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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이동화(아디 활동가),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 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실향 속에 망향의 씨를 심기(신종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3-08-29 09:58
조회
141

신종환 / 공무원



 

좋은 일은 드물고, 슬프거나 화나거나 어처구니 없는 일들은 빗발치거나 하나의 일에서 그 모든 감정을 느끼게 된다. 좋은 일에 대한 예감은 어긋나고 나쁜 일에 대한 불안함은 맞아떨어지거나 그 이상. 일본은 혹시나는 역시나처럼 하루 200톤 가량의 오염수가 온 태평양에 고루 돌도록 방류를 시작했고 육사에서는 독립투쟁의 최전선에 있던 홍범도 장군의 행적을 공산주의 운운하며 흉상 이전을 검토하겠다고 한다. 더 열거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도 글 분량을 채울 것이다.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이전한다느니, 광복절에 경도된 이념에 대한 서슴지 않는 비난을 보면 화보다는 황당함이 앞선다. 아마도 이는 우리가 지지해온 개념에 대한 적대를 넘어 그 개념들이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인 양 하는 태도에서 느껴지는 것이리라.



하지만 대통령을 위시한 몇몇 인물과 집단이 이 황당함의 모든 배경이라고는 하기는 어렵고, 원인과 현상들이 만들어낸 냄새를 그들이 맡은 결과로 보이고, 이는 고향이란 개념을 상실한 실향민의 마음 같다.


출처 - 위키백과


전 글에서 말한 것처럼 폰 샤미소의 소설 ‘그림자를 판 사나이’에서 주인공은 그림자를 팔고 나서 자책하고 어딜가나 비난을 받는다. 많은 이들은 그림자를 인간의 ‘존엄’으로 은유하고 그의 상황을 환대받지 못하는 상황으로 해석해 환대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인간성의 영역이 축소되고 말소의 위기에 있다고 받아들인다. 어디서도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는 절망하고, 마지막 유혹에서 자신을 지키려는 노력으로 자신의 영혼은 팔지 않는다.



주인공과 그 세계의 인물들에서는 인간으로서의 조건을 상실한 자에 대한 강한 경멸이 느껴지지만 동시에 인간성을 그만큼 버려서는 안된다는 무게감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 책에 대한 해석에서 사람들은 환대를 통해 사회안에 들어가며 사람이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환대받고 타인을 환대하는 것이 서로를 인간으로 인정하면서 내가 인간이고 그만큼 타인도 인간이라는 것을 배우는 과정이며, 조건 없는 환대 속에서 서로는 조건 없이 보호되고 존중되어져야하는 존재임을 배운다고 할 수도 있다. 나아가 이런 배움이 있기 위해 그 과정은 암묵적으로 침범되지 않아야 한다.



출처 - pxfuel


하지만 우리 사회에 그런 환대의 문화가 보편적인가 묻는다면 바로 대답하기는 어렵다. 미국의 좀비 아포칼립스 소설 ‘세계대전z’에서 미군은 랜드워리어라는 병사간 동시 소통체계를 갖추고 있는데 좀비에 의해 사망하는 군인들의 공포가 빠르게 전염되어 많은 병력이 짧은 시간 동안 패닉에 빠졌다는 내용이 나온다.


 

한국도 의미 있는 활동을 하는 이들은 각지에 많고 그 영향을 이어받는 사람도 많지만 다수는 빠르고 쉽게 퍼지는 감정을 받아들이고 서로 재생산한다. 선행을 추겨세울 때도 경멸과 홀대의 다른 형태를 갖추는 경우가 잦다. ‘00같은 가짜 말고 이런 사람이 진짜 00이다’식의 배제 없이는 가치를 추겨세울 수 없는 생각들이 많이 눈에 띈다.


 

이런 모습은 어느 시점의 세대는 그런 보호와 교류의 과정을 겪지 못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과 그 이전의 세대도 그런 상호 부조의 시절을 잊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인간성은 고유한 것으로 타인의 고저와 상관없이 존재하는 것임을 서로가 받아들임으로써 존속하는 개념이고 개념이라고 표현했지만 이는 몇 가지 지식을 전파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없고 반복적인 감정과 가치의 교류가 어떤 보호 속에서 이루어짐으로써 가능할 것인데, 그것이 반복되고 축적되며 고향의 개념이 없이 실향의 화만 남아 지금처럼 ~로부터의 배척만이 긍정의 형태가 되는 실향의 심정만이 유통되는 것 같다.



지금 한국 사회의 지지, 반발, 분노에서 보호와 가치를 엿보기는 어렵다. 실제 그런 가치를 보존하고 되살리려는 사람들조차 사회에 포섭된 상태에서 글을 유통해야 하기에 누군가의 가치를 배제하는 데에 글의 일부를 할애한다. 그렇지 않은 글도 있지만 그런 글은 다소 세계와 이격된 환상의 목가적 느낌을 준다.



출처 - 저자


실향의 마음은 고향을 생각하고 고향을 알아야 희석되지만 적지 않은 사람이 고향이란 마음의 영토를 잊었을 때 이는 항문이 봉합된 쥐처럼 적대를 통해 그 결핍이 잠시 잊어질 따름이다.



고향의 의미가 사람들의 마음에 흐르지 않고 모두가 고향을 생각할 날이 요원한 날에 루쉰을 생각한다. 그는 강철로 된 방을 두드린다는 마음으로 글을 썼고 그의 삶은 자신의 죽음이 소박하고 조용히 마무리되길 원한다는 바람도 이뤄지지 않았지만 그의 의지로 비춰본 가상의 미래는 지금도 빛이 되어 길을 찾는 사람들의 등대가 되고 있다.



모든 존엄을 둘러싸는 알껍질 같은 개념을 설파하는 사람들의 뜻도 이처럼 고향을 향한 빛을 낸다. 실향의 화와 슬픔이 두터워 지는 나날, 언젠가 그 껍질이 벗겨질 날에 망향의 바람들이 빛이 되도록 오늘을 성실히 다듬어야겠다.



이미지로 아버지의 망향탑을 붙인다. 고향을 잃은 실향민들의 터전과 나는 오래 살았지만 아버지의 작품으로 말미암아 나는 그분들의 고향을 떠올릴 수 있었다. 노력하는 사람들의 글귀도 이처럼 작용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