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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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김재완(방송대 법학과 교수), 신하영옥(여성활동가), 윤영전(평통서문예원장), 이광조(CBS PD), 이문영(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 정보배(출판 기획편집자), 정재원(국민대 국제학부 교수), 조광제(철학 아카데미 상임위원), 최정학(방송대 법학과 교수), 홍미정(단국대 중동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김재완/ 방송대 법학과 교수 그동안 정부 고등교육정책(대학구조개혁 등 일련의 정부정책) 방향은 전반적인 재정 감축을 통해, 각 대학이 스스로 필요한 재원을 확충하도록 시장경쟁성을 강화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곧 대학의 기업화와 상업화를 촉진한다. 기업의 최고 목표는 이윤창출/추구이다. 이러한 경영목표 아래 기업 및 상업형 대학은 필연적으로 돈이 되는 교육서비스를 확충하고 강화하며, 반대로 적자를 내는 교육서비스부문은 통합 및 퇴출시키고 있다. 오늘날 대학구조개혁이라는 미명 하에 이루어지고 있는 실질적인 대학구조조정의 모습이다. 기업화된 대학은 input은 최소화하고 output을 최대화한다. 이러한 구조 아래에서는 교육과 교육행정서비스를 담당하는 교수와 교직원 등의 저비용, 불완전 고용은 심화될 수밖에 없고, 그에 따른 교육의 질도 떨어질 수밖에 없으며, 학생과 학부모 등 국민이 부담해야 하는 교육비용은 상승할 수밖에 없게 된다. 지금의 대학은 최소한의 비용으로 고급인력과 시설을 이용해 이윤만을 고스란히 앗아가는 기업들의 좋은 먹잇감으로만 전락하고 있다. 때문에 교육이라는 공적부문에 대한 재투자는 아주 소극적이며, 정부의 재정지원 마저도 불안정하다. 이와 같은 상업화 논리에 따른 교육지배구조의 심화는 그나마 고등교육의 공공성을 지탱해 온 국립대학마저도 점차 온존할 수 없는 엄혹한 교육자본시장으로 몰아냄으로써 교육기회의 평등마저도 박탈하고 있다. 사진 출처 - 뉴스1 이로써 국가의 사회적, 문화적, 산업적 발전의 기반이 될 수 있는 선순환적인 고등교육의 다양한 인재양성체계는 무너질 수밖에 없고, 극히 일부의 지엽적이고 기술전문적인 사람들만을 양산해 내는 획일적이고 자본중심형적인 양성시스템으로 구축될 것이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오히려 경쟁력 강화에 역행하는 것이다. 다양하고 미래지향적인 세계적, 국가적, 사회적, 문화적, 산업적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인재양성체계를 갖춘 대학이 될 수 없는 구조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산업과 경제의 급변화에 따른 제반 문제를 해결하고, 지속적인 발전과 성공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재정지원이 충분하게 뒷받침 되는 고등교육의 공공성 강화가 가장 최우선적인 과제이다. 또한 학령인구의 감소가 국가 재정지원의 대폭적인 감소를 축으로 한 고등교육의 공공성 폐기와 대학의 인위적인 구조조정의 명분이 될 수는 없다. 학령인구의 감소는 근본적으로 고비용구조의 고등교육시장구조에 기인한다. 이 시대 우리나라의 대학은 더 이상 자유로운 공기가 넘쳐나는 엘리트 지성의 전당이 아니라 우골탑이라고 불리는 고비용의 교육시설로 전락하고 말았다. 수도권 사립대학의 등록금은 1천만 원에 육박하고, 이것은 2015년 OECD 교육지표 조사 결과 세계 2위의 수준에 이를 만큼 높은 수준이다. 더 이상 고등교육을 고비용의 시장경제에만 맡겨두어서는 안 된다. 분명 고등교육은 공공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의 재정지원은 안정적이고 지속적으로 확충되고 투하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정부의 고등교육에 대한 공적 책임의 강화와 대학의 민주적인 의사결정구조의 구축을 통한 자치의 강화가 이루어질 때에만 고비용구조로 인한 교육 불평등과 왜곡된 교육노동의 현실을 해소할 수 있으며, 아울러 양질의 학령인구를 증가시킬 수 있게 될 것이다. 탄핵 이후 대선 주자들이 제시해야 할 교육정책의 방향은 공공성의 강화에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35 | 추천: 0
이문영/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트럼프가 취임 후 발표한 ‘반(反)이민 행정명령’으로 2017년 벽두부터 온 세계가 시끄럽다. 이 행정조치로 이란, 이라크, 시리아, 소말리아, 수단, 예멘, 리비아 7개국 국민의 미국 입국이 90일간 금지되고, 난민 입국 프로그램이 120일 동안 중단됐다. 그 결과, 망명, 신병치료 등을 위해 미국 입국을 허락받은 7개국 출신 난민이나 국민은 물론, 휴가나 외유 등으로 잠시 해외로 떠났던, 7개국 출신 미국 영주권자조차 공항에서 발이 묶였다. 이 조치는 ‘이민자의 나라’라는 미국의 정체성에 정면으로 배치될 뿐더러, 이동과 거주의 자유를 보장하는 보편적 인권의 심대한 침해라는 점에서 문제이다. 물론 미국 내에서도 이 행정명령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미국의 각 주 법원은 물론 연방법원조차 이 행정명령의 잠정중단과 효력정지를 선언했고, 트럼프 탄핵청원 웹사이트에는 현재 10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서명을 마친 상태이다. 그럼에도 트럼프는 지리한 법정 싸움 대신, 새로운 반이민 수정명령 발효로 자기 뜻을 관철하고자 한다. 이민자와 난민을 겨냥한 이 반인권적 조치를 트럼프라는 괴물의 돌출적 행동으로만 치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여론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 행정명령으로 대표되는 트럼프의 반이민정책을 지지하는 미국 내 여론이 약 40%에 달한다. 또 이 조치에 대해 영국, 독일 등 유럽 정부가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지만, 유럽에서조차 反이민자, 反난민 정서가 하나의 뚜렷한 정치적 흐름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프랑스에서 마린 르펜으로 대표되는 극우정당이 누리는 높은 대중적 인기가 이를 잘 보여주며, 이러한 현상이 단지 프랑스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 역시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민자나 난민이 겪고 있는 이 곤경 속에는 근대 국민국가 체제가 기반한 근본 모순이 숨겨져 있다. 일찍이 한나 아렌트가 ‘인권의 역설’이란 개념으로 통찰해낸 이 모순의 본질은 저 유명한 프랑스 인권선언(“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서부터 구조화된 ‘인권과 시민권의 분리’에 놓여 있다. 국민국가 체제에서 강력하게 작동해온 ‘국적=시민권=인권’ 사이의 동일화 기제는 인권이 시민권의 일부가 되게 함으로써, 시민권의 상실이 인권의 상실로 이어지도록 했다. 바로 여기서 ‘인권의 역설’이 발생하는 바, 국적과 시민권을 갖지 못함으로써 국민도, 시민도 아닌, 오로지 인간으로 남은 사람들에게 바로 그 인간을 위한 권리, 즉 인권이 송두리째 박탈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시민권과 인권의 동일시가 시민권과 인권의 원천적 분리로 결과 지어진다. 그녀 자신이 나치에 의해 국적을 박탈당한 무국적자이기도 했던 아렌트는 ‘문명의 한 가운데서 산출되는 이 야만’ 속에 ‘인권의 종말’을 예언했다. 사진 출처 - afpbbnews 트럼프의 반이민 행정명령이나, 유럽의 반난민, 반이민 정서 속에는 국적과 시민권의 동일시, 시민권과 인권의 동일시가 초래할 수 있는 ‘반인권’의 위기, ‘문명 속의 야만’이 도사리고 있다. 국적에 의해서만 보장되는 시민의 권리, 또 시민임으로써만 보장되는 인간의 권리는 소속되지 않은 자, 그럼으로써 시민일 수 없는 자를 인간의 경계 밖으로 내몬다. 첨단의 문명 속 사람, 노동, 자본의 이동이 일상화된 지구화 시대, 날로 증가하는 난민, 불법체류자, 무국적자의 존재와 그들의 열악한 현실은 이 문명 속의 야만을 생생하게 재현한다. 사실 지구화 시대 근대를 떠받쳐온 국민국가(nation-state)의 두 요소, 즉 nation과 state의 조화로운 일치가 깨어진지 오래다. 자연히 nation이 함축하는 ‘국민’으로서의 소속, state가 함축하는 그 정치적 권리, 즉 국적(nationality)과 시민권(citizenship)의 일치 역시 현재 빈번하게 위반되며 근본적인 재고를 요청받고 있다. 지구화 시대 일반화된 소속의 복수성(複數性)은 시민권의 탈국가화를 요구하며, 시민권으로 대표되는 권리의무가 국적이나 소속이 아닌 ‘거주’에 기반해야 함이 강력히 요청되기도 한다. 국적이나 소속이 함축하는 동질적 정체성의 허구성에 대한 탈신화화도 상당부분 진척되었다. 유럽 시민권, 글로벌 시민권, 트랜스/포스트내셔널 시민권 등으로 대표되는 최근 담론은 이와 밀접히 관련된다. 이에 비한다면 트럼프가 대변하는 국가주의의 소환, 그에 기반한 반이민, 반난민 정책은 얼마나 시대착오적인가. 얼마 전 신문지상에 러시아의 탈북노동자 최명복씨의 사연이 소개되었다. 러시아 극동 연해주 벌목공 출신의 최명복씨는 이미 20년 가까이 러시아에 거주하며 현지인과 결혼해 두 명의 자녀까지 둔 상태다. 그런 그가 현재 불법체류자로 러시아 경찰에 체포되어 북한으로 강제 송환될 위기에 처해있다. 북한으로의 귀환은 그에게 가족과의 생이별은 물론, 죽음을 뜻한다. 이에 러시아 인권단체 메모리알(Memorial)이 그를 도와 유럽인권재판소에 보호신청을 하는 등 구명활동에 나서고 있다. 이런 인도주의적 노력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은 다름 아닌 국가다. 즉, 러시아와 북한이 1년 전 맺은 ‘불법입국자 및 불법체류자 송환ㆍ수용에 관한 정부 간 협정’이 그것이다. 국민 외 모든 예외적 존재들을 가차 없이 내몰아버리는 국가는 인간을 인간의 경계 밖으로 내모는 역할을 앞장서 하고 있다. 트럼프의 반이민 행정명령을 작동시키는 강력한 국가주의, 그 지지자들을 하나로 모으는 국가 재건의 이데올로기가 가지는 위험성이 여기에 있다. 그 위험성은 표면의 배타성이나 반인간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문명의 발전에 따른 인식의 발전, 관점과 가치관의 발전적 재구성에 역행하기 때문이다. 김정남의 피살 이후 오로지 그 사건에로 향하는 국내 관심의 1/10 만이라도 최명복씨를 향하길 바라는 것은 이 때문이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34 | 추천: 0
마흐디 압둘 하디/ 팔레스타인 국제문제연구소장 (Mahdi Abdul Hadi, Head of PASSIA, http://www.passia.org) □ 팔레스타인인들의 노력 지난 60년 동안 우리 팔레스타인인들은 추방지와 망명지 그리고 조국에서조차, 아랍주의자 국제적주의자 혹은 사회주의자를 양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우리의 내부 담론은 에밀리 하비비의 소설 『낙관론자』였고, 우리의 외부 담론은 갓산 카나파니의 소설 『하이파로의 귀환』이었다. 우리의 정책은 살라 칼라프(아부 이야드)가 한때 ‘no-yes’(거절과 수락을 동시에)라고 설명한 것으로 요약될 수 있다. 피델 카스트로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상황판단이 빠른 ‘no-yes’의 달인이었다고 논평했다. 이스라엘의 점령 기간 동안, 우리는 종교적, 정치적, 민족적 노선 사이에서 이리저리 방황하며 우리의 조국과 애국심, 정체성을 되살리는 데 주력했다. 우리는, 이탈리아 철학자 가람치가 말했던 바와 같이, 정신적 비관론의 상황을 머뭇거리며 의지의 낙관론으로 극복했다. ▲ 마흐디 압둘 하디(Mahdi Abdul Hadi) 팔레스타인 국제문제연구소장 이스라엘 국가 건설 20년 후, 1967-1974년 외부담론은 유엔에서 야세르 아라파트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었다. “나의 손에서 올리브 가지를 떨어뜨리지 마라”, 반면 시민사회에서 주장하는 내부 담론은 “회복력 증진”이었다. 외부 내부 담론 양 측은 시인 마흐무드 다르위시의 말을 수용하면서, 팔레스타인이라는 관념이 얼마나 거대한지,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과 견고한 의지가 얼마나 어려운지, 그리고 팔레스타인 조국의 22%에 불과한 지역에 건설될 팔레스타인 국가가 얼마나 작은지를 표현했다. □ 인티파다: 팔레스타인인은 피할 수 없는 현실적 실체 이스라엘의 점령은 언제나 우리 민족의 계획을 방해했다. 우리와 충돌하고, 팔레스타인 조국 안팎에서 우리 지도자를 살해하고, 1982년 레바논을 침공해서 사브라와 샤틸라 대량학살을 저지르고, 레바논으로부터 PLO(팔레스타인 해방기구)를 추방하였다. PLO는 미국의 조정, 아랍의 감시, 이스라엘의 묵인으로, 그리스해 항구를 통해 튀니지로 이주했다. 12년을 더 기다려서 1994년(오슬로 협정) 우리는 국제적인 합법성을 얻고, 유럽의 개입과 형제들과 동지들의 임시적이고 긴급한 조치를 통해서 팔레스타인 내부 유혈분쟁을 중단하고, 추방된 PLO지도부가 귀환하였다. 12년을 기다리는 동안, 조국에 있는 사람들의 고통은 점점 더 커져 갔고, 해외 지도자들의 소외감은 더욱 심해졌다. 1987년 12월 발발한 인티파다(팔레스타인 민중봉기)와 새로 결성된 인티파다 통합지도부가 내부와 외부 세력들을 결집하고, "우리는 피할 수 없는 현실적 실체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자신감을 회복했다. 인티파다의 철학은 ‘백색혁명’과 새로운 팔레스타인인들의 전략 초안이었다. 이 전략은 “나는 당신 이스라엘을 파괴할 수 없고, 당신은 우리 조국 팔레스타인을 우리에게서 빼앗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인정하고, 두 국가 창설에 기반을 둔 정치적 해결을 위한 협상 및 화해로 가는 제3의 길을 요구한다"라는 주장에 근거했다. 팔레스타인 민족회의(PNC)는 인티파다를 수용하고 알제리에서 독립 선언문을 발표했다. 모든 사람들이 점령지(가자와 서안)에서 발발한 팔레스타인 인티파다에 공감하였고, 심지어 이스라엘인들조차 떠났다. 미국이 PLO를 인정하였고, 1989년 5월 제임스 베이커 국무장관은 이스라엘에게 대이스라엘이라는 비현실적인 비전, 팔레스타인 땅의 합병, 점령지에서 이스라엘 점령촌 활동을 포기하고, 팔레스타인인들을 정치적 권리를 누리는 이웃으로 대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1990년 10월 1일 알-아크사 사원의 안뜰에서 21명이 사망한 학살을 저지르는 등, 민중의 인티파다를 소멸시키고 인티파다 통합지도부의 메시지를 약화시키기 위해 그들의 점령지에 대한 억압적인 식민정책을 계속 유지하였다. □ 시류에 편승하는 신기루 협상들 역내에서의 사건들(1990년 걸프 전쟁과 이라크의 쿠웨이트 점령)은 모든 당사자에게 영향을 미쳤다. 미국의 우산은 역내 국가들을 보호하고 침공을 종식시키기 위해 움직였다. 팔레스타인 카드는 미군 주둔을 정당화하고, 이스라엘에게 압력을 행사해서 1990년 10월 30일 개최된 마드리드 회의에 팔레스타인-요르단 공동대표, 역내 당사자들과 국제 당사자들과의 협상에 참가하도록 하는데 활용되었다. 마드리드 회의 이후 우리는 다양한 형태의 ‘시류에 편승하는 협상들’로 바빴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망명 중이거나 점령지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이 협상들에 참가했고, 당시 이 협상들은 사실상 워싱턴에서 이루어졌다. 두 번째 단계에서, 이 협상들의 주도권이 점령지의 팔레스타인 엘리트들로부터 망명중인 고립된 팔레스타인인들에게 넘어가면서 협상 장소는 오슬로로 옮겨졌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튀니지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이 협상을 암만과 카이로가 공유하지 못하도록, 그리고 점령지라는 길고 깊은 터널 밖으로 밀어냈다. 네 번째 단계에서는, 망명 중이거나 점령지에 있는 팔레스타인인들 모두 시류에 편승하는 협상을 중단하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당국이라는 상자’에 합류했다. 그들은 이 자치정부 당국이 역내 국가들의 도움으로 자신들의 목표를 성취하기를 기도한다. 그들에게 협상은 ‘생명의 길’이었다! 우리가 위키리크스에 있는 협상 문서들을 검토했을 때, 우리가 투쟁해왔던 것들, 즉 점령 종식, 조국 해방, 점령촌 건설 중단, 토지몰수 중단 등을 찾지 못했다. 예루살렘 출입구들은 우리가 이슬람 모스크와 기독교 교회에 들어갈 수 있도록 열려있지 않았고, 우리의 국기는 오리엔트 하우스와 예루살렘 성벽에서 내려졌으며, 708km의 인종차별적인 분리장벽이 건설되었다. 우리의 5만 명의 수감자들과 억류자들은 석방되지 않았다. 이 수감자들은 창살 뒤에서 고통을 끝내고 그들의 존엄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을 요구하며 4, 5개월 동안 단식투쟁을 하였다. 가자지구에 대한 네 차례의 전쟁으로 인해 아픔과 고통이 증폭되었으나, 이 전쟁에 대하여 암만이나 카이로는 어떠한 개입도 하지 않았다. 가자지구 대파괴 이후, 몇몇 국가들이 샤름 알 셰이크에서 만나서, 가자지구 재건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당국 지원으로 허구적인 수십억 달러를 제안하였다. □ 협상도 저항도 없이, 무너지는 팔레스타인 사회 우리의 주된 걱정은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당국이라는 케이크’인 18만 명의 고용인들이 제공하는 행정업무와 서비스를 두 부분으로 나누는 것이다. 한 부분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신성한 안보협력’이라는 의제와 ‘협상이 생명이다’라는 담론의 지배를 받는 서안이고, 다른 한 부분은 지하터널을 포함하여 ‘평화의 종착역’이라는 의제와 ‘수년간의 휴전’이라는 담론의 지배를 받는 가자지구다. 그러나 두 지역들, 서안과 가자에서 협상도 없고, 저항도 없다. 오히려 난민촌에 비참함과 절망만이 존재한다. 난민에 관한 이야기는 대학교, 특별한 행사와 종교 축제에서만 들린다. 이제 우리는 호텔, 은행 대출, 회사 주식의 확산과 새로운 엘리트의 탄생을 볼 수 있다. 하나는 정부와 무관한 상업 엘리트의 재왕절개에 의한 출산이었다. 두 번째는 여전히 권력의 자리에 있는 파벌 엘리트의 탄생이었다. 세 번째는 학생들의 가방에서 칼을 압수하는 것을 자랑하는 준군사안보 엘리트이다. 네 번째는 생계수단을 제공하는 프로젝트, 항만과 공항, 건설에 관한 투자 프로젝트를 찾는 일종의 시민사회 사업과 비정부기구들이다. 예루살렘은 성벽 뒤에 버려졌고, 예루살렘 주민들은 역사유적과 종교유산 강탈을 애통해하고, 예루살렘 청년들은 아랍인들과 범아랍주의를 비판한다. 예루살렘의 알-아크사 모스크와 성묘 교회는 예배의 자유를 위해 인간의 양심에 호소한다. 예루살렘 도시는 이슬람교도, 기독교인들과 이방인들을 조롱하는 반면, 망명 생활을 하는 팔레스타인인들은 정체성, 조국, 기억을 찾으며 자책한다. 팔레스타인 시민사회는 주거, 일자리, 건강, 교육, 표현의 자유에 대한 권리와 요구에 사로 잡혀있다. 벨푸어의 범죄와 불행한 선언이 100주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회의, 집회, 기념행사 등의 현상이 확산되어왔다. 유일한 예외는 교육, 예술, 회화, 발명 등의 분야에서의 개별적인 팔레스타인인의 성공과 탁월함이다. 이 시나리오의 중반부에서 텔아비브는 2009년 헤르츠리야의 보고서를 바탕으로 ‘경제적 평화’를 도입하려고 시도했다. 이것의 추정되는 목적은 팔레스타인 경제를 위해 수백만 달러를 약속하고, 40%의 임금 인상 약속으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직원들을 매수하려 시도함으로써 경제적 번영의 섬을 만드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국가라는 최종지위 결정 문제는 뒤로 미뤄질 것이고, 가자지구에 있는 200만 명은, 불확실한 미래에 남겨져서, 라파 국경을 찾거나 터키, 키프로스, 심지어 미국의 중재로부터 나오는 항구도시 프로젝트를 찾을 것이다. 서안에서의 인종차별 정책은 계속되고 있다. 인종, 종교, 정체성을 근거로 권리와 이익에 대한 차별을 받고 있다. 팔레스타인인 주거지는 팔레스타인의 12%로 제한되었고, 70만 명의 유대인 점령민들이 서안에서 날뛰며, 팔레스타인 땅을 강탈하고 식민촌을 건설하면서 확장해나가고 있다. 다른 한편, 1967년 휴전선 안(현재 이스라엘)으로부터, 이스라엘 인구의 20%를 차지하고 있는 팔레스타인 사회의 목소리는 다음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즉 그들은 시민권의 권리라는 측면에서 평등권과 정의를 위해서 정치적으로 투쟁한다. 그들의 길은 1948년 나크바(재앙, 이스라엘 국가 건설)로부터 수십 년 후에도 여전히 길고 험난하다. 그들은 점령지 대중의 저항을 지지하지만, 이스라엘 시민으로서 이미 얻은 것을 잃지 않도록 점령지 대중저항에 개입하지는 않는다. 이스라엘 내부에 있는 팔레스타인 사회는 시온주의 우파정부를 전복하려는 이스라엘 여론에 영향을 주기 위해 모든 정당과 협력하는 것이 현재의 임무라고 말한다. □ 팔레스타인 대의를 국제화하자 더 큰 불행, 즉 조국, 민중과 우리의 권리로 남아있는 것을 제거하려는 ‘청산의 수순’을 피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의 전략은 팔레스타인 대의를 국제화하고, UN안전보장이사회부터 시작하여 최근 UN 안보리결의안에 비추어, 이스라엘 점령촌에 대한 국제적 비난을 계속해서 모으는 것이다. UN과 국제사회는 점령된 팔레스타인 국가를 인정해야 하며, 우리는 국제형사재판소와 기타 국제기구에 가입해야 한다. 우리 팔레스타인인들은 팔레스타인 대의의 국제화, 조국에서의 팔레스타인인들 통합, 점령에 관한 모든 형태의 협력 거부와 중단, 그리고 점령 세력에 대한 기소 등을 포함하는 새로운 전략을 원하고 필요로 한다. 거리에서 팔레스타인 청년운동은 "자유와 정의를 위해 존엄하게 살기 위해 저항하라"라는 기치 아래 계속되어야 한다. 청년은 저항의 도구를 명확히 해야 한다. 첫째, 팔레스타인 민족 서사, 유적, 유산에 대한 지식과 교육이어야 한다. 둘째, 이스라엘에 맞서는 불매운동, 투자 철회, 경제제재(BDS)와 이것을 해외로 확장시키는 것이다. 셋째, 두려움의 문화를 상대방에게 전가하는 것이다. 넷째, 팔레스타인 내부의 부패, 무질서 및 선동을 벗겨내는 것이다. 이전의 투쟁에 자부심을 갖고, 새로운 탄생과 새로운 정당성에 대한 희망으로 현재의 고통을 끝내고, 미래의 지평을 열어주자.
2017-08-07 | hrights | 조회: 25 | 추천: 0
정재원/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 최순실 일당의 국정농단 사태로 드러나게 된 소위 ‘박근혜 게이트’로 인해 국민들에게 충격과 분노를 야기했지만, 몇몇 인사들의 구속과 탄핵안 가결 이후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나기 전까지 박근혜 일당의 조직적이고도 치밀한 저항이 지속되고 있다. 특검 수사를 방해하기 위한 다양하고도 조직적인 저항은 많은 국민들의 분노를 자아내고 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이러한 전술은 국민들에게 소위 ‘피로감’을 느끼게 하는데 일정 정도 성공하고 있는 듯 보인다. 이에 어쩔 수 없이 밀리기만 해 왔던 박근혜 일당은 서서히 반격을 조직화해 왔고, 일베를 비롯한 집단들과 노년층들을 중심으로 허위 거짓 정보를 확산시키는 전술을 통해 이들을 결집시켜 아래로부터의 선동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박근혜 게이트로 인해 정권 재창출이 어렵게 되었다고 판단해 박근혜 반대 분위기를 주도했던 한 당사자인 극우 종편들의 논조가 변하면서 상황도 변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바로 소위 촛불의 힘으로 인해 대선에서 야당 후보가 당선되는 것을 저지해야 한다는 것, 아니 최소한 야당이 정권을 잡더라도 자신들의 특권적 부패 구조를 근본적으로 흔드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기득권 세력들의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바로 이러한 공간을 박근혜 일당이 철저하게 이용하고 있는 것이고, 그 효과는 이미 크게 나타나고 있다는 데에서 사태의 심각성이 있다. 바로 그 문제의 핵심에 대선이 있고, 대선 후보로 누가 나오며, 누가 대통령에 당선될 것인가에 대한 과도한 관심 조장이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물론 이미 예정되어 있던 대선이라는 정치적 일정이 있기 때문에 불가피한 측면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대선과는 무관한 박근혜 일당의 국정농단 사건에 대한 철저한 단죄, 나아가 이를 방조 혹은 적극적으로 이용해 온 다양한 부패한 기득권 지배세력들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이 세워져야 하는 것이 우선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국사회는 기득권 지배세력들이 만들어내는 대선 후보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 쇼’ 앞에서 크게 흔들리고 있다. 여러 차례 강조해 왔지만, 사전적 의미에서의 ‘보수주의’나 ‘보수파’, 특히 진보세력의 한 짝처럼 보이는 ‘보수 정치정당’이란 허구의 개념이다. 즉 현실에서는 전통적 가치를 옹호하거나 기존 사회 체제 유지를 통한 안정적 발전추구가 아닌, 탐욕과 특권의 독점적 확보와 확대를 추구하는 기득권 세력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들의 헤게모니 하에서 그들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집단과 오랜 기간 세뇌된 집단이 있을 뿐이다. 반동주의와 수구주의, 혹은 극우주의를 구별하는 것은 사실 커다란 의미가 없는 관념적인 학술적 분류이다. 단지 서구에서는 오랜 기간 아래로부터의 끈질긴 저항의 결과, 그리고 사회주의 국가들의 탄생으로 인해 위험을 느낀 지배 집단들이 어쩔 수 없이 일국 내에서는 타협을 하고 일정 부분 양보를 하면서 제도적으로 통제를 받게 된 것뿐이다. 따라서 일국의 경계를 넘을 경우 이들은 자신의 본질을 어김없이 드러내고 있음은 우리 모두 목격하고 있다. 이것이 현실인 것이다. 반대로 이러한 조절 장치가 없는 비중심부, 비서구 국가들에서는 외부의 힘과 때로는 대립하고 때로는 같이 하며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 있는 것이 보수의 진짜 모습인 것이다. 박근혜 게이트로 인해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확인하고 있다. 형식적, 제도적인 일부를 제외하면 과연 우리가 정당정치가 제대로 작동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그리고 정말 위험한 생각은 이러한 국정농단이 박근혜 시기에만 있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박근혜-최순실 일파가 이명박 정권에서나 전두환-노태우 정권 하에서처럼 조금 더 세련되게 좀 더 다양한 기득권 분파들에게 이익을 나누어 주었다면, 이 모든 것이 완벽하게 은폐되어 있었을 것이다. 기득권 세력의 한 축인 검찰과 언론은 철저하게 이 모든 것을 덮어 버렸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이것이 우리의 실제 정치이다. 문제는 마치 4년 내내 전혀 관심이 없던 비인기 스포츠 종목들에서 한국 대표 선수가 선전하는 중계에 몰두하며 갑자기 애국심에 불타 광분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이, 현재 우리는 급속하게 대통령 후보 문제나 그 지지율, 정당과 인물들의 합종연횡 등에 몰두하면서 정치 쇼에 빠져들고 있다.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전문가라는 집단들조차 다시 특정 정치 정당의 집권이 무엇인가를 바꿀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면서 정당에 대한 지지와 비판의 문제만으로 스스로 영역을 축소하고 있다. 사진 출처 - 프레시안 이러한 박근혜 게이트의 토대는 바로 추악한 지대추구적 세습자본주의체제에 있다. 김동춘 교수에 따르면, “이 체제의 핵심에는 자산의 불평등, 그리고 노력 없이 획득한 자산의 부당한 세습이 있다. 상위 10%가 부의 66%를 독점하고 있고, 그 부가 정당한 투자에 의한 이윤이나 임금소득이 아닌 지대추구의 방법으로 얻어진 것이고, 그것이 상속세, 증여세조차 제대로 내지 않고 세습되는 나라에서 희망이 있을 수 없다”고 한다. 최근 추정치이긴 하지만, 해외조세도피처에 한국인 재산만 무려 888조가 은닉되어 있다는 보도가 있었다. 정치민주화가 후퇴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경제민주화는 필수적이라는 주장들이 있지만, 전적인 대안체제를 제시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 구체적 상에 대해서는 서로 대립되는 주장들이 접점을 찾지 못 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 정치 정당 중심의 그럴싸한 쇼 무대 뒤에서는 자본과 관료의 지배는 한층 더 강화되고 있다. 그 무시무시한 기득권 연합 지배세력은 굳건하게 국정교과서와 사드 배치, 위안부 합의 등등 수많은 문제를 낳고 있는 정책들을 폐기하지 못 하게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탄핵이 기각이 될 수도 있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또 다시 그럴싸한 정당의 얼굴로 나오는 기득권 대표가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 상황은 이렇게 무섭게 흘러가는데, 이러한 본질을 폭로해야 할 주요 세력들 내에서는 대선이 다가올수록 촛불의 성과를 누가 전유했는가에 대한 논쟁부터 진보 정당의 후보 전술이나 기존 야당 지지 문제 등까지 또 다시 홍역을 치를 것이 분명하다. 정치가 쇼이며, 보수 정당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 본질은 변하지 않지만, 정치 과정을 무시하거나 정당 정치가 불필요하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특히 거리정치, 운동정치와 제도정치가 결합되어야 한다는 추상적인 논의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현재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에 불과한 정치에 대한 과잉, 특히 그것을 정당 집권 자체로 한정하는 구습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따라서 기득권 세력이 다시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저지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 야당 집권 이후에도 아무 것도 하지 못 하게 방해하는 구조 구축을 막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근본적으로 사회를 개조할 수 있는 정책 실행 집단을 모든 야당 내에 구축하도록 적극적으로 개입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어느 정당이 되던 순수한 논리가 아닌 실질적 사회변혁을 도모할 수 있는 근본적 토대 구축을 위해 더 큰 그림을 그려야 할 것이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42 | 추천: 0
마흐디 압둘 하디/ 팔레스타인 국제문제연구소장 (Mahdi Abdul Hadi, Head of PASSIA, http://www.passia.org) 극적인 국제적 개입과 아랍정권들이 쓰러지는 위기 속에서, 파괴가 난무하며 수백만 명의 주민들이 살해되고, 이주당하고, 난민이 되었다. 아랍역내에서 전투, 선제적인 국지전이 계속되며, 이스라엘이 1967년 점령한 아랍영토에서 철수하지 않은 채로 ‘안보 정상화’를 빌미로, 아랍평화안(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점령지 전역에서 이스라엘의 완전한 철군을 전제로, 이스라엘과 아랍국가들 사이의 관계정상화 요구)을 활용하려고 한다. 이스라엘의 군사점령 50년 동안, 이스라엘화, 유대화, 고립, 배제, 적대 정책을 실행하면서, 팔레스타인에 관한 성서적 신화, 특히 예루살렘과 예루살렘 성지와 관련된 신화를 계속해서 악용해왔다. ▲ 마흐디 압둘 하디(Mahdi Abdul Hadi) 팔레스타인 국제문제연구소장 이스라엘의 군사점령을 종식시키기에는 아랍인들의 능력이 부족하고, 팔레스타인 내부 분열을 종식시킬 민족적 의지가 없으며, 여전히 덜 성숙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대한 신뢰가 줄어들고 있다. 현재 ‘협상, 저항 그리고 두 국가의 해결안이라는 환상’이 산산히 부서졌다. 이제 ‘팔레스타인 문제가 청산’되는 수순에 도달했는지 아닌지 묻는 것은 당연하다. □ 국제적 환경 러시아 연방의 카이사르(대통령)는 그의 왕관과 왕권을 복원하여, 우리(아랍인) 중 일부의 초대로 우리(아랍) 지역에 들어왔다. 그는 그의 군대를 우리 침실에 보내고, 사원, 교회, 도시를 파괴하고 우리 주민을 몰아내고 있다. 그는 골란 고원에서 시작하여 테헤란에서 끝나는 안보체제를 마련하기 위해 우리의 적과 만나고 있다. 그는 우리 영토에 머물 것이며,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를 배제하고, 터키와 이란과 함께 이 지역 지도를 그릴 것이라고 워싱턴과 브뤼셀에 통보하고 있다. 동시에 푸틴 카이사르(대통령)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당국자를 모스크바 회의에 초대하였다. 그러나 텔아비브로부터 네타냐후가 도착할 때까지 회의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미국은 대통령선거 이후 정치적 지각변동이 발생하여, 인종 차별 및 종교 차별의 문화로 회귀함을 시사하고, 배제와 적대감, 이슬람혐오를 주장하는 법안을 만들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모든 전선에서 기꺼이 충돌하거나, 철수하거나, 흥정할 준비가 되었다고 공표했다. 트럼프가 백악관에 입성하기 직전,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오바마 대통령과 함께, 유럽과 북대서양 조약기구의 지도자들을 초청하여 어떤 불상사도 피하기 위한 협의를 요청했다. 중국은 트럼프의 주장에 반대한다. 일본과 한국은 그들의 전략을 재검토하고 있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미국과의 협상초안을 기다리는 중이다. 멕시코는 미국의 장벽 건설에 맞설 수가 없다. 한편, 캐나다 정부는 이민자들에게 문호를 열어 주었고, 그들을 신중하게 지지하고 받아들였다. □ 중동 역내 환경 이 지역의 주요 국가들,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터키와 이란은 미국의 지각변동과 러시아 카이사르(푸틴 대통령)의 복귀에 대한 결과를 서로 다르게 이해하고, 설명하고, 해석한다. 그들 사이에 논쟁과 분쟁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오바마 이후의 워싱턴과 알레포(2016년 12월 러시아가 시리아 정부군을 도와 알레포 대부분 탈환) 이후의 모스크바에 대한 개별전략과 우선순위는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들의 위상은 약하고, 거의 존재감이 없다. 왜냐하면, 이 두 나라는 안보위기, 정치적 불안정, 경제적・재정적 혼란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시리아와 이라크에서는 전투가 계속되고 있다. 이 전투는 ISIS가 패배한다고 끝나지 않을 것이다. 러시아와 미국 군대가 주둔하고, 유럽인의 손이 행동할 의지 없이 떨리고 있는 한, 이 전투는 계속될 것이다. 한때 황금 예멘이라고 불린 예멘은 모든 전선에 열려있는 교차로에 위치함으로써 불행이 계속될 것이다. 예멘은 사우디-이란 사이에서는 자국 영토를 방어하기 위하여 선제공격을 하는 장소일 뿐만 아니라, 예멘 내 서로 다른 충성파들과 무기판매상과 관련된 부족 간 갈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쟁들이 뒤섞여있는 곳이다. 리비아의 문은 북아프리카의 인접한 아랍 국가들에게 개방되어, 변화와 모든 가능성의 바람을 몰고 올 것이다. 나토만이 리비아의 의제를 결정하고, 역할을 분배할 것이다. 아랍청년들은 계속해서 변함없이 ‘벌목공’이 될 것이고, 자신들의 운동을 억압하는 ‘정치 이슬람’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군사적 지배에 저항하며, 모든 도전에 대해 맞설 것이다. 그러나 해방의 광장에서 보였던 청년들은 현재 거의 존재하지 않고, 술집 뒤로 사라지거나 혹은 망명해 버렸다. 텔아비브는 예외로 남아있다. 텔아비브는 미국의 지각변동을 환영하며, 인종차별적인 정책을 강렬히 기다리고 있다. 텔아비브는 미국이 예루살렘의 이스라엘화, 성지의 신성모독, ‘유대와 사마리아(서안)’의 합병, 봉쇄된 가자지구에 대한 봉쇄의 파트너이자 동맹이 되기를 바란다. 동시에, 이스라엘은 중동 역내에서 러시아 카이사르 군대의 주둔에 반대하지도 않으며, 러시아의 안보협력이 골란고원(시리아)에서 시작하여 테헤란(이란)에서 끝나는 한 러시아의 행동과 정책에 반대하지도 않는다. 텔아비브는 유럽의 위선과 군사점령으로 인한 계속적인 재정지출에 의존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라말라를 5성급 호텔로 바꿔 놓았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보안요원들이 서안도시들과 마을들 전역에 퍼져있으나, 서안지역에 존재하는 70만 명 이스라엘 정착민들의 식민지 쓰나미를 막을 수 없으며, 장벽 뒤에 갇힌 팔레스타인 주민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출입금지 조치를 종식시키거나, 가자지구에 대한 끝없는 이스라엘의 파괴와 포위 공격을 끝낼 수 없다. 텔아비브 보안당국은 아랍정권의 잔존세력과 악수하며 관계를 정상화하고 있다. 텔아비브 경제 세력은 나세르, 네루, 루뭄바의 즐거운 나날을 상기시키는 호텔, 커피숍, 회의실에 앉아 아프리카 대륙 국가들과 정치 놀음을 하고 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29 | 추천: 0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블랙’, 악마의 상징인 색이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비단 구속되어 있는 김기춘 씨와 조윤선 씨 그리고 그 배후로 지목되고 있는 박근혜 씨만이 아니라 사회역사적으로 스스로가 참다운 지배세력이라고 믿고 있는 악마적인 그들의 입장에서는, 경제적인 부를 넘어서서 그리고 정치적인 권력을 넘어서서 예술 문화를 통해 우리 모두의 삶을 최고의 경지로 끌어올리고자 온몸을 불태우는 사람들이 오히려 악마로 보였던 것이다. 악마의 눈에는 악마들만 보이는 법이던가. 게다가 자그마치 만 명에 이르는 악마들이라니! 헌법에 명기되어 있는 표현의 자유를 통해, 심지어 그 표현의 자유를 의무와 책임으로 여겨 만민이 자신의 존재를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을 견인함으로써 그야말로 헌법 정신을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악마들이라니! 과연 악마적인 그들은 누구이며, 어떤 인간관을 가지고 있으며, 그와 같은 악마적인 폭력성을 왜 어떻게 구비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해답이 한편으로는 불을 보듯 분명한 것 같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나 궁금하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고 했던가. 결코 그런 뜻에서는 아니지만, 우리도 그들의 이름들을 거론하면서 블랙리스트, 진짜 악마라고 여겨지는 그들의 이름들과 그 악마적인 죄상을 병기하여 열거한 블랙리스트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악마적인 그들이 만든 블랙리스트는 본래 악마적이기에 시커먼 음지에서 음모적이고 사적으로 작성되어 그와 동일한 방식으로 범죄적인 폭력을 자행했다. 그러나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순수한 블랙리스트는 양지에서 공적으로 당당하게 작성되어야 하고, 또 그렇게 그들에 대한 사회역사적인 처벌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사진 출처 - 한겨레 우리들의 순수한 블랙리스트에 올릴 이름들을 어떤 기준으로 선택해야 할까? 그 기준을 너무 폭넓게 선정하여, 예컨대 어떤 방식으로건 인권을 유린했을 경우라고 하면, 또는 어떤 방식으로건 정의에 어긋나는 행위를 했을 경우라고 하면, 그 기준들이 원칙으로 대단히 중요하긴 하지만 현실적으로 실효성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방식으로건’이라는 단서를 적절하게 한정해서 변경할 필요가 있다 할 것이다. 예컨대 ‘주도적으로’, ‘비인간적인 이념으로 무장하고서’, ‘대다수의 인민들의 생명을 아랑곳하지 않고서’, ‘자신의 지배적인 권력의 유지 · 강화를 목적으로’ 등으로 한정해서 변경해야 할 것이다. 공공의 사회역사적인 심판을 위한 순수한 블랙리스트, 우리에게는 이미 우리들의 그 순수한 블랙리스트를 대대적으로 작성한 적이 있다. ‘친일인명사전’이 그러하고 ‘진실화해위원회’에서 반민주적 · 반인권적 공권력 행사 등으로 은폐돼 온 진실을 밝혀내고자 노력함으로써 그와 관련된 인물들의 이름들을 찾아내어 백일하에 밝히고자 한 노력이 그러하다. 하지만, 그때 우리는, 이번에 악마적인 그들에 의해 음험하게 작성되어 실제로 상당한 불이익을 준 것과는 달리, 우리의 순수한 블랙리스트에 오른 사람들과 그들에 의해 여전히 이익을 보고 있는 자들을 드러내 놓고 실제로 불이익을 주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명예에 관련한 피해를 주었을 뿐, 뒤늦게나마 정식 재판을 열어 우리의 공동체로부터 일정하게 배제시키거나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것을 분열책동이라는 등 해서 정치사회적인 반발이 거셌다. 그럼으로써 우리 사회가 아직도 정의와 인권, 이를 뒷받침하는 자유와 평등에 대한 사회역사적인 공동체 의식이 제대로 쉽게 현실화될 수 없음을 확인했다. 이번 악마적인 블랙리스트 사건을 계기로, 우리들 대다수 국민들이 떨쳐 일어난, 그 강렬하게 타올랐던 ‘수백만의 촛불’의 위력을 총동원하여 정의와 인권을 위한 우리의 순수한 블랙리스트의 작성과 실효성 있는 사회역사적인 심판을 위한 법 제정에 돌입해야 하지 않겠는가. 차제에 대한민국 공동체를 정치적으로 책임지고자 하는 대선 주자들이 이 사안에 대해 가슴 깊숙이 명심해 주었으면 한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40 | 추천: 0
신하영옥/ 여성운동연구활동가 네트워크 ‘젠더고물상’ “여성인권이 낮은 곳에서 최초의 무언가가 된다는 것은 때로 목숨을 담보로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멈출 수 없는 것은, 그것을 일상으로 만들기 위해서다.” 위 글은 <워싱턴 100만 명의 여성과 세계 30개국이 함께하는 여성권리행진>의 주최 측인 <워싱턴 행진>의 대자보 내용의 일부이다. 이 최초의 전 세계적인 여성행진은 反다양성을 주장한 트럼프의 집권에 대항하여 시작되었다. 트럼프 취임일인 1월 20일 다음날인 21일 워싱턴에서 20만 명이 넘는 여성들이 참여의사를 밝히며 캐나다, 호주, 유럽 등 여러 국가들이 동시다발적인 참여를 약속했고, 한국 서울에서도 함께 행진하기로 한 것이다. 서울여성행진은 21일(토) 오후 2시에 강남역에서 행진과 후속행사로 진행된다. 현재 400여명 정도가 참여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모집광고가 있고 길지 않은 시간이었던 것으로 안다. 많은 여성들이 트럼프를 위시한 세계적 반민주주의 세력에 대해 반대하고 저항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여성으로서 ‘나’의 존재가 위험함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의 여성들이 이 뜻에 공감하고 함께 참여한다는 것은 선/후진국을 불문하고 전 세계적으로 여성에 대한 위험의 존재, 즉 안타깝지만 민주주의가 여성들에게 ‘안전’과 ‘인권’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우리 여성은 ooo에 의하여 위협받고 있다.” “우리는 자유로운 ooo권리를 원한다.” 이러한 구호는 여성이 불안하고 불행하며, 여전히 제1세대적 권리인 자유권조차도 보장받지 못하는 존재임을 드러낸다. 특히 여성의 몸과 관련한 자유권 -낙태, 출산, 성범죄- 등은 여성의 통제가 아니라 법률, 즉 (남성)국가의 통제의 대상이 된다. 여성은 과연 ‘신체의 자유’를 보장받고 있는가? <워싱턴 100만 명의 여성과 세계 30개국이 함께하는 여성권리행진> 사진 출처 - 구글 87년 체제로 호칭되는, 87년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대안에 대해 다양한 연구들이 있다. 한국이 민주화를 통해 형식/절차적 민주주의는 이루었으나 다양한 사회세력들이 존재하는 다원화된 사회의 현실이 정치차원에 반영되고 있지 않다는 것에 많은 이들이 동의한다. 이는 실질적 민주주의, 혹은 민주화에 대한 문제이다. 그리고 형식적 민주주의-절차적 평등권- 아래, 무엇보다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됨으로써 정치적 평등이 경제적 평등을 보장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정치가 경제에 종속되는 현상에 대한 문제는 실질적 민주주의를 경제적 민주주의와 등치시키며, 사회민주주의 즉, 복지국가를 대안으로 삼기도 한다. 실질적 민주화는 과연 경제민주화와 동의어일까? 작금의 국정농단 사태는 국가가 한정된 사회적 부와 자원을 배분하는 과정의 개입에 실패한 것이 아니라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고 정치를 경제의 종속 하에 두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경제적 부를 획득하기 위해 정치를 이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정치의 원래 기능을 회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이 상황에서 경제민주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이는 다양한 사회집단들의 정치경쟁이 이루어질 때 가능하다. 사회내의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이 정치적 장에서도 펼쳐지고, 사회내의 다양한 집단들만큼 다양한 정치집단들이 존재하며 상호경쟁, 감시, 때로는 연대가 작동할 때 가능하다. 이것이 실질적인 민주주의이다. 경제적 민주주의는 실질적 민주주의의 한 부분이고, 실질적 민주주의의 토대가 아니라 그 결과로만 가능하다. 여성들은 사회 내 다양한 집단들 중의 하나로서, 실질적 민주주의를 위한 여정에 있다. 민주주의가 ‘자기결정’을 핵심원리로 한다고 할 때, 여성들은 남성, 남성적 국가로부터 폭력, 억압, 차별의 과정 속에서 ‘자기결정’을 진압, 거부, 무시당해왔다. 그것을 자각한 여성들이 “여성도 인간”이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제 권리들을 “인권”의 이름으로 보장하라고 주장해왔다. 보편선거권, 헌법이 명시한 문장으로서의 성평등이 아니라 일상에서 여성들이 ‘자기결정’을 할 수 있는 실질적 평등을 만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형식적 민주화였다. 법과 제도만 만들어졌고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여성을 대상으로 한 폭력과 차별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일상인 온라인을 통해 은밀하게, 악랄하게 확장되고 있다. 이제 일상적으로, 수시로 여성폭력현장과 문화를 접함으로써 강간이 상품이 되고, ‘성폭력’(장면)을 통해 ‘성’을 ‘배우는’ 결과가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 사회의 절반이 또 다른 절반에 대해 공포심을 갖고 살아가고 다른 절반은 또 다른 절반을 강간의 대상으로 삼는 이러한 현실이 가능한 사회와 정치가 과연 민주주의인가? 이러한 상황에서 재벌 몇 명, 부패정치인 몇 명 구속하고 대통령이 바뀐다고 사회 구성원들이 ‘자기결정’의 주인, 즉 정치의 주체가 되는 그러한 민주주의가 보장될 수 있는가에 대해 질문해야 한다. 정치철학과 시스템을 바꾸는 기획, 현재 민주주의의 정의와 작동방식에 대한 철저한 성찰과 반성, 다음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철학과 정의의 확립, 다음으로 작동방식에 관여하는 시스템에 대한 다양한 입장의 총화라는 과정이 놓여져야 한다. 주부인 나는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처리해야 할 때가 있다. 놓친 드라마를 보면서 세탁기를 돌리고, 그 동안에 음식을 만들거나 청소를 한다. 그럴 땐 드라마를 ‘본다’가 아니라 ‘듣는다’이다. 그 와중에 가족 중 누군가 아무런 말도 없이 티비를 ‘확’ 꺼버리면 화가 나지 않을 수 없다. 티비 앞에 앉아있지 않을 뿐, 여전히 들음으로써 드라마를 보는 중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무시당했다는 것과 상대의 비민주적 행위에 화가 난다. 이런 것이 민주주의를 둘러싼 차이이다. 드라마를 보는 이가 많지만, 듣는 이도 있을 수 있다는 고려를 하는 것과 못하는 것. 이러한 일상의 민주주의에 대한 차이는 정치민주주의에 대한 온도차이로 연결되는 것이다. 사소할까? 일상에서 ‘자기결정’에 대한 배려를 익히지 않고 어느 날 갑자기 정치적 배려라는 것이 생겨날 수 있을까? 여성행진은 이렇게 일상에서 무의식적으로 존재하는 여성 배제적, 혐오적, 무시적 행위들과 그 행위를 성찰할 필요가 없게 만드는 정치적/사회적 시스템, 가부장제와 자본주의가 결합된, 그래서 생활과 존재 모두를 위협하는 모든 구조와 그 구조를 지탱하는 남성 집단에 대해, 특히 반다양성을 정책으로 떠들어대는 반민주적 세력들에게 여성들은 결코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것을 보고만 있지 않겠다는 실천이다. 동시에 민주주의 자체가 사회적 투쟁의 과정에 있다는, 즉 민주화로서의 민주주의만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걸음 더 나아가 한국의 민주주의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국의 정책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하는 투쟁으로서 미국의 문제를 국내문제와 연결시켜 낸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도 의미를 가지는 투쟁이다. 단선적인 ‘반미’와 ‘양키 고홈’이 아닌 방식, 세계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미국의 반민주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구체적인 목표를 가진 투쟁이라는 점에서 앞으로 한국에서 미국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에 대한 선도적 의미를 가지는 저항인 것이다. 모든 소수자 운동이 그렇지만, 특히 여성운동의 목표는 실질적 민주화로서 다양한 사회세력의 정치지형화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민주화에 대한 대안은 현실정치권에 있지 않고, 남성들에 있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며 새로운 대안을 만들고 실천하는 여성들, 그리고 이들과 연대할 수 있는 세력들에 있다고 본다. “우리는 이 나라가 여성들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다.” “우리가 화가 나면 변화가 일어나고, 일이 일어난다.” 이번 행진의 공동 창립자인 ‘Tamika Mallory'의 말이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변화는 이미 일어나고 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29 | 추천: 0
김재완/ 방송대 법학과 교수 인간은 필요하고 더 나은 무엇인가를 향해 우리의 세계와 실존을 만들어 간다. 그러한 세계 형성과 구축의 역사는 ‘인간 노동의 역사’라고도 감히 말할 수 있겠다. 노동의 역사를 통해 형성된 우리의 세계는 항상적으로 변화하며 그 방향은 좋은 쪽으로도, 나쁜 쪽으로도 이어진다. 인간의 노동은 수고를 요구하며 이를 통해 결과물들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한편 그에 조력하기도 한다. 어원적으로도 고대 그리스어에서 'ponos'는 수고의 측면을, 업적 또는 성과물을 'ergon'으로 지칭했다. 로마에서는 노예들이 짐을 지고 힘겹게 가는 모양을 ‘laborare’라고 불렀는데, 영어의 ‘labour’의 어원이 되었다. 또한 로마에서는 노예와 제대로 노동을 하지 않는 자들을 벌하고 옥죌 때 사용했던 일종의 멍에를 ‘tripalium’이라고 표현했으며, 이는 프랑스어 ‘travail(노동)’과 스페인어 ‘trabajo(노동)’의 어원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업적 또는 성과물을 로마에서는 ‘opera’라고 하였고, 이것은 프랑스어 ‘oeuvre(제작물, 창작물)’가 되었다. 한편 이것이 점차 의미 분화를 하면서 ‘창의적/자발적 노동자’를 지칭하는 ‘ouvriers’와 ‘수동적/단순 노동자’를 지칭하는 ‘laboureurs’로 구분되기도 했다. 아직도 영국에서는 ‘labour’를 ‘수동적/고통적 노동’으로, ‘work’를 ‘자발적/창의적 노동’으로 그 의미에 차이를 두고 인식하고 있다. 라틴어에서는 어떤 것을 산출해내는 것을 ‘facere’, ‘faber’라는 말로도 나타냈는데 이로부터 'faktum(사실)', 'gemachte(만들어진 것)'이라는 말들이 생성되었다. 이들은 공장을 지칭하는 ‘fabrik(영어로는 Factory)’, 제작이나 제조를 지칭하는 'fabrikation(영어로는 fabrication)'을 만들어냈다. 오늘날 우리의 노동/노동자문제는 인간 노동의 역사성에서 어떤 것을 산출해내는 수고와 그 프로세스로서의 노동성을 희석시킨 채, 노동자를 옥죄는 멍에로서의 자본 우위적 지배체계를 형성하고 구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에 기인한다고 감히 주장하고 싶다. 인간의 노동은 우리 세계를 유지하고 존속하는 것에 필요한 소비재로부터 다음 세대가 노동하는 데에 있어 토대가 되는 제반 생산물들까지도 만들어내는 속성을 가진다. 노동은 인간 생활의 재생산을 위한 전제조건을 만들어내며, 이와 함께 노동자의 노동에 대한 내외적 인식론의 자각을 항상적으로 불러일으키고 노동자가 인식했든 하지 못했든지 간에, 노동은 그 자체의 활동으로서 새로운 사회적 환경들을 만들어내고 기존의 사회적 환경들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현재의 세계를 변혁하게 만드는 목적 지향성을 가진다. 그리고 그 변혁의 방향은 폭력적이고 전체 획일적인 자본 우위적 지배체계의 제도적 멍에의 사슬들을 제거하여, 인간 존엄성에 바탕을 둔 사회적 공동체로서의 인간/인간성을 회복하고 존속하는 상호 ‘인정(認定)’으로 향해야 한다. 사진 출처 - depositphotos.com 일반적으로 정책과 법은 사업/사업자, 정치/정치가, 공무/공무원, 교육/교육자 등과 대항적으로 노동/노동자를 구분 짓는다. 때문에 일반인들의 인식구조도 그 틀에 갇혀서 사고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그러나 그러한 구분은 각 영역과 주체, 대상들에 대한 지배와 규율의 편의성을 위한 것일 뿐이다. 실질적인 내용은 사업(노동)/사업자이면서 사업노동자성, 정치(노동)/정치가이면서 정치노동자성, 공무(노동)/공무원이면서 공무노동자성, 교육(노동)/교육자이면서 교육노동자성을 가진다. 인간 노동과 그 역사성은 수고를 통해 제작물/제도들을 산출해내고, 이것을 통해 현재와 미래의 우리 실존과 세계를 변화해 나아가는 것을 구성본질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 세계의 모든 사회적 환경들은 자발적이든 수동적이든지 간에 모든 노동자의 노동 프로세스에 토대를 둔 목표물이자 결과물이라는 점을 인식한다면, 형식적인 지위나 계급의 외관적인 틀만을 강조하여 노동/노동자성을 애써 부인하고 거리를 두어 구분 짓는 것은 온당치 못한 것이다. 이러한 형식적 구별인식이 노동/노동자문제를 더욱 심화시키고 확대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시대의 정의의 저울은 노동/노동자를 심하게 들어 올려놓고 있다. 그 평형을 맞추는 첫 출발점은 저울의 반대편에 있다고 인식하는 모든 영역과 사람들의 노동/노동자(성)을 본질적으로 다시 자각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작금에 적폐 되어 있는 법적 사회적 구조들을 청산하고, 정의로운 방향으로 변혁시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30 | 추천: 0
정재원/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음에도 청문회에 개입을 하는 등 조금씩 박근혜 일파의 반격도 시작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공은 일단 헌재와 특검으로 넘어가 있는 상황에서 이제 우리는 시위에 대한 환호와 격찬을 넘어 박근혜 이후에 대해 고민을 하고 구체적인 논의와 행동을 주도해야 함에도 아직 본격화되고 있지 못 한 것이 사실이다. 이명박근혜 정권을 거치며 민주주의의 퇴행이 확연히 일어나고 있기는 하지만, 과거의 군사독재 시대와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제도적, 절차적 민주주의라는 최소주의적 민주주의마저 붕괴된 것은 아니라는 것인데, 특히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정치세력들, 심지어 새누리당 내에서조차 계파의 분열을 초래할 정도로 정권과 정당에 대한 지지율이 현 정국을 좌지우지하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으로 나타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문제는 그것이 탄핵까지 이끌고 온 동력이면서도 동시에 그 이상으로 나아가는 데 결정적인 제약 요인이라는 점이다. 또 다른 한 가지 기억할 것이 있다. 설사 지금보다 더욱 격렬한 저항이 일어나도, 그리고 더 많은 시민들이 거리에 나와도 기득권 지배집단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만일 대통령과 새누리당에 대한 지지율이 여전히 일정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더 많은 사람들이 거리에 나오더라도 저들은 곧바로 경찰로 하여금 폭력적 진압을 명령했을 것이다. 시민들의 대규모 집회 참가와 다양한 행사가 가능한 이유가 이러한 지배 집단에 대한 극도로 낮은 지지율로 인해 경찰이 어쩔 수 없이 진압을 하지 못 하는 데에도 한 원인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현재 상황에 대해 광장에서의 흥분을 가라앉히고 우리는 차분히 정리를 할 필요가 있다. 현재 대규모 시위대가 경찰의 제지를 받지 않고 서울시 중심가를 점령하고 행진할 수 있었던 데에는 상식을 뛰어 넘는 국정농단과 그를 방조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국민 대다수의 분노에 그 원인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전 국민적 분노를 야기한 충격적인 비밀들은 검찰의 수사나 야당과 시민사회의 압박에 의해 폭로된 것이 아님은 두 말 할 나위도 없다. 즉 정권 재창출에 대한 불안감이 극대화되면서 조선일보 등 기득권세력 중 일부가 반발하기 시작했고, 이들의 청와대와의 힘겨루기가 박근혜 정권에 대한 저항 운동에 있어서 결정적인 도화선이 되었고 지금도 그러하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비박으로 상징되는 기득권 세력 일부와 이들과 결합하려는 일부 야당 내 특정 세력과 명망가들에 의한 기득권 세력 재편 전략은 곧 본 궤도에 오르게 될 것이다. 특히 저들은 심지어 정권이 재창출되지 않을 경우까지 대비해서 개헌을 적극적으로 밀고 나갈 가능성도 있다. 개헌 자체에 대해서는 야당이나 시민사회에서도 엇갈리는 입장을 갖고 있다. 그 어떤 긍정적 측면이 존재하더라도 이렇게 현 국면의 상당 부분들이 저들에 의해 주도되었고 여전히 저들의 영향력이 강하게 작용하는 현실 속에서 상황적 맥락에 대한 파악 없이 그 자체의 긍정성만으로 동조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현 국면이 야당이나 시민사회가 주도하는 것으로 착각되기 쉽지만 정세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사진 출처 - 프레시안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안타깝게도 대선에서 어떤 정당의 어떤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느냐의 문제로 협소화시켜 격렬한 논쟁이 대두될 것이 자명하다. 또한 소위 촛불 시민의 저항의 성과를 보수야당의 집권으로 헌납해 버려서는 안 된다며 격렬한 상호비방도 난무할 것이다. 진보정당이 대안이 되지 못 하는 현재 어떻게 보면 이러한 혼란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진보적 지식인들과 활동가들은 이제 이러한 정치 정당 중심의 논의에서 벗어나 급격하게 정치화되고 있는 시민들의 다양한 직접적인 권력 감시와 견제, 나아가 통제 수단이 마련될 수 있도록 담론을 형성해 나가야 한다. 무엇보다도 직접적인 방조자들 뿐 아니라, 검찰 등 관료 조직들, 새누리당, 재벌들은 물론이고 아직까지 드러나지 않거나 처벌을 피하고 있는 집단들에 대한 재산몰수를 포함한 엄정한 법 집행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다가 아니다. 다양한 기득권집단들이 이들을 앞세워 이익을 관철시킨 결과물들, 즉 노동개악, 국정교과서, 위안부합의, 한일군사협정, 사드배치 등등 반민주적이고 반평등적이며 반평화적 정책들을 모조리 무효화해야 한다. 무엇보다 단순히 박근혜 일당과 그 부역자 집단을 넘어 차후 그 어떤 세력들도 자신의 이익을 관철시키지 못 하도록 근본적으로 차단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만들어지도록 강제해야 할 것이다 그 중에서도 검찰 등 사정기관에 대한 시민적 통제 장치 마련은 가장 시급하다. 현재 돌연 엄정한 수사를 하다가 청와대와 충돌하고 있는 것처럼 또 다른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 검찰은 가장 시급한 개혁의 대상이다. 이 순간까지도 우병우 전 청와대 정무수석에 대해서는 구속은커녕 증거인멸을 방조해 오고 있다. 현재 지방검사장들을 주민선거로 선출하도록 하고 선출된 검사장에 대해서는 대통령이 임명하는 규정이 적용되지 않도록 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검찰청법 개정안이 발의되어 있는데, 이를 넘어 검찰의 수사권독점을 분산시키는 등 한층 더 강화된 검찰에 대한 시민 통제권을 반드시 마련해야 한다. 아울러 검찰 외에도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을 불법적인 방식까지 동원해 이어주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실패로 돌아갔지만 간첩단 조작 등을 통해 야권 인사들을 엮으려 하는 등 공작 정치를 주도해 온 국정원에 대해서도 근본적인 수술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 외에도 수많은 국가권력 기관들의 문제가 대두되고 있는데, 헌법재판소의 정치적 독립성과 삼권분립의 원칙 침해 등에 대해 반드시 밝혀내야 하며, 마찬가지로 근본적인 해결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국가권력 기구들의 문제만큼이나 심각한 것이 바로 언론이다. 이명박 정권 하에서 집요하게 진행되어 온 언론 독립성 파괴 공작과 종편 지원 등으로 인해 불과 얼마 전까지 언론은 철저하게 정권의 나팔수로 전락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 언론들은 심지어 시위 진행 지도를 보여주며 시위 진행 상황을 안내하거나 앞 다투어 현 정권의 온갖 비리와 국정농단, 심지어 수십 년 전의 박근혜와 최태민 간의 관계까지도 보도 경쟁을 하고 있다. 이는 결단코 청와대의 통제력이 약화되어서도 언론인으로서의 자세를 되찾아서도 아니다. 따라서 언론에 대해서도 매우 단호한 단죄와 더불어 권력의 언론 장악 장치들을 파괴할 수 있도록 여론을 형성하고 마찬가지로 시민적 통제가 가능하도록 근본적인 구조 개혁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재벌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박근혜 게이트에서 저들이 소극적 참가자거나 피해자가 절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명확하게 인지해야 한다. 박근혜와 재벌 총수들이 직접 만나 돈을 낸 대가로 실제로 이들의 민원을 들어주었는지 아닌지도 중요하지만, 이렇게 쇼를 하면서 직접 만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언제든지 정권은 재벌을 비롯한 부유층과 기득권세력의 이익에 복무하고 노동자, 서민들을 억압해 온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현 사태를 계기로 다시 한 번 재벌개혁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이영복 엘시티 특혜분양에서 보듯이, 감시권 바깥에서 국가를 좀먹고 있는 재벌 외 자본가들과 부유층에 대한 사회적 통제수단, 중앙과 지방을 막론하고 권력과 자본의 영합을 제어할 수 있는 시민이 주도하는 논의들이 활발해져야 한다. 진보 지식인들과 활동가들은 정치사회에서의 문제만으로 스스로 사안을 좁혀 어느 집단에 줄을 서거나 지지를 보내는 일에 과도하게 몰두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특히 현재의 정치적 사안들이 불거지기 불과 얼마 전까지도 한국사회는 심각한 사회적 문제들로 홍역을 앓고 있었다. 이주자와 소수자는 물론 여성 일반, 심지어는 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해서조차 혐오와 배제의 정서가 우리 사회를 뒤덮어 왔다. 박근혜가 ‘결혼도 안 하고 아이도 없는 것이 문제’라든가 최순실 모녀까지 포함해 ‘암탉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는 등 이미 박근혜 정권에 비판적인 국민 내에서조차 심각한 여성혐오에 근거한 비판을 해 온 이들이 많다. ‘병신년에 병신년이 병신 짓 한다’는 등 장애인을 비하하는 말도 서슴지 않는 이들이 심지어 상당한 용기를 요하는 시위대 안에도 넘친다. 따라서 이제 저항이라는 공통점 외에 다른 부분들, 특히 그것이 인권과 (성)평등, 실질적 민주주의 등을 저해하는 것일 경우 과감하게 드러내야 하는 시점이 왔다.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해야 한다고 해서 반동적이고 퇴행적인 요소까지 다 용인하고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 시민 대부분은 설사 정권이 바뀌더라도 큰 변화 없이 현재의 헬조선을 살아갈 것이다. 결국 커다란 사회경제적 변화가 없으면, 더욱 무서운 기득권세력의 반격이 있을 것이 자명하다. 따라서 이제 지식인들과 활동가들은 저항이나 탄핵 그 자체에만 착목할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그것은 100 년도 더 넘은 과거에 썼던 용어와 개념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 현실 속에서 가능한 것부터 조금씩, 그러나 아주 과감하게 밀고 나아가야 할 것이다. 어렵게 열린 시민들의 고양된 정치의식을 정치사회만으로 좁혀서 집중하게 해서는 안 된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들이 이렇게 끔찍한 사회를 방치한 결과가 정치를 퇴행하게 만든 것이기도 하다. 어렵게 살아가는 이들이 정치세력들에게 향해야 하는 요구와 불만을 옆과 아래에 있는 약자들과 소수자들에게 향하게 만든 것이다. 100년 전과 똑같은 내용을 반복해서는 안 되지만, 누가 대선후보가 될 것이고, 어떤 당이 지지율이 높은지가 아니라 시민들이 정치와 경제를, 관료와 재벌을 조금 더 통제할 수 있을지에 대한 21세기적 시민혁명이 필요하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23 | 추천: 0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1. 국민의 권력 전번 10월 25일에 「민주주의적 파문이 요구된다」라는 글을 써서 올렸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 독직 사건’(흔히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이라고 하지만 이는 잘못된 명칭이다.)을 계기로 국민들의 대의기관인 국회의원들이 국회를 통해 최고의 통치 권력 기관인 대통령의 탄핵을 가결하여 헌법재판소의 판결만을 남겨두고 있다. 이러한 국회에서의 대통령 탄핵은 국회의원들의 자발적인 판단과 운동에 의거한 것이 아니었다. 수백 만 명의 국민들이 곳곳의 광장에 총집결하다시피 해서 현직 대통령에 대해 ‘하야’, ‘퇴진’, ‘탄핵’, ‘체포’ 등을 외치면서, 각자 국민으로서 헌법에 의해 명기 · 보장된 자신의 권력을 행사한 결과였다. 이러한 국민들의 직접적인 권력 행사는 헌법에 명기 · 보장된 집회 및 결사의 자유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동안 국민들은 투표를 통해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을 선출하여 간접적으로 자신들의 권력을 행사하고자 했다. 그런데 국민들은 그 간접적인 권력 행사가 무용한 정도가 아니라 악용되어, 오히려 자신들의 권력을 짓밟고 우롱하여 폐기 처분하다시피 한 사실을 확연하게 인식했다.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 생각을 직접 실천에 옮기고자 광장에서 직접적으로 권력을 행사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국회에서의 대통령 탄핵을 이끌어낸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이를 통해 국민들의 간접적 권력 행사의 결과로 이들 기관이 갖게 된 대의적인 권력은, 헌법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명기 · 보장된 국민들이 갖는 근본 권력에 의거한 것임을 현실적으로 실증해 보였다는 것이다. 이에 우리는 국민의 권력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하게 된다. 첫째는 헌법에 명기된바 모든 종류의 국가권력의 원천인 국민의 근본 권력이다. 둘째는 국민투표를 통해 형성되는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을 기관으로 삼아 간접적으로 발휘되는 국민의 대의 권력이다. 셋째는 이번 촛불 집회에서 현실적으로 행사된 국민의 직접적인 권력이다. 2.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권력의 개별성과 보편성 이 중에서 특별히 성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마지막 ‘현실적으로 행사되는 국민의 직접적인 권력’이다. 국민의 대의권력의 행사가 지극히 사적인 권력으로 심각하게 변질됨으로써 국민의 근본 권력이 완전히 무력(無力)하게 되다시피 하자 대대적으로 발휘된 것이 바로 국민의 직접적인 권력 행사다. 12월 13일 자 《한겨레신문》 3쪽에 실린 ‘스마트 시민, 새로운 정치(상)’은 이번 촛불 집회를 효율적으로 활성화하기 위해 <온라인 시민회의>를 만들려다 거센 반발에 부딪힌 사건에 대해, 누군가는 “당신이 왜 함부로 나를 대표하려는가?”라는 말을 했다고 전하고 있다. 합법적인 대의권력 기관인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대의적인 시민단체조차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일체의 대의적인 권력 행사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민들 각자의 자결(自決)에 의거한 직접적인 권력의 행사야말로 진정한 권력행사라는 것인데, 주시해야 할 사실은 그러한 각자의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권력의 행사가 수 백 만의 통일된 집단적 권력으로 현실화되어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통일된 보편적인 권력으로 현실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국민의 근본 권력이 지닌 개별성과 보편성이 하나로 결합되어 현실화되었다는 것이다. 좀 더 이론적인 설명을 하자면, 추상적인 보편성이 개별성에 의해 현실화됨으로써 구체성을 현실적으로 확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철학자 헤겔(G. W. F. Hegel, 1770∼1831)은 국가를 일컬어 ‘구체적 보편성’이 현실화된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국가권력 역시 ‘구체적인 보편성’을 띤 것이라고 해야 한다. 이때 ‘구체적’이라는 것은 국가권력이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지닌 권력을 하나하나 반영할 뿐만 아니라,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적용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보편적’이라는 것은 국가권력이 통일적인 정체성을 가질 뿐만 아니라, 국민들에게 평등하게 통일적으로 적용된다는 것이다. 이를 염두에 두고 보면, 이번 대대적인 촛불 집회를 이른바 ‘촛불 시민혁명’이라 일컬을 수 있는 핵심 근거는 그동안 당연하게 여겨 온 ‘대의제 민주주의’로 인하여, 간적접인 권력 행사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던 국민들이 직접적으로 개개인의 국민권력을 행사함과 동시에 통일된 국민권력으로 승화시켜 냈다는 점이라 할 것이다. 말하자면, 구체적 보편성을 띤 국가의 진정한 면모를 현실적으로 실현해 보인 점이라 할 것이다. 국가는 비가시적이다. 그래서 자칫 국가의 보편성은 추상적인 수준에 머물기 쉽다. 옛 군주제에서의 국가의 보편성은 전혀 구체적으로 실현되지 않고 오로지 강압에 의거한 추상적인 것에 불과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져 온 독재정권들은 국가를 국민으로부터 찬탈하여 사적인 소유로 전락시킴으로써 국가의 보편성을 지극히 추상적인 수준에 머물게 했다. 그러면서 강압적인 대의정치를 참다운 국가정치인 양 호도했다. 그 이후, 특히 민자당, 한나라당, 새누리당 등으로 이름을 바꾸어가며 이들 독재정권들의 혜택을 톡톡히 받고 있는 정치 세력들은 국민투표에 의한 국민들의 대의적인 권력 행사가 마치 헌법이 명시하여 보장되어야 한다는 국민들의 근본 권력의 최종적이고 유일한 형태인 양 여겨왔다. 그러면서 국가 권력의 기관을 일정하게 탈법적으로 동원하면서까지 각종 정치적인 홍보 전략을 구사하여 국가권력의 보편성을 실질적으로 대표하는 것처럼 행세했다. 그 결과 국가권력의 보편성을 추상적인 수준에 묶어두는 방식의 정치를 해 온 것이다. 사진 출처 - 한겨레 3. 마무리 그러나 이번 ‘촛불 시민혁명’을 통해,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지닌 개별적인 근본 권력이 현실적으로 발휘됨과 동시에 그러한 국민의 근본 권력이 통일된 보편성으로 실현됨으로써, 그동안 당연시되면서 자행되어 온 추상적인 국가 및 국가권력의 보편성이 구체적인 보편성을 갖춘 국가 및 국가권력으로 탈바꿈되는 대 전환의 계기를 맞게 된 것이다. 만약 앞으로 대의 정치에 의거해서 대통령직을 맡아 수행하려 하거나 국회의원직을 맡아 수행하려는 자들이 이 같은 구체적인 보편성을 띤 국가의 정체 및 구체적인 보편성을 띤 국가권력을 금과옥조인 양 온몸에 새겨 정치활동에 임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이번 ‘촛불’이 그야말로 ‘대전환의 시민혁명’으로 현실화되어 역사적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만 하고 또 그렇게 되리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24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