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우리시대

‘우리시대’는 언론계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이 멘토가 되어, 작성한 칼럼에 대한 글쓰기 지도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지혜, 김태민, 이대옥, 이서하, 전예원, 조혜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박록삼(서울신문),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오승훈(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이오성(시사인)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이창우/ 회원 칼럼니스트  영화 <플레전트빌>(1998)의 주인공 데이비드는 영화에서 TV 시트콤 <플레전트빌>의 애청자다.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한 이 인기프로그램은 ‘즐거운 마을’이라는 이름처럼 행복하고 단순한 삶을 사는 사람들의 얘길 담은 드라마다. 데이비드를 비롯해 많은 시청자들로 하여금 이제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예를 들면 이른 저녁, 아버지가 일을 마치고 “여보, 나 왔어!” 라고 말하면, 앞치마를 두룬 어머니가 부엌에서 나와 반갑게 맞는 식이다. 정성이 가득한 음식들로 채워진 저녁 식탁에 가족들이 둘러 앉아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을 오순도순 이야기하는 풍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이 시트콤을 시청하는 데이비드의 현실은 드라마와 너무 딴 판이다. 부모님은 이혼한 이후에도 전화로 서로 싸우고, 하나뿐인 쌍둥이 여동생은 학교에서 인기가 많다. 집에 와도 차가운 냉동식품을 데워 홀로 끼니를 떼우는 일상이다. 데이비드가 ‘플레전트빌’ 시트콤에 빠지게 되는 이유는 어찌보면 현실에 없는 드라마 속 세계에 대리만족하기 때문이다. 금요일 저녁, 제니퍼와 데이비드는 리모컨을 서로 가지려다 박살이 난다. 갑자기 나타난 신비한 수리공 할아버지로부터 리모컨을 받아든 두 사람이 그것을 작동시키면서 TV속 흑백세상 <플레전트빌>로 빨려 들어가는 엄청난 경험을 하게 된다.  시트콤 플레전트빌은 현실을 지배하는 모든 법칙들이 교묘하게 비껴가는 곳이다. ‘기쁨이 있는 동네’이기에 불도 날 수 없고, 비도 내리지 않고, 농구부 선수들이 넣은 슛은 무조건 들어간다. 소방관들은 출동하여 나무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고양이를 구조하는 것이 가장 큰 업무이다. 한마디로 실패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다. 웃음과 교훈을 주는 시트콤은 언제나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그곳의 사람들은 실제의 인간이 아닌, 허구로 꾸며진 반쪽짜리 존재들이니까. 이 이상적인 세상에서 잘 적응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방송에 대해 무엇이든 알고 있는 출연 배우들이야말로, 시트콤 플레젠트빌에 걸맞는 등장인물이다.  플레전트빌에서 아이스크림집의 존슨은 데이비드가 오지 않으면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무의미하게 카운터 위나 닦으면서 데이비드가 올 때까지 멍하니 기다려야 한다. 그는 시트콤에 자주 등장하는 ‘카페 주인’의 역할, 조연이다. 언제나 카운터를 닦으면서 주인공에게 필요한 조언을 해주는, 선량한 캐릭터이다. 식당 문을 열고 카운터를 닦고 메인 주인공이 등장할 때마다 가끔 비치는 조연에게 현실에서 등장인물이 된 데이비드가 말한다.  “존슨, 스스로 그 무엇도 할 수 있어요. 다음부턴 제가 오지 않아도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세요. 모든 것은 정해진 것이 아니니까요. 마음대로 바꾸어도 되는 거죠.”  그 후, 작은 자유를 맛본 존슨은 더 큰 자유에 대한 욕망이 생겨나고 이렇게 플레전트빌은 변화를 맞게 된다.  누군가의 한걸음으로 세상은 조금씩 나은 쪽으로 변화해왔고 그 가능성을 플레전트빌은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색깔’은 ‘인간다움’과 일맥상통한다. 아기처럼 아무것도 모르던 주민들이 자신의 욕망과 정체성을 깨닫게 되면서 색깔을 찾는다. 여전히 마을의 배경은 흑백이지만 생생한 색깔을 찾게 된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간다. 그러나 아직 자신의 색깔을 찾지 못한 마을 사람들의 대부분이 그들을 유색인종으로 취급하며 단호하게 뭉친다. 흑백의 플레전트빌에 색을 찾아 대비되는 영화는 민주주의 작동 원리인 다수결의 오류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다수가 선택했다고 그것이 옳은 것은 아니라고. 변화를 요구하는 시민들 사이에서 소수의 선택은 쉽게 배제당한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이 사회가 마치 영화 같은 일들이 재현된다는 사실. 어쩌면 우리도 영화나 드라마 속 세계로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플레전트빌은 그동안 지켜온 언제나 즐거운 마을을 지키기 위해 주로 시장을 중심으로 한 중년 이상의 남성들이 나선다. 제니퍼의 극 중 아버지도 포함된다. 마치 우리의 아버지들처럼 시대의 변화에 호들갑을 떨며 놀라고 어이없어하는 모습이 연출된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아내들이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변화를 거부한다. 아버지의 권위와 어머니의 무조건 희생이 미덕처럼 치장된 가부장제를 계속 유지하고 싶어 한다. 출처 - daumcdn  저녁에 집에 들어 왔을 때 당연히 맛있는 식사가 차려져 있어야 하는데, 자기 색깔을 찾은 부인들이 그것을 거부한다. 도서관에는 책들이 글자를 채워 컬러로 빛을 내고 연인들의 호수에는 컬러의 세상이, 그들만의 자유로움이 자연스럽게 채색된다. 중년을 넘긴 그들은 플레전트빌의 기득권자이자 권력자, 그리고 지배자였다. 그들은 변화가 두렵다. 이미 지금도 충분히 힘과 관련된 편리함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젊은이들의 연애를 방종이라 하고 개인의 감정 표현을 막으려고 한다. 바깥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키우는 책들을 강제로 빼앗아 불태워 버리고, 자유롭게 음악을 듣지 못하게 금지곡을 만든다.  플레전트빌 시장은 흑색으로 존재하는 사람들을 선동하며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이곳 주민들이 지켜야 할 법규들을 새로 만든다. 빠르게 변화하는 사람들을 억누르는 기득권층의 횡포와 권력남용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이 영화에서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이들의 야만과 자신의 색을 찾은 이들을 향해 ‘유색인종’이라 손가락질하며 비웃는 장면들도 역시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부끄러운 일들이 현재 이 사회에서 뻔뻔함의 극단으로 달리며 자행되고 있다. 그 모습을 20세기 후반 영화를 통해 되새김질 하다 보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서글픔과 모욕감이 고개를 내민다.  하지만 영화에서도 자신의 색깔을 찾은 마을 사람들이 모여든다. 아직 흑백인 마을 사람들에 의해 파괴된 존슨의 가게에 모여 투표로 결정된 새로운 강령을 읽고 저항을 시작한다. 아직 파괴되지 않은 뮤직 박스에서 그들이 원하는 이미 금지된 자유로운 음악을 틀고, 데이비드와 존슨은 밤을 새워 저들만의 색깔로 빛을 내는 벽화를 그린다. 나는 잘못된 일들을 파렴치하게 휘두르는 권력에 저항을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것보다는 내 한 걸음 내딛어 행동하고 나서 만날 내일이 덜 두렵다. 결정적인 해결책은 없지만 늘 새로운 시도는 가능하다. 세상은 조금 더 나은 쪽으로 향하고 있다고 믿는다.  개인의 성향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는 것. 문제는 사회가 자기에게 부과한 역할에서 자기의 존재 의의를 찾지 못할 때 생긴다. 때로는 강요 때문에 격렬한 충돌이 생긴다. 드라마에서 위안을 받는 일이 더 자연스러운 세상 같지만, 그렇다 해도 미리부터 포기할 일은 아니다. 알고리즘이 나를 현실과 동떨어지게 만든다 해도 거부할 수 있는 내가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시트콤에서 벌어지는 삶은 보이는 게 전부이다. 그 이외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배우들이 연기를 하는, 그럴듯한 세트 안의 인생은 조명이 꺼지면 더는 그곳에 없다. 드라마나 영화는 영상으로 고정해 놓은 이미지로 있을 뿐이다. 보여주기 위해 만든 삶이기에 그것으로 끝이다.  우리는 현실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걸까. 지금도 무언가에 도피하기 위해 텔레비전이나 넷플릭스 드라마에 빠져 세상을 잊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은 아닐까. 이 영화 속의 시트콤에서는 사람들이 자각과 경이를 느끼면서 그동안 내릴 수 없었던 비가 내린다. 그 비를 보고 두려움에 떨며 색을 찾지 못한 그들의 표정은 한 개인이 옳지 않은 일에 저항하려 할 때 만나는 마음과도 비슷하다. 무엇이든 하지 않는다면 안 되는데 정작 실행하면 나만 다칠 것만 같은 두려움이 먼저 앞선다. 이 사회도 제 색깔을 찾으려는 개인들이 많아지면 저 나름 행복감을 만날 수 있다. 행복한 풍경보다는 내가 행복할 수 있어야 이 세계는 다양한 색으로 제 빛을 낼 수 있다.
2022-05-18 | hrights | 조회: 60 | 추천: 2
이서하/ 회원 칼럼니스트  ‘문과라도 안 죄송한 이세계로 감’이라는 웹 소설이 온라인 플랫폼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주인공 김정진은 사학과를 졸업하고 마땅한 일자리를 찾지 못해 영세한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다, 불의의 사고로 물에 빠져 소설 속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이 세계의 마법은 아름다운 문장으로 주문을 외워야만 그 힘이 더욱 강하게 발현된다. 주인공은 편집자로 일하던 경험을 살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거센 바람이 5월의 여린 꽃봉오리를 뒤흔드니1)”, 슈테판 게오르게의 “불꽃의 궤도를 선회해본 이 그 누구든, 불꽃의 위성으로 머무를지니2)” 등 거장들의 멋들어진 문장을 사용하며 제일의 마법사로 발돋움한다. 현실에서는 아무 쓸모도 없었던 역사적 지식 역시 세계의 흐름을 파악하고 난관을 타파해 나가는 일에 큰 도움을 준다.  모든 작가는 어떻게 해야 한 명이라도 더 자신의 글을 읽어 줄지를 고민한다. 그리고 이 고민을 해소하기 위하여 독자와 공감대를 형성하고 욕망을 반영하기 위해 노력한다. ‘문과라도 안 죄송한 이세계로 감’이라는 소설이 나오게 된 배경 역시 명확하다. 우리 사회가 문과라서 죄송한 사회가 된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기술 발전의 세상이다. 아날로그는 뒤로 밀려났다. 키오스크를 통하여 대면 없이도 음식을 주문할 수 있게 되었다. QR코드를 통하여 백신 접종 여부를 인증하고 방문 기록을 남기기도 한다. 스마트폰 안에는 범인이라면 미처 다 사용하지 못할 첨단 기능이 가득하다. 이런 사회에서 당장 필요한 인재는 이공계 출신이다. 더 나은 기술, 더 나은 기계, 더 나은 전자제품을 발명할 수 있는 인재의 보유가 곧 국력이고 세계의 발전이라 인식된다. 고도로 산업화한 시대에 기술은 곧 생활이므로 이에 발맞춰 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앞으로 달려 나가기에 바빠 무언가를 잊어버리고 있던 것은 아닐까. 발전한 세상, 부강한 세상이 곧 옳은 세상과 동의어는 아닐 것이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Caspar David Friedrich, Wanderer above the Sea of Fog (1818)  인문학은 한자로 사람 인(人), 글월 문(文), 배울 학(學)이다. 즉 사람을 읽는 문자이며, 사람을 탐구하는 학문이며, 사람의 근간이 되는 초석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전혀 거창하지 않다. 사람뿐 아니라 사람 간의 관계와 인간 본질의 정수를 탐구하고 이해하여 어떻게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하는 모든 것이 바로 인문학이다. 그렇기에 어쩌면, 우리 모두 인문학적 소양을 조금씩은 가지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기술이 사회를 지탱하는 하나의 축이라면, 인문학은 꿋꿋이 기술의 반대편에서 또 하나의 축이 되어 우리 사회를 균형 있게 발전시키는 데 이바지해왔다. 단지 지나치게 기술 중심적이 된 현대 사회가 인문학으로 “먹고 사는” 일을 어렵게 만들었을 뿐이다.  사람을 읽고 이해하는 일을 그만두는 것은 타인과의 소통 및 공감 능력의 부재를 불러오기 쉽다. 요즘 사회의 과도한 경쟁, 난무하는 혐오와 분쟁 역시 이것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언제나 살아가기에 바쁜 세상이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최소한 인간의 기본적 소양을 외면하는 일만큼은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즉 사람답게 살아야 할 것이다. 이 ‘사람답게’라는 말에 인문학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하지만 사람다운 사람이라는 말을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경쟁 위주로 흘러가는 교육, 그리고 그것을 부추기는 사회 구조부터 차차 바뀌어야 할 것이다. 타인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소통 능력을 키워야 할 것이며, 무엇보다 나 자신을 깊이 알아야 할 것이다. 아직 인문학이 가야 할 길은 너무나도 멀다. 하지만 갈 길이 멀었다는 말은 곧 끝이 멀었다는 말이 아닐까.  ‘문과라도 안 죄송한 이세계로 감’속에도 여러 문제가 존재한다. 왕정을 철폐하고 공화정을 세우려 하는 혁명 세력, 권력을 지켜내려는 왕세자, 형을 밀어내고 성군이 되고자 하는 셋째 왕자의 대립 속에서 시대는 격동한다. 주인공은 역사의 풍랑 속에서 끊임없이 어떻게 해야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을 것인지, 어떻게 살아가야 옳을지에 대하여 고뇌한다. 강한 능력을 갖췄음에도 삶에 대한 고민과 성찰은 피할 수 없던 것이다. 우리 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어느 시대라도, 어떤 기술 속에서도 인간다움에 대한 고민이 사라진 적은 없다. 인문학이 매번 존폐 위기에 시달리면서도 명맥을 이어 온 이유일 것이다.  인문학을 살리기 위하여 갑자기 철학책을 펼 필요는 없다. 자신의 삶에 이미 존재하는 자그마한 인문학적 소양, 즉 인간성에 잠시의 시선을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인간성에 대한 관심과 고민 속에서 사람이 사람으로 존재하는 한 인문학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죄송한” 학문 역시도 아니다. 1) Sonnets 18 2) The Star of The Covenant
2022-05-10 | hrights | 조회: 162 | 추천: 6
김태민/ 회원 칼럼니스트  포퓰리즘적 엘리트주의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조어(造語)가 "좌파 신자유주의"와 다를 바 없는 우스운 말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식은 땀을 흘리며 이 농담 같은 말을 건네야 한다는 강한 압박감에 시달린다. 요즘 들어 우익 포퓰리즘과 엘리트주의가 결합하는 광경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우익 포퓰리즘과 엘리트주의의 결합이 그저 일시적인 착시에 불과하다면 포퓰리즘적 엘리트주의를 백치들이 지껄이는 의미 없는 소음으로 취급해도 상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포퓰리즘과 엘리트주의의 말도 안 되는 동거는 분명한 정치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한때는 정권교체기에 맞추어 획기적인 정치적 언어들이 발명되어 포퓰리즘 광풍을 만들어내던 때도 있었다. 그 이름이 경제민주화던 소득주도성장이던 포퓰리즘은 엘리트층을 배제하고 민중을 호명해내는 매력적인 전술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포퓰리즘도 그 유효기간이 지나 부끄러움도 없이 엘리트주의와 함께 배치된다. 실로 엘리트주의와 포퓰리즘을 더 이상 10년 주기의 정권교체 시기마다 교차하는 진자 운동으로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엘리트 기술관료주의가 실패하고 민주주의가 마비될 때에서야 포퓰리즘이 분출하게 된다는 오랜 상식은 무효화되었다. 오히려 둘은 동시에 그리고 상호보완적으로 움직인다. 예컨대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 캠프가 적극 활용한 정치적 지형 역시 그런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당시 윤 후보는 문 정부로 대변되는 엘리트 기술관료 신자유주의에 대한 거부감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에 편승해 포퓰리스트 전략을 구사했다. 그리고 그 포퓰리즘 전략은 법치주의와 신자유주의 경제를 내세운 엘리트주의와 접합되었다. 윤 당선인의 인수위에서 예고한 정책들과 인선 역시 동일한 배치를 보여준다. 여가부 폐지 어젠다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기술관료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제지한다는 측면에서 포퓰리즘적 요구를 만족시킨다. 한편 형식적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법률가 출신 인사를 대거 등용하고 경제적 엘리트층의 요구를 충실히 반영한 정책들을 제시하는 모습은 엘리트주의적 통치의 성격을 강화한다. 사진출처 - phelis  이 같은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대선 후보 한 명을 선택하면 포퓰리즘과 엘리트주의 모두 소비할 수 있는 정치 소비의 시대가 도래한 게 아닌지 싶다. 홍콩 민주화 운동도 여행 패키지 상품이 되는 자본주의에서는 모든 걸 팔아 넘길 수 있으니 말이다. “우리 커피를 마시면 캄보디아 소녀들을 살릴 수 있어요”, “우리 회사는 판매 수익의 1%를 기부합니다” 등등 상품은 더 이상 사물의 유용성만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분위기와 윤리적 가치, 경험도 함께 판매한다. 덕분에 소비자들은 불평등한 세상에 대한 윤리적 부담을 상품에게 넘길 수 있게 되었다. 비록 내가 하루도 빠짐 없이 전세계적 자본주의 시장에 참여한 탓에 국제 노동 분업이 한층 더 불평등해지더라도 윤리적 자책감에 빠질 필요가 없다. 상품이 나를 대신해 윤리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동일한 논리를 포퓰리즘적 엘리트주의에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지난 대선기간부터 판매된 포퓰리즘적 엘리트주의는 시민 소비자들이 정권교체를 위해 5~10년을 기다리지 않고도 즉각 모든 정치적 격동을 미리 경험하도록 해준다. 윤석열 당선인 덕분에 누군가는 엘리트 법피아들이 실현하는 “법치주의”와 “공정성”을 한껏 누릴 수 있게 되었다. 형식 민주주의라는 상품은 소비자 본인이 엘리트가 되지 못할지라도 정치인과 전문가들이 대신 권위주의적 감각을 만끽하게 해준다. 물론 엘리트주의를 즐겁게 소비할 사정이 못 되는 소비자를 위해서는 반페미, 반장애인, 반 진보시민단체 혐오 정치도 판매하고 있다. 덕분에 누군가는 “우리”의 유토피아를 방해하는 “저들”의 “비문명적인” 갈등조장 행위를 윤리적 부담 없이 마음껏 비난할 자격을 소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시장의 과열된 분위기가 지나가고 나서는 후유증의 시간이 오기 마련이다. 상품은 경제화된 삶 이외의 공간, 즉 착취적인 사회관계를 절단하면서 등장하게 된 숭고한 사물임을 고려해본다면 분명 후유증은 점차 누적되고 있을 법도 하다. 동일하게 ‘포퓰리즘적 엘리트주의’ 역시 사회적 위계로부터 비롯된 적대와 모순을 애써 억압하기 위한 정치적 언어임을 고려해본다면 이 역시 어떤 후유증을 남기고 있지 않을까? 핵심은 포퓰리즘와 엘리트주의의 결합은 정치의 실패를 가리키는 지점이지 정치의 완결된 전체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지금 우리의 정치가 모든 것의 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그게 바로 포퓰리즘 대 엘리트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정치의 언어를 찾아나서는 작업이 필연적인 다음 과제일 수 있는 이유다.
2022-05-04 | hrights | 조회: 320 | 추천: 11
김지혜/ 회원 칼럼니스트  나는 과거에 휠체어와 목발로 생활한 경험이 있다. 덤벙거리는 성격 탓에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종종 삐던 왼쪽 발목이 19살 무렵 부러졌기 때문이다. 그리 긴 기간은 아니었으나 석 달의 기간 동안 19년 인생에서 몰랐던 불편함을 처음으로 느끼게 되었다. 그 당시 나는 화장실을 가기 위해 멀리 떨어진 휠체어를 두 팔로 뻗어 내게로 당겨 앉아 그것을 화장실까지 밀어줄 사람을 필요로 했으며, 그것은 화장실에 들어가서 다시 침실로 돌아오는 순간까지 사람의 손길을 요구했다. 처음 겪어 보던 그 과정은 나에게 있어 매우 혼란스러운 경험이었다. 그렇기에 장애인들이 일상생활을 함에 있어 얼마나 많은 불편함을 겪을지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다. 장애인들은 대중교통에서만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이부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순간부터 다시 들어가는 순간까지 크고 작은 불편함을 겪는다. 그렇기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시위를 이기적인 집단의 모습으로만 받아들이는 시선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들의 절규는 평범한 삶에 대한 외침이다. 남들과 다르지 않은 삶을 바라는 간절함이다.  전장연은 지난해 말부터 출근길 지하철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인파가 가장 집중되는 곳에서의 투쟁은 사회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시민들의 의견은 갈린다. ‘권리도 좋지만, 시민들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해서야 되겠냐’‘어차피 일반 시민으로서 도울 방법이 없다’라며 외면하는 이들. 반면에 ‘장애인도 기본권인 이동권을 당연히 누려야 한다.’‘얼마나 절박했으면…’이라는 반응을 보이는 이들도 있다.  대다수 시민들은 지하철 시위에 불편함을 토로한다. 본래 ‘지옥철’이라 불릴 만큼 인구가 밀집된 공간에 휠체어를 탄 장애인들의 시위는 어쩔 수 없이 열차 지연 등 불편함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번 생각해보자. 그동안 장애인들이 싸워서 생겨난 편의시설이 전체 시민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지하철 승강장의 엘리베이터의 주 이용자는 노약자와 일반 승객들이다. 경사로 역시 리어카와 캐리어를 끄는 승객들이 이용한다, 저상버스의 도입은 승하차 시 사고율을 감소시켰고 시각장애인을 위한 노란점자블록은 신호등을 기다릴 때 서야 할 위치를 알려주는 등 비장애인의 안전망 역할을 수행한다. 즉 장애인의 편의를 위한 시설이 우리 모두의 편의를 위한 구실을 한다는 것이다. 사진 출처 - 에이블뉴스  장애인 이동권에 대한 요구는 최근 몇 년 사이 일이 아니다. 어느덧 20년째 이어지는 문제다. 그럼에도 전국 모든 지하철 역사에 대한 엘리베이터 설치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점차 늘어나고는 있어도 저상버스 도입률도 전국 평균 27.8%에 그친다. 장애인 콜택시의 운행 대수는 초기보다 오히려 줄어들고 있는 추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상버스, 장애인 콜택시가 그들의 불편함을 모두 해소할 수 있을까. 사실 대다수의 시민들은 장애인의 이동권과 그것을 위한 시설의 도입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다만 그들로 인해 본인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발생하는 것이 불편할 뿐이다. 현재 장애인 이동권에 대한 관심이 들끓고 있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장애인들로 인해 자신의 삶이 방해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비장애인이 다수라는 것이다. 장애인의 이동은 단순히 불완전한 시설의 확보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 깊숙이 뿌리 내린 ‘빨리빨리 문화’에 기인한 사회의 시선을 변화시키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길 찾기 어플에 제시된 시간 안에 도착해야만 하는 사회의 시간에 장애인의 시간은 고려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최근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의 발언으로 장애인 이동권 투쟁이 마침내 수면 위로 올랐다. “최대 다수의 불편을 야기하기 위해 지하철을 멈춰 세우는 방식의 시위는 서울 시민을 볼모 잡는 행위”이며“비문명적인 시위”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지금 불편한 것을 그들은 평생 겪었다는 것” “이런 생각을 하게 해주는 게 시위”라는 말에 좀 더 힘을 싣고 싶다.  그 누구도 장애를 갖고 싶어 갖게 된 것이 아니다. 더불어 스스로를 배려의 대상으로만 낙인 받고 싶어 하지도 않을 것이다.  장애인의 이동권은 모든 권리 중 기본이다. 이동을 하지 못하면 교육을 받는 것도, 일하는 것도, 문화를 누리는 것도 불가능해진다. 장애인의 이동권은 장애인이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숨 쉴 권리이다. 장애인의 사회참여가 온전히 보장되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2022-04-27 | hrights | 조회: 203 | 추천: 10
황은성/ 회원 칼럼니스트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또렷이 생각난다. 피 끓는 애송이들이 한 방에 삼삼오오 모여 음란물을 감상하던 순간이었다. 방 안에 모인 모두가 침을 꿀덕, 꿀덕 삼키면서 여성의 나체를 탐닉했다. 이름도, 나이도, 삶도. 아무것도 모르는 여성의 나체였다.  그리고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기사 하나를 읽었다. ‘n번방 사건’이라는 이름의 기사였다. 사건을 정독해보았다. 개요에 따르면 2018년 9월경 어느 경찰서로 ‘경찰 사칭 성폭행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신고 하나가 접수됐다고 한다. 이상한 일이다.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담당 수사관은 사건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다. 사건은 그대로 묻힌다. 후에 시간이 흐르고 그 사건은 n번방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탈바꿈한다. 소나기가 쏟아진다.  ‘반문명적 범죄’, ‘한국의 총체적이고 종합적인 인성교육 대실패’, ‘추정 가해자 30만’, ‘엄중한 법의 처벌’, ‘관련된 사람들에 대한 심판’ 등의 이름을 가진 수백 개의 기사들이 쏟아진다. 유명인사나 저명한 이들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정치하는 누구는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되는 행동해야 하는 때’라는 말을 힘있게 외치고 사람들은 그를 지지한다. 정부의 청원도 올라온다. n번방 가해자들의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는 그 청원은 수많은 독려를 받고, 눈을 감고 일어나면 몇천 개의 서명 혹은 몇만 개의 서명이 늘어나 있다.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입을 모은다.  가해자들을 욕한다. “그들은 욕먹을만한 짓을 했다. 사회적으로 매장당할만한 몰염치하고도 천인공노할 짓이었다. 윤리성에 크게 어긋나는 행동이었다.” 그 비난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말한다. “자신은 호기심에 그랬고, 시청만 했을 뿐이고,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지 않았는데 왜 처벌을 받아야 하느냐”고. 그들은 괴물이 맞다. 그렇다. 그들은 괴물이 맞다.  보안이 철저한 가상화폐를 이용해 경찰의 추적망을 피했고, 미성년자와 여성들의 성을 착취했고, 협박했고, 인생을 망쳐 놓았고, 돈을 벌었다. 겉으로는 사회의 일원이라며 한 행동들이다. 2018년도 당시에는 학생으로, 오늘의 평범한 38살의 회사원으로, 사회의 공익을 위한 공익근무요원으로 활동하며 뒤에서는 살인까지 교사하는 악행을 저질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n번방 사건이 터지기 전에는 한 클럽에서 성폭행이 이루어졌다. 그때도 지금처럼 똑같이 목소리를 내고 외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여성의 인권과 존엄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입에 오르내리고, 남자들은 잠재적인 가해자가 되고, 반증하듯 역시나 새로운 성범죄의 가해자가 되었는데 바뀐 것은 없었다. 반성을 논하는 칼럼들이 쏟아져 내렸는데, 안이한 처벌과 뒷배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들이 많았는데, 청원 역시 이루어졌는데 바뀐 것은 하나도 없었다. 성을 착취하는 괴물들과 그것을 소비하는 괴물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여기서 하나의 질문을 건네고 싶다. 도대체 우리는 왜 바뀌지 않았을까?  답은 간단했다. 멀리 찾을 것도 없었다. 남자들은 불쾌해하고 있었다. 정상적인 자신들이 어째서 소수의 괴물 때문에 잠재적 가해자가 되느냐고 말하고 있었다. 거기엔 진정한 반성도 없고 진정한 고민도 없었다.  그러니까, 그래서이다. 거기엔 진정한 반성도 없고 진정한 고민도 없었기에 사회와 우리는 바뀌지 못했다. 남자들은 여성들이 주장하는 “2020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 깔린 저변의 강간 문화”라는 말에 매우 민감하게 눈살을 찌푸리곤 한다. “강간 문화까지는 아니다.” “비약이다”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 남성들은 알게 모르게 여자들을 수없이 강간해왔다. 모니터 속에서 그랬으며 현실에서 그랬다. 그러자 누군가 말한다. “나는 한 번도 여성의 성을 학대하지 않았으며 음란물을 시청하지 않았다. 그런 내가 왜 잠재적인 가해자로 몰려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거기에 대한 대답 또한 매우 간단하다. 침묵은 때로 부정이 될 수 있지만, 긍정도 될 수 있다. 나는 한 가지를 고해하고자 한다.  나는 n번방 사건을 처음 접하고 피 끓는 애송이들이 한 방에 삼삼오오 모여 음란물을 감상하고 난 이후의 일을 생각했다. 감상을 끝내고 난 다음 ‘우리’는 아무 말도 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비밀로 하자는 말도 감상평도 없었다. 이름도, 나이도, 사는 곳도, 삶도 모르는 여성의 나체를 탐닉한 채 그저 조용히 집으로 돌아갔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우리가 그날 본 것을 우리는 우리의 가슴에 묻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렇게 나는 침묵을 택하고 괴물이 되었다.  그렇게 괴물이 된 나는 이제 말하고자 한다. 진정한 반성과 고민이 있어야만 변화가 생겨난다. 관망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잠재적인 성폭력 가해자가 되어 분노하는 것도 이제는 지겨워해야 할 때다. 이 사건 앞에서 결코 결백이란 있을 수 없다. 알아야 한다. 우리는 인간이지 괴물이 아니다. 우리는 인간이지 괴물이 아니다. 사진 출처 - N번방 성착취 강력처벌 촉구시위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까지 수많은 죽음을 목도했을 여성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죽음과 착취로 이어지는 폭력적인 소비를 근절해야 한다. 이유는 필요 없다.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는 말을 구태여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물론 누군가는 나는 결백하다고 할 수 있다. 또 누군가는 그저 음란물을 시청했을 뿐인데 왜 이런 처우를 받아야 하냐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제 괴물로 살고 싶지 않다. 이미 현실에서 한 줌의 재가 된 후에도 모니터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여성의 나체를 탐닉하고, 또 누군가를 죽이고 소비해가며 추악하게 살아가고 싶지 않다. 이것은 나의 고해이자 결심이고 나는 이제 마지막으로 당신들에게 묻고 싶다. 나는 괴물로 사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당신은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가? 괴물로 살고 싶은가? 아니면 인간으로 살고 싶은가? 황은성: 황은성입니다.
2020-05-13 | hrights | 조회: 694 | 추천: 7
김치열/ 회원 칼럼니스트 아파트나 주택에서는 반려동물을 많이 키운다. 물론 1960년대나 1970년대에도 가정집에서 동물들을 키우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주로 개와 소, 닭 등의 가축이었다. 개는 집을 지키기 위하여, 소는 농사를 쉽게 하려고, 닭은 계란을 얻거나 큰 잔칫날 잡기 위해서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동물은 가족과 같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에는 가족 간 끈끈함도 있었다. 왜 동물을 가족처럼 생각할까? 가족의 해체와 각자의 공간에서 개별화된 삶의 모습 때문이 아닐까? 과거 사람들의 관계는 끈끈하고 웃음이 넘쳤다. 동물은 방 밖에 줄을 묶어 키웠다. 그들의 복지를 신경 써준답시고 고작 작은 집 하나 지어줬다. 출처 - 크라우드 픽 사람들은 사람에게 실망해 반대심리로 다양한 종의 반려동물들을 키우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동물이 꼬리를 흔들며 우리를 맞이할 때 사랑하고 있음을 안다. 하지만 그들이 병이 들게 되면 버리려 한다. 인간은 그들을 가족처럼 여기지만 정작 동물의 입장은 생각하지 않은 채 일방적 사랑으로 동물권을 침해하고 있지는 않은가? 개는 원래 늑대과로 구분되는 동물로서 야생성을 갖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들에게 옷을 입히고 치장해주고 인위적으로 가공된 음식을 제공한다. 그들을 방 안에 가두어 키우며 마음껏 뛰어놀지 못하게 하는 건 그들의 본성을 억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간에 대한 존엄성은 수세기에 걸쳐 논의되었다. 하지만 동물 권은 동물 복지라는 용어로 최근에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잘 생각하여 보면 그들에게 옷을 입히고, 목욕을 시키고, 사람의 공간에서 함께 생활하게 하는 것은 인간의 만족을 추구하는 목적으로 자행된다고 본다. 우리가 한 번도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동물에 대한 프로그램을 보게 되면 그들도 감정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래서 그들을 훈련시키는 장면도 보게 된다. 그들을 훈련시키는 사람들은 올바로 이해하기 때문에 처음 만나는 동물도 익숙하게 다루는 것을 본다. 하지만 우리가 동물을 올바로 이해하고 있을까? 반려 견, 반려 묘 등 다양하지만 인간의 만족을 위하여 키우는 측면이 많음을 부인할 수 없다. 동물권이라는 법률상 규정은 없지만 생태계를 움직이게 하는 하나의 요소다. 동물 권은 동물이 동물다움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요소라 생각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을 뛰어놀게 하여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주택구조가 아파트이고 예전처럼 마당이 없기 때문에 그들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김치열 회원은 현재 교도관으로 재직중입니다.
2020-04-23 | hrights | 조회: 593 | 추천: 2
이희수/ 회원 칼럼니스트  지난 1월 30일, 성전환 수술 뒤 법원에서 성별정정 허가를 받은 A씨가 숙명여자대학교 법학부 2020년 신입생으로 합격하였다. 그 후 학내외에서는 지지와 반대 양측의 의견이 들끓었고, 2월 7일, A씨는 “입학 반대 움직임에 무서운 느낌이 들었다”며 입학을 포기하였다.  이 과정에서 6개 여자대학의 21개에 달하는 소위 페미니스트 단체가 ‘여자들만의 공간과 기회는 여자의 것이어야 한다.’, ’여대는 남성중심사회에서 차별받고 기회를 박탈당하는 여성들을 위해 존재하는 곳이다’라며 A씨의 입학을 반대하였고, 법원의 성별변경신청 기각 및 관련법 제정을 촉구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처음 인터넷 기사를 보았을 때, 스크롤을 올려 다시 읽었다. ‘페미니즘 단체’에서 ‘반대’하다니? 혹시 기사가 잘못되었는지 몇 번이나 더 읽고 다른 정보도 찾아보았지만, 잘못 쓴 것도 잘못 읽은 것도 아니었다.  페미니즘(여성주의)을 정의하는 다양한 말을 찾아보았다. 여기서 그 많은 정의들을 포괄할 수 있는 문장을 만들기는 어렵겠지만, 성별로 인한 차별과 억압을 없애려는 생각과 움직임이라고 하면 넓게 보아 대다수 정의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태까지의 남성 중심 사회에서는 차별과 불평등을 겪는 쪽이 여성인 경우가 대다수였으므로, 페미니즘은 여성의 인권과 이익을 주장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왔다. 그런데 여기서 ‘여성’은 특정 조건에 부합하는 집단을 가리키는 절대적인 말이 아니라, 상대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말처럼, 또 내가 알고 있던 것처럼 페미니즘의 핵심 가치가 비주류의 입장에서 사회를 바꿔나가는 것이라면 말이다. 다만 세상 사람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했을 때 상대적으로 여성이 불리한 입장에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 부당함에 공감했기 때문에, 흔히 성별로 인한 불이익과 억압을 문제 삼는 경우 여성의 권익 보장을 촉구하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성 중에서도 유색 인종 여성, 장애가 있는 여성, 빈민 여성, 여자 어린이 등 보다 열악한 상황에 처해 더 많은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남성’과 비교했을 때는 ‘여성’이 약자이지만, 한국에서 한국인 여성과 비교하면 일부 외국인 여성은 더 많은 차별을 겪는다. 이 관계는 생물학적 성과 자신의 성 정체성이 일치하는 사람들과, 트렌스젠더 혹은 어떤 성별이라고 규정해야 할지에 대한 사회적 합의조차 없는 사람들과의 관계에도 빗댈 수 있다.  숙명여자대학교 학생·소수자 인권위원회의 입장문도 이 같은 근거로, “여자대학의 창립 이념은 … 교육의 장에서 철저히 배제되어 왔던 소수자들에게 교육권을 제공하고자 한 것”이라며 A씨의 입학을 지지하였다. ‘여성’의 의미를 위와 같이 상대적인 것으로 본다면, 페미니즘이라는 이름으로 모인 단체에서 트랜스젠더 여성의 여대 입학을 이토록 격렬하게 반대한다는 사실은 의아하다. 남성 위주의 불평등한 기존 질서와 구조는 그대로 두고, 심지어 현재의 불평등을 잘 알 뿐 아니라 이에 대해 누구보다 강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성별만을 여성으로 바꾸는 것이 페미니즘이라면, 이것이 이익집단의 운동과 무엇이 다를까. 사진 출처 - 한겨레  더구나 일각에서는 A씨의 입학을 막기 위한 인터넷 단체 대화방을 만들면서, A씨를 배제하기 위해 목소리, 얼굴 및 손 전체 사진 등으로 여성임을 인정받은 사람만 입장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주로 여성을 억압하는 성별 고정관념을 타파하는 것이 페미니즘의 중요한 이슈라고 알고 있던 나는, 그들이 ‘여성이라면 응당 지녀야 할 외모’에 대한 고정관념을 갖고 있는 것일까 싶어 더욱 혼란스러웠다.  소수자로서 겪은 부당한 일을 고쳐야겠다는 생각을, 자신이 속한 집단에 적용하는 데만 그치면 악습은 끊어지지 않는다. 물론 익숙한 것을 수용하고 낯선 것은 배척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집단의 동질성을 해치는 사람에게는 일단 날을 세우고, 더 다르고 더 낯설수록 무슨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까하고 먼저 생각하게 되는 건 나 역시 예외가 아니다. 입학을 반대하는 이들이, 성전환 수술 후 다시 성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경우 등의 사례를 언급하며 염려한다는 이야기에는 섣불리 답을 달기 어렵다. 어떤 면에서는 걱정스럽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이 함께 사는 세상에서는 당연히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다수의 안정을 해칠 수 있다는 잠재적인 우려 때문에, 아직 충분히 자신의 목소리조차 내기 어려운 사람들의 권리를 무시해도 되는 것은 아닐 거다.  함께 지내기 위해, 지금까지의 안정에 위협을 느끼는 사람들과, 새로 합류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배려가 필요한지, 고쳐야 할 제도는 무엇인지 학교와 학생들이 먼저 묻고 시행하면 어떨까. 성적 차별과 불평등의 문제에 가장 민감하고, 이를 개선하려는 움직임에 열려 있는 여성들이 더욱 앞장서서 그를 지지하고 있다는 소식도 더 많이 들렸으면 좋겠다.  A씨는 2020학년도 숙명여자대학교 신입생이 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과정을 지켜보며 아직 성 소수자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권리가 있다는 사실과, 앞으로 이 상황을 어떻게 바꿔가야 할지에 대해 생각하였다. 머지않은 미래에 그가 젠더 디스포리아를 겪는 사람들, 나아가 삶의 여러 영역에서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에게, 어렵지만 마땅한 권리를 찾기 시작한 선례로 남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희수 : 저는 산책과 하얀색과 배우는 것을 좋아합니다.
2020-03-04 | hrights | 조회: 846 | 추천: 14
이현종/ 회원 칼럼니스트 요즘 들어 부모님께 이 말을 정말 지겹도록 듣고 있다. 실직 이후 사회를 알고 싶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시위 현장에 돌아다니는 아들이 걱정되니 매일 잔소리로 하시는 말씀이다. 일은 안 하고 시위나 하면서 돌아다니는 꼴을 보고 있자니 속이 타는 부모님 입장에서는 당연히 나올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그래도 해야만 할 것 같아서 시위 현장을 계속 돌아다닌다. 그러나 마음 한편으로는 죄송할 따름이다. ‘데모하면 교도소 가고 경찰한테 얻어맞을 수도 있을 텐데 너 정말 어쩌려고 그러냐?’고 하시기에 ‘옛날이랑 다르다’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차라리 그럴 거면 집에서 놀라’고 하신다. 대학 때도 이런 집회를 돌아다닌 적이 없는데 늦게 시작한 게 더 무섭다고 어른들 말씀 하나도 틀린 게 없음을 다시 한 번 느낀다. 확실히 어른들 말씀 들어보면 전에 비해 요즘의 시위·집회는 안전하고 할 만하다. 얻어맞을 걱정도 없고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 평화적이니 경찰도 그저 지켜보다 시간이 되면 알아서 물러나고 끝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집회나 시위를 항의가 아닌 일종의 축제고 놀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생겼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경찰로 대표되는 공권력에 대한 두려움 없이 시위에 참가해 왔다. 하지만 엉뚱한 곳에 문제가 있었다. 출처 - 한겨레 요즘엔 토요일에 고 문중원 열사 추모 문화제에 많이 참가하고 있는데 어딜 가나 태극기 집회 참가자들이 방해했다. 집회 준비 도중에 난입해 술 취해 행패를 부리며 욕설하고 폭력을 행사해 급기야 경찰까지 배치됐다. 청와대로 행진하던 중 앞을 가로막기도 했다. 더 가면 물리적 충돌이 날 수도 있다는 판단 하에 중지하고 거기서 농성을 벌인 적도 있었다. 그리고 툭하면 우리에게 ‘빨갱이’라고 했다, ‘민주당이 정권을 잡으니 종북이 날뛴다’고 했다. 앞장서던 필자를 밀치던 기억도 난다. 이게 부모님이 말한 큰일인가 싶기도 했다. 어떠한 정치적 발언도 없었음에도 그런 일이 생기는 걸 보면 아직도 ‘나서면 큰일 나는구나’라는 생각도 했다. 그런 일을 당하면서도 ‘왜 (사람들은) 나서서 손해를 볼까’ 생각했다. 이거 한다고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돈 나갈 일만 생기는 일인데도 말이다. 내 나름대로는 ‘사람이 자살할 죽을 정도로 억울하니까, 해결해야 한다’는 목표가 있으니 결국 손해 볼 걸 알면서도 다들 나서는 것이라 결론지었다. 고 문중원 열사의 장례가 아직도 치러지지 않고 계속 운구차에 실린 채로 유족들이 힘겹게 싸워가고 있다. 하루라도 빨리 해결되었으면 하고 정말 간절히 소망하고 기원한다. 이현종 회원은 금형 분야에서 활동중입니다.
2020-02-06 | hrights | 조회: 557 | 추천: 6
김치열/ 회원 칼럼니스트  우리 인간은 조물주에게 이성과 감정을 선물받았다. 고전을 읽다보면 이를 통찰한 뛰어난 식견에 놀라게 된다. 우리 선조들은 인간의 감정을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으로 보았고 인의예지(仁義禮智)로 통제할 수 있다고 본 반면, 서양의 프로이드는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인 이드(id)에서 바람직한 슈퍼에고(super ego)로 나아가기 위하여 이성(ego)을 통해 통제할 수 있다고 보았다. 출처 - ac 밀란 공식 홈페이지  합리적 생각보다 감정이 앞서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이는 긍정적 감정보다 주로 부정적 감정이다. 사소하게는 토론 프로그램을 보면 상대의 말을 듣기 보다는 자신의 얘기를 하고 크게는 전쟁으로 비화되기도 한다. 유럽과 중동 간 벌어졌던 십자군 전쟁과 종교로 인한 종교전쟁, 제2차 세계대전 등이 그 예다. 시간은 많이 흘렀지만 과거의 부정적 감정은 그대로 남아, 유럽과 이슬람이 지금까지 반목하기도 한다.  긍정적 감정도 지나치면 문제가 된다. 가령 사람들이 특정 연예인을 좋아하는 것은 나쁜 감정이 아니다. 하지만 좋아하는 감정을 지나치게 표현하는 소위 ‘사생팬’들은 연예인을 괴롭게 한다. 사람들이 연예인을 싫어하는 감정도 마찬가지여서, 악성 댓글과 무차별적인 근거 없는 주장으로 당사자를 힘들게 만들고 심지어 목숨까지 끊게 만드는 비극을 연출한다.  우리는 완전한 존재가 아니다. 하는 행위도 완벽하지 않다. 우리는 감정을 표현하는 것에 어색하다. 유럽의 지식인들은 분쟁을 해결할 방법으로 비폭력대화를 제안한다. 요점은 ‘대화’다. 우리는 바쁘게 살고, 책을 적게 읽고 스스로를 생각할 시간이 없다. 이는 결국 상대방도 존중하지 못하는 결과를 내기에, 어려서부터 존중을 배워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미디어만 접하는 사회에서 비폭력 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김치열 회원은 현재 교도관으로 재직중입니다.
2020-01-30 | hrights | 조회: 627 | 추천: 2
황은성/ 회원 칼럼니스트 1994년 5월. 내가 태어나기 두 달 전 엄마는 만삭의 몸으로 아빠에게 뺨을 맞았다. 엄마는 말했다. “그날 왼쪽 고막이 터졌는데 피가 고였다. 기절하고 깨어나니 굳은 피가 뺨에서 후드득 떨어졌다.” 그래서인지 26년이 지난 지금도 엄마는 왼쪽에서 나는 소리를 잘 듣지 못한다. 그 뒤로부터 매일같이. 새벽 4시까지 나와 형, 엄마는 잠들지 못했다. 억센 손끝에서 벌어진, 무참한 폭력이었다. 칼등으로 맞고 발목을 붙잡혀 옥상에 젖은 빨래처럼 널어졌다. 아빠의 송곳니에 손톱이 깨지기도 했다. 백과사전을 5권씩 올린 의자를 들고 한 시간 동안 벌을 받은 날도 있었다. 아빠가 죽었으면 했다. 온통 피멍이 든 몸으로, 어두운 방 안에서 아이는 자신의 형을 끌어안고 그런 생각을 했다. 또 그 뒤로부터, 중학교 교복을 개켜 넣어두기 전까지. 가정폭력에 시달려 내성적인 성격으로 자란, 가난하고 왜소한 아이는 학교에서도 환대받지 못했다. 쉬는 시간이면 화장실로 끌려가 이유 없이 맞았고 이유 없이 대걸레를 빤 구정물 세례를 받았다. 이 또한 이유는 없었다. 누구도 아이를 사랑하지 않았다. 그 사이. 철이 일찍 든 탓에 모든 괴로움을 안으로 꾹꾹 삼키던 아이는 “가서 용돈 좀 받고, 가족들 좀 만나고 오라”는 엄마의 말을 듣고 다시 영동고속도로를 너머 여주로 향했다. 아이의 친가 가족들이 말했다. “늬 에미가 너희 아빠 망쳐 놓은 거야.”, “벼락 맞아 죽을 년.” 아이는 아무 잘못이 없는데 죄인이 된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울었다. 그렇게 살아오다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아이는 독하게 변했다. 세상의 모진 멸시에 지쳐 스스로 서기로 했다. 그러나 비행을 일삼았다. 옥상에 올라가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누군가에게 똑같이 상처를 주었다. 그러다 교복을 개켜놓고 나니. 아이는 세상이 보기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구제불능 소리를 늘 듣고 살았으므로 그저 구제불능이었다. 목표도, 목적도 없었다. 아이는 자신의 실패를 깨달았다. 사는 것이 괴로워 매일 목구멍 너머로 알코올을 흘려보냈다. 그렇게 마신 술이 일 년이면 오백 병이 훌쩍 넘었다. 형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넌 우리 가족이랑 연 끊고 살래? 여주 안 오냐?” 아이는 더 잃는 것이 무서워 여주로 향했고 사람들은 태연했다. “왜 그러고 사냐.” “사지 멀쩡한데 좀 생활력 있게 독하게 살아라, 좋은데 좀 취업하려고 하고.” 하여 지금 그 아이는. 황은성이라는 이름으로 정신병원을 다닌다. 얼마 전이다. 우울은 삶의 전반을 차지했고 떠나지 못했다. 자신이 상처가 있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상처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치료를 받는다. 그런데 아이는 억울했다. 아이는 누군가를 상처주기 싫어 병원에 다니는데. 그의 아버지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살아간다는 게. 하여 아이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침에 9개의 알약과 저녁에 12개의 알약을 입 안에 털어넣는다는 사실을 고했다. 아버지는 심한 욕설을 내뱉었다. “너희 엄마 탓이야.” 그리곤 ‘꺼지라’며 전화를 끊었다. 아버지는 그 무참한 상처들에 속죄를 하라는 아이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는 글을 써 말하고 싶었다. “인간 내면의 상처는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고. 시간이 얼마나 흐르든 말이다. 아이의 형 말마따나 “털어내지 못하는 나약한 인간”이 되든, “과거에 발목 잡혀 현재를 피폐하게 사는 인간”이 되든, 그런 것을 원하든 원치 않든 관계없이. 내면 깊숙이 각인된 폭력은 지워지지 않는다고. 그 사실을 아는 아이는, 그러므로 자신과 같이 슬픔 속에 사는 인간들이 더 생기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는다. 자신은 이미 너무 늦어버렸고 엉켜버려서 도저히 풀 수 없다 해도 말이다. 아이는 그저 말하고 싶었다. 인간은 평생을 살아가며 누구나 저마다의 이유로 누군가를 아프게 하지만 그것은 이유가 될 수 없다고. 자신이 저지른 죄를 반드시 겸허히 받아들이고 누군가에게 그랬다면 반드시 속죄하고 고두(叩頭)하며 살아가아 한다고.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비는 일에는 이유도 순서도 필요하지 않다고.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당신이 모르는 사이 누군가를 파괴하고 죽이며 살아가게 될 거라고. 잘못했을 때는 반드시 용서를 빌라고. 더 곪아 터지기 전에, 더 썩어 슬프고 우울한 늪을 만들기 전에 진심으로 사죄하고 용서를 구하라고. 그것은 어떤 이유도, 변명도, 사정도, 배경도 필요하지 않은, 너무도 당연히 그저 그래야만 하는 일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었다. 사진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황은성: 저는 황은성입니다.
2019-12-23 | hrights | 조회: 674 | 추천: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