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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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 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권보드래(고려대 국문학과 교수), 김녕(서강대 교육대학원 교수), 김대원(성공회 서울교구 신부), 김영미(금천문화예술정보학교 교사), 김창남(성공회대 신방과 교수), 김희수(변호사), 도재형(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서상덕(가톨릭신문 기자), 오인영(고려대 역사연구소 연구교수), 이재상(CBS PD), 이재성(한겨레신문 기자), 이재승(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지상(가수 겸 작곡가), 이찬수(서울대 연구교수), 장경욱(변호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 허홍렬(치과의사), 홍승권(삼인출판사 부사장), 황미선(면일초등학교 교사)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김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촛불 집회를 뒤로하고, 오랜만에 지인들과 동행 방문한 장소가 공주시 금학동 ‘우금치 전적지’였다. 햇볕 한 움큼도 들지 않는 음습한 자리에 동학혁명위령탑이 서 있었다. 위령탑이 부서져 내리며 빨간 벽돌이 뼈처럼 드러나 있는 모습에서 이루지 못한 미완의 혁명, 그 얼굴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이 시대의 살아 있는 백과사전이라 불리는 서해성 작가는 위령탑이 서 있는 장소가 동학농민혁명군이 전몰당한 장소가 아니라, 일본군과 관군이 동학혁명군에게 총을 쏘아대던 장소라고 설명해 주었다. 설명을 듣고 보니 동학혁명위령탑이 혁명 전사들의 영혼들을 위로하는 장소가 아니라 참살당한 영혼을 구금 유폐한 장소처럼 보였다. 사진 출처 - 구글 동학혁명은 반봉건, 반외세 운동이었으며, 나라를 보호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보국안민(輔國安民), 널리 백성을 구한다는 광제창생(廣濟蒼生) 운동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인간이라고 다 인간이 아니었던 세상. 사람취급을 받지 못했던 천대받던 민초들도 다 같은 인간이고, 모든 인간을 하늘처럼 귀한 존재로 대해야 한다는 평등사상을 이 땅에 실현하려던 혁명운동이었다. 그러나 120여 년 전 그들이 꿈꾸었던 세상은 부패한 권력과 일본군 앞에 무릎을 꿇었고, 선혈만 낭자한 피고름으로 남았다. 그리고 국가도 주권도 잃어버렸다. 대통령이라는 작자는 헌정유린과 권력 남용을 일삼으면서 주권자인 국민을 개·돼지 쓰레기 취급하다가 탄핵소추 되었다. 헌법재판소의 대통령에 대한 사망선고를 앞 둔 시점에 후안무치하고 무도한 자들이 벌리고 있는 광기들이 가관이 아니다. 석고대죄 해야 할 자, 단죄 받아야 할 자가 누구인데, 거꾸로 시민이 벌 받는 사람처럼 주말엔 광화문으로 출석해야 한단 말인가. 주말을 빼앗긴 고단한 삶의 촛불은 변함없이 타오르고 있는데, 그 끝이 무엇인지도 참으로 우려스럽다. 부패하고 더러운 권력을 처단하여 도탄에 빠진 국민을 구하며, 차별과 배제 특권 없는 평등 세상을 갈구하였던 120년 전의 동학혁명과 촛불혁명의 함성이 놀랍도록 닮아있다. 최순실, 김기춘, 우병우, 조윤선 같은 간신들이 감옥에 갔다는 사실은 동학혁명보다 한발 앞선 전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간신 모리배들이 일부 구속되었다고 촛불의 꿈이 완수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시민은 알고 있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것, 촛불혁명의 꿈. 정의를 짓밟은 자들을 처벌하는 것을 넘어서서, 적극적으로 정의가 살아 숨 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 그것이 시민의 바램이다. 라틴어에 기원을 둔 평등은 공정, 정의를 의미한다. 평등한 세상, 정의롭고 공정한 세상. 권력과 부를 가진 자만이 인간 취급 받는 세상을 배척하자는 것. 법률 앞의 형식적 평등을 넘어서자는 것. 그래서 부자와 빈자 사이에 자유의 불평등한 향유가 발생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 인격적으로 존엄한 주체로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진 세상. 그것은 한낱 꿈으로 끝날 꿈에 불과할까. 국민의 대표기관인 2월 임시국회를 보면 촛불의 꿈이 어찌 될 것인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기업지배구조를 개선하는 상법, 고위공직자수사비리처 신설 법안, 공영방송 정상화 법안 등이 꿈의 계단을 올라가는 첫 걸음마가 될 것이다. 첫 계단도 올라서지 못한다면 120년 전의 함성처럼 혁명은 미완의 변주곡으로 끝나 버릴 것이다. 사진 출처 - 구글 서해성 작가의 혼이 담긴 한마디 말이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다. “그들은 저 언덕(우금치)을 넘지 못했다.”..... 스스로의 몸을 불살라 어둠을 밝히는 촛불은 저 언덕을 넘을 수 있을까. 김희수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활동 중입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59 | 추천: 2
서상덕/ 가톨릭신문 기자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망각이 아닐까!” 한동안 세간에 화제를 몰고 다닌 TV 드라마 〈도깨비〉 때문에 유명세를 탄 말이다. 꼭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 무엇일까 하는 물음은 누구나 한 번쯤 품어봤음직한 원초적인 의문이 아닐까. 드라마 〈도깨비〉에서 공유가 분한 도깨비나 이동욱이 분한 저승사자는 ‘망각’을 신이 자신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로 여긴다. 그럴 만도 하다. 적게는 300년에서 많게는 900년도 넘게, 칼에 찔린 듯 한 고통에 찬 삶을 견뎌 온 이에게는 잠시나마 고통을 잊는다는 게 그 무엇에도 비길 수 없는 축복일 수 있다. 극한의 고통을 경험해본 이라면 고개가 끄덕여질 법하다. 현실에서도 많은 이들이 고통을 벗어날 수 있는 길로 망각을 선택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망각이 쉬 이뤄지지 않을 때 기쁘고 행복했던 기억으로 고통의 기억을 대체하기도 한다. 그것이 쉽지 않을 때 극단적인 방법으로 마약류를 통해 고통의 기억을 잠시나마 잊고자 하는 유혹에 넘어가는 경우도 없지 않다. 이 망각의 기제가 사회에 투사될 때 대부분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망각의 반대인 ‘기억’을 전제로 생존해 온 존재이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에게 기억이, 그리고 그 기억의 전달이 없었다면 지구상에서 수없이 명멸해간 다른 존재들처럼 어느 한 순간 사라져버렸을 지도 모른다. 현생인류의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존재도 자신들이 살던 동굴에 암벽화를 남긴 기억의 행위로 4만 년이라는 세월을 뛰어넘어 오늘까지 살아남는 게 가능했던 것이다. 인간이 이러한 존재임에도, 망각의 기제를 사회에, 공동체에 강요하는 무리가 있다. 이들은 “그만 잊으라”고, “망각의 강 저편으로 떠나보내라”고 자꾸 주문을 건다. 세월호 참사의 아픔도, 위안부 할머니의 고통도, 용산 참사도, 쌍용차 노동자의 눈물도, 4대강의 신음도, 제주 강정의 통곡도, 미순이 효선이의 한도…. 모두 잊으라고만 한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그러면서 자신들은 반대편에서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고, 박정희기념사업회 등 기억을 위한 공간을 만든다고 난리다. 이들이 기억하고자 하는 것, 세상에 퍼뜨리고자 하는 것은 결국 ‘가짜 기억’에 지나지 않는다. ‘가짜 기억’은 원래 실체가 없는 기억이다. 이미 있던 정보가 왜곡되어 나타난 환상 같은 것도 아니고 아예 뿌리가 없는 기억이다. 꿈이나 특정 경로를 통해 접한 정보를 실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라고 착각하거나 실제 겪었던 일이라고 믿게 되는 것이다. 거짓말을 반복하다 자신이 한 거짓말마저 실제라고 믿어 버리는 ‘리플리 증후군’도 이 ‘가짜기억 증후군’의 일종이다. ‘가짜 기억’을 만들어내는 무리가 노리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우리 눈앞에서 펼쳐지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그 이유를 너무도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박정희-박근혜로 이어지며 강고하게 구축된 ‘가짜 기억’의 성(城)을 삶의 뿌리로, 존재의 기반으로 여기는 ‘박사모’ 같은 이들의 존재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누군가 만들어놓은 ‘가짜 기억’의 성에 들어가려 몸부림치더니, 어느 순간 그 성을 만드는 일에 부역하다 거짓의 성에 갇혀버려 이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이제는 그들 존재 자체가 거짓으로 만들어진 성의 밑돌이 되고 만 것이다. 이제 다시 물음을 던져본다, 나 자신에게, 우리에게. “신이 우리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감히 기억이라고 말하고 싶다. ‘사랑의 기억, 연대의 기억, 투쟁의 기억, 나눔의 기억, 하나됨의 기억…’ 기억할 때, 기억을 공유하는 우리는 쓰러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음을….
2017-07-20 | hrights | 조회: 132 | 추천: 2
이찬수/ 인권연대 운영위원 촛불집회에 맞서서 태극기를 들고 애국을 외치는 이들이 등장했다. 일당 받고 관제 데모한다는 세간의 소문이나 보도도 있지만, 자발적으로 참석한 이들도 제법 있는 것 같다. 대통령 탄핵을 반대하거나 판단을 유보하는 사람도 20% 정도는 된다니 말이다. 이른바 ‘태극기집회’가 가장 많이 내세우는 말이 ‘애국’이다. ‘박사모’도 대한민국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다. 대통령의 탄핵을 기각하라며 박사모 회원 한 사람이 태극기를 들고 투신자살하자 애국시민들은 궐기하자며 등장한 선동적 구호 속에도 애국이 들어 있다. 특히 보수단체들 중심으로 애국 혹은 애국시민이라는 말이 툭 하면 튀어나온다. 나라를 사랑한다니, 분명히 좋은 일이다. 그런데 꼭 한 가지 물어야 할 것이 있다. 도대체 국가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다. 더욱이 국가를 사랑하기까지 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탄핵을 거부한다며 투신까지 한 사건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의 이유에서 또 다른 안타까움이 일어나는 것은 어인 일인가. 국가란 무엇인지부터 생각해보자. 국가가 이루어지려면 국민, 영토, 주권이 있어야 한다. 특정 영토 내 주민이 주권을 가지고 있을 때 이들을 종합해 국가라 한다. 이 때 설명이 필요한 부분은 주권이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주권은 ‘국가의 의사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권력’이다. 대한민국헌법 1조 2항에서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규정하고 있다. 국가의 의사를 결정하는 권력이 국민에게 있다는 것이다. 지당한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얼마나 어떻게 경험하며 살아온 것일까. 이 지당한 헌법은 누가 어떻게 만든 것일까. 유감스럽게도 헌법은 민초들이 참여해 만든 게 아니다. 헌법을 만든 주체는 당시의 권력이다. 주민의 의사를 반영하기는 했겠으되, 법은 당시의 정치권력이 만들었다. 그렇게 법이 만들어지면서 사회는 체계화하고 어느 정도 안정되어가기도 한다. 그런데 사회가 안정될수록 보이지 않게 정당화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법이고 동시에 법을 만든 권력이다. 권력자가 한결같이 질서와 안정을 바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때 제기되는 또 하나의 질문, 이런 권력은 어디서 어떻게 온 것일까. 사진 출처 - 구글 국가의 성립사를 보면, 권력이 있기 전에 있었던 것이 폭력이다. 국가는 압도적 폭력이 다른 폭력을 이기고 그 폭력이 정당화되는 과정에서 성립되어 왔다. 그러면서 다른 폭력을 불법적인 것으로 배제하며 폭력을 독점해왔다. 대표적인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국가를… 정당한 물리적 폭력 행사의 독점을 실효적으로 요구하는 인간 공동체”로 규정한 바 있다. 정치학계에 널리 알려진 국가 규정이다. 한 마디로 국가 이전에 권력이 있었고, 권력 이전에 폭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 폭력이 행사될 가능성의 영역 안에 있는 이들이 그 폭력에 대해 묵인, 동의, 복종하면서 폭력이 정당해지고, 그 때부터 폭력은 권력으로 작동한다. 미셸 푸코에 의하면, 권력이란 폭력을 행사할지도 모른다는 협박만으로도 그 대상을 복종시킬 수 있는 능력이다. 권력은 폭력의 영향력 안에 있는 이들이 폭력의 가능성을 내면화하고 그에 동의하면서 성립된다는 말이다. 이렇게 근대 국가의 형성에는 힘에의 동의가 전제되어 있다. 약한 힘이 강한 힘에 동의 또는 동화되면서 강한 힘에 의해 국가라는 것이 형성되어 왔다. 그 강한 힘이 권력이 되면, 그에 동의한 사람들 간 공유의식을 객관화해줄 법과 제도를 확정한 뒤, 그 법과 제도 안에 머무는 이를 애국자라며 칭송해왔다. 법을 어기면 매국이라는 논리를 펴왔다. 그 논리가 적용될수록 법이 정당해지고, 법이 정당해질수록 권력도 강화되는, 순환적 포획의 그물을 펼쳐온 것이다. 애국하면 할수록 견고해지는 것은 사실상 권력인 것이다. 물론 권력이 튼튼해져야 할 필요도 있다. 마치 ‘조폭’이 자신의 영향력 안에 있는 이들을 일정 조건 하에서 보호하듯이, 권력도 분명히 권력에 동의한 이들의 주권을 보호하는 장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주민의 주권을 보호하지 못한 권력 때문에 일본에 식민 지배를 받기도 했으니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권력이 튼튼해져야 백성도 보호할 수 있다는 말에 타당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좀 더 근원적인 데 있다. 압도적인 힘에서 비롯된 권력은 속성상 언제나 하향적이다. 권력은 아래로부터의 상향적 요구에 따라 자신을 변화시키기 보다는 자신을 유지하고 남는 만큼만 아래를 돌아보고 보호하려 한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선언도 역설적이게도 그 잉여 권력의 작품이다. 이 권력을 은근히 국가와 동일시하면서 권력을 실제로 국민의 것으로 만드는 작업은 사실상 불가능하도록 제어해온 것이 권력이기도 하다. 애국이란 무엇인지. 국가를 사랑하는 것과 기존 권력을 정당화하는 것이 같은 말인지 다시 질문하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국가의 실체는 역시 사람에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중요하고, 사람으로서의 권리가 중요하고, 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주권에 일방적인 손상을 입지 않도록 하는 일이 중요하다.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권리와 능력은 모든 사람들에게 있다. 물론 그조차 어느 정도 하향적 권력의 작품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선언이 허언이 되지 않도록 하려면, 결국 국민이 움직여야 할 도리 밖에 없다. 정치권력은 그렇게 하지 않기, 아니 못하기 때문이다. 국가는 정적인 시스템이 아니다. 국가는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는 그 선언이 국민의 움직임을 통해 확인되며 드러나는 동적인 과정에 가깝다. 애국의 진짜 대상은 기존의 권력이나 권력 집단이 아니라, 주권을 지닌 한 사람 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사실을 무시하는 행위가 권력의 근간인 폭력을 정당화시키고 지속시키며, 주권을 그저 말뿐이게 만든다. 그것이 권력의 남용이다. 주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권력의 남용에 대한 책임은 물어야 하는 것이다. 국가의 실체를 돌아보아야 할 때이다. 사랑의 대상이 무엇인지부터 확인해야 한다. 국가를 사랑하는 것은 위로부터 주어진 권력을 그저 승인하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생명을 아래로부터 존중하고 살리는 방식으로만 가능하다.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국가는 지속적으로 만들어가야 할 과정이지, 기존의 강고한 권력 체계가 아니다. 사랑해야 할 것은 인간이지 권력 집단이나 정부 조직이 아니다. 이제라도 사람을 사랑하고 인간 개개인의 주체성을 존중하는 사회를 이루어나가야 한다. 아래로부터 목소리 하나하나를 모아 진행되는 지금의 탄핵 정국은 자신을 국가와 동일시하며 남용해온 권력의 이기적 속성과 관습을 타파하고, 주권을 비로소 확보할 수 있는 호기다. 사랑이라는 숭고한 행위의 대상은 정부 조직이 아니다. 친해져야 할 것은 권력 집단이 아니다. 이제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이고, 참으로 인간다운 가치다. 권력을 사랑할 일이 아니고 사람을 사랑할 일이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에 재직 중입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59 | 추천: 0
김창남/ 인권연대 운영위원 신영복 선생님이 꼭 1년 전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성공회대학교장으로 열린 장례에는 8000명이 넘는 분들이 조문을 오셔서 선생님의 마지막 가시는 길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배웅하였습니다. 차고 매서운 겨울바람이 살을 에던 1월 18일 많은 분들이 참가한 가운데 성공회대학교 성당에서 영결식이 엄수되었습니다.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전 병상에서 마지막 교정을 보셨던 서화집 <처음처럼> 개정판이 별세 직후인 지난 2월에 출간되었습니다. 선생님의 유분은 4월 3일 경남 밀양의 선산에 수목장으로 모셔졌고 이 자리에 표지석과 함께 진달래 숲이 조성되었습니다. 지난 5월 15일 스승의 날에는 선생님을 스승으로 모시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사)더불어숲을 결성했고 6월 16일 법인 허가를 받으면서 정식 출범하였습니다. (사)더불어숲은 신영복 선생님의 뜻을 널리 알리고 오래 기리고자 하는 여러 가지 사업을 준비하고 또 실행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에 관련한 자료를 모으고, 또 선생님의 뜻을 담은 샘터 찬물 편지를 많은 분들에게 보내고 있습니다. 소식지도 발간하고 여러 사람들이 모여 공부도 하고 강연회를 열기도 합니다. 다양한 소모임들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기도 합니다. 서예연습도 하고 또 한 번씩 밀양에 찾아가 선생님을 기억하고 서로의 뜻을 나누는 자리를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다음세대재단과 함께 신영복 선생님의 육성을 담은 소리 아카이브 작업을 위한 협약도 맺었습니다. 장기적으로는 신영복 선생님에 관한 자료를 전시하고 선생님의 뜻을 오랫동안 널리 알리는 다양한 활동의 거점이 될 수 있는 독립적 공간을 마련할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성공회대학교에서는 신영복 선생님의 유업을 잇고자 신영복 선생 추모사업추진단이 결성되었습니다. 우선 선생님의 말과 글, 삶과 뜻을 젊은 학생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의미에서 ‘신영복 함께 읽기’ 수업을 만들어 지난 학기에는 대학원 과정에 개설했고, 다음 학기에는 학부 과정에 개설할 예정입니다. 또 학교 뒷산에 선생님이 모셔진 밀양과 똑같은 모습으로 추모 공원을 조성했습니다. 또 (사)더불어숲과 구로구청, 서울시와 함께 성공회대학교에서 푸른수목원으로 연결되는 산책로에 신영복 선생님의 서화작품들을 설치하면서 더불어숲길을 조성하게 되었습니다. 신영복 선생 추모사업추진단은 내년이나 후년 학교에 새 건물이 지어지는 시점에 맞추어 적당한 자리를 확보해 신영복 선생님의 삶과 뜻, 작품을 기억하고 나눌 수 있는 공간을 교내에 마련할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진 출처 - (사)더불어숲 1주기를 맞아 몇 가지 의미있는 행사들이 진행되었습니다. 지난 연말에는 선생님이 남기신 글과 말, 대담을 묶은 유고집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 그리고 <손잡고 더불어> 두 권이 돌베개 출판사에서 출간되었습니다. 또 선생님께서 생전에 바라시던 바대로 선생님의 서체 컴퓨터 폰트를 누구나 무료로 배포받아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1월 10일부터 19일까지 동산방화랑에서 선생님의 서화작품 전시회가 열리고 있고 15일에는 성공회대학교에서 많은 분들이 함께 한 가운데 1주기 추도식이 열렸습니다. 19일에는 추모 콘서트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지난 1년을 회고하면서 만약 선생님이 조금 더 사셔서 현재의 시국을 보셨다면 어떤 말씀을 하셨을지 생각하게 됩니다. 아마 희망의 언어 석과불식(碩果不食)에 대해 말씀하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씨과실은 먹지 않는다’는 뜻의 이 구절을 선생님은 ‘씨과실은 먹히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하십니다. 촛불 광장의 시민들이 끝내 먹히지 않은 씨과실을 심으면서 이 사회에 희망이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아마 선생님은 아직 갈 길이 멀다는 말씀을 하실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눈을 사로 잡았던 환상과 거품을 말끔히 걷어내고, 앙상하게 노출된 뼈대를 직시하며, 새롭게 뿌리를 거름하여 희망의 씨앗을 일구는, 엽락(葉落)과 체로(體露), 분본(糞本)의 지혜를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또 힘 있는 쪽, 높은 쪽에서 좀 더 약한 쪽, 낮을 쪽을 향해 가는 하방연대(下方連帶)의 가치를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그렇게 우리들로 하여금 서로 손잡고 더불어 숲을 향해 함께 가는 아름다운 동행을 당부하실 것 같습니다. 김창남 위원은 현재 성공회대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59 | 추천: 0
장경욱/ 인권연대 운영위원 고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은 자신이 민정수석으로 근무하던 시절인 2014년 6월 14일부터 2015년 1월 9일까지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 김기춘의 지시사항을 매일 매일 날짜별로 자세히 메모하였다. 유족들에 의하여 세상에 공개된 업무일지에는 김기춘의 직권남용 범죄가 낱낱이 드러나 있다. 업무일지는 한국사회를 지배해온 공안통치의 내부에서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를 제대로 알 수 있는 역사적 기록이 되고 있다. 업무일지에 드러난 신유신 공안통치의 기획자 김기춘의 사고나 업무스타일은 어떤 걸까? 그는 국가정체성과 헌법가치, 체제수호를 위해 전사들이 싸우듯이 비타협적 자세와 강철 같은 의지로 대통령과 대한민국 보위를 위해 근위병, 호위무사로서 끝까지 전투력을 잃지 않도록 힘과 기를 갖추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를 위해 야간의 주간화, 휴일의 평일화, 가정의 초토화, 라면의 상식화 노선을 제시하며 모든 것을 바쳐 헌신할 것을 주문한다. 이념대결 속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갈등 속에서 전사적 자세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게 5. 16과 유신헌법에 대한 평가는 청와대에서 일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공통된 인식이 필요한 대상이다. 5. 16은 북한보다 가난한 대한민국이 반공의식마저 약화된 안보 위기상황에서, 또 초등학생도 시위에 나서 사회질서가 문란한 상황에서 애국심 가진 군인들이 구국의 일념에 일으킨 사건으로, 그 결과 대한민국은 경제성장과 자유와 번영을 구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유신헌법은 월남 패방 직전 7.4 남북공동성명과 체제경쟁, 남북대결 속에서 카터 행정부의 미군철수와 북한의 헌법 개정에 맞서 국력결집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로 그에 대한 평가는 역사에 맡길 수 밖에 없다는 인식이다. 그에게는 전사적 자세로 이념대결 속 생활을 할 수 밖에 없도록 집요하게 투쟁을 전개하는 반체제세력이 있다. 반체제세력에 대한 그의 태도는 생존을 위협하는 적군으로 관념해야 하고 온정주의는 금물이다. 그가 보기에 반체제세력의 목록은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우리 사회의 도처에 깔려 있었고 그의 할 일은 태산 같았다. 내란음모 사건이나 통합진보당 해산결정과 같이 헌법가치, 국가정체성 수호에 환호성을 질렀던 일도 있었다. 하지만, 이석기의 선처를 호소하는 카터 전 미국대통령의 서한에 대한 반박도 필요했고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문을 반영하는 헌법교육 강화방안도 필요했다. 반체제세력의 집요함에 골치가 너무 아팠다. 보수의 약점은 집요함이 없는 것이다. 내심 반체제세력의 집요함이 부러웠다. 민주노총, 통합진보당은 차치하고서라도 쌀 관세화 유예 연장을 요구하며 쌀 수입개방을 반대하는 농민단체, 법외노조 철회와 한국사 국정화 철회를 요구하는 전교조, 청와대를 대상으로 한 언론의 문제보도 기사 하나 하나에 대응해야 했다. 언론의 청와대 문제보도는 청와대에 대한 신뢰와 권위를 추락시키는 허위왜곡보도였다. 비서실장 시절 내내 언론은 성가신 존재였다. 그가 모니터링하며 대응해야 할 일은 줄어들기는커녕 늘어만 갔다. 세월호 참사원인에 청와대 보고 및 그 과정의 혼선에 대한 진상규명 요구는 대비책을 강구해야 할 일거리였다. 세월호 특별법은 좌익들의 국가기관 진입 욕구에서 비롯된 국난초래의 법이었다. 영화계 좌파성향 인적 네트워크 파악도 필요했고, 교육감의 좌파적 낭비 시정도 그의 일이었다. 대통령을 모독하는 그림을 그린 홍성담과 같은 사이비 예술가는 발붙이지 못하도록 해야 했다. 교황방문을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움직임에도 대비해야 했다. 반체제세력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우파지식인 결집, 우파시민단체와의 협력도 청와대의 업무가 되었다. 그가 쉴 새 없이 강조하였던 내부 보안의 생활화도 준수되지 않았다. 청와대 내부문건이 외부 언론사에 유출되는 국기문란의 보안유출사고까지 터져 그 수습에 모든 역량을 투입해야 했다. 사진 출처 - 민변 엎친데 덮친 격으로 탈북자 직파간첩사건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터졌다. 정상적 대한민국을 만들어야 했다. 그에게 체제수호의 3개 기둥은 국군장병, 주한미군, 국가보안법이었다. 국가보안법이 무력화되는 일이 터진 것이다. 재발방지책이 필요했다. 국가적 행사 때마다 법원도 국가안보에 책임 있다는 멘트로 커뮤니케이션을 강화하고 법관 성향에 따라 트집거리 주지 않도록 치밀하게 준비할 필요가 있었다. 간첩 수사를 저해하는 형사법제를 개정하여 한국판 애국법을 만들도록 지시했다. 간첩 무죄를 밝힌 민변 변호사들에 대한 징계도 추진했다. 민변 변호사들이 무서워졌다. 서울지방변호사회가 진행하는 마을변호사도 민변이 악용할 우려가 들었다. 탈북자 홍강철씨가 1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자 9월 6일자 업무일지에 “홍강철의 변심이 key - 방지 위한 접촉 법원 거부감과 제재”, “법원도 국가안보에 책임 있다는 멘트 필요 -> 국가적 행사 때”라는 메모가 있다. 업무일지에는 체제수호의 3개 기둥을 훈시한 그날(2014년 9월 10일)에 추석인공기 계양은 국보법 무력화 위한 교묘한 책동으로 강한 분노로 엄한 처벌을 지시하며 생존을 위협하는 적군으로 관념해야 하고 가볍게 봐서는 안 된다고 주문하였다. 그가 업무일지에서 김영한 전 민정수석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처절하였다. 자식새끼 1년 가까이 병상에 있었지만 가보지도 못하고 미력하나마 대통령을 보필하였다. 그의 말로가 참으로 애처로우나, 희대의 독재 부역자에 대한 온정주의는 금물이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68 | 추천: 0
이재승/ 인권연대 운영위원 지난 주 국정농단사태에 대한 국회청문회에서 블랙리스트가 단연 돋보였다. 특히 주무부처 장관이 블랙리스트를 전혀 모른 듯이 말하였다. 그러나 정권의 실세들도 블랙리스트의 작성이나 운용이 불법이라고 인식하는 것 같아 한편으로는 천만 다행이었다. 존재하는 블랙리스트를 대통령인들, 장관인들 어찌하겠는가! 무려 1만 여명에 육박하는 문화예술인 명단이 누구의 발상에서 시작되고 어떻게 구체화되고 확장되어 갔는지를 특검이 촘촘하게 밝혀주기를 기대한다. 아마 이러한 유형의 정권이 향후 10여년 정도를 더 집권하게 된다면 동독의 쉬타지 문서처럼 몇 백만의 시민이 요시찰대상자명부에 등재되지 않을까 모르겠다. 인류역사에서 삐딱한 학자나 문화예술인들을 좋아하는 권력자는 없다. 권력자들은 정권을 비판하는 작품을 금지하거나 그 영향력을 깎아 내리려고 애를 쓴다. 블랙리스트나 금서목록을 작성하는 것은 어찌되었든 작품 경향에 대한 분석과 판단이라는 지적인 수공예작업을 전제한다. 그런데 작품 때문에 블랙리스트에 오르기도 하였지만 시국선언이나 야당후보의 지지선언에 동참한 것만으로도 리스트에 등재되었다는 사실에서 권력집단이 통치의 열성에서 너무 불성실하다고 생각하게 한다. 특히 정보화 사회에서 명단을 인터넷에서 쓸어 담았으니 권력자들이 통치하기가 쉬운 세상이 도래했다고 생각했나 보다. 이명박 정권 아래서 국방부의 불온도서 사건은 어떠했는가? 무자격의 국방당국이 제멋대로 휘둘러 인문사회도서를 불온도서로 지정하였음에도 헌법재판소는 이를 합헌이라고 판정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타락한 권력이라고 하더라도 예술작품이나 학술도서를 직접적으로 통제하기는 어려운 모양이다. 그래서 정체불명의 리스트를 만들어 합법과 불법의 중간영역에서 정책이라는 이름으로 특정한 성향의 집단을 배제하는 것 같다. 더구나 처음부터 대놓고 배제하면 표가 날 것이고, 실상을 아는 당사자가 드잡이를 할 여지가 있으니 적당히 끼워주었다가 배제하는 수법을 취한 모양이다. 그러한 냉탕과 온탕의 방식이 비판적인 예술인들의 활동을 위축시키는 데에 가장 효과가 크다고 판단했던 까닭이다. 그래서 실세들은 명단에 있는 사람들을 일관되게 불이익을 주지는 않았다는 것으로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았다. 나는 블랙리스트의 작성 또는 운용을 정책 범죄(crime of policy)라고 생각한다. 물론 유신 정권은 한수산, 김지하, 남정현, 현기영 등 비판적인 작가들을 중앙정보부 지하실로 불러와 개처럼 두들겨 패는 등 적나라한 폭력을 가했다. 그러나 이제는 작가를 더 이상 팰 수 없기 때문에 국가적 영향력이 미치는 모든 지원사업에서 배제하기로 한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정책 범죄는 정부가 일정한 사업 분야에서 재량을 갖고 있다는 명분 아래 신청자의 정치적 성향을 사업수행자격과 부당하게 결부시키는 결정이라고 보면 된다. 문화예술인에 대한 이러한 방침을 통해 볼 때 지난 10년 동안 운영된 모든 정부지원사업에서 예컨대, 정치적 현안에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사회과학자나 인문학자들의 신청사업에서도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했을 것이라고 의심하는 게 합리적이라고 본다. 학술적 고위공직은 이미 정치적으로 특정한 성향을 보인 사람들에 의해 장악되었고 그 아래 다양한 평가단계들이 제대로 설계되어 온당하게 진행되었다고 믿기 어렵다. 정권교체 이후에 이러한 심사과정에 관여한 학자들과 그들의 평가진술에 대한 분석과 검증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기만적 학술활동과 과학적 사기를 통해서 천문학적 예산을 낭비하게 한 세력들에게 법적인 응징이 이루어져야 한다. 지난 10년 동안에 도처에서 날뛴 크고 작은 괴벨스들을 찾아내야 한다. 전국의 국립대학교 총장 임명에 정부가 멋대로 순위를 바꿔 임명하거나 심지어 수년 째 임명을 거부하는 일도 있으며, 이 과정에서 권력의 실세들이 개입하였다는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사진 출처 - 노컷뉴스 여기서 블랙리스트의 본질과 역사를 간단히 정리하는 것이 좋겠다. 블랙리스트의 작성은 권력의 기본적인 속성이다. 권력은 본질적으로 피아를 식별하는 것이라면, 블랙리스트는 그 식별의 결과물이다. 아마도 정치가 적과 동지의 구분에 입각한 투쟁이라고 한다면 모든 조직 또는 권력은 잠재적으로도 누가 벗이고 적인지를 가늠하는데 심혈을 기울인다. 문제는 현실사회에서 정치적으로 반대편에 서있다는 이유로 이들을 악의 무리로 상정하고 그에게서 시민으로서 향유해야할 기회를 부당하게 박탈할 수 없다는 점이다. 블랙리스트를 취업금지자명단으로 이해한다면, 우리 역사에서도 몇 가지 사례가 떠오른다. 전두환 신군부는 80년대에 언론을 강제로 통폐합하고 비판적인 언론인들에게 재취업의 기업을 봉쇄하고자 언론인리스트를 작성하였다. 유신시대 이래로 노조활동 관여자나 해직노동자들의 재취업을 막았던 노동자리스트도 기억해야 한다. 1990년 보안사에 근무하던 윤석양 이병은 국군보안사령부가 명부를 작성하여 정치인이나 운동권에 대한 사찰을 지속해왔다는 사실을 폭로하였다. 한국에서 리스트는 취업을 방해하거나 정치인의 일상을 감시하는 역할에 그치지 않았다. 6.25전쟁 중에 국민보도연맹원 학살이나 예비검속에 따른 민간인 학살도 명부가 그 출발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 관한 총괄적인 명부는 아직까지도 발견되지 않았다. 정치사회에는 다양한 위험원인에 대한 다양한 리스트가 존재해야 한다. 예컨대 중대한 범죄를 저지를 것으로 의심할만한 합리적인 이유가 있는 사람들의 리스트는 반드시 작성해야 한다. 수없이 많은 심각한 범죄나 테러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면 정부는 무능한 조직으로 낙인이 찍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민으로서 일반적인 자유와 권리를 행사하고 그러한 한도 안에서 정부와 정부의 정책을 비판했다고 해서 이들을 블랙리스트에 기재하는 것은 심각한 불법이다. 블랙리스트는 적법한 권리행사자를 차별하고 배제하려는 의도에서 작성되었기 때문에 블랙리스트의 작성만으로도 범죄에 해당한다. 이러한 명단에 입각하여 지난 몇 년간 문화예술사업을 설계하고 운영했다면 국운쇠락은 아직도 진행 중이라고 보아야 한다. 블랙리스트의 작성 및 운용과정에 관여한 모든 공직자들을 상대로 블랙리스트에 등재된 문화예술인들이 집단적으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한다. 차제에 국민의 이름으로 불법적인 권력농단을 더 이상 국가행위로 간주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사건에 연루된 공직자, 대통령에서 문체부의 말단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모든 재산을 책임재산으로 삼아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 필요하다. 모든 공직자에게 이렇게 끔찍한 범죄를 자행하려면 자신의 직위와 재산까지도 모두 걸어야 한다는 점을 학습시킬 최상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이재승 위원은 현재 건국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65 | 추천: 0
이재성/ 인권연대 운영위원 얼마 전 대학 같은 과 동기들과 차기 대선을 주제로 잠깐 이야기를 나눴다. 나를 포함 4명밖에 안 되니까 즉석 설문조사를 했다. 2명이 안희정 지지자였고, 다른 2명은 각각 박원순과 이재명을 지지한다고 했다. 유유상종일 것이란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대학 1학년 때 처음 만난 뒤 거의 28년 만에 다시 만난 친구들이었다. 나를 제외하면 학생운동을 했던 친구들도 아니었다. 특히 외국계 기업 임원인 한 친구는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유명 인사들과 교유관계가 꽤 두터운 데도 이재명을 지지한다고 해서 의외였다.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여권 주자 이름은 한명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왜 문재인 이름이 나오지 않은 걸까. 조중동이 벌써 대통령 된 것처럼 행세하지 말라고 견제구를 날리고 있는 유력 주자인데. 구중궁궐의 엽기적인 뉴스가 줄을 이을 때만 해도 문재인은 지지율 1위였다. 하지만 여론조사 그래프를 보면 최고조일 때조차 문재인 지지율이 20~25% 사이 박스권에 갇힌 형국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최근 반기문이 대선 출마를 사실상 선언하자마자 바로 뒤집혀 버릴 만큼 허약한 지지율이다. 나는 궁금해졌다. 노무현의 친구라는 프리미엄과 청와대 국정 경험, 학생운동과 인권 변호사라는 감동적인 경력, 군 미필자들이 득실거리는 정치권에서 특전사 출신이라는 비교우위와 믿음직한 외모라는 상품성까지 갖췄으며, 각종 미담의 주인공인 문재인의 인기는 왜 오르지 않는 걸까. 상당수 야당 지지자들이 문재인의 비밀을 알아버린 게 아닐까. 문재인에 대한 내 결론은 ‘훌륭한 사람인 것은 맞지만 훌륭한 정치인은 아니다’이다. 정치인 문재인이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지도자는 앞에서 이끄는 사람이다. 김대중은 지도자의 덕목을 국민보다 반 발 앞서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대중의 어법을 빌리면 노무현은 국민보다 한 발 앞서간 사람이다. 방향은 대체로 옳았지만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그런데 문재인은 국민보다 한 발 뒤에 서 있는 느낌이다. 늘 주저하며 눈치를 본다. 특유의 우유부단함이 이번 박근혜 퇴진 촛불 국면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반 발도 아니고 한 발 뒤처져 있는 사람은 지도자가 아니다. 앞장서서 퇴진과 탄핵을 외친 이재명의 인기가 치솟은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대중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주는 정치인에게 열광한다. 이런 말을 해도 될까 눈치 보는 정치인은 인기가 없다. 안철수의 인기가 떨어진 이유도 이와 같다. 문재인이 종종 과격해질 때도 있다. 이럴 땐 그가 완급조절이 잘 안되는, 말을 정제해서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정치는 말로 하는 것인데, 말을 잘 못하니 어려운 일이 많다. (가끔 답답했지만) 무릎을 치게 하는 혜안을 보여줬던 김대중이나 (사고도 많이 쳤지만) 속 시원하게 상식을 설파했던 노무현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정권 교체를 바라는 사람들이 지금 머리가 아픈 것은 바로 문재인이 여전히 야권 지지율 1위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 1위의 확장성이 떨어진다는 사실이 이미 확인됐다. 박근혜의 살신성인으로 어느 때보다도 야권의 집권 가능성이 높아졌는데도 그 가능성을 낙관하기 어려운 이유다. 결선 투표를 도입한다고 해결될 성질은 아닌 것 같다. 사진 출처 - 한겨레 야권 인사들은 반기문을 ‘기름장어’라고 놀리지만 나는 그가 간단치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때로 위대한 능력으로 스스로를 감동하게 하지만, 또한 그에 못지않게 속물근성이 강하다. 위인전까지 나와 있는 유명인사의 선거 경쟁력은 만만히 볼 게 아니다. 12월27일 창당을 선언한 개혁보수신당이 반기문을 영입해서 유승민과 경선을 치를 경우 그 승자의 본선 경쟁력은 막강할 것이다. 콘텐츠가 부족한 반기문으로서는 일찍 열린 대선판이 반가울 것이다. 검증 기간을 최소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안철수가 이쪽으로 붙을지 모르겠지만 만약 그렇다면 그 승자는 더욱 강해질 것이다. 이에 못지않게 심각한 문제는 설사 문재인이 대통령이 된다고 해도 잘 할 것 같지 않다는 점이다. 최근 그의 발언을 보면 박근혜의 안티 테제로서 자신을 세우려고 할 뿐, 이 나라를 어떻게 바꿔나갈지에 대한 방향은 제시하지 않는다. 특히 재벌 개혁이나 서민 경제 등 국민들의 관심이 많은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메시지가 잘 들리지 않는다. 2012년보다 조금이라도 진전된 내용이 없는 것 같다. 좋게 보려고 해도 노무현 정부 때 이미 확인됐듯이 친재벌적 성향은 변하지 않을 것이란 걱정이 앞선다. 박근혜 옆에 문고리 삼인방이 있었다면 문재인 옆엔 삼철이가 있다는 말이 나온다. 이른바 친문세력의 핵심인사들을 일컫는 말이다. 문재인이 벌써 인의 장막에 둘러싸여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이재명이 반문연대를 제안했다가 문재인 지지자들로부터 뭇매를 맞고 있는 모양이다. 안희정조차 이재명을 비판했다. 나는 안희정의 태도에 동의하지 않는다. 아무리 내부 경쟁이라고 해도 다른 점을 드러내고 토론하는 게 정치다. 그 과정에서 여론의 지지가 확인되는 것이다. 같은 편이라고 비판하지 말자는 것은 새누리당식 전체주의다. 새누리당이 쪼개지면서 정치적 역동성이 여당에서 발생하고 있다는 점에 유념해야 한다. 선거는 역동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쪽이 우세하다. 여론이 관심을 가지고 따라가기 때문이다. 부자 몸조심하다가 막판에 되치기당한 힐러리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다들 아는 얘기지만 노무현이 세상을 뜨기 전까지 문재인은 정치에 별 뜻이 없었다. 문재인 스스로도 자신이 정치에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난 대선에 나서는 과정도 그렇다. 권력의지를 갖고 적극적으로 대선에 뛰어들었다기보다는 노무현 지지 세력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떠밀려 나왔다. 그런데 대선에서 떨어지고 나서부터 사람이 좀 바뀌기 시작한 것 같다. 권력의지가 강해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무엇을 위한 권력의지인지 잘 모르겠다. 누가 봐도 지금은 야권이 유리한 최고의 상황이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헌법재판소가 탄핵 심판을 기각하지 않는 한) 앞으로 야권은 내려갈 일만 남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문재인 지지율 역시 내려갈 일만 남았다고 봐야 한다. 이럴 때 ‘훌륭한 사람’ 문재인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고 정권교체를 위한 불쏘시개가 되라고 하면 무리한 주장일까. 지난 총선 당시 밝힌 정계 은퇴까지는 아니더라도 대승적인 관점에서 2선 후퇴를 함으로써 가능성을 품고 있는 다른 후보들에게 양보하라는 것이다. 우리 국민도 성공한 대통령을 한번 가져봐야 하는 것 아닌가.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79 | 추천: 0
김영미/ 인권연대 운영위원 학교를 다니는 것이 곧 배우는 것일까? 최근에 “고전이 건네는 말 5 ”을 읽고 나서 학교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해보았다. 이반 일리치(오스트리아 철학자, 신학자)는 “학교는 사람들이 학교의 교육과정을 따르는 것만으로 뭔가를 배운 것처럼 여기게 한다”고 말했다. 그가 보기에 학교는 학교의 교육적 형식에 불과한 것을 마치 배움 그 자체인 것처럼 만들었다고 했다. 무엇을 배웠는지, 배운 것을 어떻게 활용할 생각인지,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가 중요하지 않고 학교에 다닌다는 것, 학교의 교육과정을 잘 따르는 것, 학교가 주는 졸업장을 얻는 것이 중요한 현상이 되었다. 중학교 3학년 학생들의 학기말 시험과 학생생활기록까지 끝난 11월~2월의 교실 풍경은 3월 학기 초의 분위기와는 정반대다. 학교생활에 집중하고 질서 있었던 모습에서 고등학교로의 진학이 결정된 후에는 학생들이 다른 모습을 보인다. 학생 중에 일부는 어떤 이유로든 학교를 나오지 않고 학원과 집을 오가며 고등학교에서 배울 선행 학습을 하고, 학교를 나와도 수업시간에 잠을 자거나, 수업을 하려는 일부 학생과 교사를 방해하기도 하고, 무질서한 모습으로 교사의 훈육에 반항하거나 무시하는 모습으로 일관되게 행동한다. 졸업장을 갖게 되는 학생들에게 학교는 더 이상 배움의 공간이 아닌 것이다. 이렇게 돌변한 학생들에게 준비되지 못한 교사들은 심한 자괴감을 느껴 학생들을 방조하거나 심하면 교직을 떠나기도 한다. 학교는 배움의 기회를 모두에게 주었지만, 많은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고 그것에 대한 대안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언제까지 우리는 이러한 학교를 지켜보고 있어야만 할까? 이반 일리치의 “배운다는 것”은 수업이라는 형식에 맞추는 일도, 시험점수나 학력을 따내는 일도 아니었다. 배운다는 것은 “역량”을 키우는 것으로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는 힘을 길러 주는 것, 알고 익혀서 자신의 쓰임에 따라 배운 바를 활용하고 삶의 문제를 헤쳐 나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라고 했다. 교육은 그런 자세를 길러주는 것이고 이러한 배움이 없는 학교는 희망이 없다고 했다. 사진 출처 - 민중의소리 학교만이 유일한 배움의 공간이라고 생각하지 말자. 가정, 공동체, 지역사회 모두가 배움의 공간이 되어보는 것은 어떨까? 어떤 난관에 부딪쳤을 때 자신의 힘으로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도록 자율적인 사람으로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며 조화롭게 살 수 있게 배우는 공간들이 되었으면 한다. - 언제나 질문하는 사람이 되길, 수유너머 지음 - 김영미 위원은 현재 중학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64 | 추천: 0
오인영/ 인권연대 운영위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인간의 역사에서 영원히 변치 않는 게 있을까?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단단했던 진리도 시대가 변하면 물렁해지거나 부서진다. 영원하리란 사랑도 세월이 가면 식거나 사라진다. 권력의 철옹성도 쇠하거나 허물어진다. 열흘 붉은 꽃이 없듯이 아무리 권세가 높다한들 오래가지 못한다. 역사적 시각에서 보면 거의 모든 진리, 가치, 권력은 절대적이지 않다. 역사적인 것들은 시간의 침식을 거치면서 상대화된다. 기실, 역사 자체가 고정불변의 정태(靜態)가 아니라 가변적인 동태(動態)이지 않은가. 인간의 의지적 노력이 없다면 역사의 변화도 없다 항상(恒常)과 영원(永遠)이 없으니 역사 세계의 만물(萬物)은 가만 놔두면 알아서 유전(流轉)할까? 모든 것이 무상(無常)하다고 그냥 그대로 내버려둬도 역사는 저절로 변할까? 그럴 리는 만무하다. 자연의 변화는 인간의 소망이나 기대와 무관하게 자연스럽게 일어나지만 역사의 변화는 저절로 일어나지 않는다. 생각 위에 생각을 쌓는 데 일가견이 있던 철학자 헤겔조차 인간의 정열이 없다면 세계사는 이성의 자기실현과정이 될 수 없다고 보았다. 역사의 변화는 자연적 필연성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적 노력에 의해 생겨난다. 노예제만 봐도 그렇다. 노예제도가 원래 나쁘다는 선험적 윤리 따위는 없었다. 노예들이 예속과 굴종을 거부하면서부터 노예제는 타파되어 마땅한 악이 되었다. 역사적 변화는 알아채기 쉽지 않다. 인간은 지구에 살지만 지구의 모든 일을 다 볼 수 있는 지구만한 눈을 갖고 있진 못하다. 장구한 인간의 역사에서 일어난 숱한 변화를 일이관지(一以貫之)할만한 역사의 눈을 갖추기도 어렵다.(그 어렵고 힘든 일을 해냈다고 자부한 사람들도 없진 않았지만 ‘자부’를 ‘자뻑’=자만으로 바꿔 읽어야 할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크고 근본적인 역사적 변화일수록 장기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그것을 알아채기란 쉽지 않다. 인간의 유한성과 인식의 불완전성, 역사적 변화의 심대함 말고도 역사적 변화를 감지하기 어려운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역사적 변화를 바라지 않는 세력들이 농간(弄奸)을 부리기 때문이다. 변화를 바라지 않는 세력들의 농간 작가 최인훈의 역사적 통찰에 기대어 말하자면, 옳은 방향으로의 변화라고 하더라도 역사가 저절로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거나 그런 변화를 이루려는 사람들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이것은 그런 사람들이 소수이기 때문만도 아니다. 옳은 변화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다수라고 하더라도, 그 정의로운 다수가 반드시 이기리라는 보장 같은 것은 역사에 없다. 만일 거짓이라는 것이 거짓이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효력이 없는 것이라면, 이 세상에 불의와 혼란은 아예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거짓임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거짓은 쉬 사라지지 않는다. 해방 이후 친일파 청산이 옳지 않았거나 그런 민중의 요구가 약했기 때문에 친일파가 득세했는가, 87년 6월 항쟁에서 내건 군부독재의 종식이 정의롭지 않아서 노태우정권이 들어섰던가, 과연 ‘세월호’ 진상을 규명하려는 요구가 부당하고 약했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진실이 드러나지 않은 것인가. 지금보다 더 나은 사회 · 인간다운 세상을 지향하는 변화가 일어나면, 자기 정체가 탄로 나서 손해를 보는 자들은 역사적 변화를 방해하려 했다. 거짓이 밝혀져서 문제가 풀리면 밑지는 자들은 한사코 거짓의 힘으로 현상유지=사실상 역사적 반동(historical reaction)을 획책해 왔다. 그들은 변화를 ‘무질서’ 혹은 ‘혼란’으로 매도해 왔다. 통제할 수 없는 변화로 인해서 자신이 누려온 ‘신성불가침’의 특권이 흔들릴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해 <백날 (탄핵을) 외쳐봐라, 그래도 변하는 것은 없다>, <촛불을 들어봐야 너만 손해고, 너 인생만 고달파진다>, <지금부터 진실과 민주를 운운하는 자들은 혼란을 부추기는 불순세력이다>라는 수사적 무기를 동원한다. (앨버트 허시먼(A. O. Hirshman)은 『보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이근영 옮김)에서 이와 같은 수사를, 프랑스혁명 이후 서양의 기득권 세력이 구사한 대표적인 세 개의 “반동명제”라고 손꼽은 다음에 각기 <무용(無用)명제>, <역효과명제>, <위험명제>로 명명한 바 있다.) 남과 다른 특권을 누리려는 기득권 세력은 기본적으로 불평등의 옹호자들이다. 그들은 평등에 기초한 민주주의를 좋아하지 않고, 수용할 생각도 없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말이 법전 바깥의 현실로 나오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언필칭 오피니언 리더니 퍼스트 레이디였다느니 경제성장의 주역이니 해대며 현실세계에는 <지도하는 주체인 나-지도 받아야 할 남>이라는 차별이 있는 게 정상이라고 농간을 부린다. 자기들처럼 믿는 자들은 정상이고 순수이지만, 믿지 않고 현실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불순하고 위험하니 ‘발본색원’하여 격리 · 배제 · 처벌하려 든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실감(實感)은 수사(修辭)보다 힘이 세다. 그러나 정작 위험하고 착란에 빠진 무리는 자신들이라는 것을 모른다. 개돼지 취급한 대다수 국민들이 ‘니들이야말로 치료제라고 우기는 병균’임을 이미 감지했다는 걸 알지 못한다. 지들이 내세운 대통령이라는 자가 국민의 뜻을 대의할 능력은 고사하고 애당초 그럴 의사와 자격조차 없다는 사실을 간파했다는 것을 경시하거나 호도하려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남녀노소는, 이제 기득권 세력이 인민주권을 불완전하게 대의하는 게 아니라 대의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지경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촛불집회를 통해서,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배우지 못했거나 않았더라도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봤다. 민주공화국의 참된 뜻과 인민주권의 힘을 실감했다. 물론, 개인적 삶에서건 역사의 변화에서건 일다운 일이라면 그게 저절로 쉽게 될 리 없다. 응당 의지적 노력이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그리했더니, ‘따로 또 같이’ 촛불 들기를 마다하지 않았더니, 역사가 조금 변하더라는 것을 실감했다는 사실이다. 이런 경이로운 실감(實感)이야말로 저들의 경악스런 수사(修辭)를 물리칠 최대의 무기다. 그러니 허투루 무기를 내려놓아서는 안 될 줄 안다. 아직 ‘실감의 시절’이 ‘실제의 시대’가 되기 않았으므로! 희망과 절망은 고작 한 글자 차이다. 오인영 위원은 현재 고려대 역사연구소에 재직 중입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68 | 추천: 0
강국진/ 인권연대 운영위원 비극은 왜 되풀이되는가. 비극을 되돌아보지 않기 때문이다. 비극을 잊어버리면 문밖에 또 다른 비극이 우리를 기다린다. 비극을 기억에서 가장 지워버리고 싶어 하는 이들은 비극에 가장 책임이 있는 동시에 망각을 통해 가장 이득을 얻는 사람들일 것이다. 우리는 세월호라는 ‘단군 이래 최대 비극’을 통해 뼈저리게 그걸 느꼈다. 이제는 대통령이 맞는지조차 알쏭달쏭한, 이름을 입에 올리기도 끔찍한 박 모 씨 얘긴 더 하고 싶지도 않다. 다만 박 모 씨를 쫓아내고 나서 책임감있는 국가를 같이 만들기 위해 무척 중요한 문제를 고민해보고자 한다. 이 글은 한마디로 ‘국민안전처를 어찌할꼬’에 관한 고민의 산물이다. 우리는 분명히 기억한다. 2년 전 국민안전처가 왜 생겼는가? 세월호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국민안전처에게 세월호란 이름을 입에 담기만 해도 큰 일이 날 것 같은, 영화 ‘해리포터’ 시리즈에 등장하는 ‘볼드모트’일 뿐이다. 그게 아니라면 국민안전처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의 활빈당에 뿌리를 둔 조직인건가. 홍길동은 명백히 아버지를 인지했다. 하지만 국민안전처는 아버지를 숨기느라 바쁘다. 국민안전처는 2014년 11월19일 출범했다. 국민안전처는 출범 이래 지금까지 세월호 참사에 대한 조사와 분석, 연구 과제라도 한 번 한 적이 있었을까? 국민안전처 장관 박인용이 지난달 출범 2주년을 맞아 소속 공무원들에게 보낸 공개 편지 어디에도 세월호는 없었다. 사진 출처 - 서울신문 지난달 23일 한국행정연구원이 주최하는 '재난안전정책연구' 공동학술대회에서는 국민안전처 차관 이성호가 기조강연을 했다. 그는 그동안 국민안전처가 이룬 성과를 자세히 설명했다. 안전처가 문을 열게 된 배경도 설명했다. 어디에도 세월호 얘긴 없었다. 심지어 국민안전처 출범 배경을 설명할 때도 세월호는 언급도 하지 않았다. 뿌리를 숨기느라 바쁘니 자신들이 뭘 해야 하는지도 혼란스럽기만 하다. 이성호는 기조강연에서 국민안전처가 갖가지 성과를 자랑했는데 그 중 하나가 도로복구 실적이었다. 그걸 왜 국민안전처가 내세우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도로복구는 국토교통부 혹은 지방자치단체가 할 일인데 말이다. 예산 낭비 논란을 빚은 안전신문고 애플리케이션은 또 어떤가. 국민안전처는 예방이나 안전교육을 부쩍 강조하는 듯 한데 그것 역시 국민안전처 업무라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안전이란 이름 붙은 게 모두 국민안전처 소관은 아니다. 식품안전을 다루는 1차 책임은 식품의약품안전처에 있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사고를 당하지 않게 하는 1차 책임은 교육부에 있다. 군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안전사고 주무부처는 국방부다. 그럼 국민안전처는 뭘 해야 할까. 재난대응이다. 자연재난이나 사회재난이 일단 발생하면 안전처가 총괄 지휘감독을 해야 한다. 지금 국민안전처에 필요한 건 안전캠페인이나 예방교육이 아니라 좀 더 실질적으로 현장 인력들이 자율성과 책임성을 갖고 재난대응을 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하고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다. 국민안전처는 장관과 차관이 모두 직업군인 출신이어서 그런지 상당히 군대식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는 얘길 자주 듣는다. 유감스럽게도, 군대라는 곳이 얼마나 현장인력에게 자율성과 책임성을 부여하고, 안전문제에 얼마나 예민하게 반응하는 곳인지 군대 갔다 온 나는 아는게 없으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재론하지 않겠다. 다만 한 가지는 꼭 지적하고 싶다. 박인용은 취임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날마다 아침에 상황점검회의를 한다. 그게 재난대응에 얼마나 효과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주말도 없이 회의 참석하느라 국민안전처 본부 공무원들이 겪는 스트레스가 상당하다. 지난해에는 회의 준비 때문에 국민안전처 주변에 방까지 구했던 실장 한 명이 사망하는 사건도 있었다. 국민안전처는 매우 독특한 조직이다. 외국에서 비슷한 사례를 찾기도 어렵다. 정권 바뀔 때마다 정부조직을 이리 붙였다 저리 붙였다 하는 건 아니라고 본다. 그렇다 하더라도 명확한 조직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를 위해 가장 적합한 조직구조를 만들고 적절한 예산과 인력을 배치하는 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과연 국민안전처가 ‘다시는 세월호같은 비극이 일어나면 안 된다’는 출생의 비밀을 언제까지 숨기고만 있을지 국민들이 지켜보고 있다. 강국진 위원은 현재 서울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17-07-20 | hrights | 조회: 50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