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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립묘지는 제대로 된 삽질이 필요하다 (이상재)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12 14:32
조회
270

이상재/ 대전충남인권연대 사무국장


 

내 신통치 않은 기억력으로도 생각이 나는데 아마 1980년대 중반 정도였던 것 같다.

그즈음 가끔 TV뉴스에 일본 정부가 실시했던 ‘외국인 지문 날인제도’를 거부하는 피켓시위나 기자회견 따위의 장면들이 나왔던 적이 있었다.

뭐 특별한 사회적 문제의식이라곤 거의 없었던 때였다. 매일 학교 가서 그날 주번이 누구인지, 요일, 날짜 등을 치밀하게 계산해서 자리 잡는 것 따위에 온 정열을 쏟았던 복지부동, 무사안일의 시간이 반복되는 시절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외국인 지문 날인제도’에 대해 관심을 가질 리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선생님께서 일본 거주 외국인을 범죄인 취급하며 지문을 등록하는 아주 악랄한 제도라는 설명을 해주셨다. 짧은 순간이나마 차별받는 재일동포의 현실에 설움이 아주 잠깐 복받쳐 왔고, 그때 당시 청소년이라면 누구나 했을 법한 “C8 역시 쪽00다운 짓이야!”라는 말을 뱉으며 극렬한 반일 감정을 지닌 민족주의자로 변하곤 했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그러했듯이 나도 만17세가 되어 동사무소에 가서 주사 아저씨의 친절한 설명에 따라 열손가락을 전부 다 '지문날인’을 하고 말았다.

솔직히 그때 당시야 성인인증을 받았다는 희열에 우쭐함까지 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아침조례 시간마다 펄럭이는 태극기를 바라보며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하고자 다짐했던 대한민국으로부터 예비 범죄자 취급을 당하고 만 것은 사실이었다.

피켓시위를 하던 아저씨 아줌마도, 일본에서의 ‘외국인 지문 날인제도’의 부당함을 설명하셨던 선생님도 열손가락, 특히 엄지손가락은 180도 돌려가며 확실하게 지문 날인을 하며 주민등록증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일본정부를 비판하는 그 엄청난 자신감과 확신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왔던 것일까?

계속적인 반대 운동 때문에 2000년 일본정부는 ‘외국인 지문날인제도’를 완전 폐지했다. 혹시 이전 대한해협을 넘어 간간히 들리는 폐지요구에 대해 이런 속내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을까 싶다. “그래도 우리는 엄지손가락만 한다.”

일본 도쿄 중심가의 황궁 옆에 위치하고 있으며, 도쿄돔 야구장의 2배 크기로 1869년 메이지 천황시절 황군의 혼령들을 위로하기 위해 국가 신사로 지어졌으며 도쿠가와 막부가 무너진 무진전쟁이후 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11개 전쟁 전몰자 중 총 246만여 명이 안치되어 있다고 한다.

이곳의 정문을 들어서면 ‘일본 육군의 아버지’라고 불리 우는 ‘오무라 마스지로’의 동상이 서 있으며 그 오른쪽으로는 가미가제 돌격대원의 동상, 야마토(大和) 전함의 포탄, 군마(軍馬), 군견(軍犬)의 위령탑 등이 즐비해 있으며 그 뒤쪽으로는 “군인칙유(천황이 내린 제국 군인의 덕목) 비석과 유슈칸(遊就館)이라는 일종의 전쟁박물관도 볼 수 있다고 하니 특히 한국 사람으로서는 간담이 서늘해 지는 장면이 아닐 수 없겠다.

이쯤 되면 대강 짐작을 했겠지만 이곳은 그 유명한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에 대한 설명이다. 이곳이 동북아 주변국의 집중적인 관심을 끈 시점은 태평양전쟁의 A급 전범 14명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1970년 후반 이후라고 한다. 그 당시 야스쿠니 신사의 참배가 일본의 침략전쟁 정당화로 이어질 것을 우려한 주변국의 강력한 반발로 인해, 1985년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이후로는 신사참배는 한동안 중단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2001년 취임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때부터 다시 일본의 유력한 우익 정치인들이 꾸준히 신사참배를 강행하고 있어 주변국들의 심한 반발을 불러오고 있다.

서춘은 매일신보와 각종 잡지에 친일 논조를 주장하고 친일잡지 ‘태양’을 만든 대표적인 친일언론인이었고 김창룡은 만주에서 독립군을 잡았던 일제관동군출신으로 백범 김구선생 암살의 명백한 혐의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 유학성은 12.12쿠데타의 핵심인물로 1997년 전두환, 노태우와 함께 반란모의참여, 반란중요임무종사, 내란모의 참여 등의 죄목으로 6년 실형을 선고 받았지만 대법원 확정판결 2주전에 사망하고 만다.

세 사람의 공통점은 모두 사후 국립묘지에 묻혀 있다는 것이다.(서춘의 묘는 독립유공자 서훈취소 8년만인 2004년에야 국립묘지에서 이장되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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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일을 맞아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돼 있는 유학성 전 의원의 묘지앞에
국군기무사령관(오른쪽 4번째) 등 이름으로 놓인 조화(2007년)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일본 정부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한반도 일제 강점과 태평양 전쟁으로 인한 상처가 여전히 상존하고 있는 현실에서 후안무치(厚顔無恥-얼굴이 두꺼워 부끄러움이 없다.)한 행위임에 틀림없으며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의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광복 60년을 훨씬 넘긴 이 시점에서도 일본 고위관료들에 의해 여전히 무슨 월별행사처럼 침략전쟁 정당화 발언과 위안부 등에 대한 망언이 터져 나오는 참담한 현실 앞에 우리는 놓여있다.

국립묘지(國立墓地)란, 나라(國)에서 세운(立) 묘지(墓地)를 말한다.

친일파와 내란죄로 유죄를 받은 자를 국립묘지에 눕혀놓고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비판하는 우리의 자화상은 왠지 서글프기까지 하다.

오히려 일본의 한반도 강점에 대한 ‘확신범적인’ 당당한 태도는 우리가 빌미를 제공한 것이 아닐까? 하는 확신에 찬 의구심을 가져본다.

마지막 임시정부요인이셨던 조경한 선생은 1993년 임종에 앞서 “친일파가 독립유공자로 바뀌어 함께 묻혀있는 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에는 절대 가지 않겠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나라에서 세운 국립묘지에 나라 팔아먹은 자와 반란 가담자가 버젓이 누워있는 신비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광복 67주년을 넘긴 이 시점에서도 여전히 과거사에 대해 혼란스러운 것은 우리의 현대사가 질곡의 순간마다 파내야 될 것을 파내지 못한 ‘삽질’의 역사였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대한민국의 국립묘지는 제대로 된 삽질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