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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폭력 대응과 성폭력 대응, 닮아도 너무 닮았다 (허창영)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7-12 14:37
조회
172

허창영/ 광주교육청 민주인권교육센터, 전임 간사




이 세상에 범죄에 대해 관대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을까?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빵가게의 빵을 훔친 정도의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불의에 분노하고 악행에 치를 떤다.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행사된 폭력에 대해서는 특히 민감하다. 인간의 존엄함이 폭력에 의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결과 앞에서 우리는 모두 감정의 북받침을 느낀다. 그 감정들을 추스르기 위해서는 몇 번이고 가슴 깊이 숨을 들이마셔야 한다. ‘죄는 용서할 수 없지만 사람은 용서 할 수 있는’ 정도의 경지에 오르려면 상당한 수양이 필요하다.

그런데 사람들의 이런 분노감정을 놓고 흥정놀이를 하는 집단이 있다. 학교폭력(학생 간 폭력)과 성폭력으로 재미를 보고 있는 이들이 그렇다. 지난해부터 세간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학교폭력 문제의 전면에는 늘 고통 받고 있는 피해자들을 내세운다. 성폭력 문제도 마찬가지다. 이토록 고통 받고 있는 피해자들이 있는데, ‘가해자에 대한 온정주의가 웬 말이냐’는 식이다. 대책이라고 내놓는 것들에 대해 비판이라도 할라 치면 ‘가해자의 인권만 생각한다.’라거나 ‘네 자식도 당해봐야 한다.’는 험한 말로 대꾸한다. 인간의 존엄함을 짓밟은 폭력 앞에서 서슬 퍼래지는 전형적인 인간의 모습들이다.

개인이야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합리적 대안을 내놓아야 할 의회나 정부기관들조차도 마찬가지다. 학교폭력과 성폭력을 근절하겠다며 호들갑은 떨고 있지만, 그 내용들이 국민의 분노감정에 기댄 한심한 수준이다. 학교폭력에 대해서는 학생생활기록부에 기재한다거나 초기부터 경찰이 개입해 엄벌하겠다는 식의 접근이 대세다. 성폭력에 대해서도 전자발찌를 강화하고 화학적 거세를 해야 한다고 얘기되더니 급기야 물리적 거세까지 제안되고 있다. 문제를 저지른 개인에게만 책임을 묻겠다는 지극히 전근대적인 처벌위주의 접근 방식이다.

극악무도한 개인만 제거하면 인류가 평온할 것이라는 증명 불가능한 정책을 쏟아내면서도 무책임하지는 않은지에 대한 일말의 성찰도 없다. 개인의 분노감정만 자극할 뿐 문제의 본질을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 정부기관에 의해 ‘대안’이라는 웃지 못 할 이름으로 버젓이 자행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정작 이러한 정책들로 학교폭력과 성폭력이 해결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범죄와 관련해 늘 등장하는 애꿎은 CCTV처럼 ‘엄벌’이라는 단어를 잘 팔아먹는 것에만 관심을 보일 뿐이다. 분노한 개인들의 감정을 추스르게 할 빠른 약 처방으로 위기상황을 극복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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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뉴스1


왜냐하면 그들은 정작 문제의 본질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문제의 본질을 보자면 결국 스스로의 문제점을 파헤쳐야 하는 상황에 부딪힌다. 학교폭력이 발생하는 구조적인 문제, 왜곡된 교육구조가 사람을 어떻게 피폐하게 만드는지를 드러내야하기 때문이다. 이를 감추기 위해 철저하게 개인의 문제로 돌린다. 학교에 적응하지 못한 학생, 가정에서 또는 심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학생으로 치부하면서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교육구조가 갖는 문제는 교묘히 회피한다. 성폭력 역시 지극히 남성중심의 가부장적인 사회구조 속에서, 남성이 주류인 권력의 관점에서 성폭력이 어떻게 인식되고 있는지를 고백해야하는 문제를 회피한다. 그저 정신 나간 어떤 남성의 문제로 적당히 선긋기 한다. 심지어 어떤 여성 의원이 물리적 거세를 운운하면서도 그것이 남성 중심적 정책이라는 일말의 의심도 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지 않은가.

학교폭력의 본질적 문제는 교육에 있다는 점을, 성폭력의 근저에는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사회구조가 존재한다는 점을 고백해야 한다. 그렇지만 고백은 문제를 해결하는 출발점에 지나지 않는다. 출발점에서부터 차근차근 필요한 대안들을 토론하고 지혜를 모아야 한다. 지금의 상황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출발점에 서지도 않은 상황이다. 그러니 학교폭력도 성폭력도 해결방안을 찾는 일은 현재로서는 요원한 일이다. 지금의 상황을 그냥 둔다면 둘 다 판박이처럼 닮은 정책들만 쳇바퀴 돌 듯 반복할 뿐이다. 말만 무성하고 떡고물은 딴 놈이 먹을 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