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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한 혐오란 없다(이서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3-03-07 16:32
조회
240

이서하 / 회원칼럼니스트



개강을 앞두고 수업 정보를 얻고자 접속한 대학생 커뮤니티, 에브리타임에는 오늘도 혐오 발언이 오가고 있었다. 어제는 페미니스트가, 저번 주에는 장애인이, 그 이전 주에는 길고양이가 혐오의 대상이었다. 이번에는 중국인이었다. “난 착한 중국인은 좋아함. 그러니까 난 혐오자가 아님.”이라는 말이 수십 개의 동의를 받고 추천 게시물로 올랐다.



그리 낯선 말은 아니다. 단어만 달라질 뿐 이와 비슷한 문장은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다. 아이들이 싫은 게 아니라 시끄러운 아이들이 싫다, 페미니스트가 아니라 일부의 남자를 혐오하는 사람들이 싫다, 이동권 시위로 등교를 방해하는 장애인은 싫지만 조용히 지내는 장애인은 지지한다는 말 따위다. 물론 이는 혐오를 정당화하기 위해 내세우는 변명에 불과하다. 그들의 논리는 결국 ‘어떤 피해도 보고 싶지 않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시대는 피해당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역시도 일종의 특권임을 망각한 시대다.



출처 - 경향신문


 

세상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며 인권의식도 진보했다. 적어도 오늘날의 우리는 타인을 차별하는 행위가 부끄러운 일이라는 사실 정도는 알게 되었다. 그래서일까, 차별과 혐오에 어떻게든 이유를 붙이려는 사람이 늘어났다. 이렇듯 자신이 합리적인 행위를 하고 있다 믿는 이들은 단지 상대를 싫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상대를 싫어할 이유가 충분하다며 혐오를 정당화해 잘못된 사고방식을 세상에 전달한다.



혐오와 차별은 사회적, 경제적 위기가 닥쳤을 때 급속도로 확산된다. 사회경제적 위기 속에서 개개인의 일상과 지위가 불안해지자 안전에 집착하게 되며 평소 취약한 지위에 있거나 사회가 편견을 가지고 있던 소수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흑사병 시기에 일어난 유대인 학살, 중세에서 근대로 전환되는 불안정한 시기에 일어난 마녀사냥 등이 증명하듯 2020년의 팬데믹 역시 혐오와 차별이 확산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었다. 물론 국제사회는 이런 상황을 예견했다. <COVID-19와 인권 유엔 사무총장 정책보고서>(2020)에서 “평등, 비차별, 포용이 이번 위기의 핵심이다”라는 점을 분명히 하거나, 유엔 인권최고대표의 <COVID-19 지침>(2020)에서 코로나 피해를 막는 정책에서 단 한 사람도 소외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 역시 그런 우려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말대로 포용은 혐오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가치다. 하지만 포용의 정신을 가지기 어렵다면, 손해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바꿀 수 없다면 아주 조금 사고를 전환해보는 건 어떨까.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상 속에서 아무 손해도 보지 않고 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살면서 한 번쯤 손해를 봐야만 한다면 악덕 사장을 만나 임금 미지급에 시달리기보단 세상을 조금 더 나아지게 하는 과정에서 잠시의 어려움을 겪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물론 손해의 총량은 정해져 있지 않다. 하지만 혐오의 총량 역시 마찬가지다. 정해져 있지 않기에 줄일 수도 있다. 선구자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모두가 선구자다. 잠시의 불편을 감내하고 선구자가 될 수 있다면 손해라 칭하긴 어려운 일이다.


출처 - 네이버포스트


독일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인 카롤린 엠케는 저서 “혐오사회”에서 혐오에 혐오로 맞서 그들이 원하는 모습에 가까워져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와 함께 “증오의 큰물이 계속 부풀어 오르는 것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 모든 이가 딛고 설 수 있는 튼튼한 지반을 닦아놓는 것.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라고 말한다. 혐오의 연쇄를 끊되, 혐오의 물결 앞에서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맞서기를 멈추지 말라는 뜻이겠다. 언젠가 더는 상대를 손쉽게 혐오할 수 없는 시대가 오도록 말이다.



누군가는 개개인의 힘만으로 무엇을 할 수 있냐고 되물을 것이다. 그러나 혐오 역시도 개인의 생각일 뿐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이를 끊어내려는 목소리가 모여 정책을 바꿔나가고 포용의 정신을 계속해서 가르쳐 나간다면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이 되듯 점차 나와는 다른 상대의 모습도 포용할 줄 아는 사람들이 이 사회를 채우게 되지 않을까. 어지러운 혐오의 시대에 누구 하나 휩쓸리지 않고 무사히 빛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