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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 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녕(서강대 교육대학원 교수), 김대원(성공회 서울교구 신부), 김영미(금천문화예술정보학교 교사), 김희수(변호사), 설경(변호사), 오인영(고려대 역사연구소 연구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재상(CBS PD), 이재성(한겨레신문 기자), 이재승(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지상(가수 겸 작곡가),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임아영(경향신문 기자), 장경욱(변호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 허홍렬(치과의사), 홍승권(삼인출판사 부사장), 황미선(면일초등학교 교사)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장경욱/ 인권연대 운영위원  분단 참사는 한반도의 분단으로 인한 적대와 전쟁구조가 낳은 비극적 사건들을 일컫는다. 분단냉전체제가 빚은 재난이다. 분단 적대로 인해 발생한 인도주의적 문제도 분단 참사에 해당된다.  분단 참사로 인하여 교전 쌍방은 막대한 고통과 유혈을 초래하였다. 전쟁을 정지시키고 항구적 평화가 달성될 때까지 적대 쌍방의 일체의 적대행위와 무력행위의 완전한 정지를 보장하기 위한 조건과 규정에 상호 동의한 것이 정전협정(휴전협정)이다. 정전협정에는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이라는 용어가 쓰인다.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은 남북으로 분단되고 동족상잔의 전쟁을 치른 후 정전협상 과정에서 생겨나 국제법 용어가 되었다. 지금도 국제사회에서 널리 통용되고 있지만 용어의 실현은 요원한 일이다. 한반도에서는 여전히 희생과 재난이 끊이지 않고 있다. 분단 참사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고뇌에 가득찬 국제법 용어는 그 실현을 위한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이라는 용어를 떠올린 것은 평화협정의 필요성과 분단 참사에 해당하는 인도주의적 문제 해결을 위한 실마리를 찾기 위함이다.  정전협정에서 적대 쌍방의 군 사령관들은 각 국 정부들에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정전협정 효력 발생 후 3개월 내에 고위급 정치회담을 소집하여 모든 외국군대의 철수 및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 등의 문제들을 협의할 것을 건의하였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각까지도 이해 당사국들 사이의 북미 간 2자, 남북미 간 3자, 남북미중 간 4자, 남북미중, 러시아, 일본 간 6자회담이 열렸으나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정치회담(대화와 협상)을 통한 해법은 도출되기도 힘들거니와 도출된 합의조차 제대로 이행되지 못하고 있다.  적대 쌍방 사이의 한반도의 정치군사적 위기와 갈등의 연속과정은 분단으로 인한 인도주의적 문제의 발생원인이 되었고 그 해결과정에서 적대 쌍방 사이의 정치적 대화와 협상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대화와 협상을 통한 모색은 교착 국면을 거쳐 일정한 합의를 도출하였으나 이후 합의 이행을 둘러싼 불신은 새로운 정치군사적 위기를 낳았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분담 참사가 발생하는 무한한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악순환의 반복 과정에서 적대 쌍방 사이의 의견불일치 해소를 통한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상호주의, 타협주의보다는 적대관계를 강화하는 일방주의와 군사적 대결주의가 심화되었다. 상호 군비증강에 대한 불신은 군비증강을 제약하는 정전협정 규정의 무효화로 이어졌다. 소련제 항공기를 몰래 반입하였다며 북측을 비난한 유엔군(미군)은 핵무기를 배치하였다. 적대 쌍방 사이의 극도의 불신이 작용하는 분단냉전체제에서 정전체제의 항구적 평화체제로의 전환을 목표로 한 정전협정의 준수와 이행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시간이 갈수록 정전협정의 각 조항들의 상호 위반과 체계적 파기만이 남았다.  그나마 전쟁을 멈추고 일체의 적대행위를 금지하고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추구하기 위한 목적의 정전협정 덕분에 포로송환이라는 인도주의적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볼 수 있다. 분단으로 인한 인도주의적 문제인 포로송환의 합의에 도달하기까지 전쟁은 2년이나 더 치열하게 진행되었다. 정전협상에서 포로교환의 방법에 대한 의견 불일치가 상호 양보를 통해 합의에 도달하는 기나긴 과정 동안 무수한 희생을 낳은, 밀고 밀리는 육박전을 벌인 고지전이 계속되었다.  적대 교전 쌍방 사이의 한반도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분단으로 인한 인도주의적 참사를 방지하기 위하여 적대 교전 쌍방이 추구해야 할 유일한 길은 정전협정과 같은 방식의 연장선상에서 상호 수용 가능한 합의와 상호 동의에 의한 평화적 문제해결 방법 밖에 없다. 그것이 전쟁을 막고 분담 참사를 예방하는 길이다. 정전협정은 정치회담을 통한 평화협정으로의 대체를 예정한 잠정협정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정치회담을 통한 평화협정의 체결은 이 땅에서 이적시되고 있다. 북 지도자의 참수와 북 정권의 격멸 및 평양 점령을 위한 군사작전 계획이 영구히 취소되기는커녕 은폐된 채로 훈련되는 상황이다.  끊임없이 분단 참사를 발생시키는 분단냉전체제에서 오로지 적대와 대결을 추구하며 상호 이해와 타협 없이 일방적 주장만을 강요하는 일방주의가 이 땅에서 독버섯처럼 자라나 누구도 이의를 제기해서는 안 되는 무서운 진리로 둔갑했다.  북 주민과 북 사회주의 정권 일체를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북 사회주의의 일체의 산물 그 자체를 적대하며 부인하는 국가보안법이 분단 참사의 예방과 분단 참사로 인한 인도주의적 문제의 해결을 방해하고 있다.  서해 북측 인근 해상에서 북측 군인에 의해 피격 사망한 실종 공무원 사건에서 분단 참사를 미연에 방지할 상호 이해와 타협의 정신이 발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여론은 일부에 불과하다. 오로지 상대에 대한 비방과 대결만이 난무한다. 서해 분쟁 수역에서 공동어로구역과 평화수역을 정하기로 남북 간 상호 합의가 수차 이뤄졌음에도 의견불일치로 구역과 수역 설정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이 근본원인이 되어 서해분쟁수역에서 발생한 이번 분단 참사를 교훈으로 남북 간 분단으로 인한 인도주의적 문제 해결을 위한 협의와 분단 참사를 예방할 공동의 노력이 재개되어야 한다.  분단 참사를 빙자하여 상대방을 비방하며 적대관계를 강화하는 것은 정전협상에서 군사경계선 확정을 둘러싸고 적대 쌍방이 지리한 교전을 이어간 것과 같다. 상호 일방적 해상경계선을 설정하고 이를 군사력으로 수호하고자 군사적 대결을 지속하는 한 제3의 연평해전과 제2의 연평도 포격전과 제2의 피격 사건과 같은 참사는 필연적으로 발생될 수밖에 없다.  정전협정에는 실향민들이 군사분계선을 통한 안전한 귀향을 군사적으로 보장하기 위한 규정들이 있지만 단 한 번도 남북 실향민들의 귀향 문제를 군사정전위원회나 그 밖의 남북 간 협상에서 합의하고 이행한 적이 없다.  6.15 남북공동선언의 성과로 63명의 비전향 장기수들이 북측으로 송환되었지만, 이는 일시적, 정치적 합의에서 비롯된 혜택일 뿐, 정전협정의 규정과 같이 실향민들의 안전한 귀향을 보장하는 남북 간 합의는 현재 없다. 정전협정 67주년을 하루 앞둔 지난 7월 26일 경기 파주시 임진각 전망대에서 시민들이 북녘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 출처 - 서울신문  최근 조성길 전 대리대사 부인의 북한 송환 의사가 이슈가 되고 있다. 한국행을 원치 않았고 북에는 현재 딸이 살고 있다고 한다. 북송을 위한 국내법적 근거가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단언컨대 국내법적으로는 근거가 없다.  국가보안법이 헌법과 국제법 위에 존재하는 한 그 누구도 지옥의 땅으로 돌아가려는 시도가 국가보안법 탈출죄로 처단되고, 이를 지지하거나 방조하는 자들 또한 국가보안법에 한데 엮어 처벌받는 국가보안법이 지배하는 남녘땅에서 감히 누가 북송을 거론할 수 있다는 말인가.  더욱이 남쪽에서 보고 들은 모든 것이 국가기밀이 되는 국가보안법 아닌가. 남측에 정착한 탈북자의 이름 등 신상정보가 국가기밀이 되고 신변보호 보안경찰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화통일에 도움을 주는 국가기밀이 되는 데 북으로 송환되면 남측 탈북민의 가족들은 정치범 수용소로 가서 처형될 수 있고 신변보호 보안경찰의 생명마저 위태롭게 될 수 있다. 이처럼 국가안전에 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데 누가 감히 북송 주장을 한다는 말인가.  북으로 돌아갔다가 재탈북한 이들이 전부 국가보안법 간첩죄로 3년 6월의 징역을 살고 나오는 파시즘 국가보안법이 지배하는 것이 냉혹한 현실이다. 대법관들마저 국가보안법 앞에서 이성을 잃고 북맹으로 전락하여 공안의 일방적 주장에 사로잡혀 북 악마화와 적대의 논리를 확인해 주고 있는 마당에 북측으로 귀향을 공개적으로 추진할 사람은 거의 없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한국 정부에 북한이탈주민보호법에 따른 보호신청을 한 경우 보호신청 무효를 주장하며 북으로 돌려보내 줄 것을 요청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우리는 평양시민 김련희씨 사례와 북 해외식당 종업원들의 유인납치 사건에서 익히 경험하였다.  국가보안법으로 세뇌된 인식들에서 나오는 반응들을 보자. 북으로 돌아가면 이러나저러나 죽을 것이고, 남측의 자유로운 세상을 맛보고서 지옥의 땅에 돌아가겠다는 것 자체가 미친 짓 아니냐는 조건반사적 반응은 북송 절대 불가의 세뇌된 여론으로 나타난다,  한국에서 북측으로 가겠다고 주장하는 자는 그 사람의 동기를 불문하고 이적으로 취급받는다. 브로커에 속아서 한국으로 입국하였다가 그리운 조국과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겠다고 언론에 보도된 김련희씨는 현재 국가보안법 수사 중이다. 온갖 종북몰이 딱지가 붙었다. 김련희씨가 브로커에 속아서 한국에 입국하였다고 하며 단식투쟁까지 하였지만 국정원 조사관들은 돌아갈 방법이 없다며 오히려 남쪽에 온 것이 북에 알려지면 북의 가족들이 모두 죽임을 당한다는 황당무계한 궤변을 늘어놓았다. 어쩔 수 없이 한국 땅에 정착 후 여권이 만들어지면 제3국을 경유해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북송 요구를 하며 단식을 한 경력으로 인하여 신원이상자로 여권이 나오지 않았다. 뒤늦게 2018년 집단유인납치된 북 해외식당 종업원들의 여권 미발급이 사회문제가 되어 한국을 동경하여 입국한 종업원들이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한 한국 정부가 여권을 발급하여주지 않은 자체가 앞뒤가 모순된 것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자 국정원은 입장을 바꿔 집단유인 납치 피해자인 종업원들과 함께 김련희씨에게도 슬쩍 여권을 발급하여 주었다. 그러나 김련희씨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수사 중이라는 이유로 지속적으로 출국금지가 연장되고 있다.  적대 쌍방 사이에 절대 물러설 수 없는 마지노선만이 남은 분단냉전의 적대관계에서 쌓인 불신과 증오는 상호 우발적 무력 충돌과 분단 참사를 만드는 도그마가 되었다. 북에 대해 오로지 모든 것을 부인하기만 하다 보니 북측에도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이 진리 아닌 진리가 되었다. 북측에는 외세의 제국주의에 맞서 자존심을 지키는 우리 겨레가 지도자를 중심으로 단결하여 사회주의를 향해 전진해가고 있다고 하면 아마도 다들 죽일 듯 행패질할 반인권적 사회가 되고 말았다.  진실을 말할 권리는 없고, 공갈칠 자유는 넘치는 사회다. 태극기와 성조기를 휘두르는 박상학 같은 자들이 반북 망동을 부리기에 안성 맞춤한 세상이다. 진실을 호도하는 일방주의가 초래한 극도의 불신과 대결의 냉전 한가운데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채 언제나 평화가 목마르고 분단 참사가 숱하게 벌어지고 있다.  불신을 해소하고 신뢰증진하며 상호이해와 타협을 통해 적대관계를 해소하는 길로 나아가는 인식과 감성과 해법 마련은 평화를 위해, 분단 참사를 예방하기 위해 시급히 준비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길이 여전히 요원하다. 정전협상과 정전협정의 정신을 살려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정치회담은 언제 한번 제대로 열린 적이 없다.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를 달성하고 분단 참사 없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쟁취할 그 길에서, 국가보안법과 그에 길들여지고 세뇌된 북맹을 타파하고 맹목적 불신과 오해, 비방과 대결의 난장판을 갈아엎어야 한다. 국가보안법을 넘어, 정전협정의 긴 터널을 넘어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이루는 그날을 앞당기고 싶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2020-10-20 | hrights | 조회: 108 | 추천: 1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그동안 종교학과 평화학을 공부하다가 올 초부터 보훈교육연구원에서 일하고 있다. 보훈교육연구원 밖에서 보았던 한국 보훈제도의 의미와 과제가 안에 들어오니 더 선명하게 보인다. 그것은 결국 보훈이란 무엇이고 보훈이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의 문제로 귀결된다.  사전적으로 보훈(報勳)은 “국가 유공자의 애국정신을 기리어 나라에서 유공자나 그 유족에게 훈공에 대한 보답을 하는 일”이다. ‘국가보훈기본법’ 제1조(목적)의 핵심을 추리면, ‘국가를 위하여 희생하거나 공헌한 사람의 숭고한 정신을 선양하고 그와 그 유족 또는 가족의 영예로운 삶과 복지향상을 도모하며 나아가 국민의 나라사랑정신 함양에 이바지하는 행위’다. 얼핏 지당하고 분명한 규정 같다.  하지만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 ‘공을 세운다는 것’[有功]이 무엇인지 하나씩 따지다 보면, 실제로 그 경계가 모호할 때가 많다. 전쟁 참전 용사가 국가유공자일 수 있고, 코로나19의 확산을 막기 위해 희생을 무릅쓰고 노력하는 이들도 국가유공자일 수 있으며, 나아가 양심적으로 선량하게 사는 소시민도 국가유공자일 수 있다. 이들 없이 국가가 유지되고 발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어디까지가 국가에 공을 세우는 행위인지 규정하고자 할 때 늘 긴장과 갈등이 뒤따른다. 어떤 태도로 얼마나 헌신하고 희생적이어야 유공자라고 할 수 있는지는 결국 사회적 의미와 영향력에 따른 법률적인 판단에 달려 있다. 공식적으로 국가유공자라는 말은 헌신과 희생의 객관적 증거에 입각해 법과 규정대로 판단한 이후에나 쓸 수 있다. 그리고 이 때의 법과 규정은 좁은 의미에서 엄정하게 적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국가 전체를 염두에 두면, 나아가 국경이 사라져가다시피 하는 급격한 지구화 현상까지 염두에 두면, 국가유공의 본질을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어디까지가 국가유공의 행위인지 그 경계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현행 법률과 제도상 보상과 선양의 대상이 되지 못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류애를 실천하다 희생당한 이들이 보훈의 가치와 본질에서 멀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보훈은 국가공동체로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정책이면서도, 역설적이게도 누군가의 희생을 낳은 폭력적 현실을 전제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이것은 그 폭력적 전제 자체를 없애가는 행위가 정말 근본적인 보훈의 행위라는 뜻이다. 역설적이게도 국가유공자가 더 이상 나오지 않아도 되는, 바꾸어 말하면 국가보훈기본법의 국가유공자의 개념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될 평화의 세상을 만들어가는 장기적 과제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더욱이 세계가 급격히 유기적으로 연결되어가고 있는 때일수록, 어느 국가에 공을 세우는 행위가 다른 국가에 피해가 아니라 도리어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보훈이 국가를 위하여 희생한 사람의 숭고한 정신을 선양하는 행위라 해도, 그 희생이 특정 국가만이 아닌 다른 국가에게도 유익이 될 수 있다면 더 좋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다. 독립 운동을 하고 전쟁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지배와 정복의 세상이 아니라, 식민, 전쟁 등과 같은 폭력이 사라져, 국가를 위한 희생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아도 되는 지구촌 사회를 만드는 일, 그 궁극적 비전을 한시라도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눈앞의 희생자를 우선 돌보고, 국가를 위한 희생의 정신을 선양하되, 궁극적으로는 더 이상 희생이 나오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다각도로 만들어가는 일, 이러한 행위를 ‘선제적 보훈’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의 희생에 보답하는 ‘사후적 보훈’이 당면한 단기적 과제라면, ‘선제적 보훈’은 사후적 보훈을 포함하며 이루어야 할 장기적 과제이다. 기존 보훈이 국경 중심의 근대 민족국가 범주에 제한되는 경향이 있다면, ‘선제적 보훈’은 국경 중심의 민족국가의 범위를 넘어, 탈경계적 세계시민사회에 걸맞게 재규정하는 행위와 연결된다. 한반도의 경우는 통일과 평화 지향의 실천과도 연결된다. 사진 출처 - 구글  가령 6.25 전쟁에 참여했다가 희생당한 이들과 유족을 돌보는 일은 보훈의 핵심이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여기에 머물러서는 곤란하다는 뜻이다. 북한 보훈정책의 북한 사회적 의미를 연구하고, 그 의미를 적절히 반영하며 결국은 북한을 품는 더 큰 보훈의 개념과 정책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남한의 보훈이 북한에게도 유의미한 것이 될 수 있도록 보훈의 시각을 확대해야 한다. 이것이 선제적 보훈의 한 가지 길이기도 하다. 최종적으로는 적까지 품을 수 있는 보훈이어야 한다. 그런 가능성을 간과하면 보훈 정책이 그 희생을 낳은 적에 대한 증오로 이어지고, 그로 인한 다른 갈등을 야기하는 진원지가 될 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보훈의 의미와 범주를 선제적으로 확대해가야 한다.  이러한 선제적 보훈은 사후적 보훈을 포함하며 거기에 심층적 의미와 방향성을 알려준다. “사후적 보훈≤선제적 보훈”으로 그 범위를 규정할 수 있다. 그리고 ‘사후적 보훈과 같으면서도 언제나 더 큰 선제적 보훈’의 핵심은 한 마디로 ‘평화와 인권’이라고 할 수 있다. 보훈은 결국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일이고, 희생을 낳은 폭력이 없어질 때까지, 완전한 평화가 이루어질 때까지 계속되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보훈교육연구원에 재직 중입니다.
2020-10-07 | hrights | 조회: 272 | 추천: 11
임아연/ 인권연대 운영위원  의식주(衣食住).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물질적 조건이라고 학교에서 배운 것들이다. 과거 어렵던 시절에는 인생 자체가 의식주를 해결하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이 산업화를 거쳐 선진국가(?) 대열에 진입하면서 적어도 입고(衣) 먹는 것(食) 때문에 고통 받는 사람들은 크게 줄었다. (물론 여전히 존재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많은 옷 중에서 무엇을 입을까 고민하고, 오늘은 어떤 맛있는 음식을 먹을까 걱정한다. 모자라서 걱정이 아니라 너무 많아서 걱정인 것이다.  그러나 주(住)는 대한민국이 아직 해결 못한 생존조건이다. 물론 과거 초가집, 판잣집 자리에 고층 아파트가 즐비하게 들어섰다. 이미 2010년에 주택보급률이 100%를 넘어섰고, 자가 보유 비율도 60%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소득 대비 턱없이 높은 주거비용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고 있다. 지역 간의 현격한 주택가격 차이도 국가적 불안요소가 되고 있다. 가격이 떨어질 줄 모르는 서울 강남지역은 이상 과열 현상이 계속되고, 값이 저렴한 지방의 주택은 수요가 부족해 찬바람이 분다.  얼마 전 정부가 부동산 대책을 내놨지만 해당 정책이 한국사회 부동산 문제를 당장 해결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의 부동산 투기를 규제한다고 해도 비수도권 지방의 주택 공실 문제는 크게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수도권과 지방 간의 주택가격 양극화는 수도권 집중 정책이 가져온 부산물이다. 정치, 경제, 문화가 집중된 지역에 사람들이 몰리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 주택가격이 치솟는다. 다른 소비재와 달리 주택은 공급을 늘리거나 대체 수단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다. 자본주의 경제에서는 수요가 늘어나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꼽는다. 그러면 공급이 늘어나고 다시 수요증가로 이어지는 경제성장의 순환구조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택시장에서는 자본주의 경제원리가 잘 작동하지 않는다. 가장 큰 원인은 수요가 늘어나도 공급을 충분히 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수요가 늘어나는데 공급이 부족하면 자연 가격이 과도하게 오르기 마련이다. 땅 위에 지어야 하는 주택은 공급물량이 제한되어 있다. 식량이나 의복처럼 수요가 늘면 생산을 늘릴 수 있는 재화가 아니다. 땅이 모자라 고층으로 짓긴 하지만 그래도 어차피 올라갈 수 있는 높이는 제한되어 있다. 서울 강남의 아파트 수요가 많으니 모든 아파트를 초고층 아파트로 짓자고 하는 사람은 없다.  주택시장의 또 다른 특성은 상승한 주택가격이 다시 내려오기 힘들다는 점이다. 수요가 줄어들면 공급이 줄고 가격을 낮추어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시장경제의 원리다. 소비자들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휘발유 가격을 보면 산유국의 공급이 줄어들면 가격이 오르지만, 산유국이 생산량을 늘리거나 운전자의 수요가 줄어들면 가격이 다시 내려간다. 주기적으로 주부들의 원성을 사는 배추나 무, 고추와 같은 농산품도 작황이 나쁘면 가격이 오르지만, 풍작으로 출하량이 늘면 가격이 떨어진다. 사진 출처 - freepik  그러나 한 번 올라간 주택가격은 거의 내려가지 않는다. 주된 이유는 주택은 주거지인 동시에 투자수단이기 때문이다. ‘내 집 마련의 꿈’을 실현한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의 전 재산을 투자했다. 자기 집을 소유한 60%의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집값 하락은 투자손실을 의미한다. 이들은 싸게 집을 팔기보다는 집값이 오를 때까지 버틴다. 그리고 정치인들에게 집값 하락을 막으라고 요구한다. 최근 정부가 부동산 과열을 막기 위한 대책을 내놨어도 강남 지역의 부동산 가격이 크게 낮아질 가능성이 낮은 이유다.  현재 주택문제로 가장 크게 고통 받는 사람들은 대학교육이나 일자리 때문에 수도권에 거주해야 하는 청년세대다. 치솟는 대학가 원룸 가격에 좌절하는 대학생들과, 보금자리를 찾지 못해 결혼을 미루거나 포기하는 청년 직장인들이다. 정부도 이들의 주택 문제를 해결할 대책을 쉽사리 만들지 못하고 있다. ‘행복주택’ 정책처럼 새로운 주택을 공급하는 종래의 방식으로는 결코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당면한 주택문제는 주택공급 대신 사람의 이동으로 해결해야 한다. 수도권의 주택 빈곤층이 저렴한 지방의 주택에서 살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도권에 집중된 대학과 일자리를 지방으로 옮겨야 한다.  청년문화의 중심도 서울에서 지방으로 분산시켜야 한다. 말하기는 쉽지만 실현하기는 무척 어려운 대안이다. 수도권 집값 하락을 우려하는 사람들의 반대 때문이다. 그래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기 때문이다. 임아연 위원은 현재 당진시대 편집부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2020-09-23 | hrights | 조회: 211 | 추천: 2
이재성/ 인권연대 운영위원  의사들의 이기적이고 유아적인 집단행동을 보면서 울화가 치민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국사회가 쌓아 올린 학력주의라는 바벨탑의 꼭대기에서 자칭 ‘전교 1등’들이 벌인 광란의 질주는 병들어 있는 우리 사회의 자화상을 돌아보게 했다. 더 높이 올라가 더 많이 먹겠다는 저들의 탐욕이 아무런 수치심 없이 전국에 생방송 되는 현실이 나는 참을 수 없을 만큼 부끄러웠다.  의사들의 집단행동을 보면서 검사들을 떠올린 것도 비단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같은 ‘사짜’라서만이 아니다. 학력경쟁에서 승리했다는 이유로 부와 권력의 독식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오만함과 자신들이 이 나라의 시스템을 결정하는 주체인 것처럼 사고하는 비민주적 성향이 닮아 있었다. 우리 사회는 의사와 검사(판사) 등 이른바 ‘사짜’들의 부와 권력을 보장해 왔다. 최근의 의란(醫亂)과 검란(檢亂)은 정부가 그 공고한 기득권에 균열을 내려 하자 벌어진 도발이다. 나는 두 노블레스 집단의 이기주의로 대표되는 ‘부자들의 계급투쟁’이 우리 민주주의와 직결된 문제라고 생각한다. ‘내로남불’과 ‘진영논리’라는 방패  의대 정원 확대를 반대하는 의사들의 집단 진료거부가 밥그릇 싸움이라는 점은 대체로 쉬이 인정하지만, 윤석열 검찰의 검찰개혁 저지 투쟁이 밥그릇 싸움이었다는 데는 토를 다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의사들의 경제투쟁과 달리 검사들의 경제투쟁은 정치투쟁(권력감시)의 외피를 쓰고 은밀하게 벌어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검찰의 경제투쟁이란 수사권과 기소권을 양손에 쥐고 있어야만 여의봉처럼 효과가 극대화하는 전관예우 시스템의 영속화이며, 그것을 분리하려는 검찰개혁 시도를 분쇄하기 위한 투쟁이다. 의사들이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진료권을 버렸다면 검사들은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수사권을 남용했다.) 사안이 크든 작든 권력감시라는 명분이 있는 한 검찰은 일종의 ‘까방권’을 천부인권처럼 보유하게 된다. 예를 들어 검찰의 조국 일가 수사는 정치적 목적을 가진 무리한 수사였으며 사실상 실패한 수사였음이 드러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윤석열 검찰을 향한 비난이 크지 않은 이유가 여기 있다. 결국 개혁을 하려면 티끌 같은 잘못도 있어선 안 된다는 논리가 성립하게 됐다. 이렇게 되면, 누군가에게 과도하게 주어져 있던 부와 권력을 나누는 개혁은 백 년이 지나도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내로남불’과 ‘진영논리’라는 비판은 반개혁 수구세력이 휘두르는 전가의 보도이자 방패가 되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정치적 순수주의에 빠진 원리주의자들  문제는 진보 인사들 사이에서조차 인식의 차이가 크다는 점이다. ‘내로남불’과 ‘진영논리’에 대한 판단이 세상의 전부가 돼버린 진중권이나 서민 같은 사람은 이미 레테의 강을 건너가 버렸다. 최근엔 또 다른 차원의 균열이 보이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경제학자 정태인은 최근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다.  “검찰개혁? 중요하다. 그러나 불평등 위기보다 중요한가? 3년 넘게 종부세 안 올린 게 촛불 정부인가? 언론 개혁? 중요하다. 조중동은 악성 바이러스, 맞다. 그러나 기후위기보다 중요한가? 3년 넘게 4대강 보도 그냥 두는 게 촛불 정부인가?”  불평등과 기후위기가 검찰개혁이나 언론개혁보다 더 중요한, 상위의 과제라는 데는 나도 동의한다. (사실 이 정부는 언론개혁을 말한 적이 없고, 생각도 없다!) 하지만 차원이 전혀 다른 주제를 견주는 방식의 비판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정부는 불평등이나 기후위기 문제에 대해 장기적인 관점으로 국민을 설득하고 정책대안을 제시해야 할 의무가 있다. 문재인 정부가 이에 대해 유능하지 않다는 정태인의 주장에는 나도 동의한다. (실은 유무능을 따지기 전에 쁘띠부르주아 정당으로서 민주당의 계급적 한계를 지적하는 게 더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주제와 직접 관련이 없으므로 생략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검찰개혁 필요성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검찰개혁은 2016~2017년 촛불항쟁 과정에서 차기 정부 개혁과제 1순위로 꼽혔던 사안이다. 그만큼 우리 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했던 실체적 위험이었다. 더구나 수구세력은 검찰개혁 저지를 위해 총력을 집중하고 있다. ‘조국 사태’에 이은 최근의 추미애 장관 흔들기는 그 일환이다. 그런데도 이른바 피디 성향의 평등파들 사이에서 정태인류의 인식이 자랑스레 전시되는 현상은 자못 우려스럽다. 나는 그들이 검찰이란 집단의 파괴력과 상징성을 무시하고 있거나 애써 외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좀 심하게 말하면, 정치적 순수주의에 빠져 환상을 좇는 원리주의자들의 옹알이에 불과하다고 평가한다. 수구세력의 사법적 날개가 된 검찰  수구세력이 검찰개혁 저지에 총력을 기울이는 이유는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검찰이 수구세력의 주요 진지이자 요새이기 때문이다. 군대를 동원한 쿠데타가 거의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공권력 가운데 가장 강력한 물리력(수사권, 영장청구권, 기소권, 형집행권)을 독점하는 검찰을 수구세력은 정치적 반대파를 제거하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으로 활용해 왔고, 그 과정에서 둘 간의 정치적 연대가 형성됐다. 여기에 물적 토대를 제공하는 재벌권력이 가세하면서 수구세력의 트라이앵글이 완성됐다. 요컨대, 반검찰개혁 전선은 수구세력 계급투쟁의 최전선이다.  검찰에 있을 때 정의의 사도처럼 행세하던 최재경 같은 이들이 자연스레 재벌의 앞잡이가 되는 상황은 검찰이 수구세력의 사법적 날개가 된 현실을 웅변한다. 비단 최재경만이 아니다. 황교안 같은 공안통들은 권위주의 정권에 복무하면서 정치적으로 활로를 찾았지만, 이종왕 같은 특수통들은 퇴직 후 재벌의 손발이 되어 돈을 버는 쪽을 택했다.  평소 검찰 독립을 목 놓아 부르짖는 열혈 검찰주의자들 가운데 퇴직 후 재벌의 앞잡이가 된 선배 검사를 비판하는 경우를 나는 본 적이 없다. 검찰에 있을 때는 권력을, 퇴직하고서는 부를 누리는 것이 자신들의 당연한 출세 코스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첫 단추는 잘못 꿰었지만 이제라도  검찰개혁을 포함한 사법개혁의 최종 목표는 ‘돈으로 법을 사는 구조’를 바꾸는 것이다. 시민이 기소에 참여하는 기소대배심, 재판에 참여하는 배심재판의 전면 도입을 통해 검사와 판사들의 재량을 줄이고 민주적으로 통제하는 것이다. 핵심 고리는 이름도 아름다운 ‘전관예우’를 혁파하는 것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검찰을 길들여 자신의 칼로 사용하는 쪽을 택했고, 그 칼에 제 손을 베었다. 이른바 추미애 라인으로 검찰을 장악한 것은 당장 불가피한 선택이었겠으나, 하책 중의 하책이다. 나는 이성윤 서울중앙지검장이 의로운 검사라서 추미애 장관과 문재인 정부 편에 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공수처가 설립되더라도 정권이 바뀌면 제2의 대검 중수부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나는 반복적으로 경고해 왔다. 과연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은 수사와 기소 분리를 포함한 2단계 검찰개혁을 수행할 수 있을까. 문재인의 검찰 개혁이 여기서 멈춘다면, 노무현의 만시지탄은 반복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조선일보가 돌리는 사탄의 맷돌  다시 서론으로 돌아가 보자. 의사들의 집단행동은 대체 누가 저들을 이토록 뻔뻔한 공감력 제로의 괴물로 만들었는가라는 질문을 우리 사회에 던졌다. 때마침 전교조가 받아든 대법원의 파기 환송 판결은 이 땅에도 한때 참교육을 향한 열망이 있었으며, 경쟁 일변도의 숨 막히는 승자독식이 아닌 다양성과 협동의 중요성을 가르쳤던 선생님들이 있었음을 상기하게 했다. 너무나 오랜 고통 끝에 뒤늦게 찾아온 정의 앞에 전교조 선생님들은 기쁨보다 망연자실한 감정이 더 크지 않았을까, 나는 홀로 안타까웠다. 그리고 전교조를 빨간색으로 색칠하고 악마화하는데 앞장섰던 <조선일보>를 떠올렸다. 그 시각에도 조선일보는 의사들의 집단행동을 옹호하고 정부를 규탄하느라 시커먼 지면을 궤변과 거짓으로 채우고 있었다. 노동자들의 파업을 맹비난하던 입으로 의사들의 파업을 지지하는, 그 일관된 비일관성만은 인정해주어야 하는 것일까.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전교조와 386세대는 조선일보와의 싸움에서 졌다. 패배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 기득권의 일부가 되었고, 2030세대는 386보다 더 철저하게 성과주의에 빠져있다. 학력주의가 지배하는 이성의 폐허에서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조선일보가 돌리는 사탄의 맷돌을 멈출 수 있을까. 만약 그럴 수 있는 방안이 있다면, 나는 진영논리라는 비난을 감수하고서라도, 기꺼이 그 편에 서겠다.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20-09-16 | hrights | 조회: 3477 | 추천: 86
임아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엄마, 연계형 가고 싶은데.”  9월이 되었지만 초등학교 2학년이 된 첫째 아이가 학교에 간 횟수는 열 손가락을 넘지 않는다. 학교 수업은 가정에서 하는 원격수업으로 대체됐고 친구들과의 교류는 요원하다. 모든 아이들이 집에 갇혀 있어 ‘코로나 세대’라는 말도 나왔다. 아이는 자주 말한다. ‘연계형 돌봄 교실’에 가고 싶다고.  지난 7~8월 맞벌이인 우리 부부는 아이들을 집에 둘 수 없었다. 첫째는 돌봄 교실에, 둘째는 어린이집 긴급보육 시스템에 의지했다. 8월부터 수도권에 코로나 재확산세가 심상치 않아지자 기관에서 코로나가 확산되면 어떡하나 걱정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둘 다 회사를 가야하니 방법이 없었을 뿐이다. 아이는 아이대로 학교에 가고 싶어했다. ‘연계형’ 돌봄교실에 가면 같이 ‘블레이드(팽이)’를 접어 돌릴 수 있는 친구가 있기 때문이다. ‘연계형’에 가고 싶다는 아이에게 차마 학교에 가면 안 된다고 할 수도 없었다. 아이는 ‘친구들과의 놀이’를 그리워했으니까.  지난 7월 일주일에 하루씩 학교에 갔을 때 아이에게 물었었다. “오늘 친구들하고는 잘 지냈어?” 아이는 손사래 쳤다. “엄마, 친구들하고 말하면 안돼. 선생님이 코로나 위험하다고 쉬는 시간에 노는 것도 조심하라 하셨어.” 급식을 먹을 때도 말할 수 없는 학교. 그러나 돌아보면 그조차도 ‘교류’였다. 어느 주말 외삼촌이 놀러오기로 했다가 정부종합청사에 확진자가 나오면서 약속을 취소했다. 정부청사에는 내가 담당하는 금융위원회 기자실이 있었고 확진자와 동선이 겹치지 않았지만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 생각은 하지 못했다. 아이는 기다렸던 외삼촌과의 만남이 취소됐다는 소식에 소리 내어 울었다. “코로나 때문에, 코로나 때문에...”라고 말하며. 약간 격하게 우는 아이를 보며 아이들의 ‘상심’은 어른들의 답답함과 차원이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다시 4주간 집에 갇혀 있는 ‘코로나 세대’를 키우며 작은 아이들의 배움에 대해 생각한다. 친구들과의 교류를 통해 사회를 배워갈 나이에 ‘만남’이 단절된 아이들 세대의 배움에 대해서. 그런 와중에 일부 과학고에서는 계속 수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는 한 국회의원의 문제제기를 들었다. 교사 1인당 학생 수가 적어 밀집된 환경이 아니기에 가능했다는 설명이었다. 전 세계를 뒤덮은 코로나 팬데믹은 아이들의 배움 앞에서도 평등하지 않다.  코로나 확산 이후 1년 정도가 지나면 아이들의 ‘학습 격차’가 통계로도 증명되기 시작할 것이다. 맞벌이 부부지만 퇴근 후에 매일 아이 학습 진도를 체크하고 아이가 다 하지 못한 숙제를 도와줄 수 있는 우리 집은 그나마 낫다. 생계 걱정 때문에 돌봄을 신경 쓸 수 없는 한부모 가정이라면, 젊은 부부들만큼 아이들 학습을 도와줄 수 없는 조부모 가정이라면 어떨까. 두 아이를 낳고 돌봄의 위기를 여러 번 넘었다. 그러면서 가장 크게 배운 것은 한 존재를 온전히 돌본다는 것은 부모의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이를 마을에서 키워야 한다는 말은 그래서 지금도 유효하다. 그런데 코로나로 드러난 우리의 돌봄·교육 환경은 어떤가. 어떤 부모에게서 태어났느냐와 상관없이 아이들을 잘 돌볼 수 있는 사회인가. 사진 출처 - 경향신문  코로나 초기에도 학원들은 문을 열었다. 미취학 아이들이 다니는 동네 대형 영어학원이 문을 열었다는 소식에 전화해 항의했다. “바이러스 확산 위험 때문에 학교가 닫았는데 학원에서 밀집된 환경으로 지역사회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하시나요.” 영세한 학원도 아니고 답답했다. 학원 선생님은 대답했다. “열어달라는 학부모님들의 요청이 많아서요.” 바이러스가 퍼질까 걱정하는 상황에서도 누군가들은 열심히 사교육을 받았다. 왜 그렇게 어린 아이들이 영어 사교육을 받아야 하느냐는 질문까지 갈 필요도 없다. 이제 교육은 계층 이동의 사다리 역할이 아니라 불평등을 자녀에게 대물림하는 도구가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역설적으로 ‘물리적 공간인 학교’가 사라져버린 지금 우리는 코로나 이전부터 있었던 교육의 불평등을 더욱 실감하고 있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배경에 따라 코로나 학습 격차는 더욱 심해지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까. 임아영 위원은 현재 경향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span></p> <p style="text-align: center;"><a href="http://hrights.or.kr/support/" target="_blank" rel="noopener noreferrer"><img src="/rew/wp-content/uploads/kboard_attached/10/202009/5f6af8451caab9874146.jpg" alt="" /></a></p>
2020-09-09 | hrights | 조회: 345 | 추천: 11
최낙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일말의 근거도 없이 어떤 ‘썰’을 그냥 사실로 받아들일 때가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 그 일을 돌이켜보면 단지 어처구니가 없을 뿐입니다. 왜 그랬는지, 어째서 그랬는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되어 가는가 하는 과정에 대해서는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0여 년 전쯤, 서울에서 기차로 한 시간 남짓한 거리의 농촌 마을에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위세 좋은 신도시의 노른자위가 되었지만, 당시 그곳은 리(里) 단위의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그 마을에는 제 또래의 청년(?)들이 대여섯 명 정도가 살고 있었습니다. 글을 써보겠다는 사람, 무슨 고시 혹은 공무원 공부를 한다는 사람, 명리학을 깨우쳐보겠다는 사람 등등 출신도 배경도 다른 이들이 어쩌다 보니 친구처럼 지내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공통점이라고는 마을 토박이가 아닌 소위 외지인들이었다는 것, 단지 월세가 싸다는 이유만으로 이곳에 살게 되었다는 것 정도였습니다. 그런데도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의 관계는 점점 더 끈끈하게 발전해갔습니다.  저녁 무렵 가끔 모여 회식처럼 시작되었던 술자리는 몇 달 후, 벌건 대낮의 술판이 되어갔습니다. 그리고 술자리만큼 사이가 가까워지면서 형, 동생 하면서 편하게 말을 놓기 시작했습니다. 수줍은 성격에 말수가 적었던 A는 어느새 좌중을 압도하는 개그맨이 되어갔으며 날품을 팔았지만 알뜰하게 살림을 하던 B는 일을 나가는 날이 손에 꼽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무위도식하며 동지애(?)를 다지면서 결국 우리는, 나름 성실하게 살았던 B의 집에 모여 살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열심히 일하지 않았으니 각자의 월세를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더 쉽게 아무 때나 술판을 벌일 수 있는 비슷한 처지의 화상들끼리 모여 살고 있어 아무 생각이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함께 살던 어느 여름날 밤이었습니다. 언제나처럼 별 시덥지 않은 ‘썰’들이 난무하는 중에 누가 어디에서 들었는지 사뭇 진지하게 말을 했습니다. 나만 알고 있던 비밀을 이제야 공개한다는 듯 한 어조였습니다.  “청개구리가 남자의 ‘정력’에 그렇게 좋대!”  도대체 여자 친구는커녕 짝사랑하는 상대조차 한 명도 없는 우리에게 왜 그 말이 그렇게 중요한 정보인지 아무도 어떤 생각도 없었지만, 우리는 놀라운 사실을 드디어 알았다는 듯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습니다. 모여 사는 집 밖 화장실 근처에는 제법 굵은 대추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청개구리들로 가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뭇잎 하나에 청개구리 한 마리가 붙어 있을 정도였습니다.  아침에 화장실을 오가며 보았던 그 청개구리들에게 그런 비밀이 있었다니! 그때부터 청개구리가 왜 남자의 정력에 좋은가에 대한 격도 어이도 없는 토론이 시작되었습니다.  청개구리가 아침이슬만 먹는 것은 우주의 정기를 먹는 것이다, 저렇게 영롱한 빛깔이 나는 생명체를 본 적이 없다, 대추나무가 원래 귀신을 쫓는 나무인데 거기에 모여 사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등등. 의심 없는 결론이 이미 정해져 있으니 청개구리가 특별한 보양식인 근거는 수백 가지가 넘을 정도였습니다.  다음 날 아침부터 우리는 대추나무에서 대추를 따 먹듯이 청개구리를 한 마리씩 떼어 먹기 시작했습니다. 비위가 좋은 친구는 처음부터 날것으로 먹기 시작했고 그렇지 않은 친구는 프라이팬에 튀겨 먹었습니다. 며칠 후, 날것이 더 좋다는 누군가의 말이 설득력을 갖게 되면서 우리는 모두 매일 아침 청개구리를 날것으로 먹게 되었습니다. 왠지 몸이 가뿐해지는 것 같았고 머리도 똑똑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의 동지애는 더욱더 끈끈해져 갔습니다.  “완전히 고급 회 맛이야.”  “이제는 밥 생각이 안 난다.”  아침마다 우리는 청개구리의 효능에 대해 서로에게 자랑하고 뿌듯해했습니다. 한 열흘 정도 그렇게 지났을 때였던 것 같습니다. 한 친구가 일을 보러 서울에 다녀온 저녁이었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무언가 큰일이 났다고 써 있었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사실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큰일 났다! 청개구리 몸속에 무서운 기생충이 있대!”  서울에서 만난 사람에게서 들었는데 확실하다는, 웬만큼 익혀서는 죽지도 않는, 그 기생충이 심장에 파고 들어가 갑자기 죽을 수도 있다는, 수술도 불가능할 거라는 이야기들이 이어졌습니다. 그야말로 난리가 났습니다. 이번에도 격의 없고 어이없는 토론이 시작되었습니다. 처음 청개구리가 몸에 좋다고 말했던 게 누구였던가, 그 기생충이 어떻게 생겼냐, 지금 그게 중요하냐, 화장실 근처가 문제였나, 생각해보니 맛이 조금 이상했다, 말해준 이가 믿을 만한 사람이다, 어떻게 아는 사람이냐, 약국에 가서 물어보자, 약사가 뭘 아냐 등등.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갑론을박하는 사이 한 친구가 말했습니다.  “내 친구 중에 한의사 있어!”  다음날, 한의사 친구를 둔 동지가 기차를 타고 부랴부랴 서울에 다녀왔습니다. 동지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뭐래?”  “몸에 좋을 것도 없고, 그런 기생충이 있는 것도 아닌데...”  “아닌데?”  “근데, 그걸 왜 먹냐고...”  한동안 모두들 말이 없었습니다. 청개구리가 몸에 좋다고 했을 때, 몸에 좋은 이유들을 수백 가지 만들어낼 수 있었으며 반대로 청개구리가 위험하다고 했을 때 역시 많은 이유와 추측들이 난무했지만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무엇 때문에? 그날 이후 지금까지, 저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때 그런 일이 왜 벌어졌는지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그때 그 마을에 나를 비롯해 바보천치들 댓 명이 있었다’라고 하면 말이 될까요?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코로나-19와 태풍 관련된 것 외에 다른 정보를 보지 않으려고 애써도 황당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에 관한 뉴스를 보게 됩니다. 오래전 화장실 옆에 대추나무가 한 그루 있었고 거기엔 청개구리들이 가득했습니다. ‘썰’들이 난무하고 바보천치들도 있겠지요. 최낙영 위원은 현재 도서출판 '밭' 주간으로 재직 중입니다.
2020-09-03 | hrights | 조회: 169 | 추천: 7
오인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미국역사학회 회장을 역임한 린 헌트(Lynn Huntrer) UCLA 교수는 역사에 대해 거짓말을 늘어놓은 자들의 대표적 사례로서 홀로코스트 부정(否定)을 예시한다. 그녀의 주장에 의하면, 유럽의 극우 성향의 정치인들과 일부 문인들은 찰나의 유명세를 얻기 위해 나치 독일이 1933년에서 1945년 사이에 약 600만 명의 유대인을 계획적으로 학살한 역사적 사실을 부정한다. 부정의 양태도 다양하다. 희생자의 수가 600만에 훨씬 못 미친다거나 히틀러와 나치가 대량학살에 대한 공식적인 계획을 세운 적이 없다는 주장에서부터 가스실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형태의 부정이 제기되었다.  거짓을 주장하는 자들은 살상에 가담한 사람들의 신상과 규모, 가해자들이 동원했던 수단과 방법을 참혹할 정도로 자세히 밝혀낸 역사적 사실을 부인한다. 희생자에 대한 목격자의 진술, 강제수용소를 탈출한 사람들의 증언도 타당하지 않다고 잡아뗀다. 홀로코스트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를 놓고 역사학자들이 이견을 보일 수도 있고, 실제로 이견이 존재하기도 한다. 그러나 진지한 역사학자나 독자라면 살상이 계획적이고 대규모로 자행되었다는 ‘사실’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지는 않는다.  거짓 주장이 제기될 때마다 수많은 기록에 근거한 반박이 제기되고 독일 정부와 민간에서도 과거의 악행을 인정하는 모범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홀로코스트 부정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유럽 전역과 세계 다른 지역까지 퍼져 나가고 있다. 린 헌트의 주장에 의하면, 홀로코스트를 얼마나 엉터리로 부인하든, 근거가 부실하든 상관없이, 거짓주장의 효과는 분명하게 발생한다. 2013년 말부터 2014년 초에 국제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중동과 북아프리카에 거주하는 응답자 가운데 홀로코스트 관련 역사 서술이 정확하다고 생각한다는 비율은 5분의 1에 불과했다.  거짓말로 세계의 주목을 받은 유명한 사례를 말하면서 이 분의 일화를 빼놓기는 어렵다. 2012년 시점에서 부동산 개발업자였던 도널드 트럼프는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에 대한 의혹을 제기했다. 트럼프는 오바마가 미국에서 출생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불법적으로 대통령에 선출되었다고 넌지시 말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하와이 출생 사실을 입증하는 출생증명서를 제시하자 이번에는 증명서가 위조됐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놀랍게도(!) 출생증명서를 위조문서라고 간주할 만한 증거가 전혀 없었는데도 위조 운운했다. 그랬던 트럼프가 2016년 대선 기간 중에는 자신의 입장을 철회하고 오바마의 미국 출생 사실을 인정했다. 그는 자신이 허위주장을 조장했음을 시인하면서 역시 놀랍게도 자신이 분란을 매듭짓는 공을 세웠다고 떠벌렸다. (이상의 내용은 린 헌트, <무엇이 역사인가>(박홍경 옮김, 프롬북스)의 1부에서 따온 것임을 밝힙니다.)  거짓말과 관련된 트럼프 대통령의 일화는 이뿐만이 아니다. 트럼프 정부는 ‘대안적 사실’이라는 말까지 만들어내서 억지 주장을 가리려고 했다. 2017년, 온라인상에서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에 온 사람들의 수가 전임 오바마 대통령 취임식 때 참가한 사람들의 수보다 적었다며 ‘인기 없는 대통령’이라는 비아냥이 퍼져나갔다. 그러자 백악관 대변인은 “우리 데이터로 따져 봤을 때” 단지 오바마 취임식 당시보다 더 많은 사람이 온 것이 아니라 사상 최대의 인파가 운집했다는 브리핑을 했다. 하지만 이런 뻔뻔한 허세는 두 취임식을 찍은 항공사진 비교나 지하철 이용객 비교와 같은 객관적이고 명확한 증거를 통해 반박되면서 트럼프 정부에 대한 비판은 더 거세졌다. ‘대안적 사실’이라는 신조어는 이런 와중에 나왔다. 백악관 선임고문이었던 캘리언 콘웨이는 NBC의 <밋 더 프레스>와의 인터뷰에서 백악관 대변인 발언을 옹호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s)을 제시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니까, ‘대안적 사실’은 객관적이고 명백한 사실을 눙치고 자신들의 편향적 생각을 사실이라고 강변하는 억지 주장, 즉 거짓말인 셈이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러시아의 푸틴 정부도 트럼프 정부 못지않게 자기들이 믿고 싶은 ‘대안적 사실’을 강변하는 데 능숙하다. 일례로 2014년 2월 말, 군 계급장을 달지 않은 러시아 특수부대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크림반도의 핵심 시설을 점령했다. 하지만 러시아 정부는 물론이고 푸틴 대통령까지 직접 나서서 그들이 러시아군이라는 사실을 반복해서 부인했다. 그들은 자발적인 ‘자위 집단’이며 심지어 현지 상점에서 러시아제로 보이는 군사 장비를 구입했을 거라고 주장했다. 푸틴과 그의 측근들조차 자신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음에도, 러시아 민족주의자들은 신성한 러시아 민족의 보존이라는 정당한 대의를 위한 살인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까지 주장했다. 그들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별개의 민족이라는 주장이야말로 푸틴이 러시아 민족의 재통합이라는 신성한 사명을 수행한다면서 했던 그 어떤 발언보다도 훨씬 악질적인 거짓말이라고 비난했다.  명백한 사실을 모호하게 만들고, 자신들의 편향된 생각을 사실인 양 꾸며서 여론을 호도하려는 ‘대안적 사실’이 천지 사방에 넘쳐난다. ‘지금 여기’에도 그렇다. 목사라는 전광훈씨는 집회에 나오면 걸린 병도 낫는다고 혹세무민하면서 사랑제일교회와 광화문 집회를 통해 결과적으로 온 국민에게 바이러스 테러를 가했다. 국민의 생명과 생계에 심각한 위협을 안겨주고도 자기 교회가 바이러스를 퍼붓는 테러를 당했다는 궤변을 늘어놓는다. 코로나는 신앙의 문제도 아니고, 좌우 이념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방역=과학의 문제이며 절대 가치인 생명과 직결된 문제다. 그럼에도 정쟁의 대상으로 악용하려는 일부 간악한 무리가 ‘코로나 정치’라는 대안적 사실을 퍼뜨리고 있다. 그런 대안적 사실은 없다. 거짓에도 힘이 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순 없지만, 실재하지도 않는 대안적 사실은 사악한 거짓일 뿐이다. 이건 사실이다. 오인영 위원은 현재 고려대 역사연구소에 재직 중입니다.
2020-08-26 | hrights | 조회: 267 | 추천: 5
이지상/ 인권연대 운영위원  날아갔다 허망하게. 몇 번의 긴 통화와 회의를 빙자한 몇 번의 술자리를 거친 후 겨우 확정했던 이번 주말 공연. 근 두 달여에 걸친 기대감이란 끈질긴 생명력은 채 1분도 되지 않는 전화 한 통으로 소멸됐다. “코로나가 이렇게 난리인데 이번 공연을 어떻게 할까요?”를 묻는 그에게 “예정대로 진행합시다”라고 배짱 좋게 호기부릴 놈이 대한민국에 얼마나 되겠는가 말이다. 익숙하지는 않지만 섭섭하지도 않다. 올해 2월부터는 자주 겪어왔던 일이다.  지난 5월 18일에 음반을 출시했다. 5년만 이었다. 뭐라도 하나 꼼지락거려야 겨우 한 장 판다. 보도 자료를 쓰고 언론사에 보내는 일도 수월하지는 않았다. 자기가 만든 물건 자기가 좋다고 우겨대는 모양새가 맘 편할 리는 없다. 겨우 자료를 디밀며 들이댔던 결과가 기사로 나올 때마다 순탄치 않은 성취감에 안도하기도 했다. 공연을 해야 했다. 이제 공연만 하면 목돈으로 빠져나간 음반 제작비를 푼돈으로라도 확보할 수 있다. 그러나 코로나. “아~ 이놈의 코로나”  전파하라는 복음(福音)은 처박아두고 코로나만 옮기고 다닌다는 어느 분의 이야기에 깊은 공감의 웃음을 날리다가 어떨 땐 부아가 치밀기도 하는 것이다. 빛이니 소금이니 진리니 떠드는 자들의 침 튀기는 언사가 요사스러운 망령처럼 떠돌아 누구에게 얼마만큼 빙의(憑依)되었을지를 추산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니 내 속이 속이 아닌 것이다.  코로나19의 전국적 확산에 지대한 공로가 있는 대구의 신천지가 그랬다. 그들은 무언가를 아주 열심히 신앙하는 사람들이었다. 모두들 열심이었다. 학교는 학생과 선생의 대면 관계를 끊었고 식당은 오지 않는 손님을 기다리며 무너져 내리는 속내를 힘겨운 은행 대출로 채웠다. 정부는 K-방역을 전 세계에 각인시킬 만큼의 능력을 보여줬고 의료진은 짓무르는 땀띠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얻어가는 일상의 평화를 다시 역병(疫病)의 진창으로 인도(引導)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빛과 진리의 세상을 보여준다는 자부심이 넘치는 사람들이다. 그런 이들이 뭇 중생들을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 중에도 순전한 복음이라든가 기쁨이나 우리가 제일이라든가 성인(聖人) 바오로가 이방의 선교사역 중심지로 두었던 지명이라던가 하는 비슷한 이름을 쓰는 교회들이 끊임없이 그들만의 복음(?)을 전파해내는데 그중에 역시 제일은 사랑이라. “하나님 나한테 까불면 죽어”라고 일갈할 만큼 사랑엔 자신 있다는 어느 믿음 충만한 선지자 덕에 비대면 강의에 행사취소문자를 수시로 받고 아이의 학원비까지 걱정해야 하는 나는 ‘염병 할 놈’에 졸지에 ‘베라 먹을 놈-벼락 맞을 놈-’ 까지 된 것이다. 아니 벼락을 맞은 것이다. 하늘을 절대적으로 신앙한다는 그들을 향해 하늘이 무섭지 않은가를 울부짖었던 역사가 낯설지 않으니 이쯤 되면 ‘전파하라는 복음(福音)은 처박아두고 코로나만 옮기고 다닌다’ 는 조소에 덧붙여 과연 그들의 복음은 코로나보다 더 나은 것이었을까를 질문하고 싶은 것이다. 보수단체들의 8·15 광화문 집회 모습 사진 출처 - 연합뉴스  “나오시오 나와요! 기독교인들이여, 하느님의 일을 거부하는 개 같은 적들을 물리치시오. 저 폭군이 내 성스러운 율법의 책을 땅에 던졌소. 그걸 보지 못하였소? 제아무리 들판에 인디언들이 가득한들 저 자만심 가득한 개에게 까지 굳이 공손하고 비굴하게 굴 필요가 있겠소? 내가 죄를 사하나니 어서 와서 저자를 치시오” - 총.균.쇠/ 제레드 다이아몬드 중에서 P98-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 국왕으로부터 받은 하늘의 명령을 외쳤던 수사(修士) 비센테 데 발베르데는 수천 년 역사에 빛나는 화려한 잉카제국의 마지막 황제 아타우알파를 살해한 피의 도살자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수하였다. 1532년 11월 16일이었고 그날 잉카의 중심 페루의 카르마르카에서 피사로의 군대는 고작 168명이었으며 그들의 간계에 목숨을 잃은 순박한 잉카의 후예들은 8만 명이 넘었다. 같은 하늘의 사명을 받았던 아즈텍 문명의 파괴자 에르난 코르테즈의 학살까지 포함하면 그들 하늘의 군대에 의해 몰살당한 원주민은 남아메리카 인구의 95%에 해당하는 1억여명 가량이다.  ‘스페인 사람들-로마 카톨릭 제국의 무적 황제이기도 하신 우리 국왕 전하의 신하들-의 신중함, 강인함, 군기(軍紀). 근면성. 위험을 무릅쓰는 항해. 그리고 전투력 등은 기독교들에게 기쁨이요 이교도들에게는 공포가 될 것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또한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고 가톨릭 황제 폐하께 미력이나마 도움을 드리기 위해 소신은 이 이야기를 기록하여 폐하께 바침으로써...’ - 위의 책 P95-  잉카의 황제 아타우알파를 속임수로 인질로 잡고 결국 처형했으며 잉카문명을 소멸시켰던 이 기록은 스페인 국왕에게 자신들의 충성심을 보고했던 에르난도 피사로와 페드로 피사로-프란시시코 피사로를 포함한 3형제-를 포함한 6인의 증언으로 자랑스런 식민지 개척자의 역사가 되어있다.  “그들은 우리에게 성경을 쥐어 주었다. 그 대신 그들은 우리의 땅을 가져갔다”는 데스몬드 투투(Desmond Mpilo Tutu) 주교의 얘기는 기독교로 포장한 서구 식민지 세력의 아프리카 침탈사를 한목에 보여준다.  “그대들은 어떻게 해서 저 하늘이나 대지의 온기를 사고 팔 수 있는가? 대기의 신선함과 반짝이는 물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것들을 팔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에게는 대지의 모든 부분이 신성한 것이다. 빛나는 솔잎, 모래 기슭, 어두운 숲속 안개, 맑게 노래하는 온갖 벌레들, 이 모두가 우리의 기억과 경험 속에서 신성한 것이다. 나무속에 흐르는 수액은 우리 홍인(紅人)의 기억을 실어 나른다. 백인은 죽어서 별들 사이를 거닐 적에 그들이 태어난 곳을 망각해 버리지만, 우리는 죽어서도 이 아름다운 대지를 결코 잊지 못한다”  푸른 별과 생동하는 들짐승들을 이웃으로 모셨던 아메리카 대륙의 마지막 인디언 시애틀(seattle) 추장의 연설은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의 한을 대변한다. 원주민들에게 땅을 강요했던 당시 미국의 14대 대통령은 프랭클린 피어스였고 그 역시 영국에서 도피한 청교도의 후예였다.  굳이 외국의 사례를 들것도 없다.  “그때 공산당이 많아서 지방도 혼란하지 않았갔시오. 그때 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되어 조직을 했시오.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 사건을 평정하기도 하고 그랬시오. 그러니까니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미움도 많이 사게 됐지요.” - 윤정란, <한국 전쟁과 기독교>, 한울, 2015-  북한의 체제 특히 토지개혁에 불만을 품은 기독교인들이 해방 후 1953년까지 약 7만-10만 가깝게 남쪽으로 내려왔고 장로교와 감리교의 교권을 장악하며 개신교의 여론을 주도했다. 그들 중 대부분이 극단적 반공주의자가 되었다. 한국 예수교 장로회의 큰 어른으로 추앙받는 고 한경직 목사의 증언은 1948년도부터 벌어진 한반도 남녘의 민간인 학살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섬뜩해진다. - 이지상, <여행자를 위한 에세이 北> 삼인, 2019-  해방 후 1%에 해당했던 기독교인의 인구는 현재 20%를 상회한다. 인구 증가율까지를 포함하면 해방 후 적어도 30배 이상의 비약적 발전을 한 셈이다. 성장의 근저(根底)에 있는 반공과 독재 시절에 누린 흔적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하여 한국 사회가 친일, 반공과 더불어 기독교의 사회라고 진단하는 어느 사회학자의 규정을 빌리지 않더라도 작금의 상황에서 이들이 전하는 복음이 코로나 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유효하다. 이들이 전하는 복음은 얼핏 보더라도 국가보안법의 독소조항 폐지는 물론 비리사학 근절을 위한 사학법 폐지 반대에 성도들을 거리로 나오게 했고 목숨 바쳐 탈출한 이방인들을 타종교라는 이유로 혐오하는가 하면 최근의 차별 금지법 반대에도 열을 올리는 등 모든 이들의 살림을 위해 스스로 죽어간 청년 예수의 삶과는 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  사랑이 제일이라는 교회 관련 코로나 확진자가 450명을 훌쩍 넘었다. 지난 2월 대구 신천지 교회의 31번 환자 발생 이후 한국 교회는 신천지를 비판하는데 집중했었고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른 사안은 접어두고라도 코로나 전파로 인한 한국사회의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는 일부 교회에 대한 비판은 교계 내에서 더 많이 이루어져야 한다. 한국 기독교를 대표한다는 연합회의 전 총회장님이셨던 그 목사님에 대한 회개 요구도 빗발쳐야 한다. 세상의 상처받은 자들을 위로해야할 교회를 오히려 뭇 대중들의 비아냥의 대상으로 만든 죄, 교회 모독죄, 기독교인 모멸죄를 물어야 한다.  대인춘풍 대기추상(待人春風 待己秋霜)이라 했다. 타인을 대할 때는 봄바람 같이 자신을 대할 때는 가을 서릿발같이 하라는 공자님의 말씀이다. 한낮 동양 고전으로 치부하는 어록도 이럴진대 우주 만물의 근원, 하늘을 신앙하는 사람들이 못할 이유가 없다. 성서가 논어보다 못하다면 이 또한 교회 모독 아닌가. 이지상 위원은 현재 가수겸 작곡가로 활동 중입니다.
2020-08-19 | hrights | 조회: 350 | 추천: 11
강국진/ 인권연대 운영위원  어디에 돈을 쓰는지 알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옷을 예로 들어보자. 한 지인은 이제껏 제 돈으로 옷 비슷한 거라고는 양말 한 켤레 사 본적이 없다. 이 사람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외모를 꾸미는데 별반 관심이 없기 때문에 옷을 사는데 돈을 쓰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옆에서 챙겨주는 사람이 없으면 패션은 고사하고 단정하게 입고 다니기도 쉽지 않은, '손이 많이 가는' 부류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다른 지인은 주말에 처자식을 집에 남겨놓고 혼자서 차를 몰고 대형할인매장에 가서 자신이 입을 옷을 직접 쇼핑한다. 그는 아내가 자기 옷차림에 이러니 저러니 간섭하는 것도 싫어할 정도로 패션에 관한 확고한 소신이 있는 부류다.  옷뿐만이 아니다. 책이나 그림, 도자기, 하다못해 건담 프라모델에 이르기까지 각자 자신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에는 주저 없이 돈을 낸다. 캠핑에서 인생의 행복을 찾는 사람이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몇백 만원짜리 캠핑 장비를 살 수도 있다. 야구 좋아하는 사람에겐 축구화가, 축구 좋아하는 사람에겐 글러브가 아무 짝에 쓸모없는 낭비로 비칠 수도 있다. 물론 마권 사는데 월급을 쓸어담는다거나, 주말만 되면 강원랜드로 달려가 아침 해가 뜰 때까지 눈이 벌개지는 사람들 역시 최소한 자신들이 생각하는 우선순위를 확고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선 차이가 없다.  개개인이 돈쓰는 문제를 계모임이나 회사로 확장시켜도 크게 다르지 않은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수익 대부분을 연구개발투자에 지출하는 회사와 주주배당에 지출하는 회사는 각자가 생각하는 기업경영의 철학을 반영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국가가 어디에 얼마나 돈을 쓰고 어느 곳에 돈을 안 쓰는지 보여주는 예산문제는 그 국가의 지향점, 그 국가를 움직이는 이들의 철학과 수준을 남김없이 보여준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어떤 국가가 인권문제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여주는 시금석으로 예산만한게 없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틈만 나면 '대북 퍼주기' 비난을 받았다. 대북 퍼주기 때문에 나라 망한다는 소리까지 나왔을 정도였다. 실제 10년간 북한에 ‘퍼주기’한 돈은 식량차관을 포함해도 2조 683억 원이다. 1년에 약 2000억 원, 대한민국 국민 1인당 1년에 5000원 가량이다. 이게 어느 정도인지 비교를 해보자. 아라뱃길이란 쌩뚱맞은 간판을 달고 있는 경인운하 건설예산이 2조 2500억 원이었다. 최근 대법원 판결로 다시 한번 주목을 받은 예산 낭비의 끝판왕 용인 경전철을 짓는데 9288억원 들었다. 용인 경전철 하나면 대북 퍼주기를 5년 넘게 할 수 있다. 경인운하를 만들지 않았으면 대북 퍼주기 10년간 하고도 돈이 남았다. 참 많이도 퍼줬다.  경인운하 만든다고 땅 팔 돈은 있어도 대북 인도적 지원에 쓸 돈은 없다는 이명박, 박근혜 정부는 사실 명확한 국정철학을 제시한 셈이다. '(어차피 곧 망할 텐데) 북한에 커피 값만큼도 주기 싫다.'  코로나19 위협에 시달린 지 반년이 넘었다. 미국만도 못한 공공의료 시스템 속에서도 신속하게 (의료 관계자들의 땀과 노력을 갈아 넣은 노력으로) 지금까진 선방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여전히 상황은 불안하고 대응수준은 취약하다. 선별진료소 운영과 확진환자 치료, 역학조사, 지역사회 예방조치 등 코로나19 대응은 전적으로 공공의료 시스템과 헌신에 힘입었다. 그런 이유로 신속하게 공공병상을 확충하고, 공공의료 인력과 방역인력을 갖추지 않으면 언제라도 위기국면에 빠질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문재인 정부가 발표한 '한국판 뉴딜'은 이 정부가 생각하는 코로나19 대응 지향점과 전략, 더 나아가 코로나19 이후 한국을 어떻게 바꿀지 극명하게 보여주지 않나 싶다. 사진 출처 - 서울신문  '한국판 뉴딜' 어디에도 공공의료 얘기는 없다. 정말이지 단 한 글자도 없다. 반면 스마트병원, 비대면 의료 얘기만 잔뜩 들어있다. 전국민주노동조합 의료연대본부가 발표한 성명은 '한국판 뉴딜'의 핵심을 제대로 짚었다. “인력 확충과 공공병원 호소에 대통령은 ‘감염내과 전문의가 있는 병원이 전문의가 없는 병원과 디지털로 협진 하겠다’고 답했다...감염내과 전문의가 없는 병원에는 최첨단 모니터가 아니라 감염내과 전문의가 필요하다.”  사실 한국에서 '뉴딜'은 노무현 정부부터 역대 정권마다 비슷비슷한 이름으로 내놨다. 내용은 더 비슷했다. 이번 '한국판 뉴딜'의 한 축인 '그린뉴딜'은 이명박 정부 '녹색뉴딜' 시즌2이고, '스마트뉴딜' 역시 박근혜 정부 '디지털 뉴딜' 시즌2라고 할 수 있다. '한국판 뉴딜' 발표문 제목을 '창조경제'로 바꾸고 2020년을 2016년으로 바꿔놓으면 청와대 관계자들조차 깜빡 속아 넘어가지 않을까 싶다. 반면 노무현 정부 뉴딜에 들어있던 사회투자계획은 물론, 2012년 대선 당시 제시했던 경제민주화와 복지강화를 바탕으로 한 '한국판 뉴딜' 공약도 온데간데없다. 뉴딜만 놓고 보면, 문재인 정부는 노무현 정부보단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연장선에 있다.  왜 이렇게 됐을까. 이러저러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결국은 '거기다 돈 쓰기 싫다'는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있을 듯하다. 당장 위기극복을 위한 추경을 한다면서 질병관리본부 직원들의 연가보상비를 전액 삭감해버린게 문재인 정부다. 왜 그랬을까. 그 돈이 아깝거나,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코로나19 대응 일선에 있는 의료진이나 역학조사관들이 체력고갈로 쓰러지지 않도록 하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인력을 충원해야 한다. 하다못해 지자체에서 그 잘난 K-방역을 위해 계약직 공무원 2명이라도 추가로 고용하려면 1년에 1억 원 돈이 든다. 공공병상 확충을 위한 많은 계획들이 경제성이 없다는 이유로 예비타당성조사도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서, 돈 쓰기 싫은 것 말고 어떤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한마디로 말해서, 문재인 정부는 한국판 뉴딜 발표를 통해 '노오력'과 '열정페이' 말고는 국민건강을 위한 더 좋은 제도를 갖추는데 돈쓰기 싫다고, 돈쓰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강국진 위원은 현재 서울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20-08-05 | hrights | 조회: 353 | 추천: 6
이재상/ 인권연대 운영위원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이 하락하고 있다. 핵심적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아무래도 부동산 정책의 실패 때문일 것이다. 참여정부 때도 그랬지만 집값을 잡겠다는 의지는 강했으나 결과는 비참했다. 보수언론과 정치권의 프레임 전쟁에 발목 잡힌 측면도 있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땜질식 정책 때문이라는 비난도 들어야 했다. 실제 11차례의 부동산 대책에도 집값 폭등세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촛불로 일어선 정부가 집값 때문에 흔들리다니 참담하기도 하고 어이가 없다는 생각도 든다. 참여정부 이후 10년을 기다려 들어선 문재인 대통령은 ‘부동산만큼은 자신 있다’고 외쳤고, 참여정부의 실패를 답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여전히 집값은 치솟았다. 야당은 말할 것도 없고 청와대나 집권여당에도 다주택자들이 많았고, 처분하라는 지시에도 버티다가 여론에 등이 떠밀려 마지못해 시늉을 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여당의 한 의원은 집값은 잡히지 않을 거라는 말로 논란을 더 키웠다. 정부를 믿고 기다렸던 서민들은 허탈함을 넘어 배신과 분노마저 느끼고 있다.  경실련에서 역대 정권별 서울 아파트 값 상승에 대한 분석을 내놓았는데, 서울 25평 아파트 값은 문재인 정부 초기 8.4억에서 3년 만에 12.9억이 됐다. 상승액 기준으로 4.5억이 올라 역대 최고치이고 상승률도 53%에 달한다. 강남과 비강남의 가격 격차도 1993년에 비해 100배나 벌어졌다. 모든 수치에 있어서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 때의 성적표가 가장 참담하다.  역대 정권 가운데 아파트 값이 하락했던 때는 이명박 정부가 유일하다. 분양가상한제와 분양원가공개를 전면시행하고 SH공사가 후분양제와 장기전세를 실시하면서 아파트 값이 떨어졌다. LH공사는 토지는 임대하고 건물만 분양하는 이른바 반값 아파트를 내놓기도 했다. 이 시기 강남의 아파트 값은 16% 하락했고 강남과 강북 아파트 값 격차도 줄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토건족의 대통령이었고 숱한 과오를 저지르긴 했지만 역설적이게도 아파트 가격을 안정시키는 데는 성공했다. 박근혜의 초이노믹스 대전환 이전까지는 말이다.  역설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부동산을 안정시키겠다고 나섰던 문재인 정부는 땜질식 처방과 대책으로 오히려 투기를 조장했다. 실수요자들은 대출규제로 묶어놓고 현금부자들과 투기꾼과 재벌에겐 막대한 혜택을 주는 방식이다 보니 투기꾼에게 꽃길을 깔아줬다는 비판도 들린다. 박근혜 정부 때 분양가상한제 폐지와 주택대출확대정책 등 이전 정부에서 축적해온 바탕이 있다고 해도 현 정부의 책임도 결코 작지 않다. 사진 출처 - 경향비즈  우리 사회의 불평등과 격차의 심화 원인은 부동산 투기로 인한 불로소득이라고 말한다. 열심히 땀 흘려 일하는 노동자보다 아파트나 오피스텔이 돈을 훨씬 더 잘 번다. 가만히 있어도 따박따박 들어오는 월세와 폭등하는 집값. 이것이 대한민국을 무너트리고 정권을 위기로 몰고 있다. 대출규제와 보유세 강화는 방향은 맞지만 지금의 집값 폭등상황을 안정시킬 대책은 아니다. 고위공직자들의 다주택 처분도 보여주기 눈가림에 불과하다. 그런다고 집값이 떨어지겠는가. 집값을 잡겠다는 의지의 천명이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이미 그 의지는 충분히 많이 표명했다.  근본대책은 집값 자체를 낮추는 것이어야 한다. 그 방안은 이미 시행된 적도 있고 효과도 검증됐다. 분양가상한제와 분양원가공개가 그것이다. 그동안은 거대야당에 발목 잡혀 하지 못했다는 핑계내지는 변명이라도 가능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180석의 무게와 책임을 다해야 한다. 더 이상의 실책과 실기는 있을 수 없다. 이재상 위원은 현재 CBS방송국 PD로 재직 중입니다.
2020-07-29 | hrights | 조회: 184 | 추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