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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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이동화(아디 활동가),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 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윤요왕 / 전 춘천별빛 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이웃마을 원주에 마지막 남은 단관극장인 ‘아카데미 극장’이 논란과 갈등 끝에 철거가 되었다. 원주지역 시민단체들과 종교계는 물론 한국영화학회, 한국사회학회, 역사문제연구소 등 역사·기록·문화·예술·건축·사회 등 다양한 학제를 망라한 단체들까지 나서서 긴급 호소문을 발표하고 국회포럼을 여는 등 보존에 대한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원주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도 현장 농성장에 가서 찬반의 이야기를 들어봤지만 어쩔수 없는 ‘힘’ 앞에 무기력한 생각이 들면서 씁쓸함과 허탈감이 들었다. 시민들의 여론조사를 통해 보존-철거의 결정을 내리자는 시민사회의 마지막 요구도 무산되었다. <‘깊은 민주주의’의 또 다른 예> "선거로 선출되었다는 단 하나의 근거로 국민(혹은 주민)들의 의사는 묻지 않고 마치 제왕처럼 군림하는 정치지도자, 행정책임자들에게 너무나 길들여진 우리로서는 그저 부러워만 하고 있어야 할까?" <경향신문 2015년 / 고 김종철 | 녹색평론> 얼마 전 ‘깊은 민주주의’(Deep Democracy) 관한 포럼에 참가하면서 2015년 경향신문에 기고한 故 김종철 녹색평론 편집장님의 글을 읽게 되었는데 원주 아카데미 극장 철거현장이 오버랩되었다. 그동안 마을자치, 주민자치, 마을공동체 활동과 정책사업들을 통해 직접민주주의의 노력들이 다양한 곳에서 펼쳐지고 있지만 아직 멀었구나 생각되었다. 지방자치, 지방분권은 지방자치단체와 지방의회까지만 내려온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 풀뿌리 직접민주주의(마을자치 등)를 통해 주민,시민,국민들의 권한과 자치를 위해 노력해 온 것이 아직 멀었구나 하는 자괴감까지 든다. 비단 지방작은 소도시만의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2024년은 알 수 없는 국가의 경제위기, 소득불균형으로 그 어느때보다 힘든 한해가 될 거란 예측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오고 있다. 국민의 세금으로 걷어진 예산이 정권이 바뀌었다는 이유하나로 하루아침에 없어진다는 통보를 받아야만 하는 오늘의 현실에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깊은 민주주의’(Deep Democracy) 관한 포럼에서 발제를 한 성공회대 김찬호 교수님의 한국 민주주의의 자화상에 대한 분석을 새겨 봐야 할 것이다. 첫째, 옅은 민주주의 측면에서는 선진국이다(선거,법의 지배 등) 둘째, 뿌리없는 정당의 포플리즘 공세로 편가르기 속의 혐오아 적대 감정의 격화로 과제해결 능력의 퇴화가 가져온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는 정치 셋째, 특정 소수의 단기적 이익 넷째, 불신과 냉소주의가 만연되어 돈과 권력과 사회적 위세를 향한 질주로 진단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치현실의 대안으로 ‘파커 파머’의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에서는 정치권력과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면서 ‘마음(heart)’을 화두로 던지고 있었다. 마음이 열린 사람들이 정치의 주축이 될 때, 보다 평등하고 정의롭고 자비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어찌보면 너무나 당연한 것 같은 얘기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는 민주주의를 얘기하면서 제도나 체계, 질서, 법 등을 강조하면서 역설적이게도 형식적 민주주의만을 구축한 건 아닌가 성찰해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 홋카이도의 작은 시골마을 ‘히가시카와’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8,000명의 주민들이 사는 작은 산골농촌마을이었다. 이 마을에서 어떻게 민주주의(자치)와 마음이 정책화되고 마을을 가꾸어 가면서 지역소멸의 위기를 극복하고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 있는지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내 호기심과 관심을 끈 것은 근사한 중장기 정책도 상큼한 아이디어도 아닌 주민들과 행정의 지역의 아이들에 대한 ‘마음’이었다. ‘너의 의자’ ‘배움의 의자’라고 불리우는 태어난 아이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는 작은의자였고 중학생들이 3년동안 공부하는데 앉는 의자였다. 지역의 마음의 선물로 시작한 의자가 산업화되고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키는 단초가 되었다. 여기서 하나 더 궁금한거는 행정과 어떻게 이게 논의가 되고 합의가 되었는지였다. 우리보다 훨씬 앞서서 또 깊어진 풀뿌리 지방자치(마을자치)가 민주주의의 방식으로 실현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음을 알게되었다. 히가시카와 행정공무원들이 일을 함에 있어서 지켜야 하는 원칙같은 것이 있는데 ‘3無’라고 한다. 이 3無는 공무원들이 ‘예산이 없어서 못한다, 다른지역 사례가 없어서 못한다, 우리지역에는 없다’라는 변명과 핑계가 없다는 뜻이다. 다양한 마을의 분과위원회가 있고 자생단체와 주민들의 의견이 제안되고 토론해서 협의하면 행정은 최대한 그것이 가능하도록 방안과 정책을 찾는다고 한다. 그러니 주민들의 효능감이 높아져 참여가 왕성하다는 설명이다. 결국 민주주의는 국민들 각자가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 민주주의가 ‘마음((heart)’을 기본으로 권한과 권력을 국민들에게 가능한한 이양해야 하는 단계로 발전되어야 하리라 생각한다. 선거라는 그 제도 하나로는 국민이 주인인 국가를 만드는 성숙한 사회로 나아갈 수 없음을 우리모두 깊이 깨달아야 한다. 권력을 권한을 가졌다고 모든 것이 통용되던 시대는 지나갔다. 시민들에게 묻고 확인하고 대화하는 최소한의 민주적인 절차를 거치는 정치인들을 보고 싶다. 또한, 시민들의 삶은 우리들의 마음과 행동에 달려있음을 다시한번 이야기하고 싶다.
2023-11-22 | hrights | 조회: 281 | 추천: 3
김형수 / 장애인학생지원네크워크 사무국장 얼마 전 사무실 아파트 우편함에 은평구청 장애인복지과로부터 온 과태료처분 통지서가 있었다. 바로 사무실 아파트 내의 장애인전용주차구역 위반 신고 사실을 알리는 것이었다. 출처: 전북일보 알고 보니 차 안 장애인전용주차표지가 떨어져서 생활신고앱으로 고발한 것이었다. 시간을 보니 늦은 심야 시간이었다. 이름 모를 누군가 여기 장애인전용주차구역은 충분해서 나 때문에 주차 못한 사람도 없었을 텐데 굳이 주차 자격을 확인하고 사진까지 찍는 품을 들여 신고를 실천한 것이었다. 아파트 주민만 주차장 출입이 가능하니 같은 아파트 주민이었을 것이다.  주차 표지를 새로 발급 받으려고 구산동 주민센터를 갔을 때는 마침 점심시간 직전이었는데 담당자께서는 직원들과 함께 가는 식사 시간도 뒤로 미루고 노란 주자표지를 발급해 주셨다. 점검을 받으러 아파트 정비소를 찾았을 때는 주섬주섬 목발을 짚고 내리려는 나를, 그냥 차에 타고 있으라며 민망하게도 즐비하게 앞질러온 비싼 차를 대기하게 한 채로 내 차를 먼저 봐주셨다. 그리고 손수 사무실 앞으로 자동차를 배달해 주셨다. 그렇게 사무실로 올라오는데 바로 아래층에 사시는 할머니를 뵈었다. 기회는 이 때다 싶어서 평소에 걱정되었던 것을 조심스레 물어 보았다. “혹시 가끔 쿵쿵 층간 소음이 있지는 않나요” 그러자 아래층 할머니가 바로 응답하셨다. “아우, 좀 쿵쿵거리면 어때요, 사는 게 좀 시끄러우면 어때요,” 이러시면서 내가 사과할 여유도 주지 않고 그냥 가버리셨다. 9월 21일 은평구는 서울 지자체 최초로 민방위 대피시설 표지판에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를 부착하는 ‘행사’를 진행했다고 보도자료로 널리 알렸다. 민방위 지침 등의 규정에는 있지만 구체적으로 집행하지 않았던 것을 은평구청이 적극 실천하고 이를 확대하겠다고 밝힌 것은 분명 칭찬받아야 할 일이다. 출처: KBS 그러나 이런 것이 단순히 ‘행사’나 ‘보도자료’나 ‘기념사진’으로만 그쳐서는 안된다. 이런 소식은 그 누구보다 은평구에 사는 장애인 당사자 한명 한명에게 명확하게 전달되고 인지되어야 할 재난 정보다. 우리는 화재사고에 대피하지 못해 홀로 돌아가셔야만 했던 시각 장애인 주민을 기억해야한다. 점자표지를 설치했다는 기념사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시각 장애인을 찾아 함께 대피하는 이웃 주민들, 곧 장애인과 만나고 같이 사는 사람들의 일상적이고 민감한 실천이다. 민방위 대피시설에 점자표지를 설치했다고 홍보했으면 장애인 당사자가 재난 시에 그곳까지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에 대한 정보와 방법도 당사자에게 인지되어야 한다. 엄밀히 말하면 민방위 관련법에서 여러 이유로 훈련과 소집 등에서 장애인을 제외하고 있는 것은 그 구조적, 시대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참 서글프고 차별적인 이야기이다. 국가에 의한 재난 방위이든 민간에 의한 재난 방위이든 장애인을 우선 고려하라는 것은 상식이고 지침이나 시행령 등에도 명시한 것이지만 그것이 구조와 방위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훈련되거나 시행되지는 않는다. 9.11 미국 테러 때 시각장애인이 칠흑같은 어둠을 뚫고 비장애인 기십 명을 구조한 것을 기억해 보라. 허나 우리나라는 장애인 당사자가 알아서 스스로를 구조하거나 방어할 수밖에 없는데, 그런 구조와 방위 방법을 배울 수 있는 민방위 훈련에서조차 법적으로 탈락되어 있고 재난정보 접근성 개선이 구청의 기념사업으로만 포장되는 것은 반갑지만 동시에 슬픈 것이다. 물론 구청이 앞장서서 이런 일을 널리 알리는 것은 장애인의 재난 정보 접근성의 중요도를 알리고 대중들이 실천하는 자극은 될 것이다. 그러나 같은 주민으로의 장애인을 지원하고 보호하는 당연한 일을 구청이 이제야 이렇게 선전하는 것은 때때로 쓴 웃음을 짓게 한다. 도리어 밤늦게까지 장애인 주차 위반을 감시하고 신고한 같은 아파트 주민이 더 감동적일 정도다. 장애인 대피에 관심이 있는 구청이라면 은평구에서 장애인들이 이런 대피 훈련을 차별 없이 받을 수 있는 곳이 있는지, 구의 수영교실이나 체육시설 등에서 장애인들이 얼마든지 생존수영 수업을 비장애인들과 함께 받을 수 있는지도 널리 찾아 보도자료를 뿌리고 그 태권도장 앞에서 수영교실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어야 하지 않을까? 이제 지진과 같은 기후 위기 재해가 남의 일 같지 않고, 포화가 터지는 전쟁 등이 남의 나라 일 같지 않은 시대에, 나는 늘 제일 먼저 가깝게 탈출하라고 주차위반을 신고하고 내 차량에 법적 지위를 알려주고 자동차를 손봐준 이웃 주민들을 각종 언론에 알리고 더욱더 칭찬해 드리고 싶다. 그게 인권의 시작이자 끝이 아닐까?      그리고 뒤늦게 민방위대피소 점자표지를 설치한 것은 자랑하고 기념해야 할 일이 아니다.  지역 주민에게 유감을 표하고 먼저 반성해야 할 일이다. 은평문화예술회관은 모두에게 열려있어야 할 공공시설이 아니던가? 대피소는 모든 구민들이 이미 함께 대피해야 할 시설 아니던가? 설마 모든 구민에 장애인은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인가?
2023-11-07 | hrights | 조회: 114 | 추천: 6
정한별 / 사회복지사   2018년 개봉한 디즈니 애니메이션 “코코”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사람들은 세 번 죽는다. 숨이 멎는 순간 생물학적으로 죽고, 장례식에 온 하객들이 떠나갈 때 사회적으로 죽고, 그 사람을 기억하는 마지막 사람이 죽으면 그것이 진정한 죽음이다.”   2014년 4월 16일 제주도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가 진도 인근에서 사고가 났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사고 뉴스에 이은 전원구조 뉴스로 세월호 사고는 잠깐 동안 관심 밖으로 비껴났다. 전원구조가 오보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014년 4월 18일 세월호는 완전히 침몰했고, 300여명이 숨졌다. 생존자들의 다수는 해양경찰보다 늦게 도착한 민간선박에 의해 구조되었고, 침몰한 선체의 인양은 박근혜 대통령이 파면된 이후인 2017년 3월 22일이나 돼서야 시작되었다. 출처 - 무등일보 세월호 사고는 대한민국의 수준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대형 여객선의 선장을 계약직으로 고용한 해운사, 선원 교육 등의 관리 소홀, 선박의 적재 한도 초과, 사고가 나자 배를 버리고 도망가버린 선장과 선원, 대형 재난의 책임 떠넘기기에 급급한 정부, 보도윤리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던 언론, 이와 대비되는 시민사회의 구조와 자원봉사. 세월호 사고를 기점으로 세상이 많이 변했다고 생각했다. 정부가 자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일이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있겠구나, 책임을 질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일들을 뻔뻔한 얼굴로 하는 일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구나. 부패한 정부에 비해, 우리 시민들의 의식은 상당히 성숙했기에 그래도 희망은 있구나. 2014년 봄에 생겼던 관심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내내 뉴스를 챙기며, 관련 소식을 챙기고 관련 행사를 챙기고, 자원봉사활동을 했던 마음은 얼음이 전부 녹아버려 싱거워진 아이스아메리카노처럼 옅어졌다. 그 사이 세상은 또 변했다. 다리가 무너지고, 백화점이 무너지고, 은행과 기업도 무너지고, 배가 침몰하는 것도 모자라, 도심의 길거리 마저 무너져 버렸다.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 골목길에서 160여명의 시민들이 사망했다.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 사람 많기로 유명한 이태원 할로윈 축제에서 사람들이 깔려 유명을 달리했다. 축제 이전 많은 인파가 예상되었지만 경찰, 지자체 그 누구도 적극적으로 인파운집을 대비하지 않았다. 사고가 일어나기 3시간 전부터 수많은 인파로 인한 압사 우려 신고가 접수되었지만 시민들의 신고 역시 참사를 막지 못했다. 이태원 참사를 대하는 정부의 모습을 보면서 기시감을 느꼈다. 불현 듯 2014년 4월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에 볼을 꼬집어도 봤지만, 아무리 볼을 꼬집어도 현실감각이 돌아오지 않았다. 출처 - KBS뉴스 정부는 국가애도기간을 정하며 근조 리본에 근조라는 글씨를 쓸 수 없게 했다. 참사라는 명칭도, 피해자라는 용어도 쓸 수 없게 했다. 대한민국의 안전을 책임지는 부서의 장관은 “경찰 등 인력 배치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라며 책임을 피하는 데 급급했다. 이태원 참사 외신 기자회견에 참석한 높으신 나으리는 “한국 정부 책임의 시작과 끝은 어디라고 보느냐”라는 외신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잘 안들리는 것에 책임져야 할 사람의 첫 번째와 마지막 책임은 무엇인가” 라며 웃는 얼굴로 농담을 뱉었다. 한 기초지자체 의원은 세월호를 운운하며 “나라 구하다 죽었냐”고 조롱 섞인 혐오를 SNS상에 뿌렸고, 대통령실의 비서관은 “부모도 놀러 가는 것을 못 말려놓고 왜 정부에게 책임을 떠넘기냐”라며 도대체 이해가 불가능한 논리로 국가의 역할이 무엇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고, 여당의 국회의원은 “지난 세월호 사태에서 우리는 똑똑히 보았습니다. 국가적 참사가 발생했을 때 이를 숙주로 삼아 기생하는 참사 영업상이 활개치는 비극을 똑똑히 보았습니다”라며 혐오표현의 진수를 보여주셨다. 어찌보면 고마운 분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이다. 분노는 연료로 쓰일 수 있으니 말이다. 출처 - 한겨레 10년 같은 1년이 흘러, 다시 10월 29일이 되었다. 참사의 진상을 밝히게 될 거라는 일말의 기대감을 안고 시작한 국정조사는 그 어떤 의혹도 밝혀내지 못한 채 끝나버렸고, 이태원 참사 특별법은 법사위에 계류중이다. 참사가 일어난 지 1년이 지났지만,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참사의 원인도, 참사에 대한 책임도 밝혀진 게 없는데, 사람들의 관심은 점점 희미해져가고 있다. 세월호도, 이태원도, 잊지 않아야 할 것들, 잊을 수 없는 아픈 기억들이 조금씩 늘어가는 현실에 가을밤의 공기가 한없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낀다. 너무 일찍 별이 된 이들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라도 조금 더 머물 수 있도록 기억의 나무에 물을 주는 것이 어떨까.  
2023-10-31 | hrights | 조회: 172 | 추천: 7
사단법인 아디 이동화 활동가   팔레스타인에서 한국으로 급하게 돌아온 지도 거의 2주정도 됐습니다. 하지만 제 정신은 팔레스타인 어딘가에 두고 온 듯 몽롱하고 멍합니다. 엄청나게 쏟아지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관련 뉴스 때문인지 가슴속 분노와 슬픔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합니다. 지난 10월 7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가 이스라엘이 세운 분리장벽을 넘어 공격할 때 저는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에서 올리브 수확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디는 정의기억연대의 후원을 받아 2021년부터 팔레스타인 나블루스에서 현지여성들의 인권보호를 위한 트라우마힐링센터 사업을 하고 있고, 그 사업의 연장선상에서 팔레스타인에 방문한 것이지요. 10월 7일, 제가 가장 먼저 목격한 광경은 올리브를 따고 있는 곳 반대편에서 피어오르는 커다란 화재였고, 그것은 이스라엘 정착촌민이 하마스 공격에 보복을 하기 위해 팔레스타인 올리브농장에 방화를 한 것이었습니다. 올리브 수확을 마치고 나블루스로 돌아왔을 때 현지 사람들에게서 기쁨과 우려를 동시에 보았습니다. 가자가 봉쇄된 지 15년, 높이 8미터의 거대한 분리장벽이 가자지구를 둘러친 지 21년 만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장벽을 넘어 자신들의 예전 땅이었던 지금의 이스라엘에 도달했다는 기쁨을 드러냈습니다. 동시에 이스라엘의 잔혹한 보복 군사공격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저를 포함한 아디의 팔레스타인 방문팀은 안전확보를 위해 서둘러 현지 일정을 종료하고 귀국 편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소요된 며칠 동안 저는 현지 활동가들과 많이 언쟁했습니다. 어떠한 이유로도 민간인과 비전투요원을 살해하고 납치하는 전쟁범죄는 용납할 수도 동의할 수 없다고 주장했고, 현지활동가에게는 제 주장이 현실을 모르는 순진한 공자님 말씀처럼 들렸나봅니다. 그들은 10월 7일의 하나의 사건이 아닌 지난 75년 동안 자신들이 당했던 고초를 이야기하며 우리에게도 당신들과 같은 삶을 살 권리가 있다고 했습니다. 서로 다른 말을 하는 평행선과도 같은 언쟁 속에서 현지 활동가는 수십 년 동안 팔레스타인 아이와 여성, 민간인이 살해당할 때 세상은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어느 누가 우리 편에서 목소리를 내준 적이 있었느냐? 라고 항변할 때 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사진 1. 나블루스 부린마을, 이스라엘 정착민에 의해 방화되는 팔레스타인 올리브 농장, 사진 출처: 한톨 우려했던 대로 하마스의 공격은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왔습니다. 과거의 선례처럼 이스라엘은 민간인까지 무차별적으로 살해하는 보복군사공격을 시작했고 이번에는 전 세계의 여론의 지탄도 함께 따라왔습니다. 하마스의 민간인 살상 관련 뉴스는 정제되지 않고 사실관계도 불분명한 채 공중파, 케이블, 신문, 심지어 개인의 sns를 타며 엄청나게 전파됐습니다. 그리고 가자지구의 알아흘리 병원이 공습으로 큰 피해를 봤다는 소식에 전 세계 여론은 다시 한 번 출렁거렸고 지금은 서로의 탓이라며 책임을 떠넘기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의 죽음의 시간은 계속 흘러갑니다. 이스라엘의 사망자 수는 멈췄고 팔레스타인 측 사망자와 부상자는 계속 늘어만 갔습니다. 사망자와 부상자의 절반 이상이 아이와 여성이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관심은 하마스의 만행과 알 아흘리 병원 폭격이 누구 소행인지에서 멈춰 있는 듯합니다. 지중해에 맞닿아 있고 서울시 절반가량 크기의 가자지구는 세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고 외부로 연결된 모든 도로가 봉쇄된 감옥과도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번 사태를 통해 부가적으로 알게 된 사실입니다. 가자지구는 외부에 의해 완벽하게 봉쇄됐으면서도 또 외부에 완전하게 의존해야만 하는 지역입니다. 이런 가자지구에 이스라엘은 전기를 끊고 물을 끊었습니다. 모든 물류의 흐름을 차단했습니다. 하늘에서 전단지를 뿌리며 남쪽으로 이동하지 않으면 하마스편이라 간주하고 폭격하겠다고 연신 협박합니다. 두려움에 떨며 남쪽으로 이동한 사람들이 있는 반면 자포자기 심정으로 떠나지 못하는 사람도 엄청나게 많습니다. 가자지구 현지에서 전해주는 소식은 200만명의 가자지구 사람들이 하루하루가 위태롭고 절박한 상황속에서 지내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이들이 갈 만한 안전한 곳은 딱히 없습니다. 지난 23일 월요일 하루 동안 만 이스라엘 공중 폭격으로 사망한 가자지구 민간인 수만 어린이 182명을 포함하여 436명이 사망했습니다. 지금 이순간도 이스라엘의 공중 폭격이 이어지고 지상전을 위한 무시무시한 탱크와 전차는 가자지구 코앞에서 대기중 입니다. 사진 2. 10월 22일 팔레스타인 연대집회, “이스라엘은 민간인 학살을 멈춰라” by 아디 어느 순간 우리의 기억은 멈춰졌습니다. 언론은 연신 하마스의 악행을 계속 선전합니다. 한국의 몇몇 언론사는 현지에 기자를 파견하며 현지소식을 전하고 있지만 그들은 비극의 한 면 만을 강조합니다. 만약 그들이 가자지구에 있다면 그들이 바라본 세상은 공포와 죽음, 사방이 벽으로 막힌 절망적인 현실일 것입니다. 또한 팔레스타인에는 가자지구만 있지 않습니다. 서안지구 역시 공격받고 있습니다. 10월 7일 이후 서안지구에서도 이스라엘 군의 군사공격으로 1,400명 이상이 체포되고 90명 이상이 사망했습니다. 아디의 현지 활동가역시 이스라엘군이 발포한 유탄에 맞아 부상을 당해 병원으로 후송됐습니다. 서안지구의 대부분의 도시는 이스라엘군에 의해 봉쇄됐고 아디의 센터 역시 현재 문을 닫은 상태입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많은 사람들은 하마스가 이 지옥의 문을 연 당사자이고 10월 7일부터 비극이 시작됐다고 생각합니다. 안타깝게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생각은 완전히 다릅니다. 유엔에서는 팔레스타인을 지칭할 때 Occupied Palestinian Territories 즉 점령된 팔레스타인 지역이라고 합니다. 이번 사태는 긴 점령의 역사 중 하나의 사건이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점령의 상징과도 같은 분리장벽이 처음 무너지고 본인의 고향에 발을 딛는 최초의 기억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동안 수많은 보도를 통해 팔레스타인은 점령됐고 점령이 불법이라 알려졌지만 사람들은 기억하지 못합니다. 이 사태 이전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평화롭게 일상을 살고 있었다는 생각은 착각에 불과합니다.. 이번 비극적인 사태를 통해 저는 인류의 양심이 시험대에 올랐고, 그동안 국제사회가 구축한 신념의 토대는 그 앙상함을 고스란히 드러냈다고 생각합니다. 하늘을 찢을 듯한 전투기의 굉음과 곧바로 이어지는 폭격의 섬광은 인구 230만의 가자를 죽음의 도시로 만들었습니다. 쉴 새 없이 밀려드는 부상자와 사망자로 병원은 이미 아수라장이 돼버렸고, 폭격으로 무너진 건물의 잔해 속에서 주민들은 필사적으로 맨손으로 콘크리트 잔해를 파헤치고 있지만 그 밑에 갈린 아이들은 서서히 숨을 거두고 있습니다. 잔인한 세상의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고통 받는 이들의 절규는 점령의 담장을 넘지 못합니다. 이들의 절규가 마지막 숨을 다할 때 우리가 믿는 양심과 신념역시 끝날 것입니다. 이번 사태로 인해 사망한 모든 이들의 명복을 빌며 하루빨리 이 비극이 끝나길 간절히 바래봅니다.
2023-10-25 | hrights | 조회: 108 | 추천: 7
신종환 / 공무원 역사를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격언은 많고 그만큼 여기저기서 언급된다. 뒤집어서 말하면 그만큼 생각보다 쉽게 잊힌다는 반증이기도 한 것 같다. 한국과 일본의 사이에는 여전히 청산되지 않은 과거가 있지만 때때로 어떤 사람들은 과거의 일들을 지금과는 관계없는 일들로 치부하고 또 그런 자신들의 생각을 정당하다고 믿고 여지저기에서 말하곤 한다. 그런 일들의 시비를 가리는 일 이전에 그런 사람들이 그런 일들을 벌이는 까닭을 생각해보면 어쨌든 그들의 생활과 환경이 과거와는 사뭇 달라졌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고, 나아가서 우리가 처한 여러 상황적 맥락에 과거와는 다른 점들이 많아졌다는 말인 것도 같다. 출처 - 뉴닉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그리고 이를 비추는 시선들은 짧은 시간에 달라지는 상황에서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자라고 어떻게 흘러가는지에 대한 복잡하고 비참한 풍경 중 하나다. 복잡하게 얽힌 문제 속에서 팔레스타인에 살던 여러 아랍계 민족집단의 후인들은 이제 팔레스타인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빼앗긴 과거와 고통받는 현재를 공유하고 있고, 세계를 방랑하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나라를 세운 유대인의 후인들은 이제 자신들의 강토를 침범하는 이들에 대해 심적으로 정정당당한 분노를 가림 없이 표출하고 있다. 출처 - 오마이뉴스 언론에 실린지 20년 가까이 된 사진에서 이스라엘 아이들이 헤즈볼라를 향해 발사될 포탄에 낙서하고 있는 장면은 서로를 향한 인식이 얼마나 기형적으로 자라나고 있는지 보여준다. 우리나라와 사이가 안좋은 나라에서 우리나라로 향하는 포탄에 웃는 얼굴로 우리의 죽음을 기원하는 사진을 어느 아이가 인터넷에서 보고 자란 아이가 10명이라면 그중 몇이 어떤 마음을 먹을지 확답을 할 수 없어도 평화적 전망을 내놓기는 어렵다. 내가 즐겨 듣는 팟캐스트 진행자는 팔레스타인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에 대한 기울어진 보도에 ‘팔레스타인 사람의 죽음은 다섯 글자로 적히고 이스라엘인의 죽음은 책 한권으로 적힌다’고 말했다. 비대칭적으로 나타나는 폭력에 대해서 전세계적으로는 반대방향으로 비대칭적인 보도와 이에 따른 비난이 이어진다면 이는 차라리 다음 폭력에 대한 양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출처 - KBS뉴스 하마스는 음악축제를 기습해서 수십의 사람을 죽이고 기백의 사람들을 인질로 잡았다. 당시 영상과 상황은 전세계에 급속도로 퍼졌다. 이후 이스라엘은 먼저 잘못한 것은 자신들이 아니라는 듯 가자지구에 무차별 폭격을 가해 수천의 희생자가 발생했고, 가자지구에 백린탄을 발사한 영상이 인터넷에 듬성듬성 보였다. 백린탄을 실제로 쏘았는지, 누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죽음들 앞에서 편을 드는 일이 타당한지는 모르겠지만 팔레스타인이 백린탄을 쏘았다면 양상이 달랐을 거란 예상은 어렵지 않다. 앞으로 상황은 악화일로로 치닫을 일을 목전에 두고 있다. 궁지에 몰린 가자지구에는 비명이 멈추지 않고, 눈물에도 멈추지 않는 피와 불을 본 어떤 팔레스타인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의 목젖을 마이크 삼고 그들의 집을 무너뜨림으로 자신의 집이 무너졌음을 알리고자 마음 먹는다. 이스라엘 건국 이후 줄곧 피가 흐르고 비명이 이어진 비극은 단시간에 끝나지 않을 것 같다. 다만 양 터전에서 이어지는 비참함에 의식적으로 비대칭적으로 귀를 기울이고 이를 알리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아야 팔레스타인 사람의 가슴에서 꺼지지 않은 불꽃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의 단초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국에서 먼 땅의 비참한 냄새를 맡으며 한다.
2023-10-17 | hrights | 조회: 140 | 추천: 2
이원영 / 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우리가 살면서 접하는 사건의 지평선들 저기, 사라진 별의 자리 / 아스라이 하얀 빛 / 한동안은 꺼내 볼 수 있을 거야 / 아낌없이 반짝인 시간은 / 조금씩 옅어져 가더라도 / 너와 내 맘에 살아 숨 쉴 테니 / 여긴, 서로의 끝이 아닌 / 새로운 길모퉁이 / 익숙함에 진심을 속이지 말자 / 하나 둘 추억이 떠오르면 / 많이 많이 그리워할 거야 / 고마웠어요 그래도 이제는 / 사건의 지평선 너머로 출처 - 대학신문 가수 윤하의 ‘사건의 지평선’이라는 노래의 가사이다. 사건의 지평선이라는 매우 어려운 물리학 용어를 노래 가사로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놀랍다. 예술의 경지라고 부를 법하다. 사건의 지평선은 ‘어떤 지점에서 일어난 사건이 어느 영역 바깥쪽에 있는 관측자에게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려도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할 때, 그 시공간의 영역의 경계를 사건의 지평선이라고 부른다.’ 사건의 지평선에는 블랙홀 주변의 사건의 지평선과 우주론적 사건의 지평선 두가지가 있다고 한다.(네이버지식백과) 분명히 존재하지만 우리가 관측할 수 없는 경계를 왜 물리학에서는 사건의 지평선(Event Horizon)이라고 지칭했을까? 사건의 지평선이라는 노래는 ‘서로의 끝이 아닌 새로운 길모퉁이’라며 ‘많이 많이 그리워할 거’라고 애절하게 표현했을까?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과 공간은 무수히 많은 사건의 지평선이 존재하는 것 같다. 잊고 싶어도 잊혀지지 않는 수많은 관계와 사건의 연속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태원 참사 1주기와 너무 멋진 가을 10.29 이태원참사가 발생한 지 벌써 1년이 되어간다. 이태원참사는 있어서는 안될 사건, 159명의 안타까운 생명이 순식간에 사라진 사건이다. 이런 사회적 참사는 반드시 그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사회적이라는 말이 수식어로 붙은 이유는 사회적 원인이 그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출처 - 동아일보 코로나 거리두기가 끝나고 오랜만에 할러윈 축제가 열린 공간에는 수많은 군중이 밀집할 거라고 예상을 했지만, 그에 대한 대비책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다수 군중의 원활한 흐름을 아무도 통제하지 못해 압사 사고가 발생했다. 사고가 발생하지 몇 시간 전부터 그곳에 머물렀던 시민들의 심각한 경고와 호소가 있었지만 적절한 조치가 시행되지 못했다. 결국, 이태원참사는 시민의 안전을 책임질 정부의 부재, 행정력의 외면으로 발생한 사고라는 것이 드러났다. 사회적 참사는 그 사회 공동체에 책임이 있다. 우리가 정말 멋지고 아름다운 계절인 가을에 사건의 희생자와 유가족의 아픔을 기억하고 함께 해야 하는 이유이다. 우리 이웃과 가족에게도 언제든 발생할 수 있는 일이기에 더욱 그런 사회적 참사가 발생하지 않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참사 이후, 용산 시민사회 공동체의 노력 작년 10.29 이태원참사 이후 용산지역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한 ‘1029이태원참사추모와 책임자 처벌을 위한 용산시민행동’이라는 연대단체를 꾸렸다. 이태원이라는 공간은 용산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곳이기도 하다.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과 젊은 청춘들이 모이는 축제의 공간, 해방의 공간이기도 하다. 너무도 익숙한 공간에서 참사가 발생했기에 우리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보자고 여러 가지 활동을 전개했다. 이태원참사 희생자 분향소 지킴이를 일요일마다 해 왔다. 녹사평역 부근 분향소에서 시작해 지금은 시청 앞 분향소에서 진행하고 있다. 또 추모 문화제와 현수막 게시, 유가족간담회 등을 비롯해 유가족협의회의 활동에도 결합해왔다. 그리고 이태원 참사의 핵심 책임자인 박희영 용산구청장 사퇴촉구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세 달 사이에 2천 명 가까운 시민들이 서명에 참여했다. 출처 - 파이낸셜뉴스 이태원 참사의 책임자로 지목되어 수사를 받고 구속되었던 박희영 용산구청장은 지난 6월 공황장애 등을 이유로 보석 석방되어 용산구청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용산구청의 여러 가지 행사를 하면서 주민들을 만나고 있다. 매월 한 차례씩 형사 재판을 받고 있는데 재판이 있을 때마다 유가족들은 법원 앞에서 “구청장 자격 없는 박희영은 사퇴하라”라며 울부짖었다. 159명이 죽었는데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아무도 사과하지 않고 처벌받지 않는 현실은 사회적 참사가 왜 계속 반복되는지를 바로 보여준다. 이런 현실을 조금이라도 바꾸기 위해서 용산의 시민사회단체들은 박희영 용산구청장이 형사 처벌을 제대로 받고 그 사퇴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행동을 이어갈 예정이다. 또한, 여러 가지 한계와 문제점이 많기는 하지만 주민소환 운동도 염두에 두고 준비하고 있다.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것을 넘어 이태원참사는 기억되어야 한다. 참사가 발생한 이태원역 1번 출구 앞 골목에 ‘기억과 안전의 길’을 조성하려는 것도 그 일환이다. 그렇지만 기억하는 것을 넘어 우리에게 주어진 길이 있다. 바로 투쟁하는 일이다.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길이다. 이태원참사특별법이 제정되고 생명안전기본법을 국회에서 통과시켜야 한다. 매우 험난한 투쟁 과정이 이어질 것이다. 출처 - 경향신문 사회적 참사가 발생하기 전에 항상 그 징후가 발견된다. 누군가는 그 징후를 경고하고 해결을 하라고 촉구했다. 우리가 납득하기 어려운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분노를 참을 수 없었던 것은 매우 예민하게 반응하고 조치했다면 소중한 생명을 앗아간 참사는 사전에 충분히 예방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물리학이 말하는 사건의 지평선은 우리가 만지고 이해하기 어렵지만 우리가 살면서 자주 경험하는 사건의 지평선은 충분히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런 믿음과 희망으로 시민들은 오늘도 살아간다. 우리, ‘익숙함에 진심을 속이지 말자’.
2023-10-11 | hrights | 조회: 225 | 추천: 5
김형수 / 장애인학생지원네크워크 사무국장 출처 - 서울시 어릴 때 부모님은 밤늦게까지 급한 일이 생기면 언제나 가까이에 사는 작은 이모에게 우리 형제를 돌봐 달라고 부탁했었다. 이제 우리 사회는 아이가 힘들다는 이유로, 아동을 집에 혼자 내버려 두는 것도, 학교에 보내지 않은 것도 모두 폭넓게 아동학대로 사회적으로 법적으로 판단해 왔다. 역사적으로 그렇게 학대로 죽어간 아동들이 너무 많았고 무엇보다 아동 당사자가 가졌을 두려움과 공포를 의미있게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동학대에 대하여 여러 고려해야 될 상황에도 신고자나 피해자의 신원을 철저하게 보장하고 의심 정황만 있어도 즉시 신고하라고 관련 법에서 정한 취지는 무엇보다도 아동 당사자의 안전과 인권을 무엇보다 먼저 지키기 위한 원칙 중의 원칙이었다. 아동학대의 즉시 신고제도의 취지는 형사법적으로 가해자를 무조건 처벌하자는 것이 아니다. 아동 학대는 부모나 가족, 또는 교사처럼 학대이후에도 쉽게 단절할 수 없는 관계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권력 범죄이다. 그래서 가해자의 그런 행위가 학대임을 일깨워주어 학대에 대한 인권 감수성을 높여서 학대적 행위가 더 은폐되거나 심각해지는 것을 미리 방지하는 것에 큰 목적이 있다. 출처 - 오마이뉴스 최근 불거진 우리 동네 은평구 특수학교의 장애인 학대 사건 역시 4년 전부터 발생한 가해 교사의 학대적 행위에 대하여 제대로 감시하거나 내부 고발을 하지 않아서 교사의 폭행이 더 크게 곪아진 사건이었다. 피해 학생은 얼굴이 다 터지도록 폭행을 당해도 제대로 된 의사 표현을 못했다. 가해 교사는 장애인 학생이 자해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은폐하여 결국 주변의 활동지원사의 신고로 사건의 전말이 밝혀졌다. 그런 과거의 역사와 과정에도 불구하고 용인 장애인학대 학대 피해사건에서 보다 시피 장애인부모의 비동의 교실 녹음만을 문제 삼는 것은 교사들의 현실적 어려움을 백분 이해 한다 하더라도 무척 위험한 주장이다. 비동의 교실 녹음이나 즉시 신고에 대하여 비판이 성립하려면 그런 전문가인 특수교사의 집단에서 사전에 언제든 학대에 대해 교사들 간의 내부 감시와 내부 고발이 아주 철저하게 완벽하게 하겠다는 것이 굳건해야 한다. 그런 믿음을 바탕으로 우리는 특수교사에게 장애인 당사자가 신뢰할 수 있는 조력인으로서의 그 권위와 권한을 부여해 왔다. 그러나 슬프게도 이제껏 많은 유죄 판결이 난 사건에서 이런 내부 감시가 그 권위를 인정해 주고 아동학대 신고대상에서 면제를 해줄 만큼 이루어져 왔는가를 보면 절대로 용납할 수 없음이다. 그런 믿음들이 요즘의 큰 이슈와 맞물려 일부 특수교사들과 특수교육 교수에 의해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음이 심히 우려 스럽다. 요즘 관내 학교들이 장애인 인권교육을 요청하면서 아예 인권 감수성이란 단어를 삼가 달라고 문서로 요청하거나 특수교사들이 법적 의무 문서인 장애인 개별화교육계획 문서 작성 자체를 거부하는 일이 갑자기 발생하고 있다. 출처 - 서울경제 이런 퇴행은 단기적으로는 일부 교사들의 피로도를 줄이고 갈등을 줄일지는 모르나 장기적으로는 교사들의 신뢰와 권위에 치명상을 가져다 줄 것이다. 장애에 대하여 그 선입관과 편견을 배제해야할 전문가들이 장애인 학생의 장애 때문에 이 모든 문제가 발생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가해자의 논리에 설득되어 감정이입하는 것은 사건 본질 해결을 어렵게 한다. 비장애인 학생에게는 논쟁의 여지 없이 학대로 인정할 부적절한 교사들의 감정적 발언들이, 장애인 학생에게는 장애인이기 때문에 다르게 적용되는 것은 시혜적인 장애인 관점과 다름 아니다. 그리고 본인의 노동권을 주장하기 위하여 장애인 학생 자체를 악마화 하거나 장애로 발생한 여러 일들을 수치스럽게 혐오 스럽게 집회에서 발언하거나 언론에게 인터뷰 하는 것은 교사들의 기본적인 전문성과 인권 감수성 마저 위선에 불과했나 의심할 만큼 과도하기 까지 한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런 언론과 여론의 폭주에 대하여 교사 사회에서도 특수교육계도 차분한 이성적인 인권적인 목소리를 찾기가 더 어렵다는 사실이다. 최근 얼마전까지도 장애인 학생이라서 학대 문제는 더욱 민감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사람들이, 특수교육계에서 인권유린으로 과거 사라진 강압적 신체 구속 보호 장구 사용을 대단히 자연스레 요구하는 모습은 그 동안 우리가 믿어왔던 전문가의 인권 감수성과는 너무 거리가 멀다. 도리어 권력적이기까지 하다. 적어도 전문적인 직업인이라면 사회와 국가가 장애인 교육에 대한 책임을 다하라 같은 학생으로서의 통합교육을 더욱 요구해야 하지 않는가? 오히려 특수교사와 특수교육 교수들은 대중들에게 무엇이 진정한 인권적 정당한 교육인지를 알려주고 홍보할 책임이 있다. 용인 학대 사건에서처럼 자신의 감정과 기분을 근무시간에 태도로 폭발시킨 것을 정당한 훈육으로 포장하고 교육 공무원인 본인의 책임하에 있는 장애인 학생의 개인정보와 교육상담 내용도 마음대로 대중에게 유포하는 행위에 대해 시시비비를 판단할 수 없다면서 침묵하는 것이 과연 교육적인가? 전문적인가? 출처 - 브런치스토리 언론을 통해 알려진 그런 행위가 특수교육이구나 곡해하는 대중들에게 아무 말 하지 않아도 괜찮은가? 그냥 100년 전 전문성 설리반 선생으로 현장교사들이 박제되어도 괜찮은가? 오히려 이번 사건을 계기로 교육현장을 더욱 투명하게 인권적으로 만들기 위하여 인권 감수성, 장애 감수성, 학대 감수성을 높일 터이니 부당한 악성 민원을 멈추어 달라고 해야 타당하지 않은가? 이제 교육현장과 종사자들이 장애인 인권 문제와 학대에 대하여 보다 공개적으로 교실 문을 활짝 열고 사회 구성원들과 소통하고 공부해야 할 때이다. 아니 우리의 위선을 성찰하고 그것을 실천할 때이다. @ 본 원고는 은평시민신문에 실린 원고를 수정 보강했습니다.
2023-09-20 | hrights | 조회: 178 | 추천: 2
정한별 / 사회복지사     세상엔 사람들이 살고 있다. 사람이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인간이라는 존재의 다수성은 인간 사회가 어떻게 운영되고 유지되어야 하는가를 아주 명백히 보여주는 가장 기본적인 인간 존재의 특성이다. 한나아렌트는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의 다수성에 대해 언급했다. “어떤 누구도 지금까지 살았고 현재 살고 있으며 앞으로 살게 될 다른 누구와 동일하지 않다는 점에서만 모든 인간은 동일하다.” 아렌트는 절대 같은 사람이 없는 다수성이 인간 세계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지, 그로 인해 사회는 어떤 고민을 나눠야 하는지를 설명했다. 출처 - 브런치스토리 자신을 들여다보고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일은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지속적으로 해 나아가야 할 숙제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자신을 객관화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자신 스스로도 자신을 알기가 어려운데, 어찌 남을 이해할 수 있을까. 노력 없이 결코 불가능한 일이다.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사라지는 순간 세상은 어떻게 변할까. 개인을 집단으로 치환하여 바라보고 단순화하는 전체주의적 사고가 인간에 대한 편견을 만들어 낸다. 요즘의 한국은 개개인에 대한 이해를 거부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장애학생 혐오의 확산 얼마 전, 한 웹툰 작가의 고소가 이슈가 되었다. 작가는 자폐성장애를 가진 자신의 아이가 학교의 특수교사로부터 아동학대를 당했다는 이유로 고소를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아동이 학교에서 겪은 일을 확인하기 위해 몰래 특수교사의 말을 녹음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여론은 웹툰 작가에 대한 비난으로 들끓었다. 작가에게 향해 있던 비난의 화살은 멈추지 않고, 장애학생에 대한 혐오로 확산되었다. 관련 내용을 다룬 기사의 댓글에는 장애학생 전체를 비난하고 사회로부터 격리해야 한다는 댓글들이 넘쳐났다. 장애학생에 대한 분리교육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며, 장애학생 때문에 비장애학생, 교사들이 피해를 당하고 있다는 글들이 넘쳐났다. 출처 - 에이블뉴스 장애학생에 대한 분리교육은 당연한 일이며, 정말 장애학생 때문에 비장애학생, 교사들이 피해를 당하고 있는 것일까? 문제가 발생할 때 어떤 존재 그 자체에 대한 비난은 가장 단순하고 쉽게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이지만 문제의 근원적 해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방식이다. 수학여행을 가다가 사고가 나자 수학여행을 없애 버리려던 일, 오염수 방류를 비판하자 오염수 방류를 비판하는 국민들을 비과학적이라고 매도해 버리는 일, 교권하락 나아가 교권침해의 상황이 심각해지자, 학생인권을 제한하자는 일. 이 모두 문제의 변죽을 울리는 일에 불과하다.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특수교육에 대한 요구 대한민국의 출생률이 낮아지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다. 학급당 학생 수 역시 꾸준히 낮아지고 있다. 학생 수 감소에도 불구하고 특수교육 대상자는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국립특수교육원의 2023년 특수교육 연차보고서에 따르면, 2023년 전국 특수교육대상자는 10만9703명으로 2018년 9만780명에서 5년 만에 20% 넘게 늘었다. 출처 - 동아일보 이 많은 특수교육대상 학생들은 어디에 있을까? 전체 특수교육 대상 학생 중 특수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26.7%(29,236명)에 불과하다. 일반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73.3%(80,467명)이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56.5%(61,993명)가 일반학교의 특수학급에 배치되어 있으며, 일반학급에는 16.8%(18,474명)가 배치되어 있다. 특수학교에 배치되어 있는 인원은 점점 줄어가는 추세이며, 대신 일반학교에 배치되는 학생은 점점 늘어가는 추세이다. 특수학교 아닌 일반학교에 다니고 있는 학생들의 비율이 73.3%나 해당하니, 다수의 특수교육대상학생들이 비장애학생들과 함께 교육을 받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말 통합교육을 받는 학생들은 일반학급에 배치된 16.8%에 불과하다. 특수교육대상학생들의 장애영역은 지적장애 50.9%, 자폐성장애 17.6%, 발달지체 11.8%의 순서로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발달장애에 해당하는 지적장애와 자폐성장애를 갖고 있는 학생이 특수교육대상의 70%에 육박하는 것이다. 특수교육법은 특수교육대상 개개인의 특색에 맞는 개별화된 교육계획을 수립하게끔 하고 있으며(제22조), 특히나 발달장애는 개별적인 접근과 개인의 특성에 맞춘 지원이 필수적이어서 발달장애인지원법에서 개인별로 지원계획(제19조)을 수립하게끔 하고 있을 정도이다. 피해자는 누구인가 이러한 개별화된 지원을 강조하는 법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수교육법상 특수학급 학생 정원인 유치원 4명, 초중등학교 6명, 고등학교 7명에 따르다 보면, 학생 개개인에 대한 개별화된 지원은 불가능하다. 정원 문제 외에도 특수교육법에서 보장하는 지원인력(제28조) 역시 턱 없이 부족하다. 특수교육 지원인력은 별도의 전문적 교육을 받은 인원이 아닌, 사회복무요원을 이용하기도 한다. 특히 경기도는 별도의 유급인력 보다 사회복무요원을 지원인력으로 더 많이 활용한다. 이마저도 충분히 배치되면 다행이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러한 상황이다 보니, 지원인력을 제대로 지원받지 못해 학습권을 침해받은 특수교육대상 초등학생과 부모가 교육감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물론, 이 소송은 지난 5월 1심서 패소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피해는 고스란히 학교 현장으로 돌아가곤 한다. 비장애학생의 학부모들은 장애학생을 위한 특수학급이 설치되는 일을 반대하고, 공공연히 차별적인 상황, 차별적인 분위기를 조성한다. 장애학생을 자녀로 둔 부모가 가질 수 있는 선택지는 두 가지에 불과하다. 투사가 되어 주변의 모든 사람 심지어는 학교와 싸우든가, 조용히 지내거나 다른 학교나 다른 교육 상황을 찾아서 숨어드는 일. 장애학생들은 일상화된 혐오에 상처받다가 무뎌지거나, 견디지 못하고 더욱 곪아들어가는 일, 비장애학생들은 장애학생에 대한 편견과 불편이 강화되는 일. 이들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교사들은 학대의 행위자가 되거나 우울증 등 정신과 질환의 피해자가 되는 일. 그 어디에도 책임 있는 교육 당국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출처 - 오마이뉴스 특수교육법은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가 장애인 및 특별한 교육적 요구가 있는 사람에게 통합된 교육환경을 제공하고 생애주기에 따라 장애유형, 장애정도의 특성을 고려한 교육을 실시하여 이들이 자아실현과 사회통합을 하는데 기여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통합교육은 특수교육의 수단이자 목적이라고 할 것이다. 교육은 학문적 성취를 이루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장애학생이 통합교육의 현장에서 비장애학생과 함께 지내면서 비장애학생의 행동을 보는 일 자체도 학습의 효과가 있을 수 있다.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것을 이유로 장애학생만을 분리하여 교육하는 일이 결코 장애학생을 위한 일이 아닐 수 있다. 비장애학생들도 장애학생들과 함께 지내며 사람에 대한 배려와 다양한 사회의 모습을 배울 수 있다. 세상은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다.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장애학생도 비장애학생도 학부모도 교사도, 그 누구도 피해받지 않기 위해선 학생 개인의 상황에 맞춘 보다 개별화된 지원이 필요하다. 1) 한나아렌트, 「인간의 조건」  
2023-09-12 | hrights | 조회: 179 | 추천: 4
이동화 / 사단법인 아디 활동가   지난 8월 25일, 아디를 포함한 몇몇의 시민사회 단체는 주한 미얀마 대사관 앞에서 로힝야 학살 6주기를 추모하는 기자회견을 가졌다. 2018년부터 매년 기자회견을 가졌으니 올해로 여섯 번째이다. 8월의 뜨거운 태양아래 미얀마 군부의 잔혹한 학살을 성토했으나 현장에는 기자 1분과 주최단체 관계자 7~8명만이 참석했다. 예상은 했지만 무관심에 가까운 언론 반응과 냉정한 현실은 늘 적응하기 어렵다. 사진 1. 로힝야 6주기 기자회견 사진, 2023.08.25. / 출처 - 저자 아디는 2017년 8월 미얀마 군부의 대규모 학살 전부터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학살 피해생존자를 만나서 당시의 현실을 꼼꼼히 기록하고 있다. 기록의 결과는 너무도 끔직하다. 7년 전 미얀마 군인은 2살짜리 로힝야 갓난아이를 땅에 내리쳤고 산채로 불에 던졌다.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집단강간과 집단살해는 분쟁의 폭력성뿐만 아니라 군부가 성폭력을 전쟁의 도구로 사용했음을 드러냈다. 국제사회는 공분했고,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미얀마 정부에 요구했으나 미얀마 정부는 군부를 옹호했다. 그리고 4년이 지난 2021년, 군부는 자신들을 옹호했던 미얀마 정부를 뒤엎고 권력을 차지했다. 학살에 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더욱 어려워졌다. 출처 - 로이터연합뉴스 7년 전 학살을 피해 방글라데시로 피난한 로힝야 피해생존자들의 요즘의 삶은 어떠할까? 대나무와 방수천으로 만들어진 임시 쉼터, 매년 발생하는 몬순 시기 재난적 폭우와 잦은 화재, 식량부족으로 인한 발육 부진과 영양실조, 각종 빌병과 유행병, 마약 밀매 조직들의 납치와 인신매매, 무장단체들 간의 무력충돌과 살해 위협, 이로 인한 방글라데시 군경의 이동 통제와 폭력 등은 로힝야 난민의 삶을 더욱 힘겹게 하고 있다. 특히 외부 원조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난민들에게 국제사회의 재정지원 축소는 치명적이다. 최근 유엔 세계식량계획(World Food Program)은 재정부족으로 로힝야 난민에게 지급하는 식량배급을 월 12달러에서 8달러로 축소했다. 이제 캠프 내 생계활동이 허용되지 않는 백만 명의 로힝야 난민들은 한 달 동안 8달러(하루 360원 정도)로 끼니를 해결해야 한다. 출처 - 로이터연합뉴스 로힝야 학살 사건이 발생하고 수년이 흘렀지만 부당한 현실은 변하지 않고 피해자의 인권회복은 도대체 가능하기는 할까 라는 의문이 들 만큼 멈춰 서있다. 이런 답답한 현실에서 새로운 이슈는 계속 터지고 사람들의 관심이 그쪽으로 쏠린다. 그래서 유효기간이 길지 않은 관심과 비정한 현실이 가끔 원망스럽다. 그래도 시선을 현장으로 돌리면 생각은 달라진다. 몇 명 되지 않는 활동가와 단 한명의 기자가 참여한 기자회견도 캠프에서 통제된 일상을 사는 로힝야 난민들에게는 소중하고 든든한 연대였다. 매년 학살 기자회견 사진과 동영상을 아디 페북에 올리면 로힝야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요’를 누르고 내 개인계정에 찾아와 ‘친구신청’을 한다. 매년 올해의 기자회견이 마지막이길 간절히 바랬다. 하지만 6년째 하고 있다. 아마 내년에도 그 이후에도 세상은 그리 많이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캠프에서 로힝야 난민들이 우리의 인기 없는 기자회견을 성원한다면 몇 년이고 계속 할 생각이다. 아디도 나름 ‘중꺽마’이다.
2023-09-05 | hrights | 조회: 151 | 추천: 5
신종환 / 공무원   좋은 일은 드물고, 슬프거나 화나거나 어처구니 없는 일들은 빗발치거나 하나의 일에서 그 모든 감정을 느끼게 된다. 좋은 일에 대한 예감은 어긋나고 나쁜 일에 대한 불안함은 맞아떨어지거나 그 이상. 일본은 혹시나는 역시나처럼 하루 200톤 가량의 오염수가 온 태평양에 고루 돌도록 방류를 시작했고 육사에서는 독립투쟁의 최전선에 있던 홍범도 장군의 행적을 공산주의 운운하며 흉상 이전을 검토하겠다고 한다. 더 열거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도 글 분량을 채울 것이다.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이전한다느니, 광복절에 경도된 이념에 대한 서슴지 않는 비난을 보면 화보다는 황당함이 앞선다. 아마도 이는 우리가 지지해온 개념에 대한 적대를 넘어 그 개념들이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인 양 하는 태도에서 느껴지는 것이리라. 하지만 대통령을 위시한 몇몇 인물과 집단이 이 황당함의 모든 배경이라고는 하기는 어렵고, 원인과 현상들이 만들어낸 냄새를 그들이 맡은 결과로 보이고, 이는 고향이란 개념을 상실한 실향민의 마음 같다. 출처 - 위키백과 전 글에서 말한 것처럼 폰 샤미소의 소설 ‘그림자를 판 사나이’에서 주인공은 그림자를 팔고 나서 자책하고 어딜가나 비난을 받는다. 많은 이들은 그림자를 인간의 ‘존엄’으로 은유하고 그의 상황을 환대받지 못하는 상황으로 해석해 환대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인간성의 영역이 축소되고 말소의 위기에 있다고 받아들인다. 어디서도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는 절망하고, 마지막 유혹에서 자신을 지키려는 노력으로 자신의 영혼은 팔지 않는다. 주인공과 그 세계의 인물들에서는 인간으로서의 조건을 상실한 자에 대한 강한 경멸이 느껴지지만 동시에 인간성을 그만큼 버려서는 안된다는 무게감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책에 대한 해석에서 사람들은 환대를 통해 사회안에 들어가며 사람이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환대받고 타인을 환대하는 것이 서로를 인간으로 인정하면서 내가 인간이고 그만큼 타인도 인간이라는 것을 배우는 과정이며, 조건 없는 환대 속에서 서로는 조건 없이 보호되고 존중되어져야하는 존재임을 배운다고 할 수도 있다. 나아가 이런 배움이 있기 위해 그 과정은 암묵적으로 침범되지 않아야 한다. 출처 - pxfuel 하지만 우리 사회에 그런 환대의 문화가 보편적인가 묻는다면 바로 대답하기는 어렵다. 미국의 좀비 아포칼립스 소설 ‘세계대전z’에서 미군은 랜드워리어라는 병사간 동시 소통체계를 갖추고 있는데 좀비에 의해 사망하는 군인들의 공포가 빠르게 전염되어 많은 병력이 짧은 시간 동안 패닉에 빠졌다는 내용이 나온다.   한국도 의미 있는 활동을 하는 이들은 각지에 많고 그 영향을 이어받는 사람도 많지만 다수는 빠르고 쉽게 퍼지는 감정을 받아들이고 서로 재생산한다. 선행을 추겨세울 때도 경멸과 홀대의 다른 형태를 갖추는 경우가 잦다. ‘00같은 가짜 말고 이런 사람이 진짜 00이다’식의 배제 없이는 가치를 추겨세울 수 없는 생각들이 많이 눈에 띈다.   이런 모습은 어느 시점의 세대는 그런 보호와 교류의 과정을 겪지 못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과 그 이전의 세대도 그런 상호 부조의 시절을 잊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인간성은 고유한 것으로 타인의 고저와 상관없이 존재하는 것임을 서로가 받아들임으로써 존속하는 개념이고 개념이라고 표현했지만 이는 몇 가지 지식을 전파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없고 반복적인 감정과 가치의 교류가 어떤 보호 속에서 이루어짐으로써 가능할 것인데, 그것이 반복되고 축적되며 고향의 개념이 없이 실향의 화만 남아 지금처럼 ~로부터의 배척만이 긍정의 형태가 되는 실향의 심정만이 유통되는 것 같다. 지금 한국 사회의 지지, 반발, 분노에서 보호와 가치를 엿보기는 어렵다. 실제 그런 가치를 보존하고 되살리려는 사람들조차 사회에 포섭된 상태에서 글을 유통해야 하기에 누군가의 가치를 배제하는 데에 글의 일부를 할애한다. 그렇지 않은 글도 있지만 그런 글은 다소 세계와 이격된 환상의 목가적 느낌을 준다. 출처 - 저자 실향의 마음은 고향을 생각하고 고향을 알아야 희석되지만 적지 않은 사람이 고향이란 마음의 영토를 잊었을 때 이는 항문이 봉합된 쥐처럼 적대를 통해 그 결핍이 잠시 잊어질 따름이다. 고향의 의미가 사람들의 마음에 흐르지 않고 모두가 고향을 생각할 날이 요원한 날에 루쉰을 생각한다. 그는 강철로 된 방을 두드린다는 마음으로 글을 썼고 그의 삶은 자신의 죽음이 소박하고 조용히 마무리되길 원한다는 바람도 이뤄지지 않았지만 그의 의지로 비춰본 가상의 미래는 지금도 빛이 되어 길을 찾는 사람들의 등대가 되고 있다. 모든 존엄을 둘러싸는 알껍질 같은 개념을 설파하는 사람들의 뜻도 이처럼 고향을 향한 빛을 낸다. 실향의 화와 슬픔이 두터워 지는 나날, 언젠가 그 껍질이 벗겨질 날에 망향의 바람들이 빛이 되도록 오늘을 성실히 다듬어야겠다. 이미지로 아버지의 망향탑을 붙인다. 고향을 잃은 실향민들의 터전과 나는 오래 살았지만 아버지의 작품으로 말미암아 나는 그분들의 고향을 떠올릴 수 있었다. 노력하는 사람들의 글귀도 이처럼 작용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2023-08-29 | hrights | 조회: 145 | 추천: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