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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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조광제 / 철학아카데미 대표 출처 - 국제뉴스   미국의 행태가 괴이할 정도로 불편하다. 역사적으로 고착되다시피 한 군사 · 경제적인 압도적 우위를 무기로 내세워 당연하다는 듯 대한민국을 여러 방면에서 압박하고 있다. 우선 다들 염려하다시피 한국의 주력 산업인 첨단의 반도체 기술을 전유하고자 하고 구미 시장에서 힘을 발휘하는 자동차 생산과 판매에 상대적인 불이익을 강요하고 있다. 미국이 세계 자본주의 패권 다툼에서 중국에 밀리는 형세가 뚜렷해지자 미국주의를 내세워 한국이 그네들의 속국이라도 되는 양 일종의 제국주의적인 약탈을 자행하는 꼴이다.   이러한 경제적인 영역에서의 무시와 강압뿐만이 아니다. 다 알다시피, 자유, 평화, 번영의 인도-태평양 전략이란 명목하에 한미일 군사동맹을 향해 뚜렷한 행보를 보이고, 그 수단으로 일본이 유사시 반격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군사력을 배가해 나가는 걸 허용했다. 외교 전문가들은 미국의 지시에 따라 한국 군대가 일본 군대의 지휘권 아래 들어갈 수도 있음을 염려하고 경고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듯, 일본이 수출규제까지 단행하는 등 한일 관계를 교착 상태에 빠뜨렸던 일제 강점기 강제징용 문제를 윤석열 정권이 굴욕적으로 해결하도록 배후 조작한 기미마저 보인다.   급기야 “미국의 중앙정보국 등이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대한민국 정보의 내부 논의를 감청해 온 정황이 뉴욕 타임스 보도를 통해 드러나, 이에 관한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라는 보도가 나왔다. 아무리 군사 동맹국이라고는 하나 도저히 있을 수도 없고 묵과할 수도 없는 참상이 벌어졌다. 이에 대해 대통령실에서는 제3국에 의한 도 · 감청 내용의 조작 가능성을 언급하는가 하면 “사실관계의 파악이 우선”이라고 발표했다. 이는 사태를 호도하는 것에 불과하다. 뚜렷한 사실 확인은 미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해야만 할 것이고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 “만약 사실이라면”이라는 단서를 붙여서라도 동맹국 간에 결단코 용납할 수 없는 행위임을 우선 발표해야 한다. “즉각 미국 정부에 해당 보도의 진위와 기밀문건에 대한 명확한 정보를 요구하라”라는 민주당의 성명이나 “미국 눈치 보기부터 한 모양새다. 즉각 미국 정부를 향해 사실 규명과 사과, 재발 방지를 요구해야 한다.”라는 정의당의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민의 분노를 내세워 미국 정부의 해명을 적극적으로 요구해야 한다.   어떤 상처건 제대로 치료하지 않고 곪도록 방치하면 언젠가는 부풀어 올라 터지기 마련이다. 1945년 이후 3년에 걸친 미군정의 지배와 명령에 따라 일어난 대대적인 양민학살을 낳은 제주 4.3사건에서부터 미군의 허락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1951년의 거창 양민학살 사건, 미국이 배후조정 했다는 혐의가 끊이지 않는 5.18 광주 민주항쟁의 시민을 향한 발포, 그 외 미 중앙정보국의 배후설이 끊이지 않는 김재규에 의한 박정희 살해 사건을 비롯한 한국 정권에 대한 간섭 등은 아무리 6.25 전쟁에 주도적으로 참전해 공산화를 막았다고 할지라도, 또 한국의 경제 건설에 미국이 긍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할지라도, 결코 정당화할 수 없는 비인간적이고 반도덕적인 악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자유 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공산 진영 사이의 냉전과 그 양극 대립의 과정에서 한반도의 남북 분단이 전략적인 수단으로서건 부산물로서건 고착되었다는 사실도 부인하기는 어렵다. 한반도의 분단 체제의 고착이 오랜 세월 한국민에게 극복하기 힘든 집단 무의식적인 분열증과 이데올로기적인 진영 논리를 깊숙이 심어 넣어 어떻게 특히 정치적인 영역에서 불구의 정서에 시달리게 했는가. 오랜 기간 반공 이데올로기를 내세운 군사독재 정권을 가능하게 했고, 그런 가운데 수없이 많은 인권 유린이 이루어졌고 그때는 물론이고 심지어 지금도 이를 당연하게 여기는 우중들이 모여 백주에 “빨갱이 문재인과 이재명을 찢어 죽여라!”라는 구호를 당당하게 외치고 있다. 그들이 하나같이 오른손에 미국 국기를 쥐고서 흔들고 왼손에 태극기를 쥐고서 흔드는 모습은 한반도 분단 체제의 고착과 전략적인 활용에 있어 미국의 책임이 엄중함을 결과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할 것이다.   그동안 미국은 한국의 우방국이었고 동맹국이었다. 그리고 속내와는 달리 적어도 겉으로는 마치 형님 국가처럼 한국 사회의 자유와 민주, 평화와 번영을 돕는 형세를 취해왔다. 이러한 미국의 역사적인 행보는 스탈린-모택동-김일성의 공산 독재체제와의 대결,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공산 ‘세습왕조’의 반민주적인 통치 체제 등과 대비됨으로써 그 정당성을 가상적으로 획득했다. 그런데, 이제 ‘미국주의’라는 그네들의 국가 전략 아래 동맹국이라 할지라도, 오히려 그 동맹국이라는 미명으로 어떤 강압적인 조치라도 취할 수 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결국 절대적인 군사력과 경제력을 앞세워 우리 한국민들에게 예속적인 굴종을 요구하는 셈이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미국의 도움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제주의 4·3 독립통일 투쟁, 대구의 2·28 학생의거, 마산의 3·15 부정선거 규탄 시위, 4·19 혁명에 의한 이승만 독재의 종식과 새 민주헌법의 제정, 부마항쟁을 통한 독재자 박정희의 사살, 5·18 민주항쟁, 6월 항쟁에 의한 전두환 독재정권의 분쇄와 새 민주헌법의 제정, 그리고 촛불혁명을 통한 시민사회의 성숙과 무능한 대통령 박근혜의 탄핵 등은 어느 국가에서도 볼 수 없는, 끊임없는 민주사회를 향한 한국민의 도도한 시민 정신에 의한 성취였다.   그런데도 언제나 상층에서 이익 카르텔을 형성한 경제 재벌 · 언론재벌 · 모피아 운운하는 반민주적인 세력이 그림자 정권처럼 사회정치적인 권력을 장악해 발휘해오고 있고, 이에 휩쓸려 많은 수의 국민이 암암리에 군중을 형성하여 반민주적 · 친독재의 성향을 드러내오고 있다. 그 모든 이유라고 할 수 없으나, 상당 부분 분단 체제 때문임은 분명하다. 따라서 다 그렇다고는 할 수 없으나, 민주주의를 올곧게 하기 위해서라도 남북 평화 통일 내지는 평화 협력이 절실했다. 이를 위한 한국민의 노력에 미국이 도움을 줬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설사 도움을 주었다고 해도 어떻게 구체적으로 도움을 주었는지 들어본 적이 없다. 오히려 암암리에 방해했으리라는 짐작이 옳을 것이다. 주한미군 철수선언마저 담은 박정희-김일성의 7·4 남북 공동성명, 노태우 정권 때 이루어진 남북 화해와 불가침 그리고 교류 협력 및 비핵화를 합의하면서 남측 · 북측이라 부르기로 한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김대중-김정일의 남북정상회담과 6·15 남북 공동선언, 노무현-김정일의 10·4 남북정상 선언, 문재인-김정은의 남북정상회담과 김정은-트럼프의 북미정상회담 등 남북 평화와 통일을 향한 쉼 없는 노력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러 거의 물거품이 된 것 같아 참담함을 금할 길 없다. 더군다나 남북이 휴지기에 들어서서 그저 냉랭한 대립 상태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마치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로 치닫는 것 같아 참담함에 불안과 두려움이 더한다.   1994년 한때 북핵 위기가 고조되어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한국 내 미국민의 소개령을 내렸다는 첩보에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여 전쟁이 발발할 것을 염려하여 잠을 이루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다행히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한반도에서 전쟁은 안 된다. 내가 80만 대군의 국군 통수권자다. 전쟁에 단 한 명의 국군도 동원하지 않겠다.”라는 결연한 의지를 보였고, 이에 미국 대통령 클린턴이 한발 물러섰다고 한다. 그러고는 30년이 지났다. 그 사이 남북 간에 몇몇 총격전이 있긴 했으나 특별히 전쟁이 날 것 같은 기미는 없었다. 그런데 요즈음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가 너무나 험악하여 곧 전쟁이 날 것 같은 형세다. 대만 문제를 둘러싼 미-중의 격돌이 워낙 심상찮다. 그리고 이를 중심으로 한 것이라 하겠지만 한미일과 북중러의 대립 관계가 격화되는 가운데, 북한과의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의 일환으로 한미 또는 한미일 군사 훈련이 수시로 대대적인 규모로 이루어지고 그와 동시에 하루가 멀다고 북한에서 중장거리 미사일을 쏟아 올리면서 소형화했다는 핵폭탄을 노골적으로 내보이기까지 한다. 게다가 이미 벌어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끝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문제는 대통령 윤석열의 태도다. 북한이 공격의 기미를 보일 시 선제공격을 가하겠다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또 일본의 반격 능력을 위한 군사력 배가에 대해 염려는커녕 오히려 적극적으로 찬동하는 발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많은 국민이 염려하는 한미일 군사동맹마저 기꺼이 맺을 기세여서 유사시 일본 자위대가 한반도에 상륙하여 전쟁을 치르는 것마저 허용하겠다는 기미를 보인다. 간단히 말하면, “어디 붙자면 붙어 보자.”라는 식이다. 정말이지 어쩌려고 이러는가? 국내 정치에서 무지와 무능 그리고 무당이라는 ‘3무 정치’라는 비아냥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물론이고, 그러한 ‘3무’가 대미 종속도 모자라 대일 종속마저 번연히 외교의 업적이라고 내세우는 것도 엄청난 문제다. 하지만, 무엇보다 문제인 것은 이러한 ‘3무’가 한반도 민족 전체의 말살을 가져올 수 있는 전쟁을 앞당기는 일에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 너무나 불안하고 두렵다. 대통령 윤석열은 30년 전 김영삼 대통령이 기염을 토하듯 밝힌 “한반도에서 전쟁은 안 된다. 내가 80만 대군의 국군 통수권자다. 전쟁에 단 한 명의 국군도 동원하지 않겠다.”라는 결연한 의지를 곧이곧대로 체화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 반전 · 평화의 의지를 발휘하여 곧 있을 한미 정상회담에서 우리로서는 결코 전쟁에 가담할 수 없다는 각오를 밝혀야 한다. 만약 그 반대로 전쟁 발발의 위기를 고조시키는 쪽으로 협상을 단행한다면, 그야말로 그의 정권은 임기를 제대로 채울 수 없을 것이다.
2023-04-17 | hrights | 조회: 159 | 추천: 2
윤요왕 / 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오랜만에 새벽까지 사업계획서 하나를 썼다. 농어촌청소년육성재단의 농어촌지역 청소년들을 위한 지원사업이다. 작년 전국의 7개 농촌지역(마을)에서 의기투합한 마을활동가들이 ‘우리가 움직이면 학교’라는 제목으로 농어촌 청소년들을 모집해 곡성에서 춘천까지 전국의 7개 시골마을을 들여다보는 배움여행학교를 했더랬다. 모든면에서 소외되고 꽉 막혀있는 듯한 농촌의 청소년들에게 다른지역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마을어른들의 환대와 존중을 통해 자존감을 조금이라도 회복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취지에서 진행한 사업이었다. 출처 - 이로운넷 올해 이 사업을 다시 신청하기로 했고 올해 난 Gapyear를 보내고 있는 백수라 비슷한 처지의 순천 한 활동가와 함께 실무를 맡기로 했다. 사업계획서를 쓰다보니 이런저런 고민하게 되는 생각들로 쉽게 써 내려가지 못하고 더디기만하다. 이 사업의 1차적 목적은 작년과 동일하다. 그런데 그것만으로 충분할까? 청소년들에게 소멸,과소화되어가는 농촌마을이 그래도 행복할거라고 미래에는 살만해질거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일가 하는 것이다. 결국 농촌의 청소년들은 결국 이 척박한 시골을 떠나 도시에 대한 동경심 내지는 먹고사는 문제로 도시민이 되지 않겠느냐 하는 답답함과 억울함이 마음속에서 올라오고 있기때문이다. 이런 지역소멸이나 지방 과소화 문제를 우리가 짧은 시간과 생각으로 해결하지는 못하겠지만 올해 ‘우리가 움직이는 학교’는 작년에 가졌던 1차적 목표에 더해 ‘우리마을에 계속 살 수는 없을까?’ 하는 질문과 고민을 청소년들에게 던져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옛날처럼 ‘농사나 짓고 살지’하는 태도가 아니라 ‘마을에서 재미있는 일 벌이기’ ‘하고싶은 일로 먹고사는 문제해결하기’ 등 실체적이고 구체적인 고민과 대화를 함께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다. 이를 위해 먼저 다양하게 마을을 행복하게 만드는 사례를 경험하고 그런 활동을 하는 어른들을 만나게 해주고 싶다. 새로운 자극을 통해 상상의 한발을 더 내딛게 해주고 싶은 것이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앞다투어 도시의 청년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 어쩌면 기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문제에 있어 예전부터 기회있을 때마다 얘기하는게 있는데, 외부의 도시민을 끌어오는 것만큼 지역의 청소년들부터 어른이 돼서도 떠나지 않고 정착할 수 있는 것에 고민하고 정책적 투자를 하면 좋겠다. 도시만큼은 아니더라도 생활,일자리,문화 인프라를 지방에 농촌마을에 적절히 구축하면서 지역청소년들이 지역청년이 될 수 있도록 한다면 떠나고픈 도시민들에게도 좋은 자극과 가능성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지역의 청소년들과 청년들에게 투자하자. 다양한 재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창업과 주거문제에 대한 정책적 지원을 하자. 오히려 청소년들이 많지 않기에 맞춤형으로 얼마든지 촘촘한 계획과 투자가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서울로 대변되는 도시로 올라간 다수의 시골청년들은 오히려 척박한 삶을 살게되지 않나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웬만한 아파트 전세가 10억을 호가하니 근사하고 럭셔리한 빌딩이나 아파트는 이룰 수 없는 신기루같은 것일텐데 말이다. 지역에서 나고 자란 청소년들이 안전한 관계속에 존중과 환대를 받으며 건강하게 생활하고 고향에 대한 자부심과 자존감을 갖고 청년이 되면서는 지역(마을)을 기반으로 일자리나 창업의 꿈을 실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꿈을 꾼다. 도시의 소비문화와 경쟁사회는 어쩌면 보이지 않는 자본의 작품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농촌 우리집 마당만큼도 안되는 면적의 아파트가 수십억을 하는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느냐 말이다. 절대 인구수가 줄면서 서울의 인구도 감소하고 그들의 황금알을 낳는 아파트도 분양률이 떨어지고 아파트값도 하락한다는 소식에 한편으로 기쁘기도 하지만 자본의 속성상 이대로 물러나지는 않을 것 같아 걱정스런 마음도 든다. 이번 농촌마을의 청소년 20여명과 함께 ‘우리는 우리끼리 마을에서 잘 살기로 했다’같은 비전을 온전하게 세울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내외 농촌마을 탐방프로젝트와 진지한 대화를 통해 그 가능성과 상상의 꿈을 이야기해 보고 싶다. 어쩌면 과장된 내 표현일지는 모르겠으나 지역에서 마을에서 마을 어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곧 자기 주체성을 회복하는 것이요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을 지키며 그들이 원하는대로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대로 살아가는 것이다라고 우리 청소년들 마음속에 작은 파장을 주고 싶다. 더불어 지역소멸의 첫 번째 열쇠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마을에 살고있는 청소년들로부터 출발해야 함을 잊지않았으면 좋겠다.  
2023-04-11 | hrights | 조회: 171 | 추천: 3
석미화 / 평화활동가   국가(폭력)에 동원된 월남전 참전군인의 삶에 대한 연구 ‘월남으로 간 동창생’을 찾아가는 여정이 마무리되었다. 연구를 통해 월남으로 간 금마국민학교 동창생 이야기를 중심으로 월남전 참전이 학교, 마을, 지역사회에서 일어난 일대 사건이었음을 인지하고, 공동체를 중심으로 월남전의 기억을 살펴보고자 했다. 또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그들의 삶을 조명하고, 국민학교 동창생 서사를 통해 월남전의 기억을 찾아감으로써 이제껏 말로만 전해 내려왔던 참전군인의 전후 삶을 확인하고, 마을을 중심으로 전쟁과 폭력의 역사, 그로부터 연결된 삶을 이야기하고자 했다. 연구를 마치며 지난 2월 말, 1년여의 활동을 공유하는 자리를 가졌다. 이 연구를 응원하고 후원한 30여 명의 활동가와 연구자, 시민이 한자리에 모여 작지만 빛나는 이야기를 만났다.   출처 - 아카이브평화기억 블로그   금마국민학교는 1911년 9월 익산공립보통학교로 문을 열었다. 월남으로 간 동창생들은 전쟁이 끝난 다음 해인 1954년에 국민학교에 입학해 1959학년도 48회 졸업생이 되는데 이 해 졸업한 학생이 185명으로 전후 다른 해에 비해 많았다. 졸업생 중 110명이 남학생인데, 그중 월남에 간 이가 12명이다. 남자 졸업생 열 명 중 한 명 꼴로 월남에 간 것이다. 우리는 연구 활동으로 5명의 동창생과 3명의 가족, 그리고 이웃을 만났다. 그들의 전쟁 경험뿐만 아니라 생애 전반에 걸친 이야기를 들었다. 동창생과의 만남으로 전쟁과 삶의 관계를 탐구하고 그들이 갖고 있는 전쟁의 기억과 언어를 기록하고자 했다. 무엇보다 동창생들이 전쟁과 삶에서 겪은 감정과 생각에 귀 기울였다. 삶에서 전쟁이 지나간 자리를 만나고, 동원된 존재로서 전쟁을 겪었던 그의 이야기 속에서 국가와 이념의 외피를 벗은 전쟁과 폭력의 얼굴을 마주하고자 했다. 한국이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1964년부터 1973년까지 연인원 32만여 명의 청년이 월남에 갔다. 마을에서 함께 나고 자란 동창생들은 청년이 되어 전장으로 갔다. 이들은 어릴 적 한국전쟁을 겪었다. 국민학교를 다니는 것조차 어려운 시절이었다. 학교에 들어간다고 해서 모두 졸업을 하는 시대도 아니었다. 동창생 중에는 국민학교 시절이 유일한 학창 시절인 이도 여럿이다. 가난한 시절이었다. 동창생들과의 만남에서, 월남으로 가는 이야기의 어느 대목에서든 가난은 반드시 등장했다. 가난과 월남전은 뗄 수 없는 관계였다. 국가는 가난을 경제발전이라는 언어로 포장해 결과적 의미를 부여했지만 그의 이야기 속에서 가난은 월남으로 가는 출발점이었다. 국가는 전쟁터에 일자리를 마련했고, 동창생들은 가난 때문에 군사 노동을 해야 했다. 동창생마다 가난에 대한 서사가 길었다. 돈 벌러 월남 갔다는 말은 감추고 싶은 이야기지만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국가의 기억에는 동창생들이 겪어야 했던 그 시대의 가난이 빠져 있었다. 그리고 동창생들에게는 가난과 더불어 월남으로 간 저마다의 사연이 있었다.   출처 - 아카이브평화기억 블로그 연구는 개인과 마을공동체의 언어가 지금까지 국가가 유통하고 있는 전쟁 기억과 어떤 차이를 가지는지 실체로서 그들의 언어를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베트남전쟁에 대한 공식 기억은 역사 교과서, 월남 파병을 전시하는 공간, 다수의 언론 보도, 국방부와 국가보훈처가 주도하는 홍보와 기억의 영역에 존재한다. 그것은 국가에 대한 호국정신과 자유민주주의 수호, 경제발전과 같은 언어로 정의된다. 참전군인은 용맹한 한국군, 대민 지원 활동을 하는 인도적인 모습이나 전사·부상·고엽제 피해와 같은 희생과 헌신의 상징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동창생들의 기억은 국가의 공식 기억과는 전혀 다른 결을 갖고 있었다. 우리는 전쟁을 사건으로 기억하지만 동창생들에게 전쟁은 삶의 일부이고, 부정하거나 외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전쟁은 삶으로 치환되었고, 후회해봐야 소용없는 어떤 의미로든 긍정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전쟁을 찬성하거나 미화하는 것과는 다른 관점이다. 그들이 자신의 삶에서 전쟁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가난’ ‘가족’ ‘경험’과 같은 더 나은 것들로 가기 위한 선택의 결과이거나, 그것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강요와 타의에 의한 것으로 저항하거나 원망하기보다는 명령체계 속에 순응하는 존재로서 받아들이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그들이 전쟁을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전장에서 경험한 것들까지 미화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전장에서 맞닥뜨린 죽음에 슬픔과 분노를 느끼고 그곳에서 살아온 것을 다행이라 여기며, 전쟁은 없어야 한다는 입장을 강하게 이야기했다. 국가가 공식 기억에서 전쟁을 명분과 정의로 포장하는 것과 달리 동창생들이 목격한 전쟁은 허망한 죽음 그 자체였다. 동창생들은 총 들고 적과 싸우는 것 말고도 별별 일이 다 일어나는 게 전쟁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런 일들이 문제라거나 부당하다고 여기기보다는 어쩔 수 없는 과정이고 선택이었다고 말한다. 이런 전쟁과 기억들 속에서 전쟁 간 것을 후회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던졌을 때, 동창생에게 돌아온 답변은 그래도 잘 갔다 왔다는 것이었다. ‘아 살아왔으니 잘 갔다 왔지.’ 그들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전쟁은 없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전쟁을 갔다 온 것에 대해서는 후회하거나 부정하지 않았다. 이렇듯 그들의 기억과 언어 사이에서 진심을 헤아리는 일은 ‘월남으로 간 동창생들’을 만날 때 반드시 필요한 능력이었다. 출처 - 아카이브평화기억 블로그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문득 짧게 내뱉은 말속에서 혹은 행간에서 70대 중반 넘어 인생의 끝자락을 살고 있는 이들의 슬픔이 느껴졌다. 지나온 삶으로서 전쟁 경험에 대한 슬픔과 두려움, 분노, 체념과 인정 같은 복잡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분열적 감정과 생각들 사이에서 우리의 시선은 어디에 닿아 있는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시대, 그들이 겪은 전쟁을 공감의 언어로 이해하고 바라본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현재 우리가 만나는 베트남전쟁의 기억들은 동창생들의 기억과 어떻게 만나고 있는가. 국가적으로 사회적으로 이 전쟁에 대한 냉소와 비판 사이에 정작 그 전쟁에 갔던 수많은 동창생들은 자신만의 이야기 속에서 동떨어진 존재로 살아가고 있었다. #인권연대 #주간 #웹진 #사람소리 #수요산책 #석미화 #그의전쟁그의삶 #베트남 #참전 #기억
2023-03-21 | hrights | 조회: 278 | 추천: 7
이재환 / 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출처 - 셔터스톡   근 3년간의 코로나19 시국 이후 이곳저곳에서 내놓는 경제 전망은 음울하다. 지난 2월 KDB산업은행의 2023년 국내 물가 및 고용 전망에 따르면, 국내경제는 글로벌 고금리, 고물가, 저성장 환경 하에서 소비·수출 둔화와 투자 위축으로 1.9% 성장률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된다. 민간소비는 소비심리 악화 지속과 고물가·고금리에 따른 가계의 실질 구매력약화로 2.3% 수준에 그칠 것으로 전망된다. 소비자물가는 민간소비 감소와 기저효과 등의 영향으로 상승폭은 축소되겠으나, 물가안정목표를 상회하는 3.4%를 기록할 것으로 보인다. 고용은 수출 부진 및 민간소비 위축으로 고용 여건이 악화되고 전년도 증가의 기저효과로 취업자 수 증가가 제한되어 실업률은 3.2% 수준으로 전망된다. 민생과 직결되는 물가는 2022년 대비 상승세가 완화될 것으로 예측되나 여전히 안정이 필요한 상황이며 고금리현상과 관련하여 소비심리를 위축할 가능성이 크므로, 관련 대응 정책이 필요하다고 보고서는 지목했다. 아울러, 소비의 위축은 기업의 생산량․수익 감소, 고용률 저하, 구조조정 등 경기침체와 실업사태를 유발 할 수 있으므로 경제적 취약계층을 위한 긴급복지정책과 고용정책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된다고 밝히고 있다. 경제 관련기관의 예측 이전에 현장의 우려는 더 직접적이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지난해 말 도․소매업, 숙박․음식점업, 예술․스포츠․여가 관련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소상공인 300개사를 대상으로 실시한 '2023년 소상공인 경영환경 전망 및 경영애로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절반 정도가 2023년 경영환경이 올해보다 어두울 것으로 내다봤다. 경영환경이 2022년보다 올해 악화될 것으로 전망한 소상공인은 56.0%였으며, 다소 악화 47.7%, 매우 악화 8.3%로 순으로 집계됐다. 악화를 우려하는 이유는 고물가에 따른 원가 상승과 수익 감소(52.4%), 기준금리 인상 등에 따른 대출상환 부담 증가(38.7%), 온라인·디지털화 등 급변하는 산업환경에 대한 대응능력 부족(8.9%) 등이 꼽혔다. 경영환경이 개선될 것이라고 전망한 소상공인은 10.3%에 불과했으며, 다소 개선 10.0%, 매우 개선 0.3%로 조사됐다. 개선 기대 요인으로는 사회적 거리두기 해제 및 코로나19 종식에 대한 전망(77.4%), 새 정부의 다양한 소상공인․자영업자 지원책 도입(12.9%), 향후 고금리․고물가 추세 완화에 따른 경영비용 감소(9.7%) 등 순이었다. 장황하게 경제 분석 및 여론조사 결과를 들이밀었지만, 요약하자면 코로나19 이후 고금리, 고물가, 저성장 시대로 접어들며 물가는 오르고 소비는 위축, 후속 여파로 고용위기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분석이다. 게다가 경제는 심리라고 하는데 경제 주체들의 위축 심리가 큰 것이 더 큰 문제일 수 있다. 이처럼 경기침체라는 해일이 눈앞에 닥치는 상황에서 어떤 정책적 대안이 추진되고 있는지 경제주체 모두가 주목하고 있다. 다양한 대책을 마련하고 있겠지만, 그 중에서 지역사랑상품권(지역화폐)을 잘 활용하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   지역화폐는 1930년대 초 오스트리아 티롤(Tyrol)의 뵈르글(Worgl) 마을에서 대공황의 여파로 실업자가 증대하자 마을회의를 거쳐 지역 저축은행 차입금을 담보로 지역일자리에 대한 보상으로 법정화폐 임금대신 ‘노동증명서’ 형태의 지역화폐를 지급한 것으로 시초로 본다. 또 1980년대 초 오일쇼크로 인해 북아메리카 지역의 경제 불황이 극심해진 시기, 캐나다 브리티시 콜럼비아주 코목스 벨리(Comox Valley)에서 최초의 LETS(Local Exchange Trading System)가 사용되었으며, 이 ‘렛츠’ 지역화폐는 근대적 지역화폐의 시작이었다. 이처럼 지역화폐는 경제 불황기에 그 빛을 발휘하게 된다. 경기불황과 소비위축이 반복되며 돈이 풀리지 않을 때 축적(이자) 없이 교환에 중점을 두고 소비 활성화를 목적으로 효과를 본 것이 지역화폐이기 때문이다. 돈이 안돌면 돌게 만들자! 지역화폐 시루와 텅빈 상권   일각에서는 지역화폐가 전국적으로 활성화되면 인플레이션에 의한 화폐가치 하락 등을 우려하지만, 한 해 유동성 현금이 수 천조 원 돌고 있는 현실에서 지난해 불과 27조 원이 돌았던 지역화폐가 인플레이션을 일으킨다는 것은 과대망상에 가깝다. 무엇보다 국내 지자체 주도 지역화폐는 법정화폐와 1대 1로 연동(태환)되는 보완화폐로 지자체가 마구 찍어내는 돈이 아니다. 인센티브 분을 제외하고 화폐가치의 하락을 이끌 개연성이 없다. 지역화폐가 소비를 촉진하고 지역에 돈이 돌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과한 것도 문제다. 이를테면 난방비 인상으로 어려움을 겪는 대상에 대한 지원을 강구하면서 지역화폐 할인율 또는 캐쉬백을 대폭 상향하는 것은 정책적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지역화폐는 현금으로만 구매가 가능해 난방비 인상으로 어려움을 겪는 대상자들보다 현금 구매능력이 높은 사람들에게 혜택이 집중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지역화폐가 만사형통은 아니다. 하지만 경제 위기를 타개할 하나의 도구로 그 쓰임새를 역사에서 검증 받아왔다. 정치적 유불리를 떠나 지역화폐를 통해 오롯이 민생위기를 어떻게 극복할지 지혜를 모으길 희망한다. #인권연대 #사람소리 #수요산책 #웹진 #박상경 #코로나 #경제 #지역화폐
2023-03-14 | hrights | 조회: 215 | 추천: 3
박상경 / 인권연대 회원   출처 - YTN뉴스 1.  국민학교(오래 전에는 이렇게 말하였다.) 4학년 교실, 겨울방학을 앞두고 우리는 시험을 보고 있었다. 시험문제를 푸느라 조용한 교실에는 난로에서 타닥 타다닥 탁, 나무 타는 소리만 들렸다. 난로 바로 뒤에 앉아 있던 나는 뜨거운 난롯불로 벌게진 얼굴을 돌리느라 잠시 고개를 들었다. 그때 맨 앞줄에 앉아 있는 아이가 지금은 학습 참고서인 전과(책)을 넘기며 양옆에 있는 아이들한테 무엇인가 말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 아이들 바로 앞에는 선생님의 책상에서 선생님이 책을 읽고 있었다. “선생님!” 책을 보던 선생님이 내 쪽으로 고개를 들면서 왜 그러냐고 물었다. 나는 일어나서 “ㅇㅇ이 전과를 보면서 시험을 봅니다. 그리고 ㅇㅇ과 ㅇㅇ한테 알려줍니다.” 하고 말하였다. 순간, 교실 안이 잠시 술렁이는 듯하더니 이내 적막감이 흘렀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내 얼굴과 선생님 얼굴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고, 얼굴빛이 차가워진, 잠시 할 말을 잊은 듯하던 선생님이 나한테 “네가 봤냐?”고 물었다. 내가 “봤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선생님은 고개를 떨구고 있는 앞의 아이들에게 “네가 정말 그랬냐?”라고 물었다. 그 아이가 들릴 듯 말 듯 한 조그만 소리로 “아니요!”라고 대답했다. “얘가 아니라고 한다.” 선생님이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걸로 끝이었다. 나한테도 그 아이들한테도 더 이상 확인을 하거나 책망 같은 것은 없었다. 사실 전과를 보는 아이는 공부를 잘하는 아이였다. 그 양옆에 앉은 아이들은 반장과 부반장이었고 부잣집 딸이었다. 선생님은 그 아이들을 짝꿍으로 엮어 자신과 가까운 맨 앞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벌이는 부정과 횡포를 방조하거나 방임하였다. 모두 가난하던 시절에 조금 잘사는 집안의 딸들, 고만고만하게 공부하던 아이들 중에 공부를 조금 잘하는 아이를 학교에서 제일 예쁘고 멋쟁이인 선생님은 이렇게 모두가 알게 차별(?)하였다. 그해 겨울에는 눈이 많이 내렸다. 운동장에서 한바탕 눈싸움이 벌어졌다. 우리는 분노를 담아 뭉친 눈을 그 아이들을 향해 던졌다. 쏟아지는 눈 뭉치를 피해 그 아이들은 도망갔다. 우리는 도망가는 아이들을 쫓아가며 눈 뭉치를 던졌다. 그 아이들은 왜 우리한테만 그러냐고 항의하지도 않았고 그만하라고 소리치지도 않았다. 그저 이리저리 도망 다니기 바빴다. 우리는 화가 났고 비열한 선생님의 그늘을 벗어난 아이들은 비굴했다. 그리고 5학년에 올라가면서 당시 부잣집 아이들이 그런 것처럼 반장과 부반장은 서울로 전학을 갔다. 물론 집은 이사 가지 않은 부정 전입이었다.   출처 - 드라마 더글로리 중 2. 중학교 2학년, 우리 담임선생님은 국어 선생님이었다. 눈이 너무 나빠 뱅글뱅글 도는 돋보기 같은 안경을 끼고 목소리는 쉰 것처럼 허스키하지만 감수성 예민하신 시인이었다. 그런 선생님이 어느 날 종례를 마치면서 몇 명의 아이한테 잠깐 남으라고 하였다. 모두가 돌아간 교실에서 선생님은 이유는 말하지 않고 일요일인 다음 날 집으로 오라고 하였다. 무슨 일인가 싶으면서도, 선생님 집으로 오라고 하는 걸 보니 뭔가 으쓱한 기분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시간에 맞춰 선생님 집으로 갔다. 우리 감수성 예민한 시인 선생님은 몸이 약한 선생님의 부인을 대신하여 무거운 일을 할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날 우리는 배추를 나르고 펌프질을 해 물을 길었다. 몸이 약한 선생님 부인은 이것저것 우리한테 주문했고, 감수성 예민하신 선생님은 부인이 주문한 일을 되풀이하여 말해 주었다. 우리는 말없이 시키는 일을 하고는 저녁이 되어서 집으로 갔다. 우리는 창피함을 느꼈다. 그 일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한참 흘러 시인이신 선생님을 직장 복도에서 마주쳤다. 그때 일하던 잡지에 원고를 가지고 왔다. 나는 그냥 외면했다. 쪽팔린 그때의 기억이 순간적으로 그이를 외면하게 했다. 3. 고등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이 병가를 내셨단다. 임시 담임으로 사회 과목을 맡은 옆 반 선생님이 오셨다. 호리호리한 몸매의, 안경 너머의 눈매와 목소리가 몹시 날카로운 선생님은 무섭기로 명성이 자자하였다. 복도에서 마주친 아이들이 인사를 하면 무시하는 선생님, 우리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선생님은 때리지는 않았으나 늘 가는 매를 들고 다녔다. 언제든지 우리를 향해 그 매를 휘두를 수 있다는 모양새였다. 그러나 때리지는 않는 그 선생님의 말은 한 마디 한 마디가 폭력적이었다. 대다수의 여고생들은 알지도 못하는 남녀간의 일을 마치 당연히 모두가 그러는 것처럼 말하거나, 우리는 그저 나쁜 짓을 저지를 아이들로 대했다. 비아냥거리며 무시하는 선생님의 말을 들을 때면 한 대 맞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왜 그렇게까지 무시하고 미워하고 폭력적인 말로 학생들을 대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서울대 나온 사람은 이렇게 사람을 무시해도 되냐며, 우리는 성질 더러운 선생님한테서, 지옥 같기만 한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아직은 많은 게 서툴고 그래서 많은 가능성을 가졌을 그런 우리를 조금은 인정해 주는, 그러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야단치는 선생님을 원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이런 생각을 표현하지 못했다. 아니 말할 수가 없었다. 선생님의 한 마디에 기가 죽어 쓸모없는 사람처럼 느껴지던 그 시절, 무의식 속에 접혀 있던 기억을 끄집어내면서 문득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선생님, 왜 그렇게 저희를 무시하고 미워하셔요? 저희가 그렇게 나쁜 아이들인가요?” 하고 물어보고 싶다. 그런데 권위라는 폭력의 그늘에서 정말 이렇게 물어볼 수 있을까?! #인권연대 #사람소리 #수요산책 #학교폭력 #교사폭력 #학생
2023-03-14 | hrights | 조회: 231 | 추천: 6
이윤/경찰관 체포라는 용어가 영화, 드라마, 뉴스 등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으나, 그 의미에 대해서는 경찰이나 수사관에게 잡혀가는 것이라고만 아는 분이 많다. 얼마 전 TV 드라마에서 지하철 내 몰카범을 체포하는 장면에 현행범체포가 아닌 긴급체포라는 용어를 쓰기에 바로 채널을 돌려버렸다. 방송 작가나 PD도 정확히 모를 정도면 다른 사람들은 거의 알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이 어느 날 갑자기 수사기관에 체포당했을 때 체포에 대해 모르고 있으면 당황하여 적절한 대응이 어렵다. 나의 인권은 내가 지킨다는 마음으로 체포에 대해 알아보자. 출처 - 연합뉴스 영장에 의한 체포와 영장 없는 체포 체포는 크게 영장에 의한 체포와 영장 없이도 가능한 체포로 나뉜다. 영장 없이 가능한 체포에는 현행범체포와 긴급체포가 있다. - 체포영장에 의한 체포 체포는 사람의 신체를 구속하여 행동의 자유를 빼앗는 것이다. 죄를 지은 사람도 재판에서 유죄 판결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무죄로 추정되므로(무죄추정의 원칙) 함부로 자유를 박탈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범죄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면 범인으로 의심받는 사람(피의자)을 상대로 구체적 사실을 확인할 필요가 있어서 형사소송법은 출석요구에 응하지 않는 사람을 일시적으로 강제로라도 데려다 앉혀놓고 질문할 수 있게 하였다. 그런데 의심된다는 이유로 수사기관이 아무나 체포하면 안 되므로, 법원이 검토하여 영장을 발부한 사람만 체포하게 한 것이 체포영장에 의한 체포다. 체포영장을 발부받으려면 수사기관이 피의자 인적사항(이름, 주민번호, 주거지 등)을 알고 있어야 하고, 피의자가 정당한 이유없이 3회 정도 출석요구에 응하지 않아야 한다. 반대로 출석요구에 잘 응하면 체포영장은 잘 발부되지 않는다. 수사는 임의수사(강제가 아닌 동의나 승낙에 의한 수사)가 원칙이다. 몇 번이나 출석하여 조사를 받았고, 도주나 증거인멸 우려가 없다면 체포영장 또는 구속영장을 청구하거나 발부할 요건이 되지 않는다. 재판도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을 위해 불구속 재판이 원칙이다. - 현행범체포 현행범이란 범죄를 실행 중이거나 실행 직후인 사람이다. 현행범은 누가 보더라도 범인임이 확실하고, 바로 체포하지 않으면 도주하거나 증거를 인멸할 가능성이 높으며, 도주하면 누구인지 알아내기도 쉽지 않고, 영장을 발부받을 시간적 여유(2~3일)도 없으므로 영장없이 체포가 가능하다. 또한 수사기관이 아닌 누구라도 현행범을 체포할 수 있는데, 이때는 즉시 수사기관에 인계해야 한다. 주의할 점은 현행범으로 취급되는 준현행범이 있다는 것이다. 준현행범은 범인으로 불리며 추적되는 사람(“도둑이야”라며 쫓기는 사람), 장물이나 범행에 사용된 물건을 가진 사람, 신체나 의복에 증거가 될 뚜렷한 흔적이 있는 사람, 누구냐고 묻자 도망하려는 사람이다. - 긴급체포 말 그대로 영장을 미리 받을 여유 없이 범인을 우연히 발견했거나 하는 긴급한 경우 영장 없이 체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이스피싱 피해자로부터 현금을 받아간 사람을 5시간 정도 추적하다가(이미 현행범은 아니다) 범죄장소에서 먼 곳의 어느 모텔로 들어간 것을 CCTV로 확인하였으나, 그 사람의 인적사항은 모른다. 그래서 영장을 발부받을 수 없다. 혐의자가 모텔에서 나와 다른 곳으로 가기 전에 일단 체포해야 한다. 종업원에게 물어 그 사람이 어느 방에 있는지 파악하여 불러내었다면 도주 방지를 위해 영장없이 체포할 수밖에 없다. 긴급체포는 체포영장에 의한 체포와 현행범체포의 실무적 사각지대를 보완하기 위해 만든 제도로 보인다. 경찰이 긴급체포한 경우에는 즉시 검사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승인받지 못하면 바로 석방해야 한다. 검사가 긴급체포하면 별도로 승인받는 절차가 없다. 체포 시 고지받을 권리 위 세 가지 체포를 할 때 검사나 경찰은 피체포자에게 피의사실의 요지, 체포의 이유와 변호인을 선임할 수 있음을 말하고, 변명할 기회를 주어야 하며, 진술거부권과 체포적부심사권이 있음을 알려주어야 한다. 흔히 미란다 고지라고 알고 있는 그것이다. 형사소송법에는 진술거부권 고지는 포함되어 있지 않으나 대통령령인 ‘검사와 사법경찰관의 상호협력과 일반적 수사준칙에 관한 규정’에는 고지하도록 되어 있다. 이를 고지하지 않은 체포는 절차적으로 위법하며, 위법한 체포를 이용하여 얻은 증거는 재판에서 사용될 수 없다. 체포와 구속 체포는 수사를 위해 잠시 붙잡아두는 것이고, 구속은 재판을 위해 붙잡아두는 것이다. 수사를 위해 잠시 붙잡아 인적사항과 혐의사실을 확인하는 데 영장이 필요한지는 의문이다. 강한 인권보호를 위해서는 체포에도 영장이 필요할 것 같긴 하다. 그런데 독일이나 영국은 영장 없는 체포를 넓게 인정하고 있다. 일본은 한국과 같이 체포영장 제도가 있는데, 검사만 청구할 수 있는 한국과 달리 경찰도 법원에 직접 청구할 수 있다. 한국은 체포가 마치 구속을 위한 전 단계 같은 느낌이다. 그러면서도 체포 후 구속할 필요가 있으면 다시 검사에게 구속영장 청구를 신청하여 발부받도록 하고 있다. 체포와 구속에 검사는 항상 관여한다. 체포 시간으로부터 48시간 이내에 구속영장을 발부받지 못하면 석방해야 한다. 그러니 무고하게 체포가 되었다고 하여 희망을 버리면 안 된다. 내가 죄가 없다면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 절차에서 판사에게 무고함을 토로하고 설명할 수 있다. 다만 실질심사는 구속 적절성을 심사하는 절차일 뿐 유·무죄를 가리는 재판은 아니다. 불구속 재판이 원칙인데도 요건이 미비한 구속영장을 청구해놓고 ‘정정당당하다면 실질심사를 받으라’고 하는 것은 억지다. 체포와 구속은 수사와 재판을 위해 대상자를 확보할 수 있게 하는 도구일 뿐이다. 체포영장이나 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고 하여 피의자의 유죄가 확정되는 것은 아니다. 수사기관의 출석요구에 수차례나 성실히 응하여 도주 우려가 없고, 달리 인멸할 증거가 없는데도 체포나 구속을 시도하는 것은 직권을 남용하여 괴롭히는 행위로 보인다. 법집행이 공정하려면 일관성과 형평성이 요구된다.   #인권연대 #사람소리 #수요산책 #이윤 #체포 #긴급체포 #현행범체포 #의미
2023-02-28 | hrights | 조회: 412 | 추천: 12
反시온주의, 시온주의, 비시온주의   홍미정 / 단국대학교 아시아 중동학부 □ 초정통파 유대인의 특성 유대인들의 혈통이 다양하다는 것과 이스라엘 국가에 대한 유대인들의 정치적 입장이 시온주의, 비시온주의, 反시온주의 등으로 다양하다는 것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이와 함께 유대인들의 종교적 성향도 개혁파, 초정통파, 정통파, 전통주의자, 세속주의자 등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초정통파(하레디)는 특별한 복장 때문에 유대인들 중에서 가장 눈에 띈다. 검은 정장에 챙이 넓은 검은 모자를 쓴 초정통파 남성, 긴 치마, 두꺼운 스타킹, 검은 머리 덮개 등을 입은 초정통파 여성을 예루살렘 거리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특히 간간히 보이는 검은 덮개로 머리와 얼굴까지 가린 초정통파 유대인 여성들은 세계 미디어에서 널리 알려진 무슬림 근본주의자 여성들의 모습과 흡사하다. 초정통파 유대교는 세속화에 맞서 모세 시대부터 내려온 유대교법(토라)과 전통을 보존하고 수호함으로써, 세속 사회로부터 유대교 공동체를 보호하려는 중부 및 동유럽 전통주의자 랍비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오늘날 초정통파 유대인들의 공통적인 존재 근거는 유대교법과 전통의 보존 및 수호다. 18세기 후반 계몽주의 운동의 영향으로 유대교 내부에서도 변화와 개혁을 요구하는 유대 계몽주의 운동(하스칼라)이 발생하자, 이에 맞서 중부 및 동유럽 소재 예시바(유대교 학교)와 시나고그(유대 교회) 등 유대교 공동체를 중심으로 신비주의 및 경건주의 운동이 확산되었다. 이러한 경건주의 운동을 주도한 집단은 계몽주의 확산이라는 도전에 직면한 보수적인 하시디 랍비들(우크라이나 중심)과 미트나그디 랍비들(리투아니아 중심)이었다. 역내에서 서로 세력 경쟁하던 이 두 랍비 집단들이 초기 초정통파 유대인들이다. 2021년 12월 이스라엘 민주주의 연구소가 내놓은 통계에 따르면, 경외와 두려움으로 신의 의지를 수행하고, 현대 가치와 관습에 반대하면서 유대교법과 전통을 엄격하게 고수하는 초정통파 유대인공동체는 이스라엘 전체 인구의 약 13%(약 1백 22만 6천명)다. 초정통파 유대인공동체는 사실상 종파 내 결혼과 높은 출산율 때문에 인구수가 빠르게 증가한다. 이스라엘 내 초정통파 비율은 2009년 10%에서 2021년 13%으로 증가했다. 이스라엘군은 징병제이지만, 대부분의 초정통파 유대인은 예시바에서 토라공부를 한다는 구실로, 병역 면제 나이에 도달할 때까지 병역을 연기한다. 최근에는 초정통파 유대인 남자의 군대 지원이 늘어나는 추세다. 일반적으로 초정통파 주민들은 국가 공무원이나 군복무를 반대한다. 최근 초정통파 유대교 정당들은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 이상으로, 정치에서 영향력 있는 중요한 행위자로 등장했다. 이 정당들의 최우선 과제는 자신들의 정치적 기반을 제공하는 종교 공동체의 현실적인 이익 확보다. 따라서 이러한 유대교 정당들은 자신들의 정파에 이익이 된다면, 좌파 진영이나 우파 진영 어느 쪽과도 연합정부를 구성할 수 있다. 이스라엘 비례대표제 의회제도에서 전체 120석 중 61석 이상을 확보한 정당 연합이 정부를 구성할 수 있는 자격을 갖기 때문에, 상대적 소수파인 정통파 유대인들의 영향력은 인구 규모를 훨씬 뛰어넘어 연합정부의 생존에 결정적이다. 따라서 정통파 유대인 정당들은 ‘예시바 등 종교 교육기관에 재원 지원, 안식일 및 코셔 음식 준수, 비정통파 및 개혁파 유대교에서 행하는 개종 거부’ 등 종교 행위를 법제화함으로써 이스라엘 정치에서 초정통파 유대인들의 영향력 확장을 꾀하고 있다. 2022년 11월 의회 선거에서 초정통파 유대교 정당은 11석을 획득한 세파르디&미즈라히(대부분 중동 출신) 유대인을 대표하는 샤스당, 7석을 획득한 초정통파 아쉬케나지(유럽 및 러시아 출신) 유대인을 대표하는 토라 유대교 연합당(아구다트 이스라엘+ 데겔 하토라)이다. 이 두 초정통파 유대교 정당은 20세기 초 폴란드에서 창설된 세계적인 초정통파 유대교 정치 단체, 아구다트 이스라엘로부터 갈라져 나오거나 통합된 정당들이다. 이스라엘 최초의 초정통파 유대교 정당으로서 아구다트 이스라엘은 초정통파 유대인들의 교육, 사회복지, 팔레스타인으로 이주, 종교 문제에 관한 입법과 초정통파 유대인들에 대한 병역 면제를 주도했다. □ 아구다트 이스라엘: 세계 시온주의자 기구 반대, 이스라엘 국가 지지 세속적인 시온주의자들이 주도하는 세계 시온주의자 기구(WZO)의 활동에 반대하면서, 1912년 폴란드에서 3종류의 초정통파 유대인들, 즉 독일 정통파 유대교 랍비 삼손 라파엘 허쉬(1808~1888)의 제자 랍비들, 폴란드의 하시디 랍비들, 리투아니아의 미트나그디 랍비들이 연합하여 세계적인 운동으로 아구다트 이스라엘을 창설하였다. 아구다트 이스라엘은 신의 개입으로부터 유대국가가 출현해야 한다고 믿고, 세속적인 시온주의자들이 주도하는 유대국가 창설 운동을 반대했다. 아구다트 이스라엘은 ‘유대인들을 토라(모세 오경)에 의해서 정의된 종교 공동체 구성원들’이라고 정의하였고, 정통파가 아닌 유대인 단체들과 협력을 전면적으로 거부했다. 아구다트 이스라엘은 시온주의를 신성 모독으로 간주하고,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 설립을 목표로 활동하는 세계 시온주의자 기구에 맞서면서, 한 때 세파르디&미즈라히를 포함하는 초정통파 유대인들의 포괄적인 우산 조직으로 성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아구다트 이스라엘은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 시기에 4차례(1920년, 1925년, 1931년, 1944년) 실시한 팔레스타인 유대인공동체 대표회의 선거도 거부하였다. 이 선거에서 탁월한 시온주의 지도자로 부상한 폴란드 출신의 데이비드 벤구리온(1886~1973)이 이끄는 정당은 영국위임통치 기간 4차례 선거에서 모두 제 1당을 차지하였다. 게다가 이스라엘 국가 건설 이후 1949년~1961년까지 실시된 5차례 의회 선거에서도 벤구리온이 이끄는 당이 제1당을 차지하였다. 동시에 벤구리온은 세계 시온주의자 기구 의장(재임: 1946~1956) 및 이스라엘 총리(재임: 1948~1954, 1955~1963)를 역임하는 등 이스라엘 정치에서 장기 지속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세계 시온주의자 기구와 벤구리온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 창설되었다. 세계 시온주의자 기구 의장 벤구리온이 발표한 ‘이스라엘 독립선언서’는 세계 시온주의자 기구 창설을 주도한 헝가리 출신 유대인 데오도르 허즐(1860~1904)을 ‘유대국가의 정신적인 아버지’로 명시하였다.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 통치 시대에 아구다트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조직화된 유대 공동체와는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자리를 잡았으나 1933년 세계 시온주의자 기구 산하 조직인 유대기구와 협정을 체결하면서, 유대기구가 영국위임통치당국으로부터 할당받은 이민자 중 6.5%를 재분배 받았다. 게다가 1947년 아구다트 이스라엘은 유대기구와 ‘현상유지 서한’으로 알려진 훨씬 더 포괄적인 협정을 체결하면서, 종교적인 이익을 보장받았고, 합법적으로 이스라엘 정부 연합에 합류할 기회를 얻었다. 따라서 아구다트 이스라엘은 의회 선거에 참여하는 등 이스라엘 국가와 전략적 협력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아구다트 이스라엘은 1951년 실시된 제2차 이스라엘의회 선거에 참가하였다. 아구다트 이스라엘은 120명의 의원을 선출하는 이스라엘의회 선거에서 1951년 3석, 1955년 아구다트 이스라엘+포알레이 아구다트 이스라엘 6석, 1959년 아구다트 이스라엘+포알레이 아구다트 이스라엘 6석, 1961년 4석, 1965년 4석, 1969년 4석, 1973년 아구다트 이스라엘+포알레이 아구다트 5석, 1977년 4석, 1981년 4석, 1984년 2석, 1988년 5석을 획득하였다. 아구다트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국가와의 전략적 관계에서 장관 직위를 거부하였고, 정부에서 맡은 주요 업무는 ‘교육, 주택, 사회 서비스, 비군사 서비스, 유대 종교적 특성 보존을 위한 예산 문제’에서 하레디(초정통파) 유권자들의 이익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아구다트 이스라엘이 공식적으로 시온주의를 거부했기 때문에,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그들의 입장은 유연했다. 이러한 모호하면서 유연한 태도로 인해 아구다트 이스라엘은 정치적 협상력을 높이면서 리쿠드와 노동당이 이끄는 연합정부에 모두 참여할 수 있었다. 2020년 10월 28일, 아구다트 이스라엘은 [하레디 원칙에 대한 아구다트 이스라엘 성명]에서 세계 시온주의 기구에 반대하지만, 하레디 공동체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국가를 지지한다는 원칙을 밝혔다. [하레디 원칙에 대한 아구다트 이스라엘 성명]   최근 시온주의 운동 조직 대표들의 성명은 하레디 유대인들이 세계 시온주의 기구의 ‘예루살렘 프로그램’을 수용했다고 암시했다. ‘예루살렘 프로그램’은 시온주의를 ‘유대인의 민족 해방 운동’으로 선언하고 ‘유대 민족의 삶에 있어서 이스라엘 국가 중심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유일신과 신이 우리에게 주신 토라에 대한 믿음에 기반을 둔 사람 집단이며, 그 외에는 다른 것은 아니다. 이 진리를 생략함으로써, ‘예루살렘 프로그램’과 그것이 구현하는 시온주의 이데올로기는 세계의 다른 모든 국가들과 유사한 정치적 실체로서 유대인의 본질을 재정의하려고 시도한다. 이 재정의는 우리 유대인의 신앙과 전통의 본질에 어긋난다. 지난 세기의 토라 거장들이 아구다트 이스라엘 운동을 설립한 근본 원칙들은 유대인 민족성에 대한 시온주의 재정의를 확고하게 거부하는 것이 있었다. 역사적으로 아구다트 이스라엘은 그 근본 원칙에 충실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시온주의가 하레디 유대인의 근본적인 믿음과 양립할 수 있다는 어떠한 제안도 근거가 없으며 거부되어야 한다. 이스라엘 국가 건설 이전에 시온주의 운동발흥 초기부터 유럽의 명망 있는 랍비들 사이에서는 고대 이스라엘 땅에 ‘유대국가’ 건설을 최고의 목표로 여기는 유대인들의 운동에 관한 깊은 우려가 있었다. 이스라엘 국가가 창설되면서, 아구다트 이스라엘 운동을 이끈 명망있는 랍비들은 종교적 유대인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의회 활동을 포함한 이스라엘 국가의 민주적인 업무에 참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이스라엘 의회는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는 정부 기구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어떤 시온주의자 기구나 회의에 참여하는 것은 토라가 유대인들의 궁극적인 결정자이자 통합자라는 것을 아는 유대인들에게 용납될 수 없다. 시온주의가 유대민족을 규정하는 개념은 잘못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구다트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에 대한 지지를 변경하지 않으며, 이스라엘의 안보, 경제적 필요, 복지 등을 항상 지지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다. □ 반시온주의자-네투레이 카르타: 이스라엘 해체 운동 영국 위임통치기간 동안 아구다트 이스라엘 소속 랍비 중에, 예루살렘 지역 초정통파 유대인 집단 거주지, 메아 쉐아림 소재 헝가리 유대 공동체 태생의 랍비 암람 블라우(1894~1974)가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1869년 슬로바키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주한 유대인이며, 어머니는 예루살렘 원주민 유대인이었다. 1930년대 아구다트 이스라엘이 시온주의 운동과 타협하는 모습을 보이자, 1938년 랍비 암람 블라우는 아구다트 이스라엘과 결별하고, ‘도시(예루살렘)의 수호자’를 뜻하는 네투레이 카르타를 공식적으로 창설하였다. 네투레이 카르타는 공식 홈페이지에서 “네투레이 카르타는 네투레이 카르타 교회당에서 정기적으로 기도하거나, 네투레이 카르타가 운영하는 교육기관에 자녀를 보내거나, 네투레이 카르타가 소집하는 활동, 집회,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붙여진 이름이다. 네투레이 카르타는 유대인 메시아가 도래할 때까지 유대인 자신들의 국가를 갖는 것은 금지되어 있으며, 이스라엘 국가는 신에 대한 반역이라는 믿음으로 이스라엘 국가의 평화적 해체를 요구한다. 회원들이 이스라엘 국기를 공개적으로 불태우는 데 자주 참여한다.”라고 밝히고 있다. 네투레이 카르타 회원들은 런던, 뉴욕, 예루살렘 등의 도시에서 퓨림 축일 등 유대교 기념행사 등에서 일상적으로 이스라엘 국기를 불태운다. 네투레이 카르타 지도자 랍비 모세 허쉬(1930~2010)는 생전에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모세 허쉬와 야세르 아라파트의 관계는 아라파트가 튀니지에 거주하던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4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허쉬는 유대인 문제에 관한 자치정부 수반 아라파트의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허쉬는 시온주의에 반대하면서도 ‘시온주의 국가’ 이스라엘로부터 자금을 지원받는 이중적인 행위를 하는 아구다트 이스라엘 등 초정통파 유대인 단체들을 비난했다. 이스라엘 건설 이후, 네투레이 카르타는 더욱 고립되었지만 부유한 초정통파 하시디 집단의 후원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시디 집단의 후원으로 네투레이 카르타는 이스라엘 국가에 세금을 내는 것을 견딜 수 있고, 자선기금 분배를 활용해서 이스라엘 국가로부터 보조금 받는 것을 피할 수 있다. 결국 초정통파 하시디 후원 덕택에 네투레이 카르타는 이스라엘 내 정치적 기반 및 공식적인 관계가 거의 없는 자급자족 공동체로 존재한다. 네투레이 카르타는 ‘토라의 가르침에 따라, 유대인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에서 추방되었고, 신은 메시아가 도래할 때까지 유대 국가 창설을 금지했다.’라고 믿는다. 이러한 네투레이 카르타의 신학적 견해를 공유하는 초정통파 유대인들도 이스라엘 국가 해체를 주장하는 등 과격한 행동 때문에 네투레이 카르타와 거리를 두었다. 반면 네투레이 카르타는 자신들과 종교 규범을 공유하지 않는 유대인들을 이단자로 배척하며, “아랍인이 통치하는 팔레스타인 국가에서 유대 공동체가 소수자로 존재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2023년 1월 30일. 네투레이 카르타 뉴욕시위 : 출처 - (Neturei Karta facebook 게시물) 2023년 1월 9일, 예루살렘과 베이트 쉐메시 출신 네투레이 카르타 회원 3명이 팔레스타인 저항세력의 중심지 서안 소재 제닌 난민 캠프를 방문해서 이스라엘이 테러단체로 지정한 이슬람지하드 대원들과 파타 대원들을 만났다. 이에 대해서 이스라엘 경찰은 팔레스타인 자치 지역을 불법 방문한 혐의로 네투레이 카르타 회원 3명을 조사했고, 이스라엘 국가안보장관 극우파 이타마르 벤 그비르는 이 3명을 시리아로 추방해야한다고 주장했다. 2009년 7월 15일 미국인 랍비 이스로엘 와이스 등 네투레이 카르타 대표단 4명이 이집트를 통해서 가자로 들어가 하마스 지도자 이스마엘 하니야를 만나고, 의료 지원 물품, 트럭 등을 전달했다. 이 때 랍비 와이스는 “우리는 당신들의 고통을 공감하면서, 당신들과 함께 소리쳐 운다. 여기는 당신들의 땅이다. 이 땅은 불법적으로 부당하게 훔친 사람들에 의해 점령당했다. 그 사람들이 유대교의 이름과 우리의 정체성을 납치했다.”라고 주장했다. 랍비 와이스는 2006년 12월 11일, 이란에서 개최된 ‘홀로코스트에 대한 세계적 비전을 검토하는 국제회의’에도 참가했다. 그러나 이 국제회의에서 그는 홀로코스트를 부인하거나 의문을 제기하지는 않았다. 그의 어머니는 폴란드 출신이고, 아버지는 헝가리 출신이다. 홀로코스트 동안 그의 조부모, 아주머니, 삼촌 등 많은 가족들이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했다. 그는 인터뷰에서 홀로코스트 국제회의에 참가한 이유를 “우리가 적이 아니라는 것을 아랍세계와 무슬림 세계에 알리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의 검은 코트 깃에 히브리어, 아랍어, 영어로 “유대인은 시온주의자가 아니다”라고 적힌 팔레스타인 국기, 빨간 금지선이 그어진 이스라엘 국기가 위아래로 나란히 꽂혀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일반 시온주의자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시온주의에 반대하는 초정통파 유대인들조차도 네투레이 카르타를 지나친 극단주의자로 간주한다. □ 시온주의자-샤스당: 세파르디&미즈라히 이익 확보 이스라엘 세파르디 최고 랍비를 역임한 이라크 출신의 오바디아 유세프(1920~2013)가 1984년 유럽 출신의 아쉬케나지들이 지배하는 아구다트 이스라엘로부터 중동 출신의 세파르디&미즈라히를 독립시켜 ‘세파르디 수비대’를 뜻하는 샤스당을 창설하였다. 샤스당 창당 이유는 이스라엘의회 선거에서 아구다트 이스라엘에 투표하는 세파르디&미즈라히 유대인들이 다수임에도 불구하고, 유럽 출신의 아쉬케나지들이 의원직을 독점한 것에 대한 불만에서 비롯되었다. 샤스는 세속주의와 유럽계 초정통파의 패권에 반대하여 세파르디&미즈라히의 종교적 유산을 되찾는 것을 목표로 일어났다. 선거 기간 동안 샤스의 구호는 “고대의 제왕적 영광을 회복하기, 우리는 가지지 못한 사람들 편이다.”라는 것이었다. 이 구호는 세파르디&미즈라히 조상들의 영광스런 유산을 되찾고, 현재 직면한 세파르디&미즈라히 공동체에 대한 편견을 종식시키고, 차별적인 경제 문제를 해결하고, 사회 정의를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세파르디 초정통파는 공동체 랍비들이 수백 명에 달하고, 엄격하게 율법을 준수하지만, 이스라엘 미즈라히 사회의 비초정통파 대중들과 강력한 유대감을 유지한다. 이러한 세파르디&미즈라히들의 지지를 배경으로 샤스당은 1984년 4석(3.1%, 63,605득표), 1988년 6석(4.7%, 107,709득표), 1992년 6석, 1996년 10석, 1999년 17석(13%, 430,676득표) , 2003년 11석, 2006년 12석, 2009년 11석, 2013년 11석, 2015년 7석, 2019년 4월 8석(5.99%), 2019년 9월 9석(7.44%), 2020년 9석(7.69%), 2021년 9석(7.17%), 2022년 11석(8.25%, 392,964득표)을 획득함으로써 이스라엘 정치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샤스당의 활동을 통해서 세파르디&미즈라히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정치에서 독자적인 커다란 영향력을 확보하게 되었다. 게다가 샤스당이 초정통파가 아닌 일반 세파르디&미즈라히 유대인들의 표를 흡수함으로써, 이스라엘 정치에서 초정통파 정치세력의 영향력이 증대된 것으로 보인다. 샤스 당의 주요 이념은 세파르디&미즈라히 공동체의 종교적, 문화적 유산을 보호하는 것이다. 샤스는 ‘세파르디&미즈라히 주민에 대한 경제적, 사회적 차별을 종식’시키고, ‘전통적인 미즈라히 유대인들의 고대의 영광을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초정통파가 아닌 일반 세파르디&미즈라히도 샤스를 지지한다. 2010년 이스라엘 세파르디&미즈라히 유대인을 대표하는 샤스 당은 시온주의 운동의 최고 상부 조직인 세계 시온주의자 기구에 가입함으로써 적극적인 시온주의자로 나섰다. 아구다트 이스라엘과 달리, 샤스는 ‘종교적 신념과 시온주의 사이에 모순이 없다,’라고 간주한다. 아쉬케나지 초정통파 유대 정당들인 아구다트 이스라엘과 데겔 하토라는 이러한 샤스당의 적극적인 시온주의자 정책을 거칠게 비난하였다. 정치적 문제에 있어서 아구다트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샤스도 좌파 및 우파 정부에 참가하였다. 샤스의 선택 기준은 세파르디와&미즈라히 유대인들에게 어느 정부가 더 큰 이익을 주느냐였다. □ 비시온주의자-토라 유대교 연합당: 아쉬케나지 이익 확보 1992년 아쉬케나지 초정통파 유대교 정당 아구다트 이스라엘과 데겔 하토라(1988년 미트나그디가 아구다트 이스라엘로부터 독립하여 창설됨)가 동맹하여 토라 유대교 연합당을 만들었다. 이들은 세계 시온주의자 기구에 가입하지 않았다. 토라 유대교 연합은 이스라엘의회 선거에서 1994년 4석, 1996년 4석, 1999년 5석, 2003년 5석, 2006년 6석, 2009년 5석, 2013년 7석, 2015년 6석, 2019년 4월 8석, 2019년 9월 7석, 2020년 7석, 2021년 7석, 2022년 7석을 차지했다. 이 정당은 비시온주의자로 분류되며, 이스라엘 정부에서 원칙적으로 차관직만 받아들이며, 교육과 사회복지, 초정통파의 병역 문제 등에 영향력을 발휘한다. 샤스와 마찬가지로, 토라 유대교 연합이 꾸준히 의회 의석의 확보한다는 것은 초정통파 유대교 공동체가 이스라엘 정치에서 영향력이 증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은 이민과 더 독실한 공동체의 높은 출산율도 일정하게 기여하는 것으로 보인다. 토라 유대교 연합도 이스라엘 정치에서 아쉬케나지 초정통파의 이익 확보를 위해서 활동한다.
2023-02-21 | hrights | 조회: 996 | 추천: 2
염운옥 / 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은 1838년 어느 날 런던 동물원에서 오랑우탄 제니를 만났다. 제니는 보르네오에서 온 세 살짜리 암컷 오랑우탄으로 런던 동물원에서는 처음 선보이는 오랑우탄이었다. 제니는 난방이 들어오는 우리에 갇혀 인간처럼 옷을 입고 차를 마시는 모습을 연기해야 했다. 제니가 다윈에 대해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 길 없지만, 다윈이 본 제니는 기록에 남았다. 다윈은 오랑우탄과 인간의 공통점을 눈여겨보았다. 제니를 관찰한 다윈은 인간 어린아이와 닮은 오랑우탄의 표정과 행동을 보고 나서 인간과 동물 사이의 진화적 연속성을 확신하게 되었다고 노트에 적었다. 후일 다윈은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1872)에서 유인원 관찰이 흥미로운 이유는 감정 표현이 인간과 유사하기 때문이라고 썼다. 기쁨, 즐거움, 애정을 표현할 때면 인간도 유인원도 입술을 내밀고 웃는 소리를 내고 눈을 반짝일 뿐만 아니라 고통, 슬픔, 고민, 질투 같은 부정적 감정에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까지도 똑같다고 했다.   오랑우탄은 동남아시아, 그중에서도 수마트라섬과 보르네오섬에서만 서식하는 대형 유인원이다. 오랑우탄이란 말은 고대 말레이어로 ‘숲에 사는 사람’이란 뜻이다. 얼굴과 몸이 털로 가득 덮여 있고, 숲속 나무 위에 살며 걸음걸이는 느릿느릿한 이 유인원을 고대 수마트라섬과 보르네오섬 현지인들은 ‘uraŋutan’, ‘wuraŋutan’, ‘uraŋuta’ 이라 불렀다. 이를 들은 유럽인들이 ‘Orang Outang’, ‘Ōran ootan’이라고 적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동아시아에서는 ‘성성(猩猩)이’이라고 불렀다.   오랑우탄이란 말은 1630년대 네덜란드 상인들을 통해 유럽으로 들어왔다. 18세기까지 유럽에서 오랑우탄은 당시까지 유럽에 알려진 모든 대형 유인원을 포괄하는 용어로 쓰였다. 놀랍게도 pygmy, Indian satyr, pongo, jocko, barris, drill, smitten Quioias Morrou, salvage 같은 용어가 오랑우탄과 같은 의미로 쓰였고, 오랑우탄과 침팬지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오랑우탄이라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 오랑우탄을 부르는 이름이 여럿일 뿐만 아니라 유럽어, 아시아어, 아프리카어가 혼재하는 언어적 혼란과 동남아시아에 사는 오랑우탄과 아프리카에 사는 침팬지가 구분되지 않는 지리적 혼동은 오랑우탄이 유럽에 던진 충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오랑우탄이 여러 이름으로 불렸던 이유는 유럽인의 인식체계에 들어온 이 낯선 동물을 어떻게 분류해야 할지 몹시 곤란했기 때문이다.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경계가 얼마나 모호한가를 불길하게 상기시키는 이 생명체를 늑대소년 같은 야생인간으로 봐야 할지, 아니면 원숭이에 가까운 종이라고 하면 될지 쉽게 판단이 서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18세기는 ‘오랑우탄의 세기’라고 할 만큼 오랑우탄 연구는 이 시기 자연사와 비교해부학 분야에서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프랑스의 과학자 니콜라 클로드 파브리 드 페이레스크(Nicolas-Claude Fabri de Peiresc)는 아프리카와 지중해 여행을 통해 오랑우탄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이 동물은 인간과 원숭이 사이의 제3의 종”이라고 단언하기도 했다. 오랑우탄의 정체를 밝히는 일은 인간과 비인간 사이의 모호한 경계에 구분선을 명확히 그음으로써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밝히는 일과 다르지 않았다. 오랑우탄이 쏘아 올린 질문이 계몽주의 시대 자연학과 인간학을 관통하는 주제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오랑우탄은 어떻게 유럽에 알려지게 되었을까? 네덜란드동인도회사의 상업 네트워크는 유럽에 아시아 오랑우탄에 관한 지식이 전해지는 주요 루트였다. 오랑우탄이란 말을 책에 써서 처음 소개한 학자는 야코부스 본티우스(Jacobus Bontius)였다. 레이덴 태생으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의사로 바타비아에서 활동했던 본티우스는 저서에 오랑우탄에 관한 묘사와 삽화를 남겼다. 그는 인간의 얼굴을 한 이 놀라운 괴물이 직립해 걸어 다니는 것을 자신이 직접 여러 번 목격했으며, 자바인들에 의하면 오랑우탄은 말을 할 줄 알며, 혐오스러운 욕정을 만족시키려고 유인원이나 원숭이와 관계하는 인도 여성과의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고 전했다.   Jacobus Bontius, Engraving of a orangutan, 1658, Wellcome Collection L0032838 출처: Wikimedia Commons   유럽 최초로 살아있는 유인원을 관찰하고 책에 쓴 사람은 네덜란드 의사이자 암스테르담 시장이었던 니콜라스 튈프(Nicolaes Tulp)였다. 『의학적 관찰』(1641)의 한 장(章)을 할애해 오랑우탄에 관해 썼다. 오랑우탄을 ‘호모 실베스트리스(homo sylvestris)’라고 표현하고, ‘인디언 사티로스(Indian satyr)’와 같은 존재라고 적었다. 이런 동일시는 고대 로마의 가이우스 플리니우스 세쿤두스(Gaius Plinius Secundus)와 클라우디우스 아에리아누스(Claudius Aelianus), 16세기 스위스 의사 콘라드 게스너(Conrad Gesner)로 이어지는 유럽 박물학의 전통을 따른 것이다. 튈프가 관찰한 오랑우탄은 1630년 한 네덜란드 상인이 들여와 헤이그의 오라녜공 프레데릭 핸드릭(the Prince of Orange Frederick Hendrick)의 메나주리에서 사육한 개체였다. 튈프는 신체적 특징을 조사했을 뿐 아니라 컵을 사용해 물을 마시고 잠잘 때 베개와 담요를 사용하는 것 같은 행동에 주목해 마치 ‘가장 교육받은 사람’ 같았다고 적었다. 튈프는 오랑우탄을 눈으로 직접 관찰하면서도 고전 문헌에서 읽은 ‘호모 실베스트리스’, ‘인디언 사티로스’라고 판단하고, 전통에 기대어 신빙성을 부여하는 방법을 택했다. 계몽의 시대라고 하지만 경험적 관찰은 아직 고전의 권위를 이기지 못했다. 튈프의 책은 한 페이지 전면을 할애해 오랑우탄 판화를 실었고, 이 판화 덕분에 유명한 텍스트가 되었다. 판화에서 오랑우탄은 늘어진 젖가슴에 다소곳한 태도로 부끄러운 곳을 가리고 있는 여성화된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튈프의 판화는 과학 논문과 대중 여행기에서 수없이 복제·유통되었다.   Nicolaes Tulp, Homo Sylvestris, Observationes Medicae, 1641 출처: Silvia Sebastiani, “A ‘Monster With Human Visage’,” p. 84.   사체 해부를 통해 오랑우탄의 정체에 대해 해부학적 결론을 내놓은 학자는 페트루스 캄퍼르(Petrus Camper)였다. 네덜란드 의사이자 해부학자 캄퍼르는 여러 마리의 오랑우탄을 해부해 밝혀낸 결과를 1779년 영국 왕립학회 학술지 『철학논문집』에 실었다. 캄퍼르의 논문 「오랑우탄의 발음기관에 관한 설명」은 인간과 유인원 사이의 구조적 유사성과 차이에 관한 답이 되었다. 이 논문에서 캄퍼르는 오랑우탄의 언어사용과 인간과의 교접 가능성을 전면 부정했다. 후두부의 구조상 언어를 사용할 수 없으며 생식기도 인간보다 개와 유사하다고 밝힘으로써 인간과 오랑우탄의 성교와 번식 가능성은 없다고 결론 내렸다.   캄퍼르가 여러 마리의 오랑우탄을 해부할 수 있었던 배경은 1770년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네트워크를 통해 네덜란드 총독의 메나주리로 공급된 아시아 오랑우탄의 수가 증가했기 때문이었다. 18세기 유럽에서 오랑우탄은 과학적 관찰과 해부의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공공장소에 전시되어 ‘호기심 많은’ 관중들의 눈길을 끌었다. 네덜란드와 영국에서 오랑우탄에 관한 기사는 정기적으로 신문에 실렸고, 런던의 커피하우스 같은 새로운 사교와 공론의 공간에 오랑우탄이 전시되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오랑우탄은 살아서는 왕과 귀족의 메나주리, 커피하우스, 동물원에서 사육·전시되었고, 죽어서는 해부대 위에 올랐다가 표본이 되어 자연사박물관에 안치되었다. 오랑우탄의 본성에 대한 논란이 일단락되고, 유럽 동물원에 대중의 구경거리로, 자연사박물관에 해부학 표본으로 안치되는 것은 19세기 중반의 일이었다. 동물성과 인간성에 관한 논쟁은 유럽과 비유럽 사이에 구축된 수많은 연결망이 존재했기에 가능했다. 유럽과 비유럽의 연결은 인간과 인간의 교류뿐만 아니라 유인원의 글로벌 교환으로도 드러났다. 인간과 같은 ‘사람과(Hominidae)’의 친척 오랑우탄이 아직도 동물원에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 Charles Darwin, Notebook, 1838. Lines 79 & 196–197. http://darwin-online.org.uk/content/frameset?eywords=boast%20of%20his%20proud&pageseq=69&itemID=CUL-DAR122.-&viewtype=text 2)찰스 다윈, 김성한 옮김,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 (사이언스북스, 2020), 206-211쪽. 3)Wayan Jarrah Sastrawan, “The Word ‘Orangutan’: Old Malay Origin or European Concoction?,” Bijdragen tot de taal-, land-en volkenkunde/Journal of the Humanities and Social Sciences of Southeast Asia 176.4 (2020), pp. 536-539. 4)성성(猩猩)은 전근대 한자문화권의 고전들에 기록된 인간을 닮은 동물의 통칭이다. 현대 중국어에서는 침팬지를 흑성성(黑猩猩), 보노보를 왜성성(倭猩猩), 고릴라를 대성성(大猩猩), 오랑우탄을 홍성성(红猩猩)이라고 한다. 5)Silvia Sebastiani, “A ‘Monster With Human Visage’: The Orangutan, Savagery, and the Borders of Humanity in the Global Enlightenment,” History of the Human Sciences 32.4 (2019), p. 82. 6)M. C. Meijer, “The Century of the Orangutan,” New Perspectives on the Eighteenth Century 1 (2004), pp. 62–78. 7)Silvia Sebastiani, “A ‘Monster With Human Visage’,” p. 83. 8)튈프는 렘브란트의 유명한 그림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수업〉(1632)의 주인공이다. 9)라틴어로 호모 실베스트리스(homo sylvestris)는 ‘숲(sylva)에 사는 사람’이란 뜻이다. 야만(savage)과 숲(sylva)은 같은 어원에서 나온 단어다. ​ 10)Silvia Sebastiani, “A ‘Monster With Human Visage’,” pp. 82-83. 11)Petrus Camper, (1779) ‘Account of the Organs of Speech of the Orang Outang’, Philosophical Transactions 69 (1779), pp. 139–159. 12)Silvia Sebastiani, “A ‘Monster With Human Visage’, p. 93 13)사람과(Hominidae)는 사람, 침팬지, 보노보, 고릴라, 오랑우탄 등을 포함하는 영장류의 한 과이다. 대형 유인원이라고도 부른다. 이 중에서 인간과 가장 가까운 영장류는 침팬지와 보노보다. 14)Jacobus Bontius, “Historiae naturalis et medicae Indiae orientalis [Natiral and Medical History of East Indies],” in W. Piso, De Indiae utriusque re naturali et medica libri quatuordecim [On the Natural and Medical Things of Both Indies in Fourteen Books]. (Amsterdam: Lodovicum et Danielem Elzevirios, 1658). #인권연대 #사람소리 #수요산책 #염운옥 #오랑우탄이쏘아올린질문 #칼럼
2023-02-13 | hrights | 조회: 647 | 추천: 5
조광제 / 철학아카데미 대표 광기의 자유 권력과 광기의 결합만큼 결정적인 위험이 있을까? 여기에 돈벌이의 기회 조작까지 더해지면 타는 불에 계속 기름을 끼얹는 격으로 광기가 더욱 솟구쳐오른다. 게다가 거기에 현존하는 거대 정치권력의 뒷배가 작용하면 완벽하게 인간성이 소멸하고 정치가 실종된다. 2023년 2월 4일에 방영된 《뉴스타파》의 <정치깡패가 된 ‘아스팔트 유튜버’>를 시청하고 난 뒤, 예상을 뛰어넘는 사태에 충격을 금할 수 없었다. 극우 유튜버들의 작태들을 대략 알고 있긴 했으나, 단편적이나마 정돈된 영상을 통해 그 실상을 접하고 나니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우리 사회가 이토록 노골적이고 비합리적인 광기의 폭력에 휩쓸리고 말았는가, 하는 절망감이 일순간 나의 심정을 억누르면서 답답하기 이를 데 없었다. 더불어 어떻게 만든 민주 사회인데, 하는 심정에 분노가 치솟으면서 폭력에는 폭력 외에 다른 치유책이 없다는 확신이 나의 심사를 지배하기까지 했다. 출처 - 뉴스타파 무엇보다 심각한 일은 대통령 윤석열 씨의 집권이 이런 ‘정치깡패 유튜버들’의 활동에 노골적으로 또는 은밀하게 힘입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중요한 연설 때면 대통령 윤석열 씨가 왜 그렇게 자유를 거듭 강조하는지 알쏭달쏭 그동안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뉴스타파>의 저 영상을 보고서 그 이유와 내용을 짐작하게 되었다. 내심 논리 비약이길 바라지만, 그가 말하는 자유가, 이태원 참사 유가족을 향해 “시체 팔이” 운운하여 경악을 금치 못하게 했던 김상진이라는 인물이 주도하는 ‘신자유연대’라는 단체의 이름에 들어있는 ‘자유’와 같다는 것, 말하자면, 극우 보수 무리가 말하는 자유와 같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는가? 이른바 민주주의를 외치는 진보 세력은 알고 보면 친북 좌파 빨갱이 간첩의 집단들이다. 그리고 그 수장은 문재인이고 이재명이다. 그 증거는 한반도 평화를 빌미로 북한과 중국에 예속되어 미국을 전적으로 따르지 않고 친일을 범죄시한다는 것이다. 멀쩡한 우리 공무원을 탈북자로 만들어 죽이는 게 그 증거다. 언필칭 민주 세력이라는 이 집단들이 내세우는 민주주의와 자유는 엉터리고 위장일 뿐이다. 이 세력들은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아예 함께 할 수 없는 적일 뿐이다. 따라서 이들 집단을 철저히 적으로 여겨 척결하는 길만이 진정한 자유 민주주의를 이루는 길이고 나라를 구하는 길이다. 이 적들을 분쇄하기 위해서는 언제 어디서든지 크고 작은 전쟁을 벌일 수 있어야 한다. 이들을 척결할 수 있는 확실한 무기는 무소불위의 검찰 권력이고, 검찰 권력을 곳곳에 정치권력으로 확대해 정확하게 자리 잡도록 하는 것이다. 저들이 말하는 ‘검찰 공화국’이니 ‘검찰 독재’니 하는 말은 우리가 잡은 기회를 정당화하는 말이니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오히려 달가워해야 한다. 저들에게 조그마한 틈을 보여서도 안 된다. 내가, 우리가 집권한 지 1년이 다 되어가도록 왜 영수 회담 운운하는 짓을 하지 않았겠는가. 적과 마주 앉아, 더군다나 국정을 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거대 야당의 힘을 내세워 협치 운운하는데, 거기에 휘둘리면 안 된다. 어떻게든 아차 했으면 질 뻔했던 적의 두목인 이재명을 감옥에 잡아넣어야 한다. 그 인간을 살려 두면 종북 좌익의 준동을 막는 일이 힘들어진다. 만약 다음 대선에 정권을 넘겨주면 어떻게 되겠는가. 오로지 죄를 법으로 정당하게 다스렸을 뿐 죄를 지을 수 없는 우리를 오히려 잡아넣지 않겠는가. 방심해서는 안 된다. 조금이라도 나와 우리가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는 걸 눈치채도록 해서는 안 된다. 무슨 실수를 했건, 무슨 일을 벌였건, 무슨 일이 벌어졌건 간에 결단코 의무를 다하지 못해 잘못했다고 사과하거나 잘못 실수를 저질렀다고 변명해서는 안 된다. 무조건 딱 잡아떼야 한다. 확실한 증거가 없는데, 저것들이 뭐 어쩌겠는가. 의혹이니 뭐니 아무리 떠들어도 겁내지 말고 오히려 역공을 취해야 한다. 우리가 쥐고 있는 검찰과 경찰의 공권력을 활용해야 한다. 고발하고 고소해서 겁을 주고 몰아붙여 입을 다물게 하고 굴복시켜야 한다. 대다수 국민이 못 살겠다고 나설라치면 전번 정권의 탓이라고 몰아붙여야 한다. 막강한 언론들이 다 우리 편이지 않은가. 재벌 기업들이란 본래 정권에 아부하기 마련이니까 걱정할 필요가 없고, 게다가 그동안 내가, 우리가 많이 봐주었잖아. 언론과 재벌을 장악하면 그걸로 얼마든지 우리의 뜻을 펼칠 수 있잖아. 최대한 함께 보조를 잘 맞추도록 해야 한다. 내가, 우리가 어떻게 통치 권력을 거머쥐었는가. 국민이 나를, 우리를 선택한다고 해서 가능하겠는가, 신적인 운명이 나를, 우리를 택했으니까 가능했다. 그러니 아예 걱정해서는 안 된다. 나의, 우리의 통치 권력이 얼마나 강력한가를 여실히 보여줘야 한다. 무조건 밀어붙여야 한다. 조금이라도 방해되는 자가 있으면 눈치 볼 필요 없이 틀림없이 제거해버려야 한다. 나를, 우리를 비난하고 비판하는 놈들은 철저히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 거짓말은 전혀 문제가 안 된다. 경선 때건 대선 때건 무슨 공약을 내세웠건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오히려 필요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거짓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모든 게 바로 우리가 추구하는 자유이고, 진정한 자유다. 김정은이 핵무기 좀 있다고 나를, 우리를 내놓고 함부로 욕하는데, 가만두면 도저히 안 된다. 전쟁을 겁내면 안 된다. 선제공격, 조금이라도 기미가 보이면 먼저 쳐야 한다. 확실한 우리 편이 있지 않은가. 미국도 있고 일본도 있고 나토도 있지 않은가. 내가, 우리가 나토에 괜히 갔겠어? 일단 미국 바이든에게 전술 핵무기 배치해 달라고 하고, 안 되면 우리가 독자적으로 핵무기를 개발할 수도 있는 거야. 중국이 문제라고? 중국과의 교역? 지금 교역이 문제야? 자유가 문제지. 좌고우면하지 않는 자유, 조금이라도 나, 우리를 비방하고 말 안 듣는 놈은 안에서건 밖에서건 다 적이야. 작건 크건 적은 무조건 척결해야 해. 그게 자유야. 그게 자유 민주주의야. 진보주의적 자유 워낙 불안하고 갑갑한 마음에 잠시 흥분했다 싶어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악은 과연 어디에서 비롯하는가? 일찍이 소크라테스는 악이 무지에서 비롯한다고 했다. 잘못된 짓인 줄 알긴 했는데, 어쩔 수 없이 그 짓을 하고 말았다는 건 소크라테스에게 통하지 않는다. 잘못된 짓인 줄 제대로 알지 못했기에 나쁜 짓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짓을 할 때, 그 짓이 잘못된 것임을 제대로 알기만 하면 그 짓을 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내가 하는 짓이 잘못된 것인지 올바른 것인지 과연 제대로 알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그리고 만약 알 수 있다면, 그 앎의 기준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점이 문제다. 로빈슨 크루소처럼 아무도 없는 외딴섬에 사는데도 올바르거나 잘못된 짓이 성립할 수 있을까? 말하자면, 다른 사람들과 전혀 상관없이 올바르거나 잘못된 짓이 성립할 수 있을까? 여러 전제들을 고려해 따지게 되면 복잡하겠지만, 단적으로 보면 복잡할 게 없다. 내가 하는 행위가 남들과 아무 상관이 없다면, 올바르다거나 잘못되었다거나 할 까닭이 없다. 그렇다면, 내가 하는 짓이 올바른지 잘못된 것인지의 기준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찾을 수밖에 없다. 누구나 다른 사람들과 온갖 다양한 관계를 맺고 살겠지만, 올바름과 잘못됨에 관한 기준을 찾기 위해 고려해야 할 일은 일단 간단하다. 내가 하는 짓이 남에게 득이 되면, 내가 하는 짓은 올바르다. 그리고 내가 하는 짓이 남에게 해가 되면, 내가 하는 짓은 잘못이다. 그렇다면 남에게 득이 되는 일이 무엇이며, 해가 되는 일이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분별하는 것이 문제다. 이를 정확하게 분별했다 할지라도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남에게 득이 되는 게 분명하다고 해서 내가 그 일을 남에게 함부로 권유하거나 심지어 강권하거나 강제로 시킬 수 있는가? 남에게 득이 되는 일이라 할지라도 그 일을 내가 남에게 강제로 하도록 하는데도, 과연 그 일이 그 사람에게 득이 될 수 있을까? 남의 자유를 빼앗으면서까지 그 사람에게 득이 되도록 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달리 말하면, 내가 올바른 짓을 하기 위해 남의 자유를 빼앗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만약 누구에게나 자유가 가장 큰 득이라면, 이는 아예 불가능하다. 묘하게도 누구나 자유를 추구한다. 자유야말로 인간다운 인간이 되는 데 가장 근원적인 요소라 여긴다. 그래서 자유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큰 득이고, 따라서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자유만큼은 양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자유조차 근원적으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바탕으로 해서만 의미 있게 성립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내가 자유롭기 위해 다른 사람의 자유를 제한하는 일이 벌어지지 말란 법도 없고, 다른 사람의 자유를 제한하는 만큼 나의 자유의 폭이 더 커지지 말란 법도 없다. 실제로는 오히려 그런 법이고, 그래서 자유를 둘러싼 투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내가 자유로운 만큼 남도 자유롭고, 남이 자유로운 만큼 내가 자유로우면 더 바랄 게 없다. 이는 자유에 관한 이상적 상황이다. 묘한 말로 들리겠지만, 우리는 이러한 이상을 포기할 자유가 없다. 어렵게 들리겠지만, 오로지 남들과의 관계에서만 나의 자유가 성립한다고 할 때, 자유롭지 않은 남들을 통해서는 나의 자유가 성립할 수 없다. 남을 마음대로 부리는 데서 나의 자유가 성립하는 게 아니라, 자유로운 남들을 존중할 때 나의 자유가 제대로 성립한다. 자유는 아무것도 아닌 텅 빈 형식으로서 성립할 수 없다. 자유는 실질적인 내용을 통해서만 제대로 성립한다. 자유는 근본적으로 행동의 자유지만, 자유로운 행동은 자유로운 상상을 통해 새로운 여건을 창조할 때 그 실질을 확보한다. 남들이 자유롭게 상상하고 창조할 수 있을 때, 그런 남들과 함께 관계를 맺고 사는 나의 자유가 더 풍부하게 실질을 획득할 수 있다. 자유로운 상상과 창조적인 행위의 공동체를 통해서만 실질적인 자유가 성립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상적 상황을 조금이라도 더 현실화하고자 하는 노력하는 자들을 일컬어 진보주의자라 일컫는다. 그래서 진보주의와 자유주의는 근본적으로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근원적으로 일치한다. 진보주의자는 더 나은 미래의 현재를 향해 상상한다. 이때 더 나은 미래의 현재는 창조적인 상상을 현실로 구현한 현재다. 진보주의자는 나의 자유가 남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인정한다. 그래서, 그 전제 위에서 그 제한의 폭을 최소화하고자 한다. 이런 까닭에 진보주의자는 평등을 지향한다. 평등은 자유와 전혀 대립하지 않는다. 불평등이야말로 자유를 위협한다. 불평등한 자유는 텅 빈 형식에 따른 자유일 뿐, 실질적인 자유가 아니다. 실질적인 자유에서 실질은 배타적인 소유와 처분을 통한 향유를 넘어서는 데서 주어진다. 함께 향유 하지 않으면 실현될 수 없는 결과물들, 예를 들어 예술과 문학, 학문과 기술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종교 등을 향유 하는 데서 자유의 실질이 주어진다. 배타적인 나의 자유를 진정한 자유라고 생각하는 자는 제대로 된 자유주의자가 아니다. 나의 자유를 제한하는 자는 누구든지 나의 적이라고 여기는 자의 입에서 발설되는 자유에 대한 강조는 무지와 확증 편향에 따른 것으로서 자유의 실질을 파괴한다. 남들을 지배하는 권력만이 자유를 가능케 한다고 생각하는 자의 자유는 남들은 물론이고 저 자신마저 노예로 만든다. 이러한 자의 생각이 뭉쳐지게 되면 자신만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모든 사람의 자유를 자신에게 일관되게 맞추어야 한다는 파쇼적인 사상이 된다. 파쇼는 자유주의의 적이고, 더욱이 진보주의의 적이다. 최대한 보편적인 실질의 평등을 통해서만 실질적인 자유를 실현할 수 있음을 생각하지 않는 자는 그런 만큼 자유를 훼손하는 자다. 현행법은 현실 권력의 충돌과 타협의 산물이다. 그렇다고 해서 특히 민주주의 사회에서 갖는 현행법의 권위를 무시할 수는 없다. 하지만, 평등과 자유의 일치를 방해하는 법은 그런 만큼 배타적인, 자유 아닌 자유를 위한 것이기에 수정되어야 하고 폐기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법의 궁극적인 정당성을 고려하지 않고 법의 한계를 무시하고 현실 권력의 법을 절대적인 양 내세우는 자는 실은 법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이 거머쥔 현실 권력을 유지하고 강화하고자 법을 악용하는 것이다. 그 증거는 자신의 배타적인 유불리를 따져 배타적 · 선택적으로 법을 적용하는 데서 나타난다. #인권연대 #웹진 #사람소리 #수요산책 #조광제 #자유 #민주주의 #광기 #칼럼
2023-02-08 | hrights | 조회: 220 | 추천: 3
석미화 / 평화활동가   새해가 밝았다.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풍경은 언제나 회한과 기대가 교차한다. 해가 바뀌는 그 시간엔 눈썹이 하얗게 셀까봐-물론 그 말을 믿는 나이는 지났지만-왠지 깨어 있어야 할 것 같은 기분에 늘 자정을 넘겨 잠을 청한다. 하긴 음력 섣달그믐날 밤 풍속이니 상관없겠다만. 밤을 밝히며 지난해에 미처 못한 일들을 꺼내 본다. 그중에는 주변에 감사 인사 드리기도 있고, 또 그해에 꼭 쓰겠다고 마음먹은 글쓰기도 있다. 그래서 이번 글은 미처 하지 못한 글쓰기 숙제 하나를 꺼내 보기로 한다. 비록 해를 넘겨 쓰는 것이긴 하지만, 그런들 어떠랴. 2022년 한베수교 30주년에 대한 짧은 생각을 이제야 긁적여 본다.   출처 - 아주경제 2022년은 한국과 베트남 수교 30주년이 되는 해였다. 지난 12월 초에는 응우옌쑤언푹 베트남 국가주석이 한국을 방문해 정상회담을 열고 양국이 최고 수준의 협력관계로 나갈 것을 합의하기도 했다. 수교일인 12월 22일 기념 리셉션과 정부 행사가 이어지며 한국과 베트남의 경제협력과 교류가 더욱 성장할 것이라는 보도가 거창했지만, 정작 ‘한베수교 30년’이 역사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돌아보려는 노력은 찾기 어려웠다.   1975년에 전쟁이 끝나고 한국은 베트남과의 교류를 끊지만 91년 소련 붕괴 후 공산주의 국가에 대한 ‘북방정책’으로 92년 다시 수교를 맺는다. 나는 지난 활동 속에 수교와 베트남전쟁을 키워드로 과거 어떤 기사가 등장했는지 검색해 본 일이 있다. 한국과 베트남 양국 관계에 베트남전쟁과 수교가 상호 어떤 영향을 미치며 현재에 이르게 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한 연구였다. 수교는 한베 과거사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정작 수교 협상 테이블에 양국의 과거사가 주요 의제로 오른 것은 아니었다.   99년 이후 베트남전쟁은 한국군의 전쟁 범죄에 대한 기사가 자주 등장하지만 수교 전후 시기에는 달랐다. 라이따이한, 국군포로, 그리고 난민에 대한 기사가 주를 이루었다. 라이따이한에 대한 기사는 대부분 가난과 동정, 이산의 슬픔을 강조하는 신파가 많았다. 베트남에 한국군 생존 포로가 있다는 주장도 있었다. 또 수교가 이루어짐으로써 부산 ‘월남난민보호소’ 표정을 다룬 기사도 보였다. 보트피플로 한국에 들어온 남베트남인들이 수교 후 송환될 것을 걱정하는 기사였다. 베트남전 참전군인들이 고엽제 피해보상을 요구하며 장시간 고속도로를 점거한 사건이 지면을 장식하기도 했다. 그 후로도 양 국가 간 정상회담과 공식적인 외교 행보가 이어질 때마다 과거사 문제는 항상 언론에 등장했다. ‘미안해요 베트남’ 캠페인은 한국과 베트남의 꾸준한 교류와 수교로 인한 공식외교 속 과거사에 대한 조명, 사회 민주화와 참전군인의 기억 투쟁이라는 복잡한 지형 속에서 그 흐름을 타고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것을 사회적 성찰의 기회로 만든 것은 지속적인 후속 보도와 시민사회의 관심이었다.   그보다 앞선 90년 월간 <말>의 ‘민간인학살’ 보도로부터 불과 2년 후 한베 수교가 이루어졌지만 양국의 과거사가 폭넓게 조망되지 않은 점은 의아하면서도 아쉽다. 민주화 이후 참전군인의 목소리가 사회적으로 확산되는 과정속에도 언론들은 베트남전쟁의 어두운 유산에 대해 외면했다. 참전군인의 기억투쟁은 국가와 국민으로부터 소외되어 온 그간의 과정을 보상받고, 그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벗어나기 위해 반사적으로 ‘보상’과 ‘명예’에 집중해왔다. 지금도 대한민국 방방곡곡 ‘월남참전기념탑’이 세워지고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본다.   수교 30주년을 기념해 베트남전 참전군인들이 만든 공법단체 ‘월남참전자회’ 소속 참전군인 40여 명은 베트남을 방문해 한국과 베트남 전사자에 대한 합동위령제를 지냈다고 한다. 또 58주년 월남참전기념식을 열기도 했다. ‘참전기념식’이라니... 종전과 더불어 평화를 기념하고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6.25도 전쟁 발발일로, 월남전도 전쟁 참전일로 기억하는 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해야 할까.   출처 - 네이버블로그 수교 이후의 보도를 모니터하며 느낀 것은 한국과 베트남이 과거사에 대해 의식하고 있으나, 해결 의지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과거에 적으로 만났던 양 국가 간에는 역사적 성찰 없이 ‘전장에서 시장으로’라는 실리적 입장만이 난무하다. 수교 30년, 시장과 경제, 외교, 명예를 강조하는 저마다의 ‘기념’ 사이에 양국의 과거사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과 접근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것이 수교 30주년에 우리가 스스로 돌아봐야 할 자화상이 아닐까.     #인권연대 #사람소리 #수요산책 #석미화 #한베수교 #한국 #베트남 #단상
2023-01-10 | hrights | 조회: 413 | 추천: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