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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MZ 오피스」가 말하지 않은 것(김태민)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3-01-31 09:36
조회
434

김태민 / 회원 칼럼니스트


 

유튜브에 어느샌가 MZ 신입사원의 직장 생활을 풍자하는 콘텐츠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이 영상들은 사무직 종사자들의 세대 충돌을 다룬다고 하면서 MZ 신입사원들의 민폐 행위를 열거하기 시작한다. 영상 속의 MZ 신입사원들은 업무 시간 중에 유튜브 라이브 방송을 하거나 에어팟을 끼고 음악을 듣는 것으로 그려진다. 어떤 이는 업무 공간에서 사적인 통화를 일삼더니 그다음 날 자의적으로 1시간 일찍 출근해서 1시간 일찍 퇴근하려 한다. 제목도 비난의 표적을 명확히 한다. “0x년생 MZ 신입, 이것도 제가 해야 하나요?”, “저 깨우지 마세요. MZ에 당하는 직장 상사” 등등. 나르시시즘적 기행을 벌이고도 의기양양한 MZ 신입사원을 재현하는 데 성공한 콘텐츠들은 곧이어 추천 알고리즘을 통해 MZ 사원을 채용하지 않는 이유를 열거하는 노골적인 콘텐츠로 이어진다.



출처 - 쿠팡플레이 MZ오피스


MZ 신입사원의 좌충우돌로 세대 갈등의 리얼리즘을 제시하고자 하는 웹 드라마가 특별한 논쟁과 마찰 없이 인기를 얻는 이유는 그것이 다소 짓궂지만 ‘쿨’한 자기 패러디로 소비되기 때문일 것이다. 조직의 논리를 체득하지 못한 어색한 자신의 과거 모습을 반영하는 퍼포먼스는 자학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킬 만하다. 하지만 MZ 세대의 특징을 남김없이 묘사하겠다고 자부하는 미디어 이미지에 실눈을 뜨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MZ 신입사원을 “맑은 눈의 광인”이라든가 “머리가 꽃밭인 애”로 묘사하는 어느 유명한 MZ 세대 풍자물에서 드러나듯이 이들에 관한 미디어 이미지는 조직 상급자의 즉자적인 응시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MZ 세대 풍자물의 서사적 코드는 노동시장과 일터에서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 이들을 잔혹하게 조롱하는 냉소적인 아이러니로 작동하고 있고 영상의 관람자로 하여금 그 냉소의 제스처에 적극 참여하도록 유도한다.


 

소셜 미디어와 OTT 플랫폼에서 쏟아지고 있는 이미지들은 분명 현실세계를 모사하는 사물로 한정되기를 거부한다. 유튜브 콘텐츠의 섬네일을 통해 시청할 영상을 선택하고 ‘좋아요’를 누르며 댓글란에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는 행위는 모두 이미지들이 제공하는 상상적 세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라는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이미지는 수동적인 관람의 객체를 넘어 현실을 적극적으로 규정하는 주체가 되어버린다. MZ 세대를 풍자하는 미디어 이미지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청년 노동자를 ‘리얼’하게 보고한다는 ‘본격’ MZ 몰카, 콩트, 웹 드라마 또는 밈 이미지는 단순히 매일같이 이루어지는 노동의 현장을 날 것 그대로 기술하는 대신 일터에서 벌어지는 갈등 상황과 내적 모순에 상상적인 관계를 부여하는 데 여념이 없다. 상상적인 서술 속에서 MZ 세대를 “발암인자”와 다를 바 없이 응시하는 그 ‘눈’은 단연 사업주 또는 조직 상급자의 것이고 이미지에 접속한 관람객은 이미지가 제시한 대로 현실을 해석하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가장 마뜩잖은 점은 냉소적인 조롱의 코드가 조직 내의 권력자를 향하지 않고 최하위 노동자를 겨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MZ 세대를 둘러싼 이미지 체계가 이토록 강력하다고 한들 그것이 언제나 매끈한 모습의 역사를 가진 것은 아니다. MZ 세대의 실체에 다가갈수록 어떤 사회적 효과를 겨냥하고 있는 정치적 인장만 선명해질 뿐 청년층에 대한 조화롭고 객관적인 이미지를 구성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예컨대 지난 대선에서 공정성의 사도로 묘사된 ‘이대남’과 개혁의 불꽃을 수호하는 투사로 여겨진 ‘개딸’의 대립적 이미지는 명확한 정치적 효과를 거두어낸 편이었다. 하지만 2030 남성들의 국정수행 지지율이 수직 하강하고 ‘개딸’이라고 불리는 이들의 실체가 좀처럼 잡히지 않는 지금 그와 같은 이미지의 체계가 여전히 청년층을 온전히 대변한다고 볼 수 없다. ‘88만원 세대’, ‘N포 세대’와 같이 취약한 청년 세대의 이미지나 하 수상한 시절 ‘안녕들 하십니까’라 물으며 일말의 연대의 가능성을 건져 올리려는 청년의 이미지를 거쳐 ‘일베’라는 반문화적 종족이 돌연 튀어나왔을 때 청년 세대를 온전히 재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토록 분열된 청년 세대의 이미지로부터 식별되는 것이라곤 정치적 효과의 흔적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대론의 유혹을 더욱 경계하고 그것이 지닌 정치적 효과를 언제나 정밀하게 측정해야 한다. MZ 세대를 신화화하거나 조롱하는 일체의 시도는 정치적 효과를 노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MZ 세대를 겨냥한 가학적 코미디가 악의 없는 폭소를 유도한다고들 하지만 그 끝에 의뭉스럽게 남아있는 냉소적 아이러니는 젊은 노동자를 향한 혐오를 내장하고 있다. 사실 그렇지 않나. 누군가를 불쾌하게 만들려 작정한 이들은 종종 모욕을 줄 의도는 없다고 주장하지만 당혹스럽고 혐오스러운 이야기를 기어이 들이밀곤 한다. 문제는 어느 순간부터 진심과 농담이 구별되지 않기 시작하고 바이럴한 효과만 남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MZ 사원에 관한 출처 불명의 악의적인 사례로 MZ 세대의 습속을 운운하는 행위들의 정치적 효과를 경계해야 한다. 이즈음 됐으면 그 짓궂은 ‘농담’들이 화석화된 조직 문화를 탈피하고자 하는 청년 노동자들이 자율적인 일터 문화를 조직할 가능성을 차단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