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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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젊은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젊은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아현(인권연대 연구원),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사무국장), 서동기(대학생), 손상훈(교단자정센터 원장), 송채경화(한겨레21 기자), 이동화(아디 사무국장), 이상재(대전충남인권연대 사무국장), 이현정(꽃씨네농작물 농부), 이회림(○○경찰서), 허창영(광주교육청 조사구제팀장, 전임 간사)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 장애인이 나오는 영화! 장애인 문제를 다룬 영화? 장애인이 만드는 영화......  - 김형수/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사무국장 「김 교수님이 새로운 학설을 발표했다. 소리에도 뼈가 있다는 것이었다. (중략) 한 학기 내내 그는 모든 수업 시간마다 침묵하는 무서운 고집을 보여주었다.(중략) 그의 견해는 너무 난해하여 곧 묵살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 다음 학기부터 우리들의 귀는 모든 소리들을 훨씬 더 잘 듣게 되었다. 」 ( 1984. 기형도 시집 [입속의 검은 잎] 중에서 소리의 뼈.) 우리에게 지금까지 보여진 것들·····  왜 장애코드이고 장애인 캐릭터인가?  ‘문화’는 타일러(Tylor, 1871. 1. 1)가 정의하듯, 한 사회 집단이 공유하는 생활양식의 총체(a whole way of life)로써 지식·신앙·예술·도덕·법·관습 그리고 한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인간에 의하여 획득된 능력과 습성을 포함하는 복합적인 전체다. 뒤집어 말하면 어느 특정한 집단의 능력과 습성, 즉 그 존재성을 구별할 수 있고 인식할 수 있는 ‘실천’ 및 ‘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는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현대의 영향 있는 문화 ‘매체’다. (ex. 도가니 2011, 감독 황동혁)’에서 목격하듯이. 또한 그 자체가 또 하나의 ‘문화’를 이루고 있다. 수많은 지역에서 진행되는 장애인 영화제와 제작되고 있는 장애인 영화들 다큐멘터리 등등에서. (ex. 글러브 2011, 감독 강우석). 그렇게 영화는 문화의 산물이자 문화의 ‘도구’이다. 또한 산업이기도 해서 소비되고 소모된다. 산물이자 도구이며 산업이기 때문에 영화의 구성요소와 코드들과 기호들은 서로 관계가 있고 서사적이며 권력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영화는 ‘극장의 우상’ 효과와 ‘동굴의 우상’ 효과를 함께 일으킨다. 우리는 영화가 전달하는 이야기를 영화관에 불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성찰하거나 피드백하기 어렵다. 그 상태에서 우리는 영화가 전해주는 사물이나 대상을 바라보는 가치관 및 관점을 보고 따라가고 몰입하고 감동한다. 영화의 막강한 힘은 매체로서의 파급력(필름 복사를 통해 전 인류가 동시간대에 볼 수 있다)으로 드러나는데, 이는 사람들의 물리적 공간을 재배열하고 일상생활의 많은 활동들과 장소들을 시간적으로 재조직하면서 우리 사회의 관계 자체를 변화시킨다.  그래서 문화로서의 영화는 기존의 생각을 바꾸어 놓기도 하고 새로운 가치를 일깨워 주기도 하지만, 왜곡된 가치관이나 잘못된 관점을 부여하기도 한다.1)  영화는 진실을 만들고 진실을 발견하기도 하지만, 본의든 아니든 간에 진실을 숨기고 왜곡시키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영화 속 캐릭터로서의 장애인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거 대부분의 장애인 영화 - (여기서 ‘장애인 영화’는 공식 용어가 아니다. 장애인 영화가 여성 영화나 페미니즘 영화나 퀴어 영화처럼 정체성을 가지고 장르화 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 -가 ‘장애인의 것’과 ‘비장애인들의 것’을 확연히 다른 것처럼 억지로 나누고, 다시 그것을 서로 비교하여 충돌시키면서, 그 관계를 긍정적으로 재통합시키지 못하고 되레 왜곡시키고 있다. 왜냐하면 절대 다수의 비장애인 관객은 장애인이라는 사회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 존재를 영화라는 거대한 매체를 통해 우선 접촉하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 영화에서의 장애 코드는 이야기의 논리성과 상상력을 완결하기 위해서 표현되는 장애를 가진 인간 캐릭터의 ‘완성’이나 ‘발견’이 아니라 인간 캐릭터의 왜곡과 두려움, 상징이 주된 목적이었다. 장애 코드를 영화 기호화 하는 것은 장애를 가진 당사자가 등장한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게 그들은 대상화 되었고 그들의 장애는 커밍아웃하는 것이 아니라 강제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아웃팅 되어왔다. 또한 장애 자체나 장애인이란 캐릭터가 영화라는 것과 직접적으로 긴장 관계를 가진 것은 한국 영화에서는 얼마되지 않았다. 한국 영화에서의 장애코드나 장애인의 등장은 주로 문학과 텍스트영역에서 변용되고 각색되고 재구성되어왔다. (ex. 소설 <백치 아다다> - 1935년 5월 조선문단에 발표한 계용묵의 단편소설이 1956년과 1987년 두번에 걸쳐 영화로 만들어 졌다. 1956년은 이강석 감독에 의해 ‘백치 아다다’, 1987년엔 임권택 감독에 의해 ‘아다다’라는 이름으로 개봉됐으나 영화적으로 재창작되는, 즉 패러디되거나 풍자됐다고는 보기 어렵다. ) 우리나라 영화 중에 ‘만종’(An Evening Bell, 1970)이란 영화가 있다. 한국 영화중 최초로 수화가 비중있게 나오면서 농아인 연인들이 우여곡절 끝에 결혼을 한다는 이야기인데 둘 사이에 결합을 방해하는 것으로 한 의사가 ‘장애가 유전된다’는 잘못된 정보를 활용하는 부분이 나온다. 이 영화가 수화를 사용하는 남녀 주인공이 등장한다는 의미이외에도 그 시대의 장애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도 잘 드러내고 있다.  이런 흐름이 90년대까지 이어 오다가 2000년 초 각종 인권영화와 여성 영화 및 퀴어 영화들의 등장으로 장애 코드와 장애인 캐릭터는 본격적으로 영화 자체와 긴장 관계를 가진다. (ex. 오아시스 2002. 감독 이창동.) 영화 ‘오아시스’의 등장은 영화에서 장애코드와 장애인 캐릭터의 본격적인 논쟁의 시작이었다. 영화 기호로서의 장애여성에 대한 묘사, 이야기, 비장애인 주연 배우가 장애 연기를 하는 것에서 촉발된 장애인 당사자 배우 등장에 대한 논쟁 등이 그것이다. 장애인을 연기했고 장애인 문제를 다루었던 것이 장애인 영화냐 아니냐 하는 장르적 토론까지 영화적 담론을 뜨겁게 끌어냈던 영화였다. 아마도 감독이 가족 중에 장애인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영화 기호로서의 장애와 영화 주제로서의 장애인 또는 장애 코드 등등. 즉, 어떤 주제를 그 영화에서 잘 형상화 해내기 위해 장애인이 그려졌는가? 아니면 장애인을 형상화한 영화인가? 하는 문제의식이었다. 2)  그리고 이런 영화를 시대 흐름에 따라서도 분석하고 분류했다면 글쓴이가 드러내고 싶은 주제의식이 –고정 관념의 변주와 확장에 따른 장애인 캐릭터의 변화- 이  더욱 분명해 질 수 있겠다.     매체는 문화적 경험을 매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라는 메시지를 그 매체를 통해 무의식적으로 강요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 위협받게 되는 문화적 경험을 결정한다.  이는 비장애인에게나 장애인에게나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과거에 영화를 통해 드러난 장애 코드는 장애인에게는 자기 장애를 극복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을 심어 주고 비장애인에게는 장애인들은 우리가 먼저 이해하고 무조건 사랑해 주어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 준다. 그리고 우리들은 은연중에 삶의 방식을 강요받게 된다. 장애인을 약하거나 나쁘게 혹은 왜곡되게 그리는 영화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을 있는 그대로 다양하게 그리는 영화가 없다는 사실을 비판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미 짜여진 의식이나 틀에 의해 만들어진 장르로서의 장애인 영화는 역설적이게도 끊임없이 파괴되어야 한다. 장애 코드도 마찬가지다.  이제 우리가 보아야 할 것들······.  “청각장애라는 것은 장애(handicap)가 아니다. 이것은 문화이고, 언어이다. 그리고 나는 청각장애인인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만약 의학이 발달해 내 청력을 돌아오게 할 수 있다 하더라도, 나는 결코 그것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결코, 결코 내가 죽을 때까지...”   미식축구선수 영화배우청각 장애인 존 림니즈 청각장애는 또 다른 문화다. (The Deaf Celebration of Separate Culture)  나의 개성, 나의 장애, 나의 영화. 우리는 결코 성립되지 않는, 적어도 납득할 만한 규정이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 용어들을 아주 쉽게 사용하곤 한다. 일상에서야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대충 소통이 되지만 사실은 분명치 않은 용어 말이다. 그런 용어 중의 하나가 바로 ‘영화 언어’이다. 앞으로 규정해야 할 대상이 그 규정 전에 전제되는 논리의 오류가 발생한다. 장애가 무엇인가에 대한 규정도 할 수 없으면서 영화에서 장애 코드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장애인이 등장하는 (비장애인이 등장하는 또는 장애인이 직접 연기하는) 것이 장애 코드인가? 장애인 문제를 다루면 그게 영화에서 말하는 장애 코드인가? 장애인 감독이 연출하고 영화에서 장애인들이 직접 자문을 해주면 장애 코드가 충실히 반영된 영화인가?  장애인의 문화 행위와 문화 실천이 ‘문화’ 그 자체로 인정받을 수 있으려면, 먼저 ‘장애(Disability)’ 자체가 문화적으로 가치 있어야 한다. ‘장애(Disability)’가 문화적으로 가치를 지닌다면 ‘장애인’ 역시 문화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할 수 있을 것이고, 문화적으로 가치를 지닌 ‘장애(Disability)’ 상태의 사람들이 생산하고 누리고 즐기는 문화 역시 사회적인 힘과 영향을 지닌 문명으로서의 ‘장애인 문화’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꼭 항상 긍정적일 필요도 없고 좋을 필요도 없다. 다양하고 풍부하게 있는 그대로 영화에 나오면 그만이다. 장애가 흡연보다 나쁘지는 않으니까. 3)  ‘장애’가 과학적으로 사회적으로 가치 있음을 검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핵심은 ‘장애’ 자체가 문화적으로 가치 있다고 믿고 신념으로 확인해야 우리들에게 그 가치가 부여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장애’가 가진 소수성을 창조하고 획득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소수성을 창조하고 획득하고 확인 하는 과정을 통해 영화에서의 장애 코드는 완성될 것이다.   tvN 드라마 ‘마이 디어 프렌즈’처럼, 주인공이 3년 전에 사고 당했다는 설정을 고려하면 오히려 사실적이다.    미국 영화 ‘SuperHero Movie (2008, 한국제목:잠자리맨)’를 보면 유명한 장애인 과학자 ‘스티븐 호킹’이 온갖 비속어를 내뱉으며 자기비하를 일삼아 관객들에게 웃음을 주는 패러디 장면이 나온다. 우리나라에서는 코메디 프로그램이나 영화 등에서 장애인을 비하하는 장면이나 대사가 가끔 등장하면 미국에 비해 훨씬 민감하게 반응하며 사회물의를 일으키기도 하는데, 그 미국 영화의 개봉 이후 호킹 박사나 장애인 단체 등이 문제제기를 하거나 소송을 했다는 소식은 찾을 수 없다. 왜 그럴까? 외국의 경우 개그의 소재로 장애인이 등장해도 별문제가 없는 것은 아마도 누가 보더라도 장애인 당사자라고 인식할 수 있는 캐릭터가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이면을 폭로해 웃음을 유발하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은 아닐까?  논의를 막는 도구로써 문화는 장애인 개인이나 집단의 개별성으로 도드라지는 문화가 아니라, 장애인들이 비장애인들의 주류 문화에 용해되어 자신들의 장애를 ‘극복’하거나, 불굴의 의지로 인간 승리를 하거나, 가능하다면 적극적으로 감추어야 하는 것으로써 ‘장애’를 사회화시키는 중요한 기제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가 끊임없이 중요한 주제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정치의 이용가치 때문인지도 모른다. 장애인과 그의 장애가 뭔가 멋있고 강력하고 폼나는 것으로 표상된다면(피터팬의 후크선장처럼), 장애가 손해나 패배로 작용하지 않는다면(미국 드리마의 명탐정 뭉크처럼), 그런 문화실천과 행위로 문화를 생산할 수 있다면, 장애인의 문화 그 자체가 장애인의 정체성을 바로 세워주고 그들에게 자부심의 권능을 심어주고 그들의 삶에 긍정적인 에너지로 발산하게 될 것이다(미국 애니메이션 ‘드래곤 길들이기’의 절단 장애 소년 주인공과 투슬리스 용처럼). 자신의 장애가 인생의 멍에나 고통이 아니라 뛰어난 문화 콘텐츠 아이콘으로 변환된다면, 장애인의 장애를 기적과 구원의 대상이 아닌 향유하고 즐겨야 할 예술로 만들어 낼 수 있다면, 비장애인으로 하여금 그 문화를 닮게 할 수 있다면 장애인 문화는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미국에서 시청률 1, 2위를 달렸던 미국 드라마 ‘Glee’를 보면 실제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는 소녀가 고등학교 치어리더로 등장하면서 극의 진행을 이끌고 있으며, 유명한 ‘C.S.I’에서는 시즌별로 약 2편씩 발달장애인 당사자를 주인공으로 에피소드가 진행된다.  그리고 철저하게 자폐인의 관점에서 미국의 동물학자를 다룬 영화 ‘템플 그랜딘(Temple Grandin)’도 개봉했다. 그 실존 주인공은 정보 공유 강연 사이트(Ted)에 나와 15분 동안 ‘우리 사회는 왜 자폐를 필요로 하는가’란 제목으로 대중강의를 진행하기도 했다. 미국 제작자들은 반드시 제작 과정에서 장애인 당사자들을 참여시킨다. 이는 장애인 당사자들을 실제로 주연 배우로 등장시켜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그들의 삶을 세밀하고 일상적으로 그리기 위해서다. 그렇지 않다면 극으로서의 재미도 떨어지지만, 장애인 당사자에게 당장 장애인차별금지법으로 고소당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미국에서 코미디 소재나 풍자의 소재로 발달장애인이 희화화된다 하더라도 넘어갈 수 있는 것은 장애인 당사자들 스스로 그것에 대한 방어권을 행사할 기회가 많을 뿐 아니라 희화화한 것 외에도 장애인을 멋있고 능력 있게 그려낸 다른 다양한 콘텐츠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화 스타워즈 다스 베이더처럼, 영화 아이언맨처럼. 그리고 아카데미 최연소 최초 여우주연상을 받은 농아인 배우 말리 매틀린(Marlee Matlin) 4)처럼.  템플 그랜딘(Temple Grandin, 1947년)은, 보스턴 출신 미국의 동물학자이다. 비학대적인 가축시설의 설계자이며, 콜로라도 주립대학 준교수이다. 초등학교 졸업 후 좋은 지도자를 만난 덕분에 1960년대에는 뉴햄프셔 주 린지에 있는 기숙학교 햄프셔 컨트리 스쿨에 들어가 1970년에 프랭클린 피어스 컬리지에서 심리학 학사, 1975년에는 애리조나 주립대학 에서 동물학 석사, 1989년에 일리노이 대학에서 동물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10년 그녀의 이름을 딴 극 영화가 제작되어 2011년 1월 미국 LA서 열린 제17회 미국배우조합상(SAG) 드라마 부문 여우주연상을 받기도 했다. 물론 장애인당사자가 주인공을 맡지는 않았지만 그 누구도 이영화가 당사자의 관점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근자에 와서야 1960년대 바보 캐릭터 ‘영구’가 만든 발달 장애인에 대한 이미지를 ‘내 마음이 들리니’라는 드라마를 통해서 겨우 넘을 수 있었고, 영화 ‘도가니’를 통해 장애인의 현실을 ‘착한 일’, ‘좋은 일’로, 도덕적 면죄부에서 벗어나 외면하고 있던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이제야 시각 장애인을 그릴 때는 시각 장애인에게 물어보고 청각 장애인에게 자문을 구하고 그들을 참여시키기 시작했다.  우리는 언제쯤 장애인 배우가 주인공이 되는 영화를 스크린에서 볼 수 있을까? 장애를 극복하지 않고 인정하는 것이 진정 자아를 찾아가는 올바른 길임을 강조하고, 굳이 장애코드를 드러내지 않고 장애인을 등장시키며 네 장애는 가치 있고 의미 있다고 재미있게 설득하는 ‘X-man’이나 ‘닥터 스트레인지’ 같은 영화를 만날 수 있을까?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며 본질을 통찰하고 다름을 인정하고 익숙해지자는 류 감독의 장애인 캐릭터 상의 시도는 중요한 출발이 될 것이다.  이와 더불어 문학에서 예능으로, 그리고 사진 영역으로까지 넓혀보자. 그래서 장애인을 문화 속에서 새롭게 해석하고 새롭게 창조해보자. 물론 이를 위해서 장애인들의 영화적 창작 활동이 적극적으로 확대되어야 할 것이고 기존 영화마당에도 장애인 당사자들이 더욱 많이 뛰어 들어가야 할 것이다. 메가폰을 들고, 카메라를 들고, 조명판을 들고, 시나리오를 들고서. 특히 보다 많은 지적 자폐성 장애인들이, 정신 장애인들이, 희귀 장애인들이.      「당신의 편견에 도전하라. 아니면 그것들이 당신에게 도전할 것이다. - 미국 드라마 스타트렉 엔터프라이즈 시즌 1기 4부 중에서」 1) 우리가 문둥병이라고 잘못 부르는 한센병은 현대에 와서 의학적으로는 단순 전염성 피부병에 불과하다. 하지만 여전히 ‘문둥이’란 단어는 그 어떤 모욕어나 차별어보다 그 힘이 강하다. 문둥병이란 호칭은 단지 당사자에 대한 차별을 넘어 아직까지도 자식들이 파혼까지 당할 수 있는 세대간 차별이나 전지구적인 모욕을 야기한다. 오죽했으면 지난 1월 일본의 유엔 친선 대사가 "폐기된 용어를 차별적 의미로 사용"한다고 개탄하면서 "문둥병"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말자고 촉구하고 유엔인권위원회에서 결의문까지 발표했을까? 한센병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공포를 사회화 시키는 가장 강한 무기 중 하나가 ‘영화 벤허’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아직 그것을 뒤집을 만한 영화는 나오지 않았다.   2) 전자의 대표적 예인 찰리 채플린의 <City Lights>에 나오는 시각 장애인인 꽃 파는 소녀는 이 영화에서 하나의 영화적 형상화를 거친 언어일 뿐이었다. 채플린은 시각 장애를 가진 소녀가 어떻게 해서 룸펜을 재벌이라고 여기게 되는가를 형상화 해내야 했다. 그래서 마침내 그는 교통이 매우 혼잡한 곳을 오락가락하다가 모퉁이에 주차해 있는 리무진의 한쪽 뒷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다른 쪽 문으로 나오는 방법을 썼다. 눈먼 소녀는 무거운 차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는 ‘재벌’이 값비싼 차에서 내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후자의 예로는 1995년 베니스 영화제 은곰상 수상한 팀로스의 비열한 거리 (1994)에 나오는 장애인 폭력배, 우리나라 영화 <그 섬에 가고 싶다>에서 심혜진이 밑은 정신 장애인, <고래 사냥>에서 이혜숙이 분한 실어증 언어 장애인등이 있다. 3) 뮤지컬 ‘킹키부츠’에서 주연 배우가 여장남자를 혐오하는 사람들에게 대응하는 대사를 변용했다. 4) 1986년 《작은 신의 아이들》로 영화 데뷔를 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이 데뷔작을 통해 아직까지 깨지지 않는 기록을 만들어 놓고 있다. 하나는 현재까지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유일한 장애인 연기자라는 기록이며, 또한 그가 수상했던 여우주연상은 해당 부문의 역대 최연소로 기록되고 있다(수상 당시 21세 218일). (출처-위키백과) 
2018-10-31 | hrights | 조회: 55 | 추천: 1
서동기/ 대학생  강력 범죄가 발생한다. 가해자 X의 잔혹한 범죄와 피해자의 참혹한 피해가 연일 언론에 정밀하게 묘사된다. 가해자의 심신미약, 정신질환에 의한 형벌 감경 가능성이 언급된다. 분노는 더욱 타오른다.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는 강력 처벌을 요구하는 청원이 등장하고 많은 이들이 동참한다. 사악한 X의 신상 공개결정이 내려진다. 끔찍한 짓을 하고도 살아있는 뻔뻔한 X의 얼굴과 목소리는 브라운관과 4G, 5G의 인터넷망을 통해 실시간으로 전국에 중개되고 가해자에 대한 각종 분석과 피해자 가족의 고통에 찬 일상이 후속 기사로 따른다. 그리고 조금 뒤 X는 어디선가 등장한 또 다른 사악한 X’로 대체되어 있다.  며칠 전 친척들 여럿이 모였다. 대화는 ‘피시방 살인사건’으로 흘렀다. 어른들은 뉴스에서 본 범죄의 잔혹함을 공유하고, 아이들은 페이스북에 담당 응급실 의사가 올렸다는 글을 이야기한다. 범죄의 잔혹함에 치를 떨고, 사형을 해서라도 강력하게 처벌해 재발을 방지해야 한다고 분노한다. 그리고는 각자 조심하라는 안쓰러운 당부로 대화는 마무리된다. 누구나 이러한 사건이 재발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것이다. 하지만 슬프게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지 않나. 아마 이러한 사건은 다시 발생할 것이다, 하지만 그때도 비슷한 패턴으로 사건을 지나갈 수는 없지 않은가. 사진출처 - pixabay  우리 사회를 다시보자. 가해자의 가족을 끈질기게 쫓고, 주변인들을 찾아내어 온갖 가십들이 사명감에 찬 언론에 의해 근엄하게 보도된다. 이번 사건에는 담당 응급실 의사까지 등장했다. 피해자 담당 의사는 피해자의 참혹한 상태와 분노를 SNS에 작성한다. “목덜미에 있던 상처가 살이 많아 가장 깊었다.” 등의 자세한 설명이 이어지는 글은 20만의 공감을 받으며 퍼져나갔다. 담당의는 자신의 글이 ‘가해자의 엄중한 처벌과 진상 조사, 재발방지’의 도화선이 되길 바란다고 말한다. 언론의 사명에 찬 보도와 응급의학과 의사의 분노 표출은 무언가 닮아있다.  다수 언론의 보도와 모 의사의 사명감에 찬 분노를 보면서 ‘주석궁으로 탱크 진격’을 말하던 이른바 ‘대북강경파’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은 과도할까. 그들의 주장은 과격한 언어와 묘사를 기반으로 형체 없는 분노와 적대심만을 재생산한다. 그것이 결국 오래토록 분단 상황을 고착화해왔음을 우리는 경험했다. 이런 ‘수구적’ 행태에 언론과 모 의사의 선의에 찬 경솔함을 빗대는 것이 과도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는 우리 사회의 죽음과 사건사고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음, 해결의지 없음을 방증하는 것은 아닐까. 단지 분노에 차서 엄벌을 말하고 주목경쟁을 하는 것으로 우리는 아무 것도 넘어설 수 없다.  냉정하게 지금 우리 사회가 정밀 묘사해야 할 것은 무언인가. 통계청이 발표한 2017년 사망원인 통계에 따르면 작년 한 해 자살로 12,463명, 운수사고로 5,028명, 산업재해로 2,040명의 사람들이 세상을 떠났다. 하루에 자살로 34명, 운수사고로 14명, 산업재해로 5.5명이 죽었고 비슷한 숫자의 사람들이 올해도 죽고 있을 것이다. 한편 타살로 세상을 등진 이들은 지난해 총 415명이다. 과도한 분노 표출과 이를 자극하는 주목경쟁들이 가해자 하나를 엄벌에 처하자고 목소리를 높이는 동안 우리 사회의 주목받지 못하는 죽음은 그렇게 이어지고 있다.   엄벌을 통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도 명확하다. ‘조두순 사건’ 이후 흉악범에 대한 처벌이 강화되어 유기징역의 가중 상한이 최대 50년까지 늘었지만 사악한 X는 X’가 되어 끊임없이 등장해왔다. 이것은 단순히 형벌의 강화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보여준다. 사명감에서 비롯된 비판(의식)과 범죄에 대한 분노가 단순히 가해자에게 엄벌을 내리게 하는 것에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분노와 엄벌을 넘어서는 논의와 정치, 장치를 마련해야 하는 숙제 앞에서 우리는 너무 비슷한 패턴으로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다.
2018-10-29 | hrights | 조회: 47 | 추천: 4
 손상훈/ 종교투명성센터 운영위원, 교단자정센터 원장  지리산에 산적이 나타났다는 언론보도가 있었다. 잠시 놀랐지만 바로 수긍이 갔다. 시민단체 참여연대와 인근 주민들이 낸 조계종 천은사의 관람료 징수문제다. 안진걸 참여연대 시민위원장은 "2000년에 참여연대가 문화재 관람료 문제로 공익소송을 해서 대법원이 부당이득이라는 판례까지 나왔다. 그런데도 지켜지지 않았다"며 문화재 관람료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현재 문화재 관람료를 징수하는 사찰은 약 70곳이다. 문화재를 보유한 사찰 500여 곳 가운데 일부만 징수하는 것이다. 불국사 등 사찰관람이 중심인 경우 시민들의 불만이 거의 없다. 그러나 사찰을 방문하지 않고 국립공원을 주로 이용하려는 시민들은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한다. 당연한 지적이고 개선되어야 할 과제다. 2018년 3월에도 국회에서 의원실과 단체들이 토론회를 열어 해결방안을 논의했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해결을 위한 제도개선은 미흡하고 조계종은 침묵하고 있다.  조계종은 최근 10년간 시민들에게 받은 관람료의 사용 내역부터 공개해야 한다.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소장은 “문화재 관람료를 받는 것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어떻게 쓰이는지 먼저 관람료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지리산 천은사에 대해서는 "이렇게 길을 막고 돈을 받는 것은 국민 재산권 침해다"라고 했다. 지난 수십여 년 간 조계종 총무원이 수억에서 수십억대의 국고보조금을 횡령하는 등의 부정부패 사건이 나면 사찰재정투명화, 관람료내역 공개를 수습방안으로 내놓았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한 번도 제대로 쓰임새가 공개된 적 없다. 왜 이럴까. 정치권이나 정부 관련부처, 사정당국이 눈감고 나 몰라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계종의 눈치를 보고 여야가 민원과 항의에 겁내고 있다는 의견도 있다.  조계종을 비롯한 불교계 시민사회단체와 조계종 신도단체는 지난해부터 함께 행동하여 ‘조계종 총무원장’을 퇴진시키는, 현대불교사에 새로운 사례를 만들었다. 1994년 조계종 교단개혁은 승려와 재가불자가 함께 했다면 2018년은 평신도(재가불자)가 주도했다는 차이가 있다.  지난해부터 최근까지 수만 명이 서울 종로 보신각에서 촛불법회와 행진을 했다. 조계종의 적폐청산을 위한 기자회견을 열고 ‘천막 정진단’을 만들어 싸웠다. 우리 나이 80세 가까운 스님의 40여 일간의 단식에 많은 시민과 이웃종교, 시민사회, 언론인들이 함께 해준 지원이 큰 힘이 되었다.  불교계의 미흡한 역량만으로 이룰 수 없는 성과를 만들었다. 임기 1년 안팎인 현직 총무원장이 탄핵되는 역사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 아니라 제 잇속을 지키려는 이익집단인 약 300여명의 승려들이 전두환 식 체육관 선거처럼, 그들만의 잔치로 인물만 교체되었고 문제점은 여전히 그대로 인 상황이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최근 조계종 총무원 문화부장에 임명된 승려는 징역형의 유죄판결을 받은 인사다. 경기도 S시 시장이 이 승려에게 뇌물을 받고 사법처리를 받았다. 이 승려는 납골당 사업으로 막대한 이익을 챙겨 고위직 승려에게 상납했다는 의혹과 함께 미국 라스베이거스 해외원정팀이 실무를 추진했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불국사 종상승려 등과 함께 미국 여행을 추진한 여행사 자료가 엠비씨 피디수첩에 공개되기도 했다. 나라에서 세금으로 지원하는 템플스테이 지원예산과 폐사지 복원예산, 전통사찰지원관련 예산을 나누는 총무원의 부장(사회로 치면 장관급 인사)이 되었으니 ‘세금’을 어떻게 사용할지 ‘매의 눈’으로 지켜봐야 할 상황이다. 산적에 이어 세금 먹는 아귀의 탄생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다.  지리산의 산적을 없애는 방법은 참여연대에 이어 종교계, 시민사회, 시민들이 대규모 소송인단을 모집해 다시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에 문제를 제기해 보는 방법이 있다. 이번 단풍철에는 지리산 국립공원에 가보자. 사찰을 가고 싶지 않음에도 길목에서 입장료를 여전히 받고 있다면 인터뷰도 하고, 녹음도 하고, 입장료를 낸 영수증도 모아보자. 이웃 종교인들과 시민사회가 이런 단풍철 운동을 다시 시작할 때 신임 조계종 총무원장이 호응해 주길 기대한다. 지난 10여 년간 관람료 사용 내역을 낱낱이 공개해 모든 이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 연간 수백억 원을 직간접적으로 지원받는 조계종 사찰들이 지켜야할 최소한의 의무이다. 국고보조금과 관람료 지출내역도 투명하게 처리하지 못하면서 조계종 지원예산만 늘리려 하는 것은 종교의 대표적인 악습이다. 신임 총무원장은 합리적인 관람료 개선책을 통해 시민의 신뢰를 회복하길 촉구한다.
2018-10-17 | hrights | 조회: 151 | 추천: 6
이회림/ 00경찰서  제 고향 경주는 온통 무덤 천지입니다. 계절마다 색다른 자태를 뽐내는 보면 볼수록 매력 있는 무덤들 천지입니다. 한 달에 한 번이라도 못 보면 그리운 마음까지 듭니다.  보통 무덤은 교외나 산에 숨어 있는데 경주는 동네마다 크고 작은 고분 공원이 있습니다. 임신한 언니와 함께 무덤을 탑돌이 하듯이 돌며 산책하고, 세상 밖으로 나온 조카를 안고 나와서도 산책하고 또 얼마 뒤 걸음마를 배우게 된 조카의 손을 잡고 나오기도 합니다. 이 정도면 죽은 자와 산 자가 더불어 사는 땅이라고 해도 말이 되는 것 같습니다. 안 그런가요?  네 살 배기 조카가 산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모! 저기 되게 큰 무덤이 있어!”라구요.  ‘산’이라는 단어와 ‘산’의 모양을 배우기 전에 무덤, 고분, 능, 이런 단어들을 먼저 배운 조카 입장에서는 아주 당연한 반응일 수밖에요. 산이 삶이라면 무덤은 죽음일진데, 제 조카의 눈에는 크다 작다의 차이 정도인가 봅니다.  드니 빌뇌브 감독의 영화 ‘컨택트’ 에서는 언어학자인 여주인공이 어떤 특별한 경험을 통해 과거와 미래를 관통하는 삶의 비밀을 알게 됩니다. 그 여주인공이 알게 되는 비밀이라는 건, 이름 모를 고분들이 그들의 존재 자체로 웅변하는 그것과 일맥상통했습니다. 아직 영화를 못 보신 분들을 위해 그 비밀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누설하지 않겠습니다. 눈치빠른 분들은 이미 알아차렸을 것 같지만요. 사진 출처 - 필자  지금 저는 정면으로 커다란 고분이 내려다보이는 카페의 2층 창가자리에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 자연스럽게 깎여서 만들어진 부드러운 능선을 보고 있노라면 제 마음도 덩달아 보들보들 잘 다듬어 지는 듯 한 느낌이 듭니다.  창밖은 조금씩 땅거미가 내리는지 대기가 푸르스름해 지기 시작합니다. 저는 이 시간대의 풍경을 참 좋아하는데요. 이렇게 해가 기울기 시작할 때부터 하늘이 석양에 물들고 해가 질 때까지의 시간을 ‘매직 아워’라고 부른답니다.  사진·영화계의 전문 용어인 ‘매직 아워’는 날이 밝아오기 시작하는 새벽녘부터 일출 직전까지, 해 진 후 땅거미가 지는 저녁녘부터 어둠이 덮이기 직전까지를 일컫습니다. 대기에 푸른빛과 붉은빛, 밝음과 어둠이 공존하면서 매혹적이고 극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특별한 시간이죠.  요즘처럼 디지털 카메라가 보편화되기 전에는 필름 카메라를 이용해서 사진을 찍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노출계를 따로 사서 하늘과 땅, 건물, 사람 등 내가 프레임에 담고 싶은 것들을 향해 들고 노출값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지금 제 앞에 보이는 풍경을 예로 들어, 큰 무덤과 그 앞을 지나가는 빨간 점퍼를 입은 사람과 무덤 뒤로 보이는 갈색빛 나무 그리고 하늘까지 모두 한 프레임 안에 담고자 한다면, 이렇게 4 개의 피사체가 가진 각각의 노출값을 찾아낸 후에는 이들의 평균값, 즉 ‘적정노출’을 도출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노출값이라는 것은 햇빛의 변화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것이고 특히 해질 무렵이 되면 색온도의 변화가 가장 많아 적정노출 값을 완벽히 구하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그래서 사진 찍기 가장 불편한 시간일 수가 있는데요, 아이러니하게도 이 순간에 가장 색감이 풍부하고 아름다운 사진이 찍힙니다.  영화감독 테렌스 맬릭은 ‘천국의 나날들’이라는 영화의 야외장면을 모두 ‘매직 아워’에 찍었다고 합니다. 정확히는 그 당시 시력을 잃어가고 있던 촬영감독 ‘네스트로 알멘드로스’에게 맬릭 감독이 모든 야외 장면을 인위적 조명 없이 부드러운 자연광으로, 오직 ‘매직 아워’에만 찍어 달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맬릭 감독의 이 같은 고집 덕분에 황금빛으로 물결치는 밀밭을 배경으로 ‘세계 영화 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라는 찬사를 받는 영화가 탄생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모든 사람의 내면엔 절반은 천사, 절반은 악마가 있다.”  이 영화 안에서 관찰자 역할을 하고 있던 소녀의 대사입니다.  매직 아워에 촬영한 덕분에 어스름 속의 사물과 풍광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면서도 무슨 일이 일어날 것같이 낯설고 불안하기도 한 미묘한 느낌을 줍니다. 영화는 그렇게 마술 같은 순간들을 화가가 점묘화를 그리듯이 섬세하게 담아냅니다. 매직 아워는 낮과 밤의 경계에서 변화무쌍한 노출값을 가지고, 천국의 나날들은 선과 악의 경계에서 아름답게 빛납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좋은 순간, 나쁜 순간을 동시에 품에 안고 살아갑니다. 특히 범죄 피해 경험을 가지면 그 나쁜 순간이라는 것이 정말로 진하게 눈앞에 불쑥 불쑥 나타나니 참 귀찮기도 하지요.  그런데 이런 모든 좋고, 나쁜  순간들을 모두 모아놓고 저기~ 멀리서 쳐다 보다보면 아주 변화무쌍하고 아름다운 장면일 수도 있습니다. 마치 매직 아워에 노출이 마구 변하지만 가장 풍부하고 아름답게 남듯이 말이죠. 자~ 10월 초이니, 슬슬 가을 향기가 진해지려하는 경주입니다.  올 가을에는 당일치기든 1박 2일이든 모두 경주여행 한 번 오시기를 권합니다. 무덤 위로 내려앉는 석양과 매직 아워, 저 혼자 즐기기엔 미안할 정도로 사랑스러우니까요! 어서오이소~~
2018-10-04 | hrights | 조회: 83 | 추천: 2
김아현/ 인권연대 연구원  그들은 어디에나 있다. 수원과 인천을 떠들썩하게 했고 제주를 놀라게 했다. 최근에는 어린이대공원 초입에서 벌어진 일이 과천을 두려움에 빠뜨렸다. 세상 곳곳, 옛날부터 지금까지, 매우 다양한 양상으로, 언제나 있어왔다. 살인자의 이야기다.  하지만 어쩌면, 그들은 어디에도 없다. 사람을 죽이는 일과 같은 무거운 범죄도 사람이 사는 곳이면 일어나는 일이지만, 잘 돌아보면 생각만큼 자주 일어나지는 않는다. 자주 일어나지 않기에 더 요란하게 알려질 뿐이다. 그리고 ‘누가’ 그런 일을 저질렀는지 알려질 즈음이면 그들은 빠른 속도로 세상과 격리된다. ‘정체가 드러난 살인자’는 구속 수감되어 여러 미디어와 우리 공포 속에서 회자될 뿐, 지금 여기, 우리 곁에 있지 않다.  발각된 죄보다 조심해야 할 것은 아직 발각되지 않은 죄다. 발각되지 않아 합당한 처벌을 받지도 않았고, 참회와 교정의 기회도 아직 보장받지 못한 상태의 죄다. 그리고 발각되지 않은 죄보다 절망적인 것은, 죄를 쉽게 짓도록 하는 부정적인 외부영향이 고착화된 사회, 그 고착이 내내 개선되지 않는 사회다. 한 사람의 고통과 두려움이 증오와 혐오로 자라도록 방치하면서, 그의 잘못에 대해 처벌만 강화하는 사회다.  최근 몇 년간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일의 관계자라는 오명이 억울해, 스스로 생을 마감한 남자가 있다. 남겨진 그의 아이들은 아직도 친구들에게 아버지의 이름과 존재를 밝히지 못한다. 실명과 얼굴, 그를 둘러싼 혐의가 모두 알려진 사람의 자식이라는 것이 밝혀진다면 그 이후 일어날 것이라 예상되는 일들 때문이다. 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진실이 밝혀지고 명예가 회복되기 전까지 아마 숨죽여 살, 어린 시절을 지배하는 대부분의 기억이 두려움과 공포일 아이들의 미래는 어떨까. 인간의 모든 범죄는 어린 아이의 방황에서 시작된다(<레 미제라블>에서 인용).    ‘자기가 저지르지 않은 잘못으로 평생 대신 손가락질 당하는 것이 응보이고 정의인가’ 묻는다면, 그렇다고 답할 사람은 많지 않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쉽게, 심지어 사회 정의라는 이름으로, ‘피의자의 가족, 범죄자의 아들, 살인자의 어머니, 악인의 아버지’로 호명당하는 사람들을 만들어낸다. 사진 출처 - freepik  피의자 얼굴 공개를 두고 오랜 논란이 있었다. 그런데 과천 어린이대공원 살인사건 피의자의 얼굴이 언론에 공개되던 최근에는 분노 비슷한 것을 느꼈던 것 같다. 말 그대로 ‘시대착오적’이다. 경찰과 우리 사회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다. 그는 용서받기 힘든 끔찍한 죄를 저질렀고 응당 벌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아직 재판이 시작되지 않아 당연히 형이 확정되지 않은, 우리가 법적으로 ‘피의자’라 부르기로 한 사람을,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매장시키고 ‘알 권리’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남겨진 그의 가족에게 ‘보복’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경찰은 지난 1년 반 동안의 개혁 논의를 통해 도출한 몇 가지 결론들을 대대적으로 공개하며, 인권경찰로 거듭나겠다고 했다. 인권침해진상조사단의 조사 결과를 발표하며 국민의 인권을 적극적으로 침해해온 과오를 반성하고 달라지겠다고 했다. 개혁을 위한 입법 논의도 진행하는 중이다. 좀 떠들썩하다 싶게 의지를 다지고 있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 시점, 이러한 시대상황에서, 말과 행보를 일치시키는 최소한의 염치는 있었어야 했다.  경찰이 이러한 사건 피의자의 얼굴을 공개하는 법적 근거는 2010년 신설된 특정강력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이하 특강법) 8조 2항이다. 이후 2011년 개정을 통해 피의자의 얼굴, 나이, 성명 등 신상에 관한 정보를 공개할 수 있는 전제조건을 강화했다. ‘국민의 알 권리 보장, 피의자의 재범방지 및 범죄예방 등 오로지 공공의 이익을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해 공개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밝혀진 살인’이야 말로 재범의 위험이 가장 적은 범죄 가운데 하나다. 살인이 피의자의 얼굴을 공개해서 예방될 일이라면, 우리 사회의 살인은 통계적으로든 체감으로든 점점 줄어들었어야 했다. 그리고 강호순과 신창원이 검거되던 시점의 얼굴을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아무런 이익도 되지 않는다.  이것은 정의가 아니다.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지도 않는다. 재범 방지는 물론이고 예방조차 할 수 없다. 피의자 얼굴 공개를 통해 우리가 얻을 이익은 아무 것도 없고 다만 파생되는 고통과 비극의 계보만 있을 뿐이다. 득보다 실이 많다면 바꾸는 게 문명사회다. 특강법 8조 2항에 관한 전면적인 논의가 이뤄져야 할 때다. 범죄자의 얼굴과 그의 가족을 궁금해 하는 우리 마음 속 특강법 8조 2항도 함께.
2018-09-12 | hrights | 조회: 471 | 추천: 11
이동화/ 아디(아시아인권평화디딤돌) 활동가  로힝야 여성인 카리마 카툼(20)님에게 1년 전 사건은 영원히 깨어날 수 없는 끔찍한 악몽이다.  “(2017. 8. 25.)점심 기도 시간이 지나고 남편이 모스크에서 돌아왔어요. 식사를 준비하는데, 갑자기 군인들이 들어오더니 아무 설명 없이 남편에게 총을 쐈어요. 그렇게 남편을 잃었어요. 그리고 그들은 저를 강간하려 했고, 저는 저항했어요. 그러자 옆에서 울고 있던 두 살 아들을 땅에 던지고 총을 쐈어요. 땅에 있는 아들을 껴안으려 손을 뻗자 군인은 제 팔목에 총을 쐈어요. 그리고 정신을 잃었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헛간은 까맣게 타 있었어요. 가족이 저와 아들을 마을 의사인 소피 울라에게 데려갔죠. 아들을 응급처치 했지만 가망이 없다고 했어요. 마지막 젖도 물리지 못한 채 그렇게 아들을 떠나보냈어요.”  - 조진섭 사진사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 영상(2018. 8. 30.) 중 일부 발췌  우리에게도 뉴스를 통해 알려진 로힝야 난민사태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1년 전 미얀마 군부에 의해 자행된 학살은 미얀마 정부의 공식적 진상조사도 책임자 처벌도 없이 수천, 수만 명의 로힝야 사람들의 몸과 마음속에 섬뜩한 공포로 기억되고 있다. 불과 몇 달 만에 100만 명이 넘는 로힝야 난민이 형성한 난민촌에는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의 빼곡한 천막 막사가 산비탈을 중심으로 위태롭게 존재하고 있다. 수만, 수십만의 난민들이 형성한 사회는 강한 역동성을 보이지만 그 미래가 밝아보이진 않고 그 곳에서 만난 아이들은 우리네 아이만큼이나 호기심 많고 해맑지만 그 내면의 미소는 슬퍼 보인다.   방글라데시 로힝야 난민캠프 중 하킴파라 난민캠프 사진 출처 -세계봉공재단촬영, 2018. 6. 8.  로힝야 사람들에 대한 한국 온라인 댓글에 “영국에 부역한 로힝야 사람들” “자업자득” “일제시대 프락치와 로힝야는 동일하다”는 식으로 여전히 비하와 혐오로 가득하다. 도대체 로힝야 사람들이 한국 네티즌에게 무슨 잘못을 했을까 싶다. 백번 양보하여 로힝야족이 과거 영국식민지였을 때 나쁜 짓을 했다 치더라도 2만 5천 명(외국 연구보고서) 사망자 중 절반 이상이 어린아이들이고 성폭행피해자만 1만 9천 명이라는 참혹한 현실 앞에서 70년 전의 과거는 현재의 학살을 정당화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지난 8월 24일, 아디를 포함한 한국의 시민사회는 로힝야 학살 1주기 추모행사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는 행사를 가졌다. 그리고 한국에서 로힝야 난민으로 살고 있는 파티마님은 행사 막바지에 이렇게 이야기했다.  “우리도 꿈이 있잖아요.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삶, 원하는 곳에 갈 수 있는 삶, 불쌍함이 없는 삶, 사실 우리의 꿈이 거창한 건 아닙니다. 로힝야가 아닌 사람들이 당연하게 누리는 삶, 우리는 그 당연한 삶을 꿈꾸고 있어요. 그리고 그런 삶을 누릴 수 있는 있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어요”  1년이 지난 오늘, 아직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다.
2018-09-05 | hrights | 조회: 94 | 추천: 7
이상재/ 대전충남인권연대 사무국장  보고 또 봐도 눈물이 납니다. 심지어 같은 장면을 몇 번을 봐도 눈물이 납니다.  이번 21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 장면을 보면서 참 많이 울었습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30여 년이 가까워져 오지만 TV 화면 속에 보이는 일백 살 무렵의 부모와 일흔 살 즈음의 자식들이 만나는 장면은 볼 때마다 특별히 더 슬프고 눈시울을 뜨겁게 합니다.  예전에는 마냥 슬프고 애잔한 마음만 들었는데 이번에도 상봉 가족들이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기약 없는 이별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남한과 북한 양측의 국가가 이산가족에게 너무 하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 자연스레 혼잣말로 욕지거리까지 나왔습니다.  인터넷으로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검색해 봤습니다. 1985년 ‘남북 이산가족 고향방문단 및 예술공연단’ 형식으로 당시 남측 35명과 북측 30명의 역사적인 첫 상봉이 이루어진 이후 올해까지 21차에 걸쳐 직접적인 상봉이 이루어졌고 일곱 차례 화상을 통한 만남이 있었다고 합니다.  통일부와 대한 적십자사가 함께 운영하는 이산가족정보통합시스템에 남아있는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 중 생존자는 5만 6천 명이 넘고, 신청했지만 상봉하지 못하고 사망한 신청자는 7만 5천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생존자 중 70대 이상의 고령 신청자가 85%이고 90세 이상이 1만 2천 명이나 되는 상황에서 이번처럼 한 번에 100명도 안 되는 가족의 만남으로는 이산가족의 염원을 해소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헤어진 가족을 한 번도 만나기 어려운 현실도 문제지만 한 번 만나고 그 이후 제대로 된 연락이나 만남을 이어가지 못하는 것도 상봉 가족에게는 또 하나의 큰 아픔입니다.  이번 21차 이산가족 상봉을 기념해 MBC 방송사에서 원로가수 현미 씨의 사연을 방송했습니다. 한국전쟁 때 두 여동생을 잃어버리고 남한에 정착한 현미 씨 남매들은 남북 간 정식 교류가 없던 1998년, 제3국 중개업자와 방송국의 도움으로 북한의 여동생 한 명과 극적으로 상봉합니다. 하지만 그때의 짧은 만남 이후 현미 씨는 동생 생각에 우울증에 걸려 치료까지 받아야 했고 20년 동안 남북 정부의 상봉 행사가 있을 때마다 신청을 해 봤지만 한 번도 재회의 기회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 여동생과 다시 만나기를 염원하던 현미 씨의 오빠와 언니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1985년 첫 남북 이산가족 상봉 이후 이산가족 상봉 행사는 남한과 북한의 정치적 상황변화에 따라 중단과 재개를 반복해 왔습니다.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공식적인 직접 상봉 행사가 21회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은 남한과 북한 양측이 이산가족의 상봉을 남북관계에서 서로의 입장을 관철하려는 정치적 이벤트이자 지렛대로 이용해 왔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처럼 전통적인 가족관에 대한 비판과 여러 급진적인 이론도 많습니다. 하지만 눈물과 감정이 남아 있을까 싶은 고령의 노인도 자식을 만나서 통곡하고, 형제가 죽어 대신 나온 조카를 만나서도 얼싸안고 우는 장면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적어도 헤어진 가족이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은 인륜이고 자연스러운 감정이라는 것일 것입니다. 그 자연스럽고 당연한 염원에 정치적, 외교적 조건과 잣대를 들이대어 국가가 통제하는 것은 잔인한 짓이고 반인권적인 처사입니다. 남한과 북한 정부는 가족이 생이별한 전쟁피해자인 한반도의 이산가족들에게 전쟁 이후부터 지금까지 어쩌면 잔인한 고문을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유엔의 고문방지협약에서 정의한 고문의 정의는 “한 사람 또는 다수의 사람이 단독, 당국의 지시에 의해 다른 사람으로부터 정보나 자백을 받아 내거나 또 다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고의적, 또는 제도적으로 불합리하게 고통을 당하게 함으로써 정신적 및 육체적 해를 가하는 행위”라고 되어 있습니다. 고문에까지 비유하는 것은 너무 심하다고 하는 분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정의를 찬찬히 읽어보면 한국전쟁 이후 남과 북으로 헤어져 자유롭게 만나지 못했던 이산가족들은 정부 당국이 다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제도적으로 불합리하게 하는 과정에서 고통을 당하고 정신적으로 해를 입고 살았습니다. 긴 세월 동안 이산가족들은 광의의 의미에서 고문을 당하고 살았던 것이지요.  시시때때로 변하는 복잡한 외교와 정치 상황에서 어쩌면 고정불변의 정답과 대응정책은 존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끝난 지 65년이 지나도록 고통 받는 남과 북의 이산가족 상봉이 더는 정치와 외교의 기회와 조건 카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얼마 전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한 발언에 이산가족문제의 정답은 다 나와 있습니다.  “최근 5년 동안 3600여 명이 매년 돌아가셨고 올해 상반기에만 3천명 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분들이 헤어진 가족의 생사조차 알지 못한 채 천추의 한을 안고 생을 마감하신 것은 남과 북의 정부 모두에게 부끄러운 일입니다. 이제 그분들의 기다림이 더 이상 길어져서는 안 됩니다. 이산가족 상봉을 더욱 확대하고 속도를 내는 것은 남과 북이 해야 하는 인도적 사업 중에서도 최우선적인 사항입니다. 남과 북은 더 담대하게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정기적인 상봉행사는 물론 전면적 생사확인, 화상상봉, 상시상봉, 서신교환, 고향방문 등 상봉 확대방안을 실행해야 합니다. 특히 오래전에 남북 합의로 건설된 금강산 이산가족 면회소를 건설취지대로 상시 운영하고 상시상봉의 장으로 활용해야 할 것입니다......”  이 발언내용이 현실화 될 수 있도록 남과 북의 정치 지도자들이 하루빨리 만나서 결과를 내왔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2018-08-22 | hrights | 조회: 254 | 추천: 4
- 장애인 인권의, 장애인 인권에 의한, 장애인 인권을 위한 그림책 김형수/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사무국장 “과거에는 백과사전을 찾아보면 정답을 알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는 구글에 검색하면 수만개의 답이 올라와 있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어떤 게 진실인지 아닌지는 스스로 결정해야 합니다.“ - 안드레아스 슐라이허/ OECD 교육 및 기술부 총책임자 1. 관련 동화나 창작물이 절대적으로 늘어나야 한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인권과 연관된 콘텐츠의 등장은 2002년 12월 11일, 국가인권위원회가 개최한 인권동화책을 활용한 인권교육 워크숍을 통해서이다. 이것 역시 기존에 존재하는 동화책이 아닌 처음부터 인권교육을 목적으로 창작한 동화를 통한 워크숍이었다.   시민사회 영역에서는 1997년 정권의 탄압을 피해, 최초로 홍익대학교에서 인권영화제가 열린 것을 계기로 인권을 알리고, 각성하고, 실천하기 위한 창작물-콘텐츠의 필요성을 알게 되어 인권과 관련한 동화책 목록을 작성해서 책으로 내기도 했다.  (어린이 인권교육에 눈을 돌리게 된 계기는 인권단체인 ‘인권운동사랑방’ 대표 서준식씨의 옥중서신이었다. 지난 97년 보안관찰법 위반으로 구속된 서 씨가 자신의 아이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서 어린이에 대한 인권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됐다. 처음에는 창작동화도 생각했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많은 노력이 들 것 같아 기존 동화를 변형하기로 하고, 지난 1월 말부터 지금까지 모두 400여 편의 동화를 검색해 주제별로 분류해놓았다. 앞으로 600여 편의 동화를 더 검색한 뒤 초고에 들어갈 계획이다. 물론 수많은 국내외 동화를 검색하고 주제별로 분류해야 하는 방대한 작업을 차 변호사 혼자서 하지는 않는다. 2년 전부터 한결법인에서 함께 일하는 박세진(26·오른쪽)씨가 러시아문학을 전공한 경험을 살려 차 변호사를 돕고 있다. 한겨레21 1999년 03월 18일 제249호. 인권동화로 재미있는 인권교육을)  유엔 세계 인권선언 발표이후 어린이 인권교육을 위한 인권선언의 개념을 담아 이야기한 동화책 및 그림책은 외국에서 많이 제작되었고 이미 그림책 자체가 문맹자와 모든 사람을 위한 인권과 존재와 욕망의 그 자체이자 이유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인권을 알고 인권을 배우고 인권을 실천하는 인권교육 자체가 ‘인권’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림책을 쓰고 그림책을 읽고 그림책을 통해 무엇을 배우는 것이 인권의 시작이다. 그림책이란 것이 존재하려면 그것을 읽는 사람, 모든 사람을 독립적인 존재로 주체적인 독자로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애인을 이야기하려하고 장애인을 만나려하고 장애인을 해석하려는 그림책은 그것을 읽는 사람들에게 장애인을 독립적인 존재로 인정하게 하고 장애인과 감정을 공감하게 하며 간접 경험을 만들어 준다. 장애인이 실제로 등장하든 그렇지 않든 그림책을 통해 장애인을 이야기하고 그들을 만나고 해석하는 것, 상상하는 것은 의미가 깊다. 장애인 당사자에게 존재의 의미를 일깨우고 그들의 이야기를 창조하고 다른 사람과 공감하고 교류할 수 있다면 더욱 그러하다.  그래서 무엇보다 다양한 장애인에 대하여 그것을 직접 드러내고 있든지, 아니든지 다양한 인권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그림책이, 관련된 창작물이 많아져야 한다. 존재를 인정하고 그들에 대해 말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쉽게 주의 깊게 자주 들을 수 있어야 한다. 1)  무엇보다 그림책은 예술이며 예술은 사람들에게 향유되어야 하고 향유되는 사람들에게 행복과 즐거움을 주어야 한다. 인권교육은 그 행복의 나라로 가기 위한 도로이며 다리이자 나침반이다.   그런데 문제는 인권이 단순히 존재를 인정하고 이야기하고 공감하고 교류한다면 차별을 없애고 인권을 실현할 수 있느냐이다. 경험적으로 전통적인 동화책이나 그림책들은 성역할을 고착화화고 여성과 빈곤, 외모를 비하하고 배제하는데 더 도움을 주었다는 비판을 피해갈 수 없다.  이것은 역시나 장애인 인권 동화에도, 그림책에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 의도와 상관없이 그림 및 삽화들은, 이야기들은, 책들은 편견을 만들고 이미지를 고착하며 파생된 다양한 재창작물은 가치를 다르게 만들기도 한다. 2)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다시 문제 제기해보아야 한다. 전통적인 동화들이, 인권의 이름으로 창작한 그림책들이, 인권교육을 목적으로 쓰여진 그림책들이 과연 장애인 당사자에게 장애인으로서의 자부심을 주고 즐거움을 주고 있는가? 카타르시스와 위로를 주고 있는가? 장애를 진실로 다름이나 차이로 만들어 주고 있는가? 차별과 혐오를 넘어 통합과 인권으로 실천하게 하는가? 2. 작가가 중요한가? 독자가 중요한가? 교육자가 중요한가? 비판적 읽기와 재해석 및 재창조 - 더 중요해진 것은 소프트웨어, 그것을 구동하는 사람이다.  인권교육의 목적이 인권을 알고 인권을 공감하는데 그치지 않고 차별을 막고 인권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것에 있다면, 만들어진 그림책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기존의 인권교육 운동을 하고 있는 전문가들은 반인권 그림이든, 잔혹 그림책이든, 전쟁을 독려하든 페미니즘이든, 노동자의 인권을 이야기하든 크게 상관은 없다. 교육의 지루함만 극복할 수 있다면 – 교육 시간 자체에서 이미 어린이들과 그림책을 즉석에서 창작하고 이야기하고 상상한다 - 어떤 그림책이든 인권으로 읽고 인권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장애인 인권 그림책의 양적 질적 향상, 내용과 구조의 실험에도 이 그림책들이 순수하게 책과 독자로만 만나게 자연스럽게 그냥 놓아 둘 수가 없다. 인권을 실천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보다 능동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내용물을 인권으로 비판적으로 해석하고 교육할 수 있는 능력, 자원, 전달체계가 꼭 필요하다.  인권적으로 가치 있는 그림책이 되어야 하지만, 그림책 자체로도 가치가 높아져야 한다. 그림책은 그래서 그 독자층을 넓히고 접근을 쉽게 하고 상상력과 해석을 자극하기 위하여 그림책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하고 팝업북(pop-up Book) 등으로 실험되고 도전되어야 한다.  시각장애인이 읽을 수 있는 그림책 - [도서] 시각장애인 엄마, 그림책을 읽다. 이와타 미쓰코 저/정숙경 역 BF북스 | 2012년 5월 -, 오디오북도 아주 많아져야 한다. 사진 출처 - 구글 3. 모든 ‘그림’에는 결국 결말이 없듯이 모든 ‘인권’에는, 모든 교육에는 ‘결말’이 없다.    장애인 그림책은 계속 창작 되어야 한다. 프리퀄과 스핀 오프 시리즈까지 장애인 정체성을 강화하고 차별을 금지하는 책은 끊임없이 나와야 한다. 우리가 함께 이야기해야할 장애는 참 많고 실천해야 하는 인권은 계속 변화하고 진화한다. 장애는 어렵고 버겁기도 하지만 그림책과 이야기는 쉽고 재미있기 때문이다. 특히 책은 전기가 없어도 단말기가 없어도 오래 보존하고 공유하기 쉽다. 언제든 우리에게 상상력을 제공하고 실천할 수 있는 에너지를 준다. 스스로 알을 깨면 새 생명이 되지만, 남이 깨주면 요리감이 된다. - 강남구, <청춘, 거침없이 달려라> 1) 인공와우를 한 인형, 휠체어를 이용하는 인형, 다운증후군을 가진 인형을 제작하는 토이 라이크미 운동. 2) 스코틀랜드의 극작가 제임스 배리 경의 연극 "피터 팬: 자라지 않는 아이" 및 동 작품의 소설판인 "피터와 웬디" 에 등장하는 악역 캐릭터 한손이 갈고리(hook)라 후크 선장은 원래 애꾸눈이 아니다. 그를 애꾸눈으로 만든 것은 90년대 컴퓨터 게임회사가 만든 캐릭터를 통해서이다.
2018-08-01 | hrights | 조회: 165 | 추천: 3
서동기/ 대학생  ‘학교 밖 청소년’들은 우리 교육 시스템에 대한 살아있는 저항이자 교육 시스템의 실패에 대한 살아있는 증거다. 지방선거 후 다시 시작된 ‘진보 교육’의 시대에 ‘학교 밖 청소년’들을 위해 가장 최전선에 나서야 할 사람들은 바로 ‘진보 교육감’들이다.  ‘학교 밖 청소년 지원에 관한 법률(학교밖청소년지원법)’에 따르면 학교 밖 청소년이란 초등, 중등학교 과정에서 3개월 이상 결석하거나 취학의무를 면제 받은 청소년 또는 고등학교 과정에서 제적이나 퇴학 처분을 받거나 자퇴한 청소년들 정규 국가교육과정에 진학하지 않은 청소년 모두를 통칭한다. 매년 6만에서 7만 명의 청소년이 학교 밖으로 나오고, 학령기 청소년의 6%에 해당하는 38만 7천 명 정도가 전체 학교 밖 청소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학교밖청소년지원법’에 따르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그들에 대한 지원계획을 수립하고 실태조사와 상담. 교육, 취업, 자립 등을 지원한다. 현재 학교 밖 청소년들에 대한 지원은 여성가족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운영하는 ‘학교 밖 청소년지원센터’에 의하여 이뤄진다. 지원센터들은 청소년들을 위한 검정고시 학습, 취업을 위한 교육을 진행 중이지만 이마저 학교 밖 청소년 중 20% 가량이 참여하고 있을 뿐 추적조차 되지 않는 청소년들이 많다. 사진출처-pixabay  지난 몇 년간 학교 밖 청소년지원센터에서 청소년들을 만나고 교육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교육 역시 대개 검정고시 합격을 위한 과목 교육에 지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지원센터들은 ‘대학생 멘토’ 들을 저렴하게 고용하여 그들을 통해 검정고시 합격만을 목표로 하는 교육을 제공한다. 그나마 학교 밖에서 국가에 도움을 청하는 20%의 학생마저도 국가와 우리 교육 시스템은 적당한 구색만 맞추고 방치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교육부 등 국가교육시스템 안에서 학교 밖 청소년의 소외는 노골적이다. 법률 내에서 교육시스템의 역할은 학생들이 학교 밖으로 나가는 경우 학생들의 인적사항을 지원센터로 전달하는 것에 그친다. 교육부와 정부는 그들을 교육의 대상으로 상정하고 있지 않다. 국가교육시스템의 실패로 정규교육에서 이탈한 청소년들은 다시 배움의 사각지대에 방치된다.  현장에서 만난 청소년들은 각자 학교 밖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자퇴 후 일상의 무기력함을 토로하는 학생부터, 학교 밖의 현장에서 여전히 최저시급도 받지 못한 채 배달 아르바이트를 지속하는 학생, 진로를 고민하고 대입을 준비하고자 하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방황 하는 학생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학생들이 있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모두 우리 교육 시스템의 실패로 인해 배제되고 사각지대에 다시 방치되어 있는 학생들이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학교 밖 청소년을 우리사회는 단지 골칫덩이로 여기고 있을 뿐이다. 청소년들의 폭력 범죄 사건이 터질 때면 학교 밖 청소년들은 문제의 원흉으로 언급된다. 어떤 사건이 있을 때 우리 사회는 그들에 대해 반짝 관심을 내보이고 처벌 강화를 쉽게 외친다. 하지만 그 이전에 우리 사회의 마땅한 책임과 의무를 다 했는지 물었을 때 기존 시스템의 수혜자들과 책임 있는 자들은 부끄러움을 느껴야 마땅하다. 그 대표가 바로 진보 교육감들이다.  지난 6월의 지방선거에서 전국 17개의 교육감 선거구 가운데 14곳에서 진보 교육감 후보가 당선되었다. 교육감 직선제의 시행 이후 진보 교육감은 2010년 6곳, 2014년에 13곳에서 당선되며 지속적으로 세를 확장해왔다. 동시에 이번에 당선된 14명의 진보 교육감들 중 11명은 현직 교육감이다. 이들이 교육 정책의 연속성, 책임성을 확보하여 능동적으로 정책을 펴나가야 할 책무는 적지 않다.  진보 교육감의 시대가 다시 시작되었다. 3기 민선교육감 시대가 시작되며 이제는 진보 교육감만의 새로운 시도와 기존의 교육과 다른 무엇을 제시해야 할 때가 되었다. 학교 밖의 청소년들을 새로운 교육 실험의 대상으로 삼아 우리의 제도권 교육의 문제점을 성찰하고 다른 교육의 가능성으로 만들어 나가는 것은 어려운 일일까? 학교 밖 청소년과 진보 교육감의 만남이 참된 교육의 가능성을 여는 마중물이 되는 상상을 해본다.
2018-07-23 | hrights | 조회: 240 | 추천: 9
손상훈/ 종교투명성센터 운영위원, 교단자정센터 원장  답답하다. 20대였던 동국대 학생의 50여일 단식에 이어 88세 노승려가 30여일 째 단식하는 현실이 참담하다. 설조스님이 단식을 하는 이유는 언론에 알려진 설정 총무원장을 비롯한 조계종 최고위층의 공직사퇴, 그리고 실정법을 위반했다는 의혹을 철저하게 수사해 달라는 것이다. 바로 자승 전 총무원장을 비롯한 성폭행, 상습도박, 국고보조금 횡령의혹의 고위층 승려들을 말한다.  예수님과 부처님이 오늘 오셨다면 무슨 가르침을 주셨을까. 선이 악을 이기려면, 이토록 벼랑 끝으로 가야만 할 지 의문이다. 1919년 3.1운동 이래 촛불 혁명으로 한국사회 민주주의를 일구어 가는 민주사회에서 개인이 목숨을 걸고 싸우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찾아오길 기대한다. 매년 수백억 원을 갖가지 명목으로 국고보조금을 지원받는 조계종이 투명한 재정공개와 집행을 해 왔다면 상습도박과 공금횡령, 숨겨놓은 처자식(은처자) 사건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또한, 학력위조나, 논물표절(글 도둑질)도 아주 드문 일이 되었을 것이다. 최근 감사원의 감사가 시작되었다는 10.27법난특별법에 근거한 기념관 건립관련 집행도 문제투성이라는 의혹이 제기된 지 몇 년 만이다. 연간 수 백 억 원의 국민 세금에 더해 국회에서 특별법까지 만들어 추진한 일을 조계종 승려들이 맡으면서 몇 년 째 을 갖가지 핑계와 꼼수로 공적사업을 질질 끌고 있다. 조계종 총무원의 행정 처리는 부끄러워 입이 다물어질 지경이다. 이명박 대통령과 형님동생사이였던 자승 총무원장 시대여서 가능했고 종교권력을 두려워하는 사법당국과 정치권력이 여전히 존재하니 가능한 일이다. 늦었지만 감사원의 감사가 시작되었다고 하니, 제대로 된 감사로 재발방지 제도까지 제시하길 기대해본다. 감사원 개원이래 가장 멋진 감사가 이뤄지길 꿈꾼다. 이처럼 자발적인 청렴문화 자정기능이 상실된 조계종을 비롯한 극소수 종교계의 현실은 사법당국의 손에 민주적인 제도개선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긴박한 처지에 놓여있다. 지난 7월14일 조계종적폐청산을 바라는 시민단체가 개최한 집회에서의 구호도 ‘자승 구속, 설정 퇴진’이었다. 종교계 (특히 조계종)의 부정부패를 가볍게 다루는 사법당국은 규탄 받아 마땅하다. 사진 출처 - 불교포커스  특히, 검찰과 경찰이 종교계 최고위층의 위법사건에 대해 솜방망이 수사를 해왔고 지금도 눈감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또 꿈꾼다. 검찰은 지난 2011년 8월 경주 불국사 (경내) 승려들의 상습 도박 사건에 대해서 무혐의 처리했다. 자승 총무원장, 불국사 종상 관장 등 16명이 상습도박을 했다고 자수한 사람은 있었지만 처벌받은 사람은 없다. 재수사가 시작되었다는 뉴스가 나온다면 노스님은 단식을 중단하지 않을까 상상해 본다. 또한 경찰은 적광승려 납치, 폭행, 감금사건에 대해 재조사 하고, 기자회견을 열지 못하게 한 배후에 총무원장의 지시 여부, 관여 정황을 파악한다는 언론 보도가 있다면 조계종의 현재 상황은 많이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검찰과 경찰이 재조사에 나설 가능성이 없다. 이에 함세웅 신부님을 비롯한 시민 사회 원로와 종교계, 시민사회, 진보 단체가 공동으로 국민기구를 구성하고 의견을 모아 오는 7월19일(목) 오후에 설정 총무원장 면담, 청와대 면담 방문에 나선다고 한다. 설조 스님 단식장을 찾은 시민사회원로 사진 출처 - 불교포커스  그런데, 조계종 내부의 원로, 80년대 민주화운동을 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모 사찰의 방장이나 개혁승려는 여전히 눈치만보고 잇속만 차리고 있다. 아니 오히려 도박사건으로 유명해진 사찰답게 소속 승려들이 현 총무원의 호법부장, 유명사찰의 부주지를 맡는 등 실세가 되어있다. 차라리 차기 총무원장 후보라도 나서 생명을 살리는 일에 나서달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하는 웃지 못 할 처지가 되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라는 노래의 가사처럼. 1994년 아래로부터 함께 쌓아올린 성과를 극소수 승려들만 배불리고 호위호식하게 만든 결과가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자성이 드는 것은 왜일까.  이제 이 땅의 '흥부'들이 답할 차례이다. 어떤 영화에서 '흥부'는 "많은 이의 뜻을 받고 있는 이가 새 길을 열어주길,' 이라 했다. 이 영화에서 놀부는 ‘꿈꾸는 것도 죄다’라고 했던가. 우리 나이 88세의 노승려의 단식을 이용해 또 다른 권력을 차지하려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그래도 생명은 살려 놓고 민주주의의 절차에 따라 경쟁해야 옳다. 생명을 장물 삼아 권력을 탐하는 조계종 최고위층에 대해 지금 '흥부' 들은 ‘놀부’들에 맞서 함께 실천하고 더불어 꿈꿔 주길 요청한다.
2018-07-18 | hrights | 조회: 291 | 추천: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