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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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 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권보드래(고려대 국문학과 교수), 김녕(서강대 교육대학원 교수), 김대원(성공회 서울교구 신부), 김영미(금천문화예술정보학교 교사), 김창남(성공회대 신방과 교수), 김희수(변호사), 도재형(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서상덕(가톨릭신문 기자), 오인영(고려대 역사연구소 연구교수), 이재상(CBS PD), 이재성(한겨레신문 기자), 이재승(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지상(가수 겸 작곡가), 이찬수(서울대 연구교수), 장경욱(변호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 허홍렬(치과의사), 홍승권(삼인출판사 부사장), 황미선(면일초등학교 교사)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오인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나라 안팎으로 막말이 유행이다. ‘돈은 막고 말은 풀라’는 요구가 나올 선거철도 아닌 데, 어디서 ‘막말의 달인 뽑기 세계대회’라도 열렸나 싶을 정도로 뻔뻔하기 짝이 없는 막말이 기승을 부린다. 이제 “관 속에 들어가도 막말은 말라”는 속담의 시대는 거(去)하고, 거리낌 없이 속되게 말하는 망언의 시대가 래(來)한 것인가? 잠시 생각을 모아보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니라는 궁리가 선다.   막말하는 사람들이 오늘의 세계에 갑자기 출몰한 건 아니다. 그런 사례는 역사에 무수하다. 여성에게는 단두대에서 목이 잘릴 자격은 있어도 투표할 권리 따위는 없다고 망발한 자들도 있었고, 백인종이 ‘열등한’ 인종인 황인종과 흑인종을 지배해야 마땅하다고 떠든 인종주의자 고비노(1816~1882)의 막말도 있었다. 일제 강점기를 “태평천하”라고 외친 자도 있었고, ‘살인멸구(殺人滅口)’를 자행한 독재자에게 “하늘의 찬양이 두루 님께로 오시나이다.”라며 시답지 않은 망언을 읊조린 자도 있었다.   그럼에도, 요즘 들어 막말의 강도가 세졌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우선 나라 바깥을 보면, 개인으로는 세계에 제일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미국 대통령이 눈에 들어온다. 요즘은 특히 트윗(‘멍청이’라는 뜻의 twit이 아니라 ‘tweet’)이 눈에 띤다. 대통령 되기 전부터 그는 부자로서가 아니라 막말로 더 유명했던 모양이다. 작년 10월까지만 해도 일부 영국인들은 영국의 EU 탈퇴로 영국 국민이 <올해의 가장 멍청한 국민>으로 뽑힐 거라고 탄식했으나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이 되자 그 상(?)은 이제 미국 국민에게 돌아가게 됐다며 안도했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였으니까.   그는 선거 유세 중에 테러를 막으려면 물고문보다 더 센 것도 필요하다느니, 자신에게 불리하게 보도하는 언론 뉴스는 모두 가짜라느니, 모든 나쁜 것은 오바마로부터 비롯되었다느니 하며 망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의 막말은 미국 ‘내’만이 아니라 국외를 향해서도 계속됐다. 중국과의 무역을 놓고는 중국이 미국을 강간하도록 놔둬서는 안 된다고 했고, 우리나라와 관련해서는 (2015년 8월 21일, 미국 앨라배마 주 버밍햄 라디오 방송 와피(WAPI)의 ‘매트 머피쇼’에서) “나는 한국은 훌륭하다고 생각한다”면서도 “그거 아나? 우리는 삼성, LG의 제품을 한국에서 들여오고 그들은 많은 돈을 번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서 군대를 보내지만 우리는 얻는 게 하나도 없다”며 “이건 미친 짓”이라는 저속한 표현을 막 썼다.     사진 출처 - 한겨레     나라 안으로 눈길을 돌리면, 정 아무개 의원의 막말이 단연 도드라져 보인다. 말을 그대로 옮길 경우의 혈압상승을 염려하여 추려 적자면, 그는 노무현 대통령이 부부싸움 끝에 목숨을 끊은 거 아니냐고, 블랙리스트에 올라서 이명박 정부 시절 밥을 굶었냐고 으르렁거리는 말들을 연속해서 쏟아냈다. 그의 정략적 노림수가 무엇이든 간에, 그의 말에는 사자의 명예훼손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고인이 직접 항변할 수 없다는 점을 악용하려는 비열함과, MB정권이 니들에게 린치를 가하지 않았고 감옥에 보내지 않았으며 밥줄도 완전히 끊지 않은 걸 다행으로나 알라는 거들먹거림의 비릿함이 담겨 있었다. 그의 말 어디에도 간난(艱難)한 삶을 견뎌온 사람을 보듬어주려는 마음은 보이지 않았다. 놀랍게도 그는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거룩한 선서를 3번이나 한 국회의원이다.   이렇게만 말하면 당자들은 억울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나만 그랬냐? 맞다, 다른 사람도 그랬다. 착란(錯亂)상태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국내의 막말 세 개만 상기해 보자. “현 정부는 가장 깨끗한 정부다.” 김기춘 씨가 비서실장 자리에서 물러날 때(2015/2/22) 수석비서관회의에서 한 말이다. 2015년 7월 당시 새누리당 최고위원이었던 서청원 씨는 “박근혜 정부는 가장 역대 정권 중에서 대한민국을 가장 민주적으로 이끌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7년 전(2010/7/30), 이명박 각하의 발언, “우리 정부는 도덕적으로(‘도둑적으로’의 오기가 아니다!) 깨끗하게 출발했다. 도덕적으로 떳떳한 정부의 전통을 세워 나가도록 하자.”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거나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라는 철학적 언술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사용하는 언어의 수준을 보면, 의도까진 몰라도 말하는 사람의 인격과 생각의 수준을 알아챌 순 있다. 물론, 고상한 말을 하는 사람이 모두 고매한 인격자는 아니다. 말을 잘 꾸며대는 위선자나 지능적 사기꾼도 있다. 허나, 막말하는 사람은 대개 고매한 인격자가 아니다. 고상한 생각을 한다고 믿기도 어렵다. 아니, 사적으로는 좋은 (조)부모, 남편, 아내, 딸, 아들이라는 소리를 들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적으로 좋은 위정자로 평가받기는 어려워 보인다.   역사는 손에 쥔 권세를 내려놓느니 차라리 나라를 망치고 말겠다는 후안무치한 자들을 보여준다. 일제가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할 당시, 한국 측 대신 가운데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은 찬성에 서명했다. 나라를 왜적에게 팔아먹은 이런 을사오적과 같은 파렴치한이 오늘의 세상이라고 없겠는가? 일신의 영달을 위해서 기꺼이 매국도, 매판도, 막말도 하겠다는 자들이 있다고 보는 게 꾸밈없는 현실인식일 것이다.   악이 없는 세상, 몰염치한 족속들이 사라진 세상을 꿈꿀 순 있어도 그런 세상을 만들기란 난망하다. 설령 적대적 사회모순이 사라진 유토피아 같은 세상이 되어도 개인적 실패나 범죄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미간이 찌푸려지지만, 놀부나 막말을 내뱉는 자도 있는 게 세상이다. 흥부들만 사는 세상은 없다. 그러나 막말하는 자들에게 공적 권한이나 자리를 주지 않는 세상은 만들 수 있다. 민주공화국의 시민에게는 사사로움에 사로잡힌 모리배(謀利輩)가 두 번 다시 공적 영역에 발들이지 못하도록 할 책무가 있다. 주권자인 시민에게는 그럴 힘도 있다. 주권재민의 힘만큼은 아낌없이 쓰자. 품위 있는 공공언어의 시대로 어서 가자.   오인영 위원은 현재 고려대 역사연구소에 재직 중입니다.
2017-09-28 | hrights | 조회: 9 | 추천: 0
강국진/ 인권연대 운영위원     세금을 징수하는 일을 하는 세무 공무원이라면 보통 사람들보다 세금을 좀 더 친근하게 느낄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한 세무 공무원과 얘길 한 적이 있는데 이 분은 자기가 낸 세금을 “뜯겼다”고 표현했다. 세금 내기 좋아하는 국민을 둔 나라는 어디에도 없겠지만 한국 사람들은 유별나게 세금에 거부감을 보인다. 세금을 비유하는 낱말이 피와 폭탄이니 할 말 다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귀결이다. 한국 근현대사는 세금에 대한 나쁜 추억이 켜켜이 쌓인 역사였다. 역사 시험에 꼭 등장하는 게 조선 말기 ‘삼정의 문란’이었다. 갑오농민전쟁도 시발점은 세금 문제였다. 그뿐인가. 식민지, 전쟁, 군사독재와 외환위기, 세월호 참사로 이어진 200여 년 동안 언제 한번 세금을 권리이자 의무로 인식할 기회가 있었던가 싶다. 생존원리가 각자도생(各自圖生)인 나라에서 세금이란 그저 수탈과 착취를 달리 부르는 이름에 불과했다.   조선총독부가 거두는 세금에 저항하는 것은 독립운동이었다.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이 발표한 결의문에서 두번째 요구사항은 바로 “서민의 세금을 대폭 감면하고 국민경제의 밑받침인 근로대중의 최저 생활을 보장하라”였다. 서슬퍼런 유신정권이 1977년 아시아에서 최초로 부가가치세를 시행할 당시엔 동대문과 남대문 시장 상인들이 철시를 했다. 부마항쟁 당시엔 시위대 손에 불탄 관공서 중에는 세무서가 있었다. 조세저항이 민주화운동인 시절이었다.   ‘혈세’(血稅)라는 낱말은 한국에서 세금이 갖는 역사적 맥락을 잘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무척 오래된 말 같지만 사실 혈세는 메이지유신 당시 일본에서 나온 용어다. 그 뜻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 혈세는 원래 ‘전쟁에서 피를 흘리는’ 병역 의무를 뜻했다.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 “조선인들은 혈세를 내지 않는다”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이 말은 조선 사람들은 징집 대상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흥미로운 지점은 이 땅에선 이미 1920년대부터 ‘민중의 고혈을 빠는 세금’이라는 용례가 신문에 나타난다는 점이다.     사진 출처 - 서울신문     세금폭탄은 또 어떤가. 정치인 중에선 한나라당 당대표 시절 박근혜가 최초로 사용해 대박을 친 ‘세금폭탄’은 조세에 대한 거부감을 제대로 건드렸고, 조세에 대한 적대감을 고취시켰다. 세금폭탄은 조세문제를 갈등의 최전선으로 만들어 버렸다. 세금폭탄 공격 덕분에 정권 탈환에 성공한 이명박 정부는 임기 첫해부터 ‘부자감세’ 비판에 휘청거려야 했다. 박근혜 정부는 또 어떤가. 긍정적으로 평가해줄 대목이 많았던 연말정산 개혁조치는 ‘서민증세’ 논란으로 빛이 바랬다.   국민들이 세금에 그토록 적대적인 건 사실 그동안 나라가 나라답지 못한 것에서 오는 부정적인 학습효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문재인 정부가 적극적인 재정정책을 천명한 것은 무척이나 긍정적이다. ‘증세 없는 복지’를 주장했던 박근혜 정부는 결국 비과세감면 정비와 담뱃값 인상 등 각종 ‘복지없는 증세’를 열심히 해놓은 덕분에 문재인 정부는 상당한 세입증가 효과를 누리는 것도 좋은 여건이다.   제구실을 하는 국가란 어떤 국가일까. 멀리서 찾을 것이 아니라 헌법을 뒤져보면 답이 나온다. 헌법에는 인권증진(제10조), 고용 증진과 적정임금 보장(제32조 제1항), 사회복지와 재해예방·재난안전(제34조), 환경보전과 쾌적한 주거 보장(제35조), 소득분배 유지와 경제민주화(제119조 제2항) 등 국가의 의무로 가득하다. 다만 역대 정부가 ‘국민들이 세금 내기를 싫어한다’거나 ‘증세에는 국민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알리바이 뒤에 숨었을 뿐이다. 국가의 의무를 다하려면 돈이 든다. 우리가 내는 세금이 우리나라를 제대로 만들 수 있다.   복지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요구는 여러 선거를 거치면서 국민적 합의에 거의 도달한 문제다. 그러려면 더 많은 세금이 필요하다. 북유럽 복지국가들의 부가가치세율이 25%(한국은 10%)를 넘나드는 건 다 이유가 있다. 높은 복지지출 수준은 높은 조세 수준을 요구한다. 북유럽 복지국가는 높은 복지 수준을 위해 높은 조세수준이 필요하다. 그래서 높은 직접세만으론 충분하지 않으니까 간접세 수준도 높다. 그렇게 모든 국민에게 세금을 많이 징수해서 모든 국민들을 위한 복지지출에 돈을 쓴다. ‘보편복지’는 언제나 ‘보편증세’와 짝을 맞출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가 먼저 생각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싶다. ‘국가가 내게 해준 게 뭐냐’에서 ‘우리가 내는 세금으로 우리나라를 나라답게 가꾸자’로.   강국진 위원은 현재 서울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17-09-27 | hrights | 조회: 22 | 추천: 0
 최낙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때로는 작은 일이 크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북가좌동 삼거리에서 연희동까지, 제 출근 거리는 걸어서 30분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웬만하면(?) 버스를 타고 갑니다. 조금 부지런을 떨면 걸어서 충분한 거리를 버스로 출근하자니 은근히 마음이 불편할 때도 있습니다. 남들이 알면 손가락질할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 때는 스스로 변명도 잘 만들어냅니다. ‘오늘은 피곤하니까...’ ‘오늘은 날이 더우니까...’ 등등 스스로를 정당화시키며 버스에 오릅니다. 하지만 어떤 변명을 갖다 붙여도 제가 버스를 타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단지 걷는 것보다는 몸이 편하게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출근 때의 일입니다. 습관처럼 버스를 탔습니다. 집에서 사무실까지는 버스로 다섯 정류장쯤 됩니다. 모래내 시장을 지나면 사천교 정류장입니다. 거기서 중앙차선으로 직진을 하면 연세대를 거쳐, 이대앞, 광화문 쪽으로 가는 버스들입니다. 한편 오른쪽 차선으로 빠지면 연남동을 거쳐 신촌, 마포 쪽으로 가는 버스들입니다.   제가 탄 버스가 사천교 정류장에 정차했습니다. 두어 사람이 내리고 또 그만큼 버스에 올랐습니다. 그렇게 버스가 다음 정류장으로 출발하려 앞문을 닫으려 할 때 누군가 달려와서 버스 승강대를 잡았습니다. 50대 후반쯤 되어 보이지만 단단한 몸을 가진 남자였습니다.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버스 기사에게 물었습니다.   “이거 신촌 가지요?”   하지만 제가 타고 있는 이 버스는 중앙차로로 직진하는 버스였습니다. 기사는 친절하게 말했습니다.   “손님, 이 차는 연세대 쪽으로 갑니다.”   버스 기사가 그렇게 말을 하면 보통 사람들은 버스 번호를 잘못 보았다거나 무언가 착각을 했다고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겠지만 그 사람은 달랐습니다. 그는 승강대를 잡은 손을 놓지 않고 버스기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닌데...? 아닐 텐데?”   버스기사가 다시 한 번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는 받아들이지 않고 다시 같은 말을 했습니다.   “아닌데, 아닌데... 아닐 텐데?”   앞쪽에 앉아 있는 승객 몇이 짜증난 표정을 지었지만, 버스 기사는 더 친절하게 설명했습니다.   “손님, 이 버스는 신촌 쪽으로 가지 않습니다. 신촌 쪽으로 가시려면 000번이나 ***번을 타셔야 합니다.”   앞자리에 있던 승객들도 거들었습니다.   “아저씨, 다른 버스 타셔야 해요.”   그제서야 버스 승강대를 놓으면서도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같은 말을 했습니다.   “아닌데...? 아닌데...?”   버스가 떠날 때까지 그는 앞문 창 너머로 버스 기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무언가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허... 별사람 다 보겠네.”   앞자리의 승객들이 혀를 찼습니다. 저 역시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설마 버스 기사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요?   하루에도 몇 번씩 같은 노선을 운전하는 기사의 말도, 버스 안에 있던 승객들까지 아니라고 하는데도 그는 왜 자신이 무언가 착각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걸까, 자기 생각에 대한 그런 확신은 어떻게 갖게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사무실까지 걸어가면서도 그의 표정이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남에 대한 의심이 많은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에 대한 확신이 너무 강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진 출처 - 노컷뉴스     문득 소름이 끼쳤습니다. 갑자기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국정원 댓글부대로 암약(?)했던 이들 중 개인의 사적 이익만을 위해서가 아닌, 그 일이 그야 말로 구국 충정이라는 확신으로 키보드를 두드렸던 사람들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영주, 고대영, 김장겸.., 요즘 듣고 보았던 이름들이 줄줄이 떠올랐습니다. 생각에 생각이 점점 부풀어 올랐습니다. 어쩌면 버스 승강대를 잡고 ‘아닌데... 아닐 텐데’라고 했던 그에게는 어쩌면 정해진 버스 노선이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의 머릿속에는 내가 택한 버스는 무조건 내가 원하는 목적지로 가야만 한다는, 그런 확신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끔찍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쓸데없이 지나친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자꾸 편해지려고 하는 게으른 몸 때문일까요? 앞으로는 걸어서 출근해야겠습니다. 그 결심이 또 며칠이나 갈까요?     최낙영 위원은 현재 도서출판 '밭' 주간으로 재직 중입니다.
2017-09-27 | hrights | 조회: 8 | 추천: 1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세계적 회사라는 삼성전자 부회장 이재용에 대한 재판이 진행 중이다. 권력과 유착하며 작은 지분으로 전체 계열사를 장악해온 한국식 재벌의 전형을 보여주는 회사다. 이재용에게 뇌물죄 등으로 내린 징역 5년형이 턱없이 약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그는 무죄이니 당장에, 적어도 집행유예로라도 석방해야 한다는 ‘삼성교’ 신자들도 있다. 한국 사회 어디나 거기서 거긴데 굳이 감옥까지 보낼 거야 뭐 있냐는 현실 타협파들도 제법 된다. 하지만 ‘삼성 이재용’이 아니었다면 형량은 더 높았으리라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그런 점에서 법원도 상당 부분 현실 타협적이다.   그러면 형량을 높여 수감하면 그것으로 모든 게 마무리되는 것일까. 물론 그렇게라도 될 수 있다면 한국 사법의 현실도 한결 정의에 가까워지는 일일 것이다.(‘정의’나 ‘사법’이나 영어로는 다 justice다.) 그럼에도 더 근본적인 문제는 없겠는지 한 번 더 생각해볼 것들이 있다. 불교의 ‘공업(共業)’과 기독교계의 ‘회복적 정의/회복적 사법(restorative justice)’ 개념이다.   개인의 행동은 개인의 흔적과 자취를 남긴다는 ‘별업(別業)’에 비해, 연기적(緣起的) 세계관에 기반한 ‘공업’은 사람은 관계적 존재이니 누군가의 범죄에는 사회적 책임, 나아가 크든 작든 나의 책임도 얽혀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개체 중심적 사유를 넘어서는 지혜로운 통찰이다. 물론 사회 질서 및 사법 체계 자체가 전적으로 개체 혹은 개인 중심적인 마당에, 어떤 행위의 가장 주체적인 이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재용을 법적 정의와 절차에 따라 훨씬 더 정당하게 심판해야 하는 것도 분명하다. 그러면서도 공업은 같은 사건 안에 다른 원인과 책임은 없는지 좀 더 성찰하도록 이끈다. 이재용의 책임은 이재용에게 묻되, 거기에 연루된 모든 이들의 책임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미국 메노나이트 기독교계에서 ‘회복적 정의(회복적 사법)’라는 개념을 제시한 이래 점차 확산 중이다. ‘회복적 정의’란 어떤 사건의 피해자, 지역사회, 가해자가 피해 회복 프로그램에 함께 개입해 폭력에 의한 피해를 바로잡고 범죄의 예방과 치유를 시도하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 가해자는 자신의 행동이 끼친 의미를 깨닫고 반성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기존의 국가주도형 징벌적 사법체계의 한계를 직시하고, 인간의 존엄성과 범죄의 사회성을 의식하는 가운데, 가해자와 피해자를 다시 지역사회에 통합시킬 수 있는 인간적 가능성을 더 확보하기 위한 시도다.   한국에서도 청소년 범죄의 가해자와 피해자, 관계자를 중심으로 회복적 정의가 점차 시도되고 있다고 한다. 법적 절차에 따라 가해자에게 책임을 묻되, 차가운 법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자기 고백이 가능한 청소년기에서부터 시도해보자는 취지에서다. 회복적 정의는 범죄의 판단을 국가의 법적 체계에만 맡기지 말고, 사건에 연루되고 관계된 이들이 서로의 책임과 상처와 아픔을 같이 나눌 때, 잘잘못에 대한 개인의 주체적 성찰이 좀 더 확보될 수 있으리라 본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물론 삼성 이재용이 양심과 법에 따라 자신의 잘못을 쉽사리 고백할 리는 없을 것이다. 이재용과도 연루된 박근혜 역시 그럴 것이다. 박근혜와 연루된 최순실, 김기춘, 우병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현재의 법정은 이들에게 적극적인 자기변호의 장으로 보장된 공간일 테니, 법정에서는 자기중심적인 언어로, 말하자면 변명으로 일관할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잘못을 개인에게만 돌리고, 잘못에 대한 처분을 차가운 사법체계에만 맡기기에는 인간의 뜨거운 욕망이 전 사회적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 좀 더 솔직하게 얘기할 수 있는 공론의 장이 좀 더 필요하다. 인간의 주체적 성찰의 영역을 확보하고 확대하지 않고서는, 범죄마저 정치나 권력 탓이라 돌리는 변명이 계속되겠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맥락에서는 그럴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지만...   잘못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명백히 묻되, 기왕 벌어진 모든 일에서 더 많은 이가 ‘양심적’ 책임을 느낄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가야 한다. 급기야 법정도 범죄자 개인의 책임을 계량화하는 데 함몰되지 말고,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관계자들이 모두 토론하는 공간으로 변모해야 한다. 죄책도 판사만이 아니라, 결국은 모두가 묻고, 양심상으로는 모든 이가 책임질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 실제로 세상만사는 모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순수한 개인적 선이나 온전한 개인적 악은 이론적으로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국회, 경찰, 검찰은 그런 거 못할 테니, 건강한 시민단체나 종교인들이 ‘공업’에 기반한 ‘회복적 정의’의 차원에서 그런 자리와 문화를 일부나마 마련하고 확대해갈 수 있다면 좋겠다. 어떻든 법, 정치, 권력보다는 인간이 우선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이재용과 박근혜, 나아가 최순실, 김기춘, 우병우 등에 대한 법정 선고가 엄중하게 내려져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에 재직 중입니다.
2017-09-27 | hrights | 조회: 21 | 추천: 0
권보드래/ 인권연대 운영위원  ‘각을 뜨자’는 북한의 구호는 참 무시무시했다. ‘미제의 각을 뜨자’는 둥 ‘○○○의 각을 뜨자’는 둥의 말을 들으면 진저리가 처졌다. 초등학교 도덕 시간쯤에 주워들었을 법한 표어다. 능지처참식, 회칼 들고 상대방의 살을 뭉텅뭉텅 저며내는 장면이 떠오르면서 절로 공포가 솟아나곤 했다. 생생한 신체적 상상을 자아내던 그 표어 때문에 악몽을 꾸기도 했었나 보다. ‘이승복 어린이’마저 학살했다는 그들이 아닌가.  몇 해 전 알게 된 사실로는 ‘각을 뜨자’는 무시무시한 말의 속내는 꽤 다르다. 북한을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에 자료를 좀 뒤적여 보니 단박 눈에 띄는 말이었는데, 다만 이번엔 겁에 질린 북한의 모습이 먼저 보였다. ‘각을 뜨자’는 건 터무니없이 강한 상대 앞에서의 생존 노력에 가깝다. 기억나는 대로 대강 소개하자면 “미국은 너무나 강하다. 정면으로 상대해선 질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약한 존재라 해도 사생결단의 자세로 덤비면 살점 한 뭉텅이는 베어낼 수 있을 것이다. 여럿이 힘을 합쳐 그렇게 ‘각을 뜨면’ 제아무리 강대국이라 해도 언젠가는 쓰러질 것이다.” 이런 메시지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각을 뜨자’는 말은 스스로 너무나 미약하다고 느끼는 존재의 단말마였다고나 할까.  당연한 일이겠지만 남북한이 대치하는 상황에서 앎은 기우뚱하다. 상대방을 적으로 삼아 체제를 유지해 왔던 오랜 내력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너무 모른다. 박정희 시절의 팽팽한 경쟁 국면을 지나, 이제 어느 모로 보나 남한이 우위를 점하고 있는데도 북한은 아직 미지와 공포의 대상이다. 요즘처럼 긴장의 수위가 높을 때, 답답한 마음에 북한 관련 사이트라도 찾아볼까 해도 접근은 번번이 차단된다. 북한 TV 정도는 이제 터 놔도 될 텐데, ‘남북의 창’ 같은 프로그램에서 인색하게 보여주는 것이 고작이다. 그래도 예전엔 삼엄했던 국토통일원 북한자료실이 통일부 북한자료센터로 한결 여유로워져서 북한의 TV 프로그램 편성표라도 엿볼 수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할까.  오늘자 조선중앙 TV를 보니 ‘조국해방전쟁 승리기념관’ 참관 프로그램에 ‘강경에는 초강경으로’라는 표어가 눈에 띈다. 강경에는 초강경으로… 두루 알다시피 북한의 일관된 외교 노선이다. 북한의 주장대로라면 “한 평방킬로미터에 평균 18개의 폭탄을” 맞았다는 한국전쟁 당시의 기억 때문인가, 공포와 그 반작용으로서의 초강경은 북한의 국가론적 기초인 듯 보인다. 자기들이 일으킨 전쟁이라고 해도 그 과정에서 겪은 공포는 공포대로 남아 있을 터이다. 원자탄으로 영토가 다 초토화되리라는 소문도 널리 퍼졌었다고 하는 만큼. 사진 출처 - SBS  남녘 백성으로선 ‘각을 뜨자’는 말이 여전히 섬뜩하다. 속내를 알았다고 해도 ‘각을 뜨자’는 말이 주는 원초적 이물감이 다 사라지진 않는다. 어쨌거나 죽기살기로 덤비겠다는 위협적 언사가 아닌가. 더군다나 요즘은 핵무기를 수천 킬로미터 너머로 쏘아 올릴 능력까지 과시하고 있는 형편임에야. 북한이 미국에 ‘크고 작은 선물보따리’를 보내겠다고 하고, 미국의 대통령이란 자가 ‘필요하다면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할 때마다, 아직도 분노와 혐오에 앞서 공포가 밀려오곤 한다. 벌써 여러 해째, 두 명의 ‘대북 강경’ 대통령을 겪은 이후의 풍경이다.  근 10년 대치를 거듭하는 속에서 북한도 많이 바뀌었나 보다. 북한 핵무장이 완성 단계에 이르고 있다는 주장을 들을 때나, 남한은 아예 제치고 미국과 직접 상대하려는 태도가 한결 완연해졌다는 분석을 접할 때면 더 그렇게 느껴진다. 그러나 여전히 내가 전해 듣는 북한은 미지의 존재, ‘각을 뜨자’는 살벌한 말로 덜컥 겁부터 나게 하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조금쯤 더 알면 안 되나. 저쪽에선 우리를 보여줄 수 없더라도 우리라도 저쪽을 좀 더 전면적으로. 웹사이트는 어렵더라도 북한 TV라도 흔하게 볼 수 없을까. 남한에서 합법적으로 출판된 북한 책이라곤 지금까지 딱 한 종, 홍석중의 『황진이』뿐이라니 아직 멀고 먼 일일까. 권보드래 위원은 현재 고려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09-08 | hrights | 조회: 8 | 추천: 0
김희수 / 인권연대 운영위원 문재인 대통령은 장발장은행과 관련하여 소득에 따른 차등벌금제 등을 실시하겠다고 대통령 공약으로 발표하였고, 국정기획위는 장발장은행 운영비용 지원을 100대 국정과제에 포함해 발표하였다. 대통령의 100대 국정과제로 장발장은행을 도와주신다니 말씀만으로도 고맙기 그지없다. 장발장은행의 꿈은 운영비용 지원을 넘어선 다른 지평선을 보고 있다는 것과 장발장은행이 꿈을 이룰 수 있게 도와주실 것을 호소하는 의미로 이 글을 쓴다. 장발장은행에 관여하고 있는 사람들의 대외적인 공통 발언은 장발장은행은 폐업이 목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소극적인 꿈이고, 적극적인 꿈은 다른 것이다. 장발장은행은 경미한 생계형 법규 위반으로 벌금을 납부할 수 없어 벌금 대신 감옥에 갇혀야 하는 이 시대 장발장을 구제하자고 만들어진 은행도 아닌 은행이다. 벌금을 낼 수 없어 감옥에서 몸으로 때우는 숫자는 2012년부터 2016년까지 연평균 38,846명에 이른다. 이 시대 장발장의 애끊는 사연과 함께 교도소는 과밀수용으로 넘치고 있다. 이것은 분명 문명국가의 모습은 아니다. 부자에게는 껌 값도 못되는 벌금액이 가난한 자에게는 잔인하고 야만스런 형벌로 뒤바뀌어 감옥에 수감되는게 빈자의 현실. 이것은 곧 가난이 형벌이라는 공식으로 바뀌어 형벌의 불평등을 야기한다. 이런 형벌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장발장은행의 궁극적인 꿈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형벌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영화 '레미제라블' 사진 출처 - 네이버  장발장은행이 가장 역점을 두고 있는 것은 일수벌금제(대통령 공약의 차등벌금제) 도입이다. 일수벌금제란 쉽게 말해 재산과 소득이 많은 사람에게 부과하는 벌금과 가난한 자들에게 부과하는 벌금형의 기준을 개인적·경제적 사정을 기초로 사람마다 달리 정하는 것을 말한다. 핀란드 최대 기업이라 할 수 있는 노키아 부사장에게 오토바이 과속 운전으로 1억 6,000만원의 벌금이 부과된 사실 등이 대표적으로 알려진 일수벌금제의 한 사례다. 그런데 법무부는 시기상조라면서 이를 반대하고 있고, 일수벌금제를 도입하려면 법률을 바꾸어야 하는데 국회가 언제 그런 신진법률을 도입할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는 형편이다. 그런데 법률 개정 없이도 가능한 방법이 있다. 형법 제51조(양형의 조건)는 형을 정함에 있어 범인의 연령, 성행, 지능과 환경, 범행의 동기, 수단과 결과 등을 참작하도록 규정하고 있고, 형법 제53조(작량감경)는 범죄의 정상에 참작할만한 사유가 있는 때에는 작량하여 그 형을 감경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위 법조항을 근거로 대통령령으로 일수벌금제 실시에 대한 구체적인 벌금 적용지침을 내리고, 검찰이 벌금형에 대한 지침에 따라 이를 적용하면 일수벌금제 도입과 동일한 효과를 낼 수 있는 방법이 가능하다. 이것이 첫 번째 방법이다. 두 번째 방법은 대법원 양형위원회에서 양형기준을 만들어 적용하는 것이다. 2007년부터 대법원 양형위원회가 활동하고 있지만, 정작 형사사건의 약 80%를 차지하고 있는 벌금형에 대한 양형 기준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그 결과 검찰이 구약식명령(검사가 제출한 자료만으로 피고인이 법원에 출석하지 않고 판사가 자료만으로 간이 재판하여 판결을 내리는 제도) 등을 통해 구형하는 벌금형이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거의 99% 그대로 법원에 의하여 선고되고 있다. 법원은 검찰을 견제해야 할 기관이지만, 벌금형에 있어서는 전혀 민주적인 사법적 통제가 전무하다시피 한 것이 현실이다. 법원도 장발장 양산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며 최종적인 책임이 있는 이유다.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이 시대 장발장을 양산하지 않도록 하는 벌금형 기준을 하루 속히 투명하게 결정·제시해야 한다. 단지 장발장만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 투명하고 공정한 형사사법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사항이다. 세 번째 방법은 현재의 제도를 유지하더라도 영국의 사례처럼 매우 정치한 규정으로 사실상 일수벌금제처럼 운영하는 방식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영국의 경우, 벌금 미납자에 대하여 교도소에 수감하는 대신 무보수근로명령, 통행금지명령(예컨대, 저녁 7시부터 아침 7시까지 가정에 체류하고 통행을 금지하는 내용), 벌금을 즉시 납부하는 자에게는 최고 50%까지 공제혜택을 주는 제도, 범죄자가 고의로 벌금을 납부하지 않은 것이 아니고 지불 능력 때문이라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법원은 벌금의 전부 또는 일부를 면제할 수도 있는 제도 등을 운영하고 있다. 우리 법제와 같은 총액벌금제도를 유지하면서도 영국은 형벌불평등을 방지할 수 있는 제도를 실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제도들이 도입되면 장발장은행은 자동적으로 폐업할 것이다. 하루빨리 장발장은행이 폐업할 수 있도록 문재인 대통령님께서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이 글은 곧 출간 예정인 '검찰공화국(가제)'에 실릴 내용의 일부를 발췌한 내용입니다. 김희수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2017-08-18 | hrights | 조회: 7 | 추천: 0
이재승/ 인권연대 운영위원 나는 7개월 전에 인권연대의 게시판에 민사재판의 맥락에서 ‘블랙리스트 소송’을 제안하였다. 2017년 7월 27일에 블랙리스트와 관련한 1심 형사재판이 매듭지어졌다. 재판에 나타난 문제점을 토론하고자 다시 쓰기로 한다. 아마도 이 문제는 고등법원에서 다투어야 할 사항이기도 하다. 김기춘에게는 연옥의 시간이 왔다. 나쁜 시대의 권력엘리트로서 김기춘의 날은 저물어간다. 그는 형사재판을 받는 것이 마뜩치 않았던지 차라리 정치적 패배자로서 독배를 마시겠다며 기염을 토했다. 그런데 그는 항우도 아니고, 사육신도 아니다. 그는 <청문회>에서도, 영화 <자백>에서도 그저 책임 앞에서 발뺌하는 초라한 노인에 지나지 않았다. 정권이 망했다고 해서 그 정권참여자들을 모두 처벌하지는 않는다. 그가 권좌에 있을 때에는 정권을 반대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을 타격하는 데에 법을 사용했을지 모르지만 법치국가의 법은 불법과 범죄를 자행한 자들만 겨냥한다. 김기춘이 유죄라는 점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것 같다. 조윤선 문체부 장관의 무죄에 대해서는 모두가 황당함을 느끼는 모양이다. “장관이 알바인가?”라는 댓글도 있다(요즘 알바로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민망한 표현이지만). 눈 딱 감고 진실에 대하여 치열하게 무지 하고픈 조 전장관의 열망이 결실을 거둔 것일까? 변호인의 뛰어난 기술과 네트웍이 통한 것일까? 어쨌든 국가개조와 좌파척결이라는 문체부의 사명과 당해장관이 무관하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 판결 부분은 관료제의 본성을 간파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변명에 녹아버린 것 같다. 내가 알기로는 오물통에 빠져서 오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기술은 없다. 이 판결에서 더 큰 문제는 대통령의 책임에 관한 것이다. 판사는 중의적으로 말했다. 대통령이 구체적인 범죄를 지시하지 않았으므로 책임이 없고, 보수적인 정책을 내걸고 당선된 대통령이 좌파를 배제하는 정책을 펼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 견해가 모두 틀렸다고 본다. 또한 대통령은 무죄이고 블랙리스트 작성자만 유죄라는 재판의 결론도 틀렸다고 본다. 대통령의 발언이나 지시가 정상적인 정치행위라면, 이를 받들어 구체화하고 수행하는 행위도 무죄가 되어야 한다. 반대로 김기춘과 문체부 공직자들의 행위가 범죄라면 권력자로서 그 기본구상을 제공하고 실행을 지시하고 이행여부를 감독하고 지속적으로 지적하는 대통령의 행위도 범죄에 해당한다. 이 쟁점은 고등법원에서 어느 하나의 방향으로 재정리되어야 한다. 대통령과 블랙리스트 작성자들이 모두 유죄가 되거나 모두 무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판사가 두 가지 가능성을 열어두려고 일부러 이렇게 판결한 것은 아닌지 의문을 가진다. 판결은 어쨌든 일관성이 없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이제 블랙리스트와 관련한 대통령의 범죄에 대해서 거론해보자. 판사는 대통령이 구체적인 범죄계획에 관여하지 않아서 죄가 없다고 본 모양이다. 이러한 시각에서라면 대통령이 범죄자로 처벌받기가 참으로 어렵겠다. 지금도 자신이 시민들에게 총을 쏘라고 지시하지 않았다는 전두환의 상투적인 변명이 떠오른다. 최고 권력자는 눈빛으로, 외마디로 통치한다. ‘배신자’ 또는 ‘진실한 사람’과 같이 권력자의 말은 단도처럼 짧고 암시적이다. 그래서 권력이다. 문체부직원이나 김기춘이 대통령의 의향과 무관하게 자가발전하여 블랙리스트를 작성하고 운용하였다면 대통령은 죄가 없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좌파척결이나 국가개조를 말하고 영화제작투자사의 사장자리까지 흔드는 대통령이 블랙리스트의 발상과 무관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너무 순진한 이해이다. 대통령은 블랙리스트 범죄의 총연출자이고 나머지 인물들은 고작 중간기획자나 실행행위자들이다. 국민은 2016년 총선에서 새누리당의 공천과정을 통해 대통령이 척결의 달인이라는 점을 재차 확인하였다. 박 전 대통령은 무능력한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피아를 구별하고 찍어내기 부문에서는 아버지에게 뒤처지지 않는다. 블랙리스트나 배신자명부(공천살생부)는 그의 전문영역이다. 보수적인 정치인이 자신의 보수적인 공약을 내걸고 당선되었으니 좌파를 배제하는 정책을 펼 수도 있다는 판사의 견해는 그럴듯하지만 더 생각해보자. 판사는 이 일이 공약의 이행이므로 별 문제가 없다면서 그를 당선시킨 국민에게 책임을 슬쩍 떠넘기는 것 같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히틀러가 유대인의 절멸을 내걸고 당선되었으니 유대인을 이제 척결해도 된다는 말처럼 들린다. 물론 유대인학살과 비판적인 문화예 인의 지원배제가 동일한 수준의 범죄와 악이 아니라는 점은 인정한다. 그런데 판사는 정책과 범죄를 구별하지 못하는 미끄러운 언덕에 이미 서 있다. 원론적으로 생각해보자. 보수적인 정책을 내걸고 당선되었으면 보수적인 정책을 펴는 것은 당연하고, 진보적인 정책을 내걸고 당선되었으면 진보적인 정책을 펴는 것도 당연하다. 문제는 그 정책이 인권, 민주주의, 법치국가의 원리에 반하는지 여부를 놓아버려서는 안 된다. 최고 권력자는 지지자의 이름으로 국가와 헌법을 처분하고 반대자를 몰살시킬 권한까지 획득할 수는 없는 것이다. 판사는 정책적 재량이라는 관념으로 헌법에 구멍을 내고 있다. 좌파척결이나 국가개조는 이른바 표적 집단을 상정한다. <국제형사재판소규정>을 들여다보면 블랙리스트의 의미를 어느 정도 구체화할 수 있다. 어떤 정책이 특정 집단이나 확인가능한 집단에 대한 광범위한 또는 체계적 공격의 일환으로서 ‘정치적, 종교적, 인종적, 민족적, 국민적 이유로’ 박해를 가하거나 비인도적인 행위를 의도한다면 그것은 ‘인도에 반한 죄(crime against humanity)’에 해당한다(제7조). 이는 박근혜와 김기춘으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규범적 시발점이다. 국가인권위원회법은 헌법상의 평등의 의미를 구체화하였다. 이에 따르면 성별, 종교, 장애, 나이, 사회적 신분, 출신 지역, 인종, 피부색,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성적 지향 등을 이유로 고용, 교육, 용역, 재정지원 등에서 차별하는 것을 평등권 침해로 규정한다(제2조). 정부에 비판적인 문화예술인이라는 이유로 정부지원사업에서 배제하는 것은 헌법위반이다. 정부정책은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적인 영역이고, 공적인 영역은 권력자의 사유물이 아니기 때문에 평등의 원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박근혜와 그 도당들은 문화 예술 표현의 자유 영역에서 좌파척결을 내걸고 정치적 탄압을 자행하였기 때문에 반민주적인 세력으로 단죄해야 한다. 박근혜와 김기춘은 자유민주주의를 나치화하였다. 판사가 표현의 자유를 통제하고 비판적인 예술인들을 억압하기 위한 발상을 보수적인 정책으로 상투화하는 것은 나치즘의 동방판이다. 어느 정권이든 정치적, 종교적, 인종적, 민족적 이유로 특정집단을 표적으로 삼아 정책을 펼친다면 그것은 정치적 박해이고 때로는 인도에 반한 죄로 상승한다. 되돌아보면 긴급조치를 비롯하여 유신시대에 이루어진 억압은 박정희와 김기춘의 인도에 반한 죄들이다. 인도에 반한 죄에는 시효가 없다고 주장하는 담대한 검사와 판사가 조속히 나타나기를 기대해본다. 어느 정권이든 헌법의 기본원리나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지 않으면서 국민적으로 수긍할만한 정책을 펼쳐야 한다. 그것은 주로 경제정책이나 조세정책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정책수행의 결과는 다음 선거에서 심판하기가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천년만년 집권하겠다고, 국가를 개조하겠다고, 이데올로기적 과잉에 빠져 정치적 표적 집단을 설정하여 억압과 배제를 획책하는 블랙리스트는 정책이 아니라 범죄의 기획이다.   이재승 위원은 현재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08-09 | hrights | 조회: 6 | 추천: 0
김창남/ 인권연대 운영위원 지난 7월 20일 제주대 인문대 교수 19인의 연명으로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성명서의 제목은 ‘우리는 왜 대학의 회복을 바라는가’였다. 뉴스에서도 크게 다루어지지 않았고 별달리 화제가 되지도 않은 이 ‘뜬금없는’ 성명서를 나는 페이스북을 통해 우연히 접했다. 이 성명서에서 교수들은 먼저 대학의 의미를 묻고 있다. 그들에 따르면, 대학은 ‘창의적인 인재를 양성하는 미래가치를 만들어 가는 공간’이며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먼 곳을 내다보면서 기존의 관행과 규칙, 사고틀을 넘어 새로운 지식담론을 생산’하는 곳이다. 대학을 무대로 형성된 다양한 학문공동체들이 ‘사소한 개념 하나에서도 논쟁을 벌이고 비판하고 소통하는 학문적 토론’이 존재할 때 비로소 대학은 대학으로써 존재가치를 가진다는 것이다.   제주대 인문대 교수들이 발표한 성명서 내용의 일부 사진 출처 - 제주의 소리   제주대 교수들이 성명서를 낸 것은 바로 그런 대학의 존재가치가 지금 근원에서부터 붕괴되고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대학이 환금성 높은 기술기능을 생산하고 직무능력을 갖춘 인력을 공급하는 곳으로 인식되면서 학문적 공동체가 무너지고 있고, ‘연구역량 강화’니 ‘교육지표 개선’이니 하는 명분으로 교육과 학문을 획일적으로 평가하고 효율화하겠다는 위험한 논리가 대학을 붕괴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성명서는 ‘대학의 회복’을 위해, 현재 강압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정부와 교육당국의 대학 구조조정 정책과 고등교육 재정지원 정책을 원점에서 재검토할 것, 대학이 정부의 구조개혁 평가 및 재정 지원사업 등을 핑계로 벌어지고 있는 비민주적이고 부도덕한 이른바 성과지표 개선방안 따위에서 벗어나 대학다운 정체성과 품위를 회복할 것, 그리고 대학 구성원들 스스로 정부와 대학 당국에 의해 강제된 비정상적 평가와 관리에 반대하고 이런 퇴행이 재현될 수 없도록 학문공동체의 활성화에 적극 나설 것 등을 요구하고 있다. 대학에 몸담고 있는 한 사람으로 나 역시 이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대학은 대학평가를 통한 인위적인 구조조정 압박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교육의 ‘질’을 관리하겠다며 제시되는 수많은 ‘양’적 지표들은 대학의 풍경을 크게 바꾸고 있다. 교수들은 학술 논문의 양을 채우기에 급급하고 행정적으로 요구되는 수많은 서류들을 채우며 이런 저런 실적을 높이느라 분주하다. 학생들은 상대 평가의 살벌한 현실 앞에서 성적에 애가 닳고 출석 체크에 목을 맨다. 전임교수 강의 분담률을 높이기 위해 교수들의 강의 부담은 커지고 시간 강사들이 해고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취업률 지표를 올리기 위해 갖가지 편법까지 동원된다는 소리도 들린다. 재정 지원과 인위적인 정원단축을 무기로 삼아 대학을 통제하려는 교육 당국 앞에서 대학은 속수무책으로 전전긍긍하고 있다. 대학이 다양한 지적 담론이 만개하고 활발히 토론하며 비판적 지성이 육성되는 공간이라는 상식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학령인구가 감소하는 상황에서 대학에 어떤 식으로든 일정한 구조 조정이 필요한 건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런 구조조정이 ‘자본과 시장의 논리’, ‘효율성의 논리’, ‘경쟁력의 논리’라는 잣대로 이루어지는 건 심각한 문제다. 그것은 대학이 가진 가장 근원적인 의미를 배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뜻에서 제주대 인문대 교수들의 성명은 매우 절실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 이들의 문제제기가 어떤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다른 대학에서 여기에 호응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 같지도 않다.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고 교육부 수장이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일단은 기대를 갖고 지켜보자는 생각이 많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제주대 인문대 교수들의 성명서는 적어도 이 문제를 바라보는 일부의 교수들의 인식이 그만큼 절박함을 보여준다. 이들의 목소리를 계기로 이 사회에서 대학이 갖는 의미와 현실, 전망에 대해, 현재 진행되는 대학 구조조정의 문제에 대해, 대학 교육이 가야할 방향에 대해 진지한 토론이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김창남 위원은 현재 성공회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08-09 | hrights | 조회: 3 | 추천: 0
김영미/ 인권연대 운영위원 교사의 감정은 주로 언어를 통해서 나타난다. 교사의 언어는 학생, 학부모, 동료교사, 선후배교사 관계 속에서 희망을 주기도 하지만 상처를 주고받기도 한다. 말과 글은 머리에만 남겨지는 게 아닙니다. 가슴에도 새겨집니다. 마음 깊숙이 꽂힌 언어는 지지 않는 꽃입니다. 우린 그 꽃을 바라보며 위안을 얻기도 합니다. - 언어의 온도(이기주) 중 - 감정을 절제하고 모범적이어야 한다는 강박감에 자신감 넘치는 언어를 사용하는 교사, 지나친 열등감이 있는 교사가 사용하는 언어, 감정 변화가 심한 교사가 사용하는 언어들은 학생들뿐만 아니라 동료교사들에게 스트레스와 상처를 준다. 교사 생활이 오래 될수록 언어사용에 신중해지며 어떻게 말하느냐 또는 어떤 말을 하지 않느냐가 중요 한 것 같아 학생과 동료교사들의 언어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다언(多言)이 실언(失言)이 되지 않도록 입을 닫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 최근에 예술을 전공한 교사로 정년을 3년 앞둔 심 교사(가명, 남)와 학교가 처음인 현 교사(가명, 여)가 병가를 신청했다. 심 교사는 교사들의 모임이나 예술교사회의에서 2시간이상 학생에게 지도하듯이 권위적인 말로 학교 업무에 대한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하면서 현 교사 등 다른 교사들이 발언할 기회를 주지 않고 회의를 끝냈다. 현 교사는 학생지도 및 업무에 대한 고충이 많았지만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현 교사가 학생지도를 하는 모습에 불만이 있던 심 교사가 그 자리에서 학생에 대한 훈계와 함께 현 교사에게 지도를 하자 그동안 쌓인 감정과 모욕감에 분노한 현 교사가 큰소리로 항의를 했다. 당황한 심 교사가 “왜 이렇게 짖어대! 짖지 마! 시끄러워! 말하지 마!”라고 소리 쳤다. 이에 심한 모욕과 분노의 감정을 느낀 현 교사는 울면서 학교장실로 달려갔다. 동료교사가 아닌 부하직원으로 대하면서 권위주의적인 언어 사용, 대화마저 차단한 심 교사에게 불편한 감정을 가졌던 현 교사는 개(동물)에게 쓰는 언어를 본인에게 사용한 것에 대한 분노의 감정이 한순간에 폭발한 것 이었다.   사진 출처 - 아시아경제 학교장 중재로 심 교사가 사과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된 듯 했지만, 진심어린 사과로 느끼지 못한 현 교사는 심한 불면증과 적응장애로 병가를 신청했다. 다음날 심 교사는 현 교사가 자기를 곤란하게 만들려는 음모라며 이를 받아준 학교 측에 난동에 가까운 소란을 피우다가 탈진하였고 바로 스트레스성 만성위염 등으로 병가를 신청해 학교를 나오지 않고 있다. 교사들은 늘 마주치는 학생들과 더불어 학부모, 학교관리자로부터 상처 받고 감정을 상하기도, 분노하기도 한다. 모든 것이 낯설던 현 교사가 동료교사로부터 격려가 아닌 심 교사의 차갑고 기계적인 언어에 얼음이 되어버린 것이다. 일상 속에서 쓰고 있는 말 하나하나에 소중함과 절실함을 담은 따뜻한 말을 쓰도록 노력한다면 갈등과 분노의 차가움이 줄고 온기가 생겨날 것 같다. 김영미 위원은 현재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14 | 추천: 0
- 희망과 실망의 변주 서상덕/ 인권연대 운영위원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요즘 안철수 국민의당 전 대선후보가 어떤 모습으로 정치판을 떠날지 상상해보고 있다. "안철수가 고대하고 고대하던 대선 출마 선언 기자회견을 하던 그때가 다시 떠오르네요. 당시 안철수가 내건 슬로건이 '미래는 이미 우리 곁에 와 있습니다'였죠? 저는 이 문구가 참 마음에 들었어요. 우리 사회에, 정치판에 희망으로 가득 찬 새로운 미래가 태풍처럼 밀려올 것만 같은 떨림이랄까." (강연재, 「안철수는 왜」 23쪽) 안철수 전 국민의당 공동대표의 '새 정치'에 공감한다며 관련 저서까지 펴냈던 강연재 전 국민의당 부대변인이 7월 6일 탈당계를 냈다. 앞서 강 전 부대변인은 "(현재의 국민의당이) 제3 중도의 길을 가는 정당도 아니고, 전국 정당도 아니고, 안철수의 새 정치도 없다고 판단했다"고 탈당 사유를 밝혔다. 그러면서 "안철수의 새 정치는 저뿐만 아니라 국민들께서도 원했다. 그런데 새 정치라는 것이 정말 어려운 것 같다. 이걸 안착시키는 데 있어 정말 사생결단 각오나 결기, 용기가 필요한 일인데, 그렇게 하기에는 안철수라는 정치인과 저를 포함한 주변 분들의 역량이 다 부족했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ㅋㅋㅋ 이러~언. 그걸 지금에서야….) 문재인 대통령의 아들 준용씨에 대한 '취업특혜 의혹 제보조작' 사건 혐의로 이준서 전 당 최고위원이 구속되는 등 바람 잘 날 없는 국민의당에 쏠린 평범한 일반 시민들의 감정은 ‘실망’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닌 듯하다. 스스로 ‘안빠’임을 자임하던 강연재마저도 "안철수 대응에 실망"이란 말을 날리고 탈당하는 판이니…. 그러나 잘 생각해보자, ‘실망’이라니…. 그렇다면 무슨 ‘희망’이라도 걸었다는 말인데…. 나는 이 자리에서뿐 아니라 기회가 닿는 여러 자리에서 안철수라는 인물이 희망, 그것도 ‘정치적’ 희망을 걸 정도의 사람이 못 된다는 말을 줄곧 해왔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당장 ‘이명박근혜’ 정권 9년의 아픔을 낳는데 톡톡히 한 몫 한 이가 정치인 안철수임을 부인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듯하다. 기억의 테이프를 감아 정치인 안철수의 등판 시점으로 돌아가 보자. 당시 이명박 정권에 실망한 국민들은 합리적이고 정직해 보이는 안철수에 희망을 뒀다. 하지만 이 희망 안에 ‘패착(敗着)’이 도사리고 있었다. 성공한 벤처사업가, ‘국민 멘토’라는 이미지에 너무 빨리 ‘성공한 정치인’이라는 희망을 결합시켜버린 것이다. 희망 걸 데를 찾지 못하던 이들의 조급증이 만들어낸 결과다. 당시 정권에 대한 실망이, 오도된 희망 안에서 악수(惡手)를 변주해낸 것이다. 그 끝이 어떠했는지는 다 아는 사실이다. 당시 문재인 후보의 마지막 광화문 유세가 끝난 뒤 안철수는 “문 후보가 대통령이 되건 안 되건 나는 ‘내 정치’를 하겠다”고 했다. 그러고는 역사적인 대선 투표 당일 가방을 싸서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분명 잘못된 선택이었고, 정치인으로서 무책임의 극치를 보여줬다. 그때도 지금도 안철수 ‘정치’의 실체를 알 수 없다. (아니, 있기나 한지….) 그 후과는 ‘이명박근혜’ 정권 9년간 이어졌고 오늘, 그로테스크한 모습으로 또 다른 변주를 낳고 있다. 준용씨에 대한 '취업특혜 의혹 제보조작' 사건은 그 한 조각일 뿐이다. 그래도 정치인 안철수에 희망을 거는 이가 있다면 ‘예정된 파국’에 눈감은 무감각, 무지를 탓하는 걸 넘어 역사적 책임을 물어야 할 지 모르겠다. 그러나 안철수 전 대표는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지난 7월 2일 당 차원의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국민과 당에 정말 죄송한 일이 발생했다"고 말한 것, 그게 전부다. 많은 국민이 공분하고, 자신이 만든 당이 존폐 위기에 내몰리고 있는데, 이런 수준의 언명이라니. 그럼에도 그때도 지금도 안철수 전 대표의 긴 침묵이 이어지고 있다. 할 말을 참고 있는 게 아니라, 타이밍을 보고 있는 게 아니라면, 이제 어떤 말을 해도 좋은 소리 들을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알고나 있긴 한 걸까. 나는 최소한 안철수가 그 정도 판단은 하고 있으리라 기대를 걸어보지만, 역시나 콘텐츠가 없기 때문이라는 결론에 가까워지고 있다. ‘정치인’ 안철수는 그때도 틀렸고 지금도 틀렸다. 앞으로는 정치인 안철수로 인해 ‘물 먹는’ 이들이 더 이상 생겨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헛된 ‘희망’의 변주 놀음에 정신이 뺏겨 실망에서 더 나아가 절망의 나락에 떨어지는 이가 생기지 않았으면 한다. 서상덕 위원은 현재 가톨릭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10 | 추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