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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무한경쟁 속을 걸으며(이서하)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22-11-09 09:44
조회
341

이서하 / 회원칼럼니스트



대학수학능력시험 고사일이 코앞이다. 수시 접수는 끝난 지 오래고 예체능 계열 실기가 한창이다. 주위의 수험생들은 바짝 다가온 시험 앞에 두 부류로 나뉘었다. 심각하고 비장해지거나, 자유가 얼마 남지 않았다며 외려 즐거워하거나.


어느 쪽이든 의문이다. 대학 입학이 인생의 큰 관문 중 하나로 여겨지는 것도, 그것을 위하여 자유가 없다고 느낄 만큼 공부에 매진해야 하는 것도. 성적만을 전부로 여기는 사회구조에 대한 지적은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그러나 꾸준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유의미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한국의 학력주의는 학벌주의, 연고주의, 능력주의, 엘리트주의 등과 결합하여 그 세를 불리고 있다.



<출처 : pixabay>


고된 노력 끝에 서울 소재의 대학에 들어가도 경쟁은 끝나지 않는다. 대학 간 입시 결과로 다시 서열이 나뉜다. 같은 대학 안에서도 각 학과의 입시 결과, 미래 전망 등으로 학과 간 서열이 나뉜다. 바야흐로 모든 일에 경쟁이 적용되는 무한경쟁 시대인 셈이다.


사람의 성실함과 같은 추상적 개념은 수치화할 수 없기에 이 경쟁이 공정하기만 하다면 사람을 구분하는 좋은 지표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많은 이들이 지적해 왔듯 학벌의 배경에는 개인의 노력으로 결코 극복할 수 없는 것이 개입한다. 타고난 지능, 사교육의 기회, 물질적 뒷받침 등이 그렇다.


능력주의가 공정하게 작동하려면 공평한 기회의 제공, 능력에 따른 합당한 보상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은 축적한 부의 정도에 따라 달라진다. 고액 과외를 받으며 공부에만 매진할 수 있는 사람과 학원을 갈 여력도 없이 아르바이트를 병행해야 하는 소년가장의 격차, 집 앞에 각종 학원이 가득한 대도시 학생과 종합학원 하나가 전부인 낙후 지역 학생 사이의 격차를 떠올려 보자. 이렇듯 각자의 삶이 매우 다른 사회에서, 학업 성취도를 온전히 개인의 능력으로 환원하기에는 문제가 있다.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가자면 학력이 상대를 판단하는 데 있어 그렇게 중요하냐는 질문을 던질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꿈을 위하여, 어쩌면 생존하기 위하여 대학 대신 일터를 선택한 이들은 어린 나이로 받는 무시와 고졸 출신으로 받는 차별에 맞서며 치열하게 삶을 일궈나가고 있다. 그 삶의 무게와 부단한 노력이 대학 졸업자가 학업에 사용한 노력보다 못하다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출처 : pixabay>


 

최근 덕성여자대학교에서는 청소노동자들이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을 단행했다. 이 파업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주장 중 주목할 만한 것은 “조교 임금도 그것보다 낮다”라는 것인데, 이는 대학에 다니는, 혹은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조차 그보다 적게 받으니 더 요구하지 말라는 학력주의적 시각을 여실히 드러낸다. 청소노동자의 임금이 동결되는 것이 아니라 조교의 임금이 올라야 모두가 보다 나은 삶을 영위할 수 있을 텐데도 말이다.


지난 8월 연세대학교 청소 및 경비노동자들은 이와 비슷한 시위 과정에서 학생들로부터 고소·고발을 당하기도 했다. 이런 약자, 소수자를 향한 적대감은 비단 학력주의뿐 아니라 취업난과도 연결되어 있다. 능력주의에 따르자면 대학을 나오기까지의 고생만큼 보상을 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사회 어디에서도 그를 보장하지 않는다. 외려 수많은 대학 졸업자 사이에서 졸업장의 가치는 나날이 떨어진다. 그렇기에 학벌주의, 곧 대학서열주의는 아주 세밀해진다.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사소한 차이도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현시대 청년들은 능력주의를 내면화한다.


이처럼 사회현상은 여러 가지 요인과 복잡하고 견고하게 얽혀 있다. 그런 만큼 구조를 깨는 것은 어렵다. 구조에 순응하는 것 역시 이 시대를 걷는 사람으로서 함부로 잘못이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일을 정당화하거나 외면하지 않는 데에 있다. 구조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치환한다면, 일정 부분 구조에 순응하면서도 그 폐단에 대해 비판하는 이들을 모순된 위선자라 부른다면, 이 잘못된 구조에서의 탈출은 더욱 요원해질 테다.


그러니 이따금 물었으면 한다. 이 무한한 경쟁의 승자는 누구인가 하고. 개인주의가 팽배한 이 시대에도 함께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내가 이 정도에 그쳤으니 나보다 못한 너는 거기서 더 바라지 말라고 깎아내리는 목소리도 있다. 이토록 다른 가치가 충돌하는 사회에서, 더 나은 길이 무엇일지 우리는 분명히 알고 있다.


현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언제나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어 후대에 물려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니 살아남기 위하여 경쟁하고 부딪힐지라도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만큼은 잊지 않기를. 잔물결 끝에 밀려오는 파도처럼, 이토록 사소한 시작으로부터 언젠가 학업의 굴레를 벗어나 타인의 참된 능력을 알아볼 수 있는 날이 도래할 것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