는 자와 돌봄을 필요로 하는 자의 존엄이 사소한 것으로 치부되는 현상을 목도하게 된다. 전복적 사고: 취약성 인식과 돌봄사회로의 전환   김영옥·류은숙은 인간의 취약성이 존재론적, 보편적 특성이라고 설명한다. 인간 존재 자체가 취약하고, 모든 인간은 취약한 존재로 태어나 취약한 존재로 사멸한다는 공통점을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돌봄에 대한 논의, 돌봄권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부모가 되었든 부모가 아닌 타인이 되었든 누군가에 대한 의존 덕분에 생명을 유지하게 된 인간이, 제 스스로 자라나 제 스스로 살아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되는 이유가 뭘까.   얼마 전 세상을 떠난, 홍세화 선생은 자신의 생각이 자신의 것이 아닐 수 있으며, 자신 스스로가 생각의 주체로서 삶을 살기 위해선 끊임없이 사유하고 공부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돌봄은 여성의 일이라는 생각, 돌봄은 가족이 제공하는 것이라는 생각, 타인에게 폐를 끼치면 안된다는 생각, 생산노동 중심의 사회에서 돌봄노동(재생산노동)은 가치가 낮다는 생각, 돌봄노동은 누구나 할 수 있으면서 동시에 아무나 할 수 없다는 생각. 이 모든 자신의 생각이라고 착각했던 생각들이 사실은 사유와 공부의 끝에 갖게 된 생각이 아니라, 무비판적·무지성적 수용으로 습득하게 된 것은 아닐까.   뇌리에 박혀 태도가 되어버린 생각을 바꾸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봄의 부재와 인권의 상실로 가득 찬 소멸사회를 돌봄사회로 바꾸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다. 인권에는 유보가 없다.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한다. “우리가 가는 길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어려운 길이므로 우리가 가야하는 것이다.”****       *문유석, 「최소한의 선의」 중에서     **한국일보, “아픈부모·아이는 어쩌나...가족돌봄휴가, 직장인 60%엔 그림의 떡” (2024. 5. 12.)   ***김영옥·류은숙, 「돌봄과 인권」 참고 ****홍세화, 「미안함에 대하여」 중에서
2024-05-14 | hrights | 조회: 189 | 추천: 6
이동화 / 사단법인 아디 활동가 코로나19로  한동안 미얀마에 갈 수 없다가 드디어 지난 3월 말, 10일간의 미얀마 출장을 다녀왔습니다. 미얀마 중부지역에서 7년간 진행하고 있는 아디의 평화 도서관 사업을 점검하기 위해서였는데요. 이는 미얀마 군부 쿠데타 이후 2번째 방문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미얀마 상황은 나아지기는커녕 점점 더 악화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출장 때가 되면, 커다란 돌덩이 하나를 가슴에 얹은 것마냥 답답하고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이번 출장에서 가장 먼저 놀란 것은 무섭게 치솟은 기름값과 현지 화폐의 환율폭락이었습니다. 방문 시 미얀마의 기름값(휘발유 기준)은 리터랑 2600~2900짯(MMK, 현지화)이었습니다. 한화로 계산하면 리터당 천 원 정도인 셈이죠. 이 가격은 쿠데타 전과 비교했을 때 거의 3배(기존 800~1000짯)가 뛴 금액입니다. 사실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미얀마 화폐 가치의 폭락입니다. 쿠데타 전까지만 해도 미얀마 환율은 한화와 비슷하거나 심지어는 한화보다 높았으나, 현재는 1짯에 0.35원, 즉 1원에 2.8짯으로 극심한 폭락 현상을 맞닥뜨리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현지 초등학교 교사 급여는 대략 30만짯으로, 쿠테타 전에는 한화 30만 원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쿠테타 이후, 환율로만 따졌을 때 대략 19만원이 떨어진 11만 원 정도 수준입니다. 여기에 기름값을 포함한 현지 물가까지 2-3배로 뛰면서, 현지 교사의 월급은 체감상 4~5만 원 정도의 가치뿐이 지니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사진. 올해 2월 1일 서울역광장에서 열린 미얀마 시민저항 3주년 행사사진 이번 출장에서 눈여겨봤던 또 하나의 사실은 여전히 시민불복종운동(CDM, Civil Disobedience Movement)이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시민불복종운동은 2021년 2월 군부 쿠데타 발발 직후 미얀마 전역에서 거세게 일어났습니다. 학생과 교사, 의사와 은행원 등 많은 이들이 등교와 출석, 출근을 거부하며 군부에 항거하는 자발적 시민운동을 벌였는데요. 물론 군부에 저항하는 반대 시위나 집회가 줄어든 것도 사실이지만, 시민불복종 운동은 여전히 사회 곳곳에서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아디의 도서관만 하더라도 도서관 이용자였던 대학생들의 등교 거부가 이어지며 제적 상태에 처한 경우가 대다수이고, 기존 초, 중등 교사들 또한 출근 거부가 지속되며 강제로 해고되거나 군부의 블랙리스트에 올려져 있는 상황입니다. 심지어 초등학교 학생들조차 부모에 의해 등교를 거부하기도 하였는데요. 물론 군부는 이러한 아이들을 학교에서 모두 퇴학 처리시켰습니다. 아디가 평화도서관 창립하던 때 많은 도움을 줬던 현지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군부의 수배를 피해 미얀마 국경 지역으로 피신했거나 일부는 붙잡혀 2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시민불복종 운동은 각자의 자리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일례로 이들 중 일부는 도서관에서 교육 봉사를 자처하며, 퇴학당한 아이들은 도서관에서 못다 한 공부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최근 미얀마 군부는 소수민족군대와 미얀마 시민방위군(PDF, People’s Defence Force) 사이의 전투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자 돌연 강제 징집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강제 징집으로 끌려간 현지인들은 쿠데타 세력에 맞서 싸우는 시민방위군과 쿠데타 군부 사이의 총알받이가 될 거라며 강한 거부감을 보이고 있지만, 강제 징집을 거부할 시 징집대상자뿐만 아니라 가족들까지 처벌한다는 군부의 경고에 불안에 떨며 살고 있습니다. 아디가 함께하는 평화도서관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교사와 사서, 자원활동가들이 징집 대상이며, 실제 도서관 활동가 중 일부에게는 징집의 사전단계인 등록부 조사가 이뤄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들이 현실적으로 택할 수 있는 회피 방법은 많지 않아, 대개 외국으로의 피신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쿠데타 발발 초기, 한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미얀마 군부에 대한 규탄과 제재조치를 시행했습니다. 외교적으로 단절될 거 같던 미얀마 군부는 중국의 지지를 등에 업고 여전히 국제사회에서 미얀마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한국 정부는 미얀마 군부가 임명한 미얀마 대사를 무기 홍보 행사에 초청하기도 했습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으로 세상의 관심은 더 이상 미얀마 군부 통치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모두의 관심이 사그라들수록 미얀마 군부는 더욱 활개를 치며 자국민을 탄압합니다. 그럼에도 미얀마에서 만났던 수많은 이들은 여전히 자신의 방식으로 미얀마 군부를 거부하며 저항하고 있습니다. 출장 내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를 되묻는 순간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갑갑하고 야속한 현실만 안고 돌아온 듯합니다.
2024-05-14 | hrights | 조회: 106 | 추천: 3
신종환 / 공무원 때때로 어떤 이를 기억하는 것은 기억하는 이의 삶을 비추는 일을 거친다. 그 분을 적게 알았던 이의 짧은 삶이 그분을 반사하며 새롭게 비추기에. 그리고 그의 삶에서 멀리 있던 나같은 사람의 마음이 가끔은 선생님과 가까웠던 사람들이 미처 모르던 선생님의 어떤 색을 보여줄지도 모르니까.. 사진: 독서신문 홍세화 선생님을 처음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시절 같이 틈나는 대로 토론을 나누던 친구들과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와 ‘세느강은 좌우를 가르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를 읽었을 때였다. 저항이 삶의 당연한 방향이거니 했던 그 때 글에 비치는 선생님의 인상은 당시 두서 없이 읽던 책들에 등장하는 부당함에 굴하지 않던 수많은 지식인 중 한 명이었다. 대학생활이 시작된 2009년의 대학가는 아직 취업의 압박이 세지 않고 사고의 자유와 청춘의 열기가 배움의 열의와 잘 붙어있던 시절이었고, 지적으로 정서적으로 허기진 그들을 접하려는 명사들의 강연들이 도처에 있었고 홍세화 선생님은 그런 명사들 중 한 분으로 기억되었다. 많은 이들이 마이크를 놓고 조용히 사라진 어느 날 선생님의 이름이 인터넷에서 보였다. 악화일로를 걷던 진보신당의 대표직에 홍세화 선생님이 ‘오르고 싶지 않은 무대’에 올랐다는 내용이었다. 해야 한다는 당위에 기꺼이 투신하는 모습에 감탄하면서도 난파선같은 당에 뛰어드는 모습에 탄식이 흐르는 한편 그의 선택이 이해되지 않았다. 가야 하는 길을 가는 태도의 빛남에 마음을 기대면서도 무의식적으로 그 무게는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리고 어느 해 뒤 인권연대의 송년회에서 우연히 같은 테이블에 앉은 선생님께 질문을 드린 일이 있었다. 5‧18 혁명 당시 어떻게 그 많은 이들이 현장으로 발길을 향했는지 모르겠다는 나의 말에 선생님은 고민할 일이 아니라는 듯 말씀하셨다. “그야, 사람이니까.” 나는 그 말이 인상에 남아 당시 세월호 집회 현장에 나가자는 대자보를 쓰며 그 말을 적었고 속된 말로 오래 우려 먹었다. 지금에 이르러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는 지불해야 할 것이 많다는 걸 배우고서야 선생님의 대답은 사람이기 위해 스스로 겪었던 많은 시도들이 만들어낸 말임을 막역하게 안다. 또 약간의 시간이 지나 선생님은 인권연대에서 벌금을 낼 여력이 없는 이들을 위해 준비한 장발장 은행의 은행장이 되었다. 선생님을 전혀 모르는 이가 이 글을 읽으면 역순으로 적은 것이 아니라고 할지도 모른다. 장발장 은행장에서 진보신당의 대표로, 대표에서 이름난 명사로. 한겨레 기획위원에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편집인, 말과활 발행인이 된 행보도 마찬가지. 가능성의 기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선생님의 길은 어디로 가야하는지에 대한 한결같은 자의적 떨림이 만든 선명한 궤적이었다. 어느 시간 동안 있을 만한 방향 대신 있어야 할 방향이 어디인지 계속 묻고 그대로 가는 이는 드물다. 그가 있었던 곳이 계속 머물 만큼 아늑한 곳이었다면 더욱. 고병권 선생님은 공학적 지식과는 달리 철학적 지식은 자신의 삶이 이론을 비추기에 그렇지 다른 삶을 살면 앎이 훼손된다고 했는데 그런 의미에서 홍세화 선생님은 의도치 않게 본인이 말한 바를 삶으로 증명했다. 가능성의 유무와 사회‧경제적 기준에 머무는 시선으로는 선생님을 이해할 수 없다. 눈 돌리면 물러지는 당위성의 경도를 단단히 다듬고 잠깐이면 어두워지는 가야 할 미래를 애써 밝혀 아마 스스로를 비추고 덥혔을 거라 조심히 짐작만 해봄직한 잊히는 감각. 선생님은 잊어서는 안되는 어떤 감각의 증명이었고 이를 위해 수반하는 노력의 총량이었고 수반되는 노력이 설명되는 까닭으로 내 삶에 뿌리내려주셨음을 애써 마음 어느 곳에 새긴다. 당연한 것이 드물어진 나날에 선생님이 없으실 세상이 무서워지고 슬퍼지고 아쉬워 바둥거리기에 앞서 선생님이 있어 살아가는 큰 방향이 어긋나지 않을 수 있었던 사람들의 한 명으로 지면을 빌려 마음을 전해본다. ‘선생님이 계셔서 크게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고마웠습니다. 힘껏 살겠습니다.’
2024-04-30 | hrights | 조회: 199 | 추천: 3
이원영 / 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1. 어머니의 신장투석 작년 하반기부터 양평 시골집에 사시는 어머니가 신장투석을 시작하셨다. 신장이 10% 정도밖에 역할을 못 해서 결국 신장투석을 치료 방법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덕에 자식들은 어머니를 일주일에 세 번 병원에 모시고 오가는 일을 분담하고 있다. 사는 동네에 몇 군데 병원에선 2년~3년을 기다려야 하므로 양평에서 하남시를 50분 가까이 차를 몰고 왔다 갔다 해야 한다. 신장투석은 혈액을 인공신장 기계를 통해 빼내서 노폐물을 걸러낸 다음에 다시 몸으로 돌려보내는 치료 방법이다. 신장은 그 모양새 때문에 콩팥이라고도 불리는데 몸 안의 체액, 전해질, 염기 등을 조절하며, 혈액 안의 노폐물을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 일주일에 세 번 병원에 가서 세 시간 이상을 혈액투석을 하는 일이 얼마나 고달픈 일인지는 말해 무엇하랴? 하지만 그걸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병든 몸은 치료해야 하고 다행히도 신장투석 덕분에 어머니는 식사도 잘하시고 농사일도 조금씩 하시면서 그럭저럭 저물어가는 노후를 보내고 있다. 어머니가 신장투석을 시작하면서 우리 가족들은 인체에서 신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다. 그래서 가능하면 덜 짜고 덜 맵게 먹는 습관을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다. 한번 망가진 신장은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고 한다. 운이 나쁘면 젊어서부터 신장투석을 평생 해야 하는 번거로움에 시달리는 경우도 있다니 건강한 몸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 다시금 고마워할 수밖에. 2. 톨스토이에게 던진 세 가지 질문 인체와 사회는 복잡한 유기적 화합물이다. 혼자 살 수 없는 동물, 사람. 우리는 이런저런 사람들과 매일 만난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살면서 가장 힘든 일이 사람 관계이다. 관계가 틀어지면 고통스럽고 회복하기도 어렵다. 좋은 관계를 가꾸며 살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 모든 사람과 좋은 사이를 유지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러려면 너무 피곤하다. 하여튼 어리석음 투성이인 나를 돌아보면서 지혜롭게 사는 방법을 궁금해하다가 존경스러운 톨스토이 이야기를 듣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 너무나 유명한 톨스토이에게 던진 <세 가지 질문>이다. 첫째,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언제인가? 둘째,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셋째,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톨스토이의 대답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현재이고,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내가 대하고 있는 사람이며,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일이다. 인간은 그것을 위해 세상에 온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날마다 그때그때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 3. 새해에 품은 소망 어머니 신장투석과 톨스토이 세 가지 질문이 무슨 상관일까? 첫째, 어머니는 자식들을 번거롭게 하는 것에 대해 무척 미안해하신다. 하지만 어머니의 큰 사랑을 받고 자란 우리는 너무나 당연한 일로 여긴다. 사람과의 관계는 서로 주고받는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어머니는 지금 생각해보니 자식 여럿 고생해서 키우길 잘했다고 말씀하신다. 빌려준 것을 다시 받는 거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시니 그렇게 생각하시라고 했다. 둘째, 꼭 톨스토이 이야기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너무 소홀하게 살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더 자주 잔소리하고 화내고 무언가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뇌과학자들은 가장 가까운 사람일수록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처럼 여기는 착각을 하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분석하기도 한다. 때론 남으로 여기는 것이 더 현명하고 인간적일 때도 있으니 그렇게 생각해보면 좋겠다. 셋째, 우리 어머니도 그렇고 톨스토이도 그렇고 타인에게 크고 작은 선을 행하며 평생을 살았다. 그를 아는 많은 이들은 존경의 마음을 보냈다. 하지만 결국 병들고 외롭게 세상을 떠나는 게 인생인 것이다. 나는 어머니의 삶을 생각하면 매우 안쓰럽고 허무하다. 아프지 않고 늙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새삼 느낀다. 대문호 톨스토이는 많은 재산과 명성에도 매우 가난한 삶을 택했고 쓸쓸하게 생을 마쳤다. 비록 허무하지만 만족스러운 삶, 아주 작은 것들에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란 무엇인지? 2024년에 나는 느리게 비우는 삶을 살려고 애쓰기로 했다. 느려야 돌아볼 수 있고 비워야 채울 수 있다고 하는데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너무 성급하고 건조하고 빡빡한 일상을 변화시키고 싶었다. 벌써 4월 하순이니 이런 새해 소망이 잘 실천되고 있는지는 지나 봐야 알 일이다. 우리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라는 노래 가사가 삶에 큰 위안이 되는 나이가 어느덧 되었나 보다.
2024-04-23 | hrights | 조회: 171 | 추천: 2
윤요왕 / 춘천별빛 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3월 마지막 날 춘천별빛 사회적협동조합 총회를 통해 4년만에 이사장으로 복귀를 하게 되었다. 이사장을 맡는 것에 대한 고민이 많이 들었다. 자유롭게 살았던 지난 1년의 생활을 조금더 연장하고픈 생각과 새롭게 설레는 일들에 대한 구상으로 24년을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떠나있던 4년이 아니라 지난 20여년의 기억들을 되새김하게 되었다. 방과후 마을공부방과 농촌유학, 마을어르신 돌봄, 도시청년들의 시골 이주살이까지 지난 20여년 작은 농촌마을에서 벌인 일들을 돌이켜보면 참으로 무던히도 애를 썼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자꾸 일벌리는 대표 때문에 힘들고 수고했던 많은 별빛샘들과 아이들, 부모님들이 있었기에 그나마 작은 시골마을에 기쁘고 행복한 모습들이 있었으리라. 이사장으로 복귀하면서 기존 활동들에 대한 성찰과 미래에 대한 고민도 하면서 스멀스멀 맘속에 자리잡은 일들도 병행하기로 했다. 그래서 만들게 된 것이 별빛 부설 ‘마주연구소’다. 마주연구소는 마을주민의 약자이면서 사람들이 마주하면서 살아간다는 공동체성을 표현한 이름이기도 하다. 마주연구소는 기존 별빛이 하던 일을 보좌하기도 하지만 마을의 중장기적인 일, 새롭게 필요해진 일 등을 고민하는 상근자 한명없는 연구소다. 개인적으로 전에 다니던 센터에서 나온 몇분들을 비상임연구원으로 위촉해서 함께 사부작사부작 작당모의에 들어갔다. 그 중 한가지 아프지만 설레는 일을 소개하고 싶다. 마을교육공동체, 작은학교살리기, 청년살이 등 전국 곳곳의 현장에서 수많은 활동가들과 주민들이 지역을 살리고 마을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고 있다. 그런데, 문득 뒤돌아보니 가슴 한켠이 뻥뚤린것처럼 공허함을 느끼게 되었다. 이유가 뭘까? 이런 노력과 수고에도 시골마을은과 지방은 사그라져가고 있다는 숨길 수 없는 현실이 있었다. 얼마 전 들은 얘기가 있다. 화천은 군차원에서 화천군 청소년들이 대학을 가면 4년치 등록금 전액(국립,사립 상관없이)과 월 생활비(졸업할 때까지 매월 50만원)를 지원해주고 있다. 교육지원으로 소멸해가는 작은소도시를 살리고자 무진 애를 쓰고 있고 그래서 좋은 사례로 언론에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그런데, 한켠에서는 이 사업에 대해 한탄하는 소리가 나온다고 한다. 왜일까? 그렇게 지원한 청소년들이 청년이 되어서 어른이 되어서 다시 돌아와 화천군민이 되지 않는다는 점 때문이다. 장학사업, 교육사업이라는 것이 상대적으로 교육불평등이 심한 지방에서 지원사업을 통해 그 인재가 널리 나가 지역을 빛내주는 것이 목적이었으리라. 그러나 지역소멸, 과소화 문제가 지역의 가장 큰 화두가 된 지금 돌아오지 않는 소위 ‘인재’들에 대한 지원이 얼마나 유효하고 적절한지에 대한 내부의 성찰하는 목소리인 것이다. 비단 화천만 그럴까? 지난 1년 전국을 돌아다녀보니 여기저기 상황은 다르지만 앞서 얘기한 ‘공허함’이 곳곳에서 보이고 있었다. 지역의 우수한 인재가 서울로 가든 세계로 가든 지역을 빛내고 자신의 꿈을 키우는 지원에 누가 반대할까만은 지역을 지키고 남는 마을인재에도 지원을 해야 하지 않을까? 지역에 마을에 남아 모색하는 청소년, 청년들을 능력없는 ‘루저’로 취급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올해 설레고 필요한 구상중에 하나가 이거다. (마을의 청소년을 지역의 청년으로-)청청 로컬 스쿨! 20세 전후의 청소년들을 위한 새로운 학교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20여명 정도의 20세 전후 청소년들을 모아 3년+a의 과정으로 스스로 지역의 시민으로 어른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플랫폼 캠퍼스를 구상 중이다. 지붕없는 캠퍼스가 전국, 세계 곳곳에 있다. 또, 전국의 시민교사들로부터 생활기술과 지혜를 배우고 세상에 살아가는 힘을 키우는 커리큘럼을 만들고자 한다. 이에 먼저 시민교사 소위 ‘키다리아저씨’를 모집했더니 10일만에 춘천과 전국에서 110명이 신청을 했다. 댓가도 없고 명함도 없다. 우리시대 청소년들을 위해 내가 가진 생각과 삶과 지혜를 오롯히 나누고 싶은 선한마음의 키다리 아저씨, 키다리 아지매들이다. 초중고 그리고 대학까지의 국가교육체계를 통하면 안전하게 사회에 어른으로 자리잡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어느 통계를 보니 은둔형 외톨이가 청소년 14만명, 청년 54만명이 있다고 한다.(출처: 청년재단) 고등교육 선진국이라고 불릴만큼 교육열이 높고 교육강대국이라는 우리나라에서 정규교육과정을 다 이수했지만 사회의 어른으로 자리잡는 것은 청년들에게 막막하고 두렵고 절망적인 일일수 있겠다는 지표가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다. 국가교육과정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반증이 아닐까? 또, 필요한 정보보다는 ‘돈이 최고’라는 사회분위기에 무분별하게 노출되어 금수저가 아니면 살아내기 힘든 나라로 인식되고 있는 듯 하다. 청소년들의 내적 근육을 키우는 자존감, 주체성, 자기철학이 필요하다. 이를 가르쳐주는 곳이 없다는 생각이 ‘청청 로컬 스쿨’을 생각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일본의 한 공업고등전문학교의 현장수업 꼭 지방에 살아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이런 지붕없는 캠퍼스와 전국의 시민교사들의 삶을 살피고 관계하면서 희망을 잃지않고 자기만의 길을 꿈꿔볼 수 있으면 좋겠다. 얼마전 다녀온 일본의 한 시골마을에 5년짜리 학교가 개교했다. 고등학교 3년+전문과정 2년으로 보통의 학교와는 다른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고 실질적인 배움이 일어나고 있는 걸 보았다. 일본 전역에서 수많은 아이들이 지원했다고 한다. 대한민국의 24년 고등학교 졸업생 38만명, 24년 전국의 대학 신입생 51만명!(이 차이로 정원을 채우지 못하는 대학이 늘어나고 있다) 이 단순 수치로만 보면 우리나라 청소년들은 모두 행복하게 20살을 맞이해야 한다. 모두가 대학을 갈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하면 인생이 보장되는 시대는 옛 유물이 되어 버린지 오래다. “사회부모로 시민교사로 전국의 키다리아저씨아지매들을 찾습니다~” ‘청청 로컬 스쿨, 춘천’을 시작으로 전국 곳곳에 지역에 맞는 청청 로컬 캠퍼스가 많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2024-04-17 | hrights | 조회: 136 | 추천: 3
김형수 / 장애인학생지원네크워크 사무국장 바야흐로 정치와 선거의 계절이다. 국회로 가겠다는 우리 동네 후보들은 은평구 주민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겠다고 하고, 장애인 등을 대표하겠다는 장애인 당사자 비례대표들도 속속 출사표를 내고 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국구 의원 당선된 소아마비 지체장애인 이성재 의원을 시작으로 최초의 시각장애인 시의원 17대 국회의원 정화원씨도 있었지만 장애인 당사자 목소리를 내며 지역에서 국회로 입성한 장애인은 아직 없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국회에 있던 그의 아들도 고문으로 장애를 얻었지만 그 중 어느 현역 정치인 중에서 공식적으로 장애인 등록은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 어떤 이도 우리들을 장애인들을, 특히 증증 장애인을 대표해주지 않는다는 절망의 시대를 관통하고 있을지 모른다. 이제 곳곳에 선거인 명부가 붙고 있다. 각 건물에 붙은 저 벽보를 자세히 접할 수 있는 휠체어 이용 장애인, 시각 장애인 동네 시민이 있을까? 입후보자가 아니라 투표하는 개개인이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선거 운동을 직접 할 수 있는 거주 시설의 장애인은 몇이나 될까?  내가 가진 뇌병변의 장애인은 누가 대표하지? 이제까지 그나마 사회 활동이 왕성하고 비장애인과 다를바 없는 소득과 사회적 지위를 가진 시각장애인과 일부 지체 장애인들만 입법 활동을 해왔다. 외국 선진국에 비해 우리나라는 아직 청각 장애인이나 뇌병변 장애인 중에서 시의원 조차 나온 적이 없다. 내가 만나는 중증의 발달장애인들은 누가 대표하지? 지금 활동하고 있는 후보들 중에서 몇몇 이라도 발달 장애인과 직접 대화를 하고 선거 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수많은 근육 장애 벗들은 과연 누가 대표하고 있지? 얼마 전 민주당 장애인 위원회 위원장인 근육장애를 가진 당사자 분이 갑자기 돌아가셨다. 많은 분들이 슬픔에 빠졌지만 민주당은 그 슬픈 죽음에 대해 공식적인 추모 입장을 발표하지 않았다. 동네 굽어보는 곳에 있는 생활주거시설에 사는 장애인 분들의 이해 관계와 인권은 누가 대표할 수 있을까? 거기 당사자분들에게 주거에 대한 권리와 재산권을 행사하게 하겠다는 국회의원은 아직 없다. 산책하는 마을 주민들도 자유롭게 만나기 힘든 저 넓디 넓은 시설에 사는 장애인 분들의 목소리는 누가 듣고 있지? 덩그러이 혼자 살면서 매일 매일 아침에 침대에서 떨어지지 않기를 걱정하는 자립 주택 등의 1인 생활 장애인은 누가 대표할 수 있을까 고민한다. 반려 동물과 반려 식물을 키우고 싶지만 제대로 물은 줄 수 있을지, 산책이나 가능할런지 고민해야 하는 누워서 생활하는 장애인들의 바람들은 누가 공유하고 있을까 고민한다. 우리가 대중들에게 세련되거나 충분히 잘나 보이지는 않았을지라도 지금 여기 이렇게 각 정당의 후보들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려야 한다. 장애인 당사지 분들이 비록 직접 정해진 권력은 얻지 못해도 포기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의 장애가 사람들을 구할 수 있음을, 우리의 장애인 인권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음을, 계속 외쳐야 한다. 정권 심판과 마찬가지로 장애인 당사자가 화장실을 자유롭게 이용하는 것도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회사를 출퇴근하고 학교를 다니고 지역 사회에 살아 가는 것도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하는 우리의 대표가 필요하다. 저 국회 안의 300명 모두 알 수 있도록 실천할 수 있도록 장애를 낫지 않고도 장애를 극복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사랑하는 사람과 연애하고 다양한 가족을 이룰 수 있음을 깨닫게 해야 한다. 부디 각 정당의 장애인 비례대표 후보님들은 보다 다양한, 보다 중한 장애인들이, 국회에서 정치 무대에서 일할 수 있는 경험을 쌓아 진정한 정치 세력화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 주길 바란다. 정치나 권력의 유불리를 떠나 장애인을 대표하여 소수자들을 대표하여 다음 국회에는 보다 다양한 장애 유형를 가진 대표자들이, LGBT분들이, 이중언어 사용자 분들이, 몸이 많이 아픈 분들도, 청소년들도 국회에 진출할 수 있기를 계속 꿈꾼다. 우리를 대표할 사람을 찾을 수 없다면 우리 스스로 우리를 대표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필자는 누군가들에게 스스로 '대표'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보여주고 싶어 국회 비례대표 후보 공개선발에 지원 했다. 사실 공개 선발 형식으로 이뤄진 이번 국민 경선은 장애인 당사자 입장에서는 다소 불리한 과정이었다. 현장 무대에는 경사로도 없었고 심지어 장애인 화장실조차 제대로 찾기 어려웠다. 단상은 목발을 사용하면서 나자신을 드러내기에는 너무 고정되어 있어서 안전을 위해서 밝은 조명을 두고 한발 물러나야 했다. 사실 경선에서 우위에 올라야 겠다는 생각보다 무대에서 어떤 경우에도 꽈당 넘어지지 말아야 겠다는 각오가 더 했다. 물론 주최 측은 시간도 없었고 후보들은 대학 수능 시험 때보다 더 민감하니 모든 것을 준비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미 경선 후보 중에 장애인 당사자 후보가 있고 장애인과 오랫동안 같이 연대해온 시민 사회와 민주당이 준비한 만큼 최소한 오줌쌀 권리와 안전하게 자신을 홍보할 권리는 앞으로 좀더 확실하게 보장하길 바란다. 내가 어느 이들과 함께 '대표'하겠다. 결심을 한 것은 올해 초 인권연대 교사 연수 강의에서 만난 '우리는 그 어떤 이도 우리들을 대표해주지 않는다는 절망의 시대를 관통하고 있다'는 존경하는 강사의 말 한마디 덕분이었다. 남들처럼 미용실도 가서 훤한 이마도 열고 화장도 받아야 대중들이 호감을 갖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대부분 나와 같은 장애인들은 아침 출근길에 남들보다 한두시간 더 걸리는 지하철 리프트를 타기 위해, 장애인 콜택시를 타기 위해 그런 사치를 부리지 않기에, 우리를 손님으로 진정 환영하는 미용실도 찾기 어렵다는 현실을 보여 주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무대에 올라 미리 옷을 입고 잠을 자고 무도한 계단을 넘어지지 않고 무대에 오르기 위해 시커먼 등산화를 신었다. 코로나 후유증으로 호흡조차 버겁기만 했지만 저는 숨이 막혀 컥컥 거려도 마스크를 잡고 끝까지 이야기 하고 싶었다. 그래서 몸이 아무리 아프고 아무리 힘들어도 호흡기 사용으로 숨쉬기도 괴롭고 가래 때문에 말하기 조차 힘든 사람들도, 대중들 앞에서 '대표'할 수 있음을, 우리 모두를 위한 '정치'를 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대표사진은 흑백이었다. 내 주변에는 색깔을 정확하게 찾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제 주변엔 다양한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나는 불리하더라도 나를 보고 있는 그 분들에게 당신들을 생각하는 여기 한 사람이 있다 알려주고 싶었다. 그래도 비례 후보 한명은 당신을 위해 흑백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다 외치고 싶었다. 경선 발표 장소에서 내가 올린 화면은 검은 바탕에 흰 글씨 밖에 없었다. 발표 자료가 성의가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화면을 보는 누군가는 내가 왜 그렇게 흑백 대비가 크게 자료를 만들었는지 발견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감히 그 '누군가를' 몇 되지 않지만 꼭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발표하고 싶었다. 언어장애가 심하고 안면 장애를 가지고 휘청휘청한 걸음을 가지고 의원이 되겠다 외칠 수 있음을, 청각 장애를 가지고 입술을 읽는 의정 생활을 할 수 있음을. 자폐나 지적 장애나 다운 증후군을 가지고 멋지게 입법 활동을 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싶었다. 나는 늘 대중들에게 너는 이것을 하기에는 너무 위험해, 너는 저것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을 수없이 듣고 살았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것도, 대학을 가는 것도 모두 그러했다. 대학에 경사로 하나 만드는 것도 장애인 시설비리 철폐를 위해 싸우는 것도 군가산점 위헌 심판을 받는 것도 대부분 불가능하다고 했다. 큰 단체의 대표도 없고 인기많은 활동도 없었다. 그러나 이렇게 무너질듯한 쏟아질듯한 몸을 가지고도 중증 뇌병변 장애를 가지고도 쟁쟁한 후보들과 경쟁할 수 있음을 호소하고 싶었다. 비록 정해진 권력은 얻지 못해도 우리의 정치를. 우리의 장애가 사람들을 구할수 있음을, 우리의 인권이 세상을 바꿀수 있음을, 계속 외쳐야 한다. 정권 심판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화장실을 자유롭게 이용하는 것도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회사를 출퇴근하고 학교를 다니고 지역 사회에 살아 갈 수 있음을 말해야 한다.
2024-04-09 | hrights | 조회: 159 | 추천: 3
정한별 / 사회복지사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겨우 9년 정도 세상을 겪은 아이가 마주한 세상이 낯설게 느껴졌다. 아이라는 존재가 나(부모)와는 별개의 존재라는 것을 머리로 알고 있었지만 피부로는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2024년 3월 23일, 아이가 사는 세상이 결국 그 아이만의 것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아이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부모는 매우 중요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없는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자신의 무대에서 주인공은 자신이며, 부모는 그 어떤 손도 내밀어 줄 수 없단 사실에 기분이 묘해졌다. 아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자신이 주인공인 무대를 만들었다. 그 덕에 많이 배울 수 있었다. 마냥 어리게만 생각했던 아이가 나 없이도 잘 해낼 수 있단 사실에 뭔가 섭섭한 기분마저 들었다. 생각해 보면 결정도, 준비도, 도전도, 실수도, 극복도, 인내도, 결과에 대한 수용도, 그 어떤 것도 자신의 것이 아닌 게 없었다.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스스로 하고 있었다. 모르고 있던 사이 아이는 부모라는 존재에서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다. 아이가 있었던 무대는 그 어떤 노력으로도 어찌해 볼 수 없는 영역이 있었다. 자신의 노력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이미 정해져 있는 것들이 너무도 극명하게 보였다. 이미 정해져 있는 것들, 태어나는 순간 사실 이미 정해져 버린 운명 같은 것들이 부모인 내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마냥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이를 만나러 가는 길에는 미뤄뒀던 피로가 몰려와 너무 힘이 들었는데, 돌아가는 길엔 굳이 내가 미안해 할 필요도 없는 것들에 대한 미안함과 먹먹함이 피로감을 밀어 내버렸다. 미소를 보이려 했는데, 마냥 웃음이 입가에 머물지 못했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오자 피곤에 절은 몸이 평정심을 밀어 내버렸다. 내 마음의 실체를 글을 쓰는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다. 어른이 되어가는 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 노력을 배신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수용하는 것,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이 마음대로 되는 일보다 훨씬 많이 있다는 것을 익히는 것, 그럼에도 그 어떤 것들에도 부러지지 않는 마음을 익히는 일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 그 부러지지 않는 마음은 꼭 혼자서 유지할 필요도 유지할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아들의 작은 성공과 수많은 실패들을 그렇게 말없이 지켜보고 계셨다는 것을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 실패에 상처받을 아들이 걱정되서, 실망할 아들이 마음에 걸려 마음 편히 위로도, 더 열심히 해보라는 비판의 채찍질도 편하게 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마음을, 어머니의 걱정을 내가 자식을 낳고 길러보니 이제야 알 것 같다. 너무 늦게 알게 되어 고맙다는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제사상에 술 한 잔 올리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라는 사실이 마음이 아프다. 아버지는 내게 하고 싶은 말을 주로 편지로 써서 주고는 했다. 특히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의 아버지는 일주일에 한 통 이상 편지를 써 주셨다. 아버지의 편지는 A4 용지 3분의1 정도 분량 밖에 되지 않았다. 아버지는 항상 그 편지를 컴퓨터로 타이핑한 후 출력해서 깔끔하게 자른 뒤 고이 접어 도시락 가방에 넣어주셨다. 편지의 내용은 고3인 나에게 하는 잔소리가 대부분이었다. 꽤나 조심스럽게 간접적으로 전하는 잔소리. 어느 순간부터는 제대로 편지를 읽지도 않았다. 얼마 전, 서랍을 정리하다가 아버지가 내게 보냈던 그 편지들을 우연히 발견했다. 20년이 지난 뒤 다시 꺼내 본 편지는 힘들어하는 고3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걱정과 위로가, 되려 아들을 불편하게 할세라 자신의 진심을 조심스레 전하고자 했던 배려가 듬뿍 담겨 있었다. 동시에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고, 자신의 슬픔을 위로 받고 싶어했던 연약한 한 인간의 모습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20년이 지나서, 아버지가 했던 행동들을 그대로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하고 싶은 말과 전하고 싶은 마음을 편지로 남기고, 위로도 질책도 너무 조심스레 하느라 무슨 말인지도 모를 선문답식의 이야길 아이에게 전하기도 하고... 아이의 세상이 대견하면서도 섭섭하기도 한 마음에 울적해 하기도 하고... 사실은 자신 역시 연약한 인간임에도 아이에겐 단단한 사람으로 비치고 싶은 마음에 몇 겹의 가면을 쓰기도 한다. 아이가 성장하는 만큼 부모도 성장한다고 하던가. 이 너무도 진부한 문구가 어떤 의미인지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 아울러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마음 역시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할 때면, “너도 너랑 똑같은 자식 낳아서 겪어봐라”라고 하시며 훌쩍이던 어머니의 말씀이 이제야 조금 이해가 된다.
2024-03-26 | hrights | 조회: 190 | 추천: 4
이동화 / 사단법인 아디 활동가   가자 지구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향한 이스라엘의 군사 공격과 전면 봉쇄 조치가 5개월 이상 지속되면서 가자 지구의 모든 주민은 포탄과 미사일, 총탄이 만들어 내는 죽음의 공포와 함께 굶주림과 배고픔, 갈증과 질병이 양산하는 고통속에서 하루하루를 견뎌내고 있습니다. 아디를 포함한 국내 시민사회 단체와 개인들은 가자 지구 피해주민을 위해 긴급모금을 추진하여 지난 2월에 송금하였고, 도움을 받은 현지 피해 생존자 중 일부가 한국에 감사 소식과 영상을 보내왔습니다. 그 중 마르와의 이야기를 공유하며 이스라엘 측에서 전하는 소식과 뉴스가 아닌 팔레스타인 피해 여성의 이야기를 통해 그들의 현실이 어떠한 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진 1. 인터뷰에 응해준 마르와 나쉬완(인터뷰 캡쳐사진, 출처: 사단법인 아디, 영상: 유튜브 “[가자지구 긴급 모금] 현지 사용 보고 인터뷰 영상 제 이름은 마르와 나쉬완(Marwa Nashwan)입니다. 30세이고 남편과 3명의 자녀가 있어요. 그 날(10월 8일)이 있던 때에는 임신 5개월이었지요. 그 날 제 남편은 이스라엘 로부터 전화를 받았어요. “우리(이스라엘)는 베이트 하눈(Beit-Hanoun, 마르와 거주지) 전 지역을 파괴할 것이다. 너희들은 5분 안에 집을 떠나야 한다.” 우리는 모든 짐을 집에 남겨두고 도망쳐 나왔어요. 그리고 정말 10분뒤에 저희 집은 파괴됐어요. 우리 가족은 걸어서 베이트 라이아(Beit-Lhia)로 갔어요. 우리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함께 걸었는데 많이 두려워했고 많이 울었어요. 그리고 우리는 알-인도네시안(Al-Indonesian) 병원 근처에 있는 ‘하마드 학교(Hamad school)’에 도착했어요. 학교 상황은 이미 재앙과 같았어요. 교실은 가득차서 우리 아이들을 위한 공간이 없고, 씻는 곳과 화장실은 너무 더러웠고 한참 멀리 떨어져 있었죠. 깨끗한 물도 없고 한마디로 아무 것도 없었어요. 저는 그곳에서 38일간을 머물렀고 가지고 있던 돈을 전부 사용했어요. 우리에게 어떤 도움이나 구호물품, 음식도 전달되지 않았어요. 이스라엘은 학교근처에 있는 알 인도네시안 병원을 공격하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갑자기 학교에도 로켓이 날아오기 시작했죠. 우리는 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었어요. 인근의 모든 곳이 위험 해졌죠. 다른 곳으로 이동할 교통비도 없었기 때문에 제 머리속은 복잡 했지만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어요. 우리는 다시 먼 길을 떠나야 했어요. 우리는 남쪽으로 무작정 걸어갔어요. 아이들도 함께요.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데이르 알 바라(Deir-Al Balah, 중부지역)로 가는 차를 발견하고 도움을 요청했어요. 저는 임신한 상태였고 지친 상태로 아이들을 데리고 먼 거리를 걷는 것은 힘들기도 하지만 뱃속의 아이에게 너무 위험 했거든요. 저와 우리 가족은 다행히 바다 근처의 데이르 알 바라의 B초등학교(Deir- Al balah primary B school)에 도착했어요. 그 작은 학교에 2만 명이 있었어요. 저는 한 교실안에 70명의 여성과 아이들과 함께 있었어요. 이 곳 학교도 이전 학교와 마찬가지였어요. 물도 없고 근처 시장에는 상품이 고갈됐어요. 간혹 지급되는 구호품은 턱없이 모자랐고 무엇보다 얼마 남지 않은 생필품의 가격이 너무 올라서 도저히 구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죠. 그림 1. 마르와 이동경로(베이트 하눈->베이트 라히아->인도네시안 병원인근 하마드 학교->데이르 알 바라->알 아와다) 출산일은 점점 다가왔어요. 아기 상태 때문에 제왕절개 수술을 해야 했어요 하지만 이 지역에는 임산부를 위한 병원이나 의료시설이 없었어요. 그래서 저는 다시 다른 지역으로 갈수 밖에 없었어요. 다행히 누세리아트(Nuseriat)지역의 알 아와다(Al-Awada) 병원이 운영되고 있다고 해요. 하지만 그 곳으로 가는 차가 없었어요. 저는 만삭이었고 그 곳으로 걸어갈 수는 없었어요. 그래서 당나귀를 타고 가야 했어요. 만삭의 몸으로 당나귀를 타고 갔을 때 제 기분이 어땠을 거 같아요? 병원에 가서 저는 정말 다행히도 무사히 아이를 낳았고, 하이쎔(Haitham)으로 이름 지었어요. 하느님 감사합니다. 이후 저는 다시 학교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저는 UPWC(팔레스타인 여성위원회 연합, 기금 현지 배분단체)을 통해 한국에서 보내준 기금을 전해 받았어요. 정말 꿈만 같았어요. 저는 이 돈을 가지고 하이셈의 기저귀를 샀어요. 지금 기저귀는 현지에서 정말 비싸답니다 분유도 샀고 아기 옷도 샀어요. 저를 위해 생리대 및 여성용품도 샀어요. 가족들을 위해 비누와 삼푸도 샀어요. 냉동 닭 1마리를 샀는데 진짜 비쌌지만 꿈만 같았어요. 그리고 계란 5개, 야채들, 통조림(콩, 당근, 콩, 참치, 치즈 등)을 샀어요. 그리고 저에게 필요한 약품(혈액응고제)과 주사기를 샀어요. 남은 돈으로는 아기에게 필요한 것들을 살 예정이에요. 너무너무 감사하고 한국에 있는 분들에게 꼭 이 메세지를 보내고 싶어요. 팔레스타인 여성을 돌보고 요구사항을 들어주는 이들은 누구도 없어요. 여러분의 도움이 어둠속에서 빛과 같아요. 더 많은 분들이 우리에게 연대해 주길 간절히 바랍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2024-03-19 | hrights | 조회: 137 | 추천: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