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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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는 언론계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이 멘토가 되어, 작성한 칼럼에 대한 글쓰기 지도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전예원/ 회원 칼럼니스트  6월 18일 세계 난민의 날을 기념하는 제7회 난민영화제(‘그럼에도 우리 함께’)가 열렸다. 이번 난민영화제가 소개한 <파리의 별빛 아래>(2020), <나의 집은 어디인가>(2021), <기록(Writing To Reach You)>(2021), <소속(Belonging)>(2021) 등 네 편의 영화는 국적국을 떠난 이들이 맞닥트린 ‘난민 이후의 삶’에 주목했다. 출처 -  KOREFF 공식 홈페이지  미디어를 통해 접하는 난민의 형상은 대부분 독재와 내전, 종교 박해 등으로 무너진 삶의 고통에 머물곤 한다. 시선은 국적국을 떠나게 된 사건이나 국경을 넘나드는 행적 이후까지 이어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난민들이 이주 후 일상에서 겪는 현실의 문제를 밀도 있게 그려 낸 이 네 편의 영화에는 그들의 취약하고 위태로운 삶의 실체가 담겨 있다.  난민들이 국적국을 벗어난 이후 겪는 문제의 양상은 복잡하다. 영화 <파리의 별빛아래>는 엄마와 헤어져 거리를 떠도는 난민소년 ‘술리’와, 그의 엄마를 찾는 여정에 함께하는 홈리스 여성 ‘크리스틴’의 이야기를 통해 난민들이 마주한 문제적 현실을 드러낸다.  난민은 법 안에서도 그 지위가 불안정하다. 술리가 프랑스의 거리를 떠돌게 된 시작은 다름 아닌 모자(母子)의 강제 퇴거조치기 때문이다. 난민들의 처지는 그들이 체류하고 있는 국가의 상황에 좌우된다. 술리 모자가 강제퇴거 대상이 되는 까닭 역시 프랑스의 난민정책상 이들 모자가 오스트리아로 보내져야했기 때문인데, 이 장면을 통해 자기의사와 관계없이 거소가 정해지는 난민들의 불안정한 처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우리’와 다르다는 차별도 난민들에게 강력한 낙인이 된다. 영화 속 프랑스 사람들은 술리를 프랑스 사회에 융화되지 못하는 골칫덩이로 취급하거나,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말로 불편함을 드러낸다. 어린아이의 몸으로 산과 강을 건너 전쟁 중인 국적국을 벗어난 술리의 삶에 대한 이해는 찾아보기 어렵다. 난민협약 가입국으로서 난민들을 수용하기 위한 형식적인 법과 절차는 갖췄지만, 그들을 공동체의 존재로 받아들이려는 인식은 자리 잡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난민들은 언제라도 다시 추방될 수 있다는 불안감과, ‘난민’이라는 이유로 가해지는 혐오와 편견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이중의 문제를 겪고 있는 셈이다.  난민이 맞닥뜨린 이 이중문제의 현실은 비단 영화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사회의 현실도 별반 다르지 않다. 인정율이 1.5~3프로에 그치는 현행 심사제도에서 한국사회의 절대다수의 난민이 ‘인도적 체류자’와 같은 불안정한 지위로 부유한다. 난민인정을 받기 위해 입증해야 하는 ‘박해받을 두려움’은 그 성질상 증명이 쉽지 않아 분명한 기준안이 제시되어야 함에도 법무부는 난민인정심사의 기준이 되는 ‘난민체류지침’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차별적 인식도 마찬가지다. 2018년, 제주 도착 예멘 난민들을 향했던 ‘가짜난민’의 프레임과 ‘난민법 폐지발의’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당시 다수의 언론은 난민을 청년의 일자리와 여성의 안전을 위협하는 불온한 존재로 비추어 난민에 대한 혐오감을 부추겼다. 난민들에게 일자리를 주기 위한 정책이 청년들의 고용불안을 심화시킬 것이며, 예멘이 여권이 낮은 이슬람 문화권에 속해있기 때문에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급증하리라는 것이 주 논리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상당 부분 그 근거가 빈약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실재하는 대다수의 난민은 국내의 취업자들과 직접 경쟁하는 일자리를 얻을 수 없고, 이슬람권의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를 것이라는 추측은 미디어를 통해 빚어진 왜곡된 이미지의 일면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여느 사회에서건 난민들은 법적지위를 획득하기 어렵고, 운 좋게 난민인정을 받은 이후에도 숱한 차별적 인식들과 마주해야 한다. 낯선 문화권의 난민들은 인종적, 종교적 이유로 왜곡 보도되어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문화적 차이 탓에 한국사회에 융화되기 어려운 존재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난민영화제에는 ‘이란 난민소년’으로 잘 알려진 김민혁 학생이 자신의 경험을 나누었는데, 그는 복잡다단했던 한국에서의 난민인정심사의 경험을 환기하는 한편 차별적 인식을 바꿔나가기 위해 자신이 했던 최근의 노력들을 언급했다. 일례로 그는 난민이기에 한국 사회에 융화되지 못할 것이라는 시선들을 바꾸기 위해 배우로서 모델로서, 또한 학생으로서 자신이 이뤄온 많은 성과들을 이야기한 후에야 자신이 사실 난민임을 밝히는 화법을 취한다고 한다. ‘난민’이기 이전에 함께 살아가는 ‘사람’임을 보임으로써 차별과 편견에 대응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하고 복잡한 난민인정심사의 과정과 그 이후의 삶에서 마주하는 일상의 차별적 인식들을, 난민 개인의 힘만으로 헤쳐 나갈 수 있을까. ‘난민’과 ‘국민’이 공생할 수 있는 방향에 대한 고민은 분명 필요한 일이나, 그것이 ‘받아들여지기를 원하는’ 어느 한쪽에만 짐 지우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될 일이다. 우리 모두는 태어난 나라를 선택할 수 없고, 예고 없이 발생하는 재난과 전쟁, 그 밖의 박해사유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화제의 슬로건처럼 ‘그럼에도 우리 함께’ 가는 마음이 필요할 것 같다. 그리고 그건 대단한 노력을 요하는 종류의 것은 아닐지 모른다. 난민들과의 마주침의 계기들을 외면하지 않는 것, 그들이 국적국을 떠나오게 된 맥락을 상상하는 것, 그리고 그 이후의 삶을 편견 없이 지켜보는 것. 그럼에도 ‘함께’하는 마음은 그런 것이 아닐까.
2022-07-13 | hrights | 조회: 298 | 추천: 6
이창우/ 회원 칼럼니스트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작동하기를 바라는 힘보다 앞서는 감성의 힘으로 나는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 현대라는 위험사회에 갑자기 찾아온 죽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생명이 한 점에서 출발한 것이라면 그 점이 더는 보이지 않는 것을 죽음이라 편리하게 이름 붙일 수는 있다.  삶이라는 제목에 굳이 흔적을 남겨야 할 것도 아니다. 스스로 확인하다가 살아있음을, 그것이 벅차면 확인하지 않아도 된다. 어떤 점으로 있건 그건 내가 부르고 싶은 이름으로 불리면 된다. 수많은 말과 소리와 글로. 또는 이미지로. 그게 삶이라는 이름이 되기도 한다.  세상에서 여러 모습으로 살아가는 일. 지금 여기와 그 어느 날과 또 다른 그 어느 시절에 살아간다는 것이 삶이다. 중심이 되는 하나가 다른 차이, 질적 다양성을 말살시키려는 것은 폭력이다. 인류의 역사에 드리워진 만행, 그들조차 인지하기 어려울 만큼 보호받거나 정당화하고 이어가는 남성 중심의 사회구조이다.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일상에서 이론적으로 배우고 느끼며 살고 있다. 다만 인간으로 태어나 여성으로 있는 것과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과는 확연히 다름을 쉽게 지나칠 뿐이다. 내가 생활하면서 만나는 부당함이 뼈저리게 파고들지 않으면 저항보다 순응이 쉽다.  남성 중심의 사회가 그렇다. 워낙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공고하게 굳어진 남성 중심의 생각들이 자리를 내어주지 못한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스스로 알아차리고 깨닫지 않으면 페미니즘은 수많은 사회운동처럼 부분에서 정체되어 파편화되고 더 나아가지 못한다.  페미니즘은 더 나은 삶을 위한 과정의 한 의식화이고 그 너머에서 진정한 휴머니즘의 세계가 열릴 수 있다. 남자, 여자로 규정된 생각에서 벗어나 인류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세계에서 하나인 인간으로 살아나기 위해서라도 페미니즘은 자명성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접근해 한 걸음 내딛기 시작해본다. 내가 받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어머니 교과서를 다시 풀어내 보기. 지금 나는 과연 누구와 마주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는 일. 다름 아닌 거울 속에 '여성'은 아닐지. 단 한 번의 거대한 투쟁 없이 지나온 한국 여성의 역사는 또 어떨지.  내게 부여된 젠더로 나의 삶을 구분하거나 규정하는 일은 순전히 개인의 몫이어야 한다. 타인들이 지칭할 문제가 아니기에 인간이면 충분할 자의식이 필요한 거였다. 여전히 이 세계는 고정되거나 신화가 되어버린 성 역할의 사회학습 효과를 톡톡히 요구하고 있다.  씩씩한 남자 만들기만큼이나 현모양처 만들기에 힘을 쏟았던 한국사회의 역사성을 느껴보는 일. 주체로 살아가기에 걸림돌은 무엇일까 생각하다 멈추는 곳은 지금, 여기였다. 페미니즘은 건강한 사상이다. 논쟁으로 승부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앎을 서로 나누는 이성과 감성의 조율이다.  젠더만큼 뜨겁고 달콤하고 격렬하기도 한 논쟁은 드물다. 뒤끝으로 공부의 동기를 주는 괜찮은 학문이기도 하다. 온라인에서는 논쟁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말들로 뒤죽박죽이다. 표출된 말들은 치우친 경우가 더 많다. 읽어보면 공론장과 같은 역할의 커뮤니티에서 정제되지 않은 풍경은 가히 폭력을 넘어 가학적으로 보인다.  페미니즘을 접하면서 수많은 문학과 책들 속에서 만나는 것은 분명 살아 움직이고 있는 존재로서 여성이다. 작은 부분들로 이루어진 페미니즘은 전체를 돋보이게 할 수 있는 기제로 서로를 감싸 안아준다. 어느 작은 한 가지로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청소년기와 청년의 시간에 책을 가까이하기 어려웠던 한국사회의 능력주의라는 강박. 페미니즘 공부를 해오면서 자주 만나는 감정이다. 고전이라 불리는 세계문학 안에는 여성으로 태어났지만, 인간으로 살아가려는 수많은 목소리가 있다. 적어도 주체의 나를 보살피게 된다는 의미이다.  사회에서 만들어가는 여성의 모습과 다른 나를 인정하는 일부터 시작해 사회에서 학습한 지식이 얼마나 남성 중심으로 치우쳤는지. 되돌아보면 문학과 함께 굳이 꺼낼 단어들이 페미니즘과 이어지고는 한다.  페미니즘을 공부하면서 배우는 것은 이 세계가 얼마나 편향성을 주류로 생각해 왔는가이다. 인간으로서 존엄이 거의 모든 영역에서 강자에게 치우친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적어도 나의 세계에서만큼은 변화가 찾아온다.  나와 그대가 하는 그럴싸한 변명, 초연하게 살아온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한 나의 이야기 또는 그대 이야기가 있다. 자기 정당성이란 함정을 파 놓고 삶을 궁핍하게 몰아가는 이 사회 구조에서 멀쩡하기는 어렵다. 하나에서 여럿으로 연대의 힘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동력이다.
2022-07-06 | hrights | 조회: 335 | 추천: 1
이서하/ 회원칼럼니스트  언젠가 중요한 미팅을 앞두고 만날 장소를 정하던 중, 상대로부터 파리바게뜨에서 만나자는 말을 들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하필 시그니처 지점이었다. 임종린 민주노총 화섬식품노조 파리바게뜨지회장의 단식 투쟁이 한창 화제였던 시기라 SPC 산하 가게들은 불매 중이라고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러나 서로 차선책이 없었다. 초면의 상대를 만나는 자리에서 마땅한 대안 없이 고집을 부릴 수도 없는 일이었기에 결국 파리바게뜨에서의 만남을 수락했다. 나는 “그곳도 괜찮다”라고 답한 순간부터 만남이 파하는 순간까지 영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단식 투쟁이 한창 진행되는 현장과는 달리, 그날의 파리바게뜨는 고즈넉하고 평화로웠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다. 수많은 정보가 각종 매체를 통하여 송출되는 요즈음, 정보를 접하기 쉬워진 만큼 잊어버리는 속도 역시 빨라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자주 든다. 알려야 할 소식이 너무나도 많기에 한 번 지면에 오른 이야기는 어지간한 화제성을 가지지 않고서야 쉽게 묻힌다. 그렇게 우리로부터 먼 이야기를 우리는 점점 더 빠르게 잊어버린다.  이러한 망각의 시대에서 시민운동의 숙명이라면 기억됨에 있지 않은가 싶다. 불매운동이 특히 그렇다. 매출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어 기업의 반성을 촉구하는 운동인 만큼 소비자의 적극적인 동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불매운동이 유의미한 지표를 보이지 못했다면 조용해지기만을 기다려 온 사측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선을 돌리고, 노동자 앞에는 해결되지 않은 문제만이 덩그러니 남을 것이다.  요즈음 또 하나의 불매운동이 고개를 들고 있다. 올해 3월 28일부터 임종린 민주노총 화섬식품노조 파리바게뜨지회장은 SPC의 노조 탄압 및 부당노동행위 중단, 2018년 1월 합의한 사회적 합의 이행을 촉구하며 53일간의 단식 투쟁을 진행했다. SPC는 파리바게뜨, 던킨도너츠, 배스킨라빈스 등의 산하 기업을 두고 있으며 국내 제빵업계에서는 선두로 꼽히는 그룹이다. SPC는 민주노총 조합원의 승진 차별 및 노조 탈퇴 종용, 연차휴가 및 여성 노동자의 월경·출산·육아휴직을 보장하지 않은 등의 사유로 불매운동의 대열에 올랐다.  SPC는 노조원에 대한 차별이 없었으며, 사회적 합의 내용의 충분한 이행을 통해 당사와 가맹점주가 제빵기사들에게 동종업계에서 최고 수준인 임금 및 복리후생을 제공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지난 6월 16일 파리바게뜨 사회적 합의 이행 검증위원회는 2018년 1월 사회적 합의 주체들이 합의한 11개 항 중 실제로 이행된 것은 2가지, 일부 이행된 것으로 확인된 항목은 3가지라고 밝혔다.  이처럼 노사 간의 갈등이 길어지자 임 지회장의 단식은 건강을 위하여 끝을 맺었으며 현재 시민과 노동자가 합심하여 릴레이 단식 및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처음 단식이 시작될 때 SNS에서는 이를 지지하기 위하여 SPC 산하 기업 목록을 정리해 불매 리스트를 만들거나 파리바게뜨를 대체할 동네 빵집을 소개하는 챌린지를 진행했다. 그러나 임 지회장의 단식이 끝난 지금, 언론 보도 및 관심을 기울이는 시민의 수는 한 폭 줄어들었다. 이는 특정한 원인이 있다기보다도 한번 언급한 정보가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레 보도 순위에서 밀리게 되는 현상일 것이다.  가끔 이렇게 한 시기를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들이 얼마나 기억되고 있을까를 생각한다. 누군가 여전히 기억하며 불매를 이어가는가 하면 희미한 기억을 붙잡기 위해 검색을 하는 이도, 아주 잊어버린 이도 존재할 것이다. 사실 망각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삶은 흘러가고 우리는 연일 보도되는 새로운 사건들에 귀를 기울이게 될 테니까.  하지만 삶의 편린이 스쳐 지나간다는 주마등이라는 것도 있지 않은가. 나는 그런 것을 믿는다. 유수 같은 세상 밑에 조약돌처럼 가라앉아 있는 기억의 잔해를, 잠시 밀려나 있었을 뿐 수면 위로 떠 오를 듯 말 듯 어른거리는 기억의 끈질김을 믿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 하는 우리의 인간됨 역시도 믿는다.  그러니 모든 것을 매일 기억하지는 못하더라도 소란을 동반했던 어떤 이름들이 보인다면 퍼뜩 떠올릴 수는 있지 않을까. 오래 바라보고 검색창 위에 손가락을 올려 그 이름이 누군가의 삶을 잡아먹고 성장했다는 것을 기억해낼 수는 있지 않을까. 나는 오늘도 망각의 강 앞에 서서, 동료 시민의 고통에 기여하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이렇게 질문을 던진다. 혹시 잊어버린 것이 있지 않을까?
2022-06-28 | hrights | 조회: 352 | 추천: 2
김태민/ 회원 칼럼니스트  전망과 비전을 폐기하고 취향과 감정으로 뭉친 정치 공동체는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역대급으로 낮은 투표율 속에서 치러진 지방선거 결과는 이미 현실로서 도래했으나 한사코 부인된 진리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다. 개혁의 염원을 오로지 부패한 권력을 규탄하는 도덕적 호소로 채우는 감정의 정치 공동체는 실패할 수 밖에 없다고. 사실은 그렇다. 지난 몇 달간 탄핵된 보수 세력에게 정권을 넘겨준 실패를 만회하고자 괴물 같은 권력을 “모피아”, “검피아” 같은 용어로 명명하려는 시도들을 목격했다. 이 같은 권력의 수사학이 겨냥하는 정치적 효과는 비교적 명백하다. 일반 시민과 거대 권력 사이의 대립을 서사화하며 기득권과 대립각을 세울 감정의 공동체를 만들어내고자 했을 것이다.   물론 추문으로 가득 찬 내각 인사들의 오물을 들춰내며 권력의 서사를 직조해내는 방편은 분명 현실 정치의 문법을 반영한 저항의 언어로써 정당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이는 권력의 표면을 소묘하는 그 이상의 효과를 가져올 수 없다. 무엇보다 ‘세상은 원래 그런 것 아니냐’는 냉소적인 이데올로기와 정권 발목잡기 프레임에 밀려 정치적 동력을 상당 부분 상실한다. 게다가 정권 인사의 도덕성을 논하는 것을 넘어 권력의 분배 방식을 어떻게 시정할지에 대한 명징한 대안적 기획이 제시되지 않아 투표에 참여해야 할 명확한 정치적 유인을 제공하지 못했다. 대선에서 최고 투표율을 보인 호남이 지방선거 참여에는 저조했던 건 그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 기득권에 대한 분노로 탄생한 감정의 공동체가 전망과 비전을 만나지 못한 채 맥없이 실패한 셈이다.   정권 인사의 부도덕성을 규탄하고 검찰권력과 모피아의 연대를 비판하는 윤리적 호소에 매몰되어있을 동안 ‘반기득권 서사’의 성긴 손가락 사이로 구조적 모순은 잘도 빠져나갔다. 검찰권력의 선택적인 수사와 모피아와의 부패한 연합이 ‘특권계급’의 부와 권력의 분배 문제로 축소된 이유는 민주주의 자체의 환영과 자본주의 체제 내부의 모순을 우회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모호하게 정의된 ‘특권계급’이라던가 ‘기득권’이라는 관념이 민주주의의 위기로 제시될 때 체제의 부패한 규율이 정치 진영을 가리지 않고 사회 전반에 걸쳐 동형적으로 분포한 현실은 감쪽같이 은폐된다. 규제와 기소를 담당하던 공직자들이 기업을 거쳐 다시 공직으로 돌아오는 행태는 집단 세력화된 엘리트 계급의 부도덕과 파렴치함의 문제를 넘어 이윤 축적을 위해 거대한 공장처럼 운영되는 체제 자체의 문제인데도 말이다.  출처 - 경향신문  모피아나 검피아마저 설계해내는 지배적인 구조의 힘을 캐묻지 않은 탓에 이제 저들은 정치 권력을 배당 받은 본분에 따라 노동법 개악을 입 냄새 나도록 떠들며 경제 질서의 재조정을 향해 내달리고 있다. 때마침 지난 25일 한덕수 총리는 중처법 개정을 본격적으로 공론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한 기자간담회에서 “산업계에서 중대재해처벌법이 일종의 규제가 아니냐는 지적이 있다는 말에 동의한다.”며 “산업 안전 재해를 줄여야 한다는 것에 다 동의하고 목적에 아무런 논쟁이 있을 수 없지만 그 방법론이 적절한지 들여다봐야 한다”라고 말했다.   한덕수 총리의 위 대목은 범죄와 형벌의 영역이 어떻게 경제적 격자를 통해 규정되는지를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그에 따르면 기업살인과 형사법적 처벌을 다룬 중처법은 ‘규제완화와 투자활성화’의 문제로 탈바꿈한다. 그리고 기업살인법과 규제정책의 존재론적 격차를 단숨에 뛰어넘는 논리적 비약은 전혀 어색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형사적 처벌의 영역을 행정적 규제와 관리의 영역으로 오인하는 인식상의 혼동 또는 프로이트적 말실수(Freudian slip)는 전혀 우연이 아니다. 이는 오히려 검찰 권력과 자본주의적 경제 체제가 동거하기 위해 벌어지는 현실 정치의 기묘한 복화술, 즉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이 산업재해를 둘러싼 형사법적 권한을 조정하는 양상을 그대로 체현하고 있다.   공정과 정의의 신화가 전하는 바와 달리 신자유주의 통치성에 예속된 검찰권력은 경제 이성의 명령에 따라 어떤 범죄를 용인하고 처벌할지를 결정한다. 결국 온갖 기소와 수사의 스펙터클을 뽐내던 검찰은 기업살인에 대한 형사법적 접근을 철회하고 검찰통치를 자랑하는 이번 정권은 기업의 강력한 요구에 발맞추어 기업살인 문제를 ‘규제’와 ‘행정적 관리’의 영역으로 배치시킬 것이다. 지금 당장은 법 개정을 할 수 없는 처지이기에 경영자의 안전보건의무 범위를 축소시키는 가이드라인을 내리는 행정 전술을 통해 중처법을 저지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한 마디로 검찰권력은 산업재해를 둘러싼 자본과 노동자의 대립 속에서 무엇을 물고 무엇을 놓아야 할지 잘 알고 있다. 이처럼 사업주와 경영책임자의 범죄와 처벌에 관한 문제가 경제 활성화 방안으로 번역되는 과정은 검찰권력에 기초한 이번 정권이 신자유주의 통치성 또는 자본주의적 생산 체제와 어떤 종속적 관계를 맺고 있는지 확연히 알게 한다.   현실 정치 속의 수많은 권력의 쟁투와 정치적 대결의 양상은 경제라는 강력한 심급과의 특수한 관계 속에서 전개된다. 그런 이유에서 지금의 정세를 단순히 검찰권력을 포함한 기득권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주도권 다툼만으로 해석될 수 없다. 중처법 개정 문제뿐만 아니라 각종 정치 경제 분야에서 기득권 세력의 계보로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목록들이 계속 이어질 것이다. 개혁주의 진영의 내로남불로 ‘반기득권 서사’가 현실에 대한 설명력을 잃고 유권자들에게 투쟁의 정당성도, 대안적 기획도 제공하지 못한다면 새로운 문제의식을 찾아 나서야 할 때다. 자본주의 사회 배후의 은밀한 소수의 조종자들을 규탄하는 윤리적인 호소를 넘어, 반기득권 연대라는 손쉬운 도식들을 대체하고도 남을 총체적인 방향성을 향해서 말이다.
2022-06-15 | hrights | 조회: 376 | 추천: 6
김지혜/ 회원 칼럼니스트 만약 일반 기업에서 업무 중 화장실 이용 시간을 근무평가에 반영해 경쟁에 붙인다면 어떻게 될까? 배달업체인 요기요의 AI는 이것을 가능하게 했다. 라이더의 휴게시간을 상대적으로 평가하는 요기요의 AI는 잠깐의 휴게시간도 데이터로 산정하여 라이더에게 등급을 부여하고 일감을 줄인다. 등급 하락으로 인한 수입 감소를 막기 위해 라이더들은 화장실 참는 경쟁을 해야 하는 것이다.  배달업체 라이더는 특수 고용직 플랫폼 노동자이다. 그들은 노동법의 보호를 받는 근로자가 아닌 개인사업자의 형태로 플랫폼을 통해 소비자에게 서비스를 제공한다. 출처 - 중앙일보  코로나 사태 이후 비대면‧비접촉의 형태로 생활양식이 변화하면서 플랫폼 노동은 우리 생활 깊숙이 파고들었다. 소비자에게는 편리함이, 일하는 이들에게는 과외 시간을 이용해 수입을 올릴 수 있다는 이점이 강조됐다. 그러나 이 플랫폼 산업은 출혈적 경쟁과 알고리즘에 의한 비인간적 통제에 의해 굴러가는 시스템이었다.  진입장벽이 낮고 시간관리가 자유롭다는 이점으로 배달라이더의 수는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알고리즘은 그런 이점을 비웃는다. 계속해서 콜을 받지 않으면 점차 콜이 줄어드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일정한 수입(콜)을 유지하려면 그들은 계속해서 도로 위를 질주할 수밖에 없다. 즉, 이들은 무한노동을 전제로 24시간 대기상태에 있다.  서울시에 따르면 이륜차사고가 지난 1월부터 지난 5월 20일까지 지난해 같은 기간 동안에 비해 47.1%포인트 증가했다. 횡단보도 주행, 신호위반 등이 그 원인이다. 이것은 개인의 도덕성 문제가 아니다. 보다 빠른 배달을 원하는 소비자, 콜을 잡기 위한 라이더끼리의 지나친 경쟁, ‘단순중개’라는 명목 하에 방관하는 플랫폼 기업, 이륜차의 교통법규 위반에 대한 부실 단속 등 다양한 문제가 얽혀 있다.  지난 5월 29일, 배달 노동자의 산재보험 적용을 막아왔던 전속성 조항(두 군데 이상의 사업장에서 일하는 라이더의 경우 한 사업장에서 월 소득 115만원 이상을 벌거나 93시간 이상을 일해야 산재보험의 적용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폐지하는 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그동안 전속성 조항의 미충족으로 산재보험의 적용대상이 되지 못했던 노동자들에게 산재 적용 대상의 가능성이 열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건 사고에 대한 예방이 중요하기에 의무는 있으나 권리는 없는 그들에게 노동권을 보장하는 것이 먼저다. 국내에서 거대 플랫폼 기업으로 인한 사회적 문제가 계속 심화하고 있는데 정작 이들은 국경을 넘어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플랫폼 노동자의 노동자성이 인정되지 않는 이상 이들은 인간적으로 노동할 수 없다. 알고리즘, 콜, 평점 등으로 노동자를 관리하고 통제하는 플랫폼 기업은 관리자로서 책임을 져야하며 동시에 플랫폼 노동자는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고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영국의 노동법학자인 제레미아스 아담스-프라슬은 이를 “혁신의 역설”로 표현하며 플랫폼 기술은 혁신적일지 몰라도 플랫폼 노동자가 일하는 방식은 오히려 퇴행적임을 지적한다. 플랫폼 산업 시대, 우리는 노동자의 권리와 사업주의 책임에 대해 다시 돌아봐야 한다.
2022-06-08 | hrights | 조회: 457 | 추천: 6
조혜원/ 회원칼럼니스트  지난 5월 2일 걸그룹 에스파가 경복고 축제에 참석했다가 현장에 참석한 학생들의 도를 넘은 행동들로 인한 피해 사실이 전해졌다. 학생들은 무대에 난입해 과도한 신체 접촉을 시도하는 등 위협적 행위를 이어갔다. 사건 이후에도 자신들의 SNS에 해당 사진과 함께 성희롱적 발언을 올리기까지 했다. 학교 측은 두 차례에 걸쳐 사과문을 내놓았지만, 그 어디에도 문제의 본질은 찾아볼 수 없는, 표면적인 사과일 뿐이었다. 이번 경복고 사건의 문제점은 가해 학생들 개개인의 일탈에 국한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는 해당 행사 자체에 문제가 있다. 에스파의 소속사는 SM 엔터테인먼트다. 이수만 총괄프로듀서가 실질적 오너인 회사다. 그리고 경복고는 이수만 총괄프로듀서의 모교다.  동문에 SM 오너 등과 같은 권력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여성 가수 공연이 선물 혹은 특혜처럼 제공될 때, 그 공연을 관람하는 남학생들은 이를 특권으로 인식하게 되며 해당 가수들을 하나의 개인으로 보지 않게 된다. 즉 공연의 주체는 사라지고 그저 권력을 가진 동문이 하사해주는 하나의 상품으로 대상화되며, 이 과정에서 왜곡된 성 관념과 여성의 성적 대상화, 그리고 여성 혐오적 시각이 재생산되는 것이다. 과연 이러한 현장이 공교육으로서 아이들에게 어떠한 교육적 효과를 가져다주며, 무슨 의미를 가진다는 말인가. 사진출처 - 세계일보  이는 올해 초 ‘진명여고 위문편지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 사회는 언제까지 여성들이 인간이 아닌 상품으로 대상화되는 것을 지켜만 봐야 하는가. 반복되는 사건들에서 여성은 그저 남성에게 기쁨과 즐거움, 응원을 주는 보조적인 존재로서 추락해 버림과 동시에 전통적인 성 역할을 재생산하는 대상으로 전락할 뿐이다.  남성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여성들, 그리고 쉽게 여성들을 대상화하는 남성 카르텔, 기분이 나쁜 남성과 실질적인 공포를 느끼는 여성. 경복고 사태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계속해서 반복하여 발생하는 문제들의 집약체이다. 이제는 무엇이 문제인지 직시하여야 한다.  ‘명문’ 경복고가 동창회 주최의 기념식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7년 전 동문 체육대회 협찬 품목 현수막에 품목명으로 ‘레드벨벳’이라고 기재한 전적과 이번 사건이 크게 다르다고 할 수 있는가. 그들만의 카르텔을 통해 경복고는 남성중심적, 가부장적인 가치관 확산에 기여하지 않는다고 발뺌할 수 있을 것인가. 학연과 특권의식으로 얼룩진 남성 카르텔에서 피해를 보는 자는 오롯이 여성이다. 이것이 그들이 말하는 ‘명문고등학교’라면, 그 명문은 틀렸다.  경복고는 본교의 공고한 권력 카르텔로부터 발생한 가부장적인 가치관 생산과 왜곡된 성 인지 감수성 확산 사실에 대하여 제대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또한 더 이상 가해자 개인의 일탈로 꼬리 자를 생각 말고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여야 한다. 묻어두고 회피할수록 우리 사회의 곪아터진 현실은 계속해서 이렇게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될 것이다. 이제는 현실을 직시하고 무엇이 올바른 교육의 방향성인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2022-05-31 | hrights | 조회: 632 | 추천: 3
전예원/ 회원칼럼니스트  지난해 수강한 한 교양수업에서 혼인신고서를 작성하라는 과제를 받았다. 법학 관련 과목이었던 만큼 “살면서 한 번쯤 작성하게 될 법률문서를 제 손으로 작성해보라”는 것이 취지였건만, 종이를 앞에 두고 한참 들여다봤던 기억이 있다. 가상의 상대를 지정하여 작성해도 좋다기에 얼굴도 모르는 사람의 본관이며 주소를 꾸며 적었다. 많은 것이 낯설었다. 결혼이 먼 미래의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혼인신고서를 ‘살면서 한 번쯤 작성할 문서’로 일컫는 가정 자체에 의문이 들었던 탓이다.  혼인율이 감소함에 따라 결혼도 ‘선택’이라는 인식이 커진 것도 사실이나, 여전히 결혼을 ‘의무’로 규정짓는 무의식을 경험한다. 혼인신고서의 작성이 별다른 이의 없이 과제가 되는 모습이 그러하다. 제도로서의 결혼이 반드시 거쳐야 할 통과의례처럼 여겨지는 까닭은 결혼제도의 사회유지 기능에 있다. 법률혼은 가족과 가계를 일치시켜 관리를 쉽게 하고, 출산을 통해 사회구성원의 안정적인 재생산을 가능하게 한다. 다시 말해 결혼은 개인 간의 관계를 결정짓는 것을 넘어 국가 성원(국민)을 확충하기 위한 의미 또한 갖는 것이다. 출처-pixabay  그러나 법률혼주의를 중심으로 국민을 ‘관리’하고 ‘재생산’하는 데에 초점한 이 제도는 어떤 지점을 놓치고 있는 것 같다. 현실의 결혼과 가족제도는 많은 부분 부부와 그 자녀를 단위로 하는 정상가족을 상정한다. 다시 말해 이러한 기준에 부합하는 당사자들만이 가족으로 인정받고 국민의 권리를 보호받는 것이다.  이 기준에 부합되지 않는 이들은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온전한 권리행사가 불가능하다. 가령 재생산의 의무를 다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퀴어 커플들은 법률상 부부를 이룰 수 없으며 가족 정책의 적용을 받기 어렵다. 결혼이주여성의 경우 국제결혼을 통해 가족법상의 부부를 이룰 수는 있으나, ‘자녀 없음’을 사유로 하여 국적 인정에 어려움을 겪는다. 한국 사회에서의 개인의 지위가 가족과 자녀 유무에 종속되어 성립하는 것이다. 한 사회가 개인을 대우하는 방식이 ‘재생산 기능’을 요건으로 한 조건부 인정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정상가족을 기준삼은 결혼제도가 사회유지에 긍정적인 기능을 해왔음을 부인할 수는 없으나, 예측할 수 없는 미래로부터 정상기능을 해온 것들에도 오기능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결혼에 대한 인식이 변화하고 다양한 가족의 형태가 늘어난 현실은 제도의 점검이 필요함을 암시한다. ‘결혼은 선택’이라는 인식과 무관하게 행해지는 ‘결혼제도’에 대한 고민은 변화하는 현실과 얼마만큼 조응하며 나아갈 수 있을까.  가정의 달 5월을 통과하며, 새삼스레 가족의 의미를 질문하게 되는 요즘이다. 결혼을 선택할 수 없는 사람들과, 결혼이 선택 아닌 의무가 되는 사람들에 대한 폭넓은 고려가 필요하다. 최근의 정부가 인구정책의 패러다임을 전환할 것을 밝혔다는 사실로부터 한 가지 기대를 건다. 양적증가에 지향을 두었던 저출산정책에, 인구감소에 적응하는 방식 역시 고려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전환에 기존의 혼인·가족정책에 내재한 재생산의 요구에 대한 질문과 성찰이 동반되었으면 한다. 가족성원을 한단위의 국가성원으로 치환하지 않는 접근방식이 필요하다. 상호인정에 기반 한, 그야말로 애정으로 충만한 ‘가정의 달’은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2022-05-25 | hrights | 조회: 670 | 추천: 12
이창우/ 회원 칼럼니스트  영화 <플레전트빌>(1998)의 주인공 데이비드는 영화에서 TV 시트콤 <플레전트빌>의 애청자다. 1950년대를 배경으로 한 이 인기프로그램은 ‘즐거운 마을’이라는 이름처럼 행복하고 단순한 삶을 사는 사람들의 얘길 담은 드라마다. 데이비드를 비롯해 많은 시청자들로 하여금 이제 존재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예를 들면 이른 저녁, 아버지가 일을 마치고 “여보, 나 왔어!” 라고 말하면, 앞치마를 두룬 어머니가 부엌에서 나와 반갑게 맞는 식이다. 정성이 가득한 음식들로 채워진 저녁 식탁에 가족들이 둘러 앉아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을 오순도순 이야기하는 풍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이 시트콤을 시청하는 데이비드의 현실은 드라마와 너무 딴 판이다. 부모님은 이혼한 이후에도 전화로 서로 싸우고, 하나뿐인 쌍둥이 여동생은 학교에서 인기가 많다. 집에 와도 차가운 냉동식품을 데워 홀로 끼니를 떼우는 일상이다. 데이비드가 ‘플레전트빌’ 시트콤에 빠지게 되는 이유는 어찌보면 현실에 없는 드라마 속 세계에 대리만족하기 때문이다. 금요일 저녁, 제니퍼와 데이비드는 리모컨을 서로 가지려다 박살이 난다. 갑자기 나타난 신비한 수리공 할아버지로부터 리모컨을 받아든 두 사람이 그것을 작동시키면서 TV속 흑백세상 <플레전트빌>로 빨려 들어가는 엄청난 경험을 하게 된다.  시트콤 플레전트빌은 현실을 지배하는 모든 법칙들이 교묘하게 비껴가는 곳이다. ‘기쁨이 있는 동네’이기에 불도 날 수 없고, 비도 내리지 않고, 농구부 선수들이 넣은 슛은 무조건 들어간다. 소방관들은 출동하여 나무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고양이를 구조하는 것이 가장 큰 업무이다. 한마디로 실패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다. 웃음과 교훈을 주는 시트콤은 언제나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그곳의 사람들은 실제의 인간이 아닌, 허구로 꾸며진 반쪽짜리 존재들이니까. 이 이상적인 세상에서 잘 적응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방송에 대해 무엇이든 알고 있는 출연 배우들이야말로, 시트콤 플레젠트빌에 걸맞는 등장인물이다.  플레전트빌에서 아이스크림집의 존슨은 데이비드가 오지 않으면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무의미하게 카운터 위나 닦으면서 데이비드가 올 때까지 멍하니 기다려야 한다. 그는 시트콤에 자주 등장하는 ‘카페 주인’의 역할, 조연이다. 언제나 카운터를 닦으면서 주인공에게 필요한 조언을 해주는, 선량한 캐릭터이다. 식당 문을 열고 카운터를 닦고 메인 주인공이 등장할 때마다 가끔 비치는 조연에게 현실에서 등장인물이 된 데이비드가 말한다.  “존슨, 스스로 그 무엇도 할 수 있어요. 다음부턴 제가 오지 않아도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세요. 모든 것은 정해진 것이 아니니까요. 마음대로 바꾸어도 되는 거죠.”  그 후, 작은 자유를 맛본 존슨은 더 큰 자유에 대한 욕망이 생겨나고 이렇게 플레전트빌은 변화를 맞게 된다.  누군가의 한걸음으로 세상은 조금씩 나은 쪽으로 변화해왔고 그 가능성을 플레전트빌은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색깔’은 ‘인간다움’과 일맥상통한다. 아기처럼 아무것도 모르던 주민들이 자신의 욕망과 정체성을 깨닫게 되면서 색깔을 찾는다. 여전히 마을의 배경은 흑백이지만 생생한 색깔을 찾게 된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간다. 그러나 아직 자신의 색깔을 찾지 못한 마을 사람들의 대부분이 그들을 유색인종으로 취급하며 단호하게 뭉친다. 흑백의 플레전트빌에 색을 찾아 대비되는 영화는 민주주의 작동 원리인 다수결의 오류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다수가 선택했다고 그것이 옳은 것은 아니라고. 변화를 요구하는 시민들 사이에서 소수의 선택은 쉽게 배제당한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이 사회가 마치 영화 같은 일들이 재현된다는 사실. 어쩌면 우리도 영화나 드라마 속 세계로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이다. 플레전트빌은 그동안 지켜온 언제나 즐거운 마을을 지키기 위해 주로 시장을 중심으로 한 중년 이상의 남성들이 나선다. 제니퍼의 극 중 아버지도 포함된다. 마치 우리의 아버지들처럼 시대의 변화에 호들갑을 떨며 놀라고 어이없어하는 모습이 연출된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아내들이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변화를 거부한다. 아버지의 권위와 어머니의 무조건 희생이 미덕처럼 치장된 가부장제를 계속 유지하고 싶어 한다. 출처 - daumcdn  저녁에 집에 들어 왔을 때 당연히 맛있는 식사가 차려져 있어야 하는데, 자기 색깔을 찾은 부인들이 그것을 거부한다. 도서관에는 책들이 글자를 채워 컬러로 빛을 내고 연인들의 호수에는 컬러의 세상이, 그들만의 자유로움이 자연스럽게 채색된다. 중년을 넘긴 그들은 플레전트빌의 기득권자이자 권력자, 그리고 지배자였다. 그들은 변화가 두렵다. 이미 지금도 충분히 힘과 관련된 편리함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젊은이들의 연애를 방종이라 하고 개인의 감정 표현을 막으려고 한다. 바깥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키우는 책들을 강제로 빼앗아 불태워 버리고, 자유롭게 음악을 듣지 못하게 금지곡을 만든다.  플레전트빌 시장은 흑색으로 존재하는 사람들을 선동하며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이곳 주민들이 지켜야 할 법규들을 새로 만든다. 빠르게 변화하는 사람들을 억누르는 기득권층의 횡포와 권력남용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이 영화에서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이들의 야만과 자신의 색을 찾은 이들을 향해 ‘유색인종’이라 손가락질하며 비웃는 장면들도 역시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부끄러운 일들이 현재 이 사회에서 뻔뻔함의 극단으로 달리며 자행되고 있다. 그 모습을 20세기 후반 영화를 통해 되새김질 하다 보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서글픔과 모욕감이 고개를 내민다.  하지만 영화에서도 자신의 색깔을 찾은 마을 사람들이 모여든다. 아직 흑백인 마을 사람들에 의해 파괴된 존슨의 가게에 모여 투표로 결정된 새로운 강령을 읽고 저항을 시작한다. 아직 파괴되지 않은 뮤직 박스에서 그들이 원하는 이미 금지된 자유로운 음악을 틀고, 데이비드와 존슨은 밤을 새워 저들만의 색깔로 빛을 내는 벽화를 그린다. 나는 잘못된 일들을 파렴치하게 휘두르는 권력에 저항을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것보다는 내 한 걸음 내딛어 행동하고 나서 만날 내일이 덜 두렵다. 결정적인 해결책은 없지만 늘 새로운 시도는 가능하다. 세상은 조금 더 나은 쪽으로 향하고 있다고 믿는다.  개인의 성향은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는 것. 문제는 사회가 자기에게 부과한 역할에서 자기의 존재 의의를 찾지 못할 때 생긴다. 때로는 강요 때문에 격렬한 충돌이 생긴다. 드라마에서 위안을 받는 일이 더 자연스러운 세상 같지만, 그렇다 해도 미리부터 포기할 일은 아니다. 알고리즘이 나를 현실과 동떨어지게 만든다 해도 거부할 수 있는 내가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시트콤에서 벌어지는 삶은 보이는 게 전부이다. 그 이외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배우들이 연기를 하는, 그럴듯한 세트 안의 인생은 조명이 꺼지면 더는 그곳에 없다. 드라마나 영화는 영상으로 고정해 놓은 이미지로 있을 뿐이다. 보여주기 위해 만든 삶이기에 그것으로 끝이다.  우리는 현실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걸까. 지금도 무언가에 도피하기 위해 텔레비전이나 넷플릭스 드라마에 빠져 세상을 잊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은 아닐까. 이 영화 속의 시트콤에서는 사람들이 자각과 경이를 느끼면서 그동안 내릴 수 없었던 비가 내린다. 그 비를 보고 두려움에 떨며 색을 찾지 못한 그들의 표정은 한 개인이 옳지 않은 일에 저항하려 할 때 만나는 마음과도 비슷하다. 무엇이든 하지 않는다면 안 되는데 정작 실행하면 나만 다칠 것만 같은 두려움이 먼저 앞선다. 이 사회도 제 색깔을 찾으려는 개인들이 많아지면 저 나름 행복감을 만날 수 있다. 행복한 풍경보다는 내가 행복할 수 있어야 이 세계는 다양한 색으로 제 빛을 낼 수 있다.
2022-05-18 | hrights | 조회: 450 | 추천: 5
이서하/ 회원 칼럼니스트  ‘문과라도 안 죄송한 이세계로 감’이라는 웹 소설이 온라인 플랫폼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주인공 김정진은 사학과를 졸업하고 마땅한 일자리를 찾지 못해 영세한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하다, 불의의 사고로 물에 빠져 소설 속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이 세계의 마법은 아름다운 문장으로 주문을 외워야만 그 힘이 더욱 강하게 발현된다. 주인공은 편집자로 일하던 경험을 살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거센 바람이 5월의 여린 꽃봉오리를 뒤흔드니1)”, 슈테판 게오르게의 “불꽃의 궤도를 선회해본 이 그 누구든, 불꽃의 위성으로 머무를지니2)” 등 거장들의 멋들어진 문장을 사용하며 제일의 마법사로 발돋움한다. 현실에서는 아무 쓸모도 없었던 역사적 지식 역시 세계의 흐름을 파악하고 난관을 타파해 나가는 일에 큰 도움을 준다.  모든 작가는 어떻게 해야 한 명이라도 더 자신의 글을 읽어 줄지를 고민한다. 그리고 이 고민을 해소하기 위하여 독자와 공감대를 형성하고 욕망을 반영하기 위해 노력한다. ‘문과라도 안 죄송한 이세계로 감’이라는 소설이 나오게 된 배경 역시 명확하다. 우리 사회가 문과라서 죄송한 사회가 된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기술 발전의 세상이다. 아날로그는 뒤로 밀려났다. 키오스크를 통하여 대면 없이도 음식을 주문할 수 있게 되었다. QR코드를 통하여 백신 접종 여부를 인증하고 방문 기록을 남기기도 한다. 스마트폰 안에는 범인이라면 미처 다 사용하지 못할 첨단 기능이 가득하다. 이런 사회에서 당장 필요한 인재는 이공계 출신이다. 더 나은 기술, 더 나은 기계, 더 나은 전자제품을 발명할 수 있는 인재의 보유가 곧 국력이고 세계의 발전이라 인식된다. 고도로 산업화한 시대에 기술은 곧 생활이므로 이에 발맞춰 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앞으로 달려 나가기에 바빠 무언가를 잊어버리고 있던 것은 아닐까. 발전한 세상, 부강한 세상이 곧 옳은 세상과 동의어는 아닐 것이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Caspar David Friedrich, Wanderer above the Sea of Fog (1818)  인문학은 한자로 사람 인(人), 글월 문(文), 배울 학(學)이다. 즉 사람을 읽는 문자이며, 사람을 탐구하는 학문이며, 사람의 근간이 되는 초석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전혀 거창하지 않다. 사람뿐 아니라 사람 간의 관계와 인간 본질의 정수를 탐구하고 이해하여 어떻게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하는 모든 것이 바로 인문학이다. 그렇기에 어쩌면, 우리 모두 인문학적 소양을 조금씩은 가지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기술이 사회를 지탱하는 하나의 축이라면, 인문학은 꿋꿋이 기술의 반대편에서 또 하나의 축이 되어 우리 사회를 균형 있게 발전시키는 데 이바지해왔다. 단지 지나치게 기술 중심적이 된 현대 사회가 인문학으로 “먹고 사는” 일을 어렵게 만들었을 뿐이다.  사람을 읽고 이해하는 일을 그만두는 것은 타인과의 소통 및 공감 능력의 부재를 불러오기 쉽다. 요즘 사회의 과도한 경쟁, 난무하는 혐오와 분쟁 역시 이것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언제나 살아가기에 바쁜 세상이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최소한 인간의 기본적 소양을 외면하는 일만큼은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즉 사람답게 살아야 할 것이다. 이 ‘사람답게’라는 말에 인문학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하지만 사람다운 사람이라는 말을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경쟁 위주로 흘러가는 교육, 그리고 그것을 부추기는 사회 구조부터 차차 바뀌어야 할 것이다. 타인을 배려하고 이해하는 소통 능력을 키워야 할 것이며, 무엇보다 나 자신을 깊이 알아야 할 것이다. 아직 인문학이 가야 할 길은 너무나도 멀다. 하지만 갈 길이 멀었다는 말은 곧 끝이 멀었다는 말이 아닐까.  ‘문과라도 안 죄송한 이세계로 감’속에도 여러 문제가 존재한다. 왕정을 철폐하고 공화정을 세우려 하는 혁명 세력, 권력을 지켜내려는 왕세자, 형을 밀어내고 성군이 되고자 하는 셋째 왕자의 대립 속에서 시대는 격동한다. 주인공은 역사의 풍랑 속에서 끊임없이 어떻게 해야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을 것인지, 어떻게 살아가야 옳을지에 대하여 고뇌한다. 강한 능력을 갖췄음에도 삶에 대한 고민과 성찰은 피할 수 없던 것이다. 우리 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어느 시대라도, 어떤 기술 속에서도 인간다움에 대한 고민이 사라진 적은 없다. 인문학이 매번 존폐 위기에 시달리면서도 명맥을 이어 온 이유일 것이다.  인문학을 살리기 위하여 갑자기 철학책을 펼 필요는 없다. 자신의 삶에 이미 존재하는 자그마한 인문학적 소양, 즉 인간성에 잠시의 시선을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인간성에 대한 관심과 고민 속에서 사람이 사람으로 존재하는 한 인문학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죄송한” 학문 역시도 아니다. 1) Sonnets 18 2) The Star of The Covenant
2022-05-10 | hrights | 조회: 567 | 추천: 7
김태민/ 회원 칼럼니스트  포퓰리즘적 엘리트주의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조어(造語)가 "좌파 신자유주의"와 다를 바 없는 우스운 말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식은 땀을 흘리며 이 농담 같은 말을 건네야 한다는 강한 압박감에 시달린다. 요즘 들어 우익 포퓰리즘과 엘리트주의가 결합하는 광경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우익 포퓰리즘과 엘리트주의의 결합이 그저 일시적인 착시에 불과하다면 포퓰리즘적 엘리트주의를 백치들이 지껄이는 의미 없는 소음으로 취급해도 상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포퓰리즘과 엘리트주의의 말도 안 되는 동거는 분명한 정치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한때는 정권교체기에 맞추어 획기적인 정치적 언어들이 발명되어 포퓰리즘 광풍을 만들어내던 때도 있었다. 그 이름이 경제민주화던 소득주도성장이던 포퓰리즘은 엘리트층을 배제하고 민중을 호명해내는 매력적인 전술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포퓰리즘도 그 유효기간이 지나 부끄러움도 없이 엘리트주의와 함께 배치된다. 실로 엘리트주의와 포퓰리즘을 더 이상 10년 주기의 정권교체 시기마다 교차하는 진자 운동으로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런 까닭에 엘리트 기술관료주의가 실패하고 민주주의가 마비될 때에서야 포퓰리즘이 분출하게 된다는 오랜 상식은 무효화되었다. 오히려 둘은 동시에 그리고 상호보완적으로 움직인다. 예컨대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 캠프가 적극 활용한 정치적 지형 역시 그런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당시 윤 후보는 문 정부로 대변되는 엘리트 기술관료 신자유주의에 대한 거부감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에 편승해 포퓰리스트 전략을 구사했다. 그리고 그 포퓰리즘 전략은 법치주의와 신자유주의 경제를 내세운 엘리트주의와 접합되었다. 윤 당선인의 인수위에서 예고한 정책들과 인선 역시 동일한 배치를 보여준다. 여가부 폐지 어젠다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기술관료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제지한다는 측면에서 포퓰리즘적 요구를 만족시킨다. 한편 형식적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법률가 출신 인사를 대거 등용하고 경제적 엘리트층의 요구를 충실히 반영한 정책들을 제시하는 모습은 엘리트주의적 통치의 성격을 강화한다. 사진출처 - phelis  이 같은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대선 후보 한 명을 선택하면 포퓰리즘과 엘리트주의 모두 소비할 수 있는 정치 소비의 시대가 도래한 게 아닌지 싶다. 홍콩 민주화 운동도 여행 패키지 상품이 되는 자본주의에서는 모든 걸 팔아 넘길 수 있으니 말이다. “우리 커피를 마시면 캄보디아 소녀들을 살릴 수 있어요”, “우리 회사는 판매 수익의 1%를 기부합니다” 등등 상품은 더 이상 사물의 유용성만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분위기와 윤리적 가치, 경험도 함께 판매한다. 덕분에 소비자들은 불평등한 세상에 대한 윤리적 부담을 상품에게 넘길 수 있게 되었다. 비록 내가 하루도 빠짐 없이 전세계적 자본주의 시장에 참여한 탓에 국제 노동 분업이 한층 더 불평등해지더라도 윤리적 자책감에 빠질 필요가 없다. 상품이 나를 대신해 윤리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동일한 논리를 포퓰리즘적 엘리트주의에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지난 대선기간부터 판매된 포퓰리즘적 엘리트주의는 시민 소비자들이 정권교체를 위해 5~10년을 기다리지 않고도 즉각 모든 정치적 격동을 미리 경험하도록 해준다. 윤석열 당선인 덕분에 누군가는 엘리트 법피아들이 실현하는 “법치주의”와 “공정성”을 한껏 누릴 수 있게 되었다. 형식 민주주의라는 상품은 소비자 본인이 엘리트가 되지 못할지라도 정치인과 전문가들이 대신 권위주의적 감각을 만끽하게 해준다. 물론 엘리트주의를 즐겁게 소비할 사정이 못 되는 소비자를 위해서는 반페미, 반장애인, 반 진보시민단체 혐오 정치도 판매하고 있다. 덕분에 누군가는 “우리”의 유토피아를 방해하는 “저들”의 “비문명적인” 갈등조장 행위를 윤리적 부담 없이 마음껏 비난할 자격을 소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도 시장의 과열된 분위기가 지나가고 나서는 후유증의 시간이 오기 마련이다. 상품은 경제화된 삶 이외의 공간, 즉 착취적인 사회관계를 절단하면서 등장하게 된 숭고한 사물임을 고려해본다면 분명 후유증은 점차 누적되고 있을 법도 하다. 동일하게 ‘포퓰리즘적 엘리트주의’ 역시 사회적 위계로부터 비롯된 적대와 모순을 애써 억압하기 위한 정치적 언어임을 고려해본다면 이 역시 어떤 후유증을 남기고 있지 않을까? 핵심은 포퓰리즘와 엘리트주의의 결합은 정치의 실패를 가리키는 지점이지 정치의 완결된 전체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지금 우리의 정치가 모든 것의 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그게 바로 포퓰리즘 대 엘리트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정치의 언어를 찾아나서는 작업이 필연적인 다음 과제일 수 있는 이유다.
2022-05-04 | hrights | 조회: 784 | 추천: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