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익의 인권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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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경찰청 국가수사본부. 20여년에 걸친 검경 수사권 조정 끝에 태어났다. 경찰에 독자적 수사권을 주면서 일종의 안전장치로 만들었다. 그러나 크게 달라지는 건 없다. 같은 경찰관들이 똑같은 일을 한다. 경찰청 수사책임자 계급을 한 단계 올리고 국가수사본부장을 개방직으로 임명한다는 것 말고 눈에 띄는 건 없다. 부서 이름이야 아무래도 좋다. 경찰청 수사국이 하든, 경찰청 국가수사본부가 하든 같은 경찰일 뿐이다.  달라진 건 형사소송법 개정으로 경찰이 명실상부 수사의 주체로 거듭났다는 거다. 권한이 없다며 억울하면 검찰에 가서 말하라는 식의 뻔한 변명은 통하지 않게 되었다. 경찰로서는 2021년이 책임 수사 원년이 되는 거다. 국가수사본부가 어떻게 하느냐에 경찰의 명운이 달려 있다. 사진 출처 - 경찰청  범죄 수사에도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경찰만을 위한 수사다. 2015년 1만4556건이던 공무집행방해죄 사건은 2019년 1만1654건으로 20%나 줄었다. 공무집행방해죄 사건 피해자의 다수는 경찰관이다. 구속 건수 감소폭은 훨씬 크다. 같은 기간 1437건에서 577건으로 60%나 줄었다. 박근혜 정권에서 문재인 정권으로 바뀐 것이 경찰활동에 영향을 미쳤다. 경찰관을 피해자로 하는 모욕죄나 명예훼손죄 적용도 정권에 따라 급격하게 변한다. 이런 식의 자의적 법집행, 경찰만을 위한 수사는 없어져야 한다.  한국은 치안여건이 좋은 나라다. 이를테면 가장 끔찍한 범죄, 살인을 보자. 2015년 919건이던 것이 2019년엔 775건으로 줄었다. 4년 만에 16%나 감소했다. 그러나 연간 775건도 살인미수를 포함한 거다. 살인이 자행된 기수사건만 친다면 297건으로 줄어드는데, 여기에도 자살교사·자살방조 등이 포함되었으니, 실제 살인사건은 연간 225건에 불과하다. 일본 다음으로 살인사건 발생률이 낮고, 검거율은 늘 세계 최고다. 강도사건은 2015년의 1445건이 2019년엔 798건이 되었다. 4년 만에 45%나 줄었다. 믿기지 않는 놀라운 감소폭이다. 폭력·절도 등 다른 강력범죄들도 마찬가지다.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범죄 자체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치안 상황이 매우 안정적으로 관리되고 있다.  그런데 시민들은 세계 최고의 치안 현실을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 꼭 필요한 수사가 제때 진행된다는 믿음, 경찰의 수사역량이 정확하게 발휘된다는 믿음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야말로 경찰의 명운을 걸 때다.  여전히 검찰개혁 요구가 거센 것은 검찰이 자초한 것이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자기 조직만을 위해 휘두르는 행태가 검찰개혁의 필요성을 일깨워주는 거다. 검경 수사권 조정이나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립으로 끝난 게 아니라, 수사권과 기소권의 완전한 분리가 검찰개혁의 핵심이 되었다.  경찰도 마찬가지다. 김창룡 경찰청장은 “경찰의 수사역량을 온전히 증명해내야 할 첫 시험대에 올랐다”고 했다. 지난 월요일 경찰지휘부 회의에서 했던 말이다. LH 임직원들의 투기 의혹 사건은 국가수사본부 설립 이후 처음 떠맡은 국민적 사건이다. 성역 없는 수사, 부패와 비리의 뿌리까지 뽑아내는 철저한 수사를 하면 경찰은 국민의 신뢰라는 엄청난 자산을 얻게 될 것이다. 수사 성과를 내지 못하면 국가수사본부는 시작부터 존폐의 기로에 서게 될 것이다. 수십년 동안 경찰 주변을 맴돌았던 ‘자질미달론’이 틀리지 않았다며 수사권을 다시 조정하자는 목소리도 나올 거다. 말에 대한 책임은 무섭다. 경찰청장의 말이 수사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엄청난 후폭풍이 불 거다. 모처럼 경찰에 주어진 새로운 권한도 얼마든지 거둬들일 수 있다. 제도는 늘 변하기 마련이다.  민주공화국의 주권자들이 경찰 수사를 주시하고 있다. 인권 보장을 위한 적법절차를 잘 지키면서도, 증거를 충실하게 모아 악랄한 투기세력의 뿌리까지 파헤쳐 들어가야 한다. 정치적 유불리를 따지지 말고 여야, 지위 고하 등을 가리지 않아야 한다. LH 사태 수사를 통해 과감하게 성과를 내야 한다. 우리 사회에 공정한 원칙이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고, 범죄자들에게는 확실한 법률적 응징을 통해 정의가 살아있음을 보여줘야 한다. 공무원이나 LH 직원들의 불법적 욕심이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 보여줘야 한다.  경찰청 국가수사본부는 시작부터 중요한 시험대에 서게 되었다. 조직 출범부터 유명무실한 조직이 되어 곧 문을 닫을지, 국민의 사랑과 신뢰로 거듭나는 탄탄한 조직이 될지 아직은 알 수 없다. 어떻게 되든 그건 모두 경찰청의 의지에 달려 있다.
2021-04-05 | hrights | 조회: 140 | 추천: 2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  국회에서 논의를 시작하자마자 검찰은 반발했다. 검찰총장이 포문을 열었고, 일선 검사들도 통신망에 글을 쓰거나 언론을 부추기며 반발하고 있다. 여차하면 집회라도 열 태세다. 일부는 사표를 내면서 의지를 불태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행태는 반복적이다. 10년 전에도 그랬다.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검찰총장이 사의를 표명했다. 국제회의가 열리는 중이라 당장 그만두지 못한다는 핑계를 댔지만, 그래도 언성은 높았다. 이번에도 “직을 걸고 막을 수 있다면야 100번이라도 걸겠”단다. 역시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다.  검찰총장은 검찰의 수사권과 기소권을 분리하자는 입법 움직임에 대해 “검찰총장이 미워서 추진되는 일”이라 규정하나, 서너 달만 있으면 임기가 끝나는 검찰총장 때문에 수사구조의 근간을 다시 짠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약 검찰총장이 미워서라면, 잠자코 시간을 보낸 다음, 코드에 맞는 사람을 임명하면 그만이다. 검찰총장에 대한 호불호는 쟁점 축에도 못 낀다. 핵심은 검찰개혁이다.  개혁이 필요한 까닭은 간단하다. 검찰의 힘이 너무 세기 때문이다. 한국 검찰은 태어날 때부터 힘센 조직이었지만, 총칼을 들고 설쳤던 경찰과 군대 때문에 눈에 잘 띄지 않았을 뿐이다. 민주화 이후 검찰은 본격적으로 무소불위의 자리에 올라섰다. 벌써 30년이 넘었다. 검찰의 힘은 국가형벌권을 좌우한다는 데 있다. 수사권, 영장청구권, 기소권, 형집행권을 독점하고 있으니, 형사사법은 검찰사법이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지경이다. 죄 많은 사람을 봐주는 일도, 죄 없는 사람을 괴롭히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처럼 손봐주고 싶은 사람이라면 가공할 만한 수사권을 동원할 수도 있지만,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처럼 별장 성폭력이라는 사건 자체보다 출국금지라는 엉뚱한 사안을 키우기도 한다.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장을 구속하겠다 벼르며 사건 자체를 호도하고 있다. 같은 검사들이라면 희한한 셈법을 동원해 룸살롱 접대 비용을 100만원 이하로 맞춰줄 수도 있다. 힘이 센 탓인지 남들 시선도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스스로 부패했으면서도 검찰만이 유일한 반부패기관이라는 착각 속에 산다. 사진 출처 - 구글  검찰은 명칭부터 이상한 조직이다. 영어(Prosecution)로는 ‘기소’ 기관인데, 한자(檢察)는 잡도리하고 살핀다는 ‘수사’를 뜻한다. 수사와 기소는 각각으로도 엄청난 권한인데, 이걸 모두 쥐고 있으니 무소불위의 권력이 되었다. 그러니 개혁의 핵심은 독점 권한을 민주주의 원리에 따라 ‘견제와 균형’이 작동할 수 있도록 쪼개는 데 있다.  왜 맨날 검찰개혁이냐는 사람도 있다. 개혁과제가 쌓여 있는데 검찰개혁에만 골몰하냐는 거다. 요란했을지 모르지만, 검찰개혁은 별로 진행되지 않았다. 중요한 성과라는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도 1년에 서너 건 정도밖에 수사하지 못하는 구조적 한계가 있다. 검경 수사권 조정도 일부 진전은 있었지만 검찰의 직접수사 범위가 너무 광범위하게 설정되었다. 대통령령 개정 과정에서 검찰과 경찰 간 의견 충돌이 있었지만, 언제나처럼 검찰의 완승으로 싱겁게 끝났다.  지금의 논의과정도 그렇다. 일부 국회의원들이 검찰의 수사권과 기소권을 분리해 ‘중대범죄수사청’과 ‘국가기소청’을 신설하는 법안을 만들고 있는 게 전부다. 법률안을 발의한 것도 아니다. 이제 막 공청회를 열어 논의를 시작한 수준이다. 개혁안이 여당 내부에서 힘을 받을지도 의문이다. 당장 서울·부산 시장 선거가 급할 텐데 굳이 검찰의 반발을 무릅써가며 전면적 개혁에 나설 것 같지 않다. 자체로 막강한 데다 법조기자단이란 특별한 우군을 지닌 검찰과 싸워봐야 득될 게 없다고 판단할 것이 뻔하다. 검찰총장의 언행도 4월 선거를 염두에 둔 정치행위로 보인다. 일단 이번만 막으면 다음엔 개혁동력을 상실할 것이란 계산을 했을 거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여태껏 진행한 개혁은 겨우 반 발짝 내디딘 것에 불과하다는 건 명백하다. 검찰의 독점을 깨지 않으면 검사였던 사람들이 전관 특혜를 받고 떼돈을 벌고, 검찰권이 국민이 아니라 오로지 전·현직 검사들만을 위해 쓰이는 부패구조는 바뀌지 않을 거다. 검찰은 거악을 일소한다며 반부패 수사역량을 강조하지만, 부패의 핵심고리에 전·현직 검사들이 자리하는 경우는 너무 많다. 검찰이 한 손에 쥔 권한을 쪼개는 것 말고는 어떤 대책도 검찰의 부패를 막을 수 없다. 수사와 기소를 각각 서로 다른 독립기관이 나눠 맡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견제와 균형이야말로 부패를 없앨 가장 실효적인 처방이다. 부패는 독점에서 나온다.
2021-03-10 | hrights | 조회: 290 | 추천: 13
출처 - 서울신문 소년원 출신. 이건 낙인 아니면 철없는 훈장이다. 소년원 출신이라면 골목에서 놀기 편할 수도 있다. 남다른 경험을 했다며 어깨에 힘을 줄 수 있다. 그래 봤자 잠깐, 철없는 시절의 골목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소년원 출신이라는 건 대개 낙인이다. 소년원은 “소년이 건전하게 성장하도록 돕는”(‘소년법’ 제1조) 곳이다. 소년의 잘못은 소년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아이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부모의 잘못이고 교사 등 어른들의 책임이기도 하다. 아직 성장 중이니 기회를 주자는 뜻도 있다. 비행 때문에 소년원에 간다지만, 같은 비행을 저질러도 가난하거나 한부모 또는 조손 가정 아이라면 소년원에 갈 확률이 엄청나게 높다. 그러니 일반적인 형사처분과는 다른 ‘특별한 조치’가 필요한 거다. 2년 동안 소년원에 가두든, 수강명령이나 사회봉사명령을 내리거나 보호관찰을 하든 모든 소년보호 활동은 법률의 요구처럼 건전한 성장을 돕는 차원에서 진행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딴판이다. 소년원은 감옥과 별반 다르지 않다. 어쩌면 감옥보다 훨씬 큰 고통을 견뎌야 한다. 소년원 한 끼 급식비는 고작 2080원에 불과하다. 간식도 없고 매점도 없는 소년원에서 고픈 배를 달래기 위해 밥만 잔뜩 먹어야 하는 현실, 청소년들이 탄수화물 과다섭취로 인한 고도비만으로 내몰리는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감옥에서는 돈만 있으면 과일, 달걀, 반찬에다 과자까지 사 먹을 수 있다. 가난해도 강제노역으로 받는 작업보상금으로 반찬 정도는 마련할 수 있다. 당장 고통도 심각하지만, 소년원에서 나간 다음도 문제다. 어떤 보호처분을 받아도 “소년의 장래 신상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소년법’ 제32조) 않아야 한다는 규정이 있지만, 소년에 대한 낙인은 청년이 된 다음에도 지워지지 않는다. “소년원에 갔다 왔어도 장교가 될 수 있어요.” 법무부 공식 블로그에 실린 기사다. 소년원 출신이라고 공무원이 될 수 없다는 ‘잘못된 생각’ 때문에 일찌감치 포기하면 안 된다며 정확한 사실을 알려주겠단다. ‘임용결격 사유’가 아니면 누구나 시험 볼 자격이 있다는 거다. 여기까지는 맞다. 소년원 출신도 누구나 시험을 볼 자격을 준다. 하지만 소년원 이력을 문제 삼아 탈락시키는 경우는 너무 흔하다. 해병대 부사관 시험에 응시한 청년도 그랬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필기시험, 신체검사, 인성검사까지 통과했지만 소년원 출신이라는 낙인은 피하지 못했다. 소년보호 처분을 이유로 어떤 불이익도 받지 않아야 한다는 ‘소년법’ 규정과 달리 ‘형의 실효 등에 관한 법률’은 “각 군 사관생도의 입학 및 장교·준사관·부사관·군무원의 임용과 그 후보자의 선발에 필요한 경우” 소년보호 처분 이력을 조회하고 회보할 수 있도록 규정(제7조)하고 있다. 소년보호처분을 받은 사람은 걸러내겠다는 거다. 지원자에게 소년보호 관련 서류를 제출하라거나 ‘개인정보 수집·이용·제공 동의서’를 받아 관련 정보를 들여다보는 방법도 있다. 제출하라는 서류를 내지 않을 취업준비생은 없다. 서류를 내지 않으면 탈락할 것이 뻔한데, 달라는 서류를 내지 않을 수 없다. 개인정보 이용에 동의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말로만 동의일 뿐 강제와 다를 바 없다. 법률끼리 서로 충돌하고, 법무부는 공식 블로그를 통해 사실상의 거짓말을 홍보하고, 국방부는 소년보호 처분을 받았다고 낙인을 찍으며, 젊은이들의 직업선택 자유는 물론 생계마저 박탈하고 있다. 앞뒤도 맞지 않고 법률 원칙도 저버리는 이상한 행태다. 마치 무정부 상태에서나 가능한 일이 반복되고 있다. 소년원 출신도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줘야 한다. 오히려 사회생활에 적응하도록 도와야 한다. 누구라도 소년보호 처분 기록을 들여다볼 수 없게 법률을 바꿔야 한다. 본인 동의를 받았다고 해도 본인이 아니면 기록을 볼 수 없게 해야 한다. 또한 일정 기간이 지나면 아예 기록을 삭제해야 한다. 앞길이 막힌, 그래서 희망을 빼앗긴 삶은 비참하다. 청소년 시기의 잘못 때문에 젊은이의 앞길을 막는 건 가혹하다. 그 젊은이가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할지 걱정이다. 사람은 늘 변하기 마련이다. 소년 시절의 잘못을 반성하고 새로운 출발을 하려는 사람을 돕지는 못할망정, 자기 실력으로 취업하려는 걸 막으면 안 된다. 누구에게나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워야 한다. 소년원 경력을 이유로 차별받으면 안 된다.
2021-01-29 | hrights | 조회: 305 | 추천: 12
사진 출처 - 한겨레 국민연금이나 건강보험은 소득과 재산에 따라 달리 낸다. 부자는 좀 더 많이 내고 가난한 자는 적게 낸다. 공평하게 내는 거다. 1993년 금융실명제, 1995년 부동산실명제 도입으로 세상은 투명해졌고, 국민연금과 건강보험을 제대로 운영할 만한 틀도 이미 마련했다. 그런데 유독 벌금만은 소득이나 재산에 상관없이 무차별적으로 매긴다. 빈부의 차이가 엄연한 세상에서 무차별은 더 노골적인 차별과 다름없다. 소득과 재산에 따라 다른 액수의 건강보험료를 내는 게 당연하다면, 벌금도 그래야 한다. 형벌은 고통을 주어 죗값을 치르는 거다. 벌금형은 돈을 빼앗는 고통으로 죗값을 치른다. 하지만 지금처럼 부자와 가난한 사람에게 똑같은 액수의 벌금을 매기면, 형벌로서의 효과는 찾아보기 어려워진다. 누군가에겐 벌금형이 아무런 고통을 느낄 수 없는 선처가 되기도 하고, 다른 어떤 이에겐 무거운 형벌이 된다. 벌금을 내지 못해 감옥에 가는 사람은 매년 4만명 이상으로 여전히 많다. 형벌은 대부분 벌금형이다. 그러니 벌금형이 공평하지 못하면 형벌 자체의 근간이 흔들리는 거다. 오랫동안 소득이나 재산과 연동해 벌금을 정하는 재산비례 벌금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던 것도 이런 까닭이었다. 학계 논의는 30년이 넘었고 인권운동가들에겐 좀체 풀리지 않는 숙원사업이었다. 인권연대가 장발장은행을 만든 건 벌금제 개혁활동의 일환으로 일종의 궁여지책이었다. 벌금을 못내 감옥에 갇힐 위기에 놓인 우리 시대의 장발장들을 위해 무담보, 무이자 대출을 6년째 계속하고 있지만, 장발장은행의 목표는 얼른 문을 닫는 거다. 벌금제를 고쳐 가난한 사람들에게 유독 가혹한 형벌을 강요하지 않고, 빈부의 차이를 떠나 모두에게 공평한 형벌이 적용되는 세상을 위한 작은 디딤돌 역할일 뿐이다. 재산비례 벌금제는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기도 했다. 지금의 총액 벌금제를 재산비례 벌금제로 바꾸는 것은 공정한 사회,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절실한 과제였다. 법이 정의를 위한 도구가 되려면 무엇보다 공평해야 한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비난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개혁은 지지부진했다. 집권세력은 별 관심이 없었다. 국가의 형벌만큼은 공평해야 한다는 호소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그러던 차에 반가운 토론회가 열렸다. 지난달 22일 소병철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과 형사정책연구원이 함께 연 ‘자산(재산)비례 벌금제의 입법 방안’ 정책토론회였다. 새로운 제도에 대한 시민 일반과 전문가들에 대한 의식 조사도 했고, 챙겨야 할 여러 쟁점도 함께 다뤘다. 이름이 낯설어서 그렇지 설명을 들은 대다수 시민들은 재산비례 벌금제 도입을 찬성했다. 소병철 의원은 재산비례 벌금제 도입을 위한 형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한 터였다. 법무부 소속 검사만이 유일한 반대론자였다. 반대라고 꼭 집어서 말하지는 않았지만, 재산비례 벌금제를 도입하면 재판이 지연되어 피고인 인권침해 등의 우려가 있다고 했다. 정확한 소득과 재산을 조사하려면 시일이 꽤 걸릴 테니 그만큼 재판이 지연될 거란 말이다. 또한 형법만이 아니라 개별 법률들을 모두 찾아서 고쳐야 하는 만만치 않은 작업도 필요하니 시간을 갖고 더 많이 연구하고 토론해야 한다고 했다. 흔한 ‘시기상조론’이었다. 다들 공평한 세상을 바란다고 말하지만, 실질은 이렇게 많이 다르다. 한국은 역동적인 나라지만, 중대재해기업처벌법처럼 힘센 사람들의 이익이 걸리면 유독 뜸을 들인다. 세상에 존재하는 형사정책 중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연구하고 논의했던 주제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농익혔지만, 검사는 시기상조란다. 재산비례 벌금제를 도입한 나라들도 꽤 많아서 참고할 모델이 차고 넘치는데도 딴소리다. 핀란드는 1921년에 이 제도를 도입했다. 정확히 100년 전이다. 스웨덴 1931년, 덴마크 1939년, 꽤 늦었다는 독일(연방공화국)도 1975년에 도입했다. 2021년의 대한민국이 1975년의 독일, 심지어 1921년의 핀란드만큼도 못하다는 걸까. 재산이나 소득을 파악하는 데 별도의 예산이나 인력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이를테면 건강보험료 기준 소득 분위를 그대로 활용해도 된다. 국가장학금처럼 보건복지부 사회보장정보시스템을 활용해도 된다.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부족한 것은 정확한 소득과 재산을 파악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공평한 형벌을 집행하겠다는, 나아가 공평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정책의지다. 새해다. 코로나19도 잘 극복하고, 한국 사회가 보다 공평한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재산비례 벌금제가 그 시작이다.
2021-01-05 | hrights | 조회: 336 | 추천: 4
언론은 ‘추·윤 갈등’이라며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 간 갈등에 주목하지만, 그건 사태의 본질이 아니다. 핵심은 ‘검찰개혁’이다. 법무부 장관과 여당 모두 검찰개혁을 말한다. “검찰개혁이 일부의 저항이나 정쟁으로 지체된다면 국민을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도 불행한 일.” 여당 대표의 말이다. 검사들의 말도 별반 다르지 않다. 대검 차장이 장관에게 한발 뒤로 물러나라며 내건 명분도 검찰개혁이다. 전체 검찰 구성원의 마음을 얻어야만 검찰개혁이 가능하니, 검찰총장을 징계하지 말라는 거다. 말이 같다고 뜻마저 같지는 않다. 검찰개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각기 다르고, 개혁을 추진하려는 쪽과 저항세력이 뒤섞여 있기도 하다. 언론은 그저 중계방송식 보도를 하거나 검찰 쪽으로 기울어진 편파보도를 쏟아내고 있다. 정치적 셈법에 따른 보도도 적지 않다. 그래서 뭐가 검찰개혁인지 다시금 꼽아봐야 한다. 핵심은 간단하다. 문제가 있으니 고쳐야 한다는 거다. 검찰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고 있다. 오랫동안 살펴본 결과, 집권 초기의 대통령을 제외하곤 언제나 검찰권력이 가장 막강했다. 경찰이 득세하던 건국 초기나 군인들이 총칼을 휘두르던 군부독재 시기 정도만 예외일 뿐, 민주화 이후엔 언제나 검찰이 최강이었다. 검찰개혁은 검찰이 지닌 막강하면서도 독점적인 권한을 민주적 원리에 따라 나누고, 민주적 통제를 강화하는 거다. 검사들만 누리는 엄청난 특권을 폐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가진 힘을 빼앗길 판이니 검사들이 개혁에 저항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검찰의 중립성과 독립성을 보장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속내는 민주적 통제 없이 자기들만의 세상을 유지하겠다는 거다. 그래서 검찰 구성원의 마음을 얻고 동의를 구하며 검찰개혁을 하라는 건, 개혁 시늉만 내라는 거다. 재벌이 동의하는 재벌개혁, 검찰이 동의하는 검찰개혁은 모두 말장난이다. 경찰과의 수사권 조정이나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신설은 이런 차원에서 진행한 개혁과제였다. 하지만 경찰과의 수사권 조정은 검찰의 완승으로 끝났다. 견제와 균형이라는 민주주의 원칙에는 한참 미치지 못했다. 검찰의 수사권을 빼앗는 것은 고사하고 검찰은 자기들이 원하는 사건들에 대한 직접 수사권도 그대로 틀어쥐게 되었다. 수사권과 기소권을 엄격하게 분리해 검찰이 지닌 수사권을 박탈하는 게 개혁의 핵심이지만, 어슬렁거리다 만 격이다. 공수처는 출발선에 서보지도 못했다. 검찰권력에 대한 민주적 통제는 논의조차 별로 없었다. 일본의 검찰심사회, 미국의 기소배심 같은 안전장치는 여전히 작동하지 않고 있다. 검사의 영장청구권을 헌법으로 규정한 것도 바로잡아야 하고, 오로지 국가검찰 제도만 운용하는 것도 살펴봐야 한다. 공룡경찰이 걱정되어 자치경찰이 필요하다면, 자치검찰도 챙겨봐야 할 중요한 대목이다. 검사들이 누리는 특권도 그대로다. 당장의 사태만 해도 그렇다. 국가공무원 중 유일하게 검사들에 대한 징계만 별도의 법률에 따른다. 법관의 독립이 곧 재판의 독립으로 이어지기에 행정부 소속 공무원들과 달리 ‘법관징계법’이란 별도의 법률을 두고 있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법무부 소속 외청의 공무원들만을 위한 특별한 징계법은 내용은 물론 행정조직 구조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검사들은 임용부터 3급 고위공무원 행세를 한다. 조직 안에는 차관급이 차고 넘친다. 대검찰청과 고등검찰청이 마치 대법원과 고등법원에 비견하듯, 떡하니 자리 잡고 있다. 과도하고도 이상하다. 검사였던 사람들이 전관예우를 받으며 형사사법 전반을 왜곡하는 악질 관행도 뿌리 뽑아야 한다. 평생 검사를 하는 문화를 정착시키고, 검사를 했던 사람은 변호사 개업 자체를 못하도록 하는 등의 전관예우 방지장치도 챙겨봐야 한다. 집단행동을 하거나 사표를 던지는 등 일반 공무원들은 상상하기 힘든 검사들의 대응이 이어지고 있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강도 높은 반발을 이렇게 쉽게 하는 건, 검사가 아니면 누구도 처벌할 수 없는 지금의 형사사법 시스템 때문이다. 불법적 집단행동마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우국충정이라 둔갑시켜버리면 그만이다. 문재인 정부에 실망했거나 조국 전 법무부 장관에게 분노한다는 이유로, 또는 야당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검찰에 박수를 보내는 사람들도 제법 있단다. 우려할 만한 상황이다. 이런 식으로 검찰개혁이 좌초할 수는 없다. 언론의 편파적인 과잉보도를 넘어, 정치쟁점화를 넘어 검찰개혁의 본령을 논의하고 또 추진해야 한다.
2020-12-04 | hrights | 조회: 341 | 추천: 5
출처 - 구글 조두순의 재범 확률은 76.4%란다. 법무보호복지공단이 대학과 공동 연구했다며 내놓은 결과다. 일기예보조차 엇나갈 때가 많다. 앞날을 내다보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텐데, 재범 확률을 소수점 이하까지 정확히 제시한다. 이런 식의 황당한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몇년 전부터 조두순 출소를 예고했던 언론은 이젠 D-며칠 하는 식으로 아예 날짜까지 매겨가며 기사 제목을 달고 있다. 1952년생 조두순은 출소 직후 일흔 살이 된다. 희대의 악당이니 늙었다고 경계를 늦출 수는 없을 게다. 법이 정한 전자발찌와 신상공개만으로는 부족하다며, 갖가지 대책이 쏟아지고 있다. 법무부, 경찰청, 여성가족부와 안산시까지 발 빠르게 대책을 내놓고 있다. 조두순 집 근처에는 출소 전까지 200여대의 CCTV를 설치하고 내년까지는 모두 3700여대를 더 설치한다. 보호관찰관은 일대일로 24시간 조두순을 감시하고, 경찰은 집 앞에 방범초소를 세우고 특별 감시시스템을 운용한단다. 12년 전 조두순이 저지른 범행은 참혹했다. 말뜻 그대로 비참하고 끔찍했으며, 잔인하고 무자비했다. 해서 조두순의 이름은 곧바로 공포를 불러온다. 게다가 조두순이 했다는 “교도소에서 열심히 운동하고 나올 테니, 그때 봅시다”라는 말 때문에 더욱 섬뜩한 존재가 되었다. 감옥에 갇힌 12년 동안에도 내내 언론의 주목을 받았으니, 조두순이 사회로 돌아온다는 소식에 여론이 들썩이는 건 당연할 게다. 그는 현존하는 괴물이다. 조두순이 지닌 악마적 이미지 때문에, 어떤 기사든 조두순과 엮으면 주목받을 수 있다. 언론의 클릭 장삿속이 조두순이라는 폭발력 있는 뉴스메이커를 불러내는 거다. 오늘도 조두순을 둘러싼 온갖 보도가 차고 넘친다. 조두순의 재범률을 정확히 예측하는 인공지능을 개발했다거나 조두순이 했다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말들까지 여과 없이 보도되고 있다. 그래도 좋다. 조두순은 몹쓸 짓을 했으니, 그가 족쇄를 차고 사는 것도 어차피 치러야 할 죗값일 테니, 그렇다 치자. 문제는 조두순 사건에서 반드시 함께 거명되는 그 피해자, 여전히 ‘나영이(가명)’라 불리는 사람이다. 세월이 흘렀고, 그도 이젠 성년을 넘긴 청년이 되었다. 그에겐 더 이상 친권자도, 보호자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래 청년들이 그렇듯, 그도 평범한 대학생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언론은 여전히 그를 조두순 사건의 피해 어린이로만 다루고 있다. 언론은 조두순을 불러낼 때마다 ‘나영이’도 함께 호출하고 있다. 그의 범죄 피해는 조두순의 악마성을 입증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라며 반복적으로 묘사되고, 온갖 과장을 덧붙이기도 한다. 어떤 정치인이 이끄는 사단법인은 나영이를 위해 모금을 한다고 분주하다. 이미 성인이 된 사람의 의사는 묻지도 않고 돕겠다는 거다. 도움은 도와달라는 사람에게 필요한 거다. 적어도 성인에게는 그렇다. ‘나영이’라 불리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어떤 경찰관에게 들었다. 그는 나영이 자매가 언니라 부르며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다. 나영이 자매를 살뜰하게 챙겼고 국내여행은 물론 해외여행도 함께 다닌다. 누군가의 후원이나 모금을 통해 하는 일도 아니다.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경찰관으로서의 미안함, 아니 그 이전에 사람으로서의 안타까움은 그를 나영이 자매의 든든한 후견자가 되도록 했을 거다. 그는 최근 한 인권단체의 홈페이지에 쓴 기고문을 통해 조두순 출소를 앞둔 과도한 관심이 ‘나영이’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생각해달라고 호소했다. 언론이 조두순에 대해 보도할 때마다 나영이가 함께 언급되는 상황은 이제 바뀌어야 한다는 거다. ‘나영이’란 사람은 신체적·정신적으로 극한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살기 위해 애썼고, 그렇게 고군분투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살려고 노력하고 있단다. 그러니 조두순이란 괴물 때문에 ‘나영이’의 상처를 들쑤시는 일은 이젠 그만둬야 하다는 거다. 무엇이든 ‘나영이’와 관련된 결정은 ‘나영이’ 자신의 몫이어야 한다. 그건 부모도 예외가 아니어야 한다. 대학생이 되었는데도 초등학생 때의 상처만을 계속 부여잡고 살 수는 없다. 범죄 피해만으로도 힘든 사람에게 끔찍한 기억을 자꾸만 되살리는 것은 너무 폭력적인 일이다. 이런 게 바로 2차 가해다. 범죄피해자를 대할 때는 언제나 섬세하고도 신중해야 한다. 언급조차 조심스러워야 한다. 지금 상황에서 ‘나영이’란 사람을 돕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역설적이게도 그 사람을 그냥 두는 것이다. ‘나영이’란 사람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잊혀질 권리다.
2020-11-06 | hrights | 조회: 218 | 추천: 5
추미애 법무부 장관 아들의 병역 문제가 한동안 쟁점이었다. 숱한 기사가 쏟아져 나왔지만, 쟁점은 “소설 쓰시네”였나 싶을 정도였다. 병사의 휴가 연장이 그렇게 심각한 문제인지, 왜 정쟁거리가 되는지 모르겠다. 군 관련 기사는 쏟아졌지만, 군대 문제의 본질에 가닿은 기사는 없었다. 어차피 관심은 군대나 군인이 아니라, 상대를 궁지로 모는 게 전부인 진영 다툼이었을 뿐이다. 최근 육군훈련소 홈페이지에 새로운 공고가 떴다. 다음주 월요일(12일)부터 훈련병에게 보내는 인터넷 편지쓰기를 중단하겠단다. 표현만 ‘변경’일 뿐, 실상은 중단이고 금지였다. 앞으로는 140자 이내의 ‘응원 메시지’만 전해주겠단다. 휴대전화도 없는 훈련병들에게 인터넷 편지쓰기는 밖에 있는 사람들과 자신을 이어주는 생명줄 같은 구실을 한다. 훈련소는 낯설고 힘든 곳이다. 단기간에 장정을 군인으로 바꾸는 곳이니 뭐 하나 만만한 게 없다. 그러니 밖에 두고 온 사람들은 모두 그립다. 부모, 형제, 친구 등이 보내준 편지는 낯선 훈련소 생활에서 숨통 같은 역할을 한다. 육군훈련소는 이런 숨통을 끊어버리겠다는 거다. 이유가 기가 막히다. “각 부대에서는 1일 평균 2시간 이상을 편지 출력과 개인별 전달에 사용하고 있으며 또한 많은 인쇄용지가 사용되고 있”으니, “훈련병의 안전한 교육훈련과 훈육 등에 보다 많은 관심과 노력을 집중하기 위해” 중단한다는 거다. 부대가 매일 2시간 이상을 편지 출력과 전달에 매달린다는 과장도 이상하지만, ‘많은 인쇄용지’가 그렇게 큰 부담인지 모르겠다. 국방비 지출 세계 6위인 대한민국이 복사용지 가격 부담 때문에 편지도 못 쓰게 막겠다는 건가. 아들을 군대에 보낸 부모나 훈련병들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쩨쩨한 태도다. ‘제복 입은 시민’ 대접은 고사하고 조금만 번거로워도 가족과의 편지마저 봉쇄할 수 있다는 발상이 두렵기까지 하다. 이런 사람들에게 장정들을 맡겨야 한다는 게 답답하다. 사실 군대에는 이처럼 당장 바로잡을 게 너무 많다. 특히 의무복무군인들이 받는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고통들이 그렇다. 익숙한 것이 옳은 것은 아니다. 직업군인들은 부대를 비우고 퇴근하는데, 왜 의무복무군인들만 부대를 지키고 있어야 하는지부터 국가와 군대의 답변을 듣고 싶은 대목이 한둘이 아니다. 권한이 크고 책임이 무거운 사람들은 일과가 끝나면 자유롭게 지내는데, 아무런 권한도 책임도 없는 병사들은 왜 내무생활을 강요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여태껏 없었다. 직업군인들은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는 급여에다 아주 특별한 연금, 그리고 10년만 근속해도 국립묘지에 안장되는 자격을 갖는다. 그러나 의무복무자는 최저임금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용돈’ 수준의 월급만 받는다. 중요한 시기에 생업과 학업을 접어두고 군대에 왔다. 원치 않는 임무도 수행하며 때론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 자기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도 따르지만, 적절한 보상은 없다. 월급, 연금, 국립묘지 등은 그저 남의 이야기일 뿐이다. 왜 제복을 입어야 하는지, 머리는 왜 그렇게 짧게 잘라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머리카락 길이가 전투력과 비례한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면, 그저 어설픈 일제강점기 식의 구습일 뿐이다. 무엇보다 복무기간도 살펴봐야 한다. 각종 전략무기가 핵심전력이 된 세상에서 전쟁 수행이나 평화 유지를 위해 병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적이다. 각개전투를 하며 고지를 점령하는 식의 전쟁은 진작 끝났다. 육군 기준 18개월 복무는 2012년 대선 때, 박근혜·문재인 후보가 동시에 했던 공약을 이제야 이행하고 있을 뿐이다. 합리적인 복무기간은 얼마일지, 기간을 더 줄일 수 없는지도 꼼꼼하게 살펴야 한다. 코로나19 때문에 의무복무 중인 젊은이들의 고생이 많다. 면회, 외출, 외박, 휴가 등이 여의치 않으니 너무 힘들단다. 무척 힘들겠지만, 군인들의 영내 집단 거주를 생각하면 부대 밖 출입이 코로나19 이전과 다를 수밖에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니 지혜를 모아야 한다. 당장 힘들어하는 젊은이들에게 뭐든 답을 찾아주어야 한다. 휴가 등에서 손해를 보면 그만큼 복무기간을 줄여주는 등의 방법을 고안해야 한다. 외출 두 번 못하면 하루 일찍 제대한다는 식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 무엇보다 복사용지도 아깝다며 인터넷 편지쓰기마저 막아버리는 일부터 당장 그만둬야 한다. 직업군인들이 머리를 맞대고 의무복무군인들을 도울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의무복무 중인 젊은이들에게 지고 있는 빚을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다.
2020-10-12 | hrights | 조회: 406 | 추천: 11
전광훈씨의 행태가 갈수록 볼썽사납다. 지금껏 끼친 민폐도 엄청난데, 여전히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고 있다. 속내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때마다 광장에 모여서 태극기와 성조기, 심지어 이스라엘 국기와 일장기까지 흔들고, 멀쩡한 광화문광장을 이승만광장이라고 부르는 것도 다 나름의 까닭이 있을 거다. 매번 실패했지만, 혹시 국회의원이 될 가능성이 활짝 열릴지도 모르고, 그게 아니라도 당장의 돈벌이로도 유익할지 모르겠다. 문제는 그들의 행태가 그저 시끄러운 소음에 그치지 않는다는 거다. 전광훈의 교회와 광복절집회의 여파가 상당하다. 사람들은 구체적이며 직접적인 고통을 겪고 있다. 코로나19에 걸린 사람들은 물론 생계를 위협당하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코로나19는 매우 어려운 난관이었지만, 정부가 칭찬할 만한 노력을 했고 시민들은 마스크 착용과 거리 두기로 감염 차단을 위해 노력했기에 그나마 K방역이란 말을 들으며 선방해오던 차였다. 그걸 단박에 망가뜨려놓고는 반성은커녕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차라리 신천지의 이만희는 고개를 숙이기라도 했지만, 전광훈 등은 달랐다. 그들이 공동체의 도덕적 요청이나 호소를 외면했다거나, 신에게조차 까불면 죽는다며 기독교 신앙을 부인했다면 또 모르겠다. 그건 도덕적 비난을 받거나 파문 등 종교적 심판을 받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전광훈 등이 대놓고 반복적으로 법률을 위반하고 있다는 거다. 구속 상태에 있다 법원의 보석 결정으로 석방된 상태인데도 막무가내다. 도덕과 달리 법은 분명하다. 명백하게 공식화되어 있다. 그런데 법을 어겨도 상관없다는 이상한 배짱, 정치영역이든 장사든 또는 선교든 제 잇속만 차리면 아무 상관없다는 그 몰염치를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다. 이미 문재인 대통령은 전씨 등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정부 차원의 대응은 굼뜨다. 시민들은 보도를 통해 전광훈 일당의 범죄를 실시간으로 지켜보는데, 공권력의 대응은 미온적이다. 공직기강이 해이해진 탓일까, 검찰과 경찰은 너무 느리고, 법원은 고약했다. 법원행정처장은 광화문집회를 허용한 것이 심사숙고한 결과라 했지만, 그저 일반적인 원칙에만 기댔을 뿐이다. 이 와중에 인권에 대한 이야기도 자주 들린다. 누구든 헌법이 보장하는 종교의 자유,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거다. 당연하다. 다만 내가 인권을 누릴 수 있다는 게 뭐든 내 맘대로 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떤 권리든 필요에 따라 필요한 만큼 제한할 수 있다. 뭐든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인권일 수는 없다. 남을 해칠 권리, 집단감염병을 남들에게 옮겨줘도 될 권리 같은 것은 절대 보장할 수 없다. 인권은 아무나 누릴 수 없고, 누릴 자격이 있는 사람들만 누려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꽤 많다. 극단세력이나 전광훈 같은 공동체 파괴범에겐 인권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 어떤 사람이든, 그들에게도 인권은 보장되어야 한다. 이건 세계인권선언과 대한민국 헌법의 중요한 원칙이다. 인권의 보편성이야말로 우리가 부여잡고 가야 할 민주공화국의 기본이다. 맘에 들지 않아도, 진영이 달라도, 심지어 지금 확인하는 것처럼 공동체에 해가 되는 사람이라도 인권을 보장해야 한다. 공동체의 안녕을 훼방 놓고 돈벌이를 위해 혐오와 저주만 늘어놓는 사람들에게도 인권은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인권이 있다는 것과 그들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물론 범죄자에게도 인권은 있지만, 그건 혹시 있을지 모를 위법부당한 국가작용을 걱정하며 범죄자의 방어권을 보장해주자는 차원이나 구금시설에서도 최소한의 인간적인 기준은 맞춰주어야 한다는 차원에서의 인권일 뿐이다. 범죄자를 그냥 방치하자는 건 결코 아니다. 상황을 나쁘게 만들었으니, 보복을 하자는 게 아니다. 전광훈 등처럼 목소리 큰 사람들에게도 법률이 정확히 집행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해달라는 거다. 지금처럼 공동체가 위기에 빠졌을 때, 검찰, 경찰, 법원과 지방정부의 각오는 각별해야 한다. 법원은 전광훈에 대한 보석이나 광복절집회 허용 같은 한심한 결정을 치열히 반성해야 한다. 무엇보다 대통령이 단호해야 한다. 대통령의 말이 분명한 의지에 바탕한 실행력과 만날 때, 무서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지금은 그럴 때다. 저들이 나와 우리의 가족과 이웃을 함부로 공격하고 거짓말을 일삼아 방역체계의 근간을 뒤흔들고 있다. 더 이상 공동체의 안녕을 해치고 조롱하도록 그냥 놔둘 수는 없다.
2020-09-07 | hrights | 조회: 274 | 추천: 4
당·정·청이 발표한 권력기관 개혁은 검경 수사권 조정, 자치경찰, 그리고 국가정보원 명칭 변경이 전부였다. 수사권 조정은 검사의 직접수사 범위를 ‘반드시 필요한 분야로 한정’한다지만, 막상 그 범위를 정하는 대통령령은 검사들이 원하는 대로 정해둔 상태다. 법으로 줄인 검사의 직접수사를 시행령으로 늘린 거다. 국정원 이름을 ‘해외안보정보원’으로 바꾸는 건 전형적인 쇼에 불과하다. 국정원의 정치관여야 법률로 엄격히 금지하는 판이니, 이름만 바꿔서 뭘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다. 김대중 정부 이래 20년 넘게 별 탈 없이 쓰는 이름을 굳이 바꾸자는 까닭은 뭔가. 자치경찰제 도입이 경찰개혁의 핵심인 것은 맞다. 그러나 여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법률안은 지방경찰청과 경찰서, 지구대, 파출소 등 기존 조직은 그대로 국가경찰인데, 그 소속만 시·도지사로 바꾼 것뿐이다. 실질은 그대로 두고 명목만 조금 바꾼 거다. 지방경찰청의 사무를 관장하기 위해 시·도 자치경찰위원회라는 합의제 행정기관을 두는 것은 진전이지만, 지방경찰청장을 경찰청장이 추천해서 대통령이 임명하는 근간은 바뀌지 않았다. 하다못해 지방의회의 임명동의나 청문절차조차 없다. 법률 개정안 취지에서 밝힌 것처럼 “현행 조직체제 변화를 최소화”했기에 달라지는 건 거의 없다. 명령, 인사, 재정 등 조직을 움직이는 핵심은 여전히 국가경찰 시스템과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무늬만 자치경찰일 뿐이다. 실질적인 개혁은 아예 외면했다. 정보경찰이 대표적이다. 정보경찰을 폐지해야 한다는 요구가 많지만, 이번에도 어물쩍 넘어간다. 달라진 건 법률에서 정보경찰의 역할을 ‘치안정보’라 했던 것을 ‘공공안녕에 대한 위험의 예방과 대응을 위한 정보’라고 달리 표현한 게 전부다. 어차피 모호한 건 마찬가지다. 수사권 조정으로 경찰이 공룡이 되었고, 그래서 정보경찰을 폐지해야 한다는 지적은 온당치 않다. 정보경찰 폐지는 경찰의 공룡화에 대한 대책이 아니라, 쓸모가 적으니 없애야 한다는 거다. 대통령과 청와대 참모들이 정보경찰이 작성한 보고서를 받아보는 게 유일한 쓸모인데, 3000명 넘는 정보경찰이 청와대 일부 인사들의 호기심 충족에나 동원되고 있다는 건 국가적 낭비다. 정보경찰은 그냥 없애도 아무 문제 없다. 청와대만 결단하면 될 일이다. 경찰위원회도 여전히 있으나 마나 한 유령조직으로 머물러 있다. 고위직 경찰관 출신이 유일한 상임위원을 맡고, 나머지 위원은 모두 비상임, 사무는 경찰청이 담당하는 구조는 바뀌지 않는다. 경찰위원회는 독임제 기구의 폐해를 막기 위한 민주적 통제가 아니라, 거꾸로 경찰청을 보좌하는 거수기 역할에서 멈출 거다. 1991년 설립 이래 지금까지 3298건의 안건을 다뤘지만, 부결은 모두 3건에 불과한 역사와 전통은 앞으로도 쭉 이어질 거다. 경찰에 대한 전문적인 독립 감시기구 설립은 언급조차 없다. 모든 권력에는 감시와 통제가 필요하다는 상식은 이번에도 외면당했다. 대통령이나 대통령을 배출한 정치세력이야 경찰을 맘대로 부릴 수 있으니 불편할 게 없겠지만, 경찰의 치안서비스를 받아야 할 시민들 입장은 전혀 다르다. 경찰에 불만이 있으면 청문감사관 등 내부 감시 기능에 호소해야 하지만, 이들은 시민의 목소리를 귀담아듣는 데는 영 굼뜨기만 하다. 기관장의 지휘권을 위해 직원들의 기강 확립에나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 경찰 외부에서, 경찰과 전혀 다른 독립적인 기구가 일상적으로 경찰에 대한 민원을 처리해주고 일상적으로 경찰활동을 감시한다면, 경찰서비스의 수준은 단박에 높아질 거다. 억울한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경찰활동을 정교화하고, 합리적으로 업무를 처리할 것이다. 불합리한 명령체계에는 균열이 생기고, 법과 원칙이 우선하게 될 것이다. 경찰의 내부 감사인력은 1800명쯤 되지만, 외부 감시기구라면 300명 정도여도 훨씬 더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다. 내부냐 외부냐의 차이는 이렇게 크다. 영국의 잉글랜드와 웨일스에 좋은 모델이 있다고 십수년째 호소하고 있지만, 문재인 정부의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집권에 성공한 사람들이 흔히 보이는 태만 또는 오만이다. 아쉽다. 권력기관 개혁의 핵심은 권력기관이 정권이 아니라 오로지 국민에게만 충성을 다하도록 만드는 거다. 곧 민주주의 일반 원리가 권력기관의 운영에도 어김없이 관철되어야 한다. 모든 권력은 시민을 위해 존재하고, 시민의 통제를 받아야 하며 오로지 시민을 위해서만 일해야 한다. 대통령만을 위한 권력기관에서 벗어나 국민의 기관으로 거듭나는 것이 핵심이다. 촛불정부를 자임하지만, 제대로 된 권력기관 개혁은 지금껏 없었다.
2020-08-07 | hrights | 조회: 374 | 추천: 5
경희대 태권도학과. 역사와 전통에 빛나며 태권도를 이끌어간다는 자부심도 크다. 태권도 시범단을 운영하면서 세계 곳곳을 다니기도 했다. 선망의 대상이었고, 실력이 뛰어난 학생들만 단원이 될 수 있었다. 빛이 크다고 꼭 그림자도 클 필요는 없는데, 이 학교 시범단에서 폭력사건이 터졌다. 선배들의 구타를 견디지 못한 피해 학생들이 부모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어지간한 주먹질과 발길질은 참으려 했단다. 하지만 정도가 심했다. ‘엎드려뻗쳐’를 시켜놓고 몽둥이로 때리는 구타는 남녀를 가리지 않았다. 때리는 이유도 황당했다. 기강이 해이하다거나 손발이 맞지 않는다고 때렸고, 격파용으로 사온 사과가 예쁘지 않다고 때렸다. ‘선착순 집합’은 보통 2~3㎞씩 달리게 했다. 학교당국은 꿈쩍도 안 했다. 폭행을 훈련 과정에서 으레 있을 수 있는 일처럼 여겼다. 교수들은 선배 학생들의 구타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저 뒤로 물러서 있었다. 문제는 가해 학생들이었다. 뭐라 이유를 대든 폭력은 범죄일 뿐이니, 당장 학사징계와 형사처벌을 받게 될 처지였다. 가해자들은 급했다. 지금까지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것은 물론 앞길까지 막힐 판이었다. 가해자들은 필사적으로 피해자들에게 매달렸다. 용서해 달라, 합의해 달라며 피해자와 그 주변을 압박하는 건 전형적인 2차 가해였다. 곤혹스러웠다. 상처를 보듬고 달래기도 힘들었다. 아무리 가해자였지만, 학교 선배들이 청하는 용서를 계속 외면하기도 힘들었다. 잘못은 컸지만, 그래도 아직 어린 학생들이었다. 한 피해 여학생의 아버지가 특히 그랬다. 그는 교사였다. 누구보다 학교폭력의 구조와 양상을 잘 알고 있었다. 옛날 군대가 그랬듯, 학교체육에서도 악순환이 반복되는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어제의 피해자가 오늘은 가해자가 되는 악순환이었다. 가해 학생들도 지난해까지는 피해자였다. 폭력에 길들여지면서 강도는 점점 세졌고, 때려서라도 성과를 내야 한다는 이상한 사명감을 갖기도 했다. 일정한 실력을 요구하는 교수들의 주문도 무섭기만 했다. 그래서 가해 학생 몇 명을 처벌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라고 여겼다. 교수들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고 뒷전으로 빠져 있는 상황이라 더욱 그랬다. 용서하되, 교훈이라도 남기고 싶었다. 태권도학과 교수와 학생들을 모아놓고 폭력예방, 인권교육이라도 듣게 하고 싶었다. 폭력을 휘두르는 범죄가 얼마나 큰 잘못인지 생각할 기회라도 주고 싶었다. 폭력의 구조를 본 건 놀라운 직관이었다. 피해자와 그 가족이 모두 이렇게 성숙한 판단을 해야 한다는 건 전혀 아니다. 다만 교육자였던 그 아버지가 그랬다는 거다. 그 아버지가 마련한 인권교육을 맡게 되었다. 체육대학 학장실에 들렀다가 학장과 함께 강의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학장이 복도로 나오자, 교수와 학생들이 부지런히 오가던 복도에서는 마치 모세가 홍해를 갈랐다는 것처럼 기적이 일어났다. 모두들 복도 양쪽으로 붙었다. 학장이 가는 길에 거치적거리지 않으려는 몸에 밴 ‘배려’였다. 무슨 신흥종교 교주의 행차를 보는 것 같았다. 2010년 11월25일, 경희대 태권도학과에서 겪은 일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인권교육은 효과가 있었다. 폭행이 범죄라는 인식을 공유했고, 사람을 때리는 게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교육 때문인지, 그제라도 교수들이 폭력 단속에 나선 때문인지, 후배들을 때리는 일은 사라졌다고 한다. 경희대 태권도학과의 고질적인 폭력 악순환이 완전히 사라졌는지, 이젠 폭력 때문에 고통받는 학생들이 없는지 정말 궁금하다. 10년 세월이 흘렀다. 모세처럼 체육대학 복도를 갈랐던 체육대학 학장은 국기원 원장이 되었다. 대학 총장은 학교법인 이사장이 되었다. 아버지가 닦은 터전이어선지 모두들 자연스럽게 여겼다. 이사장의 형은 세계태권도연맹 총재다. 학교폭력의 악순환에서 가장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은 모두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그 여학생은 태권도를 포기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발군의 실력이었다. 시범단에서 활동할 만큼 실력이 뛰어났지만, 실력을 꽃피울 수 없었다. 마치 최숙현 선수가 그랬던 것처럼 피해자가 체육계를 떠나는, 아니 쫓겨나는 상황은 어제오늘이 다르지 않았다. 지금도 모든 게 막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몇 달 동안 호소했지만 귀담아들어주는 곳은 없었다. 책임 있는 사람들은 책임 있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피해를 호소하는 게 더 큰 피해를 불러오는 것 같았다. 흔히들 ‘극단적 선택’이라지만, 뭐든 꽉 막힌 상태에선 달리 선택할 게 없었을 거다. 쫓겨나듯 그런 선택으로 내몰린 거다. 스물두 살 청년을 극단으로 내몬 건 직접 가해자들만이 아니었다. 경주시와 경상북도, 철인3종협회와 대한체육회, 문화체육관광부와 국가인권위원회, 그리고 경찰까지 그가 피해자로서 도움을 받아야 할 곳들은 모두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이번에는 달라야 한다는 다짐은 책임 있는 사람들에게서 나와야 한다. 해결책도 책임 있는 사람들만 마련할 수 있다. 구타와 가혹행위, 성폭력이 일어나면 상상하는 것 그 이상의 단호한 처벌을 받는다는 것을 정확하게 보여주어야 한다. 피해를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는 풍토는 체육계와 체육팀을 운영하는 학교, 기업, 정부가 만들어줘야 한다. 폭력예방교육과 인권교육은 수시로 진행해야 하고, 체육계 폭력에 대한 감시 프로그램도 작동시켜야 한다. 대통령,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교육부 장관과 교육감들,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 대한체육회 회장 등 책임 있는 사람들이 답해야 한다. 이미 나와 있는 답은 챙기고, 부족한 부분도 챙겨야 한다. 어떤 종목이든 폭력이 없어지지 않으면, 그 종목 자체를 영구 추방하겠다는 자세로 폭력 근절에 나서야 한다. 책임자들에게 묻고 싶다. 이제 제2의 피해를 막을 준비는 되었는가. 오늘은 어제와 달라졌는가. 최숙현 선수는 마지막 희생자인가.
2020-07-17 | hrights | 조회: 288 | 추천: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