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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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산책’은 각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칼럼 공간입니다.

‘수요산책’에는 김재완(방송대 법학과 교수), 신하영옥(여성활동가), 윤영전(평통서문예원장), 이광조(CBS PD), 이문영(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교수), 정보배(출판 기획편집자), 정재원(국민대 국제학부 교수), 조광제(철학 아카데미 상임위원), 최정학(방송대 법학과 교수), 홍미정(단국대 중동학과 교수)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정재원/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 사회가 각박해지면서 하루가 멀다 하고 끔찍한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아동학대 문제로 한참을 사회가 들끓었고, 바로 그 전까지는 각종 잔혹한 살인 사건이나 군과 학원 폭력의 희생자 문제, 그리고 염전 등 곳곳에서의 장애인 학대 사건 등이 지면을 장식해 왔었다. 이렇게 각종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는 가운데, 최근에 안산의 한 호수 주변에서 사체의 하반신이 발견되는 일이 일어났는데, 며칠 뒤 나머지 상반신이 발견되었고, 곧바로 그 끔찍한 토막살인 범죄의 용의자가 검거되면서 우리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너무나도 평범한 한 젊은이가 그러한 끔찍한 살인 사건을 저질렀다는 사실 자체가 충격적이며, 살해 동기나 공범의 여부, 그리고 살해 후 SNS 활동 등의 행적들은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많지만, 어찌 되었든 그가 살인을 저지른 것은 맞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유사한 범죄들 중에서도 이 범죄가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아직 수사가 진행 중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은 물론 이름 등이 공개되면서부터이다. 소위 인권선진국들에서도 강력범죄자들의 인적사항들에 대해서는 공개를 당연시 여긴다는 사실을 근거로 많은 국민들이 이러한 강력범죄자들의 얼굴을 공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몇 가지 기준을 근거로 몇 년 전부터 일부 강력범들의 얼굴이 공개되어 오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다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유사한 범죄 등으로부터 위협을 크게 느끼며 불안감이 커진 한국 사회의 여론은 신원 공개론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직 본격적인 수사는 물론, 최종적으로 법적인 판결이 나지 않은 상황에서, 무죄추정의 원칙을 깨고 얼굴을 비롯한 용의자의 신원을 공개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입지가 약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용의자의 신원이 공개되자마자 그의 가족과 친지, 지인들, 심지어 전 여자 친구의 신상까지 그대로 노출되는 일이 일어났고, 인터넷에는 이들에 대한 욕설과 비방이 넘쳐나기에 이르렀다. 결국 이에 대해 경찰과 검찰은 단호하게 대응할 것을 밝히지 않을 수 없었지만, 이는 수사당국이 자초한 일이기도 하다. 사실 최근 몇 년 동안 얼굴 등 신상 공개 여부에 있어서 중요한 한 원칙은 바로 가족 등 범인 주변인들에 대한 보호가 필요한 경우에는 공개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중요한 원칙은 제대로 홍보가 된 적이 없었다. 문제는 이러한 원칙이 이번에는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치 무엇인가를 덮거나 관심을 흩어 놔야 하는 목적이 있는 양 너무나 과도하게 모든 것이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최소한 현재의 한국의 인권감수성과 민주주의 수준에서는 용의자 혹은 심지어 형이 확정된 범죄자의 얼굴 등 신상을 공개해서는 안 된다. 물론 상습적 성범죄자들의 경우 신상 및 거주지 공개에 대해서는 이러한 주장을 하기에는 더 많은 연구와 논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범죄자의 인권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바로 용의자 혹은 범죄자의 가족과 친척, 그리고 지인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이러한 공개는 반대해야 한다. 얼굴을 공개해서 설사 그 용의자 혹은 범죄자의 가족이 누군지를 알게 되더라도 별다른 피해를 받지 않는 외국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감옥에 들어가 있을 범죄자는 얼굴이 드러나도 큰 피해를 보지 않는 반면, 연좌제 비슷한 것이 전 사회적으로 남아 있는 한국 사회에서 그의 가족과 친척들은 엄청난 피해를 볼 수 있다. 소위 수감자 가족들의 고통에 대해서 우리는 잘 알지 못 한다. 더군다나 그러한 범죄를 저지르는 DNA가 그 아들, 딸에게도 유전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꽤 확고하게 사람들의 인식 속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수감자 가족들은 한층 더 고통을 받는다. 평생을 주변의 시선을 피해 살아가야 하는 이들은 연애와 결혼, 취업과 거주 등에 있어서 심각한 제약을 받으며 극심한 고통 속에서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 뿐인가. 가족의 범죄가 마치 자신의 범죄인 양 스스로를 옥죄며 살아가야 하는 고통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어느 사회든 내 피붙이가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범인이라는 사실은 남아있는 가족들에게 끔찍한 기억과 경험이겠지만, 한국처럼 가족에게 연대책임을 묻는 전사회적인 연좌제가 기승을 부리고 있고, 같은 죄인으로 취급받는 사회에서는 범인은 물론 용의자 혹은 피의자에 대한 신상 공개는 대중의 관음증 해소 외에는 오히려 많은 이들에게 더 큰 고통을 준다는 점에서 반대해야 한다. 사진 출처 - 뉴스1 이러한 고민 없는 공개/비공개 논의는 우리 사회의 인권의식과 민주주의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얼마 전 몇몇 여성 연예인들이 소위 성매매를 했다고 해서 한바탕 여론이 뜨거웠었다. 그런데 엄연히 성을 산 당사자인 남성의 신원은 제대로 드러나지도 않은 채, 온통 사회의 관심은 여성 연예인들에게만 쏠렸다. 좌익효수를 비롯한 국정원의 선거 개입, 세월호와 국정원과의 관계, 전경련과 국정원과 어버이연합 등의 관계 등등 훨씬 더 집요하게 궁금증을 해소해야 할 사건들이 넘쳐나지만, 때로는 언론과 정권의 의도에 놀아나서, 때로는 우리 스스로 더 많은 고민을 해야 하는 부분에 대해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경향이 크다. 이 외에도 이 사건과 관련하여 우리 사회는 또 다른 문제를 드러냈다. 처음에 시신의 발 크기가 과도하게 작다는 보도에 대해 네티즌들은 안산 일대의 외국인 노동자일 가능성을 강조하면서 중국 동포(조선족)들의 범죄나 동남아 이주자들의 과거 범죄 사례들을 들며 한국사회가 이들로 인해 위험해진 것으로 단정하고 심지어 피의자가 아닌 피해자가 외국인일 것이라는 추정에도 불구하고 외국인 혐오증과 인종주의적 발언들이 넘쳐났다. 출입국관리소의 단속을 피해 도망가다 추락해 사망하는 사건에 대해서조차 인종주의적인 댓글들이 넘치는 상황은 한층 더 악화되고 있다. OECD 국가들 중 최고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자살률과 마찬가지로 최고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각종 산업재해들까지 합할 경우 우리 사회는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 각종 범죄들의 증가는 한층 더 우리 사회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문제는 극단적인 사이코패스는 제외하더라도 대부분의 범죄들, 심지어 소위 ‘묻지마 살인’조차 개인의 정신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물론 강력범죄들의 발생을 사회구조적인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그러나 기득권 세력들의 부정의와 불공정한 행태, 부패와 탐욕으로 인한 범죄들은 제대로 처벌되지 않는데 반해, 저임금과 무복지, 빈곤과 불평등, 위계적 질서와 극심한 양극화, 각종 갑질들과 다양한 폭력에 노출, 방치되어 있는 대다수의 국민들에게는 매우 잔혹한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이 박탈감을 느끼며 범죄의 길로 빠지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상황은 심각하다. 위정자들이 민주주의와 인권을 후퇴시킨다면 민중들이 깨어서 그것들을 막아야 한다. 추상적인 거리정치나 낡은 목적을 가진 저항논리나 운동정치론만으로는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비록 주체적 의지로 역사와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지는 못 하지만, 설사 근본적인 변혁과는 거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당면한 정세, 아니 아주 작은 사건 수준이라도 시민사회는 제대로 신속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 발생하는 상황들을 종합적으로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 담론과 방법들을 적극적으로 선도적으로 제시할 필요가 있다. 끔찍한 범죄가 일어나는 사회적 요인들을 근본적으로 문제제기해야 하는데, 여타의 다른 사회운동들의 필요성에 대한 논리와 결합시킬 수 있다면 기꺼이 해야 한다. 이것은 범죄학의 영역이고, 이것은 여성학의 영역이며, 이것은 사회복지의 영역이니 나와는 상관없다는 식의 논리를 빨리 벗어나야 한다. 모든 것이 종합적으로 사고될 때만이 안전도 보장되는 이상적 사회가 도래할 것이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39 | 추천: 0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1. 내면에서부터 사회주의로 가자 여러모로 마음이 뒤숭숭하다 못해 예사로 불안하다. 환갑을 넘기도록 나이를 먹게 되면 도를 닦은 듯 품새를 취하면서 내면에서부터 여유가 있어야 하지 않나 싶지만, 세상사 위험천만한 급격한 변화의 힘으로 무의식을 꿰뚫고서 등 뒤에서부터 치고 들어온다는 것을 실감하고 나면 이야기가 전혀 달라진다. 젊은 때에는 내면의 성찰을 하면서 개인주의자가 될지언정, 늙을수록 사회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함께 살아가는 뭇 사람들의 삶에 안타깝다 못해 괜스레 눈시울을 적시게 되면, 결코 오만해서가 아니라 그 반대로 겸손해졌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늙을수록 죽음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서는 것이니, 그래서 자연적인 개별적 생명에 더욱 집착하기 마련이니, 집착이건 해탈이건 바탕에서부터 개인주의자일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 싶지만 그게 아닌 것이다. 늙을수록 요구되는 그 해탈의 방향은 사회주의적인 방향이어야 한다.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도 마찬가지다. 일제 강점기 시절 시인 백석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시를 통해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데 지는 것이 아니다 /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라고 읊었는데, 그때 그 ‘세상’을 개인주의적으로 해석하면 그저 기생과의 사랑을 허용치 않는 편견의 세상으로 읽히지만, 사회주의적으로 해석하면 제국주의적인 강압의 자본주의로 점철된 나머지 근본적인 인간성을 파괴하는 세상으로 읽히는 것이다. 요즘 텔레비전에까지 소개되면서 유행하고 있는, 기본적인 효용만을 남기고 모두 버리자는 이른바 미니멀리즘적인 생활방식도 마찬가지다. 그 효용의 척도가 그저 개인적인 안심입명에 있다면, 그 생활방식은 탈속적인 개인주의에 불과하니 그것도 일정하게 조심해야 할 일이다. 그 효용의 척도를 모두가 단 한 번 주어진 인생을 함께 평등하게 소통하고 즐기는 것으로 설정한 것이라면, 거기에서 사회주의적인 함의를 찾아 읽어낼 수 있다면 미니멀리즘적인 생활방식을 권장해야 할 일이다. 2. 사회주의로 갈 수밖에 없다 다들 알다시피 얼마 전에 세계적인 바둑기사 이세돌이 <알파고>라는 인공지능과의 바둑에서 거의 완패하고 말았다. 세계인들 모두가 경악했다. 빠르고 정밀한 계산을 요구하는 영역을 기계에게 빼앗긴 지 오래되었지만, 원리상 결코 넘겨줄 수 없을 것이라 여겼던 자율적인 상상과 직관 및 반성의 영역마저 기계에게 넘겨주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동안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는 신뿐이었다. 그러나 신은 단 한 번도 객관적으로 실증된 적이 없는 말 그대로 마음이 만들어낸 유령에 불과했다. 그래서 더 섬뜩한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알파고>라는 기계가 인간보다 우월하다는 것이 객관적으로 실증된 것이다.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인간의 지위가 순식간에 내려앉은 세계사적인 사건이 벌어진 탓에, 세계인 모두가 공포에 질린 듯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자본주의는 미래가 있는가』(이매뉴엘 월러스틴 외 지음, 성백용 옮김, 창비, 원전 2013 / 국역본 2014)라는 책에 실린 랜들 콜린스의 글 「중간계급 노동의 종말: 더 이상 탈출구는 없다」는 자본주의 400여 년의 역사는 기술에 의해 노동이 대체되어 온 역사였고 그것이 자본주의에 가하는 악순환의 위협을 방어하기 위한 역사였지만 결국 더 이상 방어책이 없고, 따라서 약 2040년 쯤 되면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붕괴될 것임을 역설하고 있다. 그러면서 “postcapitalism”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잠정적으로 쓰고 있다. 그것은 자본주의 이후의, 그 정체를 가늠하기 힘든 새로운 체제를 지칭하기 위한 것이다. 생산을 위한 기계 기술이 발전하게 되면 그만큼 인간은 덜 노동하게 되고 더 많은 여유 시간을 확보하면서 함께 향유를 누릴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나게 되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이 원칙이 전혀 통용되지 않는다. 이 원칙을 현실로 바꾸고자 하는 데서 새로운 사회주의, 그 이념이 설립된다.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한, 기계 기술의 비용이 점점 커지면서 그에 따라 그 기계 기술 소유자의 수가 줄어들게 되고 따라서 생산수단의 독점의 폭이 커지면서 생산물에 대한 독점적 소유의 폭 또한 당연히 늘어나게 된다. 생산력이 발전함으로써 사회 전체의 부는 계속 늘어나지만, 그 부의 소유에서 제외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나면서 직장을 잃거나 할 일을 잃어 대다수의 구매력이 줄어들고 생산에서 경색이 일어나면서 더욱 더 많은 실업자들이 생겨나는 악순환이 거듭된다. 자본주의적인 재분배 시스템으로는 이 악순환을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복지국가 정책이었으나 복지국가가 사회전반적인 체제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자본주의 체제의 부작용을 메우기 위한 부수적인 일환으로 작동하는 한 경우에 따라 언제든지 약화되거나 심지어 폐기될 수도 있다. 20세기 말부터 21세기에 접어들어 이를 확연히 목도하게 된다. 사회 구성에 있어서 근본 문제는 재분배 시스템이다. 생산을 위한 고도의 기계기술이 발전하면 할수록 재분배 시스템을 둘러싼 사회적인 갈등과 대립의 폭과 깊이는 더욱 커지게 된다. <알파고>가 세계인들에게 준 충격의 숨겨진 본질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제 생산을 위한 효율성은 기계의 몫이 될 것이다. 심지어 생산의 효율성을 위한 관리 조정마저도 인공지능이라는 기계의 몫이 될 것이다. ‘대책 없는’ 낙관주의를 내세워 말하자면, 이제 인간들은 그저 놀고먹기만 하면 된다. 어떻게 놀고먹을 것인가가 문제다. 모두가 평등하게 평화롭게 즐겁게 다양하게 새롭게 놀고먹을 수 있을 길을 마련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전면적이고 심오한 감각을 갖춘 인간들”(마르크스)이 예사로 평범한 인간으로서 서로 함께 즐길 수 있는 길을 마련해야 한다. 이렇게 생산의 대부분은 기계에게 맡기고 전면적이고 심오한 감각을 누리면서 놀고먹을 수 있는 길을 일컬어 새로운 사회주의라고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적인 재분배 시스템으로는 이렇게 놀고먹을 수 있는 길은 아예 불가능하다. 일체의 생산물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그것들을 생산하는 사람들에게 청구권이라는 이름으로 명령권을 행사하는 화폐, 이 화폐를 더 크게 하기 위한 자본, 모든 인간적인 다양성을 궁극적으로 바로 이 명령권 증식의 자본이라는 단일성을 위한 수단으로만 조직 관리하는 사회 및 국가의 구성, 이로써는 객관적으로 실증되고 있는 탈인간적인 기계기술의 발전과 그에 따른 자본 파괴의 악순환의 길을 막아낼 수도 역용(逆用)할 수도 없다. 그래서 세계적인 학자들이 “자본주의는 미래가 있는가?” 라고 물음을 던진 뒤, “미래가 없다. 불과 2,30년 안에 붕괴되고 말 것이다.”라는 분석적인 진단을 내리는 것이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3. 그런데 지금 우리는? 4·13 총선 결과가 야권분열에 의한 섬뜩한 예상과는 반대로 나타남으로써 그나마 안도의 호흡으로 몸을 추스르나 했더니, ‘구조조정’ 이야기가 나오면서 사회경제적인 삶이 이미 체험하고 있는 극도의 불안정성을 기정사실화 하면서 더욱 강화하는 쪽으로 치닫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노동의 유연화’를 내세운 미국 헤게모니 하의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 및 사회경제적인 확산이 2008년 대 금융위기의 철퇴를 맞은 이후 잠시 고개를 숙이면서 몸을 감추는가 보다 했더니 그게 아니다. ‘혁신’, ‘창조’, ‘유연화’, 심지어 ‘인공지능에의 대대적인 투자’ 등의 낱말들이 범람하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를 끝끝내 유지하고자 여러모로 발버둥치고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이 낱말들이 암암리에 또는 명시적으로 지시하는 파편적이고 단기적인 실제의 구현이야말로 마치 오늘날의 불안정의 기조를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역량이고 최고의 가치를 지닌 양 예사로 통용된다. 하지만 그런 추세에 스며들어 있는 시간의 단편화를 넘어선 시간의 파편화에 대한 성찰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시간이 파편화된다는 것은 각자뿐만 아니라 사회 및 국가마저도 존재를 형성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간이 파편화된다는 것은 다소 구체적으로 말하면 결코 벗어날 수 없는 현존의 활동들이 파편화된다는 것을 뜻한다. 누구든 무엇이든 지금 여기에서의 현존이 축적되어 그 나름의 존재를 형성한다. 존재가 역사성을 띨 수밖에 없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그런데 현존이 번갈아 이어지긴 하되 파편적으로 이어지면 그 어떤 역사적이거나 서사적인 내용도 형성하지 못한다. 공시적으로도 그렇고 통시적으로 그럴 것인데, 모든 대상들과 모든 사건들이 뿔뿔이 흩어져 연기가 공중에 날리다가 곧 사라지고 마는 것처럼 되고 만다. 그 속에서 인간들 역시 마찬가지다. ‘종신 고용’은 이미 옛말이 되고 말았다. 해당 기업의 주식 값을 올리기 위해서는 그 기업이 혁신이니 구조조정이니 하면서 단기간의 이익을 올리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흉내라도 내야 한다. 모든 기업의 가치를 주식 값의 등락으로 환산하고자 하는 주주자본주의적인 논리 앞에서, 정부 책임자건 기업의 경영 책임자건 기업의 노동자건 속수무책의 무책임으로 일관하게 되고 그저 주어진 단편적인 현존에 매몰되어 우선 위기만을 모면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면 과연 어떻게 되는가? 이는 ‘전면적이고 심오한 감각을 갖추고서 모두가 함께 삶을 즐길 수 있는 세상’과는 정반대의 길임에 틀림없다. 2008년 대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그런 위기를 가져온 지역화 및 세계화와 전반적인 자유무역의 분위기가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그 여파로 여전히 세계 전체의 경제가 불황의 늪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고 한국경제 역시 마찬가지로 장기 불황의 조짐을 씻어낼 수 없다는 염려가 공인되다시피 하는데도, 이를 근본적으로 되돌릴 수 있는 길을 어느 누구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 그런데도 또다시 그 위기의 원인들을 단편적인 방식으로 반복할 수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양 하면서 장기적인 근본 대책을 전혀 강구하지 못한다는 것은 과연 어떤 묵시록적인 의미를 던지는 것인가? 분명 사회적 생산력은 계속 신장되고 있는데도 그 과실에 대한 재분배의 관계가 날로 정체조차 불분명한 소수 독점적인 방향으로 악화되면서 이른바 생산력과 생산관계 간의 적대적인 모순이 더욱 격화되는 과정이 더욱 날카롭게 전개된다는 것은 오래지 않은 미래에 대 체제적인 격변이 일어나리라는 묵시록적인 계시를 함축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 격변의 과정이 얼마나 폭력적일지 어느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상황에서, 왜 하필이면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군사적 대립과 갈등은 이토록 섬뜩하게 전개되는 것인가? 난세를 태평세로 바꾸고자 한 ‘춘추공양학’으로 본 공자의 뜻이라도 다시 살려내어 깊이 새겨야 한다. 존재와 그에 따른 역사는 골동품처럼 취미 내지는 통치수단이 되어 거리에 나돌고, 문화는 거대한 풍선처럼 상품 내지는 순간적인 마취제가 되어 하늘을 난다. 시간의 파편화를 요구하는 사회경제적인 삶의 방식이 낳은 결과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참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조차 없는 존재의 섬뜩함’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게다가 허약하기 짝이 없는 통치 그룹이라니. 이 무슨 해괴한 사회국가적 불행이란 말인가. 도대체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통치 그룹인가.
2017-08-07 | hrights | 조회: 53 | 추천: 0
정보배/ 출판 기획편집자   “아니, 어떻게, 이렇게 말도 안 되게 힘든 걸 다들 묵묵히 해왔단 거야?” 백일 갓 지난 갓난애를 둔 후배는 정말 다들 이런 식으로 아이를 키워왔단 거냐며, 왜 다들 아무 말도 안 한 거냐며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누군가 나에게 마흔 넘어 아이를 낳고, 피붙이 도움을 전혀 받을 수 없이 아이를 키우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적나라하게 말해줬더라면 나는 아이를 낳지 않았을 것이라며. 올해 초 한 방송사에서 방영한 <엄마의 전쟁>이라는 다큐가 SNS상에서 꽤 논란이 되었다. 양육에 대한 책임을 엄마에게 전적으로 지우고 ‘엄마 노릇’을 빼고는 엄마의 다른 정체성이나 자아를 완전히 무시하는 남편들과 그 점을 교묘히 부각시키는 제작진의 의도가 많은 여성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엄마가 된 여자는 다른 욕망이나 자아실현에 대해 말을 꺼내서도 안 되며, 엄마 노릇을 하느라 정신적, 육체적으로 혹사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 노릇을 훌륭히 해내야만 제대로 된 엄마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통념이 지배적이다. 여자는 엄마가 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엄마가 된 여자도 ‘엄마 노릇’으로 존재 가치가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다. 『엄마라는 직업』을 쓴 헴마 카노바스 사우의 말처럼, 여성의 정체성이 엄마가 된다는 사실만으로 규정되거나 사라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아직도 엄마가 아닌 여성에 대해서 불완전한 존재 혹은 뭔가 부족해서 불쌍한 사람으로 취급하는 것이 현실이다. 여전히 “나는 엄마가 되고 싶지 않다”거나 “엄마가 된 것을 후회한다”는 말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사회인 것이다. 왜 엄마는 ‘엄마 노릇’ 말고 개인의 욕구를 실현하기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하면 안 되는가? 왜 아이 양육과 관련한 여러 문제와 해결책에 아빠라는 단어는 등장하지 않는가? 얼마 전 『엄마라는 직업』을 출간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이런 문제에 대해 속 시원하게 엄마의 입장에서 대놓고 문제 제기하는 책이 별로 없는 데다, 이 책은 현실적으로 엄마 자신과 그 주변 인물, 기업, 정부가 어떤 현실적인 대책을 모색할 수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제안한다는 장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 - 예스24 사회에서는 여자들의 마음속에서 고동치는 주체인 ‘여자’를 배려하지 않은 채 그저 기존 구도 속에서 엄마 노릇을 하도록 하기 위한 교육법과 가치관을 퍼뜨리고 있다. 이 시대 엄마들은 한편으로는 자녀에게 절대적으로 헌신해야 한다는 전통적 사고방식을 물려받았고, 한편으로는 여자에게 적극적인 역할을 부여하는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샌드위치 세대’이다. 만약 누군가 이 사회에서 엄마가 되기로 결심했다면, 자녀를 돌봄과 동시에 자신과 일에 집중하면서 완벽한 가정을 일구어야 하는 ‘100점짜리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모순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사회적 통념에서 오는 불쾌감, 임신 때문에 직장에서 겪는 불이익과 불편, 가정과 직장 사이를 오가며 수많은 일을 처리해야 하는 어려움 등을 모두 감수해야 한다. 직업이 따로 있는 엄마는 (모성의 자연스러운 발현을 원하는) 자기 자신을 벗어던져야 하는 전통적 남성 위주로 짜여 있는 직업 세계의 구조와 맞닥뜨리면서, 가정과 일 모두를 잘해내고 있지 못하다는 죄책감과 불안감에 휩싸이게 된다. 사회에서 ‘모성’은 엄마들에게 ‘엄마 노릇’을 강제하고 싶을 때 가져다 쓰는 도구일 뿐이다. 육아휴직을 둘러싼 논의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직장 생활에서 아이의 양육과 관련한 이슈가 생겼을 때 엄마들은 능력 없고 민폐 끼치는 동료가 되지 않기 위해 다른 핑계를 대야 하는 형편이다. 아이 양육을 온전히 개인이나 가족 누군가의 희생에 의존해서 키워야만 하는 사회 시스템 속에서 저출산이라는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엄마라는 ‘직업’을 묵묵히 수행하는 여성들이 처한 개인적, 사회적 현실에 대해 제대로 말해야 할 때가 이미 지나도 한참 지났다. 더 이상 엄마들에게 모든 것을 떠안으라고 할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대답을 내놓아야 한다. * 덧붙인다면, 『엄마라는 직업』에서 저자가 말한 여러 대안들을 눈여겨봤으면 좋겠다. 특히 일과 가정을 배려한 정책 - 자녀를 출산하거나 입양했을 경우 남자도 유급휴가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거나, 특정한 기간이나 상황에서 자녀와 가정을 돌볼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유연한 노동시간을 기업이 운용하도록 하거나, 양육비의 적극적 지원, 어린이집이 고품질의 기준을 적용할 수 있도록 하는 관찰과 감시가 정책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는 등의 현실적인 제안들은 지금 한국 사회에 꼭 필요한 것들이라고 본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40 | 추천: 0
홍미정/ 단국대 중동학과 조교수 □ 아랍에미리트(아부다비)와 카타르가 서로 다른 파벌 지원 2011년 카다피 정권이 붕괴되면서, 곧바로 리비아는 대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다양한 무장단체들이 난립하면서, 석유와 가스가 풍부하게 매장된 리비아 영토에 대한 통제권을 주장했다. 결국 리비아는 석유 가스 매장지와 파이프라인 통제권을 중심으로 서부의 트리폴리 정부와 동부의 투브루크 정부로 나뉘어 권력 투쟁을 하고 있으며, 충돌하는 이해관계를 가진 외부 행위자들, 특히 아랍에미리트와 카타르가 깊숙이 개입한 전쟁터가 되었다. 현재 리비아에는 이슬람주의자가 중심이 되어 트리폴리를 통치하는 ‘새 일반 국민회의 정부(the government of the New General National Congress)’와 투브루크를 통치하며,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대표자들 정부(the government of the House of Representatives)’가 권력 투쟁을 하고 있다. 트리폴리의 ‘새 일반 국민회의’는 터키, 수단, 카타르의 후원을 받고 있으며, 투브루크의 ‘대표자들 정부’는 러시아, 이집트, 아랍에미리트의 후원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2015년 5월 캠프데이비드에서 개최된 미국-걸프 협력기구(GCC) 국가들 정상 회담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아랍에미리트 지도자와 카타르 지도자에게 리비아에서 포괄적인 정치적 해결을 선호한다고 밝혔다. 걸프 아랍 관리들은 계속된 평화 과정을 공개적으로 비난하지 않고, 시리아, 이라크, 예멘 등 역내 분쟁에서 군사적인 해결책은 있을 수 없다고 합의하였다. 그러나 이 정상회담 이후, 아랍에미리트와 카타르는 리비아에서 각각의 협력 파벌들을 후원하면서 권력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리비아는 카타르와 아랍에미리트(아부다비)가 상호 경쟁적인 파벌을 지원하는 전쟁터일 뿐만 아니라, 아부다비와 카타르 모두에게 매우 커다란 이권이 걸려있는 곳이다. 카타르가 후원하는 이슬람주의자 무슬림 형제단이 리비아를 비롯한 중동 국가들에서 부상하고 있다. 무슬림 형제단은 아부다비가 주도하는 아랍에미리트의 정치 경제 질서에 대한 잠재적인 불안 요인이다. 아부다비 당국자들은 무슬림 형제단의 아랍에미리트 분파인 알 이슬라흐를 아부다비가 주도하는 아랍에미리트 정치 질서를 전복시킬 수 있는 단체로 생각한다. 따라서 아부다비 당국자들은 자국 내의 알 이슬라흐를 강력하게 탄압할 뿐만 아니라, 중동 전역에서 무슬림 형제단 제휴 단체들을 반대한다. 무슬림 형제단에 반대하는 아랍에미리트는 2014년 7월 이후 트리폴리를 장악한 이슬람주의자들을 테러리스트라고 주장하는 투브루크의 ‘대표자들 정부’를 강력하게 지지한다. 2014년 7월 선거에서 무슬림 형제단이 패배한 후에, 무슬림 형제단이 이끄는 연합 리비아 돈(Libya Dawn)이 수도 트리폴리를 장악하였다. 리비아 돈 전사들이 ‘새 일반 국민회의 정부’를 창립하고, 유엔 승인을 받은 ‘대표자들 정부’를 이집트 근처 지중해안을 따라 위치한 투브루크로 축출하였다. 평화를 중재하려는 유엔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트리폴리에 기반을 둔 정부와 투브루크에 기반을 둔 두 개의 리비아 정부는 계속 충돌하고 있다. 이 두 정부에 대한 카타르와 아랍에미리트의 지원이 리비아 분쟁을 장기화시키고, 격화시킨다. 아랍에미리트와 카타르는 카다피 반군들에 대한 후원자들로서 리비아 봉기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 두 걸프 국가는 이 거대한 지정학적인 투쟁에서 경쟁자로 출현하였다. 러시아, 이집트와 함께 아랍에미리트는 투브루크에 기반을 둔 정부를 후원한다. 터키, 수단과 함께 카타르는 트리폴리에서 이슬람주의자가 이끄는 정부를 후원한다. 이러한 리비아에서 아랍에메리트와 카타르의 대리전은 걸프 협력 기구(GCC) 내에 심각한 분열이 존재한다는 분명한 예다. 카다피 이후의 리비아 정치질서 수립에, 이 두 걸프 국가들이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 무슬림 형제단을 두려워하는 아랍에미리트(아부다비) 무슬림 형제단은 민주적인 기구들을 육성하고, 중동 역내 전역에서 사회정의를 지지해 왔다. 당연히, 걸프 협력기구의 통치 가문들은 정부 반대파에게 기회를 줄 수도 있는 각 국내의 반정부 활동 가능성 때문에 무슬림 형제단의 활동을 매우 두려워한다. 리비아에서 아랍에미리트-카타르 경쟁은 걸프 왕국들 내의 민감한 정치적 문제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특히, 걸프 왕국 통치가문들은 무슬림형제단과 같은 이슬람주의자 운동 부상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에 대하여 노심초사한다. 무슬림 형제단의 다양한 분파들은 2011년 아랍봉기 이후 선거를 통해서 권력을 장악했다. 2011년 6월 12일 터키의 정의 발전당(Justice and Development Party), 2011년 10월 23일 튀니지의 엔나흐다당(Ennahda), 2011년 11월 28일-2012년 1월 11일 이집트의 자유정의당(Freedom and Justice) 등이 선거에서 승리한 것이 분명한 그 예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에 대해서 아랍에미리트와 카타르는 각각 다르게 반응했다. 아랍에미리트는 국내외에서 확고하게 반 무슬림 형제단 정책을 견지한다. 2011년 이후, 아부다비는 무슬림 형제단에 맞서기 위하여 특히 이집트와 리비아에 상당한 재원을 투자하고 있으며, 자국 내 무슬림 형제단 분파인 알 이슬라흐를 강력하게 탄압한다. 카타르는 아랍 역내에서 활동하는 무슬림 형제단 분파들을 후원함으로써, 카타르의 지정학적인 영향력을 확장하고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무슬림 형제단 분파들을 활용한다. 그러나 카타르 역시 자국 내에서는 무슬림 형제단의 활동에 대한 두려움으로, 무슬림 형제단 활동을 금지시키는 이중적인 정책을 취하고 있다. □ 카타르가 후원하는 무슬림 형제단 세력을 반드시 제압하라 2014년 8월 아랍에미리트 비행기가 이집트 기지에서 트리폴리 통제권 장악을 시도하는 이슬람주의 무장 단체를 공격하였다. 이 공격은 아랍에미리트가 국제적인 승인 없이 외국을 공격한 최초의 사건이었지만, 무슬림 형제단 리비아 돈의 트리폴리 장악을 저지하지 못했다. 2015년 11월, 뉴욕 타임스는 카타르가 후원하는 이슬람 무장단체를 약화시키기 위한 시도로 아랍에미리트 선박이 리비아 무장단체에게 무기를 공급하였다고 폭로하였다. 또 아랍에미리트는 평화 협상 중재자로 유엔이 리비아에 파견한 특사 베르나르디노 레온(Bernardino León, 특사재임: 2014년 9월 1일–2015년 11월 1일)에게 높은 급료를 받는 에미리트 외교 아카데미(the Emirates Diplomatic Academy, EDA) 총 책임자 직위를 제안하였다. 레온이 유엔 리비아 특사 직위에서 물러나자마자 2015년 11월 4일, 약속대로 아랍에미리트는 그를 에미리트 외교 아카데미의 총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이 사건은 유엔이 실제로 리비아 사태 해결을 위한 노력을 하는지 의구심을 갖게 하며, 카타르에게 리비아에 대한 주도권을 절대로 빼앗길 수 없다는 아랍에미리트의 확고한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55 | 추천: 0
정지영/ 한국장애인단체총연합회 사무국장 4월이 되면 장애인은 조금 심란해집니다. 이제는 모두가 잘 아시는 4월 20일 장애인의 날이 있기 때문이죠. 장애인을 위한 날, 그래서 장애인 주간행사도 많고, 기념식도 있는 그 날이 되면 우리는 왜 헛헛해질까요. 아마도 수십 년간 반복되는 ‘장애인의 날’에만 집중되는 관심 때문 아닐까요. 364일 차별 속에 살아가는 장애인, 그 날 하루만 바쁩니다. 정부 주도의 기념식도 있고요, 각 지역에서 열리는 기념행사도 있고요, 장애를 잘 극복했다며 상도 주기도 하고, 영화를 공짜로 보여주기도 하고, 장애인 콜택시도 무료로 이용할 수 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분이 썩 좋지 않습니다. 모두 이해해 주시겠지요? 장애인들도 365일 1년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니까요. 그래서 장애인들은 4월에 투쟁을 합니다. 이미 지역별로 순회투쟁에 들어간 곳도 있고 4월 20일이 되면 길거리에서 권리를 외치는 장애인들을 보시게 될 거에요. 혼란스러울 수도 있어요. TV에는 장애인들을 위해서 정부, 지자체, 민간에서 잔치를 열어주고 있는 데 한편에선 목청 높여 거리로 나선 장애인들이 있을 테니까요. 2015년 4월 20일, 장애인의 날. 휠체어를 탄 한 장애인이 장애인 차별 철폐를 주장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 출처- 경향신문 길을 막는다고 시끄럽다고 눈살을 찌푸리시기 전에 장애인들이 여러분들과 어떻게 살고 있는지 한 번 되돌아봐 주시기 바라는 마음에 최근 소식 몇 가지 전해드려요. 먼저 잊을 만하면 기사로 나오는 장애아동을 살해하고 자살한 부모의 이야기 입니다. 경찰관이라고 합니다. 다운증후군 아들을 목 졸라 숨지게 하고, 자신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가족들에게 미안하다는 내용의 유서가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아들은 20살이지만 고등학교 1학년입니다. 장애인을 키우는 가족이 죄인도 아닌데 늘 미안하다고 합니다. 자식이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가족에 의해 살해당하는 사건들이 이어집니다. 사람들은 안타까워하면서도 오죽하면 그랬을까, 그 가족들의 심정을 이해한다고 합니다. 저는 거꾸로 묻고 싶습니다. 우리가 안타까워하는 것은 장애인으로 태어난 그 사람과, 그 가족의 비극적 운명일까요 아니면 장애인으로 태어나 살아가는, 장애인 가족과 함께 살아가기가 힘겨운 사회일까요? 국가인권위원회에서는 최근 장애인시설에 대한 폐쇄권고를 내렸습니다. 장애인시설 거주인들 간의 성추행·성폭행이 끊이지 않는 모 시설이 더 이상의 자정능력이 없다며 시설 폐쇄를 권고했습니다. 또 다른 장애인거주시설에는 24시간 돌봄 없이 장애인들이 방치되지 않도록 개선할 것을 권고하기도 했습니다. 아직도 많은 장애인이 지역사회에서 분리된 채, 지역사회에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과 다르게 살아가고 있다는 반증일 것입니다. 활짝 핀 벚꽃을 마냥 좋게 바라볼 수 없는 4월, 언제쯤이면 장애인도 함께 마음껏 웃을 수 있을까요. 4월, 장애인들은 거리로 나옵니다. 지나가다 마주치게 되면 봄꽃 구경 함께할 수 있는 날을 앞당기기 위함임을 공감해주시고 응원해주시기 바랍니다. 4월 20일 장애인의 날. 장애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잔치가 아니라 권리입니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38 | 추천: 0
김재완/ 방송대 법학과 교수 인공지능의 여파가 거세다. 고도로 생각하고 학습하는 능력은 인간 고유의 영역으로만 여겨져 왔었다. 그런데 이제 그 영역을 넘보는 기계문명이 목전에 도래하고 있다. 아울러 인공지능이 가져올 디스토피아(Dystopia)적 미래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인간은 자신의 두뇌활동을 통해 상상된 이미지들을 만들어내고 이것을 현실에 실재하는 것들로 재창조해내는 탁월한 능력의 생명체이다. 현재 가장 핫(Hot)한 대상인 인공지능도 그 결과물이다. 인공지능의 요체는 방대한 양의 디지털화된 데이터이다. 지속적으로 공급되는 방대한 데이터에 기초해서 학습하고 선택하는 딥러닝과 알고리즘을 통한 하드웨어의 거대한 연산처리 과정을 통해 마치 인간의 두뇌활동과 같은 모양새를 가진 인공의 지능이 되는 것이다. 결국 인공지능이란 인간의 관리가 가능한 기계장치에 불과한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호들갑스럽게 인공지능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느낄 필요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진정한 공포와 두려움은 인공지능 그 자체보다도 그것을 통해 만들어질 가속화된 인간 소외의 사회구조적 변화에 있을 것이다. 인공지능을 관리할 소수의 인간만으로도 수많은 노동자들을 대체할 수 있다는 새로운 과학기술적 자본의 패러다임이 공포의 실체이다. 또 하나 우리들 사피엔스(Sapiens) 종은 신의 영역인 생명의 법칙에도 도전해왔다. 인간의 유한성을 뛰어넘고자 하는 욕망은 생명공학의 발전을 통해 점점 실체화되고 있다. 그것이 종교적, 윤리적인 거센 저항에 부딪힌다고 하더라도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새로운 진화의 단계에 돌입해 있는 것은 분명하다. 특히 이제 인간은 과학기술을 통해 스스로 신이 되고자 하는 단계로 질주하고 있다. 인간의 신체에 기계공학적인 기술을 접목시켜 사이보그로 재탄생하는 생체공학적 기술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다. 생명체와 기계, 인공지능, 그리고 생명공학이 결합하는 것이다. 새로운 유기체가 탄생하는 것은 상상 속의 일이 아니라 현실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유기체 진화의 주체에서 새로운 유기체들을 창조하는 주체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이를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자연법칙이 아니라 거대한 자본의 힘을 빌린 과학기술이다. 여기에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을 생산해야만 하는 자본의 법칙이 그 동력원이라는 점을 간파해야 한다. 사진 출처 - 한국일보 새로운 과학기술적 자본의 패러다임이 만들어내는 결과물들 속에 진정한 유기체로서의 인간 군상들은 어떤 모습으로 자리할 것인가? 이제 인간 자신들조차도 주체의 자리에서 밀려나 객체로,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은 아닌가? 과학기술적 자본을 관리하는 자들의 관리 대상으로서 물화되는 것은 아닌가? 그러한 부정적인 물음에도 불구하고, 생명체의 유한성을 개선하는 기술이 우리를 보다 더 자유롭고 평화롭게 만들며, 세상을 유토피아로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닌가 하는 희망적인 물음도 제기해 볼 수 있다. 이러한 물음들의 본질은 인간을 더 인간답게 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이냐 하는 것에 있다.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라는 영화에서 노동용 복제인간(Replicant) 로이는 자신의 수명이 매우 짧고, 유통기한이 다 되었음을 알고서 오히려 자신을 죽이려는 인간 데커드를 구한다. 그 유명한 대사 “나는 너희 인간들이 상상하지 못할 것들을 봤어. 그 기억들 모두 시간 속에 사라지겠지, 빗속의 이 눈물처럼. 죽을 시간이다.”라는 말을 던지면서. 인간이 만든 피조물이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 준 것이다. 엑스마키나라는 영화에서 인공지능 여성 로봇인 에이바는 자신을 창조한 칼렙과 네이든의 남성적 욕망을 교묘히 이용해 실험실을 탈출하고 자유를 얻는다. 자유를 얻기 위해 인간의 미묘한 감정까지도 이용할 수 있는 자아를 가졌다는 점에서 충격적이었다. 인간이 인간답다는 것은 모든 생명체에게 존재하는 고유의 유효기간, 즉 언젠가는 죽게 된다는 사실과 그 삶의 과정 속에서 작동하는 온갖 감정들의 덩어리가 인간과 인간 사이를 끊임없이 연결한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피조물을 사랑할 수도 있고, 피조물이 인간을 사랑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인간이 인간 자신을 사랑하고, 또 다른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다. 과학기술이 초고도로 발전할수록 우리들은 우리 자신들을 비추는 거울 앞에 더 자주 서야 한다. 그 앞에서 생명체로서의 본질을 더욱 각성하고 인간적인 것에 대한 물음을 던져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 것인가? 새로운 과학기술적 자본의 패러다임이 가져올 변화의 구조 속에서, 더욱 인권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강화시켜야 하는 과제가 우리에게 던져지는 것이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36 | 추천: 0
정재원/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 인천 연수구에서 학대와 배고픔을 참지 못 해 2층에서 배수관을 타고 내려와 슈퍼마켓에서 먹을 것을 찾다가 주민들의 신고로 밝혀진 한 아이에 대한 무지막지한 학대 사건 이후 전수조사가 이루어졌고, 그 후 곳곳에서 끔찍한 사건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부천 초등생 아들 시신 훼손 사건, 부천 여중생 딸 시신 방치 사건, 광주 7세 여아 살해 사건에 이어 최근 신원영 군 살해 사건 등 드러난 것만 해도 수 건이 넘는다. 사실 아이들을 키우다보면 그 자체로도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 오랫동안 훈육의 일환처럼 여겨져 온 손찌검 정도를 안 하는 가정은 거의 없는 것이 현실이다. OECD 국가들 중 가장 노동 시간이 긴 우리나라에서 부부가 모두 일을 하는 가정의 경우 육아는 전쟁에 가깝다. 게다가 아이를 제대로 돌 볼 수 없는 상당수의 빈곤 가정의 경우 육아로부터 오는 스트레스는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문제 외에도 정상적인 가족생활을 이어나가지 못 할 정도의 폭력 등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는 수많은 다양한 가정들이 존재하고 있는데, 이러한 경우 학대나 방임은 한층 더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허약한 아이들에게 그토록 무자비하고 비상식적인 행위를 할 수 있는지 이해를 하지 못 한다. 긴 시간 굶기거나 뜨거운 물이나 다리미 같은 것으로 화상까지 입히는 행위... 차디찬 욕실에 가두어 락스와 찬물을 끼얹거나 소금만 먹이고 구토한 것을 먹게 하는 행위... 손과 발은 물론 각종 도구를 이용해 뼈가 부러지고 살갗이 찢어지고 피멍이 곳곳에 들 정도로 무자비하게 구타하는 행위 등등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이러한 행위들을 어떻게 심지어 친부모가 자행하거나 방조, 혹은 방치할 수 있는지에 대해 전문가들의 설명이 있기는 하지만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점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무엇보다 빈곤 가정의 경우 더 많은 학대 행위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학대 행위 그 자체에 대한 예방이나 처벌 강화가 아닌 근본적인 처방이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외에도 우리가 고민해야 할 지점들은 너무나 많다. 살해까지 이르지 않았을 뿐, 수많은 학대와 방임, 그리고 성적 학대들이 넘쳐나고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러한 ‘부모들’을 사실상 만들어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이 문제는 이러한 부모들만의 문제가 아닌 전 세대에 걸친 문제이기도 하다. 불과 얼마 전까지 큰 주목을 받았던 학원 폭력의 가해자들이나 대학 내 군기 잡기, 군대 폭력의 가해자들이 부모가 되어서는 갑자기 순한 양이 될 수 있을까? 게다가 이들 역시 또 다른 학대 피해 경험을 가진 이들일 수도 있다. 인분 교수 사건이나 동기 간 학대 사건, 선후배 학대 사건, 직장 내 왕따 및 폭력 사건과 같은 사건의 가해자들과 같은 사람들은 부모가 된 후 어떻게 변할까? 그 뿐만이 아니다. 사실 학교에 나오지 않는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전수조사 계획이 나왔을 때, 곧바로 의문을 갖게 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 위의 중고등학생 나이의 청소년들 중 학교에 가지 않고 있는 소위 ‘가출 청소년’의 문제이다. 과연 이들은 초등학생 보다는 조금 더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학대 아동 현황 파악에서 벗어나 있어야 하는 카테고리인가? 그리고 과연 이 심각한 문제에 대해 국가는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한 자료에 따르면, 한 해에 2만 명 이상의 학생들이 가출을 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며, 현재 무려 약 20만 여 명의 가출 학생들이 거리를 떠돌며 범죄 등에 연루되어 있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리고 여러 조사 자료에 따르면, 청소년의 가출 역시 빈곤과 가정 내 불화 및 학대 등이 원인들 중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사진 출처 - 게티이미지뱅크   일단 아동학대로만 제한하더라도 전 세계 48개 국가들이 부모의 체벌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아동 체벌을 법적으로 금지하고 있는 것에서 보듯 아동학대를 근본적으로 막기 위한 기본적 토대라고 할 수 있는 법적인 수단의 강화를 통한 아동학대방지정책은 그 무엇보다 절실하다. 그러나 아동 자체에 대한 학대와 방임 등에 대한 대책 강화는 물론, 위에서 언급했듯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폭력을 유발시키는 다양한 원인들의 근본적인 제거가 너무나 절실하다. 즉 단순히 ‘내 아이의 문제는 내 가정 내의 문제’, ‘체벌도 하나의 훈육 방법’ 등과 같은 전근대적인 교육 방법이나 가족에 대한 우리 사회의 잘못된 인습에 대한 타파로 협소화시키는 것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 한다는 것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완벽하게 이웃과 단절되어 버린 현대 한국 사회에서 이웃공동체의 역할의 강화 등 사회적으로 문제를 풀어 나가자는 방법 역시 아직은 이상적인 것에 가깝고 실효성이 없다. 물론 대안은 쉽게 마련되지는 않겠지만, 분명한 것은 이러한 사회현상에 대해 종합적이고 입체적인 대책이 아닌 단기적이고 협소한 대책으로는 절대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게임과 도박에 중독되어 살아가고 음주와 성매매에 빠져 지내는 사람들을 양산하는 사회, 서로를 차별하고 짓밟고 증오하며 속여야만 살 수 있는 사회, 스트레스와 불만이 극대화되어 분노조절을 하지 못하고 우울증에 고통 받는 등 정신적인 문제들을 안고 사는 사람들을 양산하는 사회, 폭력과 사기와 협잡과 궤변이 승리하는 사회, 질병과 파산과 빈곤과 자살 등 수많은 사회문제를 개인이 해결해야 하는 사회, 불공정과 불평등과 양극화 속에서 극소수만 잘 사는 사회를 사실상 방치하고 경제민주화와 복지에 대한 요구를 포퓰리즘으로 왜곡하고, 온갖 특혜로 자신들의 배만 불리고 있는 한국사회의 지배 엘리트들의 횡포가 유지되는 한 근본적인 해결은 요원할 것이다. 이런 와중에도 우리 사회의 언론들은 ‘계모’만을 강조하여 ‘친부’의 학대 책임을 상대적으로 경감시켜 주고 있으며, 수많은 재혼 가정의 어머니들에 대한 편견을 한층 더 확대시키고 있다. 범인의 얼굴을 알려도 친척이나 지인들은 큰 피해를 입지 않는 미국 등지와는 전혀 달리, 범인의 얼굴을 드러낼 경우 주변 가족들이나 지인들까지도 피해를 입게 되어 얼굴을 공개하지 않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범인의 인권 때문에 공개하지 않는 것인 양 착각하는 여론들도 여전하다. 학대의 가해자가 ‘조선족’이었던 한 사건에서는 본질을 벗어나 외국인혐오증이 극에 달한 적도 있었다. 이 끔찍한 아동 학대에 대해서 더욱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치열한 고민과 진지한 논의들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언제나 그렇듯 부차적인 관심들과 엉뚱한 논의들만 무성하다. 현재 우리 사회는 이보다 더 끔찍한 사건들이 예비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령 이주 노동자 자녀들이나 중도입국 자녀, 혼혈 가정 자녀에 대한 폭력과 인권 침해 문제 자체도 심각하지만, 이들이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고 거리를 배회하는 숫자가 크게 늘어나면서 발생할 수 있는 사회적 문제들이 기존의 문제들과 중첩되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위에서도 강조했듯, 언제나 이러한 문제 역시 개인과 가족이 알아서 해결해야 할 문제로 치부되며 국가는 사실상 방치하거나 심지어 방조하고 있다. 자신들의 이윤과 탐욕에만 눈이 먼 기득권 집단들, 여론 주도층들은 자신들의 이익이 침해되기 때문에 복지라는 형태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극구 반대하고 있다. 선교의 대상으로 인식할 뿐 근본적인 국가 복지로 해결하는 데에 매우 저항적인 보수적 종교 단체들 역시 역할을 하지 못 한다. 시민사회만이 국가를 압박하고 아래로부터의 진정한 대안들을 만들어 낼 수 있지만, 아직 종합적으로 사회문제를 분석하고 대안을 내기엔 힘이 달린다. 부디 이러한 끔찍한 사건들이 돌고 돌아 다시 돌아오지 않기 위해서라도 근본적이고 종합적인 대책이 절실하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36 | 추천: 0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상임위원 각자의 개인적인 삶에서건 집단의 공동적인 삶에서건 철학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고 흔히 말한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언급하는 철학은 과연 일반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 우선, 주체의 행동을 사실에 따른 기능의 차원에서 의미에 따른 가치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정신적인 위력을 뜻한다. 그런 다음, 어떤 가치를 어떻게 설정하고 추구해 나가야 하는가를 반복해서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는 정신적 위력을 뜻한다. 더 나아가, 비판적으로 성찰된 가치를 사회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이를 저해하는 요인들, 즉 왜곡된 또는 강압적인 기존의 가치들을 제거해 나가는 투쟁적인 정신적 위력을 뜻한다. 그리고 끝으로, 비판적인 성찰을 바탕으로 사회적으로 실현된 가치들을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즐기면서 누릴 수 있게끔 확산・심화시킬 수 있는 정신적 위력을 뜻한다. 한 마디로 줄여 말하면, 철학은 가치투쟁의 정신적 위력을 뜻한다. 이런 일반적인 뜻을 지닌 철학을 염두에 두고서, 지금 여기 우리 한국사회에서 요청되는 특수한 철학을 궁구한다면, 그 철학은 기본적으로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할까? 논의의 편의상, 이 철학을 일컬어 ‘당대의 한국철학’이라 부르기로 한다. 그런데 특수한 철학이라고 해서 철학 자체가 어차피 지닐 수밖에 없는 일반성을 벗어날 수는 없다. 굳이 말한다면, 지금 여기 우리 한국사회에서 요청되는 특수한 철학, 이른바 당대의 한국철학은 ‘특수한 일반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이는 특별히 한국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가치투쟁의 계기들을 포착해내지 않고서는 당대의 한국철학을 구성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 특별히 한국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가치투쟁의 계기들로서 지목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지면 관계도 있지만, 무엇보다 이 사안 자체가 워낙 중차대한 나머지 치밀한 사유를, 게다가 공동적인 치밀한 사유를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아직은 전혀 설익은 생각에 불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에, 시론(試論)의 차원에서 시급하다고 여겨지는 한 가지만 제시하고자 한다. 우리 한국사회에서 핵심적인 가치투쟁의 계기는 이른바 ‘분단체제’에서 형성된다. ‘체제’는 그 체제 하에 사는 사람들의 의식 및 무의식을 지평적으로 규정하는 비인격적인 힘을 발휘한다. 이때 체제의 비인격적인 힘은 사람들의 인격을 외부에서부터 그리고 심층에서부터 규정하게 된다. 이로써 체제는 사람들이 가치를 추구할 때 그 사람들의 주체 속에 내면화되어 인격적인 기반으로 작동하는 욕망과 감정을 조절 ‧ 규제하게 된다. 분단체제는 분명 외부세력에 의해 지정학적으로 한반도에 강압된 결과물이다. 그 강압의 과정에서 심지어 극단적인 전쟁마저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은 분단체제를 그야말로 강력한 체제로, 그러니까 분단이 의식/무의식에 대한 체제적인 규정력을 확고하게 발휘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일군의 연구자들은 ‘분단 트라우마’라는 용어를 주조해 내어 이를 철학적으로 규명하고자 하는 노력까지 했다. 가치투쟁의 인격적인 기반인 욕망과 감정에 관련하여, 분단체제가 내면화됨으로써 발휘하는 섬뜩한 내용은, 무엇이든지 적대적으로 분단되지 않으면 불안하게 된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나 또는 우리에 대해 적대적인 자 또는 세력이 현존한다고 여겨지지 않으면 불안하게 된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평화 또는 평화로움에 대한 근본적인 불안증을 갖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평화에 대한 불안증은 분열증을 낳게 된다. 적은 없애야 한다. 그런데 적이 없으면 불안하다. 적을 공격해서 없애고자 하면 할수록 불안은 가중된다. 적을 공격하면서 적을 키워야 한다. 이른바 자기공격적인(self-defeating) 분열증을 낳는 것이다. 예컨대 정치영역에서 예사로 ‘패권’이라는 말이 난무하는 것은 이러한 자기공격적인 분열증세 중 하나다. 사회적으로조차 지역감정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이러한 자기공격적인 분열증세 중 하나다. 이러한 분열증적 근본불안에 시달리는 상태로는 철학자 니체가 말하는 이른바 ‘반동성’ 즉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자극에 의해서만 운동을 하는 주체 아닌 주체의 성격을 결코 벗어버릴 수 없다. 마치 주체적으로 강력한 힘을 발휘해 적을 압도하고 있다고 여기지만, 그 주체는 오히려 철학자 푸코가 말한 권력관계의 꼭두각시가 되고 마는 것과 같다. 내면화된 분단체제에 의거한 진짜 주체는 반동적인 주체로서 자율성을 근본적으로 결여된 가짜 주체다. 이러한 ‘가짜인 진짜 주체’들이 모여 만들어나가는 한국사회에서 과연 누구나 흔쾌히 즐기면서 누릴 수 있는 가치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인가. 비판적으로 성찰된 가치를 사회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정신적 위력으로서의 당대의 한국철학, 가치투쟁을 벌이는 정신적 위력으로서의 당대의 한국철학, 이를 형성하고자 할 때 그 방향의 초점은 내면화된 분단체제를 뿌리 뽑는 쪽으로, 그리고 분단체제를 강요하는 지정학적인 외부세력들과 이를 우호적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내부세력들을 차단하는 쪽으로 향해야 할 것이다. 달리 말하면, 평화를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그 모든 힘들을 분쇄하는 쪽으로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이때 철학적인 가치투쟁의 핵심 수단은 평화일 수밖에 없다. 당대의 한국철학은, (1) 진정 평화를 비판적으로 성찰하여 그 가치의 위력을 드러내야 할 것이고, (2) 그 가치를 사회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원칙들을 제대로 세워야 할 것이고, (3) 평화를 방해하는 세력들이 지닌 가짜 철학 기반을 훤히 드러내어 그 반(反)가치의 성격들을 폭로할 뿐만 아니라, (4) 그 세력들을 일소하는 데 필요한 가치투쟁의 원칙들을 세워야 할 것이다. 요컨대 당대의 한국철학은 ‘평화의 철학’이지 않으면 안 되고, 또 ‘평화의 철학’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평화의 근본 기반은 평등이다. 평등의 근본 기반은 각자가 지닌 대체불가능성에 의거한 단독성이다. 예컨대 노동현실에서 비정규직을 양산하여 이른바 노동유연성이라는 미명하에 노동자의 대체가능성을 한껏 높이고자 하는 것은 각자가 지닌 단독성을 한껏 유린하는 것이다. 단독성이 유린되면 평등이 깨지고, 평등이 깨지면 평화는 불가능해진다. 예컨대, 1인 1표의 투표권의 평등만으로는 실질적 민주주의를 결코 실현할 수 없다. 1표를 행사하는 그 1인에게서 평화에 대한 불안, 평등에 대한 공포, 단독성에 대한 저항 등을 없애야만 한다. 1표를 행사하는 그 1인에게서 내면화된 분단체제에 의거한 자기적대적인 분열증적 모순감정을 제거해야 한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각자의 처지가 최대한 평등한 쪽으로 현실화되어야 함은 두말 할 것도 없다. 다만, 그 심층의 바탕에서 작동하는 한국사회 특유의 내면화된 분단의식이 똬리를 틀고서 독기를 뿜어내는 한, 그런 사회경제적인 현실에서의 평등을 향한 크고 작은 노력들이 수포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54 | 추천: 0
정보배/ 출판 기획편집자 “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니?” “응, 나는 엄마가 될 거야.” 그랬다. 여섯 살 꼬마였던 나의 꿈은 엄마가 되는 것이었다. 언니, 왜 결혼해? 어릴 적 꿈과는 달리 대학 때 나는 결혼에 대해 굉장한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이미 결혼을 한 세 명의 언니를 통해 들은 며느리 경험담은 내게 한국에서 여자가 결혼한다는 것은, 부당한 대접을 받아도 참아야 하고 비합리적인 것에 대해서 의견을 제시해서도 나서서도 안 되는, 그야말로 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으로 살아야 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20대 초반의 내게 한국의 시어머니들과 시댁이라는 곳은 며느리를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고 종처럼 부려먹는 악덕한 부류들로 인식되었다. 그런 생각으로 가득 차 있던 내게 페미니즘 문학으로 석사논문까지 쓴 넷째 언니가 결혼을 하겠다고 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국에서 결혼이라는 것이 여자에게 얼마나 부당하고 말도 안 되는 것을 강요하는 제도인지 너무나 잘 아는 언니가 ‘결혼’이라는 것을 하다니. 나는 대놓고 따졌다. “언니, 왜 결혼해?” 지금도 기억나는 언니의 대답. “경험하지 않고 밖에서만 있는 것보다, 그 속에서 직접 부딪히면서 내가 생각하는 것을 해보는 거, 힘들겠지만 나는 그러려고 해.” 이 사무실의 절반 이상이 여자야! 30대 초반의 직장은 사무실에 스무 명 정도가 같이 일하는 꽤 큰 규모의 출판사였다. 다른 일로 회사 송년회에 참석하지 못했고 부서 뒤풀이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며칠 뒤 부서 뒤풀이로 남자 관리자들 몇몇이 단란주점에 갔고 총무에게 부서회의비로 올리라며 단란주점 영수증을 여러 장 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부서회의비는 부서원당 금액이 배정되어 있는 것으로 몇몇이 마음대로 그 금액을 모두 써서는 안 된다. 총무는 부당하다고 생각했으나 남자 선배들이 처리하라는 대로 하지 않고 문제제기를 했을 때 벌어질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당시 부서에 브리태니커 백과서전이 없어서 개인비용으로 CD를 사고 회사 컴퓨터 메모리도 개인비용으로 늘리면서 일을 하던 참이었다. 도대체, 회사업무에 필요한 자재도 구비하지 않으면서, 남자들끼리 놀고먹은 영수증을 부서회의비로 올리라니. 회사의 총무를 맡고 있는 후배에게 나는 강하게 말했다. “지금껏 직장문화라는 것은 남자들이 만들어놓은 것이다. 봐라. 이것이 온당한 것이냐. 여기 이 사무실의 절반 이상이 여자들이다. 헌데 왜 여직원들의 권리를 남자 직원들이 마음대로 무시하도록 내버려두느냐. 이것은 부서의 상급자에게 당연히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 이런 문제 하나도 바꿔놓지 않으면 남성 위주의 직장문화는 앞으로도 계속 바뀌지 않을 거다. 너뿐만 아니라 네 후배들이 들어와도 마찬가지라고.” 나는 진심으로 분개했다. 결국 상급자에게 문제제기하겠다는 얘기를 듣고 단란주점에 갔던 세 명의 남자 직원들이 부서회의비를 토해냈다. 결혼 안한 여자로 사는 것도 힘들다 이 땅에서 며느리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익히 알고 있는 내가 어쩌다 결혼을 하게 되었을까. 사랑해서 결혼했다는 흔한 이유 말고, 내가 가슴에 담아둔 이유들을 끄집어내 본다. 30대 중반까지 싱글로 있는 나에게 사회는 계속 압력을 가했다. 싱글인 여자 직원은 술자리에도 당연히 늦게까지 남아 있어야 하고, (나는 술 권하는 사회를 혐오한다!) 왜 아직 결혼 안했냐는 관심 아닌 주제넘은 간섭을 들어야 하고, 늦게 퇴근하는 밤길거리가 심히 두렵고, 혼자 사는 집에 오는 택배아저씨들도 두렵고, 신고전화를 걸었던 파출소 경찰관에게 수작을 거는 전화를 왜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고, 아침 출근 택시 안에서 연락하라며 주던 전화번호 적힌 쪽지를 무서워서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도 싫고, 늦은 밤 택시에서 성폭행 사고가 가장 많다며 회사에서 첫 차가 다닐 때까지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결혼을 하면 그런 것들이 다 해결이 되냐고? 당연 아니다. 유부녀가 되면 해결되는 것은 소수이고, 몇 가지는 늙으면 저절로 해결되는 것들도 있다. 엄마가 된다는 것, 엄마로 산다는 것 혼자서 애 키우는 게 이렇게 힘들다고 누군가 진지하게 얘기해 줬다면 과연 그래도 나는 아이를 낳았을까? 그렇다고 대답할 자신이 없다. 나는 아는 임산부들에게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솔직하게 얘기해준다. 임신 중에 너의 몸이 어떤 변화를 겪게 되는지, 자연분만이든 제왕절개든 아이를 낳고 나면 자궁에 어떤 변화가 있는지, 갓난아기와 24시간을 함께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등등. 나는 딸이 100일이 지나자 인간의 꼴이 아닌 나를 보며 우울해했다. 몇 시간이라도 내게 아이와 떨어져 있는 시간과 공간을 주지 않으면 미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를 낳았으니 한없는 책임감을 가지고 모성으로 힘든 상황을 견뎌야 한다는, 주입된 엄마노릇은 자신을 옭아맸다. 지금의 나를 한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이런 것일까. 출판노동자이고, 딸을 둔 엄마이고, 그 이전에 여자이면서 한 인간이다. 이 문장에 나의 정체성이 얼마나 담겨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엄마=모성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나의 다른 정체성을 다 덮어버릴 수도 없고 덮어서도 안 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각각의 내가 그 위치에서 제자리를 갖고 역할을 다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절실하다. 가족 중 누구 한 명의 희생이 없으면 아이를 제대로 키우지도 못하는 그런 사회가 제대로 된 것일 리 없다.
2017-08-07 | hrights | 조회: 54 | 추천: 0
:고귀하지만, 애처로운 꿈 홍미정/ 단국대 중동학과 조교수 ◯ 이스라엘군의 실탄/팔레스타인인의 부엌 칼 팔레스타인 보건부에 따르면, 2015년 10월 1일부터 2016년 2월 21일까지 서안, 예루살렘, 가자 등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181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이 사망하고, 팔레스타인인들의 공격으로 21명의 이스라엘인들이 사망하였다. 1) 팔레스타인인들 전체 사망자 181명 중 155명은 서안 소재 이스라엘 정착촌 근처, 이스라엘 검문소, 분리장벽 근처, 이슬람 성지 동예루살렘에서 대부분 이스라엘군의 실탄 공격으로 사망하였다. 26명은 고립된 가자지역에서 역시 이스라엘의 실탄 공격과 공습으로 사망하였다. 이스라엘인 전체 사망자 21명 중 18명은 모두 서안 소재 이스라엘 정착촌 근처와 동예루살렘에서 사망하였다. 1명은 서예루살렘에서, 2명은 텔아비브에서 각각 팔레스타인인의 칼에 찔려 사망하였다. 이 사건들 대부분은 팔레스타인인들의 거주지역인 서안, 동예루살렘, 가자 지역에서 발생했다. 특히 서안 소재 이스라엘 정착촌 근처, 이스라엘 검문소, 분리장벽, 점령당한 이슬람성지 예루살렘 등 이스라엘 점령과 팔레스타인인들의 고통을 상징하는 곳에서 발생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 팔레스타인 여론: PLO와 PA 불신 1993년 이후, PLO(팔레스타인 해방기구)와 PA(팔레스타인 임시 자치정부, PLO의 일부) 소속 팔레스타인 협상 대표들은 ‘최종적인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협상 결과가 서안, 가자, 동예루살렘 지역에 팔레스타인 국가가 건설’을 할 것처럼 선전해왔다. 그러나 최근 팔레스타인 여론조사 기구가 보여주는 자료는 팔레스타인인들이 더 이상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을 내세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협상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2015년 10월 라말라 소재 팔레스타인 정책과 조사 연구 센터(PCPSR)가 내놓은 여론 조사 자료는 다음과 같다. 2) ▶ 팔레스타인인 80%는 팔레스타인이 ‘제1의 아랍대의’라고 믿지 않는다(사실상, 아랍 국가들은 팔레스타인 문제에 관심 없다). ▶ PLO와 PLO 집행위원회에 대한 팔레스타인인들의 불신이 증가하고 있으며, 67%는 PA가 이스라엘 정착민들의 테러리즘으로부터 팔레스타인인들을 보호한다고 믿지 않는다. 게다가 65%는 PA 수반 마흐무드 압바스의 사임을 요구한다. 51%는 PA 해체를 주장하고, 57%는 무장 봉기를 지지한다. ▶ 팔레스타인인 52%는 두 국가 해결안(이스라엘과 병존하는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생각하지 않는다. 즉 30%는 1948년 이스라엘 국가가 창설된 도시와 마을들(현재 이스라엘 내부)로 난민 귀환권을 획득하는 것이 가장 필수적인 목표라고 생각한다. 13%는 이슬람의 가르침을 적용하는 경건하고 도덕적이며, 종교적인 가르침을 존중하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다. 9%는 팔레스타인인들의 자유와 권리를 존중하는 민주적인 정치제도를 수립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라고 믿는다. ▶ 팔레스타인인 48%만이 1967년 점령지인 동예루살렘, 서안, 가자에서 이스라엘 점령종식과 동예루살렘을 수도로 서안, 가자에 팔레스타인국가 건설을 가장 필수적인 목표라고 생각한다. 이제 팔레스타인인 다수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협상을 통한 두 국가 해결안을 현실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1993년부터 이스라엘-PLO, PA 협상을 실질적으로 이끌어 온 PA 수반 마흐무드 압바스 체제는 심각한 붕괴 위기에 직면한 것으로 보인다. ◯ 1988년 12월 유엔총회 결의: PLO의 팔레스타인 독립선언 승인 1964년 아랍연맹이 후원하여 팔레스타인 민족회의(PNC)가 팔레스타인 해방을 목표로 내세운 PLO를 창설하였다. 1974년 PLO는 유엔 옵저버 자격을 획득한 이후, 현재까지 유엔에서 팔레스타인 단독 대표로서 활동하고 있다(2011년 9월 유엔에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 마흐무드 압바스도 ‘팔레스타인인들의 합법적 단독대표 PLO를 대표하여 연설한다.’고 밝혔다). 3) 1988년 11월 15일 PLO는 알제에서 ‘1967년 이스라엘이 점령한 팔레스타인 땅에서 성지 예루살렘을 수도로 팔레스타인 국가(The State of Palestine) 창설’을 명시하는 팔레스타인 독립선언을 채택했다. 이 PLO의 독립선언을 승인하는 유엔총회 결의(A/RES/43/177)가 4) 1988년 12월 15일 채택되었다. 이 유엔총회 결의는 ‘1967년 이후 점령당한 팔레스타인 영토에 대한 팔레스타인인들의 주권을 확인하면서, 유엔사무총장에게 후속조치를 취하도록 요구’하였다. 이 결의에 대하여 104개 국가가 찬성하였고, 44개 국가가 기권하였으며, 오직 미국과 이스라엘만 반대 투표하였다. 1989년 2월까지 93개 국가가 팔레스타인 국가를 인정하였다. 1989년 4월 PLO 중앙위원회는 야세르 아라파트를 팔레스타인 국가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이 때 PLO가 주도하는 팔레스타인 독립국가가 탄생할 것처럼 보였다. ◯ 1990s 이스라엘-PLO, PA 협상: PLO의 팔레스타인 독립선언 무효화 그러나 유엔사무총장이 팔레스타인 국가 건설을 위한 후속조치를 취하지 않은 상태에서, 1993년 9월부터 미국의 중재로 이스라엘-PLO 직접 협상이 진행되었다. 이 협상 결과 PLO 집행부 일부가 PA를 창설하였다. 이후 PA는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에서 진행되던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 논의를 완벽하게 차단시켰다. 이로써 PLO는 1988년 12월 유엔총회 결의(A/RES/43/177), 즉 ‘팔레스타인 독립선언 유엔 승인’이라는 중요한 성과를 스스로 무효화시켰다. 1993년 이후 20년 이상 계속된 이스라엘-PLO, PA 협상안 어디에도 팔레스타인 국가(State of Palestine)는 명시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따라서 PLO, PA 협상대표들이 협상과정에서 ‘최종적으로 팔레스타인 국가를 건설할 것’이라고 큰소리친 것은 팔레스타인인들을 대상으로 한 희대의 사기극이었다. 현재 팔레스타인인들 대부분은 이스라엘-PLO, PA 직접 협상의 속임수를 완전히 파악하였다. 절망한 일부 팔레스타인인들은 부엌칼을 들고, 핵무장한 이스라엘 점령으로부터의 해방과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이라는 고귀하지만 애처로운 꿈을 꾸고 있다. 1) IMEMC, List of 181 Palestinians & 21 Israelis Killed Since October 1st, http://www.imemc.org/article/75027 2) the Palestinian Center for Policy and Survey Research, Palestinian Public Opinion Poll No (57), 6 October 2015,http://www.pcpsr.org/sites/default/files/p57e%20Full%20text%20%20English%20desgine.pdf 3) HAARETZ, Full Transcript of Abbas Speech at UN General Assembly, Sep 23, 2011 http://www.haaretz.com/israel-news/full-transcript-of-abbas-speech-at-un-general-assembly-1.386385 4) UN General Assembly, Question of Palestine, A/RES/43/177, 82nd plenary meeting, 15 December 1988, http://www.un.org/documents/ga/res/43/a43r177.htm
2017-08-07 | hrights | 조회: 52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