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home > 인권연대소개 > 인권연대란?

‘발자국통신’은 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녕(서강대 교육대학원 교수), 김영미(금천문화예술정보학교 교사), 김희수(변호사), 설경(변호사), 오인영(고려대 역사연구소 연구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재상(CBS PD), 이재성(한겨레신문 기자), 이재승(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임아영(경향신문 기자), 장경욱(변호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 허홍렬(치과의사), 황미선(면일초등학교 교사)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이재성/ 인권연대 운영위원  의사들의 이기적이고 유아적인 집단행동을 보면서 울화가 치민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국사회가 쌓아 올린 학력주의라는 바벨탑의 꼭대기에서 자칭 ‘전교 1등’들이 벌인 광란의 질주는 병들어 있는 우리 사회의 자화상을 돌아보게 했다. 더 높이 올라가 더 많이 먹겠다는 저들의 탐욕이 아무런 수치심 없이 전국에 생방송 되는 현실이 나는 참을 수 없을 만큼 부끄러웠다.  의사들의 집단행동을 보면서 검사들을 떠올린 것도 비단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같은 ‘사짜’라서만이 아니다. 학력경쟁에서 승리했다는 이유로 부와 권력의 독식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오만함과 자신들이 이 나라의 시스템을 결정하는 주체인 것처럼 사고하는 비민주적 성향이 닮아 있었다. 우리 사회는 의사와 검사(판사) 등 이른바 ‘사짜’들의 부와 권력을 보장해 왔다. 최근의 의란(醫亂)과 검란(檢亂)은 정부가 그 공고한 기득권에 균열을 내려 하자 벌어진 도발이다. 나는 두 노블레스 집단의 이기주의로 대표되는 ‘부자들의 계급투쟁’이 우리 민주주의와 직결된 문제라고 생각한다. ‘내로남불’과 ‘진영논리’라는 방패  의대 정원 확대를 반대하는 의사들의 집단 진료거부가 밥그릇 싸움이라는 점은 대체로 쉬이 인정하지만, 윤석열 검찰의 검찰개혁 저지 투쟁이 밥그릇 싸움이었다는 데는 토를 다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의사들의 경제투쟁과 달리 검사들의 경제투쟁은 정치투쟁(권력감시)의 외피를 쓰고 은밀하게 벌어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검찰의 경제투쟁이란 수사권과 기소권을 양손에 쥐고 있어야만 여의봉처럼 효과가 극대화하는 전관예우 시스템의 영속화이며, 그것을 분리하려는 검찰개혁 시도를 분쇄하기 위한 투쟁이다. 의사들이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진료권을 버렸다면 검사들은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수사권을 남용했다.) 사안이 크든 작든 권력감시라는 명분이 있는 한 검찰은 일종의 ‘까방권’을 천부인권처럼 보유하게 된다. 예를 들어 검찰의 조국 일가 수사는 정치적 목적을 가진 무리한 수사였으며 사실상 실패한 수사였음이 드러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윤석열 검찰을 향한 비난이 크지 않은 이유가 여기 있다. 결국 개혁을 하려면 티끌 같은 잘못도 있어선 안 된다는 논리가 성립하게 됐다. 이렇게 되면, 누군가에게 과도하게 주어져 있던 부와 권력을 나누는 개혁은 백 년이 지나도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내로남불’과 ‘진영논리’라는 비판은 반개혁 수구세력이 휘두르는 전가의 보도이자 방패가 되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정치적 순수주의에 빠진 원리주의자들  문제는 진보 인사들 사이에서조차 인식의 차이가 크다는 점이다. ‘내로남불’과 ‘진영논리’에 대한 판단이 세상의 전부가 돼버린 진중권이나 서민 같은 사람은 이미 레테의 강을 건너가 버렸다. 최근엔 또 다른 차원의 균열이 보이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경제학자 정태인은 최근 페이스북에 이렇게 썼다.  “검찰개혁? 중요하다. 그러나 불평등 위기보다 중요한가? 3년 넘게 종부세 안 올린 게 촛불 정부인가? 언론 개혁? 중요하다. 조중동은 악성 바이러스, 맞다. 그러나 기후위기보다 중요한가? 3년 넘게 4대강 보도 그냥 두는 게 촛불 정부인가?”  불평등과 기후위기가 검찰개혁이나 언론개혁보다 더 중요한, 상위의 과제라는 데는 나도 동의한다. (사실 이 정부는 언론개혁을 말한 적이 없고, 생각도 없다!) 하지만 차원이 전혀 다른 주제를 견주는 방식의 비판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정부는 불평등이나 기후위기 문제에 대해 장기적인 관점으로 국민을 설득하고 정책대안을 제시해야 할 의무가 있다. 문재인 정부가 이에 대해 유능하지 않다는 정태인의 주장에는 나도 동의한다. (실은 유무능을 따지기 전에 쁘띠부르주아 정당으로서 민주당의 계급적 한계를 지적하는 게 더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주제와 직접 관련이 없으므로 생략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검찰개혁 필요성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검찰개혁은 2016~2017년 촛불항쟁 과정에서 차기 정부 개혁과제 1순위로 꼽혔던 사안이다. 그만큼 우리 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했던 실체적 위험이었다. 더구나 수구세력은 검찰개혁 저지를 위해 총력을 집중하고 있다. ‘조국 사태’에 이은 최근의 추미애 장관 흔들기는 그 일환이다. 그런데도 이른바 피디 성향의 평등파들 사이에서 정태인류의 인식이 자랑스레 전시되는 현상은 자못 우려스럽다. 나는 그들이 검찰이란 집단의 파괴력과 상징성을 무시하고 있거나 애써 외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좀 심하게 말하면, 정치적 순수주의에 빠져 환상을 좇는 원리주의자들의 옹알이에 불과하다고 평가한다. 수구세력의 사법적 날개가 된 검찰  수구세력이 검찰개혁 저지에 총력을 기울이는 이유는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검찰이 수구세력의 주요 진지이자 요새이기 때문이다. 군대를 동원한 쿠데타가 거의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공권력 가운데 가장 강력한 물리력(수사권, 영장청구권, 기소권, 형집행권)을 독점하는 검찰을 수구세력은 정치적 반대파를 제거하는 가장 효율적인 수단으로 활용해 왔고, 그 과정에서 둘 간의 정치적 연대가 형성됐다. 여기에 물적 토대를 제공하는 재벌권력이 가세하면서 수구세력의 트라이앵글이 완성됐다. 요컨대, 반검찰개혁 전선은 수구세력 계급투쟁의 최전선이다.  검찰에 있을 때 정의의 사도처럼 행세하던 최재경 같은 이들이 자연스레 재벌의 앞잡이가 되는 상황은 검찰이 수구세력의 사법적 날개가 된 현실을 웅변한다. 비단 최재경만이 아니다. 황교안 같은 공안통들은 권위주의 정권에 복무하면서 정치적으로 활로를 찾았지만, 이종왕 같은 특수통들은 퇴직 후 재벌의 손발이 되어 돈을 버는 쪽을 택했다.  평소 검찰 독립을 목 놓아 부르짖는 열혈 검찰주의자들 가운데 퇴직 후 재벌의 앞잡이가 된 선배 검사를 비판하는 경우를 나는 본 적이 없다. 검찰에 있을 때는 권력을, 퇴직하고서는 부를 누리는 것이 자신들의 당연한 출세 코스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첫 단추는 잘못 꿰었지만 이제라도  검찰개혁을 포함한 사법개혁의 최종 목표는 ‘돈으로 법을 사는 구조’를 바꾸는 것이다. 시민이 기소에 참여하는 기소대배심, 재판에 참여하는 배심재판의 전면 도입을 통해 검사와 판사들의 재량을 줄이고 민주적으로 통제하는 것이다. 핵심 고리는 이름도 아름다운 ‘전관예우’를 혁파하는 것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검찰을 길들여 자신의 칼로 사용하는 쪽을 택했고, 그 칼에 제 손을 베었다. 이른바 추미애 라인으로 검찰을 장악한 것은 당장 불가피한 선택이었겠으나, 하책 중의 하책이다. 나는 이성윤 서울중앙지검장이 의로운 검사라서 추미애 장관과 문재인 정부 편에 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공수처가 설립되더라도 정권이 바뀌면 제2의 대검 중수부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나는 반복적으로 경고해 왔다. 과연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은 수사와 기소 분리를 포함한 2단계 검찰개혁을 수행할 수 있을까. 문재인의 검찰 개혁이 여기서 멈춘다면, 노무현의 만시지탄은 반복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조선일보가 돌리는 사탄의 맷돌  다시 서론으로 돌아가 보자. 의사들의 집단행동은 대체 누가 저들을 이토록 뻔뻔한 공감력 제로의 괴물로 만들었는가라는 질문을 우리 사회에 던졌다. 때마침 전교조가 받아든 대법원의 파기 환송 판결은 이 땅에도 한때 참교육을 향한 열망이 있었으며, 경쟁 일변도의 숨 막히는 승자독식이 아닌 다양성과 협동의 중요성을 가르쳤던 선생님들이 있었음을 상기하게 했다. 너무나 오랜 고통 끝에 뒤늦게 찾아온 정의 앞에 전교조 선생님들은 기쁨보다 망연자실한 감정이 더 크지 않았을까, 나는 홀로 안타까웠다. 그리고 전교조를 빨간색으로 색칠하고 악마화하는데 앞장섰던 <조선일보>를 떠올렸다. 그 시각에도 조선일보는 의사들의 집단행동을 옹호하고 정부를 규탄하느라 시커먼 지면을 궤변과 거짓으로 채우고 있었다. 노동자들의 파업을 맹비난하던 입으로 의사들의 파업을 지지하는, 그 일관된 비일관성만은 인정해주어야 하는 것일까.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전교조와 386세대는 조선일보와의 싸움에서 졌다. 패배했을 뿐 아니라 스스로 기득권의 일부가 되었고, 2030세대는 386보다 더 철저하게 성과주의에 빠져있다. 학력주의가 지배하는 이성의 폐허에서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조선일보가 돌리는 사탄의 맷돌을 멈출 수 있을까. 만약 그럴 수 있는 방안이 있다면, 나는 진영논리라는 비난을 감수하고서라도, 기꺼이 그 편에 서겠다.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20-09-16 | hrights | 조회: 3589 | 추천: 86
임아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엄마, 연계형 가고 싶은데.”  9월이 되었지만 초등학교 2학년이 된 첫째 아이가 학교에 간 횟수는 열 손가락을 넘지 않는다. 학교 수업은 가정에서 하는 원격수업으로 대체됐고 친구들과의 교류는 요원하다. 모든 아이들이 집에 갇혀 있어 ‘코로나 세대’라는 말도 나왔다. 아이는 자주 말한다. ‘연계형 돌봄 교실’에 가고 싶다고.  지난 7~8월 맞벌이인 우리 부부는 아이들을 집에 둘 수 없었다. 첫째는 돌봄 교실에, 둘째는 어린이집 긴급보육 시스템에 의지했다. 8월부터 수도권에 코로나 재확산세가 심상치 않아지자 기관에서 코로나가 확산되면 어떡하나 걱정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둘 다 회사를 가야하니 방법이 없었을 뿐이다. 아이는 아이대로 학교에 가고 싶어했다. ‘연계형’ 돌봄교실에 가면 같이 ‘블레이드(팽이)’를 접어 돌릴 수 있는 친구가 있기 때문이다. ‘연계형’에 가고 싶다는 아이에게 차마 학교에 가면 안 된다고 할 수도 없었다. 아이는 ‘친구들과의 놀이’를 그리워했으니까.  지난 7월 일주일에 하루씩 학교에 갔을 때 아이에게 물었었다. “오늘 친구들하고는 잘 지냈어?” 아이는 손사래 쳤다. “엄마, 친구들하고 말하면 안돼. 선생님이 코로나 위험하다고 쉬는 시간에 노는 것도 조심하라 하셨어.” 급식을 먹을 때도 말할 수 없는 학교. 그러나 돌아보면 그조차도 ‘교류’였다. 어느 주말 외삼촌이 놀러오기로 했다가 정부종합청사에 확진자가 나오면서 약속을 취소했다. 정부청사에는 내가 담당하는 금융위원회 기자실이 있었고 확진자와 동선이 겹치지 않았지만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 생각은 하지 못했다. 아이는 기다렸던 외삼촌과의 만남이 취소됐다는 소식에 소리 내어 울었다. “코로나 때문에, 코로나 때문에...”라고 말하며. 약간 격하게 우는 아이를 보며 아이들의 ‘상심’은 어른들의 답답함과 차원이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다시 4주간 집에 갇혀 있는 ‘코로나 세대’를 키우며 작은 아이들의 배움에 대해 생각한다. 친구들과의 교류를 통해 사회를 배워갈 나이에 ‘만남’이 단절된 아이들 세대의 배움에 대해서. 그런 와중에 일부 과학고에서는 계속 수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는 한 국회의원의 문제제기를 들었다. 교사 1인당 학생 수가 적어 밀집된 환경이 아니기에 가능했다는 설명이었다. 전 세계를 뒤덮은 코로나 팬데믹은 아이들의 배움 앞에서도 평등하지 않다.  코로나 확산 이후 1년 정도가 지나면 아이들의 ‘학습 격차’가 통계로도 증명되기 시작할 것이다. 맞벌이 부부지만 퇴근 후에 매일 아이 학습 진도를 체크하고 아이가 다 하지 못한 숙제를 도와줄 수 있는 우리 집은 그나마 낫다. 생계 걱정 때문에 돌봄을 신경 쓸 수 없는 한부모 가정이라면, 젊은 부부들만큼 아이들 학습을 도와줄 수 없는 조부모 가정이라면 어떨까. 두 아이를 낳고 돌봄의 위기를 여러 번 넘었다. 그러면서 가장 크게 배운 것은 한 존재를 온전히 돌본다는 것은 부모의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이를 마을에서 키워야 한다는 말은 그래서 지금도 유효하다. 그런데 코로나로 드러난 우리의 돌봄·교육 환경은 어떤가. 어떤 부모에게서 태어났느냐와 상관없이 아이들을 잘 돌볼 수 있는 사회인가. 사진 출처 - 경향신문  코로나 초기에도 학원들은 문을 열었다. 미취학 아이들이 다니는 동네 대형 영어학원이 문을 열었다는 소식에 전화해 항의했다. “바이러스 확산 위험 때문에 학교가 닫았는데 학원에서 밀집된 환경으로 지역사회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하시나요.” 영세한 학원도 아니고 답답했다. 학원 선생님은 대답했다. “열어달라는 학부모님들의 요청이 많아서요.” 바이러스가 퍼질까 걱정하는 상황에서도 누군가들은 열심히 사교육을 받았다. 왜 그렇게 어린 아이들이 영어 사교육을 받아야 하느냐는 질문까지 갈 필요도 없다. 이제 교육은 계층 이동의 사다리 역할이 아니라 불평등을 자녀에게 대물림하는 도구가 되어버린 것이 아닐까.  역설적으로 ‘물리적 공간인 학교’가 사라져버린 지금 우리는 코로나 이전부터 있었던 교육의 불평등을 더욱 실감하고 있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배경에 따라 코로나 학습 격차는 더욱 심해지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까. 임아영 위원은 현재 경향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20-09-09 | hrights | 조회: 381 | 추천: 11
최낙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일말의 근거도 없이 어떤 ‘썰’을 그냥 사실로 받아들일 때가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 그 일을 돌이켜보면 단지 어처구니가 없을 뿐입니다. 왜 그랬는지, 어째서 그랬는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되어 가는가 하는 과정에 대해서는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0여 년 전쯤, 서울에서 기차로 한 시간 남짓한 거리의 농촌 마을에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위세 좋은 신도시의 노른자위가 되었지만, 당시 그곳은 리(里) 단위의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그 마을에는 제 또래의 청년(?)들이 대여섯 명 정도가 살고 있었습니다. 글을 써보겠다는 사람, 무슨 고시 혹은 공무원 공부를 한다는 사람, 명리학을 깨우쳐보겠다는 사람 등등 출신도 배경도 다른 이들이 어쩌다 보니 친구처럼 지내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공통점이라고는 마을 토박이가 아닌 소위 외지인들이었다는 것, 단지 월세가 싸다는 이유만으로 이곳에 살게 되었다는 것 정도였습니다. 그런데도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의 관계는 점점 더 끈끈하게 발전해갔습니다.  저녁 무렵 가끔 모여 회식처럼 시작되었던 술자리는 몇 달 후, 벌건 대낮의 술판이 되어갔습니다. 그리고 술자리만큼 사이가 가까워지면서 형, 동생 하면서 편하게 말을 놓기 시작했습니다. 수줍은 성격에 말수가 적었던 A는 어느새 좌중을 압도하는 개그맨이 되어갔으며 날품을 팔았지만 알뜰하게 살림을 하던 B는 일을 나가는 날이 손에 꼽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무위도식하며 동지애(?)를 다지면서 결국 우리는, 나름 성실하게 살았던 B의 집에 모여 살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열심히 일하지 않았으니 각자의 월세를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더 쉽게 아무 때나 술판을 벌일 수 있는 비슷한 처지의 화상들끼리 모여 살고 있어 아무 생각이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함께 살던 어느 여름날 밤이었습니다. 언제나처럼 별 시덥지 않은 ‘썰’들이 난무하는 중에 누가 어디에서 들었는지 사뭇 진지하게 말을 했습니다. 나만 알고 있던 비밀을 이제야 공개한다는 듯 한 어조였습니다.  “청개구리가 남자의 ‘정력’에 그렇게 좋대!”  도대체 여자 친구는커녕 짝사랑하는 상대조차 한 명도 없는 우리에게 왜 그 말이 그렇게 중요한 정보인지 아무도 어떤 생각도 없었지만, 우리는 놀라운 사실을 드디어 알았다는 듯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습니다. 모여 사는 집 밖 화장실 근처에는 제법 굵은 대추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청개구리들로 가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뭇잎 하나에 청개구리 한 마리가 붙어 있을 정도였습니다.  아침에 화장실을 오가며 보았던 그 청개구리들에게 그런 비밀이 있었다니! 그때부터 청개구리가 왜 남자의 정력에 좋은가에 대한 격도 어이도 없는 토론이 시작되었습니다.  청개구리가 아침이슬만 먹는 것은 우주의 정기를 먹는 것이다, 저렇게 영롱한 빛깔이 나는 생명체를 본 적이 없다, 대추나무가 원래 귀신을 쫓는 나무인데 거기에 모여 사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등등. 의심 없는 결론이 이미 정해져 있으니 청개구리가 특별한 보양식인 근거는 수백 가지가 넘을 정도였습니다.  다음 날 아침부터 우리는 대추나무에서 대추를 따 먹듯이 청개구리를 한 마리씩 떼어 먹기 시작했습니다. 비위가 좋은 친구는 처음부터 날것으로 먹기 시작했고 그렇지 않은 친구는 프라이팬에 튀겨 먹었습니다. 며칠 후, 날것이 더 좋다는 누군가의 말이 설득력을 갖게 되면서 우리는 모두 매일 아침 청개구리를 날것으로 먹게 되었습니다. 왠지 몸이 가뿐해지는 것 같았고 머리도 똑똑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의 동지애는 더욱더 끈끈해져 갔습니다.  “완전히 고급 회 맛이야.”  “이제는 밥 생각이 안 난다.”  아침마다 우리는 청개구리의 효능에 대해 서로에게 자랑하고 뿌듯해했습니다. 한 열흘 정도 그렇게 지났을 때였던 것 같습니다. 한 친구가 일을 보러 서울에 다녀온 저녁이었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무언가 큰일이 났다고 써 있었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사실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큰일 났다! 청개구리 몸속에 무서운 기생충이 있대!”  서울에서 만난 사람에게서 들었는데 확실하다는, 웬만큼 익혀서는 죽지도 않는, 그 기생충이 심장에 파고 들어가 갑자기 죽을 수도 있다는, 수술도 불가능할 거라는 이야기들이 이어졌습니다. 그야말로 난리가 났습니다. 이번에도 격의 없고 어이없는 토론이 시작되었습니다. 처음 청개구리가 몸에 좋다고 말했던 게 누구였던가, 그 기생충이 어떻게 생겼냐, 지금 그게 중요하냐, 화장실 근처가 문제였나, 생각해보니 맛이 조금 이상했다, 말해준 이가 믿을 만한 사람이다, 어떻게 아는 사람이냐, 약국에 가서 물어보자, 약사가 뭘 아냐 등등.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갑론을박하는 사이 한 친구가 말했습니다.  “내 친구 중에 한의사 있어!”  다음날, 한의사 친구를 둔 동지가 기차를 타고 부랴부랴 서울에 다녀왔습니다. 동지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뭐래?”  “몸에 좋을 것도 없고, 그런 기생충이 있는 것도 아닌데...”  “아닌데?”  “근데, 그걸 왜 먹냐고...”  한동안 모두들 말이 없었습니다. 청개구리가 몸에 좋다고 했을 때, 몸에 좋은 이유들을 수백 가지 만들어낼 수 있었으며 반대로 청개구리가 위험하다고 했을 때 역시 많은 이유와 추측들이 난무했지만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무엇 때문에? 그날 이후 지금까지, 저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때 그런 일이 왜 벌어졌는지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그때 그 마을에 나를 비롯해 바보천치들 댓 명이 있었다’라고 하면 말이 될까요?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코로나-19와 태풍 관련된 것 외에 다른 정보를 보지 않으려고 애써도 황당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에 관한 뉴스를 보게 됩니다. 오래전 화장실 옆에 대추나무가 한 그루 있었고 거기엔 청개구리들이 가득했습니다. ‘썰’들이 난무하고 바보천치들도 있겠지요. 최낙영 위원은 현재 도서출판 '밭' 주간으로 재직 중입니다.
2020-09-03 | hrights | 조회: 201 | 추천: 7
오인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미국역사학회 회장을 역임한 린 헌트(Lynn Huntrer) UCLA 교수는 역사에 대해 거짓말을 늘어놓은 자들의 대표적 사례로서 홀로코스트 부정(否定)을 예시한다. 그녀의 주장에 의하면, 유럽의 극우 성향의 정치인들과 일부 문인들은 찰나의 유명세를 얻기 위해 나치 독일이 1933년에서 1945년 사이에 약 600만 명의 유대인을 계획적으로 학살한 역사적 사실을 부정한다. 부정의 양태도 다양하다. 희생자의 수가 600만에 훨씬 못 미친다거나 히틀러와 나치가 대량학살에 대한 공식적인 계획을 세운 적이 없다는 주장에서부터 가스실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주장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형태의 부정이 제기되었다.  거짓을 주장하는 자들은 살상에 가담한 사람들의 신상과 규모, 가해자들이 동원했던 수단과 방법을 참혹할 정도로 자세히 밝혀낸 역사적 사실을 부인한다. 희생자에 대한 목격자의 진술, 강제수용소를 탈출한 사람들의 증언도 타당하지 않다고 잡아뗀다. 홀로코스트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를 놓고 역사학자들이 이견을 보일 수도 있고, 실제로 이견이 존재하기도 한다. 그러나 진지한 역사학자나 독자라면 살상이 계획적이고 대규모로 자행되었다는 ‘사실’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지는 않는다.  거짓 주장이 제기될 때마다 수많은 기록에 근거한 반박이 제기되고 독일 정부와 민간에서도 과거의 악행을 인정하는 모범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홀로코스트 부정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유럽 전역과 세계 다른 지역까지 퍼져 나가고 있다. 린 헌트의 주장에 의하면, 홀로코스트를 얼마나 엉터리로 부인하든, 근거가 부실하든 상관없이, 거짓주장의 효과는 분명하게 발생한다. 2013년 말부터 2014년 초에 국제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중동과 북아프리카에 거주하는 응답자 가운데 홀로코스트 관련 역사 서술이 정확하다고 생각한다는 비율은 5분의 1에 불과했다.  거짓말로 세계의 주목을 받은 유명한 사례를 말하면서 이 분의 일화를 빼놓기는 어렵다. 2012년 시점에서 부동산 개발업자였던 도널드 트럼프는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에 대한 의혹을 제기했다. 트럼프는 오바마가 미국에서 출생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불법적으로 대통령에 선출되었다고 넌지시 말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하와이 출생 사실을 입증하는 출생증명서를 제시하자 이번에는 증명서가 위조됐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놀랍게도(!) 출생증명서를 위조문서라고 간주할 만한 증거가 전혀 없었는데도 위조 운운했다. 그랬던 트럼프가 2016년 대선 기간 중에는 자신의 입장을 철회하고 오바마의 미국 출생 사실을 인정했다. 그는 자신이 허위주장을 조장했음을 시인하면서 역시 놀랍게도 자신이 분란을 매듭짓는 공을 세웠다고 떠벌렸다. (이상의 내용은 린 헌트, <무엇이 역사인가>(박홍경 옮김, 프롬북스)의 1부에서 따온 것임을 밝힙니다.)  거짓말과 관련된 트럼프 대통령의 일화는 이뿐만이 아니다. 트럼프 정부는 ‘대안적 사실’이라는 말까지 만들어내서 억지 주장을 가리려고 했다. 2017년, 온라인상에서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에 온 사람들의 수가 전임 오바마 대통령 취임식 때 참가한 사람들의 수보다 적었다며 ‘인기 없는 대통령’이라는 비아냥이 퍼져나갔다. 그러자 백악관 대변인은 “우리 데이터로 따져 봤을 때” 단지 오바마 취임식 당시보다 더 많은 사람이 온 것이 아니라 사상 최대의 인파가 운집했다는 브리핑을 했다. 하지만 이런 뻔뻔한 허세는 두 취임식을 찍은 항공사진 비교나 지하철 이용객 비교와 같은 객관적이고 명확한 증거를 통해 반박되면서 트럼프 정부에 대한 비판은 더 거세졌다. ‘대안적 사실’이라는 신조어는 이런 와중에 나왔다. 백악관 선임고문이었던 캘리언 콘웨이는 NBC의 <밋 더 프레스>와의 인터뷰에서 백악관 대변인 발언을 옹호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 대안적 사실(Alternative Facts)을 제시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니까, ‘대안적 사실’은 객관적이고 명백한 사실을 눙치고 자신들의 편향적 생각을 사실이라고 강변하는 억지 주장, 즉 거짓말인 셈이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러시아의 푸틴 정부도 트럼프 정부 못지않게 자기들이 믿고 싶은 ‘대안적 사실’을 강변하는 데 능숙하다. 일례로 2014년 2월 말, 군 계급장을 달지 않은 러시아 특수부대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크림반도의 핵심 시설을 점령했다. 하지만 러시아 정부는 물론이고 푸틴 대통령까지 직접 나서서 그들이 러시아군이라는 사실을 반복해서 부인했다. 그들은 자발적인 ‘자위 집단’이며 심지어 현지 상점에서 러시아제로 보이는 군사 장비를 구입했을 거라고 주장했다. 푸틴과 그의 측근들조차 자신들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음에도, 러시아 민족주의자들은 신성한 러시아 민족의 보존이라는 정당한 대의를 위한 살인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까지 주장했다. 그들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별개의 민족이라는 주장이야말로 푸틴이 러시아 민족의 재통합이라는 신성한 사명을 수행한다면서 했던 그 어떤 발언보다도 훨씬 악질적인 거짓말이라고 비난했다.  명백한 사실을 모호하게 만들고, 자신들의 편향된 생각을 사실인 양 꾸며서 여론을 호도하려는 ‘대안적 사실’이 천지 사방에 넘쳐난다. ‘지금 여기’에도 그렇다. 목사라는 전광훈씨는 집회에 나오면 걸린 병도 낫는다고 혹세무민하면서 사랑제일교회와 광화문 집회를 통해 결과적으로 온 국민에게 바이러스 테러를 가했다. 국민의 생명과 생계에 심각한 위협을 안겨주고도 자기 교회가 바이러스를 퍼붓는 테러를 당했다는 궤변을 늘어놓는다. 코로나는 신앙의 문제도 아니고, 좌우 이념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방역=과학의 문제이며 절대 가치인 생명과 직결된 문제다. 그럼에도 정쟁의 대상으로 악용하려는 일부 간악한 무리가 ‘코로나 정치’라는 대안적 사실을 퍼뜨리고 있다. 그런 대안적 사실은 없다. 거짓에도 힘이 있다는 사실을 무시할 순 없지만, 실재하지도 않는 대안적 사실은 사악한 거짓일 뿐이다. 이건 사실이다. 오인영 위원은 현재 고려대 역사연구소에 재직 중입니다.
2020-08-26 | hrights | 조회: 314 | 추천: 6
이지상/ 인권연대 운영위원  날아갔다 허망하게. 몇 번의 긴 통화와 회의를 빙자한 몇 번의 술자리를 거친 후 겨우 확정했던 이번 주말 공연. 근 두 달여에 걸친 기대감이란 끈질긴 생명력은 채 1분도 되지 않는 전화 한 통으로 소멸됐다. “코로나가 이렇게 난리인데 이번 공연을 어떻게 할까요?”를 묻는 그에게 “예정대로 진행합시다”라고 배짱 좋게 호기부릴 놈이 대한민국에 얼마나 되겠는가 말이다. 익숙하지는 않지만 섭섭하지도 않다. 올해 2월부터는 자주 겪어왔던 일이다.  지난 5월 18일에 음반을 출시했다. 5년만 이었다. 뭐라도 하나 꼼지락거려야 겨우 한 장 판다. 보도 자료를 쓰고 언론사에 보내는 일도 수월하지는 않았다. 자기가 만든 물건 자기가 좋다고 우겨대는 모양새가 맘 편할 리는 없다. 겨우 자료를 디밀며 들이댔던 결과가 기사로 나올 때마다 순탄치 않은 성취감에 안도하기도 했다. 공연을 해야 했다. 이제 공연만 하면 목돈으로 빠져나간 음반 제작비를 푼돈으로라도 확보할 수 있다. 그러나 코로나. “아~ 이놈의 코로나”  전파하라는 복음(福音)은 처박아두고 코로나만 옮기고 다닌다는 어느 분의 이야기에 깊은 공감의 웃음을 날리다가 어떨 땐 부아가 치밀기도 하는 것이다. 빛이니 소금이니 진리니 떠드는 자들의 침 튀기는 언사가 요사스러운 망령처럼 떠돌아 누구에게 얼마만큼 빙의(憑依)되었을지를 추산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니 내 속이 속이 아닌 것이다.  코로나19의 전국적 확산에 지대한 공로가 있는 대구의 신천지가 그랬다. 그들은 무언가를 아주 열심히 신앙하는 사람들이었다. 모두들 열심이었다. 학교는 학생과 선생의 대면 관계를 끊었고 식당은 오지 않는 손님을 기다리며 무너져 내리는 속내를 힘겨운 은행 대출로 채웠다. 정부는 K-방역을 전 세계에 각인시킬 만큼의 능력을 보여줬고 의료진은 짓무르는 땀띠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얻어가는 일상의 평화를 다시 역병(疫病)의 진창으로 인도(引導)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빛과 진리의 세상을 보여준다는 자부심이 넘치는 사람들이다. 그런 이들이 뭇 중생들을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 중에도 순전한 복음이라든가 기쁨이나 우리가 제일이라든가 성인(聖人) 바오로가 이방의 선교사역 중심지로 두었던 지명이라던가 하는 비슷한 이름을 쓰는 교회들이 끊임없이 그들만의 복음(?)을 전파해내는데 그중에 역시 제일은 사랑이라. “하나님 나한테 까불면 죽어”라고 일갈할 만큼 사랑엔 자신 있다는 어느 믿음 충만한 선지자 덕에 비대면 강의에 행사취소문자를 수시로 받고 아이의 학원비까지 걱정해야 하는 나는 ‘염병 할 놈’에 졸지에 ‘베라 먹을 놈-벼락 맞을 놈-’ 까지 된 것이다. 아니 벼락을 맞은 것이다. 하늘을 절대적으로 신앙한다는 그들을 향해 하늘이 무섭지 않은가를 울부짖었던 역사가 낯설지 않으니 이쯤 되면 ‘전파하라는 복음(福音)은 처박아두고 코로나만 옮기고 다닌다’ 는 조소에 덧붙여 과연 그들의 복음은 코로나보다 더 나은 것이었을까를 질문하고 싶은 것이다. 보수단체들의 8·15 광화문 집회 모습 사진 출처 - 연합뉴스  “나오시오 나와요! 기독교인들이여, 하느님의 일을 거부하는 개 같은 적들을 물리치시오. 저 폭군이 내 성스러운 율법의 책을 땅에 던졌소. 그걸 보지 못하였소? 제아무리 들판에 인디언들이 가득한들 저 자만심 가득한 개에게 까지 굳이 공손하고 비굴하게 굴 필요가 있겠소? 내가 죄를 사하나니 어서 와서 저자를 치시오” - 총.균.쇠/ 제레드 다이아몬드 중에서 P98-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 국왕으로부터 받은 하늘의 명령을 외쳤던 수사(修士) 비센테 데 발베르데는 수천 년 역사에 빛나는 화려한 잉카제국의 마지막 황제 아타우알파를 살해한 피의 도살자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수하였다. 1532년 11월 16일이었고 그날 잉카의 중심 페루의 카르마르카에서 피사로의 군대는 고작 168명이었으며 그들의 간계에 목숨을 잃은 순박한 잉카의 후예들은 8만 명이 넘었다. 같은 하늘의 사명을 받았던 아즈텍 문명의 파괴자 에르난 코르테즈의 학살까지 포함하면 그들 하늘의 군대에 의해 몰살당한 원주민은 남아메리카 인구의 95%에 해당하는 1억여명 가량이다.  ‘스페인 사람들-로마 카톨릭 제국의 무적 황제이기도 하신 우리 국왕 전하의 신하들-의 신중함, 강인함, 군기(軍紀). 근면성. 위험을 무릅쓰는 항해. 그리고 전투력 등은 기독교들에게 기쁨이요 이교도들에게는 공포가 될 것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또한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고 가톨릭 황제 폐하께 미력이나마 도움을 드리기 위해 소신은 이 이야기를 기록하여 폐하께 바침으로써...’ - 위의 책 P95-  잉카의 황제 아타우알파를 속임수로 인질로 잡고 결국 처형했으며 잉카문명을 소멸시켰던 이 기록은 스페인 국왕에게 자신들의 충성심을 보고했던 에르난도 피사로와 페드로 피사로-프란시시코 피사로를 포함한 3형제-를 포함한 6인의 증언으로 자랑스런 식민지 개척자의 역사가 되어있다.  “그들은 우리에게 성경을 쥐어 주었다. 그 대신 그들은 우리의 땅을 가져갔다”는 데스몬드 투투(Desmond Mpilo Tutu) 주교의 얘기는 기독교로 포장한 서구 식민지 세력의 아프리카 침탈사를 한목에 보여준다.  “그대들은 어떻게 해서 저 하늘이나 대지의 온기를 사고 팔 수 있는가? 대기의 신선함과 반짝이는 물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것들을 팔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에게는 대지의 모든 부분이 신성한 것이다. 빛나는 솔잎, 모래 기슭, 어두운 숲속 안개, 맑게 노래하는 온갖 벌레들, 이 모두가 우리의 기억과 경험 속에서 신성한 것이다. 나무속에 흐르는 수액은 우리 홍인(紅人)의 기억을 실어 나른다. 백인은 죽어서 별들 사이를 거닐 적에 그들이 태어난 곳을 망각해 버리지만, 우리는 죽어서도 이 아름다운 대지를 결코 잊지 못한다”  푸른 별과 생동하는 들짐승들을 이웃으로 모셨던 아메리카 대륙의 마지막 인디언 시애틀(seattle) 추장의 연설은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의 한을 대변한다. 원주민들에게 땅을 강요했던 당시 미국의 14대 대통령은 프랭클린 피어스였고 그 역시 영국에서 도피한 청교도의 후예였다.  굳이 외국의 사례를 들것도 없다.  “그때 공산당이 많아서 지방도 혼란하지 않았갔시오. 그때 서북청년회라고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중심되어 조직을 했시오. 그 청년들이 제주도 반란 사건을 평정하기도 하고 그랬시오. 그러니까니 우리 영락교회 청년들이 미움도 많이 사게 됐지요.” - 윤정란, <한국 전쟁과 기독교>, 한울, 2015-  북한의 체제 특히 토지개혁에 불만을 품은 기독교인들이 해방 후 1953년까지 약 7만-10만 가깝게 남쪽으로 내려왔고 장로교와 감리교의 교권을 장악하며 개신교의 여론을 주도했다. 그들 중 대부분이 극단적 반공주의자가 되었다. 한국 예수교 장로회의 큰 어른으로 추앙받는 고 한경직 목사의 증언은 1948년도부터 벌어진 한반도 남녘의 민간인 학살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섬뜩해진다. - 이지상, <여행자를 위한 에세이 北> 삼인, 2019-  해방 후 1%에 해당했던 기독교인의 인구는 현재 20%를 상회한다. 인구 증가율까지를 포함하면 해방 후 적어도 30배 이상의 비약적 발전을 한 셈이다. 성장의 근저(根底)에 있는 반공과 독재 시절에 누린 흔적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하여 한국 사회가 친일, 반공과 더불어 기독교의 사회라고 진단하는 어느 사회학자의 규정을 빌리지 않더라도 작금의 상황에서 이들이 전하는 복음이 코로나 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유효하다. 이들이 전하는 복음은 얼핏 보더라도 국가보안법의 독소조항 폐지는 물론 비리사학 근절을 위한 사학법 폐지 반대에 성도들을 거리로 나오게 했고 목숨 바쳐 탈출한 이방인들을 타종교라는 이유로 혐오하는가 하면 최근의 차별 금지법 반대에도 열을 올리는 등 모든 이들의 살림을 위해 스스로 죽어간 청년 예수의 삶과는 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  사랑이 제일이라는 교회 관련 코로나 확진자가 450명을 훌쩍 넘었다. 지난 2월 대구 신천지 교회의 31번 환자 발생 이후 한국 교회는 신천지를 비판하는데 집중했었고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른 사안은 접어두고라도 코로나 전파로 인한 한국사회의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는 일부 교회에 대한 비판은 교계 내에서 더 많이 이루어져야 한다. 한국 기독교를 대표한다는 연합회의 전 총회장님이셨던 그 목사님에 대한 회개 요구도 빗발쳐야 한다. 세상의 상처받은 자들을 위로해야할 교회를 오히려 뭇 대중들의 비아냥의 대상으로 만든 죄, 교회 모독죄, 기독교인 모멸죄를 물어야 한다.  대인춘풍 대기추상(待人春風 待己秋霜)이라 했다. 타인을 대할 때는 봄바람 같이 자신을 대할 때는 가을 서릿발같이 하라는 공자님의 말씀이다. 한낮 동양 고전으로 치부하는 어록도 이럴진대 우주 만물의 근원, 하늘을 신앙하는 사람들이 못할 이유가 없다. 성서가 논어보다 못하다면 이 또한 교회 모독 아닌가. 이지상 위원은 현재 가수겸 작곡가로 활동 중입니다.
2020-08-19 | hrights | 조회: 379 | 추천: 11
강국진/ 인권연대 운영위원  어디에 돈을 쓰는지 알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옷을 예로 들어보자. 한 지인은 이제껏 제 돈으로 옷 비슷한 거라고는 양말 한 켤레 사 본적이 없다. 이 사람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외모를 꾸미는데 별반 관심이 없기 때문에 옷을 사는데 돈을 쓰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옆에서 챙겨주는 사람이 없으면 패션은 고사하고 단정하게 입고 다니기도 쉽지 않은, '손이 많이 가는' 부류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다른 지인은 주말에 처자식을 집에 남겨놓고 혼자서 차를 몰고 대형할인매장에 가서 자신이 입을 옷을 직접 쇼핑한다. 그는 아내가 자기 옷차림에 이러니 저러니 간섭하는 것도 싫어할 정도로 패션에 관한 확고한 소신이 있는 부류다.  옷뿐만이 아니다. 책이나 그림, 도자기, 하다못해 건담 프라모델에 이르기까지 각자 자신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에는 주저 없이 돈을 낸다. 캠핑에서 인생의 행복을 찾는 사람이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몇백 만원짜리 캠핑 장비를 살 수도 있다. 야구 좋아하는 사람에겐 축구화가, 축구 좋아하는 사람에겐 글러브가 아무 짝에 쓸모없는 낭비로 비칠 수도 있다. 물론 마권 사는데 월급을 쓸어담는다거나, 주말만 되면 강원랜드로 달려가 아침 해가 뜰 때까지 눈이 벌개지는 사람들 역시 최소한 자신들이 생각하는 우선순위를 확고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선 차이가 없다.  개개인이 돈쓰는 문제를 계모임이나 회사로 확장시켜도 크게 다르지 않은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수익 대부분을 연구개발투자에 지출하는 회사와 주주배당에 지출하는 회사는 각자가 생각하는 기업경영의 철학을 반영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국가가 어디에 얼마나 돈을 쓰고 어느 곳에 돈을 안 쓰는지 보여주는 예산문제는 그 국가의 지향점, 그 국가를 움직이는 이들의 철학과 수준을 남김없이 보여준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어떤 국가가 인권문제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여주는 시금석으로 예산만한게 없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틈만 나면 '대북 퍼주기' 비난을 받았다. 대북 퍼주기 때문에 나라 망한다는 소리까지 나왔을 정도였다. 실제 10년간 북한에 ‘퍼주기’한 돈은 식량차관을 포함해도 2조 683억 원이다. 1년에 약 2000억 원, 대한민국 국민 1인당 1년에 5000원 가량이다. 이게 어느 정도인지 비교를 해보자. 아라뱃길이란 쌩뚱맞은 간판을 달고 있는 경인운하 건설예산이 2조 2500억 원이었다. 최근 대법원 판결로 다시 한번 주목을 받은 예산 낭비의 끝판왕 용인 경전철을 짓는데 9288억원 들었다. 용인 경전철 하나면 대북 퍼주기를 5년 넘게 할 수 있다. 경인운하를 만들지 않았으면 대북 퍼주기 10년간 하고도 돈이 남았다. 참 많이도 퍼줬다.  경인운하 만든다고 땅 팔 돈은 있어도 대북 인도적 지원에 쓸 돈은 없다는 이명박, 박근혜 정부는 사실 명확한 국정철학을 제시한 셈이다. '(어차피 곧 망할 텐데) 북한에 커피 값만큼도 주기 싫다.'  코로나19 위협에 시달린 지 반년이 넘었다. 미국만도 못한 공공의료 시스템 속에서도 신속하게 (의료 관계자들의 땀과 노력을 갈아 넣은 노력으로) 지금까진 선방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여전히 상황은 불안하고 대응수준은 취약하다. 선별진료소 운영과 확진환자 치료, 역학조사, 지역사회 예방조치 등 코로나19 대응은 전적으로 공공의료 시스템과 헌신에 힘입었다. 그런 이유로 신속하게 공공병상을 확충하고, 공공의료 인력과 방역인력을 갖추지 않으면 언제라도 위기국면에 빠질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문재인 정부가 발표한 '한국판 뉴딜'은 이 정부가 생각하는 코로나19 대응 지향점과 전략, 더 나아가 코로나19 이후 한국을 어떻게 바꿀지 극명하게 보여주지 않나 싶다. 사진 출처 - 서울신문  '한국판 뉴딜' 어디에도 공공의료 얘기는 없다. 정말이지 단 한 글자도 없다. 반면 스마트병원, 비대면 의료 얘기만 잔뜩 들어있다. 전국민주노동조합 의료연대본부가 발표한 성명은 '한국판 뉴딜'의 핵심을 제대로 짚었다. “인력 확충과 공공병원 호소에 대통령은 ‘감염내과 전문의가 있는 병원이 전문의가 없는 병원과 디지털로 협진 하겠다’고 답했다...감염내과 전문의가 없는 병원에는 최첨단 모니터가 아니라 감염내과 전문의가 필요하다.”  사실 한국에서 '뉴딜'은 노무현 정부부터 역대 정권마다 비슷비슷한 이름으로 내놨다. 내용은 더 비슷했다. 이번 '한국판 뉴딜'의 한 축인 '그린뉴딜'은 이명박 정부 '녹색뉴딜' 시즌2이고, '스마트뉴딜' 역시 박근혜 정부 '디지털 뉴딜' 시즌2라고 할 수 있다. '한국판 뉴딜' 발표문 제목을 '창조경제'로 바꾸고 2020년을 2016년으로 바꿔놓으면 청와대 관계자들조차 깜빡 속아 넘어가지 않을까 싶다. 반면 노무현 정부 뉴딜에 들어있던 사회투자계획은 물론, 2012년 대선 당시 제시했던 경제민주화와 복지강화를 바탕으로 한 '한국판 뉴딜' 공약도 온데간데없다. 뉴딜만 놓고 보면, 문재인 정부는 노무현 정부보단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연장선에 있다.  왜 이렇게 됐을까. 이러저러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결국은 '거기다 돈 쓰기 싫다'는 한 마디로 정리할 수 있을 듯하다. 당장 위기극복을 위한 추경을 한다면서 질병관리본부 직원들의 연가보상비를 전액 삭감해버린게 문재인 정부다. 왜 그랬을까. 그 돈이 아깝거나,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코로나19 대응 일선에 있는 의료진이나 역학조사관들이 체력고갈로 쓰러지지 않도록 하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인력을 충원해야 한다. 하다못해 지자체에서 그 잘난 K-방역을 위해 계약직 공무원 2명이라도 추가로 고용하려면 1년에 1억 원 돈이 든다. 공공병상 확충을 위한 많은 계획들이 경제성이 없다는 이유로 예비타당성조사도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서, 돈 쓰기 싫은 것 말고 어떤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한마디로 말해서, 문재인 정부는 한국판 뉴딜 발표를 통해 '노오력'과 '열정페이' 말고는 국민건강을 위한 더 좋은 제도를 갖추는데 돈쓰기 싫다고, 돈쓰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강국진 위원은 현재 서울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20-08-05 | hrights | 조회: 395 | 추천: 6
이재상/ 인권연대 운영위원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이 하락하고 있다. 핵심적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아무래도 부동산 정책의 실패 때문일 것이다. 참여정부 때도 그랬지만 집값을 잡겠다는 의지는 강했으나 결과는 비참했다. 보수언론과 정치권의 프레임 전쟁에 발목 잡힌 측면도 있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땜질식 정책 때문이라는 비난도 들어야 했다. 실제 11차례의 부동산 대책에도 집값 폭등세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촛불로 일어선 정부가 집값 때문에 흔들리다니 참담하기도 하고 어이가 없다는 생각도 든다. 참여정부 이후 10년을 기다려 들어선 문재인 대통령은 ‘부동산만큼은 자신 있다’고 외쳤고, 참여정부의 실패를 답습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여전히 집값은 치솟았다. 야당은 말할 것도 없고 청와대나 집권여당에도 다주택자들이 많았고, 처분하라는 지시에도 버티다가 여론에 등이 떠밀려 마지못해 시늉을 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여당의 한 의원은 집값은 잡히지 않을 거라는 말로 논란을 더 키웠다. 정부를 믿고 기다렸던 서민들은 허탈함을 넘어 배신과 분노마저 느끼고 있다.  경실련에서 역대 정권별 서울 아파트 값 상승에 대한 분석을 내놓았는데, 서울 25평 아파트 값은 문재인 정부 초기 8.4억에서 3년 만에 12.9억이 됐다. 상승액 기준으로 4.5억이 올라 역대 최고치이고 상승률도 53%에 달한다. 강남과 비강남의 가격 격차도 1993년에 비해 100배나 벌어졌다. 모든 수치에 있어서 노무현, 문재인 대통령 때의 성적표가 가장 참담하다.  역대 정권 가운데 아파트 값이 하락했던 때는 이명박 정부가 유일하다. 분양가상한제와 분양원가공개를 전면시행하고 SH공사가 후분양제와 장기전세를 실시하면서 아파트 값이 떨어졌다. LH공사는 토지는 임대하고 건물만 분양하는 이른바 반값 아파트를 내놓기도 했다. 이 시기 강남의 아파트 값은 16% 하락했고 강남과 강북 아파트 값 격차도 줄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토건족의 대통령이었고 숱한 과오를 저지르긴 했지만 역설적이게도 아파트 가격을 안정시키는 데는 성공했다. 박근혜의 초이노믹스 대전환 이전까지는 말이다.  역설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부동산을 안정시키겠다고 나섰던 문재인 정부는 땜질식 처방과 대책으로 오히려 투기를 조장했다. 실수요자들은 대출규제로 묶어놓고 현금부자들과 투기꾼과 재벌에겐 막대한 혜택을 주는 방식이다 보니 투기꾼에게 꽃길을 깔아줬다는 비판도 들린다. 박근혜 정부 때 분양가상한제 폐지와 주택대출확대정책 등 이전 정부에서 축적해온 바탕이 있다고 해도 현 정부의 책임도 결코 작지 않다. 사진 출처 - 경향비즈  우리 사회의 불평등과 격차의 심화 원인은 부동산 투기로 인한 불로소득이라고 말한다. 열심히 땀 흘려 일하는 노동자보다 아파트나 오피스텔이 돈을 훨씬 더 잘 번다. 가만히 있어도 따박따박 들어오는 월세와 폭등하는 집값. 이것이 대한민국을 무너트리고 정권을 위기로 몰고 있다. 대출규제와 보유세 강화는 방향은 맞지만 지금의 집값 폭등상황을 안정시킬 대책은 아니다. 고위공직자들의 다주택 처분도 보여주기 눈가림에 불과하다. 그런다고 집값이 떨어지겠는가. 집값을 잡겠다는 의지의 천명이라고 볼 수도 있겠으나 이미 그 의지는 충분히 많이 표명했다.  근본대책은 집값 자체를 낮추는 것이어야 한다. 그 방안은 이미 시행된 적도 있고 효과도 검증됐다. 분양가상한제와 분양원가공개가 그것이다. 그동안은 거대야당에 발목 잡혀 하지 못했다는 핑계내지는 변명이라도 가능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180석의 무게와 책임을 다해야 한다. 더 이상의 실책과 실기는 있을 수 없다. 이재상 위원은 현재 CBS방송국 PD로 재직 중입니다.
2020-07-29 | hrights | 조회: 206 | 추천: 4
이재승/ 인권연대 운영위원  과거사의 문제로서 제주4.3사건은 2000년 시행된 제주4.3사건법이라는 독자적인 경로를 걸어왔다. 그러나 제주4.3사건법은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에 주안점을 두었기 때문에 정의의 원칙이나 피해자의 권리에서 보자면 심각하게 미진한 것이었다. 그 후 2007년 법 개정을 통해 4.3평화공원과 평화재단은 제주도민에 대한 집단적 상징적 보상조치로 받아들여졌다. 2017년 문재인 대통령 후보는 국민 눈높이에 맞는 과거사 정리를 100대 집권공약으로 제시하였고, 당선 이후 2018년 문대통령은 4.3행사에 참석하여 국가책임에 대해 운을 떼었고 2020년 4.3행사의 추념사에서는 희생자 유족에 대한 배보상을 힘주어 약속하였다. 대통령의 확언에 따르면 당정청이 합당한 방침을 정립하기만 한다면 제주4.3사건이 조속히 해결될 것처럼 보인다. 제주4.3사건 희생자 유족에 대한 보상기준은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에 대한 해법으로도 활용되리라고 예상된다.  잘 알다시피 제주4.3사건은 미군정에서 한국정부로 통치권이 이양되는 국면에서 발생한 원형적 국가폭력이다. 제주4.3사건은 친일세력을 이용한 군정당국의 억압정책과 단독정부의 수립에 대한 민중적이고 민족적인 저항의 귀결이었다. 과거 공식적 역사는 1948년 4월 3일 좌익의 봉기만을 대서특필하고 4.3사건을 공산폭동이라고 기술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의 역사는 이와 같이 단순하고 일방적인 규정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는다. 마그마가 끓어올라야 화산이 분출하는 법. 군정과 경찰은 1947년 3.1절 행사에 참가한 도민들을 향해 발포하여 6명을 사망케 하였다(3.1사건). 군정당국은 사태의 진정을 위해 책임자를 처벌하거나 사과하기는커녕 항의하는 도민을 검거작전으로 몰아치고 세 건의 고문치사사건을 야기함으로써 도민들의 분노에 불을 질렀다. 군정당국의 억압에 대해 총파업으로 시작된 제주도민의 항의는 해를 넘겨 지속되었고 제주도 남로당 청년당원들은 1948년 4월 3일 단독정부, 단독선거를 반대하며 봉기를 결행하였다. 양측이 무기를 내려놓을 계기들이 없지 않았으나 사태는 점차 돌이킬 수 없는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1948년 10월 이후부터 1949년 여름까지 군경의 대대적인 초토화 작전으로 수 만 명의 민간인이 집단적으로 희생되었다. 제주4.3위원회와 제주4.3평화재단의 공식집계에 의하면 신고된 희생자가 1만 5천명에 육박한다. 신고하지 못한 희생자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제주4.3사건 희생자 중에서 수형자(受刑者)라는 특이한 유형이 존재한다. 한국전쟁에서 군대가 약식재판으로 사람을 자의적으로 처형한 사례는 부지기수였으나 제주4.3사건 군사재판은 그 황당함에 있어서는 급수를 달리 한다. 제주도에서 1948년 12월과 1949년 6-7월에 두 차례 설치된 군법회의가 대규모재판(mega-justice)를 단행하였다. 군사재판은 380여명의 민간인에게 사형을,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1년형에서 무기형까지 징역형을 부과하였다. 징역형을 살던 다수는 한국전쟁 중 무차별적으로 처형되었고 전쟁 전에 석방된 사람들은 예비검속으로 처형당하였다. 1945년 이후 연합국들이 절차적 권리(변호인입회, 변론, 방어권)를 무시하고 졸속적인 재판으로 전쟁포로나 민간인을 처형했다는 사유로 일본군 법무장교와 독일 공직자들을 전쟁범죄로 처벌하던 때에 한국군대는 야만적 사법살인으로 폭주하였다. 오늘날 국제형사재판소 규정은 비국제적인 무력충돌에 대한 규정에서 이와 같은 약식처형을 전쟁범죄(국제관습법)로 규정하고 있다.  제주4.3군사재판의 이러한 실상은 제주4.3위원회의 활동초기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당시 군사재판은 법적인 절차를 전적으로 무시하였고 판결서도 작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재판이라고 보기도 어려웠다. 수형인명부만이 남아 있어서 어떤 사태의 흔적을 겨우 전달하고 있을 뿐이다. 1963년 김춘배씨 잔형집행 사건(김춘배씨는 1948년 12월 13일 내란죄로 징역 20년을 선고받았으나 한국전쟁 중 풀려나 숨어 지내다가 1961년 체포되어 다시 나머지 형기를 정하는 재판을 받게 되었다)에서 증인으로 나온 송요친(제주4.3사건 당시 제주지역 계엄사령관)은 당시에 ‘군사재판은 없었다’고 이미 진술하였다. 이와 같은 군사재판의 실상이 참작되어 2007년 제주4․3사건법 개정과정에서 군사재판의 피해자들이 수형자라는 이름으로 희생자로 분류되었다. 그러나 수형자의 명예가 이 정도에서 완전히 회복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하여 이 판결 자체를 입법적으로 극복하려는 방안이 2017년 제주4.3사건법 개정안(20대 국회)으로 가시화되었고, 21대 국회에서도 동일한 취지의 개정안이 곧 발의될 예정이다.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과거의 확정판결을 다투는 방식은 재심이다. 재판 자체가 범죄(고문, 증거조작, 위증)와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 증명되거나 재판의 결론을 바꿀 새로운 증거가 발견되는 경우에 과거의 유죄판결은 파기된다. 그런데 제주4.3군사재판이 재심을 청구해야할 유효한 판결로 성립하는지(존재하는지)가 우선 문제되었다. 이러한 연유로 제주4.3희생자유족회는 입법을 통해 군사재판 전체를 무효화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입법을 통한 판결의 무효화에 대해서는 3권 분립 원칙에 기대어 반대하는 목소리가 높다. 그러나 이러한 목소리가 법조물신주의의 산물이 아닌가 의심을 갖게 된다. 검찰개혁과 사법개혁을 유독 강조하는 시대에 한국 사법사 최악의 스캔들을 정상적인 판결로 취급하는 태도는 납득하기 어렵다. 물론 입법으로 판결을 무효화하는 방식을 대다수 법률가들은 충격적으로 여길 만하다. 그러나 실상을 알면 입장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제주 4·3평화공원에 세워진 희생자 각명비 사진 출처 - 경향신문  2018년 제주4.3군사재판의 피해자 가운데 생존자 18인의 재심청구가 받아들여져서 제주4.3사건에 대한 재판이 새로이 진행되었다. 2019년 새로운 재판부는 제주4.3군사재판에서 적법한 조사절차나 공소제기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을 확인하고, 공소제기가 없는 사건에 대하여 마땅히 ‘공소기각의 결정’을 내렸다. 재판부의 공소기각의 결정은 판결자체가 논리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을 내포하므로 군법회의 판결의 ”부존재 확인”결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유족들이 제주4.3사건법 개정안에 반영한 군법회의 판결의 “무효 확인”은 부존재 확인보다 온건한 방안이라고 할 수 있다. 군사재판의 실상으로 직진한다면 제주4.3군사재판은 유효한 재판이 아니라 사법적으로 분식된 자의적 처형 또는 군사적 처분에 불과하다.  국제적으로도 집단적인 사법살인이나 자의적 처형을 가하는 나라는 그다지 많지 않다. 아르헨티나 군사독재자들처럼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대체로 거추장스러운 재판절차를 거치지 않고 정치적 반대자들을 강제로 실종시키거나 은밀하게 직접적으로 살해하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우리나라 권력자들은 법절차와 형식을 남용하여 학살을 자행하는 특이한 법애호증을 보여주었다. 여기서 법애호증이란 법원칙을 존중하려는 태도가 아니라 미구에 닥칠 책임과 비난을 모면하기 위해 법형식에 의존하는 성향을 의미한다. 따라서 적나라한 야만 이외에 법의 얼굴을 한 야만이 한국현대사에서 법조문화로 자리 잡았다. 3권분립론에 입각하여 입법적 무효화방안에 반론을 펴는 분들은 제주4.3군사재판이 적나라한 학살의 눈속임이자 이러한 법애호증의 파생물이라는 점을 외면하는 것이다.  법률적 야만으로서 사법적 살해나 박해는 20세기에 전체주의적인 독일이나 일본, 권위주의적인 한국에서 특히 번성하였다. 실제로 재판의 무효화 관행은 전쟁법(국제인도법)에서 기원하며 연합국이 독일을 청산하는 데에 집중적으로 활용하였다. 2차세계대전후에 연합국은 나치불법판결청산법(Unrechtsurteilsaufhebungsgesetz)을 제정하여 나치독일의 허다한 정치 재판과 사법살인을 무효화하였다. 나아가 독일정부는 입법을 통해 1998년 이후에도 59개의 악법이나 법조항에 입각한 형사법원의 유죄판결을 무효화하였고, 동시에 악명 높은 정치재판소(친위대 즉결처형재판소 및 인민재판소 등)의 판결 전체를 무효화하였다.  제주4.3군사재판은 앞서 말한 법절차의 위배라는 내재적인 약점뿐만 아니라 헌법적이고 구조적인 약점도 안고 있다. 첫째로 1948년 군사재판에서는 계엄선포의 법적 근거를 갖추지 못한 가운데 계엄을 선포하고 군 당국이 계엄을 빌미로 군사재판을 감행하였다는 점, 둘째로 1949년 군사재판에서는 계엄령이 해제된 다음에 민간인에 대하여 군사재판을 계속하였다는 점, 셋째로 1949년 군사재판의 법적 기초가 된 국방경비법이 유효한 방식으로 공포되었는지에 대해서 여전히 다투어지고 있다는 점, 마지막으로 1954년 헌법개정시점까지 군사재판 자체가 헌법상 근거를 갖지 못했고 또한 상고심으로서 대법원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는 점 등에서 제주4.3군사재판은 헌법적 불법에 해당한다. 따라서 제주4.3군사재판은 법치국가적인 의미에서의 재판이라기보다는 불법국가에서의 군사적 처분이라고 할 만하다.  2020년 현재 380여명의 수형자들(대다수 사망한 희생자이다)과 유족이 추가적으로 재심을 청구하였다. 일각에서 이와 같이 개별적인 재심청구를 진행하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더라도 2530명 수형자들의 유족 다수는 여전히 재심을 청구하지 않을 공산이 크다. 그 경우 국가에 의한 일괄적인 시정조치의 필요성이 다시 제기될 것이다. 제주4.3군사재판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국회가 입법을 통해 판결의 불성립 또는 부존재에 준하는 의미에서 무효 확인을 해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물론 이러한 무효화방안이 본격적으로 논의되는 동안에 법무부나 검찰이 긴급조치판결에 대한 직권재심청구처럼 제주4.3군사재판에 대한 재심을 직권으로 청구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제주4.3군사재판은 군검사나 군판사의 개인적인 업무상 과오도 아니고, 국방부나 법무부, 법원의 이해관계사항이 아니라 입법, 사법, 행정의 모든 차원에서 자행된 초헌법적 국가범죄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래서 3권 분립을 운위하면서 개별적인 재심만이 합당한 해법인양 강변하는 것은 초헌법적 국가범죄를 정상화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초헌법적 범죄의 해결주체는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가 적임자이다. 이재승 위원은 현재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20-07-08 | hrights | 조회: 350 | 추천: 9
김영미/ 인권연대 운영위원  고등학교 3학년 동안 직업교육을 원하는 학생들만 있는 학교도 세 차례 개학연기와 순차적 온라인 개학 등 전례 없는 비상 상황이다. 불안과 초조함으로 새 학년을 맞이했고, 개학하면서는 코로나로부터 학생들을 지키기 위한 많은 고민과 방역활동 및 코로나 대응 모의 훈련도 여러 번 실시했다. 풍경 1  5월20일 개학날.  필수와 어머니가 같이 등교했다. 열화상카메라를 통과하여 교무실을 거쳐서 교실로 가 수업을 받던 중에 필수의 체온이 38도가 넘었다. 담임교사와 학생이 일시적 관찰실로 왔다. 관찰실에서 필수는 담임교사에게 “사실은 새벽에 열이 40도를 넘고, 목이 아팠으며 설사를 했어요.” 라고 고백했다. 학교에 가길 원한 엄마가 해열제를 먹이고 체온이 떨어진 필수와 같이 등교하며 무사히(?) 교실로 들어가는 필수에게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하면서 집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너무 놀란 교사들은 코로나 증세와 유사한 학생을 바로 선별진료소로 보내 검사를 받게 했다. 필수와 같은 공간에 있었던 교사는 어린 자녀를 근처의 친척집에 맡겼고, 연로하신 부모가 있는 교사는 집으로 귀가를 못하고 지인의 집에서 머무르며 필수의 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마음을 졸이면서 자가 격리를 해야만 했다. 다음날 오후 필수의 결과는 음성으로 나왔지만 그 불안했던 마음과 공포는 우리를 늘 긴장하도록 했다. 아픈 몸을 숨기며 학교에 나온 학생에게 나쁜 감정을 가졌고, 가능하면 학생들을 안 만났고, 학생들을 만날 때에는 코로나에 감염되지 않을까 의심하며 멀리했다. 풍경 2  6월 중순 수동이가 등교했다.  집 근처의 교회를 다니던 수동이가 2주 전 주일예배 후 형과 함께 교회에 머물렀는데 그곳에 코로나19 확진을 받은 교우가 있었다. 곧바로 코로나 진단검사를 받았고 결과가 음성으로 나와 이틀간 학교에 등교했는데 뒤늦게 보건소에서 2주간의 격리를 해야 한다는 연락이 왔다. 수동이는 형과 함께 둘이 눕기에도 빠듯한 작은방에 격리돼 방에서 나갈 수도 없고, 음식도 일회용 그릇으로, 화장실도 가족들이 없을 때 쓰며 소독약품을 뿌렸으며, 빨리 이 좁은 방안에서 나갈 날만 기다렸다고 했다. 그럼에도 수동이는 격리 후 학교에 와서는 자기 때문에 코로나에 감염 될 뻔 한 교사와 친구들에게 너무 미안하다면서 괴로워했다. 이러한 수동이의 마음과 같이 많은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감염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외식과 외출을 하지 않고 학교와 집을 오가는 생활을 하고 있으며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은 학교와 교사들의 뉴스를 접할 때마다 가슴이 철렁한다. 내가 코로나에 감염되는 것도 큰 문제지만 사회적인 지탄을 받으며 내가 속한 학교에 되돌릴 수 없는 큰 피해를 주고 싶지 않다는 것은 학생, 교사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같은 생각일 것이다.   사진 출처 - 한겨레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과 여론조사기관 글로벌리서치가 6월에 실시한 ‘포스트 코로나 관련 인식조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창궐하는 감염병 앞에서 우리의 근심은 비단 나 혼자만이 아닌 주변 모두에게 끼칠 수 있는 영향력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다. ‘나로 인해 주변 사람들이 감염될까’(87.3%), ‘내가 코로나에 걸릴까봐’(85.1%), ‘코로나로 나와 가족이 고용 위기에 처할까봐’(83.8%), ‘코로나에 감염돼 동선이 공개될까’(64%)를 사람들은 걱정하고 있었다. - 한겨레신문(6.25.)에서 -  속절없이 확산되는 감염병 앞에서 일상에 금이 가고, 당연시되던 삶의 양식의 변화로 인해 불안과 불확실성의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 코로나19가 몰고 올 변화의 파고가 앞으로 얼마나 될지 헤아리기도 어렵다. 김영미 위원은 현재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2020-07-01 | hrights | 조회: 247 | 추천: 4
장경욱/ 인권연대 운영위원  필자는 국가보안법 사건의 변론과정에서 끊임없이 종북몰이 공격을 받았다. 90년대 말 이후 수많은 탈북자 간첩조작 사건이 행해졌다. 그 중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유우성, 홍강철에 대한 간첩조작 사건의 수사와 재판과정에서 무죄선고를 받기까지 종북몰이 공세는 더욱 심해졌다.  2016년 4월 20대 총선을 앞두고 박근혜 정권은 총선 승리용 북풍 여론몰이를 위해 북 해외식당 종업원들을 집단유인 납치하는 범죄를 저질렀다. 그 추악한 해외공작의 진상은 언젠가는 세상에 소상히 드러날 것이다. 납치유인 피해자들과 그 가족들이 겪고 있는 고통은 현재 진행형이다. 납치유인 피해자들의 인권옹호를 위한 북 해외식당 종업원 납치유인범죄의 진상규명과정에서도 필자에게는 수많은 종북몰이 딱지가 붙고 있다.  최근 조선일보, 중앙일보, 문화일보 등과 반북 탈북자들이 운영하는 유튜브 방송은 납치유인 피해자 지원을 위한 필자의 후원 활동에 시비를 걸며 자유를 찾아 귀순한 북 해외식당 종업원들에게 재월북을 회유하며 돈을 줬고 거부하자 돈을 끊었다고 왜곡하는 보도를 수시로 하고 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종북몰이 피해자가 사회적 생매장을 당하지 않을까 공포에 시달리는 형국이 여전하다. 종북몰이 공세에 이제는 이골이 날 때도 되었건만, 그 표적이 될 때마다 쫄기 십상이다. 호흡을 가다듬고 정신무장을 하고 용기를 내어 정면으로 싸우는 과정의 연속이다.  하지만, 종북몰이를 당하는 표적이 된 입장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종북몰이 공세가 심해질수록 그에 정면으로 맞서 함께 힘을 모아 맞서나가지 못하는 현실이다. 필자의 언행에 괜히 종북몰이를 자초한 빌미가 된 것이 없는지 의구심을 표하며 심지어 해명을 요구한다. 종북몰이 피해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필자로 말미암아 종북몰이를 불러오지 않을까 위축된 주변의 반응에서 종북몰이에 취약한 우리사회의 현실을 발견한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이토록 종북몰이에 취약한 이유는 무엇일까?  악마화된 북과 연결되는 반북분단적대구조 때문이다. 북에 대해서는 악마화, 기괴화, 혐오, 증오, 불신, 조롱, 저주, 폄훼, 의구심, 공포심 이외의 정상적 감정과 이성적 사고는 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악마와도 같은 매카시즘에 저항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극우보수세력의 종북몰이 표적이 될까봐 쫄아 호흡조차 가다듬지 못하기 때문이다. 용기 내어 종북몰이 피해자와 함께 연대하여 싸우지 못하기 때문이다.  분단적대구조에 익숙하게 되면 비정상이 정상이 되도록 뇌가 세탁이 되어 궤변이 합리적 이성으로 포장되어 일상이 된다. 어중이떠중이들이 문제의 본질에 접근조차 해보지 못한 채 행세하기가 쉬워 도처에 넘쳐난다. 분단적대구조에 젖어 이성이 사라진 야만의 세상에서 동족에 대한 허위의 우월의식은 자기안위에 급급한 기회주의적 속성을 가리는 무기가 된다. 정의와 진리, 상식과 도덕은 온데 간데없이 사라진다. 피장파장, 내로남불, 오십보백보 같은 단어가 인생의 보편적 가치로 자리잡는다.  분단적대구조에 길들여져 종북몰이에 취약하고 비정상이 판을 치는 그 틈에 인륜을 내던지고 양심을 포기한 인간 추물들의 반북 악행은 그 누구도 다스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군사분계선 일대에서 반북 삐라 살포 망동은 북한 인권 운동이 되어 미국의 민주주의기금(NED)의 지원을 받고 국제인권상을 수상하는 기괴한 일이 공공연히 세계의 면전에서 행해지고 있다.  이 통탄할 종북몰이와 반북적대행위가 횡행하는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당장 시급하게 우리 사회에 필요한 처방전은 무엇일까.  북에 대해 바로 알고서 북에 대해 혐오와 증오, 불신과 조롱 등 동족대결의 적대감과 의구심에서 벗어나 동족과 화합하고 협력하기 위한 신뢰의 감정을 갖기 위해 우리의 인식을 이성적으로 정상화하는 자각이 필요하다.  어떠한 경우에도 동족을 비방하고 불신을 조장하는 것은 우리 사회를 종북몰이와 반북 악행이 거침없이 표출되는 동족대결의 어두운 터널에 가두는 어리석은 일이라는 자각이 절실하다.  동족대결의 어두운 터널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종북몰이를 타파할 수 있고, 반북 삐라 살포와 같은 반북 망동을 단호히 처벌하며 모든 반북적대행위를 근절할 수 있다.  국가보안법이 지배하는 분단적대구조 하에서 한반도 전쟁의 위기를 초래할 수 있는 반북 삐라 망동을 근절시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언감생심의 일이다. 북 지도자에 대한 모독과 북 체제에 대한 비방이 자유와 인권을 위한 일로 둔갑되는 사회에서 반북 삐라 망동을 금지시킬 수 없다. 반북 삐라 망동을 부추기는 상전의 나라가 이를 가만 두고 보지 않을 것이다.  2018년 4.27 판문점 선언에서 “5월 1일부터 군사분계선 일대에서 확성기 방송·전단 살포를 비롯한 모든 적대 행위들을 중지하기로 합의”했음에도 불구하고 2019년 십여 차례, 올해 현재 세차례나 대북전단이 살포된 사실이 동족대결의 터널을 벗어나기 위한 우리의 앞길이 얼마나 험난한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반북 삐라 망동 사태에서 빚어진 작금의 한반도 군사적 충돌의 위기상황을 맞아, 우리는 외세와 극우보수세력이 국가보안법으로 가둬놓은 어둠의 동굴에서 탈출할 비상한 노력을 가속화할 때이다. 동족의 편에 서서 동족을 알고 동족과 힘을 합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외세의 지배와 간섭에서 벗어나 극우보수세력을 우리 사회에서 영구히 퇴장시킬 수 있다. 그 길에 한반도 평화번영과 통일, 미래세대의 행복이 있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2020-06-17 | hrights | 조회: 472 | 추천: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