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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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1. 윤석열의 권력과 자유 윤석열은 과연 이상한 인간인가? 상식을 갖춘 자라면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괴이한 자인가? 심지어, 인간의 얼굴에 뱀의 몸통을 한 스핑크스처럼 괴물인가? 아니다. 그는 보통 사람보다 좀 더 의지가 강할 뿐이다. 그 강한 의지가 철저히 권력을 향해 있을 뿐이다. 쉽게 말하면, 남에게 지고는 못 사는 성정을 뼛속 깊이 새기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는 오로지 권력만을 좋아한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단언할 수 없지만, 정신분석학적으로 역시 권력 지향형으로 추정되는 그의 아버지 탓이라고는 하지만, 어쨌건 흔히 권력을 얻는 지름길이라 여기는 사법 고시에 기필코 합격하고 말겠다는 다짐으로 아홉 번이나 도전했다는 전대미문의 사실에서 이를 확인하게 된다. 결과론적인 진단임을 피할 수는 없지만, 기어코 대통령이 되고 말았다는 데서 이를 재확인하게 된다. 그는 자신이 오로지 권력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돈은 권력을 위해 필요할 뿐이다. 억만금을 주더라도 그는 거머쥔 권력을 내놓지 않을 인물이다. 항간에 떠도는 “권력은 부자 사이에서도 나눌 수 없다.”라는 말을 권력에 대한 비판이라고는 손톱만치도 생각하지 않고, 그거야말로 천상천하의 진리임을 철석같이 믿는 인물이다. 그는 프랑스의 대문호 오노레 드 발자크가 말한 것처럼 “토론의 대상이 되는 권력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라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웅은 예외 없이 권력의 화신이 아니더냐, 하는 말을 동어반복으로 여기는 인물이다. 약하고 가난한 자들을 위해 헌신하거나, 우주적인 철리를 깨달아 이를 실천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다거나, 예술과 문학을 위해 평생을 바치거나, 과학적인 이치를 깨닫거나 이를 기반으로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전심전력으로 노력함으로써, 설사 그들이 성인으로 또는 천재로 추앙받는다고 할지라도 그들을 내심으로는 권력을 추구하였으나 현실적으로 권력을 얻을 길이 없음을 알아 다른 쪽에서나마 권력을 얻어보리라 하여 엉뚱한 길을 찾아 밟아간 자들에 불과하다고 여기고 결국에는 권력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한 자들이라 여기는 인물이다. 한마디로 윤석열은 의식적으로건 무의식적으로건 “권력은 절대적 진리다.”라는 걸 믿는 인물이다.             그래서 공정과 상식은 권력을 얻기 위한 질 좋은 수단일 뿐이고, 도덕과 정의는 권력을 얻는 데 참으로 좋은 수단일 뿐이긴 하지만 그 질이 너무나 좋아 수단으로 쓰기에는 위험한 구석이 있다고 여긴다. 그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권력을 위한 수단은 자유다. 한마디로 그는 자유의 전사다. 그는 수시로 자유를 외친다. 하지만 그 자유의 정체와 본질이 무엇인지 제대로 밝히지는 않는다.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그가 생각하는 자유를 나열하면 이렇다. 권력을 얻기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이라도 활용할 수 있는 자유, 확보한 만큼의 권력을 마음껏 휘두를 수 있는 자유, 더 많은 권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면 필요에 따라 때로는 한껏 아첨하고 때로는 강력하게 협박할 수 있는 자유, 자신의 권력을 편드는 자들을 끌어모아 활용할 수 있는 결사의 자유, 자신이 거머쥔 권력을 조금이라도 좀 먹으려는 자라면 누구나 벼랑 끝까지 쫓아가 몰아붙여 불안과 두려움에 떨게 할 수 있는 자유, 자신에게 권력을 위임한 모두를 어리석기 짝이 없는 자로 여길 수 있는 자유, 자기보다 분명히 강한 자라면 위대한 자라고 여긴 나머지 그 앞에서 납작 엎드려 고개 숙여 그의 위력을 조금이라도 나누어 받기를 앙망할 수 있는 자유, 항간에 떠도는 합리를 추구하는 지성이나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양심 운운하는 자들이야말로 위선적이고 천하에 몹쓸 쓰레기 같은 자라고 여길 수 있는 자유, “다른 사람의 행복을 빼앗으려 하거나 행복을 얻으려는 다른 사람의 노력을 방해하지 않는 한, 우리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자유”라는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에 관한 말에서 행복을 권력으로 대체해서 해석할 수 있는 자유, 그래서 남의 권력을 빼앗거나 방해하지 않고 나의 권력을 추구할 수 있는 길이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존 스튜어트 밀이야말로 바보이거나 거짓말쟁이임에 틀림이 없다고 확신할 수 있는 자유, 내가 그렇다고 생각한다는데 무슨 간섭이냐고 내놓고 떠들 수 있는 표현과 실행의 자유 등등. 요컨대 윤석열은 “인생은 권력 투쟁의 과정이고 산물이다.”라는 제1 명제와 “자유는 근본적으로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에서 모든 수단을 활용할 수 있는 자유다.”라는 제2 명제를 굳건히 믿는다고 할 수 있다. 과연 이를 믿는다고 해서 이상한가? 철학자 스피노자는 “각각의 사물은 자신 안에 존재하는 한에서 자신의 존재 안에 남아 있으려고 한다.”라는 이른바 코나투스(conatus)를 말하지 않았는가. 자신의 존재 안에 남아 있으려 한다는 건 자신의 존재를 가능하면 더욱 강하게 유지하려는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남들을 적대적으로 이용하는 건 당연한 것 아닌가. 이와 같은 방식으로 사물의 본성으로 보자면, 권력을 진리로 삼고, 권력을 위한 자유를 진정한 자유로 여긴다고 해서 윤석열을 비난할 수 없는 노릇이다. 과연 그러한가? 2. 윤석열의 우둔한 권력의지 권력을 추구하는 자들의 딜레마가 있다. 인간들이 신(神)을 창안하고 절대권력을 그 핵심적인 특성으로 삼은 데서 알 수 있듯이, 권력은 무한할뿐더러 한 인간에게서 생겨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한 인간이 거머쥘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쉽게 말하듯이, 권력을 추구하는 자는 끝없이 권력의 노예가 된다. 그런데도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헌법에 명시해 놓았다. 혹시라도 누군가 어리석게도 권력이 자신에게서 생겨나고 따라서 권력을 자기가 마음대로 휘둘러도 상관없다고 생각하여 엉뚱한 짓을 할 수도 있기에, 이렇게 아예 헌법에 명기해 못 박아 놓은 것이다. 권력을 지니고서 지배하는 자는 자신의 권력에 예속되어 지배받는 자를 애용할 뿐 결단코 사랑하지 않는다. 권력관계만으로 일관하는 인간관계에서 토사구팽은 상례다. 하지만, 권력에 지배받는 자는 그 때문에 자기가 권력을 나누어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 자기가 권력에 지배받는다는 사실을 흔쾌히 여기지 않는다. 신이 인간들로부터 칭송을 받기 위해서는 권력 외에 사랑이 필요하다. 그래서, 모순되게도 신은 무한한 권력과 아울러 무한한 사랑을 갖춘 존재로 정의된다. 권력과 사랑은 모순 관계다. 신은 존재의 원리에 따라 모순을 충분히 감당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못하다. 권력을 위해서는 그만큼 사랑을 저버릴 수밖에 없고, 사랑을 위해서는 그만큼 권력을 저버릴 수밖에 없다. 보통 사람들은 권력과 사랑을 적절히 섞어 살고 있지만, 윤석열에게 사랑은 오로지 권력을 향한 것일 뿐이다. 모르긴 해도, 아마도 그는 자신에 대한 이 진단을 흔쾌히 승인할 것이다. 한 나라의 통치 권력을 거머쥔 대통령이 되려 하거나 된 자는 “사랑하고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을 외친다. 이는 자신이 권력을 추구해서 대통령이 되려는 게 아님을 선포하는 행위다. 국민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자존심도 명예도 심지어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목숨뿐만 아니라 가족의 안위마저도 아깝게 여기지 않고 내놓을 거라는 다짐을 내보이는 행위다. 윤석열 역시 대통령 취임사에서 “존경하고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을 맨 앞에 내세웠다. 그뿐만이 아니다. “국민이 진정한 주인인 나라를 재건하는 소명”을 운위했고, “반지성주의” 때문에 “민주주의의 위기”가 닥쳤고, 그래서 “양극화가 심화하고 공동체의 결속력이 흔들리고 와해 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할 정치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역설하고, “합리주의와 지성주의”를 바탕으로 한 “과학과 진실을 통해 민주주의”를 건설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 말을 한 지 불과 2년도 채 되지 않았다. 전부 다 거짓말이다. 아니, 거짓말이 아닐 수도 있다. 자신이 왜 그 말을 하는지는 알지만, 그 말이 진정 무슨 뜻인지를 모를 수가 있고, 모르고 하는 거짓말은 정작 거짓말이라 할 수 없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으로서는 참말일 수도 있다. 그라면 거머쥔 권력을 빼앗기지 않고 강화하기 위해 하는 말은 무슨 말이든지 참말일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핵심은 그가 권력을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서는 무슨 말이든지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전부 다 거짓말이다. 다들 아는 일이어서 새삼 그 실질적인 증거를 일일이 들이댈 필요조차 없다. 대선 후보 시절 손바닥에 임금 ‘王’ 자를 뚜렷이 새기고 나와 그 무속적 반지성주의로써 온 국민을 창피하게 만든 때부터 이미 그 싹을 확인했다. 그런데도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억장이 무너지고 기가 막힐 노릇이지만,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는가에 관한 일련의 과정에 관해서는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지금까지도 그러하지만, 최고의 권력자인 대통령을 꿈꾸는 당시에 한시도 그치지 않고 자행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권력의 발판인 검찰 조직을 거머쥐고서 그 사법적 위세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휘권자인 법무부 장관은 물론 대통령마저 어쩔 줄 모를 정도로 한껏 자의적으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대통령이 된 뒤 국민 모두의 비극이 순식간에 절정에 올랐다. 용산 대대통령실 이전에서부터 시작해 어이없이 이루어지는 일방적이고 독선적인, 게다가 파괴적인 국정의 운영과 그 틈틈이 드러나고 생겨나는 갖은 부정과 부패의 이력들에서 이제 그의 통치를 반(反)민주적이고 반민족적이고 반국가적이고 무엇보다 반(反)민생이라고 하더라도 쉽게 반박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자기만의 권력과 자신의 권력을 위한 자기만의 자유를 추구하는 자가 대통령이라는 엄중하기 이를 데 없는 자리에 올랐을 때 과연 어떤 참사가 일어나는가를 우리 국민은 물론 심지어 세계인 모두가 여실히 목격하는 중이다. 불행 중 다행한 일은 그가 권력을 추구하는 데 전혀 현명하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지만, 그가 대통령의 자리에 선출되기까지는 어떻든 나름 최대한의 요령을 발휘해 불행하게도 국민을 잘 속여 넘긴 셈이다. 하지만 다행하게도 딱 거기까지일 뿐이다. 대통령이라는 최고 권력을 장악하자마자 누구나 그 어이없는 속내를 훤히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로 무자비한 권력욕을 무식하게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속으로 썩어들어가는 방식이 아니라, 겉과 속이 함께 썩어들어가는 방식으로 일관했기 때문에, 취임 초기부터 <촛불 행동>의 시민들이 주말마다 거리에 나와 ‘윤석열 하야’을 외쳤고 급기야 ‘윤석열 탄핵’을 목청껏 외치고 있다. 3. 총선 민주 진영 대승리, 탄핵만이 답이다. 이제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총선이다. 신생 정당인 <조국 혁신당>에서 ‘3년은 너무 길다’라는 총선 구호를 내걸었고, 대다수 국민이 이를 ‘윤석열 조기 탄핵’으로 읽고서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조국 혁신당>이 이른바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이 내세우는 ‘4월 10일 심판의 날’ 총선 구호 역시 이재명 대표가 “이제 너희는 해고다.”라고 역설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윤석열 정권에 대한 ‘최후의 심판’과 그에 따른 ‘탄핵을 통한 조기 종식’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통령 탄핵’은 그야말로 불행이다. 하지만 실현한다면 불행 중 다행이다. 정말이지 어떻게 만들어 온 나라인가! 민주화를 위한 무수한 희생은 물론이고 그 와중에 죽으라고 열심히 일한 탓에 불과 2년 전만 해도 ‘자고 나니 선진국이다’라는 말을 당연하다고 여기면서 나라에 대한 자부심을 지니지 않았던가. 세계 곳곳에서 한국을 배우겠다고 형형색색의 많은 젊은이가 찾아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제 ‘자고 나니 후진국이구나’ 하는 한탄이 들린다. 한국이 민주국가의 모범에서 독재국가로 전락하고 있다는 세계적인 진단이 나오고 있다. 속된 말로 ‘미치고 팔딱 뛸 노릇이다.’ 그런데 드디어 총선이 다가오고 있다. 또 한 번의 대통령 탄핵이 다가오고 있다. 그렇게 믿는다.
2024-03-19 | hrights | 조회: 5 | 추천: 0
박상경 / 인권연대 회원 1. 초등학교 이학년 때이다. 골목 끝에서 나는 나보다 너더댓 살은 많은, 우리가 세 살던 주인집 언니와 머리끄덩이를 잡고 싸웠다. 이를 말리던 아이 중에 하나가 집에 달려가 엄마를 불러왔다. 주인집 아줌마도 같이 달려왔다. 싸운 이유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이도 많고 덩치도 큰 언니는 한주먹도 안 되는 조그만 애가 지지 않고 달려드는 게 몹시 분했고 나는 그런 언니한테 지지 않으려고 씩씩댔다. 달려온 엄마와 아줌마를 본 순간 우리는 아이들답게 “우왕”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와 아줌마는 각자 자식을 붙잡고 야단을 쳤다. 엄마는 나한테 조그만 게 언니한테 덤비고 그런다고, 아줌마는 언니가 돼서 동생이랑 잘 놀지는 못하고 싸운다고. 우리는 입을 내민 채 집으로 돌아가 우물가에서 울어서 꼬질꼬질해진 얼굴을 씻으면서도 눈을 흘겼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로 그 집에서 우리는 일 년쯤 더 살다 이사 갔다. 엄마가 학교 다니는 나를 두고 동생들과 시골에 갈 일이라도 생기면 주인집 아줌마는 나를 데려다 밥을 먹이고 재워줬다. 잠은 미예 언니랑 잤다. 나랑 싸운 언니다. 2. 해마다 정기세미나를 기획하였는데 어느 해인가 포스터에 들어갈 내용에 ‘사회’를 ‘좌장’으로 바꾼 적이 있다. 물론 ‘사회’를 보는 분의 요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기획한 정기세미나의 내용이 지난해와 특별히 달라진 게 없기에 당황스러웠다. 사회자라는 말보다는 좌장이라고 하는 것이 격조 있어 보여 그러는 걸까. 그해 세미나는 내용적으로 지난해에 미치지 못하였다. ‘좌장’은 그저 말의 허세였다. 그런 말의 허세와 허영은 우리 사회의 ‘리더’며 ‘어른’이라는 표현에서도 차고 넘쳐난다. 자격은 없으면서도 우리 사회의 리더란다. 국회의원 3선이니 5선이니 하면서 사회의 어른을 자처하는 이들이 많다. 사회의 리더며 어른들이 넘쳐나는 요즘, 내가 사는 세상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비루하고 몰염치하다. 제 욕심을 채우는 일에 골몰하면서도 자기가 어른이란다, 사회의 리더란다. 이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몰라도 된다. 그저 내가 리더고 어른이니 내가 하는 일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저희들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옷을 갈아입고 화를 낸다. 보통 사람은 내 자식이 잘못했다고 내 자식을 야단치면서도 어른 노릇을 잃지 않는데, 제 욕심 채우는 일에 골몰하는 사이비 리더는 너희가 잘못하는 거라고 큰소리치고 화를 낸다. 어찌 그리도 체면 자칠 줄도 모르고 부끄러움도 모르는 건지. 바야흐로 세상은 염치없는 이들이 득세를 하고 부끄러움은 평범한 사람들의 몫으로 돌아오고 있다. 3. 오래전에 읽은 시가 자꾸만 생각나 시집을 찾아봤다.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아름다운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업을 가진 아저씨가 꽃리본 단 딸아이의 손 이끌고 백화점 거리 칫솔 사러 나오신단다. 탄광 퇴근하는 鑛夫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묻은 책 하이덱거 럿셀 헤밍웨이 莊子 휴가여행 떠나는 국무총리 서울역 삼등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 있을 때 그걸 본 서울역장 기쁘시겠오라는 인사 한마디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남해에서 북강까지 넘실대는 물결 동해에서 서해까지 팔랑대는 꽃밭 땅에서 하늘로 치솟는 무지개빛 분수 이름은 잊었지만 뭐라군가 불리우는 그 중립국에선 하나에서 백까지가 다 대학 나온 농민들 추럭을 두 대씩이나 가지고 대리석 별장에서 산다지만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이름 꽃이름 지휘자이름 극작가이름은 훤하더란다. 애당초 어느쪽 패거리에도 총쏘는 야만엔 가담치 않기로 작정한 그 知性 그래서 어린이들은 사람 죽이는 시늉을 아니하고도 아름다운 놀이 꽃동산처럼 풍요로운 나라, 억만금을 준대도 싫었다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 상처내는 미사일기지도 땡크기지도 들어올 수 없소 끝끝내 사나이나라 배짱 지킨 국민들, 반도의 달밤 무너진 성터가의 입맞춤이며 푸짐한 타작소리 춤 思索뿐 하늘로 가는 길가엔 황토빛 노을 물든 석양 大統領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 가더란다.”(신동엽, 산문시 <1>) 이토록 지독하게 몰염치한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의 무력감은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이름 꽃이름 지휘자이름 극작가이름은 훤한” 그런 세상을 간절히 꿈꾸게 한다.
2024-03-13 | hrights | 조회: 70 | 추천: 3
이윤 / 경찰관   초등학교 시절 우수상을 받아오면 어머니는 우리 삼 형제를 데리고 중국집에 가서 200원쯤 하던 짜장면을 사 주셨다. 어머니는 짜장면이 싫다고 하시며 3개만 시키셨고, 나는 이 맛있는 짜장면을 왜 싫다고 하시는지 궁금해하면서 쫄깃하고 달콤한 면발을 목젖 너머로 삼켰다. 한 친구 아버지는 우수상 받아오면 자전거를 사준다고 했다는데 그게 참 부러웠다. 만일 우리 어머니가 나에게 자전거를 사주셨으면 나는 그 후에도 공부를 열심히 했을까? 인지부조화 이론에 의하면 자전거 보상으로 공부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에 나는 그 이후 공부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짜장면은 공부를 열심히 하는 목적이라기에는 너무 하찮아서 노력-보상 간 불일치가 발생한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공부가 재미있었다거나 미래를 위한 준비 등 더 그럴듯한 이유를 찾아 태도를 형성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 후 별다른 보상이 없어도 계속 열심히 공부했다. 어머니는 가정 형편 때문에 짜장면으로 보상하셨지만, 인지부조화 이론 관점에서는 정확한 보상이었다. 인지부조화(cognitive dissonance) 이론은 심리학자인 레온 페스팅거가 1957년 발표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 신념, 의견, 태도, 행동 간 서로 모순되어 양립할 수 없는 불균형 상태(인지부조화)를 불편해하므로 이를 해소하여 조화상태를 이루려 한다는 이론이다. 불균형 해소를 위해 주로 변경하는 것은 변화나 조작이 간단하고 쉬운 의견이나 태도이다. 친구들과 나가 뛰어놀고 싶은 것도 참고 졸린 눈을 비비며 억지로 공부한 노력에 비하면 짜장면은 너무 소소한 보상이라 노력-보상 간 불균형이 생긴다. 이미 해버린 노력과 시험 결과와 먹어버린 짜장면은 변경할 수 없는 상수다. 하지만 공부에 대한 태도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나 자신도 잘 몰랐기에 쉽게 변화시킬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공부가 재미있어’ 또는 ‘공부 별로 어렵지 않네’라는 태도를 형성하였을 것이다. 포도를 따 먹지 못한 여우가 ‘저 포도는 익지 않아서 신맛이 날 거야’라고 생각하는 것도 인지부조화 해소를 위한 자기합리화의 일례다. 3천 회 이상 엄격한 심리학 실험을 거쳐 검증된 인지부조화 이론은 많은 사람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인지부조화가 있을 때 보통은 태도를 쉽게 바꾸지만, 정치적‧종교적 신념은 바꾸기 어렵다. 살아오면서 정치적‧종교적 신념에 대해 남들에게 여러 번 말했거나 그에 맞는 행동을 많이 하여 이미 상수가 되어서 변할 수 없다. 누군가에겐 그 신념이 자신의 정체성 또는 존재 이유기도 하다. 그래서 신념과 불일치하는 사건이 발생하면 그에 대해 부인하고, 분노하고, 신념과 일치하는 쪽으로 왜곡 해석하려 한다. 신념에 배치되는 사실‧증거‧가설은 애써 외면하고, 일치하는 것만 찾아다닌다. A정당에 투표한 사람이 있는데, 선거 결과 B정당이 승리하여 다수당이 되었다고 가정하자. 지지 정당이 정권 잡는 데 실패했다는 이유로 지금까지 옳다고 믿어온 정치적 신념을 바꾸지는 않는다. 그러나 A정당이 패배한 선거 결과 자체가 자신의 신념 및 투표행위와 배치되므로 인지부조화 상태에 빠졌다고 할 수 있다. 이 불일치를 해소하기 위해 이 사람은 B정당이 틀렸다거나 부정하게 승리했다는 태도를 형성하고, 그 증거를 찾으려 한다. 그러나 정당 간 정강이나 정책이 서로 다르기는 해도 틀리기는 쉽지 않으니 다른 데서 B정당의 흠을 찾으려 한다. 전통적으로 뇌물과 성추문은 한 인간을 정치적‧사회적으로 매장하는 데 청산가리만큼 효과가 좋다고 알려져 있다. A정당은 약발 좋은 추문을 여기저기 흘리거나 만들고, 이 사람은 B정당 사람들의 뇌물과 성추문 그리고 기타 여러 자질구레한 잘못을 찾으려 애쓴다. 지저분한 사람들 모인 곳이 B정당이라는 증거를 보며 나의 선택이 옳았음을 확인하기 위해서다. 그렇게 B정당이 틀렸다는 신념을 확인시켜 주는 온갖 지저분한 증거에 젖다 보면, B정당 사람들에 대한 인간적 혐오감이 증가한다. 자극적인 뉴스 헤드라인과 유튜브 알고리즘은 이 과정을 더 쉽고 빠르고 강하게 해 준다. 게다가 정치인의 언행을 웃음거리로 만들어 조롱하고 멸시하는 컨텐츠에 많이 노출될수록 시청자의 마음속에는 정치적 신념과 상관없이 인간적 혐오감이 증폭된다. 증폭된 혐오감은 정치 테러로 발전할 수 있다. 내가 지금 힘들고 괴로운 이유가 모두 그 사람 탓이니 악마화된 그 사람을 없애야 나와 사회, 나라가 편해진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최근 정치인들에 대한 물리적 공격이 발생한 이유도 이런 과정으로 자라난 혐오감이 원인일 것이다. 물론 사생활이 난잡하고, 거짓말 잘하고, 부정축재하는 사람에게 정치를 맡기는 건 고양이에게 생선가게 맡기는 격이니 공익 목적으로 널리 알려야 하지만, 이런 네거티브 전략이 주가 되어 혐오감만 부추긴다면 정치는 사라지고 수치와 경악만 남게 된다.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정보가 홍수처럼 쏟아지는 시대다. 유권자들은 인지부조화가 혐오로 발전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나도 틀릴 수 있음을 늘 염두에 두고, 내 신념과 반대되는 의견도 경청하고, 정보를 검토할 때는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관점에서 해야 한다. 개인이 깊이 생각하고 알아보기에는 너무나 먹고살기 바쁜 세상이 되어버려서 정보를 빨리 처리하는 게 편하겠지만, 그럴수록 스스로 한 번 더 생각하는 노력을 해야 혐오정치를 멀리할 수 있다.
2024-02-28 | hrights | 조회: 93 | 추천: 3
박록삼 / 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위르겐 클린스만(60)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 우리에게는 꼬박 30년 전 이미 선수로서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참으로 다사다난했던 1994년 여름이었습니다. 미국 월드컵 조별예선에서 한국 대표팀과 만난 독일 대표팀의 공격수 클린스만은 전반전 12분 만에 입이 떡 벌어지게 만드는 골을 넣었습니다. 좁은 공간 수비수 세 명 틈바구니에서 받은 패스를 오른발로 톡 건드리더니 180도 빙그르 돌아서 날린 왼발 발리슛은 최인영 골기퍼의 오른쪽 가장 먼 곳을 파고들었습니다. FIFA랭킹 1위팀의 세계적 선수라는 것이 무엇인지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게 만든 그림 같은 골이었습니다. 그는 이후에도 한 골을 더 넣으며 3-0으로 넉넉히 경기를 이끌었습니다. 1무 1패로 벼랑 끝에 몰린 한국 대표팀은 후반전 황선홍 선수와 홍명보 선수의 멋진 중거리슛으로 1골 차까지 추격하는 등 뒤늦게 분전했지만 패배해 안타까움을 더한 경기였습니다. 어쨌든 이 경기에서 클린스만은 한국 축구팬들로서는 결코 잊을 수 없는 모습을 남겼지요. 선수 시절 그는 ‘레전드’라는 평가가 걸맞는, 참으로 화려한 활약을 펼쳤습니다. 만 18세에 분데스리가에서 한 시즌 16골을 넣었고, 1988년 올림픽에서 독일(당시 서독) 국가대표 공격수로서 동메달, 유로대회 4강, 올해의 선수상 등을 받는 등 만 12년 동안 A매치 108경기에서 47골을 넣었습니다. 1990년 10월 ‘통일독일 대표팀 A매치 1호골’도 클린스만이 기록했을 정도로 독일에서 그의 상징성은 큽니다. 문제는 그 이후입니다. 감독으로서 성적은 신통치 않았습니다. 독일 대표팀, 미국 대표팀 감독을 했지만 각각 유럽선수권 조별리그 탈락, 월드컵 지역 예선 조 최하위 등 성적을 냈습니다. 결국 2016년 미국팀 감독직에서 경질되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 맡은 국가대표팀 감독이 2023년 3월 한국입니다. 딱 1년이 지난 현재 그는 사실상 경질됐습니다. 아시안컵 우승 실패라는 결과적 성적표보다는 축구팬들과 소통하는 태도, 업무에 임하는 자세 등에 더욱 큰 문제를 드러냈습니다. 아시안컵 4강전 패배 이후 한국 귀국 이틀 만에 미국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일반 축구팬과 언론은 물론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축구 평론가, 심지어 정치인 등까지 다수 국민들의 퇴진 요구 목소리만 ‘닭 쫓던 개’처럼 공허히 울려 퍼지게 됐습니다. 결국 대한축구협회는 경질을 통보하게 됐죠. 이렇듯 마이동풍, 오불관언하는 책임자의 끝은 경질, 탄핵로 귀결되는 것이 사필귀정이지요. 이뿐인가요. 한국 사회에 ‘또다른 퇴임 요구’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대통령 이야기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2022년 5월 취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탄핵 집회가 바로 시작했으니 조금 지나친 면이 있는 듯도 했습니다. 윤 대통령을 지지하는 입장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윤 대통령을 비판하는 입장에서도 우려의 시선이 컸습니다. 시간을 주고 조금 더 지켜봐야 한다는 목소리에서부터 대선 결과에 불복하는 정치적 집회 아니냐는 지적까지 우려 섞인 시선들은 충분히 많았습니다. 하지만 불과 2년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윤석열 정부 스스로 탄핵의 사유를 차곡차곡 쌓아가는 모양새입니다. 법률가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혹은 검사 출신의 법률가인 탓인지 그 사유라는 것이 대부분 법의 위반 문제, 법 권능의 과도한 행사와 관련됩니다. 헌법 제65조는 대통령이 그 직무집행에 있어서 헌법이나 법률을 위배한 때에는 국회는 탄핵 소추를 의결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22개월 가까이 되는 동안 야당 대표를 한 번도 만나지 않으며 일방적 국정 운영을 한 점이 탄핵의 이유는 될 수 없습니다. R&D예산 4조 6000억원을 삭감하며 국가의 중장기적 발전의 동력을 훼손한 것이나, 국민과 소통한다면서 대통령실을 용산으로 옮겨 최소 수천억원의 막대한 예산을 들게 만든 점, 출근 약식기자회견으로 소통의 모양새를 취하더니 2022년 11월 이후 1년 3개월 동안 언론과 접촉을 아예 회피한 점, 정부에 비판적 보도를 한 언론사를 번번이 압수수색하고 기소한 점, KBS와 연합뉴스 YTN 등 공적 언론을 장악한 점, 신냉전적 외교안보정책을 고수하며 1992년 중국과 수교 이후 31년 만에 처음으로 대중 무역적자를 기록하고 러시아를 사실상 적대국으로 대한 점, 한반도의 평화체제 관리를 소홀히 해 군사적 대치를 가파르게 만든 점, 전문성과 역량에 대한 제대로 된 검증도 없이 검사 출신 등을 국정 요직 곳곳에 등용하는 인사 난맥상 등등등도 대통령으로서 능력과 자격이 부족함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게 직접적인 탄핵의 사유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무속인 천공의 다양한 가르침 내용을 국정에 적용했다는 일각의 의혹, 혹은 대통령이 되기 전 사실혼 관계에 있던 배우자의 주가조작 가담 의혹, 잦은 지각 출근 의혹 역시 진실을 밝혀야 하며, 그에 따라 비판과 책임을 질지언정 법적 탄핵 사유까지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쉽게 간과하기 어려운 부분 또한 분명히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강제 징용 관련 대법원 판결을 부정하면서 삼권 분립의 헌법 체제를 무너뜨린 점이나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에 외압을 행사해 병사 사망 사건 수사 내용과 결과 자체를 뒤집어버렸다는 의혹, 대통령의 장모 소유 땅 앞으로 서울-양평 고속도로 노선을 변경한 것과 관련한 국정농단 의혹, 대통령 배우자의 명품백 뇌물 수수 의혹 등은 간단한 문제가 아닐 것 같습니다. 여기에 대통령의 법안 거부권을 직권남용에 가깝게 행사하더니 급기야 자신의 배우자 방탄용으로 사용한 점은 감정적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검찰총장 시절 검찰에 비판적인 정치인의 고발을 정당에 사주하며 선거에 개입하려 했다는 의혹의 직접적 책임을 져야 하는 문제 역시 간단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여기에 보태 심심찮게 국민의힘 당무 및 공천 과정에 개입하는 언행들이 대통령발로 툭툭 던져지는 것도 매우 위태롭습니다. 사실 이 극단적 대결과 갈등의 시대, 누가 대통령을 한들 중뿔나게 잘할까 싶으니 윤 대통령에게도 어지간하면 잘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주자고 말하고 싶은 마음도 큽니다. 그런데 너무도 불통입니다. 인사도, 정책도, 정치도, 외교안보도, 경제도 뭐 하나도 국민과 소통하려는 모습이 안 보입니다. 2월 16일 카이스트 졸업식에서 윤 대통령을 향해 “R&D 예산 복원하라”고 외치던 졸업생의 입을 틀어막은 뒤 팔다리를 들고 연행해 경찰에 넘긴 사건은 슬픔을 넘어 분노를 일으키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난 1월 18일 “국정기조를 바꿔라”고 말한 국회의원의 입을 틀어막고 내동댕이친 장면의 재판입니다. ‘입틀막 정권’이라는 비판의 언사조차 온순한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남은 시간 3년을 한국사회가 잘 버텨낼 수 있을지 두려움이 듭니다. 4월 10일 총선에서 민심이 어떤 형태로든 일단락을 지어주겠지요. 2024년 이렇게 두 개의 탄핵 여론이 뜨겁습니다. 오불관언, 불통의 모양새로 약간 닮은 꼴 같기도 합니다. 어쨌든 하나는 국민적 여론에 밀려 사실상 탄핵, 경질이 이뤄졌습니다.  까짓것 축구야 우리 삶에 뭐 얼마나 영향이 있겠습니까. 월드컵 등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면 정신적 위안을 받고 만족감을 얻는 정도겠지요. 국가의 이익과 국민의 민생, 한국 사회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만들기 위한 책임을 지고 있는 대통령의 위치와 어디 비교할 바나 되겠습니까. 부여받은 책임과 과제, 역할을 마지막까지 제대로 수행하고자 한다면 국민들의 비판 여론에도 귀를 기울이고, 운영의 기조를 대폭 바로잡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국민들은 열정적이면서도 참 착한 사람들인지라 과제와 역할의 방향성을 제대로 잡았다면 그 운영 과정에서 벌어지는 작은 실수는 크게 문제 삼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자신의 귀를 막고, 국민의 입을 틀어막는 일이 반복된다면 국민들은 용서하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부디 두 개의 탄핵 여론이, 두 개의 오불관언이 국민들에게 행복한 결론으로 마무리되기를 바라고 또 바랄 따름입니다.
2024-02-20 | hrights | 조회: 262 | 추천: 4
황문규 / 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 1. 세상이 혼탁하다. 어디선가 본 드라마에서 ‘아직도 정의를 찾는 사람이 있냐’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부정의가 판치는 세상이다. 검사 출신 몇몇 무리의 말이 곧 정의의 기준이 되고 있다. 압수․수색은 수사가 아니라 통치의 수단이 되었다는 지적이다. 보이는 세상에서 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에 종사하도록 되어있는 검찰과 경찰은 그들을 위해 기꺼이 압수․수색에 나선다.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는 국정원이 그에 뒤질세라 열심이다. 관료사회에서는 감사원이, 언론사회에서는 방송통신위원회가 기특하게도 압수․수색 없이도 제몫을 다하고 있다. 법원은 짐짓 그렇지 않은 척하면서 압수․수색을 위한 영장 발부로 동조한다. 압수․수색을 당한 자의 모멸감과 공포감은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본보기가 되고 있다. 이런 세태는 어느 사진작가에 예술적 영감을 주어 ‘무빙 데이(Moving Day)’라는 작품으로 이어질 정도가 되었다. 사진: 옥정호 작가의 사진프린트 패널 작품 ‘무빙 데이(Moving Day) - No.2’. 2. 불과 얼마 전 대통령 탄핵이라는 역사적 경험에서 권력기관이 정치적으로 중립성을 유지하고 민주적인 통제 장치가 작동하는 긍정적 의미의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가 만들어질 것이라는 시도와 기대가 있었다. 그 시도는 그렇지만 너무나 민주적? 방식으로 진행된 나머지, 그리고 김수영의 시 「풀」에서처럼 ‘바람보다 더 빨리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 버리는 권력기관(관료)에 포섭되어, 그나마 그때까지 매여있던 고삐를 느슨하게 하고 심지어 풀어버리게 만들었다. ‘살아있는 권력 수사가 검찰개혁’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고삐가 풀려버린 것이다. 이른바 ‘검찰국가’ 시대가 도래하자, 그간 검경 수사권조정에 유리한 국면을 만들기 위해 ‘경찰이 곧 시민이고, 시민이 곧 경찰이다’는 구호를 외치면서 ‘인권경찰’을 표방하던 경찰은 어느새 ‘국가인권위원회 권고의 무조건적 수용’이 경찰의 적극적 법 집행에 방해가 되는 저해요소로 평가할 정도로 변해버렸다. 권력에 춤추지 않으면 견디기 힘든 후과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사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는 비아냥의 대상이 돼버렸지만, 사람 좋은 어느 전직 대통령을 탓할 수만 없는 이유다. 3. 어느새 권력에 따라 춤추는 모습이 일상화된 대한민국이다. 정권교체는 이제 전 정권을 청산이 필요한 적폐로 내몰고, 대한민국을 새로운 권력에 따라 춤추게 만드는 게임의 승자에 다름 아니다. 개인적으로 지난 정부의 적폐청산이 ‘전 정권 죽이기’가 아니라, 친일잔재, 군사정권의 잔재, 그리고 예컨대 오래 전의 책이지만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에서 지적한 유교문화 중 현대사회와 모순되는 폐습 등등이 청산되고 새로운 미래의 대한민국을 위한 법과 제도를 다듬고 보완하는 계기로 이어질 것으로 기대했었다. 그러나 기대가 현실이 되지 못한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오늘의 정권도 내일이면 곧 청산되어야 할 또다시 새로운 적폐로 내몰릴 것이기 때문이다. 거꾸로 간 세상이 다시 거꾸로 가고, 더 거꾸로 가는 세상이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4. 혼탁한 세상이다. 그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다. 그저 각자도생해야지라는 생각이지만, 각자도생조차 버거운 세상이다. 그래도 세상이 혼탁하지 않았던 역사가 과연 있기는 했을까, 오죽했으면 굴원의 어부사(漁父辭)〈창랑의 물이 맑거든/ 나의 갓을 씻을 수 있고/ 창랑의 물이 탁하거든/ 내 발을 씻을 수 있어라〉가 나왔을까라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는다. 나아가 노자의 숙능탁이정지서청(孰能濁以靜之徐淸)처럼 자신을 기꺼이 흐리게 만들되, 탁류에 휩쓸리지 않고 오히려 탁류를 가라앉힘으로써 세상을 서서히 맑게 할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고 선택하는 안목을 가진 다수가 정치적 효능감을 느낄 수 있는 세상이 도래하기를 기대해본다.
2024-02-14 | hrights | 조회: 177 | 추천: 15
서보학 / 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지난 1월 20일 김진욱 초대공수처장이 퇴임하면서 1기 공수처가 막을 내렸다. 공수처는 대통령, 국회의원, 고위공직자 등의 권력형 비리를 수사하여 국가운영의 투명성과 공직사회의 신뢰성을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도입되었다. 한국 사회 최대 권력기관인 검찰을 견제하기 위한 기관이기도 하다. 공수처는 1996년 1월 시민단체인 참여연대가 15대 국회에 제출한 입법청원을 통해 최초로 공론화되었고 이후 김대중, 노무현, 문재인 정부 등 진보정권에서 도입을 위한 노력을 지속 경주해 왔으며 마침내 2019년 12월 30일 20대 국회에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안’이 본회를 통과하였고 2020년 1월 7일 국무회를 통해 공표되었다. 공수처 설립은 시민사회와 진보세력이 25년간 보수세력 및 검찰의 집요한 반대를 극복하고 거둔 성과이기 때문에 3년 전 공수처 출범 시 시민들의 기대감이 높았다. 정치권의 요구에 맞춰 고위공직자 범죄를 편파·왜곡 수사하거나 은폐하기에 급급했던 검찰과는 달리 공수처는 공정한 잣대로 권력형 비리를 엄정 수사할 것과 또한 특권 남용·내부 비리로 깊숙이 병든 검찰을 견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사진: 연합뉴스 그러나 공수처의 지난 3년은 실망스러웠다. 초미의 관심사였던 1호 수사사건의 선정부터 납득하기 어려웠다. 중대한 권력형 범죄나 검사비리를 선정하여 수사에 착수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공수처는 자신들이 기소할 수도 없는 사건인 서울시교육감 해직교사 부당채용사건을 1호 수사사건으로 선정하였다. 공수처의 역할에 대한 시민들의 기대를 무시한 사건선정이었다. 지난 3년간 1기 공수처는 겨우 3건을 기소하였는데 이 중 2건은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다. 5건의 구속영장 신청은 모두 기각되었다. 초라한 성적표를 거둔 것이다. 때문에 언론은 공수처가 빈손인 ‘空手處’로 전락했다는 혹평을 내놓았고 폐지론을 언급하기 시작하였다. 권력형 비리를 성역 없이 수사하고 검찰의 권력 남용·부패를 견제하여 사법정의를 바로 세우는데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했던 공수처가 사실상 개점휴업 상태인 식물기구로 전락한 것이다.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에서 오랜 기간 일을 하며 공수처 도입 운동에 적극 참여했었던 필자의 실망감도 말할 수 없이 크다. 1기 공수처가 실패한 이유는 여러 가지일 것이다. 우선 규모가 너무 작다. 공수처는 검사 25명과 수사관 40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검찰의 1개 지청 규모에 불과하다. 공수처가 대규모 수사인력에 의한 치밀한 수사가 필요한 권력형 범죄들을 수사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너무 적은 인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공수처 검사·수사관의 임기 및 연임이 제한되어 신분이 불안정한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신분이 불안한 처지에서 거대권력인 정치권·검찰의 눈치를 보지 않고 용감하게 맞서 수사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공수처의 기소권이 판사·검사·고위경찰관 비리로 제한된 것도 약점으로 꼽힌다. 그 외 다른 모든 범죄는 공수처가 수사를 마치면 검찰로 송치를 해야 하는데 여기서 기득권 검찰에 의한 견제와 방해를 받기 때문이다. 최근 1월 30일 1심에서 유죄가 선고된 ‘대검 고발 사주 의혹 사건’에서 주모자인 손준성 검사는 공수처에 의해 직접 기소되었지만 공범관계에 있는 김웅 국민의힘 의원(공수처 수사 당시 김웅 의원은 전 검사이자 국회의원 후보 신분이었다)은 검찰로 송치된 뒤 무혐의 불기소처분되었다. 이는 공수처 수사에 대한 검찰의 견제·방해가 노골적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공수처가 무기력증에 빠진 가장 큰 이유는 공수처 구성원들의 의식·자세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초대 공수처장 및 공수처 검사들에게 고위직 범죄를 일소하여 사법정의를 바로 세우겠다는 소명의식과 외부의 압력에 굴하지 않는 독립적 수사기구로서의 위상을 바로 세우겠다는 결기가 부족했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특히 무난한 성품의 인물, 다시 말해 소신과 결기가 부족했던 인물을 초대처장으로 임명한 것이 결정적인 실책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공수처는 문을 닫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아직은 공수처에게 존재가치를 입증할 수 있는 기회를 더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근 법원은 ‘대검 고발 사주 의혹 사건’의 주모자인 손준성 검사에게 "공직자로서의 정치적 중립을 어기고 검찰권을 남용했다"고 질타하면서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하였다. 만약 이 사건을 검찰의 손에 맡겼다면 기소는 커녕 수사조차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나마 공수처가 수사하고 직접 기소한 결과 검찰권한을 야당인사 죽이기에 활용하려 했던 사건의 일부가 세상에 드러날 수 있었다. 이 사건은 공수처가 왜 필요한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다만 당시 윤석열 검찰총장의 오른팔 역할을 하던 손준성 검사의 배후에 대한 수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공수처 수사의 한계도 명확하다). 현재 해병대 채상병 사망사건 수사 외압 의혹에 대해서도 공수처가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 사건에서도 외압의 꼬리를 따라가다 보면 국방부를 거쳐 대통령실까지 이를 수 있기에 검찰에 맡겨서는 실체적 진실이 묻힐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지금 단계에서 벌써 공수처의 존폐 여부를 논의하는 것은 이르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2기 공수처의 앞날도 밝지 않다는 데 있다. 윤석열 검찰정권이 눈엣가시 같은 공수처를 어떻게 다룰지는 불을 보듯 뻔하다. 현재 정부·여당은 친윤인사를 2기 공수처장으로 집요하게 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2기 공수처장으로 유력시되고 있는 김태규 국민권익위원회 부위원장은 과거 판사 시절부터 공수처를 '통제 불가능한 괴물' '형사사법 절차 안의 이질분자'라고 비난했던 인물이다. 공수처가 탄생되어서는 안 될 기관이라고 목소리 높였던 자가 차기 공수처장으로 유력시되는 현실은 가히 코미디급이다. 만약 이 사람이 차기 처장에 임명된다면 향후 3년간 공수처는 완전한 식물기구로 전락하거나 아니면 검찰과 더불어 야당·진보시민세력을 찌르는 제2의 칼이 될 가능성이 크다. 우리는 지난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비전문가·무소신파 현병철 인권위원장에 의해 독립기구였던 국가인권위원회가 독립성을 상실하고 인권보호·구제에서 전혀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식물기구로 전락했던 쓰라린 기억을 갖고 있다. 윤석열 정권하의 국가인권위원회도 보수적인 상임위원 2인으로 인해 이미 그 기능이 상당 부분 마비되어 가는 중이다. 앞으로 2기 공수처도 똑같은 전철을 밟지 않을까 염려되는 것이다. 어째 보수정권하에서는 모든 분야에서 정상이 비정상으로 대체되는 역사 퇴행이 반복되는지 답답함을 금할 수 없다. 향후 공수처를 어찌할 것인가. 윤석열 정부 출범 후 급속하게 정부·여당에 종속되어 ‘정권의 돌격대’로 전락한 검찰·경찰·감사원·국민권익위원회의 길을 공수처도 따라서 갈 것인가. 솔직히 현실적 전망은 비관적이다. 향후 공수처를 무력화하거나 정적 제거의 칼로 사용하려는 정부·여당의 시도는 노골화될 가능성이 크다. 무력감이 들지만 희망의 끈을 놓을 수는 없다. 지금으로서는 4월 총선이 희망이다. 차기 22대 국회에서 사회정의를 중시하는 진보세력이 압도적인 세력을 형성한다면 정부·여당의 퇴행 시도에도 제동이 걸리지 않을까. 또한 국회가 법을 보완하여 공수처의 독립성·법적 권한·인적 자원을 강화한다면 공수처가 설립 취지에 맞게 제 역할을 해낼 수 있지 않을까. 공수처 처장·검사에 대한 국회의 탄핵소추권도 공수처의 일탈을 견제할 수 있는 장치가 될 것이다. 윤석열 검찰정권에서 추락하고 있는 한국이 다시 도약하기 위해서는 공정한 잣대로 권력형 비리를 엄정 수사하고 사정기관의 권한남용·부패를 견제하는 공수처의 위상을 바로 세우는 것이 필수적이다. 희망이 헛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2024-02-07 | hrights | 조회: 111 | 추천: 3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1. 역사는 목적을 향해 나아간다? 역사의 흐름을 어느 궁극적인 상태를 향해 나아간다고 여기는 사상이 있다. 이를 목적론이라고 한다. 목적론으로 철학적으로 체계화한 인물은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기원전 384∼322)다. 한 알의 도토리는 환경을 잘 만나 적응하면 마침내 거대하게 우뚝 솟은 참나무가 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도토리를 참나무의 가능태이고, 참나무는 도토리의 가능태가 현실화한 거라고 말한다. 도토리는 도토리 자체로는 현실태지만, 도토리가 참나무라는 목적을 지니고 실현하고자 한다는 점에서는 참나무의 가능태다. 참나무도 마찬가지다. 참나무를 참나무 자체로 보면 현실태이지만, 참나무가 목수의 손을 거쳐 아름다운 가구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보면, 참나무는 아름다운 가구의 가능태다. 이처럼 만물은 지금 그 자체로는 현실태(energeia)지만, 그것이 미래에 다른 무엇인가를 될 수 있고 되려고 한다는 점에서는 그 다른 무엇인가를 향한 가능태(dynamis)다. 그리고 만물의 각각은 자신의 가능태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모든 변화가 일어나 작동하는 이치다. 따라서 시간이 흐를수록 가능태의 분량은 줄어들고 현실태의 분량은 늘어난다. 현실화의 과정이 마무리되어 더는 현실태로 바뀔 가능태가 없어지고 오로지 온통 현실태만 존재하게 되면 그 완전한 현실태를 완전태(entelekeia)라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역사는 궁극적으로 완전태를 향해 변화해서 나아간다. 그리고 그 궁극적인 완전태는 신 또는 순수이성이다. 기독교는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을 받아들여 역사는 신의 섭리를 완성하는 쪽으로 나아간다고 믿었다. 신의 섭리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고 모든 신실한 기독교인들을 몸의 기관으로 삼아 완전한 하나의 몸 즉 완전한 교회를 만드는 것이다. 그 완전한 몸에서는 평화와 정의가 하나가 되고, 진리와 자유가 하나가 되고, 모든 일이 절대적인 이성에 따라 진행한다. 그리하여 거기에는 한 올의 죄도 없다. 이를 이루는 게 신의 섭리다. 이러한 기독교의 목적론은 헤겔(G. W. F. Hegel, 1770∼1831)을 비롯한 서양의 철학자들에게 크게 영향을 끼쳤다. 2. 역사는 투쟁에 따른 우연의 부침일 뿐이다? 목적론과 대립하는 것을 흔히 기계론이라고 한다. 거시적이건 미시적이건 우주를 구성하는 모든 물질은 원인과 결과 사이의 빈틈없는 법칙에 따른 운동을 반복할 뿐이라고 여기는 것이 기계론이다. 이 기계론은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에 의해 체계화되어 근대과학 혁명을 일으키는 철학적인 기반이 된다. 이에 따르면, 물질적인 우주의 변화 과정 즉 역사에는 아무런 목적이 없다. 그런데, 목적론에 대립하는 또 하나의 오래된 이론이 있다. 만물의 변화는 사랑 즉 화합과 투쟁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한다는 엠페도클레스(Empedocles, 기원전 494∼434)의 우주 순환론이다. 그는 온 우주가 흙, 물, 공기, 불 등 네 원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원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랑의 화합과 적대적인 투쟁에 따라 현재의 살아있는 상태가 결정되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다시 새로운 살아있는 상태가 결정되어 나타난다고 보았다. 만약 사랑의 화합만 있다면 만물은 흩어짐이 없이 뭉쳐지기만 하고 마침내 아무런 변화도 일으킬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만물이 변화하면서 역사를 이루는 건 근본적으로 투쟁이다. 모든 변화와 운동은 투쟁을 통해 일어난다. 헤겔은 모든 운동을 모순에 따른 투쟁으로 보면서도 투쟁은 새로운 단계를 향해 나아가는 원동력이 된다고 보았고, 모순에 따른 투쟁을 통해 도달하는 그 새로운 단계는 계속 상승하여 마침내 절대 이성의 대화합 상태에 이른다고 보았다. 그 투쟁의 과정을 변증법적인 지양, 즉 이전 단계를 포섭하면서 새로운 상태로 올라서면서 발전하는 걸로 보았다. 이러한 헤겔의 목적론적인 투쟁 이론은 엠페도클레스가 투쟁을 통해 만물이 발전하는 게 아니라 순환한다고 본 것과는 크게 다르다. 엠페도클레스의 순환론적인 투쟁 이론에 따르면, 역사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그저 우연한 드러남과 사라짐의 반복일 뿐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대립과 투쟁이 처절하게 일어난다. 3. 정치는 투쟁인가, 아니면 화합인가? 한낮에 많은 사람이 모인 가운데 괴한이 양날의 칼을 꼬나쥐고 날아들 듯이 뛰어들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목을 깊숙이 찔렀다. 이 대표는 단번에 쓰러졌고 피를 흥건히 쏟았다. 여러모로 방송 중이었고 많은 국민이 보고 있었다. 뭔가 불안하더니 기어코 이런 참극이 벌어졌다. 이 살해 시도는 사법적으로는 살인 미수고, 정치적으로는 암살 테러고, 도덕적으로는 반인륜적이다. 한순간의 한 가지 행위에 사법과 정치와 도덕이 중첩되어 작동한다. 거꾸로 말하면, 사법도 정치도 도덕도 모두 대립과 투쟁의 일환임을 드러낸다. 불과 2년 전쯤 일명 태극기 부대는 “문재인을 찢어 죽여라!”라는 구호를 외쳤다. 그들을 위시한 보수 세력은 이른바 조국 사태 때 윤석열을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마침내 그 위세를 믿고서 대선에 출마한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대통령 윤석열은 누구한테서 어떻게 배웠는지 알 수 없는 자유라는 말로 위장한 시대착오적인 반공의 가치 이념을 내세운다. 그리하여 대미 · 대일의 굴종적인 외교로 일관하면서 자본주의 경제를 중심으로 한 미·중 헤게모니 투쟁에 돈키호테적인 선봉장을 자임해 국민 경제를 위기에 빠뜨렸지만 그다지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다. 게다가 민족이 절멸할 수도 있는 명운을 걸고서 남북 간의 전쟁을 마다하지 않겠다고 기염을 토한다. 그는 자신이 임명한 국무위원들에게 야당 국회의원들을 대상으로 “싸워라. 전사가 돼야 한다”라고 말한다.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투쟁인지는 알 수 없으나, 무조건 투쟁이다. 권력 의지를 불태우는 투쟁일 수도 있을 것이고, 아집에 의한 자존심을 위한 투쟁일 수도 있을 것이고, 이를 뒷받침하는 자신의 경제적인 이익을 위한 투쟁일 수도 있을 것이다. 대다수 사람을 위한 투쟁이 아닌 건만은 분명하다. 도대체 정체불명의 인물이다. 암튼 대통령인데도 윤석열은 거대 야당의 대표인 이재명을 마치 불가촉천민으로 여기는 양, 감옥에 있어야 할 자가 어딜 감히, 하는 심사를 내보이면서 대통령 취임 2년이 다 되도록 아예 만나지 않았다. 그러면서 이재명 대표의 범죄 의혹 운운하면서 거의 400번에 달하는 압수수색과 체포 영장 발부를 망설임 없이 집행했다. 마치 이재명이란 자는 이 땅에서 제거해 버려야 마땅하다는 전반적인 분위기를 형성해 확산했다. 이를 떠받치면서 세뇌된 자들이 없을 수 없고, 급기야 환한 대낮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던 거대 야당의 대표 이재명이 암살범의 공격으로 절체절명의 위기를 넘겨야 했다. 너무나도 심중한 사건이 벌어졌는데도 윤석열은 대통령으로서 한 치 빈틈도 없이 배후를 철저히 조사하라는 말을 하지 않고, 사건 직후 대테러센터를 통해 마치 별것 아닌 사건인 양 ‘과도’, ‘1cm 열상’, ‘출혈량 적음’ 등으로 각색하여 가짜뉴스를 퍼뜨렸다. 이에 심지어 어느 유튜버는 몇 번씩이고 사건 현장의 장면을 보여주면서 종이칼이라고 우기면서 비아냥댔다. 그런데 절체절명의 위기를 넘기고 퇴원한 직후 이재명 대표는 “싸우지 말자. 전쟁 같은 정치를 끝내자.”라고 말했다. 약자의 위치에 놓인 화합의 정치인과 권력의 고지를 점령하고서 강자의 입장에 선 투쟁의 정치인이 격돌하는 셈이다. 누가 옳고 그른가의 문제도 중요하거니와 그보다 앞서 이제 결국에 가서 누가 어떻게 싸워 현실적으로 승리의 효과를 가져올 것인가가 중요하다. 진정 누가 강하고 약한지 결론을 내야 하는 싸움이다. 화합의 메시지도 투쟁의 수단이고, 투쟁에 대한 독려는 말할 것조차 없다. 그래서 “싸우지 말자”라는 이재명 대표의 말은 해석학적인 맥락을 고려할 때 적극적으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게 진실이고, 진실의 힘이다. 그 진실은 그가 늘 하던 말대로 싸우지 않고 ‘싸워’ 이기자고 하는 것이다. ‘싸우지 않고 싸우는 자’는 논리적으로는 말도 안 되는 난센스다. 진실은 싸우지 않는 평화와 싸우는 투쟁이라는 양날의 검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로지 투쟁이라는 외날의 긴 칼을 마구 휘두르는 자를 상대를 맞아 어떻게든 싸워 이겨야 한다는 것이 진실이다. 기독교인들의 정신적인 맹주인 예수는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평화가 아니라 검을 주러 왔노라.” 하고서 외쳤다. 예수가 어찌 검만을 주러 왔겠는가.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내주라.”고 하지 않았던가. 피도 눈물도 없이 자기의 권력을 위한 투쟁만이 빛나는 긴 칼을 마구 휘두르는 자에게 이제 싸우지 말자고 제안하는 건 얼핏 약자의 모습으로 비칠 수 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이른바 강자는 한편으로 간담이 서늘할 것이다. 이제 총선이다. 이재명 대표는 화합의 칼날이 어떻게 투쟁의 위력으로 작동하는지를 보여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때로 화합을 뒤집어 투쟁을 위한 투쟁의 칼날을 번뜩이며 휘두를 수 있어야 한다. 역사는 강물이 바다로 흐르듯이 절로 목적을 향해 나아가지 않는다. 처절한 투쟁이 없을 수 없다. 정치야말로 화합과 투쟁이라는 양날의 검을 적재적소에 휘두를 수 있어야 하는 이른바 전인적인 예술인 것이다. 화합 일변도로 윤석열을 낳은 문재인의 길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2024-01-31 | hrights | 조회: 93 | 추천: 3
이재환 / 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지역화폐와 관련하여 깜짝 놀랄만한 데이터가 나왔다. 정보공개 청구 등을 통해 공공데이터를 분석하여 사회 문제 해결을 도모하는 ‘시빅해킹’ 그룹 ‘코드포코리아’는 최근 전국 243개 지자체의 방대한 지역화폐(지역사랑상품권) 정보를 취합하여 분석했다. 2019년 지역화폐 국비 지원이 시행된 후 지난해 2023년까지 5년간의 데이터를 무려 9개월간의 노력을 들여 만든 소중한 자료이다. 지역화폐에 대한 구체적인 데이터가 부족하기 이를 데 없는 상황에서 시민사회가 발 벗고 나서 직접 수집과 분석을 하여 아무 대가도 없이 공개한 것에 대해 무한히 감사를 드리고 싶다. 자세한 내용은 코드포코리아 홈페이지(https://codefor.kr/g/home/action/3/18)에서 살펴볼 수 있다. 사진: 코드포코리아 코드포코리아의 자료에 따르면, 우선 2023년 1월 기준 전국 243개 지자체 중 지역화폐를 발행하는 곳은 모두 191곳이었다. 광역지자체의 자치구들이 광역형 지역화폐를 사용하는 것을 감안하면(예를 들어 부산시는 16곳의 자치구 중 14곳이 부산 지역화폐 동백전을 같이 쓴다) 강원도 양양군을 제외한 모든 지자체에서 지역화폐를 쓸 수 있는 셈이다. 발행 지자체 수는 2019년 128곳에서 2020년 182곳, 2021년 186곳, 2022년 188곳, 2023년 188곳으로 늘어났다. 국비 지원액은 2019년 884억 원, 2020년 6,689억 원, 2021년 1조 2,522억 원, 2022년 7,053억 원, 2023년 3,525억 원이었다. 전국 발행액은 2019년 3조 2,927억 원, 2020년 15조 5,645억 원, 2021년 25조 2,435억 원, 2022년 28조 4,560억 원, 2023년 21조 9,181억 원이었다. 연 누적 이용자는 2019년 281만 5,230명, 2020년 1,492만 2,875명, 2021년 2,680만 3,259명, 2022년 3,857만 6,490명, 2023년 3,901만 8,892명으로 추산했다. 이용자 수는 지류형, 모바일형, 카드형 지역화폐의 중복사용자를 포함한 수치이다. 지역화폐 가맹점 수는 2019년 53만 2,995곳, 2020년 135만 537곳, 2021년 189만 3,835곳, 2022년 241만 5,690곳, 2023년 245만 5,603곳이었다. 지역화폐는 1996년 충북 괴산에서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2010년대 중반까지 약 50여개 지자체가 자체 조례에 근거하여 도입하고 운영했으나 두각을 나타내진 못했다. 이를 성남, 포항, 군산, 시흥시 등에서 정책적인 집중을 하게 되며 부흥기를 맞게 되었고, 2019년 골목상권 활성화를 목적으로 정부가 처음 국비 지원을 시작했다. 이후 코로나19로 급속하게 침체한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재난지원금 지역화폐 지급 및 인센티브 10%의 국비 지원이 강화되었다. 이렇게 중앙정부의 주도로 거의 모든 지자체가 지역화폐를 도입하고 운영하였으나 코로나19가 지나가며 정부 지원은 급속히 줄어들게 된다. 2021년 1조 2,522억 원의 정부 지원은 지난해 3,525억 원에서 2024년에는 3,000억 원으로 줄었다. 그 결과 2023년 대비 올해 2024년 지역화폐 발행액을 확대하겠다는 지자체는 11곳, 유지 48곳, 축소 96곳, 미정 33곳으로 전반적인 지역화폐 발행 축소 추이를 나타내고 있다. 그렇다면 2024년 지역화폐는 어떤 모습을 보이게 될까? 전체 발행액은 줄지만 급격한 쇠퇴는 없을 것으로 예상한다.(다만 광역급 지자체는 많은 부침이 있을 것 같다) 우리나라의 지역화폐는 2019년부터 2021년까지 중앙정부의 집중적인 역량투입으로 급격한 우상향 성장 곡선을 나타냈다. 이제 인위적인 성장의 거품은 꺼질 때도 됐다. 그 사이 시민과 소상공인 모두에게 지역화폐의 효용성과 만족도가 자리를 잡고 있으니 적절한 수준의 역량투입이 이뤄진 지자체의 경우 롱테일 발전 곡선을 보일 것이다. 지역화폐 도입의 순기능은 코드포코리아의 이번 공개 자료 중 하나인 설문 응답에서도 볼 수 있다. 지역화폐 사용으로 “지역을 더 잘 알게 되고 지역을 들여다보는 계기가 됐다”, “온라인 쇼핑으로 쟁여놓고 쓰던 것을 가까운 곳에서 필요한 만큼 살 수 있어 과소비, 과포장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 등의 의견이 그것이다. 물론 지역화폐가 순기능만 있는 것은 아니다. 도입 목적에 부합하지 못한다면 예산 낭비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시민들의 효용감과 별도로 구체적인 경제적 효과 분석이 아직도 더 필요하다. 지역화폐의 발전과 지속가능성의 핵심은 마중물 역할을 하는 적절한 인센티브와 보다 낮은 곳에 있는 상권에 지역화폐가 흐를 수 있는 가맹점 관리, 지역사랑상품권 법률의 제1조 목적에도 나와 있는 ‘지역공동체 강화’를 위한 새로운 상상력과 연계 정책의 도입일 것이다.
2024-01-24 | hrights | 조회: 131 | 추천: 2
박상경 / 인권연대 회원 1. 늦가을 저녁, 우리는 외할머니 치마폭을 둘러쌌다. 우리라 하면 고만고만한 외손주와 친손주 너더댓 명이었다. 작은 외숙모 손을 꼭 잡고 처음 찾아간 외가였다. 아마도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의 기억이다. 엄마가 없는 외가는 낯설지만 할머니가 있어 친근하기도 하였다. 이른 저녁상을 물리치고 나면 우리는 할머니 곁으로 모였다, 손에서 책을 놓지 않은 할머니는 우리한테는 이야기꾼이었다. 할머니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우리는 끝없는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숨죽여 흥부 놀부 이야기를 들었고, 눈물을 훔치며 심청이 이야기를 들었다. 옛날이야기가 없는 날에는 할머니 손에 윷이 들려 있었다. 말판을 만들고 낮에 주워 온 돌멩이로 말을 세웠다. 누군가 떼를 쓰기라도 하면 할머니는 엄하게 꾸짖으셨다. 떼를 써서 이기는 건 이기는 게 아니라고. 윷놀이가 끝나면 할머니는 이기고 진 거와 상관없이 광에서 가져온 인절미를 하나씩 나눠 주셨다. 깊어가는 가을밤에 우리 눈에 졸음이 들면 할머니는 “오늘은 이만 자자꾸나” 하셨다. 2. 잠은 한 살 터울 사촌동생과 할아버지 방에서 잤다. 저녁에 불을 땐 방은 따뜻했다. 할아버지 머리맡에는 자리끼가 놓여 있었고 우리는 장난치는 중에도 그 물을 쏟을까 싶어 조심하였다. 밖은 깜깜했고 간혹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에 문풍지가 파르르 떨기도 했다. 추운 밤이었다. 엄마한테는 엄하고 무서운 아버지라는데, 우리한테는 그냥 손주들 이뻐하는 할아버지였다. 네 자리 내 자리 하며 자리 싸움하다 잠이 든 우리를 할아버지는 이불 속으로 한 명씩 들어다 누였다. 이른 새벽에 기침한 할아버지는 “청산리 벽계수야~” 하는 시조를 큰소리로 읊으셨다. 할아버지의 기침 소리에 외삼촌이 “밤새 불편한 거 없으셨어요?” 하고 묻는 소리가 들렸다. “응, 괜찮다.”고 할아버지가 대답을 하셨다. 외삼촌이 아궁이에 불을 지피자 새벽녘의 식은 방이 다시 따뜻해지면서 소여물 쑤는 구수한 냄새가 방안으로 흘러들어 왔다. 3. “어머니, 이 국, 간 좀 봐주셔요!” “응, 괜찮구나!” 대가족의 아침상을 내려고 바쁜 큰외숙모가 할머니한테 여쭤보니 할머니의 대답이다. 할아버지와 큰외삼촌이 위쪽에서 상을 받으셨다. 할머니와 부산한 아이들의 상이 한쪽에 마련되고 작은외삼촌과 두 분 외숙모도 마침내 밥상 앞에 앉으면서 아침밥을 먹기 시작하였다. 언니들은 학교에 가고 사촌동생들과 들로 뛰어다니다 들어오니 할아버지가 뒤란으로 오란다. 뒤란에는 오래된 감나무가 있었는데 홍시가 눈이 부시게 매달려 있었다. 할아버지가 바지랑대로 감나무의 가지를 꺾어 홍시를 따면 바구니를 들고 있던 우리는 냉큼 담아내곤 했다. 아차 하는 순간 홍시가 그냥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면 우리는 땅바닥에 떨어진 홍시를 손가락으로 걷어 올려 핥아먹었다. 정말 맛났다.       4. 오십여 년이 넘는 아주 오래된 추억이다. 할머니는 할머니의 언어로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런데 우리는 할머니의 언어를 알아듣고 할머니와 교감하였다. 엄격하고 무서운 아버지인 할아버지는 손주들한테는 한없이 자상하셨다. 우리는 할아버지는 못하는 게 없다고 믿었다.  커서 알게 된 사실은 나이가 들면 미각이 퇴화해 짠맛부터 잃어간다는 것이다. 음식 솜씨 좋은 외숙모는 밥할 때가 되면 늘 할머니한테 간을 봐 달라고 하였다. 그러면 할머니는 간이 잘 맞는구나 하면서 웃으셨다. 아침이면 외삼촌은 할아버지한테 밤새 불편하지 않으셨냐고 여쭈었다. 그러면 할아버지는 다 좋다고 하셨다. 5. 할머니에 대한 추억이 태극기 부대 어르신들을 생각나게 했다. 지인을 만나려고 광화문을 지나갈 때 누군가를 때려잡아야 한다고 입에 담지 못할 말을  그악스럽게 쏟아내는 소리를 들으면서, 자신들만의 격렬한 언어로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다른 누군가를 배척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보면서 혹시 외로워서 그러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들이 자신과 같은 모습의 사람들뿐이어서 그런 언어에 익숙해져서 그러는 건 아닐까. 그걸 어른 노릇도 못 하는 사람들이라고 손가락질한 건 아닐까. 누군가한테는 자기의 진짜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그나마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은 거기뿐이어서 그러는 것은 아닐까. 지인을 만나고 돌아오는 지하철, 경노석에 홀로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할아버지 배낭 양쪽 주머니에는 태극기 두 개가 꽂혀 있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외로워보였다.
2024-01-16 | hrights | 조회: 126 | 추천: 5
이윤 / 경찰관 정치권에 법조인이 많아서 그런지 정치 관련 뉴스에 ‘실체적 진실’이 자주 언급된다. 실체적이라는 말이 꾸며주니 그냥 진실이라고 하는 것보다 꽤 멋져 보인다. 멋지면 유행을 타게 된다. 그래서 요즘 여기저기에 실체적 진실이 많이 등장한다. 그냥 진실이라고 해도 될 것을 꼭 실체적 진실이라고 앞머리를 붙인다. 그 의미에 맞게 적절히 쓰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실체적 진실의 의미 ‘실체적 진실’의 의미를 간단하고 쉽게 알려주는 곳을 못 찾았다. 나름대로 해석이 필요하다. 나는 수업 시간에 형사소송 이념 중 하나가 ‘실체적 진실주의’라고 하는 데서 처음 들었다. 문제는 ‘실체적(實體的)’이 무슨 뜻인지, 그냥 ‘진실’과의 차이가 무엇인지 감이 잘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요한 순간에 내가 깜빡 졸았을 수도 있다. 일상에 잘 쓰이지 않는 실체적이란 말이 들어간 걸로 보아 아마도 일본 법률 교과서를 그대로 베낀 일본식 단어가 아닌가 싶다. 법률용어사전에 의하면 실체적 진실주의란 「(형사소송에서) 법원이 당사자의 주장, 사실의 부인 또는 제출한 증거에 구속되지 않고 사안의 진상을 규명하여 객관적 진실을 규명하려는 소송법상 원리」라고 한다. 이에 의하면 실체적 진실이란 형사소송에서 범죄 사건의 정확한 진상 또는 객관적 진실을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절대적 진실, 명확한 진실 또는 그냥 진실과는 어떻게 다른 것인지 의문이며, 형사소송 외의 영역에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과거에 발생한 사실을 똑같이 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목격자나 피해자, 심지어 범인의 기억도 변형되고 편집된다. 요즘 가장 정확한 것은 CCTV 영상이다. 그러나 CCTV 영상이 목적이나 동기 같은 마음속까지 알려주지는 못한다. 모든 수사기관이나 법관은 최대한 실체적 진실에 수렴하기 위해 노력하나 결국 도달하지 못한다. 증거에 기초하여 사실에 최대한 가깝게 구성된 진실에 만족할 수밖에 없다. 2. 꿰맞추기 수사 실체적 진실에 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니 아무리 수사를 잘 하더라도 그 결과 드러난 진실은 완벽할 수 없다. 하지만 완벽에 가까운 진실을 밝히기 위해 오래전부터 수사와 추리 방법이 개발되었다. 가추법(가설적 추리법: Abduction)은 연역법, 귀납법보다 수사에 더 적합한 추리방법이다. 가추법이란 과거에 발생한 사실에 의한 흔적(증거, 자료)을 근거로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①가설을 여러 개 만들고 → ②각 가설을 검증하거나 기각하기 위한 증거를 수집하고 → ③가설들을 채택하거나 기각하고 → ④새로운 증거에 의한 새로운 가설을 수립하고 → ⑤검증이나 기각을 위한 증거를 수집(이하 반복)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 많은 가설이 만들어졌다가 사라지고 또 만들어졌다가 사라지는 와중에 가장 마지막에 살아남는 가설이 실체적 진실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채택되는 것이다. 머리도 많이 써야 하고, 시간과 노력도 많이 들어가는 방법이다. 수사를 제대로 하면 상당히 피곤하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꿰맞추기 수사도 많이 이루어진다. 흔히 와꾸(わく: 틀)수사라고도 하는데, 수사관이 초기 수집된 증거에 의해 어림짐작으로 만들어 놓은 하나의 틀(시나리오) 안에 여러 증거와 진술을 맞추어 끼워 넣는 방식이다. 틀에 맞지 않는 증거는 애써 외면하거나 버린다. 때로는 조작하기도 한다.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이 와꾸수사의 희생자가 되었다. 확증편향 때문에 한 번 만들어진 와꾸는 절대 바뀌지 않는다. 내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 과거 행적이 모두 그 와꾸 안에서 나의 범죄행위를 입증하는 증거가 된다. 내가 무고함을 입증할 방법은 마지막으로 하나밖에 남지 않는다. 많은 비극이 여기에서 나온다. 가추법이나 꿰맞추기 수사나 둘 다 가설을 설정하는 것은 같다. 하지만 가추법은 다수의 많은 가설을 설정한 후 그 전부에 대해 검증하고 기각하는 지난한 과정을 거치는 반면에 꿰맞추기 수사는 오로지 하나의 가설을 설정한 후 그 가설이 옳음을 입증하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는 차이가 있다. 꿰맞추기 수사를 하는 한 실체적 진실발견이라는 형사소송 이념은 안드로메다 성운만큼 멀어지게 된다. 바쁘고 힘들어도 용의자가 범인이 아닐 가능성을 포함한 최대한 많은 가설을 수립하고, 많은 증거를 수집하여 검증해야 한다. 그렇게 수사하면 좀 늦어질 수도 있다. 그러니 수사가 좀 지연된다고 너무 재촉하고 비난하지 않으면 좋겠다. 그리고 제발 실체적 진실이라는 말을 아무 데나 쓰지 않으면 좋겠다. 어색하다.
2024-01-10 | hrights | 조회: 219 | 추천: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