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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빈곤 포르노와 로벤스 보고서(김태민)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2-12-21 09:50
조회
289

김태민 / 회원 칼럼니스트


 

영부인이 동남아 순방 중 찍은 사진을 두고 ‘빈곤 포르노’ 논란이 이는 걸 보자 지난해 전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대사 한 대목이 떠올랐다. 기훈이 프론트맨에게 “왜 그런 짓을 벌이는 거지”라고 묻는다. 프론트맨은 “그냥 꿈을 꿨다고 생각해. 당신에게는 그렇게 나쁜 꿈도 아니잖아”라고 대답한다. 체스 말과 체스 선수의 대화처럼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대화다.


빈곤 포르노의 말이 되어버린 수많은 아동들이 빈곤 포르노를 기획한 해외 자본과 유명 인사들을 찾아가 “왜 그런 짓을 벌였느냐”고 질문하는 모습을 상상해보자. 이때 고작 얻게 되는 대답은 아마 다음과 같지 않을까. “고통스러운 과거는 그저 꿈을 꾸었다고 생각해 두게. 원조도 받았는데 그다지 나쁜 꿈도 아니지 않나.” 해외자본의 수탈, 국제분업에 의한 계급 분할은 금세 ‘원조’라는 나쁘지 않은 꿈으로 변모한다.


왜 그런 짓을 벌였냐고 질문하면 당신도 즐기지 않았냐는 남성 쇼비니즘적인 대답이 돌아오든가, 잘 생각해보면 그렇게 나쁜 일도 아니라며 다시 생각해볼 것을 강요받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유에 대한 답은 얻지 못한다. 당신도 그 관계에 적극 참여하지 않았느냐는 반문이 되돌아올 뿐이다. 노동자와 사업주의 관계도 따지고 보면 그러한 관계다. 작업장을 가르는 계급적 분할과 사회적 적대는 임금과 노동의 교환관계 속에서 그다지 나쁘지 않은 꿈이 되어버린다.


계급 간의 적대가 그다지 나쁘지 않은 꿈인 것은 자본을 숭상하는 보수 진영의 입장만은 아닐 것이다. 평택 SPL 제빵공장 직원 기계 끼임 사망 사고에서부터 이태원 참사까지 시민의 안전보건에 대한 위협이 일상화되는 와중에 진보정당에서는 안전보건의 자율 규제를 제안하고 있다. 이런 제안이 별로 놀랍지 않다. 기업도 국회의원도 대통령도 비즈니스 친화적인 자율 규제를 입 냄새 날 정도로 찬양하는 상황에서 자율 규제의 원리가 비경제적인 영역에 거리낌 없이 침투하는 양상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리라.


하지만 노동 개악을 막기에 급급한 국면에서 진보정당이 자율 규제를 산업재해의 해결책으로 제출할 때 우리는 사회 내부의 계급적 분열을 가리키던 정치가 소멸되고 수평적인 개인들의 자율적인 조직과 협치의 인식론만 남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계급적 현실은 무의식으로 침전될 뿐만 아니라 협력이라는 인식론의 도움을 받아 그다지 나쁘지 않은 꿈이 되어버린다.


물론 정의당에서 영국의 <로벤스 보고서>를 번역 발간하면서까지 제안한 안전보건체계의 자율 규제가 규제 완화의 취지는 아닐 것이다. 더하여 국가나 정부로부터 일방적으로 내려오는 법령이 사업장에 따라 달라져야 할 안전보건상의 조치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다는 주장도 공감할 만하다. 하지만 자율 규제가 그토록 자랑하는 성공적인 노사 참여 지향의 프로젝트와 사업장에서의 실제적 경험을 충실히 반영한 위험성 평가가 보장되기 위해서는 노사 간의 힘의 균형이 필요조건이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의 노동조합 조직률은 15% 미만이고 전체 사업장 대비 산업안전보건위원회가 설치된 사업장이 0.25%다. 노사 간의 힘의 균형을 기대할 수 없는 수치다.



중대재해처벌법 입장 발표 (민중의소리)


간단히 떠올려보자. 산업안전보건법에 이미 갖춰진 수많은 규정들이 집행되지 않은 이유를. 기초적인 안전보건의 조치 없이 일하던 노동자들이 열악한 작업장에서 그토록 침묵할 수밖에 없던 이유를. 노동자들의 135건의 안전조치 개선 요구가 묵살된 끝에 노동자의 참혹한 죽음으로 귀결되었다는 한화 공장의 사례를 애써 언급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렇고 그러한’ 사업장의 권력관계를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다. 비대칭적인 힘의 구도 속에서 ‘노사 참여’나 ‘노사 협력’같은 미사여구는 그리 힘 있는 말이 아니다.


따라서 노사 간의 힘의 균형을 만족하지 못할 경우 자율 규제의 본래적 의미가 실은 규제 완화가 아니라 정부의 표준 규범 이상의 규제라는 주장이 얼마나 의미 있는지 의문이다. 또한 <로벤스 보고서>의 자율 규제 프로그램의 ‘본래적’ 규정대로 높은 강도의 자율 규제와 정부 규범이 병존하는 모델이 한국 사회에서 실천적으로 수용될 수 있다고 낙관할 수 없다. 여전히 시장의 자유가 부족하다는 성마른 외침을 일관하는 대통령의 언표와 안전과 보건에서마저 추출해낼 이윤이 있는지 입법 저지와 개악 시도를 남발하는 기업의 태도를 보면 말이다.


자율 규제 프로젝트가 제시하는 사업장의 수평적인 파트너십, 성과 중심의 위험 관리, 노사 참여 지향의 규제라는 꽤 나쁘지 않은 청사진은 흡사 작업장의 계급 관계가 감쪽같이 사라진 듯한 만족감을 선사한다. <로벤스 보고서>로부터 이어지는 자율 규제 프로젝트는 적어도 안전보건 문제에 관해서는 노사 간의 공통의 이해관계가 형성될 수 있다는 특권적인 전제를 두고 있다. 하지만 노사 간의 공통의 이해관계라는 말도 신자유주의 거버넌스가 늘상 이어오던 동어반복 놀음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렵지 않게 ‘노사 협력 지향’의 자율안전경영을 위해 반드시 장착해야 할 기업가적 에토스를 떠올릴 수 있다. 작업장에서 발생하는 각종 리스크를 관리 및 경영하는 테크놀로지는 안전보건의 질적 경험이 아닌 고도로 추상화된 경제적 척도들일 것이다. 회사 사정 좀 생각하자는 권고에 맞추어 안전보건 투자를 측정 및 평가하는 재무회계적 기준들은 이미 외부 민간 업체에 마련되어 있다. 노동이 힘을 받지 못하는 사업장 또는 산업에서 재무 계산서에 구속받지 않은 안전의 질적 보장을 요구하던 노동자들은 마지못한 수동적인 수긍에 익숙해졌고 암묵적인 협박, 실직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


그러나 부당한 현실의 끝에서마저 항상 기다리고 있는 것은 언제나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의 상호 협력적인 노무 계약의 환상일 것이다. 심히 미학적으로 구축된 새 안전보건 거버넌스의 자율 규제 프로젝트가 감히 언급하지 못한 계급투쟁은 노동자의 안전과 보건에 대한 대항 담론을 조직할 자기 논술의 언어를 잃어버린 현실 그 자체다. <로벤스 보고서>가 산업재해의 주요 원인으로 노사 당사자 간의 무관심을 지적하고 산업재해를 노사 협력을 통해 축출할 수 있는 외적 위협으로 치부하면서 적대 없는 연대, 계급 없는 투쟁을 호소할 때 너무 많은 사실관계가 왜곡된다.


그러므로 가정과 전제를 다시 설정해보는 것은 어떨까. 정확한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양보할 수 없는 전제들을 살펴보는 작업은 운동 자체가 위협받는 지금 그 어떤 작업보다 긴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구조 없는 야만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기에, 그저 생명의 연장을 위해 삶을 폐기한 벌거벗은 개인이 아니기에 좀 더 근본적인 가정들에 연연해야 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