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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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 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녕(서강대 교육대학원 교수), 김대원(성공회 서울교구 신부), 김영미(금천문화예술정보학교 교사), 김희수(변호사), 도재형(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설경(변호사), 오인영(고려대 역사연구소 연구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재상(CBS PD), 이재성(한겨레신문 기자), 이재승(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지상(가수 겸 작곡가),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임아영(경향신문 기자), 장경욱(변호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 허홍렬(치과의사), 홍승권(삼인출판사 부사장), 황미선(면일초등학교 교사)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오인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현생인류를 포함하는 생물 종의 학명. 우리말로 바꾸면 ‘슬기인간’쯤 되겠다. 1758년 현대 분류학을 창시한 린네가 인간에 이런 거룩한 이름을 붙인 이래, 생각하는 능력, 그것도 사리를 바르게 판단해서 일을 처리하는 슬기는 인간의 으뜸가는 특질로 자리 잡았다.  동물은 본능의 노예처럼 죽을 때까지 거기에 매여 산다. 욕망의 내용이나 모양, 가짓수가 바뀌는 법이 없다. 그래서 몇 만 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은 종류의 짐승이라면 그들이 사는 모양은 똑같다. 그러나 사람이 사는 모양은 예전과 지금이 썩 다르다. 수렵과 채집을 하며 살았던 인간과 지금의 인간이 사는 모양은 하늘땅만큼이나 차이가 있다. 동물처럼 어제와 같은 오늘이 아니라 인간은 오늘이 어제와 다르고 내일이 오늘과 다른 세월을(정확히는 ‘역사를’) 살아왔다. 인간이 이렇게 다르게 살 수 있었던 비결도 일차적으로는 인간이 호모 사피엔스라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짐승이나 인간이나 자연 속에서 살기 위해 일을 하는 동물이지만, 인간의 일은 동물의 일과 다르다. 무엇이? 인간은 자연을 다루면서 더 쉽게,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일의 방법을 고쳐온 것이 다르다. 이렇게 자연을 다루는 일의 방법을 고쳐나갈 수 있게 한 힘이 바로 “호모 사피엔스”라고 할 때의 그 ‘슬기’이며,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을 때의 그 ‘생각’이다.  인간의 생각은, 동물이 유전적으로 타고난 본능이나 재주와 다르다. 동물의 본능은 변하지 않는다. 독수리가 제 아무리 빨리 날려고 해도 제트기처럼 날 수 없다. 독수리가 타고난 엔진과 몸뚱이는 인위적 성능변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은 보태질 수도 있고, 줄어들기도 한다. 인간은 생각의 힘을 쌓고 모아서 마침내 독수리보다 더 빨리, 더 오래 나는 비행기를 발명해 냈다. 인간의 생각은 후천적, 의식적 노력 여하에 따라 변할 수 있다. 계통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개체적 차원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인류사적 차원에서 예술과 철학의 사조가 고전주의니 낭만주의니 포스트모던이니 하며 다양한 변천을 거듭해 왔듯이, 사람과 세계(자연과 사회)에 대한 개인의 생각은 유아기, 청소년기, 성년기를 거치면서 달라진다.  생각이 지닌 경이로운 힘을 체험한 인간은, 개별적인 기억의 전수나 집단적인 기록의 보전의 형식으로 경험과 기억을 체계적으로 정리함으로써 보유하는 생각의 몸집을 불리려고 노력해 왔다. 생각의 몸집 불리기 챔피언이라 할 만한 대표적인 서양 사상가를 꼽자면 게오르그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G. F. W. Hegel 1770-1831)이 먼저 떠오른다. 그는 ‘생각’을 합리적 사고능력을 뜻하는 ‘정신(die Geist)’ 혹은 '이성(die Vernunft)'라는 말로 치환하고서 <인류의 세계사란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일종의 이성의 오디세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던가.  헤겔은 역사에서 벌어진 사건들의 현상에 홀리지 않고 현상의 이면, 즉 속내(본질)를 들여다보면, 인간의 이성이 역사를 지배하고 움직이는 궁극적인 추동력임을 간파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가 ⌈역사철학강의⌋에서 제시한 주장에 따르면, 역사의 표면적인 모습만 보면 이성은커녕 가장 추악한 일들이 쉼 없이 벌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인간의 이기적 욕망과 사사로운 개별적 이해관계의 파노라마라는 외면적 현상만 보는 인간에게 역사는 회의와 실망의 무대이다. 그러나 역사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사람에게 역사는 다르게 보인다. 즉. 역사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사람에게 역사는 새로운 면모(본질적 측면)를 드러낸다. 헤겔은 인류의 역사에는 이성의 암호가 아로새겨져 있으며, 그 암호를 해독한다면 이성에 의해 움직이는 역사의 비밀을 간파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역사의 표리부동(表裏不同)을 만들어내는 이성의 교묘한 속임수를 “이성의 간지(List der Vernunft)”라고 불렀다.  헤겔은 역사 속에서 작동하는 이성인 세계정신이 세계사를 이끌어간다고 역설했지만, 그렇다고 그가 세계정신이 직접 총칼로 무장하고 시가전을 벌이거나 전쟁을 수행한다고 주장한 거냐고 묻는다면, 그건 억측이다. 그는 특수한 이해관계에 사로잡힌 인간 개인의 정열이 없다면 자유의 실현이라는 이성의 목적도 결코 달성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헤겔은, 자유의식의 진보라는 목적 실현을 위해서 이성은 행동대원을 필요로 한다고 주장한다. 즉, 세계사적 이성인 세계정신은 역사적 현실에서 행동하는 개별적 주체(인간)의 활동의 매개 없이는 결코 자신의 추상성을 탈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소 딱딱한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보편적 이성은 역사 속에서 개별적 인간의 욕망과 통일됨으로써만 참다운 구체적 보편을 구현할 수 있다.  헤겔은 이성의 하수인으로 세계정신의 역사적 실현에 이바지하는 인간을 “세계사적 개인”으로 명명했다. 세계사적 개인은 그의 실제적 의도가 무엇이었든지 간에 세계사의 도정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초래한 실천적 행위자들이다. 그는 자신들의 정열과 노력이 역사의 궁극 목적인 자유의식의 진보에 기여한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단지 자신의 개인적 욕망과 특수한 이해의 실현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정열적 인간이다. 헤겔은 이런 세계사적 개인의 전형으로, 권력의 정점에 서고자 했으나 의도치 않게 로마를 강력한 구심점을 갖춘 세계제국으로 만든 카이사르나 유럽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으나 그 과정에서 결과적으로 유럽의 봉건적 질서를 무너뜨린 나폴레옹을 제시한다. 요컨대, 헤겔의 세계사적 개인은 현상적으로는 개인적 정열에 의해 추동되지만 본질적으로는 역사의 변증법을 실행하는 이성의 도구요, 그 시대의 필연적 요구를 채워주고 실현하는 세계정신의 실행자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개인적 이해관계를 추구할 뿐 자신이 이성의 목적을 실행하는 대행자라는 것을 깨닫지는 못한다. 한 마디로, 자신이 행했으나 그 행위의 의미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눈썰미 있는 독자는 알아챘겠지만, 세계사적 개인에 관해 장황하게 이야기한 이유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전임 오바마 대통령에 비해 민주적이거나 인권 지향적이거나 도덕적인 인물로 보이진 않는다. 그러나 노벨상을 타려는 개인적 욕망에서건, 11월 중간선거에서 자파 의원을 더 많이 당선시키려는 정치적 계산에서건 간에, 결과적으로 한반도의 낡은 냉전체제를 종식하고 평화공존의 새로운 시대를 여느냐 마느냐는 당장은 그의 손에 달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반도의 운명을 한반도의 거주민들이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없다는 처지의 아쉬움을 잠시 제쳐 놓는다면, 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세계사적 개인의 반열에 오르길 강렬히 희망한다. 한반도 평화(나아가 동아시아의 평화, 그리하여 인과적으로 세계의 평화)와 한반도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생명과 인권을 위해서가 아니라도 좋다. 명예욕과 정치적 계산에 따른 행위일지라도, 그가 북미평화협정을 성공적으로 체결해서 노벨평화상을 꼭 받았으면 좋겠다. 남북 분단과 적대적 대립에 따른 역사적 비극과 인간적 낭비를 걷어내는 평화만 만끽할 수 있다면, (팔레스타인사람들에게는 너무 미안하지만) 트럼프가 그런 21세기 세계사적 위인이 되길 간절히 희망한다. 평화와 인권의 정착이라는 우리 시대의 세계정신을 무의식적으로라도 채워주고 실천하는 세계사적 개인이 되기만 한다면, 나는 ⌈도널드 트럼프 위험한 사례⌋에서 말하는 정신분석학적 진단은 깡그리 무시하고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성공을 기꺼이 성원하겠다. 오인영 위원은 현재 고려대 역사연구소에 재직 중입니다.
2018-06-07 | hrights | 조회: 1028 | 추천: 5
김영미/ 인권연대 운영위원  “아름다운 죽음은 없다. 그러나 인간다운 죽음은 있다.” 외과의사인 아툴 가완디가 의사였던 아버지의 노화, 투병, 죽음을 곁에서 지키면서 써내려간 글이다. 우리는 모두 태어난 순간부터 나이가 들다가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데, 늙고 병들어서 오래 살고 잘 죽는 것 보다, 죽음에 대한 문제를 배워 자신의 삶을 결정할 권리를 가지면서 좋은 삶을 살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의 어머니는 팔십을 넘기신 분으로 고혈압 등 몇 개의 질병을 지녔지만 비교적 건강하게 사셨다. 그러다 작년 여름, 뇌에 양성 종양이 발견되어 수술을 받으셨다. 수술 후 일상생활을 할 수 없게 된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의지하셨다. 어머니의 일상생활을 감당하는 것이 힘들어 모두들 지쳐갈 즈음, 또다시 허리 통증과 보행불능의 증상을 보이는 척추에 다른 문제가 발생해 응급 시술을 했다. 나와 형제들은 어머니의 간호와 돌봄에 허둥대며 무기력해지고, 어머니는 공포와 두려움, 건강했던 지난날처럼 돌아오지 않는 자신의 모습에 대한 절망과 회복될 수 있다는 희망 사이에서 방황하셨다. 평소 누구보다도 다른 사람의 도움 받는 것을 싫어하시며 미안해하시는 분이시기에 가족들이 돌아가며 간호를 할 때마다 “~~야, 너무 미안하다 내가 빨리 나아서 너에게 신세를 지지 말아야지”라고 수차례 말씀하셨다. 그 말을 들으며 가슴 아파하면서도 가족들은 두 번의 위험한 상황 속에서 어머니에게 찾아온 삶의 끝을 보면서 전과 같이 회복될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가족 누구도 어머니에게 타인의 도움이 필요한 질병의 상태와 노화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알려드리지 못했다. 나 또한 지난날과 같아지기 위해 열심히 재활훈련을 하는 어머니를 마주보며 죽음에 대한 진솔한 대화를 나눌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우리 몸의 각 부품이 노쇠해지고 누군가에게 의존해야할 시기가 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머니만의 문제가 아니라 나에게도 필요한 과제다. 삶에 끝이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우리가 찾아낸 진실을 토대로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내가 늙었음을 받아들이고, 생명을 위협하는 심각한 질병으로 진단을 받고 삶의 끝에 있다면 단순히 생명을 연장하기 위한 심폐소생술을 받는 치료를 거절하고 '죽을 수밖에 없다'는 진실을 받아 들여 일상생활을 유지하던 곳에서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속에는 가족 또는 호스피스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   사진 출처 - Doingstock  가족이 나의 용기에 동의하면 좋겠지만 그들에게도 어려운 일일 것이다. 입을 옷을 스스로 고르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날 통제력, 불투명한 치료법에 현재를 양보하는 대신 최대한 온전한 정신을 유지할 존엄을 목표로 삼는 호스피스를 찾는 것도 적절한 답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정신적 고통을 피하고 가족 및 친구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주변과 상황을 자각할 수 있는 정신적 능력을 잃지 않는 것, 그리하여 타인에게 짐이 되지 않고 자신의 삶이 완결됐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이 아닐까.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인간답게 죽을 수 있는 것도 중요하다. 김영미 위원은 현재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8-05-30 | hrights | 조회: 1036 | 추천: 13
강국진/ 인권연대 운영위원  인구감소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떠오른 생각은 ‘이민을 많이 받아들이면 되는것 아닌가?’였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꽤 된다. 하지만 전체 인구의 5%도 안 되는 국내 거주 외국인 200만명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현실을 생각해보면 설득력이 없다. 결국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는 것 말고는 답이 없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로 나라가 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 저출산 문제는 말 그대로 브레이크가 없다. 올해 1분기 합계출산율은 1.07명으로 전년 동기 대비 0.1명 감소했다. 통상 아기가 가장 많이 태어나는 시기가 1분기라는 걸 감안하면 올해 합계출산율은 작년 1.05명보다도 더 떨어질 가능성이 높은 셈이다. 아이를 가장 많이 낳는 30∼34세 여성인구와 결혼도 줄어드는 추세여서 당분간 출산율 반등도 쉽지 않다.  어떤 분들은 좁은 땅에 5000만 명이나 되는 인구가 바글바글대는게 더 큰 문제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인구감소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심각한 상황은, 통계청이 지난 2016년 12월 장래인구추계와 비교해보면 금방 드러난다. 당시 통계청이 가정한 ‘최악의 시나리오’는 합계출산율 1.07이었다. 2016년 당시 통계청이 예상한 시나리오에 따르면 대한민국 전체 인구는 2023년 5168만 명으로 정점을 찍은 뒤 2024년 5166만명으로 감소하기 시작해 2040년에는 5000만명 이하로 떨어지는 등 급속히 감소한다. 현재 추세는 통계청이 예상했던 최악의 시나리오보다도 더 최악이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청년실업과 주거문제는 혼인 감소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출산율 하락을 부채질한다. “혼인 감소의 가장 큰 원인은 인구감소이지만 결혼 주연령층의 실업률 상승과 부동산 가격 상승이 함께 작용하고 있다”는 통계청 관계자 분석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생산가능인구(15~64세)는 이미 작년부터 줄어들기 시작했고 몇 년 안으로 전체 인구도 줄어들 게 확실해 보인다. 올해 들어 2월부터 4월까지 3개월 연속 취업자가 10만 명대 증가에 그쳤다. 고용률과 실업률은 큰 차이가 없고 청년실업률은 0.5% 포인트 감소했는데도 취업자 수가 좀처럼 20만명대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생산가능인구(15~64세) 자체가 줄어들면서 발생하는 ‘인구 감소 충격’이 원인이다. 취업자 증가폭이 둔화되고 생산가능인구가 줄어든다는 것은 곧 소비감소와 경제 활력 저하, 노인인구 부양부담 증가로 이어진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정부가 2006년부터 2017년까지 저출산 해결을 위해 122조원을 쏟아 부었지만 현실은 오히려 거꾸로 간다며 저출산대책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비관론이 터져 나온다. 과연 그럴까? 저출산 예산 규모와 추이를 살펴보면 정부예산 규모가 오히려 너무 적다는 게 문제라는 걸 알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 뿌린대로 거둔 것 뿐이다.  우리나라 ‘가족정책지출’ 규모는 해마다 늘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여타 선진국에 한참 미흡하다. OECD 평균은 국내총생산(GDP) 대비 2.45%(2013년도 기준)인 반면 한국은 1.38%로 1% 포인트 이상 차이가 난다. 저출산 극복의 대표적인 모범사례로 꼽히는 프랑스(3.70%)와는 2% 포인트 이상이다. 단순계산해도 한국이 OECD 평균 수준이 되려면 1년 예산규모가 15조 원가량, 프랑스 수준이 되려면 30조원 가량 정부예산을 더 써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OECD에서 한국보다 가족정책지출이 적은 나라는 터키, 멕시코, 미국 뿐이다.  가족정책지출은 가족과 아동을 대상으로 한 현금지원 성격의 정부지출을 뜻한다. 크게 아동수당이나 육아휴직급여 등 직접적 현금지원, 보육료 지원이나 국공립보육시설 지원 등 서비스 지원, 세제지원 등 세 가지로 구분한다. 한국이 다른 선진국과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영역은 직접적 현금지원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은 0.18%인 반면 OECD 평균은 1.25%, 프랑스는 1.56%, 영국은 2.42%였다. 대표적인 현금지원인 아동수당만 해도 한국은 9월부터 5세까지 지급할 예정인 반면, 주요 선진국들은 수십 년 전부터 16~18세까지 아동수당을 지급하고 있다. 프랑스는 자녀가 늘어나면 아동수당도 늘어난다.  저출산은 거의 모든 선진국이 경험했던 일이다. 가령 프랑스는 1995년 합계출산율이 1.71명, 스웨덴은 2000년 1.56명까지 떨어졌다. 하지만 2015년 합계출산율은 각각 1.98명과 1.90명으로 인구유지를 위한 합계출산율(2.1명)을 회복하고 있다. 눈여겨볼 대목은 일반적으로 여성이 경제활동에 참여하는 비율이 높을수록 출산율이 높아지는 반면 한국에서 맞벌이 부부의 평균출생아 수가 외벌이보다도 낮은 것이 사실이다. 이는 사회 전반적인 성평등 수준과 일·가정 양립을 지원하는 각종 복지제도 차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주변에서 아이를 낳지 않는 이유를 들어보자. 취업을 못해서, 비정규직이라서, 집이 없어서, 등록금 빚 때문에, 안전하게 키울 자신이 없어서, 불안해서, 헬조선을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 저출산 원인은 하나같이 인권 문제와 맞닿아 있다. 저출산은 인권문제의 결과물이다. 저출산 극복을 위해서는 인권 수준을 높여야 한다. 인권 수준을 높여야 출산율도 올라간다. 다시 한 번, ‘국가의 역할’을 묻는다. 강국진 위원은 현재 서울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18-05-23 | hrights | 조회: 861 | 추천: 6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사람이 무언가를 소유하지 않고 사는 길은 없다. 문제는 뭐든 다 소유하려는 데 있다. 쌀, 돈, 집, 땅을 소유할뿐더러, 가치, 신념, 권위, 심지어 자신의 행위마저도 소유한다. 가치 있게 살기보다는 가치를 소유하고, 권위로 존재하기보다는 권위를 소유한다. 많이 소유하고 크게 소유할수록 이익도 큰 시대다.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에서는 인간의 언어 관습조차 소유 양식으로 변해가고 있다고 말한다.  프롬의 정리에 따르면, 지난 여러 세기 동안 명사의 사용은 늘고 동사의 사용은 줄었다고 한다. 인간의 직접 경험을 반영하는 동사는 단순해지고, 소유의 대상이 되는 명사는 세분화되는 중이라는 것이다. 가령 구미인들은 흔히 “머리가 아프다”가 아니라 “두통을 가지고 있다”는 식의 표현을 한다. 아픔은 체험되는 것이지 소유되는 것이 아닌데도, 아픔을 사물화시켜 소유의 대상으로 삼는 언어를 구사한다. 내가 아픈 것이 아니라 ‘내가 아픔을 가지고 있다’는 식의 표현은 자기도 모르게 나를 아픔으로부터 소외시킨다. 나와 아픔이 별개처럼 작동하는 것이다.  “나는 안다”가 아니라 “나는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식의 표현은 지식의 소유를 인간의 척도로 삼는 소유적 실존양식의 증거들이다. 인간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업적이나 결과로 인간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신자유주의 경쟁사회의 전형을 보여준다. 인간이 지식이라는 소유물을 활용해 더 많은 이익을 취하는 과정에 인간의 삶은 그 지식과는 무관한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아는 대로 살기보다는 그저 알 뿐이다. 깊이 알기 보다는 많이 알 뿐이다. 너도나도 그 길에 나서다보니 지식이라는 추상적 명사들만이 재생산되고 대단한 성과인 냥 체계화되어 떠다닌다. 세상에 지식은 넘쳐나지만 인간은 그 지식과 하나가 되지 못한다. 그 지식을 낳기 위해 명사적 지식의 생산에 ‘올인’하고 그 지식 체계로 사회는 작동하지만, 그렇게 작동되는 사회에서 인간은 도리어 소외되고 사물화 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사진 출처 - Morguefile  어디 그뿐이던가. 원래 신(神)은 인간이 내적으로 경험하는 지고한 가치의 상징이다. 그런데 종교에서는 신도 하나의 사물로, 즉 ‘우상’으로 만들어 나의 소유를 정당화시키고 확대시키는 수단으로 삼는다. 자신의 힘을 그 사물에 투영함으로써 자신을 약화시키고, 자신이 만든 그 사물에 굴종한다. 그렇게 인간은 자신이 만든 우상의 소유물로 전락한다. 우상은 한낱 사물이기에 인간이 소유할 수는 있지만, 인간이 우상의 소유를 위해 우상에 굴종하는 형태로 우상이 인간을 소유하는 것이다.(『소유냐 존재냐』, 1부 2장) 결혼으로 사랑도 소유하고 독점하면서 더 이상 자신을 내어주지 않는다. 사랑조차 내가 소유하는 그 무엇이 되기 때문이다.  내가 언젠가 “자기중심적 평화주의”(ego-centric pacificism)라는 말을 쓴 적이 있다.(『평화와 평화들』 1부 2장) 인간, 사회, 종교, 국가가 이른바 소유적 실존양식에 휘둘리다가 평화마저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는 수단으로 만든다는 의미에서였다. 평화를 자신에 유리하게 ‘소유’하고 자신을 위한 사물로 만드는 현실을 폭로하기 위해서였다. 미국과 중국이 저마다 평화를 내세우며 아시아에서 갈등을 촉발시키고, 미국이 자유와 평화의 이름으로 이스라엘 편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을 희생시키는 일들이 다반사로 벌어지고 있다. 평화를 자신의 소유로 여기다가 평화라는 이름으로 폭력을 조장하고 정당화하는 사례들인 것이다.  세상은 평화로워질 수 있을까. 인간은 인간다워질 수 있을까. 문제의 근본 원인을 주로 인간 내면에서 찾는 에리히 프롬 식의 진단이 아쉽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유형 인간’의 실상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그의 연구는 여전히 통찰적이다. 인간다워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그 근본 이유와 인간다워지기 위한 일차적 동력이 어때야 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한 사실은 내가 인간적 가치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는 그저 인간으로 존재해야 할 뿐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인권을 ‘소유’하고 있다는 선언은 당연하다. 그 소유를 제한하는 온갖 장애에 저항해야 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 저항이 인간의 주체성을 살리고 인간다움의 기초를 다져주겠기 때문이다. 이론과는 달리 세상은 더 강력하게 비인간의 얼굴로 인간을 소외시키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러한 때이기에 더욱이나 소유형 인간 이전의 모습을 회복하려 애쓸 도리 밖에 없는 것이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에 재직 중입니다.
2018-05-15 | hrights | 조회: 1365 | 추천: 12
최낙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지난 4월 27일,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습니다. 저는 사무실에 출근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TV 앞에만 앉아 있었습니다. 꿈같은 일이었습니다. 거짓말 같았습니다. 현실이 아닌 영화 같았습니다.  ‘마음이 지척이면 천리도 지척이요, 마음이 천리면 지척도 천리’라는 옛사람의 말이 그저 그대로 온몸에 착 달라붙는 것 같았습니다.  이후, 저는 아침 첫 뉴스부터 마감뉴스까지 하루 종일 뉴스만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같은 내용의 뉴스도 이 방송, 저 방송을 돌아가며 몇 번을 보고 또 보고 하는 것 같습니다. 하다못해 티비X선까지 찾아볼 정도이니, 이렇게까지 TV를 챙겨보았던 적이 또 있었을까 싶습니다.  “둘 다 표정이 좋은 걸 보니 왠지 빨리는 안 되더라도, 제가 죽기 전까지 통일이 될 거 같아요.”  초등학교 6학년 남자아이의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냉철한 평가(?)만 봐도 판문점 회담은 성공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자기 살아생전 통일이 될 거라는 기대까지 하고 있으니 대단한 일입니다.  어느 시인의 ‘애국, 애국, 애국 소리 딸꾹질 같아...’ 하는 표현에 깊이 공감했던 제가 애국자일 리는 없습니다. 거기에 ‘통일염원 몇 년’ 하는 식의 연호(?)를 쓰는 것에 심한 거부감이 있었던 지난 기억으로 볼 때, 소위 민족주의자는 더더욱 못 되는 제가 이렇게 들떠 있는지 스스로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왜 이렇게 가슴이 기대감을 주체 못해 벌렁벌렁하는 걸까요. 사진 출처 - 뉴시스  어버이날, 어머니를 뵈러 갔습니다. 먼저 와 있던, 저보다 여섯 살이 많은 누이가 약간 상기된 얼굴로 물었습니다.  “엄마, 우리 개성하고 장단에 땅 있다고 하지 않았어?”  개성에 살던 저희 할아버지는 장단으로 이주해서 농사를 지으며 사셨다고 했습니다. 누이는 개성에 산이 있고 장단에 전답이 있는데 큰댁에 그 땅문서가 있다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말씀이 떠올랐던 모양입니다. 그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역시 정상회담 때문이었겠지요.  집에만 오면 뭐라도 하나 챙겨가려는 누이가 못마땅했는지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야, 통일이 되도 그 땅을 OO이가 너한테 쪼개 주겠냐? 미친 소리...”  ‘OO이’는 큰댁 장형(長兄)입니다. 어머니는 아예 꿈도 꾸지 말라는 듯이 한마디를 더 얹었습니다.  “그리고 이북 놈덜을 뭘로 믿냐? 통일이 무슨 애들 장난인 줄 알어...”  “아유, 내가 무슨 땅을 어떻게 하겠다고 했어?”  누이는 그냥 궁금해서 해본 소리라고 멋쩍게 웃었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북한 사람들을 ‘빨갱이 새끼덜’이라고 하지 않고 ‘이북 놈덜’이라고 말한 것에 놀랐습니다. 혹시 이번 정상회담 분위기가 열렬한 박정희 신도인 어머니에게도-비록 503 때문에 많은 실망을 했어도-어떤 영향을 준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30년 전쯤, 존경하는 소설가 한 분이 문학 수업 중에 하셨던 말이 떠오릅니다.  “보따리 하나 둘러메고 판문점에 가서, 그냥 ‘나 고향 갈랍니다’ 하고 넘어가면 왜 안 되나?”  함경도 회령이 고향이었던 선생의 얼굴은 굳어 있었습니다. 우스갯소리처럼 시작했지만 말하고 나니 새삼 어처구니가 없다는, 생각할수록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듯 한 그런 표정이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선생은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 당연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당연하게 생각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하셨던 것 같습니다.  두 정상이 마치 놀이하듯이 남북을 오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당연하다는 것은 어떤 걸까, 이런저런 이유를 달수록 오히려 구차해지는, 덧붙일 것도 뺄 것도 없이 그냥 당연한 것, 그것만으로 마땅한 것은 어디쯤 있을까요.  비록 멀리 돌아왔지만, 이렇게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 당연한 것이 당연히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당연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최낙영 위원은 현재 도서출판 '밭' 주간으로 재직 중입니다.
2018-05-09 | hrights | 조회: 795 | 추천: 8
이지상/ 인권연대 운영위원  한 사내가 죽었다. 향년이라고 하기엔 이른 나이 55세. 김아무개씨였다. 핸드백을 하나 훔쳤다고 했다. 그 죄로 벌금 150만원을 선고 받았다. 으레 그렇듯이 기초생활 수급자인 그도 벌금을 낼 돈이 없었다. 한 달에 수급비로 받는 70만원으로 그가 물어야 할 벌금의 액수는 감당할 수 없는 짐이었다. 그는 노역형을 선택했다. 그는 심부전증 환자였다. 돈이 없어 병원 진찰도 겨우 받은 그에게 의사는 수술을 해야만 한다고 했다. 돈이 없어 퇴원을 요구했던 그에게 의료진은 기초생활 수급자이기 때문에 받을 수 있는 긴급지원의 내용을 찾아주었고 그 덕분에 가까스로 수술을 마칠 수 있었다. 며칠 더 요양을 해야 한다는 의료진의 권유를 거부하고 그는 퇴원 했다. 어쩔 수 없었다. 돈이 없었다. 퇴원한지 4일째 되는 지난 4월 13일 서울구치소 노역장에 들어갔고 이틀 후 아침 반 시체가 된 그의 몸뚱이를 구치소는 병원으로 옮겼다. 그리고 거기서 죽었다. 벌금 150만원을 못내 노역장에 유치된 뒤 이틀 만에 숨진 김아무개씨의 방 사진 출처 - 한겨레  봄날의 추위가 기승을 부렸던 날 이었다. 손님이 떨구고 간 스마트 폰을 사용한 택시운전사가 잡혔다. 술 취한 동료의 지갑에서 현금 40만원을 빼냈던 직장인도 잡혔다. 그들은 벌금 150만원을 선고 받았다. 통상 절도죄에 벌금 150만원 형은 그 정도의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받는 벌이다. 그가 훔쳤다는 핸드백의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른다. 그는 그 죄로 인해 사실상 사형을 선고 받았다.  서울역 광장위에 흡연실에는 출장 가는 직장인들과 휴가 나온 군인들로 늘 북적인다. 그들의 틈에 섞여 담뱃불을 붙일 때 한눈에도 초라해 보이는 청년이 들어왔다. 얼굴은 흙빛으로 추위에 얼은 듯한 표정이었고 옷은 안쓰러울 정도로 얇았으며 왼쪽 손은 없는 듯 소매가 하늘거렸고 오른쪽 다리는 심하게 절었다. 그는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대신 오물로 인해 다들 일부러 외면하는 쓰레기통위의 담배꽁초를 두리번거렸다. 담배 찾으세요? 라고 내가 물었고 그는 부끄러운 듯 웃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봄추위에 언 눈빛만으로는 그가 초췌한 노숙자라고 여겨지지 않을 만큼 맑은 사람이었다. 내가 담뱃갑 하나를 통째로 내밀었을 때 그는 90도에 가까운 인사를 건넸는데 담뱃갑을 뒤적이던 그는 곧 그중에 한 개비를 빼고는 남은 담배를 다시 돌려주었다. 나는 담뱃갑을 다시 돌려받았다. 승차장으로 가는 계단위에서 후회 했다 그걸 돌려받다니.  “무언가 용서를 청해야할 저녁이 있다 맑은 물 한 대야 그 발밑에 놓아 무릎 꿇고 누군가의 발을 씻겨 줘야할 저녁이 있다.” – 이면우 <그 저녁은 두 번 오지 않는다> 중  대전으로 내려가는 차창으로는 오후의 햇볕이 가득했다. 나는 그 담배 갑을 돌려받지 않아도 됐었다. 아무 조건 없이 피어난 봄꽃과 품 하나 안들이고도 내리쬐는 봄볕에 내 얼굴을 들이밀며 담배 갑을 내게 돌려주는 청년의 거친 손에 미안했다. 그게 뭐라고 그게 무슨 재산이라고 그걸 돌려받다니.  맑은 눈빛의 그 청년이 허기질 때면 서울역의 어느 편의점을 어슬렁거리다가 나머지 한손으로 컵라면 따위를 슬쩍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역 광장의 의자에 떨어진 지갑을 팔 없는 소매에 숨기고 뒷골목으로 숨어들어 두려운 눈빛으로 지갑의 현금을 셀 수도 있을 것이다. 핸드백에 죽음이라는 무서운 단어가 들었는지도 모르면서 훔쳤던 김 아무개 씨처럼. “흰 발과 떨리는 손의 물살 울림”을 싣지는 못하더라도 나는 그날 오후 눈빛 맑은 그러나 한 팔이 없이 다리를 심하게 저는 청년의 순수함에 답을 해야만 했다. “나지막이, 무언가 고백해야 할 어떤 저녁이 있으나 나는 첫 한마디를 시작하지 못했고 “누군가의 발을 차고 맑은 물로 씻어주지 못했다”고. 55세의 김 아무개씨는 그렇게 죽었다. 심성 고운 맑은 눈빛의 청년 또한 그렇게 생을 마감할지도 모른다. 이지상 위원은 현재 가수겸 작곡가로 활동 중입니다.
2018-04-26 | hrights | 조회: 1447 | 추천: 16
- 어떠한 삶을 살고 싶은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서상덕/ 인권연대 운영위원 # 30년 전 : 엉뚱한 호기심에  30년 전 대학이라는 곳에 처음 발을 디딜 즈음의 기억이 되살아나는 요즘이다. 내가 다니던 대학교 주변은, 산정에 낀 운무처럼 늘 매캐한 최루탄 가스로 그윽할(?) 때가 그렇지 않은 날보다 많았다. ‘백골단’이라고 불리던 사복경찰과 전경이 수시로 학교 주변을 에워싸고 불심검문을 해댔다. 나 같이 선량한(!) 학생들도 괜히 주눅이 들어 지냈던 기억이 지금도 기분 나쁘게 떠오른다. 집회가 있는 날은 학교 건물 곳곳이 가려질 정도로 근처 집이고 사람이고 최루탄을 뒤집어쓰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대입전형에서 가고 싶은 대학을 먼저 정하고 시험을 치르는 ‘선지원 후시험’ 제도가 처음 도입되던 때라, 내가 ‘대학’과 ‘과’를 정하고부터 집안은 물론 주위 어른들의 염려의 말을 적잖이 들어야 했다. ‘그 학교는 어떠니’, ‘그 과는 어떻다’느니, ‘절대 데모하는 근처에도 가지 마라’…. 다녀본 사람들보다 ‘빠싹하다’는 투였다. 그런 말들로 이미 단련된 나였기에 주위의 ‘꼬임’(!)에도 눈과 귀 모두 닫고 도서관과 하숙집만을 오갔다.  아니, 그런데…. 그런 내 눈에 척 들어와 박힌 책 제목이 『무엇을 할 것인가?』였다. [우리 운동의 절박한 문제들]이란 부제를 눈여겨보았더라면 내 인생항로가 지금과는 많이 달라졌지 않았을까 싶다. 사진 출처- yes24  ‘앞으로 무얼 하지….’ ‘어떻게 사는 게 제대로 사는 걸까’ 한창 고민하던 때여서였을까, 기어이 호기심을 자극하는 제목의 책을 펴들고 말았다. 그 한 권의 책이 오늘의 나를 만들지는 않았겠지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만은 분명한 듯하다.  알려진 대로 블라디미르 레닌(본명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랴노프(Vladimir Ilich Ulyanov))의 대표적 저작으로 꼽히는 책이다. 그때는 이런 류의 책을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도 팽팽한 긴장감 속에 살아야 했다. 동아리방이나 학생회 사무실에 ‘짱박아’ 두고 읽어야 동티가 나지 않을 법한 책이었다.  놀랍게도 20세기에 막 들어서던 무렵인 1902년 세상에 나온 『무엇을 할 것인가?』는 당시 국제 노동운동에 횡행하고 있던 기회주의를 비판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결국 대중에 대한 광범위한 교육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 책을 ‘학습’하며 이른바 ‘무지가 역사 발전에 도움이 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말을 금과옥조처럼 새겼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 2018년, 오늘을 살며 : 선택하는 삶  30년 전 기억이 되살아나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우연’히 다가오는 선택에 따라 앞으로의 삶이 상상도 하지 못할 분수령을 맞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기 때문이다. 그런 대표적인 사례가 많은 이들이 함께 경험한 ‘촛불집회’였다. 4․19혁명, 5․18광주 민주화운동, 87년 6월 항쟁…. 우리 역사 중요한 고비마다 ‘필연’은 ‘우연’의 모습을 띠고 나타났다.  차가운 광장에서 이글이글 타올랐던 촛불을 경험하며 우리는 지금 또 한 번의 분수령을 맞고 있다.  그 분수령 앞에서 살얼음판을 걷듯 조심스러운 것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언제 깨어져 꺼질지 모르는 살얼음판 위로 무거운 돌을 던져대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살얼음판 같은 역사 현장에 돌을 던져대고 있음에도 자신의 손에 들려있는 게 돌인지 아닌지 제대로 의식하지도 못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런 이들은 대부분 정권 창출이나 권력 쟁취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이른바 ‘공신’(功臣)의 모습이나 예의 최순실과 같은 ‘고마운 분’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현실이기에 예의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말을 떠올리게 됐던 모양이다.  이 시대는 레닌이 살았던 시대보다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몇 곱절 확장돼 있다. 따라서 아이러니하게도 선택하지 말아야 할 ‘무엇’이 더 중요해진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나의 ‘우연’적 선택에 따라 역사의 수레바퀴가 10년 전으로, 아니면 더 과거로 미끄러져 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안희정, 김기식…. 순간순간 터져 나오는 ‘공신’(功臣)들의 궤도이탈에서 그 퇴행적 증후를 본다. 중차대한 역사의 고비 한가운데 서있다는 인식 없이 순전히 ‘개인적인 성취’에 취해 역사 자체를 되돌려버린 뼈아픈 사례를 무수히 보아온 우리들이다.  ‘역사’나 ‘사람’이 아니라 ‘개인’에 갇힐 때, 매몰될 때 그 후과가 얼마나 처절했는지 ‘이명박근혜’ 9년의 역사는 가감 없이 보여주었다. 개인적으로 지난 9년의 역사는 30년 전 기억을 떠올리게 할 만큼 ‘제대로’ 짜증나는 시간이었다. 나는 그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치도 없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누구나 ‘역사적’ 개인으로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할 때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부끄러움’조차 모르는 이라면 모르겠지만…. 서상덕 위원은 현재 가톨릭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18-04-24 | hrights | 조회: 1321 | 추천: 15
장경욱/ 인권연대 운영위원  홀렁 베이(Roland WEYL) 프랑스 변호사. 1939년 변호사가 된 이후 레지스탕스 시절 빼고는 여전히 변호사로 활동 중인 1919년생 100세 할아버지.  지금도 전 세계를 홀로 누비고 있다. 올해도 어김없이 한국을 방문한 그를 4월 5일 저녁에 민변의 동료 변호사들과 만난다. 올해는 무슨 이야기보따리를 푸시며 어느 국제회의의 참석을 권하실까 기대 반 걱정 반이다.  그를 만난 건 내 인생의 행운이다. 2013년에 방한한 그를 처음 만났다. 그때 홀렁 베이는 2005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국제민주법률가협회 총회에서 만났던 민변 변호사들과의 만남을 원했다. 국제민주법률가협회와 민변의 국제연대를 한층 높일 수 있는 좋은 계기를 만들고 싶다며 민변 변호사들과 간담회를 제안해 왔다. 민변 집행부와 간담회가 성사되었으나 홀렁 베이의 건강문제로 무산되자 대타로 민변 동료 변호사들과 만나게 되었다. 2013년 한국을 방문했던 홀렁 베이 변호사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그는 한국(코리아) 문제에 해박하였다. 정전협정의 조항을 읊었고 유엔헌장 조항까지 설명하며 한반도 평화와 통일문제에 대해 진보적 법률가로서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국가보안법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그해 일본 오사카 평화헌법 9조 세계대회에 참석하라며 그때 보자고 했다.  일본 오사카 평화헌법 9조 세계대회에 참석하였다. 홀렁 베이를 비롯한 국제민주법률가협회 집행부와 민변 변호사들과 간담회를 하였다. 2014년 벨기에에서 국제민주법률가협회 총회가 있으니 꼭 참관하라고 했다. 그 때 그가 국제민주법률가협회에서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에게 보내고자 하는 서한에 대한 의견을 물어왔다. 서한의 내용은 정전협정 제4조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관한 정치회담에 관한 규정에 의거 한국전쟁은 일찌감치 평화적으로 종결되었어야 함에도, 유엔이 미국의 도구화됨으로써 60년 동안 미뤄진 정치회담을 유엔이 나서 진행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국적군으로 구성된 유엔군은 더 이상 주둔할 이유가 없고 주한미군 기지는 정전협정 위반이라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는 한국에 돌아가 의견 수렴 후 회신을 드리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국가보안법에 걸릴까 제 때 제대로 답변을 드리지 못했다. 홀렁 베이는 말했다. 한국 변호사들이 서한의 주체도 아닌데 국제민주법률가협회에서 보내는 서신에 대해서 의견도 말하지 못하냐고 나무랐다. 할 말이 없었다.  그랬던 그가 우리를 이해하는 사건이 터졌다. 2013년 11월 그도 토론자로 참석하였던 ‘코리아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포츠담 국제컨퍼런스’ 에 참석하였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바라는 많은 사람들이 참가했다. 미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 노르웨이, 베트남의 여러 나라에서 참가한 외국인들과 재미, 재캐나다, 재독, 재러 등 해외동포들이 참여했고 남에서는 나와 애기봉등탑반대운동 등 평화활동을 해온 이적 목사가, 북에서는 조국통일연구원의 부원장과 교수 등이 참여했다.  다녀왔더니 난리가 났다. 조선일보는 이석기 사건 변호인, 北 통전부 인사들과 독일서 세미나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하였다. 우익보수단체 활빈단이 고발하였고 통일부는 남북교류법 위반여부를 조사 중이라고 하였다. 당시 종북몰이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종북몰이에 정면으로 맞대응이 필요했을 때 그가 연대의 서신을 내게 보냈다. ‘국제컨퍼런스에 참석한 변호사에 대한 종북몰이는 유엔인권선언에 보장된 의사, 표현, 결사의 가장 기본적인 권리에 대한 용납할 수 없는 침해이다. 이것은 평화롭고 민주적인 정신과 행동 하에 남북 간 대화를 시작하려는 남한의 정책과도 어긋나는 것이다, 판문점 정전협정 60주년을 맞이하여, 남북간 대화를 권고한 협정 4조를 다시 떠올릴 수밖에 없고 정전협정 4조는 왜 남한의 대통령이 남북간의 대화를 바라는 국제여론에 부응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유 중 하나이다. 수구보수세력들에 의한 공격은 당신에 대한 범죄일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고위 공직자들에 대한 공격이기도 하고 이는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 만약 향후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당신은 전 세계 평화와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법률가들과 시민들의 연대가 당신과 함께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는 내용이었다.  2013년 홀렁 베이와 인연을 맺은 이후 거의 매년 언제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그와 만남을 하고 있다. 그가 권하는 어느 국제회의든 무조건 참석하고 있다. 일본, 벨기에, 프랑스, 네팔, 베트남에서 강대국에 의한 민족 및 인종의 생존권이, 국가에 의해 시민들의 생존권이, 자본에 의해 노동자의 생존권이 침해되는 현장에서 집단과 개인의 생존권, 시민과 노동자의 생존권을 논하고 있다.  그가 오라는 곳에 가면 따라다니기만 해도 배우고 성큼 성큼 성장하게 된다. 그를 닮고 싶다. 장수하고 싶다. 홀로 전 세계를 누비며 인권과 평화를 논하고 싶다. 이번에는 국제민주법률가협회에서 팔레스타인 라말라 회의를 한다는데 내게 참석을 권할 것이 분명하다. 국제민주법률가들과 함께 팔레스타인 민중과 함께 평화를 위해 싸우는 길에 무조건 참여하고 싶다. 1. 홀렁 베이(Roland WEYL) <약력> 1919년 프랑스 파리 출생 1939년~현재 프랑스변호사 1954~1991 「현대법리뷰」 편집장 유엔 산하 국제민주법률가협회(AIJD) 수석부위원장 프랑스 권리연대 명예대표 프랑스 평화운동단체 라빼(La Paix) 중앙위원 프랑스변호사협회원로 노동자, 평화활동가, 알제리전쟁시기 알제리인 등의 권익보호에 헌신 법학박사이자 투쟁하는 변호사인 부인 모니끄 피꺄흐 베이와 함께 다수의 법학이론 저서 집필 <주요저서> 『정의와 인간』(1961), 『혁명과 권리의 전망: 계급사회에서 무계급사회까지』(1974), 『이혼, 자유주의와 자유』(1975), 『투쟁을 위한 의복』(1989), 『마스트리히트조약(유럽연합조약)으로부터의 해방』(1998), 『민주주의, 민중의 권리』(1996), 『시장의 독재에 대항하여』(공동저술) 2. 국제민주법률가협회(IADL, International Association of Democratic Lawyers) <소개> 1946년 파리에서 창립. 국제연합경제사회이사회(ECOSOC)와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의 자문기구. 초대대표 흐네 까썽(Ren Cassin)은 세계인권선언 작성에 참여하고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프랑스의 대표적인 법률가. <창립목적> 전 세계의 법률가, 법률가단체들간의 교류를 촉진하고 상호 이해 도모, 국제연합(UN)헌장의 실행을 위한 공동 사업 전개, 국가 간 법적 차원의 민주주의원칙의 실현과 평화유지, 입법과 실천에서 민주주의적 권리와 자유 재정립 및 수호 발전, 법률과 현실에서 모든 이들의 제한 없는 독립성 증진, 인류와 인권의 수호와 증진, 생태와 환경 보호, 적법성에 대한 엄격한 일치와 사법기구와 법률가들의 독립성을 위한 투쟁, 평등한 경제체제와 과학적 발전, 천연자원의 성립과 발전을 위한 인권 수호 <조직체계> 명예대표 : Nelson Mandela(남아프리카) 대표 : Jeanne Mirer (미국) 부대표 : Roland WEYL (프랑스), Cla Carpi da Rocha (브라질), Gavril Iosif Chiuzbaian (루마니아), Ibrahim Essamlali (카이로) 영국, 벨기에, 필리핀, 팔레스타인에 지부를 두고 있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8-04-10 | hrights | 조회: 1390 | 추천: 8
오인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나이를 먹을수록 이 말의 다정함이 절대적으로 실감된다. 추위가 유난히도 길고 깊었던 겨울의 끝에서 맞이한 봄은 더욱 반갑다. 특히 올 봄은 자연만이 젊음을 되찾는 계절이 아니라 우리 사회도 활력을 되찾는 시절이 되리라는 기대까지 더해져서 희망차게 기쁘다. 자연이 부활하는 계절에 한껏 부풀어 오른 희망을 따라 두서도, 정처도 없이 생각의 길을 거닌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가능성을 기대하고 희망하며 그것을 지향하는 것이야말로 인간 의식의 기본형태”라는 어느 철학자의 말을 떠올리면서.  마침내 그가 수인번호 716이 되었다. 기쁘다! 구속 직전 “지난 10개월간 견디기 힘든 고통”을 겪었다고 토로했다는 데, 검찰이 진즉에 그의 고통을 줄여주지 않은 건 아쉽다. 만시지탄의 감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후련하다. 물론, 구속이 곧 처벌은 아니다. 그러나 그의 구속이 정의의 구현인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는 거니까 부귀권세에 상관없이 죄를 지은 자는 벌을 받아야 한다. 사회가 존속되려면 이런 최소한의 정의가 있어야 한다.  기실, 부귀와 권세를 누리는 사람이 악을 행하면 더 크게 벌해야 한다.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살만한 처지에서 덕을 베풀진 못할망정 죄를 범하였으므로. 716은 수십 년에 걸쳐 그런 범죄행각을 벌여왔다. 상습적이다. 그래서 더 악질적이다. 그런데도 그는 마치 자신이 평생 정직하고 도덕적으로 살아왔는데 정치적 탄압에 의해 불의하게 구속된 것인 양 군다. 웃기는 노릇이 아닐 수 없다.  우선, “정직”이라는 가훈. “정직”이 정녕 가훈으로 내걸었다면, 아마도 그것은 가족 모두가 ‘탐욕 앞에 정직하자’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형제들, 아내, 아들, 사위 할 거 없이 거의 가족 모두가 범죄 혐의자라는 사실이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다. 단군 이래 이만한 가족은 없었지 싶다. 아니, 어쩌면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이래 초유의 가족일지도 모르겠다. 만일 716이 국회의원, 서울시장, 대통령 직을 거치는 동안에 가족이라는 이유로 아무런 불법적 혜택을 받지 않았다면 몰라도, 특혜는 한껏 누렸으면서 이제와 가족이라는 관계를 내세워 슬쩍 면죄부를 받으려 든다면, 인정사정없이 오직 법대로 엄정하게 처리해야 할 줄로 안다.   그리고 “도덕적으로 가장 완벽한 정부”라는 자평. 이 표현은 “도둑적으로 가장 완벽한 정부”의 오기로 보인다. 증거가 없는 악은 악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가장 큰 증거는 자기다. 정신이 어긋난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설사 남은 모를 지라도 자기는 안다. 이건 380여 년 전에 데카르트 형님이 사고실험을 통해 논리적으로 뒷받침을 해 놓은 사실이다. “모든 것을 의심하는 사이에도 내가 이렇게 의심하고 있다는 것. 내가 이렇게 의심하면서 스스로 그것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 스스로 의식하는 나는 여기에 분명히 있다는 것. 바로 그것만은 더 이상 의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내가 가장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가장 단순한 것”이라고. 그래서 나는 716이 자기네가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이라고 하는 말을 어떤 식으로든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사진 출처 - SBS  게다가 아직까지는 716이 헌법을 유린한 반국가 사범이라는 사실은 충분히 드러나지도 않았다. 구속영장에 나타난 그의 혐의는 특정범죄 가중처벌법상 뇌물수수 · 국고손실 · 조세포탈,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상 횡령, 수뢰 후 부정처사, 정치자금 부정수수, 직권남용 권리행사 방해, 대통령기록물관리법 위반 정도다. 이것만 보면 그는 정치사범이 아니라 경제 사범처럼 보인다.  716은 대통령으로 취임할 때 헌법 제69조에 따라 다음과 같은 선서를 했다.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그러나 716은 국가를 보위하기는커녕 보란 듯이 국고(國庫)를 탈탈 털어가려고 온갖 궤변과 꼼수를 다 동원했다. 조 단위로 나랏돈을 해먹은 언필칭 자원외교의 사기극과 멀쩡한 강을 살리겠다며 4대강과 그 주변 생명들을 해친 반(反)생태적 범죄에 대해서도 철저히 따져서 죗값을 물게 해야 한다. 지금 다시 돌이켜봐도 716이 대선에서 내걸었던 747공약은, 당시 풍자적으로 회자되었던바 그대로였다. (대통령이 되기만 해봐라, 내가) ‘칠(7) 수 있는 사(4)기는 다 칠(7)꺼다.’  더 나쁜 것은 그런 불의와 파괴에 국가적 사업이라는 이름을 들이대면서 합법적인 정책으로 만든 것이다. 사악하게 얻은 것을 지키기 위해 온갖 협잡(挾雜)과 비리를 저지르면서도 마치 그것에 옳은 일인 양 치장했다. 사익을 공익으로, 불의를 정의로, 악을 선으로 탈바꿈시켰을 뿐만 아니라 제도화시켰던 것이다. 같은 정파에 나온 그의 후임자가 503이 된 것은-비록 수인번호는 먼저 달았지만- 일견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렇게 해먹어도 탈나지 않는데 나도 이쯤이야 뭐, 하는 생각이 들지 않았겠는가. 법률적으로는 716에게도 마땅히 무죄추정의 원칙이 적용돼야겠지만, 양의 탈을 쓰기만 하면 탐욕스런 늑대들이 우화의 세계가 아니라 공적 현실에서 활개 치게 만든 역사적 유죄를 벗어날 순 없을 것이다.  최소한 공적 영역에서만큼은 양의 탈을 쓴 늑대들을 몰아내자는 것, 그게 적폐청산의 한 축일 것이다. 비리나 부정, 불의와 탐욕 같은 악습을 깨끗하게 씻어내지 않고서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나라를 만들 수는 없는 노력이다. 불의한 현실세계를 비판하고, 그런 현실과 다른 현실을 만들기를 꿈꿨던 토머스 모어는 ⌈유토피아⌋에서 주인공 히슬로다에우스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했다. “정실과 탐욕이라는 이 두 가지 악이 인간의 마음에 뿌리 내리면 곧 모든 정의의 파괴자가 된다. 사회의 가장 강력한 접합제인 정의가 파괴되는 것이다.” ⌈신국론 De Civitate Dei⌋의 저자로 초기 그리스도교의 대표적인 교부(敎父)였던 성(聖) 아우구스티누스는 “정의를 없애버린다면 국가는 도둑집단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라고 설파한 바 있다. 과연 그렇다! 만백성의 십시일반으로 채운 나라 곳간을 터는 일을 본업으로 삼은 자들은 도둑놈들이라고 하지 않으면 뭐라 부를 것인가? 그런 자들을 ‘발본색원’하여 엄벌하여 아예 뿌리를 뽑자는 적폐청산을 정의구현이 아니라 한사코 정치보복이라고 읽는 자들도 있다. 십중팔구, 제 발이 저린 자들이거나 탈이 벗겨질 것을 두려워하는 이리 같은 무리들이다.  그들이 뭐라 하든, 만인이 만인에 대해 이리 같이 굴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세상이 오리라는 희망을 갖게 하는 봄이다. 비단 적폐청산의 움직임만이 아니라 남북관계의 해빙과 미투(Me too)운동의 전개도 긍정적 기대를 마음을 밝고 환하고 따뜻하게 해준다. 흔히 봄을 희망에, 여름은 실행에, 가을을 결실에, 겨울을 휴식과 준비에 비유해 왔다. 사계절의 변화를 농사짓는 일에 연결하는 게 자연스러웠던 때의 기본 감각이다. 물론 인생은 곡식이 자라듯이 그렇게 철따라 매듭이 있는 것은 아니어서 자연의 계절과 인생의 계절이 꼭 일치한달 수는 없다. 사람이 사회에서 살아가는데 있어 봄에만 좋은 일이 있고, 가을에 꼭 풍성한 결실을 거두리란 법도 없다. 그러나 지금은 봄은 봄에 즐겨야 한다는 마음을 거두고 싶지 않다. 오인영 위원은 현재 고려대 역사연구소에 재직 중입니다.
2018-04-04 | hrights | 조회: 1000 | 추천: 5
강국진/ 인권연대 운영위원  발단은 지인 두 명과 나눈 대화였다. 한 여성 교수 얘기가 나왔는데 한 지인이 그 교수를 일컬어 “그 교수는 페미니스트”라고 했다. 다른 지인은 “전투적인 건 아니고 합리적인 페미니스트”라고 표현했다. “메갈리아 같은 이상한 쪽은 아니다”는 말도 등장했다. 낯설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한 그 구분법은 며칠 전 읽은 한 기사를 계기로 내 머릿속을 가득 메워 버렸다.  ‘레드벨벳’이라는 걸그룹에서 활동하는 아이린이라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3월 18일 팬 미팅에서 누군가 최근에 읽은 책이 뭐냐고 물었다. 아이린은 두 권을 말했는데 그 중 하나가 ‘82년생 김지영’이라고 한다. 그 후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아이린을 비난하는 글이 폭주했다고 한다. 이유는 아이린이 그 책을 읽은 것은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선언했다는 의미라는 거다. 심지어 어떤 팬은 아이린 사진 화형식을 하는 사진을 올리기도 했다고 한다.  위에서 말한 기사를 보니 지난 2월에는 ‘에이핑크’라는 걸그룹에서 활동하는 손나은이라는 사람이 “여자는 뭐든지 할 수 있어’’라고 적힌 휴대전화 케이스를 든 사진을 올렸고, 일부 팬들한테 항의를 받았다고 한다. 지난해에는 여성 연예인이 영문으로 ‘여자에게 왕자님은 필요없다’는 말이 적힌 티셔츠를 입었다가 격한 비난을 받기도 했다. 둘 다 페미니스트를 연상시킨다는 게 이유였다. 사진 출처 - 서울신문  솔직히 말해 레드벨벳과 아이린, 에이핑크와 손나은 모두 그 기사를 보고 처음 알았다. 별반 관심도 없다. 굳이 어떤 그룹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찾아볼 생각도 없다. 다만 두 가지 면에서 그 기사가 내게 충격을 줬다. 일단, 어떤 책을 읽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런 비난을 받아야 한다는 게 너무 어처구니가 없다. 자칭 ‘팬’이라는 사람들이 다 큰 성인한테 ‘이런 책을 읽어라’ ‘이런 책은 읽으면 안 된다’고 타박하는 꼴이라니. 그 ‘일부’ 팬들 발상대로라면 아이린이 ‘나의 투쟁’을 읽으면 순식간에 나치가 되고, ‘브로크백 마운틴’을 보면 느닷없이 게이라도 된단 말인가.  두 번째로 놀랍고도 충격적인 건 그들이 ‘페미니스트’를 바라보는 관점이었다. 짐작하건데 그들은 ‘페미니스트’를 사회정의에 부합하지 않는, 배척해야 하는 부도덕한 어떤 것으로 구성하는 듯하다. 어줍잖게 페미니스트가 좋으니 나쁘니 하는걸 따지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그들이 페미니스트를 낙인찍는 방식은 얘기를 하고 싶다. 그들이 ‘너 페미니스트냐’고 질문하는 것 자체가 폭력행사로 비치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에 인권연대에서 주최하는 ‘홍세화 초청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당시 그는 한국에서 “너 전라도 사람이냐”는 질문과 “너 경상도 사람이냐”는 질문이 갖는 차이를 들어 차별과 낙인을 설명했다. 한국이라는 맥락에서 “너 전라도 사람이냐”는 질문은 그 자체로 구별짓기와 낙인찍기를 내포하는 반면 “너 경상도 사람이냐”는 질문에는 그런 맥락이 전혀 들어있지 않다. 마치 미국에서 “너 기독교도냐”와 “너 무슬림이냐”라는 질문과 본질적으로 다를 게 없다. 그런 고민에서 우리는 “너 페미니스트냐”라는 질문이 갖는 폭력성을 확인할 수 있다.  페미니스트인지 묻는 것 자체가 폭력으로써 작동하는 건 페미니스트라는 용어 자체에 사회적 낙인이 찍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낙인을 숱하게 봐왔다. 당장 앞에서 예로 든 ‘전라도’가 그렇다. 한때 ‘빨갱이’에 집중하던 ‘일부’ 목사님들과 독실한 ‘일부’ 신도들께선 요즘 ‘동성애자’ 때려잡기에 여념이 없다.(이분들이 낸 신문광고에 동성애 옹호하는 드라마 보고 자기 자식 동성애자 되면 책임질 거냐는 말이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바쁜 일상으로 지쳐가던 내게 큰 웃음을 주신 목사님들께 이 글을 빌어 허천나게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한반도 남쪽에서 반세기 넘게 이어온 ‘빨갱이-친북-종북’은 말 그대로 낙인찍기의 정석이다. 자사고 폐지와 고교평준화 강화를 주장하는 사람에게 ‘너 빨갱이냐’ 혹은 ‘너 종북이냐’라고 묻는다면 그들이 원하는 건 둘 중 하나일 뿐이다. ‘예 저를 죽여주시옵소서’라고 엎드리거나 ‘전 빨갱이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옹색한 변명을 하거나. 대화와 토론, 소통과 공감이 들어갈 자리는 어디에도 없다.  멀리 볼 것 없다. 생각해보면 박근혜가 청와대를 깔고 앉아 하던 짓이 딱 그랬다. 박근혜가 세월호를, 야당을, 시민단체를, 그리고 국민들을 어떻게 낙인찍고 배제하고 감시했는지 기억하자. 그리고 그짓꺼리 따라하지 말자. ‘나쁜 동성애자’가 있고 ‘좋은 동성애자’가 있는게 아니라 그냥 동성애자가 있을 뿐인 것처럼, ‘좋은 페미니스트’가 있고 ‘나쁜 페미니스트’가 있는게 아니라 그저 차별에 반대하고 (양)성평등을 (온건하게 혹은 전투적으로) 촉구하는 페미니스트가 있을 뿐이다. 강국진 위원은 현재 서울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18-03-21 | hrights | 조회: 1614 | 추천: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