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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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박록삼(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상경(인권연대 회원), 서보학(경희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이윤(경찰관), 이재환(시흥시청 소상공인과 지역화폐팀 책임관), 조광제(철학아카데미 대표), 황문규(중부대학교 경찰행정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염운옥 / 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    영국박물관(British Museum) 지하층 세인즈버리 갤러리에는 베닌 조각이 있다. 베닌 조각은 흔히 베닌 브론즈(Benin Bronze)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청동뿐만이 아니라 황동, 상아 등을 재료로 한 베닌 왕국의 왕실 예술품 전체를 가리키는 명칭이다. 영국박물관 지하에서 만나는 베닌 조각은 ‘역사 없는 대륙 아프리카, 역사 없는 아프리카인’이라는 스테레오타입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편견인가를 단번에 일깨워준다. 유려하게 흐르는 청동제 두상의 아름다운 곡선, 얇은 황동판에 섬세하게 새긴 부조 솜씨는 이 유물의 주인 베닌 왕국의 문명이 얼마나 화려하게 꽃피었던가를 웅변한다. Head of a Queen Mother, British Museum ⓒ 염운옥 Cast brass plaques, British Museum ⓒ 염운옥  그런데 서아프리카 베닌의 유물이 왜 런던 영국박물관에 있을까? 말할 필요도 없이 약탈 유물이기 때문이다. 베닌 조각은 대표적인 약탈 유물이다. 1897년 1월 13일 베닌을 급습한 영국군이 베닌 왕국의 지도자 오바(Oba)를 축출하고 고무와 야자유를 손에 넣기 위해 서부 나이지리아를 보호령으로 삼으면서 전리품으로 획득한 것이다. 동인도회사 같은 특허회사의 아프리카 버전인 왕립나이저회사와 영국 식민성, 육군, 해군의 합작품인 베닌 시티 공격은 온전한 맥락을 갖추고 존재하던 왕궁 예술품을 산산이 흩어놓았다. 공격 작전의 목적은 베닌을 보호령으로 만드는데 방해되는 존재인 오바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베닌 시티 공격이 끝난 후 오바는 약식 재판을 받고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베닌 시티 원정에 대한 영국의 자기 정당화에는 아이러니하게도 노예제가 활용되었다. 1807년 대서양 노예무역을 폐지하고, 1834년 노예제를 폐지한 영국은 19세기 중반 이후에는 해군력을 이용해 노예무역을 단속하고 나섰다. 아프리카에 대한 영국의 정책이 노예매매에서 내륙 개발과 자유무역으로 전환하면서, 한때 영국에 막대한 부를 안겨주었던 노예제는 악의 근원으로 규정되었다. 이런 사정은 베닌 왕국의 노예제를 비판할 수 있는 근거와 권능을 영국에게 부여했다. 베닌의 오바를 신민을 노예화하고, 야만적인 인신공양을 자행하는 악의 화신으로 몰아붙이고, 베닌인을 위해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만듦으로써 영국은 베닌 공격을 합리화했다. 하지만 원정의 실상은 베닌인에 대한 철저한 유린이었다. 원정에 참여한 군인들은 도시를 파괴하고, 민간인을 학살하고, 유물은 약탈해 팔아치웠다.*  영국 군인들이 약탈한 수백 점의 베닌 조각은 유럽과 미국의 박물관으로 팔려나갔다. 일찍이 박물관 큐레이터들은 이 수준 높은 조각의 가치를 알아본 것이다. 그 결과 베닌 조각은 영국, 독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미국, 러시아, 스웨덴 등으로 흩어져 있다. 현재 약 868점의 베닌 조각이 베를린 민족학 박물관, 런던 영국박물관, 옥스퍼드 피트리버스 박물관, 빈 세계 박물관, 라이덴 민족학 박물관,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민족학 박물관,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스톡홀름 세계문화 박물관 등에 많게는 수백 점부터 적게는 수십 점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개인 소장은 파악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해외 소장 베닌 조각의 규모는 사실 정확히 모르는 셈이다.  베닌 조각 중에서 가장 많고 대표적인 황동 장식판은 매우 독특한 기록 문화유산이다. 크기는 A3 종이 정도이고, 황동에 부조로 베닌 왕국 오바의 치적을 새겼다. 오바는 정치와 종교를 모두 관장하는 최고 지도자를 말한다. 베닌 사람들은 왕실의 궁중의례와 외교, 교역, 전쟁 등의 주요 사건을 문자로 남기는 대신 황동판에 부조로 새겨 남겼던 것이다. 황동 부조판은 태피스트리처럼 왕궁 벽을 가득 메워 장식되어 있었다. 오바의 왕궁을 방문한 적이 있는 한 네덜란드인은 “왕의 궁정은 장방형 회랑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각 회랑의 면적은 암스테르담에 있는 무역소 사무실만큼 크고, 천장에서 밑바닥까지 전쟁의 공적과 전투 장면을 새긴 구리판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매우 깨끗하게 보존되어 있었다”***는 기록을 남겼다. * 댄 힉스, 『대약탈박물관: 제국주의는 어떻게 식민지 문화를 말살시켰나』 (책과함께, 2022), 70쪽. **댄 힉스, 『대약탈박물관』, 322-323쪽. ***닐 맥그리거, 강미경 옮김, 『대영박물관과 BBC가 펴낸 100대 유물로 보는 세계사』 (파주: 다산북스, 2014), 543-544쪽.  베닌 조각이 처음 유럽에 소개되었을 때 고대 이집트나 유럽의 영향을 받은 조각이라는 등 억측이 난무했다. 유럽 문명과 접촉하기 이전의 아프리카에서 이토록 수준 높은 부조 기술과 기록 문화가 존재할 리 없다는 오만에서 나온 평가였다. 하지만 곧 베닌 조각은 유럽의 영향을 받지 않은 순수한 서아프리카 전통의 예술임이 밝혀졌다. 또 베닌 조각에 재료로 쓰인 황동은 유럽산으로 포르투갈과의 무역을 통해 베닌으로 수입된 것이다. 유럽산 황동은 마닐라스(manillas)라 불리는 금속제 반지와 팔찌의 형태로 베닌산 상아와 금과 교환되었다. 유럽산 재료에 베닌 장인의 솜씨가 합쳐 탄생한 베닌 조각은 ‘아프리카는 원료의 생산지, 유럽은 예술의 생산지’라는 또 하나의 스테레오타입을 전복한다.*  약탈 유물 베닌 조각의 반환 문제는 현재 진행형의 뜨거운 이슈다. 영국박물관은 2018년 나이지리아에 베닌 조각을 대여 전시하겠다는 결정을 발표했다. 약탈 유물을 반환이 아니라 대여하겠다는 발상에 위선적이라는 비난이 쏟아졌지만, 나이지리아가 이를 받아들이며 성사됐다. 2022년 여름에는 호니먼박물관이 소장 베닌 조각 72점을 반환하는 결정을 내렸다. 호니먼박물관은 런던 동남부 포레스트힐에 있는 사립 인류학 박물관이다. 슈트르가르트 린덴 박물관 등 독일 박물관들도 반환 의사가 있고 협상 중에 있다고 밝혔다. 2021년 4월 독일 문화부 장관은 독일 박물관들이 소장한 베닌 조각을 장기적으로 나이지리아 정부에 반환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약탈 유물 반환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박물관들은 소위 ‘보편박물관(universal museum)’을 자임하는 런던 영국박물관, 옥스퍼드 피트리버스박물관,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 파리 케브랑리미술관 같은 서구의 대형 박물관들이다. 약탈 유물을 계속 갖고있는 한 박물관은 식민주의 폭력의 결과물을 보유하고 전시한다는 죄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보편’이라 칭하는 서구 박물관들은 ‘문화적 보호’라는 논리를 내세운다. 그냥 두면 지붕도 제대로 없는 먼지 풀풀 날리는 황무지에 방치되었을 유물을 번듯한 박물관 건물 안에 고이 모셔놓고 전 세계 시민들이 그 가치를 향유할 수 있도록 공들인 서구 박물관들의 노력을 약탈과 폭력이라는 평가로 다 덮어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이런 변명의 말을 전면 부정할 수도 없기에 마음은 복잡해진다.  하지만 방치되었던 유물을 소중히 보존하고 전시한다는 논리는 적어도 베닌 조각의 경우는 성립하지 않음이 분명하다. 베닌 조각은 폐허에 방치되어 있던 잔존물이나 잔재가 아니었다. 베닌 조각은 처음부터 흩어진 형태로 존재했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물을 원산국의 맥락에서 뜯어내고 사방으로 흩어지게 한 건 바로 영국의 베닌 시티 공격과 학살과 약탈이었다. 그 결과 베닌 조각은 유럽과 미국의 여러 박물관으로 흩어져 어디에 몇 점이 있는가를 정확히 파악하는 일조차 어렵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피트리버스 박물관 큐레이터 댄 힉스(Dan Hicks)는 베닌 조각들이 흩어진 과정을 추적하고, 폭력적 약탈과 의도적 망각의 역사를 기록하는 일을 ‘네크로그라피(necrography)’라고 부르자고 주장한다. ‘네크로그라피’는 삶을 기록하는 ‘바이오그래피(biography)’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유물의 죽음의 기록을 말한다. 힉스는 박물관학에서 전개된 기존의 개념과 사고방식, 예컨대 유물의 이주(migration of objects), 유물의 생애사(biography of objects) 같은 개념들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약탈과 파괴의 책임 소재를 얼버무리고 폭력 행위를 모호하게 포장하는데 이런 개념들이 동원되고 있다는 것이다. 힉스는 베닌 조각의 약탈과 산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죽은 백인 남성’ 17명의 경력을 추적한다. 예를 들어, 로버트 올맨(Robert Allman, 1854~1917)이란 인물은 베닌 공격 당시 나이지리아 보호령 군의관이었고, 상당량의 약탈 유물을 소지하고 귀국했다. 그는 1953년 경매에 소더비 경매에 베닌 조각을 내놓았고, 신설 나이지리아 박물관은 이를 구매했다.***  베닌 조각을 비롯한 약탈 유물을 반환하는 것의 의미는 유럽과 비유럽, 문명과 야만을 구분하는 무기의 역할을 해왔던 박물관이 스스로 무기의 역할을 내려놓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물의 약탈사, 유물의 네크로그래피는 해당 유물 생산자들의 인권 유린의 역사다. 원산지로부터 뜯겨져 나와 타지의 낯선 박물관에 ‘원시예술’이나 ‘민속품’ 같은 생경한 이름을 달고 망명해 있는 유물들을 원산국으로 돌려주는 일은 베닌 왕국을 파괴하고 살아있는 베닌의 문명을 폐허로 만들고, 동시대 문명이 아니라 고고학의 영역으로 머나먼 과거의 시간대로 쫓아 보냈던 과정을 되짚고 되돌리는 것이다. *닐 맥그리거, 『대영박물관과 BBC가 펴낸 100대 유물로 보는 세계사』, 544쪽. **Philip Oltermann, “Germany first to hand back Benin bronzes looted by British,” The Guardian, April 30, 2021. https://www.theguardian.com/world/2021/apr/30/germany-first-to-hand-back-benin-bronzes-looted-by-british?CMP=fb_gu&utm_medium=Social&utm_source=Facebook#Echobox=1619779467 ***댄 힉스, 『대약탈박물관』 (책과함께, 2022), 209-210쪽. Cast brass plaques from Benin City Nigeria, 16th Century, British Museum ⓒ 염운옥
2022-10-12 | hrights | 조회: 480 | 추천: 2
조광제 / 철학아카데미 대표 1.정치인과 정치 역량의 체화  2022년 9월 28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국회 단체교섭 대표로서 첫 연설을 했다. 필자는 유튜브를 통해 보고 들었다. 그는 대선 때 더불어민주당 후보로서 많은 연설을 했다. 그리고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선출하는 과정에서도 많은 연설을 했다. 내일이면 대통령 선거가 있는 2022년 3월 8일 청계 광장에서, 그는 운집한 시민들에게 지지를 호소하며 마지막 유세 연설을 했다. 동학혁명을 거론하면서 대동 세상을 만들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그때 현장에 있었던 필자의 눈에서 눈물이 고였던 기억이 생생하다. 양극화로 현실화한 사회경제적인 불평등을 바로 잡겠다는 그의 주장에는 ‘대동 사회 건설’이라는 역사적인 혁명의 정치 이념이 그 기초로 작동하고 있었음이다. ‘보국안민’과 ‘부정부패 일소’ 그리고 ‘배양배일’을 기치로 내세운 동학군들이 지향한 인민 중심의 평등한 세상의 건립과 외세 배격의 독립정신이 작동하고 있었다 할 것이다.  정치인은 모름지기 정치의 비전을 마련해 갖추어야 한다. 그때 정치의 비전이 개개 국민이 살아갈 수밖에 없는 국가 공동체의 미래를 향한 것임은 물론이다. 그런 점에서 정치인이 제시하는 정치의 비전은 사회 역사적인 보편성을 지녀야 하고, 그래서 원리 원칙적인 이념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다.  하지만, 보편적인 이념은 추상적이어서 자칫 현실이 갖는 실재성과 동떨어지기 쉽고 현실이 갖춘 그 실현 가능성과 괴리되기 쉽다. 그래서 정치의 비전은 분명 미래를 향한 것이나 철저하게 현실에 근거한 것이어야 한다. 이때 현실은 그저 당면한 현재만을 시제로 한 것이 아니다. 현재는 항상 과거와 미래와 결합함으로써만 살아있는 시간으로 작동한다. 현재를 중심으로 한 공시성(共時性)과 과거와 미래를 관통한 통시성(通時性)이 두 축으로 작동함으로써 현실의 시간이 구성된다. 이러한 현실적 시간의 특성을 넓혀 사회 역사성이라고 한다.  정치의 비전이 미래를 향한 사회 역사성을 기반으로 해서 성립할 때, 그 설정의 동력은 국가의 현실을 인식하는 능력과 정치적 상상력이다. 상상력은 인간을 진정 인간이게끔 하는 근본 역량이다. 감각이나 정서 그리고 지성이 제대로 유의미하게 작동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상상력과 결합해야 한다. 상상력은 주어진 것을 모티브로 삼아 주어지지 않은 것을 꾸려내는 능력이다. 상상력이 현저하게 힘을 발휘하는 영역은 예술과 문학이지만, 가장 광범위하게 그리고 강력하게 영향력을 발휘하는 영역은 바로 정치다. 국가의 현실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은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기본으로 갖추어야 한다. 하지만, 정치적 상상력은 통치를 통해 국가 공동체를 이끌겠다는 정치인에게 특별히 요구되는 덕목이다.  정치적 상상력이 부재한 자는 정치에서 항상 과거를 향한다. 과거는 이미 사실로 주어진 것으로 채워져 있기에 과거를 다루는 일에는 정치적 상상력이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일에 집착하는 정치인은 국가 공동체를 망치기 일쑤다. 미래를 어떻게 꾸려야 할지에 대한 전체적인 안목이 부재하고 당연히 모험과 도전을 멀리한다. 또 예속을 두려워하지 않고 가장 편하고 안정된 길이라 여겨 기존의 강한 세력에 들러붙는다. 무엇보다 공적으로 주어진 권한을 무식하고 무능하게도 자신의 탁월한 능력에 의해 획득한 사적인 권력으로 여겨 그동안 쌓아온 자신의 존재를 더욱 공고히 하는 일에 활용한다. 그러니까, 정치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정치적 비전을 제시하지 않는 통치자는 아예 정치인이 아니다. 본인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정치 모리배일 뿐이다.  국가 현실을 폭넓게 핵심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과 국가의 미래를 향한 정치적 상상력이 제대로 결합했을 때, 현실화 가능성이 강한 정치적 비전을 제시할 수 있다. 이는 체화되지 않고서는 자칫 공허한 이념의 발로에 그치고 만다. 필자로서는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국회 단체교섭 대표 연설에서 그러한 체화된 정치적 비전을 보았다. 그의 기본사회론이다. 출처- pixabay 2.기본사회론에 대한 하나의 해석  한 국가 공동체를 이끄는 보편적인 이념은 그 나라의 헌법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우리의 헌법 제10조다. 우리는 이 헌법 제10조를 정치를 통해 사회 역사적인 현실로 실현해야 한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국가 공동의 권력이 필수적이다. 그래서 우리의 헌법 제1조 ②항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니까, 국가 공동체의 이념을 현실로 실현해야 할 책임과 의무를 진 자는 국민 자신이다. 이에 기반하여 대선 때 이재명 후보자는 “정치의 주체는 국민입니다.”라고 외쳤다.  그런데, 원리적으로는 그 책임과 의무를 진 자는 국민 자신이지만, 실제로는 선출 과정을 통해 선택된 국민을 대표하는 정치인이다. 행정을 통한 통치를 책임지는 대통령은 물론이고, 입법 활동으로써 통치의 현실성을 담보하는 국회의원들이 바로 그러한 정치인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원칙적으로, 정치인이란 모름지기 국가 공동체에 대한 정치적 비전과 그 비전을 실현할 수 있는 역량 또는 덕을 갖추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의 실제에서 보면 그러한 정치인을 찾기는 건초 더미에서 바늘 찾기 정도로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어렵다. 그런데, 이번 대선 과정과 그 이후 전개된 정치 상황을 통해 그런 면모를 보이는 ‘이재명’이라는 정치인을 얻게 되었다. 비록 0.73%라는 근소한 차로 대통령 당선에는 실패했지만, 우선 국회의원으로 선출되고 나아가 절대다수의 국회의원을 확보한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의 대표로 선출되어 정치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어 천만다행이다. 그 이유는 기본사회에 대한 다음과 같은 그의 주장에서 드러난다.  첫째, 그는 “이제 산업화 30년, 민주화 30년을 넘어서서 기본사회 30년을 새롭게 준비할 때입니다.”라고 역설했다. 이는 우선 그의 국가 공동체를 향한 비전에 대해 ‘기본사회’라는 명칭을 붙여 정립함으로써, 자신뿐만 아니라 국민 모두에게 정치 사회적인 담론의 얼개를 제시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얼개의 구축이 그저 일면적인 착상에 그치지 않고, 한국사회의 현대사를 기반으로 향후 한국사회가 지향해야 할 방향 축을 제시한 것이다. 한편으로 사회 사상가로서의 면모마저 보인다.  둘째, 그는 “소득, 주거, 금융, 의료, 복지, 에너지, 통신 같은 모든 영역에서 국민의 기본적 삶이 보장되도록 사회 시스템을 바꿔가야 합니다.”라고 역설했다.  이는, (1) 대선 과정에서 그가 제시한 기본소득, 기본주택, 기본금융에 의료, 복지, 에너지, 통신이라는 네 항목을 보탠 것이다. 이 일곱 항목 중 소득과 금융을 뺀 다섯 항목은 국민 각자가 비용을 지불해야만 누릴 수 있다. 그런데 이 다섯 항목 중 한 가지라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면 오늘날의 기술사회에서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없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일자리를 통한 소득과 소득을 위한 편의를 도모하는 데 필요한 금융이다. 하지만 자유시장 제도의 자본주의적 경쟁에 맡겨서는 소득과 금융의 영역에서 뒤처져 인간 이하의 삶으로 전락하는 다수의 국민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가능성을 염두에 둔 방책으로서 모두 일곱 항목의 기본 충족을 통한 기본사회의 건설을 역설한 것이다. (2) ‘사회 시스템의 전환’은 달리 말하면 사회 전체의 구조 개편이다. 기본사회의 구축과 영위가 다수이건 소수이건 개개인의 선의에 의존하고 악의를 막아내는 것으로서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기본사회 체제로의 전환’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대대적인 개편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암암리에 이를 위해 국민 전체의 총의를 결집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셋째, 그는 “노동이 생산의 주역이 되는 것이 합당했던 사회제도는 기술이 생산의 주력이 되는 시대에는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습니다. 이제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삶이 아니라 기본적인 삶이 보장되는 사회로의 대전환을 고민해야 합니다.”라고 역설했다. 이는 앞서 말한 둘째의 (2)에 관한 근거를 제시하는 대목이다. 그는 21세기 세계 전체의 흐름의 대변화를 심중하게 파악하고 있다. ‘제4차 산업혁명’이라는 개념이 널리 통용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노동의 시대에서 기술의 시대로 급격하고 변하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한다. 이를 정치적 상상력을 발휘해 사회제도의 대전환을 발상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일은 전혀 쉬운 일이 아니다. 혁명적인 정치의식이 평소의 신념으로 체화되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이처럼 실질성과 논리적 정합성을 담보하는 논거와 주장을 제시할 수 있는 정치인을 가진 우리로서는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넷째, 그는 “국민 여러분 불가능한 일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해야 하고 또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입니다.”라고 역설했다. 이는 자신이 제시하는 기본사회 정책 및 이론이 일반 국민으로부터 쉽게 동의를 얻을 수 없는 것임을 본인이 충분히 자각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오만하게 일방적으로 윽박지를 성격도 아니고 그럴 뜻이 전혀 없다는 다짐을 내보인다. 한편으로 국민 모두의 이른바 집단지성을 믿고 함께 공적으로 논의해서 국민 다수의 의지를 결집해 나가겠다는 뜻을 내보이고, 다른 한편으로 그리하여 최대한 물샐 틈 없이 계획해 나간다면 얼마든지 성취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내보인 것이다.  다섯째, 이에 그는 “더 나은 삶과 더 나은 미래 앞에는 여도 야도 그리고 진보도 보수도 없습니다. 불안과 절망이 최소화되는 기본사회를 향해서 함께 준비하고 나아갑시다.”라고 역설함으로써 기본사회의 건설이 국민 모두의 과업임을 강조하고 그 과업의 실행을 위한, 정치인들과 사회세력을 비롯한 국민 모두의 관심과 공동의 노력을 절절하게 호소한다.  이 정도로 이재명 대표가 역설하는 ‘기본사회’라는 대 정치 비전에 대한 필자의 소회를 밝힌다.   3.통감(痛感)  그런데, 작금의 정치 현실은 그야말로 ‘엉망이다.’ 추측건대, 더불어민주당 내에서는 당 대표인 이재명 씨가 제시한 ‘기본사회’에 관한 논의기구가 준비 중이거나 준비를 마치고 본격적으로 그 구체적인 대책을 마련하느라 부심 할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일에 집중할 여유가 없다.  대통령 윤석열 씨의 통치가 각종 미필적 고의에 의한 실수와 실패를 거듭하면서 24%라는 전대미문의 열등한 국민 지지율에 허덕이고 있다. 유시민 작가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다. 차라리 계속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면 한다.”라는 취지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절망을 넘어 대통령이라는 자가 대다수 국민에게 아예 조롱거리로 전락해 버렸다. 그런데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처음부터 끝까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무슨 의도에서인지 과거에 집착하여 절체절명의 국가 경제의 위기에 대해 겉치레 말로만 일관한다.  거대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으로서는 이를 결단코 좌시할 수 없어 이를 비판적으로 타개하는 일에 집중한 탓에, 모처럼 자당의 대표가 제시한 정치적 비전에 관한 국민적인 여론을 독려하거나 형성할 수 있는 여유를 얻지 못하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언젠가, 정치인 이재명 씨가 제시한 ‘기본사회를 향한 대개혁’이 민의의 동력을 얻을 날이 오리라 믿는다.  마지막으로 덧붙이고자 한다. 우선 발등에 불이 떨어진 국가 경제의 위기, 대결로 치닫는 세계적인 신냉전이 복귀하고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 지역의 전쟁 발발의 불안한 정세의 급습, 더불어 백척간두의 위험에 빠진 남북평화의 문제 등이 전격적이고도 시급한 해결을 기다리고 있다. 더불어민주당만이라도 심혈을 기울여 최대한의 지혜와 역량을 결집해 분투해 주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2022-10-05 | hrights | 조회: 446 | 추천: 3
윤요왕/ 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감히 ‘춘천의 청소년들은 행복하겠다’라고 자신 있게 제목을 적었지만, 사실 아직은 나의 바람이고 희망 사항이다. 다만, 춘천의 시민들이 어른들이 소소하지만 썩 괜찮은 움직임을 시작했음을 알리고 싶어 과한 제목으로 시작한다.  오랫동안 마을교육공동체 정책이 삶과 배움이 일치하는 살아있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정책적 아젠다로 부상하면서 청소년들에 대한 여러 가지 시도들이 곳곳에서 실험되고 있다. 춘천도 행복교육지구사업이라는 정책의 일환으로 교육청과 시청이 업무협약을 맺으면서 지역과 마을이 아이들을 돌보는 성장 배움터로서의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마을교육활동을 하고 있는 나도 몇 년 전부터 춘천의 청소년들에 대한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보통 중학교를 입학하면서부터 청소년 본인들은 물론 우리 사회 모두가 대입 경쟁을 위한 6년의 길고도 험한 여정을 시작했음을 당연시 인정하게 된다. 그런데, 미래의 희망이자 나라의 희망이라고 얘기하는 청소년들이 ‘입시생’ ‘수험생’이라는 수식어가 더 어울리는 이 현실이 맞는가 하는 불편한 마음이 들었다.  중간지원조직으로 이 업무를 맡게 되면서 고민이 들었다. 숨 쉬는 것도 귀찮아하는 청소년들, 입시 준비에 24시간도 모자란 청소년들, 꿈도 희망도 생각해 볼 여유도 없는 청소년들. 이 아이들을 위한 일을 어디서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까 명쾌하게 잡히지가 않았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면서 청소년들의 일상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니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우리 시대 청소년들에게 지역사회나 어른들의 환대나 보살핌, 지지 응원이 있었나 하는 물음이 들었고 거기서부터 시작하자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노골적으로 ‘이리와 얘들아 너희를 응원할게’하는 사업이 아닌 익명성이 보장되면서 일상에서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시공간을 마련해주는 ‘맡겨놓은 카페’라는 청소년 환대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출처- 춘천 청소년들을 위한 ‘맡겨놓은 카페’ 홈페이지     https://ccycafesospeso.modoo.at/  춘천의 청소년들을 위한 ‘환대’ 프로젝트인 ‘맡겨놓은 카페’는 이탈리아에서 1930~1940년대 벌어졌던 ‘카페 소스페소(Cafe Sospeso)’ 운동에서 착안했다. 이 소스페소 운동은 하루 한 잔 커피를 마시는 것이 일상적인 문화로 형성된 이탈리아에서 경제공황을 겪으면서 경제적 약자, 노숙인들을 위해 조금 여유 있는 시민이 커피 한 잔 값을 미리 지불하고 그들이 무료로 이용하는 나눔 캠페인이다. 춘천도 급격히 카페가 늘어 이 작은 소도시에 450여 개의 카페가 있고 이 공간을 청소년들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남는 시간에 우리 청소년들은 공원 벤치나 거리를 배회하게 된다. 친구들과 수다 떨고 놀고 싶은데 우리 사회에서는 갈 곳이 마땅히 없다. 무더운 여름날, 추운 겨울 우리 아이들은 어디에 있을까? 용돈이 부족해도 편안히 몸을 쉬고 친구들과 수다를 떨 수 있는 공간으로 카페를 이용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춘천의 시민들이 어른들이 지역의 청소년들을 위해 한잔의 음료를 맡겨놓고 응원의 한마디 전해줄 수 있도록 기획했다. 춘천의 6개 중간지원기관들이 TF(사이사이)를 구성하고, 7월부터 시작해 세 달여가 지난 지금 그동안 자발적으로 동참한 카페가 28개, 시민들이 맡겨놓은 음료가 1300여 잔, 이용한 청소년들이 500명을 넘어섰다.  과연 가능할까? 생각했던 아이디어가 현실이 되었다. 눈에 보이는 수치를 넘어 그 28개 카페 현장에서 벌어지는 감동스럽고 재미난 이야기들이 속속 들려온다. 마음이 따뜻해진다. 카페 사장님들이 고맙고, 마음을 나눠주시는 시민들이 고맙고, 카페를 찾아준 청소년들이 고맙다. 우리 사회가 어떤 큰 정책이나 사업으로 변화하고 발전하는 것도 있겠지만 일상에서 누구나가 참여와 동참으로 성숙해지는 것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수준(격)을 높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맡겨놓은 카페’가 단번에 청소년들 문제를 해결한다거나 해법을 주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춘천의 청소년들에게, 춘천의 어른들이 너희를 생각하고 응원하고 지지하고 있다는 환대의 마음을 전해주고 있는 일임은 틀림없다.  다시 꿈을 꾼다.  먼 훗날 지금의 청소년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지난 어린 시절을 추억하며 누군지 모를 춘천의 어른이 맡겨놓은 음료 한잔 마시던 때를 생각하며 푸근해졌으면 좋겠다. 또, 제목처럼 ‘춘천의 청소년들은 행복하겠다’라는 생각이 현실이 되었으면 좋겠다. 지금 우리 시대 아이들에게 필요한 건 환대와 지지, 응원의 한마디 말과 토닥토닥해주는 바로 옆의 선한 이웃 어른들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2022-09-28 | hrights | 조회: 290 | 추천: 5
: 유대인, 기독교인, 무슬림 및 모든 주민들이 평등한 나라 홍미정(단국대학교 아시아 중동학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유대인, 기독교인, 무슬림들이 모두 역사적으로 시공간을 넘나들며 개종을 통해서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힘들다. 이스라엘 텔아비브 대학의 역사학 교수 슬로모 샌드는 서기 70년에 로마제국 통치하의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들이 추방되었다는 것은 신화이며, 유럽 유대인들은 개종을 통해서 창출되었다고 주장한다. 2022년 8월 30일, 이스라엘 하이파 대학 지리학 교수이며 인구통계 전문가인 아르논 소퍼의 이스라엘군 라디오 인터뷰에 따르면, 계속된 외국 유대인 이주 정책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과 이스라엘 점령지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은 전체인구의 47% 미만을 차지한다. □ 예언자 무함마드의 가계와 유대인 6세기 후반에 출생한 예언자 무함마드는 꾸라이시 부족의 하심가문 출신이다. 5세기 초에 홍해 연안 메카 지역과 히자즈 산악지역에 기반을 둔 키나나 부족에 속해 있던 쿠사이 빈 킬랍이 이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유목 친족들을 모아 메카와 카바를 지배하는 상업 중심의 꾸라이시 부족 연맹을 결성하였다. 이때 사람들이 쿠사이를 모으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꾸라이시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는 꾸라이시 부족의 1대 수장이 되었고, 예언자 무함마드의 5대 선조다. 그 이전에 꾸라이시라고 불린 사람은 없었다고 알려졌다. 이때 메카는 나무라곤 거의 없는 황량한 산에 둘러싸인 골짜기에 발달한 상업 도시였지만, 페르시아, 시리아, 이집트, 인도 등과의 교역이 성행했고, 다신교도, 유대교도, 기독교도, 조로아스터교도, 하니프, 마즈닥교도, 마니교도 등 다양한 종교들이 공존하는 상업 중심지로 국제 무역의 통상로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메카의 번영은 꾸라이시 부족의 상업 활동과 긴밀한 관련이 있었다. 오늘날 예멘 지역에 존재하던 힘야르 왕국(BC. 110–AD. 570)은 유대교로 개종하고, 기독교 국가인 악숨 왕국(AD. 1세기-960) 및 동로마 제국에 맞서 중앙 아라비아 정복을 추진하였다. 이 정복 전쟁 과정에서 힘야르 왕국은 메카의 다신교도 꾸라이시 부족과 동맹을 맺었다. 꾸라이시 부족장 쿠사이는 힘야르 왕국의 투바 아부 카립아사드 카밀왕의 명령으로 무너진 카바 신전을 재건하였다. 쿠사이는 카바 주변에 우물을 파고, 가옥을 건축하고, 유목민들을 정착시켰으며, 카바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카바 신전의 제사를 장악하였다. 당시 카바 신전에는 다양한 부족들이 신봉하는 수백 개의 신상들이 있었다. 쿠사이의 뒤를 이어 꾸라이시 부족의 2대 수장이 된 쿠사이의 아들, 압드 마나프 빈 쿠사이가 예언자 무함마드의 고조할아버지다. 메카에서 압드 마나프의 샴쌍둥이 아들인, 하심과 압드 샴스는 하심의 다리와 압드 샴스의 머리가 붙은 채로 태어났다. 아버지 압드 마나프가 이들을 칼로 분리했다고 알려져 있다. 압드 샴스는 우마이야 빈 압드 샴스의 아버지로 7세기 중반 우마이야 칼리파조를 세운 우마이야 가문의 선조가 되었고, 하심은 예언자 무함마드를 배출한 하심가문의 시조로 예언자 무함마드의 증조할아버지다. 하심은 메카에서 꾸라이시 캐러반을 시작한 유능한 상인이었다. 그는 에티오피아 통치하의 예멘으로, 동로마 제국 통치하의 시리아로, 앙카라로 국제 무역을 하였으며, 일신교인 아브라함의 종교를 가졌다는 뜻으로 하니프라고 알려졌다. 하심은 매년 메카로부터 북방으로 약 340㎞에 위치한 야스립(메디나)을 지나갔고, 그곳에서 시장을 열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야스립에 거주하는 카즈라즈 부족의 분파 낫자르 씨족의 살마 빈트 암르와 결혼하였다. 살마 역시 캐러반들과 거래를 하는 낫자르 씨족 내에서 명망이 있는 상인이었다. 하심은 야스립을 지나갈 때마다 그녀의 집에 머물렀고, 살마가 임신했을 때, 시리아로 떠났다. 살마는 야스립에서 상업을 계속하면서 가족들과 가정을 지켰고, 하심과의 사이에서 낳은 사이바 빈 하심(예언자 무함마드의 할아버지)을 키웠다. 사이바가 태어난 지 몇 달 안 되었을 때, 하심은 팔레스타인 가자에서 무역 활동을 하던 중에 사망하였다. 야스립에서 태어나서 성장하던 사이바는 삼촌 무딸립 빈 압드 마나프의 제안으로 야스립보다 부유한 상업 도시 메카로 이주하였다. 사이바가 삼촌 무딸립을 따라 메카로 들어가자, 메카 사람들이 사이바를 무딸립의 노예로 알고, 그의 이름을 압둘 무딸립으로 불렀다. 이때부터 그의 이름은 사이바보다 압둘 무딸립으로 더 흔하게 불렸다. 어느 날 압둘 무딸립은 카바 신전 주변 약 20m 떨어진 곳에서 잠잠 우물을 발견하였다. 이후, 압둘 무딸립은 잠잠 우물을 관리하며 메카를 순례하는 사람들에게 물을 공급하는 권리를 획득하였고, 그의 아들 알 압바스가 이 권리를 이어받았다. 8세기 중반 알 압바스 가문의 후손들이 압바스 칼리파조를 개창하였다. 메카에서 압둘 무딸립은 유복자로 태어난 손자이며 훗날 예언자가 된 무함마드를 키웠다. 그런데 무함마드가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 압둘 무딸립이 사망하였다. 이후에는 무함마드의 아버지 압달라와 동복형제인 삼촌 아부 딸립이 자신의 아들 알리와 무함마드를 함께 키웠다. 캐러반을 이끌었던 아부 딸립은 하심 가문의 수장이 되었다. 어린 시절 무함마드와 알리는 형제처럼 자랐고, 훗날 알리는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의 남편이 되었으며, 시아파의 1대 이맘이 되었다. 622년 예언자 무함마드는 메카에서 야스립(메디나)으로 이주하면서 증조할머니 살마 가문인 낫자르 씨족과 함께 거주하였고, 이후 같은 장소에 예언자의 모스크가 건설된 것으로 알려졌다. 623년 작성된 메디나 헌장은 사실상 낫자르 씨족의 유대인을 포함하는 메디나 거주 유대인들과 무슬림들과의 동맹을 명시한 문서다. 따라서 이주한 예언자 무함마드에게 거주지를 제공한 낫자르 씨족이 유대인이었다는 것은 합리적인 추론이다. 메디나에 거주하던 낫자르 씨족과 누세이바 씨족을 포함하는 더 큰 규모의 카즈라즈 부족 대부분은 이슬람교로 개종하였으며, 예언자 무함마드 사후 636년 시작된 예루살렘 정복 전쟁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현재 낫자르 씨족과 누세이바 씨족은 예루살렘의 무슬림 명문 가문들이다. 특히 누세이바 가문은 예수 무덤 교회의 관리인으로 성묘 교회 정문 열쇠를 관리하고 있다. 성묘교회 관리인 와지흐 누세이바 □ 개종을 통해 형성된 유대인, 기독교인, 무슬림 2008년 9월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와의 인터뷰에서 슬로모 샌드는 “기원전 6세기에 일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바벨론으로 추방당하지 않았고, 정치 지도자들과 지식인들만이 바벨론으로 이주하도록 강요받았다. AD 70년에 로마인들은 예루살렘을 포함한 동부 지중해에 어떤 지역으로부터 어떤 민족도 추방하지 않았다. 노예가 된 죄수들을 제외하고, 일반 유대 주민들은 두 번째 성전 파괴 이후에도 계속해서 그 땅에서 살았다. 4세기에 일부 예루살렘 주민들은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7세기 아랍 정복 이후 다수 예루살렘 주민들이 이슬람교로 개종했다”라고 주장했다. 오늘날 일부 팔레스타인 무슬림들의 조상은 유대인이다. 예를 들면, 헤브론에는 유대교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한 가문들이 있다. 헤브론에 거주하는 드웩 가문 중 일부가 14세기 이집트 맘룩 통치하에서 유대교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이스라엘 유대인 드웩과 팔레스타인 무슬림 드웩은 조상이 같은 유대인 가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1515년 오스만제국이 정복한 시리아 알레포 지역의 세파르디 유대인 야콥 사울 드웩 하코헨은 오스만제국 술탄이 임명한 시리아 알레포의 하캄바시(유대교 최고 랍비, 재임:1904~1908년)였다. 드웩은 세파르디 유대인 공동체 하캄바시 가문이다. 알레포의 하캄바시는 야콥 사울 드웩 하코헨 이전에도 사울 드웩 하코헨(1869–1874), 모세 하코헨(1880–1882), 아브라함 에즈라 드웩 하코헨(1883–1894) 등의 드웩 가문이 장악하였다. 그런데 1942~1947년 사이에 약 4,500명 정도의 시리아 및 레바논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다. 1948년에는 시리아에 40,000명의 유대인들이 거주하였다. 이들 중 1948~1961년에 약 5,000명의 시리아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이주하였다. 이때 알레포의 드웩 가문도 이스라엘로 이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동예루살렘을 비롯한 팔레스타인 지역에도 드웩 가문 출신 무슬림들이 활발하게 활동한다. 필자가 2016년 『21세기 중동 바르게 읽기: 재설정되는 국경』을 출판할 때, 그림 4 작품을 제공한 동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유명한 팔레스타인 무슬림 화가 탈렙 드웩, 가자를 통치하는 하마스 고위급 지도자 아지즈 드웩 등 드웩 가문 출신들이 팔레스타인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2012년 12월 8일, 미국 언론인 필립 웨이스와의 인터뷰에서 슬로모 샌드는 “유대인과 예루살렘 성지 사이의 유대관계를 인정한다. 그러나 나는 그 땅에 대한 종교적 유대관계가 유대인에게 예루살렘 성지에 대한 역사적 권리를 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이스라엘의 존재를 지지한다. 그 이유는 성지에 대한 유대인의 역사적 권리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오늘날 존재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파괴하려는 어떠한 노력도 새로운 비극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시온주의는 존재할 권리를 갖는 새로운 이스라엘 민족을 만들었다.”라고 주장했다. 슬로모 샌드는 2010년 출판된 『유대민족의 발명』을 저술하였다. 슬로모 샌드의 희망처럼, 이스라엘은 유대인, 기독교인, 무슬림들을 포함하는 주민들이 모두 법 앞에 평등한 권리를 누리며, 민주적 가치를 추구하는 나라가 될 수 있을까?
2022-09-21 | hrights | 조회: 486 | 추천: 0
이윤/ 경찰관  얼마 전 ‘헌트’라는 영화를 봤다. 짜임새 있는 이야기 구조에 화려한 액션까지 있어서 상당히 재미있게 보았다. 다만 정보기관의 고문 장면은 불편했다. 고문 묘사가 간략해서 그다지 잔인하지는 않았지만, 고문당하는 공포와 고통을 상상하기에는 충분했다. 교수, 대학생, 방산업체 사장, 심지어 정보기관 내 다른 부서 근무자도 고문 대상이었다. ‘저 사람 사상이 의심스럽다’는 투서나 첩보 한 줄이면 누구라도 고문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영화 속 장면보다 더 잔인한 현실이 존재했던 80년대까지의 한국 현대사는 메카시즘이 만연한 야만의 시대였다.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으로부터 1년이 지난 후인 88년 1월, 몇몇 경찰대학 재학생 대표들은 경찰 중립화 선언 준비로 분주했다. 졸업한 1, 2, 3기 선배들과 함께 총동창회 명의로 「경찰 중립화에 대한 우리의 견해」라는 성명서를 각 언론사에 배포하기로 하고 문안을 작성했다. 당시 과 대표로서 참석했던 나도 종로 어느 식당에서 선배들의 토론을 지켜보았다. 어리숙한 나는 허공에 날아다니는 문장을 따라잡기에도 숨이 찼다. 당시 선배들은 성명서가 보도되면 주동자와 참여자들이 잡혀갈 수도 있다며 그에 대한 대책을 고민했다. 나에겐 그 고민이 좀 생뚱맞았다. 그래도 경찰관인데, 민주 사회를 위한 의견을 발표했다는 이유로 잡혀갈까 걱정한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 걱정을 이해하게 된 것은 거의 20년이 지난 후에 한 1기 선배님의 경험담을 들었을 때였다. 그 선배님은 88년 총학생회 성명서 배포 며칠 전 이미 일부 언론사에 「경찰의 발전과 진정한 민주화를 위한 참회록」을 보냈다. 양심선언을 했다는 이유로 정보기관에 끌려가 며칠간 조사받고 나왔다고 했다. 끌려갈 때는 어디로 무슨 이유로 간다는 아무런 설명 없이 눈이 가려진 채 차에 실려 갔다고 했다. 몇 대 맞기도 했고 온갖 욕설과 협박과 회유를 받았다고 했다. 그 선배는 80년대를 성인으로 살며 시대의 부조리를 직접 경험했던 사람인데 어떻게 그런 용기를 내었고 또 그 공포를 견디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저 입을 헤 벌리고 들으며 살갗에 돋는 소름을 느낄 뿐이었다.  ‘헌트’를 보면서 느낀 불편한 감정은 그때의 기억과 함께 내가 저 자리에 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상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저 폭력을 견딜 수 있었을까. 저 자리에서 저런 고문을 받은 사람은 얼마나 두려웠을까. 죽을 수도 없는 무한한 고통의 굴레에서 얼마나 절망하였을까. 그래서 누군가는 고문 중에 목숨을 잃고, 누군가는 풀려난 후에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었거나 스스로 끊었을 것이다. 그들이 느꼈을 고통과 공포와 절망의 깊이는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다. 사진 출처 - 영화 '헌트'  법치주의는 국가권력이 국민을 다스리는 수단으로 법을 사용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권력이 고문 같은 비인간적인 행동을 못 하도록 국민의 약속인 법으로 정하고, 사회적 필요에 의해 체포, 구속, 압수 등 신체․재산의 자유를 제한할 때는 반드시 법이 정한 요건이 충족될 때, 법이 정한 절차와 방법에 따라, 그나마도 최소한으로 하라는 것이 법치주의다. 대학생 시절 헌법과 형사소송법 교과서는 ‘적법절차’와 ‘무죄추정 원칙’, ‘위법수집증거 배제법칙’을 지켜 수사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세상은 그런 원리와 원칙들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었던가 보다. 도서관에서 본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이라는 책도 나에겐 충격이었다. 그 많은 법학 교수님과 법조인들의 말과 글이 공허하고 무책임해 보였다.  아직도 지구별 어딘가에서는 고문과 사법 폭력이 자행되고 있을 것이다.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911테러 용의자로 구금되어 고문당했다는 증언이 최근에도 공개되었다. 실화에 기반한 ‘제로 다크 서티’라는 영화를 보면 CIA 요원들이 빈 라덴을 추적하기 위해 알 카에다 대원을 고문하는 장면이 나온다. 많은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고문이 불가피할 경우 고문을 하겠는가라는 질문은 중요한 철학적 딜레마다. 인류 문명은 열 명의 도둑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지 않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그러나 우린 아직 야만의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야만의 시대는 종식되어야 한다. 특히 권력 장악과 유지를 위해 무고한 사람을 고문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대한민국이 야만의 시대로 되돌아가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특히 경찰이 야만의 첨병이 되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기를 더더욱 간절히 바란다. 법률 속 글자 몇 개와 시행령 속 문장 몇 줄을 걱정할 만큼 대한민국이 허약하지 않음을 믿는다.
2022-09-13 | hrights | 조회: 565 | 추천: 14
석미화/ 평화활동가  9월 2일 방송의날 축하연이 열리는 여의도 63빌딩 앞에서 공영언론 사장 퇴진을 촉구하는 보수단체 집회가 열렸다. 집회 참석자 대부분은 월남 참전군인이었다. 참전군인들이 왜 공영방송 관련 집회에서 사장 퇴진을 외치고 달걀을 던지게 되었을까. 그 배경은 응우옌티탄의 방한과 이에 맞춰 편성된 <KBS시사멘터리 추적> 8월 7일 방송분 ‘얼굴들, 학살과 기억’과 관련이 있었다.  이 프로그램은 1968년 2월 12일 베트남 중부 퐁니퐁넛마을에서 일어난 한국군 청룡부대 민간인학살과 이 사건 피해자인 응우옌티탄이 한국 정부를 상대로 벌이고 있는 소송을 다루었다. 참전 관련 단체는 이를 편파방송으로 규정하고 참전군인 명예를 훼손했다면서 항의했다. 방송 열흘 후 월남참전전우회, 고엽제전우회, 무공수훈자회, 상이군경회 4개 참전 관련 단체가 KBS본관 앞에서 집회를 열고 KBS사장 면담과 사과를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화형식과 삭발식, 국회까지 행진하면서 그들은 ‘우리는 양민을 학살하지 않았다’ ‘참전군인의 명예를 훼손하지 말라’고 했다.  집회 다음 날 KBS 소수 노조는 ‘20년 전 알려진 논쟁 아이템,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총살사건을 1심 선고 전 방송한 까닭은?’이라는 성명을 냈다. 이후 노조 위원장이 월남참전자회 회장을 찾아 KBS를 대신해서 사과하고 문제해결에 적극 나서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총살’이나 ‘논쟁 아이템’ 등 사려 깊지 못한 용어의 표현에서와같이 이 입장은 베트남전쟁 과거사 문제에 대한 진지한 접근보다는 ‘공정’을 빙자한 선동의 언어와 편협한 이해 수준을 드러내고 있었다. 방송의 날 리셉션 행사장 앞 거리에 참전군인이 모이게 된 것은 이러한 과정에서 발생한 일이다. 집회에 참석한 한 참전군인은 “우파 노조 분들이 월남전에 대해 상세하게 보도하고 우리 위상을 높여줄 것이다”라는 기대를 말했다고 한다. 보편적 인권개념에 반하거나 미달하는 노조가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지 자못 의문스럽다. 언제 한 번이라도 참전군인들의 고통과 절박함을 그들이 진지하게 접근하는 걸 본 적이 없는 데다가 자칫 그들이 긴 세월 겪어 온 아픔을 도리어 도구화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앞선다. 지난 9월 2일 한국방송협회 주최 방송의날 축하연이 열리는 서울 여의도 63컨벤션센터 앞에서 보수단체들의 공영언론 사장 퇴진 촉구 집회가 진행됐다. 사진 출처 - 미디어오늘  며칠 뒤 국가보훈처는 <KBS 시사멘터리 추적> 프로그램 관련해 입장문을 냈다. 보훈처장이 국회에 출석해서 유감을 표명하기도 했다. 역시 KBS가 편파방송으로 참전군인의 명예를 훼손했으며 이에 대응하겠다는 것이었다. 국가보훈처가 오래도록 참전군인의 ‘명예’를 지키기보다는 이러한 노력 자체를 망각해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20년 넘게 국가가 방관함으로써 일어난 갈등과 참전군인의 분노에 대한 책임 있는 입장을 내기는커녕 얕은 수준의 문제 인식을 보여주는 데 그쳤다.  참전군인들은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활동과 퐁니퐁넛 사건 재판이 자신들의 명예를 훼손할 뿐 아니라 참전단체에서 추진하고 있는 전투수당, 참전명예수당 등을 받는 일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참전군인 한 사람이 단체 누리집에 쓴 글이다. “이 문제가 잘못되어간다면 우리들 희망 사항인 전투수당, 참전명예수당, 이러한 모든 것이 순조롭게 되가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훗날 자손들에게도 부끄러운 조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참전군인들의 걱정과는 달리 국가의 이름으로 전쟁에 참여한 뒤 받아야 하는 대우가 전쟁의 진실 때문에 어그러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아가 국가에 공헌했다고 해서 전쟁 때 행한 모든 행위가 정의일 수는 없는 일이다. 참전군인들 스스로가 걱정하듯이 그 부끄러움이 참전군인들의 몫만이 아니라 후대들의 몫으로 넘겨주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진상규명과 참전군인의 진심 어린 성찰이 반드시 필요하다.  8월 초 익산에서 참전군인을 찾아다니고 있는 동안 응우옌티탄은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익산에서 태어나 6.25를 겪고, 초등학교를 다니고 지금은 고향에서 농사일을 하거나 노년을 보내고 있는 월남전 참전군인들의 기억을 들었다. 마을은 고요하고 참전군인들의 이야기는 가슴이 저려왔다. 응우옌티탄의 눈물과 참전군인의 애환은, 실은 둘이 아니다. 오랫동안 피해자 가해자로 나누어 인식해온 사회적 관점이 둘을 만나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참전군인 32만여 명 중 5천여 명은 베트남에서 죽었고 살아 돌아온 이들도 이미 70대 중반과 80대 노년으로 접어들었다. 18만여 명 정도가 있다지만 그들과 만날 수 있는 시간 또한 그리 길지 않다. 시간이 없다. 이 둘을 이제라도 만나게 하려면 최소한의 진실에 접근해야 한다. 다시 짐을 싼다. 참전군인 할아버지들을 만나러 가기 위하여.
2022-09-07 | hrights | 조회: 327 | 추천: 3
신하영옥/ 여성운동연구네트워크 젠더고물상  한 주가 시작되는 월요일이었던 8일에 사무실 건물의 배수구가 막혀 물이 현관을 넘나들고 있어 건물 전체의 활동가들이 함께 배수구 청소를 하였었다. 그런데 바로 그날 신림동에서 여성 3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 반지하에 사는 40대 여성 두 명과 10대 여아였다. 70대 노모는 병원에 입원해서 참사를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10일에는 상도동 반지하주택에서 50대 여성이 침수로 사망했다. 역시 70대 노모는 다행히 참사를 피했다고 한다. 사망한 위의 40대 여성 한 명과 50대 여성은 발달장애인으로 이들을 돌보는 70대 노모와 함께 살다가 참변을 당했다. 이러한 사건들을 계기로 16일에는 ‘재난불평등추모행동’이 꾸려졌고, 22일에는 ‘서울장애인부모연대’가 서울시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출처 - 한겨레  ‘재난불평등추모행동’측은 8월 16일 기자회견을 열고 서울시의회 앞에 일주일간 분양소를 마련하여 자연재해가 아닌 정부 정책의 부재로 인한 재난이라는 사실, 사회적 취약계층에 대한 관심, 기후로 인한 재난의 예방과 극복을 위한 정책의 필요성을 시민들에 알리고자 하였다. 이날 기자회견문에는 9일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이 “아, 주무시다 돌아가셨구나”, “그런데 여기 계신 분들은 왜 미리 대피를 하지 않았어요?”라고 한 발언과 10일부터 12일까지 3일간의 장례 기간동안 대통령실이나 서울시장, 서울시 관계자, 여당 등에서 한 명도 문상하러 오지 않았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주무시다 돌아가셨으니 다행이라는 건지, 침수 사실을 알고도 대피하지 않은 그분들이 잘못이라는 건지, 한 나라의 대통령이 할 말은 아님이 틀림없다. 이번 침수사건을 계기로 침수가 누구에겐 불평거리로 끝나지만 누구에겐 생존의 문제임이 드러났다. 그 경계에는 불평등이 존재하고 있다.  예전에 강의안을 작성하면서 존 C.머터의 <재난 불평등>을 참고한 적이 있었다. 저자는 자연재해가 재난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는 인간으로 인한 원인이 함께 작동한다고 보았다. 즉, 자연적 요소와 인간적 요소가 함께 결합 되어 발생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자연재해가 ‘파인만 경계(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경계)’의 양쪽에 동시에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재난의 피해가 동등하지 않은 원인, 재난의 피해가 불평등하게 오는 원인을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에게 피해를 준 것”이라고 못 박는다. “자연이 처음 타격을 가하는 무시무시한 몇 분 또는 몇 시간 동안에는, 재난은 자연적이다. (…) 그러나 재난 이전과 이후의 상황은 순전히 사회적 현상”이라는 것이다. 재해로 인한 피해는 사회적 소외계층, 즉 빈민층, 장애인, 여성, 노인, 청소년 등등 취약계층에 집중되어 있다. 재난 불평등의 요소는 부, 장애여부, 나이, 권력, 성 등 사회적 불평등 요소와 맞물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자연재해는 한 사회가 기존에 지니고 있던 불평등한 현실을 답습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이번 참사는 기후 위기와 취약계층에 대한 주거정책의 부재가 빚어낸 것이다. 문제는 이 두가지 원인 모두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기후를 위기로 몰아넣은 것도 자본주의 생산시스템을 변경하지 않고 자연을 무자비하게 파괴한 인간 행동의 결과이고, 반지하에서 참사를 당한 것도 부동산으로 돈을 벌려고 하는 인간 행동의 결과이다. 나아가 재난마저 돈벌이 기회로 사용하기조차 한다. 조지프 슘페터는 ‘창조적 파괴’라는 개념에서, 재난은 ‘손해’가 아니라, 외려 복구 과정에서 사회적 ‘이익’을 산출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서울시가 3월에 발표한 ‘도시기본계획’에서는 부동산 규제를 풀겠다는 것이고, 이번 사건에 대한 대책으로는 반지하주택을 없애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부동산 규제를 풀면 집으로 돈을 버는 사람들의 이익을 더 보장해 주겠다는 것이고, 반지하주택을 없애겠다는 것은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주거이전에 대한 대책도 없이 이들을 거주지에서 쫒아내겠다는 것일 뿐이다. 이들이 갈 곳은 또다시 고시촌이나 옥탑방 같은 곳으로 옮겨갈 뿐 근원적인 대책은 되지 못할 것이다. 부동산으로 이익을 얻는 이들에게 이는 재난 복구과정에서 사회적 ‘이익’을 산출할 수 있다는 슘페터의 이론이 들어맞게 된다. 때문에 재난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고려가 없다면 오히려 부익부 빈익빈의 양극화를 초래하게 된다.  하나 더 고려할 것은 참사를 당한 발달장애인들을 돌보는 이들이 나이든 여성들이라는 점이다. 대게 돌봄 노동은 여성들의 몫이다. 여성들이 재해 상황에서 더 많은 피해를 당하는 것은 위기 상황에서도 돌봄을 멈출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취약계층에 대한 돌봄 노동은 가족이 아니라 국가, 사회적 돌봄 노동으로 변화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부와 성 모두에서 취약 요소를 안고 있는 여성에게 재난은 더 가혹한 결과로 다가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재난은 어쩔 수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재난 발생의 원인과 재난 발생 후의 대책은 인간의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인재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인재의 결과는 사회적 불평등의 위계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사회적 불평등이 양극화 될수록 재난 불평등도 양극화된다. 이번 참사에 대응하는 국가와 서울시의 안일하고 미봉적인 대처는 정치권력층이 양극화의 어느 쪽에 위치하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믿을 것은 양극화의 다른 편에 있는 이들의 연대와 대응뿐이다.
2022-08-31 | hrights | 조회: 471 | 추천: 0
박상경/ 인권연대 회원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던 늦은 밤, 전철을 타려던 내 발길이 잠시 멈칫거렸다. 승객이 별로 없는 전철 안에 기괴한 기운이 감돌았던 것이다. 불콰한 취객의 고성도 수군거리는 대화 소리도 없는, 이런저런 소리와 사람들로 북적거려야 할 전철에 적막감이 감도는데, 그 느낌이 기괴했다. 코로나19로 말을 빼앗긴 사람들의 마스크를 쓴 표정 없는 얼굴은 영화에서나 보던 미래의 암울한 도시 풍경을 보여 주는 것만 같았다.  이 기괴한 적막을 깬 것은 서울역을 벗어나면서였다. 그전부터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걸 미처 깨닫지 못했던 걸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서서 가는 사람이 별로 없던 전철 안의 사람들 눈길이 소리 나는 쪽으로 일시에 달려가는 느낌이었다. 서른 중반의 두 남녀가 마스크를 쓰지 않은 채 이야기를 나누는데, 고요한 전철 안에 울림마저 느끼게 하는 대화 소리를 정작 두 사람은 인지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사람들의 못마땅한 눈길을 느낄 만도 한데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대범하게) 이어지는 두 사람의 대화는 마치 고장난 라디오에서 나오는 소리처럼 신경을 긁었다. 적막 속에 이어지는 말소리에 오히려 사람들이 숨을 죽였다.  그때였다. 전철 한쪽 끝에 서 있던 한 남자가 발소리를 쿵쿵 내며 흔들흔들 두 사람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보통 사람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있는, 덩지가 아주 컸다. 사람들의 긴장한 눈길이 그 남자를 따라가는데 당사자들은 모르는 눈치였다. 일부러 쿵쿵 소리를 내며 두 남녀 앞에 다가간 남자가 앉아 있는 남자의 코끝에 거칠게 손가락을 흔들며 소리쳤다. “마스크 써!”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었는지 앉아 있던 남자는 멀뚱히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다시 한 번 “마스크 써, 마스크 쓰라고!”라며 덩지 큰 남자가 우악스럽게 소리를 쳤다. 순간, 상황을 파악한 남자의 얼굴이 당황스러움과 수치심으로 발개졌다. 사과하고 끝내기에는 자존심이 너무 상했고, 대거리하기에는 본인의 실수와 남자의 덩지가 만만치 않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남자를 대신해 옆에 앉은 여자가 남자의 주머니에서 마스크를 꺼내 입에 씌워 주고 자기도 마스크를 썼다. 그들의 행동에 만족했는지 덩지 큰 남자는 자기가 있던 자리로 돌아갔고 상황은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러나 두세 역을 가지 않아 두 남녀는 다시 ‘턱스크’를 한 채 두런두런 대화를 하였다. 조용한 전철 안에서 그 말소리는 사이렌 소리 같았다. 덩지 큰 남자가 더욱 거칠고 험악한 몸짓으로 그들에게 다가가 욕설 섞인 말로 “너, 마스크 써, 마스크 쓰라고, 왜 벗고 난리야!”라며 큰소리를 쳤다. 이번에도 옆에 있는 여자가 남자의 마스크를 슬그머니 코 위로 올려 주며 자신도 바르게 썼다. 남자는 여전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저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덩지 큰 남자의 기세가 사나워지면서 사태가 커지려는 순간, 한 청년이 다가가서 덩지 큰 남자의 팔을 부드럽게 잡으며 “이분들 이제 마스크 쓰셨으니 됐잖아요! 아저씨도 그만하세요!”라며 달랬다. “좋은 말로 할 때 들어야지~ 우이 씨~” “이제는 (마스크) 쓰셨으니~” 청년은 남자를 달래면서 두 남녀에게는 참으라는 몸짓을 했다. 쉽지는 않았지만 사태는 그쯤에서 매듭지어졌다. 뭔가 뒤끝이 개운치는 않았지만, 덩지 큰 남자와 청년은 자기가 있던 자리로 돌아갔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창피를 당한 두 남녀는 분하기는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는지 그다음 역에서 내렸다.  코로나19는 은연중에 내가 모르는 사람들을 적대시하는 감정까지도 용인하게 만들었다. 코로나19 초기, 집단 감염이 발생하면 우리는 초기 확진자를 향해 거침없이 손가락질을 하며 매도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았던가. 돌아보니 그때 우리한테 있던 절대 감정은 언제 전염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따른 공포였다. 그 불안감에 따른 공포를 나는 전철 안에서 체감하였다. 그리고 그 공포감을 제압한 것은 폭력이었다. 누군가의 잘못된 행동을 알려주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고, 전철 안에 있던 우리는 그들 스스로가 대화를 멈추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들은 눈치 없이 자신들만의 세상에 있었고, 이를 참지 못한 한 사람이 그들을 폭력적으로 제압하였다. 종료된 상황이 그저 유쾌하지만은 않았던 이유다. 덩지 큰 남자보다 먼저 “마스크 좀 써 주시겠어요!”라고 말하지 못한 걸 자책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저녁 뉴스를 들으며 상식보다는 권력이 우위에 있는 세상이라는 걸 새삼 확인하면서, 공포를 제압하는 폭력이 이렇게 우리를 세뇌시키도록 놔두어도 되는 건지 하는 생각에, 코로나19를 살아가는 나를 되돌아보는 오늘이다.
2022-08-23 | hrights | 조회: 308 | 추천: 4
이재환/ 시흥시청 지역화폐팀  요즘 주변에서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은 ‘지역화폐 어떻게 될 것 같아요?’ 이다.  발단은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최근 국회 대정부 질의응답에서 시작됐다. 추 부총리는 “전국 지역화폐를 중앙정부 예산으로 대대적으로 지원한 데 대해 학계 등 전문가의 많은 지적이 있었고, 원점에서 실효성을 점검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각 지자체가 자체적으로 해야 한다. 중앙정부 예산으로 광범위하게 지원하는 형태는 재고돼야한다”고 덧붙였다. 출처 : 시흥화폐 시루  정부의 지역화폐(지역사랑상품권) 지원 예산 축소는 올해부터 있었다. 정부는 2022년 국비 지원액을 2021년보다 5,000억 원 이상 적은 7,053억 원으로 편성했다. 그 결과 경기도의 경우 국비:도비:시비 지역화폐 인센티브 비율이 4:3:3 수준으로 편성되었다. 지난해는 8:1:1 수준이었다.  정부의 올해 급격한 지역화폐 지원 축소로 인해 각 지자체들은 매칭되는 지자체 부담 예산의 증가로 지속가능성의 한계에 부딪치게 되고, 인구수가 많아 발행량이 큰 광역시·대도시를 중심으로 지역화폐 인센티브 축소 및 중단 소식이 잇따르고 있다.  이 와중에 추 부총리의 발언이 나오자 곳곳에서 지역화폐가 내년부터는 발행되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마저 나오는 것이다.  사실 관계부터 톺아보자. 추 부총리의 재고 발언의 근거는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효과성에 대한 학계 및 전문가들의 의문. 그 근거는 2020년 조세재정연구원의 보고서이다. 조세재정연구원은 ‘지역화폐 도입이 지역경제에 미친 영향’ 보고서를 통해 “특정 지역 소비가 늘어나도 국가 전체적으로는 소비 증대 효과가 없다. 지역화폐는 소비자가 원래 쓰려고 한 현금을 대체하는 것에 불과하다. 지역화폐를 쓸 수 있는 업종에만 소비가 몰리게 하는 문제를 불러 온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지역화폐를 대신해 전통시장 상품권인 온누리상품권의 확대’를 대안으로 지목했다.  지역화폐 도입의 가장 큰 목적은 ‘역외소비방지’이다. 서울·수도권으로 지역소비의 부가 몰리는 것을 막고 지역 내 소비로 돌려보자는 것이다. 서울·수도권에 본점이 몰려있는 대형마트, 백화점, 온라인쇼핑몰, 대기업 직영점 및 프랜차이즈 등이 지역화폐 가맹점이 안 되는 이유이다.  다시 말해 지역화폐는 국가 전체적인 소비 증대가 목적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난맥상 중에 하나인 부의 서울·수도권 집중 현상을 조금이나마 해소해 보자는 의도로 시작된 것이다.  지역에서만 쓰게 한 지역화폐는 다음단계로 지역 내 소외된 소비처에서 순환시키자는 목적이 덧붙여진다. 그래서 대기업상권에서는 못쓰고 주로 골목상권에서만 쓰도록 지자체마다 가맹점 기준을 정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동안 별다방에 가던 소비자의 발길을 동네카페로 돌리려는 것이다. 대기업상권과 골목상권의 상생과 공존을 위함이다.  덧붙여 보고서는 지역화폐를 쓸 수 있는 업종에만 소비를 몰리게 하는 문제라고 했지만 이는 지역화폐의 가맹점 기준을 감안하면 역설적으로 동네상권에서만 소비를 몰리게 하는 게 문제라는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현실에서 지역화폐를 쓸 수 있는 업종(가게)들은 지역화폐를 쓰지 못하는 가게보다 대체로 열악하다.  조세재정연구소의 해당 보고서가 나온 이후 지역화폐에 부정적인 입장에서는 전가의 보도처럼 이 보고서의 내용이 인용된다. 하지만 이 보고서가 과연 지역화폐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현장의 현실을 제대로 살펴보고 나온 보고서인지 의문이다. 이 보고서가 나온 이후 지역화폐 관련 다수의 논문이 나왔고, 대부분 지역화폐가 지역경제 활성화 및 경제공동체 강화에 순기능을 하고 있다는 분석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보고서가 제시한 대안이 온누리상품권이라는 부분에서는 더욱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온누리상품권은 전국의 전통시장과 상점가에서만 쓸 수 있게 만든 상품권이다. 지역화폐의 목적과 용도와는 전혀 다른 상품권을 대체재로 내놓았다는 생각이다.  두 번째 근거는 재정문제이다. 어떤 시각에서는 정치적 변화가 지역화폐 정부지원 축소의 배경이라고 말하지만 사실과 다르다. 정부의 지역화폐 지원 축소는 이미 4년 전부터 계획되어 있었다. 2019년부터 정부는 기재부의 예비비로 4년 동안 한시적인 지원 예산을 마련했다. 그 기간이 올해 종료된 것이다. 그러니 2023년부터 새로운 틀에서 지원 방향을 모색해야 했고, 바뀐 정권의 긴축재정 정책에 따라 변화가 불가피한 상황인 것이다. 정부 지원 축소는 이미 예고된 미래였다.  앞서 말한 대로 정부는 올해 지역화폐 지원 국비 투입액을 7,053억원으로 편성했다. 내년도 정부 총 예산은 640조원으로 편성될 것으로 보인다. 만일 올해 지역화폐 국비 투입액만큼을 전액 삭감한다 해도 전체 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크지 않다. 지역화폐에 대한 국민의 만족도와 정책 효율성을 감안한 정책 방향인지는 잘 모르겠다.  여하튼 정부 지원이 축소되거나 중단된다 하더라도 지역화폐 정책이 일제히 일몰되지는 않을 것이다. 지역사랑상품권은 지자체가 발행 권한을 가지기 때문에 존폐는 지자체의 선택 여부에 달려있다. 지자체의 의지에 따라 지역화폐가 유지되거나, 더욱 발전하거나 반대로 복지비(정책수당)의 전달 수단에 머물거나, 아예 정책을 중단하는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다.  확실한 사실은 지난 3년간 코로나19 민생위기 극복 차원에서 유지됐던 10% 할인/적립 인센티브를 지속하기 힘들다는 점이다.(지자체가 의지와 예산을 부담할 수 있는 여력이 된다면 예외이지만)  이 와중에 살아남을 지역화폐는 지역화폐의 도입 취지에 충실한 지자체의 지역화폐가 될 것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지역 소비의 역외유출을 막고, 역내로 유입된 소비가 고르게 배분되어 대기업 상권과 골목상권 자영업이 균형 있는 발전을 이루기 위함이 지역화폐의 목적이다.
2022-08-17 | hrights | 조회: 326 | 추천: 1
염운옥/ 경희대 글로컬역사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  올해 7월의 어느 날, 드디어 파리 ‘인간박물관(Musée de l'Homme)’에 다녀왔다. 지구 온난화로 매년 더워지고 있는 유럽 날씨. 에어컨 없이도 쾌적한 유럽의 여름은 이제 옛말이 되었다. 그날 파리는 섭씨 40도에 가까운 기록적인 폭염이었다. 메트로 트로카데로 역에 내리면 인간박물관이 있는 팔레드샤요(Palais de Chaillot)와 에펠탑이 바로 보인다. 팔레드샤요는 1937년 파리박람회장으로 세운 건물로 인간박물관은 양 날개처럼 펼쳐진 반원형 건물의 오른편에 위치해 있다. 바깥 날씨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유물에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이 박물관이건만 그날은 어찌나 더운지 냉방을 하는데도 실내가 더웠다. 인간박물관 전시실을 옮겨 다닐 때면 통창 너머로 에펠탑의 멋진 전경이 각도를 달리해 시야에 자꾸 들어왔다. 한여름 한낮 데워진 지면에서 열기가 피어올라 에펠탑이 아래로부터 녹아내리는 것 같은 착시마저 들었다. 출처 - 저자 촬영 (인간박물관<Musée de l'Homme>)  인간박물관은 가장 가보고 싶었던 인류학 박물관이었다. 인간박물관은 영광과 오욕을 동시에 지닌 박물관이다. 초대 관장 인류학자 폴 리베(Paul Rivet)는 반파시즘과 반인종주의의 정신에 충실했고, 이본 오동(Yvonne Oddon)을 비롯한 박물관 소속 학자들은 프랑스를 점령한 나치에 저항하는 최초의 레지스탕스 조직을 결성했다. 리베와 오동에게 바치는 레지스탕스의 영광된 기억은 이 박물관의 ‘폴 리베 아트리움’과 ‘이본 오동 도서관’이라는 이름에 새겨져 있다. 한편, 인간박물관은 사르키 바트만(Saartjie Baartman)의 유해가 있던 곳이다. 해부되고 분해된 바트만의 몸이 유리병에 담기고 박제 표본이 되어 1970년대까지 전시되었던 곳이 바로 인간박물관이다. 바트만의 유해는 2002년 고향 남아프리카로 귀환했지만, 인간박물관이 식민박물관으로서 식민지 타자의 유해, 유골, 유물을 소장하고 있었고, 지금도 일부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인간박물관의 기원은 1882년에 문을 연 트로카데로인류학박물관(Musee d’Ethnographie du Trocadero)에 있다. 트로카데로인류학박물관은 식민지에서 가져온 유물과 아르 네그르(Art nègre)라 불리는 아프리카 미술을 모아둔 식민박물관이자 인류학 박물관이었다. 1937년 인간박물관이란 이름을 걸고 개관할 때는 인종주의 극복과 보편적 인류애를 내세웠다. 그러나 식민박물관의 유산을 탈피하는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더구나 2006년에는 소장 인류학 유물의 대부분을 새로 개관한 자크 시락-케브랑리미술관(Musée du quai Branly-Jacques Chirac)에 넘겨주게 되면서 인간박물관은 새로이 활로를 모색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래서 인간박물관은 6년 동안 문을 닫고, 상설전시 개편을 단행해 2015년 10월 재개관하는 길을 택했다. 현재 보고 있는 전시는 대규모 리뉴얼의 산물이다.  리뉴얼 기간과 코로나19 폐관 동안 기다리며 기대도 부풀었지만, 다른 한편으론 개편 이후 벌써 몇 년의 시간이 흐른 만큼 상설전시가 낡은 것이 되었으면 어쩌나 하는 우려도 생겼다. 결론부터 말하면 기대와 우려는 절반씩만 맞았다. 먼저 인간박물관은 전혀 낡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이 박물관은 실체가 모호한 ‘인류’라는 허구의 개념에 매달리는 대신, 피와 살을 지닌 구체적인 ‘인간’에서 출발한다. 그 때문에 이 박물관의 우리말 번역어도 ‘인류박물관’이 아니라 ‘인간박물관’이 되어야 옳다.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 전시실은 각기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가?”라는 세 가지 질문을 던지고 답하며, 인간의 현재와 과거와 미래를 조망한다. 혹자는 이 박물관이 지나치게 생물학에 치우쳐 있다고 평하기도 하지만, 나는 오히려 형질인류학과 문화인류학을 통합적으로 적용해 생물로서의 인간과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모순되지 않게 설명하고 전시한 것이 장점으로 보였다.  인간의 미래 전시실 마지막 케이스에는 안경, 얼굴 부상 성형, 임플란트, 미용 성형, 인공보철 팔과 다리 등 다양한 인공보철이 걸려 있었다. 인공보철이라고 하면 SF에 나오는 수퍼 히어로나 사이보그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시가 보여주듯이 손상으로 해를 입은 육체를 보완하는 보철은 인간 역사 이래 계속 존재해 왔다. 보철은 질병과 장애에 인간이 대처해온 긴 역사와 함께 공존해왔다. 보철은 미래를 말하는 동시에 미래를 장밋빛 판타지로 상상하는 오류에서 벗어나게 도와주는 생각거리다. 인간 육체의 한계를 한방에 극복할 ‘마법의 알약’ 같은 건 존재할 리 없고, 우리는 아프고 다치고 부러진 데를 어루만지고 꿰매고 덧대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의 미래를 보철로써 말하는 전시는 인간 존재의 한계와 존엄을 동시에 일깨우는 울림을 전했다. 출처 - 저자 촬영 (인공적 세계의 확장-보철/부분확대)  인간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인류학 박물관으로서 인간박물관의 또 다른 미덕은 고인류학에서 널리 인정되고 있는 인류 아프리카 기원설을 구체적 유물로 전시하고,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에 대한 답으로 아프리카를 인류의 요람으로 정확히 자리매김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인종적 다양성에 관한 전시는 마음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피부색과 안면 골격이 다양한 인간의 흉상을 1층과 2층을 연결해 수직적으로 배치해 놓은 전시는 언뜻 보았을 때 피부색 차이를 정면으로 드러내며 인간 다양성을 찬미하는 전시로 보였다. 하지만 설명문을 읽어보고는 긍정적 평가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럽인 흉상은 이름 없이 ‘전형’으로 전시된 반면 눈을 감고 있는 비유럽인 흉상에는 구체적인 이름이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비유럽인 흉상은 인간전시를 위해 프랑스에 왔던 아메리카 인디언, 애보리진, 태즈메이니아인, 그린란드인, 무어인, 아랍인, 수단인의 실제 얼굴을 본떠 제작됐기 때문이다. 전시 설명문에 비유럽인 흉상의 주인공 이름을 밝히고, 그들이 프랑스에 오게 된 연유를 적고, 그들을 부당하게 ‘열등한’ 인종으로 낙인찍는데 동원된 도구인 두개계측기(cephalic index)를 나란히 놓고 과거 골상학과 인종주의를 반성한다고 해서 이 전시를 타당하고 올바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한 평자가 혹평하듯이, 과거 ‘호기심의 방’에 놓였을 유물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재활용한 것에 불과한 것 1) 은 아닐까? 인간 다양성을 전시하는 대안적 방식은 무엇일까? 출처 - 저자 촬영 (인간유형흉상전시와 두 개계측기)  젠더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박물관 전시의 문제점은 더 눈에 들어온다. ‘여성은 육체, 남성은 정신’이라는 낡은 이분법을 무심코 드러내고 있는 곳이 여럿 보였다. 첫 전시실 ‘우리는 누구인가’의 시작점에는 젊은 여성과 노인 남성의 두상이 있고, 그 옆의 버튼을 누르면 오디오 설명이 나오는 장치가 있었다. 인간의 육체적 형질과 특성에 대한 설명은 여성이 하는 반면, 생각하는 인간의 이성에 대해서는 남성 노인이 “자, 내 주름을 만져보렴”이라면서 설명을 시작한다. 21세기 전시로서 너무 낡은 사고방식이라 지적하면 속 좁은 반응인가? 또한 인간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전시하면서 출생과 양육에서 여성의 역할을 전통적 생물학적 성별분업에 고정해 제시한 것, 미래의 사이보그 인간을 굳이 임신한 여성으로 재현한 것도 상식에 기댄 게으른 설정이었다. 이외에도 글로벌라이제이션을 인간의 현재와 미래의 당면한 현실이자 지향으로 제시하면서도 글로벌라이제이션이 결코 평등하게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을 놓치고 있다거나,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사이의 교류 증대를 식민주의의 극복과 안이하게 연결 짓는 점도 취약한 부분이었다. 출처 - 저자 촬영 (인공적 세계의 확장: 오디오 전시 임신한 여성)  반인종주의와 탈식민주의를 완벽하게 구현한 박물관과는 거리가 있지만, 인간박물관은 적어도 내가 본 인류학 박물관 가운데는 앞줄에 놓일만한 박물관이다. 프랑스의 박물관들은 대체로 프랑스어에 능숙하지 않은 관람자에게 불친절하다. 영어 가이드가 소략하거나 아예 없는 경우도 허다하다. 하지만 인간박물관은 영어와 스페인어 오디오 가이드를 잘 갖춰놓았고, 설명 내용도 깊이 있고 훌륭하다. 관람 시에는 오디오 가이드 앱 다운로드를 추천한다. 1) Herman Lebovics and Gilles Boëtsch, “Biology and Culture at the reinvented Musée de l'Homme,” French Cultural Studies, Vol. 29(2), 2018, p. 105.
2022-08-11 | hrights | 조회: 996 | 추천: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