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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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는 언론계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이 멘토가 되어, 작성한 칼럼에 대한 글쓰기 지도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지혜, 김태민, 이대옥, 이서하, 전예원, 조혜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박록삼(서울신문),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오승훈(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이오성(시사인)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이서하/ 회원칼럼니스트  해가 지날수록 여름이 점차 더워지고 있다. 매년 여름을 앞두고 등장하는 “올해 여름은 평년보다 덥다”는 기사도 그렇지만 우리가 직접 느끼기에도 다를 바가 없는 듯싶다. 선풍기로는 모자라 에어컨을 트는 일도 일부에게는 일상이 되었고, 여름철 냉방수요가 높은 탓에 전력 위기로 정전마저 종종 발생한다.  전력은 화석연료를 태워 생산한다. 이때 배출되는 이산화탄소(CO2)는 기온 상승을 야기한다. 이산화탄소는 여러 온실가스 중에서도 가장 배출량이 많은 종류로 현재 인류가 직면한 가장 큰 위기인 기후위기의 주범 중 하나다.  기후위기는 갑작스럽게 생겨난 개념도,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진 개념도 아니다. 인간이 개발을 시작하고 환경을 파괴한 이래 우리의 삶에 늘 함께했던 개념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이미 1992년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유엔 환경개발회의는 이를 의식하여 유엔기후변화협약을 채택한 바 있다.  빙하가 녹고 있다거나 오존층이 파괴되고 있다는 환경 보호 문구도 이제는 옛말이 되었다. 오늘날의 지구는 빙하와 오존층을 딛고 내려와 더욱 가까운 곳에서 우리에게 경고장을 보낸다.  올해 여름만 해도 영국을 위시한 유럽 대륙은 이상고온에 시달리고 있다. 각국 농경지에는 가뭄이 들었지만, 파키스탄 북부처럼 빙하가 있는 지역은 폭염으로 빙하가 녹아 홍수위기에 처했다. 대한민국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기록적인 폭염과 길어지는 장마, 빈번해지는 산불이 그 증거다. 이상기후에 따른 재난과 피해는 기후위기가 현재진행형의 문제임을 증명한다. 출처 -  https://showyourstripes.info/s/globe 1850년부터 현재까지의 평균기온 대비 기온을 색으로 표현한 이미지.  안토니오 구테흐스 UN 사무총장은 기후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이 ‘지속 불가능한 생산 및 소비’에 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 환경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사회 전체가 참여하는 긴급조치’가 필요하다는 사실 역시 언급했다. 요컨대 기후 위기에 대한 대응은 국가 전체, 나아가 세계 전체의 협력이 필요한 일이라는 것이다. 올해 지방선거 때 기후정의서울지선공동행동, 기후위기대전시민행동 등의 각지 환경단체가 나서 후보들에게 기후정책을 제안하고 시행 여부를 질문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대한민국은 2020년 탄소중립을 선언하고 탄소중립위원회를 설치해 2050년까지 실질 탄소 배출량을 없애겠다는 의지를 선보였다. 이로써 세계에서 14번째로 탄소중립을 법제화한 나라가 된 것이다. 이러한 정책은 분명 경제 및 사회 전체의 구조 전환을 요하는 어려운 과제지만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세상을 위하여 피할 수 없는 길이기도 하다.  기후위기 대처 방안은 명확한 듯하면서도 복잡하다. 사회구조와 맞물려 돌아갈 수 있을 만큼 합리적인 방안임과 동시에 별도의 대체재를 찾지 못한 취약 계층과도 함께할 수 있는 포용성을 띠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에어컨을 틀지 못해 온열질환으로 사고를 당하는 이들, 출퇴근 대중교통 비용을 위하여 식비를 줄이는 이들을 생각하자면 개개인의 노력으로 온실가스를 줄이자는 말도 그리 완벽한 대책은 아닌 셈이다.  한국은 제조업, 전자제품, 철강, 자동차 등의 산업을 경제 주력 업종으로 두고 있다. 이들은 에너지 특히 연료 연소가 많은 작업으로 국내 온실가스 순 배출의 90% 이상을 차지한다. 결국 한국의 탄소중립은 탄소배출 감축효과가 개인에 비해 10배 이상 큰 산업 부문에서의 에너지 전환 및 그에 기반한 산업구조의 전환이 핵심이라는 것이다.  애플 사는 2020년 7월에 2030년까지 완전히 탄소 중립을 유지할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미국 최대 은행인 JP 모건 체이스 역시 2021년 4월 기후 변화를 해결하고 지속 가능한 개발에 기여하는 솔루션을 지원하기 위해 향후 10년 동안 2조 5000억 달러의 자금을 조달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외에도 각국의 여러 기업들이 기후 변화에 맞설 대책을 내어놓고 있다.  국내 기업들 역시도 이러한 변화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외국 기업들의 탄소 배출 규제를 따라가기 급급할 뿐 진정한 변화를 망설이는 이유는 지금껏 고수해 오던 방식을 바꾸는 데 많은 비용과 리스크가 발생하기 때문, 즉 이윤 때문이다.  이윤의 중요성을 모르는 바 아니나 기업에게는 사회적 책임 역시 존재한다. 주주와 이해관계자 외에도 사회 전체의 이익 향상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을 살고자 내일을 버릴 수 없듯 우리는 탄소중립을 단순히 비용에 국한하여 보기보다는 기후위기에 맞설 기회로 보는 것이 옳다.  이러한 변화를 촉구하기 위해서는 시민 개개인의 각성 역시 필요하다. 기후위기가 현실의 문제임을 인지하고, 주요 공기업과 재벌 기업들의 변화 및 정부 정책 등을 주시하며 꾸준히 목소리를 내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역할일 것이다.  미래의 세대가 짊어져야 할 부담은 오늘 우리의 결정과 실천에 달려 있다. 지속 가능한 사회를 위하여 기후위기에 관심을 가지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는 것. 바로 그것이 지구와 인류의 미래를 바꾼다고 굳게 믿는다.
2022-08-03 | hrights | 조회: 50 | 추천: 0
김태민/ 회원 칼럼니스트  지난 7일 국가재정회의에서 긴축재정 기조를 예고한 정부는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은 13일에 경제형벌규정 TF 출범 공개회의를 열었다. 경제형벌 규정을 없애거나 행정제재로 전환하겠다는 선언식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친기업적인 정책을 공표한 정부는 18일에 대우조선하청노동자 파업 강경 대응에 나선다. 윤 대통령은 대우조선하청노동자 파업을 “불법적이고 폭력적인 노조활동”으로 규정하고 총동원령을 내리듯 관계 부처 장관들에게 강경한 대응을 주문했다. 노동 단속을 통해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국가와 자본의 승리를 선포하려는 듯이 말이다.  지금까지 새 정부의 경제 정책 방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법인세·보유세·상속세·증여세 완화, 공공기관 긴축재정, 공공기관 민영화, 경제형벌의 비범죄화, 실질임금 삭감을 위한 파업 강경 대응 등등. 목록은 더 이어질 것이다. 이 모든 작업은 새 대통령의 존재감이 국정운영에 온전히 체현되기 이전부터 동시다발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출처 - Madote, Neoliberalism and African Development  분명 이와 같은 움직임은 이전 행보와는 다른 속도감을 보여준다. 내각 인선 실패에서 사적 채용 논란까지 현 정부는 국정운영의 절차상의 문제에서 걸음마를 떼지 못하고 깊은 수렁으로 빠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경제법, 노동법 개악, 노동운동 분쇄에 있어선 이토록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한 번 더 놀라며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정부조직이 민생 대책에 무능해도 자본계급을 위해서는 없던 능력까지 끌어 모을 수 있구나. 지지율에 연연치 않고 국민만 보겠다는 대통령의 말에서 그 ‘국민’은 서민,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들을 포함하지 않는구나.  이런 깨달음은 다음과 같은 의심으로 이어진다. 혹시 정권의 배후에 공화국 시민의 요구는 적극 배제하고 자신들의 배를 불리도록 사주하는 외부 권력이 있지 않을까? 그들이 국가의 숙제를 ‘대신’하느라 민생대책이 좌초되고 있지는 않은가? 이 물음을 좇아가다 보면 재벌기업가와 윤석열 당시 대통령 후보가 “멸콩”이라는 텅 빈 구호로 한 몸이 되었던 지난 대선 때를 떠올리게 된다.  7일과 13일 양일간 확정된 긴축재정과 경제형벌의 비범죄화는 단순히 경기부양에 관한 사실만을 알려주는 게 아니었다. 여전히 시장의 자연적 회복 능력과 자기 완결성을 호소하는 새 정부의 경제정책에는 노동 탄압이라는 정치적 비밀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는 이미 대우조선하청 파업 사태에서 이를 목격했다. 민간 주도 성장이라는 시대착오적인 방향성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공권력으로 하청노동자의 쟁의를 분쇄해야 하며 손해배상소송으로 노조에 재갈을 물려야 한다는 사실 말이다. 제 아무리 시장의 자율성을 운운하며 경제정책에 과학적인 외피를 휘두르고자 한들 새 정부의 경제정책은 정치적인 스캔들이다.  경제는 정치라는 이 한 마디에는 굴곡진 노동체제의 역사가 묻어있다. 오래도록 예속되고 탄압받아온 노동의 역사는 서민을 질식시키는 ‘그 경제’가 경제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형태가 아니라고 증언한다. 비정규직, 하청, 불안정, 특수고용, 그림자, 밑바닥 노동자라고 불리는 이들의 역사는 최선의 선택지가 아님에도 ‘그 경제’ 속에 살아가도록 강제된 정치적인 경험의 과정이었다. 국가는 민간 경제 주체들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공언하지만 노동자들은 공권력의 겁박과 법률적 위협 속에서 일해야 하는 역설에 직면해 왔다. 이 역설은 착취적이며 불균등한 사회관계를 기초로 한 실재로서의 경제와 완전무결한 시장의 항구적인 승리를 선포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경제의 대립으로부터 발생한다.  이데올로기로서의 경제가 감세 정책을 통해 기업의 투자 여력을 확대하고 긴축재정으로 잠재적인 재정위기를 극복해야 한다 할 때 ‘경제정책’은 전문가들의 영역에나 속하는 고도의 기술 따위로 여겨진다. 이때 경제라고 함은 상품이라는 사물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자연법칙의 위상을 차지하게 되고 그런 까닭에 경제 전문가들이 국민을 대표해 합리적이고 중립적인 경제 정책을 세우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 사회의 윤리로 여겨진다.  혹여나 특정 경제주체에게 불리한 경제적 조치가 취해진다면 이는 경제의 총체적인 흐름 속에서 대의를 위한 것으로 정당화된다. 살기 위해 임금투쟁을 벌이는 노동자를 이기적이라고 비난하는 귀족노조 이데올로기의 논리는 이런 맥락 속에 놓여 있다. 경제 법칙에 순응하는 태도는 자기완결적인 자연법칙에 대한 과학적 태도로서 ‘문명적’ 삶의 기초로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경제에 대한 이런 이해는 매우 편향적이다. 경제가 자기 자신을 중립적이고 기술적인 그 ‘경제’로 정당화하는 과정이 순전히 정치적이고 계급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데올로기로서의 경제와 실재로서의 경제를 분간해야 한다. 실재로서의 경제는 경제침체를 눈앞에 두고도 감세조치가 기업 투자를 확대하리라는 신화적 호소에 기댄 새 정부의 부자감세의 환상을 과감히 횡단한다. 이를 통해 기업 투자 없는 부자감세가 실은 특정 계급의 이윤축적을 위한 정치적인 대책임을 알 수 있다.  이데올로기로서의 경제는 잠재적인 재정위기에 대응해 사회보장 예산을 삭감할 것을 호소한다. 하지만 실재로서의 경제의 시선에서는 사회보장 예산을 삭감하면서도 부자감세를 추진하는 정책이 계급적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게다가 긴축재정이 삶의 질적 저하에도 불구하고 균일한 노동력을 제공해야만 하는 노동자들에게서 사회보장의 손길마저 차단한다는 사실을 금방 눈치챌 수 있다. 부유해지는 사람 따로 가난해지는 사람이 따로 있는 셈이다. 가난해지는 자들은 더욱 굶주리고 더 많은 노동력을 갈취 당한다.  이처럼 정부가 부자감세와 긴축재정을 강화할수록 노동자들의 고통이 가중된다. 이 암울한 상관관계는 기업과 초고자산가의 명분 없는 이윤 축적을 위해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희생되는지를 입증한다. 최근 국회예산정책처의 보고에 따르면 새 정부는 보유세 완화로 50억 다주택자에게 연간 6000만원의 절세 혜택을 주고 있지 않은가? 지금 정부가 시행하거나 예고하는 경제 조치는 기업인들 또는 초고자산가들의 수익을 위한 사회적 관계의 조정일 뿐이다. 시장의 자연적인 회복력이라든가 민간 주도 성장 신화를 운운하며 경제 정책의 본질을 흐리려 하더라도 착취적이고 비용 전가적인 힘의 논리가 새 경제 질서를 관통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경제가 정치적인 적대와 모순을 통해 운행됨을 망각해선 안 된다.  경제형벌의 비범죄화는 어떤가? 기업범죄를 친히 사하여 주는 정책이라 하니 아무래도 이제 시행 6개월차 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기업살인’을 저지르면 사업주나 경영책임자가 실형을 살 수도 있다는 당연한 논리 앞에서 중처법을 개악하자고 난리법석을 벌인 끝에 ‘경제형벌의 비범죄화’에 이르게 되었다. 국민의힘 친윤계 국회의원들은 중처법 개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그런 이유에서 경제형벌의 비범죄화를 앞두고 산업안전보건에 대해 강하게 우려할 수밖에 없다.  국민의힘 국회의원들이 발의한 중처법 개정안은 법무부의 안전인증을 받으면 산업재해가 발생하더라도 사업주나 경영책임자가 형벌을 감면받을 수 있게 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법원에서 양형 참작 사유를 판단하기도 전에 형벌이 감면된다니 이건 대체 무슨 황당한 소리인가? 법무부에서 안전인증만 받으면 미래의 산업재해 리스크에 대해 선제적으로 형벌 감면을 보장해주는 것은 보험 상품의 회계학적 논리와 닮았다. 미래의 산업재해 리스크를 현재화해 안전인증을 위한 얼마간의 자본을 투자하고 이로써 안전보건인증을 취득할 경우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잠재적인 손해를 보전해주는 게 보험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물론 기존의 타 안전인증제도가 그러했듯 산업안전보건 분야의 안전인증의 요건은 기업의 투자 여력을 높인다는 이유로 구색 맞추기 식의 안전보건 인증서류로 채워질 것이고 그렇게 안전보건체계의 의무는 한없이 느슨해질 가능성이 크다. 경제형벌의 비범죄화와 긴축정책 기조가 도저히 규제를 가만히 두고 보지 못하는 본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즈음 되면 중처법 개정안은 중처법의 보험 상품화라고 일컬을 수 있을 듯하다. 기업살인에 대한 형벌을 고심하며 설계해도 모자랄 판에 기업의 리스크를 보전해줄 상품을 만들고 있던 셈이다. 형사처벌만큼 공정해야 하는 절차도 없을 것인데 공적 기관이 형벌 집행을 사유화해 처벌을 받지 않는 특권계급을 창설하고 궁극적으로는 자본축적에 내재한 위협을 시공간적으로 분산시켜 주게 생겼다.  뿐만 아니라 이번 개정안은 노동자의 신체와 건강에 대한 정치적 공격의 성격을 띠고 있다. 법무부의 인증을 받으면 산업재해에 따른 형사적 책임이 감경 또는 면제되는 예외적인 공간이 전국에 선포되고, 노동자의 신체에 대한 형사법적 진공상태가 만들어지는 셈이다. 결국 미래의 산업재해 리스크와 공적 기관의 안전 인증이 거래되는 순간 노동자는 잠재적으로 죽거나 다치도록 내버려진다.  죽도록 내버려진다는 말은 절대 과장이 아니다. 기업형벌의 행정 규제화와 긴축정책 때문에 산업안전보건 법률 집행이 이루어지지 않아 노동자들이 죽거나 다치도록 내버려진 역사는 영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Steve Tombs에 따르면, 영국 정부는 ‘더 나은 규제’와 ‘긴축정책’이라는 기치 아래 산업안전보건 분야의 정부 예산을 삭감한 바 있고, 그 결과 규제 감독관의 수, 근로감독 건수, 기소 건수, 유죄 선고율이 크게 감소했다고 한다. 어느 규제 감독관은 이를 “공중 보건의 위기”로 표현했다는 면담 내용도 등장한다.  이로부터 우리는 국가 권력의 폭력성이 어떻게 기능하는지 확인하게 된다. 국가 권력은 특권 계급의 요구에 따라 형벌의 진공상태를 명령하고 죽거나 다쳐도 되는 신체를 만들어낸다. 억압적인 국가 장치는 결코 모두를 위한 보편적인 인권을 보장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배제할 때라야 주권 권력이 기능할 수 있는 탓이다. 이로써 노동자들은 노동하는 신체를 제외한 대부분의 인권을 박탈당한다.  이처럼 특정 계급의 이익을 위해 국가 장치들이 사유화되고 있는 움직임은 갈수록 확연해지고 있다. 대통령실, 여당 국회의원, 검찰, 법무부 등 국가기구들은 발 벗고 나서 민생을 옥죄는 방안들을 고안하고 집행한다. 기업의 예상 수익률이 떨어져 기업투자가 발생하지 않아도 부자감세를 시행하고 있다. 그 와중에 민생을 옥죄고 노동자의 안전을 위협하는 긴축재정과 경제형벌의 비범죄화를 단행한다. 이제는 실질 임금 삭감을 정당화할 요량으로 노동계 단속에 나섰다. 대우조선 하청 노동자들이 그 목표의 첫 번째 표적이다.  민생 안정에 무능하고 민생 탄압에는 유능한 정부는 앞으로도 선택적 공정의 논란을 피할 수 없을 듯하다. 여러 분야에서 비전 부재와 메시지 실패를 보여주다가 대우조선해양 파업 사태에는 발 빠르게 강경대응을 보여줄 수 있었던 이유는 이번 정부가 공권력의 사유화에만 집중하고 있는 탓이다. 게다가 억압적인 국가 기능에 기대어 국정을 운영하려는 태도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게 분명하다. 초반부터 신선함이 전혀 없고 뭐 하나 제대로 해준 것도 없는 국가가 그저 억압할 뿐이라는 인식이 시민들 사이에 급속히 퍼지고 있다. 예상대로 ‘올드 보이’들은 생산적인 논의를 이끌어내지 못한다. 이전 정부에 대한 비토 정서만으로 탄생한 정권이기에 무엇을 기대하겠냐고들 하지만 경제 전반이 사유화되고 있는 현실을 버티는 건 너무 고단한 일이다.
2022-07-28 | hrights | 조회: 148 | 추천: 5
김지혜/ 회원 칼럼니스트 출처 - 연합뉴스  취업, 독립 등을 이유로 2030세대가 부푼 기대를 안고 첫 자취집을 찾아 나선다. 자기만의 취향으로 집을 꾸밀 생각에 들뜨는 것도 잠시, 높은 임대료로 인한 청년의 주택난은 심각하다. 정부는 19~39세 청년층을 대신해 LH가 주택 소유주와 전세 계약을 체결한 뒤 저렴한 월세로 이를 재임대하는 ‘LH 청년 전세 임대 제도’를 내놨다. 그런데 지원 대상자 절반이 이 계약을 포기하는 아이러니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부모와 본인의 소득을 기준으로 ‘LH 청년 전세 임대 제도’의 지원 대상자로 선정되면 계약 가능한 주택을 청년이 직접 찾아야 한다. 그리고 LH 주택 권리분석을 거쳐 전세 가능 여부를 검토한 뒤 임대차 계약을 체결한다. 수도권 기준으로 최대 1억 2000만원까지 전세 보증금이 지원된다.  그럼에도 최근 서울의 전세가가 급등하면서 이 제도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매물을 찾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가 됐다. 또한 임대인의 입장에서 LH 계약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점이 없으며 LH 계약 절차의 복잡성, 월세선호 현상, 매물의 부채비율과 같은 임대인 자산정보 공개를 꺼리는 등의 이유로 LH 매물의 공급 자체가 적다. 저소득 청년의 주거비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 본래의 목적이었으나 반전세의 개념으로 사실상 월세살이를 하게 되는 경우가 다수이며 LH 주택의 초과수요(매물의 공급보다 수요자가 많은 상태) 현상을 이용하여 일반적으로 선호하지 않는 반지하, 오래된 주택이 매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일각에서는 ‘LH 제도’가 오히려 전세보증금을 끌어올렸다는 주장이 있다. 국가에서 1억2000만원까지 지원해주는 것이니 임대인은 최대금액만큼 받고자 한다는 것이다.  ‘LH제도’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우선 부동산 물가 안정화를 위한 정부의 정책적 노력이 요구된다. 현재 정부는 청년의 월세부담 완화를 위한 주거급여, 청년 월세 특별지원, 청년 무이자 월세대출과 같은 지원책을 선보이고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집값을 안정화하지 않는 한 정부의 돈은 계속해서 임대인에게 흘러가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임대인에 대한 실질적인 혜택을 제공해야 한다. ‘LH제도’에 참여함으로써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임대인에게 조세 감면 혜택을 주거나 계약 절차를 간소화 할 필요가 있다. 다주택자들이 ‘LH제도’에 참여하게끔 유인책을 제시함으로써 공급량을 늘리는 방안도 생각해볼 수 있겠다.  주거권은 인간이 기본적으로 생활할 권리이다. 정부는 이제 막 사회에 첫 발을 내딛는 청년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정책을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정책이 미칠 사회적인 영향력을 계속해서 검토하고 현실에 맞게 수정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보여주기 식’ 정책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2022-07-20 | hrights | 조회: 137 | 추천: 0
조혜원/ 회원 칼럼니스트 “점심시간 1시간을 보장해주세요.” “임신한 노동자에게 필요한 쉼과 휴가를 주세요.” “다치면 산재처리를 받게 해주세요.”  21세기에 ‘사람답게 살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 기업이 있다. 빵 굽는 구수한 냄새 가득할 것만 같은 파리바게뜨의 SPC다. 임종린 민주노총 화섬식품노조 파리바게뜨 지회장은 부당노동행위 중단 및 사과, 노조파괴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하며 53일 동안 진행했던 단식을 지난 5월 19일 중단했다. 암담한 현실의 노동자 탄압과 노동인권 현주소가 SPC를 통해 다시 한 번 확인됐다.  더불어 확인한 사실은 우리 사회의 거대한 무관심이었다. 파리바게뜨 노동자들의 길고 긴 싸움이 일부 언론을 통해 공식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임 지회장의 단식 투쟁이 한 달을 훌쩍 넘어선 지난 5월 9일이 되어서였다. 그것도 한 시민의 온라인 내 해시태그 운동을 통해서 겨우 가능했다. 3월 해시태그 운동이 있기 전까지는 거의 모든 언론에서 해당 사안이 다뤄지지 않았다.  더욱 암담한 문제는 언론의 주목 이후였다. 대부분 언론사는 ‘노노 갈등’ 프레임을 씌우려 했다. 앞으로 SPC 기업이 나아가야 하는 방향들, 해당 시위의 쟁점들, 그리고 더욱 근본적인 배경을 다루는 것을 회피했고, 일부 언론은 시위와 불매운동으로 인해 가맹점주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는 식의 보도로 아예 본질을 흐리기도 하였다. 자극적이고 갈등을 불러일으킬 만한 부분만 극대화하여 보도하는 것에 그치는 언론의 보도 행태는 현재 언론이 과연 평등한 공론장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게 한다.  비단 SPC 건만이 아니다. 모든 사회적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다룰 때마다 언론은 늘 비슷한 행태였다. 페미니즘과 성평등의 투쟁을 ‘젠더 갈등’으로 축약시키거나 장애인 이동권 문제를 ‘민폐 시위’로 보도하는 등 현재의 언론은 권력 중심, 기득권 중심의 시각에서 소수자 문제를 외면하려는 행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 보니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만 내고,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여전히 갈등 그 자체에만 집중하여 “왜 또 싸우고 있는지” 따위를 물어보게 되는 것이다. 출처 - 직접 촬영  6월 8일 SPC 파리바게트 노동자의 2차 촛불시위가 있었다. 시위 현장에서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시위 현장 바로 건너편에 있는 파리바게트 건물에 사람들이 그렇게도 많이 오갔다는 사실이다. 제 아무리 확성기로 크게 문제를 이야기하고 몇 시간 동안 투쟁을 하였음에도 여전히 이 사실을 듣지 못하고, 혹은 들었음에도 문제 의식을 가지지 못하고, 혹은 문제의식을 가졌음에도 애써 외면하며 그 곳의 빵을 사가는 사람들이 그렇게도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처음으로 이 사회의 보이지 않는 벽을 보게 되었다. 고작 횡단보도 하나만큼의 거리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인식의 차이는 높은 기득권과 소수자 사이에 존재하는 엄청나게 큰 벽은 아니다. 늘 생활 속에서 맞닥뜨림에도 닿을 수 없을 듯 아득한 거리감이 있을 뿐인지 모른다.  간식거리를 위해 그곳을 들르는 직장인들, 친구들과 함께 삼삼오오 무리 지어 그곳을 들어가는 학생들, 내일 먹을 아침을 위해 식빵 한 봉지를 손에 들고 나오는 사람들과 같이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평소에는 평등하다고 생각되는 동료 시민들이 그 횡단보도 건너편에 존재한다. 악덕한 기업의 노동탄압보다, 같은 노동자들에게 무뢰배 같다며 입막음을 시도하는 한국노총보다, 그 횡단보도 건너편을 보며 느꼈던 분노와 절망감이 더 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문제를 회피하는 언론과 이 무관심한 시민의 모습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언론은 더 이상 우리 이웃의 문제를 단순한 논란거리나 가십으로 소비하는 행태를 멈추어야 한다. 이야기를 듣고 함께 해결해 나가야 한다. 그리고 이 촘촘한, 보이지 않는 인식의 벽들을 하나하나 부수어 나가야 할 것이다.
2022-07-13 | hrights | 조회: 340 | 추천: 3
전예원/ 회원 칼럼니스트  6월 18일 세계 난민의 날을 기념하는 제7회 난민영화제(‘그럼에도 우리 함께’)가 열렸다. 이번 난민영화제가 소개한 <파리의 별빛 아래>(2020), <나의 집은 어디인가>(2021), <기록(Writing To Reach You)>(2021), <소속(Belonging)>(2021) 등 네 편의 영화는 국적국을 떠난 이들이 맞닥트린 ‘난민 이후의 삶’에 주목했다. 출처 -  KOREFF 공식 홈페이지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난민의 형상은 대부분 독재와 내전, 종교 박해 등으로 무너진 삶의 고통에 머물곤 한다. 시선은 국적국을 떠나게 된 사건이나 국경을 넘나드는 행적 이후까지 이어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난민들이 이주 후 일상에서 겪는 현실의 문제를 밀도 있게 그려 낸 이 네 편의 영화에는 그들의 취약하고 위태로운 삶의 실체가 담겨 있다.  난민들이 국적국을 벗어난 이후 겪는 문제의 양상은 복잡하다. 영화 <파리의 별빛아래>는 엄마와 헤어져 거리를 떠도는 난민소년 ‘술리’와, 그의 엄마를 찾는 여정에 함께하는 홈리스 여성 ‘크리스틴’의 이야기를 통해 난민들이 마주한 문제적 현실을 드러낸다.  난민은 법 안에서도 그 지위가 불안정하다. 술리가 프랑스의 거리를 떠돌게 된 시작은 다름 아닌 모자(母子)의 강제 퇴거조치기 때문이다. 난민들의 처지는 그들이 체류하고 있는 국가의 상황에 좌우된다. 술리 모자가 강제퇴거 대상이 되는 까닭 역시 프랑스의 난민정책상 이들 모자가 오스트리아로 보내져야했기 때문인데, 이 장면을 통해 자기의사와 관계없이 거소가 정해지는 난민들의 불안정한 처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우리’와 다르다는 차별도 난민들에게 강력한 낙인이 된다. 영화 속 프랑스 사람들은 술리를 프랑스 사회에 융화되지 못하는 골칫덩이로 취급하거나,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말로 불편함을 드러낸다. 어린아이의 몸으로 산과 강을 건너 전쟁 중인 국적국을 벗어난 술리의 삶에 대한 이해는 찾아보기 어렵다. 난민협약 가입국으로서 난민들을 수용하기 위한 형식적인 법과 절차는 갖췄지만, 그들을 공동체의 존재로 받아들이려는 인식은 자리 잡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난민들은 언제라도 다시 추방될 수 있다는 불안감과, ‘난민’이라는 이유로 가해지는 혐오와 편견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이중의 문제를 겪고 있는 셈이다.  난민이 맞닥뜨린 이 이중문제의 현실은 비단 영화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사회의 현실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인정율이 1.5~3프로에 그치는 현행 심사제도에서 한국사회의 절대다수의 난민이 ‘인도적 체류자’와 같은 불안정한 지위로 부유한다. 난민인정을 받기 위해 입증해야 하는 ‘박해받을 두려움’은 그 성질상 증명이 쉽지 않아 분명한 기준안이 제시되어야 함에도 법무부는 난민인정심사의 기준이 되는 ‘난민체류지침’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차별적 인식도 마찬가지다. 2018년, 제주 도착 예멘 난민들을 향했던 ‘가짜난민’의 프레임과 ‘난민법 폐지발의’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당시 다수의 언론은 난민을 청년의 일자리와 여성의 안전을 위협하는 불온한 존재로 비추어 난민에 대한 혐오감을 부추겼다. 난민들에게 일자리를 주기 위한 정책이 청년들의 고용불안을 심화시킬 것이며, 예멘이 여권이 낮은 이슬람 문화권에 속해있기 때문에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급증하리라는 것이 주 논리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상당 부분 그 근거가 빈약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실재하는 대다수의 난민은 국내의 취업자들과 직접 경쟁하는 일자리를 얻을 수 없고, 이슬람권의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를 것이라는 추측은 미디어를 통해 빚어진 왜곡된 이미지의 일면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여느 사회에서건 난민들은 법적지위를 획득하기 어렵고, 운 좋게 난민인정을 받은 이후에도 숱한 차별적 인식들과 마주해야 한다. 낯선 문화권의 난민들은 인종적, 종교적 이유로 왜곡 보도되어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문화적 차이 탓에 한국사회에 융화되기 어려운 존재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난민영화제에는 ‘이란 난민소년’으로 잘 알려진 김민혁 학생이 자신의 경험을 나누었는데, 그는 복잡다단했던 한국에서의 난민인정심사의 경험을 환기하는 한편 차별적 인식을 바꿔나가기 위해 자신이 했던 최근의 노력들을 언급했다. 일례로 그는 난민이기에 한국 사회에 융화되지 못할 것이라는 시선들을 바꾸기 위해 배우로서 모델로서, 또한 학생으로서 자신이 이뤄온 많은 성과들을 이야기한 후에야 자신이 사실 난민임을 밝히는 화법을 취한다고 한다. ‘난민’이기 이전에 함께 살아가는 ‘사람’임을 보임으로써 차별과 편견에 대응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하고 복잡한 난민인정심사의 과정과 그 이후의 삶에서 마주하는 일상의 차별적 인식들을, 난민 개인의 힘만으로 헤쳐 나갈 수 있을까. ‘난민’과 ‘국민’이 공생할 수 있는 방향에 대한 고민은 분명 필요한 일이나, 그것이 ‘받아들여지기를 원하는’ 어느 한쪽에만 짐 지우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될 일이다. 우리 모두는 태어난 나라를 선택할 수 없고, 예고 없이 발생하는 재난과 전쟁, 그 밖의 박해사유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화제의 슬로건처럼 ‘그럼에도 우리 함께’ 가는 마음이 필요할 것 같다. 그리고 그건 대단한 노력을 요하는 종류의 것은 아닐지 모른다. 난민들과의 마주침의 계기들을 외면하지 않는 것, 그들이 국적국을 떠나오게 된 맥락을 상상하는 것, 그리고 그 이후의 삶을 편견 없이 지켜보는 것. 그럼에도 ‘함께’하는 마음은 그런 것이 아닐까.
2022-07-13 | hrights | 조회: 71 | 추천: 4
이창우/ 회원 칼럼니스트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작동하기를 바라는 힘보다 앞서는 감성의 힘으로 나는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 현대라는 위험사회에 갑자기 찾아온 죽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생명이 한 점에서 출발한 것이라면 그 점이 더는 보이지 않는 것을 죽음이라 편리하게 이름 붙일 수는 있다.  삶이라는 제목에 굳이 흔적을 남겨야 할 것도 아니다. 스스로 확인하다가 살아있음을, 그것이 벅차면 확인하지 않아도 된다. 어떤 점으로 있건 그건 내가 부르고 싶은 이름으로 불리면 된다. 수많은 말과 소리와 글로. 또는 이미지로. 그게 삶이라는 이름이 되기도 한다.  세상에서 여러 모습으로 살아가는 일. 지금 여기와 그 어느 날과 또 다른 그 어느 시절에 살아간다는 것이 삶이다. 중심이 되는 하나가 다른 차이, 질적 다양성을 말살시키려는 것은 폭력이다. 인류의 역사에 드리워진 만행, 그들조차 인지하기 어려울 만큼 보호받거나 정당화하고 이어가는 남성 중심의 사회구조이다.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일상에서 이론적으로 배우고 느끼며 살고 있다. 다만 인간으로 태어나 여성으로 있는 것과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과는 확연히 다름을 쉽게 지나칠 뿐이다. 내가 생활하면서 만나는 부당함이 뼈저리게 파고들지 않으면 저항보다 순응이 쉽다.  남성 중심의 사회가 그렇다. 워낙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공고하게 굳어진 남성 중심의 생각들이 자리를 내어주지 못한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스스로 알아차리고 깨닫지 않으면 페미니즘은 수많은 사회운동처럼 부분에서 정체되어 파편화되고 더 나아가지 못한다.  페미니즘은 더 나은 삶을 위한 과정의 한 의식화이고 그 너머에서 진정한 휴머니즘의 세계가 열릴 수 있다. 남자, 여자로 규정된 생각에서 벗어나 인류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세계에서 하나인 인간으로 살아나기 위해서라도 페미니즘은 자명성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접근해 한 걸음 내딛기 시작해본다. 내가 받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어머니 교과서를 다시 풀어내 보기. 지금 나는 과연 누구와 마주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는 일. 다름 아닌 거울 속에 '여성'은 아닐지. 단 한 번의 거대한 투쟁 없이 지나온 한국 여성의 역사는 또 어떨지.  내게 부여된 젠더로 나의 삶을 구분하거나 규정하는 일은 순전히 개인의 몫이어야 한다. 타인들이 지칭할 문제가 아니기에 인간이면 충분할 자의식이 필요한 거였다. 여전히 이 세계는 고정되거나 신화가 되어버린 성 역할의 사회학습 효과를 톡톡히 요구하고 있다.  씩씩한 남자 만들기만큼이나 현모양처 만들기에 힘을 쏟았던 한국사회의 역사성을 느껴보는 일. 주체로 살아가기에 걸림돌은 무엇일까 생각하다 멈추는 곳은 지금, 여기였다. 페미니즘은 건강한 사상이다. 논쟁으로 승부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앎을 서로 나누는 이성과 감성의 조율이다.  젠더만큼 뜨겁고 달콤하고 격렬하기도 한 논쟁은 드물다. 뒤끝으로 공부의 동기를 주는 괜찮은 학문이기도 하다. 온라인에서는 논쟁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말들로 뒤죽박죽이다. 표출된 말들은 치우친 경우가 더 많다. 읽어보면 공론장과 같은 역할의 커뮤니티에서 정제되지 않은 풍경은 가히 폭력을 넘어 가학적으로 보인다.  페미니즘을 접하면서 수많은 문학과 책들 속에서 만나는 것은 분명 살아 움직이고 있는 존재로서 여성이다. 작은 부분들로 이루어진 페미니즘은 전체를 돋보이게 할 수 있는 기제로 서로를 감싸 안아준다. 어느 작은 한 가지로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청소년기와 청년의 시간에 책을 가까이하기 어려웠던 한국사회의 능력주의라는 강박. 페미니즘 공부를 해오면서 자주 만나는 감정이다. 고전이라 불리는 세계문학 안에는 여성으로 태어났지만, 인간으로 살아가려는 수많은 목소리가 있다. 적어도 주체의 나를 보살피게 된다는 의미이다.  사회에서 만들어가는 여성의 모습과 다른 나를 인정하는 일부터 시작해 사회에서 학습한 지식이 얼마나 남성 중심으로 치우쳤는지. 되돌아보면 문학과 함께 굳이 꺼낼 단어들이 페미니즘과 이어지고는 한다.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배우는 것은 이 세계가 얼마나 편향성을 주류로 생각해 왔는가이다. 인간으로서 존엄이 거의 모든 영역에서 강자에게 치우친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적어도 나의 세계에서만큼은 변화가 찾아온다.  나와 그대가 하는 그럴싸한 변명, 초연하게 살아온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한 나의 이야기 또는 그대 이야기가 있다. 자기 정당성이란 함정을 파 놓고 삶을 궁핍하게 몰아가는 이 사회 구조에서 멀쩡하기는 어렵다. 하나에서 여럿으로 연대의 힘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동력이다.
2022-07-06 | hrights | 조회: 136 | 추천: 1
이서하/ 회원칼럼니스트  언젠가 중요한 미팅을 앞두고 만날 장소를 정하던 중, 상대로부터 파리바게뜨에서 만나자는 말을 들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하필 시그니처 지점이었다. 임종린 민주노총 화섬식품노조 파리바게뜨지회장의 단식 투쟁이 한창 화제였던 시기라 SPC 산하 가게들은 불매 중이라고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러나 서로 차선책이 없었다. 초면의 상대를 만나는 자리에서 마땅한 대안 없이 고집을 부릴 수도 없는 일이었기에 결국 파리바게뜨에서의 만남을 수락했다. 나는 “그곳도 괜찮다”라고 답한 순간부터 만남이 파하는 순간까지 영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단식 투쟁이 한창 진행되는 현장과는 달리, 그날의 파리바게뜨는 고즈넉하고 평화로웠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다. 수많은 정보가 각종 매체를 통하여 송출되는 요즈음, 정보를 접하기 쉬워진 만큼 잊어버리는 속도 역시 빨라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자주 든다. 알려야 할 소식이 너무나도 많기에 한 번 지면에 오른 이야기는 어지간한 화제성을 가지지 않고서야 쉽게 묻힌다. 그렇게 우리로부터 먼 이야기를 우리는 점점 더 빠르게 잊어버린다.  이러한 망각의 시대에서 시민운동의 숙명이라면 기억됨에 있지 않은가 싶다. 불매운동이 특히 그렇다. 매출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어 기업의 반성을 촉구하는 운동인 만큼 소비자의 적극적인 동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불매운동이 유의미한 지표를 보이지 못했다면 조용해지기만을 기다려 온 사측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선을 돌리고, 노동자 앞에는 해결되지 않은 문제만이 덩그러니 남을 것이다.  요즈음 또 하나의 불매운동이 고개를 들고 있다. 올해 3월 28일부터 임종린 민주노총 화섬식품노조 파리바게뜨지회장은 SPC의 노조 탄압 및 부당노동행위 중단, 2018년 1월 합의한 사회적 합의 이행을 촉구하며 53일간의 단식 투쟁을 진행했다. SPC는 파리바게뜨, 던킨도너츠, 배스킨라빈스 등의 산하 기업을 두고 있으며 국내 제빵업계에서는 선두로 꼽히는 그룹이다. SPC는 민주노총 조합원의 승진 차별 및 노조 탈퇴 종용, 연차휴가 및 여성 노동자의 월경·출산·육아휴직을 보장하지 않은 등의 사유로 불매운동의 대열에 올랐다.  SPC는 노조원에 대한 차별이 없었으며, 사회적 합의 내용의 충분한 이행을 통해 당사와 가맹점주가 제빵기사들에게 동종업계에서 최고 수준인 임금 및 복리후생을 제공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지난 6월 16일 파리바게뜨 사회적 합의 이행 검증위원회는 2018년 1월 사회적 합의 주체들이 합의한 11개 항 중 실제로 이행된 것은 2가지, 일부 이행된 것으로 확인된 항목은 3가지라고 밝혔다.  이처럼 노사 간의 갈등이 길어지자 임 지회장의 단식은 건강을 위하여 끝을 맺었으며 현재 시민과 노동자가 합심하여 릴레이 단식 및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처음 단식이 시작될 때 SNS에서는 이를 지지하기 위하여 SPC 산하 기업 목록을 정리해 불매 리스트를 만들거나 파리바게뜨를 대체할 동네 빵집을 소개하는 챌린지를 진행했다. 그러나 임 지회장의 단식이 끝난 지금, 언론 보도 및 관심을 기울이는 시민의 수는 한 폭 줄어들었다. 이는 특정한 원인이 있다기보다도 한번 언급한 정보가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레 보도 순위에서 밀리게 되는 현상일 것이다.  가끔 이렇게 한 시기를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들이 얼마나 기억되고 있을까를 생각한다. 누군가 여전히 기억하며 불매를 이어가는가 하면 희미한 기억을 붙잡기 위해 검색을 하는 이도, 아주 잊어버린 이도 존재할 것이다. 사실 망각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삶은 흘러가고 우리는 연일 보도되는 새로운 사건들에 귀를 기울이게 될 테니까.  하지만 삶의 편린이 스쳐 지나간다는 주마등이라는 것도 있지 않은가. 나는 그런 것을 믿는다. 유수 같은 세상 밑에 조약돌처럼 가라앉아 있는 기억의 잔해를, 잠시 밀려나 있었을 뿐 수면 위로 떠 오를 듯 말 듯 어른거리는 기억의 끈질김을 믿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 하는 우리의 인간됨 역시도 믿는다.  그러니 모든 것을 매일 기억하지는 못하더라도 소란을 동반했던 어떤 이름들이 보인다면 퍼뜩 떠올릴 수는 있지 않을까. 오래 바라보고 검색창 위에 손가락을 올려 그 이름이 누군가의 삶을 잡아먹고 성장했다는 것을 기억해낼 수는 있지 않을까. 나는 오늘도 망각의 강 앞에 서서, 동료 시민의 고통에 기여하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이렇게 질문을 던진다. 혹시 잊어버린 것이 있지 않을까?
2022-06-28 | hrights | 조회: 125 | 추천: 2
김태민/ 회원 칼럼니스트  전망과 비전을 폐기하고 취향과 감정으로 뭉친 정치 공동체는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역대급으로 낮은 투표율 속에서 치러진 지방선거 결과는 이미 현실로서 도래했으나 한사코 부인된 진리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다. 개혁의 염원을 오로지 부패한 권력을 규탄하는 도덕적 호소로 채우는 감정의 정치 공동체는 실패할 수 밖에 없다고. 사실은 그렇다. 지난 몇 달간 탄핵된 보수 세력에게 정권을 넘겨준 실패를 만회하고자 괴물 같은 권력을 “모피아”, “검피아” 같은 용어로 명명하려는 시도들을 목격했다. 이 같은 권력의 수사학이 겨냥하는 정치적 효과는 비교적 명백하다. 일반 시민과 거대 권력 사이의 대립을 서사화하며 기득권과 대립각을 세울 감정의 공동체를 만들어내고자 했을 것이다.   물론 추문으로 가득 찬 내각 인사들의 오물을 들춰내며 권력의 서사를 직조해내는 방편은 분명 현실 정치의 문법을 반영한 저항의 언어로써 정당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이는 권력의 표면을 소묘하는 그 이상의 효과를 가져올 수 없다. 무엇보다 ‘세상은 원래 그런 것 아니냐’는 냉소적인 이데올로기와 정권 발목잡기 프레임에 밀려 정치적 동력을 상당 부분 상실한다. 게다가 정권 인사의 도덕성을 논하는 것을 넘어 권력의 분배 방식을 어떻게 시정할지에 대한 명징한 대안적 기획이 제시되지 않아 투표에 참여해야 할 명확한 정치적 유인을 제공하지 못했다. 대선에서 최고 투표율을 보인 호남이 지방선거 참여에는 저조했던 건 그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기득권에 대한 분노로 탄생한 감정의 공동체가 전망과 비전을 만나지 못한 채 맥없이 실패한 셈이다.   정권 인사의 부도덕성을 규탄하고 검찰권력과 모피아의 연대를 비판하는 윤리적 호소에 매몰되어있을 동안 ‘반기득권 서사’의 성긴 손가락 사이로 구조적 모순은 잘도 빠져나갔다. 검찰권력의 선택적인 수사와 모피아와의 부패한 연합이 ‘특권계급’의 부와 권력의 분배 문제로 축소된 이유는 민주주의 자체의 환영과 자본주의 체제 내부의 모순을 우회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모호하게 정의된 ‘특권계급’이라던가 ‘기득권’이라는 관념이 민주주의의 위기로 제시될 때 체제의 부패한 규율이 정치 진영을 가리지 않고 사회 전반에 걸쳐 동형적으로 분포한 현실은 감쪽같이 은폐된다. 규제와 기소를 담당하던 공직자들이 기업을 거쳐 다시 공직으로 돌아오는 행태는 집단 세력화된 엘리트 계급의 부도덕과 파렴치함의 문제를 넘어 이윤 축적을 위해 거대한 공장처럼 운영되는 체제 자체의 문제인데도 말이다.  출처 - 경향신문  모피아나 검피아마저 설계해내는 지배적인 구조의 힘을 캐묻지 않은 탓에 이제 저들은 정치 권력을 배당 받은 본분에 따라 노동법 개악을 입 냄새 나도록 떠들며 경제 질서의 재조정을 향해 내달리고 있다. 때마침 지난 25일 한덕수 총리는 중처법 개정을 본격적으로 공론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한 기자간담회에서 “산업계에서 중대재해처벌법이 일종의 규제가 아니냐는 지적이 있다는 말에 동의한다.”며 “산업 안전 재해를 줄여야 한다는 것에 다 동의하고 목적에 아무런 논쟁이 있을 수 없지만 그 방법론이 적절한지 들여다봐야 한다”라고 말했다.   한덕수 총리의 위 대목은 범죄와 형벌의 영역이 어떻게 경제적 격자를 통해 규정되는지를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그에 따르면 기업살인과 형사법적 처벌을 다룬 중처법은 ‘규제완화와 투자활성화’의 문제로 탈바꿈한다. 그리고 기업살인법과 규제정책의 존재론적 격차를 단숨에 뛰어넘는 논리적 비약은 전혀 어색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형사적 처벌의 영역을 행정적 규제와 관리의 영역으로 오인하는 인식상의 혼동 또는 프로이트적 말실수(Freudian slip)는 전혀 우연이 아니다. 이는 오히려 검찰 권력과 자본주의적 경제 체제가 동거하기 위해 벌어지는 현실 정치의 기묘한 복화술, 즉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이 산업재해를 둘러싼 형사법적 권한을 조정하는 양상을 그대로 체현하고 있다.   공정과 정의의 신화가 전하는 바와 달리 신자유주의 통치성에 예속된 검찰권력은 경제 이성의 명령에 따라 어떤 범죄를 용인하고 처벌할지를 결정한다. 결국 온갖 기소와 수사의 스펙터클을 뽐내던 검찰은 기업살인에 대한 형사법적 접근을 철회하고 검찰통치를 자랑하는 이번 정권은 기업의 강력한 요구에 발맞추어 기업살인 문제를 ‘규제’와 ‘행정적 관리’의 영역으로 배치시킬 것이다. 지금 당장은 법 개정을 할 수 없는 처지이기에 경영자의 안전보건의무 범위를 축소시키는 가이드라인을 내리는 행정 전술을 통해 중처법을 저지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한 마디로 검찰권력은 산업재해를 둘러싼 자본과 노동자의 대립 속에서 무엇을 물고 무엇을 놓아야 할지 잘 알고 있다. 이처럼 사업주와 경영책임자의 범죄와 처벌에 관한 문제가 경제 활성화 방안으로 번역되는 과정은 검찰권력에 기초한 이번 정권이 신자유주의 통치성 또는 자본주의적 생산 체제와 어떤 종속적 관계를 맺고 있는지 확연히 알게 한다.   현실 정치 속의 수많은 권력의 쟁투와 정치적 대결의 양상은 경제라는 강력한 심급과의 특수한 관계 속에서 전개된다. 그런 이유에서 지금의 정세를 단순히 검찰권력을 포함한 기득권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주도권 다툼만으로 해석될 수 없다. 중처법 개정 문제뿐만 아니라 각종 정치 경제 분야에서 기득권 세력의 계보로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목록들이 계속 이어질 것이다. 개혁주의 진영의 내로남불로 ‘반기득권 서사’가 현실에 대한 설명력을 잃고 유권자들에게 투쟁의 정당성도, 대안적 기획도 제공하지 못한다면 새로운 문제의식을 찾아 나서야 할 때다. 자본주의 사회 배후의 은밀한 소수의 조종자들을 규탄하는 윤리적인 호소를 넘어, 반기득권 연대라는 손쉬운 도식들을 대체하고도 남을 총체적인 방향성을 향해서 말이다.
2022-06-15 | hrights | 조회: 130 | 추천: 6
김지혜/ 회원 칼럼니스트 만약 일반 기업에서 업무 중 화장실 이용 시간을 근무평가에 반영해 경쟁에 붙인다면 어떻게 될까? 배달업체인 요기요의 AI는 이것을 가능하게 했다. 라이더의 휴게시간을 상대적으로 평가하는 요기요의 AI는 잠깐의 휴게시간도 데이터로 산정하여 라이더에게 등급을 부여하고 일감을 줄인다. 등급 하락으로 인한 수입 감소를 막기 위해 라이더들은 화장실 참는 경쟁을 해야 하는 것이다.  배달업체 라이더는 특수 고용직 플랫폼 노동자이다. 그들은 노동법의 보호를 받는 근로자가 아닌 개인사업자의 형태로 플랫폼을 통해 소비자에게 서비스를 제공한다. 출처 - 중앙일보  코로나 사태 이후 비대면‧비접촉의 형태로 생활양식이 변화하면서 플랫폼 노동은 우리 생활 깊숙이 파고들었다. 소비자에게는 편리함이, 일하는 이들에게는 과외 시간을 이용해 수입을 올릴 수 있다는 이점이 강조됐다. 그러나 이 플랫폼 산업은 출혈적 경쟁과 알고리즘에 의한 비인간적 통제에 의해 굴러가는 시스템이었다.  진입장벽이 낮고 시간관리가 자유롭다는 이점으로 배달라이더의 수는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알고리즘은 그런 이점을 비웃는다. 계속해서 콜을 받지 않으면 점차 콜이 줄어드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일정한 수입(콜)을 유지하려면 그들은 계속해서 도로 위를 질주할 수밖에 없다. 즉, 이들은 무한노동을 전제로 24시간 대기상태에 있다.  서울시에 따르면 이륜차사고가 지난 1월부터 지난 5월 20일까지 지난해 같은 기간 동안에 비해 47.1%포인트 증가했다. 횡단보도 주행, 신호위반 등이 그 원인이다. 이것은 개인의 도덕성 문제가 아니다. 보다 빠른 배달을 원하는 소비자, 콜을 잡기 위한 라이더끼리의 지나친 경쟁, ‘단순중개’라는 명목 하에 방관하는 플랫폼 기업, 이륜차의 교통법규 위반에 대한 부실 단속 등 다양한 문제가 얽혀 있다.  지난 5월 29일, 배달 노동자의 산재보험 적용을 막아왔던 전속성 조항(두 군데 이상의 사업장에서 일하는 라이더의 경우 한 사업장에서 월 소득 115만원 이상을 벌거나 93시간 이상을 일해야 산재보험의 적용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폐지하는 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그동안 전속성 조항의 미충족으로 산재보험의 적용대상이 되지 못했던 노동자들에게 산재 적용 대상의 가능성이 열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건 사고에 대한 예방이 중요하기에 의무는 있으나 권리는 없는 그들에게 노동권을 보장하는 것이 먼저다. 국내에서 거대 플랫폼 기업으로 인한 사회적 문제가 계속 심화하고 있는데 정작 이들은 국경을 넘어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플랫폼 노동자의 노동자성이 인정되지 않는 이상 이들은 인간적으로 노동할 수 없다. 알고리즘, 콜, 평점 등으로 노동자를 관리하고 통제하는 플랫폼 기업은 관리자로서 책임을 져야하며 동시에 플랫폼 노동자는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고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영국의 노동법학자인 제레미아스 아담스-프라슬은 이를 “혁신의 역설”로 표현하며 플랫폼 기술은 혁신적일지 몰라도 플랫폼 노동자가 일하는 방식은 오히려 퇴행적임을 지적한다. 플랫폼 산업 시대, 우리는 노동자의 권리와 사업주의 책임에 대해 다시 돌아봐야 한다.
2022-06-08 | hrights | 조회: 189 | 추천: 6
조혜원/ 회원칼럼니스트  지난 5월 2일 걸그룹 에스파가 경복고 축제에 참석했다가 현장에 참석한 학생들의 도를 넘은 행동들로 인한 피해 사실이 전해졌다. 학생들은 무대에 난입해 과도한 신체 접촉을 시도하는 등 위협적 행위를 이어갔다. 사건 이후에도 자신들의 SNS에 해당 사진과 함께 성희롱적 발언을 올리기까지 했다. 학교 측은 두 차례에 걸쳐 사과문을 내놓았지만, 그 어디에도 문제의 본질은 찾아볼 수 없는, 표면적인 사과일 뿐이었다. 이번 경복고 사건의 문제점은 가해 학생들 개개인의 일탈에 국한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는 해당 행사 자체에 문제가 있다. 에스파의 소속사는 SM 엔터테인먼트다. 이수만 총괄프로듀서가 실질적 오너인 회사다. 그리고 경복고는 이수만 총괄프로듀서의 모교다.  동문에 SM 오너 등과 같은 권력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여성 가수 공연이 선물 혹은 특혜처럼 제공될 때, 그 공연을 관람하는 남학생들은 이를 특권으로 인식하게 되며 해당 가수들을 하나의 개인으로 보지 않게 된다. 즉 공연의 주체는 사라지고 그저 권력을 가진 동문이 하사해주는 하나의 상품으로 대상화되며, 이 과정에서 왜곡된 성 관념과 여성의 성적 대상화, 그리고 여성 혐오적 시각이 재생산되는 것이다. 과연 이러한 현장이 공교육으로서 아이들에게 어떠한 교육적 효과를 가져다주며, 무슨 의미를 가진다는 말인가. 사진출처 - 세계일보  이는 올해 초 ‘진명여고 위문편지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 사회는 언제까지 여성들이 인간이 아닌 상품으로 대상화되는 것을 지켜만 봐야 하는가. 반복되는 사건들에서 여성은 그저 남성에게 기쁨과 즐거움, 응원을 주는 보조적인 존재로서 추락해 버림과 동시에 전통적인 성 역할을 재생산하는 대상으로 전락할 뿐이다.  남성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여성들, 그리고 쉽게 여성들을 대상화하는 남성 카르텔, 기분이 나쁜 남성과 실질적인 공포를 느끼는 여성. 경복고 사태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계속해서 반복하여 발생하는 문제들의 집약체이다. 이제는 무엇이 문제인지 직시하여야 한다.  ‘명문’ 경복고가 동창회 주최의 기념식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7년 전 동문 체육대회 협찬 품목 현수막에 품목명으로 ‘레드벨벳’이라고 기재한 전적과 이번 사건이 크게 다르다고 할 수 있는가. 그들만의 카르텔을 통해 경복고는 남성중심적, 가부장적인 가치관 확산에 기여하지 않는다고 발뺌할 수 있을 것인가. 학연과 특권의식으로 얼룩진 남성 카르텔에서 피해를 보는 자는 오롯이 여성이다.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명문고등학교’라면, 그 명문은 틀렸다.  경복고는 본교의 공고한 권력 카르텔로부터 발생한 가부장적인 가치관 생산과 왜곡된 성 인지 감수성 확산 사실에 대하여 제대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또한 더 이상 가해자 개인의 일탈로 꼬리 자를 생각 말고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여야 한다. 묻어두고 회피할수록 우리 사회의 곪아터진 현실은 계속해서 이렇게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될 것이다. 이제는 현실을 직시하고 무엇이 올바른 교육의 방향성인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2022-05-31 | hrights | 조회: 302 | 추천: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