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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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성은(서울신문 기자), 김태형(프리랜서 방송작가),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박용석(출판업),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춘천별빛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이동화(아디 사무국장),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대선 하루 전입니다. 간절히 바라던 꿈이 현실이 되길 기대합니다. 새로운 역사가 만들어지길 바랍니다. 내일 대선 결과는 사실 지난해 12월 3일 결정됐다고 생각합니다. 5개월의 길고 어두운 터널... 좌절과 고통도 있었지만, 시민의 바람은 빛이 되었고 이제야 진짜 대한민국의 문을 열 순간 앞에 와 있습니다. 내일입니다. 환호 속에 대한민국이 들썩이길 바랍니다. 모두가 일상으로 돌아가 평온을 되찾을 수 있길 바랍니다. 하지만 아직은 불안합니다. 거리에 붙은 부정투표 주장 현수막, 내란에 침묵하는 후보에게 한 표를 달라는 운동원, 사전투표를 부정투표로 만들기 위해 선거법 위반까지 하는 이들, 가짜 뉴스를 공유하며 진실을 가리려 하는 사람들까지... 답답합니다. 그분들이 후보자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으면 합니다. "어떤 인생을 살고 있나요?"라고. 인생은 지문 같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절대 지워지지도,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미래도 보입니다. 대선 후보자들이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찬찬히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대한민국의 위기 때 어떤 선택을 했는지 찾아보시길 바랍니다. 그 선택들이 개인의 영달을 위한 것이었는지, 국민을 위한 것이었는지 생각해 보길 바랍니다. 우린 열심히 살았습니다.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 이웃에 해가 되는 선택을 하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잘못된 선택을 하기도 하지만 반성했고 적어도 거짓말을 하거나 남의 탓을 하진 않았습니다. 여유 없는 삶이지만 작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거리로 나섰습니다. 그런데 후보자들은 어떤가요? 나와 다르지 않은, 응원하고 싶은 후보자도 있고 실망스러운 과거를 보여주는 후보자도 있습니다. 말과 행동이 달라 국민을 불안하게 하는 후보자도 있습니다. 갈라치기로 국민을 분열시키는 후보자도 있습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지난 인생에 책임을 지지 못하는 정치인은 과감히 잘라내야 합니다. 그들에게 투표하는 것은 나를 부정하는 일입니다. 어떤 인생을 살고 싶으신가요? 후보자들이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지 보십시오. 누구에게 투표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살고 싶은 인생이 될 수도, 살고 싶지 않은 인생이 될 수도 있습니다. 투표가 우리의 미래입니다.
2025-06-02 | hrights | 조회: 6 | 추천: 1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벌써 2025년 5월 말이다. 요즘 내게 생긴 새로운 꿈이 있다. 사회운동가로 살다 보니 대선 이후 사회 대개혁을 꿈꾸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백만 유튜버가 되고 싶은 꿈을 올해 새로 추가했다. 순전히 개인적인 소망이다. 그동안 나는 개인적인 욕망과 꿈을 뒤로 미루고 살았다. 지난해 말 수십만 부가 팔린 『퓨쳐 셀프』라는 책을 선물 받아 흥미롭게 읽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원영이라는 내 존재의 의미를 한 번 곱씹어보면서 나의 미래를 생각했다. 책 내용 중에 미스터 비스트(MrBeast)라는 유튜버 이야기가 나왔다. 13살 때부터 유튜브를 시작한 사람이 자신의 미래를 엄청나게 설정하고 그 꿈을 이뤄가는 아주 전설적인 성공담이었다. 지금은 수억 명의 구독자를 확보하고 있단다. 문득 나도 그런 걸 해볼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유튜브 계정도 있고 구독자가 30여 명밖에 안 되었지만, 미래를 그렇게 설정해 보았다.     미스터 비스트 유튜브 채널 갈무리(@MrBeast)     어떻게 하면 백만 유튜버가 될 수 있을까? 우선 사진과 영상을 계속 찍어서 짧은 동영상을 유튜브에 자주 올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수십 명도 안 되던 내 영상 조회수가 매우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물론 계엄과 탄핵정국이 도움이 되었다. 탄핵, 사회 대개혁 시민 대행진에 참석할 때마다 영상을 열심히 찍었다. 그리고 비슷한 내용이지만 영상을 올렸더니 어떤 알고리즘에 올라탔는지 조회수가 1천 회를 훌쩍 넘어서는 게 아닌가? 별 특별한 내용도 없는데, 기분이 좋았다. 구독자 수도 서서히 증가했다. 요즘에는 동네에서 산책하다 찍은 영상, 식당에서 찍은 영상도 유튜브에 올리고 있다. 사람들 관심이 그런 쪽에 많은 것일까? 3천, 4천 회 조회수도 생겼다. 엄청 짜릿했다. 방송인, 예능인들이 이런 맛을 즐기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짧으면 10초 길어도 60초가 안 되는 영상을 사람들이 많이 보는 것을 보면 영상이라는 것이 사람들에게 많은 흥미를 붙잡는 매개체인 건 분명하다. 현대인이라면 남녀노소 유튜브에 중독 안 된 사람이 별로 없으니. 아직 시작에 불과하다. 5년 이내에 백만 유튜버가 되려면 내용을 기발하게 고민해야 한다. 사람들이 좋아할 내용으로. 엊그제 한강에서 헤엄치는 거북이 영상을 올렸더니 두 명의 구독자가 늘었다. 거북아, 고맙다! 종종 시사적인 내용도 올린다. 물론 짧은 영상이니 느낌을 전달하는 수준이다. 세금 낭비 오세훈의 한강리버버스에 반대, GMO 감자 수입승인 반대, 5.18 광주역사 기행, 시민 권력 주민 선언 캠페인 영상 등등. 유튜브에 영상 올리는 것을 하면서 내게 생긴 뚜렷한 변화는 어디를 가든 예리한 시선으로 스마트폰을 활용해 짧은 동영상 촬영을 습관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초짜 유튜버와 사회 대개혁의 관계 목표를 뚜렷하게 잡았으니 되든 안 되든 해볼 예정이다. 가능하면 나의 유튜브 작업이 내가 하는 시민운동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특히, 대선 이후 촛불 시민들이 바라는 사회 대개혁에 작게라도 이바지하고 싶다. 다종다양한 시민단체의 활동가들이 영상을 만들고 홍보물을 제작하는 작업처럼 멋진 의미를 부여해 본다. 올해 초부터 용산시민연대에 영상 만들기 공부 모임에 참여하면서 아주 초보적인 영상 제작을 배웠다. 연습 삼아 어떤 행사를 마치고 나면 짧은 동영상을 만들어 공유하고 있다. 시간이 많이 소요되지 않지만, 함께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이런 걸, 언제 만들었냐?”면서 깜짝 놀란다. 작은 단체 활동을 하는 50대 중반의 비전문가가 백만 유튜버가 되려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과연 허황된 것일까? 그러든 말든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주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그러다 보면 시민단체 활동에 나의 유튜브 활동이 좋은 기여를 할 것이라 믿는다. 더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느끼도록 하는 나의 능력이 키워진다면 우리가 사는 동네, 지역을 넘어 우리 사회의 대전환으로 가는 길에도 더 쓸모가 있을 것이다.   꿈꾸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던데 현재 내 유튜브의 구독자 수는 182명, 동영상은 224개, 전체 조회수는 16만 명이다. 갑자기 거창한 이야기를 하자면 인간은 꿈을 꾸면서 투쟁하면서 역사를 변화시켜 왔다. 이야기를 만들고 표현하고 비판하면서 사회를 설계해 왔다. 어떨 때는 매우 서서히, 어떨 때는 급작스럽게 변화와 퇴보를 반복하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내가 인권연대라는 소중한 공간을 만나고 용산시민연대라는 풀뿌리 시민단체에 몸담고 사는 것이 어쩌면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형성된 관계의 힘 때문이라고 본다. 내란과 탄핵, 조기 대선으로 이어지는 반년이 넘는 시간 우리는 참 숨이 가쁘게 살아왔다.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게 역사이고 우리의 삶이다. 하지만 꿈은 끊어졌다가는 다시 이어지고 우리의 삶도 계속 연결에 연결을 더한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다들 어떤 꿈을 꾸며 사는지 갑자기 궁금해진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이원영TV “구독 좋아요는 연대입니다.” 작은 연대가 쌓여 큰 변화를 만들 줄 믿는다.        
2025-05-27 | hrights | 조회: 57 | 추천: 3
윤요왕 / 춘천별빛 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엄중한 이 시국에 ‘읍·면자치권 확보를 위한 풀뿌리 공동행동’ 연수팀에 끼여 일본 연수를 다녀왔다. 일본 전역에서 모인 ‘제29회 작지만 빛나는 지자체 포럼’ 참가가 목적이었다. 일본은 우리의 읍면에 해당하는 정·촌(町村)이 자치단체 지위를 부여받고 있으며, 928개의 작은 지방자치단체가 있다. 이 포럼은 일본정부의 시·정촌 합병에 반대하며 소규모 정촌 지자체의 자립과 자치를 발전시킬 목적으로 2003년 2월에 구성하여 지방분권과 지방창생 시대를 추구하는 모임으로 시작했다. 이런 작은 지자체 단위에서 농촌재생 관련하여 농산어촌유학, 돌봄복지, 주민자치, 작은거점, 농촌RMO, 관계인구, 고향사랑기부금 등의 혁신사례가 나타나고 주목받고 있다. 전 ‘마을자치지원센터’에 있을 때 주민자치 교육을 다니면서 늘 하는 말이 있었다. ‘우리마을의 문제를 국가가 또, 시군이 해결해 줄 수 없어요. 우리마을의 문제는 우리가 잘 알고 해결해야 하는게 맞잖아요? 그게 주민자치의 이유입니다’. 너무나도 중앙집권화 되어 있는 우리나라의 행정구조상 지방자치, 지방분권은 어쩌면 묘연한 꿈에 지나지 않을 일인지 모른다. 읍면장을 주민이 직접 뽑고 읍면단위 의회가 있었던 우리의 주민자치를 1961년 군사쿠데타 이후 폐지했던 아픈 과거가 있다. 행정의 하부조직으로서 읍·면은 아무런 권한도 없이 사그러져 가는 현실을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현실이 개탄스럽다. 갑작스럽게 치러지는 이번 대선의 각 정당 정책에 이런 지방분권, 지방자치, 주민자치에 대한 공약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국가가 정부가 무얼 해줘야 한다는 정책들만 무성한 현실이 불편하다. 물론 국가와 정부의 방향과 역할이 중요하고 크다고 하는 점은 당연하고 무시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다. 그러나, 반대로 모든 권력이 중앙집권화 되어 있는 지금 구조에서 계엄과 같은 반민주적인 국가폭력의 두려움도 함께 지니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지난 20여 년간 강원도 농촌 작은 마을에서 마을과 주민들의 삶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 왔다. 그러나, 여전히 풀리지 않는 과제, 무언가 막혀있어 우리의 앞길을 힘들게 하고 있음에 답답함과 갈증을 느낀다. 마을에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정부부처나 시군의 현명한 판결만 바라봐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정부의 정책사업예산도 마을의 현실에 맞지않는데 보조금으로 받아 억지스럽게 진행하고 감당 못 할 때도 많다. 수없이 다양하고 차이가 존재하는 마을마다의 상황에 맞게 적절히 민관이 협의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사업을 진행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읍·면자치, 마을자치가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 이번에 방문한 작은마을 아치무라(阿智村) 전 촌장님(84세, 4선)의 말씀이 마음속에 깊이 와 닿는다. “지금 우리들이 추구하는 것은 통제적인 동원형의 거점이 아니라 주민들이 자유롭게 공생산하는 ‘작은 자치’에 있다. 지역에 작은 자치가 충분히 성장하면 ‘주민자치의 지역’이 등장한다.” “사람은 자기결정의 폭이나 양이 클수록 행복함을 느끼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존경받을수록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국민주권은 주민주권으로 시작해야 한다. 작은자치가 실체적 민주주의의 토대가 될 것이다.
2025-05-20 | hrights | 조회: 295 | 추천: 4
김형수 /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활동가 And say thank you? 우리는 고마워할 줄 모르는 존재인가? 올해 미국 백악관을 방문한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 미국 부통령이 자국의 전쟁 원조에 대해 왜 감사하다는 말을 하지 않느냐 윽박지르는 장면이 전 세계에 생중계 되었다. 맥락이 무엇이든 다른 나라의 침략을 받은 한 나라의 대표에게 옷도 제대로 챙겨 입고 오지 않았다고 우크라이나 대통령 한 명을 미국 정치인 여러 명이 둘러싸며 결국에는 문밖으로 내쫓았다. 앞으로 한동안 미국 사회에서 자신들에게 충성하지 않거나 순종하지 않는 ‘사회적 약자’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똑똑히, 적나라하게 보여준 모습이었다. 국가 권력이 얼마나 위선적이며 손쉽게 다를 수 있는지도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한편으로 우리가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일방적으로 근대화 되기 시작한 이후부터 오늘날까지 장애인 당사자 어느 누구도 피해가지 못하고 한 번 이상은 누구나 들어보았을 한마디, 한 장면이었다. 우리들 누구라도 스스로 그리 말하고 당연하게 여기고 있을 지경이었다. 내가 동네 미술학원을 들어 갈 때도, 초등학교를 입학할 때도,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에도 심지어 대학을 합격하고 본 대학교 학생회관 중앙도서관 앞에 붙은 대자보를 통해서도 목격할 수 있었다. “어찌 장애인 따위가 감히 감사할 줄 모르고 고맙다는 말도 붙이지 아니하고 너를 우리와 함께할 수 있도록 받아주고 도와주었는데 대들거나 따지고 드는 것이냐” 결국 미술학원 원장실 한 귀퉁이에서 다른 아이들과는 따로 그림을 그리고, 초등학교 소풍도 빈번하게 빠져야 했으며, 중고등학교 체육 수업 한번 제대로 통합 체육 수업으로 참여하지 못했으며, 학문의 전당 캠퍼스에는 오줌통을 들고 다니며 강의를 들어야 했건만, 어느 누군가는 이 말을 꼭 내 귓가에 들리게 하고야 만다. “And say thank you?” 우리를 소록도에 보내서 생체실험 을 하지 않고 강제 불임으로 낙태시키지 않았으니 고마워하라는 것인가? 우리에게 취학 통지서라도 보내고 외딴 특수학교에서 전기 충격기를 써가며 교육하지 않았으니 마음속 깊이 고마워하라는 뜻인가? 대학의 권위를 떨어뜨리고 겉보기가 좋지 않다며 입학 원서를 반려하지 아니하고 별도의 정원으로 캠퍼스 문턱이라도 넘게 해주었으니 그저 다행으로 생각하라는 뜻인가? 그래도 우리 사회가 장애인을 헌법적 권한과 지위를 가진 사람으로 존중하려고, 아니 존중해 주는 척이라도 하려고 많은 변화와 움직임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 유독 크게 바뀌지 않는 곳이 있다면 그게 바로 학교, 교육현장, 교육 관료들이다. 헌법이 만들고 50년 가까이 지난 90년대 들어서고 나서야 교육계는 장애인 학생을 국가가 책임져야 하는 의무교육대상자로 겨우 인정하였고 그 사이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시행되고 학교 현장에서 장애인 인권교육이 의무화되면서 국가 인권위원회가 해마다 장애인 학생의 인권침해와 차별사례를 두세 건씩 권고 한다. 그러나 2025년 올해도 장애인 학생이 왜 우리학교에 들어오려고 하느냐라는 발언을 공개적으로 하는 학교장이 여전히 당당하게 그 어떠한 비난과 처벌도 받지 않고 학교 현장에 존재한다. 아니 이런 제국주의 우생학적인 바리케이트는 오히려 위선적으로 교묘해지고 더 높아졌다. 최근 방과 후 승마 교실을 신청한 장애인 학생에게 다른 학생들에게는 요구하지 않는 추가비용을 너무나도 당당하게 요구한 학교 사례처럼, 반세기가 지난 이 시점에서도 장애인 학생 학부모에게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체험학습 동행이나 등굣길 동행을 강요한다. 그러면서 똑같은 대사를 마치 음원 재생하듯 무한 반복한다. 장애인 학생인 주제에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한다고 비장애인 학생들에 대한 역차별이라고 말하며 같은 공간에 존재하게 허가해 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라고, 감사한 줄 알라고 요구한다. 어버이날, 다음 날 개교 130년이 된 사립학교에 갔다. 부산 동래여고였다. 우리 어머니 이순희 활동가가 1969년 69회 졸업한 학교였다. 내 인생 처음으로 가출이 아닌 교실 탈출로 큰길 너머 여고 연못까지 도달했다가 새하얀 교복을 입은 누나들에게 손이 잡혀 다시 교실로 들여온 기억이 있는, 눈부신 햇살이 참으로 아름다운 학교였다. 마침 이 학교 교감이 초등학교 동문이었고 학내 동아리 활동 인권 강사로 나를 추천하였다. 내가 다닌 동래 초등학교는 사립으로, 당시에 학년별로 학생이 200명이 넘지 않았다. 달랑 3반으로 2년마다 반이 바뀌어서 같은 반을 하지 않아도 모두가 서로 얼굴을 알고 지낼 정도였다. 선생님들도 자기 반 아이들이 아니더라도 이름까지 다 알 정도였다. 특히 나는 모든 사람들이 나를 기억했다. 심지어 운동회, 소풍 한번 제대로 참여하지 않은 나는 누군지도 모르고 복도에서 조차 마주친 기억이 없는 친구들도 ‘목발’ 한 마디면 내 이름까지 정확하게 기억해 냈다. 늘 방과 후에 학교 입구에서 어머니를 기다렸기 때문에 간간이 이어진 만남에서는 죄다 어머니의 안부를 먼저 물어볼 정도였다. 어찌 부산까지 가나 하는데 평소 모임을 이끌던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자기가 직접 부산까지 운전해 주겠다 했다. 대학 졸업 때 유일하게 온 벗이기도 했다. 부산으로 자동차로 가는 김에 부산에서의 초등학교 동문들의 모임도 하겠다 했다. 그동안 뵙지 못했던 은사님들도 초대했다. 이리 친구가 로드 매니저 역할을 해주니 경부선 계룡대 군부대에서 일하는 동창도 만날 수 있었다. 강의 전에 미리 가서 장애인 접근성 동선도 확인할 수 있었다. 해운대 앞바다에 있는 처음으로 만난 초등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 집에도 직접 선물들을 싸들고 방문할 수 있었다. 나를 보자 마자 그때의 우리들처럼 반가움에 방방 뛰시기까지 했다. 장장 40여 년전 그때를 회상하시면서 나를 처음 봤을 때 우리 부모님에게 나의 장애에 대하여 아무것도 물어볼 수 없었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연신 나의 손을 부여잡고 나에게 더 잘해 줄 걸 잘해 줄 걸 하셨다. 사실 1학년 담임 선생님은 생애 처음으로 장애인으로 나를 만나셨다고 고백했지만 나를 거부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다른 선생님들과 학부모들이 나에 대해 뭐라 할 때 더 적극적으로 나를 대해 주셨다. 1학년 담임도 모자라 3학년 담임을 다시 자처하셨고 퇴근 시간 지나서까지 나를 옆에 앉히고 띄어쓰기를 가르치셨다. 내가 복도를 나설 때마다 화장실을 갈 때마다 불안했지만 애써 따라오지 않고 먼 발치서 기다리기만 하셨다. 손바닥 맞기조차 다른 아이들과 같이 존중해 준다며 나의 경직으로 꼽은 손가락을 애써 펴서 때려주신 선생님이었다. 그러면 나는 신이 났다. 나는 원래 친구들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다. 초등학교 또래문화는 더더욱 부족했다. 그렇게 40년을 지나다 보니 내 졸업식에 꽃다발을 사들고 오는 일도 생겼고 부산까지 손수 운전해 주는 친구도 생겼고 나만을 위한 귀향 동창회에 은사님까지 다시 뵙는 일도 생겼다. 장애인이냐 비장애인이냐가 아니라 그 어떤 존재이든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게 고맙고 소중한 인구 소멸의 시대에도 장애인 학생은 여전히 자기 동네 학교에서 “당신은 왜 굳이 우리학교에 오려고 하는가” 는 질문을 공개적으로 받아야 하는가? 장애로 등록되지 않는 학생은 아무리 교육하기 어려워도 아무리 행동 제어가 어려워도 그런 질문과 비난을 공개적으로 받지 아니한다. 디지털 수업 교재를 교과서로 쓰고 인공지능 프로그램을 코딩하며 학급당 인원수가 20명도 채 밑도는 교실이 속출하는 이 시대에도 유독 장애인 학생에게 만큼은 가혹하리 만큼 일본 제국주의 강점기 시대의 풍경과 질문을 여전히 학교 현장에서 보여 주고 있다. 문제는 장애인 학생에게 수능과 평가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또는 장애인 학생의 부모에게 무슨 음식을 먹어서 장애인 학생을 임신했느냐는 차별 혐오 발언을 하는 교육 사회 구성원을 교육 공동체는 제대로 징계하거나 처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OECD 어느 국가든 장애인 학생에 대한 차별은 빈번히 일어나고 만연한 것이 사실이지만 적어도 선진국이라고 불리우는 국가들은 일정 정도 그런 혐오와 차별의식을 공개적으로 발언하는 것에 대해서는 기본적인 수치심과 교양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 상식인데 UN장애인 협약 참여 국가이며 인권이사국이었던 우리나라의 국가 교육 공무원의 수준이 장애인 학생은 특수학교나 가야 하지 않느냐라고 교무회의 시간에 발언할 수 있는지 아연실색할 뿐이다. 더 심각한 것은 그런 장애인 학생에 대한 혐오나 차별에 대하여 침묵하거나 동조하는 조직 문화이다. 심한 장애를 가진 특수학교로 보내 버리면 그 학교의 동료 교사들은 괜찮은가? 장애인 학생이 증가하니 지역의 다른 학교 두어 개를 폐교하고 특수학교 한 개에다가 교육 예산을 몰아 주자고 하면 과연 찬성할 것인가? 서울시교육청이 작년 5∼7월 서울의 특수교육 대상 학생 총 2천405명을 대상으로 2023년 2학기와 2024년 1학기의 학교생활 내 인권침해 경험을 조사해 26일 공개한 결과 장애인학생 10명 중 1명 이상이 2023년 2학기와 2024년 1학기 중 학교에서 따돌림을 경험했다는 설문조사 결과가 나왔다. 특수교육 대상 학생은 따돌림 이외에도 언어폭력(8.6%), 신체폭력(5.7%), 강요·괴롭힘(3.3%), 사이버폭력(2.2%), 금품갈취(1.8%), 성폭력(1.2%) 등의 학교폭력을 경험했다고 응답했다. 자신을 괴롭힌 사람에게 직접 멈추라고 말한 학생은 25.5%였고,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은 경우도 14.4%에 달했다. 본인이 직접 말하기 전까지,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한 장애인 학생들과 함께 그런 혐오와 차별을 막고 장애인 학생들을 편들어 주는 교육 공동체 구성원은 아무도 없었던 것인가? 근대교육이 시작되고 지난 세기 동안 우리나라 교육 당국이나 수장들은 단 한 번도 공식적으로 공개적으로 장애인 학생의 교육차별이나 배제에 대해, 그 위헌적 번죄 사실에 대해 진정으로 사과하거나 반성한 적이 없다. 지난 서이초 사건 등에서 교사들의 억울한 죽음과 과도한 업무에 대하여 얼마나 많은 교사들이 울분을 토하며 거리로 집결했던가? 그런데 얼마 전 인천의 특수교사의 죽음에 대해서 왜 많은 일반 교사들은 함께 분노하지 아니한가? 그게 학부모의 과도한 민원 때문이 아니라 교육청과 관리자의 지원 미비로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상급자의 눈치를 보는 것인가? 여전히 진상조사는 오리무중이고 지난 2월 특수교육 여건 개선과 관련하여 인천시교육청은 크게 홍보를 하였으나 모든 지원 인력은 책임성을 묻기 어려운 자원 활동으로 돌리고 있어 장애인 학생과 그 부모들은 또다시 애꿎은 장애인 학생을 맡아준 유급 자원 활동가에게 감사해야 하고 불법과 탈법으로 불러드린 지역 사회의 활동지원사 선생님의 근거없는 통합 교육지원을 고마워해야 한다. 국민과 시민과 개인을 위해 국가가 존재하고 운영되고 유지 되는 것이 입헌 민주주의 법치 국가의 원칙일 텐데 우리나라는 여전히 장애인 학생에게도 국가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게 하고 장애인 학생의 전문적인 국가 공무원의 교육 노동을 언제까지 헌신이나 사랑 따위로 포장한다면 우리 교육계의 장애인 학생에 대한 국가의 차별 폭력과 방임은 쉬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국가주의이고 파시즘이며 전체주의인 것이다. 한때 우리사회에서 뜨거운 이슈였던 특수교사에 의한 장애인 학생에 대한 학대 사건의 2심 판결이 나왔다. 비동의 녹음의 증거 능력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1심 벌금 200만원 선고 유예가 2심에서 무죄로 선고되었다. 참교육을 말하던 전교조는 이 판결에 기쁜 논평을 냈고 해당 가해 교사는 법적 판결 있기 전에 경기도 모 특수교사로 현직에 복직했다. 아무도 그 녹음 파일에 든 녹음 내용에는 주목하지 않았다. 아무도 그 피해 학생과 그 가족들이 여전히 학교에 돌아오지 않았음을 일깨워주지 않았다. 아무도 그들을 다시 학교로 부르지 않았다. 온통 교육 당국과 언론과 유튜브가 만들어 낸 혐오 권력이 있을 뿐이었다. 아무도 자기 목소리를 가지지 못한 존재들에게는 귀기울지 않았다.
2025-05-15 | hrights | 조회: 117 | 추천: 4
정한별/사회복지사 지역사회에서 운영되는 다수의 사회복지 관련 기관들은 어린이날 즈음에 어린이날 기념 행사를 하곤 한다. 지역의 어린이날 기념 축제에 참여해서 행사를 하다 보니, 어린이날 혹은 어린이날 전의 주말은 우리 아이들이 아닌, 남의 아이들과 함께 웃고 이야기하며 노는 일이 잦았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기 전까지 이 일이 큰 문제가 아니었는데, 요즘에는 어떻게 하면 가족들에게도 미안하지 않고 일에도 무리가 없을지 고민하고 있다. 작년 어린이날 축제에는 비가 왔다. 축제가 예정되어 있던 날에 비 예보가 있었지만, 수십 년 동안 어린이날 당일, 같은 장소에서 축제를 진행했던 역사가 있으니 비가 오더라도 축제 일자를 변경할 수 없으며, 축제에 참여하는 기관들도 함께 해 달라는 주최 측의 요청이 있었다. 결국 비옷 속이 땀으로 젖은 것인지 비로 젖은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흠뻑 젖은 채로 아이들을 만났다. 많은 아이들을 만나서 어린이날을 축하했고, 축제를 진행했다. 축제를 치르고 난 뒤의 평가회의에는 내년 축제에 비 예보가 있다면 행사 일자를 바꾸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이 있었지만, 축제를 진행한 어른들도, 참여한 아이들도 모두 만족한 축제였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사회는 혼란스러웠지만 시간은 흘렀고 2025년의 어린이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이번 어린이날 축제 역시 비 예보가 있었다. 비 예보만이었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 텐데 올해는 주말과 어린이날, 부처님오신날, 대체공휴일이 연달아 있는 소위 황금연휴였다. 축제 기획회의에는 작년과 같이 축제 일자를 변경하자는 의견이 나왔고, 축제를 주최하는 단체에선 “이 축제는 어린이날에 이런 축제가 아니면 즐거운 추억을 갖기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 진행하는 것이다. 반드시 어린이날 당일에 같은 장소에서 축제를 해야 한다” 라고 설명했다. 충분히 공감 가는 설명이었지만 나는 물론, 함께 하는 동료들도 모두 가족과의 계획을 이미 정해두고 있었기에 나의 가족과 동료들을 설득할 힘이 부족했다. 결국 어린이날 축제는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어린이날을 한 주 앞둔 주말, 한 아이를 만났다. 오후 2시에 만난 아이는 밥을 먹지 못했다며 배가 고프다고 했다. 먹을 게 마땅 치 않아서 과자를 건넸다. 허겁지겁 먹는 아이의 점퍼는 많이 지저분했고 맨발에 신은 고무 샌들 역시 지저분했다. 아이가 사무실에 들어오자 사무실 안의 공기도 금세 달라졌다. 아빠와 단둘이 사는 아이는 집에서는 주로 컵밥을 먹는다고 했다. 한식류를 좋아하지만 집에서는 먹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집에는 밥솥도 없다고 했다. 아빠가 집에 오지 않는 날에는 조금 무섭긴 하지만 혼자서 잠을 잔다고 했다. 전화를 해도 받지 않는 아빠를 기다리다가 혼자 자고, 늦게 일어나면 학교에 가지 않는다고. 그러다 보니 한 달에 5번 정도 학교에 가지 않은 적도 있다고. 아이는 밥을 먹을 수 있고, 혼자가 아니어도 되는 학교와 지역아동센터가 집보다 좋다고 했다. 아빠와 함께 집에 있어도 서로 휴대전화만 보며 대화하지 않는다고 했다. 집에는 벌레가 많고, 주방에 쓰레기가 넘쳐나지만 특별히 불편한 점이 없다고 했다. 아이에게 물었다. “아빠에게 바라는 게 있어? 아빠가 어떻게 해 주면 좋겠어?” “없어요.” 아이는 여덟 살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만큼 너무 조용했고 너무 지쳐 보였다. 방임도 학대다. 아이를 방임하는 부모들은 대개 비슷한 변명을 한다. ‘바쁘고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아이를 돌보는 일을 소홀히 할 수도 있지 않나. 깨끗하지 못한 의복과 환경, 균형 잡힌 식사 제공도 어쩌다 보니 놓친 것이다. 일부러 밥을 주지 않은 것도 돌보지 않은 것도 아니고, 심지어 아이에게 욕을 하거나 때린 것도 아니다. 단지 사는게 팍팍해 아이를 돌볼 여유가 없었고 아이와 대화할 시간이 없었던 것뿐인데, 이게 어떻게 학대인가.’ 그 어떤 이유를 갖다 대도 방임도 학대가 맞다. 충분히 사랑을 받고 돌봄을 받아야 할 아이에게 관심과 사랑이 부족하다면 아이의 신체 정서 발달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이에, 방임도 다른 유형의 학대처럼 형사처벌까지 하는 것이다. 2023년 보건복지부의 아동학대 연차보고서(2024)에 따르면, 아동의 보호자가 아동을 방임하는 행위(아동복지법 제3조 제7호) 즉, 기본적인 의식주를 제공하지 않거나 불결한 환경에 아동을 방치하는 행위, 아동에게 필요한 의료처리를 하지 않거나 학교에 보내지 않는 행위, 아동을 보호하지 않고 버리는 행위는 전체 아동학대에 7.7%에 해당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수치상으로 보면, 방임이라는 학대가 많이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방임은 다른 유형의 학대와 함께 일어나는 특성이 있으며, 방임이라는 행위 역시 아동학대라는 점에서 다른 유형의 학대보다 그 피해가 덜 심각한 것은 아니다. 위 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 아동학대 사망 아동의 수는 42명이다. 이 사망사례의 아동학대 유형을 살펴보면, 신체학대 61.9%(26명), 방임 23.8%(10명)이며, 사망 사례 행위자의 유형은 부모가 85.7%, 그중 친부 38.1%, 친모 45.2%로 나타나고 있다. 사망 아동의 연령은 6세 이하 영유아가 61.4%로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심지어 1세 미만이 22.7%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3세 11.4%, 5세 11.4%, 8세 9.1%). 많은 아이들이 살고 있다. 풍족한 가정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는 아이들, 풍족하지는 않지만 화목한 가정에서 따뜻한 경험을 하는 아이들, 폭력적인 가정에서 살아남은 아이들, 검은 문 안에서 짧은 생을 마감하는 아이들. 올해도 어김없이 어린이날이 왔다. 어린이날은 단순히 아이들에게 선물을 하나 쥐어주고, 놀이동산에 데려가며 휴일을 즐기는 데에 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어른들이 평소에 어떻게 아이들을 존중했는지 돌아보며, 아이들을 더욱 사랑해야겠다고 다시 한번 다짐해야 하는 날이다. 백 년 전 소파 방정환이 어른들에게 요청한, 아이들을 내려다보지 말고 쳐다봐 달라는 말의 의미를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2025-05-07 | hrights | 조회: 174 | 추천: 7
이동화 / 사단법인 아디 사무국장 세계에서 가장 큰 난민촌이라 불리는 로힝야 난민캠프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방콕과 다카를 경유해 방글라데시 콕스바자르에 도착하는 데만 하루 반이 걸렸고, 그곳에서 난민캠프까지는 다시 차량으로 2~3시간을 더 이동해야 했다. 편도 2차선 도로 위에는 삼륜차, 자전거, 버스, 마차, 그리고 사람들이 한데 엉켜 있었고, 끊임없이 울리는 경적 소리 속에서 우리는 아슬아슬한 곡예 운전 끝에 캠프에 닿을 수 있었다. 철조망으로 둘러싼 이곳에는, 2017년 미얀마 군부의 학살을 피해 넘어온 75만 명의 로힝야 난민들, 그리고 1990년대 초부터 박해를 피해 온 초기 난민들, 최근 라카인 지역의 내전 속에서 다시 길을 떠난 이들까지,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35개 캠프에 나뉘어 살아가고 있었다. 방글라데시는 이들을 받아들였지만, 이동과 교육, 노동을 제한하는 강력한 통제 정책을 펴고 있다. 각각의 캠프는 방글라데시 정부의 관리 기구(CIC)와 로힝야 난민구호 및 귀환 위원회(RRRC)의 감독 아래 운영된다. 로힝야 캠프 14 모습 아디가 활동하는 캠프 14에 발을 들이자 가장 먼저 코를 찌르는 악취가 다가왔다. 대나무 가지를 엮어 만든 쉘터(임시 거주시설)에는 천막이 덧대어져 있었고, 지붕 역시 대나무와 천막으로 간신히 덮여 있었다. 창문도, 튼튼한 문도 없었다. 햇빛을 모은 태양광 패널로 최소한의 전기를 공급받지만, 비가 내리는 날이면 전기는 쉽게 끊겼다. 거주지 옆으로 생활하수가 그대로 흘렀고, 하천은 폐수와 쓰레기로 썩어가고 있었다. 오염된 물이 땅에 스며들어 다시 생활용수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떠올리니 마음이 무거웠다. 몬순(우기)이 오면, 범람한 오염수가 집 안까지 들이닥쳐 가재도구마저 썩어가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흙바닥이나 거칠게 다져진 시멘트 바닥 위에, 적게는 다섯 명, 많게는 열 명 이상이 한 공간을 나누어 살았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우리가 지나갈 때면 신기한 눈으로 다가와 짧은 영어로 말을 건넸다. 경계보다는 웃음이 먼저였다. 13~14㎢, 여의도의 네다섯 배 정도 되는 이 좁은 땅에 100만 명의 로힝야 난민이 살아간다. 인구밀도는 세계에서 가장 혼잡한 도시로 꼽히는 다카를 훌쩍 뛰어넘는다. 이들은 일할 자유도, 이동할 자유도 없이 8년째 외부의 구호에 의존하며 살아가고 있다. 사단법인 아디는 이곳에서 8년 동안 로힝야 여성들을 위한 심리사회적 지원 활동과 문해·수리교육, 직업교육 프로그램을 꾸준히 이어왔다. 글을 읽게 된 여성들, 바느질을 배워 소득을 만들기 시작한 사람들, 서로를 위로하고 다독이는 공동체의 모습 속에서 때로는 작은 변화가 눈에 보이기도 했다. 아디의 현지여성들의 공간인 샨티카나(평화의집)에서 직업 훈련을 받고 있는 로힝야 여성들 그러나 이곳에 머무는 동안, 나는 쉽사리 희망을 말할 수 없었다. 희망을 말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이 무너져 있었다. 나는 그들의 현실 앞에서 압도당했다. 여기는 로힝야 난민캠프이다. 살아야 하기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2025-04-29 | hrights | 조회: 353 | 추천: 13
김성은 / 서울신문 기자 “여러분, 자유롭게 들어오십시오. 하지만 먼저 다음과 같은 규칙을 숙지하십시오. 이곳은 누구나 모욕 없이 함께 모여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간입니다. 욕설을 하는 사람은 12펜스의 벌금을 내야 합니다. 다툼을 일으키는 사람은 속죄하기 위해 모든 손님에게 커피 한 잔씩을 대접해야 합니다. 시끄러운 논쟁은 철저히 삼가십시오. 무례한 언어로 국가의 문제를 경솔하게 논하지 마십시오.“ 18세기 영국 커피하우스의 벽면에는 ‘커피하우스의 규칙과 질서’가 크게 게시돼 있었다. 입장료 1페니만 내면 누구나 입장할 수 있었던 이곳은 단순히 커피를 마시는 사교의 공간이 아니었다. 귀족부터 평민까지 신분의 벽을 허물고 모여 시사, 혁명적 사상, 예술, 과학, 경제의 미래를 논의했다. 1714년 영국 런던에만 8000여 개의 커피하우스가 있었다. 이곳에서는 신문과 팸플릿이 돌며 최신 무역 정보와 과학, 정치, 경제 담론이 실시간으로 오갔다. 심지어 아이작 뉴턴과 같은 과학자들이 커피하우스에서 실험과 토론을 벌였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이 열린 토론의 장에서는 치열한 격론이 벌어질지언정, 품위와 절제 있는 대화를 지키는 게 기본 원칙이었다. 인신공격과 조롱은 용납되지 않았다. 서로의 생각을 경청하는 예의는 혁신의 씨앗을 틔웠다. 18세기 커피하우스에서 논의된 해상 무역, 금융, 과학 정보는 영국의 산업혁명과 민주주의 발전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커피하우스는 단순히 커피를 파는 공간이 아닌, 산업혁명과 금융·과학의 발전을 이끄는 사상적 엔진이 됐다. 지금, 이 커피하우스 규칙을 우리나라 정치권에 적용하면 어떨까? ‘무례함’이 특정 정당의 전유물은 아니지만, 최근 논란이 된 ‘키높이 구두’ 발언은 한 사례다. 국민의힘 대선 경선 토론회에서 홍준표 후보는 한동훈 후보에게 “키도 크신데 왜 키높이 구두를 신느냐”, “생머리인지, 보정속옷을 입었는지” 등 외모 관련 언급을 했다. 이에 한 후보 측은 홍 후보를 “눈썹 문신 1호 정치인”이라고 지칭하며 맞대응했다. 굳이 최근 사례가 아니더라도 우리 정치사는 이미 ‘커피하우스 규칙’에서 저 멀리 벗어난 지 오래다. 1998년에는 “김대중 대통령은 거짓말 하도 많이 해서 공업용 미싱으로 박아야 한다”는 발언이 정치권을 얼어붙게 했고, 2009년 대정부질문에서 한 의원은 이명박 전 대통령을 쥐에 비교해 논란을 일으켰다. 2012년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을 두고 여성을 비하하는 ‘그X’라는 욕설로 파문을 일으켰으며, 2020년 일본을 다녀온 노무현 전 대통령을 향한 “등신외교” 발언은 국회 파행을 가져왔다. 막말은 진보와 보수, 초선과 중진 가릴 것 없이 나타났다. 이런 품격 없는 언행은 국회 등 공적 토론장에서도 수없이 반복됐다. 지난해 국회에서는 의원 간 욕설, 고성, 인신공격이 빈번하게 발생해 회의가 파행되는 사례가 다수 보도됐다. “한국 국회에서는 오히려 욕설과 싸움이 칭찬받는 분위기”라는 지적마저 나왔다. 만약 이들이 18세기 커피하우스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같은 자리에 있던 손님들에게 커피값을 다 내야 하는 것은 물론, 같은 공간의 손님들 사이에서 대화 상대로 인정받지 못해 바깥으로 밀려났을 것이다. 300여 년이 흐른 지금 커피하우스 규칙을 재조명하는 이유는 품격 없는 정치가 혁신의 동력을 갉아먹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인공지능(AI)과 로봇 등 첨단기술은 그 자체로 사회에 변화를 가져오지만, 그 기술의 법·제도적 발판을 마련하고 발전 방향과 활용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정치적 리더십과 사회적 합의에 달려 있다. 게다가 지금의 기술 혁신은 18세기 산업혁명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다. 18세기에는 새로운 기술이 대중화되기까지 수십 년에서 수백 년이 걸렸지만, 21세기에는 AI와 같은 기술이 10년 이내에 전 세계적으로 확산한다고 한다. 이런 와중에 정치권의 막말과 조롱이 난무하면서 사회적 갈등만 증폭될 뿐, 제도 변화의 동력은 점점 약해지고 있다. 이미 AI·로봇 기술 도입에서 선도국에 비해 뒤처졌다는 평가를 받는 우리나라에서 정치권의 품격 없는 언행과 불필요한 정쟁이 사회적 관심을 집어삼키며 그나마 더딘 혁신의 발목을 더욱 단단히 붙잡는 족쇄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품격 없는 정치를 용인하는 것도 결국은 대중이다. 커피하우스의 주인이 손님을 내쫓듯, 우리도 품격 없는 정치를 거부할 때가 됐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기술만이 아니라, 정치인에게 이성적이고 품격 있는 언어와 태도를 요구하는 ‘커피하우스 정신’이다.
2025-04-23 | hrights | 조회: 279 | 추천: 11
신종환 / 공무원 윤석열의 탄핵이 가결되었다. 시종일관 못난 꼬라지만 보였고 앞으로 더 많은 모자라고 시시한 꼬라지만 보일 그와 그 부인은 주렁주렁 이어질 심판을 남기고 있고, 어물쩍 억울한 듯 정의로운 듯 그와 거리를 두는 듯 아닌 듯한 그의 일당들이 남아있다.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악역들은 나름의 품위 비스무리한 게 있는데 이제는 ‘전’이 붙은 정권의 놀라운 점은 ‘에이 설마 그렇게까지’라는 마음을 여러 차례 깨부순 것이다. 이제 그동안 유예되었던 미래를 다시 그리고 함께하며 또 정권의 그늘에서 고통받지만 가려져 있던 사람들을 생각해야 하지만 탄핵 이후 내 마음은 줄 서 기다리는 민원인같이 시간은 오래 걸리고 보람도 새로도 주지 않은 일상의 슬픔과 피곤과 분노만이 정리되지 않은 아기방의 용품들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시골의 폐해는 신영복 선생님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인간이라는 말을 ‘나’라는 주체는 나를 둘러싼 관계의 총합이라는데 나를 둘러싼 것들이 단순해서 덩달아 단순해지는데 이에 대한 저항보다는 일상을 하나하나 처리하고 거기에 대한 한탄만 하다 내가 지향하는 나는 마모 되는데, 쿠팡 같은 광역 배달서비스는 자본주의의 최첨병이라서 편리함만 내가 추구하는 요인이 되어 딱 니체에 나오는 종말인간 일보직전의 사람이 되기 십상이라는 것. 11시에 퇴근해서 글과 뉴스를 가까이 하는 것은 어렵지만, 업무시간 틈틈이 장바구니에 넣어둔 물건에서 옥석을 가리듯 신중히 주문할 것과 삭제할 것을 가리는데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즐겁고도 쉬운 일이다. 그리고 늘 마음속으로 되뇌인다. 수도권민들아...너네도 여기 오면 힘들거다...봐라... 3월과 4월은 특히 힘들다기보다는 내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삶에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는 기간이었다. 산불이 크게 나고 우리 지역도 2019년에 큰 산불이 난 사례가 있었기에 때문에 완전 도심지역의 녹지부서를 제외한 대부분 시도의 녹지 부서와 이를 위시한 지역의 공무원들은 3월~4월 산불 비상근무를 편성해서 평일 주말 없이 근무를 했다. 남의 업무일 때는 위로를 건네던 친구들이 이제는 내가 주말 7시에 와서 산불예방 현장근무자들에게 주기 위해 하나하나 포장하는 빵과 두유가 맛이 똑같다며 피자빵이나 초코소라빵은 왜 없냐는 말을 듣고 있노라면 사람이란 이렇게 쉽게 얄팍해질 수 있고 또 사람이란 왜 별것 아닌 일로 사회면에 나올 일들을 벌이는지 약간은 이해할 수 있었고, 비가 와서 산불근무가 일찍 끝나 기뻐하는 우리와는 달리 초과근무가 줄면 월 급여가 줄기에 기쁘지 않은 산불진화대원들의 아쉬움을 표하는 퇴근 무전을 듣고 순간 살짝 혈압이 오르는 스스로의 볼품없는 내면도 잘 볼 수 있었다. 강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올바른 선택을 누적해왔을 것이기에 이런 상황에서도 내면을 갈무리하고 생활을 정돈하고 내면의 강도를 늘리겠지만 약자에게 비겁한 비탈길을 미끄러지는 것은 언제나 매력적인 일이기에 나는 핑계만 바벨탑처럼 쌓아가며 생활을 무너뜨리고 소주병을 무너뜨리고 눈을 감고 귀를 닫았다. 그러다가 오늘처럼 글을 쓰거나 강제로 삶 전반을 뒤돌아보게 되어 있는 활동을 하면 긴급제동시설에 들어간 차량이 멈추듯 반강제로 삶의 난장도 멈추는 것이다. 난장이 된 생활과 마음을 둘러보면 사람과 타인, 공동체라는 개념은 있지만 전혀 내게 와서 어떤 감각을 주지는 않는다. 당연하지만 나라는 개념과 이를 지탱하는 생활의 경도가 확보되지 않으면 앎도 생명력을 잃는다. 삶의 생기가 없으면 타인의 생기도 이해할 수 없다. 결국 살아있다는 감각이 있어야 그걸 잘 키워서 틔우고 확장할 수 있는 건가 싶다. 그리고 늘 그렇듯, 나보다 생활에 억눌린 사람들은 어딘가에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반드시 이런 쓸모없는 모양새로 사는 게 스스로 뿐만이 아니라는 것에서 위안과 다시 일어설 마음을 주워갈 것이기에, 그리고 앞으로 남은 할 일은 산더미지만 좌우간 모자라고 추악했던 대통령을 ‘전직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성공한 것만을 사실이기에 과도기를 틈타 한가한 소리를 주워 섬겨본다. 스스로를 잘 챙겨서 마음속 ‘우리’의 생명력을 존속시키자.
2025-04-16 | hrights | 조회: 241 | 추천: 10
김태형 / 프리랜서 방송작가 3월 31일, 원고마감을 며칠을 앞둔 지금 이 순간까지도 아직 윤석열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일은 알 수 없습니다. 결론이 나면 무언가 얘기를 할 수 있다 생각했습니다. 3월 26일입니다. 헌법 재판소에서 전원일치로 인용을 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불안한 것도 사실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구속취소가 됐고 대통령실 경호처 김성훈 차장은 경찰이 4번이나 구속영장을 신청했지만 법원에서 기각했습니다. 일개 방송작가는 아무리 세상이 혼탁해도 순리대로 돌아가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법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세상은 법대로 돌아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지금의 모습을 보면서 불안이 큽니다. 잘못에 대한 합당한 처벌도 중요하지만 복귀했을 때 우리의 미래가 걱정입니다. 다시 계엄을 할까봐 걱정이 됩니다. 부조리가 정의를 이길까봐 걱정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어떻게 되는 걸까? 경찰이 국회를 봉쇄하고 특수부대가 국회 창문을 깨고 들어가는 걸 전 국민이 봤습니다. 국회의원을 포함한 정치인, 방송인들의 체포명단도 나왔습니다. 법이 어떤 판단을 내릴지 명확하다고 생각했지만 헌재의 판단이 길어지면서 인용이냐 기각이냐 각하냐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50년 전으로 돌아갈까 봐 걱정입니다. 헌법 재판관들이 왜 혼란을 만들며 침묵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오늘 인권연대로부터 홍세화 전 장발장 은행장님의 묘소 참배 메일을 받았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 인터뷰 외에는 홍세화 선생님을 만나 뵐 일이 거의 없지만 오창익 사무국장님 덕분에 사석에서 좋은 말씀도 듣고 소주 한잔 두 손으로 부딪칠 수 있었습니다. 첫 인연은 2020년 장발장 은행 관련해서 인터뷰를 하면서 시작됐고 오창익 선생님이 인연을 만들어 주면서 가끔 만나 뵐 수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굉장한 경험이었습니다. 돌아보면 선생님이 만든 역사의 한 순간에 있었기도 했습니다. 어른으로 조언도 해주셨습니다. 아버님의 기억을 말씀하시면서 다리를 떨면 목침이 날아오기도 했으니 다리 떨지 말라하셨고 제가 늦은 나이에 결혼을 못했다고 하니 늦지 않았다며 주례를 해주시겠다는 약속도 해주셨습니다. 홍세화 선생님의 샹송을 직접 들을 수 있었던 건 그냥 ‘대박’이었습니다. (인권연대 회원이라면 모두 경험이 있을 겁니다.) 감히 선생님이라고 부를 수 없는 분에게서 너무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홍세화 선생님을 정말 제대로 알고 계신 분께는 죄송합니다. 그저 저의 개인적인 특별한 경험에서는 강한 분이었지만 저 같은 나약한 이에게는 한없이 눈높이를 낮추며 사랑을 베풀어 주신 분이라 느낍니다. 지금의 대통령 탄핵 국면에서 홍세화 선생님이 계셨다면 어떤 말씀을 해주셨을까요? 그저 생각을 해보면 지금 상황은 선생님의 마지막 유언처럼 되어버린 칼럼의 ‘소유에서 관계로, 성장에서 성숙으로’라는 말씀을 모조리 부셔버리는 상황이라 바로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주시지 않으셨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인권연대에서 4월 12일 홍세화 선생님의 묘소 참배를 합니다. 저도 찾아뵈려고 하고요. 많은 분들이 참석하셔서 거인을 기억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그 날에는 대한민국의 봄을 전해드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지난해 빈소를 찾았을 때 눈물을 흘리신 많은 분들을 봤습니다. 부족한 제가 친했던 것처럼 글을 남기는 것에 죄송한 마음이고요. 그저 편하게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2025-04-02 | hrights | 조회: 134 | 추천: 9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당신의 노력은 당신을 절대로 배신하지 않습니다. 지난 3월 22일(토) 광화문 시민대행진의 한 사진이 많은 이들의 이목을 끌었습니다. 연세 많은 어르신이 피켓을 들고 있는 장면이었고 그 내용은 이랬습니다. “내 나이 92세. 내 평생 저런 놈 첨 본다. 당장 윤석열 그놈 파면해!” 자주 촛불대행진에 참여할 때마다 답답함도 많지만, 새로운 장면과 발언들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봄을 맞이하는 지금 우리는 역사적인 변곡점 위에 서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들 비슷한 생각일 것입니다. 광장의 촛불이 바람에 흔들릴지언정 절대로 꺼지지 않는 이유는, 우리의 열망이 단순한 순간의 분노가 아니라 역사의 지속적인 변화를 향한 간절한 의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 시민 권력을 한층 확장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우리가 믿는 가치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지키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사회대개혁이라는 변화는 우리, 시민들이 만드는 것 물론 쉽지 않은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아인슈타인의 이 말처럼, 우리가 과거와 똑같은 방식으로 행동하면서 변화만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의 계엄 상황과 대통령 탄핵 국면, 이 격동의 시기는 우리에게 더 깊이 있는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촛불 대행진이 단순한 항의가 아니라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실질적 힘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탄핵 이후 사회대개혁이라는 깃발을 절대로 놓아서는 안되는 줄 강조하고 강조하면서 우리가 광장에서 목 놓아 외치는 이유입니다. 그 힘은 역시 시민들에게서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아픔이 깊을수록 희망은 더욱 빛난다. 솔직히 집회를 나가면서 매번 갈등합니다. 지루하기도 하고 비슷한 발언과 공연들이 반복되기에 오늘은 또 누구를 오랜만에 만나게 될까, 오늘은 어떤 흥미로운 광경이 눈에 띌까, 오늘은 어디에서 뒤풀이할까, 오늘은 제발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바람을 가지고 깃발과 가방을 챙깁니다. "불행의 깊이만큼 행복이 생긴다."라는 말을 자주 되뇝니다. 우리 사회가 겪는 고통과 좌절이 깊을수록, 우리가 쟁취할 행복 또한 클 것입니다. 권위주의, 독재 정치가 움켜쥔 손아귀에서 시민들이 만들어낸 민주주의는, 단순한 선언이 아니라 우리가 몸으로 밀고 나가며 만들어가는 실체입니다. 그래서 요즘 헌법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새삼스럽고 놀랍습니다. 여러 곳에서 터져 나오는 헌법 개정 운동은 그래서 시민 권력을 더 넓게 확장하고, 우리가 더 이상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돕는 중요한 과정입니다. 길을 잃어도, 우리는 새로운 길을 찾는다 2025년 제가 활동하는 용산시민연대가 지역의 변화를 꿈꾸며 준비하는 22주년 총회 역시 새로운 길을 찾는 과정입니다. 총회 주제를 ‘다시 만날 세상을 향해’로 잡았습니다. 광장에서 매번 떼창으로 불리는 소녀시대의 노래 ‘다시 만난 세계’에서 따왔습니다. 회원 170명에서 두 배로 확장하겠다는 멋진 비전, 더 많은 시민과 함께하는 더 민주적인 용산을 만들겠다는 의지는 단순한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가고자 하는 방향의 문제입니다. 만약 기존의 사업방식만을 생각했다면 이 길을 찾지 못했을 것입니다. ‘길을 잃었을 때 다른 길이 찾아온다(박노해)’라는 말처럼 두려움을 응원봉으로 극복하는 시민들에게서 지혜를 얻었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새로운 가능성을 믿고,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선택했습니다. 두렵고 무서워도 그래도 하는 게 용기 왜 갑자기 ‘용기’라는 말이 떠올랐는지 모릅니다. 형형색색, 기발한 문구로 깃발을 만들어 열심히 참여해서 노래나 구호가 나올 때마다 멋진 장관을 연출하는 시민들을 보면서 대단하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특히, 단체 활동이 주업인 우리 같은 사람의 고정관념이 많이 부서졌습니다. 변화는 언제나 두려움을 동반합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을 이겨내는 사람들이 결국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우리 앞에 놓인 길이 험난할지라도, 우리에게는 포기하지 않는 시민들의 힘이 있습니다. 우리의 땀과 열정은 결코 우리를 배신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용기가, 우리의 연대가, 그리고 우리의 헌신이 더 나은 미래를 만들 것입니다. 광장에서 응원봉을 든 우리가, 권력의 복판에서 의사봉을 쥐는 그날을 떠올리면서, 또 광장을 향해 나갈 우리 모두에게 감사하면서. 함께 갑시다. 희망은 우리의 것입니다.
2025-03-26 | hrights | 조회: 358 | 추천: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