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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스타일’과 애국주의 (임아연)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12 14:36
조회
185

임아연/ 당진시대 기자


 
불편했다. 승승장구하는 싸이가 배 아파서는 아니다. ‘강남스타일’이 나오기 이전부터 미친 듯이 논다는 싸이 콘서트에서 소리지르고 날뛰면서 놀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모든 대중이 환호하고 박수를 치는 일에 심통(?)부리는 마음이 생겼다. ‘왜?’라는 물음보다 설명하기 힘든 불편함이 앞섰다. 그러다 어느 한 시점이 지나고 나서야 내가 사람들처럼 마냥 환호하지 못하는지 뒤늦게 답을 찾곤 했다. (아, 나는 정말 날카롭지도, 예민하지도 못하다.) 이번에도 역시 얼마 전 싸이의 시청 공연 실황을 중계하는 방송을 보고 알았다. 어떤 지점을 내가 불편해 했는지 맥이 짚이는 공연이었다.

공연에서 싸이는 ‘대한민국의 싸이’임을 강조했다. 인사도 그랬고 애국가로 시작한 공연코드 자체가 그랬다. 마침 그날의 풍경은 2002년 월드컵을 닮아 있었다. 군데군데 태극기가 휘날리는 모습은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그날’의 환희를 재현하는 듯 했다. 아마도 싸이와 놀기 위해 자리에 모인 사람들 역시 인파 속에서 10년 전 추억에 잠겼을 것이고, ‘대한민국’을 외쳐 부르던 그날을 기시감으로 느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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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4일 밤 가수 싸이가 8만여명(경찰 추산)의 시민이 몰린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나는 싸이 ‘강남스타일’의 성공을 대한민국과 연결 짓는 게 불편했다. 그의 노래가 한국의 전통을 알리는 노래도 아닐뿐더러 ‘대한민국’이 그의 노래가 탄생되기까지 하등 도움을 준 게 없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이 그에게 준 건 기껏해야 두 개의 군번 뿐. 그로 인해 수많은 예비역들에게 ‘화끈한 대한민국 남자’로 각인된 이미지 정도일 테다. 한국 사회에서 견고한 리그를 형성하고 있는 예비역들을 팬들로 끌어안을 수 있었다는 게 그의 성공에 장점이 될 수 있었을 런지 모르겠지만, 이것 역시 전적으로 싸이 개인의 선택이었지 대한민국이 그의 성공을 도운 건 아니었다.

김연아가 피겨로 성공하기까지, 대한민국은 스케이팅 훈련을 위한 인프라 구축은 고사하고 그에게 스케이트 한 켤레 사준 적 없으면서 김연아를 대한민국과 등치시키는 것조차 거부감이 들곤 했다. 하물며 국가대표도 아닌 싸이를 국가대표화 하는 이 끈질긴 애국주의가 지겹다. ‘대~한민국’에 울컥하는 대중의 심리를 이용하는 언론도 그렇고, 그걸 이용해 마케팅 하는 소속사도 마찬가지다.

며칠 전 김장훈과의 불화설이 불거졌을 때, 김장훈 역시 싸이를 ‘애국해야 하는 사람’으로 표현했다. 아직까지도 애국은 대한민국을 세계에 알려 나라의 이름을 드높이는 일이라고 여겨진다. 한국이 동아시아 변방의 알려지지 않은 나라였을 때 쓰이던 구호가 여전히 사용되고 있다.

지난여름 내한한 레이디가가와 에미넴, 혹은 마이클잭슨 등 수많은 세계적 해외 뮤지션들이 그들의 공연에서 미국인임을 자랑스러워하며 당당하게 ‘아메리카 만세’를 외쳤다면 지독한 미국우월주의자로 비난받았을 게 분명하다. 뮤지션들이 공연에서 자신의 국적을 강조하지 않는다고 해서 대중들이 그들의 국적을 모르는 게 아니며, 애국심에 기대어 그들을 판단하지 않는다. 대중들은 어떤 아티스트이건 그들의 음악과 퍼포먼스를 기대할 뿐이다.

싸이 ‘강남스타일’의 성공은 트렌드인 일렉트로닉 음악과 우스꽝스러운 뮤직비디오 안에 담긴 문화적 코드가 대중의 요구와 맞아 떨어진데다, SNS와 유투브 등 정보통신 발달에 힘입어 뮤직비디오가 국경을 초월해 순식간에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그 안에 어떤 국가적 메시지가 있거나 애국주의 코드가 담긴 것은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국가적 정체성을 의도했었다면 촌스러웠을 뿐, 전 세계 대중들로부터 이렇게 각광받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한국인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성과를 가져왔을 때, 아직도 한국 사회는 습관적으로 국가와 연결 짓고, 애국을 운운한다. 삼성의 제품이 세계에서 인정받는다 한들 삼성이 ‘애국’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야 한다. 인종과 국적을 초월해야 한다. 이제는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국가’라는 허상을 깨야 할 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