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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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이동화(아디 활동가),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 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강국진/ 서울신문 기자   정부 고위공무원인 A 씨는 틈날 때마다 자리를 옮길만한 곳을 알아본다. 요즘 들어 부쩍 ‘언제 옷을 벗어야 할까’ 불안하다. ‘차라리 7급에서 시작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고 후회하기도 한다. 그는 이제 50대 초반이다. 한창 일할 수 있는 나이다. 20년 넘게 일해 전문성도 있다고 자부한다. 등산이나 하며 늙기엔 눈이 너무 높아져 버렸다. 더구나 둘째는 이제 대학생이 된다. 십중팔구 그는 산하기관이나 유관업체로 재취업할 것이다. 세상은 그를 ‘관피아’라고 부른다. A 씨는 주변에서 만나거나 들은 고위공무원 사례를 조합해 가상으로 구성한 인물이다. 최근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고위공직자가 퇴직 뒤 산하기관에 취업하는 관행을 뿌리 뽑아야 한다는 주장이 높아지고 있다. 관료와 마피아를 합성한 ‘관피아’란 신조어도 유행한다. 하지만 틀어막으려는 논의만 활발할 뿐 근본원인을 진단하는 노력은 미흡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산하기관 재취업 문제는 사실 정부에서만 나타나는 문제는 아니다. 임원승진에 실패한 대기업 간부가 명예퇴직 뒤 협력업체로 자리를 옮기는 건 상식이 된 지 오래다. 유독 한국과 일본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점도 특징이다. 하나같이 계급제 문화가 강력하다. 후배를 위해 선배가 물러나야 한다는 ‘용퇴’ 관행도 있다. 정년을 채우지 못하고 물러나는 선배에게 생계수단을 보장해주는 것은 결국 조직 전체를 위한 과제가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공직사회에 대해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먼저 우리는 신분보장도 없고 노동 유연성도 극대화하는 대신 공인으로서 의무를 요구하지 않는 방식이다. 이런 방식에선 '관피아'라고 비판할 필요도 없고 그런 비판을 하는 것 자체가 명예훼손이 될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모델은 공공부문에 존중과 신분보장을 주고 그 반대급부로 사익추구를 강력히 규제하는 방식을 선택할 수 있다. 이 방식에선 공무원들에게 적절한 (십중팔구 높은 수준으로) 급여를 줘야 하고 정규직 위주로 정년을 보장해줘야 한다. 우리는 신분보장은 약화시키면서 동시에 사익추구 금지만 강화하자고 요구하고 있다. 이는 여성인권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남편을 따라죽을 선택권'을 옹호하는 것만큼이나 자기모순이다. 일전에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이계수 교수가 지적했듯이 “고위공무원단과 개방형 임용제도에서 보듯 ‘경영마인드’라는 이름으로 유연화 경향이 뚜렷해지면서 공무원 신분 자체는 갈수록 ‘회사원’과 비슷해지는 반면 각종 의무는 ‘공직자’ 기준을 요구하는 모순”을 되돌아봐야 한다. 그는 “현 제도에서는 줄 세우기와 사익추구를 막을 방법이 없고, 심지어 정치적 중립도 위협받는다”고 지적한다. 공무원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대표하는 게 이른바 철밥통 담론이다. 여기에는 “하는 일 없이”, “정년보장도 되면서”, “임금삭감도 안 하는” 기득권층이라는 비난 혹은 질시를 담고 있다. 민간영역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노동조건 악화와 비정규직화 등으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이 정규직이고 정년보장까지 받는 공무원을 향해 돌을 던지게 하는 건 아닐까. 사진 출처 - 서울신문 철밥통 담론을 구성하는 세 가지 논거는 달리 생각할 여지가 너무 많다. 하는 일 없다는 비판에는 민원처리 비효율이나 시간외수당에서 나타나는 도덕적 해이 등이 자리 잡고 있다. 물론 모든 공무원이 노동 강도가 강하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취재 과정에서 만나본 공무원들 상당수는 꽤 많이 일한다. 특히 중앙부처 간부들 중에는 주말에 제대로 쉬지도 못하는 ‘저녁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이 상당수다. 공무원들이 받는 시간외수당 역시 민간기업과 비교하면 매우 낮게 책정돼 있다. 공무원연금도 비판 대상이다. 장기적으로 공무원연금을 개혁하거나 국민연금과 통합시켜야 한다는 데 찬성하는 편이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대목도 있다. 공무원들은 퇴직금을 받지 않는다. 지금이야 공무원 평균임금이 대기업에 근접하는 수준까지 올라갔지만, 외환위기 이전만 해도 공무원들은 박봉에 시달렸다. 높은 공무원연금보장은 낮은 임금에 대한 반대급부였다. 공무원에게 정년을 보장하고 적절한 신분보장을 하는 건 역사적인 맥락을 따져봐야 한다. 막스 베버가 지적했듯이 신분을 보장하는 직업공무원을 근간으로 하는 근대 관료제가 형성된 이유는 전문성과 소명의식, 그리고 무엇보다도 부패방지와 정치적 중립을 보장하기 위해서였다. 우리 헌법 역시 정치적 중립을 위해 공무원 신분보장을 규정한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정년보장은 오히려 민간에서 확대해야 할 문제다. 민간기업에서 신분보장이 악화하니까 공무원 너희도 신분보장 받지 말라고 하는 건 ‘자해공갈’이자 ‘바닥을 향한 폭주’일 뿐이다. 우리는 왜 이토록 공무원을 비난하고 정부를 불신하는가. 가장 큰 이유는 당연히 정부가 제구실을 못 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대한민국 공무원을 대표하는 대통령이 마치 자기는 공무원 아닌 척 공무원들을 비난하고 욕보이는데 우리가 부화뇌동해야 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세월호 참사 과정에서 나타난 정부의 부실과 난맥상은 백번 비판하고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 목적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제대로 된 정부’를 만드는 것인지, ‘나는 사오정 오륙도 걱정하는데 자기들만 정규직에 정년 보장되는 공무원’을 때려잡아서 하향 평준화하자는 것인지 분명히 구별할 필요가 있다. 공직 개혁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공공성과 ‘국가의 역할’ 회복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 서둘러 정책 발표하면 ‘졸속행정’이라 비난하다가 신중하게 정책 검토하면 ‘늑장행정’이라 욕하는 방식으로는 우리가 원하는 ‘좋은 정부’를 만들 수 없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224 | 추천: 0
홍성준/ 투기자본감시센터 사무처장   1. 이완용 이래로 정책 실패를 저지른 관료는 법적, 정치적, 역사적 처벌을 받지 않았다. 투기자본감시센터는 지난달 말, 전 현직 경제관료(일명, 모피아) 5인을 검찰에 고발했다. 주요한 혐의는 두 가지인데, 그중 하나가 2003년 투기자본 론스타에게 외환은행을 매각하는 과정과 그 이후 론스타에게 특혜를 주고 국가에 큰 손해를 입혔다는 것이다. 그동안, 외환은행 매각과정에서 불법성 즉, 사모펀드에게 예외승인을 한 것이 불법이 아닌가, 외환은행의 부실은 조작된 것이 아닌가, 론스타는 자본시장법 상의 금융주력자인가, 등등을 제기해 왔다. 반면에, 이번 고발을 통해 규명하고자 한 것은 당시 경제 관료들이 론스타에게 외환은행을 매각하면서 국가를 상대로 사기를 치고, 천문학적인 손해를 입힌 행위를 규명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묻고자 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2003년부터 2006년 사이, 정부가 수출입은행과 한국은행을 통하여 소유한 국유재산인 외환은행 주식 1.6억 주인 43.17%를 보유한 최대주주로서 경영권을 단 돈 1,667억 원에 팔아치운 사기 사건으로, 국가에게 총 1조 7,426억 원의 손해를 입힌 행위에 대해 책임을 묻는 것이다. 2003년 국가보유 주식가를 저가로 결정, 콜옵션, 드래그 얼롱 등을 담아 국가를 상대로 사기를 친 내용으로 론스타와 계약을 맺었고, 이것을 당시 재경부 금융정책국장인 변양호가 주도했다. 더 하여, 주요 공범은 금융감독위원회 감독정책 제1국장 김석동과 재경부 경제협력국장인 임영록이다. 변양호가 금융정책국장을 그만 둔 뒤인 2004년에는 김석동이, 2005년에서 2006년 사이에는 임영록이 금융정책국장을 이어 받아 계약대로 론스타에게 국유재산을 퍼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도 묵인한 자들도 있다. 2003년도 당시의 재경부 장관 김진표와 수출입은행의 행장인 이영회 등이다. 그렇다면, 국가를 상대로 사기를 치고, 천문학적인 손해를 입힌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그들은 제대로 처벌받지 않았고, 승승장구하고 있다. 변양호는 2005년 “보고펀드”라는 사모펀드를 조성해서 금융시장의 큰 손이 되었다. 펀드의 이름은 “해상왕 장보고”에서 따 왔다는데, 외국자본에 맞서는 “토종” 펀드라는 것이다. 불쌍한 노예를 구출하고자 해적들과 싸운 장보고를 생각하면 참으로 가소로운 이름이다. 동료 파트너로 리먼 브라더스 한국 대표이던 이재우와 모건 스탠리 한국지사 기업금융부문 대표이던 신재하, 2010년에는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 박병무가 합류했다. 보고펀드가 대주주로서 경영에 참여하거나 경영권을 인수한 기업은 동양생명보험, 노비타, 아이리버, LG실트론, 비씨카드, 한국 버거킹 사업을 운영하는 BKR, 미국 셰일오일 및 가스를 생산하는 아나다코, DSLR용 카메라의 교환렌즈를 생산하는 삼양옵틱스, 대표적인 온라인 모바일 쇼핑 가격비교서비스인 에누리닷컴 등이며, 총 운용자산 규모는 2014년 1분기 말 기준으로 약 2조 원에 이른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보고펀드에 최초로 투자된 자금의 성격이다. 그가 과거 재경부 관료로서 관리하던 시중은행으로부터 고가의 수수료를 챙기며 거액을 투자받은 것이다. 이것은 국회 국정감사에서도 밝혀진 사실이다. 김석동도 그 후, 관료로서 승승장구하여 2007년 재정경제부 1차관을 지냈고, 고액 연봉 시비가 일었던 농협의 경제연구소 대표를 역임했다. 정권이 바뀐 후에도 다시 고관대작이 되었는데, 2011년에서 2013년까지 금융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금융위원장 시절 기억에 남는 것은 두 가지 일이다. 하나는 저축은행 부도파산이 현실화 되는 시점에도 그런 현실을 오도하며 저축은행사태 피해자들을 우롱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론스타의 먹튀를 승인하여 그들이 4조 원을 챙겨 한국을 탈출하도록 조력했다는 사실이다. 임영록 역시 그 후, 관료로서 승승장구하여 2007년 재정경제부 2차관을 지냈다. 그리고 그 기간에 저축은행 사태가 잉태되고 있었다. 2002년 상호신용금고는 저축은행으로 이름을 바꿨다. 2005년 12월 금융당국은 감독 규정을 바꿔, 사모투자펀드 투자 등을 확대할 수 있도록 했다. 여신비율 8%이하, BIS비율 8%이상인 저축은행을 우량은행으로 규정한 '88클럽'에 해당하는 곳에 대규모 대출이 가능하도록 허가했고, 저축은행 간 인수 합병을 가능케 해 덩치를 불릴 수 있도록 했다. 이후 부동산 경기가 좋아지면서 저축은행은 부동산 PF대출에 대거 뛰어들게 된다. 이 과정에서 퇴직한 금융당국 고위 관료들이 저축은행의 고문, 감사, 주주가 되었다. 그 결과 감독 기능은 무력화되고, 2011년 저축은행 사태가 발생했다. 저축은행의 대주주들과 퇴직해 ‘낙하산’으로 저축은행에 들어온 금융관료들이 공모해서 저축은행의 자본금 2조 1,680억 원 이상을 불법 대출 등으로 빼돌렸고, 그 결과 저축은행은 부실해졌고 무수히 많은 피해자들을 양산했다. 저축은행사태 피해자들은 평균 나이가 63세이고 평균소득 115만 원의 가난한 시민들로, 그들은 노년의 삶을 통째로 강탈당한 것이다. 예금자보호한도인 5,000만 원을 넘는 피해금액은 1인당 평균 540만 원 정도이다. 지금까지도 어떤 정부기관도 나서서 피해구제를 하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최근에는 저축은행 사태를 당하여 저항했던 피해자들을 검찰이 기소하여 처벌을 노리고 있다. 반면에, 저축은행 대주주들과 결탁해서 뇌물수수 비리를 저지른 정치 권력자들, 금융관료들에게 사법당국은 무죄 방면과 면죄부를 주고 있다. 아무튼, 그런 임영록이 현직 경제 관료로서 자신의 후배인 금융위원회 위원장 신제윤에 의해 낙하산으로 KB금융지주의 회장이 되었다(이 건으로 신제윤도 고발). 임영록이 2013년 6월 KB금융지주의 회장이 된 이래로 국민은행에서는 끊이지 않고 대형 금융사건이 일어나고 있다. 그 중 압권은 대량의 “개인정보 유출” 사건일 것이다. 지금도 전산시스템 교체 문제로 내부 갈등 중이다. 2003년 론스타와의 외환은행 주식매각 계약에 관련 된 조연급들의 다른 인물들을 보면, 그들도 위에서 거론한 자들처럼 별 일 없이 잘 산다. 먼저 박승 한국은행 총재는 중앙대학교 명예교수로서 지금도 존경을 받는 경제계의 원로로 대접을 받으며 편안한 노년을 보내고 있고, 이영희 수출입은행장은 아시아자산신탁 대표이사회장을 지내는 등 금융계의 큰 손이며, 김진표 재경부 장관은 야당의 유력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후, 대한민국에서 뜨거운 ‘이슈’는 소위, “관피아(관료+마피아)”일 것이다. 지금 언론과 대통령, 정치권, 입 달린 모든 사람은 “관피아”를 말하고 있다. 물론, 사람 사는 세상에서 ‘끼리끼리’ 패거리를 지어 이익을 챙기는 짓은 흔한 일이다. 그런데, 국가를 대신해서 권력을 행사하는 관료가 민간의 특정 자본가(또는 집단)와 결탁해서 사익을 챙기는 짓을 하는 것은 범죄이다. 범죄인데도 두루뭉술하게 “정책 실패”라고 고상하게도 말 한다. 아무튼, 그 결과 국가와 사회, 노동자와 시민들에게는 큰 손해를 입힌다. 더욱이 심각한 것은 그런 범죄가 반복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지난 100년 동안 한국의 역사에서 “정책 실패”를 저지른 관료들은 제대로 처벌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관료들은 뇌물을 직접 수수하지 않는 한 법적인 처벌을 받지 않는다. 정치적으로도 대통령이나 선출된 정치인은 권력을 잃으면 비판을 받거나 처벌을 받지만, 익명의 관료들은 정치권력이 교체되면 그냥 망각되고 그 지위를 유지하며 별 일 없이 잘 산다. 당연히 역사적인 처벌도 없다. 막연히,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군부 독재 시대, 신자유주의 시대가 나쁘다고 한다. 그냥, 사회구조 탓, 세월 탓을 한다. 구체적으로 누구누구가 그러한 정책실패 - 범죄를 기획하고 집행을 하여, 무수히 많은 피해자들을 양산했는지, 실명을 거론하며 단죄하는 역사책도 거의 본 적이 없다. 만약에, 그들의 이름을 거론하며 처벌을 요구하면, 저급한 행동인 것으로 말해지거나, 싸구려 “음모론”으로 취급당하기도 한다. 그나마 실명이 거론되는 것이 일제 강점기 식민지 관료였던 “친일파”다. 하지만, 구체적인 범죄사실을 적시하기도 어렵고, 그 범죄의 결과로 그 후손이 지금 사회적으로 여전히 지배계급의 지위에 있다고 말하는 순간, 정치권의 흔한 정쟁거리 이거나 술자리 안주로 전락하기 쉽다. 그러한 한국에서 관료들은 선출되지 않는 대한민국의 영원한 주인으로 남은 것이다. 앞에서 거론한 자들은 그들 중 일부이며, 그 나마도 드라마나 영화의 소재가 될 만큼 유명한 사건을 저질렀기에 이 정도의 추적과 고발이 가능한 것이다. 어떤 과오에도 제대로 처벌받지 않는 한국의 관료 신화는 이제 깨져야 한다. 동양그룹 사태와 관련한 5개 회사의 제2차 관계인집회가 열린 지난 3월 21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제3별관에서 ‘동양사태’ 피해자들이 집회에 참관하기 위해 접수를 하고 있다. 이날 회생계획안은 담보 채권액 95%, 무담보 채권액 69%의 채권자 찬성으로 가결됐다. 사진 출처 - 한겨레 2. “관피아” 개혁은 누가 할 수 있을까?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난 4월, 국회 정무위원회에서는 금융정책, 금융감독체계 개혁을 둘러싸고 한편의 “막장 드라마”가 있었다. 이 이야기는 2012년 11월 9일, 투기자본감센터가 여의도 점령운동을 함께 했던 여러 단체들과 준비한 “금융소비자위원회 독립설치”와 “금융정책감독기구의 민주적 개혁”을 위한 두 가지 법률안을 당시 민주당 김기준 의원 등이 발의한 것에서 시작된다. 중요한 것은 이 두 가지 법률을 준비한 주체인데, 금융피해자 단체들과 금융권 노조, 금융관련 시민단체들이 그들이다. 서로의 다른 입장을 넘어 금융시스템의 소외자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6개월 여간 치열한 내부 토론을 통해 정리한 것을 법안에 담았다. 한마디로, ‘금융수탈을 당하는 99%가 1%를 위한 금융시스템에 침투해서 싸우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왜 민주당인가 하면, 당시 문재인 대통령 후보의 공약으로 그 법안의 내용이 채택되어 대통령선거에서 쟁점이 되길 희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대통령선거에서 금융관련 쟁점 자체가 부재한 이유로 부각되지 못했다. 2013년 1월에서 2월 경, 현 박근혜 정권수립 당시 정부조직 개편과 맞물려 다시 부각되길 희망했지만, 금융관료들의 “금융부 신설”과 현 금융감독원을 분리해 금융위원회 산하에 “금융소비자원”을 설치하자는 안을 제기하여 그것을 저지하고자 노력했다. 그 이유는 그 안이 금융관료들의 이해와 욕망을 노골적으로 담은 것이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금융소비자 보호 기구를 두는 목적이 무엇인가! 탐욕스러운 금융자본과 부패무능한 금융관료로부터 금융소비자를 보호하자는 것이다. 그런데도, 뻔뻔하게 금융소비자 보호 기구를 금융관료 자신들이 장악하겠다는 것이다. 개혁의 대상이 개혁의 주체로 나서는 역겨운 법안이다. 그렇기 때문에 투기자본감시센터 등 여론의 반대로 무산되면서 다시 사라졌다. 아무튼, 그런 논쟁 속에서 금융수탈을 당하는 99%가 주도적으로 제기한 최초의 금융감독기구 개혁법안은 주목받지도 못했고, 결국 잊혀졌다. 그러던 중, 2013년 10월 이후 “동양그룹 사태” 발생으로 다시 금융소비자 보호기구 설치에 대한 필요성이 부각되었다. 그러자, 금융관료들이 새누리당을 통해 새롭게 관련 법안을 내놓았다. 기존의 것에서 “금융부 신설”은 제외하고, 금융위원회 산하에 “금융소비자원”을 설치하자는 원래의 법안을 다시 제안했다. 한편,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민주당의원(이후, 새정치연합)들도 관련 법안을 경쟁적으로 발의했지만 별로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결국, 어떤 법안도 통과하지 못한 상태에서 해를 넘겼다. 그런데, 2014년 2월, 김기식 의원이 새누리당의 안, 즉 금융관료들의 안을 받자고 주장하고 나섰다. 전해서 들은 이유는 납득이 잘 가질 않는데, 대강 “동양사태”로 여론이 비등하니 일단 금융소비자기구를 어설프게나마 만드는 것이 국회의 도리(?)라는 것이다. 금융관료의 법안 내용을 보면, 형식적으로는 “쌍봉형” 체계를 하고 있지만, 현 금융위원회 산하의 금융감독원을 둘로 쪼개 금융소비자원을 신설하자는 것에 불과하다. 금융소비자위원회의 구성에서도 인사권을 모피아들이 행사하게 한 것, 금융소비자위원회가 법안조차 발의를 하지 못하고, 법이나 시행령의 하위개념인 “규정의 개정 권한”만 가지는 것 등의 문제가 드러난다. 한마디로, 개악이었다. 철저하게 금융관료들의 이해와 욕망의 법률안이 김기식 의원의 찬성으로 상정되어 표결을 통해 정무위원회 통과를 목전에 두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 김기준 의원 등이 격렬히 반대하였고, 김기식 의원은 자신의 주장을 일단 철회하였다. 그 결과, 국회 정무위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해당 금융관료들의 법률안은 다룰 수 없게 되었다. 3월에 들어서자 기존의 민주당 의원들의 법률안들을 이종걸, 민병두 의원의 법안 중심으로 통합해야 한다는 새정치연합 내의 입장이 정리되었다. 그런 강한 압력이 김기준 의원에게 들어오자, “금융소비자위원회 독립설치”와 “금융정책감독기구의 민주적 개혁”을 위한 두 가지 법률안은 확실하게 폐기하게 된다. 나는 화가 나서 물었다. “왜, 하필, 금융에 대해 문외한이 만드는 안을 중심으로 통합되어야 하는가?”, “또, 아직 완성된 법안도 아닌 이종걸 안을 중심으로 당론을 정하는 것은 웃기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이에 대해 의원실 관계자는 “당에서 공천 줄 때는 금융전문가이지만, 국회에서는 초선 의원은 다선 의원의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이란다. 국회도 결국 ‘짬밥 순’인가! 웃기는 것은, 4월 14일, 새정치연합 의원들이 그 때까지도 성안이 되지 않았던 이종걸 의원 안을 지지한다고, 일부 노조와 피해자 단체 대표를 국회로 불러서 기자회견까지 열었다. 그중에 일부는 투기자본감시센터와 함께 앞에서 말한 “금융소비자위원회 독립설치”와 “금융정책감독기구의 민주적 개혁”을 위한 두 가지 법률안을 준비한 주체도 있었다. 그런 기자회견에 내용도 살피지 않고 얼굴 내미는 정신없는 노조 위원장과 궁박한 상황의 금융피해자 단체 대표도 한심하지만, 이러한 처지의 사람들을 자신들의 정치수단으로 이용하는 새정치연합 의원들이 더욱 나쁜 놈들이다. 시민사회와 정치권이 이런 관계라면, 민주주의는 “개똥”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더욱 화가 나는 것은, 끝내 이종걸 안은 성안되지 않았다. 그러자, 금융관료들의 안을 받기로 새정치연합의 당론이 정해졌다는 것이다. 그 날이 세월호 참사 와중인 4월 28일이다. 금융관료 안의 통과를 목적으로 정무위원회 범안심사소위원회를 열겠다는 것이다. 결국, 같은 당 소속 김기준 의원의 공개적인 반발로 당일에 상정되지는 않았다. 일단, 다행이다. 하지만, 나는 국회 정무위원회 새정치연합 의원들을 여전히 ‘감시’ 중이다. 나는 평소, 부패 무능한 관료들이 패거리를 지어서 사익을 추구하는 행위를 막을 자는 ‘선출된 정치인’이라고 생각했다. 상식적으로 볼 때, 시민들에게 선출된 정치인이 관료를 통제할 권위를 가지는 것은 ‘민주주의에 부합’된다고 본다. 또한, 무수히 많은 관료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선출직 정치인이 더욱 많아져야 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확장’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내 소신이다. 그런데, 지난 4월,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일어난 소동을 볼 때, 이 말이 맞을까? 자신들의 이해와 욕망을 추구하는데 능수능란한 자들이 관료들이다. 그들에게 처음 포섭된 것은 박근혜 대통령과 여당인 새누리당이다. 그리고 이에 대항해야할 야당인 새정치연합도 포섭되었다. 아마도 그 포섭의 기술은 오랜 세월 금융정책을 주물러 온 “경험”, “금융자유화” 같은 교활한 논리일 것이다. 이 기술이 경험이 부족한 국회의원들, 자유주의 정치를 지향하는 여야의 정치인들을 포섭한 것이다. 관료들이 여야 가릴 것이 없이 이런 식으로 대한민국 건국 이래 60여 년 동안 선출된 정치인들을 포섭하고, 민의를 우롱했다는 생각을 하니 기가 막힐 뿐이다! 우리사회는 “정치개혁”이란 미명으로 선거 때마다 정당들에게 대규모 의원 “물갈이”를 요구해 왔었다. 또, 미사여구를 늘어놓는 “자유주의” 정치인을 지지해왔다. 그런 것을 목적으로 시민운동을 하는 단체들도 있다. 그 결과, 경험이 미숙한 초선 국회의원을 양산했다. 숨어 있는 관료의 위험성은 보지도 못하고, 모든 책임은 여당 또는 야당, 대통령이라는 식의 정쟁에 익숙한 정치인들만이 국회를 장악했다. 그런데, 세월호 참사 이후, 그런 정치권이 “관피아”를 개혁한다고? 난 정말 모르겠다. 그런 수준의 정치인만 선출하는 시민사회가 미숙한 것인지, 선출된 정치인들을 가지고 노는 관료들이 시민사회보다 더 영악한 것인지... 분명한 것은 우리사회 곳곳이 ‘세월호’라는 것이다. 위험한 자본과 부패한 관료들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더는 미숙하고 질 낮은 정치인을 선출하면 안 된다. 우선은 시민사회부터 관료를 통제하는 방법, 자본을 통제하는 방법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막강한 관료와 자본에 맞서서 자신을 선출해준 노동자, 시민들을 지킬 수 있는 진정한 ‘호민관’이 선출될 것이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265 | 추천: -1
이동화/ 민변 국제연대위 간사   2003년 3월, 이라크 전쟁이 발발하였다. 도저히 그냥 있을 수 없어 무작정 이라크행 비행기를 탔고, 그 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7개월간 함께 지내며 ‘셀림’(건강한 청년, 한국의 돌쇠(?) 정도)이라 불리는 반전활동가가 되었다. 그리고 2004년 6월, 열병에 걸린 것처럼 다시 이라크로 향했지만, 김선일 씨의 죽음, 내전으로 치닫는 내부 상황, 점령으로 인한 이라크는 외부인의 활동을 용납하지 않았고 4개월 만에 한국으로 들어올 수 밖에 없었다. 이후 2005년 겨울, 현지인들과의 소통을 위해 필요한 아랍어를 배우기 위해 찾은 요르단 생활 중 이스라엘에 의해 수십 년 동안 점령과 봉쇄를 당하고 있는 팔레스타인에 한국의 활동가들과 함께 정말 우연치 않게 약 한 달간 지내게 되었다. 이라크만큼이나 강렬했던 팔레스타인의 경험은 국제연대활동의 중요성을 실감케 했고, 그곳 사람들과의 만남은 지울 수 없는, 강렬한 기억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2006년 11월, 한국에 되돌아 왔다. 2014년 5월, 민변이라는 단체에서 국제연대업무를 담당하며 8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2007년부터 한미 fta 비준, 광우병 촛불집회, 용산 참사, 4대강 사업, 나꼼수 표현의 자유, 국정원 대선개입 이후 박근혜 정부 들어 서울시 간첩조작사건까지 한시도 바람잘 날 없는 단체에서 국제연대활동뿐만 아니라 여러 활동을 함께 하였다. 다행스럽게도 현재 민변은 많은 시민들의 지지와 성원을 받고 있고, 한국 사회내 여러 부조리하고 부정의한 곳 어디에서든 민변의 활동을 요청받고 있다. 단체 소속 활동가로서 뿌듯하고 자랑스럽다. 반면에 시간이 흐를수록 내안의 열정은 관성이 되고, 에너지는 오래된 배터리처럼 쉽사리 충전되지 않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소속된 단체의 국제연대활동이 국내이슈에 대한 국제연대활동 중심으로 집중되다 보니 단체에서 해야하는 일과 내가 하고 싶어하는 일의 간극이 갈수록 벌어지고 있었다. 스스로 조율하는 의지도 희미해져 갔다. 위기였다. 2014년 6월, 오랜만에 느끼는 중동지역의 강렬한 더위와 건조하기 짝이 없는 바람은 내 몸의 세포들을 깨우고 있다. 모스크에서 들려오는 아잔소리(기도시간을 알리는 소리)와 주변에서 들리는 격정적인 신디사이저 음악소리는 강렬한 아랍커피처럼 이곳이 내가 그리워했던 곳임을 일깨워준다. 나는 지금 다시 팔레스타인으로 가기위해 옆 나라인 요르단에 왔다. 거의 10년만이다. 요르단 압달리 정류장 사진 출처 - 필자 다행히도 활동하는 단체에는 만 7년 이상 상근하면 3개월의 안식월이 주어진다. 나는 안식월 기간 중 5주 동안 요르단내 이라크 난민 가족을 만나고, 그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팔레스타인에서 지내는 여행을 할 예정이고 오늘이 첫 번째 날이다. 5주라는 시간동안 무엇을 할지, 무엇을 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부딪치려 한다. 오기 전 친한 선배가 이번 여행기간에 무엇을 한다는 생각보다는 푹쉬면서 여유 있고 내적으로 성숙할 수 있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전적으로 동감한다. 이번 여행의 중요한 목적도 휴식과 여유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이 여행을 채우기에는 미안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 집에서 육아를 전담하고 있는 와이프와 아빠와 한참 친해진 아이, 소속 단체의 여러 상근자 및 현장에서 치열하게 활동하는 모든 이들. 일단 마음 가고 몸가는 대로 움직이되, 더불어 나를 국제연대활동으로 이끌었던 그 곳의 사람들을 다시 만나 그들의 삶을 눈으로, 귀로, 피부로 느끼며 잊혀지고 있는 초심을 되돌아보고자 한다. 이 여행을 통해 당장은 모르지만 마음 속 깊은 곳의 솔직한 내 목소리도 들어보려 한다. 비장하지는 않지만 의미있는 여행, 이것이 오랫동안 내가 준비한 이번 여행의 그림이자 내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다. 길 위에서 다시 길을 되돌아본다. 오랜만에 살람 알라이쿰, 알라이쿰 살람(평화가 그대에게, 그대에게 평화가)!
2017-07-12 | hrights | 조회: 193 | 추천: 0
임아연/ 당진시대 기자   이번 6.4지방선거에서 주목할 만 한 점은 당진시장 후보들을 대상으로 한 토론회가 무려 5개나 진행됐다는 점이다. (방송토론까지 따지면 5개 이상이다.) 지역신문사가 주최한 토론회와 지역사회연구소에서 진행한 토론회는 큰 틀에서 보면 당진시에 대한 전반적인 정책 등 시장 후보들을 검증하는 것이었고, 면 단위에서 해당 지역의 현안에 대해 토론을 벌인 것과 농업정책, 그리고 여성정책에 대한 토론이 각각 이어졌다. 이번 선거는 세월호 참사로 인해 당내 경선 등 선거일정이 많이 미뤄졌고, 이전 같지 않게 다소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후보자들이 유세를 벌이고 있다. 때문에 일각에서는 후보들이 한 사람의 유권자라도 더 만나기 위한 시간이 부족한데, 토론회가 너무 많은 것 아니냐는 볼멘소리도 있었다. 하지만 선거가 인물이 아닌, 사탕발림 같은 구호가 아닌 정책 중심이어야 한다는 당연한 상식에 따른다면 후보자들이 공부하고, 고민하고 또 그들의 생각을 알릴 수 있는 토론회는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권자로서 여러 토론회가 계속 이어지면서 후보들이 해당 분야 또는 지역현안에 대해 얼마나 준비를 했는지 가늠할 수 있었고, 각 후보들이 사회를 보는 시각에 대해서도 나름의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에 무척 고무적이었다. 사진 출처 - 당진시대 특히 지난 5월 22일 한국유권자연맹 당진지부에서 개최한 여성정책 토론회의 경우에는 당진시가 ‘여성친화도시’를 표방하고 있지만 아직도 넘어야할 산이 크다는 것을 방증하는 기회였다. 아직도 사회에 만연한 성적 불평등과 부족한 성 의식, 그리고 그에 따른 성 인지 정책 등 모든 부분에서 미흡함을 느낄 수 있었다. 후보들이 ‘복지’라는 큰 틀에 포함시킨 여성정책은 대부분 시혜적 차원에 그쳤다. 여성을 단지 사회적 약자로 규정하고, 돌봐야 하는 존재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은 여성을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한 존재로 인식함으로써 끊임없이 타자화하고 객체화시킬 뿐이다. 성적 불평등은 여성회관을 따로 지어 주거나, 여성전용 택시를 두거나 하는 등 남녀를 구분 짓는 정책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여성이 사회적 존재로 설 수 있도록 사회참여를 돕고 정치적 발언의 기회를 확대함으로써 해소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성들이 가장 큰 문제로 느끼고 있는 출산과 육아에 대한 부담을 반드시 짚고 넘어 가야 한다. 그래서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북유럽의 사회복지 모델은 자연스럽게 여성정책과 맥을 같이 한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이 여성으로 살아가는 한 존재에게 걸림돌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사회는 이를 책임지지 않으면서 출산만을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가. 여성들 스스로 갖는 인식의 문제도 크다. 토론회를 앞두고 지역에서 벌인 설문조사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정치적 능력이 떨어진다고 보는 결과가 나왔다. 또한 토론회 말미에 사회자가 후보자들의 아내에게 “가정에서 남편의 성평등 지수를 점수로 매겨달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도 마찬가지 였다. 이들은 남편(후보자)이 손톱을 깎아 준다거나 집안 살림을 ‘돕는다’거나, 딸 아이의 초경을 축하해줬다는 점을 내세우며 저 마다 자신의 남편이 최고라고 치켜세웠다. 성 평등적 가치관과 남편의 가정적인 성향은 엄연히 다른 것이지만 여성들조차도 이를 잘못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 고령 인구가 많고, 보수적이라고 하는 지역에서 여성 문제가 이렇게 공공의 영역에서 토론된 것은 이전엔 상상하기 어려웠던 일이다.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다. 이번 선거를 계기로 앞으로 더 많은 토론과 논의, 문제제기가 이뤄진다면 지역의 여성정책과 성 인지 관점에 대한 지역민의 공감대가 점차 확산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219 | 추천: 0
송채경화/ 한겨레21 기자   5월20일자 모든 일간지의 1면에는 눈물을 흘리는 박근혜 대통령의 모습이 실렸다. 박 대통령의 눈물이 진심이든 아니든 본인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눈물을 흘리면 그 자체로 엄청난 뉴스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누리꾼들 사이에서는 이 눈물이 애초 청와대 참모진의 ‘기획’이었다는 의혹도 나오고 있다. 대통령이 대국민담화를 하기 직전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한 김진오 선임기자가 “청와대 관계자들이 세월호 참사에 대한 반성과 사과를 감성적으로 접근해야 대국민 호소력이 커진다는 의견을 개진했다. 대통령이 참모진의 의견을 수용해 단 한 번도 없었던 눈물을 보일지 지켜볼 일”이라고 말한 것을 근거로 들었다. 그러나 사전 연출이냐 아니냐를 따져 대통령의 눈물이 진심인지의 여부를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청와대 참모들이 눈물을 흘리라는 의견을 내놓은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대통령이 이를 거절했을 수 있다. 그리고 거절은 했지만 대국민담화를 진행하다보니 감정이 복받쳐 눈물이 나왔을 가능성도 있다. 사람의 속마음을 누가 어떻게 들여다볼 수 있을까.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9일 오전 청와대 춘추관에서 열린 세월호 참사 관련 대국민담화 발표 연설 말미 ‘의로운’ 희생자 이름을 거명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사진 출처 - 청와대사진기자단 그럼에도 나는 박 대통령의 눈물이 ‘악어의 눈물’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어렵다. 대통령은 일반인이 아니기에 눈물에도 ‘책임’이 따른다고 보기 때문이다. 눈물에는 여러 의미가 있다. 슬픔, 안타까움, 자기성찰, 다짐 등등. 대통령이 눈물을 흘리려면 적어도 이러한 상징적인 부분을 그 눈물 속에 담아낼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대통령은 이 점에서 실패했다. 슬픔과 안타까움은 있었을지 몰라도 자기성찰이나 앞으로의 다짐은 그 눈물에 없었다. 세월호 참사의 최종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고 말했지만, 무엇을 잘못했는지, 앞으로 어떻게 책임질 것인지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해경 해체’라는 초강수 구조조정안 외에 무너진 신뢰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았다. 더구나 대통령은 앞에서는 울면서 뒤에서는 세월호 참사에 슬퍼하는 이들에게 무차별적인 공권력을 휘둘렀다. 박근혜 정부는 지난 주말 서울 청계광장과 광화문 주변에서 거리행진을 하던 시민 200여 명을 연행했고, 이들을 형사 처벌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연행한 방식도 기존과는 달랐다. 전혀 폭력적이지 않던 분위기에서 경찰은 시민들을 에워쌌고 몇 분 만에 3번의 해산명령을 마친 뒤 궁지에 몰린 시민들을 붙잡아갔다. 해산하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시민들까지도 순식간에 데려갔다는 게 현장 참석자의 증언이다. 현장에 있던 한 시민은 <한겨레> 인터뷰에서 “200여 명 정도가 모여 있었고 일부만 도로에 앉아 있었다. 자유롭게 해산하려는 분위기였는데 순식간에 세 차례 해산명령이 이뤄지더니 경찰이 에워쌌다”고 말했다. 경찰의 목적이 애초부터 ‘질서 유지’가 아니라 ‘연행’이 아니었는지 의심이 드는 대목이다. 박근혜 정부의 공권력은 세월호 유가족을 미행하는 어처구니없는 짓도 저질렀다. 세월호 가족 대책위는 19일 “오늘 세월호 사고 실종자 가족들이 있는 전남 진도로 가던 도중 불법 미행을 하고 있는 경찰들을 발견하고, 이들로부터 미행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미행한 경찰들은 희생자 가족들이 눈치를 채고 “경찰이냐”고 묻자 아니라고 부인하다가 결국은 “유가족들에게 혹시 무슨 일이 있을까봐 도와주려고 그런 것”이라고 변명했다. 그 말이 진심이라면 출발 때부터 공개적으로 가족들을 호위했어야 맞다. 어디 이뿐일까. 교육부는 대통령에 세월호 참사의 책임을 지고 퇴진하라는 글을 쓴 교사들을 중징계하겠다고 밝혔고, 청와대는 대통령 조문 연출 의혹을 제기한 <CBS>에 소송을 걸었다. 세월호 침몰에 대한 온라인상의 수많은 의혹에 대해서는 대통령이 직접 나서 “사회적 혼란을 야기시키는 불순한 의도”라며 “이런 거짓말과 유언비어의 진원지를 끝까지 추적해서 그들의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공포정치’다. 공포정치는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대중에게 공포감을 주는 정치를 뜻한다. 자기 목소리를 내는 시민들과 언론, 심지어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마저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이 무자비한 공권력의 이면에는 “가만히 있으라”는 강력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이러한 ‘공포정치’를 해놓고 이제 와서 눈물의 진심을 믿어달라고 하니 누가 수긍할 수 있을까. 대통령은 정말 눈물 하나로 이 모든 불신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것일까. 박 대통령이 이번 대국민담화에서 던진 메시지는 이것이었다. “모든 것은 나의 책임입니다. 그러니 국민 여러분은 입 다물고 내가 앞으로 어떻게 해결해나갈지 지켜보기나 하세요.” 그러나 박 대통령이 진심으로 반성하고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면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국민 여러분, 가만히 있지 마십시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됐는지 우리 함께 되짚어봅시다. 새 체제가 필요하다면 다 같이 만들어봅시다. 제발 움직여 주십시오.”
2017-07-12 | hrights | 조회: 233 | 추천: 0
전국완/ 중학교 교사   온 나라를 슬픔에 빠지게 한 참사가 일어난 지도 어느 덧 한 달을 훌쩍 넘기고 있다. 아직까지 돌아오지 못한 18명을 기다리는 가족들의 마음은 그야말로 새카맣게 타들어가고 있지 싶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함께 절규하던 다른 가족들은 시신을 안고 하나 둘 떠나고, 텅 빈 체육관에 덩그마니 남겨졌을 그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온다. 뉴스에서도 세월호 소식은 점점 줄어들고, 사람들은 다시 방송되기 시작한 드라마와 예능을 보며 이제는 웃고 떠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20여 일 후에는 월드컵도 개막된다. 유족들이 가장 견디기 힘든 건 함께 울어주던 사람들이 이 일을 잊어버리게 되는 일일 것이다. 사건이 일어나고 온 나라가 슬픔과 분노로 들끓고 있는 동안 무능한 정부는 책임 떠넘기기와 ‘충격상쇄용 아이템 개발’에 여념이 없다가, 자식 같은 학생들의 무참한 죽음에 대통령의 책임을 묻는 교사들에 대해서는 발 빠르게 징계에 착수하며 청와대 심기보좌에는 발군의 실력을 발휘 중이다. 청와대는 여론 눈치봐가며 찔끔 찔끔 사과에 ‘적폐일소’ 운운하며 남 탓하기 바쁘고, 주범은 놓치고 겨우 박봉의 비정규직 선장과 선원 몇 명에게 살인죄를 씌워 구속시킨 검찰의 성적표는 초라하기 이를 데 없다. 거기다가 ‘기레기’떼들은 현장상황과 동떨어진 ‘받아 적기’와 부나방처럼 선정적인 기사만을 좇아 몰려다니고……. 시민들의 촛불집회를 종북으로 몰아 맞불집회를 열고 호통치는 어르신들. 떨어지는 대통령의 지지율에 유족들을 ‘몰지각한’으로 몰아붙이며 ‘대통령 구조’에 나선 자들의 개소리들. 이 와중에 ‘질서’를 내세우며 집회참가자들을 100여 명이나 연행하고는 ‘사법처리’ 들먹이며 국민이 아닌 정권의 보호에만 충실한 경찰. 그나마 있는 야당은 공천문제로 자중지란에 빠져 존재감도 없고……. 어째 이러다가 세월 따라 세월호도, 세월호 희생자도 아무 의미 없이 흐지부지 묻힐까봐 두렵다. ‘시스템 실패를 탓하지 않고 개인들 책임만 묻는다면……, 한바탕 난리로 끝날 것’이라던 울리히 벡 교수의 경고(한겨레신문)가 결국 현실이 될까봐 두렵다. 그림 출처 - 한겨레 그림판 지금까지 순진했던 우리 백성들은 그저 ‘나라 경제가 살아야 …, 기업이 살아야 …, 국익을 위해서 …’라는 정부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 그래서 열심히 일하고, 양보도 했다. 그 결과 기업들은 점점 더 많은 이윤을 내고 커졌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 각종 규제를 풀고, 고용의 유연성을 위해 이 나라 노동자의 반 이상을 비정규직으로 만들었다. 그러고도 끝을 모르는 기업들의 탐욕스런 이윤추구는 자본이 사람들의 목숨보다 우위의 지위를 얻게 만들었다. 정권창출이 지상목표인 정치인들은 불법까지 동원해 가며 정권을 차지했고, 전리품으로 얻은 자리는 끼리끼리 나누어 가졌다. 그들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일에는 애초부터 관심도 없고 능력도 없었던 거다. 결국 우리는 이렇게 어이없는 비극을 맞게 되었다. 이번 사태를 대하는 정부관계자들의 모습에서 하나같이 진정성이라는 게 보이지 않았던 건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이 바라보는 건 국민이 아니라 청와대이고, 자신들이 쥐고 있는 알량한 기득권이었던 것이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대통령과 정부는 재벌들의 마름에 지나지 않는다’는 박노자 교수의 지적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처음에는 참담하고 가슴이 아프더니, 이제는 점점 화가 나고 분노가 치민다. 울리히 벡 교수의 말처럼 권력집단은 결코 자신들의 체질을 스스로 바꾸진 못할 것이다. 우리는 길고 긴 줄을 서서 분향을 하고, 노란 리본에 ‘미안하다. 잊지 않겠다’고 적었다. 이것을 분위기상 한 번 해 본 허언으로 그치기에는 떠나보낸 목숨들이 너무 아깝고 아프다. 그리고 앞으로 더 많은 목숨들을 보내야 할 수도 있다. 내가 몸담고 있는 자리, 또 주변에서 우리는 세월호와 너무도 많이 닮은 모습들을 본다. 남보다 더 많이 가지고 누리고 사는 데에 열중하느라 어느 덧 소중한 가치들 위에 ‘돈’이 군림하게 된 가치전도의 세상을. 나와 내 가족의 출세와 성장의 단꿈에 젖어 이웃들의 불행을 외면하고 침묵함으로써 우리 사회에 부조리가 이렇게 조직화하는 데에 일조했다는 성찰과 반성이 필요할 것 같다. 그리고, 정부가 이 사태를 제대로 해결하지 않고 대충 넘어간다든가 오히려 ‘국가개조’를 명분삼아 국민 통제로 방향을 잘못 틀지 않도록 눈을 부릅뜨고 지켜봐야 할 것이다. ‘사회분열’, ‘경제’, ‘안보’ 등을 내세워 본질을 흐리더라도 넘어가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번만은 그냥 넘어갈 수 없게 말이다. 저기 저 권력자들이 우리 소시민들을 두려워하게 할 수 있는 건 진실을 제대로 아는 것일 게다.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이 엄청난 일들에 대해 관심과 시선을 오래도록 거두지 말고 제대로 알자. 그러기 위해서라도 사실은폐와 정권홍보에 급급한 공중파 언론의 추한 민낯을 보게 해준 대안언론들이 더욱 성장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태자. 우리가 가진 또 다른 힘은 머릿수다. 그들이 선거 때마다 우리의 한 표를 아쉬워하지 않는가. 함께 모여 함께 분노하자. 이번엔 쉽사리 분노를 거둬선 안 될 것 같다. 돌아오지 못한 18명의 실종자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때까지, 사태관련자들이 모두 책임을 지고 처벌을 받을 때까지, 재발방지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이 나올 때까지, 유족들이 합당한 보상을 받을 때까지. 방송에선 벌써 월드컵 기간 시청률 올리기 경쟁에 돌입한 것 같다. 예년처럼 모든 채널에서 월드컵 경기를 밤낮없이 중계하고, 거리마다 붉은 티를 입고 모여 앉아 ‘대한민국’을 외쳐대는 상황이 이번에는 오지 않기를 바란다. 아직 차가운 바다에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이 있고, 기다리다가 돌이 될 지경인 애끓는 어버이들이 있다. 그리고 가족을 떠나보낸 분들의 눈물도 채 마르지 않았다. 그들과 함께 해 주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분향소 옆에서 집단적으로 거리응원을 하는 건 도무지 지켜보지 못할 것 같다. 며칠 전 스승의 날이라고 졸업한 제자들이 찾아왔더랬다.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훌쩍 커버린 아이들의 의젓한 모습을 보며 마음이 또 뭉클했다. 중학교 때가 좋았다고, 공부가 어렵다고 죽는 소리를 하면서도 서로 학교자랑을 하던 아이들. 이 귀하고 예쁜 아이들을 더 이상은 잃어선 안 되지 않겠나.
2017-07-12 | hrights | 조회: 191 | 추천: 0
허창영/ 광주교육청 조사구제팀장, 전임 간사 인권을 얘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말 중 하나가 ‘천부인권’이다. 천부인권은 왕에게만 독점되었던 권리를 모든 사람에게로 되돌려 준 중요한 근거였다. 왕 또는 국가권력에 앞서 모든 사람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권리를 갖고 있다는 논리는 인류의 역사를 바꿀 만큼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다. 그런데 이 천부인권은 마치 인권이 ‘한 상 제대로 차려져 있는 밥상’ 같다는 느낌을 준다는 데 함정이 있다. 우리들은 그저 그 밥상에 숟가락을 얹고 먹기만 하면 될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인권은 험난한 역사적 과정을 거치면서 ‘인간의 투쟁’에 의해 ‘쟁취’되어 왔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에 의해 풀어헤쳐진 선물보따리의 실상은 밥과 국 정도가 놓여 있는 가난한 밥상에 불과했다. 그 밥상 위에 무엇을 놓고 먹을지는 인간의 선택과 투쟁을 통해 하나씩 하나씩 늘려왔다. 국가가 함부로 간섭하지 말라는 ‘자유’에서부터 ‘사회적 생존’을 위해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것으로, 나아가 집단적인 것도 인권이 될 수 있다는 것까지.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인권이라는 밥상은 바로 그 ‘인간의 역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 역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현재진행형이다. 그런데 인권의 역사를 조금 다른 관점에서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역사’ ‘사람의 범주에 들기 위한 역사’라고도 얘기한다. 기본적으로 인권은 ‘누구나’라고 하는 보편성을 가장 큰 원칙 중 하나로 본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권을 가지고 있고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인권의 실상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인간의 권리를 확인받았던 근대 시민혁명시기, 그 거대한 역사적 전환기의 열매는 ‘모든 사람’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영국의 권리장전, 미국 독립선언서, 프랑스 인권선언에 적힌 인간의 권리는 소위 ‘제3신분’에게까지만 해당되었다. 가난하고 평범한 시민들, 유색인종에게 인권은 그저 문헌상의 치장에 불과했다. 어느 계급에 속해있건 여성은 ‘모든 사람’에 포함되지 않았다. 소위 소수자 또는 사회적 약자들은 인권의 달콤한 열매를 먹지 못했던 것이다. 1789년 6월 20일 베르사유 궁전 인근의 실내 테니스코트에 모여 서약을 낭독하고 있는 제3신분 대표들. 자크 다비드 그림. /소장=파리 카르나발레 박물관 사진 출처 - 경향신문 이후 인권의 역사는 ‘모든 사람’에서 배제된 사람들이 사람으로 확인받기 위한 역사였다. 사회주의 혁명기를 거치면서 가난한 사람들까지, 양차 세계대전을 전후해 여성들까지 사람으로 확인되었다. 노예제가 폐지되고 나서도 한참 후인 흑백분리, 아파르트헤이트가 폐지되고 나서야 비로소 유색인종에게까지도 ‘인간의 권리’가 보장되었다. 장애인, 어린이·청소년, 성소수자, 노인, 이주민 등은 여전히 사람임을 확인해달라는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권의 역사를 권리주체의 입장에서 보자면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역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현재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묻고 싶다. 과연 우리는 진정한 사람인가? 극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대한민국 국민의 대다수는 인권이 얘기하는 그 ‘사람’에 해당하는지 의문이다. 인류의 역사가 근대 시민혁명 이후 차근차근 사람의 범주를 넓혀왔지만, 대한민국은 과연 그 근대 시민혁명 이후의 과정을 밟고 있는가 말이다. 밀양과 강정에서는 촌로들이 삶터를 짓밟히고 있고, 노동자들은 곳곳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 내몰려 있다. 아이들의 생명과 안전조차도 지켜주지 못하는 무책임한 권력 앞에서 나라 전체가 집단패닉에 빠져있다. 그런데도 자본은 이윤을 위한 더러운 셈법에 혈안이고, 국가권력은 진정어린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국민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권력은 그 어떤 책임도 지지 않고 있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그 안에 살고 있는 우리가 과연 사람인가? 이러한 현실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비교적 명료한 인권의 가르침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사람의 권리를 토대로 만들어진 근대국가의 정당성은 분명하게 국민의 인권을 보장하는 것에서 나온다. 우리 헌법에서도 국가는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보장할 의무가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국민이 사람임을 확인하지 않는 정부, 국민의 인권을 보장하지 않는 국가는 이미 정당성을 상실했다고 보는 것이 정당하다. 인권에서는 그러한 정부와 국가권력을 위해 친절하게도 ‘압제에 저항할 권리’를 확인하고 있다. 왕에게 독점된 권리를 모든 사람에게 되돌리면서 가장 먼저 확인한 것 중에 하나다. 실제로 인권은, 사람이라는 확인은 사실 그 어떤 것도 그냥 주어지지 않았다. 예외 없이 모두가 인정투쟁의 결과물이었다. 사람다운 삶을 보장하지 않아 사람이라는 인식조차 하지 못하도록 하는 자본과 권력을 향해 끊임없이 ‘우리도 사람이다.’는 저항을 통해 얻어진 결과였다. 대한민국의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 아닌 국민’인 우리에게는 지금 이러한 인권의 가르침이 절실한 것인지도 모른다. 국민의 인권을 보장하지 않는 국가를 향해 극히 상식적인 국민들이 할 수 있는 선택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205 | 추천: 0
세월호 사태 진상규명과 대통령을 포함한 책임자 징계가 답이다. 이현정/ 흥사단 민족통일운동본부 부장 며칠째 제주에 머물고 있다. 한라산 서쪽의 한 중산간마을에서 지내고 있고, 여기에서 글을 쓴다. 제주의 중산간마을들은 과거 제주 4.3사건으로 씻을 수 없는 큰 상처가 남은 곳이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 정부는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상 지역에서 이동하는 모든 사람들을 사살하는 강경 초토화 작전을 펼쳤다. 그 결과 중산간마을의 95% 정도가 불타버렸으며, 아이부터 노인까지 양민 대학살이 시작되었다. 당시 제주도민 10% 이상이 학살되었는데, 그 행동대장들은 바로 경찰, 군인, 그리고 서북청년회였다. 2003년 가을,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제주도민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라며 사과를 했다. 많은 제주도민이 눈물을 흘렸다. 반세기가 넘은 과거의 일이지만, 국정책임자의 진심어린 사과에 처절한 분노와 앙금이 풀렸던 것이다. 반면, 2014년 4월 30일 아침으로 돌아와 본다. 29일, 세월호 유가족들이 대통령의 사과를 거부했다. 이에 대해 오늘 청와대가 유감이라고 밝혔다. 국무위원들 앞에 앉아 나무라는 듯 한 태도를 보인 저 비공개 사과를 못 받겠다는 유가족들을 향한 경고 메시지다. 분노가 치민다. 4월 16일 사고를 결국 ‘사태’로 오게 한 국정책임자가 보여주는 저 비겁함과 무능함에 진저리가 난다. 결국 이번 사태는 무능한 정부, 비겁한 정권, 부패한 자본, 쓰레기 언론이 만든 것이다. 이것은 갑자기 생긴 건 아니다. 교묘하게 감춰져있던 것이 흉악한 민낯을 드러낸 것이다. 그런데 희생이 너무 크다. 세월호 사망자와 유가족, 그리고 슬퍼하는 많은 국민들까지. 사진 출처 - 페이스북 무능한 정부. ‘안전’행정부로 바꾸면서까지 안전을 강조하던 박근혜 정부의 무능이 드러났다. 국민을 보지 않고, 박근혜의 입만을 쳐다보는 1인 권력 시스템의 결과이다. 관료들이 대통령 눈치만 보고 있다. 사고 이후 상황대책본부가 보여준 모습이 이를 반증한다. 안전행정부, 해양수산부, 국방부, 해경 등이 보여준 건 우왕좌왕 부실한 초동대응이었다. 결국 사고를 사태로 키운 건 박근혜 정부인 것이다. 그럼에도 또 국가안전처 신설을 얘기한다. 답이 없는 무능한 정부다. 비겁한 정권. 청와대는 재난컨트롤타워가 아니라고 발뺌을 하고 있다. 구차하다.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데 관계없는 집단임을 자인한 것이다. 행정이 아닌 통치를 하고 있고, 국민을 섬기겠다고 하더니 결국 국민 위에 군림하는 못된 집단임을 보여주었다. 실종자 300여명이 차가운 물속에서 구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을 때, 대통령과 관료들이 수색 구조를 지연시켰다. 해경, 상황실 등이 보여주는 자료가 계속 거짓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진실을 계속 덮으려 하고 있다. 진실을 얘기하려는 이들에게는 윽박을 지르고 있다. 비겁한 정권이다. 부패한 자본. 구조가 계속 더뎌졌다. 유가족들과 민간 잠수부들이 계속 의문을 제기했다. 결국 드러난 것은 해경 및 해양수산부 기관과 청해진해운, 그리고 구조팀 언딘이 보여준 정경유착이 포착되었다. 관료 퇴임 후, 해운조합 등 최고관리자에 등장한 해양마피아 커넥션이 드러났다. 돈 문제로 구조작업이 더뎌지는 비참한 현실도 목격했다. 더불어 사고를 일으킨 청해진해운과 모기업 자본들의 부실과 부정 운영도 밝혀졌다. 쓰레기 언론. 뭐 길게 쓸 것도 없다. 쓰레기 언론의 밑바닥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들의 입이 국민을 향해 있지 않고, 비겁한 정권과 부패한 자본에 쏠려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결국 이번 사태는 무능한 정부, 비겁한 정권, 부패한 자본, 쓰레기 언론 모두 처벌받아야 한다. 해운 회사 측에 모든 책임을 돌려서는 안 된다. 고로 진실규명과 더불어 국정책임자인 박근혜 대통령을 포함한 관계자들에게 모두 책임성 징계가 내려져야 한다. 그러고 나서 재발방지 대책이 나와야 한다. 정홍원 총리 사퇴로 끝나서는 안 된다. 유가족과 국민들이 그 책임을 물으면 된다. 사고 후 동네에서 실종자 무사귀환 촛불문화제가 있었다. 눈물을 흘리던 동네 주민들이 준비했다. 지금 전국에서 촛불과 노란리본이 물결치는 것도 이와 같은 마음일 게다.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그 때 발언으로 했던 얘기를 던지고 싶다. "이 못된 정부 개xx들아!"
2017-07-12 | hrights | 조회: 225 | 추천: -1
손상훈/ 소셜리서치앤멘토르 기획국장   제3세계나 오지마을을 돕는 '국제개발협력'에서 주목받았거나 이용되고 있는 '적정기술'이 한국에서 다시 회자되고 있다. 휴대용 빨대 정수기, 타이어 바퀴모양의 물동이 등 전기가 없거나 가난해서 고통 받는 이웃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는 ‘나눔’에서 시작된 중간기술이다. 중간기술, 적정기술이란 개념은 대기업에서 만든 ‘하이테크기술’과 전통적인 기술의 중간을 말하고, 일본을 거쳐 번역되어 적당·적절하게 누구나 이용 가능한 기술이란 표현인 ‘적정기술’로 한국에 전해졌다. 한국에서는 개신교계 ‘국제구호, 협력’ 비영리단체나 사회적 기업들이 한국국제협력단(코이카)나 대기업 사회공헌기금으로 제3세계에 기여하였다. 또한, 2009년 국립 한밭대 홍성욱 교수가 중심이 되어 ‘적정기술연구소’와 ‘적정미래포럼’을 설립하여 '적정기술'을 본격적으로 알렸는데 이는 널리 사용해오고 있는 표현이자 기술 철학적 개념이다. (http://approtech.or.kr/) 위 사진 - ‘큐 드럼’. 물부족 지역에서 물을 쉽게 길러 오는 물수레. 아래 사진 - ‘라이프 스트로우’ 오염된 물을 안전하게 마실 수 있는, 빨대 모양의 휴대용 정수기 한국형 적정기술의 키워드는 '뽁뽁이'다. 비닐포장지이고 비닐에어캡이라는 근사한 말도 있는데 최근 몇 년 새 '붙이기'가 유행이다. 2002년 월드컵 때 빨간 티셔츠를 입고 나온 것처럼, 붙여보니 따뜻한 게 체감되고 난방비가 아껴지더라. 입소문을 타고 언론에도 나오더니 이름을 기억하기 어려운 '전직 국무총리'보다 사랑받는다. 전통한지나 창호지가 전통기술이라면 대기업에서 만든 고효율 단열재가 하이테크기 이다. 하이테크기술은 당연히 비싸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쉽게 구매가능하고 동네 철물점에서 편하게 살 수 있는 만 원대의 ‘뽁뽁이’가 생활지혜, 적당기술을 대표하게 된 것이다. 적정기술의 유래는 간디를 존경했던 영국의 경제학자 슈마허가 중간기술이란 개념으로 시작한 기술철학이며, 유럽을 중심으로 출발했다. 적정기술은 1966년 개발도상국에 적합한 소규모 기술 개발을 위한 중간기술개발그룹, 즉 영국에 ‘ITDG(현재는 Practical Action)’라는 조직을 설립한 것이 현대적인 시초이다. 슈마허는 작은 것에 만족할 줄 아는 마음과 사람이 스스로 직접 만들거나 고칠 수 있는 ‘인간의 얼굴을 한 기술’이라고도 한다. 제3세계, 오지에 사는 현지 사람들이 주변에서 쉽게 구할수 있는 재료와 기술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10%만을 위한 제품이 아닌 90%를 위한 기술이다. 슈마허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책을 통해 이것을 강조했다. 제어할 수 있는 적정기술을 통해 첨단기술 없이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1970년 미국 카터정부는 국가기구까지 만들어 적정기술을 보급하려 했으나 정부가 바뀌면서 실패했다. 당시 미국의 적정기술주의자들은 ‘잘 만든 쥐덫은 산속에서 팔아도 찾아온다며 오판했다. 미국의 적정기 은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져 갔고 외면당했다. 한국형 적정기술은 어떻게 될까. 대학 연구소를 제외하고, 농촌형과 도시형으로 나눠볼 때 ’전환기술사회적협동조합‘과 ’마을기술센터 핸즈‘ 두 곳을 주목해 보아야 한다. 농작물이나 시골집 난방을 위한 전환기술은 시골 군수의 지원과 ’흙부대생활기술네트워크‘, ’작은손기술협동조합‘ 등 지역밀착형 전문가들이 결합되었다. 농촌이나 산촌에서 실험해 보거나 적당하게 시도하는 일은 도시보다 수월한 편이라 할 수 있다. 다 험난하지만 말이다. 도시형 적정기술 사랑받을까 창동 마을예술창작소 창고 실내형 햇빛온풍기 워크숍_핸즈 홈페이지 http://handz.or.kr 그러나 세모녀 사건에서 보듯 ‘비인간적인 도시’에서 ’적당기술‘은 힘이 더 든다. 봉화에 귀촌하였다 최근 영등포에 자리를 튼 ’핸즈‘는 최근 몇 개 학교에서 실내형 햇빛온풍기를 제작하는 교육을 하고 있다. 학생이나 특히 교사들의 관심이 뜨겁단다. 짧은 시간에 온풍기의 구조와 원리를 전달하고, 서울이라는 도시 공간속에서 햇빛온풍기를 접근할 수 없을까 하는 고민에서 시작하여 실내형 온풍기를 만들고 있다. 공간난방의 보조열원으로 유럽에서 하는 방법을 한국형으로 서울도시에 맞게 시도해 보는 것이다. 이 기술의 핵심은 창문에 걸어두고서 사용할 수 있도록 가볍게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그리고 저렴해야 한다. 또 태양광 셀을 이용해서 공기흐름을 만들어 주고, 구체적인 성능과 온도를 확인하며 집안으로 들어 온 햇빛을 최대한 이용해보고자 하는 고민에서 시작되었다. ‘핸즈’에서는 앞으로 더 단순화(경량화) 시키고, 효율도 높여나갈 계획이다. ’핸즈‘의 실험이 지속가능하도록 소셜리서치와 소셜펀딩을 통해 적극 도와주고 싶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435 | 추천: 0
이상재/ 대전충남인권연대 사무국장   2년 전 고향에서 초등학생이 살해당하는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의 범인이 잡히고 전모가 밝혀지고 난 후 사건을 다룬 기사와 인터넷 게시판에는 역시나 많은 수의 댓글을 볼 수 있었다. 이런 사건이 일어난 후에 흔히 볼 수 있는 지역을 비하하는 댓글 내용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사건이 일어난 시골마을의 면단위 이름까지 소상하게 밝혀주는 친절한(?) 언론사 때문에 근처 초등학교 앞에서 조그만 문방구를 하고 계시는 외삼촌과 숙모님 내외분이 선뜻 떠올랐다. 사건이 마무리되고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거의 잊힐 때쯤 다른 일로 전화를 드렸다가 숙모님께 그 사건에 대해서도 넌지시 이야기를 꺼내 보았다. 예상대로 동네사람들이 그 일로 엄청 분노하고 창피해 한다는 얘기를 거의 30여분 가까이 하셨다. 죽은 학생은 숙모님도 아는 학생이라 마지막에는 눈물바람까지 보이셨다. 시골마을, 한 학년에 한반 정도 밖에 안 되는 작은 학교 주변이라 그 사건이 가져왔을 파장이 얼마나 컸을지는 굳이 숙모님과의 대화가 아니었더라도 대강은 짐작이 되었다. 말씀을 듣고 나니 피해학생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 마을 주민들의 분노에 나도 모르게 감정이입이 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고향에서 일어난 사건이어서 그랬는지 몰라도 왜 이런 끔찍한 사건의 언론 기사 제목은 항상 앞에 지역 명을 붙여야 하는지에 대해서 의문이 들었다. 사건을 상세히 보도해서 독자들의 알권리를 충족시키려는 언론 본연의 임무에 대해서 뭐라 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서울에서 일어난 사건에서 언론이 ‘서울살인사건’ ‘서울성폭행사건’이라고 제목을 뽑은 것을 나는 한 번도 본적이 없다. 그런데 왜 서울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일어난 사건에서는 지역 이름을 앞에 두고 제목을 뽑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혹시 언론사에 입사하면 신입기자 교육 때 사건 제목은 서울 외 지역의 경우에는 특정지역이름을 넣어서 뽑도록 매뉴얼이 되어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사진 출처 - 노컷뉴스 유력한 사건 용의자가 구속된 상황에서 사건 제목을 붙이려면 사건가해자의 이름 이니셜 정도와 사건유형 정도만 표기해도 적당하지 않을까 싶다. 서울과 같은 대도시의 경우 무슨 동이라고 해도 사건이 일어난 곳이 어딘지 정확히 알 수가 없지만 작은 규모의 시군단위 경우 동과 면단위만 적시해도 사건이 일어난 위치를 금방 알 수 있다는 점에서 필요이상으로 상세하게 위치를 알려주는 기사내용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도시생활의 특성상 자기일이 아니면 관심도 가지지 않을뿐더러 쉽게 잊히기도 하지만 아직 이런저런 연줄로 연결되어 있고 공동체문화가 남아있는 작은 시군단위에서 일어난 중범죄는 주변 사람들이 입는 상처도 여러 가지 면에서 크고 깊을 수밖에 없다. 우리 언론이 중한 범죄사실을 보도하는데서 이해할 수 없는 처사 중의 하나는 미성년자 피해자의 이름사용도 있다. 성인들 사건에서는 그렇지 않은데 미성년자 특히 초등학생이하 어린 피해자의 사건경우에는 피해 어린이의 이름을 붙여 ‘00이 사건’과 같은 제목을 붙이는 경우를 종종 접하게 된다. 정치권에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러한 사건의 재발방지를 위해 피해자 아동의 이름을 인용한 ‘00이 법’을 제정하겠다고 호들갑을 떤다. 중범죄일수록 굳이 사건 이름을 붙이자면 가해자의 이름이 제목에 들어가야 할 것이고 그것도 피해자가 어린이라면 남아있는 가족들의 상처를 생각해서 더더욱 신중을 기해야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범죄 사건이 크던 작던 간에 어떤 범죄 사건이 일어났을 경우 우리는 그 사건을 통해서 사회적 교훈을 얻고 다시는 그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데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 바람직한 사회 시스템일 것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특정지역과 특정인이 고통 받게 되는 시스템이라면 우리는 그 과정에 대해 한번 점검을 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최근 경북 모 지역에서 일어난 어린이 살해사건의 제목은 역시나 지역이름이 앞에 들어간 ‘00 계모 사건’이다. 지역이름도 문제지만 ‘계모’ 역시 문제다. 친모, 친부 사건이란 기사 제목은 들어보지 못했지만 ‘계모’와 ‘계부’가 자식에게 불미스런 사건을 일으켰을 때는 어김없이 그 제목이 붙는다. 결혼하는 다섯 쌍 중 한 쌍이 초혼과 재혼, 혹은 재혼과 재혼의 결혼인 상황에서 재혼가족들이 저런 기사를 보는 기분은 어떨까 싶다. 언론에서 아름답고 훌륭한 미담기사가 많이 나오는 사회가 힘들다면 불편한 기사로 힘들어 하거나 고통 받는 사람들을 최소화 할 수 있는 언론환경이었으면 좋겠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245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