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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이동화(아디 활동가),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 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멈춰진 시간, 망각의 기억(이동화)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3-10-25 09:41
조회
109

사단법인 아디 이동화 활동가


 

팔레스타인에서 한국으로 급하게 돌아온 지도 거의 2주정도 됐습니다. 하지만 제 정신은 팔레스타인 어딘가에 두고 온 듯 몽롱하고 멍합니다. 엄청나게 쏟아지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관련 뉴스 때문인지 가슴속 분노와 슬픔은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합니다. 지난 10월 7일, 팔레스타인 무장정파 하마스가 이스라엘이 세운 분리장벽을 넘어 공격할 때 저는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에서 올리브 수확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디는 정의기억연대의 후원을 받아 2021년부터 팔레스타인 나블루스에서 현지여성들의 인권보호를 위한 트라우마힐링센터 사업을 하고 있고, 그 사업의 연장선상에서 팔레스타인에 방문한 것이지요.


10월 7일, 제가 가장 먼저 목격한 광경은 올리브를 따고 있는 곳 반대편에서 피어오르는 커다란 화재였고, 그것은 이스라엘 정착촌민이 하마스 공격에 보복을 하기 위해 팔레스타인 올리브농장에 방화를 한 것이었습니다. 올리브 수확을 마치고 나블루스로 돌아왔을 때 현지 사람들에게서 기쁨과 우려를 동시에 보았습니다. 가자가 봉쇄된 지 15년, 높이 8미터의 거대한 분리장벽이 가자지구를 둘러친 지 21년 만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장벽을 넘어 자신들의 예전 땅이었던 지금의 이스라엘에 도달했다는 기쁨을 드러냈습니다. 동시에 이스라엘의 잔혹한 보복 군사공격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저를 포함한 아디의 팔레스타인 방문팀은 안전확보를 위해 서둘러 현지 일정을 종료하고 귀국 편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소요된 며칠 동안 저는 현지 활동가들과 많이 언쟁했습니다. 어떠한 이유로도 민간인과 비전투요원을 살해하고 납치하는 전쟁범죄는 용납할 수도 동의할 수 없다고 주장했고, 현지활동가에게는 제 주장이 현실을 모르는 순진한 공자님 말씀처럼 들렸나봅니다. 그들은 10월 7일의 하나의 사건이 아닌 지난 75년 동안 자신들이 당했던 고초를 이야기하며 우리에게도 당신들과 같은 삶을 살 권리가 있다고 했습니다. 서로 다른 말을 하는 평행선과도 같은 언쟁 속에서 현지 활동가는 수십 년 동안 팔레스타인 아이와 여성, 민간인이 살해당할 때 세상은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어느 누가 우리 편에서 목소리를 내준 적이 있었느냐? 라고 항변할 때 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사진 1. 나블루스 부린마을, 이스라엘 정착민에 의해 방화되는 팔레스타인 올리브 농장, 사진 출처: 한톨


우려했던 대로 하마스의 공격은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왔습니다. 과거의 선례처럼 이스라엘은 민간인까지 무차별적으로 살해하는 보복군사공격을 시작했고 이번에는 전 세계의 여론의 지탄도 함께 따라왔습니다. 하마스의 민간인 살상 관련 뉴스는 정제되지 않고 사실관계도 불분명한 채 공중파, 케이블, 신문, 심지어 개인의 sns를 타며 엄청나게 전파됐습니다. 그리고 가자지구의 알아흘리 병원이 공습으로 큰 피해를 봤다는 소식에 전 세계 여론은 다시 한 번 출렁거렸고 지금은 서로의 탓이라며 책임을 떠넘기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가자지구와 서안지구의 죽음의 시간은 계속 흘러갑니다. 이스라엘의 사망자 수는 멈췄고 팔레스타인 측 사망자와 부상자는 계속 늘어만 갔습니다. 사망자와 부상자의 절반 이상이 아이와 여성이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관심은 하마스의 만행과 알 아흘리 병원 폭격이 누구 소행인지에서 멈춰 있는 듯합니다.


지중해에 맞닿아 있고 서울시 절반가량 크기의 가자지구는 세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고 외부로 연결된 모든 도로가 봉쇄된 감옥과도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번 사태를 통해 부가적으로 알게 된 사실입니다. 가자지구는 외부에 의해 완벽하게 봉쇄됐으면서도 또 외부에 완전하게 의존해야만 하는 지역입니다. 이런 가자지구에 이스라엘은 전기를 끊고 물을 끊었습니다. 모든 물류의 흐름을 차단했습니다. 하늘에서 전단지를 뿌리며 남쪽으로 이동하지 않으면 하마스편이라 간주하고 폭격하겠다고 연신 협박합니다. 두려움에 떨며 남쪽으로 이동한 사람들이 있는 반면 자포자기 심정으로 떠나지 못하는 사람도 엄청나게 많습니다. 가자지구 현지에서 전해주는 소식은 200만명의 가자지구 사람들이 하루하루가 위태롭고 절박한 상황속에서 지내고 있음을 말해줍니다. 이들이 갈 만한 안전한 곳은 딱히 없습니다. 지난 23일 월요일 하루 동안 만 이스라엘 공중 폭격으로 사망한 가자지구 민간인 수만 어린이 182명을 포함하여 436명이 사망했습니다. 지금 이순간도 이스라엘의 공중 폭격이 이어지고 지상전을 위한 무시무시한 탱크와 전차는 가자지구 코앞에서 대기중 입니다.


사진 2. 10월 22일 팔레스타인 연대집회, “이스라엘은 민간인 학살을 멈춰라” by 아디


어느 순간 우리의 기억은 멈춰졌습니다. 언론은 연신 하마스의 악행을 계속 선전합니다. 한국의 몇몇 언론사는 현지에 기자를 파견하며 현지소식을 전하고 있지만 그들은 비극의 한 면 만을 강조합니다. 만약 그들이 가자지구에 있다면 그들이 바라본 세상은 공포와 죽음, 사방이 벽으로 막힌 절망적인 현실일 것입니다. 또한 팔레스타인에는 가자지구만 있지 않습니다. 서안지구 역시 공격받고 있습니다. 10월 7일 이후 서안지구에서도 이스라엘 군의 군사공격으로 1,400명 이상이 체포되고 90명 이상이 사망했습니다. 아디의 현지 활동가역시 이스라엘군이 발포한 유탄에 맞아 부상을 당해 병원으로 후송됐습니다. 서안지구의 대부분의 도시는 이스라엘군에 의해 봉쇄됐고 아디의 센터 역시 현재 문을 닫은 상태입니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많은 사람들은 하마스가 이 지옥의 문을 연 당사자이고 10월 7일부터 비극이 시작됐다고 생각합니다. 안타깝게도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생각은 완전히 다릅니다. 유엔에서는 팔레스타인을 지칭할 때 Occupied Palestinian Territories 즉 점령된 팔레스타인 지역이라고 합니다. 이번 사태는 긴 점령의 역사 중 하나의 사건이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점령의 상징과도 같은 분리장벽이 처음 무너지고 본인의 고향에 발을 딛는 최초의 기억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동안 수많은 보도를 통해 팔레스타인은 점령됐고 점령이 불법이라 알려졌지만 사람들은 기억하지 못합니다. 이 사태 이전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평화롭게 일상을 살고 있었다는 생각은 착각에 불과합니다..


이번 비극적인 사태를 통해 저는 인류의 양심이 시험대에 올랐고, 그동안 국제사회가 구축한 신념의 토대는 그 앙상함을 고스란히 드러냈다고 생각합니다. 하늘을 찢을 듯한 전투기의 굉음과 곧바로 이어지는 폭격의 섬광은 인구 230만의 가자를 죽음의 도시로 만들었습니다. 쉴 새 없이 밀려드는 부상자와 사망자로 병원은 이미 아수라장이 돼버렸고, 폭격으로 무너진 건물의 잔해 속에서 주민들은 필사적으로 맨손으로 콘크리트 잔해를 파헤치고 있지만 그 밑에 갈린 아이들은 서서히 숨을 거두고 있습니다. 잔인한 세상의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고통 받는 이들의 절규는 점령의 담장을 넘지 못합니다. 이들의 절규가 마지막 숨을 다할 때 우리가 믿는 양심과 신념역시 끝날 것입니다. 이번 사태로 인해 사망한 모든 이들의 명복을 빌며 하루빨리 이 비극이 끝나길 간절히 바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