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수요산책

‘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강대중(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윤동호(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이동우(변호사),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장은주(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이윤 / 경찰관 어릴 적 흑백 텔레비전으로 재미있게 봤던 드라마 중 ‘수사반장’과 ‘형사 콜롬보’가 있었다. ‘셜록 홈즈’, ‘아르센 뤼팽’을 포함하여 만화 ‘모돌이 탐정’ 등 수사·추리 관련 컨텐츠에 열광하던 시절이라 영상물인 두 드라마를 입에서 침 떨어지는 줄 모르고 봤다. 어른이 되고, 수사라는 것을 해 본 경험이 있는 지금은 오히려 우후죽순처럼 쏟아지는 범죄 관련 프로그램을 잘 보지 않는다. 사건 발생 직후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사건의 실체에 접근하는 것과 수사 결과를 알게 된 후 사건을 되짚어 보는 것은 긴장감과 답답함, 입수되는 정보의 양과 질이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이미 발생한 사건의 결과를 놓고 그에 이르는 과정을 소개하는 TV 프로그램은 몰입이 안 되어 재미가 없다. 가끔 침이 떨어지는 것은 나이 때문이다. 흐린 기억을 떠올려보면, ‘수사반장’은 1970년대 한국에 많았던 침입절도, 소매치기, 강도, 유괴, 살인 등 사건을 다루면서, 범인 잡는 과정과 함께 범인의 불우한 처지나 환경도 보여주고, 범인과 그 가족에 대한 동정심과 검거 사이에서 갈등하는 수사관의 모습도 그려냈다. 지금도 생각나는 장면은 교통이 불편했던 당시 눈이 많이 쌓인 강원도 산골에서 범인을 검거하여 서울까지 돌아오며 겪는 수사관의 고초와 갈등이었다. 범인을 잡을 때까지 며칠 동안 집에도 못 가면서 잠복하고, 가족이 경찰서로 속옷을 가져다주는 장면도 있었던 것 같다. ‘형사 콜롬보’에서는 수사관 개인의 고생은 잘 나오지 않았다. 주인공인 콜롬보 형사가 항상 꾀죄죄하고 헐렁한 레인코트를 입고서 고물차를 끌고 다니기는 했으나, 소위 개고생한다는 느낌은 없었다. 범인도 범행을 숨기려 알리바이 등 여러 트릭을 사용한 사람이라서 동정심이 생기지는 않았다. 콜롬보의 명석한 추리력, 그리고 추리 결과를 범인의 행동과 말로 직접 증명하게 만드는 설계 능력에 감탄할 뿐이었다. ‘수사반장’은 범인 검거 과정에, ‘형사 콜롬보’는 범죄를 밝히는 과정에 더 비중이 있었다. 둘 다 중요하지만 수사에 대한 여러 문헌에서 수사를 ‘사실 발견(fact finding)’ 활동이라고 한 점을 고려하면 ‘형사 콜롬보’가 수사 활동의 본질에 더 가까운 느낌이었다. 수사의 역할을 ‘사실 발견’에만 한정하면 인간미가 떨어지는 것 같지만,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사정이나 형편을 처벌에 고려하는 것은 수사관의 역할이 아니다. 수사관은 동정이나 참작의 여지가 있는 사실까지도 성의있게 발견해서 보고서에 나타내주면 된다. 양형에서의 판단은 법원 몫이다. 경찰은 사실을 발견하고, 검사는 발견된 사실에 법률을 적용하고, 법원은 사실 발견과 법률적용이 법에 정해진 대로 되었는지 판단해서 유무죄와 형량을 결정하는 것이 역할이다. 만일 한 사람에게 사실 발견과 법률적용을 모두 맡기면 적용할 법률에 맞는 사실만을 발견하거나 발견한 척하거나, 발견하지 않거나 발견 못한 척할 수 있어서 위험하다. 사람(군인 포함)이 죽었다거나, 부정하게 뇌물을 주고받거나, 마약을 해외에서 몰래 들여오거나, 회사 돈을 빵집에서 개인적 용도로 사용하거나, 남의 물건을 훔치는 등 범죄로 의심되는 일에 대해 모두가 납득할 수 있도록 과거 사실을 재구성하는 것이 수사의 역할이다. 그 과정에 수사관 마음대로 누군가를 봐주거나, 사실관계를 숨기거나, 과장하여 부풀리지 못하도록 팀장, 과장 등 관리체계를 만들어 확인 및 검토하게 하고, 또 검사와 판사가 확인하게 하는 것이다. 가족이나 친구, 은인이 관련된 사건에도 사적으로 관여해서는 안 된다. 다른 수사관이 진행하는 사건 수사에 대해 경찰관이 공식 절차를 통하지 않고 어떤 내용인지 ‘문의’만 해도, 그리고 ‘사건 관련자를 친절하게 응대해 주세요’라고만 요청해도 바로 경찰 형사사법정보시스템(KICS)에서 온라인으로 신고하도록 공지하는 이유도 담당수사관에게 부당한 영향을 미치는 일체의 행위를 예방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사실 발견’이 정치권력에 의해 영향받지 않게 하려고 수사의 정치적 중립과 독립을 요구한다. 하지만 아무리 시스템으로 예방하려 해도 작정하고 덤벼들면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 하물며 ‘정’과 ‘인간미’를 중시하고, 시스템마저 불완전한 한국에서는 숭숭 뚫린 구멍으로 죄지은 사람이 잘도 빠져나가거나, 갑자기 촘촘해진 그물에 억울하게 걸리는 무고한 사람도 있다. 수사관이 자신의 수사 결과가 나에게 또는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따지지(a.k.a. 정무적 판단) 않고 사실관계만 명확히 확인함으로써 나쁜 짓을 하면 반드시 벌을 받고 착하게 살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되면 좋겠다. 정 넘치고 인간미도 있는 수사반장 속 형사를 좋아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겠지만, 위법한 행동에 대해서는 사적 인연을 고려하지 않고 끝까지 사실을 확인하여 책임을 묻는 콜롬보 같은 형사가 많아지기를 바란다.
2024-10-15 | hrights | 조회: 343 | 추천: 4
박록삼 / 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한덕수 총리는 노무현 정부, 윤석열 정부 두 정부에 걸쳐 국무총리를 지낸 인물입니다. 처세의 달인으로 불리는 그의 무색무취한 성격이 한 몫을 했겠지요. 여야 가리지 않고 권력과 코드를 맞추는 데 남다른 능력을 갖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긴 합니다. 물론 하바드대 경제학 박사 학위와 더불어 경제 관료로서 오랜 시간 쌓아온 실무적 전문성이 높이 평가받은 덕분일 수도 있고요. 어떤 이유에서든 김영삼 정부부터 시작해 현 정부에 이르기까지 쉬지 않고 차관급 이상 정무직을 계속 맡아온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 총리에 관해 더욱 주목할 만한 부분이 있습니다. 익히 알려진 부분입니다만 한 총리와 김&장 법률사무소(이하 김앤장)의 관계 얘기입니다. 한 총리는 2002년 김대중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직을 마친 뒤 몇 달 지나지 않아 김앤장 고문으로 첫 인연을 맺습니다. 이 기간 IMF 시절 외환은행을 헐값에 인수한 뒤 먹튀 비판을 받은 론스타를 김앤장이 법률대리하며 한 총리의 법률 자문 여부에 대한 논란이 크게 일었죠. 그리고 김앤장을 잠시 떠난 뒤 노무현 정부 거의 대부분 기간에 걸쳐 국무조정실장, 재정경제부 장관, 국무총리로 승승장구하게 됩니다. 이후 이명박 정부에서 주미대사, 한국무역협회회장 등을 지냈고, 그러다가 2017년 다시 김앤장으로 들어가서 2022년 3월까지 꼬박 3년 4개월 동안 고문으로 일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윤석열 정부 초대 국무총리로 들어와 지금까지 공직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 기간 동안 김앤장에서 고문료로 18억원을 받았습니다. 한 총리는 이미 사표를 냈으니 또다시 김앤장으로 들어갈지 궁금합니다.  그럼에도 한 총리 사례는 약과일지 모릅니다. 외교부 공무원 출신인 박진 전 외교부 장관은 지금까지 무려 세 차례에 걸쳐 김앤장을 들락날락거렸습니다. 김영삼 정부 대통령실 해외공보비서관, 정무기획비서관 등을 마친 뒤 1998년부터 1999년까지 김앤장에서 고문으로 근무합니다. 그리고 뉴욕대 로스쿨에 잠시 다니다가 2000년 8월 다시 김앤장으로 복귀해 2001년 5월까지 고문으로 근무합니다. 이후 이회창 총재 특보로서 본격적으로 정치권에서 활동하며 16~18대에 걸쳐 국회의원을 지냈습니다. 19대 총선에서 낙선하자 역시 ‘친정’과도 같은 김앤장으로 복귀합니다. 2012~2016년 김앤장에서 근무하는 동안만 10억원 가까운 고문료를 받았다고 합니다. 세 차례에 걸친 고문료는 15억원이라고 박 전 장관 스스로 밝히기도 했습니다. 한 총리도 그렇지만, 아무튼 이쯤되면 박 전 장관 스스로 김앤장이 본 직장인지, 공직이 본 직장인지 헷갈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장관직도 끝났고 22대 총선에서도 낙선했으니 그가 이제 어디로 돌아갈지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볼 일입니다. 지독한 회전문 인사입니다. 공직→김앤장→공직→김앤장→또 공직... 이 무한 반복의 역할 교대 속에서 국가와 국민의 이익이 담보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순진하기 짝이 없을 뿐입니다. 한 총리와 박 전 장관 사례만 얘기했지만, 김앤장과 대한민국 고위 공직자의 유착 정도는 끈끈하다 못해 본말이 헷갈릴 정도로 광범위합니다. 공정거래위원회, 기획재정부, 국세청, 외교부 등 어지간한 정부 부처 출신 등을 모두 망라합니다. 변호사 아닌 공직자 출신의 고문들만 100명이 훌쩍 넘어간다고 합니다. 김앤장이 공직사회에서 오랫동안 봉사한 이들에게 기꺼이 연봉 몇 억원씩을 쥐어주는 것이 존경과 그에 걸맞는 예우를 하기 위해서일까요? 아니면 더욱 큰 이익을 만들어내기 위해 이들을 로비스트처럼 활용하기 위해서일까요? 연 매출 1조 3000억원의 로펌인 김앤장이 정부 부처와 고작 몇 백 만원 짜리 법률자문 용역 계약을 맺는 것은 더욱 큰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 밑그림을 그리기 위한 복안일 것입니다. 공직자윤리위원회의 취업 심사 시스템이 있긴 하지만 법과 시행령, 규칙 등만으로 이들의 김앤장 등 대형 로펌행을 막기는 역부족입니다. 법이 허술하고 부실하니 법령에만 근거해서 심사하다보면 눈 뜨고 코 베이듯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양이에게 어물전을 몽땅 맡겨온 격입니다. 이해관계자들이 법을 만들어서 자신의 훗날을 보장받으려 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롭기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주권자 시민들이 더욱 구체적으로 감시하면서 김앤장 공화국 건설 의도를 지적하고 비판하며 궁극적으로 법 개정을 요구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뒷북 치듯 반복되는 제2, 제3의 한덕수, 박진을 목도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2024-10-07 | hrights | 조회: 278 | 추천: 13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1979년 10월 27일 아침 10시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늦게 깼다. 잠에서 깨어나면 머리맡에 있는 라디오를 켰다. 93.1MH KBS FM 클래식 음악 방송에 채널이 고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장중한 장송곡 같은 곡이 흘러나오면서 갑자기 아나운서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나왔다. “고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서......” 독재자 박정희가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당시 나는 집 밖을 나가지 못하고 다락방에 숨어있다시피 했다. 아니, 이게 무슨 갑작스러운 축복이냐! 마루에 나와 혼자 신나게 춤을 췄다. 급히 옷을 갈아입고 시내에 나갔다. 당시 나는 군복무를 마치고 이듬해 3학년 복학 준비를 하면서 고향 마산에 있었다. 당시 마산 창동 네거리에는 10미터 안팎의 거리를 두고 클래식 음악다방 세 개가 있었다. ‘흑과 백’, ‘주노’, ‘가배 다방’이 그 이름들이다. 그때에는 주로 건물 2층에 있는 가배 다방에 모여 지인들과 시국을 논했다. 그중에는 ‘동포여 하는 소리에 놀라 깨어나 보니 똥퍼였다.’라는 시를 읊은 이선관 시인도 있었다. 그이 말고는 대부분 20대였다. 시내에 들어서니 길가에 아직 그날, 부마 민주화 항쟁의 불길이 마산으로 옮겨붙었을 첫날, 시위꾼들이 던진 유리병의 파편들이 남아 있었다. 속으로 웃음이 터졌다. 계단을 딛고 올라 다방에 들어서니 이미 많은 사람이 모여 환한 얼굴로 좋아라, 하고 있었다. “아이고, 축하합니다!”, “이게 우짠 일입니꺼”, “마, 한잔하러 가입시더”, 바라고 바라던 기적이 일어난 탓에 다들 흥분을 가누지 못했다. 10일 전쯤에 부마 민주화 항쟁으로 도시 전체가 격렬한 시위로 들끓었었다. 10월 18일 오후 5시쯤, <가배 다방>에 빈자리가 없이 젊은이들이 꽉 차 있었다. 평소 보지 못했던 몇몇 인물들이 눈에 띄었다. 전날 17일 오후 2시쯤부터 시내에서 이른바 짱돌과 빈 병 등을 던지며 진압 전투 경찰들과 강력하게 부닥쳤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아는 사람들끼리도 아무 말이 없었다. 다들 전날의 시위에 참여했었고, 그 때문에 알지 못하는 그들이 상황을 탐지하고 여차하면 체포하려는 형사들인 걸로 추정했던 것이었다. 나 역시 밤늦게까지 마산경찰서를 향해 짱돌을 던지다가 어둠 속에서 날아와 아스팔트를 치고서 솟아오른 최루탄에 무릎을 맞기도 하는 등 하면서 자정 가까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던 터였다. 오늘 또다시 뭔가 일이 벌어질 것이라 예감하고 결정적인 시간을 기다리는 긴장도 다방에 흐르는 침묵에 한몫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밖에서 “터졌다!” 하는 고함이 들렸다. 기다렸던 신호였다. 다방 안 모든 이들이 화들짝 들고 일어나 주인에게 가방 등을 맡기며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모두 창동에서 오동동 거리로 쏠려 내려갔다. 삽시간에 골목골목에서 나온 사람들로 길이 꽉 찼다. 오동동과 연결된 해안도로로 나가자, 마산수출자유지역과 창원공단 쪽에서 엄청난 시위 인파가 몰려왔다. 뒤끝이 보이지 않는 시위대로 4차선 도로가 꽉 찼었다. “독재 타도!, 독재 타도!” 구호가 끊임없이 넘쳐났다. 어느새 날이 어두워졌다. 선두에는 언제 준비했는지 제법 큰 피켓을 들고 나아가고 있었다. 나는 궁금한 마음에 최전방으로 나가 피켓에 무얼 적었는지를 보았다. ‘간첩 잡아 보상받자’라는 글귀가 크게 쓰여 있었다. 길가에 서 있던 반공 선전판을 뽑아낸 든 것이었다. ‘이야! 쥑인다!’ 나는 혼자 크게 웃었다. 도로 가의 모든 건물은 불이 커져 있었다. 본능적이었던 것 같다. 시위대는 어디선가 불빛이 보이기만 하면 ‘불 꺼!’ 하고 외쳤다. 그런 탓에 시위대의 물결은 어둠 속으로 크게 일렁이며 나아갔다. 그러다가 밤 8시쯤 되었을까, 시위대가 3‧15 의거탑을 마주하고 있는 마산 MBC 문화방송 앞에 이르러 더는 나가지 못하고 멈쳐 섰다. 총기로 무장한 진압군과 맞닥뜨린 것이었다. 진압군은 대각선으로 열 지어 군홧발을 아스팔트 바닥에 힘차게 내리누르는 시위 진압 보행을 하면서 다가왔다. 군홧발의 소리는 엄청나게 크게 들렸다. 나는 시위대 맨 앞에 서 있었고, 참다못해 혼자 진압군 쪽으로 나갔다. 4, 50미터 전방쯤이었을까? 진압군이 갑자기 총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그 총소리는 하늘마저 진동할 정도로 컸다. 시위대는 혼비백산 인도로 퍼져 나갔고 골목골목으로 숨어들었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총알이 시위대를 향한 건 아니었다. 맨 앞에서 서 있었기에 여실히 확인했다. 총소리와 함께 진압군 앞 아스팔트에서 강렬한 불빛들이 튀었다. 골목골목을 통해 빠져나와 북마산파출소를 향한 대로로 접어들었다. 파출소 앞에 헤드라이트를 환하게 켠 버스 두 대와 진압 군인들이 열 지어 있었다. 이쪽으로 접어든 시위대는 20명 가까운 정도에 불과했다. 우리는 길가 알루미늄판으로 만든 자그마한 주차 관리소를 엎어 아스팔트 길로 끌고 나갔다. 이를 바리케이드로 삼아 뒤에 숨어 군인들을 향해 밀고 나갔다. 고요하기 짝이 없는 캄캄한 도로, 엎어진 알루미늄판이 아스팔트에 쓸리며 내는 소리는 엄청나게 크게 들였다. 버스 가까이 짱돌 사정거리 정도로 좁혀졌을 때 다들 튀어나와 호주머니 속에 장만한 돌들을 버스의 헤드라이트를 향해 던졌다. 일단 우리를 향해 쏘아대는 버스 헤드라이트를 깨 우리의 모습이 노출되는 일부터 해결해야 했다. 그런데 서 있던 버스가 우리를 향해 갑자기 돌진했다. 놀란 탓에 다들 인도로 재빨리 도망쳤다. 지나가는 버스를 힐긋 돌아보니 운전자 혼자뿐이었다. 저들마저도 우리의 규모를 몰라 경계했던 것이었다. 그러고 얼마 있지 않아 진압 군인들이 우리를 향해 달려왔다. 우리는 ‘서원골’을 향하는 길로 2차선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좁은 도로로 도주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진압 군인들이 뒤쫓아 왔다. “부산 기동대 모여!”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부산을 진압하고 마산으로 넘어온 군인들이었다. 도망쳐 올라가면서 누군가가 동사무소를 향해 돌을 던졌다. 동사무소를 독재자의 명령을 수행하는 국가 기관으로 본 것이었다. 나는 ‘그러지 마! 동사무소가 무슨 죄가 있어!’ 하고 소리 질렀다. 어느새 진압군이 쫓아와 2, 30미터 거리였다. 그들은 M16 소총 같은 걸 어깨에 걸고 기다란 진압 곤봉과 철판으로 된 큰 방패로 무장하고서 우리를 뒤쫓아 왔다. 내 옆에는 아직 창원의 39사단에서 방위로 근무하는 친구가 함께 있었다. 일촉즉발의 위기였다. 나는 성호동 철길 위 잘 아는 교회 집사님의 대문을 급하게 두들겼다. 곧바로 그 집 며느리인 누님뻘 되는 분이 나와 문을 열어주어 친구와 함께 들어가 숨었다. 그러고는 대문 위에 설치된 슬라브로 올라가 엎드려 아래 지척 어둠 속에서 벌어지는 아비규환의 장면을 지켜보았다. 진압 곤봉에 두들겨 맞으면서 붙들린 시위꾼에게 철판 방패로 내려찍기도 했다. 한쪽에서는 “한 번만 살려주이소! 한 번만 살려주이소!”(한 번만 살려주세요!) 하는 애달픈 애원이 터져 나왔고, 다른 쪽에서는 “아나! 죽이라!”(어디 죽일 테면 죽여봐!) 하는 강렬한 저항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반항하는 그를 향해 진압군이 철판 방패로 사정없이 내려찍었다. 그런데 어느 시위대 한 명이 급한 김에 길 맞은편 집 대문을 급하게 두들기고 곧바로 주인이 나와 문을 열어주어 집안으로 숨어들었다. 주인은 대문을 닫았다. 불행히도 어느 한 군인이 이를 확인했다. 군인이 그 집 대문을 총 개머리판으로 두들겼다. 그런데도 주인은 곧바로 문을 열지 않았다. 그사이 숨어든 시위꾼은 어느새 어떻게 올라갔는지 그 집 기와지붕 위에 납작 엎드렸다. 주인이 대문을 열었다. 그러자 군인은 “이 새끼 죽고 싶어 환장했어!” 하면서 주인을 총 개머리판으로 돌려쳤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아비규환이었다. 몇몇은 서원골을 향해 도망쳐 올라갔고, 몇몇 사람들이 끌려가는 등 해서 그곳에서의 사태는 마무리되었다. 교회 집사님이 마련해 준 방에 친구와 함께 누웠다. 잠이 오지 않았다. 어디선가 멀리서 ‘독재 타도! 독재 타도!’ 하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 날 슬그머니 집으로 돌아온 뒤 집에 칩거하다시피 했다. 한 주일쯤 지나 수요일 예배를 보기 위해 저녁에 집을 나섰다. 하지만 중도에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키 큰 떡대 같은 몸집의 군인들이 골목마다 M16 소총을 허리에 대고 곧추세워 경계를 서고 있었다. 당시 스무 살부터 서른 살까지 모든 청년을 잡아간다는 소문이 돌았다. 시위를 하지 않은 ‘놈’들이 없다는 식이었다. 도시 전체가 공포 분위기였다. 그러다가 언젠가부터 군인들이 사라졌다. 다름 아니라, 독재자 박정희가 그의 심복이었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에 살해된 것이었다. 꿈같은 일이었다. 만약 그가 살해되지 않았다면, 부산과 마산은 색출, 체포, 구금의 살벌한 일들이 오랫동안 지속했을 것이다. 그 이후, 18년 독재로부터 해방된 정치 공간에서 김대중과 김영삼을 중심으로 민주정치를 회복하기 위한 연설회 등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그 와중에 한때 박정희의 심복 중 심복이었다가 잠시 그와 거리를 두고 있었던 김종필도 이에 가세했다. 이른바 1980년 서울의 봄, 3김 정치가 민심을 얻기 위해 동분서주 급하게 움직인 것이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박정희 살해 사건을 수사한다는 명목으로 보안사령관 전두환을 위시한, 이른바 하나회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이미 암약하면서 정권을 장악하려 한다는 소문이 크게 돌았다. 3학년에 복학한 나는 내가 다니던 신학교 역사에서 처음으로 일곱 명의 학우와 함께 정치 투쟁 서클 <비아 돌로로사>(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올라간 언덕길의 이름)를 만들었다. ‘전두환, 신현확은 물러나라!’ 하는 구호 아래 각 대학에서 베껴 온 대자보의 내용들을 수렴 ‧ 개작하여 밤새 대자보를 만들어 교내 몇 군데에 붙였다. 4월 말쯤이었다. 우리 서클 학우들이 교문을 박차고 숭실대학으로 올라가는 가파른 길을 따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하는 구호를 외치며 달려 올라갔다. 갑자기 검은 세단 네다섯 대가 겨우 8명밖에 되지 않는 우리 앞뒤를 에워쌌다. ‘제발 학교 안으로만 들어가 달라.’라는 게 그들의 요구였다. 그때만 해도 시위를 하더라도 함부로 체포할 수 없는 분위기였던 거다. 학교로 돌아온 우리는 교문 바로 안에서 데모했다. 길 맞은편에 초등학교 앞에 페퍼포그 차를 동원한 1개 중대 정도 되는 규모의 전투 경찰들이 열 지어 섰고, 학교 안에서는 모든 강의가 중지되어 학생과 교수 등 약 800명이 ‘구경’했다. 그렇게 미온적이었던 마침내 5월 13일 서울 시내에서 대학 연합의 대대적인 시위가 있었을 때 300명 정도의 신학생들이 사당동에서 광화문까지 ‘전두환은 물러가라!’ 구호를 외치며 도보로 참여했다. 격렬하게 투쟁해 저희 신학생들이 3대의 경찰차를 불태웠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착한’ 목사 지망생들이 속에서 자유를 향한 열정을 뿜어내자 ‘무서운’ 폭력도 마다하지 않은 것이었다. 학생들의 시위는 15일까지 간간이 이어졌고, 전두환 일당은 이를 빌미로 그들의 계획대로 5월 17일 확대 계엄령을 선포해 모든 정치 활동을 중지시켰다. 그다음 날인 5월 18일 광주에서 대대적인 비극을 몰고 온 민주항쟁이 시작되었다. 나는 짐을 싸서 고향인 마산으로 도주했다.
2024-10-02 | hrights | 조회: 80 | 추천: 6
이재환 / 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얼마 전 미국의 지역화폐를 탐방하는 좋은 기회를 얻었다. 미국에도 지역화폐가? 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자율성과 독립성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연방제 국가 미국의 지역화폐의 역사는 제법 깊고 넓다. 코로나19 국면 이전 미국 내 지역화폐의 수는 약 110여개로 알려져 있었다. 대표적인 지역화폐로 코넬대학교가 있는 뉴욕주 이타카 시의 ‘이타카 아워즈’가 있었다. 이타카 아워즈는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시간이며 시간에 따라 가치를 측정하고 교환되는 돈을 표방한다. 변호사의 1시간과 막노동꾼의 1시간은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다. 지난 1991년부터 발행된 이타카 아워즈는 뜨개질이나 춤, 언어 등 지역주민이 자신이 가진 재능을 나누며 아워즈를 벌 수 있다. 아워즈는 가맹점에서 현금처럼 사용이 가능하다. 통용되는 아워즈의 약 10% 정도는 자선단체나 시민단체를 지원하는데 쓰이며 소액의 아워즈로 무이자 대출을 받을 수 있다. 실제로 약 3만 달러 상당의 아워즈가 대출이 되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이타카 아워즈는 지역 20마일 이내에서만 발행하고 사용됨에 따라 지역의 돈이 지역 내에서만 순환하여 수십만 달러의 거래 발생 효과를 거뒀다고 평가받는다.   매사추세츠주 버크셔 카운티에서 2006년부터 발행하는 ‘버크셰어’는 지역 내 5개 은행 13개 지점에서 95달러를 내면 100버크셰어로 환전을 받아 400여 개 지역 가맹점에서 사용하는 지역화폐이다.  달러 대신 지역화폐인 버크셰어를 사용하면서 지역의 자금이 온라인 쇼핑이나 대형 유통점 등 외부로 빠져나가지 않고 지역 내에서 돌기 때문에 지역 소상공인 매출 유지에 도움이 된다. 돈이 지역 내에서 돌고 도는 지속가능한 경제시스템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두 지역화폐는 미 동부권의 사례이다. 이번에 찾아본 곳은 미 서부권의 지역화폐 운영 지역이었다. 그중에서 인상 깊었던 세 곳이 있다. 먼저 캘리포니아 북부 샌프란시스코 인근 산타크루즈 카운티의 지역화폐 ‘다운타운 달러스’ 이다. 다운타운 달러스는 지역 내 중심 상권 약 150여 개의 가맹점에서 사용 가능한 지역화폐로 지난 2008년 미국발 국제금융위기 상황에서 발행하기 시작했다. <다운타운 달러스 사용 가능 가맹점 지도 및 홍보 리플릿> 달러와 1대1로 가치교환이 가능하며 지류 형태로 유통된다. 다운타운 달러스 판매와 가맹점 환전업무는 상가연합회에서 담당하며 운영비는 상가들의 회비로, 지역화폐 홍보는 가맹점이 자체적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재밌는 점은 코로나19 국면을 기점으로 발행량이 3~4배 이상 확대됐다는 점이다. 경제위기가 닥칠수록 불경기 지역에 돈을 돌게 하는데 지역화폐가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놀라운 점은 다운타운 달러스를 운영하는 상가연합회의 핵심 관계자(Director of Operations)가 전직 산타크루즈 시장이었다. 다운타운 달러스의 지역 내 위상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산타크루즈는 역사적으로 공동체 의식이 매우 강한 지역으로 골목상권 활성화에 대한 상점-시민 간 역시 강력한 유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렇게 지역적 유대 의식을 바탕으로 성장한 다운타운 크루즈는 특히 생일이나 기념일에 주민들이 서로 나누는 선물로 마케팅을 하며 지속가능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세뱃돈으로 지역화폐를 주는 게 전통처럼 굳어진 격이다. 다운타운 크루즈를 운영하는 상가연합회 관계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지역 상권에 스타벅스 등 대형 체인 브랜드들이 입점을 하더라도 오래 못갔다고 크게 강조하는 점이었다. 지역 소상공 자영업 상권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컸다. 두 번째 지역화폐는 캘리포니아의 유명 휴양지인 산타바바라 카운티의 ‘산타바바라 미션즈’이다. 이 지역화폐는 지역 상권 활성화라는 목표보다 공동체 강화에 더 큰 방점을 찍고 있었다. 산타바바라 미션즈 지역화폐의 실물을 본 순간 눈을 의심했다. 흙으로 빚어 불에 구워 만든 도자기 동전이었다. <산타바바라 미션즈 실물 화폐>    산타바바라 미션즈는 지역 또는 상권의 경제 활성화보다 청소년, 은퇴자, 노숙자, 예술가 등 다양한 지역화폐 이해관계자 간 공동체 강화가 주요 목적이다 보니, 화폐 자체에도 연대의 정신을 물씬 담고 있었다. 도자기 동전의 옆면에는 거래자 간 이름을 적을 수도 있었다. 일본에서 지역화폐를 ‘주민 간에 오고가는 편지’라고 표현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산타바바라 미션즈는 정말 편지 같은 돈이었다.  공동체 활성화 중심형 지역화폐이다 보니 유통량은 매우 미미한 수준이었다. 아마 우리나라였다면 아이들 장난으로 치부하거나 운영의 미숙을 논하기 딱 좋은 정도였지만 산타바바라 미션즈 운영진들은 매우 진지했다. 역시 코로나19 국면 이후 화폐의 용도에 대한 의심과 고민에서 출발했고 실험적이지만 충분히 만족해 했다. 또한 앞으로 블록체인 등의 기술을 접목시킨 모바일 간편결제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세 번째 지역화폐는 산타바바라의 파마스 마켓에서 사용되는 ‘마켓코인’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화폐라기보다 물건 구매 시 교환용 토큰(token)에 가깝다. 파마스 마켓은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5일장이다. 지역 농민들이 직접 생산한 제품을 일주일에 한번 정도 모여 판매하는 장터이다. 그런데 규모가 제법 커서 일주일 장을 볼 수 있을 정도로 구색이 잘 갖춰진 시장이었다. <파마스 마켓에서 쓰이는 마켓코인> 이런 5일장에서 쓰는 플라스틱 동전 형태의 마켓코인의 목적은 ‘카드수수료 절감’이었다. 미국의 카드수수료율은 약 3%로 장터에 모인 농부들에게는 만만치 않은 부담이었을 것이다. 이를 한 번에 해결하는 방법으로, 장터 운영진들이 입장하는 주민들에게 달러나 카드 결제를 받고 시장에서만 쓸 수 있는 토큰을 교환해준 것이다. 토큰을 사용해도 거스름돈은 달러로 받을 수 있다. 규모가 아닌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우리만의 돈’을 쓰는 간결하지만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장터에 나온 주민들은 이 같은 방식에 대해 매우 긍정적이었다. 일단 파마스 마켓이 일종의 교류의 장이자 작은 축제와도 같아 운영의 취지에 적극 공감하고 있었다. 어린이, 청소년들 대상으로 화폐의 개념에 대해 공부하고 게임처럼 활용할 수 있어 부모들의 반응이 좋다고도 했다. 이들 지역화폐의 공통점은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지역에 돈을 돌게 하자는 의도를 가지고 확장하거나 새로 만들었다는데 있다. 또한 행정의 지원 없이 자발적인 추진 과정을 거쳤다. 무엇보다 ‘경제’보다 ‘공동체’가 더 중요하다는 인식이 매우 강했다. 수단이 목적이 되버린 가장 유명한 사례가 ‘돈’이라고 했던가. 미국 서부에서 만난 지역화폐는 지역화폐라는 도구로 무엇을 이룰 것인지, 지역화폐의 존재 이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우리나라의 지역화폐는 정부 및 지자체 차원에서 경제 활성화를 주요 목적으로 2010년대 중반부터 강력하게 시행되어 왔다. 지역의 부는 지역에서 소비하자는 동기는 미 서부의 지역화폐와 닮았지만 추진 주체와 추진력은 달랐다. 경제 불황기 지역화폐의 필요성과 역할은 증대되고 있다. 그동안 우리나라의 지역화폐가 효율성과 파급력에 집중하며 지역 순환경제 활성화에 큰 성과를 거뒀다. 서울 수도권에 집중되는 소비의 부를 지역에 남기는 가장 효과적인 재정정책이었음을 부정하긴 어려울 것이다. 이제 더 나아가 지역의 경제 문제를 고민하는 공동체 의식 즉, 사회적자본(social capital, 지역의 문제 해결에 함께하려는 무형의 자산)을 강화하는 도구로 지역화폐의 존재 가치를 추가 정립시키는 것을 심도있게 고민해야할 때가 아닐까.
2024-09-25 | hrights | 조회: 93 | 추천: 10
이동우/변호사 현 정부 들어 세금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작년인 2023년에 실제 세금으로 들어온 돈이 정부가 예측한 금액에 비해 무려 56조 원이나 부족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야당과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정부의 무분별한 감세정책 때문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그러나 정부는 이런 비판을 모두 무시하고 올해 다시 세금을 깎아주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번에는 상속세를 중심으로 세금이 너무 높다며 깎아줘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특히 문제가 되는 건 기업을 물려줄 때 세금을 적게 내거나 아예 내지 않게 하기 위한 계획이 포함된 점이다.   우리나라는 1997년에 이른바 ‘백년가게’를 만들어야 한다는 명분으로 ‘가업승계 공제제도’란 걸 만들었다. 쉽게 말해 부모에 이어 자식이 가게를 이어서 운영하면 세금을 깎아주는 제도다. 맛 좋은 칼국숫집을 부모를 이어 자식이 운영할 때 세금 때문에 가게를 팔아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안 된다는 주장에 반대할 사람은 많지 않았고, 세금을 낼 때 1억 원을 빼주는 것으로 시작이 됐다.   그러나 처음에는 좋은 의도로 시작된 이 제도가 점점 변질되면서 상속세를 내지 않고 가게나 기업을 자녀들에게 물려주는 수단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제도 도입 후 27년이 지난 지금 이른바 ‘가업’을 물려줄 때 국가가 빼주는 세금은 최대 600억 원이 되었다. 27년 동안 무려 600배나 늘어난 것이다. 27년 동안 우리나라의 명목 GDP는 1997년 542조 원에서, 2023년에 2,400조 원으로 약 4.4배가 늘었을 뿐인데 기업을 물려줄 때 빼주는 세금은 같은 기간 동안 무려 600배나 늘어난 것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이것도 부족하다며 약간의 조건을 붙여 깎아주는 세금의 최대치를 600억 원에서 1,200억 원으로 늘려야 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여기에 더해 기회발전특구로 지정된 지역에서 창업하거나 이전하는 기업에는 한도 자체를 없애겠다고까지 했다. 깎아주는 세금의 최대치에 제한이 없다는 얘기는 세금을 한 푼도 내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다. 실로 황당하기 이를 데 없는 계획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기업을 물려줄 때 세금 때문에 물려주지 못하면 안 되기 때문에 세금을 깎아줘야 한다는 정부의 주장이 타당해지려면 자녀는 아무 조건 없이 혹은 큰 부담 없이 부모의 기업을 물려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타당해야 한다. 그렇다면 왜 그것이 기업에만 해당되어야 할까? 부모가 가진 것이라면 부동산인 빌딩도, 금융자산인 은행 계좌의 돈도, 장관이라는 직위도, 의사라는 직업도, 경찰이라는 업무도 아무 조건 없이 혹은 큰 부담 없이 모두 물려받는 게 맞지 않을까? 그렇게 부모의 자산과 지위를 물려받는 사회를 우리는 계급사회라고 부르고 신분제 사회라고 불러왔다. 그리고 우리의 헌법은 제11조 제2항에서 “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라고 분명하게 신분제를 부정하고 있다. 헌법정신을 강조하는 대통령이 운영하는 지금의 정부가 헌법의 규정에 정면으로 반하는 신분제 부활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모순적인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가업승계 공제제도의 변질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정부는 작년에 이미 자식이 가업을 물려받은 뒤 변경할 수 있는 업종의 범위를 한국표준산업분류에 따른 중분류에서 대분류로 확대했다. 표현이 어려운데 쉽게 말해서 지금까지는 한식당이 다른 업종의 음식업으로 변경하는 것만 허용해줬는데 이제는 한식당이 숙박업으로 변경할 때도 허용해주는 것으로 바뀐 것이다. 과연 이것이 1997년 우리가 생각했던 백년가게의 모습일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칼국숫집에서 파스타 집으로 바뀌어도 고개가 갸우뚱해지는데 심지어 칼국숫집을 민박집으로 바꾸는 것이 어떻게 백년가게가 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런 걸 버젓이 허용하고 있는 제도가 바로 지금의 가업상속공제제도다. 도입 당시의 목표나 명분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다.   가업승계 공제제도의 문제점을 일일이 열거하기에는 이번 칼럼의 지면이 부족하다. 또 독자들도 지루해하실 수 있는 세법 이야기도 많다. 따라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 두 가지를 앞에서 언급했다. 글을 정리하면서 앞의 두 가지 외에 독자분들도 쉽게 공감하실만한, 그래서 꼭 바뀌어야 하는 중요한 세 가지를 간략히 얘기하고자 한다.   첫째로는 가업을 승계받는 자녀에 대한 조건이다. 지금은 자녀가 2년만 가업에 종사하면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맛집의 요리법이나 물건 제조의 기술을 2년 만에 배운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사회가 세금 감면이라는 혜택을 주면서까지 유지되어야 할 기술력이 확보되려면 적어도 10년의 기간은 필요한 만큼 혜택을 받기 위한 조건인 자녀가 가업에 종사하는 기간을 2년에서 10년을 늘려야 한다.   둘째는 사후관리기간이다. 가업을 승계했다는 이유로 세금 혜택을 받아놓고 기업을 팔아버리거나 다른 업종으로 변경하면 안 되기 때문에 현재 5년 동안 관련 규정을 잘 지키고 있는지를 감독한다. 그러나 이 말은 5년이 지나면 기업을 팔거나 업종을 변경해도 된다는 말이 된다. 백년가게를 만들자는 애초의 목적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이 기간도 원래는 15년이었는데 차츰 줄어서 5년이 된 것이다. 시대변화를 고려한다고 하더라도 애초대로 15년으로 늘려서 사후관리를 엄격히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는 대상기업의 확대 문제다. 현재 가업승계 공제제도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은 쉽게 정리하면 중소기업과 매출 5,000억 원 이하의 중견기업이다. 정부는 이 대상을 확대하고자 한다. 그러나 중소기업과 매출 5,000억 원 이하의 중견기업도 이미 매우 높은 수준이다. 이 대상을 자꾸 늘리다 보면 언젠가는 우리가 흔히 재벌이라고 불리는 대기업도 가업승계 공제제도를 활용하는 날이 올지 모른다. 대상기업의 확대는 전체 사회의 경제 규모 성장에 따라 매우 신중하게 결정되어야지 현 정부처럼 무턱대고 확대해서는 안 된다.   여러 문제점을 보이는 가업승계 공제제도 자체를 폐지하자는 주장도 많다. 그러나 일부나마 이 제도가 애초 목적대로 활용되는 때도 있으니 문제점을 보완해 제대로 기능하게 하자는 주장도 적지 않다. 오늘은 근래 주로 논의되는 후자의 관점에서 변질된 가업승계 제도를 바로잡을 방법들에 대한 고민을 다루었다. 갈수록 답답해져 가는 우리 사회의 현실에 골치가 아픈 독자분들에게 또 하나의 답답한 정보를 전달한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그러나 이 글로 정부의 무분별한 감세정책에 반대하는 분들이 하나둘 늘어난다면 상황이 더 악화되는 건 막을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답답한 현실도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함께 독자분들의 이해를 구하고 싶다.
2024-09-19 | hrights | 조회: 105 | 추천: 10
장은주 / 영산대학교 성심교양대학 교수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한국의 민주주의는 여러 가지 면에서 심각한 퇴행 증상을 보이고 있다. 스웨덴의 민주주의다양성연구소는 “2024 민주주의 보고서”에서 한국의 민주주의가 의미 있는 수준의 민주화 이후 갑자기 다시 민주화 이전 권위주의 체제 수준으로 퇴행하는 독재화의 길을 가고 있다는 평가를 내놓았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이런 통치 양식을 선보이고 있는 윤석열 정권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윤석열 대통령의 정치를 전 세계적으로 기승을 부리고 있는 ‘우익 포퓰리즘’의 한국적 변종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사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과정에서부터 지금까지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 등에 비견되는 포퓰리스트의 면모를 자주 보였다. 그러나 윤석열 대통령의 정치를 마냥 다른 나라 극우 포퓰리즘 정치와 같은 선상에 세우기 힘든 측면도 있다. 무엇보다도 이 정부는 부자와 기득권 세력을 위한 정책을 집요하게 관철시키고 사회적 약자들을 오히려 기득권 세력이라고 공격하곤 하는데, 이는 다른 나라의 극우 포퓰리즘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다. 조금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나는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의 ‘사이비’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주목한다. 자유민주주의란 그 핵심에서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인정하고 보장하며 법의 지배를 원리로 하는 민주적 정치체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자유민주주의가 많은 측면에서 왜곡되어 도입되며 정착했는데, 바로 이것이 검찰통치를 가능하게 한 중요한 배경이라는 이야기다. 자유민주주의는 본디 시민들의 인권(기본권)을 최우선적으로 보장하는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헌정화된 민주주의 또는 ‘입헌 민주주의’의 한 모델을 가리킨다. 헌정주의는 본래 공화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자유주의는 그 전통에서 출발하여 불간섭-자유의 이상과 결합된 권리보장적이고 제한적인 국가라는 이상을 추구하면서 자유민주주의라는 헌정 체제를 발전시켰다. 이 체제에서 사법 체계는 궁극적으로 민주적 과정을 통해서도 침해되어서는 안 되는 시민들의 인권을 보장하는 최후의 보루로 이해된다. 사법부와 검찰의 ‘공정한’ 법 관리와 집행에 대한 요구와 기대가 성립하는 것도 바로 이 맥락이고, 단순한 다수결주의를 넘어서는 헌정적 민주주의 체제도 바로 이 맥락에서 정당화된다. 이런 의미에서 자유민주주의는 제한적 민주주의다. 자유주의는 민주주의의 입헌화 과정에서 재산이나 시장의 자유와 관련된 자연권적 권리를 강조하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법치의 우위를 확립하고 민주 정치의 역할을 제한했다. 그러나 뒤집어보면 이 체제는 그 기본권 보장을 명분으로 소수의 사법 엘리트에게 너무 많은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 한 마디로, 이 체제는 기본적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법치의 우위 원칙’을 내장하고 있다. 그래서 자유민주주의 체제는 그 본성상 강하거나 약한 쥬리스토라시(juristocacy), 곧 ‘법조인지배체제’ 또는 ‘사법통치’를 내장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미국에서만 보더라도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대자들은 바로 대법관들이었다. 미국 대법원은 정부 정책들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리는 등 뉴딜 정책 실현에서 가장 큰 저항 세력이었다. 최근 미국 대법원은 여성의 자유로운 낙태 허용을 위헌이라고 판시함으로써 미국 사회가 수십 년 동안 이뤄 온 사회 진보를 무력화시키기도 했다. 이런 모습은 다른 나라들에서도 쉽게 관찰된다. 진짜 심각한 것은 이 자유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사법부가 정치세력과 결탁해서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왜곡시키는 모습을 보이는 경우다. 스페인의 경우 민주화 이후 곤살레스 수상 시절 보수 야당인 인민당은 사법부와 손을 잡고 여당인 사회노동당 인사들을 기소하고 유죄 판결을 이끌어내는 전략을 사용하여 정권교체를 이끌었다. 최근 브라질에서도 한국의 검찰이 지닌 권한을 보유한 수사 판사 세르지우 패르난두 모루는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을 활용하여 룰라 대통령을 기소하는 등의 사법정치를 통해 ‘브라질의 트럼프’라 불리던 극우 정치인 자이르 보우소나루를 대통령으로 만들고 자신은 법무부 장관이 되기도 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보이는 윤석열 정부의 ‘검찰통치(체제)(prosecutocracy)’도 바로 이런 넓은 의미의 사법통치의 한 변종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이것은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우리 민주주의 체제의 헌정적 결함의 결과다. 이런 결함은 무엇보다도 우리나라의 경우 민주화 과정에서 민주주의의 입헌화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리고 표방되었던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사회문화적 조건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에서 일부 소수 정치인들이 밀실에서 헌정체제를 설계했다는 데서 비롯한다. 이 체제에서 법조인들은 다른 집단이나 사회계층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이것은 통상적인 자유민주주의 체제 자체에 내장된 민주주의에 대한 법치 우위의 원칙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다. 우리의 경우 민주화 과정에서 재산권말고는 다른 중요한 기본권은 경시되고 법치의 이념은 ‘법을 수단으로 한 지배’로 왜곡된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확립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검찰을 비롯한 법조 엘리트에게 너무 많은 권력 공간을 열어 주었는데, 이것은 다시 우리의 자유민주주의체제를 더 더욱 왜곡시켰다. 특히 검찰에게 수사권과 기소권을 모두 쥐어주는 헌정적 결함은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본성적으로 강하든 약하든 내재하고 있는 사법통치의 경향이 한국에서는 검찰통치의 형식으로 나타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윤석열 정부는 본질적으로 한국식 사이비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필연적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윤석열 정부 이후’를 모색하면서 단순한 ‘정권 심판’이나 ‘정권 교체’를 넘어 그와 같은 사이비 자유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한 새로운 민주적 헌정체제를 수립해야 한다. 자유민주주의가 유일하게 가능한 입헌민주주의는 아니다. 최선의 입헌민주주의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시민 개개인의 자유와 존엄성을 보호하기 위한 국가의 적극적 역할을 긍정하지만, 수평적 권력 분립과 수직적인 민주적 통제의 원리를 결합하여 국가가 그 자체로 지배의 원천이 되는 걸 견제할 수 있는 새로운 민주적 헌정체제의 모색이 절실하다.
2024-09-09 | hrights | 조회: 129 | 추천: 3
강대중 / 서울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8월 말 일본 후쿠시마에 4박 5일 동안 다녀왔다. 14명이었던 일행이 인천공항에서 만나 너나없이 후쿠시마 간다고 주변에서 걱정을 많이 한다며 인사를 나눴다. 한 사람은 ‘세슘회’를 잘 먹고 오라는 인사도 받았다고 했다. 웃음 섞인 농담이었지만, 후쿠시마가 어떤 곳으로 각인되어 있는지 잘 보여주는 말이었다. 우리가 출국하기 열흘쯤 전에는 제5호 태풍 마리아가 후쿠시마가 포함된 일본 동북부 도호쿠 지방으로 상륙했었고, 후쿠시마 원전에서는 8월 8일부터 오염수 8차 방류가 진행 중이었다. 후쿠시마는 재난과 위험의 대명사로 어느새 자리잡았다. 나는 2011년 3월 11일 일어난 동일본 대지진 이듬해인 2012년에 8월 한 달 동안은 홀로, 또 2019년 봄부터 여름까지 5개월 동안은 가족과 함께 후쿠시마 원전에서 100여㎞ 떨어져 있는 미야기현 센다이시 소재 도호쿠대학교에 방문 연구원으로 체류했었다. 2012년 홀로 체류할 때도 그랬지만, 2019년에는 당시 초등학생, 중학생이던 딸들도 데려갈 일이냐는 걱정과 염려 섞인 말을 정말 많이 들었다. 그래서 웬만큼은 주위의 후쿠시마 방문 걱정에 단련이 되어 있었지만, 아무 걱정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후쿠시마를 다녀왔다면 그 또한 사실은 아닐 것이다. 도호쿠대학교 교육학부 교수님들과 인연으로 나는 2012년부터 여러 차례 이와테현, 미야기현, 후쿠시마현의 동일본 대지진 피해 지역을 답사하고, 통역자의 도움을 받아 주민들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2012년 첫 방문 때 센다이 국제공항 벽면에는 쓰나미가 어디까지 올라왔었는지 알려주는 눈금과 화살표가 표시되어 있었다. 자동차와 비행기가 쓰나미에 휩쓸린 사진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었다. 센다이 시내 주요 지점, 특히 학교의 방사능 수치를 측정해 공개하는 웹사이트도 있었다. 이삼일마다 들렀던 슈퍼마켓의 과일과 야채 매대에는 어김없이 방사능 수치를 적은 메모 핀도 꽂혀 있었다. 연구실이 있던 대학 건물의 꼭대기 층에는 대형 강당이 있었는데, 쓰나미에 침수됐던 중요 공공 기록물의 보존 처리 작업을 하는 자원봉사자들로 항상 분주했다. 해안 지역의 마을 상황은 실로 처참했다. 바다가 아주 가까운 어떤 마을은 재해 쓰레기를 싹 치운 상태였는데 집이 있던 자리의 콘크리트 기초 외에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말 그대로 삶이 뿌리째 뽑혀 나가고 흔적만 남아 있었다. 한 농촌 마을에서 만난 40대 부부는 피난에서 돌아와 텃밭에 심은 채소를 보여 주며 “그래도 농사를 멈출 수는 없다”고 중얼거리듯 내게 말했었다. 그때 그 부부의 얼굴을 바라보며 느꼈던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심경이 아직 내 가슴에 남아있다. 이번 후쿠시마 방문은 일본 전국사회교육추진협의회 초청으로 한국평생교육총연합회가 방문단을 꾸려서 성사된 것이었다. 후쿠시마대학교에서 이틀간 열린 제63차 전국사회교육연구집회 행사를 전후해 한국과 일본의 마을공동체와 평생교육(일본에서는 사회교육이라 부른다)의 역할을 검토하는 한일교류 특별분과 참여가 직접적인 목적이었다. 나로서는 끔찍한 재해에도 불구하고 고향을 떠나지 않고 마을을 지키며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시 들을 기회였다. 23일 정오쯤 일본 미야기현 센다이 국제공항에 도착해 휴대전화를 켜자마자 “띵띵~” 알림음이 울렸다. “[외교부]후쿠시마 원전 인근 지역은 여행경보 3단계(출국 권고) 발령 지역이니 긴요한 용무가 아닌 경우 동 지역의 여행을 취소, 연기 바랍니다.” 문자가 말하는 후쿠시마 원전 인근 지역은 엄밀하게 말하면 원자로 폭발 사고가 난 원전으로부터 반경 30km 이내와 일본 정부가 지정한 피난 지시 구역이다. 거기에는 조상 대대로 농사짓던 땅과 살던 집이 있는 일본인도 들어갈 수가 없다. 일본 땅에 닿자마자 전송된 이 문자의 효과는 분명하다. 후쿠시마는 위험한 곳이라는 인상을 뇌리에 다시 새긴다. 이제 센다이 공항에서 재해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지만, 마중 나온 일본 측 인사들의 기억 속에는 여전히 선명했다. 주차장으로 이동하는 짧은 시간 동안 그들은 우리에게 쓰나미가 덮친 그날의 공항 상황을 열심히 설명했다. 그러나 10미터가 넘는 높이의 쓰나미는 아무리 여러 번 들어도 너무나 비현실적이다. 기록에 따르면, 이와테현에서는 40미터, 대략 아파트 15층 높이의 쓰나미가 관측됐다고 한다. 센다이 공항에서 한일교류 특별분과 회의가 열린 니혼마쓰시의 후쿠시마현 남녀공생센터(성평등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일본 전역에 세워진 350여 개의 공공시설 중 하나이다)로 이동하는 중에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잠시 쉴 기회가 있었다. 휴게소 슈퍼마켓에서는 지역 특산품인 과자와 가공식품을 판매하고 있었는데, 후쿠시마 명물인 복숭아도 입구 쪽 매대에 진열되어 있었다. 12년 전과 달리 매대 어디에도 방사능 수치를 적은 메모 핀은 꽂혀 있지 않았다. 내 제안으로 복숭아 두 상자를 구입해 다음 날 아침 식사 때 나눠 먹는데, 누군가 “혹시…”하며 방사능 얘기를 했다. 아침을 같이 먹던 일본인 교수가 “철저하게 검사해서 전혀 문제가 없다는 걸 일일이 확인한다. 누가 방사능의 공포를 더 절실하게 느끼겠나? 원전 사고로 하루아침에 고향 집을 떠나 아직도 돌아가지 못하는 이들과 이웃해 사는 우리”라며 안심시켰다. 23일 분과회에서는 니혼마쓰시 토와쵸에서 평생을 산 히키치 도모코 씨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가 있는 지역을 목표로 하여―정든 지역에서 즐겁고 안심하고 계속 살기 위해’란 제목의 발표를 했다. 1958년생 여성인 히키치 씨는 1976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토와쵸의 공무원이 되어 2018년 정년까지 일했다. 정년 뒤에도 3년간 기간제로 공무원 생활을 더 했고, 2021년부터는 마을 공동체 현장 전문가인 촌락지원원으로 일하고 있다. 히키치 씨 발표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내용은 1984년 결성한 여성 문집 써클 「포켓」이었다. 현재 13명이 회원인 이 써클은 올해 8월 「포켓」 480호를 발행했다. 40년 동안 매월 「포켓」을 발행해 온 것이다. 그동안 딱 한 번 대지진이 있었던 2011년 3월호를 휴간했다고 한다. 히키치 씨는 그때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방사능과의 싸움으로 일상이 완전히 정지됐었다고 회상했다. 다음 달 4월호 편집회의에서는 지진이 발생했을 때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피난자를 어떻게 수용했는지, 여러 미디어에서 쏟아지던 쓰나미와 방사능 정보에 대해 서로 정신없이 이야기했다고 한다. 표지에 비둘기를 날려 보내는 두 손 그림이 그려진 2011년 4월호 「포켓」에는 ‘마음이 불안해져 지진이 올 때마다 공포에 질린 나머지 우는 습관이 생겼다.’ ‘만약 무슨 일이 있어도 역시 이 곳 토와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더더욱 하게 되었다.’는 내용이 실렸다고 한다. 히키치 씨도 ‘함께 여기서 계속 살 동료가 있으니 나도 여기서 살아갈 수 있다’는 마음이 생겼다고 한다. 엄청난 재난이 몰고 온 공포와 불안을 함께 견딜 단단한 이웃이 문집을 매개로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히키치 씨에게 당신 세대에는 농촌을 떠나 도시로 이주한 사람들이 많았을 텐데 고향을 떠나고 싶었던 적이 없었는지, 토와쵸에는 당신처럼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그곳을 떠나지 않고 살아가는 주민의 비율이 어느 정도인지를 물었다. 젊었을 때는 지역의 청년단 활동을 열심히 하고, 나이가 들어서도 그 사람들과 지속적으로 새로운 지역 활동을 하는 조직을 결성해 운영하다 보니 그만 떠날 수가 없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자신과 고등학교를 함께 졸업한 이들 중 삼분의 일 정도가 고향에 남았으니 그 정도 비율이 고향 토박이일 거 같다고 했다. 그 답을 듣고 열아홉 살에 대학 공부한다고 고향을 떠나 서울로 와서 어디에도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살아온 게 내 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40대에 7년을 살았던 13층짜리 아파트에서는 같은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익힐 새도 없이 많이 사람들이 이사를 들어오고 이사를 나갔었다. 어쩌면 나도 그렇게 들고나는 흐름 속에 잠깐 존재했을 것이다. 이웃이지만 이웃이 아닌 삶, 내 가족 안으로 오그라든 채 사는 곳에서 이웃과 단단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 삶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다음날 사회교육연구전국집회 전체 모임에서는 ‘동일본 대지진 13년 후쿠시마로부터의 발신’을 주제로 발표가 이어졌다. 후쿠시마 어업을 다시 살리기 위해 지역의 어민들과 10년 넘게 연대 활동을 해온 후쿠시마대학교의 하야시 카루헤이 교수님의 발표, 6년간 피난을 끝내고 다시 돌아간 고향 마을의 주민이 6천 명에서 2천 명으로 줄어든 상황에서 어떻게 다시 공동체를 만들 것인가 고민하는 이이다테 마을의 나가마사 마스시오 씨의 발표, 대지진 이후 살던 곳을 떠났거나 남아있는 사람들을 주기적으로 인터뷰하며 수집한 자료를 공유해 준 전 후쿠시마대학교 단바 사키 교수(현재는 리쓰메이칸대학교 소속)의 발표, 지역 공민관의 재난 극복 과정에서의 역할과 미래에 닥칠 또 다른 재난을 대비하는 프로그램에 관한 이와키시립 공민관 관장 이나다 마사코 씨의 발표를 들으며 많은 생각을 했지만, 아주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발표는 ‘NPO 법인 3.11을 이야기하는 모임’의 아오키 요시코 대표의 것이었다. 후쿠시마현의 여러 고등학교에서 국어(일본어) 교사로 재직하다 지금은 퇴직한 아오키 대표는 지난 10여 년 동안 3.11을 이야기하는 모임에서 나눈 이야기를 날 것 그대로 전했다. “(2011년 3월) 12일 피난을 할 때는 3일 뒤면 집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6년 동안 돌아가지 못했다. 1만 6천 명의 마을 사람들이 모두 한 번에 마을을 비웠다. 이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23살 때 원전이 처음 돌아가기 시작할 때, 내가 무엇을 했는지 무엇도 기억나지 않는다. 2004년 처음 이 학교 왔을 때, 도쿄 원전 직원들이 강의했다. 원전 주변 학교 교사 연수였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이 학생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했는지 반성하고 있다. 죽을 때까지 내가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2011년 원전 사고를 절대로 잊지 않겠다고 2014년 학교로 돌아와서 결심했다. 그런데 2015년 학교가 휴교했다. 학교 주변 벽에는 부흥을 원한다는 표지가 붙어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원전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동네이지만 이 동네 학생들이 다양한 꿈을 꿀 수 있도록 잘 키우자고 결심했던 교사들이 있었다. 그런데 원전 사고로 거기 들어갈 수 없게 됐다. 모두 물거품이 됐다.” 아오키 대표의 발표 슬라이드 중에는 학교 인조 잔디 운동장 위에 덩그러니 혼자 남아서 썩어 가는 야구공 사진이 있었다. 그 야구공을 던지고, 치고, 받던 학생들이 떠올랐다. 그중에는 일본 고교 야구 선수라면 누구나 꿈꾼다는 한신 고시엔 야구장의 흙을 담아오고 싶었던 학생들도 있었을 것이다. 야구공은 썩어도 그 꿈은 썩지 않았기를 바라지만, 이제 그 학교는 어떤 학생의 꿈도 품지 못하는 곳이 되어 버렸다.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분 일어난 동일본 대지진과 쓰나미, 그리고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많은 사람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꿨다. 여러 발표를 들으며 지난 13년 동안 이들은 어쩌면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거의 모든 고통이 겹겹이 쌓인 삶을 살아온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전체 집회 마지막 순서로 특별 공연을 한 ‘후쿠시마 행복을 전하는 합창단’의 한 여학생은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했다. 합창단은 미야기현과 후쿠시마현의 10대 학생들을 공개 모집해 결성한 것으로 재해 지역 곳곳을 다니며 공연을 한다고 했다. 그 여학생은 합창단 활동을 하며 재해를 당한 사람을 많이 만났는데, 자기 예상과 달리 그들이 누구보다도 맑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어 많이 놀랐고 그래서 많은 걸 배우고 있다고 말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대와 동역이 세대를 가로질러 생겨나는 걸 그 여학생의 말에서 느낄 수 있었다. 일행 중 한 명인 신민선 서울여대 교수가 일본 참가자들에게 한국에 돌아가면 “후쿠시마가 후쿠시마한다”는 말을 써야겠다는 인사를 했다. 명사로 후쿠시마는 절망의 땅, 버려진 땅, 재해의 땅이다. 그곳에서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며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목소리를 끊임없이 드러내고, 경청하고, 내발적 힘을 길러낸다. 사람을 이어주고, 지역을 개척하며, 미래를 만든다. 공동체를 일으켜 세운다. 이런 일을 동사인 “후쿠시마한다”고 부르자는 제안이었다. 귀국 비행기를 타러 센다이 공항을 향해 가는 중에 누렇게 벼가 익어가는 들판과 탐스러운 복숭아가 달린 과수원을 한참 가로질러 지났다. 거기서 “후쿠시마하는” 농민들이 좀 더 힘을 내기를 바라고 또 기대한다.
2024-09-05 | hrights | 조회: 415 | 추천: 12
윤동호 / 국민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짝사랑이 지속적 괴롭힘(스토킹)으로 바뀌지 않는 한 형벌을 줄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신체접촉이 형벌을 부를 수 있다. 격하게 공개적으로 하면 공연음란죄다.  은밀한 육체적 사랑은 형법과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은 권장되어야 한다. 세로토닌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이 나와서 행복감을 느끼게 해준단다.  그러나 형법이 금지하는 은밀한 육체적 사랑이 있다. 서로가 원하는 신체접촉을 사랑이 아니라 간음, 유사간음, 추행으로 부르고 형벌을 준다.  배우자 있는 사람과 그 배우자 아닌 이성의 성교를 간통죄로 부르고 2년 이하 징역으로 처벌했으나 형법에서 2016. 1. 6. 62년 만에 사라졌다. 헌법이 보장하는 성(性)적 자기결정권과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한다는 것이 헌법재판소(헌재)의 위헌결정의 이유다. 이제는 혼외성관계로 부른다. 그렇다고 혼외성관계가 법적으로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민법의 불법행위에 해당하여 손해배상책임을 질 수 있다.  13세 미만 사람과 신체접촉도 그가 원할지라도 사랑이라 부르지 않는다. 13세 미만 사람이 동의하더라도 연령에 관계없이 누구나 그와 어떠한 신체접촉도 금지한다. 형법은 강간죄, 유사강간죄, 강제추행죄로 간주한다(제305조). 그 이유는 13세 미만 사람은 외부의 부적절한 성적 자극이나 물리력의 행사가 없는 상태에서 심리적 장애 없이 성적 정체성과 가치관을 형성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19세 이상 사람이 13세 이상 16세 미만 사람과 신체접촉을 하는 것도 2020. 5. 19.부터 새롭게 금지되고 있다. 13세 이상 16세 미만 사람도 13세 미만 사람처럼 성적 자기결정권의 의미를 올바로 인식하고 이를 합리적으로 행사하기 어렵다고 간주한 것이다. 19세 이상 사람이 16세 미만 사람과 친밀감을 쌓아서 심리적 의존관계를 형성한 후 이를 이용해서 동의를 얻어 신체접촉을 할 수 있고, 이는 육체적 사랑이 아니라 그루밍(grooming) 성범죄라는 것이다.  13세 미만 사람과 육체적 사랑을 나누려고 옷을 벗다가 멈춘 사람은 물론 13세 이상 16세 미만 사람과 육체적 사랑을 나누려고 옷을 벗다가 멈춘 19세 이상 사람 모두 미수범으로 처벌할 수 있고(2006도9453의 취지), 이들이 육체적 사랑을 나눌 목적으로 서로 마음을 먹거나 준비하면 예비·음모범(3년 이하 징역)으로 처벌할 수 있다.  군인 간 육체적 사랑도 군형법은 추행으로 부르고 금지한다(제92조의6). 그 법정형도 무겁다. 폐지된 간통죄의 법정형과 같다. 그런데 남성 군인의 동성애만 처벌한다. 아무런 문제없이 충실하게 복무하고 있다가 다른 군인의 동성애 조사 중 파헤쳐지기도 한다. 헌재는 2023. 10. 26. 네 번째 합헌결정을 했다(2017헌가16). 군 내부의 건전한 공적 생활과 군기가 군인의 성적 자기결정권과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18세 사람과 16세 사람의 육체적 사랑은 금지하지 않는 것에 견줘보면, 성(性)적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군인이라는 이유로, 남성이라는  이유로, 동성애라는 이유로 차별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동성애자의 군복무를 허용하면서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처벌한다면 모순이다. 성적 건강의 문란 내지 군 기강의 해이와 동성애는 무관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적과 싸운다면 오히려 동성애가 전투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  동성애자의 입양도 유효하다. 민법 규정에 따라 적법하게 입양신고를 마친 사람이 단지 동성애자로서 동성과 동거하면서 자신의 성과 다른 성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는 입양이 선량한 풍속에 반하여 무효라고 볼 수 없다고 대법원은 봤다(2012므806).  최근 사실혼 관계에 있는 (남성) 동성애자의 국민건강보험 피부양자 자격도 인정되었다. 대법원은 다른 사실혼과 달리 동성 동거인의 피부양자 자격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성적 지향을 이유로 한 차별 행위로서 인간의 존엄과 가치, 행복추구권, 평등권 등을 침해한다고 봤다(2023두36800전합).  육체적 사랑을 나눈 장소가 병영 외부의 사적인 공간인 경우도 처벌해오다가 대법원은 최근 사적 공간의 육체적 사랑은 처벌할 수 없다고 봤다(2019도3047전합). 군기를 직접적·구체적으로 침해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데 육체적 사랑은 공개적으로 하지는 않는다. 공개된 장소에서 육체적 사랑은 공연음란죄로 처벌된다. 군형법 제92조의6의 추행죄를 둘 이유가 없다. 다시 헌재의 심판대에 오르면 위헌결정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간통죄처럼. 그 전에 국회가 없앴으면 더 좋겠다.
2024-08-27 | hrights | 조회: 282 | 추천: 4
이윤 / 경찰관 公과 私를 구분한다는 것이 말하기는 쉽지만, 실행은 참 어렵다. 하루 생활의 시공간을 딱 잘라 공/사 영역으로 구분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직장과 집이 공/사 영역으로 구분될 수 있을 것 같으나, 그러면 ‘직장 화장실에서 용변을 보는 것은 공인가, 사인가?’ 또 ‘퇴근 시간 후 집에서 같은 부서 사람들과 업무상 단톡방 대화를 나누는 것은?’이라는 질문에 답하기 쉽지 않다. 공적 또는 사적으로 소요된 시간과 노력에 대한 보상과 공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사회가 점점 예민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직장에서의 인간관계 공/사 구분도 어렵다. 한국에는 좀 친해지면 반말하는 문화가 있다. 반말을 하면서 점점 서로 간 공적 공간은 좁아지고 사적 공간은 넓어지며, 공/사 경계가 모호해진다. 직장이나 학교에서 선배가 두어 번 술자리를 거친 후 ‘앞으로 나에게 말 놓고, 편하게 형이라고 불러’라고 호형을 허하면 동생 된 사람은 형으로부터 보살핌을 받을 수 있어 좋다. 그러나 부하 노릇을 해야 하는 단점도 생긴다. 집에 있는 친동생에게도 시키지 않을 것 같은 담배 심부름이라든지, 은행 가서 돈 찾아오기 등을 해야 한다. 업무적으로도 마치 하인 부리듯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맡기면서 형 동생 사이에 그런 것도 못 해주느냐는 태도를 보인다. 직장 내 괴롭힘 또는 갑질이다. 동생 된 입장에서는 사적 심부름이나 업무 전가에 문제를 제기하면 인간적으로 선배와 멀어질 것 같고, 속 좁은 놈이라는 평가를 받을까 봐 속을 끓인다. 물론 나중에 모든 고생을 보상받는 은혜를 입는 (그나마 다행인) 경우도 있다. 그런데 그 형이 자신에게 잘 해준 동생에 대한 사적 감정만으로 승진이나 보직 등에 혜택을 주는 것(사내 정치 또는 줄서기) 역시 공사 구분을 못한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이 외에 혈연, 지연, 학연, 군대연 등 사적 인연에 의해 공적 의사결정이 좌우되는 것도 공/사 구분하지 못한 경우다. 요즘은 공적 자원을 사적으로 이용하는 것에 대해 점점 심각한 부정행위로 보는 추세다. 회사 탕비실에 있는 과자와 커피로 아침을 해결하는 직원을 일컫는 탕파족(탕비실 파먹는 사람)이라는 신조어가 생기고, 그 비난 가능성에 대해 인터넷에서 논란이 일 정도다. 30년 전에는 경찰서 과장도 의경이 운전해 주는 관용차로 출퇴근했는데, 요즘 경찰서장은 대중교통이나 자차를 이용하여 출퇴근한다. 휴가 때 관용차를 사용하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예전에는 판공비가 현금으로 지급되어 집 앞에서 떡을 사 먹더라도 괜찮았겠지만, 요즘 업무추진비는 법인카드로 사용 후 영수증을 제출해야 하고, 그 용도와 시간 및 사용 장소가 제한되어 있으며, 누구와 무슨 이유로 사용하였는지 명시해야 한다. 공적 자원을 사적으로 사용하고 싶은(憑公營私) 욕심은 누구에게나 있다. 다만 누군가는 평소 갈고 닦은 수행과 품격으로 욕심을 억누를 수 있어 공사를 잘 구분할 뿐이다. 지위가 높아질수록 권한과 권력이 커지면서 공/사 구분하기는 매우 어려워진다. 그래서 큰 권한과 권력을 맡을 사람의 수행 정도와 품격을 확인하고 검증해야 한다. 각종 선출직에 대한 경선과 본선거 과정, 장관급 고위직에 대한 인사청문회 등에서 이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고 소명하도록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사 구분이 안 되는 사람은 중세 봉건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옛날에는 국가 내 토지를 비롯한 모든 자원이 황제나 왕의 것이었고, 그로부터 봉토를 받은 영주들이 위탁관리하였으니, 황제나 왕, 영주는 공사 구분 없이 모든 것을 마음대로 사용해도 되었다. 심지어 결혼세를 내지 못한 신부로 하여금 영주에게 순결을 바치게 하는 ‘초야권’이라는 것도 있었다고 들었다. 공이 곧 사였고, 사가 곧 공이었다. 왕의 음주가무 및 사냥 등 놀이 비용도 당연히 세금을 이용했다. 대한민국은 봉건 사회가 아니라 민주공화국이다. 그래서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은 사적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아직 봉건적 사고에 머무르고 있는 사람은 관직이나 선출직이 옛날 벼슬자리인 것처럼 생각하고, 공적 권한을 사적으로 사용하는 것에 문제의식을 못 느낀다. 공직 특히 고위직에 있는 사람이 주변인들에게 자신의 성공과 그로 인한 영향력을 과시하고 싶어서, 또 사적 이득을 취할 목적으로 공적 권한을 사용하여 국토이용계획, 수사, 통관절차 등에서 사법적, 금전적 이득을 주는 것 역시 공사 구분을 못 한 행동이다. 뉴스를 보면 요즘에도 공사 구분을 못 하는 사람이 참 많은 듯하다. 1800년 전 ‘읍참마속’으로 공사 구분을 분명히 한 제갈량이 그리울 지경이다. 공명정대의 의미가 ‘하는 일이나 태도가 사사로움이나 그릇됨이 없이 아주 정당하고 떳떳함’인데, 이 나라에 공명정대한 사람이 그렇게나 드물어서 공사 구분 안 되는 사람에게 나라의 중요한 일을 맡길 수밖에 없는 것인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2024-08-16 | hrights | 조회: 310 | 추천: 6
박록삼 / 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노영방송이라는 말은 어제오늘 나온 표현은 아닙니다. 공영방송으로서 잘못 운영되고 있음을 극단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정치적 레토릭에 가깝죠. 지난주 인사청문회에서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이 연신 썼지만 그가 아니라도 십 수 년 전부터 극우 유튜버를 비롯해 MBC, KBS 등의 소수노조, 보수 정치권 등에서 즐겨 써왔던 표현 중 하나입니다. 홍준표 대구시장은 지난해 노골적으로 대구 MBC의 취재를 거부하고 방해하는 동안 MBC를 가리켜 “민주노총 방송으로 변질됐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MBC, KBS 등의 일부 사장 혹은 보도국 등 주요 인사들이 언론노조 조합원이라는 점, 언론노조의 방송 영향력이 강하다는 점 등을 그 근거로 꼽곤 했습니다. 노영언론이라는 선동적 언어로 그들이 무엇을 바라는 것인지 궁금합니다만, 그 내밀한 부분은 나중에 더 생각해보기로 하고 언론노조가 대체 무엇인지 민주노총과 관계는 어떤 건지 살펴보고 싶습니다. 사실 미리 귀띔 드리자면 민주노총은 물론 언론노조조차 사실 관계조차 맞지 않는 ‘노영방송’이라는 호칭 앞에서 민망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전국언론노조는 민주노총 산하 산별노조 중 하나로서 2000년 탄생했습니다. 여전히 많은 분들이 흔히들 ‘언론노련’, ‘언노련’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만 1988년 11월 출범한 언론노련이 기업별 노조들이 모인 연맹체였다면 언론노조는 전체 언론 노동자 조합원들이 하나의 노조 아래 모인 산별노조로 진화했다고 보면 편안할 것 같습니다. 실제 전국 각지의 신문, 방송, 통신사, 주간지는 물론 출판 인쇄, 언론유관기관 등까지 지부, 본부로 망라한 언론노조는 1만 3000명 정도의 노조원이 있습니다. 단일한 노조 깃발 아래 세워져 만 24년이 된 언론노조이건만 명실상부한 산별노조라 말하기에는 내용적으로 어려움이 큽니다. 예컨대 신문 소속 언론노동자와 방송 소속 언론노동자가 몸으로 공유하는 이해관계가 거의 없다시피 하니 같은 노조 조합원으로서 접점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같은 방송 부문 언론노동자, 같은 신문 부문 언론노동자라도 서로 소 닭 보듯 멀뚱멀뚱 하는 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우리의 기업 문화, 노사 문화가 여전히 개별 기업 단위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 탓일 것입니다. 예컨대 각 개별 언론사에서 임금협상 단체협상을 할 때의 노조 측 대표도 언론노조 위원장이지만 이는 형식적일 뿐, 개별 언론사 노조지부장에게 위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즉, 산별노조로 혁신 발전했다지만 여전히 개별 노조의 연맹체인 ‘언론노련 시대’를 살고 있는 셈이지요. 물론 노동자 권익 보호 및 평등한 노동문화 지향의 가치를 구현해야 할 산별노조가 갖고 있는 현실성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별도로 필요하긴 하겠죠. 이러한 노조 문화의 후진성은 언론 환경 변화의 원인 혹은 결과물일지 모릅니다. 언론의 뉴스 컨텐츠 소비가 철저히 포털을 중심으로 이뤄지게 된 나비 효과로 생각됩니다. 개별 언론사로서는 컨텐츠의 차별화를 통한 매체 고유 독자의 창출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게 되고, 생산성과 경제성이 떨어지는 일처럼 여겨집니다. 그저 정글과도 같은 포털 내부 경쟁에서 이기고 포털의 메인 페이지에 잘 노출돼 조회수를 올릴 수 있는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컨텐츠만 살아남게 됐습니다. 대부분 언론 매체에서 조회수를 기사의 사실상 유일한 평가 근거로 삼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피할지 모르지만, 그만큼 언론 환경 악화의 악순환의 고리 또한 심화되게 됐습니다. 상업적 경쟁을 강조하다보니 언론 노동자들의 인식 역시 소속된 매체, 회사 단위를 결코 벗어나지 못합니다. 언론의 공공성, 사회적 책임성 등을 중심으로 한 언론 집단 내부의 공동 이슈가 있음에도 공동의 대응, 언론노조로서 1만 3000 노조원의 연대는 상상조차 어려운 일입니다. 소속 회사에서 발생한 이슈에 대해서조차 노조원의 노조 활동 참여도가 높지 않은 곳이 대부분이니 긴 말이 필요 없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마당에 민주노총에 대해서는 말한들 뭐하겠습니까. 오래 전 언론노조에 파견돼 언론개혁 10대 과제를 만들기 위해 몇 달 동안 일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민주노총이 총파업을 준비하던 때였습니다. 민주노총이 총파업을 결의하는 회의에 참여한 언론노조 간부에게 “언론노조 동지들은 이번 총파업의 보도투쟁을 조직해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언론노조의 조직 수준과 상황, 특수성에 대한 이해가 깔린 방침 전달이었습니다. 총파업에 참여하지는 못하더라도 민주노총 총파업의 의미와, 이유, 목표 등을 국민들이 잘 공유할 수 있도록 보도를 잘 해달라는 의미였겠지요. “잘 알겠다”고 답하고 돌아왔지만 언론노조가 할 수 있는 일은 사실상 그럴싸하게 총파업 행동지침을 만들어서 각 지부, 본부에 전달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할 수 없었습니다. 윤석열 정부에서 일방적이고 폭력적으로 장악했고, 또 장악하고자 하는 MBC, KBS, YTN 등 방송사 언론노조 본부, 지부의 상황 또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상대적으로 인원이 많고 개별 본부 조직력이 조금 더 높은 정도지요. 단언컨대 노영방송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일부 우파 정치인과 일부 우파 언론계 인사들이 내건 정치적 구호일 뿐입니다. 이런 표현이 나올수록 공영언론이 해야 할 사회적 책무와 역할이 함께 표류하게 되고, 정치적 유불리의 거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언론과 방송은 노조의 것이 아니었듯 정권의 전리품 또한 아닙니다. 부디 윤석열 대통령은 무조건적인 거부권 행사를 멈추고, 방송통신위 및 방송문화진흥회. KBS 이사회 등에 대한 폭력적인 방송 장악 인사를 원상 복구하기를 바랍니다.
2024-08-06 | hrights | 조회: 298 | 추천: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