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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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자국통신은’인권연대 운영위원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발자국통신’에는 강국진(서울신문 기자), 김희교(광운대학교 동북아문화산업학부 교수), 염운옥(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교수), 오항녕(전주대 교수),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 임아연(당진시대 기자), 장경욱(변호사), 정범구(전 주독일 대사), 최낙영(도서출판 밭 주간)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오항녕 / 인권연대운영위원   1. 자료로 보나 행태로 보나 검찰은 욕을 먹어도 싸다, 확실히 뜯어고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선지 ‘검찰이 수사는 안 하고 정치를 한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허나 이 말은 부정확하다. 정치는 사회나 국가를 위한 권한, 이익, 가치의 조정을 말한다. 그래서 어떤 조직이나 사회든 정치가 있기 마련이다. 검찰도 정치를 할 줄 알아야 한다. 문제는 검찰이 정치를 못하는 그 무능함에 있다. 수사든 정치든, 이미 수준이 타락 단계라는 게 문제이다. 이재명 대표는 ‘검찰이 수사는 안 하고 정치를 한다’고 비판했다. (연합뉴스 사진)   1. 장면① 독일 튀빙엔 버스가 정류장에 멈췄다. 기사가 운전석에서 내린다. 무슨 일이지? 사고 났나? 고개를 빼고 살피는 건 나 하나뿐이다. 다들 데면데면하다. 기사는 출입구로 와서 깔판을 내린다. 곧 휠체어를 탄 승객이 깔판을 통해 버스에 오른다. 튀빙엔의 모든 버스는 저상 버스인 데다 차체가 승강장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어 있어 휠체어나 유모차를 이용하는 승객이 타고 내리는 데 어려움이 적다. 그들은 출입문 아래 부착된 깔판을 이용할 수 있고 보통 버스 안의 다른 승객이 이를 돕는다. 20년 전쯤 도쿄 지하철을 이용할 때 보았던 시스템과도 비슷했다. 아무튼 부러웠다. 튀빙엔 버스는 저 깔판을 펴면 휄체어 승객이 쉽게 승차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눈 온 뒤 찍은 사진이라 좀 더럽다.   장면② 뮌헨의 고미술관(Alte Pinakothek), 한 아이가 뒤뚱거리며 걸어온다. 기저귀를 떼지 않은 듯 보인다. 몇 걸음 걷지 못하고 털썩 주저앉는다. 아예 바닥에 뒹군다. 아이 뒤에는 유모차를 미는 엄마가 따른다. 그림을 보다 말고 아이 모습에 눈길을 빼앗겼다. 이래서 미술관에 젊은 부부와 아이들이 그리 쉽게 눈에 띄었구나. 한국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유모차, 휠체어를 제공하는 일이 떠올랐다. 그래서 흐뭇했다. 유아를 데리고 관람하는 엄마   1. 재작년쯤인가 ‘눈 떠보니 선진국’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이미 세계 10위권으로 성장한 경제와 군사력, 거기에 촛불만으로 부패-불법 정권을 몰아낸 시민의 힘은 자부심을 가질 만했다. ‘수천 년 침략을 당했던’으로 시작하는 약소국 콤플렉스를 사실로 보든 정서로 헤아리든 별로 동의하지 않던 나로서는 반가운 현상이었다. 자신의 사회에 자부심을 가진다는 건 건강한 징조라는 게 내 진단이었다. 동시에 아직은 아니다, 라고 판단하는 근거는 선진국-후진국이라는 말이 서구중심의 자본주의적 프레임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우리에게 나타나는 몇 가지 현상이 결코 인간사회가 이루어야 할 ‘살만한 곳’이란 뜻의 선진국과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1. 인권연대의 장발장 은행이 아직도 운영되고 있는 것이 우리 사회가 아직 멀었다는 증거의 하나이다. 벌금이 없어 징역을 살아야 하는 ‘현대판 장발장’들에게 대출을 시작한지 8년, 대출심사도 100차를 넘었다. 박근혜-문재인-윤석열 정권을 거치면서도 엄청난 예산을 가진 정부가 하지 못하고, 아직도 시민단체인 인권연대가 운영하고 있다. 내가 이 나라 정부는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장발장 은행은 또 다른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작년 대법관 후보로 오석준이 올랐다. 오석준은 ‘800원을 횡령한’ 운수노동자에게 해고 판결을 내렸던 자이다. 당시 버스기사는 17년간 그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오석준은 지금 대법관이다. 국회 인사청문회를 통과했다는 말이다. 내가 이 나라 국회는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800원 횡령을 이유로 버스기사에게 해고 판결을 내렸던 오석준의 청문회 선서 장면. 요즘 유행한다는 송혜교 씨 필로 한 마디 해주련다. ‘훌륭하다, 석준아!’ (연합뉴스 사진)   1. 며칠 전, 서울시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시위를 이유로 삼각지역을 무정차 통과한다는 문자를 발송했다고 한다. 전장연이 ‘대중교통이나 도로 등의 공공시설을 타격하거나 무단으로 점거하는 불법을 일삼는다는 이유였다. 전장연을 시민의 불편을 야기하는 집단으로 돌리는 서울시의 야비함이 행정과 법집행 속에 숨어있었다. 불법으로 무단점거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온통 계단 천지인 서울의 대중교통망, 휠체어나 유모차 하나 넣을 공간이 없거나 부족한 버스와 기차, 전철을 개선해달라는 요청이 그렇게 용서받지 못할 일일까? 서울시장 오세훈의 말처럼 이런 요청이 무관용의 대상인가? 이곳이 ‘우리의 서울’인 것이 과연 자랑스러운가? 나는 교통, 나아가 사회적 약자인 장애인들이 언제나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약자들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우리 사회의 안녕과 정의가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는 말을 하는 중이다. 더구나 이 시대에 누구나 언제든 약자의 지위에 놓일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미 대다수 우리는 이미 약자이고 소수자이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시위에 대한 오세훈 서울시장의 잔인한 대처 이후 시민들의 전장연 후원금이 늘었다고 한다. (한겨레신문 사진)   1. 말씀①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구약성경 시편 146:9) 말씀② 늙었는데 처가 없거나 남편이 없거나 자식이 없는 사람, 어려서 부모가 없는 어린이 등 환과독고(鰥寡獨孤) 네 부류는 세상에서 곤궁하여 하소연할 데도 없는 사람이므로, 문왕이 복지 정책을 펼 때는 반드시 이 네 부류를 우선 대상으로 삼았다.(맹자 양혜왕 하편)   1. 《성경》과 《맹자》는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했고, 저 아래로 내려가는 걸 경계했다. 타락이 아니라 정치라고 부를 수 있는 하한선이다. 현대판 장발장을 외면하고, 800원에 횡령죄로 해고하고, 장애인의 호소를 형사처벌로 대응하는 권력을 가진 자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정치 또는 정책, 행정이라고 생각하는가 보다. 그러나 그런 행동을 두고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차마 못할 짓’이라고 불렀다. 이는 권력은 있으되 정치를 못하는 것, 즉 정치적 무능을 자백하는 일이다. 누군가에게 차마 못할 짓을 한다는 건 개인이든, 정당이든, 또 어떤 주체든 이미 타락했다는 뜻이다. 주의할지어다, 편들다간 같이 타락하리니. 그리하여 기억할지어다, 지옥에는 타락한 자들의 방 만이 아니라 방관한 자들의 자리도 넉넉히 준비되어 있나니.     오항녕 위원은 현재 전주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23-02-07 | hrights | 조회: 410 | 추천: 4
이찬수 / 인권연대 운영위원   일제강점기의 후유증은 세기가 바뀌어도 지속된다. 해방 이후 물러난 일본의 자리에 미국이 들어왔다. 한국인 상당수에게 미국은 일본을 몰아낸 해방자였다. 동시에 한반도의 남쪽에 군정을 시작한 또다른 점령자이기도 했다. 식민지 시대 엘리트 친일파들에게는 생존의 열쇠를 진 권력이었다. 일본을 대체한 미국이 친일파 청산에 나설까 두려워하며 이들은 친미적 자세를 취했다.   해방 후 친일파 청산은 대세였지만 실제 청산까지는 하지 못했다. 1947년 ‘남조선과도입법회의’에서 격론과 진통 끝에 ‘부일협력자·민족반역자·전범·간상배에 관한 특별법률조례’를 제정했다. 그러나 미군정장관이 조례의 인준을 거부하면서 미군정기에서 친일파 청산은 사실상 무산되고 말았다. 남조선과도입법회의 자체에도 친일파들이 상당수 포진해있었지만, 패전국 일본을 친미국가로 만들어 공산세력의 남하를 막고자 했던 미국의 입장에서는 한국의 친일파를 단죄하면서 일본의 친미화에 힘을 뺄 이유가 없었다.   그러자 식민지 엘리트들은 친미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기 시작했다. 미국이 지닌 힘과 관용의 그림자에 숨어 자신들의 흑역사를 은폐하고, 미국이 수호하는 가치, 즉 반공주의와 민주주의를 옹호하며, 일제강점기 때의 기득권을 유지했다.(홍승표, 『태극기와 한국교회』, 331-332)   미국식 반공주의는 식민지 엘리트들이 과거청산의 흐름으로부터 자신들을 보존하기 위한 생존수단이었다. 친일파는 친미주의자로 변신했고, 반공주의자가 되었다. 친미적 이승만 정부 시기를 지나면서 ‘반공-국가주의’가 정치의 주요 지향이 되었고, ‘반공’은 ‘국시’가 되었다. 반공주의에 동의하지 않는 이는 처벌하고 국민의 자격을 박탈할 수 있는 정도까지 강화되었다. 미군정 시기 반공주의가 식민지 엘리트들의 생존수단이었다면,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 정부를 지나면서 반공주의는 상당수 국민의 생존수단이 되었다.   한국전쟁 이후엔 냉전적 세계관이 내면화되었다. 많은 한국인이 미국 중심의 자유 진영과 자신을 운명공동체처럼 인식했다. 미국이라는 친구와 소련·중국·북한이라는 적을 이원론적으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를 선과 악의 도식으로 구분했다. 공산세력과의 투쟁을 성전(聖戰)처럼 여겼고, 여기에 민족주의가 개입하면서 반공주의는 더 내면화되었다. 내면화할 수밖에 없도록 정부는 강력하게 개입하고 내내 추동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 미국은 ‘북조선 괴뢰정권’의 적화야욕으로부터 한국을 지켜주는 구세주이자, 반공, 민주, 발전 등의 ‘교리’를 통해 한국을 움직이는 동력으로 작용했다.(강인철, 『경합하는 시민종교들』, 제2장)   반공주의는 미국 중심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자부심의 표현이기도 했다. ‘공산주의=억압’, ‘민주주의=자유’라는 도식이 일상화되면서 ‘자유대한민국’이라는 말이 마치 국호처럼 사용되었고, ‘자유민주주의’는 ‘반공’이나 ‘반사회주의’를 통해서만 실현되는 것처럼 인식되었다. 자유대한민국이라는 말에는 반공과 친미가 전제되어 있었다. 반공주의와 친미주의가 동전의 양면 관계가 되었고, 일제강점기의 엘리트 친일세력들은 동전의 양면 모두 안으로 녹아 들어갔다.   이런 흐름에 익숙한 이들이 보수의 주류를 형성한다. 한국의 보수는 특히 정치적 차원에서 일본과 미국의 현실적 힘과 타협하며 친미-친일-반공의 트라이앵글을 형성해왔다. 보수 정부일수록 ‘친일적 친미’를 기반으로 ‘반공’을 내세워왔다. 해방과 전쟁 이후 수십 년이 넘도록 농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런 구도는 계속되어왔다. 2023년의 대통령도 전형적인 반공-친미-친일 도식 안에 갇혀 있다. 북한, 중국, 러시아 순으로 멀리 하고, 미국, 일본 순으로 가까이 한다. ‘친일적 친미’ 혹은 ‘친미적 친일’의 자세로 반공/반사회주의적 태도를 견지한다.   ‘(북한과의) 9.19 군사합의 효력 정지 검토’, ‘(북한을) 100배, 1000배로 때리기’ 같은 말, ‘미국의 핵우산’, ‘자체 핵보유’ 같은 발언을 예사로 하는 것이 그 사례이다.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배상을 국내 기업이 대신 하게 한다든지, ‘일본의 군비증액은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는 식의 발언으로 일본 보수 정치의 치밀한 전략을 긍정하는 모양새도 그렇다. ‘UAE의 적/위협국가는 이란, 우리의 주적은 북한’이라는 UAE에서의 발언은 우리의 외교가 아닌 미국의 외교를 대신 해주러 간 것이 아닐까 싶을 만큼 치명적이다. 이들은 모두 친미, 친일, 반공이라는 보수 주류의 흐름이 거의 체화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출처 - 중앙뉴스 근본 문제는 이런 트라이앵글이 아주 낡았다는 점이다. 세계는 이런 구도 안에 있지 않다. ‘반공’ 같은 반대와 분열의 프레임에 갇혀서는 지구마을 시대를 감당하지 못한다. 생태위기에 내몰린 인류세 시대에는 도리어 자멸로 이끄는 위험한 태도다. 한·미·일 대 북·중·러 간 분열적 대립을 넘어서는 상위의 질서를 탐색하고 구체화해 나가야 한다. 한국의 국가영향력이 세계 6위란다. 지구 전체를 향하는 안목을 갖추고 인류가 박수를 보낼 만한 정책을 보여줘야 하지 않겠는가. 반대, 보복, 분열을 정당화하는 프레임 정치는 더 이상 안된다. 상대방의 마음과 다양한 입장을 이해할 줄 아는 인간적인 공부가 필요하다. 그것이 ‘크게[大] 거느리고[統] 다스린다[領]’는 대통령의 무한 책임과 중차대한 의무다. 제발 불가능한 주문이 아니길 빈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레페스포럼 대표로 재직 중입니다.  
2023-01-17 | hrights | 조회: 496 | 추천: 11
오인영 / 인권연대 운영위원   2023년 새해가 밝았다. 그러나 청명한 자연의 하늘과 달리, 우리 사회의 하늘은 어둡게만 보인다. 윤석열 정권에 의해 정치 분야만이 아니라 노동, 인권, 복지, 외교, 문화 등 거의 사회 모든 분야에서 역사적 퇴행이 일어나고 있다. 시대 상황은 위중하기만 한데 그것을 극복할 길을 잘 보이지 않는 듯하다. 역사의 퇴행이 빚어내는 생명 위험과 생활 위기를 돌파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궁리하다가 지난 성탄절에 돌아가신 조세희 선생이 2009년 1월 21일 용산참사 현장에서 하신 발언이 떠올랐다. 13년 전의 말씀이지만 각성과 연대를 촉구하는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할 뿐만 아니라 ‘1029참사’를 떠올리면 더욱 절절히 와닿기에, (추모의 마음까지를 담아) 조세희 선생의 발언 요지를 여기에 소개한다. 출처 - 경향신문 저는 조세희라고 합니다. 저를 잘 모르실 분들이 많을 텐데 저는 본래 나약하기 짝이 없는, 연약한 작가입니다. 30년 전에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라는 철거민, 슬픔, 아픔, 고통에 대해서 썼던 사람입니다. (중략)   내가 [난․쏘․공]을 처음 쓸 때는, 우리가 살아야 되는 미래가 아름답기를, 그리고 슬프지 않기를, 모든 것이 평화롭고, 평등이라는 말까지, 거기에다 민주주의라는 말까지, 그래서 고통이 어느 한쪽으로만 집중이 되는 걸 막을 생각으로,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글을 썼던 것입니다. (중략)   2005년 11월 15일까지는 제가 현장에 늘 카메라를 갖고 나왔습니다. 그것은 제가 한 사람으로 시민으로서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을 기록하는 데 자료를 얻을 겸, 그리고 현장에서 싸우는 분들에게 머릿수 하나를 첨가하는 마음으로 참여했습니다. 그것이 2005년 11월 15일 전용철 농민이 돌아가시는 현장에서 저도 상처를 입고, 아프고 카메라 다 망가지고, 그 이후에 병이 들었습니다. 그 뒤에 현장에 나오지 못했습니다. 현장에서 투쟁하는 분들에게 늘 미안했습니다.   지금 또 나온 이유는, 나와서는 안 될, 못될 정도의 건강인데도 나왔습니다. 그것을 왜 그러냐 하면, 우리가 사는 세상, 지금 2001년 새 세기가 박정희 때부터 시작된 그 군부 치하에서 낙원으로 설정이 돼 있던 땅입니다. 제가 늙어서 도착한 곳이 낙원이어야 되는데, 제가 듣는 이야기는 이 세게, 천몇백 인종, 이백여 나라, 그 많은 국가 중에서 제일 미개하고 제일 흉하고 제일 폭력적인 그 힘에 의해서 이 세상에서 제일 귀중한 생명 여섯이 희생을 당했다는 그 앞에서, 어떻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잠 못 자고 아픈 몸으로 지금 나온 이유는 어떻게 하면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까 하는 고민 끝에 여러분을 뵙고 한 말씀만 드리려고 이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중략)   내가 [난․쏘․공]을 처음 쓸 때, 우리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한 아이가 밤에 잠을 자지 못하고 배고파 운다면, 그것을 놓아두고 잠자는 우리가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고, 그것이 곧 폭력이라고 썼습니다. 그 말을 지금에 적용해보면, 우리 개개인이 얼마나 얼마나 큰 폭력을 경찰들 못지않게 쓰고 있습니까. 경찰의 우두머리가 쓰는 폭력과 우리가 쓰는 폭력은 얼마나 다릅니까.   우리는 무지에서 깨어나는 순간, 우리 미래의 길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제가 말씀드릴게요. 지금 주위가 어렵다는 뜻으로 쓰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민족은 지금 캄캄한 밀림 속에 들어가 갇혀 있습니다. 앞이 안 보입니다. 우리 개개인이 나침반을 지녀야 됩니다. 우리 머리 속에 나침반을 넣어 둡시다. 그리고 우리는 지도를 가져야죠. 우리 민족은 지금 지도도 없고, 나침반도 없고, 앞길도 없는 길을 자연적인 상태에 맡겨 둔 채 그냥 갑니다. 어떻게 해결되겠지. 하늘이 무너져도 살아날 구멍이 있다, 이런 생각 하죠. 하늘이 무너지면 다 죽습니다. 선진국 제1세계에, 유럽 어느 나라의 속담에 하늘이 무너지면 살길이 없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 속담은 뭐냐 하면 '하늘이 무너지면 파랑새를 잡자' 그랬습니다.   우리는 여섯 분의 이 귀중한 생명을 가슴에 새기고 그들의 절망, 그들의 가족, 그리고 그들의 동지인 여러분 개개인들이 정신을 바짝 차려서 우리의 무지에서 벗어나서, 밀림에서 벗어나서, 밀림 다음에 나타나는 넓은 개활지를 발견하도록 합시다. (중략)   밝음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가 새겨야 될 것은 그거죠. 우리가 밝음을 가져야지요. 저는 작은 촛불 하나를 가지고 왔습니다. 중국의 위대한 노신이라는 작가가 말했죠. “큰 횃불 나오기 전에 우리는 작은 촛불이라도 들러 나왔다”. 조세희가 그렇습니다. 여러분께 제가 이야기합니다.   우리 연대라는 말을 그냥 쉽게 합니다.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에게 다 연대의 힘, 우리 사랑의 힘, 평등의 힘, 자유의 힘, 이것을 우리가 소유하도록 합시다. 당신이, 여러분이 이성과 힘 두 가지를 다 가질 수 없다면 당신, 여러분은 이성을 갖고 적들에게는 힘을 주어버리자. 적들은 그 힘으로 전투에서 이길지는 몰라도, 전쟁에서는 이길 수가 없다. 적들은 힘으로 이성을 만들 수 없지만 우리는 이성으로 힘을 만들 수 있다. 이 말을 간단히 줄이면 우리가 전쟁에서는 이긴다는 것이죠. 이것을 적들에게 전달하도록 합시다."     끝으로 조세희 선생이 11년 전 인권연대 12주년 창립기념식에 참석해 야스퍼스를 인용하며 현실에 대해 모두가 공동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역설한 말씀과 천정환 교수의 경향신문 칼럼(「조세희 연말」 22년 12월 29일)에도 인용된 [난쏘공]의 한 대목을 옮겨 적으며 새해 새날, 새롭게(혹은 새삼) 밝음을 향한 의지를 추스른다.   출처 - 인권연대 회원   “인간과 인간들 사이에는 연대감이 존재하기 때문에 개개인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잘못과 불의, 저질러지는 범죄에 책임을 져야 한다. 악을 저지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으면 그에 대한 책임을 같이 나눠지게 된다.”   “이 시간부터 우리 가슴에 철 기둥 하나씩을 심어 넣자. 무슨 일이 있어도 쓰러지지 않을 철 기둥을 박아두고 어떤 어려움이 와도 버텨내면서 빛이 보이는 곳으로 달려가야 한다.”     오인영 위원은 현재 고려대 역사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23-01-03 | hrights | 조회: 485 | 추천: 15
이재성 / 인권연대 운영위원 하나의 유령이 대한민국을 떠돌고 있다. 법치라는 유령이. 법치가 법복귀족(noblesse de robe)의 인치(人治)로 전락한 지 오래인데도 한국사회는 법치라는 유령에 홀려, 출구 없는 반동의 터널을 헤매고 있다. 언론은 검찰의 포로가 되었고, 사법부는 검찰의 시녀가 되었다. 진보논객은 역진영논리라는 병에 걸려 제 발등 찍기에 바쁘고, 민주당과 정의당은 검찰이 놓은 덫에 빠져 정치 언어를 잃은 채 오리무중이다. 바야흐로 검찰의 전성시대다. 출처 - 경향신문 법치의 계급적 본질 화물연대 파업에 대한 탄압은 검사정권이 말하는 법치의 계급적 본질을 폭로한다. 검찰 집단이 한 번도 반노동자적이지 않은 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전혀 새로운 일은 아니지만, 파업에 강경대응 했다고 대통령 지지율이 올라가는 현상은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민주노총을 비롯한 진보진영이 여론전에서 패배하고 있는 현실을 가감없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헌법이나 ILO 규정까지 거론할 필요도 없다. 특정 회사에 소속된 정규직 노동자도 아니고 화물차를 소유한 차주로서 임의의 계약관계에 있는 (투쟁의 결과 간신히 4대보험 임의가입 대상이 된) 특수고용직 노동자에게 정부가 업무개시명령을 내린다는 건 그 자체로 모순이다. 고용할 땐 책임지기 싫어서 자영업자로 만들어놓고 뭉쳐서 싸우면 자영업자에게 강제노동 명령을 내린다? 이 자명한 억지에도 맞서지 못할 만큼 진보진영의 여론 형성 능력은 바닥에 떨어져 있다. 적반하장 정치가 가능한 이유 유례없이 낮은 지지율과 무책임한 불통에도 불구하고 윤석열이 우격다짐-적반하장 정치를 할 수 있는 이유는 단지 자기가 검찰 출신이어서 기소되지 않을 거라는 확신 때문만은 아니다. 나는 윤석열과 졸개들이 현대 민주사회의 핵심 작동 원리인 법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권한과 메커니즘을 장악했다고 믿기에 저렇게 당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믿음은 상당부분 타당하다. 대통령 후보로 등극하게 된 계기였던 조국 일가 수사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윤석열은 오불관언의 돌쇠형 리더십으로 일관해 왔다. 비판이 없지 않았으나 법 집행이라는 명분으로 쉽게 제압했다. 법은 자신의 모든 허물과 모순과 자가당착을 파묻어버릴 수 있을 정도로 강력했다. 법 해석투쟁 포기한 대가 법은 사회적 약속이지만 갈등과 타협의 산물이어서 해석과 적용에서도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법 집행의 적정성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 법치를 부인하는 것 같은 분위기가 생겨 버렸다. 법은 끊임없이 재해석해서 새로 만들어 나가야 하는 정의 실현의 일시적 도구에 불과한데도, 마치 불변의 진실인 것처럼 묻지도 따지지도 않게 되었다. 법 집행의 생명은 공정성인데, 살권수라는 거짓 명분에 속아 유검무죄 무검유죄의 편파성을 용인해 버렸다. 검찰 수사의 편파성과 자의성을 지적하면 민주당 편을 든다고 눈을 흘겼다. 진보진영이 법 해석투쟁에서 스스로 백기투항한 결과가 검사정권의 수립이요,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전방위적 반동의 물결이다. 검찰의 포로가 된 언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국민은 현명해서 여론의 3분의 2가량이 윤석열 정부의 일방통행에 비판적이다. 하지만 분노는 한줄기로 모이지 않는다. 언론의 역할 또는 책임 방기가 큰 몫을 차지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자신들이 진영주의 언론이라고 낙인 찍은 매체의 보도는 아예 무시한다. <더탐사>가 보도한 ‘윤석열-한동훈-김앤장 술자리 의혹’ 사건이 그런 경우다. 만약 이 보도가 사실이라면, 법의 이름으로 나라를 주무르는 법복귀족 카르텔의 실체를 드러내는 중대한 국기문란 사건이지만 팩트 취재조차 하지 않는 것 같다. 법무부 장관이 <더탐사> 기자들을 고발하고 잇달아 압수수색을 벌이고 있는데도 모른척한다. 수사기관을 완벽히 장악한 검찰 출신 장관이 법을 동원해 비판 보도에 재갈을 물리는데도 별일 아니라는 듯 무시하고 있다. 진영주의 매체는 언론자유를 누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설사 이들이 진영주의 매체라 해도 언론탄압에는 함께 맞서 싸워야 하는 것 아닌가. 주류언론이 단순히 정보가 부족해서 검찰 비판 보도에 소극적인 것만은 아니다. 유검무죄의 흔한 케이스 중 하나인 이른바 고발사주 사건을 보자. 검찰이 핵심 피의자인 김웅을 불기소 처분하기 위해 수사보고서를 허위작성했다는 검찰수사관의 폭로를 거의 지나가는 뉴스처럼 다루거나 무시했다. 공항에서 도망가려는 김학의 긴급체포를 위해 허위공문서를 작성했다고 검찰이 수사를 벌일 때는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따라가기 바빴던 언론은 대체 어느 나라 언론이었나? 역진영논리에 빠진 진보논객들 국민 일반의 상식과 주류언론 또는 지식인들 사이에 점점 더 괴리가 커지는 현상은 몇 년째 이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강준만은 최근 한 칼럼에서 윤석열과 이재명이 마주 보며 달리는 기차라며, 이걸 세우는 게 자신의 사명인 것처럼 말했다. 내가 보기에 이재명을 향해 달려가는 것은 윤석열과 검찰 부하들이고, 이재명은 피하고 싶은데 피할 데가 없어서 그냥 서 있는 것 같은데, 대체 무슨 근거로 마주 보며 달리는 기차라는 것인지, 칼럼을 봐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최근 검찰이 소환조사를 받으라고 이재명에게 통보한 성남FC 수사처럼 없는 죄도 만들어내려는 검찰의 필사적인 노력이 보이지 않는 것인지, 못 본 척하는 것인지 역시 알 수가 없다. 진영논리라는 비판이 두려운 나머지 역진영논리에 빠져 사리판단조차 흐려진 사례라고 생각한다. 어떤 진보논객은 이재명의 측근이 모두 구속되었으니 최소한 유감표명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몰아부친다. 그런데 구속된 본인들은 강력하게 부인하고 있다. 특히 정진상의 경우, 돈을 줬다는 전언의 전언을 근거로 기소와 영장 발부가 이뤄진 것이다. (부패방지법 위반 혐의는 사안 자체도 별 게 아니고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주장이 있다) 진보논객조차 검찰 기소와 영장 발부를 유죄 판결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이런 안이한 자세가 검찰 권력을 무소불위로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정녕 모르는 것일까. 정권이 바뀌어 검찰이 재수사에 착수하자 기존 진술을 뒤집어가며 검찰이 원하는 그림을 그려주는 피의자들만 혐의를 덜어주고 편의를 봐주는 게 보이지 않는 것일까. 증언 조작의 낌새를 느끼는 건 지나친 의심일까. 검찰의 시녀가 된 사법부 영장 발부 또한 유죄의 기준이 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여기서 세부 사항을 따질 여유는 없지만, 서해 피격 사건과 관련하여 서훈 전 국정원장의 영장이 발부된 것이 대표적이다. 문재인 정부 당시 양승태 대법원장 구속과 함께 사법부의 방대한 자료와 정보가 검찰에 넘어간 이후 사법부의 보수화 경향이 눈에 띄게 강화됐다고 느끼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검찰에 영혼을 털린 사법부가 검찰의 눈치를 보는 시녀로 전락한 게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다. 물론 그렇지 않은 판사도 있겠지만, 잘 보이지 않는다. 대법원이 윤석열 장모의 요양급여 편취 사건에 무죄를 선고한 것은 그저 작은 사례에 불과하다. 스스로 무릎 꿇은 민주당 검찰권력 앞에 스스로 무릎 꿇는 건 민주당도 마찬가지다. 지난여름 민주당은 기소와 동시에 직무를 정지하는 당헌을 결국 유지하기로 결정했는데, 이재명 방탄용이라는 내외부 비판 때문이었다. 나는 민주당의 당헌 개정이 기소가 본래 갖고 있는 사전적 의미-법원에 심판을 요구한다-로 제자리를 찾을 수 있는 계기라고 생각했는데, 내부 정치투쟁으로 전락해 수포가 되어버렸다. 이것이 오늘날 사분오열되어 눈치만 보면서 거의 아무런 존재감도 느껴지지 않는 거대야당 민주당의 모습이다. 민주당마저 이렇게 기소에 힘을 실어주니 검찰이 죄수까지 동원해서 증언을 연습시켜 진술을 바꾸고 기록을 조작하며 기소에 목숨을 거는 것이다. 특히 윗분들이 싫어하는 대상의 경우 일단 기소만 하면 해당 검사는 출세길이 보장된다. 재판에서 무죄가 나오더라도 대법원 판결까지 걸리는 시간을 고려하면 판결은 무의미하다. 기소 대상에 대한 여론재판은 이미 오래전에 끝난 상태고, 해당 검사의 화려한 경력을 물릴 수도 없다. 이 상태로라면 오히려 물불 가리지 않고 기소에 올인하지 않는 검사가 비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제도적 유인책이 강력하다. 이성윤, 박은정 등 문재인 정부에 협조적이었던 검사들이 죄다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것도 이런 배경에 따른 것이다. 조직의 배신자는 지구 끝까지 쫓아가서 보복하는 게 한국 검찰의 조폭적 규율이다. 무너진 상식의 인계철선 윤석열과 검찰이 정권 탈취의 수단으로 사용했던 수사와 기소는 이제 정적제거와 정치보복의 무기로 활용되고 있다. 제 식구(ex: 김건희, 김웅)는 뻔뻔할 정도로 대놓고 봐준다. 공정하게 보이려는 최소한의 성의도 없다. 형식적인 외관조차 갖추기 귀찮을 만큼 자신감에 가득 차 있다. 정의와 상식의 인계철선이 무너진 것이다. 그런데도 검찰의 불공정성에 대한 비판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문재인 정부 당시 공정성 논란의 주요 펌프였던 검찰과 보수언론이 기능을 멈춰서 사회적 원동력이 사라진 탓이 크다. 진보진영의 경우 앞서 언급한 각자의 사정으로 주눅이 들어 있다. 무엇보다 법 집행 자체, 법치라는 허울의 위력에 눌려 감히 저항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군사정권의 물리적 폭압과 달리 검사정권의 법리적 폭압은 알아차리기도 쉽지 않고 분노를 모으기는 더욱 어렵다. 일종의 저강도 독재인 셈인데, 그래서 언론과 지식인의 책무가 더욱 중요해진다. 적어도 진보언론과 논객들은 문재인 정부 당시 공정성 문제를 제기했던 열정의 절반이라도 할애해 검찰의 불공정성을 비판해야 한다. 검찰개혁은 진영의 문제가 아니라 인권의 문제이자 정의의 문제이며, 무너진 상식의 인계철선을 복원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22-12-28 | hrights | 조회: 502 | 추천: 17
최낙영 / 인권연대 운영위원   ’이태원 참사‘가 발생한 지 49일째인 지난 16일 유가족협의회와 시민대책회의는 16일 오후 6시부터 이태원역 1번 출구 앞에서 ’10.29 이태원 참사 49일 시민추모제‘를 열었다. (...) 유가족과 시민들은 정부와 여당을 향해 진정성 있는 사과를 요구했다. (...) 49재가 진행되는 이태원 거리는 눈물로 뒤덮였지만 유가족과 시민의 절절한 절규를 들어야 할 정부와 여당은 찾아볼 수 없었다. 또 총리도, 행정안전부 장관도 얼굴조차 비치지 않았다. 비슷한 시각 윤석열 대통령은 부인 김건희 여사와 ‘윈·윈터’ 페스티벌 개막식에 참석해 술잔을 사고 트리를 점등했다. (...) -세계일보, 2022. 12. 20. 인권연대 회원이 된 덕에, 2022년 ‘올해의 인권책’으로 선정된 <학교 가는 길>을 비롯, 몇 권의 책을 더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 책들 중, <민낯들>(오찬호 지음, 북트리거 발행)은 최근 우리 사회에서 벌어졌던, 우리가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한다고 다짐했던 12가지 사건들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진실이 인양되지 않고 있는 세월호 참사, 변희수 하사를 죽음으로 몰고 간 후에도 여전한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 노동자 김용균의 산재 사망 사고 이후에도 바뀐 것이 거의 없는 하청업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현실 등 우리 사회의 약한 고리가 어떻게 무너졌으며, 혐오와 증오가 어떻게 일상화되었는지를 살핍니다. 지은이는 이 책에서 “인간 존엄이 보장되지 않았기에 발생한 안타까운 사건들과, 한국 사회는 원래 그렇기에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이 야기한 괴상한 일들 속에 질문은 숨겨져 있다.”며 제대로 된 질문을 우리 사회에 던질 것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에 대해 ‘일단 화들짝 놀라고, 아직도 이런 일이 있냐고 탄식하고, 피해자를 추모하고, 재발 방지를 모색하는 고민의 연속만이 사회를 움직인다.’고 힘주어 말합니다. <출처 - 셔터스톡> 복철지계(覆轍之戒)는 먼저 간 수레가 엎어진 것을 보고 뒤에 오는 수레가 미리 대비해야 한다는 말이라고 합니다. 과거의 잘못을 거울삼아 같은 과오를 저지르게 되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이태원 참사는 세월호의 아픈 기억을 다시 떠오르게 합니다. 유족들 앞에서 벌어졌던 소위 ‘폭식투쟁’이라는, 그 끔찍했던 장면은 언제나 저를 몸서리치게 만듭니다. <민낯들>에서 세월호 참사에 관한 장(‘우리는 끝없이 먹먹할 것이다-기억과 책임 그리고 약속, 세월호 참사’)의 끝 문장들을 옮깁니다. “우리의 추모에는 이 잘못된 시스템에 대한 경고음이 있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다시 먹먹해질 것이다. 지나간 일을 왜 그렇게 붙들고 있냐는 그 생각, 추모가 밥 먹여 주냐는 그 생각, 이왕이면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는 그 생각이야말로 엉터리 시스템이 가장 원하는 결과라는 걸 잊어선 안 된다.” 이태원 참사 특조위가 구성된 지 27일 만에야 첫 현장조사에 나섰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정말 춥고 가슴 먹먹한 연말입니다. 최낙영 위원은 도서출판 밭 주간에 재직 중입니다.
2022-12-22 | hrights | 조회: 266 | 추천: 4
강국진/ 인권연대 운영위원 ‘알렉산더’라는 영화가 있다. 흥행이 썩 잘되진 않았고 다소 지루한 것도 사실이지만 영화 초반부 가우가멜라 전투 장면만큼은 언제봐도 흥미롭다. 알렉산더대왕이 이끄는 마케도니아와 다리우스3세가 이끄는 페르시아가 기원전 331년 오늘날 이라크 아르빌 인근 가우가멜라라는 곳에서 맞붙었던 전투에서 알렉산더는 우익에 배치한 기병대를 이끌고 페르시아 쪽 좌익 기병대를 유인한 뒤 페르시아 본진과 좌익 사이에 벌어진 틈을 놓치지 않고 다리우스3세 바로 앞까지 쇄도했다. 예상치 못한 일격에 전열이 무너지면서 페르시아는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다. 대오가 흐트러지는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은 덕분에 그토록 기세등등했던 페르시아가 무너졌다. 군대에 가면 가장 먼저 배우는 게 제식훈련이다. 조교들은 끊임없이 “오와 열을 맞추라”며 어그적거리는 훈련병들을 닦달한다. 줄이 조금 안맞는다고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일어날까 싶은 생각이 들기 마련이지만 지나놓고 보면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줄을 맞춰서 움직이지 못하는 군대는 군대로서 기능을 할 수가 없다. 평소에도 줄이 안 맞는데 위기상황에서 한 몸처럼 움직인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줄이 무너져서 몰살당하는 얘기는 동서고금 흔하디 흔하다. 데모할 때 생각해보자. 가투(가두투쟁)에서 전경들이 최루탄을 쏘고 시위대가 화염병을 던지는 건 기본적으로 상대 진영을 붕괴시키기 위해서다. 축구도 크게 다르지 않다. 4-4-2나 4-3-3 같은 이른바 포메이션이라는 것도 따지고보면 전투진형과 다르지 않다. 수비가 무너져서 실점을 했다는 건 수비 대오가 무너져 방어가 안되는 구멍이 뚫렸다는 의미다. 강한 압박과 속도, 패스를 통해 우리 공격대형은 제대로 작동하게 하면 승리할 수 있다. 한국과 포르투갈 경기 막판 역전골은 포르투갈 선수 7명이 손흥민 막느라 정신이 팔려서 수비대형이 무너진 게 원인이었다. 대오를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짧은 군대 경험을 통해 생각해보면 내 옆에 있는 전우, 내 뒤에 있는 전우가 나를 지켜준다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적군이 우리를 향해 돌진해오면 무섭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럴 때 한두명이 자리를 이탈해 버리면 공포가 전염병처럼 순식간에 퍼지기 마련이다. 그럼 전투는 하나 마나다. 반대로, 내 옆자리를 맡은 사람이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면 그 용기 또한 퍼져나간다. 대오를 유지해야 내 목숨도 살릴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결국 믿음직한 전우만큼 든든한 게 없다. 출처 - 천주교인권위원회 한 군인이 있었다. 세상은 남자라 여겼지만 자신은 여자이고 싶었다. 믿음직한 전우로서 나라를 지키는 군인, 하사 변희수로 남고 싶었다. 하지만 육군에선 하사 변희수가 성전환수술을 한 것을 ‘심신장애’로 규정했다. 강제전역시켰다. 육군의 논리는 이런 것일까. 하사 변희수는 남성의 상징인 ‘거시기’를 떼어냈다. 그는 이제 ‘생물학적 남성’이 아니고, 믿음직한 전우도 될 수 없다. 성전환 수술 이후에도 계속 군복무를 하고 싶어했던 하사 변희수는 결국 스스로 세상을 버렸다. 생각해보면 이상한 것 투성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듬직했던 전우가 어떻게 성전환 수술을 하고 나면 전우들의 목숨을 믿고 맡길 수 없는 믿음직하지 않은 사람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육군이 생각하는 믿음직한 전우는 ‘생물학적 남성’이어야만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오늘도 군대에서 성실하게 복무하는 여성 장교와 부사관들은 뭐란 말인가. 법원에서도 강제전역이 부당하다고 판결했다. 그런데도 최근 육군은 고(故) 변희수 육군 하사가 ‘순직’이 아니라 ‘일반 사망’이라고 결론내렸다. 육군에선 “공무와 상당한 인과관계가 없다고 판단했다”고 하는데, 군인사법에선 “고도의 위험을 무릅쓴 직무 수행 중 사망”한 사례 뿐 아니라 “국가의 수호·안전보장 또는 국민의 생명·재산 보호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직무수행이나 교육훈련 중 사망한 사람”도 순직 대상에 포함한다는 것과도 맞지 않는다. 인권침해나 관리소홀로 인한 자살을 순직으로 인용하는 최근 추세에 비춰보더라도 납득이 안된다. 육군은 여전히 하사 변희수를 전우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리라. 전우가 내 뒤에서 나를 지켜주고 나 또한 전우를 지킨다. '여자'냐 '남자'냐 하는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게이 레즈비언 트랜스젠더 그런 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오직 내 옆 내 뒤에 있을 때 든든한, 목숨을 빚질 수 있는 믿음을 주는 ‘사람’이면 된 것 아닐까. 나를 지켜주는 건 '전우'로 충분하다. 강국진 위원은 현재 서울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22-12-14 | hrights | 조회: 445 | 추천: 6
장경욱 / 인권연대 운영위원   윤석열 정부의 무차별 종북몰이, 공안몰이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정권과 집권여당의 낮은 지지율에 따른 위기 탈출을 노린 사활을 건 종북몰이는 급기야 민중운동과 진보통일운동 진영에 대한 공안몰이 국가보안법 수사로 이어지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극우보수정권은 통치 위기 국면에서 언제나 종북몰이, 공안몰이 카드를 꺼내 사이비 안보문제를 내세워 공안정국을 조성하며 여론의 반전을 꾀해 왔다. 아무데나 시도 때도 없이 ‘전가의 보도’로 사용 중이다. 늘 봐왔던 시대착오적 코믹 저질 수법이긴 한데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스릴러 공포 영화를 보는 오싹한 느낌이다. 느닷없이 전직 대통령조차 신영복 선생을 존경한다는 이유로 김일성주의자로 간주한다. 대통령이 여당 행사에서 종북 주사파와는 협치가 불가능하다는 발언으로 야당을 향한 종북몰이 공세의 앞장에 나선다. 심지어 안전 운행을 위해 안전운임제의 적용 확대를 요구하는 화물연대의 정당한 생존권 투쟁을 불법파업으로 매도하며 북한의 핵 위협과 마찬가지로 규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민주노총의 국가보안법 폐지 성명에 이때다 하고 ‘민노총’이 하라는 노동자 대변은 하지 않고 북한을 대변하는 ‘조선로동당 2중대’라고 나무라며 ‘민로총’으로 이름을 바꾸라는 여당의 논평은 노동자를 위한다는 그 가식이 역겹기는 하지만 차라리 애교스럽기까지 하다. 작금의 종북몰이 공세는 거의 실성한 수준의 황당무계하기 그지없고, 막무가내식 무식과 만용, 오만과 독선으로 점철된 것으로 최악으로 꼽힐 것이다. 출처 - Rev. Timothy's 묵상일기 중 윤석열 정부는 재벌 대기업 중심의 불평등 심화로 인한 민생 위기의 해소에는 아무런 관심조차 두지 않고 그 어떠한 대책조차 내놓지 못하고 있다. 대통령 임기 시작 고작 6개월 만에 정권의 무능함이 탄로 날까 두려워 오로지 종북몰이 공세로 정쟁을 불러오고 노동자 때려잡기에 혈안 돼 노동기본권을 침해하며 생존권을 위협하는 반민중적 정책으로 일관하고 있다. 극우보수정권의 재집권을 기다렸다는 듯이 공안수사기관들은 전방위적 국가보안법 수사를 노골화하고 있다. 늘 그래왔듯이 민중운동과 진보통일운동 진영에 대한 공안몰이가 확대일로를 걷고 있다. 민중운동과 진보통일운동 진영은 극우보수정권의 종북몰이, 공안몰이의 희생양이 되어 국가보안법의 위협과 처벌에 직면해 있다. 국가정보원, 경찰청 안보수사대, 검찰 등 공안수사기관은 그동안 오래도록 썩혀두었던 음습한 지하 저장창고에서 공안몰이 창고 대방출을 본격화하며 희생양을 취사, 선택하여 공안탄압의 칼날을 휘두르고 있다. 국가정보원 안보수사국 및 국가정보원 대변인실은 향후 극우보수언론과 짬짜미가 되어 정권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국면전환용 언론공작을 통해 반국가단체요, 북한 연계요 하며 온갖 종북몰이 보도로 국민의 눈과 귀를 어지럽힐 것이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을 겪어왔건만 종북몰이, 공안몰이에 기댄 극우보수정권의 역사적 운명이 또다시 궁금해진다. 뻔하다. 자멸이다. 당장은 상책일 듯 보일지 몰라도 종북 공안몰이에 기대어 정권의 수명을 이어가는 것은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통합진보당을 해산시킨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을 자초했던 역사가 되풀이 될 것이다. 과거의 실패한 정책을 오늘에 되살리는 것은 피하는 것이 상책이다. 그러나, 한반도 전쟁 위기 고조 및 10. 29. 이태원 참사에 대한 추모와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윤석열 정부의 대북 적대 강경 정책과 종북몰이 공세는 공안탄압의 부활로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말입니다! 더 이상은 분단냉전체제의 적대관계를 배경으로 종북몰이, 공안몰이를 하기도 예전과 같지 않다. 더는 용납되지도 통하지도 않는다. 시대착오적 종북몰이, 공안몰이에 대응하여 그 근간이 되는 분단냉전체제를 청산하기 위한 국가보안법 폐지운동이 점점 더 활성화되고 있다. 분단냉전체제에 길들여진 나머지 종북몰이, 공안몰이에 취약해져 무기력한 상태로 적응해 살아온 어제의 한국 민중이 아니다. 바야흐로 종북몰이, 공안몰이가 기승을 부리고 반복되는 분단냉전체제 유지의 압도적 힘의 실체에 대한 본질적 문제인식에 기초해 무기력에서 벗어나 이에 대응할 역량을 키우며 그 극복의 대안과 힘을 갖추어 나가고 있다. 한국 민중 스스로의 힘으로 분단냉전체제의 청산을 위한 핵심적 장애물인 국가보안법이라는 거대한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저항력을 키워나갈 수 있어야 비로소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극우보수세력의 종북몰이, 공안몰이 공세에 맞서 능동적 힘으로 제동을 걸고 우리사회에서 종북몰이, 공안몰이 시도 자체를 뿌리 뽑을 수 있다. 국가보안법 폐지는 분단냉전체제의 청산과 함께 이뤄질 근본적 과제이기에 한국 민중을 억압하는 분단 악법에 맞서 그 폐지를 위한 민중의 역량을 축적해 나갈 때 비로소 한국사회는 보수와 진보가 대등한 균형을 이루며 공존할 수 있고, 민중운동과 진보통일운동 진영이 더는 종북몰이, 공안몰이의 희생양이 되지 않고 정상적으로 활동을 펼칠 수 있게 되며, 국민의 일상은 물론 선거 등 정치적 공간에서 국민 누구나 정치사상의 표현을 자유롭게 개진할 수 있는 민주사회로 발전할 것이다. 장경욱 위원은 현재 변호사로 재직 중입니다.
2022-12-07 | hrights | 조회: 456 | 추천: 5
이찬수 / 인권연대 운영위원   인간은 자연 내 존재이다. 인간이 자연 안에서 생겼고 자연법칙에 따라 살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법칙을 대상화할 줄도 안다. 가령 고대인이 마른 나무를 비벼 불을 일으키는 방법을 알았을 때, 그 고대인은 불이 붙는 자연의 법칙을 대상화하며 아는 것이다. 법칙을 대상화할 줄 아는 인간은 그 법칙을 하나의 ‘방법’으로 정리해 다른 이에게 전수한다. 이렇게 전수되는 자연법칙이 ‘기술’이다. 그 기술로 인해 ‘문명’이 발생한다.   인간은 전수된 자연법칙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통제한다. 불도 인간의 목적에 맞추어진다. 제사를 드리기 위해 불을 지피고, 고기를 굽고 집을 데우기 위해 불을 일으킨다. 인간이 자연법칙을 자신의 의도에 어울리도록 조작하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은 자신을 자연에 대한 통제자나 조절자로 인식한다.   나아가 인간이 추상화한 기계적 법칙이 본래의 자연 속으로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럴수록 인간의 문명은 더 복잡하고 정교해진다. 인간은 다시 자연을 대체한 기계적 자연법칙에 욕망과 환상을 투사한다. 욕망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이다. 그럴수록 욕망과 환상이 투사된 자연법칙이 본래의 자연법칙을 통제한다. 인간은 다시 그 통제된 자연법칙, 즉 기술에 스스로를 밀어 넣는다. 그래야 자신을 위한 효과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인간이 자신을 위해 조작해낸 자연법칙에 종속되는 방식으로 스스로 자연이 되어 간다.   여기서 인류세(Anthropocene)라는 신조어도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인류세는 “인간의 활동이 지구상에 축적되어 자연의 존재 방식을 바꾸고 이 바뀐 자연에 의해 인간이 영향을 받게 된 상황”을 의미한다.(시노하라 마사타케, 『인류세의 철학』) 지구의 지질학적 구조 안에서 살던 인간이 힘을 키워 지구의 지질 구조를 바꾸는 존재로까지 ‘발전’해 간 것이다. 지구온난화, 가뭄, 홍수 등은 인간이 바꾼 기계적 자연법칙의 효과들, 인간이 원하지 않았던 효과들이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를 자연처럼 여길 정도로 자연을 수단화하는 중에도, 본래의 자연은 숨죽이고만 있지 않았다. 본래의 자연은 인간의 수단에 갇히지 않고, 인간과의 경계를 뚫고 인간세계에 침입하여 인간의 지반을 뒤흔들고 때로는 붕괴시키기도 한다. 인간이 대상화시킨 자연법칙을 통해 자연 본연의 위력을 드러낸다. 지구온난화, 가뭄, 홍수는 물론 심지어 지진과 쓰나미도 인간이 자연을 객체화시키면서 벌어지는 현상이자, 인간에 대한 본래적 자연의 역공이기도 하다. 출처 : 기업의 png에서 .pngtree.com/   희한하게도 똑같은 현상이 법과 정치에서 벌어지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근대 국민국가는 국민과 영토와 주권으로 구성된다. 주권이란 국가의 의사를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권력이다. 원칙적으로 이 권력은 국민 전체에게 평등하게 속해 있다. 그 국민적 평등성을 유지하는 상태가 정의이다. 정의는 본래적 의미에서의 질서이기도 하다. 정의와 질서를 위해서는 사법(司法)과 정치가 필요하다. 사법과 정치는 국가 운영의 근간이다.   그런데 인간이 스스로 자연이 될 정도로 자연을 수단화하며 살아왔듯이, 이때 사법과 정치가 자신에게 더욱 유리한 것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일종의 인지상정이기도 하다. 문제는 권력의 정점에서 법을 운용하는 세력일수록 법을 자신의 수단으로 삼을 가능성도 크다는 데 있다. 법의 운용 세력도 본래는 법의 영역 안에 있는 ‘법 내부적 존재’이지만, 법의 운용을 빌미로, 법의 이름으로, 법의 상위에 오른다는 데 있다. 인간에 의해 객체화된 자연법칙이 기술이듯이, 법 기술에 능한 이가 법의 이름으로 법을 통제하며 그들만의 법 세계를 이룬다. 본래의 법은 자연환경처럼 인간을 둘러싸고 있고, 모든 이가 같은 법의 통제와 견제 하에 있어야 하지만, 법 기술자들은 법 안에서 법의 이름으로 법을 통제하며 넘어선다. 법을 이용해 자신을 정당화하고 유지하고 영향력을 확장한다.   수단화한 법으로 법의 이름으로 누구에게나 평등해야 할 법 안으로 들어간다. 그런 식으로 법과 하나가 된다. 자연 내 존재인 인간이 지질학적 행위자가 되어 자연의 질서를 무너뜨리듯이, 특정세력에 유리한 법이 법의 이름으로 법 안으로 들어가 법의 주체자가 된다. 그러면서 법 본연의 평등성을 해친다.   어떤 사건의 위법성을 판단하는 주체인 검찰은 사법 권력의 정점에 있는 세력이다. 검찰 자신은 법질서 안에 있으되, 법을 운용하는 주체로서의 의식이 훨씬 강하다. 자신이 사법의 대상이라는 생각을 별반 하지 않는다. 법의 원리를 활용해 법을 수단화하면서 법의 효과를 누리다가 급기야 법과 하나가 된다.   검찰 수장 출신인 대통령이 자신에게 불리한 보도를 했다는 이유로 대표적인 언론인 MBC의 취재를 제한하고 제재까지 추진하려 하고 있다. 해외 순방을 위한 대통령 전용기에 MBC 기자를 배제한 이유에 대해 “헌법수호를 위한 조치”라고 강하게 성토한 바 있다. 수호해야 하는 헌법과 그 헌법을 수호하는 주체를 동일시하면서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정치적 시도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헌법의 이름으로 스스로 헌법의 자리에 오르려 한다. 대통령이 된 이후 수도 없이 ‘자유’를 외쳤지만, 막상 자신에게 불리한 자유는 배제한다.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을 내세워 언론의 자유를 부정하는 행태에서 헌법의 이름으로 헌법을 부정하는 모순을 국민에게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대다수가 안다. 인간이 스스로 자연이 되어버릴 정도로 키운 힘이 사실은 자연이 아니라 인간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대통령이 수호하려는 헌법은 사실상 법을 앞세운 자신의 권력이라는 것을 말이다. 인간을 위한 수단인 줄 알았던 자연이 기후위기의 형태로 인간의 지반을 공격하듯이, 자신을 위해 수단화한 법의 효과가 실질적 주권자인 국민 안에서 다양하게 파생되고 재이용되면서 더 큰 쓰나미로 변하리라는 것을 말이다. 자연의 질서는 물론, 사법과 정치 본연의 질서를 그 어떤 것보다 두려워해야 할 일이다.   이찬수 위원은 현재 레페스포럼 대표로 재직 중입니다.
2022-11-23 | hrights | 조회: 534 | 추천: 9
  최낙영 / 인권연대 운영위원 얼마 전, 법무부 국정감사에 관한 뉴스를 보았습니다. 일개 임명직 국무위원이 "저는 다 걸겠다. 장관직을 포함해 앞으로 어떤 공직이든 다 걸겠다. 의원님은 무엇을 걸 것인가" 했다는 기가 막힌 기사를 보았습니다. “나는 몽땅 올인! 쫄리면 뒤지시든가” 하는 어떤 영화 장면이 생각났습니다. 국정감사장에서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이 무슨 화투판의 끗발을 확인하는 일과 같은 것일까요? 관련 동영상을 찾아봤더니 자신에게 뭔가 불리하다 싶으면 무조건 발끈하며 떼를 쓰는 철부지 같기도 해서 조금 안쓰럽기도 했습니다.   그 기사와 동영상을 보고 나니 문득 30여 년 전에 시시비비를 가렸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오래전에 있었던, 갑자기 떠오른 기억이기에 이야기가 분명하고 확실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대강의 줄거리는 이러했습니다. 대학 1학년, 여름방학이었습니다. 실향민의 자식으로 서울 변두리에서 나고 자란 저는 ‘고향’이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습니다. 그런 제 마음을 읽은 듯한 A라는 친구가 자기 집으로 며칠 놀러 오라고 했습니다. 친구의 집은 경북의 P라는 시 근교였습니다. 지금도 비슷하겠지만, 당시 지방은 시를 조금만 벗어나면 거의 시골과 같았습니다. 친구의 기꺼운 초대로 P시의 시골 같은 근교에서 이틀 정도 고향의 맛을 느끼고 있을 때였습니다. A가 자신의 고교동창 B를 만나기로 했으니 P시에 나가 같이 술을 한잔하자고 했습니다. B는 우리와는 달리 전교 1, 2등을 다퉜으며 S대 법학과에 재학 중이라고 했습니다. A는 자신이 B 같은 대단한 친구와 친하다는 것을 은근 자랑하는 눈치였습니다. 저녁 무렵 시내에서 처음 만난 B는 그야말로 자신감이 몸에 배어 있는 듯했습니다. 웃는 얼굴로 A와 저를 번갈아 보는 B의 눈빛과 표정은 뭔가 당당해 보였습니다. 간단한 수인사를 마친 후, 점잖게 말을 아끼던 B는 술 몇 잔을 마신 후 말문이 트이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술도 잘 못하고, 말도 잘 못하지만...”이라고 시작된 그의 말은 곧 연설처럼 길어졌습니다. “이 사회라는 게 말야... 정의라는 게 말야...” 1차, 2차를 마치고 자정이 넘어 들어온 여인숙에서까지 B의 말은 쉽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피곤했던 친구 A가 B에게 “그래, 니는 똑똑하니까... 알았다. 니 말이 다 맞다. 이제 그만 자자” 하고 말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A의 얼굴을 쳐다보던 B의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졌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큰소리로 호통치듯 말했습니다. “알아? 니가 뭘 알아?” 갑작스런 B의 태도에 잠시 놀랐던 A가 내 얼굴을 한번 보더니 차분하게 말했습니다. “그래, 내가 뭘 알겠나, 됐으니까 그만 자자.” “되긴 뭐가 돼? 우리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인데 지금 잠이 오냐?” B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여인숙 유리창에 재떨이를 던졌습니다. 유리창이 깨지고 A와 B의 말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결국 여인숙 주인이 올라왔습니다. 여인숙 주인을 보고 흥분을 가라앉히려는 A와 달리 B는 더 흥분한 듯 보였습니다. B가 여인숙 주인에게 삿대질을 하며 퍼붓듯이 소리쳤습니다. “아저씨가 뭔데, 남의 방문을 함부로 열고 들어오는 건데?” A와 B의 말다툼이 이제 B와 여인숙 주인의 싸움으로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여인숙 주인이 막무가내의 B를 감당하기는 어려워 보였습니다. 여인숙 주인의 속이 썩어들어갈 때쯤 다 필요없다는 듯이 대뜸 B가 말했습니다. 출처 : wallpaperbetter “아저씨, 우리 경찰에 가서 시시비비를 따져볼까?” 황당하기 짝이 없는 B의 말에 A는 깜짝 놀라 여인숙 주인에게 용서를 구하기도 했으나 결국 우리는 파출소에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파출소장쯤 되어 보이는 사람이 저희를 불렀습니다. “니들 뭐 하는 쉐끼들이고?” 잔뜩 졸아 있던 저와 A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저희는 OO대학 OO과 1학년 학생입니다” “학생? 이 쉐끼들이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무서운 얼굴로 우리를 노려보던 그 경찰관은 고개를 돌려 우리와 달리 빳빳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B에게 물었습니다. “니는? 니는, 어느 학교 다니는데 그래 꼴값을 떨고 있나?” “지는 S대 법대 다니는데예.” B의 대답에 그 경찰관은 깜짝 놀란 듯한 표정으로 A와 저를 쳐다보았습니다. 우리가 고개를 끄덕이자 경찰관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여인숙 주인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에,.. 사장님, 혈기왕성한 젊은 학생들이 술을 마시고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경찰관의 S대 사법고시... 수재... 크게 될... 어쩌구 하며 이어지는 말에 여인숙 주인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 일 없이 파출소를 나왔습니다. 그때 소장쯤 되어 보이는 경찰관은 B에게는 어색한 미소와 격려의 말을, A와 저에게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열심히 공부하라는 말을 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때 파출소 문을 나서면서 A와 저를 쳐다보는 그 때 B의 표정은 “시시비비 확실히 가렸지?” 하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해 가을에 자퇴했던 A는 바람대로 한의사가 되어 있는지, S대 법학과를 다녔던 B는 지금 어디서 어떻게 시시비비(是是非非)를 따지고 있을까... 새삼 궁금해집니다. 30여 년 전 일을 곱씹어보자니 정말 시간은 쏜살같이 빠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윤석열 정권이 들어선 지 불과 6개월여... 시간은 마치 멈춰 있는 듯이 더디게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남은 4년 반이라니! 시간은 시간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시비비(時時非非)라고 하면 엉터리 말장난이겠지요? 최낙영 위원은 도서출판 밭 주간에 재직 중입니다.
2022-11-10 | hrights | 조회: 463 | 추천: 9
이재성 / 인권연대 운영위원  10.29 이태원 압사 참사는 (일방통행 안내 같은) 간단한 조처만으로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사고라는 점에서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참사보다 정부와 지자체의 책임이 압도적으로 명백한 인재다. 나는 세월호보다 훨씬 더 심각한 사태라고 생각한다. 관리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최자가 명확하지 않다는 이유로, 법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사실상 일부러 방치했다. 많은 인파가 몰릴 것이 뻔한 상황에서 자율적으로 질서를 책임지는 주최 쪽이 없다면 안전사고 확률은 더욱 높아진다. 주최자가 없다는 건 방치의 사유가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 개입의 사유로 삼아야 했다. 개입의 법적 근거가 없다는 변명 역시 해괴하기는 마찬가지다. 법적 근거가 있어야만 국민의 안전을 책임질 수 있다고 말하는 정부가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법적 근거가 없으면 이번처럼 국민이 죽어가도록 내팽개쳐도 좋다는 말인가. 정치에 악용하지 말라는 정치적 주장 도처에서 세월호 데자뷔가 감지된다.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버티다가 비난 여론이 일자 축소와 왜곡에 나서는 것도 동일한 패턴이다. 이태원 참사를 축소왜곡하려는 준동은 이미 시작되었다. 세월호 참사가 단순 해상 교통사고라며 축소하는데 급급했던 바로 그들이 참사가 아니라 사고이고, 희생자 대신 사망자라고 부르라며 추모 글씨 없는 근조 리본을 강요하고 있다. 경찰력으로 막을 수 없었던 사고라는 이상민의 발언은 세월호 당시 청와대는 콘트롤타워가 아니라던 반응을 떠올리게 한다. 11월 1일 경찰청장의 국회 답변을 보면, 아마도 경찰은 112 신고를 무시한 하급 직원들을 제물로 바치고 싶어하는 것 같다. 또한 참사 현장의 ‘토끼머리띠 청년’을 세월호 사건의 유병언처럼 국면전환 카드로 삼으려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면피와 떠넘기기에만 열중하는 자들이 희생자 유족의 세금과 통신요금 감면, 외국인 주검 이송비용 지원 등 정부 돈을 쓰는 데는 열심이다. 정부는 책임이 없다면서 돈은 지원하겠다는 건 자가당착이 아닐 수 없다. 책임은 지기 싫지만 푼돈은 줄 수 있다는 것인가. 국민을 돈 몇 푼에 매수하려는 얄팍한 속임수요 국민 무시 발상이다. 사후 수습과 재발 방지를 위해서라도 사고 원인과 책임자 규명은 필수적이다. 진정한 애도는 철저한 원인 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이뤄질 때 가능한 것이다. 위기의 순간에 골든타임이 있듯이 원인 규명에도 골든타임이 있다. 지금이 바로 그 시간이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세월호 때 그랬던 것처럼 정쟁을 그만두고 애도에 전념하자는 탈정치 주문이 쏟아진다. 이례적으로 서둘러 국가애도기간을 선포한 것도 그 때문이리라. 지금은 애도할 때이니 책임을 따지지 말라는 것이다. 정작 자신들은 정치적 책임을 모면하려 온갖 술수와 국민 무시 발언을 일삼으면서 정치적으로 악용하지 말라니, 적반하장의 달인들답다. 이념투쟁 하지 말자는 자들이 가장 이념적이듯, 정쟁하지 말자는 자들이 가장 정치적이다. 이태원 참사를 가장 정치적으로 대하는 집단은 참사에 정치를 끌어들이지 말라고 주장하는 바로 그들이다. 바뀐 것은 행정권력 뿐 다중안전사고는 손에 쥔 물처럼 빈틈을 찾아 흘러내린다. 다리와 백화점이 무너지는 하드웨어 참사를 지나, 유치원생과 중고생이 집중적으로 희생당한 씨랜드와 인천 호프집 화재를 겪었고, 무엇보다 악몽같은 세월호 대참사를 당하고 나서는, 적어도 대한민국에서 인간이 직접적 원인으로 작용하는 대형 참사는 없을 줄 알았다. 참사의 아픔 만큼 우리 사회가 성숙해져서 더는 빈틈이 없을 줄 알았다. 아니, 사람 사는 세상에 빈틈은 없을 수 없겠지만 행정력으로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한동안 그 믿음이 사실인 줄 착각하고 살았다. 우리가 놓치고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보수정권과 대형참사 사이에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있는 것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주변에 꽤 있다. 특히 이태원 핼러윈 축제의 경우 해마다 열렸던 것이고, 수십만이 다녀간 것도 올해만 그런 것이 아니어서 관계당국의 대응에서 문제점을 찾는 건 논리적인 귀결로 보인다. 코로나 거리두기 해제라는 변수가 있긴 하지만, 코로나 이전에도 많은 인파가 모였던 점을 고려해 볼 때, 대통령부터 구청장까지 모든 기관장이 국민의힘 계열로 바뀐 데서 원인을 찾는 것이다. 바뀐 것은 행정권력 뿐이라는 문제의식이다. 나는 이것이 터무니없는 음모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검사정부의 약탈적 관점 참사 당일 경찰은 이태원에 137명을 배치했지만 정복경찰은 58명에 불과했고, 대부분 마약 등을 단속하는 사복경찰이었다고 한다. 경찰봉을 들고 질서유지를 하는 교통이나 경비 경찰은 아예 없었다. 10만명 이상 모일 것이라는 걸 경찰도 알았지만 범죄단속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안전은 뒷전이었다. 이 사실은 이번 사태의 본질을 폭로한다. 국민을 단속의 대상으로 보는 약탈적 관점이 참사의 배후에 존재하는 것이다.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건 아무리 잘해도 인사고과에 반영되지 않지만, 범죄를 단속하면 건수가 올라간다. 모든 국민을 잠재적 범죄자로 간주하고 실적의 대상으로 보는 관점은 경찰만이 아니라 이 정부의 타고난 유전자다. 정적 수사에 편파적으로 올인하고 있는 검찰을 보라. 대통령이 된 검찰 선배에게 잘 보이기 위해, 조직의 존재감을 높이기 위해, 단위마다 치열한 실적경쟁을 벌이고 있다. 행정의 본질은 서비스인데 이 정부는 처벌과 단속이라 생각한다. 위임받은 권력으로 봉사할 생각은 않고 군림하려고 한다. 자영업자들이 자기 장사하는데 우리가 왜 돕느냐는 용산구청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의 안전무시 발언 이태원 참사는 윤석열 정부의 출범과 함께 잉태된 것이다. “안전을 중시하는 관료적인 사고는 버려야 한다”는 대통령 발언의 파장은 원전업계에만 머물지 않는다. 파리바게뜨 빵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가 무참하게 죽어나가도 이 정부는 특별연장근로시간을 늘리는데 열중하고 있다. 이태원 참사에 가려졌지만, 봉화 아연광산 매몰 사고 현장 구조작업은 헛되이 골든타임을 허비하는 중이다. 대통령의 안전무시 철학은 공무원 사회와 기업 전체에 바이러스처럼 퍼져, 이제 대한민국은 언제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장전 상태가 되었다. 이 정부는 참사를 참사로 덮고 있다. 국제 외교무대에서의 욕설 파문으로 국가 이미지를 추락시켜 놓고도 사과 한마디 없이 오히려 화를 내더니 김진태가 쏘아올린 채권시장 경색으로 덮었다. 그 위를 이태원 참사가 덮었고, 이제 이태원 참사 위에 북한발 미사일이 쌓이고 있다. 시대착오적인 외눈박이 외교로 북한을 도발하고 일본과 밀착하여 전쟁 위험을 키우고 있다.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 채로 임계점을 향해 밀도를 높이고 있다. 공급망 붕괴와 에너지 위기에 이어 유례없이 급격한 금리인상으로 인해 실물경제의 경착륙이 이미 진행 중인데, 이 정부 인사들의 위기의식은 찾아보기 어렵다. 번호표를 뽑고 대기 중인 경제와 안보 참사 앞에서 불안에 떨고 있는 건 국민뿐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사진출처 - 넷플릭스 <서부전선 이상없다> 최근 넷플릭스에서 개봉한 영화 <서부 전선 이상 없다>는 리더의 중요성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제1차 세계대전 휴전협상 발효를 불과 몇 시간 앞두고, 해당 부대의 독일 장군은 비겁한 사민주의자들의 타협에 굴복할 수 없다며,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나가서 싸우라고 병사들을 사지로 내몬다. 몇 시간만 지나면 집에 돌아갈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던 병사들은 차디찬 주검으로 돌아온다. 20세기 초반의 독일 군대와 21세기 초반의 한국 사회는 다르다. 아니, 달라야 한다. 리더가 미쳤어도 바로 잡을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이재성 위원은 현재 한겨레신문사에 재직 중입니다.
2022-11-03 | hrights | 조회: 882 | 추천: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