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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올바르게 공감하는 법(이서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3-01-04 09:27
조회
255

이서하 / 회원칼럼니스트


 

2022년 12월 18일에 열린 월드컵 결승전은 아르헨티나와 프랑스의 격돌이었다. 대한민국과는관련 없는 나라들이지만, 주변에는 열성적으로 응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 모두가 축구 팬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축구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리오넬 메시가 은퇴 무대를 월드컵 우승으로 장식할 수 있기를 바라며 아르헨티나를 응원했다.


 

이렇듯 우리는 직접 관련 있는 일이 아니더라도 쉽게 상대의 심정을 이해하고, 감정을 이입할 수 있다. 드라마를 보며 주인공의 고난에 함께 슬퍼하고 악역에게 화를 내는 것, 친구에게 좋은 일이 생겼을 때 함께 기뻐하고 축하해주는 것 모두 이러한 공감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요즈음 시대에는 이러한 공감이 줄어들고 있다는 평이 나오고 있는 동시에, 자신이 원할 때 원하는 집단에게만 공감한다는 의미의 ‘선택적 공감’이라는 단어가 새로이 생겼다.


 


출처 - 중앙일보


공감은 동화와는 조금 다르다. 공감은 상대에게 완전히 이입한다기보다도 ‘너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며 상대의 감정이나 상태를 있는 그대로 이해해 하나의 사실로써 받아들이는 행위에 가깝다. 그러나 과잉된 공감, 선택적으로 발휘되는 공감은 이러한 이해의 수준을 넘어서 집단과 자신을 동일시하도록 한다. 이는 “내 편 아니면 적”이라는 흑백논리의 발단이 되고, 나와 다른 입장에 선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게끔 한다. 즉 공감이 이해가 아닌 타자에 대한 몰이해를 불러오는 역효과를 낳은 것이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는 2021년 12월부터 장애인 이동권, 교육권, 탈시설권리 등이 포함된 장애인권리예산 반영을 촉구하며 지하철을 타고 내리는 방식의 시위를 진행하고 있다. 일 년간 이어진 시위를 두고 여전히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뉜다. 출근과 등교에 지장이 생긴다며 시위를 비난하는 부류, 지하철을 타고 내리는 일만으로도 지연이 생긴다는 것은 오히려 장애인 이동권이 확보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사례라며 시위를 지지하는 부류다.


 

이제 한 번쯤 물어봐야 할 때다. 어째서 시위가 진행되는 일 년 동안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을까? 어째서 사람들은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정부를 비판하는 대신 해결을 촉구하며 시위를 진행하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일까? 작년 12월 서울교통공사에서 내세운 시위 대응책은 시위가 열리는 역을 무정차 통과한다는 것이었고, 이에 일각에서는 시민에게 불편함을 느끼게 해, 정부가 아닌 시위대에게 화살을 돌리고자 이 같은 대응을 내놓은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다. 그리고 2023년 1월, 그런 비판이 무색하게도 탑승 시위를 진행하려던 전장연 활동가들은 개찰구 앞에서 경찰의 방패 앞에 가로막혔다.


 

왜 열차를 타고 내리는 행위 하나에도 많은 불편함이 따를뿐더러 때로는 목숨도 걸어야 하는 장애인의 입장에 공감하는 사람은 이토록 적을까. 시위를 비난할 수 있다는 것은 장애인이 교통수단을 이용할 때 겪는 불편함보다도, 지금 당장 난처함을 겪는 자기 자신과 같은 이들의 집단에 대해 더욱 손쉽게 공감하기 때문이리라. 공감이라는 단어로 정당화되고 견고해지는 내집단에 대한 옹호는 자연스럽게 외집단에 대한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비단 전장연 시위에 대한 반응뿐 아니라, 각종 사회 문제와 정치 현장에서 이러한 선택적 공감이 계속해서 되풀이되며 대립이 격렬해지고 첨예해지고 있다.


 

전장연 시위를 지지하는 목소리 중에는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다”며 상대에게 공감을 유도하는 표어가 종종 보인다. 그런 표어를 볼 때마다 나는 언젠가 자신의 일이 아닐지라도 편히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세상이 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열차와 승강장 사이의 거리가 멀어서 휠체어 바퀴가 빠지기 때문에, 지금의 지하철 역사는 휠체어로 이동하기 힘들기 때문에, 저상버스와 장애인콜택시의 숫자가 적기 때문에, 예산이 수립되지 않아 정책을 시행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이 시위가 필요하다. 누군가는 지금의 대중교통이 완벽하다고 느낄지언정 또다른 누군가는 지금의 대중교통을 불편히 여긴다. 그러니 이런 고생을 감수할 만큼 필요한 일이구나, 그렇게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일까.


 

공감의 중요성은 많은 사람이 이미 인식하고 있다. 공감은 우리가 타인을 이해하고 연대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준다. 나는 여전히 이런 마음들이 가지는 힘을 믿는다. 그렇기에 필요한 것은 단순히 공감하는 것이 아니라 공감의 범위를 넓히는 일이다. 함께하고 싶은 이들, 내가 편하게 여기는 이들에게만 공감하는 것은 연대라 불리기에 다소 무리가 있다. 아마도 그것은 단순한 호감에 보다 가까울 것이다.


 

잘 알지 못하는 이들, 나와 다른 입장마저도 헤아리고 살필 때 그것을 비로소 공감이자 연대라고 부를 수 있는 게 아닐까. 지금 내가 공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과연 옳은 방식인지, 내가 나만의 생각에 갇혀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한번 되돌아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변화를 도모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언젠가, 세상의 많은 투쟁이 비난 대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라는 이해의 말을 들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