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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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권용선(수유너머104 연구원), 석미화(한베평화재단 사무처장), 신하영옥(여성활동가), 윤영전(평통서문예원장),  이문영(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주무관), 정보배(출판 기획편집자), 조광제(철학 아카데미 상임위원), 최정학(방송대 법학과 교수), 홍미정(단국대 중동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 이스라엘-UAE 및 아랍 동맹 홍미정/ 단국대 중동학과 조교수 □ 이스라엘-아랍 동맹을 견인하는 UAE  2019년 12월 21일, 아랍에미리트(UAE) 외교국제협력부 장관 압둘라 빈 자이드는 아랍-이스라엘의 동맹을 지지하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고, 이스라엘 총리 베냐민 네타냐후로부터 즉각 환영을 받았다.  압둘라 빈 자이드 장관은 “이슬람의 개혁: 아랍-이스라엘 동맹이 중동에서 구체화되고 있다”는 제목의 영국 주간지 더 스펙터의 기사를 링크해 트위터에 올렸다. 네타냐후는 압둘라 장관의 글에 화답하는 트위터에서, “나는 이스라엘과 많은 아랍국가들 사이의 더욱 긴밀한 관계를 환영한다. 이스라엘과 아랍국가들 사이에 관계 정상화와 평화의 시기가 도래했다.”고 썼다.  현재 이스라엘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갖는 아랍 정부들은 UAE, 이집트, 요르단,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사우디, 바레인, 수단과 리비아 동부의 군벌인 칼리파 하프타르 정부 등이다. UAE가 이스라엘과 협력하는 이 축을 이끌고 있다. 특히 최근 UAE 중개로 이스라엘과 리비아 동부의 하프타르 정부의 군사적 관계가 강화되고 있다. 2017년 8월 8일, 미들 이스트 아이 보도에 따르면, 이스라엘군 관계자는 “우리의 친구의 친구, 우리의 적의 적은 우리의 친구다. 리비아 동부를 통치하는 칼리파 하프타르는 우리의 친구인 이집트, 요르단, UAE의 친구이며, 우리의 적인 IS와 싸운다. 그러므로 하프타르는 우리의 친구다.”라고 밝혔다. 2018년 UAE가 중개한 이스라엘-하프타르 회담에서 이스라엘은 하프타르 군대에게 무기를 공급하기로 합의하였다. 미들이스트 모니터 보도에 따르면, 2019년 12월 현재 하프타르는 이스라엘과 관계 정상화를 추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UAE가 이끄는 축에 맞서는 정부들은 터키, 카타르, 튀니지, 리비아 서부의 국민합의정부(GNA)와 UAE의 이슬라흐, 사우디의 알 사흐와,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등 각 국가 내 정부반대파인 무슬림형제단 세력들이다. 이 축을 선도하는 국가는 터키이며, 상호 협력의 매개체로 이슬람을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한다. 이스라엘-하프타르 관계 강화에 맞서, 최근 터키와 유엔이 인정한 GNA가 관계를 강화하고 있다. 특히 2019년 11월 27일, 터키와 GNA는 지중해에서의 배타적 경제수역 지정을 포함하는 ‘해상관할구역 경계협정’과 ‘안보와 군사협력 협정’을 체결하였다. 터키와 GNA가 공유하는 이 해상관할 구역은 동부지중해를 남북으로 가로질러 터키와 리비아 서부를 이어 주며, 이스라엘이 이 구역에 접근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게다가 2019년 12월 26일, 이란과 터키는 이슬람을 매개로 종교 협력 협정을 체결하는 등, 최근 터키와 이란이 가까워지고 있는 형국이다.  그렇다면, 최근 이스라엘은 왜 UAE가 이끄는 아랍 국가들, 특히 리비아 동부의 하프타르 세력과 협력 강화에 적극 나선 것일까? 그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타마르와 레비아탄 가스전을 비롯한 이스라엘 연안 동지중해 가스전에서 생산되는 천연가스의 유럽 수출을 위한 허브를 구축하고, 지중해를 동서로 관통하여 유럽으로 가는 수출용 가스관의 안전망 확보를 위한 것이다. □ 이스라엘 천연가스 소비시장: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요르단, 이집트  미국회사 노블에너지는 2009년-2010년에 동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타마르와 레비아탄 가스전들을 발견하여 개발하고 있으며, 이 가스전들에 대한 최대 지분(타마르 유전의 36%, 레비아탄 유전의 39.66%)을 소유할 뿐만 아니라 외국과 가스협정을 체결하는 주체다. 사실상, 이스라엘 연안 동지중해에서 생산되는 천연 가스 수출의 가장 큰 수혜자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미국회사 노블에너지인 셈이다.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듯, 2017년 9월 미국은 이스라엘 항구 도시 하이파에 해군기지를 건설하였다.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의 도움 허가’ 라는 제목이 붙은 2017년 미국방수권법 1259항은 “동지중해는 이스라엘 안보뿐만 아니라, 미국 안보 이익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며, 미 국방부는 이 지역에서 안보 능력을 계속 발전시키고, 증진시켜야한다.”고 규정한다. 사실상 이러한 미국의 정책은 터키와 시리아 등 이스라엘 인근 국가들로부터 이스라엘의 지중해 패권을 확보하고, 동지중해 유전 지대를 안정적으로 개발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끼지는 것으로 보인다.  이미 이스라엘 주변 아랍 국가들은 동지중해에서 생산되는 천연 가스 소비 시장이 되었다. 2014년 1월 6일, 노블에너지와 서안에 위치한 팔레스타인 전력회사(PPGC)는 제닌 지역 발전소에 20년 동안 공급할 12억 달러 상당의 천연가스 구매계약을 체결함으로써,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이스라엘 연안에서 생산되는 천연가스를 구매하는 첫 번째 주체가 되었다.  2016년 9월 노블에너지와 요르단 국영회사 NEPCO는 요르단에게 15년 동안 100억 달러 상당 천연가스를 공급하기로 사이에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 때, NEPCO는 “이 협정은 역내 협력을 강화시킬 것이고, 요르단을 동지중해에서 발견된 가스전을 활용하기 위한 지중해 프로젝트 연합과 EU의 일부로 만들 것이다.”라고 발표하였다. 또 이스라엘 에너지장관 유발 스테이니츠는 “이 가스협정은 극히 중요한 국가의 업적이며, 이스라엘과 요르단 사이의 유대와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강화하는 중요한 초석”이라고 밝혔다.  2018년 2월 노블에너지, 이스라엘회사 델렉 시추와 이집트회사 돌피너스 홀딩스가 이집트에게 150억 달러 상당 천연가스를 공급하기로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스라엘 관리들은 이 협정을 이스라엘 가스 산업 사상 최대 규모의 협정이라고 밝혔다. 게다가 2019년 10월 이집트가 가스 수입을 34% 늘리기로 결정하면서 약 200억 달러 상당으로 수입액이 증가하였다.  2019년 1월 카이로 회의에서 이스라엘, 이집트, 요르단,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키프로스, 그리스, 이탈리아는 역내 가스 시장을 창출하고, 인프라 비용을 절감하고, 경쟁력 있는 가격을 제공하기 위한 지중해 프로젝트인 ‘동지중해 가스포럼’을 세우기로 합의하였다. 2019년 7월 25일 카이로에서 미국 에너지 장관 릭페리, EU 에너지 사무총장, 프랑스, 세계은행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이스라엘, 이집트, 요르단,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키프로스, 그리스, 이탈리아 에너지 장관들은 ‘동지중해 가스포럼’을 공식적으로 출범시켰다. 사실상 이 포럼은 이스라엘 연안에서 생산되는 천연가스를 인근 아랍 국가들에게 수출하는 것은 물론이고, 세계 최대의 천연가스 시장인 유럽으로 수출을 확대하기 위한 것이다. 이로써 2016년 9월 요르단국영회사 NEPCO가 예견한 것처럼, 천연가스를 매개로 한 지중해 프로젝트 연합의 형태로 EU국가들과 아랍국가들 사이에서 협력관계가 창출되었다. □ 전운이 감도는 동지중해: 이스라엘-UAE/터키-GNA  이스라엘 공군은 2017년 3월 27일-4월 6일, 2018년 3월, 2019년 4월에 그리스에서 실시된 이니오호스 연례 훈련에 UAE 공군, 미국 공군과 나란히 연합 훈련에 참가하였다. 이외에도, 이탈리아, 영국, 키프로스 공군들이 이 훈련에 참가하였다.  이니오호스 훈련 실시 중인 2017년 4월 3일, 이스라엘, 키프로스, 그리스, 이탈리아는 이스라엘연안에서 시작하여 지중해를 관통하는 세계에서 가장 긴 해저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건설을 위한 공동선언을 채택하였다. 이 공동선언에 대하여 이스라엘 에너지 장관인 유발 스타이니츠는 “이것은 지중해 4개국, 이스라엘, 키프로스, 그리스, 이탈리아 사이의 경이적인 우정의 시작이며, 세계에서 가장 길고, 가장 깊은 해저 파이프라인이 될 것이다.”고 밝혔다.  2017년 6월 15일, 이스라엘 총리 베냐민 네타냐후, 그리스 총리 알렉시스 치프라스, 키프로스 대통령 니코스 아나스타시아데스는 지중해 연안유전에서 나오는 가스를 유럽으로 수출할 파이프라인 건설을 진행하기로 합의하면서, 경제협력을 강화하기로 공동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 자리에서 이스라엘 총리 베냐민 네타냐후는 “몇 달 전까지도 해저 파이프라인 건설은 환상의 영역에 있었는데, 이제 현실이 되었다.”고 밝혔다.  이 해저 파이프라인은 2천 2백㎞가 될 것이며, 이스라엘과 키프로스 연안 가스 유전을 그리스와 이탈리아까지 연결시키면서, 이스라엘을 역내 에너지 중심축으로 탈바꿈시킬 것이다. 이 계획에 따르면, 2025년경에는 이 파이프라인을 통해서 천연가스가 이스라엘로부터 유럽으로 수출될 것이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정책에 맞서 2019년 11월 27일, 터키 대통령 에르도안과 GNA 대표 파예즈 알 사라지(리비아 대통령위원회의 의장 겸 총리)는 지중해에서의 배타적 경제 수역 지정을 포함하는 ‘해상관할구역 경계협정’과 ‘안보와 군사협력 협정’을 체결하였다. 12월 5일 터키 국회는 이 협정들을 비준하였다. 터키와 GNA가 공유하는 이 해상관할 구역은 지중해를 남북으로 가로질러 터키와 리비아 서부를 이어 준다. 이 협정에서 터키는 이 지정된 관할 구역을 지역을 지나는 선박을 억류, 검사, 조사할 수 있으며, 이스라엘이 이 해역에 접근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따라서 이 해상관할 구역은 이스라엘에서 그리스로 가는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건설에 결정적인 장애물이다.  이 협정에 대한 대응 조치로, 12월 6일 그리스는 GNA가 파견한 리비아 대사에게 72시간 내에 그리스를 떠나라고 명령했고, 이집트는 12월 15일 리비아 대사관을 폐쇄하고, 대사를 추방했다.  2019년 12월 현재 동부지중해를 관통하는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건설에 중요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지역에 위치한 리비아 상공에서는 UAE와 터키 사이에서 새로운 양상의 드론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 전쟁은 2019년 4월 동부지역을 통치하는 군벌 칼리파 하프타르 장군이 GNA가 통치하는 서부지역 트리폴리를 공격하면서 발발하였다. 하프타르 군대는 UAE, 이스라엘, 이집트, 사우디, 수단(5천명 용병), 프랑스, 러시아(2천명 용병)의 지원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수단과 러시아 용병들에게 UAE가 자금 지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하프타르의 가장 큰 버팀목은 UAE 정부다.  이런 상황에서 2019년 12월 15일 다급해진 GNA 대표 파예즈 알 사라지는 카타르를 방문하여 카타르 국왕 타밈 빈 하마드 알 싸니로부터 경제와 안보 분야에서 GNA를 계속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연루된 이 전쟁에서 카타르가 적극 나서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터키는 GNA에게 드론 공격 및 무기를 지원하는 유일한 외부 세력이다. 2019년 12월 25일, 터키 대통령 에르도안이 튀니지를 방문하여 까이스 사이드 대통령과 리비아 문제에서 협력할 것을 밝히면서, 튀니지 안보, 터키 안보, 지중해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리비아 분쟁에서 GNA를 지원하기로 합의하였다. 12월 26일, 터키 대통령 에르도안은 GNA의 요청이 있을 경우, 2020년 1월에 터키 군대를 파견할 수도 있다고 밝혔다.  결국 이스라엘이 GNA에 맞서는 하프타르 군대를 돕는 주된 동기 중 하나는 이스라엘이 동지중해연안 유전으로부터 유럽으로 가는 천연가스관 건설을 위해 터키-GNA 연대를 부수고, 안전한 동부 지중해의 해상 루트를 확보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스라엘 정책에 UAE와 이집트는 적극 협력하고 있다.
2020-01-07 | hrights | 조회: 910 | 추천: 3
윤영전/ (사)평화통일연대 이사장  내 80평생에 잊을 수 없는 55년 전, 1965년 1월초, 군 말년에 요란한 전화벨이 울렸다. “해외파병요원 지원자 모집”이었다. 파병될 나라는 전운이 감도는 월남이라 했다. 파병지원자 신청 마감은 1월 20일까지였다.  당시 나는 원주 제235부대 서무계에 있었고 전역 3개월을 앞둔 육군병장이었다. 2년 전에 입대하여 오직 제대할 날만을 달력에서 하루씩 지워가고 있었다. 전통 내용이 나와는 상관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전쟁지역이기에 전사가 속출할 수도 있다고 한다. 좀 더 생각해 보면 세상에 목숨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지 않는가?  헌데 슬그머니 모험적 마음들이었다. 제대하면 복학해 공부할 것이다. 9살에 6.25전쟁을 목도하고,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란 영화도 보았다. ‘전쟁과 평화’를 실제 경험할 수 있기에, 나에게 체험의 기회라 생각했었다.  우리나라 정부수립 후 최초의 해외 파견으로, 어떤 일이든 최초라는 단어는 호감이 간다. 그런데 신원조회가 걱정이었다. 해방공간에서 맏형이 건준과 통일운동으로 재판도 없이 죽어갔었다. 의용군 둘째형과 부친도 부역자였기에 신원조회가 문제였다.  이번 신원조회를 만약 통과한다면 걱정을 덜 수도 있었다. 전언통신문을 정리하여 부대장에 올리고 부대원에 공람을 했다. 130명중에 단 2명만이 지원 했다. 그런데 부대장과 군종신부는 나의 지원 사실을 철회하라고 했다. 지금 월남 사이공 수도가 구정공세로 함락될지도 모를 위험한 곳이기에 살아온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허나 나는 한번 결심한 이상 지원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일단 지원자 중심으로 부대편성을 하면서, 나는 서무사병계 직무를 맡았다. 인사계 최 상사와 강 부대장과 함께했다. 양평으로 이동하여 부대편성과 참전교육을 받을 때였다. 1군사령부 인사참모 김 중령이 찾아와 지원을 철회하라고 했다. 부모님과 할머님이 파병사실을 아시고는 지인을 통해 철회부탁을 한 것이다.  군청에 다니던 맏형이 22살에 사상범으로 죽고, 둘째형이 참전으로 부상당했기에 셋째인 나를 죽음의 전쟁터로 보낼 수 없다는 것이다. “한 번 결심을 번복 않는다,”고 단호하게 의견을 말하니, 인사참모도 “가면 죽을 수도 있는데 어찌 고집부리나. 그러나 그리 결심이 강하니 어쩔 수 없네.”하면서 돌아갔다.  걱정이던 신원조회는 어인 일인지 통과되었다. 현리에서 2천명이 결단식에 2월 7일 서울운동장에서 박정희 대통령도 참석한 ‘한국군최초해외파견’ 평화의 사도 “비둘기부대” 국민환송식을 가족과 시민도 함께 했다. 전선 없는 월남전이기에 참전자들에게 특별히 범국민적 성대한 환송식이 거행되었는데 운동장 곳곳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2월 11일 부산 제3부두에서 해군엘에스티함대에 탑선한 선발대 600명이 주야 2주간 공해를 항해하여 베트남 붕타우에 도착했다. 두 달 전 와 있던, 이동외교병원 간호장교와 요원들이 함정가까이 와서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5일 만에 월남의 수도 사이공항구에 도착했다.  당시 월남의 정부수반인 판칵수와 국방장관 티우 중장, 키 공군사령관과 실세인 칸 소장도 환영식에 함께해 비둘기부대원 선발대 600명을 환영해 주었다. 다음날 사이공에서 26킬로 떨어진 비엔호아 지안에 도착했다. 부대 2킬로 반경이나 된 부대막사에서 우리 전우들은 첫날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한 달 후에 본대 1,400명이 ‘유에스메이카’호로 도착해 도합 2천명 부대원이 함께했다. 첫날 부대본부 연병장에서 조문환 준장(단장)이 훈시를 했다. 경례는 “경계철저” 그리고 “살아서 돌아가자”였다. 조 준장은 “이곳은 한국이 아닌 우방국이다. 내나라 수호한 것도 아니고 타국에서 헛되이 죽어갈 수는 없다”며 강하고 진한 훈시를 했다.  조문환 장군의 훈시에 전부대원들은 숙연했다. 전선 없는 전쟁터인 월남 현지는 당시 제네바협정에 의거 17도선, 북은 월맹, 남은 월남이었다. 프랑스와 80년 전쟁에 항쟁한 베트콩(베트남민족해방전선요원)이 월남의 3분의1을 관할하고 있었다.  우리 부대가 주둔 후, 첫 교전은 4월 2일, 본대에 도착한지 7일만이었다. 그날 “또순이”란 우리 영화를 상영해 이국의 향수를 달래주었었다. 밤10시에 전원취침에 들어갔는데 나는 당직을 맡고 있어 잠에 들지 않았었다. 11시에 베트콩 2개 중대는 비둘기부대 단 본부를 겨냥한 박격포탄 80여발을 선제공격하고 부대에 침공을 했다.  본부 가까이 포탄이 떨어져 나는 바로 비상벨을 눌렀다. 처음 겪는 실제전쟁 상황이었다. 베트콩의 포탄에 바로 응사하고 조명탄이 터지고 총소리가 요란했다. 어쩌면 교전에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일부 전우들은 우왕좌왕 오락가락 했다.  1시간여 교전 끝에 아군 8명의 중경상자가 붕타우로 후송되었다. 베트콩 1명 사망, 수십 명 중상, 총 5자루 노획을 상부에 보고했다. 그날이 ‘한국군 해외파견 최초 교전 승리’했다고 전사에 기록되어 있다. 그들은 이후 한국전투부대파병을 사전에 차단하는 작전을 펼쳤다.  그해 8월과 9월에 전투부대 맹호사단과 청룡여단과 백마사단이 퀴논과 나트란 캄란에 주둔했다. 10월에 주로 월남군과 미군이 함께한 베트콩 소탕작전을 전개했었다. 미숙한 정글전이기에 연전연패로 전우 수백 명이 전사하고 부상당했다. 나는 천주교 신자로 군종신부와 함께 탄산누트공항 영안실에서 전사한 맹호와 귀신 잡는다는 청룡전우 영혼에 미사를 올리면서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죽지 말고 살아가자고 했는데... 죽음은 일부 지휘관의 공명심과 무모한 소탕작전 때문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더 슬픈 사실은 우리 전우들이 벌인 베트콩 소탕작전에서 월남 민간인을 첩자로 여겨 우리 전사자 숫자와 같은 수천여 명이 희생된 것이다. 한 ․ 베트남 수교 후에 김, 노 대통령이 방문하여 특별히 사과는 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에서도 미군이 우리 민간인을 희생시킨 것과 같은 처지로 인한 죽음이었는데 과연 쉽게 잊히겠는가?  9년 동안 한국군 33만 명이 파병되고 6천여 명이 전사하고 2만 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고엽제 유사환자까지 수만 여명에 이르렀다. 나는 베트남에 파견 온 것에 대해 남루한 후회를 했다. 내나라 통일도 못하면서, 월남의 민족해방통일을 방해하는 용병으로 지원해 파병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항상 마음이 아팠다.  그들은 오래전 프랑스와의 80년 전쟁을 이겨내고 제네바협정으로 17도선 남북으로 나뉘어 다시 미국을 비롯한 한국 필리핀 여러 나라 외세가 참전해 전쟁이었다. 진정 월남인들은 말한다. 우리는 “공산 사회주의도 자본 민주주의도 싫다. 오직 외세의 간섭 없는, 전쟁 없는 베트남 민족으로 통일되어 평화롭게 살기를 원한다.”고.  미군은 한국군 10년 파병에 전투수당 기타 일체의 비용을 부담하는 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고엽제 피해 건은 빠져 있었다. 그간에 수차례 고엽제 보상을 미국법원에 제기했으나 64년 한미월남파견각서에 들어있지 않다며 패소하였다. 내 참전전우 수 명도 고엽제 환자로, 또는 유사환자로 치료 중이다.  미국이 월남을 동남아 기지로 삼았기에 발생한 과다 군사비용과 인명손실이었다. 우리도 월남전에 참전하여 한때는 적대국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프랑스를 이기고 73년에는 세계강국인 미국을 이겨내고 남북베트남의 민족 통일을 이루어 냈었다. 이제는 외세도 전쟁도 없는 평화를 얻고 있었다. 도이모이 정책으로 날로 성장하는 베트남이다. 사진 출처 - 구글  참전 이후 항상 마음 한 가운데 아픔이었는데, 다행이도 우리와 많은 교류와 협력을 하는 수교국이 되었다. 나는 수교된 후에 3차례나 참전 전우들과 하노이와 호치민시, 붕타우, 지안, 나트란, 캄란 등을 방문하면서 젊은 날의 아련한 추억을 떠올리기도 했다.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삶을 누리고 있는 베트남을 보면서 고맙기도 하다. 특히 근간에 우리나라 축구 박 감독이 베트남의 국가대표 감독으로 영웅적 칭송을 받고 있어 한 베트남 선린관계에 마치 지난 용병의 아픔을 덜어 주는 감을 느끼기도 한다.  나는 자주 국립묘지를 찾아 전우의 묘소 앞에서 고개를 숙인다. 또한 고, 조문환 장군 묘소에서 “죽지 말고 살아서 돌아가자”는 훈시를 기억한다. 지난번 운명한 채명신 주월 한국사령관이, 장군 묘를 사양하고 사병묘소에 묻혀, 사병과 함께하는 부하사랑 영혼이기에 명복을 빌었다. 필자 또한 살아서 이글을 쓰고 있어 감회가 깊다.  베트남 참전 반백년을 기억하면서 그들은 호치민 같은 민족지도자가 있었기에 미국을 이겨냈다. 우리는 언제 한반도 주변 열강들의 패권에서 벗어날까. 수치스러운 지구상 마지막 분단 70년, 한반도 주변 강국들의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양상이 아닌, 새우가 주름잡는 우리의 소원인 남북평화통일이 오는 그날을 염원해 본다. * 윤영전 : 작가(수필, 소설, 서예 칼럼니스트) 아호:九巖. 당호:傳孝堂. 한국작가회의 소설회원                수필집 (도라산의 봄) 소설집 (못다핀 꽃) 에세이집 (평화, 그 아름다운 말)                고희문집 (인연, 아름다운 만남) 수필선 (강물은 흐른다) 희수기념문집 발간                평화통일 삶을 살다(평화연대문집) 구암애창가곡집(CD) 등 다수 저서.
2019-12-26 | hrights | 조회: 286 | 추천: 4
- 지극히 ‘사적인’ 강사법 단상 권용선/ 수유너머104 연구원  대학에서 시강강의를 시작한 지 올해로 만 이십년 되었다. 외국에 나가 있던 몇 해를 제외하면, 거의 한학기도 거르지 않고 대학에서 무엇인가 가르치는 일을 했었고, 지금도 하고 있다. 2010년 조선대에서 근무하던 고 서정민 선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후 시간강사의 열악한 현실이 공론화되었고, 문제의식을 가진 소수의 강사들이 나서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2018년 8월부터 고등교육법이 개정 시행되었다.  일명 강사법이라 알려진 고등교육법 개정안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시간강사들의 열악한 법적지위와 처우 등을 개선하기 위해 오랜 진통 끝에 만들어지고 현실화된 것이지만, 그것을 실감하는 현직 강사들의 온도차는 제법 큰 것 같다. 2018년 법안의 국회통과 전후로 우리에게 알려진 법안의 핵심 내용은 강사의 법적지위 부여, 1년 이상 최대 3년까지 근무보장, 4대 보험 가입, 그리고 방중 임금과 퇴직금 보장 등이었다.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교육부가 이것을 안정적으로 시행할 만한 예산 확보에 실패하고, 강의인력 및 강좌축소라는 방식으로 재정 부담을 줄이려는 대학 측의 공격적 방어가 전방위적으로 일어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지난겨울, 그러니까 강사법이 본격적으로 시행되기 이전에 이미 대학들은 충분히, 이러한 일들을 진행했고, ‘강사공채’의 과정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천했다. 그 결과 대략 7,800 여명의 강사가 실직했고 많은 수의 강좌가 축소 ․ 통폐합 되었는데, 그중 소규모 강좌 6,000 여 개가 폐지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육부가 대학을 향해 할 수 있는 일은 사안에 대한 경고와 권고밖엔 없었고, 법안 구축에 개입했던 노조집행부의 활동은 반복적으로 대학의 악마성을 고발하거나 강사법의 훌륭함을 선전하는 데 집중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현장 강사들 다수는 강사법이 자신들을 보호해줄 거라고, 강사법으로 자신들의 삶이 더 나아질 거라고 믿지 않았다.  2019년 5월, 기존에 알려졌던 강사법의 핵심내용은 교육부, 대학, 노조 3주체로 구성된 TF팀 테이블에서 수정과 합의를 거쳐 <강사제도 운영 매뉴얼 시안>의 형태로 결정되었다. 이것에 따르면, 강사의 시회적 지위와 법적 신분을 보장했지만, “「교육공무원법」, 「사립학교법」 및 「사립학교교직원 연금법」을 적용할 때에는 교원으로 보지 아니한다.”는 단서가 붙는다. 방학 중 임금지급을 명시했지만, “임금수준이나 산정방법 등 구체적 사항은 강의 및 수행 업무 등을 고려하여 개별 대학의 임용계약으로 정하도록”해서 대학의 ‘자율권’을 보장했다. 내가 출강하고 있는 대학의 경우, 방중 임금은 ‘2주치’ 주는 것으로 결정했다. 또 매뉴얼에는 “퇴직금은 현행 근로관계 법령에 의거하여 1주간의 소정 근로시간이 15시간 미만인 경우에 대하여는 지급 의무사항이 아님” 국민건강보험은 “1개월 동안의 소정 근로시간이 60시간 미만인 단시간근로자는 건강보험의 직장가입자가 될 수 없어 강사는 적용되지 않음”이라고 되어 있다. ‘한 명의 강사가 한 대학에서 주당 6시간 이하의 강의만 할 수 있다’는 강사법에 따라 애초에 건강보험 혜택은 불가능했고, 퇴직금의 경우에도 대학 측의 호의에 기대는 것 말고는 어떤 법적인 권리행사도 기대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것이 아름답고 완벽한 강사법의 실제 내용이지만, 어쩐지 제대로 된 언론 보도는 극히 드물었다. 모두 다 아는 사실은 이 과정에서 적게는 7,000여 명에서 많게는 만여 명의 강사들이 일자리를 잃었다는 것, 강좌의 축소 통폐합으로 학생들은 양질의 교육 기회와 권리를 박탈당했다는 것, 그리고 이것의 결과가 대학교육의 전면적인 황폐화와 연결될 것이라는 점이다.  현재까지 진행된 상황만으로 보자면, 강사법은 누구의 행복도 보장하지 못한다. 지난여름 전국의 대학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었던 ‘강사공채’는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블랙 코미디였다. 특정인의 독점을 막는다는 취지에서 마련된 ‘한 학교 6시간 제한 시수’로 인해 적어도 두 세 학교 강의를 해야 기초생활을 간신히 유지할 수 있는 전업강사들 다수는 닥치는 대로, 원서를 내고 면접을 보는 전쟁을 치러야 했다. 많은 대학들이 연구업적, 강의경력, 면접 등에서 전임교수 선발에 준하는 요구들을 내놓았고, 그 과정은 응시자들의 피로, 자존감 하락, 마음의 상처를 대가로 요구했다. 법적인 연구와 강의 경력은 석사학위 소유자 정도, 특정한 분야의 경우 예외조항도 둔 터였지만, 강박적으로 내외부에서 작동되는 ‘시선의 검열’은 ‘정량평가’를 공정함의 최우선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법적인 문제가 되지 않는 선에서 대학들은 대체로 전임자들을 선택하기도 했는데, 이미 검증되고 익숙한 강사를 제외시키고 완전히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는 모험을 대학은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런 경험도 연고도 없는 대학과 관계를 맺으려면 탁월한 경력과 업적이 있거나 아주 운이 좋아야만 했다. 어떤 대학들은 겸임 혹은 초빙의 형태로 강사들을 유인하기도 했다. 비용은 줄이고 대학평가점수는 올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 - SBS  사실, 강사법의 가장 큰 수혜자는 대학이다. 재정상의 부담과 학령인구의 감소 등을 이유로 최대한 법의 그물망을 빠져나가며 안정적으로 ‘구조조정’을 단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나 알다시피, 우리시대의 대학은 더 이상 선량한 교육기관이 아니다. 적어도 사학들은 예전부터 기업의 돈세탁과 감세의 주요 통로로 활용되어 왔고, 지금은 대학 자체가 사업의 대상이 되었을 뿐이다. 등록금 동결 10년, 학령인구 감소 등의 이유로 학내 구성원들을 지속적으로 감축하는 동안에도 대학들은 외국인 학생들을 착실히 유치해왔고, 정원 외 외국인 학생들은 대학재정의 핵심적인 불로소득이 되어주었다. 자본가의 마인드로 무장한 대학은 비용 절감과 이윤생산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할 것이다. 자본은 이해득실을 따지지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선악의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러므로 대학의 행태를 규탄하고 그들을 악마화하는 것은 자기위안이나 책임회피의 태도일 뿐, 그것만으로는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 애초에 법안이 시행되기 전 다수의 현장 강사들, 대학 내부의 일부 관계자들, 교육관련 전문가들과 소수의 노조활동 유경험자들은 지속적으로 우려를 표했고, 법안의 보완을 주장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 10여 년 간의 힘겨운 싸움의 결과가 이렇게 나타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혹독한 ‘강사공채’의 시간을 통과해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쨌든 약간의 변화를 체감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비록 1년 혹은 최대 3년짜리 비정규직 교원의 신분이지만 법적 지위를 얻게 되어서 가장 기뻤던 순간은 ‘오피스365’ 프로그램을 무상으로 쓸 수 있게 되었을 때였다. 정말 기뻤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매년 혹은 3년에 한 번씩 치러야 한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하다. 시간과 노력과 비용의 문제도 있지만, 후배 강사와 하나의 자리를 두고 경쟁해야 하는 상황, 교수 신분으로 심사위원 자리에 앉아 있는 또 다른 후배와 마주쳐야 하는 상황들은 다시 떠올려도 불편하고 괴롭다. 언제까지 이런 과정을 견딜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언제까지 좋은 내용으로 학생들을 만나는 괜찮은 선생이 되려고 노력할 수 있을까.  이 와중에 한 무형문화재급 인사 한 분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20여 년 동안 출강하던 대학에서 더 이상 강의를 하지 못하게 되었고, 생활의 문제, 자존감의 문제로 시름이 깊었다고 한다. 완벽하고 아름다운 강사법에 흠집이 날까 두려웠는지 즉각적으로 이것은 강사법 때문이 아니며, 비정규직의 문제때문이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맞다. 강사법이 무슨 죄가 있나. 죄가 있다면, 이 강사법의 효과, 법을 효과적으로 자기성장의 기회로 삼는 대학의 무자비한 활동에 있고, 스스로 자긍심을 잃고 번민하며 노조 활동도 안 하는 주제에 볼멘소리나 하는 나 같은 철없는 일부 강사들의 태도에 있고, 예산도 확보 못한 채 대학의 자율에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교육부의 무능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선의와 희생정신으로 무장한 개인의 진정성을 공적 정의와 등가적인 위치에 올려놓으면서, 그것과 다른 의견은 적대하거나 계몽의 대상으로 취급하는 맹목적 선민의식, 그 고집스러운 태도가 세상을 망치는데 뜻밖의 기여를 하기도 하는 법이다.  고 김정희 선생은 동해안별신굿 전수조교로 이름이 높았고, 한예종 전통예술원의 겸임교수로 오래 후학을 양성해 온 분이었다고 한다. 언론에 알려진 것 외에 복잡하고 내밀한 사정이 더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현재 한예종에 출강하는 강사들 중에는 현장경험을 인정받아 학위 없이도 강의를 하는 분들도 있기 때문이다. 법안 자체와 예외규정에 따라 선택권자가 유연하게 강사채용을 할 수도 있는 구조인 것이다. 강사법 시행으로 강사들의 생사여탈권이 담당교수 개인에게서 작게는 학과나 단과대로, 나아가 학교행정시스템 자체로 옮겨간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 안에도 여전히 미시적인 차이들이 있고, 다양한 이해관계와 권력관계의 부딪침이 빈번한데 이것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래서 문득 궁금해진다. 이 얄팍하고 유약한 강사법에 무엇인가를 더 보태거나 빼는 일이 가능할까? 누군가가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그 일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여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문제들이 복잡하고 중층적으로 연루되어 있다. 누가 감히 나설 수 있을까? * 고 김정희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2019-12-18 | hrights | 조회: 269 | 추천: 4
홍미정/ 단국대 중동학과 조교수 □ 우파 시온주의 정치인들의 反아랍 경향  최근 몇 년 동안, 이스라엘에서 우파 시온주의자들과 아랍계 소수자들의 관계는 점점 더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유대민족 국가법’ 제정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인종차별 정책으로 이스라엘 내에서 유대인/아랍인 분열이 더욱 강화된다면, 이스라엘 정치와 사회에 폭발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이스라엘 중앙통계국 분류에 따르면, 2018년 7월 이스라엘 전체 인구는 840만 명 정도다. 전체 인구의 74.2%(623만 명)는 유대인이며, 전체 인구의 21.4%(약 181만 명)를 차지하는 아랍계 소수자들은 무슬림 약 150만 명, 기독교인 16만 8천 명, 드루즈 13만 9천 명으로 구성된다. 나머지 4.4%는 ‘기타’로 분류된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은 단일한 종족, 종교, 문화 공동체라기보다는 여러 종족과 다양한 종교와 문화 집단으로 이루어진 모자이크 사회다.  이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고위급 정치인들은 흔히 인종차별적인 메시지를 유포시킨다. 2019년 9월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는 크네세트(의회)선거 유세에서 “만약 당신이 리쿠드 당에 투표하지 않는다면, 아랍인들이 우리 모두를 전멸시킬 것이다. 아랍들은 여성, 어린이, 남성 등 우리 모두를 파괴시키기를 원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랍인들을 적으로 돌리는 선거 메시지를 통해서 역사적 팔레스타인 땅에 대한 유대인 독점을 주장하는 우파 시온주의 리쿠드당으로 유대인 유권자들을 결집시키려고 시도했다. 2019년 10월 라디오 방송에서, 이스라엘 공안부장관 길라드 에르단은 “아랍인들은 천성적으로 폭력적이다. 유대인들은 법정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지만, 아랍인들은 칼을 빼든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反아랍 정서는 이스라엘 주류 정치의 특징이다. 아랍어 사용지역 □ 인종차별적인 유대민족 국가법  이러한 이스라엘 정치인들의 인종차별적 주장은 앞서 2018년 7월 기본법으로 제정된 ‘유대민족 국가법’에 이미 반영되었다. 우파 시온주의자들이 이 법 제정을 주도하였다. 사실상 헌법으로 작용하는 이 법은 이스라엘의 민주적인 특성과 인종적 소수자들을 무시하면서, 이스라엘 국가에 대한 유대인의 독점권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였다. 기본법: 유대민족을 위한 민족국가로서의 이스라엘 2018년 7월 19일, 이스라엘 의회(크네세트)는 여러 시간의 논쟁 끝에 다음을 명시한 기본법, ‘유대민족 국가법’을 120명 의원 중 찬성 62표 대 반대 55표, 기권 2표로 통과시켰다. 1. 세 가지 기본 원칙 1) 이스라엘 땅은 이스라엘 국가가 건설된 유대인들의 역사적 고향이다. 2) 이스라엘 국가는 유대인들의 천부적, 문화적, 종교적, 역사적 자결권을 실행한다. 3) 이스라엘 국가 내에서 민족적 자결권을 행사할 권리는 유대인들에게만 있다. 2. 국가의 이름은 이스라엘이다. 3. 통합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다. 4. 이스라엘의 공식 언어는 히브리어다. 아랍어는 이스라엘 국가 내에서 특별한 지위를 갖는다. 5. 이스라엘은 유대인 이민과 귀환을 위해 개방될 것이다. 6. 이스라엘은 유대 정착촌 개발을 민족의 가치로 간주하며, 정착촌 건설과 강화를 고무시키고 촉진시키는 조치를 취할 것이다.  이 법은 이스라엘 내 소수자들을 배려하는 평등이나 민주주의를 언급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점령지에서 이스라엘 정착촌 건설과 강화를 규정함으로써, 1967년 전쟁으로 이스라엘이 점령한 팔레스타인(동예루살렘, 서안, 가자)과 시리아 지역(골란고원)으로 이스라엘 국가 영역의 확장을 꾀하였다.  이러한 인종차별 정책의 법제화는 특히 군복무를 하는 등 이스라엘 국가에 충성해온 아랍계 소수자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아랍계 소수자들은 텔아비브 시내에서 시위를 조직하는 등 유대민족 국가법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2018년 8월 11일, 유대민족 국가법에 반대하여 북부 갈릴리, 남부 네게브 등 전국에서 온 수 만 명의 아랍계 이스라엘 시민들이 “우리는 이등 시민이 아니다. 유대민족 국가법은 공식적인 인종차별주의”라고 쓰인 현수막을 들고 텔아비브 시내에서 행진했다. 이 시위대에게 고등 아랍 감시 위원회의장 무함마드 바라카는 “국가의 목표를, 한 인종 집단의 소유물로 만드는 조항이 있는 헌법은 오늘날 이 세상에 없다. 모든 시민과 거주자들의 평등권 조항을 포함하지 않는 헌법은 세상에 없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 내 아랍계 소수자들은 이스라엘이 모든 시민권자들이 동등한 권리를 갖는 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2018년 8월 7일, 유대민족 국가법 반대 시위를 주도한 드루즈 공동체의 종교 지도자 셰이크 모아파크 타리프는 “이스라엘 국가에 대한 의문의 여지가 없는 우리의 충성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유대인들과 동등하게 간주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 유대인들을 대신해서 아랍인들을 공격하는 드루즈  드루즈들은 동예루살렘이나, 서안 소재 이스라엘 검문소, 가자/이스라엘 경계 등 점령지, 즉 팔레스타인인들과 직접 부딪히는 지역에서 이스라엘을 수호하는 국경 경찰이나 군인들로 3년간 의무 복무를 한다. 즉 상대적으로 위험한 지역에서 유대인들을 대신해서 드루즈 아랍인들이 다른 아랍인들과 맞서 싸운다.  예를 들면, 드루즈 출신 준장 가산 알리안은 2014년 7월 8일-8월 26일까지 7주 동안 진행된 이스라엘의 가자 공격을 지휘하였다. 이 공격으로 1,400명의 팔레스타인인들과 13명의 이스라엘 군인들이 희생되었으나, 이 희생된 군인들도 대부분 아랍인들이었다. 또 2017년 7월 14일(금), 동예루살렘 알 아크사 모스크 입구에서 권총과 사제 총으로 무장한 아랍계 이스라엘인들 3명이 이스라엘 국경 경찰관 2명을 사살했다. 이 3명의 아랍계 이스라엘인들은 이스라엘 북부 아랍도시 출신이고, 사살된 2명의 이스라엘 국경 경찰관은 드루즈들이다. 결국 이 사건은 아랍인들이 드루즈 아랍인 이스라엘 군인들을 사살한 사건이었다.  드루즈들은 1956년 5월 ‘유대인과 드루즈 협정’에 따라, 이스라엘 군대에 의무병으로 징집된다. 따라서 드루즈를 제외하고, 유대인과 협정을 체결하지 않은 아랍계 이스라엘 시민들은 의무 징집 대상이 아니다. ‘유대인과 드루즈 협정’ 체결 당시. 이스라엘 총리 데이비드 벤구리온은 “드루즈들과 유대인들 사이의 협정은 단지 종이 위에 쓰인 글이 아니다. 드루즈 전사들의 피로 이루어진 신성화된 것이다.”라고 찬양했다. 이스라엘 국가에 피를 받친 드루즈들의 충성은 이후 이스라엘의 인종차별적인 정책과 유대인 독점권을 강화하는데 활용되어 왔다.  게다가 2018년 7월 드루즈 출신 크네세트 의원 가운데 이스라엘 우파 시온주의당 소속인 아유브 카라(리쿠드)와 하마드 아마르(이스라엘 베이테누)는 유대민족 국가법 제정에 찬성표를 던졌다. 아유브 카라는 서안에 이스라엘 정착촌 건설을 찬성하는 인물이며, 크네세트 부대변인, 총리실 장관, 2017-2019년 통신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2019년 9월 선거에서 재선된 하마드 아마르의 선거 슬로건은 ‘이스라엘 국가에 대한 충성 없이 시민권 없음은 드루즈 공동체에게 당연한 것이다’였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유대민족 국가법’ 제정 등 이스라엘의 소수자 차별과 배제 정책은 이스라엘의 필요성에 따라 진행되는 것이며, 소수자들의 이스라엘 국가에 대한 충성도와는 관계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아랍계 이스라엘인들의 정치적 통합 강화  드루즈 정치인들과 우파 시온주의자들의 적극적인 연대에도 불구하고, 이에 맞서는 아랍인들 사이의 정치적 통합은 아랍인들의 정체성을 강화시키면서 강력한 정치 세력화를 이끌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아랍계 소수자들의 적극적인 정치참여는 민주주의와 평등한 국가로 가는 희망의 불씨가 될 수 있다.  크네세트 총 120석은 전국 단일 선거구에서 비공개 단일 정당 명부 비례대표로 선출된다. 유권자들은 선호 정당에 투표를 한다. 각 정당들은 최소 득표율 3.25%를 넘어야한다. 이는 대부분의 경우 최소 4석 규모의 정당을 의미한다. 이로 인해서 정당들 사이에서는 의석 확보를 위한 연합이 이루어진다. 뿐만 아니라, 아랍계 소수자들은 유대 시온주의자들이 결성한 거대 정당에 이름을 올려 크네세트에 진출하기도 하였다.  전체 인구의 약 21.4%를 차지하는 아랍계 소수자들이 최근 10년간 배출한 크네세트 의석은 각각 11-16석에 이른다. 특히 2015년 선거에서는 주요 4개의 비시온주의 아랍 정당들이 공동명부를 작성해서 통합 세력으로 선거에 참여함으로써, 446,583표(10.54%)를 얻어서 공동명부로 13석(유대인 1석 포함)을 획득하고, 이스라엘 내 3대 정당으로 발전하였다. 이 때 전체 아랍인들은 크네세트 총 의석의 13%인 총 16석을 획득하였다. 이 선거에서 드루즈가 5석(리쿠드 1석, 시온주의자 연합1석, 쿨라누 1석, 이스라엘 베이테누 1석, 아랍 공동명부 1석), 즉 유대인들이 주도하는 시온주의 정당들에서 4석, 비시온주의 아랍정당들 공동명부 1석을 획득하는 선거 돌풍을 일으켰다. 이 때 아랍계 유권자의 투표율은 역대 최고로 63.7%였고, 드루즈 중 81%가 시온주의 정당들에 투표한 반면, 드루즈 이외의 아랍인들 중 19%가 시온주의 정당에 투표했다.  가장 최근에 실시된 2019년 9월 선거에서 아랍인들은 공동체별로 드루즈 3석(블루앤화이트1석, 이스라엘 베이테누1석, 공동명부 1석), 기독교인 2석, 베두인 1석, 수니무슬림 8석을 획득하였다. 드루즈 2석은 시온주의당 소속이었고, 드루즈 1석, 기독교인 2석, 베두인 1석, 수니무슬림 8석은 모두 공동명부 소속이었다. 그 결과 470,211표(10.60%)를 얻은 공동명부는 13석(유대인 1석 포함)을 획득함으로써 블루앤화이트(33석), 리쿠드(32석)에 이어 3대 정당 자리를 유지하였다. 이 때 드루즈를 제외한 아랍계 투표자들 중 82%가 공동명부에 투표한 것으로 드러났다. 아랍계 소수자들이 투표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가한다면, 공동명부 의석수는 훨씬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 정부의 강력한 유대화 정책 및 아랍계 소수자 분열 정책과 아랍계 소수자들 사이에서 서로 다른 정치적 견해에도 불구하고, 아랍계 소수자들은 크네세트 선거에서 비시온주의 정당들이 연합하여 공동명부를 작성함으로써 통합세력의 힘을 맛보았다. 앞으로 아랍계 소수자들은 ‘유대민족 국가법’ 제정 등 이스라엘의 강력한 인종차별적 정책에 대한 대응으로 통합을 더욱 강화하면서 이스라엘 내에서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부상할 것으로 보인다.
2019-12-03 | hrights | 조회: 631 | 추천: 1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대표  최근 심사가 계속 혼란스럽다. 이른바 ‘태극기 부대’와 ‘전광훈 무리’ 그리고 자유한국당 세력이 거동해 대대적인 광화문 집회를 연 뒤부터다. 솔직히 충격이 컸다. 정권에 대항하는 대대적인 시위는 ‘우리’에게만 해당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60년 4.19 혁명, 79년 부마항쟁, 80년 5월의 봄과 5.18 민주 항쟁, 87년 6월 항쟁 그리고 2016년 촛불 혁명 등, 면면히 이어져 온 민주화를 위한 대투쟁은 역대 군사독재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었고 또 그 잔재를 일소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일들은 말 그대로 투쟁이었기에 참가자들로서는 직간접적으로 목숨을 건 불안하고 위험한 것이었다.  그런데 전혀 반대 성격을 띤, 그러니까 민주화 투쟁의 성과인 민주정권을 오히려 타도하자는 대규모 집회 시위가 발생한 것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현상인가, 이 묘한 광기가 어디에 어떻게 잠복해 있다가 이렇게 분출하는가, 전반적인 성격으로 보아 분명 파시즘적인 대중 동원이 분명한 것 같은데 무조건 그렇게 예단해버릴 수도 없을 것 같으니, 도대체 이 기이한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여러 물음이 떠오르면서 심지어 불안한 느낌에 휩싸이기까지 했다. 게다가 조국 사태를 기화로 대학가에서조차 이에 편승하는 것 같은 시위들이 생겨났으니 더욱 심사가 복잡했다.  ‘우리’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을 것인데, 처음 생각대로 결국, 반동적 성격을 띤 대규모 집회 시위라고 규정하게 되었다. 반동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동하는 운동이 자신에게 가해질 때 부정적인 방향으로 튀어 오르는 반작용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대한 반동인가가 문제다. 몇 가지로 추슬러 보았다. 첫째는 촛불 정권이 내세운 ‘적폐 청산’ 작업에 대한 반동이다. 둘째는 정부 주도의 남북평화 기조의 형성에 대한 반동이다. 셋째는 민주화 투쟁과 성취의 전유(專有)에 대한 반동이다. 이 셋이 상호 강화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적폐는 크게 보아 두 가지가 맞물린 것이다. 하나는 권력에 편승한 부정부패이고, 다른 하나는 이에 대한 사법기관의 편파적이고 불공정한 처리다. 그 핵심은 신성해야 할 국가 권력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뿌리를 내린 특정 이익 세력에 의해 근본적일 정도로 크게 훼손되었다는 사실이다. 적폐 청산은 바로 국가 권력을 특정한 세력으로부터 독립시켜 철저하게 보편적인 중립성을 갖추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재벌 기업이나 보수 언론 및 검찰과 법원 등이 카르텔을 형성하여 국가 권력 이상의 위력을 발휘하는 것을 뿌리에서부터 싹을 잘라내겠다는 것이 적폐 청산의 취지다.  각성한 시민들의 대대적인 봉기로 세워진 민주정권은 그 정당성에 따른 자신감으로써 적폐 청산이란 ‘엄청난’ 구호를 내걸고 기존의 사회 권력에 선전포고를 한 셈이다. 두 명의 전직 대통령이 구속 기소되고, 헌정 사상 처음으로 전직 대법원장이 구속 기소되었다. 재벌 기업의 총수들이 줄줄이 부패 혐의로 기소되기도 했다.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 현실이 되어 눈앞에 전개된 것이다.  그동안 이들이 그렇게 불법적인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은 일반 대중의 사회집단 심리적인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일반 대중들 역시 적당한 기회주의적인 태도로 부당한 사회 정치적인 권력에 알게 모르게 편승함으로써 하부에서 그들을 옹호하는 두터운 층을 형성한 것이다. 여러 기업의 고위 임원을 비롯해 저 스스로 사회 엘리트로서 자부하는 사람들, 기존의 사회 형태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지점에서 충분히 자신의 삶을 긍정할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 그리고 권위주의적인 종교 권력에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예속되었던 사람들을 위시해 이들처럼 자신의 존재를 심리적으로 맡길 영웅적인 대리인을 필요로 하는 많은 사람 등이 이 일반 대중에 속한다. 이들은 ‘적폐 청산’이라는 구호만으로도 그들이 그동안 살아온 삶과 그 존재의미가 삭제당한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니 적당한 기회만 주어진다면 이들은 반동적인 행위를 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어제까지만 해도 핵미사일 공격이니 사드 배치니 하면서 적대적인 분단과 그에 따른 절체절명의 위협이 난무하다가 남북뿐만 아니라 북미 간에 전혀 예상치 못한 평화 분위기가 삽시간에 불어 닥쳤다. 그리고 이를 현 민주정권의 수장인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최대한 확대 심화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는 모습을 보였다. 앞서 말한 그동안의 현 상태에 충분히 만족하거나 만족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여기던 위 일반 대중들은 이 급작스러운 대대적인 분위기 반전에 일종의 아노미 심리 상태에 빠져든 셈이다. 그들은 남북분단과 한반도 내전으로 인해 적대적인 이데올로기가 만연한 냉전 상태에 맞추어 삶을 이행했고 그런 가운데 나름 자부할 수 있는 자신의 삶과 존재를 형성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남북분단에 따른 모순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러한 적대적인 상태를 체화하여 알게 모르게 그 분단 상태를 즐기고 누려온 사람들이다. 그런데 적폐 청산을 주도하면서 자신의 사회적인 존재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저 정권의 수장이 이제 그동안 철천지원수라 여겼던 적의 수장을 이 땅에 불러들이는가 하면 적진에 올라가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면서 파안대소하는 모습으로 희희낙락하듯 한다. 그들은 이를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다고 여긴다.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려는 자, 주사파, 공산주의자, 빨갱이, 나라 팔아먹는 놈, 심지어 찢어 죽일 놈 등 그들로서는 최고의 악담이자 저주라고 여기는 욕설들을 마음껏 퍼붓게 된다. 그런데 이런 분통 터지는 심정을 대낮 수도 서울의 한복판에서 안심 놓고 분출하여 마음껏 외칠 기회가 주어졌으니 게다가 모이라는 동원령이 떨어졌으니 어찌 마다할 수 있겠는가.  그동안 그들은 군사독재 국가건 시장 자유주의에 의한 잔인한 자본주의 국가건 저들 스스로 애써 세우고 지키고 발전시켜 왔다고 믿었기에 단 한 번도 나서서 나라를 비판해 본 적이 없다. 따라서 관제 데모를 제외하고는 대대적인 집단 시위를 해 본 적도 없다. 말하자면, 부당한 정권에 맞서서 정치적으로 대대적인 집단 시위를 할 때, 각자가 어떻게 개인의 차원을 넘어서서 공동체적인 위력을 공유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가 확장 심화하는가를 경험해 본 적이 없다. 어쩌면 민주화 투쟁을 위해 떨쳐 일어서서 ‘산 자여 따르라!’ 하고서 거대한 물결을 형성하는 ‘우리’의 존재 방식을 내심 부러워했을 수 있다. 비판적인 힘을 발휘해 무소불위의 정치권력을 감히 분쇄하고자 하는 저 ‘황당한’ 뚝심이 어디에서 나온단 말인가, 하고서 의아해했을 수도 있다. 오랜 세월 억압받으면서도 순응해 왔기에 순응을 자연스럽게 여기고 저항이니 비판이니 하는 데서 건립되는 삶의 의미를 거의 경험하지 못했고, 그래서 그저 이렇게 살다 가면 되겠거니 했는데 그게 아니라고 부추기도 독려하고 끌어내고 밀어주는 이상한 동지들이 나타난 것이다. 더군다나 태극기를 들고 나가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진정한 애국자임을 확신할 수 있고, 더불어 미국 국기를 들고 흔드는 것만으로도 세계 최고의 제국 시민이 된 것 같은 정확한 착각이 일기도 하는 데다, 수시로 텔레비전에 나오는 스타 정치인들이 함께 행진의 발을 맞추고 나를 향해 위대한 행동을 한다고 찬양하니 어찌 존재가 발양하지 않을 것이며 충동적인 흥분과 광기를 마다할 것인가. 더군다나 지금껏 절대적인 성역이라 여겼던 현직 대통령 이름을 마음껏 짓밟아 욕할 수 있으니 이 쾌감이라니. 그야말로 뜻하지 않게 대통령 이상으로 기세등등한 ‘완장’을 찬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대대적인 집단 시위에 참여하게 되자 동원이 아니라 자발적인 봉기라 여기게 되고 봉기라 여기지 않을지라도 적어도 자발적인 동원이라고 여기게 된다. 이에 집단적 충동에 의한 카니발적인 쾌감에 빠져들게 된다. 자유한국당 정치인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그동안 마주한 경험이 없는 엄청난 인파를 눈앞에 두게 되니 그들 모두가 나 때문에 흥분하는 것 같고,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고, 내가 아니면 누가 저들에게 삶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는가 하는 ‘위대한’ 착각이 나를 사로잡는다. 연단에 나서서 기염을 토하게 되니, 정치적 인생이란 바로 이 맛이구나 하면서 더없는 환희가 밀려온다. 선전 선동이야말로 정치인의 본령임을 몸소 체험하게 되고, 그래서 마약처럼 광장이 그리워진다. 정권 담당자의 일거수일투족이 마치 제 무덤을 파는 것 같고, 승리하여 최고 권력을 거머쥘 날이 멀지 않다는 정확한 오인이 자리를 잡는다. 사진 출처 - 노컷뉴스  그들 ‘광화문 세력’들은 가상적인 초자아에 길들어 있는 자들이다. 숭배할 대상이 있어야 하고 자발적으로 순응할 대상이 있어야 하고, 그 대상을 중심으로 형성된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되는 금기의 체계가 있어야 하고, 아울러 역설적으로 그 금기의 체계를 위반하는 적들이 있어야 한다. 독재가 있어야 하고, 제국이 있어야 하고, 제국 속의 제국이 있어야 하고, 그것들은 영원해야 하고 본질상 완전해야 한다. 그 완전하고 영원한 본질적인 가치를 의심해 본 적이 없고, 그래서 심지어 그 가치가 완전하고 영원하고 본질적이라는 사실을 굳이 반성해서 자각할 필요조차 없다. 따라서 진실과 정의와 진리를 알게 되면 그들도 깨닫고 열린 마음으로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는 자가 되리라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그래서 그들의 대대적인 준동을 바라보는 마음이 불안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그들을 치유 내지는 처리할 방법은 폭력뿐이다. 그들의 자아는 제국 속의 제국이고, 그 제국을 지배하는 원리는 폭력이기 때문이다. 미시적 파시즘의 물방울들이 모여 제법 큰 잠정적 파시즘의 강물을 형성한 셈이다. 잠정적인 파시즘의 강물이 현실화되어 범람하기 전에 그 흐름을 제어할 수 있는 국가 권력의 댐을 건설해야 한다. 국가 권력의 원천은 합법적인 폭력이다. 파시즘적인 폭력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은 민주적인 합법적 폭력 즉 민주적인 국가 권력뿐이다. 대내적으로 제대로 된 국가 권력을 행사할 수 있으려면, 대외적으로 국가 주권이 확고해야 한다. ‘광화문’의 저들이 미국 국기를 흔드는 것은 대한민국의 주권을 정확하게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것이고, 저들이 태극기를 흔드는 이유는 남북 간의 평화를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광화문 세력’의 등장은 한편으로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역사가 이처럼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임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게 된 계기를 제공하고 있다.
2019-11-27 | hrights | 조회: 214 | 추천: 5
이윤/ 경찰관  1990년대 중반, 수사업무를 시작한 지 3년쯤 지났을 때 나에겐 수사관으로서의 엉뚱한 자신감이 있었다. 내가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죄가 없는 사람도 죄가 있는 것처럼, 죄가 있는 사람도 없는 것처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증거를 조작하거나 고문을 하지 않고 단지 글쓰기만으로도 가능하다고 생각했다.(생각만 했다. 진짜)  조서는 그런 힘을 지녔다. 다음 질문에 대한 답들을 비교해보자. 문: 당신이 그 자전거를 훔쳤나요. 답1: 아니요, 저는 그 자전거를 훔치지 않았습니다. 답2: (주위를 둘러보며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아... 아니요. 저는... 그걸 안... 가져갔는데요. 답3: (화난 듯 눈을 크게 뜨고 큰 목소리로) 왜 저에게 그런 걸 물어봐요? 네? 제가 그랬다는 증거라도 있나요? 경찰이 이래도 되는 거예요? 참! 이거 생사람 잡으시네.  답들은 모두 범행을 부인하는 내용이다. 다만 답1은 단순한 범행 부인일 뿐 답을 하는 사람에 대한 평가의 여지가 없는 중립적 답변인데 비하여, 답2는 범인이 범행을 들키자 불안해하는 모습이라고 평가될 수 있고, 답3에 대해서는 뻔뻔한 범인이 딱 잡아떼며 오히려 화를 내는 모습이라고 느껴질 것이다. 아마 답2나 답3을 조서에서 읽으면 피의자가 부인한다는 사실보다는 진술한 사람의 인성과 성격, 심리상태에 대한 평가가 개입되어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구나.’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는 답1과 같이 말했는데 조서에 답2나 답3처럼 쓰는 것은 왜곡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피의자가 이 정도의 변형에 대해 내가 말한 것과 다르다며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까? 또 확실하게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고 자신할 수도 없다. 답2나 답3으로 말한 것을 답1처럼 쓰는 것은 왜곡이라고 할 수 없다. 정리해서 취지만 기록한 것이니까. 수사관은 왜곡의 경계에 이르지 않는 작은 변형으로 얼마든지 피의자에 대한 인상을 바꿀 수 있다.  조서(調書)란 녹취록과 달리 ‘조사한 사실을 기록한 문서’다. 따라서 말한 그대로 써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수사관이 관찰한 진술자의 행동이나 태도를 쓰는 것도 가능하다. 수사기관이 쓰는 조서에는 진술조서나 피의자신문조서 뿐만 아니라 압수조서나 검증조서도 있는데 기재되는 내용이 진술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조서는 수사관이 경험한 내용을 작성하는 일종의 보고서라고 할 수 있기에 피의자가 말한 모든 것을 그대로 기재할 필요는 없다. 그러다보니 말한 사람의 기억과 진술이 조서를 작성하는 수사관을 거쳐 문자화되는 과정에서 뉘앙스가 조금씩 달라지기도 한다.  조서는 수사관의 개인적 관점과 판단, 의견에 의해 오염될 수 있기 때문에 증거로 사용하기에는 위험하다. 조서 작성 후 진술자에게 읽어보게 하고, 매 장마다 간인하고, 서명날인하게 하였다고 하더라도 다르지 않다. 일부 유명하신 분들 외에는 그렇게 꼼꼼하게 늦은 시간까지 읽어보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 분들도 조서의 트릭에서는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조서에 나의 의도 및 기억이 원래의 그것과 다르게 기재되지 않도록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진술거부권을 행사하는 것이다. 진술거부권은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이므로 누구라도 수사기관에서 이를 행사할 수 있다.  수사기관이 글로 쓴 보고서일 뿐인 조서를 조심해야 하는 이유는 조서의 증거능력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검사가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에 대해 피고인에 의해 법정에서 진술한 내용대로 기재되어 있음이 인정되면(실질적 성립진정) 내용을 부인해도 증거능력이 인정된다. 경찰이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에 대해 피고인이 법정에서 ‘말한 대로 기재되어 있지만 그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고 할 경우(내용 부인)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그래서 경찰에서 자백한 누군가를 기소하기 전에 검찰에서는 경찰 작성 조서와 같은 내용으로 다시 조서를 작성한다고 한다. 그래야 그 자백을 유죄판결의 증거로 사용하기 쉬워지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 - KBS  이런 증거능력의 차이 때문에 자백을 받으려는 검사의 욕구가 경찰보다는 클 것이다. 자백을 받으려는 욕구가 크면 부인하는 상대방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괴롭히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가족들의 계좌나 행적을 표창장까지 모두 조사하고, 사업장의 모든 자료들을 압수수색하고, 친구와 거래 상대방을 뒤져 위법한 무엇 하나라도 건지려 한다. 자신의 괴로움은 물론이고 자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까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현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어진 피의자는 없는 죄도 인정하게 된다. 이 때 어쩔 수 없이 했던 소극적 인정이 조서에는 적극적 인정으로 기재될 수 있다.  피의자신문조서의 증거능력을 인정하는 것은 세계에 유례가 없다고 한다(경향신문, 19. 5. 21). 15년 전 읽은 논문에 의하면 전 세계에서 4개국(한국, 일본, 중동과 북유럽에서 1개씩)만 인정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것은 세계에서 유일무이하다거나 1등을 해도 별로 자랑스럽지 않다.  다행히 패스트트랙으로 12월 3일 국회 본회의에 부의되는 형사소송법 개정안에는 검사작성 피의자신문조서의 증거능력을 경찰작성 피의자신문조서의 증거능력 정도로 약화시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개정되면 수사기관이 피의자 신문과정에서 어떻게든 자백을 받아 조서에 기재하려고 하는 동기가 사라질 것이고, 결백한 사람이 억울하게 유죄판결 받을 가능성도 줄어들 것이다. 2020년에는 꼭 개정된 형사소송법이 시행되길 바란다.
2019-11-20 | hrights | 조회: 1177 | 추천: 12
이재환/ 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주무관  지역화폐가 유행이다. 민간 부문에서 공동체 구성원 간 회원제처럼 거래되는 대안화폐로 시작된 국내의 지역화폐가 최근에는 관의 주도로 법정화폐와 교환이 가능한 형태로 크게 확산되고 있다.  지난해까지 70여 곳에서 운영했던 지자체 지역화폐는 올해 현재 160여 곳으로 확산되었다. 확산의 배경에는 소상공 자영업자 살리기 차원의 적극적인 중앙정부 지원이 있다. 지역 내 골목상권과 전통시장 등에서만 사용이 가능한 대신 소비자가 지역화폐를 구매하면 지자체별로 3~11%의 선할인, 캐시백, 포인트 적립 등의 혜택을 제공하는데, 이 인센티브의 상당수를 올해부터 국비로 지원하고 있다.  급속히 확대되고 있는 지역화폐를 바라보는 시각도 점차 다양해지고 있다. 국가 차원의 통화 질서를 교란한다는 다소 공상적인 지적부터 기본소득의 지급 매개로 활용한다면 복지와 지역경제 살리기라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정책적 선택도 나오고 있다.  그 중에서 최근 현실적인 상황에 맞부딪치고 있는 지역화폐 관련 논란거리가 있다. 바로 ‘혈세 퍼주기’이다. 최근에 터져 나오는 지역화폐 관련 이슈를 보면 일부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다. 더 나아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표현을 정말 오랜만에, 맞춤형으로 떠올리게 한다.  이제 김영민 교수식으로 보다 근본적으로 물어야 한다. 지역화폐란 무엇인가?  지역화폐의 대전제는 이렇다.  1. 지역 내 소비의 부가 외부로 유출되는 역외유출을 막아 지역에 돈이 돌게 하여 순환경제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함이다.  2. 지역을 생각하는 협력적 소비가 지역공공체성 강화로 이어져 지역의 사회적 자본을 키운다.  2번이 전통적인 지역화폐(대안화폐)가 견지하는 공동체 활성화 및 자급자족 지향과 궤를 같이한다면, 1번은 경제적 효과에 초점을 맞춰 최근 특히 우리나라 지자체에서 폭발적으로 확산되는 지향점이다.  지역화폐는 바야흐로 양적경쟁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자치단체장의 지시가 떨어지면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이 ‘발행규모 000억 원’ 부터 걸고 나선다. 그러기위해선 쉽고 빠른 도입에 초점이 맞춰질 수밖에 없다.  지역화폐라고 하면 명칭 그대로 지역의 특성을 면밀히 파악하고 지역 주민의 이해와 요구가 충분히 모아진 후 도입이 이뤄져도 성공여부를 장담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다이내믹 코리아의 진가는 지역화폐 도입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발행액에 초점이 맞춰진 실적 올리기 방법은 이제 표준화모델이 되어가고 있다. 묘수라고 할 것도 없다. 구매 인센티브의 폭을 늘릴 수 있는 만큼 늘리는 것이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전국적으로 지자체 지역화폐의 구매 시 혜택은 3~6% 선할인이 평균적이었다. 혜택을 받는 기준도 1인당 월 30~50만원 수준이었고, 법인은 구매만 가능하고 할인은 못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과거 상품권 유통시장에서 벌어졌던 각종 폐해를 극복하고 지자체 예산으로 지급되는 인센티브가 과도한 재정투입으로 이어져 지역화폐의 지속가능성을 저해시키는 것을 경계한 기준이 이 정도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중앙정부의 지원을 지렛대삼아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파격적인 인센티브를 건 지자체의 지역화폐가 나오기 시작했다. (굳이 ‘지자체’ 지역화폐라고 강조하는 이유는 수 십 년 전부터 공동체형 지역대안화폐 활동을 벌여온 민간영역 분들의 수고가 떠올라서다. 그 분들이 최근 느끼는 자괴감도 함께 떠올려진다) 이어 발행(판매) 실적이 경쟁적으로 발표된다.  그런데 슬슬 이구동성으로 묻기 시작한다. 중앙정부의 지원이 언제까지 갈 것인가? 지원이 끝난 후에도 소비자 혜택을 유지할 수 있는가?  답은 나와 있다. 공짜 점심은 계속 될 수 없다.  앞서 1, 2의 대전제를 수용하기 위해서는 사용자의 신뢰 획득이 관건이다. 통화의 기본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그런데 최근 일부 지자체에서 파격적인 인센티브 도입 이후 재정의 문제로 혜택범위가 급감하자마자 사용자들이 보여준 반응은 대체로 ‘혜택이 좋아 잘 썼는데 이제 빠염(bye)~’이 주류다. 일부는 ‘이제 혜택 좀 보려고 했는데 벌써? 니들이 그렇지~’ 이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지역화폐는 불편한 돈이다. 온라인쇼핑몰에서도 백화점에서도 대형마트에서도 스타벅스에서도 못 쓰는 돈이다. 동네 골목가게나 전통시장, 마을기업이나 협동조합에서 쓰는 돈이다. 그래서 인센티브를 준다. 촉진의 역할이다.  이 인센티브는 지역화폐 활성화를 위한 중요한 요인이다. 예산을 들여서라도 마중물 효과를 보기 위해 필요하다. 전통시장현대화사업으로 전국의 시장에서 어기영차 지붕을 올렸지만 손님이 찾아왔다는 이야기는 듣기 힘들다. 하지만 지역화폐는 매우 직접적인 효과가 나타나는 소프트웨어다. 골목상권 살리기를 위해 그간 무수히 쏟아 부은 예산보다 훨씬 효과적인 재정정책이 지역화폐 인센티브 예산이다.  그렇다고 꼬리가 몸통을 흔들어선 안 된다. 인센티브가 지역화폐 사용의 주목적이 되어선 안 된다. 혜택이 떨어지면 쉽게 떠나고 다시 돌아오는 것도 힘들다. 이것이 지속가능성과 관련한 지역화폐의 더 큰 위기징후이다.  지역화폐의 존재이유는 내가 쓰는 이 돈이 우리 집 가계에도 좋고 동네경제와 지역공동체를 살릴 수 있다는 인식이 함께 공동체에 쌓일 때 유효하다. 왜 지역화폐를 쓰냐는 질문에 할인이 가장 큰 이유가 된다면 지역화폐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지역경제 활성화는 지역화폐의 중간 목표이다. 궁극적인 지향은 공동체를 강화하고 사회적 자본을 쌓는 수단으로 지역화폐가 활용되는 것이다. 이것이 진짜 지역화폐의 지속가능성이며 경쟁력이다.  한편에서는 인센티브를 강조하다 삐끗했지만 다른 부가서비스를 강화해 다시 소비자와 지역민들의 발길을 돌려세우겠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건투를 빌면서도 ‘꼬리가 몸통을 흔들어서도 안 되겠지만 사실 꼬리로 몸통을 흔들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부가서비스가 아무리 좋더라도 본 상품이 좋아야 손님이 온다.  어쨌건 다시 김영민 교수식 표현을 빌자면, “테이블을 당수로 쪼개고 목젖을 끄집어내 줄넘기를 하면서…” 까지는 아니더라도 지역화폐에 대한 진중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싶다. 자칫하다간 댕댕이에게 죽을 먹일 수도 있겠다 싶어서다. 먼저 논의할 지점은 ‘왜 지역화폐를 해야 하나?’겠다.
2019-11-13 | hrights | 조회: 259 | 추천: 1
윤영전/ (사)평화통일연대 이사장  내 나고 자란 고향의 효골에는 ‘잇고개’가 마치 관문처럼 있다. 약간 구불구불한 이 고개를 넘어 학교와 시내를 오갔기에 내게는 만남과 이별, 그리고 기쁨과 안타까움이 교차하는 고개였다. 특히 내 두 할머니와의 아련한 추억이 담겨 있는 고개이기도 하다.  두 할머니는 친가와 양가 사이의 동서 간이었다. 양할머니가 18살에 갓 시집을 오셨는데, 양할아버지가 나의 친할머니 친정의 지붕 일을 하시다가 그만 낙상하셔서 병을 얻어 두 달을 사시다가 운명하셨다. 신혼의 단꿈도 접은 양할머니는 자식도 없이 청상(靑孀) 과부가 되시었다.  집안 어른들은 양할머니가 홀로 사시는 모습을 안타까워했다. 양반가의 체면에 재가를 권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희생을 하며 살아 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양할머니는 15년을 당신의 친정과 시댁을 오가면서 남편의 묘소를 돌보고 제사를 지내며 망부(亡夫)에 대한 도리를 다하였다. 끝내 개가를 하지 않고 수절한 할머니에게 문중은 당신의 시아주버니의 둘째 아들인 조카를 양자로 결정하였다.  할머니는 긴 세월을 기다려 양아들을 맞이했다. 아들을 서당에 보내고 기르며, 바느질과 길쌈을 하여 모은 돈으로 논밭을 사들여 살림을 늘려가니 사는 보람을 가질 수 있었다. 아들이 서당에서 공부를 잘해, 군 백일장에 나갔는데 ‘국화’라는 제목으로 장원하여 자식 둔 재미를 보셨다. 그 아들이 열아홉 살이 되자 혼인을 시키고 그렇게 바라던 손자들을 손수 받으시면서 마치 자신이 낳은 자식처럼 총애를 하시었다. 손자들이 어머니 젖을 물리고 나면 바로 양할머니의 차지가 되어, 손자 키우는 재미에 세월이 가는 줄을 모르셨다.  할머니가 홀로 된 처음에는 남편의 죽음이 나의 친할머니 때문이라고 원망도 했었지만, 대신 귀한 아들을 양자로 받아 고마운 마음이 되었고, 더구나 손자를 셋이나 낳고 큰 손자는 똑똑하고 공부도 잘해 군청에 근무해 기쁘기만 했다. 두 할머니는 서로에게 섭섭함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고마움과 기쁨을 안겨 언제나 다정한 모습으로 큰집과 작은집을 왕래하시었다.  이런 두 할머니를 나는 어려서부터 존경했다. 손자들은 무엇이든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먼저 양할머니, 그 다음이 친할머니였다. 친할머니는 핏줄을 이어 준 할머니요, 양할머니는 나를 헌신적으로 길러주신 분이지만 정(情)은 길러준 양할머니에게 먼저 갔다. 동생에게 어머니의 젖을 빼앗긴 나는 나오지도 않는 할머니의 젖을 빠느라 퍽도 귀찮게 하던 손자였다.  여느 집안에나 있는 일이지만, 우리 집안도 지금까지 형제간에 알게 모르게 시기와 경쟁을 했었다. 처음 경쟁은 집이었다. 큰댁이 넓은 집터에 집을 지어 살았는데, 양할머니와 어머니는 샘이 나셨다. “우리도 큰댁과 똑같은 집을 짓고 살자”며 큰 결의를 하듯 말씀을 하시었다. 그러고는 열심히 모은 돈으로 집터를 사고, 큰댁을 지은 목수에게 똑같이 일을 맡겨 새 집으로 이사를 했다.  이리 이사한 다음에는 자식번성 경쟁이었다. 아들이 많아야 자식 농사에 성공한 것처럼 여기던 그 때에 두 할머니의 보이지 않는 경쟁의식을 엿볼 수가 있었다. 세월이 가면서 큰집과 우리집 손자녀들이 무려 17명이나 되어 두 할머니는 든든하고 기쁘게 생각하셨다.  그러나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듯이, 양할머니에게 비운이 몰려왔다. 스물두 살의 큰손자가 1949년 3월, 재판도 없이 죽임을 당해 아픔의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이어서 둘째 손자가 6․25한국전쟁에 참전하여 부상을 입었다. 그리고 셋째인 내가 집안에 알리지도 않고 월남전에 지원하여 두 할머니는 가슴 졸이며 15개월 동안 정화수를 떠놓고 무운장구를 빌어야 했었다.  어느 날 효골 집에 신문사 기자가 한국군월남 참전을 취재하러 왔었다. ‘혹 손자에게 불행한 소식이 있어서 전하려 온 게 아닌가?’ 깜짝 놀라신 할머니의 모습이 내 사진과 함께 신문사회면에 나기도 했다. 내가 두 할머니의 간절한 기도로 월남에서 무사히 귀국하여 고향에 돌아올 때도, 두 할머니는 잇고개에서 몇 시간을 기다리셨다. 내가 두 할머니께 엎드려 큰절을 올리니 덩실덩실 춤을 추시며 온 동네를 다니며 “우리 손자가 사지(死地)에서 살아왔다”며 기뻐하셨다. 사진 출처 - 구글  그 뒤 내가 고향을 떠날 때마다 잇고개를 넘으면, 두 할머니는 이제 가면 언제 오느냐며 아쉬운 작별을 하시곤 했었다. 내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한없이 바라보고 계셨다. 나는 그럴 때마다 두 할머니들을 향해 손을 흔들면서 마음이 아프기만 했다. 그로부터 수 년 후 이미 팔순을 넘기신 두 할머니는, 잠시 고향을 찾은 손자에게 “서울이 좋다고 하던데 우리도 데려가면 안 되느냐?”고 물으셨다. 그때 서울에는 두 할머니의 손자녀가 살고 있었기에 서울 한 번 가 보는 게 소원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그때는 감히 노인들을 서울에 모실 수가 없었다. 기차를 무려 12시간이나 타야 하는 먼 길이었다. 지금 같으면 자동차로 몇 시간이면 되고 서울 이곳저곳을 구경시켜 드릴 수 있었을 터인데 두 할머니의 소원을 들어 드리지 못한 게 지금도 큰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문중에서는 양할머니가 65년을 개가하지 않고 수절하며 양반가의 체면을 살렸다고 열부(烈婦) 표창을 주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도 두 어버이를 지극 정성으로 봉양한 효행으로 효자·효부상을 받으셨고 10년 전에는 나와 아내에게도 두 할머니와 부모님을 잘 모셨다하여 효자상과 효부상을 주었다. 한 집안에서 삼대(三代)가 효열(孝烈) 표창을 받은 일은 백 년만인데, 백 년 전에는 고조부모가 효열상을 받은 일이 있었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몇 년 전 “할머니의 소원(유언)을 말씀해 달라”는 나의 요구에 “소원은 무슨 소원이냐 ”하시고는 도선산 앞에 세워진 고조부모의 효열비(孝烈碑)를 눈여겨보시면서 당신이 생각하신 속마음을 말씀하셨다.  “비록 두 달도 함께 살지 못해 정도 들지 않았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할아버지의 묘와 쌍봉분(雙封墳)으로 하고, 여유가 있으면 표식이나 해주면 좋겠다.”는 소박하고 진지한 말씀이었다.  나는 할머니의 말씀을 깊이 새기고 실천을 다짐하면서, 8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신 지 10년째 되던 해 도선산 자락에 쌍봉분을 만들고 비문을 짓고 내가 직접 글씨를 써서 묘비를 세워 드렸다. 양할머니를 당당히 우리 후손들에게 말할 수 있었고 손자로서는 응당 해드리는 게 도리였다. 그리고 이듬해 생가 할머니에게도 묘비를 세워 드려 손자녀들의 정성을 올렸다.  요즘은 효열 정신이 구시대적 사고라고 치부해 버린다. 나만 잘살면 그만이고 눈앞에 보이는 순간의 만족이 최고라는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적인 사고가 만연하다. 효열 정신이 퇴색하니 부부의 도리도 무너져 이혼율이 하늘을 찌를 듯 높아가고 있는 것 같다. 부모 형제간에도 갈등이 늘어만 간다. 이 모두가 효열에 대한 정신이 점점 사라져 가서는 아닐지 하는 마음이 나만의 생각일까!  내가 이제 할머니들의 나이에 가까이 들어 느끼는 감정은 시대적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두 할머니의 순수하고 정감이 넘치는 그 모습들이 한없이 그리워진다는 것이다. 오직 희생정신으로 자식 사랑과 손자 사랑, 그리고 우애와 양보의 미덕을 끊임없이 몸소 보여준 두 할머니들이었다.  나는 가끔 고향을 찾아서 잇고개에서 두 할머니가가 주신 정다운 내리사랑 모습을 떠올린다. 그저 손자가 무탈하게 잘되기만을 바라시던 두 할머니의 사랑이 한없이 그리워지기만 한다. *윤영전(尹永典) 소설가. 수필가. 서예초대작가. 칼럼니스트 소설집(못다핀 꽃) 수필집(도라산의 봄. 강물은 흐른다) 에세이집(평화, 아름다운 말) 고희문집(인연, 아름다운 만남) 희수기념문집. 서초문학상, 국회통일상, 서예초대작가 한국작가회의 소설가. 한국문인협회 수필가. 평통서문예원 원장. 산영수필문학회장 역임 효열상(윤씨문중) 근묵회 회장. 통일부 통일교육위원. (사)평화통일연대 이사장.
2019-11-06 | hrights | 조회: 269 | 추천: 2
권용선/ 수유너머 104 연구원  그는 말했다. “예전에 정치 저널리스트라는 명칭은 그로티우스, 푸펜도르흐, 보댕, 몽테스키외, 블랙스톤, 벤담, 마블리, 사바리, 아담 스미스, 루소와 같은 위대한 저술가들에게 부여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정치에 관계하고 있는 모든 어설픈 저술가들을 지칭하고 있다. 뛰어난 사상가이자, 예언자이며, 사상적인 선지자였던 정치 저널리스트가 이제는 현실의 바람에 흔들리는 깃대가 되어버렸다.”(발자크, 「저널리즘」 중에서. 한국어 번역본의 제목은 「기자의 본성에 관한 보고」) 그의 시대에 신문기자는 모두 정치 저널리스트에 속했다. 이들 조직은 “기사는 한 문장도 쓰지 않으며 아무 것도 제대로 아는 것이 없기 때문에 모든 일에 관여하는” 사장, 주필, 사주, 편집장과 무대 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테너가수처럼 행동하는 논설위원, 연극의 조연과 같은 역할을 담당하는 전문기자, 편집장이나 사주의 명령에 따라 ‘자크의 요리사’처럼 짧은 기사들을 이리저리 오려붙이는 편집기자, 의원들을 성공시키거나 명성을 실추시키며 정치드라마를 연출하는 국회 출입기자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구독자를 잡기 위해 각양각색의 말들을 쉴 새 없이 쏟아내던 크고 작은 사이즈의 신문, 잡지, 팸플릿들, “먼저 때려라! 변명은 나중에 하면 된다.”는 구호를 공유했던 정치 저널리즘의 행동양식, 발자크의 눈에 비친 루이 필립 시대의 저널리즘이 존재하는 방식이었다. 몇 가지 세부만 살짝 바꾼다면, 같은 방식으로 우리시대의 저널리즘에 대해 풍자하거나 냉소하는 일도 어렵지 않아 보인다.  법무부 장관 자리를 둘러싸고 온 나라가 들끓었던 지난 시간 동안 ‘검찰개혁’이라는 구호로 수렴된 ‘사법개혁’의 절박함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한국사회가 지닌 온갖 ‘개혁할 거리들’을 우리 앞에 펼쳐 놓았다. 너무 많은 이슈들이 한꺼번에 장관후보자를 매개로 쏟아져 나왔고, 속보와 단독 타이틀을 단 기사들의 홍수 속에서 정작 중요한 것과 사소한 것, 법적 판단의 층위와 도덕적 기대의 차원, 사실과 전언과 정황은 구분되지 않았다. 분초를 다투며 쏟아지는 기사들 대부분은 사건 (혹은 상황)을 이해하고 판단할 시간을 독자들에게 배려하지 않았고, 어느 순간 사람들은 선결정된 자신의 입장을 지지할 기사들을 취합함으로써 각자의 방식으로 사실과 정의의 서사를 스스로 구성하기 시작했다. 미디어를 신뢰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미디어가 되거나 ‘다른’ 미디어의 목소리를 찾기도 했다. 전선은 복잡해졌고, 평소라면 선명한 대립의 입장에 섰던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적어도 언어적 차원에서는 그랬다. 돌이켜보면, 아무 것도 확인된 것은 없었고, 결정된 것도 없었지만, 검찰과 언론의 공조로 만들어진 프레임 속에서, 유죄추정의 분위기는 빠르게 확산되었다. 프레임은 법적인 판단과 근거 이전에 도덕성의 문제를 제기하는 식으로 짜였고, 여기에 장관 후보의 정무 감각이나 업무 수행능력에 대한 토론과 판단은 주변화 되었다. “고양이를 죽이는 것은 팩트가 아닌 뉘앙스”(권석천, 「검찰청의 편집자들」 중에서)라는 비유는 단순한 비유 이상이었던 셈이다. 사진 출처 - freepik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청문회가 열리기 전에 있었던 기자들과 장관 후보의 간담회, 비슷한 질문들에 대한 비슷한 답변과 사과가 다람쥐 쳇바퀴처럼 장시간 반복되었던 기이한 풍경이 여전히 씁쓸하게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기자들 누구도 현장의 분위기나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주목하지 않았고,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각자의 스마트 폰에 적혀 있는 질문들을 ‘읽고’ 있었다. 누가 저들에게 질문을 지시하는 걸까, 모든 언론사들이 간담회장을 수습기자들의 필드워크 장소로 활용하기로 약속이나 한 걸까, 누구든 핵심을 찌르는 묵직한 질문 하나쯤 던져줄 때가 되지 않았나. 이런 생각이 두서없이 떠올랐었다. 기자들은 당당해보이지도, 날렵해보이지도, 영리해보이지도, 사려 깊어보이지도 않았다. 저들은 왜 기자가 되고 싶었을까.  일전에 만났던 한 주간지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예전엔 그래도 내가 쓴 기사랑 타사 기자들이 쓴 걸 크로스 체킹할 시간이 약간이라도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불가능해요. 속보, 단독 기사들이 매분매초 튀어나온다고요. 머뭇거리는 순간 도태될지도 몰라요. 물론, 아주 가끔 정말 제대로 된 기사들이 나오기도 해요. 하지만 포털 메인에는 이런 양질의 기사들이 노출될 확률이 제로예요. 절대로 노출되지 않아요.” 사정이 이러니 기자들만 탓할 수도 없다. 광고주를 의식하며 감각적인 제목으로 클릭수를 늘리려는 언론의 욕망과 가벼운 내용으로 최대치의 정보를 얻으려는 유저들의 이해가 맞물려 돌아가는 디지털 환경은 이제 저널리즘 환경의 상수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뉴욕타임즈의 발행인 설즈버거의 말처럼, 포털 사이트가 플랫폼이 되는 언론 환경은 뉴스를 저널리즘이 아니라 단순 콘텐츠 수준으로 전락시킬 뿐이다. 우리는 이제 지식과 통찰과 결기가 느껴지는 제대로 된 뉴스들 만날 수 없게 되어버린 걸까?  지금으로부터 약 20여 년 전, 언론인 리영희 선생은 동료, 후배 기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괴로움’이 없어요. 어려운 시대 특히 변혁의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들인 기자들이 괴로워 할 줄 모릅니다. 그러다보니 공부를 하지 않습니다. 주요한 정치적 국면마다 보도 내용과 전망, 예측이 수천 번, 수만 번 틀렸어도 반성할 줄 모릅니다.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핵심은 어떤 것인지 천착하려는 각고의 노력과 의식이 없습니다. 이익집단의 파수병으로 안주하려는 경향이 너무 강합니다. 자기가 서있는 자리가 그야말로 소중하다고 생각한다면 그에 걸 맞는 인내와 각오, 그리고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기획대담; 리영희-김주언」<미디어오늘> 1997. 2. 3) 발자크의 시대로부터 180여 년, 리영희 선생이 활동했던 ‘검열’의 군사독재 시절로부터 수십여 년, 왜 저널리즘에 대한 그들의 걱정이 여전히 유효하게 느껴지는 걸까. 마음이 무겁다.
2019-10-23 | hrights | 조회: 329 | 추천: 7
홍미정/ 단국대 중동학과 조교수 □ 예멘 내전 구도  2015년 3월 이후 계속되는 예멘 내전은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미국과 유럽의 자금지원을 받는 ACLED 발표에 따르면, 2015년 3월부터 2019년 6월 중순까지 민간인들과 전투원들을 합쳐 9만 1천 6백 명의 예멘인들이 사망했다. 유엔 관계자에 따르면 예멘의 인권 상황은 세계 최악이며, 3천만 명에 가까운 예멘 주민의 3분의 2인 2천만 명이 굶주리고 있다.  사우디가 주도하는 아랍연합과 북서부 예멘에 기반을 둔 후티의 5년에 가까운 분쟁이 국제적인 관심을 끌고 있다. 2012년 2월 21일 압드라보 만수르 하디는 단독후보로 출마한 대통령 선거에서 2년간의 과도기간 동안 예멘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임기 만료 후에도 대통령직을 계속 유지하였다. 결국 2014년 9월, 후티 반군이 수도 사나를 점령했다. 2015년 1월 22일, 후티는 하디대통령을 사임시켜 가택 연금하고, 혁명위원회를 구성하여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게 만들었다. 2월 하디는 아덴으로 탈출해 사임을 철회하고, 후티의 정권 탈취를 맹비난하였다. 2015년 3월 25일 후티가 아덴을 공격하자, 하디는 보트를 타고 사우디로 탈출하였다. 이 때 사우디가 아랍연합군을 조직하여 하디정부를 복귀시키고, 사나와 주요 도시들로부터 후티 전사들을 축출하기 위하여 군사공격을 시작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예멘 내전을 사우디가 주도하는 아랍연합 대 후티의 구조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실제 내전 상황은 조금 더 복잡하다. 하드라마우트에 기반을 두고 활동하는 아라비아반도의 알카에다와 예멘 ISIL도 서로 경쟁하면서, 영토 장악을 위하여 후티 혹은 하디 정부 세력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다. 알카에다는 사우디와 예멘의 북부경계-중부내륙-남부해안가를 남북으로 잇는 상당한 영토를 장악하고 있다.  특히 주목할 것은 2019년 8월 남부예멘에서 사우디가 후원하는 하디정부와 UAE가 후원하는 남부과도위원회 사이에서 오래 계속된 긴장이 폭발하면서, 사우디와 UAE의 지역 동맹들 사이에서 전투가 발발했다는 것이다. UAE는 사우디가 주도하는 아랍연합군의 중요한 일원이기도하다. 전통적으로 매우 강력한 역내 동맹으로 알려진 사우디와 UAE 사이에서 진행되는, 아덴을 포함한 남부예멘 지배권 투쟁은, 역내 정치 변동 방향을 예측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할 것이다. 결국 중동 역내에서 사우디가 약화되고, UAE가 부상할 것인가? □ 남부과도위원회/하디정부의 분쟁  2019년 8월 15일 UAE가 지원하는 예멘의 남부과도위원회는 남부예멘의 독립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로써 남부과도위원회의 목표는 분명해졌다. 그것은 1967-1990년까지 남부예멘지역에 존재했던 ‘예멘 인민민주공화국 영역(남예멘)’에 ‘독립 연방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남부독립 국가건설을 반대하는 하디정부와 남부과도위원회 사이의 투쟁이 격화되었다.  이제 남부과도위원회의 주요한 적은, 주로 서북부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후티 반군이라기보다는, 2015년 후티에게 축출되어 아덴에 통치기반을 세우고, 사우디에 망명 중인 하디정부다.  사우디와 UAE는 명목상으로는 사나와 서북부 지역에서 후티를 축출하고,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하디정부를 복원시키기 위하여 2015년 결성된 아랍연합군의 동맹국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사우디와 UAE는 남부 분리 독립 문제를 놓고 서로 대립하고 있다. 최근 하디정부는 아랍연합군에서 UAE를 배제시킬 것을 사우디에게 요구하였다.  올해 8월 초부터 아덴에서 사우디가 지원하는 친 하디정부 세력들과 UAE가 지원하는 남부과도위원회세력들이 예멘 남부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전투를 벌이고 있다. 이 전투는 8월 1일 아덴 근처, 남부과도위원회 제1지원 여단장 무니르 알 야피에 대한 미사일 암살 테러 공격으로 촉발되었다. 남부과도위원회에 소속된 UAE 지원군과 사우디의 지원을 받는 하디정부에 충성하는 세력 간에 나흘간의 전투가 벌어졌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후티운동에 맞서 협력하는 아랍연합 소속인 사우디와 UAE 사이에 균열이 명백하게 드러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게다가 후티가 이 미사일 테러 공격을 자행했다고 즉시 밝혔으나, 남부과도위원회는 이 공격의 책임을 하디정부에게 돌렸다. 8월 6일 기자회견에서 남부과도위원회 부의장 하니 빈 브레이크는 ‘하디정부 및 무슬림형제단과 연계된 이슬라흐 당이 협력하여 아덴의 지배권을 완전히 장악하려는 계획의 일환으로 이번 테러 공격을 자행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이제 남부과도위원회가 하디정부를 아덴에서 추방할 명분이 분명해졌다. 흥미로운 것은 후티가 스스로 테러 행위를 자행했다고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빈 브레이크가 끝내 이 테러 공격에 대해 후티를 비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슬라흐 당은 1990년 사우디의 자금지원을 받아 창설된 정치 단체로 하시드부족 연맹 및 무슬림형제단과 연계되어 있다. 하시드부족 연맹은 과거 살레 대통령 통치 시절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부족으로, 북부지역에 기반을 두었다. 빈 브레이크가 하디정부와 이슬라흐 당을 연계해서 책임을 물은 이유는 하디 정부의 부통령이자 정부군 지휘관인 알리 모신 알 아흐마르 장군이 하시드 부족연맹 출신으로 이슬라흐 당의 창설 멤버이며, 북부지역에 위치한 마레브와 알 자우프 소재 이슬라흐 당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하디 정부군은 알 아흐마르 가문이 속한 북부 하시드 부족연맹과 이슬람주의자 세력인 이슬라흐 당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활동한다. 이러한 하디정부군의 특성 때문에 남부주민들은 하디대통령이 남부지역 아비얀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북부지역 이익을 대변하는 인물로 간주한다.  반면에 남부지역 이익을 대변한다는 과도국가위원회 지도부에서는 남부지역 라히즈와 알 달레 출신들이 영향력을 발휘한다. 사실 남부의 분리추구 의식은 1986년, 1994년의 주요한 두 번의 예멘내전에서 창출되고, 전임 통치자인 살레의 통치기간 동안에 실행된 남부 차별 정책으로 인해서 강화되어 남부지역에 뿌리깊이 존재한다. 남부분리주의자 군벌을 주도하는 세력은 주로 무장한 살라피, 사회주의자 및 예멘 인민민주공화국 재건을 추구하는 세력들이다. 또 지방에서 활동하는 과도국가위원회 연대 세력은 지역기반으로 지방 출신 전사들을 집결시키고, 각 지방에서 하디정부군과의 전투하고 있다. □ 남부과도위원회의 전투력 증강  2019년 8월 10일 하디정부의 내무부장관 아흐마드 마이사리는 “UAE는 남부과도위원회가 하디정부의 수도인 아덴을 장악하도록 도왔다. UAE는 남부과도위원회에게 400대 이상의 장갑차와 쿠데타 민병대를 지원했으며, 수천 명의 용병들을 고용하여 아덴 전투에 참가시켰다.”고 주장하면서 UAE를 비난했다. 이 전투에서 40명이 사망하고, 260명이 부상당했다.  2019년 8월 1일, 무니르 알 야피에 대한 암살 테러공격 직후, 남부과도위원회 세력들은 아덴과 아덴 주변 지역들 라히즈, 아비얀, 타이즈 등의 통제권을 장악하였다. 8월 9일~10일 라히즈 소재 하디정부군들, 즉 제4 지구 사령부와 헌병사령부가 남부과도위원회에 합류하였고 내무부 산하 부대들, 즉 라히즈 경찰청과 아덴, 라히즈, 아비얀의 특수부대도 남부과도위원회의 편에 섰다. 이로써 남부과도위원회가 아덴 주변 지역 하디정부군들을 흡수하면서 승기를 잡았다.  하디정부군에 맞서는 전투를 주도하는 남부과도위원회의 핵심부대인 보안벨트군은 야피 부족연맹으로부터 병사 대부분을 충원하며 아덴, 아비얀, 라히즈, 달레에 배치된다. 이외에 주요 지역에 기반을 둔 사브와니 정예부대와 하드라미 정예부대가 남부과도위원회 연계 세력들로 활동한다. 사브와니 정예부대는 아덴 동쪽 385㎞에 위치하고, 석유가 풍부하게 매장된 사브와 출신의 병사들로, 하드라미 정예부대는 하드라마우트 출신의 병사들로 구성된 지방군대다. 보안벨트, 사브와니 정예부대와 하드라미 정예부대는 남부 분리 독립을 추구하는 남부과도위원회의 중추세력들이며, 부족과 지역을 기반으로 전사들을 집결시키고, 각기 해당지역에서 전투에 참가한다. 따라서 이들 부대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하나의 지휘체계를 갖고 있지 않다. 8월 말경에 남부과도위원회가 사브와 지역 장악을 시도하면서, 하디정부군과 사브와니 정예부대 사이에 일진일퇴의 격전이 발발하였다.  사실 보안벨트, 사브와니 정예부대, 하드라미 정예부대 등은 2016년 후티 반군의 활동을 막아내기 위한 아랍연합군의 일부로 UAE의 후원을 받아 남부에서 창설되었다. 그러나 2017년 5월 하디정부로부터 분리 독립을 추구하는 남부과도위원회가 창설되면서 이 부대들은 남부과도위원회의 주력군이 되었고, 하디정부에 대항하는 독립 투쟁 전선에서 활약하게 되었다. □ 남부과도위원회의 독립국가 건설 가능성  남부가 통합된 예멘공화국으로부터 분리 독립하려는 움직임은 남부가 분리 독립을 요구하면서 촉발된 1994년 내전 이후 계속 되었다. 긴장이 고조되면서 2007년 남부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파벌들과 인물들이 이끄는 느슨한 연합으로 준군사조직인 남부운동이 출현하였다. 남부운동은 예멘공화국으로부터 ‘남부 탈퇴’와, 예멘공화국 창립 이전의 독립국가인 ‘예멘 인민민주공화국’으로의 복귀를 요구했다. 2017년 남부운동은 전임 아덴주지사 아이다루스 알 주바이디가 이끄는 남부과도위원회를 설립하였다. UAE와 동맹을 맺은 남부의 정치인들, 부족지도자들, 군부인물들로 구성된 남부과도위원회는 남부운동의 강력한 분리 독립 움직임을 계승하였다.  2019년 8월 15일, 남부과도위원회는 “오늘날 남부주민들의 승리로 인해 새로운 국면의 역사적인 순간을 맞이했다. 1994년 내전이후, 북부가 남부를 점령하여 25년간 통치하는 동안 남부 주민들의 투쟁은 엄청나고, 희생으로 가득 찼다. 이제 남부 독립 연방 국가를 회복시키려는 남부 주민들의 목표는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이다.”는 정치 선언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UAE가 지원하는 남부과도위원회에 맞서 하디정부를 지원하는 사우디의 대응은 매우 미온적인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9월 21일 사우디 정부는 리야드에서 망명중인 하디정부의 고문인 무타히르 아드난에게 사우디를 떠나도록 요구하였다. 그 이유는 ‘무타히르 아드난이 아랍연합을 비난하면서, 아랍연합이 남부과도위원회 세력들의 아덴 점령을 지원한 UAE를 응징하는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우디는 예멘 문제로 UAE와의 불화가 심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 같다.  사우디와 UAE는 중동 역내에서 군사적으로나 외교적으로 한편임에도 불구하고, 예멘 내전에서 양국의 이해관계는 결코 동일하지 않다. 외견상 사우디나 UAE 양 측은 북부지역을 장악한 후티에 맞서 가능한 한 협력관계를 유지하면서, 남부지역에서는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미국은 예멘 전쟁을 끝내기 위하여 후티와 대화를 시도하는 반면, 남부 예멘에서 사우디와 UAE 사이에 놓인 불화에 적극 개입하여 해결하려고 시도하지 않는다. 이러한 미국의 정책은 예멘에서 사우디의 영향력 약화로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남부예멘에서는 사우디가 UAE에게 밀리고 있는 형국이다. 미국에게는 사우디보다는 UAE가 예멘에서 영향력을 확보하는 것이 중동 역내정책을 조정하는데 유리한 것처럼 보인다. 이로 인해서 남부 예멘에서는 사우디가 후원하는 하디정부가 더욱 약화되고, UAE가 후원하는 남부과도위원회의 영향력이 한층 강화되면서 남부독립국가 건설을 이끌 것으로 보인다.
2019-10-08 | hrights | 조회: 576 | 추천: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