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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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김재완(방송대 법학과 교수), 신하영옥(여성활동가), 윤영전(평통서문예원장), 이광조(CBS PD), 이문영(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 정보배(출판 기획편집자), 정재원(국민대 국제학부 교수), 조광제(철학 아카데미 상임위원), 최정학(방송대 법학과 교수), 홍미정(단국대 중동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1. 국민의 권력 전번 10월 25일에 「민주주의적 파문이 요구된다」라는 글을 써서 올렸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 독직 사건’(흔히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이라고 하지만 이는 잘못된 명칭이다.)을 계기로 국민들의 대의기관인 국회의원들이 국회를 통해 최고의 통치 권력 기관인 대통령의 탄핵을 가결하여 헌법재판소의 판결만을 남겨두고 있다. 이러한 국회에서의 대통령 탄핵은 국회의원들의 자발적인 판단과 운동에 의거한 것이 아니었다. 수백 만 명의 국민들이 곳곳의 광장에 총집결하다시피 해서 현직 대통령에 대해 ‘하야’, ‘퇴진’, ‘탄핵’, ‘체포’ 등을 외치면서, 각자 국민으로서 헌법에 의해 명기 · 보장된 자신의 권력을 행사한 결과였다. 이러한 국민들의 직접적인 권력 행사는 헌법에 명기 · 보장된 집회 및 결사의 자유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동안 국민들은 투표를 통해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을 선출하여 간접적으로 자신들의 권력을 행사하고자 했다. 그런데 국민들은 그 간접적인 권력 행사가 무용한 정도가 아니라 악용되어, 오히려 자신들의 권력을 짓밟고 우롱하여 폐기 처분하다시피 한 사실을 확연하게 인식했다.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그 생각을 직접 실천에 옮기고자 광장에서 직접적으로 권력을 행사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국회에서의 대통령 탄핵을 이끌어낸 것이다. 중요한 사실은 이를 통해 국민들의 간접적 권력 행사의 결과로 이들 기관이 갖게 된 대의적인 권력은, 헌법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명기 · 보장된 국민들이 갖는 근본 권력에 의거한 것임을 현실적으로 실증해 보였다는 것이다. 이에 우리는 국민의 권력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하게 된다. 첫째는 헌법에 명기된바 모든 종류의 국가권력의 원천인 국민의 근본 권력이다. 둘째는 국민투표를 통해 형성되는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을 기관으로 삼아 간접적으로 발휘되는 국민의 대의 권력이다. 셋째는 이번 촛불 집회에서 현실적으로 행사된 국민의 직접적인 권력이다. 2.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권력의 개별성과 보편성 이 중에서 특별히 성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마지막 ‘현실적으로 행사되는 국민의 직접적인 권력’이다. 국민의 대의권력의 행사가 지극히 사적인 권력으로 심각하게 변질됨으로써 국민의 근본 권력이 완전히 무력(無力)하게 되다시피 하자 대대적으로 발휘된 것이 바로 국민의 직접적인 권력 행사다. 12월 13일 자 《한겨레신문》 3쪽에 실린 ‘스마트 시민, 새로운 정치(상)’은 이번 촛불 집회를 효율적으로 활성화하기 위해 <온라인 시민회의>를 만들려다 거센 반발에 부딪힌 사건에 대해, 누군가는 “당신이 왜 함부로 나를 대표하려는가?”라는 말을 했다고 전하고 있다. 합법적인 대의권력 기관인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대의적인 시민단체조차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일체의 대의적인 권력 행사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민들 각자의 자결(自決)에 의거한 직접적인 권력의 행사야말로 진정한 권력행사라는 것인데, 주시해야 할 사실은 그러한 각자의 자율적이고 주체적인 권력의 행사가 수 백 만의 통일된 집단적 권력으로 현실화되어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통일된 보편적인 권력으로 현실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국민의 근본 권력이 지닌 개별성과 보편성이 하나로 결합되어 현실화되었다는 것이다. 좀 더 이론적인 설명을 하자면, 추상적인 보편성이 개별성에 의해 현실화됨으로써 구체성을 현실적으로 확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철학자 헤겔(G. W. F. Hegel, 1770∼1831)은 국가를 일컬어 ‘구체적 보편성’이 현실화된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국가권력 역시 ‘구체적인 보편성’을 띤 것이라고 해야 한다. 이때 ‘구체적’이라는 것은 국가권력이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지닌 권력을 하나하나 반영할 뿐만 아니라,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적용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보편적’이라는 것은 국가권력이 통일적인 정체성을 가질 뿐만 아니라, 국민들에게 평등하게 통일적으로 적용된다는 것이다. 이를 염두에 두고 보면, 이번 대대적인 촛불 집회를 이른바 ‘촛불 시민혁명’이라 일컬을 수 있는 핵심 근거는 그동안 당연하게 여겨 온 ‘대의제 민주주의’로 인하여, 간적접인 권력 행사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던 국민들이 직접적으로 개개인의 국민권력을 행사함과 동시에 통일된 국민권력으로 승화시켜 냈다는 점이라 할 것이다. 말하자면, 구체적 보편성을 띤 국가의 진정한 면모를 현실적으로 실현해 보인 점이라 할 것이다. 국가는 비가시적이다. 그래서 자칫 국가의 보편성은 추상적인 수준에 머물기 쉽다. 옛 군주제에서의 국가의 보편성은 전혀 구체적으로 실현되지 않고 오로지 강압에 의거한 추상적인 것에 불과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져 온 독재정권들은 국가를 국민으로부터 찬탈하여 사적인 소유로 전락시킴으로써 국가의 보편성을 지극히 추상적인 수준에 머물게 했다. 그러면서 강압적인 대의정치를 참다운 국가정치인 양 호도했다. 그 이후, 특히 민자당, 한나라당, 새누리당 등으로 이름을 바꾸어가며 이들 독재정권들의 혜택을 톡톡히 받고 있는 정치 세력들은 국민투표에 의한 국민들의 대의적인 권력 행사가 마치 헌법이 명시하여 보장되어야 한다는 국민들의 근본 권력의 최종적이고 유일한 형태인 양 여겨왔다. 그러면서 국가 권력의 기관을 일정하게 탈법적으로 동원하면서까지 각종 정치적인 홍보 전략을 구사하여 국가권력의 보편성을 실질적으로 대표하는 것처럼 행세했다. 그 결과 국가권력의 보편성을 추상적인 수준에 묶어두는 방식의 정치를 해 온 것이다. 사진 출처 - 한겨레 3. 마무리 그러나 이번 ‘촛불 시민혁명’을 통해,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지닌 개별적인 근본 권력이 현실적으로 발휘됨과 동시에 그러한 국민의 근본 권력이 통일된 보편성으로 실현됨으로써, 그동안 당연시되면서 자행되어 온 추상적인 국가 및 국가권력의 보편성이 구체적인 보편성을 갖춘 국가 및 국가권력으로 탈바꿈되는 대 전환의 계기를 맞게 된 것이다. 만약 앞으로 대의 정치에 의거해서 대통령직을 맡아 수행하려 하거나 국회의원직을 맡아 수행하려는 자들이 이 같은 구체적인 보편성을 띤 국가의 정체 및 구체적인 보편성을 띤 국가권력을 금과옥조인 양 온몸에 새겨 정치활동에 임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이번 ‘촛불’이 그야말로 ‘대전환의 시민혁명’으로 현실화되어 역사적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만 하고 또 그렇게 되리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60 | 추천: 0
신하영옥/ 여성운동연구활동가 지난 주 수업시간 “여성운동, 여성의 해방은 인권적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봐요. 정치적 차원에서 주장할 것이 아니라... 여성운동은 그동안 어떤 방식으로 해 왔나요?” 의견과 질문이 동시에 섞인 한 학생의 발언에 잠시 멈칫거리게 되었다. <인권>과 <정치>가 별개였는지? <정치적>이라함에 대하여 사람들은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 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대답은 뒤에서 언급하도록 하겠다. 그리고 그 시간을 전후로, 지난 30여 년 간 해왔던 여/성/운동에 대해 뒤돌아볼 수밖에 없게 만든 현장에 있었다. 하나는 강남역여성살해사건 이후 198일간의 기록을 통해 그간의 활동을 정리해보는 자리였고 다른 하나는 사이버여성폭력에 대해 대응하던 일군의 여성들이 오프라인에서 단체를 결성하는 아주작고 소박한 자리였다. 이 두 현장에서 어쩌면 민주화와 더불어 30년간 여성운동을 해 왔다고 인식하고 있던 나는, 새로운 여성폭력현장과 현상의 출현에 대해, 그 잔혹함에 대해, 그리고 이에 저항하는 여성들에 대한 질기고 악랄한 위협과 테러에 준하는 남성들의 대응양태를 현장에서 겪은 그들을 통해 들으면서 절망, 슬픔, 안쓰러움, 분노, 공포 등 여러 복잡한 감정에 휩싸여야 했다. 강남역 사건이후 전국에서 자발적으로 추모제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자발적으로 발화하였다 하더라도, 책임질, 즉 ‘총대를 메야’할 누군가는 필요하기에 자발적인 ‘총대’들이 나타났고 이들은 며칠 밤낮을 새우며 추모현장을 지켜야 했다. 그러나 이미 여러 매체를 통해 알듯이 ‘일베’를 비롯하여 수많은 남성과 남성 집단들이 ‘웬 여혐살인?’ 이라며 이들을 비꼬고, 비웃고, 욕하고, 위협하고, 나아가 타이르기 까지 했었다. 토론회에서 총대들이 겪은 사건들, ‘커터칼을 드르륵거리며 추모현장을 배회하던 남성’, ‘일베구성원들의 집단적인 추모현장 훼손’, ‘저지에도 불구하고 카메라로 촬영’, ‘동영상 및 영상 올리기’ 등 순간순간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게 하고 후속작업으로 이어지는 온라인상에서의 촬영공개와 신상 털기는 이들이 현재까지도 그 공포와 두려움 안에 갇혀있게 하고 있다. 이들은 말한다. ‘처음부터 페미니스트는 아니었다.’ 고. 오히려 그러한 남성들의 위협과 공포로 인해, 페미니스트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우리는 ‘소라넷’을 위시하여 여성에 대한 폭력과 차별이 혐오와 뒤섞여있는 여러 사이트들을 알고 있다. 온라인 일상에서 발생하는 이러한 행위에 대한 여성들의 공격은 소위 ‘메갈리아’를 통해 발화하였고 이들의 행위는 ‘미러링’이라는 양식으로 수많은-소위 진보남성을 포함-남성들의 비판과 우려, 타이름의 대상이 되었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서는 더 치열한 보복과 위협들이 이 여성들에게 가해졌음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드물다. 이들에 대한 신상 털기는 결국 이들이 직장을 그만두게 될 지경으로 만들고, 고소로 인해 수많은 이들의 온라인 활동을 중단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고소와 그 판결에 따른 경제적 문제까지 떠안고 있으며, ‘남혐’ 신고로 이들의 활동사이트가 폐쇄조치 되거나 남성들의 공격으로 인해 자체 폐쇄하거나 아니면 폐쇄적으로 운영 중에 있다. 그러나 ‘여혐’사이트에 대한 신고는 ‘표현의 자유’라는 보호 하에 운영되고 있는 것, 이것이 온라인에서 발생하고 있는 현상들이다. 많은 여성들이 온라인에서의 성폭력저항활동이 위축되거나 포기하고 있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라인을 넘어 좀 더 공식적인 활동으로 만들기 위해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연결시키려는 시도가 있었고, 그것이 앞서 말한 단체의 개소식이었다. 그들 역시 여전히 그간 당해온 남성들의 위협과 ‘신상 털기’ 등으로 인해 공포와 두려움, 상처를 안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서울시여성가족재단 성평등 도서관 '여기'에 마련된 '기억 존'에 전시된 추모 메시지 사진 출처 - 여성신문 이 두 현장의 두 일군의 여성들을 보면서 어떤 이는 여성운동의 맥이 끊이지 않았다 반가워하고, 어떤 이는 온라인상의 여성폭력과 저항을 담론화해야 한다고도 한다. 나는.... 그냥 이들이 잘 생존했으면 했다. 두려움과 공포로 인한 상처, 신상 털기로부터 비롯된 직장 및 집, 가족들과의 결별로 인한 가난과 법적 다툼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과 심리적 위축으로부터 이들이 살아남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딸 또래의 이들의 저항이 너무나 처절하고 힘겨워서, 여성운동을 했다는 것이 정말 미안할 지경이었다. 처음부터 이들의 활동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간접적인 평가와 소문에 의존했던 것에 대한 환멸. 여성폭력관련법들이 제정됨으로써, 형식적 시스템이 구비됨으로써 어쩌면 여성폭력은 공식적 시스템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은밀하게 숨어버렸던 듯하다. 마치 성매매 집결지를 없애자 다른 곳에서 진행되는 것처럼. 여성의 권리는 ‘인권’이다. 그러므로 여성해방운동은 인권운동의 차원에서 진행되어왔다. 여성도 인간이라는 자명한 듯 보이는 이 도식을 이해시키기 위해 30년을 넘게 싸워왔다. 그리고 그 해결을 ‘정치적’ 으로 접근하여 법과 제도로 이식해왔던 것이다. 페미니즘이 뭐냐고 묻는다면 여성들의 수만큼 많은 페미니즘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페미니즘은 삶의 현장이라는 맥락 속에 있는 주체들을 중요하게 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성도 인간’이라는 것을 주장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실천들이 페미니즘이라고 정의한다면, ‘공적’인 영역에서 ‘시스템’과 ‘조직’으로 여성에 대한 비인간적 처우를 개선하려고 한 것이 그간의 여성운동이라면, 현재 벌어지고 있는 여성운동은 ‘공공의 성격을 띠나 매우 개인화된’ 온라인이라는 공간에서 ‘담론과 언어’를 통해 ‘개인’들이 여성차별과 폭력에 저항하는 방식이다. 이는 ‘일상의 민주화’라는 측면에서 아주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일상 속에서 부딪히는 것은 시스템으로써, 구조로써의 가부장제가 아닌 ‘남성의 얼굴을 한’ 가부장제이다. 그러므로 남성 대 여성, 혹은 남성 집단 대 여성집단 이라는 구도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이 부분을 인정해야 한다. ‘왜 자꾸 남성과 여성의 대결로 몰아가느냐?’ 고 ‘나까지 싸잡아 몰지각한 남성으로 몰지 말라’ 고, 또는 ‘너무 예민하다.’ 고 할 것이 아니다. ‘일상의 민주화’는 뒤집으면 ‘일상의 비민주성’을 의미한다. 일상이 비민주적일 때 그 속에는 억압과 폭력의 주체와 대상이 존재한다. 가부장제 한국사회에서 과연 어떤 성이 주체이고 대상일 것인가는 자명하다. ‘미스 박’으로 모든 못마땅한 여성을 대상화하는 언어와 태도가 존재하는 한, 그리고 집회에서 성평등을 주장하는 여성들에게 여지없이 욕설이 날아들고 성추행이 발생하는 한, 나는 어떤 정권 혹은 정부형태라 해도 온전히 민주적이라고 느낄 수 없다. 민주주의는 누구나 주인/주체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국가권력에서의 의미만이 아니다. 아니 국가권력의 존재이유가 권력을 위임한 국민들 즉, 국가의 주인/주체들의 삶을 잘 조직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일상적인 삶을 누군가의 방해나 억압 없이 스스로 조직할 수 있을 때 제대로 된 민주적 국가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국가의 존재 자체가 국민구성원 모두의 자치적인 일상의 정치를 보장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민 개개인이 곧 국가이며, 국가의 성격은 따라서 국민들의 성격을 닮을 수밖에 없다. 민주화에 대한 함성과 열망이 뜨거운 요즘, 그 어느 때보다도 나의 삶의 조직방식, 일상의 정치방식에 대해 성찰해야 한다. 어떤 방식으로 나는 타인/타자, 특히 소수자와 연결되고 영향을 미치는가? 국가와 사회의 민주화가 내 삶과 어떤 연결을 가지며, 어떻게 연결되어야 하며, 어떤 방식으로 구성되는지, 무엇이 민주화인지? 나는 민주적인지......
2017-08-07 | hrights | 조회: 65 | 추천: 0
김재완/ 방송대 법학과 교수 박근혜-최태민-최순실, 수 십 여년에 걸쳐 형성된 사악한 권력욕의 덩어리가 만천하에 그 민낯을 드러낸 순간 이 나라 주권자들의 자괴감은 절정에 치달았다. 박근혜를 정점으로 그를 호위하고 방어해온 비선을 중심으로, 정당과 정부에서 한 자리 더 차지하고자 범친박임을 내세우는 정치인들, 출세욕에 눈 먼 검사들, 이 정부에서도 더욱더 노동자들을 탄압하고 이윤을 착취하는 것에 골몰해온 일부 기업들, 오직 정권의 나팔수 역할을 해온 언론 등등 공적 임무와 역할은 망각한 채 오직 박 정권과의 커넥션을 통해 사리사욕만을 추구하는 이른바 ‘박근혜 사적권력복합체’가 드러난 것이다. 국정 전반에 걸쳐 정당한 법적 정치적 절차들은 무시하고 그 입맛대로 국정을 농단함으로써 철저하게 권력을 사유화하고, 이를 통해 막대한 사익을 축적해 온 것이다. 때문에 이러한 현실을 목도한 주권자들의 자괴감은 형언할 수조차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 자괴감은 박근혜 퇴진의 백만 촛불과 절대 다수 국민들의 지지로 승화되어 주권자의 자존감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그런데 주권자의 대리인들은 정치 공학적 계산에 몰두하느라 주권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사태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다시 한 번 주권자들에게 정신적 쇼크를 안겨주었다. 다행이 추미애 대표가 영수회담을 철회하고, 문재인 전 대표가 국민과 함께 전국적인 퇴진운동을 선언함으로써 주권자의 정신적 쇼크는 일단 회복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전개에서 읽혀지는 것은 정치 일선의 엘리트들은 ‘민(people)’의 직접적인 뜻과는 관계없이, 이중적인 정치 플레이를 보다 더 선호한다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정치적 계산이 적절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박근혜-최순실 사건’은 그러한 정치적 계산이 적용될 수 없는 것임이 명백하다. ‘박근혜-최순실 사건’은 ‘박근혜 사적권력복합체’의 도덕적·정치적·(헌)법적 죄책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사태에 대해 올바른 의식을 가진 정치인이라면 어느 정당 소속인지, 보수인지 진보인지를 불문하고 박근혜 대통령의 헌정문란으로 야기된 국민의 목소리에 절대적으로 귀 기울여야만 한다. 이중적인 계산을 하면서 ‘책임총리’이니, ‘권한대행 총리 체제’이니 하는 논의 등은 문제의 본질을 더욱 흐려지게 만들고 있다. 또한 ‘탄핵’을 끼워 넣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대다수 국민들은 탄핵에 관한 헌법 내용을 정확히 모르는 것이 사실이다.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는 국회재적의원 과반수의 발의와 국회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있어야 한다(헌법 제65조 제2항 단서). 그러나 이것으로 탄핵이 바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절차는 탄핵‘소추’일뿐이다. 최종적인 탄핵결정은 헌법재판소가 재판관 6인 이상이 찬성을 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러한 헌법 프로세스를 거쳐야만 비로소 대통령을 물러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탄핵이라는 카드가 힘과 실효성을 가지려면 결의요건인 3분의 2를 훨씬 넘어서는 압도적 다수로 충족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헌법이 법이기는 하지만, 정치와 사회의 역동성을 담지 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만일 힘겹게 그 요건을 충족했다면 헌법재판소가 흔쾌히 탄핵결정을 하는 데에 주저하고 그들의 숨겨진 정치적 이해에 따라 불탄핵의 법리를 내놓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탄핵소추 후 헌재의 절차에서 검사역할을 맡는 것은 국회의 법제사법위원장이다. 그런데 법제사법위원장이 누구인가? 박근혜 최순실 사건의 특검도 반대하는 박근혜 결사옹호대가 아닌가?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예상할 때, 탄핵이라는 카드도 그렇게 녹녹하지 않은 것임을 알 수가 있다. 현 시국에 대해서 이러저러한 해법들이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절대 다수의 국민들이 ‘박근혜 사적권력복합체’가 저지른 헌정유린 범죄를 단죄할 것과 수괴인 박근혜의 퇴진을 한 목소리로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땅히 그렇게 될 것을 명령하고 있다. 이러한 주권자 국민의 명령으로 박근혜 대통령은 이미 그 민주적 정당성을 잃었다. 따라서 자연인 박근혜만이 남았을 뿐이다. 그렇다면 주권자의 모든 대리기관들은 오직 주권자의 명령을 이행하는 것에 충실해야만 한다. 정치적 합의로 대통령 퇴진을 우선적으로 관철하는 것이 중요하고 근본적인 것이다. 그 다음으로 헌법상 실행방안을 자연스럽게 도출해내는 것이 순리이다. 사진 출처 - 노컷뉴스 검찰 및 특검의 수사는 ‘박근혜 사적권력복합체’의 헌정유린 범죄의 실체가 그 뿌리까지 낱낱이 드러날 때 까지, 즉 국민에게 한 점의 의혹조차 용납하지 않을 경우까지 되어야만 하고 그렇게 되도록 정치적 법적 뒷받침을 해주어야만 한다. 그러나 현재 국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특검법안 처리의 모습은 정치권이 주권자 국민의 뜻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또 한 번 드러내는 행태를 보여주고 있다. 이미 박근혜는 주권자 국민의 퇴진명령에 의해 대통령의 자격을 상실했다. 이 점을 정치권은 망각하고 있다. 철저한 수사대상으로서의 자연인 박근혜만이 남아 있다는 것을 각인하고, 이에 따라 주권자의 대리권한을 수행해야만 한다. 그러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정치세력은 단연코 정치생명을 잃고 말 것이다. 또한 박근혜는 더 이상 청와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청와대는 주권자인 국민의 소유이다. 국민의 위임에 따라 5년간 헌법수호의무를 다할 때 까지만, 그 존속을 보장받았을 뿐이다. 이제 헌법질서를 파괴한 범죄의 수괴인 박근혜는 그러한 존속보장을 누릴 수가 없으므로 당연히 퇴거해야만 한다. 그리고 모든 정부기관과 공무원들은 국민의 퇴진명령과 퇴거명령을 받은 박근혜의 명령을 거부할 정당한 권한을 가진다. 이제 모든 정부기구의 작동은 주권자 국민의 명령에만 기속해야 한다. 우리 주권자는 주권자로서의 저항책무를 지속적으로 다함으로써, ‘박근혜 사적권력복합체’를 뒷받침해온 모든 기득권체제의 부정의와 탐욕을 이제는 종식시켜야만 한다. 주권자인 우리와 우리 아이들의 미래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64 | 추천: 0
-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카타르, 터키 홍미정/ 단국대 중동학과 조교수 □ 오마바 정부의 무기판매: 걸프 아랍왕국들과 터키 무기거래는 핵심적인 전쟁동력이다. 2011-2015년 시리아, 리비아, 예멘에서 내전이 진행되는 동안, 미국 무기 수출은 전 세계 무기거래 총량의 33%를 차지했다. 이 내전에 깊이 개입한 걸프 아랍왕국들, 사우디, 아랍에미리트, 카타르와 터키는 주로 미국으로부터 무기를 구매했다.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SIPRI)에 따르면, 2011-2015년 세계 최대 무기 수출국가인 미국의 무기판매에서 걸프 아랍왕국들은 가장 중요한 시장이었다. 현재 진행 중인 시리아와 리비아 내전이 시작된 2011년을 분기점으로, 2006-2010년과 2011-2015년 무기거래를 비교해볼 때, 중동국가들의 무기수입은 61% 증가한 반면, 같은 기간 동안 유럽 국가들의 무기수입은 41%감소하였다. 이 기간 동안 중동국가들의 급격한 무기수입 증가를 견인한 국가는 사우디와 카타르다. 이 시기에 사우디의 무기수입은 275%, 카타르의 무기수입은 279%만큼 증가했으며, 아랍에미리트 무기수입은 35% 증가했다. 사우디는 시리아와 예멘 내전에 직접 개입하고 있으며, 카타르는 시리아와 리비아 내전에 직접 개입하고 있다. 아랍에미리트는 리비아 내전에는 깊숙이 직접 개입하고 있지만, 시리아와 예멘 내전에는 거의 연루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터키는 시리아와 리비아 내전에 깊이 개입하고 있다. 시리아 내전(2011년 3월–현재)에서 사우디, 카타르, 터키가 협력과 경쟁을 하면서 서로 다른 반군들을 지원한다. 시리아 정책연구센터(SCPR)에 따르면, 2011년 3월부터 2016년 2월까지 계속된 시리아 내전에서 47만 명이 사망하고, 전체 주민들 1천 8백 만 명 중 47%가 거주지에서 축출되었다. 유엔난민기구(UNHCR)에 따르면, 2016년 11월 7일 현재 해외 시리아난민 481만 명 이상이 터키, 요르단, 레바논 등지에 있다. 2011년 이후, 두 차례의 리비아 내전(1차: 2011년 3월-2011년 10월, 2차: 2014년 5월–현재)이 발발하였다. 1차 내전은 미국, 프랑스 등 다국적군이 개입함으로써, 1969년 9월 이후 리비아를 통치해온 카다피를 축출시켰다. 2차 내전에서는 아랍에미리트와 이집트가 동부 세속주의자 정부를 지원하고, 카타르와 터키가 서부 이슬람주의자 정부를 지원한다. 2014년 5월부터 2016년 6월까지 계속된 2차 내전에서, 전체 리비아 주민 약 640만 명 중에서 4,700명 이상이 사망하였다. 2015년 3월 이후 사우디는 예멘 후티반군과 전쟁 중이다. 유엔 보고서에 따르면, 사우디가 폭격을 시작한 2015년 3월부터 2016년 9월까지 예멘에서 약 4,000명의 민간인을 포함하여 11,000명 정도가 사망하였다. 2009-2016년 집권한 오바마 정부는 사우디에게 1,150억 달러의 무기판매를 승인하였다. 이것은 오바마 정부 통치기간동안 총 무기판매량 2,788억 달러의 41%를 초과하는 액수다. 이 기간 동안 미국산 무기구매 총액 중 1위는 사우디, 2위는 아랍에미리트, 3위는 터키였다. 부시는 이라크 통치자 후세인을 직접 공격하는 방식을 취했지만, 오바마는 동맹국들을 통하여 무기 공급선을 활용하면서 대리전쟁을 수행하고 있다. 결국 오바마 대통령은 협상과 중재를 통한 중동 전쟁 해결대신, 무기판매라는 대리전쟁을 선택함으로써, 내전들을 격화시키고, 장기화시켰다. □ 어느 정부가 더 공세적이었나?: 부시 정부와 오바마 정부 지난 20년 동안 미국은 대체로 세계 무기시장의 30%-50%를 점유했다. 그런데 2012년 시리아 내전이 격화되면서, 미국은 연간 세계 무기 거래량의 70%를 차지함으로써 연간 최고 판매치를 경신하였다. 2009-2016년 오바마 정부의 무기 판매 사진 출처 - defenseone.com 2001-2008년 집권한 부시정부는 1,286억 달러의 무기판매를 승인하였다. 2009-2016년 집권한 오마바 정부는 2,788억 달러의 무기판매를 승인하였다. 오바마 정부의 무기판매액은 부시 정부의 2배 이상이다. 구체적으로 오바마 정부는 2009년-321억 달러, 2010년-220억 달러, 2011년-270억 달러, 2012년-678억 달러, 2013년-242억 달러, 2014년-319억 달러, 2015년-402억 달러의 무기판매를 승인하였다. 최종적으로 2016년 11월 8일 오바마 정부는 2016년-336억 달러의 무기판매를 승인하였으며, 이것은 70억 달러를 넘을 것으로 예상되는 쿠웨이트, 카타르, 바레인에 대한 전투기 판매를 포함하지 않은 것이다. 2009년 오바마가 대통령에 취임했을 때, 미국 특수부대(USSOCOM)는 약 60억 달러의 예산과 56,000명의 요원으로 구성되었다. 2016년 오바마 대통령은 차기 정부에 미국 특수 부대 예산을 거의 두 배인 110억 달러로, 특수부대 요원을 70,000명으로 증가시켰다. 미국 특수부대는 현재 시리아 내전 등 중동 전쟁에서 활동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것이 2009년 12월 노벨 평화상을 받은 미국 대통령 오바마의 진면목이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71 | 추천: 0
이문영/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 통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마음이 간 곳이 없다. 산란한 마음에 자꾸 뉴스만 클릭하게 된다. 그 사이 또 어떤 엄청난 일이... 무섭기도 하다. 내 잘못도 아닌 일에 이렇게 ‘쪽팔리게’ 될 줄 몰랐다. 집중이 되지 않으니 차라리 청계광장으로, 광화문으로 나가볼까. 그런데 뒷덜미를 잡아끄는 글 빚들, 당장 처리해야 할 업무들... 하지만 마침내, 지금 ‘뭣이 중한디?!’ 한동안 인구에 회자되던 영화 속 대사를 이렇게 읊조리게 될 줄이야. 요즘과 꼭 같은 마음상태였던 때가 한 번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소식을 들었을 때다. 그땐 그게 그렇게 쉽더니... 이런 시국에 무슨 다른 주제의 칼럼을 쓸 수 있을까...싶었지만, 흘러넘치는 이 어처구니없는, 그러나 엄연히 사실인 이야기들, 아무리 들어도 새삼스레 진저리쳐지는 소식들, 당연한 분노와 흥분과 규탄에 또 다른 목소리를 얹고 싶지는 않다. 아니, 그럴 능력이 안 된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이겠다. 잘못돼도 너무 잘못돼,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어디서 끝내야할지도 모르겠으니. 그런 차에 필자가 속한 기관에서 진행 중인 <평화아카데미> 수강생들과 함께 ‘철원 평화예술기행’을 할 기회가 주어졌다. 60여년 넘게 계속된 정전 상태에 멈추어있는 곳. 이 아수라장을 잠시라도 떠나 차라리 그 멈춤 속에 서고 싶었다. ‘폐허 위에서 평화를 상상하다’라는 컨셉 아래 분단의 비극, 그러나 통일의 희망을 함께 상징하는 철원으로 떠났다. 안보관광이 아닌 ‘평화기행’의 일종으로. 철원은 현재 남한의 북쪽 한계선에 자리하지만, 사실 딱 한반도 허리에 해당하는 지리적 중심이다. 궁예가 통일신라와 후백제에 맞서 후고구려의 도읍으로 철원을 정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그곳 평화전망대에 설치된 DMZ 조감도에는 옛 궁예궁터가 함께 표시되어 있다. 한국전쟁 이전 철원은 춘천과 더불어 강원도 내 대읍부향의 하나였다. 경원선의 주요기착지이자 금강산 전철의 시발점이었고, 중부에서는 드문 비옥하고 너른 평야로 농축산물의 거래가 활발했다. 각종 관공서, 금융기관, 교육기관은 물론, 당시로서는 드물게 백화점까지 갖춘 풍요롭고 넉넉한 도시가 철원의 옛 모습이다. 노동당사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하지만 한때 번화했던 도시는 이제 폐허로 남았다. 우리가 돌아본 옛 철원 경찰서, 노동당사, 농산물 검사소, 제2금융조합, 얼음 창고, 수도국지, 철원감리교회 등은 간신히 그 흔적을 헤아릴 수 있는 ‘터’로만 남아 있다. 포탄이 관통한 흔적이 그대로 남은 기둥, 원래의 형체를 가늠하기 힘든 부서진 잔해, 구멍 숭숭 뚫린 벽들 사이로 유독 차가운 바람이 휑하니 분다. 그와 대조적으로 DMZ 남방한계선의 철책, 그 너머의 군사분계선, 남북한 초소, 그리고 곳곳에 잠복한 지뢰와 각종 화기들로 ‘비무장지대’란 이름을 무색하게 하는 ‘중무장지대’의 살벌함은 너무 생생한 현실이다. 만일 우리를 반겨주시고, 가이드를 자청해 우리를 안내해주시고, 차진 철원 오대쌀로 갓 지은 점심과 저녁을 마련해주신 양지리 두루미 마을 어르신들이 안 계셨다면, 그 폐허 속에서 평화를 상상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전쟁으로 숨죽인 땅을 분주히 일깨워 삶의 터전으로 만든 어르신들은 오랜만에 찾아온 젊은이들에 한껏 기뻐하셨다. 그곳을 먼저 찾은 또 다른 젊음들에 그러하셨듯이. 철원 양지리 마을엔 세계 각국에서 온 예술가들이 머물고 있다. 전쟁의 상흔과 평화의 희구가 절박하게 교차하고,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반세기가 훌쩍 넘도록 지속된 긴장이 DMZ 풍경 속에 최대치로 가시화되고, 숨죽이며 총을 겨눈 그 진공상태 속에 오로지 자연만이 무심히 번성하는 이 기묘한 곳에 ‘두루미처럼’ 찾아든 예술가들이다. 예를 들어 아트선재센터의 ‘리얼 DMZ 프로젝트’에 참여한 예술가들은 일정기간 지역주민과 함께 살며 그 특이한 ‘장소성’을 행위예술로, 이미지로, 영화로 풀어내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우리 기행의 가장 중요한 순서도 우리 젊은 학생들과 이 젊은 예술가들의 만남이었다. 이날 ‘철원 평화예술기행’에 참여한 학생들은 각자의 감상과 느낌을 시, 사진, 랩, 퍼포먼스 등 장르 불문, 자신만의 방식으로 예술화한 과제를 제출하기로 되어 있다. 이 학생들이 어떤 결과물을 제출할지 몹시 기대된다. 학점도 인정 안 되고, 별다른 스펙도 될 리 없는, 게다가 하루 일과를 마무리할 저녁 7시에야 시작되는 이 아카데미에 제 발로 찾아온 (혹은 ‘두루미처럼’ 날아든) 이 기특하고 대견한 학생들은 이날 폐허를 종횡무진하며 자못 진지해졌다가 이내 깔깔거렸고, <노동당사 매점>이라는 기묘한 이름의 가게에서 내가 사준 ‘고소미’를 깨물고, 어르신들이 차려준 밥상을 ‘맛있다!’를 연발하며 싹싹 비워냈다. 그날 나는 이미 폐허 위에서 평화를 보았다. 돌아오는 길, 불 꺼진 버스 안, 뒷자리에 앉은 여학생 두 명이 낮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린다. “광장에 사람들 무지 많이 모였대”, “내 친구들 다 거기 있다는데”, “사진 찍은 거 계속 올라와”... 폐허 위에서 내가 본 평화가 헛것은 아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고, 흐뭇해졌고, 기운이 났다. 다시 시작이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65 | 추천: 0
정재원/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 군사 독재가 종식되고 정권의 교체도 경험하게 되면서 최소한 정치적 민주주의, 제도적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는 안정화에 접어들었다고 말하던 시기에 유학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제 아주 심각한 정치적 문제는 점차로 사라져 가고 그 동안 상대적으로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던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에 집중해야 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고 생각하던 시절이다 보니 비록 학위를 위해 정신없는 나날들이었지만 조금은 다른 여유를 갖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특히 유학 자체도 힘든 과정이었지만, 점차로 국가의 권위주의적 성격이 강화되고, 시민사회는 탄압받아 질식 상태였으며, 스킨헤드 등 외국인 혐오증이 사회에 만연하는 등의 문제를 겪으면서 더더욱, 최소한 그 정도는 아닌 소위 민주화를 달성한 한국으로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던 시절이었다. 유학 말기에 한국에서는 다시 보수 정권으로의 정권 교체가 있었으나, 많은 이들의 바람처럼 이제 ‘민주 대 반민주’의 시대는 지나고 합리적인 ‘보수 대 진보’의 정책 경쟁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희망 속에서 설사 이렇게 다시 보수 정권으로 정권이 교체되어도 커다란 후퇴는 없을 것이라 기대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에 박살이 나고 말았다. 필자는 현실 사회에서 보수 세력이라는 것은 사전적 정의인 전통적 가치를 옹호하거나 기존 사회 체제 유지를 통한 안정적 발전추구가 아닌 탐욕과 특권의 독점적 확보와 확대를 추구하는 기득권 세력에 불과하다고 주장해 왔다. 즉 정치 사회의 보수 정당 세력은 이 사회의 지배 집단의 이익을 반영하는 세력들 중 일부분일 뿐이며, 부를 독점하고 착취하고 지배하고 있는 실제 세력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대응하는 것을 방해하는 역할을 해 오고 있다. 그리고 이들의 헤게모니 하에서 그들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적극적으로 동의하는 집단과 오랜 기간 세뇌된 집단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강조해 왔다. 바로 이런 생각을 지지하듯 보수 정치 세력이 정권을 잡자마자 이들을 앞세운 사회의 기득권세력에 의한 노골적이고 급격한 총체적 퇴보가 시작되었다. 한 네티즌이 공중파 뉴스에만 나온 자료를 가지고 한국이 헬조선인 이유에 대해 트위터에 올린 내용이 화제가 된 바 있었다. 그에 따르면, OECD 국가들 중(때로는 조사 대상 국가들 중) 아동 복지비 지출 등 전체 복지비 지출비율, 의료비 공공부담, 언론의 자 , 여성의 사회 참여, 아동 삶의 질, 노인 소득, 삶의 만족도, 고용 안정성, 노동 의욕, 직장인 유급 휴가, 수도권 주거 행복, 성평등도, 사회자본지수, 교사만족도, 수면시간, 아동 성범죄 처벌 정도, 유리천장지수, 행복지수, 출산율, 은퇴 후 생활 자신감, 가족과 같이 보내는 시간 등은 최하위를 기록하였다. 반면, 가계 부채 증가율, 국가 부채 증가율, 물가상승률, 산업 재해 사망, 교통사고 사망, 의료비 지출, 사기사건 발생률, 실업률 증가, 노동시간, 최저임금 이하 비율, 사교육비 지출, 노인 빈곤율, 정규직 해고 용이성, 남녀 임금 격차, 일자리 포기 청년 비율, 여성 · 노인 · 청소년 자살률, 고령층 부채자 비율, 등록금 부담, 아동 학업 스트레스, 대기 질 등은 최고를 기록했다. 문제는 이 모든 것이 현재 한국 사회의 문제들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며, 더 큰 문제는 이번 정권이 들어서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지표들은 모두 수위를 다투거나 꼴찌를 다툰다는 점에서 단순히 어느 나라에서나 나타나는 사회문제라고 치부할 수 없다는 데에 그 심각성이 있다. 게다가 최고/최하만 아닐 뿐 심각한 여러 사회문제들이 한층 더 확대되고 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이렇게 거의 모든 지표들이 보여주듯 모든 측면에서 사회가 파탄 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결은커녕 엄청난 실정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세월호 사건과 메르스 사태와 같이 의도적으로 일으킨 사건이 아닌 경우에도 그 대처와 수습과정에 있어서의 대혼란, 진상규명 방해, 원인 은폐 등 심각한 문제들이 발생한 것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외에도 아주 많이 추려서 굵직굵직한 몇몇 주요 사건들로만 한정해도 문제가 심각하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 잇따른 인사 참사, 윤창중 성추행 사건, 기초노령연금 공약 파기, KTX민영화, 의료 · 가스 · 철도 민영화 추진, 교학사 교과서 논란, 국정원 간첩 조작 사건, 카톡 검열, 전시작전권 전환 공약 파기, 정윤회 비선 실세 의혹, 경남도 무상급식 포기 및 공공의료 기관 폐쇄, 통진당 강제 해산, 각종 비위 장관 억지 임명, 교과서 국정화 강행, 건국절 논란 유도, 성완종 리스트, 미군 탄저균 배달 사고, 각종 검찰 비위 사건 및 정치검찰의 불공정한 편파적 기소, 테러방지법 입법 강행, 위안부 졸속 합의, 개성공단 폐쇄, 노동법 개악 시도, 전교조 법외 노조화, 박정희 우상화 작업에 예산 낭비, ODA의 새마을 운동화, 4대강 수질 악화 방치 및 확대 기도, 세월호 특조위 조사 방해 및 임기 종료, 가습기 살균제 조사 방해, 고 백남기 농민 사건, 사드 배치 강행, 일베 등 방조, 롯데 · 어버이연합 · 권력 실세 등에 대한 비호 및 엉터리 수사, 문화계 블랙리스트, 청와대 주도 미르, K-스포츠와 전경련 등의 연루, 그리고 최근 우병우, 최순실 등 비선과 초법적 특권 세력들의 권력 남용 및 비위 사건 방조 등등 나열하는 것 자체도 버거울 정도로 사태는 심각하다. 문제는 이러한 사건이 말 그대로 우연히 일어날 수도 있는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는 점이다. 위에서 언급한 사건들에는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비리나 부정, 불공정 행위들은 빠져 있다. 위에 나열한 사건들로 한정하더라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러한 실정과 사건들 속에서도 기득권의 이익과 이해를 위한 조치가 취해지고 있었다는 것이고, 설사 그 와중에 명확히 법적인 위반이 드러났다 하더라도 제대로 조사되거나 처벌된 적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기득권들의 국가 사유화 과정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는 상황에서 헬조선을 살아가는 대다수의 국민들은 병들고 다치고 죽어가고 있다. 자살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범죄로 빠지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상황은 심각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서로를 증오하고 혐오하는 풍토가 생겨나지 않는 것이 이상하지 않는가? 기득권들이 자신들의 특권을 지키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상황에서 안타깝게도 힘들게 사는 대다수의 국민들은 조금이라도 다른 집단들, 약한 집단들에 대해 노골적으로 혐오의 감정을 드러내며 불만의 화살을 돌려 댄다. 당연히 이러한 과정에도 저들은 개입한다. 가짜 시민사회단체들을 만들어서 서로에게 화살을 겨누게 하는 것은 물론 자신들의 지지기반이 되고 있는 일베와 같은 젊은 극우 범법자들을 적극적으로 방조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다시 근본적인 물음을 물어야 한다. 저들은 왜 저렇게 뻔 한 거짓 선동을 하고 있는 것일까? 왜 뻔한 은폐와 왜곡을 반복하는 것일까? 당연히 이 모든 짓들은 죄상이 드러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 그 첫 목표이지만, 더욱 근본적인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인지 우리는 최순실 사태를 겪으며 확실하게 배우고 있다. 이 와중에도 현재 조선일보를 필두로 기득권 세력들은 박근혜 카드를 일정정도 버리면서 소위 비박 혹은 개혁파들을 내세우며 세력을 재편하고 있다. 부화뇌동하는 일부 야권 세력들까지 끌어들일 경우 그 파장은 꽤 클 것이다. 그러나 현재 최순실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씌우는 기득권 연합, 즉 새누리당, 국정원과 검찰 등 각종 관료 집단, 재벌, 그리고 사회 곳곳에 똬리를 틀고 있는 기득권 집단 등등이 연출하는 쇼에 속아서는 안 된다. 자격이 안 되는 대통령을 앞세워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해 온 이들 집단에 대한 시민사회로부터의 통제와 감시, 견제 장치가 확보될 수 있도록 총력을 기울여야 할 때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70 | 추천: 0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1. 인간 삶에서 기본이 되는 두 축은 에너지와 소통이다. 에너지는 인간 삶의 필요조건이고, 소통은 인간 삶의 충분조건이다. 2. 개인에게서 에너지는 생명력으로써 드러나고, 사회에서 에너지는 생산력으로써 드러난다. 각자는 사회적 존재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개인적 생명력은 사회적 생산력의 요소적인 원천으로 작동하고, 사회적 생산력은 개인적 생명력의 지평적인 지반으로써 작동한다. 하지만 각자가 사회적 생산력과 자신의 개인적 생명력이 정규적인 방식으로 비례한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사회 체제의 구조와 성격에 따라 그 비례 관계는 확 달라진다. 심지어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이 오히려 자신의 생명력을 훼손시켜 약화시킨다고 여길 수도 있다. 사회적인 평등과 불평등의 지수는 사회적 생산력이 사회 구성원들의 생명력을 강화하는 데 얼마만큼 고르게 기여하는가에 달려 있다. 이는 당연히 분배와 관련된다. 사회적인 평등과 불평등은 개인적 생명력을 원천으로 해서 유지되는 사회적 생산력의 결과로써의 열매를 얼마만큼 고르게 분배하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다들 알다시피, 이를 정치경제학에서는 생산 관계라고 일컫는다. 사회적 생산력을 강화하는 데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개인들의 생명력이지만, 이러한 생명력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에너지 중심의 기계기술의 발명과 발달이 요구된다. 증기기관, 엔진, 모터 등으로 이어지는 에너지 중심의 기계기술의 발달은 그 이전의 사회적 생산력과 아예 비교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엄청난 속도로 사회적 생산력을 높였다. 그 과정에서 각자가 지닌 생명력은 사회적 생산력의 근본 원천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사회적인 기계기술을 활용하기 위한 보조적인 수단인 양 취급되었다. 그것은 자본주의라는 왜곡된 사회 체제의 구조와 성격에 의해 사회적 생산력이 배타적 이윤의 창출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는 쪽으로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이윤과 기술이 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결합되어 과잉의 속도로 상호상승의 긍정적 피드백의 과정을 추진하는 과정을 거쳤던 것이다. 모터가 쾌속으로 돌아가는 그 모양으로, 사회 전체가 이윤 창출을 위해 최대한 높은 속도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과잉의 사회적인 속도에 휘말려버린 개인들 각자도 자신의 생명력을 오로지 배타적인 이익을 위한 방향으로 투입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이를 활용하여 사회 전체는 더욱 더 이윤을 중심으로 과속하게 되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각자는 자신의 생명력을 각자의 존재가 지닌 의미와 가치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활용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기회를 박탈당하고 그 방향이 비틀어진다. 그럼으로써 심지어 각자가 자신의 생명력을 강하게 발휘하여 활용하는 만큼 오히려 자신의 존재가 지닌 의미와 가치를 상실하는 쪽으로 치닫게 된다. 개인의 특수성에 따라 이러한 사회 전체의 방향을 역행하는 경우도 물론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심지어 그렇게 역행의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개인들의 활동마저도 이윤과 이익, 즉 부를 중심으로 한 사회 전체적인 흐름에 다시 흡수되기 일쑤인 것이다. 3. 사회적 생산력과 개인적 생명력은 개인과 사회가 선순환의 상호작용을 통해 그 나름의 존재 의미와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일 뿐, 그 자체 목적은 될 수 없다. 당연하다시피, 개인들이 모여 사회를 형성한다. 사회의 일차적인 역할은 개인들 간의 상호부조를 통해 각자의 생명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역할만으로는 제대로 된 사회로써 기능을 다한다고 할 수 없다. 사회의 진정한 역할은 개인들 간의 수평적인 상호표현과 상호이해를 통해 각자가 타인들과 수행하는 소통의 폭을 확대하고 깊이를 심화시키는 데서 성립한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사회는 소통의 기술들을 개발해 왔다. 말과 글, 전설과 신화, 축제와 종교, 시와 음악과 회화와 조각, 연극과 오페라, 필사와 인쇄, 사진과 영화, 우편과 전화, 신문과 잡지, 라디오와 텔레비전, 컴퓨터와 인터넷, 인공위성과 스마트폰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술들을 개발하여 발전시키고 활용해 왔다. 그 중에 뺄 수 없는 사회적 소통의 기술이 정치다. 법치와 민주주의를 개발하고, 보편적인 국민 교육을 개발하고, 관료제적인 행정을 개발했다. 이들 소통의 제반 기술들을 조금만 생각해 보면, 소통이 에너지와 얼마나 다른가를 쉽게 알 수 있다. 에너지 기술에서 파악할 수 있듯이 에너지는 수단이다. 이에 반해, 여기 소통의 기술들을 통해 얼마나 다양한 인간 삶의 내용들이 흘러넘치는가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듯이, 소통이야말로 그 자체로 인간 삶의 의미와 가치를 실현해 나가는 활동이며 목적이다. 그런 점에서 에너지가 인간 삶의 필요조건인 데 반해, 소통은 인간 삶의 충분조건인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내가 얼마나 어떻게 수평적인 동등성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다양하게 그리고 깊이 있게 소통하는가에 따라 내 존재의 의미와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다. 사진 출처 - 허핑턴포스트 4. 그러고 보면, 각자가 자신만의 배타적인 내면적 고유 영역을 형성하여 누리는 것만으로는 결코 인간다운 삶을 누린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일러주는 것이 소통이다. 왜곡된 사회 체제로 인해 사회 전체가 이윤과 이익 즉 부를 중심으로, 게다가 과잉의 속도로 진행되다보니, 각자가 자기 나름의 배타적이고 내면적 고유 영역을 형성하는 것이 마치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데 긴급한 요청인 것처럼 여겨지게 되고, 그런 탓에 배타적인 자신만의 내면적 고유 영역의 확보와 향유야말로 인간다운 삶의 의미와 가치를 꾸려나가는 외길인 양 오인되었을 뿐이다. 이는 배타적인 부를 중심으로 사회가 굴러가는 것과 더불어 사회적으로 참다운 소통의 길이 원천적으로 차단되어 있음을 일러주는 또 하나의 사회적인 증좌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각자가 사회적으로 배타적인 부를 추구하는 것과 자신만의 배타적인 내면적 고유 영역을 추구하는 것이 비록 서로 대립된다고 할지라도 일종의 동전의 양면처럼 작동하면서 서로에 대해 알리바이 역할을 할 소지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의 배타적이고 내면적인 고유 영역을 확보하고자 할 때, 그 배타성 역시 배타적인 부와 연결되면서 왜곡되어 나타나는 것이 권력이다. 철학자 하버마스가 적절히 제시한 것처럼 부와 권력은 철저히 왜곡된 소통의 방식이다. 부와 권력은 배타적인 상대적 격차를 전제로 해서 성립한다. 부와 권력이 사회적 소통의 핵심적인 수단으로 작동할 때, 진정한 소통을 중심으로 한 인간다운 인간의 삶을 사회적으로 구현한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 5. 제대로 된 진정한 소통은 사람들 간에 수평적인 동등성을 바탕으로 다양한 폭과 심오한 깊이를 일구어 낼 수 있을 때 성립한다. 이러한 진정한 소통을 위해서는 부와 권력을 중심으로 한 왜곡된 소통을 몰아내야 한다. 이를 위해 우선 필요한 것은 사회적 생산력에 의거한 각종 에너지를 평등하게 분배하는 것이다. 에너지가 소통의 필요조건이기에 에너지의 평등한 분배가 없이는 그런 만큼 그렇게 불평등하게 배분된 에너지를 사회적 기반으로 삼아 배타적인 부와 권력이 소통의 핵심 수단으로 작동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서로 소통할 수 있는 폭과 깊이를 지닌 소통의 내용들을 최대한 다양하게 개발하여 서로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배타적인 부와 권력에 대한 욕망보다 상호 동등한 수평적인 소통을 통해 서로의 존재를 한껏 공유하여 발전시키고 그러한 발전을 향유하는 데 대한 욕망이 사회적으로 더욱 강화되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일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 바로 통치 행위다. 이러한 일을 도모하기 위해 모두가 민주주의 제도라는 사회정치적인 소통의 기술을 개발했고, 이를 통해 모두가 진정한 소통을 더 효율적으로 잘 하기 위한 새로운 민주적인 소통을 통한 통치 행위를 설정했고, 또 이를 위해 민주적인 선거 제도를 통해 임시로 통치 행위를 맡아 진정한 사회적 소통이 확산되고 더욱 강화될 수 있도록 책임과 의무를 다할 수 있는 자들을 선발하여 일을 맡긴 것이다. 그런데 만약 통치 행위를 부와 권력을 중심으로 한 철저히 왜곡된 소통의 방식을 더욱 강화하고 심화시키는 데 활용한다면, 그러한 통치 행위를 하는 자나 집단은 사회적인 이른바 공공의 적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그러한 행위를 하는 자나 집단은 사회적으로 철저하게 파문(excommunication, 소통 바탕으로 내몰아 버림)시켜야, 즉 소통 공동체에서 아예 제외시켜야 마땅하다. 말하자면 ‘민주주의적인 파문’을 단행해야 한다. 수단일 뿐인 에너지를 인간 삶의 근본으로 삼고, 게다가 불평등하게 편중된 배타적인 에너지의 결과물인 배타적인 부와 권력을 인간 삶의 근본으로 삼아, 진정한 인간다운 삶인 진정한 소통을 백안시하다 못해 아예 망각케 만드는 자들과 그러한 자들을 용인하는 사회는 근본적으로 반민주적이며 범죄적인 사회가 아닐 수 없다. 그러한 사회를 만들어 강화해 온 역사는 반민주적이고 범죄적인 역사가 아닐 수 없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거니와, ‘민주주의적인 파문’을 통해 이러한 범죄의 사회와 역사를 단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69 | 추천: 0
신하영옥/ 여성운동연구활동가 요즘 들어 페미니즘이 세간의 화두가 되고 있다. 페미니즘 학교는 연일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는 소문이 들리고, 서점에서도 페미니즘 관련 서적이 갑자기 많이 팔리고 있는 듯하다. 여기엔 소위 ‘메갈’, 즉 ‘메르스갤러리’ 사안들이나 ‘강남역 살인사건’ 등이 도화선이 된 것으로 보인다. ‘미러링’이 도덕적이냐 비도덕적이냐의 논쟁에서부터 촉발된 ‘메갈’을 둘러싼, 그리고 강남역 사건을 둘러싼 다양한 반응들, 그리고 무엇보다 여성들 공통의 두려움과 무기력으로부터 출발된 분노와 행동의 욕구가 페미니즘 1세대인 여성운동‘권충’, 그리고 2세대인 영페미니스트들과 다른 좀 더 공세적이고, 은유적이며, 해학적인, 그리고 직접적이며, 솔직한 대응방법들을 통해 더욱더 확산일로에 있는 듯이 보인다. 나는 소위 ‘권충’-운동권-세대이다. 때문에 처음 메갈에 대한 이런저런 소문들, 평가들을 들었을 때, 익숙하지 않은 방식에 좀 놀라고, 좀 흥미롭고 그러나 대체로 무관심했었다. 그러나 ‘왕자는 필요 없다’는 티셔츠를 입은 성우에 대한 부당한 처우에 대한 정의당 사태가 나고부터 이런 새로운 페미니스트들의 등장과 행동양식은 나의 관심의 중심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관심 있게 지켜보았던 진보정당에 대한 실망과 더불어. 그러나 새로운 페미니스트들 스스로 ‘권충’을 만나기를 거부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기에 만나고는 싶었지만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없었다. 그런데 어제 그들을 만났다. 물론 메갈 측 친구들은 아니었지만 20대 페미니스트들로 구성된 ‘페미당당’ 회원들이었다. 페미당당은 한국에 페미니스트 정당을 만들고자 하는 젊은 여성들로 구성된 정당준비모임이다. 이들이 여성운동이나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았지만, 주로 학습으로, 그리고 사이버 상에서 ‘트펨’-트위터 페미니스트-으로 활동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고, 강남역 사건을 계기로 뭔가 움직여야 한다는 자각을 통해 ‘거울행동’-영정만한 크기의 거울을 들고 서로 비추기-을 시작으로 현재 10월 ‘임신중단’, 즉 ‘낙태’ 합법화 시위를 지난 일요일과 오는 일요일에 진행하기까지 되었다. 여성단체가 아니고 정당인 이유는 ‘대의민주제’에서 정당이 지닌 정치적 힘, 권력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성정당을 만들고자 하는 이유도 바로 정치적 힘, 권력을 여성들이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그러한 이유는 기존의 정당들이 어느 누구도 여성의 삶과 직결된 여성문제를 주요한 이슈로 제기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남성들에 비해 그 또래 여성들이 ‘탈조선’ 하는 것이 일종의 유행처럼 나타나는 것도, 이 땅에서 여성이 살아가기가 남성에 비해 너무나 힘들다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여성이슈, 낙태나 성폭력, 성매매, 일상의 여성혐오나 비하, 증오적 여성대상 범죄-사이버상의 욕설 포함-는 여성의 일상의 삶을 무력화시킨다. 일상이 매번 두려움이나 경계, 혹은 비하라는 수모의 연속이라면 그것은 폭력의 일상화를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들의 문제이자 여성이슈들은 여성들의 일상을 폭력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일상적인 일상으로 되찾아오는 문제가 된다. 삶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여성문제가 기성정당들에서는 그 친구들의 말을 빌려오면 ‘부록’처럼, 그리고 선심 쓰듯 던지는 것이 고작인 것이다. 이러한 현실이 이들에게 정당을 만들고 싶다는 욕망을, 행동을 가져오게 했던 배경이다. 지금 여성정당에 대한 논의는 여러 군데서 나오고 있는 듯하다. 경남지역에서도 기존 정당에서 여성의원-지방 및 국회-의 경험을 가진 일군의 집단들이, 여성의원들의 적극적인 활동에도 변하지 않는 남성 중심적, 권위적, 비민주적인 정당문화와 구조를 그 내부에서 깨는 것에 한계를 느끼고 여성만의 독자적인 정당을 만들어야 할 필요성에 대해 조심스럽게 논의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동안 여성정치세력화가 정치적인 민주화에 얼마나 기여했는가? 를 중심으로 고민을 해오던 나는 문제는 여성정치세력화의 전략이나 여성의원들의 남성적인 정치문화가 아니라, 정당문화와 구조 자체가 남성 중심적이라는 결론에 맞닥뜨리고, 여성정치가 기존의 정치판에 ‘끼어들기’를 통해 정치문화에 대한 ‘새판 짜기’는 요원할 뿐이라는 답답함을 안고 있었다. 새판을 짜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럼 무엇이어야 하는가? 여성의원들의 수가 임계점을 초과한다면 권위적이고 비민주적인 정당과 정치문화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아니면 자질을 갖춘 여성의원들이 늘어하는 것이 필요한가? 그렇게 된다면 변화는 가능할까? 아니다. 그런 자질을 갖춘 여성의원들이 정치의 장에 진입하는 것에서 나아가 그 정치적 생명을 연장 및 유지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가능한가? 라는 질문에 맞닥뜨릴 수밖에 없다. 사진 출처 - 국민일보 스웨덴을 떠올리면 양성평등이라는 말이 떠오르고 대체로 여성의 지위가 남성과 대등하다고 생각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스웨덴에, 어쩌면 스웨덴이기 때문에 여성정당 'FI(Feminist Initiative)' 가 만들어지고 유럽의회에 진출까지 했다. 물론 10년이라는 긴 시간을 인고로 보내야 했지만 말이다. 2005년에 준비와 창당에서 의회진출까지 10년이라는 내홍과 외부위협을 견뎌냈다. 이들의 창당기에 관한 영화에서 나타난 FI회원들에 대한 남성들의 직/간접적인 온갖 위협들을 보면서 ‘스웨덴도 저러는 구나’ 했다. 때문에 ‘페미당당’ 회원들이 ‘염산테러’라는 극단의 위협을 예견하는 것이 과장은 아니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러한 위협과 두려움 속에서도 그러나, 이들은 여전히 활달하고, 에너지가 넘치고, 가부장문화를 해학과 풍자로 비틀어 웃을 줄 안다. 이 여성들을 만나고 한편 미안함과, 한편 가능성에 대한 희망, 구체적으로는 이미 페미니스트 정당이 창당되고 선거에 뛰어드는 모습을 그려본다. 이를 위해 구세대이자 ‘권충’ 들인 우리의 모임과 20대 페미니스트인 그들의 모임의 연대방안을 모색하기로 했다. 우리는 우리의, 그들은 그들의 경험과 방법을 서로에게 나눔으로써 결국엔 더 큰 ‘우리’가 되는 그러한 과정을 가지기로. 벌써 가슴이 뛴다. 어느 총선에선가, 혹은 지방선거에서라도 ‘페미당당’이란 정당의 이름이 투표용지에 기입되고, 누군가 찍는다는 그런 상상만으로도 그렇다. 이슈는 당연 낙태를 포함한 모든 여성들의 신체적 권리가 구조적으로 법적으로 실현되도록 하는 것들이 될 것이다. ‘남자답다’라는 말이 적극성과 과감성을 대표하지 않고 ‘여성답다’라는 말이 수동성과 소극성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말들이 사라져버린 어느 날, 여성주의, 페미니즘도 사라져 버릴 그 날, 그 날이 더디더라도 만들어지고 있다. 과감성과 적극성이 ‘여성답게’로 표현되는 과정을 통해.
2017-08-07 | hrights | 조회: 89 | 추천: 0
에너지 강국으로 부상하는 이스라엘 홍미정/ 단국대 중동학과 조교수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이 가자를 포위하고, 공격하는 진정한 이유를 가자 연안에 매장된 석유와 천연가스를 장악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2019년부터 요르단으로 수출하게 될 천연가스는 팔레스타인 가자 연안을 포함하는 지중해안의 레비아탄 유전에서 생산되는 것이다. 요르단에서 가장 강력한 야당으로, 무슬림형제단 분파인 이슬람 행동전선(IAF)은 이스라엘이 통제하는 지중해 수역에서 생산되는 천연가스 수입협정을 거부하면서 “이 천연가스는 팔레스타인 해역에서 훔친 것이고, 이 협정은 시온주의자 적들에게 의존하는 것이며, 시온주의자들의 팔레스타인 점령을 지지하는 것이다.”라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레비아탄 유전지대 사진 출처 - offshore-technology.com 2016년 9월 30일 이스라엘 천연가스 수입협정체결을 반대하는 요르단인 시위대 약 2천 5백 명 정도가 암만 중심가에서 행진하였다. 이것은 최근 몇 년 사이에 조직된 시위들 중에서는 가장 규모가 컸다. 시위대는 “요르단 국민들은 가스협정 파기를 원한다. 요르단 시민들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자금을 시온주의자들에게 제공하지 말 것, 시온주의자 적들로부터 가스를 수입하지 말 것”이라고 쓴 깃발을 들었다. 10월 3일 이슬람행동전선과 노동조합 등 시위조직자들은 요르단 시민들에게 천연가스 수입 협정체결에 맞서 저녁 9시와 10시 사이에 각 가정의 소등을 요청하였다. 이번 대중시위는 암만 도심지뿐만 아니라, 북부의 이르비드와 남부의 케락 등 주요 도시들에서 조직되었다. 요르단 시민들 중 50% 이상이 팔레스타인 출신이며, 이들은 주로 대도시 지역에 거주한다. 이번 요르단 대중시위는 2016년 9월 26일 요르단 국영전기회사와(NEPCO)와 미국회사 노블에너지(Noble Energy)가 체결한 천연가스 거래 협정을 반대하기 위한 것이다. NEPCO는 요르단 전체 수요 전력의 85%를 생산하며, 노블에너지는 지중해안 최대유전 지대인 레비아탄 유전 지분 39.66%를 소유한, 이 유전개발과 운영을 책임진 회사다. 노블에너지는 “NEPCO와의 계약은 15년 동안 매일 3억 입방 피트(850만㎥)를 제공하는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 양은 NEPCO가 필요로 하는 액화 천연가스의 40%를 충족시킬 것이다. 이 협정은 2019년부터 발효될 것이고, 100억 달러 정도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16년 10월 3일 대규모 시위의 대응으로, 요르단 정보장관 무함마드 모나미는 요르단 TV에서 “이 협정으로 요르단은 에너지 예산을 매년 6억 달러 정도 절약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스라엘에 의존하지 않을 것이다. 요르단의 이스라엘 천연가스 구입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영토점령을 지지하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다.”라고 항변하였다. 그러나 요르단 작가 히삼 부스타니는 “적의 가스는 점령을 의미하며, 이스라엘로부터 오는 ‘도둑질한’ 천연가스는 국제가격보다 더 비싸다”고 주장하였다. 이슬람행동전선, 세속주의자와 노동조합 등이 주도하는 이 협정거부 움직임이 쉽게 잦아지지는 않을 것 같다. 2010년 발견된 레비아탄 유전은 최근 10년 동안 발견된 세계 최대의 연안 가스전으로 알려졌다. 미국회사 노블에너지가 레비아탄 유전 지분 39.66%, 3개의 이스라엘 에너지 회사들, 델렉 시추가 22.67%, 아브네르 오일 탐사가 22.67%, 레티오 오일 탐사가 15%를 각각 소유하고 있으며, 이들이 노블에너지가 주도하는 레비아탄 컨소시엄을 구성한다. 올해 가스 협정 체결에 앞서, 2014년 9월 3일 NEPCO는 레비아탄 유전에서 천연가스를 매일 3억 입방 피트씩 15년간 수입하기로 노블에너지와 양해각서(MOU)를 체결하였다. 이 MOU에서 NEPCO는 15년 동안 총 150억 달러를 레비아탄 컨소시엄에게 지불하기로 되어있다. 총액 중 56%인 84억 달러는 로열티와 법인세 등의 명목으로 이스라엘 정부에게, 49억 달러는 미국회사 노블에너지와 델렉 시추 등 3개의 이스라엘 에너지 회사들에게, 17억 달러는 채굴과 운영비용 등으로 할당 되었다. 그러나 2014년 12월 요르단 하원은 이 MOU에 반대하는 결의안을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시켰다. 2016년 11월 7일 새로 출범하는 요르단 의회에서도 지난 9월 체결된 가스협정에 대한 상당한 논란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2016년 9월 26일, 이스라엘 에너지장관 유발 스테이니츠는 “이 가스협정은 극히 중요한 국가의 업적이며, 이스라엘과 요르단 사이의 유대와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강화하는 중요한 초석”이라고 밝혔다. 게다가 이스라엘 회사 델렉 시추의 최고 경영자 요시 아부는 “이 협정 체결은 역사적인 사건이며, 레비아탄 유전을 에너지 지도에서 중요한 행위자로 세운다. 레비아탄 컨소시엄은 이집트, 터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포함하는 추가적인 거래를 추진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은 미국회사 노블에너지가 주도한 컨소시엄을 통하여 역내에서 처음으로 요르단과 천연가스 거래 협정을 체결하였고, 현재 터키, 이집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EU 등과 가스 수출 협상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제 이스라엘은 에너지 자급자족을 넘어선 수출국으로 탈바꿈하게 됨으로써 역내 에너지 강국으로 전환될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이스라엘은 천연가스와 석유가 매장된 점령지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배권을 더욱 확장하고, 팔레스타인인 출입금지정책과 이스라엘 정착촌건설 등을 통해서 영해와 영토에 대한 팔레스타인인들의 주권을 박탈하는 정책을 한층 강화시킬 것으로 예상된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83 | 추천: 0
김재완/ 방송대 법학과 교수 우리나라의 고등교육은 약 87%에 이르는 사립대학이 담당하고 있다. 국가의 고등교육정책이 공적부담을 통한 공교육 중심보다는, 민간재원에 바탕을 둔 사학중심으로 행해진 것에 따른 결과이다. 사학의 양적 팽창과 사학의 높은 의존도는 국가로 하여금 학교법인의 관리·감독을 무디게 만드는 결과를 빚어냈다. 이러한 방임적 사학중심의 교육정책은 사립대학을 운영하는 학교법인으로 하여금 사적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고, 운영자는 학교를 공교육의 현장이 아닌 자신의 전유물이자 왕국으로 여김으로써 온갖 비리를 저질렀다. 그 중심에 상지대가 있고, 상지대 사태는 국가의 그릇된 고등교육정책과 그 운영이 공교육을 어떻게 무너뜨리고 있는지를 적확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1993년 당시 이사장인 김문기는 공금 횡령과 부정입학 관련 금품수수 등의 비리로 구속되어 상지대에서 물러났고, 상지대는 임시이사 체제로 운영되었다. 그러다가 2003년에 새로이 정식이사가 선출되면서 비리재단과의 연결고리를 끊어냈다. 그러나 김문기 측은 임시이사들이 정식이사를 선임하는 내용의 이사회결의가 무효임을 확인해달라는 청구의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 대법원은 전원합의체판결로 “임시이사들이 선임되기 전에 적법하게 선임되었다가 퇴임한 최후의 정식이사들(종전이사)에게 이사회결의의 하자를 다툴 소의 이익이 있으며, 임시이사는 임시적으로 그 운영을 담당하는 위기관리자로서, 일반적인 학교법인의 운영에 관한 행위에 한하여 정식이사와 동일한 권한을 가지는 것으로 제한적으로 해석해야 하므로 정식이사를 선임할 권한은 없다.”고 판결(대법원 2007.05.17. 선고 2006다19054 전원합의체 판결 참조)함으로써 비리재단이 복귀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게 된다. 이후 교육부 사학분쟁조정위원회는 상지대의 분규사태를 정상화하는 방안으로 정식이사 8명과 임시이사 1명을 선임했는데, 이사 9명 중 4명은 김문기가 추천한 인물로 구성되었다. 교육부가 상지대의 정상화방안이라는 미명하에 비리재단을 복귀시킴으로써 진정한 정상화를 갈망하는 학내 구성원들의 반발을 불러왔고, 오히려 상지대는 더욱 비정상화의 길을 걷게 된다. 이에 교수협의회와 총학생회 등 상지대 구성원들은 교육부를 상대로 이사선임처분을 취소하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에서 1심과 2심은 “학교법인을 운영하는 이사의 선임으로 교수와 학생 등 대학구성원들의 학교의 운영이나 학문의 자유 등에 관한 권리나 이익이 침해된다고 볼 수는 없으며, 설령 침해될 가능성이 있다 하더라도 이는 지극히 간접적일 수밖에 없고, 또한 학교의 구성원일 뿐 학교법인의 운영에 직접 관여할 수 있는 지위에 있지 않은 원고들로서는 이사선임과 관련하여 종전이사의 지위와 같은 지위에 있다고 할 수 없으므로 학교구성원인 원고들이 종전이사에 준하여 이사선임처분에 대하여 다툴 법률상 이익을 가진다고 볼 수는 없다.”고 판결(서울고등법원 2012.07.11. 선고 2011누40402 판결 참조)함으로써 비리재단의 복귀는 법적으로도 완결되는 듯 했다. 그러나 2015년의 대법원판결에서 서울고법판결을 파기환송함으로써 대반전이 이루어졌다. 이 판결의 핵심은 “임시이사제도의 취지, 교직원·학생 등의 학교운영에 참여할 기회를 부여하기 위한 개방이사 제도에 관한 법령의 규정 내용과 입법 취지 등을 종합하여 보면, 사립학교법과 그 시행령 및 법인 정관 규정은 헌법 제31조 제4항에 정한 교육의 자주성과 대학의 자율성에 근거한 대학교 교수협의회와 총학생회의 학교운영참여권을 구체화하여 이를 보호하고 있다고 해석되므로, 교수협의회와 총학생회는 이사선임처분을 다툴 법률상 이익을 가진다.”는 것이다(대법원 2015.07.23. 선고 2012두19496, 19502 판결 참조). 이로써 대학교 운영의 주체, 다시 말해 학교민주주의의 주체는 근본적으로 대학구성원인 교수와 학생들이라는 사실을 재차 확인해 주었다. 사학의 비리재단에 의해 촉발된 분규로 최대의 피해를 입는 당사자는 대학구성원인 교수와 학생들이다. 대학의 진정한 정상화와 민주화를 부르짖는 교수들과 직원들은 부당한 파면과 해고 등으로 내몰리며 교권을 유린당하고 비리재단의 입맛에 맞는 이사와 교수, 직원들로 그 자리가 메워짐으로써 학생들의 정상적인 수업권은 침해당한다. 더욱이 교육부의 인위적인 대학구조조정의 칼날은 상지대 구성원들의 교육인권을 갈가리 찢어내고 있다. 교육부의 대학구조조정은 학령인구감소로 인해 대학입학정원이 줄어들 것이므로, 그 불균형한 수급을 맞추기 위해 인위적으로 대학숫자를 줄이고자 하는 것에 있다. 그 수단으로 교육부가 설정한 기준에 의한 대학평가를 통해 부실대학을 지정하고 지정된 대학에 대한 정부재정지원 및 사업의 제한, 국가장학금 수혜와 학자금 대출의 제한으로 고등교육시장에서 전면 퇴출시키는 방법을 사용한다. 이러한 대학구조개혁평가라는 미명하에서 상지대는 D등급을 받아 부실한 대학으로 지정되고 말았다. 파행적이고 부실하게 된 대학운영의 책임이 비리재단인 학교법인의 그릇된 운영으로 인해 빚어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실질적인 내용과 과정은 무시한 채 정부재정지원을 중단함으로써 대학주체인 교수와 학생들의 교육인권을 벼랑으로 내몰고 있다. 고등교육에 있어 사학의 양적 팽창과 이에 대한 높은 의존도는 분명 정부의 고등교육정책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에 필연적으로 사악한 비리사학이 양산되었고, 고등교육을 위한 시민의 지출비용은 가파르게 상승하기만 해왔으며 고등교육은 그 본질적인 의미를 잃어버린 채 전문기술 내지 직업학교로 전락하고 있는 등의 총체적인 고등교육 황폐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전적으로 그에 대한 책임은 교육의 공공성을 방기한 국가에게 있음에도, 그 피해와 책임은 고스란히 대학구성원과 시민에게 지워지고 있다. 인제대 고영남 교수의 지적처럼, 공적인 학교제도를 보장하고 일정한 범위에서 사립학교의 운영을 감독·통제할 권한과 책임을 지는 교육부가 대학구조개혁평가를 통해 자신의 부작위와 무능을 교육주체들에게 떠넘기고 있는 것이다. 이제라도 국가는 고등교육정책의 나침반을 교육의 공공성 강화라는 지점으로 되돌려 놓아야만 한다. 현재와 같은 인위적인 대학구조조정의 수단을 폐기하고, 대학의 자율성과 대학주체의 교육인권을 드높이기 위한 고등교육의 본질을 되찾는 방안을 모색하고 수립해야 할 것이다. 그 출발점으로 사학의 비리재단부터 철저하게 퇴출시켜야만 한다. 상지대가 보여주고 있는 비리재단과의 처절한 싸움과 그 결과는 고등교육의 정상화와 공공성 강화의 향방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바로미터이다. 상지대의 정상화 투쟁은 비단 상지대 자체의 문제만이 아니라 고등교육, 더 나아가 전반적인 교육정책에서 교육부와 학교법인의 독단적인 지배 권력으로부터 잃어버린 교육주체들의 교육인권을 되찾아 주는 상징적인 깃발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깃발이 모든 교육현장에서 나부껴야만 교육복지를 통한 시민복지국가로 성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94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