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우리시대

‘우리시대’는 언론계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이 멘토가 되어, 작성한 칼럼에 대한 글쓰기 지도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이창우/ 회원 칼럼니스트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갈등을 만드는 것이 '상대적 박탈감'이라면, 끝없이 회한에 젖도록 하는 것이 '상대적 공감'인 것 같다. 물론 개인적인 차이가 있으니 내 생각을 중심으로 말하려 한다.  상대적 박탈감은 개인에서 시작해 사회와 세계로까지 확장될 수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근원을 찾다 보니 적어도 나에게만은 '가족'이었다.  내 의지로 태어나지 않았기에 분명 부모 덕분에 나는 이 세상을 만났다. 그렇다면 내 부모는 어떤 환경에서 나를 태어나게 했고 성장하도록 만들었는지가 중요해진다. 대다수 사람은 성장하면서 부모의 삶에서 보고 들으며 우선순위를 배우게 된다.  부모의 가치관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나의 부모가 보여주고 훈육의 형태로 학습하도록 했던 것들, 생활인으로 눈에 드러난 다양한 측면에서 부모를 관찰할 뿐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의 뇌는 그것마저도 선별적으로 윤색하면서 자극적으로 다가왔던 것을 중심으로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어린 시절 내가 느낀 상대적 박탈감으로 뚜렷하게 남은 것이 '도시락'이었다. 지금은 초등학교라 불리지만 국민학교를 나온 나의 경우에는 '급식'이란 말도 없었다.  어머니께서는 맞벌이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아버지의 직업이 박봉이었기 때문이라 했다. 지금은 직업 선호도가 높은 공무원이었는데 말이다. 그 시절 공무원은 가욋돈이 월급보다 많아서 살기가 좋았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그 상황이 내 아버지에게 해당되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존경심을 갖고 어머니의 고군분투기가 시작되었다고는 해도 그것은 어머니의 선택을 정당화시킨 일면도 있다. 어쨌거나 어머니의 경제활동으로 나의 유년기는 애정결핍을 대가로 그럭저럭 경제적 궁핍을 피해 평범하게 살아왔다.  어머니의 분투에 힘입어 나의 도시락을 책임지는 사람은 집안일의 거의 모든 것을 담당하는 식모 언니라 부르던 가사도우미였다. 문제는 그 언니의 선택에 어머니조차 거부할 수 없는 무엇이 있는데, 어머니에게만 주어진 '돌봄'이라는 성역할이었다.  당시 맞벌이 부부에게 돌봄 노동의 부담은 온전히 개인의 몫이었다. 국가의 역할은 생각해보지도 않고 요구할 줄 모르고 당연하게 받아들인 부모의 선택은 그저 현실이다. 부모는 혼자 크는 아이가 어른이 되기까지 결핍을 알아차리지도 공감하지도 못한다.  내게는 부재중인 어머니를 대신할 대모의 결정이 절대적인 환경에서, 내 도시락과 주변 친구들이 가져오는 도시락의 격차가 너무 컸기에 생긴 심한 상대적 박탈감이 어린 시절 보이는 것의 전부였다.  그것만이 그토록 중요했던 초등학교 시절의 내게 그 이후 성장기 기억에 상대적 박탈감은 남아 있지 않았다. 스스로를 돌보는 일에 익숙했던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살아남을 이유를 찾아냈기에 가능한 일이다.  성장하는 과정에서 선택한 그 길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다고 생각하는 지점에서야 만나는 감정, 뭔가 이게 아닌데 하는 마음이다. 당연하게 생각하며 한참을 걸어왔던 길이 아무래도 아닌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경우도 익숙하다.  잘못된 것을 알아차리고 다시 돌아가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이론적으로나 물리적으로 내가 과거로 다시 돌아가 그 선택을 다시 할 수는 없지만, 상상으로는 가능하다.  그 가능성에 매달리게 되면 딱지가 하나 붙여지면서 졸지에 '사회 부적응' 낙인마저 감당해야 되는 게 아닐까도 싶다. 하지만 별로 권하고 싶지는 않다.  지금까지 지나온 그 세월의 수고와 고통, 스스로 위로하기 위해 저질렀던 자율을 내세우던 강제, 자발적 자유의 속박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나의 잘못된 선택을 외면하도록 한다. 매몰비용은 나답게 살아내기 위해 필요했다.   출처- pixabay    국가의 성장이 숫자로 확연해도 개인의 성장을 고통스럽게 한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국가의 성장에서 만나는 상대적 박탈감과 능력주의의 불공정을 주변에서 너무도 잔혹하게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의 성장우선주의 정책은 부의 양극화도 가져왔다. 어떤 의미에서 국가는 '미필적 고의'를 당연시하며 위세를 부려온 것이기도 하다. 그런 행위를 멈추게 할 수 있는 역할을 가진 '법과 정의'는 대한민국이 수립된 이후부터만 따져 보아도 수평을 이루지 못하는 저울로 있다.  일상에서 정의가 상대적으로 비틀거리고, 개인이 추구하는 선함이 공공선으로 나아가는 가치는 힘을 잃었다. 그래도 이 사회가 표방하는 능력주의에 빨려 들어가는 그놈의 '매몰비용'을 앞으로 남은 시간을 위해 아낌없이 버리는 게 나답게 살아갈 수 있는 첫걸음이기도 하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는 언제나 있었다. 처음부터 결과에만 조급하게 매달리지 않고 과정을 통해 내일의 가능성을 도모할 수 있다. 나에게서 성취하는 삶이 가능하다는 믿음으로 '상대적 공감'이 만들어지면 행복한 개인이 함께할 건강하고 희망찬 사회가 열릴 것이다.  
2022-09-27 | hrights | 조회: 216 | 추천: 1
이서하/ 회원 칼럼니스트  주위에서 비슷한 취미를 가진 사람을 찾기가 어려웠다. 전시회도, 뮤지컬도 고향에선 하지 않았다. 넌지시 물어봐도 취향이 아닌 일에 몇 시간을 들여 서울까지 가려고 하는 친구는 없어 권유하기가 멋쩍었다. 취미를 함께할 사람을 찾고자 고민 끝에 시작한 SNS에서도 사정은 비슷했다. 좋아하는 뮤지컬 작품을 논하던 중 아직 이 작품을 보지 못해 어떤 내용일지 궁금하다는 댓글을 받으면 같이 보러 가자고 답하곤 했는데, 가끔 “내가 지방에 살아서….” 라는 대답을 들으면 어쩔 수 없이 미안해지곤 했다.  ‘지킬 앤 하이드’나 ‘레베카’처럼 대형 제작사가 만드는 유명작은 짧은 기간일지언정 전국 각지를 돌며 공연하기도 한다. 자본과 수요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영세한 소극장의 공연들은 그러기 쉽지 않다. 기껏해야 한두 군데, 그나마도 가지 않는 일이 빈번하다. 지방민에게는 서울에 가야만 향유할 수 있는 작품이 되는 셈이다.  지갑 사정에 여유가 있을 땐 “올라오기만 하면 까짓 표는 내가 사 줄게” 하고 호기도 부려 보지만 선뜻 수락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남에게 신세 지는 일도 그렇겠거니와 푯값이 해결된다고 교통비, 일정, 숙소 등의 문제가 모두 해결되는 것은 아니니까. 지방에 산다는 이유로 비싸게는 십오만 원, 적게는 삼사만 원 하는 푯값만큼의, 혹은 그 이상의 금액으로 돈길을 만들어 행차해야만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는 사회를 두고 평등하며 공정하다고 말하기엔 무리가 있을 것이다.  사실 문화예술에 대한 격차만을 논할 수 있다면 사정이 좋은 편일지도 모른다. 지방에서는 인근에 병원이 없어 치료에 필요한 골든타임을 놓치거나 병을 키우는 사례도 빈번히 발생한다. 서울 집값이 내려간다는 이유로 소각장, 송전탑, 원전 등을 지방으로 보낸 탓에 해당 지역 주민들은 고통을 받거나, 심하게는 목숨이 위험해지기도 한다. 충청남도의 경우 수도권에 전력을 보내고자 세운 석탄화력발전소로 인해 40년 이상 유해 배출가스, 대기 및 토양오염, 초고압 송전탑 등으로 피해를 겪고 있다. 고리, 월성, 울진, 영광, 고창 등 원전 주변 거주민들의 방사능 피폭 피해에 대한 증언 역시 그렇다.  이런 문제들은 우리 사회에서 충분히 이해받고 있을까. 지난 3월, 주한규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원자력정책센터장)는 충남의 석탄화력발전소 자리에 소형모듈원전을 지으면 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경북 월성원자력 인근 주민으로 구성된 ‘월성원전인접지역이주대책위원회’는 2014년 8월 25일부터 지금까지도 천막농성을 진행하고 있다.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성은 있을 것이다. 과연 이것이 수도권의 문제였어도 해결까지 가는 일이 이처럼 지지부진했을까.  2021년 기준 수도권 인구는 전국 인구의 50.4%에 해당하는 2,605만 명으로 집계되었다. 국민의 절반이 수도권에 살고 있으니 다수의 사고관과 재난 보도 역시 수도권에 집중되곤 한다. 태풍 힌남노는 지난 6일 오전 5시경 경남 통영 부근 해안에 상륙해 제주와 영남 지역에 정전, 침수, 수질 오염 등의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태풍이 물러간 후 SNS와 인터넷 커뮤니티 등지에는 “별일 아니었다”, “기상청이 거짓말을 했다”는 반응이 다수 올라왔다. 이는 지방의 피해가 수도권 중심적 사고에 의하여 어떻게 축소되는지를 잘 보여주는 현상이다. 불빛을 통해 본 서울과 지방의 격차 사진 출처 - © NASA Earth Observatory images by Joshua Stevens, using Suomi NPP VIIRS data from Miguel Román, NASA Goddard Space Flight Center  서울 중심의 경제 발전, 문화시설, 사회 및 정치의 방향성을 비꼬아 만든 ‘서울공화국’이라는 단어가 대한민국에 자리 잡은 지 오래다. 그러나 이 단어는 언제까지고 묵인해서는 안 될, 해결해 나가야 할 과제다. 우리가 지방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곳에도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지방에는 분명히 수도권보다 적은 인구가 산다. 그러나 이것은 지방민이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소외되어야 할 이유가 되진 않는다.  지방 곳곳에 각종 인프라를 설치하고 보도의 초점을 맞추는 일은 단연 정부와 언론의 몫이겠으나, 내가 사는 곳이 전부가 아님을 인지하고 다른 지역에 사는 이들을 이해하며 배려하고자 노력하는 것은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위하여 우리가 실천해야 할 몫일 것이다. 그러니 일단은 바깥의 삶을 기억하는 것부터 시작하면 어떨까. 서울 바깥에도 삶은 있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 앞으로도 여전히, 아주 당연하게도.
2022-09-14 | hrights | 조회: 372 | 추천: 1
김태민/ 회원칼럼니스트  업무상 재해의 인정기준을 설명하던 노무사의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20년 이상 산업안전보건 분야에서 강의하고 투쟁해온 그는 ‘떨어짐 사고’가 얼마나 후진적인 산재인지 강조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는 ‘떨어짐 사고’가 발생한 사업장을 조사할 때마다 노동자가 안전고리가 성가시다며 안전고리 착용을 거부했다는 사업주의 뻔한 거짓말을 직면한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그 거짓말을 경찰과 노동부가 의심하지 않는다며 분노했다. 결국 경찰도 노동부도 사업주도 한 목소리로 노동자 개인의 과실을 사고의 원인으로 지목한다. 이로써 노동자의 죽음에 침전되어 있는 구조적 실체는 전적으로 부인된다.  얼핏 이 이야기를 듣고 나서 다음과 같은 의문 제기를 할 수도 있겠다. 노동자는 이미 죽어 그의 진의를 판별해볼 수 없는 노릇이고 사고 현장에 대한 사실관계 역시 명확히 파악되지 않는 상황인데 경찰과 노동부의 입장에서는 사업주의 말을 믿고 보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그의 죽음이 구조적이라고 단정할 수 없지 않은가? 하지만 산업재해의 구조적 실체를 추적한다는 것은 노동이 노동시장과 생산조직에서 벗어나 단독으로 효과를 산출할 수 없음을 솔직히 인정하자는 전제로부터 시작한다. 자본 없는 임노동을 상상할 수 없듯이 생산체제 없는 산업재해는 상상할 수 없다. 산업재해의 인과를 살핀다는 것은 노동이 생산체제에 포섭되는 과정을 살피는 작업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오히려 ‘구조’ 자체를 도외시하는 황당무계한 시도는 그 의도부터 의심스러울 따름이다.  따라서 구조 분석은 앞선 의문 제기와는 전혀 다른 문제의식을 제기한다. 도대체 어떤 성질의 노동시장과 생산조직에 속해 있기에 작업장의 안전보건조치 미비가 노동자 개인에게 귀속되는 것인가? 노동자의 죽음을 개인화하는 이데올로기는 어떤 생산체제의 원리로 구조화되어 있는가? 이러한 문제의식으로부터 ‘떨어짐 사고’를 살펴본다면 업무 중 추락으로 사망한 노동자의 신체를 조직하는 구조를 표상할 수 있게 된다.  ‘떨어짐 사고’는 매해 업무상 사고 사망의 절반가량을 차지한다. 매해 높은 비율로 반복되는 사고이기에 예측과 예방이 어려운 산업재해로 오해할 수 있지만, 안전장비만 착용해도 ‘떨어짐 사고’의 치명률은 급격히 감소한다. 안전장비 착용 여부와 떨어짐 사망 사고가 높은 상관성을 가지고 있고 그 상관성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면 노동자들이 애써 안전장비를 착용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안전장비를 착용하지 않도록 노동자의 선택이 유도되는 것이 아닌가?  안전장비 미착용으로 초래되는 안전상의 불이익과 작업속도 향상으로 얻게 되는 경제적 이익을 비교해 판단하더라도 자신의 생명을 작업속도와 맞바꾸고 싶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추락사가 안전장비를 애써 착용하지 않는 비합리적인 행동으로부터 비롯되었다면 합리적인 판단을 마비시킨 외적 요인을 탐문해야 한다. 이때 우리는 모든 합리성과 윤리적 판단이 무효화되고 기계적인 생산 활동만이 허용되는 구조적 요인에 도달하게 된다. 노동자의 신체는 작업속도를 위해서 안전수칙을 묵살하고 자신의 생명을 소진하라고 명하는 조직의 명령 체계에 포획되어 있다. Capitalism is failing. People want a job with a decent wage – why is that so hard? | Richard Reeves | The Guardian 사진 출처 - The Guardian  노동자의 죽음에는 조직이라는 계급적 요인이 문신처럼 새겨져 있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우리 시대의 정언명령은 실업을 수치스럽고 공포스러운 것으로 만든다. 실업을 상상해야 하는 우리의 노동이 노무 계약을 맺은 뒤에도 끊임없이 자본을 곁눈질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결국 노동자의 신체는 노동을 정형적으로 구성하는 생산조직의 명령을 따라야 하고 자신의 생물학적 한계와 강도 높은 노동 사이를 줄타기하며 일생을 소진한다. 내일 또다시 일터에 나오기 위해 생명력을 재생산해야 한다는 의무의식과 땀구멍을 조여오는 노동 강도는 이중으로 노동자를 압박한다. 노동자는 자신의 신체를 대표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는 서글픈 일이 벌어진다.  최근 고용노동부 장관은 자신의 신체를 잃어버린 노동자의 처지를 더할 나위 없이 잘 보여주었다. 지난 10일 이정식 장관은 근로시간 유연화에 대한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자 IT기업을 찾았지만 보여주기식 의견수렴을 위해 사측 인사들만 만나고 떠났다. 노동 시간을 논의하는 데 노동자가 배제된 어처구니없는 상황은 노동하는 신체를 통제할 수 없는 노동자의 현실을 적실하게 보여주지 않는가? 이러한 현실을 잘 알고 있을 한국노총 출신 고용노동부 장관이 노동자를 논의에서 배제하는 것은 노동 아닌 돈이 돈을 낳고 자본이 자본을 낳는다는 오랜 자본주의의 신앙에 기초한 것이 아닐까?  노동 분야의 덩어리 규제를 혁파하겠다고 벼르고 있는 윤석열 정부에서는 자본의 언명이 더욱 선명해지고 있다. 소진하라! 소진하라! 소진하라! 끊임없이 축적하라는 자본주의의 지상과제는 노동자들의 생명을 소진시켜 자본 증식에 기여하라는 명령으로 전환된다. 어떠한 수단도 용납된다. 유연근무제와 임금체계 개편으로 노동일과 노동 강도를 강화하고, 공공지출을 삭감해 공공서비스와 복지의 규모를 축소할 수도 있다. 노동 귀족론과 같은 정치적 공세는 언제나 예상 가능한 지점이다.  노동 유연화로 경제적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현 정부가 작은 정부를 자임하는 모습이 블랙유머일 수밖에 없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현 정부가 경제적인 장에서 한 발 물러나 기업을 포함한 민간 행위자들을 위해 자유로운 경제 플랫폼만을 제공하는 기술관료장치로 축소된다는 생각과 달리 정부는 기업을 대신해 “자유”, “시장”, “반공산”을 운운하며 자본주의의 기본 공리를 선전한다. 장기지속의 경기침체로 자본이 더 이상 이윤을 추출할 수 없다고 여겨질 때 국가는 새로운 사회적 규정을 수립하고 착취하기 용이한 형태로 근로시간, 임금, 고용의 형태를 가공한다. 이처럼 소위 “작은 정부”라고 불리는 국가 장치들은 노동자들의 생명이 유용되는 방식에 적극 개입한다.  “자유민주주의”를 기치로 “작은 정부”를 추구한다고 하더라도 국가는 결코 작아지지 않는다. 정부가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의 파업에 대응해 공권력을 투입할 것이라고 공갈할 때에도 국가가 작아지는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장기 경기침체 속에서 국가와 자본 대신 망가지고 해체되는 것은 오히려 ‘사회의 영역’과 ‘공공의 영역’이었다. 그리고 ‘사회성’이 무너질수록 노동자의 신체는 더욱 가혹한 취급을 받을 것이다. 벌써부터 각종 퇴행적인 노동 법안과 생산과정 재편이 준비되어 있지 않은가? 현실이 이러한데도 ‘자유’와 ‘작은 정부’를 자신들의 모토로 삼는 이들에게 묻는다. 당신은 노동자의 신체와 생명이 경제적 야욕에 예속되는 현상마저 “자유”라고 부르고 싶은가?
2022-09-07 | hrights | 조회: 212 | 추천: 3
김지혜 / 회원칼럼니스트 8월9일 신림동의 한 다세대 주택 반지하에서 일가족이 숨진 채 발견되었다. 115년만의 기록적인 폭우가 서울에 쏟아지던 밤이었다. 밤새 쏟아진 비와 빌라 앞 싱크홀은 이들을 급속도로 고립시켰고 끝내 구조되지 못했다. 8월8일 0시부터 8월9일 24시까지의 강수량은 515.5mm였다. 지난해 서울 전체에 내린 비(1,186.5mm)의 43.4%가 단 이틀 만에 내린 셈이다. 이례적인 집중호우로 인해 인명피해도 심각하다. 8월19일 기준 14명이 사망했고, 2명이 실종됐다. 기록적인 집중호우가 주택침수로 이어지면서 반지하에 거주하는 취약계층의 목숨을 앗아갔고 그들의 주거지를 잃게 했다.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있던 빈곤과 불평등의 문제가 이번 재난에서 반지하 침수로 여실히 드러난 셈이다. 출처 - 시사저널 폭우에 침수된 반지하 가정집. 통계청에 따르면 2020년 기준 전국의 반지하 주택은 약 32만 가구에 이른다. 이 중 61%에 해당하는 약 20만 가구가 서울에 집중되어 있다. 같은 건물이라도 지하층과 지상층의 월세가 2배 이상 차이가 나는 곳이 대다수다. 교통비, 식비, 직장이나 학교 등과의 접근성을 고려하여 집을 구하는 이들에게 반지하는 마지막 선택지이자 기회가 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주거공간으로서의 최소한의 권리는 주어져야 한다. 설사 자본주의 경쟁에서 패배하여 지하로 내려간 것이라 표현하더라도 그렇다. 인간은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삶을 살아가는 것은 승리와 패배로 가를 수 없는, 그저 평범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는 평범함에 벌을 주어서는 안 된다. 유엔 해비타트에서는 사람들에게 적절한(adequate) 주택을 공급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안전하고(safe), 안심할 수 있고(secure), 살만하며(habitable), 지불가능(affordable)한 집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단순히 지붕만 있다고 집이 아니다. 집은 더 나은 삶과 미래에 대한 기회를 줄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기후위기로 인한 자연재해는 앞으로 더 잦아질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자연재해는 가장 먼저 빈자를 향할 것이고 그들에게 남기는 피해는 훨씬 클 것이다. 우리 공동체의 일원인 이웃들이 한순간에 유명을 달리한 어이없는 비극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기를 소망한다.
2022-08-31 | hrights | 조회: 212 | 추천: 0
조혜원/ 회원 칼럼니스트  2022년 7월 15일, 한 명의 여성이 남성에 의해 성폭력 피해를 입고 대학교 건물에서 추락해 목숨을 잃었다. '알몸', '나체', '여대생'이라는 키워드를 사용한 언론이 아니었다면 이 사건에 대해 알지 못한 채 지나가는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출처 - 한겨레  많은 여성들이 남성들에 의해서 죽어나간다. 한국여성의전화 등 민간 통계에 따르면 2021년 남편, 애인 등 친밀한 관계의 남성에 의해 살해당한 여성이 97명이다. 살인미수까지 포함하면 285명에 이른다. 언론에 보도된 사건들 중심으로만 통계화한 것이니 현실 속 여성 살해 사건은 더욱 많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살해 이외의 다른 유형의 폭력까지 생각해 보면 수많은 여성들이 젠더 폭력의 피해자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젠더 폭력은 많은 이들을 폭력에 둔감해지게 만들었다.  왜 죽어야만 했을까. 매일매일 새로운 여성의 죽음과 고통을 기사로 접하며 처음에는 들끓어 오르는 분노를 바탕으로 목소리를 냈지만 이러한 목소리는 묵살당해왔다.  사회가 가지고 있는 젠더 폭력에 대한 잘못된 통념이 어떤 것인지, 그것이 왜 문제인지를 지적하더라도 오히려 이를 무작정 비난하는 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목소리를 낼 힘을 잃어버렸다.  젠더 폭력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탓에 사건의 원인 파악과 대책 마련의 과정에서 여성들은 또다시 고통받게 된다. 폭력의 원인과 책임을 피해자에게 돌리며 피해자인 여성을 비난하는 등 2차 피해가 발생하거나, 여성에 대한 폭력을 개인의 문제로 여김으로써 불평등한 권력관계에서 발생한 젠더 폭력의 본질을 외면하게 만들곤 한다.  이러한 왜곡 자체가, 이제는 온 사회가 익숙해져버린 여성 혐오다. 왜곡의 굴레가 반복되는 구조 속에서 이제는 무엇이 문제인지, 이를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에 대해 생각하는 것조차 회의적인 일이 되어버렸다.  ‘인하대 성폭행 사망사건’과 같은 일이 발생하였을 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발생한 구조적 폭력 현상인 젠더 폭력이 단순히 개인 간에 발생한 폭력 또는 불운에 의해 벌어진 하나의 비극으로만 치부되어 보도된다는 점이다.  이번 인하대에서 벌어진 성폭행 사망사건도 역시 ‘대학 내의 무분별한 음주문화’가 문제인 것처럼 보도되었다. 결국 이는 사건의 본질을 왜곡시키며 그 원인을 불평등한 젠더 권력이 아닌 보편적인 안전 문제로 치부해버리는 경향까지 나타났다.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워딩을 이용한 비윤리적인 보도 또한 문제의식을 희석시킨다. 이러한 보도 행태는 사회에 만연한 젠더 폭력의 공론화를 막게 되고 젠더 폭력을 젠더 폭력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상황을 만든다.  인터넷 커뮤니티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미 자정능력을 잃은 온라인 대학 커뮤니티 (에브리타임) 는 “사건은 안타깝지만 이게 왜 젠더 문제냐”라는 이야기로 최소한의 문제 제기조차 막아버린다. 이는 CCTV 증설, 순찰 강화 등 수박 겉핥기식의 대책만 내놓는 결과를 불러온다.  결국 개인의 올바른 성인식 확립이 중요하다. 우리에게는 성평등이 필요하다. 피드를 장식하는 헤드라인 속 타자화된 가해자, 피해자가 아닌 우리가 주인공인 일상에서의 성평등을 확립해야 한다.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 법을 만들거나 개정하고, 형량을 높이고, 언론의 보도 윤리 강령을 다듬고, 온라인 혐오 표현을 제재하는 대안이 필요하다. 그러나 법을 집행하는 법조인의, 보도자료를 작성하는 기자의, 인터넷 커뮤니티를 활용하는 시민의 인식이 변하지 않는 이상 대안은 실현되지 못한다.  젠더 폭력은 ‘단순 해프닝’이 아니다. 반복되는 폭력의 양상이 존재함에도 언제까지 그것이 사회적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며 현실을 외면할 것인지 궁금하다.  젠더 폭력을 젠더 폭력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여성이 여성이어서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또 다른 젠더 폭력이 발생하며 이는 과거의 다른 사건들과 별개로 존재하다 소멸한다. 기존의 차별적인 질서는 재생산될 것이며 우리가 이러한 폭력에 둔감해진 틈을 타 젠더 폭력은 더 늘어날 것이다.  여전히 우리나라에는 페미사이드와 관련된 정부통계가 없다. 사건을 당장 막는 것에 급급하기 보다는 사후에 이 사건을 어떻게 기록하고 이야기하는지에 대해서부터 바꿔나가야 한다.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6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이제는 이 논쟁을 끝낼 때다.
2022-08-24 | hrights | 조회: 277 | 추천: 0
전예원/ 회원 칼럼니스트  한국과 일본의 관계 회복을 위한 노력이 이어지는 요즈음이다. 지난 4일 도쿄에서는 양국 정계 인사들로 이루어진 한일의원연맹과 일한의원연맹 간 합동간사회의가 열렸으며, 같은 날 캄보디아의 프놈펜에서는 ASEAN (동남아시아국가연합) 회의 차 만난 박진 외교부장관과 일본의 하야시 외무상 간 양자회담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만남에 ‘호응’과 ‘협조’와 같은 수사를 덧붙이는 헤드라인들이 눈에 띄는 가운데, 혐한-반일 감정이 고조되던 3년 전의 이맘때와는 상반된 분위기를 체감한다. 당시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를 두고 반목하던 양국의 입장이 연일 기사화되었고, 이는 곧 민간의 이례적인 불매운동으로 번져 상점가에 'NO JAPAN' 표식이 줄을 잇는 현상마저 나타났기 때문이다. 출처 - 한겨레 (중구청 제공)  국가 간 경제 갈등이 조속히 처리되지 못하고 국민적 반향으로까지 이어진 까닭은 무엇이었나. 개인적 경험에 비추었을 때, 수출문제를 대하는 양국의 의견차가 쉽사리 좁혀지지 못한 데에는 문제의 원인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차이가 있었다.  한일 간 갈등이 최고점에 이르렀던 2019년 여름, 대학생민간교류단체 활동에서 일본의 학생들과 수출규제 조치를 주제로 토론했을 때의 일이다. 한국 측 학생들은 일제의 강제동원 피해자의 배상청구에 대한 보복조치를 수출규제의 원인으로 지목하였다. 이에 반해 일본 측 학생들은 수출규제가 강제동원 문제와는 무관하며 북한을 의식한 안보정책이라는 입장이었다. 한국에서 북한으로 핵 제조의 재료가 되는 물자가 여러차례 무단 반출된 정황이 포착되었기에 정당한 조처라는 것이다.  이는 당시 한-일 사회에서 지배적인 여론과도 상당 부분 유사한 해석이었고, 토론이 진행될수록 해결방안의 모색이 요원해보였다. 문제에 접근하는 관점 차에 기인한 논쟁이 반복되었고, 평행선을 걷는 듯 접점을 찾기 어려운 주장들만이 오갔기 때문이다.  논쟁의 중심에 놓인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문제 역시 토론을 어렵게 했다. 2018년 한국의 대법원 판결에 의거하여 일본 회사의 사과와 손해배상을 요구한 한국 측 입장과, 이미 두 차례의 외교 합의를 통해 충분하고 완전한 보상이 이루어졌다는 일본 측 주장이 대립했다. 수출규제를 둘러싼 각국의 주장이 식민지 역사 청산에 있어 합의와 보상의 완결 여부를 두고 오랜 시간 갈등해 온 양국 관계의 뇌관을 건드린 셈이다.  실제 외교 정책에 있어서도 수출규제와 강제동원 문제의 명확한 타개책을 찾지 못한 채 새 정부가 들어섰다. 현 정부는 유세 과정부터 당선 이후까지 ‘한일 관계 개선 본격화’를 내세우며 이전 정부와의 단절을 꾀했고, 그 결과 출범 이후 3개월 간 네 차례 회동을 통해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 국민적 분노를 자아냈던 3년 전의 여름이 무색하리만큼 한일 관계 정상화에 박차를 가하는 행보다. 한국을 향한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는 여전히 유효함에도 말이다.  강제동원 피해자의 배상청구 문제도 대중의 관심에서 자연히 멀어진 것 같다. 지난해 7월 대법원은 2018년의 판결을 뒤집고 강제동원 피해자의 배상청구를 기각하는 판결을 내려 새로운 국면을 맞았으나, 이 같은 변화는 이전만큼의 관심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외교부는 민관협의체를 통해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문제의 해결에 적극적으로 임할 것을 약속했으나, 정작 당사자인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외교부와의 신뢰 파기를 이유로 민관협의체를 탈퇴하여 ‘당사자 없는’ 협의체에 그치고 있다.  현 정부가 의도하는 대화와 협의를 통한 양국 관계 개선은 환영해 마땅한 일이나, 한국과 일본 사이의 갈등이 쉽게 해결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미결로 남은 수출규제 문제와, 강제동원 피해자들 구명의 문제를 끌어안은 채 이루어지는 화해와 협력은 반쪽짜리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에 해결되지 못한 이전 과제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명확한 해법이 동반되어야 한다. 양국 간 화해와 협력은 피해당사자를 배제하고 이루어지는 합의와 보여주기 식 외교를 지양하고, 국내외 여론과 반향을 적극적으로 의식했을 때 가능한 것이 아닐까.  해당 칼럼은 8월 9일에 작성되었습니다.
2022-08-22 | hrights | 조회: 234 | 추천: 2
이서하/ 회원칼럼니스트  해가 지날수록 여름이 점차 더워지고 있다. 매년 여름을 앞두고 등장하는 “올해 여름은 평년보다 덥다”는 기사도 그렇지만 우리가 직접 느끼기에도 다를 바가 없는 듯싶다. 선풍기로는 모자라 에어컨을 트는 일도 일부에게는 일상이 되었고, 여름철 냉방수요가 높은 탓에 전력 위기로 정전마저 종종 발생한다.  전력은 화석연료를 태워 생산한다. 이때 배출되는 이산화탄소(CO2)는 기온 상승을 야기한다. 이산화탄소는 여러 온실가스 중에서도 가장 배출량이 많은 종류로 현재 인류가 직면한 가장 큰 위기인 기후위기의 주범 중 하나다.  기후위기는 갑작스럽게 생겨난 개념도,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진 개념도 아니다. 인간이 개발을 시작하고 환경을 파괴한 이래 우리의 삶에 늘 함께했던 개념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이미 1992년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유엔 환경개발회의는 이를 의식하여 유엔기후변화협약을 채택한 바 있다.  빙하가 녹고 있다거나 오존층이 파괴되고 있다는 환경 보호 문구도 이제는 옛말이 되었다. 오늘날의 지구는 빙하와 오존층을 딛고 내려와 더욱 가까운 곳에서 우리에게 경고장을 보낸다.  올해 여름만 해도 영국을 위시한 유럽 대륙은 이상고온에 시달리고 있다. 각국 농경지에는 가뭄이 들었지만, 파키스탄 북부처럼 빙하가 있는 지역은 폭염으로 빙하가 녹아 홍수위기에 처했다. 대한민국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기록적인 폭염과 길어지는 장마, 빈번해지는 산불이 그 증거다. 이상기후에 따른 재난과 피해는 기후위기가 현재진행형의 문제임을 증명한다. 출처 -  https://showyourstripes.info/s/globe 1850년부터 현재까지의 평균기온 대비 기온을 색으로 표현한 이미지.  안토니오 구테흐스 UN 사무총장은 기후 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이 ‘지속 불가능한 생산 및 소비’에 있다고 강조한 바 있다. 환경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사회 전체가 참여하는 긴급조치’가 필요하다는 사실 역시 언급했다. 요컨대 기후 위기에 대한 대응은 국가 전체, 나아가 세계 전체의 협력이 필요한 일이라는 것이다. 올해 지방선거 때 기후정의서울지선공동행동, 기후위기대전시민행동 등의 각지 환경단체가 나서 후보들에게 기후정책을 제안하고 시행 여부를 질문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대한민국은 2020년 탄소중립을 선언하고 탄소중립위원회를 설치해 2050년까지 실질 탄소 배출량을 없애겠다는 의지를 선보였다. 이로써 세계에서 14번째로 탄소중립을 법제화한 나라가 된 것이다. 이러한 정책은 분명 경제 및 사회 전체의 구조 전환을 요하는 어려운 과제지만 다음 세대에게 물려줄 세상을 위하여 피할 수 없는 길이기도 하다.  기후위기 대처 방안은 명확한 듯하면서도 복잡하다. 사회구조와 맞물려 돌아갈 수 있을 만큼 합리적인 방안임과 동시에 별도의 대체재를 찾지 못한 취약 계층과도 함께할 수 있는 포용성을 띠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에어컨을 틀지 못해 온열질환으로 사고를 당하는 이들, 출퇴근 대중교통 비용을 위하여 식비를 줄이는 이들을 생각하자면 개개인의 노력으로 온실가스를 줄이자는 말도 그리 완벽한 대책은 아닌 셈이다.  한국은 제조업, 전자제품, 철강, 자동차 등의 산업을 경제 주력 업종으로 두고 있다. 이들은 에너지 특히 연료 연소가 많은 작업으로 국내 온실가스 순 배출의 90% 이상을 차지한다. 결국 한국의 탄소중립은 탄소배출 감축효과가 개인에 비해 10배 이상 큰 산업 부문에서의 에너지 전환 및 그에 기반한 산업구조의 전환이 핵심이라는 것이다.  애플 사는 2020년 7월에 2030년까지 완전히 탄소 중립을 유지할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미국 최대 은행인 JP 모건 체이스 역시 2021년 4월 기후 변화를 해결하고 지속 가능한 개발에 기여하는 솔루션을 지원하기 위해 향후 10년 동안 2조 5000억 달러의 자금을 조달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외에도 각국의 여러 기업들이 기후 변화에 맞설 대책을 내어놓고 있다.  국내 기업들 역시도 이러한 변화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외국 기업들의 탄소 배출 규제를 따라가기 급급할 뿐 진정한 변화를 망설이는 이유는 지금껏 고수해 오던 방식을 바꾸는 데 많은 비용과 리스크가 발생하기 때문, 즉 이윤 때문이다.  이윤의 중요성을 모르는 바 아니나 기업에게는 사회적 책임 역시 존재한다. 주주와 이해관계자 외에도 사회 전체의 이익 향상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을 살고자 내일을 버릴 수 없듯 우리는 탄소중립을 단순히 비용에 국한하여 보기보다는 기후위기에 맞설 기회로 보는 것이 옳다.  이러한 변화를 촉구하기 위해서는 시민 개개인의 각성 역시 필요하다. 기후위기가 현실의 문제임을 인지하고, 주요 공기업과 재벌 기업들의 변화 및 정부 정책 등을 주시하며 꾸준히 목소리를 내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역할일 것이다.  미래의 세대가 짊어져야 할 부담은 오늘 우리의 결정과 실천에 달려 있다. 지속 가능한 사회를 위하여 기후위기에 관심을 가지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는 것. 바로 그것이 지구와 인류의 미래를 바꾼다고 굳게 믿는다.
2022-08-03 | hrights | 조회: 311 | 추천: 0
김태민/ 회원 칼럼니스트  지난 7일 국가재정회의에서 긴축재정 기조를 예고한 정부는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은 13일에 경제형벌규정 TF 출범 공개회의를 열었다. 경제형벌 규정을 없애거나 행정제재로 전환하겠다는 선언식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친기업적인 정책을 공표한 정부는 18일에 대우조선하청노동자 파업 강경 대응에 나선다. 윤 대통령은 대우조선하청노동자 파업을 “불법적이고 폭력적인 노조활동”으로 규정하고 총동원령을 내리듯 관계 부처 장관들에게 강경한 대응을 주문했다. 노동 단속을 통해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국가와 자본의 승리를 선포하려는 듯이 말이다.  지금까지 새 정부의 경제 정책 방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법인세·보유세·상속세·증여세 완화, 공공기관 긴축재정, 공공기관 민영화, 경제형벌의 비범죄화, 실질임금 삭감을 위한 파업 강경 대응 등등. 목록은 더 이어질 것이다. 이 모든 작업은 새 대통령의 존재감이 국정운영에 온전히 체현되기 이전부터 동시다발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출처 - Madote, Neoliberalism and African Development  분명 이와 같은 움직임은 이전 행보와는 다른 속도감을 보여준다. 내각 인선 실패에서 사적 채용 논란까지 현 정부는 국정운영의 절차상의 문제에서 걸음마를 떼지 못하고 깊은 수렁으로 빠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경제법, 노동법 개악, 노동운동 분쇄에 있어선 이토록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한 번 더 놀라며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정부조직이 민생 대책에 무능해도 자본계급을 위해서는 없던 능력까지 끌어 모을 수 있구나. 지지율에 연연치 않고 국민만 보겠다는 대통령의 말에서 그 ‘국민’은 서민,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들을 포함하지 않는구나.  이런 깨달음은 다음과 같은 의심으로 이어진다. 혹시 정권의 배후에 공화국 시민의 요구는 적극 배제하고 자신들의 배를 불리도록 사주하는 외부 권력이 있지 않을까? 그들이 국가의 숙제를 ‘대신’하느라 민생대책이 좌초되고 있지는 않은가? 이 물음을 좇아가다 보면 재벌기업가와 윤석열 당시 대통령 후보가 “멸콩”이라는 텅 빈 구호로 한 몸이 되었던 지난 대선 때를 떠올리게 된다.  7일과 13일 양일간 확정된 긴축재정과 경제형벌의 비범죄화는 단순히 경기부양에 관한 사실만을 알려주는 게 아니었다. 여전히 시장의 자연적 회복 능력과 자기 완결성을 호소하는 새 정부의 경제정책에는 노동 탄압이라는 정치적 비밀이 도사리고 있다. 우리는 이미 대우조선하청 파업 사태에서 이를 목격했다. 민간 주도 성장이라는 시대착오적인 방향성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공권력으로 하청노동자의 쟁의를 분쇄해야 하며 손해배상소송으로 노조에 재갈을 물려야 한다는 사실 말이다. 제 아무리 시장의 자율성을 운운하며 경제정책에 과학적인 외피를 휘두르고자 한들 새 정부의 경제정책은 정치적인 스캔들이다.  경제는 정치라는 이 한 마디에는 굴곡진 노동체제의 역사가 묻어있다. 오래도록 예속되고 탄압받아온 노동의 역사는 서민을 질식시키는 ‘그 경제’가 경제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형태가 아니라고 증언한다. 비정규직, 하청, 불안정, 특수고용, 그림자, 밑바닥 노동자라고 불리는 이들의 역사는 최선의 선택지가 아님에도 ‘그 경제’ 속에 살아가도록 강제된 정치적인 경험의 과정이었다. 국가는 민간 경제 주체들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공언하지만 노동자들은 공권력의 겁박과 법률적 위협 속에서 일해야 하는 역설에 직면해 왔다. 이 역설은 착취적이며 불균등한 사회관계를 기초로 한 실재로서의 경제와 완전무결한 시장의 항구적인 승리를 선포하는 이데올로기로서의 경제의 대립으로부터 발생한다.  이데올로기로서의 경제가 감세 정책을 통해 기업의 투자 여력을 확대하고 긴축재정으로 잠재적인 재정위기를 극복해야 한다 할 때 ‘경제정책’은 전문가들의 영역에나 속하는 고도의 기술 따위로 여겨진다. 이때 경제라고 함은 상품이라는 사물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자연법칙의 위상을 차지하게 되고 그런 까닭에 경제 전문가들이 국민을 대표해 합리적이고 중립적인 경제 정책을 세우는 것이야말로 자본주의 사회의 윤리로 여겨진다.  혹여나 특정 경제주체에게 불리한 경제적 조치가 취해진다면 이는 경제의 총체적인 흐름 속에서 대의를 위한 것으로 정당화된다. 살기 위해 임금투쟁을 벌이는 노동자를 이기적이라고 비난하는 귀족노조 이데올로기의 논리는 이런 맥락 속에 놓여 있다. 경제 법칙에 순응하는 태도는 자기완결적인 자연법칙에 대한 과학적 태도로서 ‘문명적’ 삶의 기초로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경제에 대한 이런 이해는 매우 편향적이다. 경제가 자기 자신을 중립적이고 기술적인 그 ‘경제’로 정당화하는 과정이 순전히 정치적이고 계급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데올로기로서의 경제와 실재로서의 경제를 분간해야 한다. 실재로서의 경제는 경제침체를 눈앞에 두고도 감세조치가 기업 투자를 확대하리라는 신화적 호소에 기댄 새 정부의 부자감세의 환상을 과감히 횡단한다. 이를 통해 기업 투자 없는 부자감세가 실은 특정 계급의 이윤축적을 위한 정치적인 대책임을 알 수 있다.  이데올로기로서의 경제는 잠재적인 재정위기에 대응해 사회보장 예산을 삭감할 것을 호소한다. 하지만 실재로서의 경제의 시선에서는 사회보장 예산을 삭감하면서도 부자감세를 추진하는 정책이 계급적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게다가 긴축재정이 삶의 질적 저하에도 불구하고 균일한 노동력을 제공해야만 하는 노동자들에게서 사회보장의 손길마저 차단한다는 사실을 금방 눈치챌 수 있다. 부유해지는 사람 따로 가난해지는 사람이 따로 있는 셈이다. 가난해지는 자들은 더욱 굶주리고 더 많은 노동력을 갈취 당한다.  이처럼 정부가 부자감세와 긴축재정을 강화할수록 노동자들의 고통이 가중된다. 이 암울한 상관관계는 기업과 초고자산가의 명분 없는 이윤 축적을 위해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희생되는지를 입증한다. 최근 국회예산정책처의 보고에 따르면 새 정부는 보유세 완화로 50억 다주택자에게 연간 6000만원의 절세 혜택을 주고 있지 않은가? 지금 정부가 시행하거나 예고하는 경제 조치는 기업인들 또는 초고자산가들의 수익을 위한 사회적 관계의 조정일 뿐이다. 시장의 자연적인 회복력이라든가 민간 주도 성장 신화를 운운하며 경제 정책의 본질을 흐리려 하더라도 착취적이고 비용 전가적인 힘의 논리가 새 경제 질서를 관통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경제가 정치적인 적대와 모순을 통해 운행됨을 망각해선 안 된다.  경제형벌의 비범죄화는 어떤가? 기업범죄를 친히 사하여 주는 정책이라 하니 아무래도 이제 시행 6개월차 된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처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기업살인’을 저지르면 사업주나 경영책임자가 실형을 살 수도 있다는 당연한 논리 앞에서 중처법을 개악하자고 난리법석을 벌인 끝에 ‘경제형벌의 비범죄화’에 이르게 되었다. 국민의힘 친윤계 국회의원들은 중처법 개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그런 이유에서 경제형벌의 비범죄화를 앞두고 산업안전보건에 대해 강하게 우려할 수밖에 없다.  국민의힘 국회의원들이 발의한 중처법 개정안은 법무부의 안전인증을 받으면 산업재해가 발생하더라도 사업주나 경영책임자가 형벌을 감면받을 수 있게 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법원에서 양형 참작 사유를 판단하기도 전에 형벌이 감면된다니 이건 대체 무슨 황당한 소리인가? 법무부에서 안전인증만 받으면 미래의 산업재해 리스크에 대해 선제적으로 형벌 감면을 보장해주는 것은 보험 상품의 회계학적 논리와 닮았다. 미래의 산업재해 리스크를 현재화해 안전인증을 위한 얼마간의 자본을 투자하고 이로써 안전보건인증을 취득할 경우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잠재적인 손해를 보전해주는 게 보험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물론 기존의 타 안전인증제도가 그러했듯 산업안전보건 분야의 안전인증의 요건은 기업의 투자 여력을 높인다는 이유로 구색 맞추기 식의 안전보건 인증서류로 채워질 것이고 그렇게 안전보건체계의 의무는 한없이 느슨해질 가능성이 크다. 경제형벌의 비범죄화와 긴축정책 기조가 도저히 규제를 가만히 두고 보지 못하는 본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즈음 되면 중처법 개정안은 중처법의 보험 상품화라고 일컬을 수 있을 듯하다. 기업살인에 대한 형벌을 고심하며 설계해도 모자랄 판에 기업의 리스크를 보전해줄 상품을 만들고 있던 셈이다. 형사처벌만큼 공정해야 하는 절차도 없을 것인데 공적 기관이 형벌 집행을 사유화해 처벌을 받지 않는 특권계급을 창설하고 궁극적으로는 자본축적에 내재한 위협을 시공간적으로 분산시켜 주게 생겼다.  뿐만 아니라 이번 개정안은 노동자의 신체와 건강에 대한 정치적 공격의 성격을 띠고 있다. 법무부의 인증을 받으면 산업재해에 따른 형사적 책임이 감경 또는 면제되는 예외적인 공간이 전국에 선포되고, 노동자의 신체에 대한 형사법적 진공상태가 만들어지는 셈이다. 결국 미래의 산업재해 리스크와 공적 기관의 안전 인증이 거래되는 순간 노동자는 잠재적으로 죽거나 다치도록 내버려진다.  죽도록 내버려진다는 말은 절대 과장이 아니다. 기업형벌의 행정 규제화와 긴축정책 때문에 산업안전보건 법률 집행이 이루어지지 않아 노동자들이 죽거나 다치도록 내버려진 역사는 영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Steve Tombs에 따르면, 영국 정부는 ‘더 나은 규제’와 ‘긴축정책’이라는 기치 아래 산업안전보건 분야의 정부 예산을 삭감한 바 있고, 그 결과 규제 감독관의 수, 근로감독 건수, 기소 건수, 유죄 선고율이 크게 감소했다고 한다. 어느 규제 감독관은 이를 “공중 보건의 위기”로 표현했다는 면담 내용도 등장한다.  이로부터 우리는 국가 권력의 폭력성이 어떻게 기능하는지 확인하게 된다. 국가 권력은 특권 계급의 요구에 따라 형벌의 진공상태를 명령하고 죽거나 다쳐도 되는 신체를 만들어낸다. 억압적인 국가 장치는 결코 모두를 위한 보편적인 인권을 보장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배제할 때라야 주권 권력이 기능할 수 있는 탓이다. 이로써 노동자들은 노동하는 신체를 제외한 대부분의 인권을 박탈당한다.  이처럼 특정 계급의 이익을 위해 국가 장치들이 사유화되고 있는 움직임은 갈수록 확연해지고 있다. 대통령실, 여당 국회의원, 검찰, 법무부 등 국가기구들은 발 벗고 나서 민생을 옥죄는 방안들을 고안하고 집행한다. 기업의 예상 수익률이 떨어져 기업투자가 발생하지 않아도 부자감세를 시행하고 있다. 그 와중에 민생을 옥죄고 노동자의 안전을 위협하는 긴축재정과 경제형벌의 비범죄화를 단행한다. 이제는 실질 임금 삭감을 정당화할 요량으로 노동계 단속에 나섰다. 대우조선 하청 노동자들이 그 목표의 첫 번째 표적이다.  민생 안정에 무능하고 민생 탄압에는 유능한 정부는 앞으로도 선택적 공정의 논란을 피할 수 없을 듯하다. 여러 분야에서 비전 부재와 메시지 실패를 보여주다가 대우조선해양 파업 사태에는 발 빠르게 강경대응을 보여줄 수 있었던 이유는 이번 정부가 공권력의 사유화에만 집중하고 있는 탓이다. 게다가 억압적인 국가 기능에 기대어 국정을 운영하려는 태도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게 분명하다. 초반부터 신선함이 전혀 없고 뭐 하나 제대로 해준 것도 없는 국가가 그저 억압할 뿐이라는 인식이 시민들 사이에 급속히 퍼지고 있다. 예상대로 ‘올드 보이’들은 생산적인 논의를 이끌어내지 못한다. 이전 정부에 대한 비토 정서만으로 탄생한 정권이기에 무엇을 기대하겠냐고들 하지만 경제 전반이 사유화되고 있는 현실을 버티는 건 너무 고단한 일이다.
2022-07-28 | hrights | 조회: 458 | 추천: 5
김지혜/ 회원 칼럼니스트 출처 - 연합뉴스  취업, 독립 등을 이유로 2030세대가 부푼 기대를 안고 첫 자취집을 찾아 나선다. 자기만의 취향으로 집을 꾸밀 생각에 들뜨는 것도 잠시, 높은 임대료로 인한 청년의 주택난은 심각하다. 정부는 19~39세 청년층을 대신해 LH가 주택 소유주와 전세 계약을 체결한 뒤 저렴한 월세로 이를 재임대하는 ‘LH 청년 전세 임대 제도’를 내놨다. 그런데 지원 대상자 절반이 이 계약을 포기하는 아이러니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부모와 본인의 소득을 기준으로 ‘LH 청년 전세 임대 제도’의 지원 대상자로 선정되면 계약 가능한 주택을 청년이 직접 찾아야 한다. 그리고 LH 주택 권리분석을 거쳐 전세 가능 여부를 검토한 뒤 임대차 계약을 체결한다. 수도권 기준으로 최대 1억 2000만원까지 전세 보증금이 지원된다.  그럼에도 최근 서울의 전세가가 급등하면서 이 제도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매물을 찾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가 됐다. 또한 임대인의 입장에서 LH 계약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점이 없으며 LH 계약 절차의 복잡성, 월세선호 현상, 매물의 부채비율과 같은 임대인 자산정보 공개를 꺼리는 등의 이유로 LH 매물의 공급 자체가 적다. 저소득 청년의 주거비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 본래의 목적이었으나 반전세의 개념으로 사실상 월세살이를 하게 되는 경우가 다수이며 LH 주택의 초과수요(매물의 공급보다 수요자가 많은 상태) 현상을 이용하여 일반적으로 선호하지 않는 반지하, 오래된 주택이 매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일각에서는 ‘LH 제도’가 오히려 전세보증금을 끌어올렸다는 주장이 있다. 국가에서 1억2000만원까지 지원해주는 것이니 임대인은 최대금액만큼 받고자 한다는 것이다.  ‘LH제도’를 보완하기 위해서는 우선 부동산 물가 안정화를 위한 정부의 정책적 노력이 요구된다. 현재 정부는 청년의 월세부담 완화를 위한 주거급여, 청년 월세 특별지원, 청년 무이자 월세대출과 같은 지원책을 선보이고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집값을 안정화하지 않는 한 정부의 돈은 계속해서 임대인에게 흘러가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임대인에 대한 실질적인 혜택을 제공해야 한다. ‘LH제도’에 참여함으로써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임대인에게 조세 감면 혜택을 주거나 계약 절차를 간소화 할 필요가 있다. 다주택자들이 ‘LH제도’에 참여하게끔 유인책을 제시함으로써 공급량을 늘리는 방안도 생각해볼 수 있겠다.  주거권은 인간이 기본적으로 생활할 권리이다. 정부는 이제 막 사회에 첫 발을 내딛는 청년들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정책을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정책이 미칠 사회적인 영향력을 계속해서 검토하고 현실에 맞게 수정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보여주기 식’ 정책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2022-07-20 | hrights | 조회: 346 | 추천: 0
조혜원/ 회원 칼럼니스트 “점심시간 1시간을 보장해주세요.” “임신한 노동자에게 필요한 쉼과 휴가를 주세요.” “다치면 산재처리를 받게 해주세요.”  21세기에 ‘사람답게 살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 기업이 있다. 빵 굽는 구수한 냄새 가득할 것만 같은 파리바게뜨의 SPC다. 임종린 민주노총 화섬식품노조 파리바게뜨 지회장은 부당노동행위 중단 및 사과, 노조파괴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하며 53일 동안 진행했던 단식을 지난 5월 19일 중단했다. 암담한 현실의 노동자 탄압과 노동인권 현주소가 SPC를 통해 다시 한 번 확인됐다.  더불어 확인한 사실은 우리 사회의 거대한 무관심이었다. 파리바게뜨 노동자들의 길고 긴 싸움이 일부 언론을 통해 공식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임 지회장의 단식 투쟁이 한 달을 훌쩍 넘어선 지난 5월 9일이 되어서였다. 그것도 한 시민의 온라인 내 해시태그 운동을 통해서 겨우 가능했다. 3월 해시태그 운동이 있기 전까지는 거의 모든 언론에서 해당 사안이 다뤄지지 않았다.  더욱 암담한 문제는 언론의 주목 이후였다. 대부분 언론사는 ‘노노 갈등’ 프레임을 씌우려 했다. 앞으로 SPC 기업이 나아가야 하는 방향들, 해당 시위의 쟁점들, 그리고 더욱 근본적인 배경을 다루는 것을 회피했고, 일부 언론은 시위와 불매운동으로 인해 가맹점주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는 식의 보도로 아예 본질을 흐리기도 하였다. 자극적이고 갈등을 불러일으킬 만한 부분만 극대화하여 보도하는 것에 그치는 언론의 보도 행태는 현재 언론이 과연 평등한 공론장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게 한다.  비단 SPC 건만이 아니다. 모든 사회적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다룰 때마다 언론은 늘 비슷한 행태였다. 페미니즘과 성평등의 투쟁을 ‘젠더 갈등’으로 축약시키거나 장애인 이동권 문제를 ‘민폐 시위’로 보도하는 등 현재의 언론은 권력 중심, 기득권 중심의 시각에서 소수자 문제를 외면하려는 행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 보니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만 내고,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여전히 갈등 그 자체에만 집중하여 “왜 또 싸우고 있는지” 따위를 물어보게 되는 것이다. 출처 - 직접 촬영  6월 8일 SPC 파리바게트 노동자의 2차 촛불시위가 있었다. 시위 현장에서 가장 충격을 받은 것은 시위 현장 바로 건너편에 있는 파리바게트 건물에 사람들이 그렇게도 많이 오갔다는 사실이다. 제 아무리 확성기로 크게 문제를 이야기하고 몇 시간 동안 투쟁을 하였음에도 여전히 이 사실을 듣지 못하고, 혹은 들었음에도 문제 의식을 가지지 못하고, 혹은 문제의식을 가졌음에도 애써 외면하며 그 곳의 빵을 사가는 사람들이 그렇게도 많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처음으로 이 사회의 보이지 않는 벽을 보게 되었다. 고작 횡단보도 하나만큼의 거리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인식의 차이는 높은 기득권과 소수자 사이에 존재하는 엄청나게 큰 벽은 아니다. 늘 생활 속에서 맞닥뜨림에도 닿을 수 없을 듯 아득한 거리감이 있을 뿐인지 모른다.  간식거리를 위해 그곳을 들르는 직장인들, 친구들과 함께 삼삼오오 무리 지어 그곳을 들어가는 학생들, 내일 먹을 아침을 위해 식빵 한 봉지를 손에 들고 나오는 사람들과 같이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평소에는 평등하다고 생각되는 동료 시민들이 그 횡단보도 건너편에 존재한다. 악덕한 기업의 노동탄압보다, 같은 노동자들에게 무뢰배 같다며 입막음을 시도하는 한국노총보다, 그 횡단보도 건너편을 보며 느꼈던 분노와 절망감이 더 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문제를 회피하는 언론과 이 무관심한 시민의 모습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언론은 더 이상 우리 이웃의 문제를 단순한 논란거리나 가십으로 소비하는 행태를 멈추어야 한다. 이야기를 듣고 함께 해결해 나가야 한다. 그리고 이 촘촘한, 보이지 않는 인식의 벽들을 하나하나 부수어 나가야 할 것이다.
2022-07-13 | hrights | 조회: 644 | 추천: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