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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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 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권보드래(고려대 국문학과 교수), 김녕(서강대 교육대학원 교수), 김대원(성공회 서울교구 신부), 김영미(금천문화예술정보학교 교사), 김창남(성공회대 신방과 교수), 김희수(변호사), 도재형(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서상덕(가톨릭신문 기자), 오인영(고려대 역사연구소 연구교수), 이재상(CBS PD), 이재성(한겨레신문 기자), 이재승(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지상(가수 겸 작곡가), 이찬수(서울대 연구교수), 장경욱(변호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 허홍렬(치과의사), 홍승권(삼인출판사 부사장), 황미선(면일초등학교 교사)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이재승/ 인권연대 운영위원 더불어 민주당의 박광온 의원이 아동수당을 도입하려는 취지의 법안을 제출했다고 한다. 새누리당도 이 문제를 긍정적으로 고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일호 경제부총리는 금고지기로서 아동수당이 출산율에 적극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돈만 허비할 수 있다고 우려를 내비쳤다. 일각에서는 청년수당에 이어 아동수당도 복지포퓰리즘이라고 비난한다. 보통사람들은 이 문제를 과도하게 이데올로기적으로 덧칠하기보다는 해결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아동수당이나 청년수당이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소극적인 정부보다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장단기적으로 가동할 제도적인 프로그램을 가진 정부를 원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자유사회라는 미명 아래서 만사를 각자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는 사사주의(privatism) 교리에 강박되어왔다. 그래서 정치적 권력, 경제적 부, 사회적 지위를 갖지 못한 개인들은 크고 작은 모든 일을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나 미래에는 지금까지 운명으로 수용해왔던 바를 민주주의와 공동책임으로 극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동수당이 신설되더라도 자신의 자녀세대들에 더 좋은 미래에 대한 비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하는 사람이라면 의도적인 혹은 비의도적인 출산파업을 계속할 것이다. 빈곤의 미래가 확정된 상황에서 자녀를 출산하겠다는 부모의 결단이 종족보존이라는 허망한 욕망일 뿐이라고 말하면 불합리한 것일까? 나는 현재의 정치와 경제가 무력한 대중들에게 어떠한 희망도 제공할 수 없기 때문에 대안적인 정치와 대안적인 경제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믿는다. 정치적으로 보통사람들의 권한을 강화하고, 경제적으로 이들의 자력갱생을 북돋아주는 체제가 그것인데, 이를 자유사회주의(liberal socialism)라고 부를 수 있다. 자유사회주의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아동수당이나 청년수당은 근본적인 해법이 아니라 근본적이고 지속적인 개혁으로 가는 초기 방책들 중 하나이다. 최근에 이러한 고민의 일단을 담은 존 롤스(John Rawls 1921-2002)의 유작 <공정으로서의 정의: 재서술(이학사, 2016)>이 주목을 끌고 있다. 롤스는 자유주의의 철학 안에 있기 때문에 앞서 말한 자유사회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자유사회주의자들의 요구사항인 사회상속제에 동조하고 나섰기 때문에 거론해볼 필요가 있다. 롤스는 자신의 이상적인 정치경제체제를 ‘재산소유민주주의(property-owning democracy)’라 표현하였다. 존 롤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롤스는 이미 <정의론 A Theory of Justice(1971)>으로 20세기 후반 정치경제의 담론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정의의 두 원칙을 기반으로 자유자본주의의 폐해를 시정하려는 수정자본주의나 복지국가를 철학적으로 정당화하였다고 평가받았다. 그러나 롤스의 이론이 자유자본주의 체제를 실제로 어떻게 수정할 수 있는지, 그러한 수정작업에서 어떤 장기를 보여주는지에 대해서는 그다지 분명하지 않다. 극단적인 재산권 절대주의자가 아니라면 자유자본주의자들도 체제의 존속을 위해서 어느 정도 복지정책의 시행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회색의 이론은 시저와 브루투스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지만, 롤스는 만년에 자신의 입장을 더 분명하게 드러내었다. 롤스는 <정의론 수정판(2003, 이학사)> 서문에 재산소유 민주주의를 제시함으로써 복지강화론을 능가하기 시작하였다. 최근에 번역된 <공정성으로서 정의: 재서술>은 재산소유민주주의를 경제체제론의 관점에서 부연하였다. 롤스는 재산소유민주주의라는 개념을 1977년 노벨상을 수상한 자유사회주의자 제임스 미드(James Meade 1907-1995)로부터 수용하였다. 미드는 이미 1930년대에 오늘날 기본소득으로 알려진 시민소득(citizen’s income)이나 국가배당금(state dividends)을 구상하였다. 물론 기본소득이나 사회상속 관념은 역사가 더 길다. 미국 독립전쟁기에 토마스 페인이, 1830년대에 토마스 스킷모어가 사회상속제를 제시하였으며, 오늘날에는 하버드 대학의 로베트로 웅거(Roberto Unger) 교수가 실험주의적 사회구상 안에서 상세하게 전개해 놓았다. 사회상속을 제도로 구현하는 방식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차이가 있지만 기본은 하나다. 사회에 진입하는 모든 개인들은 부모가 아니라 사회로부터 자신의 삶에 필요한 자원을 확보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이것이 재산에 대한 인권으로서 기본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사회의 구성원 모두에게 인생의 전환점에서 재정적 수요를 충족시킬 재원을 공급해준다. 그래서 개인은 대학입학, 취업, 결혼, 창업 시에 중요한 재원을 향유하게 된다. 개인은 일생동안 부를 보유하고 증식시킬 수 있지만, 사망시에 자신이 증식시키고 보유한 재산의 필수적인 부분만을 자녀에게 상속시킬 수 있고 나머지는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 이렇게 하여 사회는 태어나는 모든 개인들 앞에서 사회의 모든 부를 들고 가서 심판을 받는다. 개인이 1/n의 몫을 통해 기존의 사회질서에 참여하면서 동시에 질서의 재편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모든 수저가 기본적으로 1/n로 수렴되도록 하는 것이다. 증여세와 상속세는 사회상속 관념을 어느 정도 구현하는 것이라고 본다. 증여세와 상속세를 당연시하면서도 사회상속제에 이질감을 느끼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청년수당, 아동수당, 기본소득은 약자에 대한 배려에 기초한 전통적인 복지권이 아니라 사회전체의 경제 질서에 대한 동등한 참여권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복지가 아니라 재산의 분산과 경제의 민주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앞서 말한 자유사회주의는 자유주의의 혁신 논리를 기성의 자유자본주의 정치, 경제, 사회체제에 대해서도 가동시키려는 운동이고, 나아가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도 생산수단과 경제적 부의 사회적 소유를 증강시키려는 운동이다. 경제적 측면에서는 개인들의 자력갱생과 보통사람들의 삶을 밑받침하는 국가의 책임재산을 강화하고 증식시키는 정치론이다. 경제부총리의 말처럼 실제로 아동수당이 출산율 증가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 그 경우 문제는 아동수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동수당과 연쇄반응을 선순환적이고 누적적으로 가져다줄 사회의 공정한 토대와 미래지향적 비전이 없다는 데에 있다. 민주적인 토대와 비전은 돈으로만 될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돈이 없다면 결코 될 수 없는 일이다. 보통사람들은 지난 50년간 정치적 독재에 허덕여왔다. 최근 20년은 빠져나올 수 없는 경제적 독재와 빈곤 속에 갇혀 있다. 이미 내년 대선의 프레임은 복지에서 경제민주화로 이동하는 것 같다. 부자에게 많은 세금을 거두어 빈곤계층에게 이전시키는 것만으로는 현안을 다 해결할 수 없다. 오히려 재산, 특히 생산수단을 소수의 수중에 두지 말고, 널리 확산시키고, 자본주의 질서 안에서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소유방식들이 성장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는 생산과 소유의 영역에서 혁신이 필요한 때이다. 이재승 위원은 현재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154 | 추천: 0
-ㅈ일보 ㅎ형에게 이재성/ 인권연대 운영위원 형, 잘 지내죠? 얼굴 본 지 벌써 1년이 넘었네요. 곧 만나서 얘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정리된 생각을 먼저 전달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형,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시청 부근에서 소주 마실 때 생각나요? 그때 형은 여권에 대선 후보로 나설만한 사람이 안 보인다고 했죠. 나는 반기문이 있지 않냐, 새누리당이 반기문을 후보로 옹립하게 될 거, 라고 말했죠. 그때 형은 그 작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흥미로워했죠. 그러고 나서 몇 달 있다가 반기문의 대선 출마 가능성에 대한 기사가 나오기 시작했고, 지금은 거의 기정사실화된 상태입니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대통령 후보가 누가 될지 맞히는 데는 나름 신통력이 있나봐 ㅎㅎ 노무현이 해양수산부 장관할 때니까, 대선 후보로 거론도 되지 않을 때인데, 민주당 보좌관들과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내가 노무현 대선 후보 어떠냐고 말했거든. 그때 이 양반들이 말도 안 된다며 펄쩍 뛰더라구. 한마디로 ‘깜’이 아니라는 얘기였지. 그런데 1년인가 지나서 노무현은 민주당 대선후보가 됐죠. 뭐 내가 돗자리 깔고 나앉겠다는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에요. 별다른 비결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그때그때 시대정신을 읽으려고 노력하면 후보가 보이더군요. 아 그렇다고 반기문이 시대정신에 맞는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새누리당은 좀 다르거든. 새누리당은 철저하게 당선 가능성으로 후보를 고르죠.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요즘 안철수 새누리당 후보는 어떨지 상상해보고 있어요. 사실 요즘이 아니라 안철수가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했을 때부터니까 아홉 달 전부터라고 해야겠네요. 안철수에 대한 내 생각은 예전에 몇 차례 얘기한 적이 있는데,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래요. ‘안철수는 보수적인 사람이고 보수정당에 어울리는 사람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다보니까’ 어울리지 않는 야당 정치인이 돼서 저렇게 고생하고 있다는 생각이에요. ‘야당 정치인 안철수’는 안철수 개인만이 아니라 국민들에게도 도움이 안 되는 일이에요. 안철수의 등판 시점으로 돌아가 봅시다. 이명박 당시 대통령의 독선적·사기적 리더십에 대한 반발로 국민들은 합리적이고 정직한 인물을 원했고, 안철수는 그런 국민적 열망에 부합하는 인물이었죠. 안철수의 정치 참여는 시대적 요청에 응답한 행위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이 양반이 대선 후보로 출마하면서 내놓은 공약은 이른바 진보적 테제와는 거리가 먼 것들이 많아요. 안철수는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합리적인 교육을 받은 엘리트로서 정직과 교양, 겸손함까지 갖춘 훌륭한 민주 시민이지만 이 나라의 근본적인 갈등을 혁신적으로 풀어낼 수가 없어요. 그러기엔 자기가 가진 게 너무 많아요. 매사에 우유부단하고 어정쩡한 스탠스를 거듭하자 인기 거품이 사라졌고, 결국 마땅한 대권주자가 없어 고민에 빠진 호남 정치인들과 손을 잡기에 이른 거죠. 요컨대 안철수의 정치적 우유부단함은 지금 입고 있는 정치적 의복이 맞지 않기 때문에 발생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체형에 맞는 옷으로 갈아입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면 특유의 우유부단함을 상당 부분 고칠 수 있을 거예요. 사진 출처 - 한겨레 자, 이제 안철수가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되면 우리나라에 뭐가 좋은지 이야기할 차례네요. 사실 지금부터가 내가 오늘 형에게 말하려는 핵심이에요. 우리나라 정치 지형에 대해 ‘기울어진 운동장’이라고들 하잖아요. 나는 그걸 ‘함몰된 운동장’이라고 고쳐 부르고 싶어요. 기울어진 건 맞는데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게 아니라 왼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오른쪽에 엄청나게 큰 구멍이 있는 거예요. 그 구멍 때문에 상대적으로 가벼워진 오른쪽이 들려있는 거죠. 왼쪽 운동장 선수들이 오른쪽을 공격하려고 해도 경사가 높아서 일단 기어오르기도 어려워요. 어렵사리 하프라인을 넘어 공격을 한다고 해도 거의 모든 볼을 이 구멍이 삼켜버리죠. 그 구멍의 이름은 ‘도덕성’ 혹은 ‘정직’입니다.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가 밀실 단식 투쟁을 벌이고 있다는데, 이 양반이 2년 전에는 국회의원이 단식하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을 거라고 말했죠. 참여정부 당시 농민들이 경찰 진압과정에서 사망했을 때는 대통령이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이정현입니다. 이 사람들의 특징은 자기 처지에 따라 말을 180도 바꾸는데 능하다는 거죠. 비슷한 예는 너무 많아서 일일이 거론하려면 타이핑하는 손가락이 아플 지경입니다. 이들이 이렇게 막무가내 식으로 나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자기들이 이 나라의 주인이고 주류라는 자의식에서 오는 자신감입니다. 아무리 개판을 쳐도 손해 볼 게 없기 때문이죠. 반면에 야당은 명백한 대선부정개입 사건에도 불구하고 선거무효소송조차 제기하지 못합니다. 사법부조차 권력에 장악돼 있는 상황에서 꼴만 우스워지고 역풍을 초래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불균형 현상은 어느 조직에서나 흔히 나타나는 인간사회의 한 특징이에요. 예를 들어 여성, 흑인, 장애인, 동성애자들이 남성, 백인, 비장애인, 이성애자보다 자기검열이 심하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죠. 두 번째 해석은 이 사람들이 전두엽이 활성화되지 않는 전형적인 사이코패스일 가능성입니다.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으며,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인간들. 우병우나 황교안 등 이 정권 고위 인사들 뿐 아니라, 이정현이나 김무성, 윤상현 등 새누리당 인사들의 행동 패턴을 보면 사이코패스의 정의와 신기할 정도로 맞아떨어집니다. 문제는 이런 특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나라를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점이에요. 합리적 토론이나 개선이 불가능하죠. 새누리당이 변하지 않으면 우리 사회의 변화는 불가능합니다. 누가 이런 후진적 문화를 바꿀 수 있을까요. 이재오나 김문수 같은 출세형 변절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원희룡이나 남경필 등 상대적으로 합리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새누리당의 대선 후보군들도 그거 못합니다. 그들은 수십 년씩 새누리당(한나라당)에서 정치하면서 그 체제에 안주해 왔습니다. 가끔 다른 목소리를 내는 건 일종의 부재증명에 불과하죠. 하지만 안철수는 할 수 있어요. 안철수는 박근혜보다는 이명박에 가까운 유형입니다. 자기 콘텐츠가 있고 CEO 출신으로서 집행력이 있지요. 비록 진보적 어젠다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안철수 정도의 합리성이면 우리 사회에 상당한 진전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재벌 위주의 경제체제가 동맥경화를 일으키고 있는 한국경제 난맥상에도 일정한 변화가 올 수 있을 겁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안철수는 야당으로는 안 됩니다. 될 수도 없겠지만 만에 하나 된다 해도 성공적 대통령이 되기 어려워요. 진보적 개혁을 바라는 지지자들의 눈높이에 맞지 않기 때문이죠. 아 반기문은 어떠냐고요? 반기문이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되고 만약 대통령까지 된다면 박근혜 정권이 5년 연장되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나는 생각해요. 반기문은 콘텐츠 없이 이미지만 존재하는 박근혜와 판박이거든요. 대한민국 보수가 일치단결해서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든 건 자기들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잖아요. 유능한 대통령이 아니라 무능하더라도 우리 먹고사는데 지장 없는 사람이면 되는 거였죠. 반기문은 전형적인 ‘바지 사장’ 스타일이에요. 그런 점에서 지금 보수의 요구에 가장 적합한 인물입니다. 유엔에서조차 ‘투명인간’이란 별명을 얻은 사람이 각종 이해관계가 치열하게 맞부딪히는 대한민국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을 겁니다. 하고 싶지도 않을 거구요. 내가 형에게 이런 얘기를 하는 건 논조가 정반대인 신문사에 다니는 형을 계속 만나는 이유와 같아요. 형은 여전히 합리적 사고가 가능한 사람이거든. 몸은 21세기에 있지만 마음만은 70년대를 사는 유체이탈 대통령 덕분에 보수 진영 내에서조차 형처럼 합리적 사고를 하는 분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어요. 나는 그런 분들의 생각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여당이 변하면 많은 게 변할 거고, 비로소 우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거예요. 만약 참여정부 때 김영란법을 시행하려고 했다고 생각해보세요. 나라 전체가 난리가 났을 겁니다.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을 거구요. 그런데 지금 보세요. 모두들 숨죽이고 어찌 될까 눈치만 봐요. 이게 주류의 힘이죠. 새누리당이 정말 장기집권을 꿈꾼다면, 그러면서도 우리나라가 앞으로 한발짝 나아가기를 원한다면 이런 방식으로 개혁을 접목해야 합니다. 형이 다니는 회사나 새누리당에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늘어나야 해요. 그래야 우리에게 미래가 열릴 거예요. 정치공학 얘기 하나만 더하면, 나는 안철수가 진정한 정치9단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어요. 영남이 아니라 호남에 판을 깐 게 한 수가 아니라 두 수 앞을 내다본 포석 아니냐는 거죠. 안철수가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된다면 역대 새누리당 대선 후보 가운데 호남에서 가장 높은 지지율을 얻을 수 있을 거예요. 겉으로 보이는 것만 믿는 나 같은 바보들은 안철수가 부산 출마를 거부하고 “그건 노무현의 길”이라고 선언했을 때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는데, 지금 보면 안철수가 처음부터 ‘동진’이 아닌 ‘서진’ 전략을 택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상이 내가 안철수가 ‘기름장어’ 반기문을 제치고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되기를 바라는 이유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새누리당과 국민의당이 합당을 해야겠죠? 3당 합당도 했는데 2당 합당쯤은 일도 아니죠. 가장 큰 난관은 반기문을 통해 퇴임 이후 안전을 보장받으려는 박근혜 일파의 견제일 겁니다. 형네 신문사가 청와대와 맞장 뜨려했던 이유도 이거 아니었나요? ‘이미 민심이 떠난 청와대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 정권재창출은 불가능하다’는 거죠. 당장은 서슬이 무서워 숨죽일 수밖에 없겠지만, 레임덕이 더 깊어지면 반격이 가능할 거예요. 자,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질문이나 반론은 술 한 잔 사면 받을게요 ㅎㅎ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88 | 추천: 0
오인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마크 트웨인은 고전을 ‘좋다고 칭찬은 하지만 읽지는 않는 책’이라고 했다. 제법 그럴듯하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고전이라 부를만한 책이 어디 일이십 권에 불과할 것이며 독서할 엄두는커녕 책 읽을 여유조차 없는 뒤숭숭한 시절이니, 좋은 책이라는 말은 들었어도 정작 읽지 못한 고전들이 즐비할 법하다. 그러나 그럴듯한 말은 그저 그럴싸할 뿐이다. 내가 읽지 못했다고 모두가 고전을 읽지 않는 것은 아니며, 상식적으로도 사람들이 읽지 않는 책이라면 애당초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역사상 유명한 인물이 모두 역사적 위인인 것은 아니듯이, 유명한 책이라고 해서 전부 고전이라고 불리는 것은 아니다. 한 권의 책이 고전이 되려면 거기에 시간의 침식을 견뎌내는 힘이 있어야 한다.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이 지금 여기에서도 적용 가능한 진리의 메시지가 담겨있어야 한다. 시대를 넘어서는 진리의 메아리가 없다면 고전이 될 수 없다. 고전읽기와 관련 깊은 강의를 십여 년 하다 보니, 반복해서 읽게 되는 고전들이 있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1859)도 그 가운데 하나다. 주관적인 독서 취향을 보태서 하는 말이지만, 「자유론」은 본문의 어느 페이지를 펼치든 밑줄을 칠만한 대목이 나오는 고전 중에 고전이다. 그럼에도 읽을 때마다 각별히 눈길을 끄는 대목은 달라진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같은 책도 그것을 읽는 상황이 달라지면 주목하게 되는 대목도 바뀐다는 사정도 이유에 포함될 것이다. 올해 「자유론」을 다시 읽으면서 내 마음에 울림을 자아낸 두 대목이 있다. 그 한 대목은 이렇다. “큰 원칙에 대해서는 시비를 걸 수 없다는 암묵적 합의가 존재하는 곳, 그리고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곳에서는 인간 역사를 그토록 아름답게 빛내주던 거대한 규모의 정신 활동이 일어날 수 없다. 사람들의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크고 중요한 문제에 대한 논란을 봉쇄하게 되면 인간 정신의 깊은 곳을 뒤흔드는 일이 생길 수 없다.” -서병훈 옮김, 「자유론」(책세상) 72쪽 책 읽기란 단지 텍스트(Text) 읽기가 아니라 그 텍스트가 놓여 있는 상황(Context) 읽기이기도 하다는 점을 실감한 것은, 내가 이 대목을 우리의 상황에 비추어 이렇게 읽었기 때문이다. ‘사드 배치에 대해서 시비를 걸어서는 안 된다고 겁박하는 정부여당이 존재하는 곳, 한반도의 평화와 한국인의 삶에서 가장 긴요한 문제인 분단 극복은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정부여당이 있는 곳에서는 우리 역사를 그토록 아름답게 빛내주던 자유와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없다. 한국인이 당연히 알아야 할 크고 중요한 문제-세월호참사의 진상, 고위 권력자들의 비리, 10엔짜리 ‘위안부’ 밀약의 내막 등에 대한 논의가 활짝 열려야만 맹목적 추종과 전도된 시각에 역동적인 충격을 줄 수 있다.’ 고전이란 지금 여기의 현실과 무관한, 그래서 읽기 힘든 책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 여기의 상황을 원리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힘을 주는 책, 따라서 반복해서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물론, 좋은 책을 읽는다고 현실이 당장 좋아지진 않는다. 고전이라고 해서 ‘금 나오라고 하면 금이 나오는’ 요술을 부리진 못한다. 그러나 제1급의 고전(古典)을 읽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3류 만도 못한 정권 때문에 고전(苦戰)하는 사람들이 줄어들 수는 있다. 대다수 사람들의 삶과 정신을 절망에 가까운 파국 상태로 내모는 사대매국 몰이꾼들의 마수에서 벗어날 여지도 커진다. 사진 출처 - 시사인 공명을 자아낸 「자유론」의 또 한 대목을 마저 소개하자. 다소 긴 인용문이지만 이 대목을 꼭 새겨들었으면(설사, 그럴 가능성이 없을지라도!) 좋겠다 싶은 사람을 마음속으로 꼽아보며 읽는다면 썩 지루하게 느껴지진 않을 것 같다. 어떤 사람의 판단이 진실로 믿음직하다고 할 때, 그 믿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대한 다른 사람의 비판에 늘 귀를 기울이는 데서 비롯된다. 자신에 대한 반대 의견까지 폭넓게 수용함으로써, 그리고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에게도 어떤 의견이 왜 잘못되었는지 자세히 설명해줌으로써, 옳은 의견 못지않게 그릇된 의견을 통해서도 이득을 얻게 되는 것이다. 어떤 문제에 대해 가능한 가장 정확한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상이한 의견을 가진 모든 사람들의 생각을 들어보고, 나아가 다양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시각에서 그 문제를 이모저모 따져보는 것이 필수적이다. 현명한 사람치고 이것 외에 다른 방법으로 지혜를 얻은 사람은 없다. 인간 지성의 본질에 비추어 볼 때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지혜를 얻을 수는 없다. 다른 사람의 생각과 자신의 생각을 비교하고 대조하면서 틀린 것은 고치고, 부족한 것은 보충하는 일을 의심쩍어 하거나 주저하지 말고 오히려 이를 습관화하는 것이 우리의 판단에 대한 믿음을 튼튼하게 해주는 유일한 방법이다.” - 「자유론」 50쪽 현대국가의 지도자가 반드시 플라톤이 주장한 철인(哲人)이어야 한다고 말하면 강변이겠지만, 적어도 밀이 말하는 ‘현명한 사람’이어야 민주국가의 지도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독재자가 아니라 지도자라면, 최소한 사회에는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이해관계가 다른 만큼 의견의 차이가 있는 게 당연하다는 것쯤은 능히 알고, 자신과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국론분열’세력이라고 매도하지 않고, 오히려 경청·대화·토론을 통해서 이견과 갈등을 합리적으로 조정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게 아닐까? 에이, 우이독경이 될 뿐인 말은 접자. 차라리 권력이란 국민을 대신해서 행사하기 편리하도록 ‘국민의 대리인’ 손에 집중되어 있을 뿐, 그것은 본질적으로 국민의 권력임을 떠올리자.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바꿔버릴 수 있는 게 대리인이라는 것을 상기하자. 그렇게 하는 것이 권력자가 국민의 이익에 어긋나게 함부로 정치를 하지 못하게 하는 최선의 길임을, 우리가 기억하자. 고전이라는 이름의 책은 이렇듯 개인이자 시민으로서 우리가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인간적 덕목과 권리를 새삼스럽게/새롭게 환기시켜준다. 바야흐로 언필칭 독서의 계절, 가을이다. 그간 미뤄둔 고전읽기에 나설 엄두라도 내보자. 함석헌 선생님의 일갈이 귀에 쟁쟁 울리는 듯하다.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 오인영 위원은 현재 고려대 역사연구소에 재직 중입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95 | 추천: 0
김창남/ 인권연대 운영위원 이른바 ‘먹방’ ‘쿡방’이 여전히 인기다. 이제 어지간히 물릴 때도 됐다 싶은데 휴일 TV 리모콘을 돌리다 보면 언제든 최소 대여섯 개 채널에서 뭔가를 먹거나 요리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먹방도 그 사이 참 다양하게 진화했다. 전국의 맛집을 찾아다니는 프로그램이나 전문 요리사가 요리 시범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처럼 오래된 먹방도 여전히 잘 나가고 있고, 몇몇 연예인들이 외딴 곳에 모여 끼니를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리얼리티 포맷도 인기를 유지하고 있다. <아빠, 어디가?> <정글의 법칙> <1박 2일> <나 혼자 산다> 등 먹방과 직접 관련이 없어 보이는 대부분의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뭔가를 먹는 장면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점잖게 테이블에 둘러앉아 음식에 관해 품평을 나누는 프로그램도 있고 남의 냉장고를 통째로 들고 와 그 안에 든 재료로 정해진 시간 내에 음식을 만들어 겨루는 프로그램도 있다. 최근에는 먹는 모습을 그냥 보여주는 프로그램들이 인기다. 먹성 좋아 보이는 개그맨들이 식당에 모여 음식을 맛있게 먹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도 있고, 젊고 예쁜 여자 아이돌 멤버가 음식 먹는 걸 보여주는 프로그램도 등장했다. 일부 인터넷 방송 채널 가운데는 젊은 여성이 엄청난 양의 음식을 먹어대는 장면을 하염없이 보여주는 방송도 있다. 놀랍게도 이런 방송이 적지 않은 인기를 모으고 있고 방송 출연자가 단지 먹어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큰 돈을 버는 사례도 적지 않단다. 먹방의 인기에 대해서는 몇 가지의 해석이 나온 바 있다. 하나는 가족의 해체와 1인 가족의 증대가 먹방의 인기를 가속화한다는 설명이다. 가족이 해체되고 혼자 사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혼자 밥을 먹어야 하는 외로움을 가상으로나마 덜고 싶은 욕망이 먹방의 인기로 나타난다는 해석이다. 또 하나의 해석은 다이어트에 대한 과도한 사회적 압박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누군가 맛있게 음식을 먹는 모습에서 일종의 전복적 즐거움을 얻는다는 해석이다. 사실 최근의 먹방은 다이어트를 통해 체형을 가꾸고 소식으로 건강을 유지해야 한다는 지배적 담론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측면이 있다는 점에서 일면 수긍이 가는 해석이다. 사진 출처 - 티브이데일리 대중문화는 기본적으로 대중의 욕구와 욕망을 드러내고 투사하는 대상이다. 영화를 보고 TV를 보면서 얻는 대중의 쾌락은 결국 그들이 가진 욕구와 욕망이 충족되는 데서 오는 쾌락이다. 먹는 것에 대한 욕망과 섹스에 대한 욕망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적 욕구에 해당한다. 가장 기본적인 욕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먹방은 포르노그래피와 그리 다르지 않다. 먹방을 두고 음식 포르노라는 비판이 나온 건 충분히 이해할만한 일이다. 심리학자 매슬로우(Maslow)는 인간의 욕구를 5단계로 구분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욕구는 식욕과 성욕 등 가장 기본이 되는 생리적 욕구, 안전에 대한 욕구, 소속과 애정에 대한 욕구, 명예와 권력의 욕구, 그리고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고자 하는 자기실현의 욕구로 단계화되어 있고, 아래 단계의 욕구가 충족되어야만 보다 상위 욕구에 대한 동기부여가 된다. 그러니까 일단 배가 부르고 안전해야 사랑도 꿈꾸고 명예도, 자기 실현도 욕망할 수 있게 된다는 얘기다. 매슬로우의 이론은 여러 가지 면에서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대중문화에 대한 대중의 취향을 설명하는 데는 일정하게 유의미한 점이 있다. 다수 대중의 인기를 얻는 대중문화일수록 대체로 낮은 단계의 기본적인 욕망에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식욕과 성욕, 안전, 소속감과 애정 같은 욕구 말이다. 헐리우드 영화가 세계를 지배하는 이유 중 하나는 대체로 가장 기본적인, 따라서 보편적인 욕구에 기반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최근 먹방의 인기는 지금 대중의 욕구가 가장 기본적이고 생리적인 욕구에 집중되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다. 어떤 사회적 가치나 이념, 이상의 실현, 아름다움의 추구, 이런 것들은 끼어들 여지도 없이 당장의 생존과 최소한의 안전과 내 식구들의 먹을 거리가 더 중요한 시대를 드러내는 징후일 수 있다는 말이다. 사회가 보수화되고 역사 퇴행의 조짐이 완연하고 최소한의 안전과 복지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불안과 의심이 강화되는 시점에 먹방이 유행하고 있다는 건 참 시사적이다. 김창남 위원은 현재 성공회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75 | 추천: 0
최낙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뜬금없이 도깨비 이야기냐고요? 역시 여름밤엔 옛날이야기가 아닐까요, 그것도 도깨비 이야기 말입니다. 이름 석 자 정도만 읽고 쓸 줄 알았던 외할머니가 해주신 이야기입니다. 옛날 어느 마을에 가난한 김 서방이 살았어. 이집 저집 남의 집 허드렛일만 해주고 근근이 먹고살던 그 김 서방이 어찌어찌 해서 도깨비와 친구가 된 거야. 어느 날 도깨비가 김 서방한테 메밀묵을 좀 쑤어달라고 했대. 도깨비는 원래 메밀묵을 제일 좋아하거든. 김 서방이 쑤어준 메밀묵을 먹으면서 도깨비는 “아이구 맛있다... 아이구 맛있다!” 하면서 정신없이 먹더래. 그러고 나서 다음날 김 서방한테 고맙다고 하면서 가마솥을 하나 주더래. 그런데 이 가마솥이 보통 가마솥이 아니야. 뚜껑을 열기만 하면 하얀 쌀이 저절로 나오는 가마솥이었어. 도깨비는 그걸 줄 테니 자기한테 매일 밤 맛있는 메밀묵을 만들어달라고 했대. 김 서방은 그러자고 했지. 그깟 메밀묵 한 덩이하고 매일 쌀이 나오는 가마솥하고 바꾸자니 당연히 그러자고 했겠지, 쌀이 얼마나 나오는 솥이냐고? 할머니집 부엌에 있는 가마솥 있지? 그거보다 큰 거였어. 그 큰 가마솥에서 쌀이 날마다 한 가득씩 나오니 김 서방은 이제 먹고사는데 아무런 걱정이 없었어. 남의 집 허드렛일을 안 해도 되고, 이쁜 색시도 얻었지. 이제 김 서방은 아무것도 아쉬울 게 없었어. 그러고 나니까 이젠 매일 밤마다 집에 찾아와 메밀묵을 달라고 찾아오는 도깨비가 점점 귀찮아졌어. 그깟 메밀묵 따위야 얼마나 하겠어. 사람이 배가 부르면 다 그렇게 돼. 아무튼 도깨비가 성가시게 된 김 서방이 꾀를 냈지. 도깨비한테 “나는 이 세상에서 돈이 제일 무섭네. 자네는 세상에서 뭐가 가장 무서운가?” 하고 물었대. 그러자 도깨비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나는 말 피가 제일 무서워” 그러더래. 김 서방은 대번에 옳다구나 했지. 그리고 바로 다음날 김 서방은 대문 앞에 말 피를 발라 놓았지. 귀찮은 도깨비가 다시 오지 못하게 말이야. 말 피? 아, 말 피도 몰라? 이히힝 하는 그 말 있잖아. 그래 소 말고 말! 그 말의 피 말이야. 그래, 도깨비는 너무 화가 났지. 그래서 도깨비는 김 서방이 가장 무서워하는 걸 김 서방 마당에 던졌어. “이 못된 김 서방아, 너도 죽어봐라. 네가 제일 무서워하는 돈이다!” 그러면서 말이야. 그것도 매일매일 밤마다. 아무렴... 김 서방은 금세 고을에서 가장 부자가 됐지. 고래등 같은 기와집에 첩을 열둘이나 거느리게 됐지. 작은마누라 말이야. 응? 자기 색시가 아무리 이뻐도 돈 많은 사내들은 다 그래. 그렇다고 김 서방이 죽을 때까지 떵떵거리는 부자로 살았냐고? 그건 아니야. 도깨비들은 자기가 줬던 것은 꼭 다시 가져가거든. 도깨비한테 받은 돈은 시간이 지나면 모두 나뭇잎이 된다는 거야. 그 돈으로 지은 집도 다 허물어지고. 결국 김 서방은 거지가 되어서 죽었대. 이제 그만 자자. 아! 그런데 혹시 니가 도깨비를 만나 횡재를 하게 되면 무조건 땅을 사야 되는 거야. 도깨비가 다른 건 다 줬다 뺏어가도 땅은 못 뺏어가거든. 내 말 명심해. 꼭 땅을 사야 된다, 알았지? 사진 출처 - yes24 일찍이 부동산 땅 투기만 한 것이 없다는 걸 예견하셨던 걸까요? 아무튼 외할머니는 아흔에 가까운 나이에 돌아가실 때까지도 도깨비가 실제로 살아 있었다고 믿는 분이었습니다. 외할머니가 제게 들려주었던 못된 도깨비, 바보 같은 도깨비, 무서운 도깨비 등 많은 도깨비 이야기는 그저 재미가 아니라 외할머니가 믿고 있었던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외할머니는 제가 어느 날 산길에서 도깨비를 만날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밤길에 누가 너를 “김 서방” 하고 부르면 도깨비인 줄 알라든가, 씨름을 하자는 도깨비를 만나면 반드시 왼쪽 다리를 걸어 넘기라든가 등등의 도깨비에게 홀렸을 때의 대처법을 진지하게 말씀해주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이 뭘 믿고 저리 버티겠나 하는 이야기가 뜨겁습니다. 롯데그룹 부회장이 자살하기 전 남긴 유서에 ‘신동빈 회장은 훌륭한 사람이다, 롯데그룹 비자금은 없었다.’고 썼다고 합니다. 어느 명망 있는 역사학자의 파렴치한 행태를 보며 ‘정말 그 사람이 미친 게 아니고서야...’ 하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무엇에 홀린 걸까, 저는 무엇에 홀려 사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에게 마음 깊이 남아 있는 외할머니의 말씀이 있습니다. “도깨비의 키가 얼마인지는 알 수 없다. 도깨비는 원래 올려다볼수록 커지고 내려다볼수록 작아진다. 그러니 도깨비와 앞에 섰을 때 네 눈높이가 바로 도깨비의 실제 키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최낙영 위원은 현재 도서출판 '밭' 주간으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94 | 추천: 0
김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우병우 민정 수석. 그는 간신인가. 충신인가. 난 한 TV 방송에 출연해서, 우 수석은 박근혜 대통령에게 충성을 맹세한 사람으로 보인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일편단심 오롯이 박근혜 여제를 위하여 충성하겠다고 맹세하면 충신이 되는 것일까. 언론에서 보도하고 있는 우 수석의 비리 혐의는 이번에 수사 의뢰된 아들 병역특혜 의혹과 관련한 직권 남용, 가족회사 관련 횡령 이외에도 처가의 차명 땅 의혹, 재산 허위 신고 등등이 있다. 민정수석이라는 자리는 권력의 핵 중에서도 핵이라 할 수 있다. 검찰, 경찰, 국정원, 국세청, 감사원 등 주요 사정기관의 공직기강을 감시하고, 이들의 활동이나 인사에 막중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민정수석은 정권의 도덕성을 가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다. 그래서 고도의 청렴성과 엄격한 도덕성을 갖춘 인물이 가야 하는 곳이다. 박근혜 여제께서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여제께서는 우 수석을 그렇게 예뻐하고 신뢰할까. 뭣이 그렇게 예쁜가. 박근혜 대통령이 어리석은 것인가. 우 수석이 어리석은 것인가. 둘 다 모두 어리석은 것인가. 아니면 국민이 어리석은 것인가. 박근혜 여제는 우 수석의 우국충정을 몰라주는 국민이 어리석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대통령 눈에는 충신임이 분명한데 왜 국민 대다수는 우 수석을 물러나야 한다고 보는 걸까. 간신이기 때문인가. 그럼 간신의 기준은 무엇인가. 권력자가 자기중심적 사고에 함몰되어 국민의 이익이나 뜻에는 관심 없고, 자신의 이익만을 도모하는 행동. 그것이 간신과 충신을 구분하는 기준이라고 난 생각한다. 우 수석의 의혹도 모두 국민의 이익과 관련한 일이 아니다. 오로지 자신의 이익과 관련한 의혹이라는 점에서 우 수석은 간신의 반열에 당당히 올라가도 좋을 것 같다. 뇌물을 받아서 120억이 넘는 주식 대박을 터뜨린 진경준 검사장, 전관예우를 이용해서 1년에 100억을 넘게 벌고도 조세를 포탈한 검사장 출신의 홍만표 변호사. 우 수석과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 간신이라는 것이다. 정의를 위하여 사용해야 할 공직자의 칼을 사리사욕을 위한 보신용 악마의 칼로 사용한 자들. 권력을 이용하여 고위직을 보전하고, 백성의 눈물로 녹봉을 받고, 공직을 치부의 수단으로 삼는 부패한 탐관오리들. 이들이 칼 든 화적떼와 무엇이 다르다고 할 수 있는가. 사진 출처 - 뉴시스 국정을 농단하고 자기 뱃속을 채운 정부의 고관대작과 고관대작 출신들이야말로 이 시대의 난신적자(亂臣賊子)가 아니고 뭣인가. 간신과 난신적자들이 득세하고 세상을 쥐락펴락하고 있다. 국가를 어지럽히고 있다. 참 피곤하다. 조선시대에도 난신적자는 구족을 멸하고, 천년이 지나도, 백골이 되었어도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 시대에 난신적자 목을 칠 자는 누구인가. 백마 타고 오는 의인을 하염없이 기다려야 하는가. 간신과 난신적자 없는 세상은 불가능한가. 인간의 역사, 권력의 역사에서 간신은 필요조건일 수밖에 없는 것인가. “간신이 뭣이 중헌디” 고금의 역사에서 최고 권력자는 왜 유독 간신을 예뻐했을까. 김희수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97 | 추천: 1
- 표류하는 2016. 한국 서상덕/ 가톨릭신문 기자 “민생 말고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 얼마 전 택시를 타고 가는데 라디오를 통해 들려온 방송 진행자의 멘트였다. 역시 말도 격식을 깰 때 신선하구나 싶어 나도 모르게 빙그레 미소가 지어졌다. 파격적인 언사를 방송에 흘린 그 진행자는 다행히도 아직까지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모양이다. 시골 냄새가 물씬물씬 풍기는 이 말은 누적 관객 수 700만 명에 육박하는 영화 ‘곡성(哭聲)'에 등장하는 대사다. 영화 속 딸로 등장하는 효진(김환희 분)이 이상증세를 보이자 경찰인 아버지(곽도원 분)가 “니 그 사람 만난 적 있제? 말혀 봐. 중요한 문제잉께”라고 묻는다. 그러자 효진이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 뭣이 중헌지도 모름서”라고 귀기(鬼氣)어린 소리를 질러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면서 유명세를 탔다. ‘뭐가 중요한지 모르잖아'라는 대사 자체의 뜻은 유별나지 않지만 배우의 호연(好演)으로 유행어가 됐다. 이 점에서 2015년 영화 ‘베테랑'에서 조태오(유아인 분)가 남긴 유행어 “어이가 없네”와 닮아 있다. ‘어이가 없다’는 표현 역시 평소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는 말이지만 유아인의 강렬한 연기 덕분에 지난해 하반기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다. 언어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문화와 사상을 반영한다. 이 때문에 언어는 그 시대가 필요로 하는 새로운 개념을 담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생겨나거나, 기존의 개념에 더해 새로운 가치를 담은 개념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낸다. 따라서 한 시대를 풍미하는 새로운 유행어나 신조어들을 하나의 속어나 일시적인 현상으로만 판단해서는 잘못된 결론에 이를 때가 많다. ‘시대의 흐름’이라는 보다 넓은 안목에서 바라봐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하루가 다르게 급속하게 변하고 있어 새로운 유행어와 신조어가 금방 나타났다 눈 깜짝할 새 사라지기도 한다. 인터넷을 비롯한 다양한 IT매체가 널리 보급돼 있는 현실에서 유행어는 과거와는 또 다른 함의를 지닐 때도 적지 않다. 이러한 유행어들은 일반적으로 우연성이 강하지만, 말을 만들어내는 사람과 그 말을 쓰는 언중들 사이의 공감대가 없이는 오래가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라고 묻는 유행어는 “뭣이 중헌지도 모름서”라는 말 끝마디에 방점이 찍히는 듯하다. ‘뭐가 중요한지 모르’고 돌아가는 세상, 또 그렇게 만드는 세태로 인해 이 말이 유행어로서 힘을 얻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나뿐일까. ‘뭣이 중헌디’라는 말은 도대체 무슨 비전과 계획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지 헷갈리게 만드는 우리 정부와 고위 공직자, 나아가 이른바 ‘금수저’들을 향해 이 땅의 민중들이 던지고 싶은 말이 아닐까. 자타가 공인하는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이 모여 있다고 하면서도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모습을 수시로 보여주니 말이다. 이제 실망하고 화를 낼 힘마저 남아있지 않은 게 이 땅의 ‘흙수저’들이 처한 현실이 아닐까. 이정현 대표가 지난 11일 낮 청와대에서 열린 새누리당의 새 지도부 초청 오찬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우리나라 교육정책을 담당하는 교육부 정책기획관은 국민을 ‘개·돼지’라고 표현해 파면당했다. 국민을 개·돼지쯤으로 본 그가 그동안 펼쳐온 정책으로 인해 힘없는 서민들이 겪었을 고통을 생각하면 분노가 치민다. 홍만표 변호사, 진경준 검사장, 우병우 민정수석…. 검사라는 지위를 사리사욕을 채우는 자리 정도로 이용한 이들의 행태는 실망을 넘어서 절망감마저 느끼게 한다. 이들을 용인하고 오히려 부추겨 온 나라꼴에 분노를 느낀다면 잘못된 일일까. 한 나라 대통령의 말은 ‘애국심 도취한 국뽕 연설’이라는 표현으로 조롱당하는 상황이 됐다. 급기야 KBS 보도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여론을 제 맘대로 하려던 이정현 전 청와대 홍보수석이 새누리당 대표가 된 현실 앞에서는 국민으로서 치욕감마저 든다. 이것이 언제까지 표류할지 모르는 대한민국 오늘의 자화상이다. ‘뭣이 중헌지’도 모르는 이들이 굴려가는 나라에서 질식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뭣이 중헌디!”라는 민중들의 외침은 “지발 좀 정신 차려!’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모든 민주주의에서 국민은 자신들의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는 알렉시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의 말이 가슴 아프게 다가오는 요즘이다. 그래서 이런 물음을 자신에게 던져본다. ‘무엇을 할 것인가?(What is to be Done?)’
2017-07-20 | hrights | 조회: 111 | 추천: 3
김영미/ 인권연대 운영위원 “아이는 부모의 앞모습이 아닌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 부모가 살아가는 대로, 부모를 보고 배운 대로 커나가는 것을 이르는 말로, 좋은 부모란 생활에서 모범을 보이는 부모다. 중학교 입학 초에 연기는 학교 행사 중 교장선생님이 낸 퀴즈이 정답을 맞혀서 이에 대한 상품을 받으려고 앞으로 나가면서 한쪽 다리를 저는 모습을 보는 학생과 교사에게 변명하듯이 “오래 앉았더니 다리가 저리네.”라고 큰소리로 말하며 갔다. 그런데 계속해서 여러 교과시간 특히 걷기 달리기 등의 체육시간에 나타나는 몸의 이상 때문에 담임교사가 부모와의 전화통화를 통해 어렵게 들은 이야기는 연기와 함께 모든 교사, 모든 학생들에게 절대 비밀을 지켜달라는 요구와, 연기가 뇌병변장애가 있지만 학습에는 전혀 이상이 없으니 일반학생들과 똑같이 교육시켜 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학습을 따라가지 못했고 모든 수업시간에 엎드려 있거나 지친 모습을 보이면서 학급의 학생들에게 적응하지 못했었다. 이에 담임교사가 부모와의 상담을 통해 이런 사실을 알리고 아이에게도 장애를 알려주어서 적응하도록 한다면 최선을 다해 돕겠다고 했지만 부모는 절대로 그럴 수 없다며 오히려 학생들이 연기를 왕따 시키려고 하니 친구를 처벌해달라는 요구까지 했다. 집에 가서도 연기에게 수업시간에 누워있었던 모습을 심하게 꾸중을 했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는 하루를 같이 보내는 담임교사의 보호로 비밀이 유지될 수 있었겠지만, 중학교에 올라와서는 조례와 종례시간에만 잠깐 보는 담임교사가 보호막이 될 수가 없었고 또한 사춘기에 접어든 학생들로부터 관찰되는 연기의 모습으로 인해 또래 관계는 기대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학교폭력과 따돌림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도, 부모는 연기에게도 정확한 사실을 알려주지 않아서 연기를 혼란스럽게 하며 연기의 장애에 대해 이해되지 못한 학생들과의 적응을 어렵게 하고 있다. 지금도 연기는 늘 학생들을 경계하면서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다. 담임교사와 함께 교사들이 연기를 도와주려고 노력하지만 번번이 부모가 제지하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국일보 부모가 자녀의 장애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아이의 불편 또한 느낄 수 있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으면 한다.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데서 나타나는 혼란, 두려움을 아이 혼자 감당하면서 세상에 적응을 할 수 있을까. 부모가 아이의 상태를 정직하게 이야기해주고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게 해서 아이들과 다른 점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다른 학생들도 알게 하여 동정의 대상이 아닌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받고 존중해 주는 교육이 될 수 있었으면 한다. 교육의 시작은 아이를 정직하게 키우는 것이라고 한다. 정직은 말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행동으로 실천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김영미 위원은 현재 중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87 | 추천: 0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한국 정치의 최고 책임자를 대통령(大統領)이라고 부른다. 이 말을 듣고 쓸 때마다 불편하다. 침이 튈만큼 발음도 드세지만, 무엇보다 위계적이고 권위적인 언어기에 그렇다. 같은 한자문화권인 중국도 일본도 쓰지 않고 한국에서만 통용되는 이상한 언어다. 어쩌다 한국에서는 ‘크게(大) 거느리고(統) 다스린다(領)’는 의미를 지닌 어마어마한 호칭을 사용하게 되었을까. 크게 거느리고 다스린다? 이 말은 본래 19세기 중반 에도시대 말기에 일본에 통상을 요구했던 미국이라는 나라의 President, 즉 ‘아메리카 연합국가’(the United States of America)의 지도자를 일컫는 말로 일본에서 위압감을 가지고 조어해냈던 말이다. 가령 “일미수호통상조약”(日米修好通商条約, 1858)에 “아메리카합중국대통령”(亞米利加合衆國大統領)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는데, 이 때 大統領은 서양식 행정부 최고 지도자에 붙여진 President의 일본식 번역어인 것이다. 당시 신사유람단의 일원이었던 이헌영의 여행보고서 「일사집략」(日槎集略, 1881)에 “신문을 보니 국왕을 지칭하는 미국의 대통령이 총에 맞아 상해를 입었다더라”(新聞紙見 米國大統領卽國王之稱被銃見害云)는 표현이 나온다. 미국의 大統領을 국왕에 해당하는 지도자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물론 당시 한국에서 大統領은 익숙한 용어가 전혀 아니었다. 가령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 1882)에서는 ‘프레지던트’를 중국에서 음역한대로 “伯理璽天德”(백리새천덕)이라 표기하고 있다. “伯理璽天德”이 미국의 President는 물론 서양식 국왕의 의미로 한동안 쓰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점차 미국이나 서양의 최고 지도자를 大統領이라 표기하게 되었다. 大統領이라는 표현은 『조선왕조실록』에도 등장하고, 고종이 미국의 최고 지도자를 大統領으로 인식했다는 『승정원일기』의 기록도 몇 차례 나온다. 1919년 3.1운동 직후 국내에서 설립된 ‘대한공화국 임시정부’, 이른바 ‘한성정부’에서 대통령(손병희), 부통령(박영효), 국무경(이승만) 등의 표현을 쓴 적이 있다. 물론 미국식 정치제도가 성립되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한국에서 미국식 대통령이라는 말이 낯익게 된 것은 거의 이승만의 영향이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이승만이 임시정부의 ‘대통령’을 자임하면서 안창호가 나서서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 노령(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등과 통합을 시도하는 과정에 ‘한성정부’에서는 이승만에게 집단지도체제의 지도자인 ‘집정관총재’(執政官總裁)를 제안했다고 한다. 하지만 미국과 친했던 이승만은 자신의 직함을 영어로 President로 표기하면서 스스로 임시정부의 대통령을 자임했고, 임시정부의 정치체제를 미국식 대통령제로 몰아갔다. 이러한 분위기 하에서 남한 단독정부 체제가 대통령 중심제로 정해지게 된 것이다. 문제는 ‘대통령’이라는 말이 president의 의미와 취지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데 있다. 본래 president는 영국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대학 위원회의 위원장인 presiding officer에 기원을 두는 말이라고 한다. 케임브리지 출신으로서 하버드 대학의 head였던 헨리 던스터(Henry Dunster)가 자신을 하버드의 President로 규정하면서 이 용어가 미국 대학가에서 쓰이기 시작했고, 그 뒤에는 아메리카대륙의 13개 영국 식민지역 대표 55인이 결성한 대륙의회 대표를 President라고 부르면서 미국의 정치적 언어가 되었다. President는 일종의 회의체 구성원들이 의회 대표를 아래로부터 선출해 만든 자리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President의 번역어로 일본에서 조어된 大統領은 수직적 위계질서가 담긴 하향적 언어다. 일본에서 무사의 우두머리를 의미하는 통령(統領)이라는 군사용어가 있기도 했지만, 어쩌면 일본인의 눈에 여러 나라 넓은 지역을 다스리는 큰 지도자라는 위압감이 더 크게 작용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떻든 大統領은 위에서 아래를 다스린다는 의미와 행위가 중첩된 권력적 언어인 것이다. 그렇지만 미국과 정치제도가 달랐던 일본 정치에서는 적용된 적이 없던 직함이다. 중국에서도 19세기 중반 President의 번역어로 ‘총통’(總統), ‘총통령’(總統領) 등이 쓰였지만, 이 역시 중국 정치에는 적용되지 않았다. 현재 대만에서 ‘총통’(총괄하여 다스림)이라는 직제와 명칭을 이어가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이나 북한에서 쓰는 ‘주석’(主席)이 용어상으로는 더 민주적이다. 이들 명칭에 비해 ‘대’통령은 통치의 양적인 측면이 더 부각된 언어이자, 아래로부터의 민주적 정신에는 어울리지 않는 권위적인 호칭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민주주의에 어울리지 않는 권위적 호칭 ‘대통령’이라는 호칭을 바꿀 수 있을까. 요사이 민회(民會) 운동이 활발해지고 있다. 시민이 개인들의 주권을 확보하고 정치 사회적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기 위한 자발적 결사체라고 할 수 있다. 주권을 특정인에게 몰아주어 권력을 확대하고 정당화시키는 대의정치 체제가 아니라, 분권과 자치에 기반한 민간 주도의 사회 개조 운동이기도 하다. 만일 민회가 거국적으로 이루어질 경우 거기에도 최고 책임자(권력자가 아니라!)가 있기는 해야 할 텐데, 그 책임자를 민회의 장, 그런 의미의 민장(民長)이라 불러볼 수 있지 않을까. 이때의 ‘민장’은 개인의 주권을 온전히 보장한 직접민주주의 체제의 유지에 책임이 큰 사람일 것이다. ‘장’(長)에 담긴 권위성이 부담스럽다면 더 민주적이고 민중적인 명칭도 생각해볼 일이다. 군림하지 않고 그저 대표하는 호칭 앞으로 시민이나 민중 위에 군림하지 않고 말 그대로 그저 ‘대표(代表)’할 수 있는 대통령이 나올 수 있을까. ‘대통령’이라는 명칭이 사라지고, ‘민장’처럼 비교적 소박하고 진솔한 직함이 통용되는 날이 올까. 오늘날 느끼는 ‘大統領’과 같은 험한 언어를 진솔하고 민주적인 직책과 연결짓는 상상 자체가 도리어 시민과 민중의 대표에 대한 모독이 되는 것은 아닐까. 그렇더라도 최소한 이름이라도 달리 쓰게 되면, 권위적인 언어로 인해 무의식적으로 갖게 되는 권력욕이라도 줄일 수 있게 되지는 않을까. <참고> 송민, “대통령의 출현”, [새국어생활] 제10권 제4호(2000년 겨울) 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역사비평사(2005) 이찬수 위원은 현재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에 재직 중입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74 | 추천: 1
권보드래/ 인권연대 운영위원 젊을 땐 주름 가득한 얼굴을 보면 가끔 궁금해 했다. 저 분들도 나처럼 느끼고 생각하고 마음 졸일까? 피부가 두꺼워지듯 마음에도 더께가 내려앉는 건 아닐까? 눈 감감해지고 귀 어두워지면서 다른 감각마저 둔해지진 않을까? 생생한 맨살을 드러내는 대신 세월의 옷을 걸쳐, 슬픔도 기쁨도 그 옷을 다 뚫고 들어오지 못하는 건 혹시 아닐는지? 세월 흘러 내 얼굴에도 주름이 생기고 내 마음에도 더께가 앉는다. 한 달여 전엔 ‘노무현 대통령 서거 7주기’라는 기사를 보고서야 5월 23일을 기억해 냈다. 그 정치‧경제적 정책에 동의하기 어려웠음에도 좋아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 10년 동안은 기일마다 검은 옷을 입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그에 앞서 ‘세월호 참사 2주기’도 건성으로 지냈다. 사건 당시 차마 못 봤던 희생자들의 흔적을 1주기 때는 찾아보겠다고 다짐했건만. 벌써 2년인데. 조금씩 나이 들면서 보니 마음 그 자체는 늙도록 생생할 것 같다. 다만 마음과 세상 사이 통로가 좁아진달까. 지금껏 쌓은 마음만으로 벅차고 매일 겪는 잡무에 신경이 지쳐, 눈 감고 귀 막지 않으면 자아가 감당치 못하리란 생각이 든다. 적당히 방어하지 않으면, 어지간히 잊어버리지 않으면 살아낼 수 없다. 로봇이 인간다워지고 있다기보다 인간이 점차 로봇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글을 읽었다. 올해는 알파고 때문에 떠들썩했고, 2년 전엔 유진 구스트만이란 대화봇이 튜링 테스트를 통과해 화제가 됐지만, 정작 문제는 인공지능의 발달이 아니라는 거다. 인간끼리의 대화나 관계가 인공지능과의 그것과 비슷하게 바뀌고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당면한 문제라는 주장이다. 사진 출처 - 시사저널 ‘대화봇’, 인간과 대화하는 인공지능이 처음 등장한 것이 벌써 반세기 전 일이다. 1965년 선보인 엘리자(Eliza)는 기본적 대화 패턴만 다룰 줄 아는 단순한 프로그램이었지만, 그럼에도 일부 사람들은 엘리자가 진짜 사람일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단다. 컴퓨터 프로그램일 뿐이라고 일러줘도 도리질할 정도로. “뭐 좀 물어봐도 될까?”라고 질문하면 “물론!”이라고 선뜻 답해주고, “내일 시험 때문에 너무 긴장돼.”라고 토로하면 “좀 쉬어. 잠 푹 자고.”라고 응답해주는 존재가 사람이 아니라곤 믿기 어려웠나 보다. 최근에는 유럽 몇 나라에서 인지행동치료에 인공지능을 도입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우울이나 불안 등 심리적 문제를 온라인으로 상담하는 데 인공지능이 효과적이란 결론을 냈다는 뜻이다. 이 경우 인공지능은 사람인 척하는 대신 처음부터 인공지능임을 밝히고, 그러나 대화 상대자의 호소에 끈질기게 귀 기울여 준다. 어쩌면 인간보다 성심껏, 인간보다 편견 없이, 인간보다 더 나은 위로를 건네며. 대화봇 프로그래밍을 안내하는 웹사이트에 접속해 보니 원리는 의외로 간단하다. 실제 대화 데이터를 구축하고, 감탄사를 적절히 활용하고, 답변이 애매할 때는 상대방의 대화를 메아리쳐 반복하는 거다. 예컨대 “내일 무역학 시험인데 대금결제방식 부분을 잘 모르겠어!”라고 하면 “잘 모르겠다고?”라고 답해주는 식이란다. “기분 나쁜 일이 있었어.”라고 쓰면 “저런.”이라며 맞장구쳐 주고. 그러고 보니 우리 집 애들도 몇십 분이고 아이폰의 시리(Siri)와 낄낄대며 잘 논다. 욕설도 해 보고, 그러면 시리는 “어쩌면 그렇게 심한 말을.”이라며 울상도 하고. 어마어마한 데이터에 근거해 인간을 흉내 내는 로봇이 미칠 수 없는 영역은 ‘시간’이요 ‘역사’라고 한다. 로봇은 “안녕?” 하는 인사말에 “그쪽도 안녕? 오늘 날씨는 어때?”라며 그럴듯하게 대답할 줄 알고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하면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라고 화답할 수 있지만, 열흘 전, 1년 전의 말을 기억하고 그에 따른 관계에 적응하진 못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공지능은 인격이라면 갖추게 되는 일관성과 그 내부의 모순에도 취약하다. 부모를 지긋지긋해하면서도 사랑하고, 세상에 대해 실망과 기대를 반복하는 심리 역시 엘리자나 유진 구스트만은 모를 거다. 인간과 로봇을 구분하기 점점 어려워진다는 건, 인간이 로봇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건, 즉 ‘시간’과 ‘역사’를, 거기 따르기 마련인 책임과 감정을 우리가 점점 멀리하고 있다는 뜻도 된다. 점심식사 때는 맛집이나 여행 정보 같은 무난한 화제로 시종하고, 누군가 자꾸 다가오면 긴장하고, 길 걸을 때도 어깨 부딪힐세라 조심하며 걷는다. 수업 때 학생들에게, 전철에서 누군가 서둘러 하차하면서 지갑을 떨어뜨리는 걸 봤다면 소리쳐 알려주겠느냐고 물었다. “알려주고 싶지만” “이상한 사람 될까 봐” 못할 것 같다는 것이 학생들의 토로였다. 그래서 마음은 과거를 향하나 보다. 더 기꺼이 관계 맺고 책임질 수 있었던 때, 세상마저 그랬던 걸로 보였던 때로. 돌이켜보면 만나는 사람 하나하나에 손 흔들던 어린 시절에 비해 우리의 세상은 얼마나 좁아졌는가. 날이 갈수록 넓어지고 시간이 흐를수록 인간다워지는 게 인생이면 좋으련만. 오늘 하루도 인간으로서 살아낼 수 있기를. 인간으로서 기억하고 또한 망각할 수 있기를. 속절없이 시간이 흐른다. 권보드래 위원은 현재 고려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79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