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목에가시

‘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젊은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젊은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아현(인권연대 연구원),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사무국장), 서동기(대학생), 손상훈(교단자정센터 원장), 송채경화(한겨레21 기자), 이동화(아디 사무국장), 이상재(대전충남인권연대 사무국장), 이현정(꽃씨네농작물 농부), 이회림(○○경찰서), 허창영(광주교육청 조사구제팀장, 전임 간사)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김아현/ 인권연대 연구원  어쩌다 다행히도 저는 '읽고 쓰고 듣고 말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분들과 인연을 이어올 수 있었습니다. 비정상적으로 기운 운동장도 합법이고 질서로 여겨야 하는 세상입니다. 여기서 애를 써가며 하루하루 살아내시고 인권연대에 후원을 하시고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이를테면 '읽거나 말하는' 분들일 확률이 높습니다. 적어도 자기에게 닥친 문제는 스스로 해결할 수 있거나, 해결하는 방법을 알거나, 타자에게 연대를 요청할 마이크가 주어진 셈이겠지요. 하다하다 안 되면 짱돌을 드는 방법도 있겠지만 요즘은 다이소에서 짱돌이 아니라 LED 촛불을 팔더라고요. 자본의 촉이란 이렇게 정교하고 무섭습니다.  읽고 말하고 듣고 쓰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 살아온 지 10년이 넘어가는데도 여전히 저는 '나도 자료를 읽고, 정책과 예산이나 현안에 대해 의견을 내고, 내 말에 대한 반론의 요지를 듣고, 그에 대한 반박을 문서로 만들 줄 아는' 사람임을, 매번 최선을 다해 증명해야 합니다. 주로 외부에 나가서이지요. 시민운동을 하면서 이러저러한 각종 위원회 같은 곳에 참여할 기회가 종종 있어왔습니다. 그런데 회의에 가 보면 시민사회의 목소리를 반영하겠다는 의지가 읽히기보다는, 적당히 균형 잡혀 보이는 논의구조를 구성하기 위해 시민사회라든가 여성이라든가 젊은이가 습관적인 악세사리가 된 것은 아닌가 싶을 때가 많습니다. 늘 찬반을 공히 비슷한 비율로 구성해 진행되는 토론회처럼요.  알고 갔지만 기대하는 바-이왕이면 가만히 있어줄 것-에 충실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되든 안 되든 역할을 하려고 합니다. 회의 전에 자료를 숙지하고, 문제제기를 하고, 개선방안 마련과 자료 제출 요구를 합니다. 수차례의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한 마디의 의견도 내지 않는 고령의 남성, 전문직 위원도 있지만 공직사회는 그분들에게 늘 깍듯하고 서로간의 예의를 주고받습니다. 그분들은 공무원들에게 문제제기를 해서 불편하게 하지도, 자료제출 요구를 해서 야근을 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 문제제기가 필요할 때는 예의바르게 합니다. 웃으며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습니다. 존재 자체로 존중받으니, 저처럼 말을 많이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말도 많이 하고 요구도 많이 하는 저는 불편한 존재, 소위 ‘싸가지 없는 젊은 여자’로 여겨질 거라 예상해봅니다. 사진 출처 - Freephoto  최저임금 개악안을 두고 투쟁이 한창입니다. 세월호 유족들도 여전히 싸우고 있고, 강정의 해군기지 앞에서도 여전히 누군가는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사람’이라고 말하기 위해 길 한복판에서 옷을 벗는 방법을 택한 여성들도 있습니다. 한국에는 최저임금의 적용을 받는 노동자보다 그 영향에서 아슬하게 빗겨간 노동자가 더 많습니다. 세월호 유족이나 강정주민이 아닌 사람들이 더 많기도 합니다. 임금이나 사회적 위상은 아직 남성에게 더 많이 주어졌지요. 해서, 싸우는 사람들은 대부분의 경우 소수이고 약자이고 관찰과 평가의 대상입니다. 그리고 싸우면서 예의바르기란 힘든 일입니다. 좋게 말로 해도 될 일이었으면 애초 싸우지 않아도 됐을 테니까요. 예의와 매너를 갖춘 약자에게 강자는, 그만큼의 예의와 매너를 돌려주지 않습니다. 설득과 관철의 수단이 말과 글밖에 없는 약자들에게는 싸우는 과정에서 요구받는 예의가 마치 줄타기의 기술과 같습니다. 아슬하고 위태하게 균형 잡기 위해 잔뜩 긴장해봐야 겨우 중심잡고 서 있을까 말까입니다.  그러나 힘 있는 사람의 매너와 예의는 다른 차원입니다. 가진 게 많은 사람인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인기나 인지도 같은 상징자본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대개의 경우 상징자본은 실제 자본으로 이어지기도 쉬워서, 이 글에서는 그냥 ‘가진 사람’으로 퉁치겠습니다. ‘가진 사람’은 예의바를 수 있습니다. 좋게 말하고 웃으며 대해도, 화자의 의도대로 결과가 생깁니다. 싸울 필요가 많지 않습니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가진 사람’이 뭔가 요구하기 전에 이미 다 갖춰진 경우도 많을 것입니다.  ‘가진 사람’일수록 더 예의와 매너를 갖춰야 한다는 역설은 여기서 생깁니다. 이미 다 갖췄거나, 품을 덜 들여도 쉽게 얻을 수 있는 유무형의 자산에 대해 긴장해야 합니다. 세상에 당연히 주어지는 자산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 자산이 권력, 예컨대 선거에서의 득표와 같은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겠지요. 득표는 권력이라는 유형의 자산을 만들어냈지만, 득표를 형성하는 지지는 엄밀히 말해 무형의 자산이고, 형태가 없기 때문에 잃기도 쉽습니다.  지방선거가 여당의 압승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당선증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아니, 당선증을 받기도 전에 공중파를 비롯한 방송에서조차 유권자를 대하는 태도가 유별났던 몇 정치인을 떠올리며 이 글을 씁니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하루하루 싸워내며 호소하고 항의하는 ‘무례한’ 민원인들 앞에서, 비슷한 강도의 비매너로 일관하던 숱한 의원님들도 떠올립니다. 당신들은 틀렸고, 더 예의바를 필요가 있습니다. 예의바를 마음이 없어도 연기라도 해야 합니다. 그게 예의입니다. 기울어진 운동장도 질서로 여겨야 하는 세상에서 이런 요구라도 하지 않으면 숨통 트고 살 도리가 없습니다.
2018-06-14 | hrights | 조회: 459 | 추천: 26
밥도, 식판도, 필기도 다 우리에겐 인권이었다 김형수/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사무국장  민주 광장에 모였다 하면 일만 명이 족히 되었던 한총련 그들, 저들, 저들 중 백 명만 있으면, 아니 50명만 있으면 당장 경사로를 만들 수 있는데, 당장 점자책이라도 구비할 텐데. 수화 통역을 부를 수 있을 텐데... 저들은 일만 명이나 모였다면서 힘없이 경찰에 걸려 내가 탈출시켜야 하는 걸까? 정말 궁금했다. 그러나 그들의 논리와 주장은 참 궁금했지만 언제나 나를 만날 때마다 그들은 밥을 챙겨 주었고 내 식판을 제일 먼저 들어 주었고 늘 강의 노트를 빌려 주었다. 나는 그들을 미워할 수 없었다. 그 때는 밥이 ‘인권’이었고 식판 들어주는 사람이 ‘인권’이었고 강의노트를 빌려 주는 사람이 ‘인권’이었다. 그들은 통일을 위해서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것일까? 그래도 나에게 그런 선배들 밖에 없었다.   대학입학 때부터 유난히 나를 챙겨주고 신경써준 과선배가 있었다. 그는 이상할 정도로 하얀 얼굴이었고 하얗다 못해 창백했었고 목소리는 자주 쉬고 갈라졌으며 자주 세브란스에 입원했다. 어느 날 어디가 아파 세브란스를 다니냐고 물어 보았다. 그는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동문이라서 병원비가 싸다고.  그는 과에서 '천재'소리를 들었고 국문과면서도 특이하게 독일어를 잘했다. 제 2 외국어 독일어 수업을 버거워 하는 나에게 그는 병원복을 입은 채로 슬리퍼를 끌며 나에게 몇 시간이고 문과대 안터 나무의자에 앉아 공짜 과외를 해 주곤 했다. 그렇게 1학년 첫 학기 제 2 외국어 수업을 마치기도 전에 그 형은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곧 병원갈 일이 없을 거라던 형은 원래 백혈병을 앓고 있었고 함께 세브란스 검진 가자던 약속을 뒤로 하고 급성으로 악화되어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헤어졌다. 이상하게 최루탄으로 눈물이 날 때마다 그 형의 새하얀 얼굴이 떠올랐다. 그런데 자꾸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96년 여름방학 때는 학생회관 3층 적십자회 동아리방에서 한총련 집회가 끝날 무렵 별로 친하지도 않은 과선배 한명이 동아리방을 지나치며 나를 불렀다. 학교 서문 근처 기찻길 옆 옥탑 자취방에 가자고 했다. 동아리방에 쌓아둔 짐을 싸들고 오란다. 방학 때 목발을 사용하는 나를 받아주는 하숙집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형은 학원 강사를 오래 했는데 밤이 되면 오래된 프라이드를 몰고 나를 여의도 등지로 드라이브 시켜 주었다. 그리고 늘 이야기 했다. 건강하라고, 끼니를 챙기라고., 좋은 날이 올 거라고. 이번에는 이름을 기억했다. 김. 겸. 손. 언젠가 잘 되면 한우 갈비에 도가니 특으로 저녁을 대접하고 싶었다. 그런데 20여 년 지난 지금도 저녁을 사드리지 못했다. 사진 출처 - dreamstime.com 종합관 5층에서의 결의, 종합관 결의, 장애인인권동아리 게르니카의 탄생.  기숙사에서 문과대를 거쳐 종합관으로 올라가는 길은 무척 가팔랐고 아침 9시 1교시 수업에 지각하기 일쑤였다. 1학년 여름이 오기 전 어느 늦은 봄날 그 가파른 길을 목발로 쇳소리를 내며 가고 있는데 내 뒤로 95학번 동기 여학생이 따라 올라왔다. 종합관 3층 전공 선택 과목 수업 교실에 들어가기 전까지 그녀는 나를 앞질러 가지 않았다. 보통은 다들 앞서 지나 가는데 의아했다. 교실에 와서 뒤돌아보니 그녀가 훌쩍이고 있었다. 울고 있었다. 눈물을 흘렀다. 왜 우냐고 물었다. 그녀는 언덕길을 오르는 내 뒷모습이 너무 힘들어 보여서 슬퍼서 울었다고 했다. 내 뒷모습을 끝까지 보며  울어주는 여인은 그녀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몇 년 뒤 그녀는 결혼하고 외국으로 간다며, 나에게 청첩장을 주면서 밥을 샀다. 무언가 말을 해야 하지만 그때는, 그리고 지금도 그 인사와 그 밥의 의미를 잘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사준 그 밥은 지금도 늘 마음의 굶주림을 사라지게 해준다. 그녀의 이름은 남. 유. 정.  그렇게 전방부대 군대생활 같은 대학 새내기 생활이 끝날 무렵 같은 과의 휠체어를 사용하는 친구가 63빌딩 꼭대기가 내다보이는 캠퍼스 건물 꼭대기로 조용히 날 불렀다. 그는 세무 공무원을 아버지로 둔, 언뜻 보기에는 부르주아적 장애인이었다. 아침마다 기숙사로 와서 자기 차로 기숙사까지 나를 날라다 주곤 했었다. 그는 더 이상 대학 생활을 사람들의 친절과 배려만 가지고는 버틸 수 없다며 우리들만의 목소리를 내야하지 않겠느냐 했다. 왜 그는 가난한 날 붙잡고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일까? 당시에 나는 대학 내에 장애인 시설로 자원봉사 가는 중앙 동아리에 가입해서 활동하고 있었다. 동아리 사람들은 한 달 내내 동아리방에서 기타치고 놀고 술마시면서 한달에 한 번 겨우 재활원에 가서 한 두시간 봉사하고 오는 이상한 사람들이었다.  같은 학교에서 도서관을 못 들어가고, 승강기가 가지 않는 강의실은 수강신청 조차 하지 못하고, 화장실 대신 오줌통을 가지고 다녀야 하는 장애인 학생에 대해서는 때때로 개인적으로 도와주기만 할뿐 그들을 위한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개인적으로 사람을 구해서 활동보조를 쓰고 있던 그와의 회합을 통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의 목소리를 내고 우리끼리 만나고 모이는 동아리를 만들어 보자고 결의하였다. 이른바, ‘종합관 결의’, 95년도에 시행된 특수교육대상자 특별전형으로 입학한 장애인 대학생들이 장애인 인권운동을 전면에 내세운 전국 최초의 동아리였다.    얼떨결에 ‘결의’는 했는데 이름이 없었다. 사랑이니 봉사니 이런 낱말이 붙는 이름은 싫었다. 손발이 오그라들 뿐 아니라 사랑이니 봉사니 하는 것들은 일시적이고 미봉책일뿐 우리들에게 필요한 간단한 경사로 하나도 만들어 주지 못했다. 식판과 휠체어를 옮겨 주던 친구들은 군대로 가버리고 졸업하기 시작했다. 우리들에게 이름은 중요했다. 전동 휠체어와 목발을 쓰는 장애인 두 명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동아리의 활동 범위는 극히 제한적이었다.  이름 하나로 고심하며, 등록금 삼백만원 넘게 내는 대학 캠퍼스의 휠체어와 목발이 만나 변변히 회의 할 곳도 찾지 못해 친구 집에서 회의를 해야만 했다. 우리의 애잔한 모습을 보고 있던 미술을 전공했던 친구 동생이 보다 못해 한 가지 이름을 제안했다.  피카소의 ‘게.르.니.카’. 이건 뭐지? 우리가 미술 동아리인가? 장애인 인권 운동을 할 건데 웬 그림이름? 도대체 무슨 관계란 말인가? 숨겨진 심오한 뜻과 의미가 있는가? 진실을 이야기 하자면 이름을 붙일 때는 아무런 의미도 연관성도 부여하지 못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우리 조직의 이름을 듣고 수많은 질문을 해왔고 그 질문을 통해 우리의 존재는 각인되었다. 홍보면에서 대성공이었다. 게르니카가 5.18 광주와 같이 스페인 내전의 학살과 인권의 역사를 담은 작품임을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뒤였다. 동성애 운동과 여성 운동을 만나다.  이름도 지었으니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해야 했으나 우리는 막막하기만 했다. 같은 해에 입학한 12명의 장애인 학생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우리 활동에 아니, 존재 자체에 회의적이다 못해 강렬히 거부했다. 단 한 명, 지금 광진구 구의원 후보로 나온, 풍물패를 하고 있던 김주현씨 만이 우리의 결의에 동참했다. 그리고 교육대학원을 다니고 있던 수화를 쓰던 농아인 선배. 정. 희. 찬 그가 대학에서 제일 먼저 같은 장애인이 와서 반가워 해주었던 사람이었다. 대견해하거나 안쓰러워하지 않고 그는 몇 번이고 격하게 포옹해 주었다. 내가 수화를 잘 모르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대다수의 비장애인들이 우리들의 존재에 관심과 지지를 보냈다. 가장 뜨거운 사람들은 대학 최초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던 동성애 인권동아리 ‘컴투게더’와 총여학생회 사람들이었다. 중앙도서관 앞에서 한창 천막 농성을 진행하던 컴투게더 사람들은 우리에게 농성하던 자리와 천막을 남겨 주었다. 장애가 없지만 우리와 거의 같은 현상으로 차별 받고 억압당하고 배제당하는 또 다른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대학 오기 전까지 동성애라는 단어조차 몰랐던 이성애자였지만 그들은 우리의 경호원이었고 활동 보조인이었고 대변인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차별과 혐오를 벗겨내고 이겨내는 가장 빠르고 좋은 방법은 스스로 멋지고 좋은 사람이 되는 것, 멋진 장애인, 좋은 장애인이 되는 것이라고, 내가 만난 멋진 게이 형들이 가르쳐 주었다.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 장애인 두 명이 학생회관 아래에 서명판을 벌였지만, 경험도 없고 조직도 없는 우리들은 막막했고 서명 책상은 휑하기만 했다. 그렇게 뙤약볕 아래에서 고래고래 2~3시간 소리를 지르고 있었는데 갑자기 학생회관 3층에서 한 무리의 여성들이 무엇을 잔뜩 들고 내려왔다. 그들은 여학생회에서 나왔다면서 별다른 설명도 없이 아무것도 없는 우리 책상을 온갖 자보와 색상지로 꾸며 주면서 엄청난 김밥과 음료수를 안겨 주었다.  그들을 미리 만나거나 우리의 서명운동을 설명한 적이 없는데도 여학생회 사람들이 들고 온 색상지에는 이미 우리의 요구 사항들이 다 적혀 있었다. 그들은 3층에서 우리가 외치는 것을 다 듣고 정리했던 것이었다. 그 사람들은 그렇게 일주일 동안 우리의 식사와 간식과 서명 자보를 챙겨 주었고 동아리방이 없던 우리에게 총여학생회 한켠을 열어주었다.
2018-06-05 | hrights | 조회: 187 | 추천: 2
서동기/ 대학생  지난 노동절 우연히 저녁 라디오 뉴스를 청취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지난해 대선과 정권교체 이후 처음 맞이하는 노동절입니다. 하지만 촛불 이후 첫 번째 노동절 라디오 뉴스의 주된 보도들은 여느 해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양대 노총의 집회와 행사로 인해 교통정체가 심하다는 소식과 함께, 문재인 대통령의 “‘근로자의 날’을 맞이하여 노동이 제도에 의해 힘 있는 사람들에 의해 홀대받고 모욕 받지 않는 세상을 생각한다”는 메시지가 단신으로 간략하게 보도되었습니다. 그리고 노동절 소식에 세 배쯤 되는 분량으로 ‘대입수시개편안’에 관한 보도가 뉴스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라디오를 듣는 내내 왠지 모를 아쉬움과 함께 얼마 남지 않은 지방선거가 떠올랐습니다. 진보정당의 한 의원은 인터뷰에서 이번 지방선거를 ‘제2의 촛불’에 비유했습니다. 비유를 곰곰이 생각하니 ‘촛불과 마찬가지로 이번 선거에서도 진보정당들은 시민들을 자신의 지지층으로 설득하는 데 실패하려나?’하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촛불을 통해 탄핵과 정권교체를 만들어냈지만 여전히 시민들의 삶과 정치 속에서 진보정당들의 비중은 여전히 미약해보입니다. 촛불을 겪었지만 일반 시민들의 삶에서 진보정치의 가치와 비전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저 역시 어떤 진보정당에 투자하고 주변의 관심을 권하는 것이 주저되기도 합니다. 사진출처 - Pixabay  X께 편지를 드리기 위해 여러 진보정당의 홈페이지와 SNS를 방문하고 열심히 톺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작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자신 있게 표를 던지고 싶은, 주변에도 적극 권하고 싶은 정당을 발견하는 것이 꽤나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저와 관심 있을 만한 이들,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진보정치에 과감하게 표를 던질 수 있을지 물었습니다. 하지만 자신 있게 우리를 매력적인 가치와 비전으로 설득하거나, 설득하려는 정당과 후보를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진보정당들의 소중한 가치와 지향에도 불구하고 유권자를 설득하고 투표를 통해 같은 뜻으로 이끌어내기에 너무나 큰 거리감이 느껴졌습니다.  얼마 전 홍세화 선생님의 <공부>에 관한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변화를 위해 움직여야 하는 ‘운동(movement)’에 대해 열변을 토하신 부분이 강한 인상을 남겼는데, 한 진보정당의 ‘언더그룹사건’과 관련한 진상조사도 맡고 계심을 알고 있었기에 해당 부분은 더욱 자조적, 절망적 장면으로 기억에 남습니다. 진보정치와 운동의 기본 강령으로 흔히 ‘조직, 학습, 선전홍보’를 꼽지만 치열하게 반성, 학습하지 않는데서 기인하는 내부의 문제와 설득하지 못함의 문제. ‘노동자는 하나다’와 같은 예전의 구호를 관성적으로 반복하는 모습. 다만 알량한 조직을 지키려고 하는 초라한 현재의 모습을 지적하신 부분이 기억에 남았습니다.  촛불 이후 첫 번째 선거인 이번 선거가 진보정당에게 이전과 그리 달라 보이지는 않습니다. 정당의 중심 의제와 진보정치의 미래를 매력적이고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일반시민들이 적극 동참하도록 만드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단지 ‘선거를 치르는 것’에 의의를 두는 것이 진보정치의 목표는 아닐 것입니다. 용기 있게 선거에 나서주신 후보님께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뿌연 하늘의 대기를 걷어내고, 일상의 적폐들을 제거하여, 여성과 노동자, 일반 민중들 모두가 행복할 비전을 제시하고 실제로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큰 희망과 힘이 진보정치에 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촛불 이후의 촛불들’을 통해 수 없이 쌓여있는 일상의 적폐들을 밝혀내어 녹색의 정치, 여성의 정치, 노동자의 정치, 민중의 정치가 폭발하고 진지하게 논의되어 우리의 삶을 진실로 변화시키는 데까지 이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 역시 일상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손과 말이 닿는 데로 우리 진보정당의 비전들과 각 정당이 생각하는 가치와 비전을 끊임없이 알리고 설득하겠습니다. 소수정당에 대한 주류 정치의 배제와 수많은 차별 사례들을 굳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 정교한 반성과 목표설정을 통해 새로운 길을 만들어나가는 진보정치를 기대합니다. 후보님의 선전을 진심으로 기원하며 글을 줄입니다.
2018-05-25 | hrights | 조회: 132 | 추천: 3
손상훈/ 종교투명성센터 운영위원, 전 교단자정센터 원장  지혜로운 딸들이 함께 총무원장도 직접 뽑고, 대표 목사님도 직접 뽑는 그 날이 오기를 소원하며.  사랑하는 딸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란다. 아버지세대에는 익숙한 민주영령(민족민주열사), 친박단체 어르신들은 호국영령에 버금가지 않을까 하는 김동수 열사, 조성만 열사 같은 이름을 말이다. 지난해 인권시민단체 회원 가입을 권유했을 때 경쾌하게 대답했던 얼굴과 다른 딸의 모습에 속으로 많이 놀랐다. 사랑하는 딸은 영화감독을 꿈꾸고 있고, 다큐도 제작하고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했던 초등학생 때 보고 싶은 동영상 못 보게 하는 미흡한 아버지를 향한 얼굴이 떠올랐다.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과 욕구에서 일어난 표정. 복잡했고 원망어리기도 하고 화난 얼굴이기도 한, 뭔가 부탁하기라도 하는 그런 애뜻하고도 복잡한 속내가 드러나는 어린아이의 얼굴이었다. 그런데 2018년 5월을 살아가는 23살. 96년생 사랑하는 딸은 무심하게 처음 들어보는데 그 분이 누군데 하면서 딴청을 부리며 제 할 일을 한다. 섭섭했다.  여성 호르몬이 많이 분비되는 50대여서인지, 아니면 사랑하는 딸에게 소외당하고 있다는 근거 없는 억측이 들어서인지 모를일이다. 그래도 다시 차분하게 '딸아, 딸들아 일어나라, 많은 이의 행복을 위해, 함께 걸어가자'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한 여고생에 의해 처음으로 발의된 스승의 날 즈음에 참으로 난감하다. 민주영령, 처음 들어보고 그 분이 누구셔. 갑자기 멍해졌다. 아니 앞이 캄캄해졌다. 그동안 뭐하며 살았길래 딸도 모르는 짝사랑을 했는지. 이십여 년 아니 삼십 여년의 활동 가운데 가족과 진심으로 공유한 일이 얼마나 되는지 세워보았다. 참으로 몇 건 되지 않았다. 내 삶의 50여년의 교훈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묻고 싶었다.  내 종교자유인권을 탄압했던 학교 교목이셨던 성경선생님은 도박으로 구속되셨고, 내 모교에서는 학생강제예배가 지금도 지속되고 있다고 한다.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조계종립종합대학인 동국대는 여전히 선택할 수 없는 종교의무강요를 하고 있다. 대법원의 판례를 바꿔서 헌법과 법률을 개정해야 사립학교의 강제종교교육은 중단될 수 있다. 이천오백년전 이 땅에 부처님, 예수님이 살아오신다면 통탄할 일이다. 아니 지금도 교훈으로 살아계신 예수님과 부처님이 회초리를 들 대 사건이다. 인류의 스승들은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존엄하다'고 가르침을 주었지만 오늘 현실을 살아가는 종교계(특히 불교계)는 인권감수성이 낙제점이다. 조계종 총무원장에게 딸이 있다면, 진정으로 아버지를 사랑한다면 스스로 일어나 외쳐야 한다. '아버지 저는 알겠습니다. 아버지가 저를 낳아주고 길러주셨지만 아버지를 아끼는 많은 이의 사랑을 저버렸음을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조계종 승려이신 아 사랑하는 아버지 부디 공직을 사퇴하시고 공개반성(불교용어로 참회)을 하시길 간절하게 원합니다'. 상상해보았다. 내 딸이 나를 섭섭하게 만든 심정으로.  연등회는 삼국시대부터 한반도에 살아온 조상들이 전통문화로 이어온 아름다운 축제이다. 지난 5월12일 서울에서 열린 연등회에서 수만 명이 모인 행사에서 조계종 설정총무원장은 아무런 해명과 반성도 없이 입바른 가르침만 메아리하고 말았다. 지난 5월1일 방영된 엠비시 피디수첩에 알려진 설정원장의 부조리, 부정부패, 은처의혹에 대해 한마디 사과도 없었다. 이런 모습을 보고 '파렴치'라고 불러야 할지 고민이다. 어찌 조계종 총무원장을 상대로 이런 비판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을까. 곱씹어 보았다. 결론은 내 탓이다. 지난 30여 년 동안 종교계 시민사회(특히 불교계 시민사회)가 시민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우리사회의 민주인권 확대를 소홀하게 한 결과라는 뼈아픈 성찰과 반성이 공명되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딸들과 함께 긴급 행동할 아버지, 어버이들이 민주영령의 뜻을 이어받고 교훈을 벗 삼아 실천할 때라는 결론이다. 부처님우시는 날. 서울 인사동 사진 출처 - 불교닷컴  어떤 독설과 비판으로도 전환시키기 어려운 조계종 적폐청산의 현실 앞에 이제 깨어나야 한다. 최근 신도 상습 성폭행으로 구속된 서울 모 교회 목사, 엄청난 공금을 맘대로 요리한 인천의 모 신부님처럼. 재벌승려, 조계종은처승려, 성추행의혹 조계종 교육원장 승려 이런 말이 다시는 회자되지 않도록 이제 한국종교계 최고위급 직업종교인들을 절복시켜야 할 때이다. 끝으로 민주영령들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김동수 열사상, 조성만 열사상 등 '종교계시민사회인권단체'들이 공동으로 심사하여 20대 청춘들에게 소중한 상을 주는 준비모임을 발의해 본다. 1980년5월27일 전남도청에서 계엄군의 총탄에 산화하신 김동수 열사는 당시 대불련(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전국 대학생 불교동아리연합조직.1963년 창립) 전남지부장으로 당시 부처님오신날 봉축 연등회 행사를 준비하다 '학생수습대책위원'으로 시신을 수습하고 안치하는 일을 하셨다. 지금 동국대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활동하는 '미동추. 미래를 여는 동국추진위원회'소속 학생들이 김동수 열사의 교훈을 벗 삼는 실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부디,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딸들이 '종교계 적폐청산(성폭행, 성추행, 부정부패, 은처의혹, 사립학교 갑질, 총장의 논물표절, 교비횡령 등)을 위해 소박한 실천에 함께 해주시길 요청한다. 지난 5.10.목. 개최된 촛불법회와 행진 모습 사진 출처 - 불교닷컴  조계종적폐청산시민연대는 오는 5월17일(목).저녁7시 서울 종각역 보신각에서 촛불법회를 개최한다. 성평등불교연대 토론회  또한, 성평등불교연대라는 불교계 시민단체는 5월26일 마야페스티벌을 벌인다. 여러 이웃종교 학자분들의 토론회와 저녁7시 노래와 춤 등 문화예술행사도 개최한다고 한다. 더 이상 굶어죽는 오누이가 없기를 바라는 간절한 오누이의 기도가 '관세음보살의 서원'이 되었다고 하고, 그래서 불교계에서 '관세음보살'을 말로 표현하는 기도를 한다. 앞으로 태어나고 자랄 이 땅의 딸들이 행복하길 온 마음으로 절실하게 발원해 본다.
2018-05-16 | hrights | 조회: 279 | 추천: 7
이회림/ 00경찰서  5월의 어느 날 아침입니다. 지하철역을 나오자마자 제일 먼저 반겨주는 할머니의 웃는 얼굴. 오늘은 다홍색 꽃이 수놓인 니트를 입으셨네요. 입술을 살며시 움직이며 생글생글 소리 없이 웃고 계시지만 항상 같은 표정입니다. 할머니는 어깨에 작은 검정색 크로스백을 메고 있는데 그 안에는 오늘 만나게 될 고객들을 위한 준비물들로 가득할 것입니다.  저 할머니는 왜 매일 저렇게 서서 처음 보는 할아버지들을 기다려야만 하는지,, 마음이 아파오는 것도 잠시 뿐, 저는 출근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할머니를 지나치면 노숙인들이 아직 문을 열지 않은 금은방 처마 밑에 드문드문 자리를 깔고 앉아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어떤 노숙인이 저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외칩니다.  “야! ㅂㅈ야!”  생전 처음 들어 보는 황당한 호칭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봅니다. 아까 그 할머니와 같은 연배로 보이는 깡마른 할아버지가 저를 쳐다보며 웃습니다. 쓰러지듯이 앉은 모습으로 아래 위로 훑어 보던 그 시선... 손녀뻘 되는 사람에게도 저런 눈빛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이 거북할 뿐 아니라 괴이하기 짝이 없습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할아버지를 힐끗 쳐다보고는 인상 한 번 찌푸리고 모두 제 갈길을 갑니다.  ‘방금 쳐다보고 간 아저씨한테 목격자 진술 부탁드리고 저 할배를 모욕죄로 현행범 체포해버릴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재빠르게 스쳤다가 사라집니다. 형벌보다는 치료가 더 시급한 할아버지라는 생각에 한숨만 새어 나옵니다.  출근길에 그 노숙인 할아버지를 보니 작년 늦여름부터 추석 연휴 전까지 구청 직원들과 함께 노숙인 자활 지원 활동을 했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일하고 있는 파출소의 ‘ㅌ공원’ 담벼락에는 일 년 내내 매일 20~30명의 노숙인들이 술판을 벌입니다. 그 중 5~6명 정도가 담 아래에 이불을 깔고 잠을 청하는 식으로 상주하는 노숙인들이고 나머지는 공원 뒷 문에서 무료로 제공되는 점심 식사 한 끼를 먹기 위해 잠시 들렸다 갈 뿐인 비 상주 노숙인들이었습니다.  작년 여름, 저는 추석이 시작되기 직전 약 2개월 간 구청 ‘자활주거팀’ 직원들과 함께 매일 오전 10시 경 ‘ㅌ공원’의 담벼락으로 갔습니다. 구청 직원들은 노숙인들이 노숙생활을 접고 인근 쪽방촌으로 들어 갈 수 있도록 설득을 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저는 혹시나 발생할지 모르는 돌발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그 모습을 지켜보거나 사진으로 남기곤 했습니다. 그런데 매일 그렇게 노숙인들과 마주하다보니, 어느새 서로 얼굴을 익히게 되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 순간이 왔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노숙인들은 한 가족이 전부 노숙생활을 하는 분들이었습니다. 70대 노모가 40대 후반의 두 형제와 함께 담 밑에서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노모는 길거리에 버려진 종이와 페트병 등을 주워 근처 고물상에 갖다 파는 식으로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반면에 두 형제는 늘 담벼락 밑에서 막걸리 잔을 기울이거나 대낮부터 바닥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행인들은, ‘경찰들 뭐하냐, 저것들 좀 안 치우고!’ 하며 항의를 하기 일쑤였고 공원 주변이 항상 노숙인들로 가득해서 냄새가 나 견딜 수 가 없다는 주변 상인들의 민원도 극심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경찰이 개입할 수 있는 질서 파괴 행위가 목전에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기에 그런 민원이 들어오면 잘 달래서 돌려 보내는 정도로 그쳤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노숙인이라해도 사람을 향해 물건 가리키듯이 ‘저것’ 이라고 지칭하거나 ‘치워’라고 함부로 말하는 것에는 울컥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노숙인 형제와 얘기를 나누면서 알게 된 사실은 노숙인 두 형제 중 큰 형이 인근 건물에 상가를 임대하고 있었고 무려 전직 기타리스트라는 것이었습니다. 재산도 있는 사람이 노숙생활을 하는 이유에 대해서 묻자, 그저 답답해서라 고만 간단히 대답하였지만 눈빛에서는 말 못할 사연이 있는 것은 분명해 보였습니다. 마침 함께 지원 나간 순찰요원 김 순경이 대학에서 드럼을 전공하고 왔기에 기타리스트 노숙인과 서로 말이 잘 통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심성 착한 김 순경은 갑자기 그 노숙인의 손을 덥석 잡더니, “아저씨. 얼른 노숙생활 청산하시고 같이 밴드해요. 제가 드럼치고 아저씨가 기타 잡으시면 되겠네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노숙인과 매일 얼굴 마주한 지 두 달이 다 되어가던 저는 노숙인들 그 누구와도 손을 잡을 엄두를 내지 못하였는데, 그 날 처음 노숙인을 만난 김 순경은 맨 손으로 그의 두 손을 잡고 진심으로 말을 걸고 있었습니다. 사진 출처 - 구글  저는 저보다 까마득한 후배인 김 순경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제 자신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겉으로는 소통하는 척, 위하는 척 했지만 손 한 번 따스하게 잡아줄 마음이 생기지 않았던 것이 한 없이 부끄러웠습니다.  그 후 그 기타리스트 노숙인 아저씨는 쪽방촌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답답해서 닫힌 공간이 싫다던 아저씨의 고집을 꺾을 수 있었던 것은 구청 직원들의 노력뿐만아니라 김 순경의 온기가 더해져서 가능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 기타리스트 아저씨의 쪽방에 작은 화분을 사서 들고 가 나름 조촐한 집들이 선물을 드렸고 아저씨는 자신의 한 평 남짓한 방을 보여주며 함박웃음을 지으셨습니다.  그 아저씨는 그 뒤로 겨울을 쪽방에서 무탈하게 보내셨지만 봄이 오니 다시 그 공원 담벼락으로 나오셨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건 70대 노모는 쪽방에 방을 두고 공원으로 마실 나오는 식으로 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아침 출근길에 어느 할아버지 노숙인이 저를 향해 말 같지도 않은 단어를 내 뱉으셔서 모욕을 느꼈지만 그건 잠시 뿐, 마음속에 측은지심이 올라와 할아버지를 탓하지 않게 된 것은 모두 제가 경찰살이를 통해 길거리에서 배운 미덕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김 순경처럼 착한 심성을 가지지는 못했지만 그런 맑은 후배들이 주변에 많이 있어 매일 그들로부터 배워가는 것 같습니다. 특히 제가 이런 경험을 하지 않았다면 최근에 읽은 책에서 아래와 같은 구절이 마음에 와 닿지는 못했을 것 같습니다.  “어떤 소년이 거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면, 배울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 ‘게으른 자를 위한 변명’ 스티븐슨-  우울하고 힘겹게만 보이는 타인들의 삶을 매일 스쳐지나가지만 그 순간을 그저 흘려보내지 않고 느끼고 배우고 또 두고두고 기억하게 되는 것은 결국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 굉장한 특혜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이놈의 경찰살이 힘겨워도 계속하게 되는가 봅니다.  자~ 이제 사무실 앞에 다 왔습니다. 5월 아침, 출근길에 참 많은 생각을 해봤습니다. 오늘도 길거리에서만 배울 수 있는 것들을 찾아내는 기대감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파이팅!!
2018-05-09 | hrights | 조회: 201 | 추천: 6
이현정/ 꽃씨네농작물 농부  지난달에 초당옥수수를 심었다. 옥수수는 처음이라 설렘이 크다. 잘 될 수도 있고, 잘 안 될 수도 있겠지. 4월 27일, 밭에서 핸드폰으로 남북정상회담을 보았다. 깜짝 놀랐다. 형식적인 행동과 발표일줄 알았는데, 상상을 뛰어 넘었다. 도보다리 독대 만남과 합의문 공동발표. 그리고 차도가 좋지 않아 지금은 백두산에 초대하지 못한다는 솔직한 발언까지. 또 무엇보다 통역 없는 자연스러운 이야기도 인상적이었다. 군사분계선 넘는 남-북 정상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사실 한 방송사에서 편집한 영상을 보고 눈물도 흘렸다. 노래 imagine 배경 음악에 남북 정상이 군사분계선을 넘나드는 모습에 말이다. 참 그 회색 시멘트 선이 뭐라고. 진짜 그게 뭐라고. 과거에 그 같은 길을 걸었던 사람들과 역사가 생각나서 눈물이 나왔다. 89년, 통일을 꿈꿨던 대학생 임수경과 문규현 신부. 분단 이래 판문점을 통과한 첫 민간인이었다. 당시 둘은 북쪽에서 그 선을 건너오자마자 남한 당국에 체포되고 옥살이를 해야만 했다. 문재인과 김정은 두 정상은 환대를 받았지만, 얼마 전까지 그곳은 분단과 금기의 선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당분간도 금기의 선으로 남을 것이다.  2007년 회담 이후 11년 만이다. 왜 이렇게 멀리 돌아왔을까. 그 이유는 모두 알거라 본다. 하지만 이 판문점 선언은 새로운 역사의 출발점이 됐다. 한반도 비핵화, 전쟁 해소와 평화체제 구축, 공동번영과 자주통일의 미래, 그리고 이를 위해 남북관계를 적극 개선하고 발전시켜나간다는 이 선언이야말로 우리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다.  물론 앞으로 과제도 산적하다. 당장 북미, 한미, 북중정상회담이 이어진다. 이 결과에 따라 판문점 선언 행보도 달라질 것이다. 그래서 조심스럽다. 갈 길도 멀다. 특히 미국의 입장에 따라 급변하는 현실은 서럽기도 하다. 하기에 북미정상회담도 꼭 잘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밭에서 남북정상회담 뉴스에 빠져있을 때였다. 다양한 새들의 소리가 평화롭게 들린다. 직박구리, 섬휘파람새, 동박새, 까치, 꿩, 찌르레기, 참새 등등. 반가운 남북정상회담 중이었지만, 우리에겐 저 새들처럼 평범한 일상이 중요하다. 통일은 결국 우리 ‘일상의 평화를 위한 과정’이 아니겠는가. 분단이 없었더라면 제주의 4.3 대량학살도 없었을 테고, 또 한반도 냉전 속의 저 강정해군기지도 없없을 것이다. 미 군함과 핵잠수함이 제주와 한반도를 휘젓고 있을 때, 우리 일상의 평화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또 분단과 그 이념이 낳은 금기도 무섭다. 내 양심에 따라 자유로운 생각을 할 수 없는 사회. 다름을 틀리다고 얘기하는 사회, 복지 확대를 이념의 잣대로 바라보는 사회. 한강과 임진강을 흐르는 강에서 정치적 호수로 만들어버린 사회. 노동 존중을 계급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회, 대륙의 꿈을 섬나라로 가두려는 사회. 인권 확대를 배부르니까 하는 소리로 취급하는 사회. 평화적 공존을 사상과 이념, 그리고 피부색으로 구별하는 사회. 기본소득과 생존을 게으름으로 치부하는 사회. 협동 대신 경쟁만이 살 길이라고 강요하는 사회. 주권과 자치 확대를 머리에 빨간 물이 들어서 그렇다는 사회. 제주 중산간마을에서 바라본 한라산, 오름, 곶자왈 사진 출처 - 필자  평화로 가는 통일 과정에서 이 껍데기들이 모두 사라졌으면 한다. 이렇게 될 때 통일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그러면서 나와 가족, 그리고 주변 이웃들의 평화적 일상을 꿈꾼다. 어제 동네에서 가족과 밥을 먹다가 누렇게 익은 맥주보리 뒤로 한라산, 여러 오름들, 곶자왈을 보았다. 평화롭고 좋았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과 함께 곧 우리에게 찾아올 일상의 평화와 행복을 기대해본다.
2018-05-03 | hrights | 조회: 172 | 추천: 2
이동화/ 아디(아시아인권평화디딤돌) 활동가  팔레스타인에 다녀온 지 2주일이 지났다. 지난 3월 13일부터 26일까지 팔레스타인에서 한 2주일 정도 있었으니 있었던 시간이나 다녀온 시간이나 얼추 비슷하다. 팔레스타인을 뉴스보도로만 접하는 많은 이들을 위해 조금씩 아득해지는 기억을 붙잡고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이번 팔레스타인 방문은 아디의 활동가로는 처음(개인적으로는 세 번째)이고, 주요한 목적은 이스라엘 불법정착촌이 야기하는 인권침해사례를 파악하고 아디가 준비중인 팔레스타인 평화여행의 현지파트너를 찾고자 함이었다. 출발, 그 여정의 시작  팔레스타인에 가기위해서는 먼저 이스라엘로 직접 가는 방법과 인근국가인 요르단을 통해 가는 방법이 있다. 현재 인천에서 이스라엘로 가는 직항편이 있기는 하나 그 비용이 만만치 않다. 그래서 러시아항공이나 유럽의 도시를 경유해서 가는 방법을 선택하면 비용도 저렴하고 비행기의 수준도 나쁘지 않다. 대신 긴 여정은 각오해야한다. 13일 오후 인천을 출발하여 모스크바를 거쳐 이스라엘 벤구리온 공항으로 가는 여정은 길고 지루했다. 거의 자정이 다된 시간에 공항에 도착하여 까다롭고 깐깐하기로 유명한 보안검색을 마치고 짐을 찾으니 공항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교통편은 다 끊겼고 텔아비브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비싼 택시비를 지출하며 텔아비브 호스텔에 도착했다. 바뀐 시차 탓에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한채 첫번째 아침을 텔아비브에서 맞이했다. 텔아비브는 지중해연안의 큰 도시로 해변가가 아름다워서 마치 부산의 해운대를 보는 듯 했다. 1948년 이전에는 누구에게나 허용되었던 지중해 바다가 이제 팔레스타인 사람에게는 금지의 영역이 되어버렸다. 팔레스타인으로 이동  소위 '팔레스타인'으로 가기 위해서는 조금 복잡한 루트를 지나야 한다. 팔레스타인은 크게 '가자지구'와 '서안지구'로 구분되는데, 현재 가자지구는 2006년이래로 이스라엘에 의해 완전히 봉쇄되어 외국인이 출입하기 불가능한 지역이 되었다. 하지만 서안지구는 몇 군데의 검문소만 지나면 자유로운 이동이 가능하다. 이번 방문의 첫 번째 도시는 내 친구가 거주하는 라말라이다. 그리고 그 곳에 가는 루트는 대략 이렇다. 텔아비브 해변가 호텔 -> 버스타고 텔아비브 중앙버스터미널(예루살렘가는 고속버스 승차) -> 예루살렘 고속버스터미널 -> 트램타고 올드시티인 다마스커스 게이트 -> 걸어서 5분거리에 있는 팔레스타인 각 지역으로 가는 버스터미널 -> 라말라 버스터미널, 뭐 이런 식이다. 막상 글로 적으면 대단히 복잡해보이나 직접 가보면 어렵지 않다. 무엇보다 이스라엘 지역에서는 구글지도에서 실시간으로 교통편을 알려주고, 팔레스타인지역에서는 누구를 붙잡고 물어봐도 친절하게 가르쳐 준다. 칼란디야 체크포인트  예루살렘에서 북쪽 서안지구로 가기위해서는 반드시 칼란디야 체크포인트를 지나야 한다. 예전 방문과는 다르게 예루살렘에서 나갈 때는 검문이 완화되었지만 예루살렘으로 들어올때는 차량과 방문자 모두 반드시 칼란디야 체크포인트에서 검문과 검색을 당해야 한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보안을 목적으로 하는 과정이지만 반대의 입장에서는 한없이 모욕적이다. 통행자는 이스라엘 군인지시에 의해 2~3명씩 철문을 통과하고 이후 짐 검색을 하고 본인의 신분증을 군인에게 보여주고 난 후 군인이 허락하면 짐을 찾아 나갈 수 있는 방식 사진 출처 - 필자 분리장벽? 보안장벽? 차별과 고립  2001년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의한 2번째 인티파다(민중봉기)이후 당시 샤론 이스라엘 총리는 팔레스타인 전영토를 10미터 콘크리트 장벽 또는 전기가 흐르는 철책으로 둘러쌓는 정책을 시행했다. 이로 인해 2018년 현재 팔레스타인 전 영토는 장벽에 갇혀있다. 그리고 이 장벽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가로지르기도 하지만 팔레스타인 내부 또한 가로지른다. 예루살렘의 경우에는 도로 한복판을 장벽이 가로질러 도로만 건너면 닿을 마을인데도 검문소를 통과하지 않으면 불가능하게 만들어 놓았다.  이 장벽을 마주하는 순간 분노와 절망감에 빠져든다. 자신의 땅에서 사는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감옥 속 죄인으로 만들어버리는 이 장벽은 이스라엘 점령의 민낯이자 팔레스타인에 대한 기본태도이다. 장벽을 걷던 중 생긴 에피소드가 있다. 3월 19일에 말없이 장벽을 걷던 중 장벽 옆에 놀고있던 꼬맹이들을 잔뜩 만났다. 생존아랍어를 몇마디 던지니 벌떼같이 달려들며 친근감을 보인다. 그러면서 장벽에 가면 군인들이 총을 쏠거라는 손짓 발짓으로 나를 장벽에서 밀어낸다. 고맙긴 하지만 장벽 사진도 찍고 상황도 봐야해서 난 괜찮다고 갈 거라고 했더니 완전 놀라면서 소리까지 지르며 가지 말라고 한다. '아 놔!! 장벽 가야 하는데..ㅠㅠ' 덕분에 5분이면 지날 거리를 거의 20분을 헤매서 도착했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아이들의 행동은 나를 보호하기 위함이었고 아이들에게 그리고 이 곳 주민들에게 장벽은 이런 존재일거라는 생각을 했다. 사진 출처 - 필자 라말라, 나블루스, 예루살렘, 베들레헴, 헤브론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서안지구내 도시간 이동은 자유롭고 생각보다 편리하다. 특히 앞서 언급한 팔레스타인의 주요도시는 빠르게 현대화되어가고 외부 관광객을 맞이할 준비를 이미 마쳤다. 서안지구내의 이동은 주로 한국의 12인승 카니발과 유사하게 생긴 노란색 세르비스가 담당하고 택시와 큰 버스, 그리고 택시처럼 생겼지만 특정구간만 다니는 하얀색 택시 세르비스로 나뉜다. 특이하게 세르비스는 승객이 다 차면 출발하는데 출발하고 나서 요금을 주는 시간은 각각 제각각이다. 출발하자마자 줄 수도 있고 내릴 때 줄 수도 있다. 그래서 언제 돈을 내나 눈치를 볼때가 가끔 있다. 요금은 라말라에서 나블루스가 16세켈(약 5천원 조금), 라말라에서 베들레헴이 20세켈(6천 3백원 정도), 라말라에서 헤브론까지 27세켈(9천원 안됨)정도이다. 참고로 팔레스타인의 물가는 그리 싸지 않다. 이스라엘 물가는 중동에서 최고수준(유럽수준)이며 이스라엘의 경제체제내에 존재하는 팔레스타인 역시 이스라엘 물가영향을 그대로 받는다.  3월의 팔레스타인은 아름답다. 특히 고대도시인 나블루스의 하늘은 감탄이 나오는 수준이다.  베들레헴은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의 성지순례객이 꼭 방문하는 기독교인의 성지이다. 그리고 그 곳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팔레스타인 기독교인도 많이 만났다. 한 가지 놀란 점은 팔레스타인내 기독교인도 이스라엘에 의해 똑같이 차별받고 동일한 대우를 받는다는 점이다. 이스라엘은 오직 유대인에게만 특권을 부여하며 이를 헌법에 명시하였다. 그런데 최근 한국 보수기독교인 중 탄핵반대 시위할 때 성조기와 이스라엘 국기가 등장하는 건, 말문이 막히는 일이다. 사진 출처 - 필자  헤브론은 유대인의 시조인 아브라함과 그 가족들이 묻힌 장소로 예루살렘과 함께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공동의 성지이다. 하지만 도시 한가운데 유대인정착촌이 있고 다른 지역보다 강경하고 극단적인 정착촌민이 많아 항상 긴장해야하고 탄압이 심각한 곳이다. 불법 정착촌, 아웃포스트(Outpost,전초기지)  ​앞서 밝힌 바와 같이 팔레스타인의 여러 인권이슈 중 아디가 올해 집중하는 것은 불법정착촌이다. 지난 2017년 미국 트럼프대통령 취임이후 그의 친이스라엘 외교정책은 바로 팔레스타인에 영향을 미쳤는데 그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이스라엘의 정착촌과 예루살렘 수도이전이다. 특히 이스라엘의 정착촌은 팔레스타인내 B지역과 C지역을 중심으로 급격히 팽창하고 있다.(오슬로 협정이후 팔레스타인은 A/B/C지역으로 행정구역이 나뉘었고, A지역은 모든 행정권한을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가지고 C지역은 이스라엘 정부가 B와 C는 그 권한이 섞여 있다. C지역은 전체 팔레스타인의 2/3가량 차지한다.) 1968년 중동전쟁이후 현재의 서안지구를 강제점령한 이스라엘은 국제법상 점령지에 자국민의 이주를 금지하는 협약을 위반하고 꾸준히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에 정착촌을 세워나갔고, 현재는 가자지구를 완전 봉쇄하고 정착촌을 철거하였지만 서안지구의 경우 야금야금 그 범위를 넓혀나가고 있다. 국제법상으로 서안지구의 정착촌은 불법이지만 이스라엘 측면에서는 정부주도 계획에 의해 조성된 것이니 불법은 아닐 터이다. 하지만 아웃포스트는 이스라엘 측면에서도 불법이다. 서안지구 산 정상부근에 이동식 집(카라반) 몇개가 유대정착민에 의해 놓여지고 서서히 이동식 집이 늘어난다. 팔레스타인 영토내이지만 이스라엘 인이 있기에 이스라엘 군인은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머무르고 이동식 집은 그 규모를 넓혀 나중에는 정착촌으로 승인받게 된다. 그리고 정착촌과 아웃포스트, 그리고 정착촌끼리 연결하여 하나의 도로를 이루고 그 규모를 키우는 방식이다. 하지만 그 지역은 이미 팔레스타인 원주민이 살고 있기에 원주민은 쫓겨나가거나 아웃포스트 정착민에 의해 공격의 대상이 되곤 한다. 이러한 불법과 폭력의 악순환이 작년 미국 대통령 당선이후 가속화되고 있음을 현지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팔레스타인자치정부 식민지와 장벽저항 위원회(PLO Colonization & Wall Resistance Commission)가 발간한 2017년 보고서에 따르면 2017년 이스라엘 정부의 팔레스타인원주민 퇴거명령은 521건이 발부되었고 그 중 510건의 가옥파괴가 진행되었으며 이스라엘 정착민의 집단 공격으로 5명이 사망하였고, 284건의 인신공격과 소유물에 대한 공격이 보고되었으며, 3260그루의 올리브 나무가 파헤쳐지거나 훼손되었다. 86대의 차량이 파괴되었고 6000 도넘(에이커)의 농작지가 공격받았고 142건의 팔레스타인 마을도 공격을 받았다고 한다. 지금도 정착민의 공격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금요집회와 저항  핵무기까지 갖춘 이스라엘 첨단 군사력에 맞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타이어를 태우고 돌을 던지며 저항한다. 끊임없이 차별하고 폭력으로 억누르지만 이들은 지치지 않고 저항한다. 처음 방문했던 2006년도에도 2014년에도 이번 2018년에도 이들은 쉽게 물러서지 않고 싸우고 있다. 사진 출처 - 필자 "거기 위험하지 않나요?"  팔레스타인을 가기 전에도, 다녀오고 난 후에도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다. 대상자가 누구인지에 따라(여/남, 아이/청년/어른, 장애/비장애 등)위험을 느끼는 정도가 다를 수 있지만 40대 비장애남성의 입장에서 대답을 한다면 “이스라엘 군인과 경찰, 극우정착민들만 피하면 팔레스타인은 위험하지 않아요”이다. 실재 팔레스타인 외국인대상 범죄율은 거의 0%에 가깝고 현지문화를 존중한다면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너무도 친절하게 외국인을 대한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현실을 설명하며 알리고자 한다. 나 역시 그들을 만나 이야기했고 그들이 보여준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내가 보고 들은 것은 아디에서 구체적 활동이 되었다. 이번 현지방문을 통해 아디는 10군데의 현지 인권/법률/피해자 지원단체와 활동가들을 만났고, 11곳의 피해마을과 현장을 방문했으며 수많은 피해자들과 현지주민을 만나며 아디의 인권보고서가 무엇을 다뤄야 하며, 현지평화여행시 어떤 곳을 방문해야 하는지를 대략 결정할 수 있었다.  지난 3월 31일,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는 장벽으로 가로막힌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장벽근처에서 평화적 캠핑을 하는 대규모 시위가 있었고 뉴스에서 보도한 바와 같이 이스라엘 군인의 발포로 수십 명의 시위대가 사망하고 수백명이 부상당했다. 이러한 뉴스는 수십년동안 반복 되고 있고 이스라엘은 여전히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총구를 겨누며 테러와 보안 두 단어를 돌려 써가며 본인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다. 이제 국제여론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을 부당하다고 외치고 있고 이스라엘 측에 더 많은 책임과 행동을 요청하고 있다.  팔레스타인에 관한 글이 이렇게 심각한 문제로 마무리되는 것을 개인적으로 바라지 않는다. 2주간 봤고 앞으로도 계속 볼 팔레스타인의 매력과 장점은 곳곳에서 넘쳐난다. 따뜻한 사람들, 맛있는 음식들, 이국적인 문화와 풍경들, 종교인들이라면 너무 가고픈 성지순례 장소들, 무엇보다 여행에서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삶과 저항의 흔적들.  매년 2~3만 명의 한국인 성지순례자들이 팔레스타인을 방문하지만 스스로 이스라엘에 다녀왔다고 생각하는, 이 기울어진 현실 속에 아디는 그 곳이 팔레스타인이고 그 사람들이 팔레스타인 사람이며 이들은 여전히 점령에 맞서 싸우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첫 번째 활동으로 하반기 팔레스타인 평화여행을 진행중에 있다. 사진 출처 - 필자
2018-04-18 | hrights | 조회: 289 | 추천: 11
이상재/ 대전충남인권연대 사무국장  2015년 대전시 의회는 전국에서 처음으로 성소수자 인권 보호에 관한 내용을 담고 조례 이름도 기존의 양성평등조례 대신에 ‘대전시 성평등 기본조례’라는 이름을 붙여 제정했다. 하지만 조례 제정 이후 보수 지역 기독교계가 성소수자 보호 규정과 조례 명칭을 문제 삼아 반발하자 대전시 의회는 시행 불과 두 달 만에 지역 인권단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만든 성평등 기본조례의 명칭을 ‘양성평등 기본조례’로 바꾸고, 성소수자 보호·지원에 관한 내용을 모두 삭제하는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2016년 더불어민주당 소속 박병철 대전시 의원이 대표 발의한 대전학생인권조례 제정안은 2017년 1월에 열린 교육 상임위원회에서 유보되더니 3월에 열린 교육위원회에서도 재차 유보되어 결국은 자동 폐기되고 말았다. 대전시 의회의 다수당인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이 공동 발의했고 대표발의자인 박병철 의원이 위원장이며 교육위원회 다섯 명의 의원 중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과반수를 넘는 3명인 상황이라 의지만 있었으면 표결을 통해 충분히 해당 상임위원회를 통과할 수 있었다. 다른 시도에 비교해 내용상으로 부족한 조례안이지만 척박한 지역 학생 인권 현실을 고려해 최초 발의부터 상임위 의결까지 일관되게 통과를 촉구한 지역 시민사회단체들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속한 당의 동료 의원들이 발의한 의안을 표결 한번 없이 자동 폐기해 버린 것이다.  충남인권조례는 2012년 당시 자유선진당 송덕빈 의원의 대표 발의와 자유한국당의 전신인 새누리당 의원 등 충청남도 의원 전원 발의로 제정되었다. 조례 내용 자체가 빈약했지만, 충청권에서는 처음 제정되었고 여야 구분 없이 도의원들의 전원 발의로 인권조례가 제정된 것에 의미가 있다고 평가되었다.  2015년 인권조례의 내용을 보다 구체적으로 강화한 개정안이 도의회에서 통과될 때에도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던 자유한국당 도의원들의 찬성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충청남도 의회 자유한국당 의원과 바른미래당 의원들은 올해 2월 충청남도 인권조례가 도민갈등을 일으키고 동성애를 조장한다는 황당한 이유를 들어 자신들이 만든 조례에 대해 폐지를 가결했다. 충청남도가 충남인권조례 폐지안에 재의 요구를 했지만, 충청남도 의회는 지난 4월 3일 본회의를 열어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으로 이루어진 재석의원 26명의 전원 찬성으로 폐지를 가결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지난 1월 대전시의회는 대전시 도시공원위원회에 시 간부공무원의 당연직 참여를 5명에서 2명으로 축소하는 내용의 '도시공원 및 녹지조례 일부 개정 조례안(이하 도시공원 조례)'을 의원들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도시공원위원회에 시 간부공무원을 5명이나 참여시켜 사실상 시 의도대로 개발행정에 대한 의사결정을 하고 있다는 문제점에 대한 개선책이었다. 도시 안의 환경권은 심해지는 미세먼지와 공해 등으로 갈수록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인권 분야인데 무분별한 개발 논리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보다 객관적인 시각을 가진 인사가 도시공원위원회에 참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점이었다.  실제로 지역의 시민사회가 난개발과 환경피해에 대한 우려를 들어 반대하고 있는 월평공원 민간특례사업의 경우 지난해 10월 시 도시공원위원회에서 참석한 17명 중 10명의 찬성표를 얻었지만, 찬성표 중 5명이 당연직 공무원 위원이었다. 대전시가 '도시공원 및 녹지조례 일부 개정 조례안(이하 도시공원 조례)'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의회에 재의 요구를 했지만 여야 구분 없이 시의원 만장일치로 가결된 안이었기에 별다른 상황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역 시민사회는 낙관했다. 하지만 대전시의회는 지난 3일 해당 안건을 상정도 하지 않고 폐기해버리는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방식으로 7대 의회를 끝내버렸다.  충청남도 의회가 충청남도 인권조례 폐지안에 대한 재의요구에 대해 출석 의원 전원의 찬성으로 폐지를 가결한 날 대전시의회는 자신들이 만장일치로 가결한 안에 대한 재의 요구를 상정도 하지 않고 대전시 집행부의 뜻대로 폐기해 버린 것이다. 의회의 처리방식은 정반대이지만 도민과 시민의 인권을 짓밟은 막가파식 의정활동을 보여준 것이라는 점에서 충청남도 의원과 대전시 의원은 쌍둥이처럼 닮아있다.  4년의 임기가 끝나고 대다수 지방의원이 재선을 준비하거나 구청장 혹은 시장, 도지사에 도전하려고 바쁜 요즘이다. SNS에서는 각 후보가 4년간의 임기 동안 이뤘던 자신의 업적을 홍보하며 시민들의 표심 잡기에 한창이다. 의원들 개개인이 잘한 것도 있겠지만 적어도 대전과 충남의 인권 분야와 관련된 지난 4년간 의원들의 활동은 여야를 막론하고 위에서 나열한 것처럼 실망을 넘어 자신들의 의원입법 활동을 스스로 부정하는 상식 이하의 것들이었다.  인권을 보장한다는 것, 인권의 보편성을 지킨다는 것은 당연함을 넘어 누군가에는 생명을 지키는 것과 같은 다급함과 중요성을 가진 것이다. 그냥 생각 없이 좋은 게 좋은 거다 싶어서 만들었다가 누군가가 조금만 반발하면 없애고 마는 것이 인권일 리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지난 4년 대전과 충청남도 의회에서 인권은 씹다가 뱉으면 그만인 껌과 같은 대접을 받았다. 더 절망적인 것은 그 지방의원들이 다시 재선하고 구청장, 시장까지 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이제 지역도 인권을 기준으로 좀 바뀔 때가 된 것은 아닐까? 적어도 인권을 무시하는 정치인들은 지역민들에게 심판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줄 때가 된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2018-04-04 | hrights | 조회: 184 | 추천: 3
김아현/ 인권연대 연구원  “해일이 오는데 조개나 줍고 있다.”  자칭타칭 이제는 ‘작가’가 된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자 ‘전 의원’의 말이다. 그가 이런 말을 한 것은 개혁국민정당(이하 개혁당) 창당 당시 당내에서 성폭력 사건이 수면 위로 불거졌을 때다. 정확히는 2002년의 일이다. 이 발화의 대상은 해당 사건을 비판하는 여성 당원들이었다. ‘중요한’ 선거를 앞두고 ‘작은’ 문제로 당의 에너지를 소진하지 말자는 주장을, 그는 타고난 문장가답게 간명한 비유로 갈음했고 이는 종종 회자되었다. 십 여 년도 훨씬 전의 일이지만 미투 이후 최근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일들을 보며 저 말을 떠올렸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다. 그리고 행여 저 말이 실수에서 비롯되지 않았더라도, 읽고 쓰고 말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라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생각과 인식이 변하고 발전할 수 있기 때문에 십 여 년 전의 ‘그의’ 발언을 이제와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다.  작가를 자임하며 이런저런 사회적 책무와 공인으로서의 무게를 벗어낸 그가, 최근의 미투 사태를 관조하며 본인이 정치인(개혁당 대표집행위원)이던 시절 한 말을 어떻게 떠올릴지는 모르겠다. 사실 별반 궁금하지도 않다. 유시민의 말이지만 유시민만의 말이 아니어서다. 저런 말과 태도는 이른바 ‘큰 일’을 한다고 자임하는 사람들에게서 지금도 흔히 볼 수 있고 아마 앞으로도 종종 볼 수 있을 거다(더는 듣고 싶지 않은 말이지만).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자는 주장과 태도는 때로 합리적이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폭력이 된다. 중요한 것은 원칙이고 그 적용이다. 민주화투쟁이든 노동운동이든 인권운동이든 정치 등을 하면서 내세우는 목적이 공동체의 이익과 발전에 있다면,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해도 좋다는 태도가 적어도 부끄러운 것인 줄은 알아야 한다. 작은 문제로 여기고 희생을 강요해 온 것이 특히 타자의 고통이라면 더더욱 강한 자기검열을 해야 한다. 경제발전이 우선이라며 수 십 년 간 용인하고 넘겼던 크고 작은 비리와 불합리들이 내 삶을 불행하게 하는 거대한 악이 되어, 우리를 맵찬 추위 속 방방곡곡에서 촛불을 들게 했다는 것을 굳이 환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진 출처 - freepik  크고 작은 성폭력, 위계나 경제력 차이에 의한 갑질은 늘 있어왔고 그를 향한 문제제기와 폭로 또한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미투라고 명명되고, 그에 대한 우리 사회의 대응이 바뀌었을 뿐이다. 심지어 수 십 년간 한국의 납량을 책임져 왔던 [전설의 고향]을 관통하는 소재들도 주로 폭로였다. 언로를 얻지 못해, 귀신이 되어서도 그 한을 어쩌지 못한 약자들의 ‘폭로’이자 ‘호소’를 둘러싼 이야기들이 한국사회 전설의 뼈대를 이루지 않던가. 2009년을 마지막으로 종영한 [전설의 고향]을 최근 우연한 기회로 다시 보며 흠칫 놀랐다. 여성과 약자를 희롱하고 착취하고 심지어 죽이고 나서도, 상대가 한을 갖지 않고 용서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설파하는 삿된 욕망이 주류사회의 유구한 전통이었구나 싶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사회가 일상적으로 또는 은밀하게 저질러 온 크고 작은 폭력을 새삼 ‘발견’하고 ‘경악’하고 가해자를 ‘비난’하는 데서 이 바람이 그칠까 두렵다. 근거 없는 두려움이거나 기우라면 좋겠다. 하지만 미투가 바람직하지 않은 형태로 변형되어 광고카피로 쓰이며 조롱거리로 다뤄지거나, 이제는 그만했으면 좋겠다는 말이 공공연히 들리거나, 자기편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가해자인 특정 피해에 대해서는 음모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서 두려움의 근거를 찾는다.  거창하게는 단군 이래 반 만 년이 흘렀고 가깝게는 87년 이후로 30여년이 지났다. 한반도에 서식하는 구성원들의 변화가 단지 먹고 입고 자는 일에 그쳐서야 될 일인가 싶다. 성폭력과 갑질의 직접적 가해자에게 향하는 남성사회의 비난이, ‘나는 저런 자들과 다르고 (바로 옆의 피해와 고통을 눈치 채지 못한 나는 무관심하고 무지했을 뿐) 무고하다’라는 구분짓기 혹은 자위에 그치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하는 수준까지는 나아가길 바란다. 그래야 2018년이다.
2018-03-21 | hrights | 조회: 506 | 추천: 16
1. 차별과 학교 폭력을 견디게 해준 어린 시절을 지켜준 사람들 김형수/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사무국장  나는 75년생이다. 1980년대 받아주는 유치원이 없어 동네 미술학원 원장실에서 친구들이 율동을 배울 동안 열심히 선긋기, 색칠하기를 했다. 공립 초등학교 9곳에서 입학을 거부당하고 부산의 한 사립학교에 문의 했을 때, “저희 학교는 학생을 구별해서 받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한 이름 모를 동래초등학교 선생님. 추첨할 뿐이라던 그 학교는 6명을 선발하는 제비뽑기에 모두 내 이름을 적어 놓았다.  나를 볼 때 마다 언제나 어디든 동행해 주던 짝지, 주.양.익. 이후 대학 때는 소록도에서 어르신을 위해 열심히 뻥튀기를 하던 그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필기를 잘 못해서 매일같이 전화를 해도 뭐든지 신나게 답을 도와주던 박.종.현. 먼거리를 갈 때 마다 늘 차를 태워주던 조.수.현. 바지에 실수를 했어도, 먹물을 뒤집어 쓰고 있어도 내 옆에서 묵묵히 미술 시간마다 그림 그리는 것을 도와 주었던 조.민.정.  받아쓰기를 못했던 나를 위해 1학년 김.인.선 선생님은 3학년에도 담임을 맡았고 5시 반 퇴근시간까지 습자지에 받아쓰기 연습을 하던 내 곁에 있어 주셨다. 엄마를 기다리는 나에게 라면도 자주 끓어 주셨던 당시 수위 이.또.범 아저씨. 나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절묘하게 잡아 사진으로 남겨주셨던 5학년 담임 미술가 이.승.희 선생님. 그 밑에는 항상 멋진 자세 멋진 모습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겨우 깨친 한글로 중학교 첫 국어 시간에 피천득 선생님의 수필 ‘내가 좋아 하는 것들’을 모방한 내 작품에 내가 본 최고의 작품이라고 칭찬해 준 국어 선생님. 당신의 그 칭찬이 지금 글 쓰고 있는 나를 만들었다.  그렇게 만난 인연들이 중고교 시절의 그 힘들었던 학교 폭력도, 처절했던 따돌림도 견디게 했고 사람에 대한 믿음을 지켜 주었다. 휴전선 최전방 특수부대 야전 훈련 같았던 청춘 생활의 버팀목.  1995년 2월 27일 서울역 새벽 4시 반 신촌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혼자 하는 서울 생활에 공황과 같은 공포에 휘감겨 있을 때, 택시 기사 아저씨께서 씨익 웃으며 던진 말 한마디.  '뭐 어때? 그냥 한번 해봐아'  늘 두려움이 밀려올 때마다 그 말은 내 심장의 가장 튼튼한 목발이 되었다.  대학에 온 첫날 모든 구성원은 신입생 오티를 가버렸고 전 세계에 목발을 짚은 사람은 나 혼자 인 것처럼 여겨지고 산꼭대기에 있던 일반 기숙사는 신청할 수 없었던 그때, 선뜻 국제기숙사에 전화해서 빈자리를 알아보고 자리를 만들라 했던 얼굴도 모르는 학생처 직원.  지나가는 학교 오솔길 500미터가 오천 미터 같은데 생전 처음 만났던 다양한 피부색깔 사람들 앞에서 넌 누구냐 하며 먼저 말 걸어와 벤치에 앉혀놓고 기숙사 입소 절차를 일사처리로 처리해주고는 나중에 기숙사에서 커피포트 하나로 해먹을 수 있는 모든 자취 요리를 알려주던 아웃사이더 아닌 아웃사이더 과 선배.  1995년 3월1일 새벽 5시 30분 외국인 기숙사 안터에서 한 시간을 기다려 6시 30분 처음으로 만난 룸메이트 가나 왕족 兄, 그는 늘 그 특유의 체취로 내가 힘들까봐 샤워에 신경을 썼고 내가 신입생이니 영어 써야 한다고 늘 방에서는 영어로 나에게 질문을 해주었다.  혼자서는 기숙사 아침 식사를 챙겨 먹을 수가 없어서 늘 참치캔 하나로 식사를 때우던 나에게 어느 날 아침 거나하게 대만식 탕수육을 만들어 주던 말 없던 어느 대만 누나.  어렵사리 전공학과 첫 수업을 마치고 만난 62명의 과 동기들은 거의 하루 종일 나에게 인사하고 반가워했다. 그 이후 한 학기 동안은 항상 내 옆에 그들이 있었다.  1995년 3월, 장애인 노점상 최정환 열사의 노제가 학교 노천극장에서 열리고 있었고 난 신입생 오티를 못갔다는 이유로 93학번 선배와 함께 과 모꼬지를 사전 답사 가기로 되어 있었다. 이러쿵저러쿵 아무말 없었던, 그 선배는 나에게 모든 것을 목격하게 했다. 난 그날 인생 처음으로 최루탄을 맞았고 전두환이 나쁜 놈인 걸 알았다.  첫 우이동 모꼬지에서 만난 사람마다 모두 나에게 시집을 한 권씩 주었고 그 시집 첫머리엔 모두 빽빽이 나에게 주는 편지가 적혀 있었다. 같은 교실에서 공부를 하게 되어서 반갑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그 중 장애 때문에 마음이 아프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96년 연세대 항쟁 사진 출처 - 구글 안경선배와 민중가요 ‘전화 카드 한 장’  1박2일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은 부슬 부슬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신촌에서 기숙사로 가는 길은 미끄러웠고 외로웠다. 나와 정반대의 길에 사는 94학번 동갑내기 선배는 신촌역에서 기숙사까지 나와 80분을 함께 했는데, 그녀는 나를 바래다준다거나 걱정된다거나 하는 소리는 굳이 하지 않았다. 우산을 쓰지도 않았고 씌어주지도 않았다. 그냥 조용히 걸었다. 노래를 차례대로 불러 주면서.  긴 생머리, 늘 조용하고 무섭기까지 한 안경선배의 안경에는 온통 물방울이 맺혀 있었고, 물 맞은 머리결에서 물안개가 뽀얗기만 했다. 그렇게 그 안경 선배는 나에게 '전화카드 한 장'이란 민중가요를 나즈막이 불러주었었다. 내 생애 처음으로 나에게 전화해도 좋다고 해준 비장애 친구였다.  새내기 한학기가 다 끝나고 갈 곳도 못 구하고 기숙사를 비워야 했을 때, 오다가다 만난 재미 교포 형은 어느 날 제일 먹고 싶은 과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아무생각 없이 내가 제일 먹고 싶었던 과일, 그러나 내가 제일 사먹기 어려운 '수박'을 이야기 했다. 한 시간 뒤에 학교 오솔길 야외 테이블에서 남자 두 명이 커다란 수박 반덩어리를 하나씩 들고 머리 박고 먹고 있었다.  결국 신촌의 어느 하숙집도 장애인 학생을 하숙생으로 받아 주지 않았다. 그렇게 나에게 자취의 모든 노하우를 전수해주던 아웃사이더 과 선배와의 신촌 옥탑방살이는 좌절되고 학생회관 동아리 방에 얹혀살게 되었다. 총학생회실 바로 옆에서 적십자 동아리방에서 먹고 자고 화장실에서 씻는 생활을 한 지 일주일 지날 무렵 처음보는, 딱 봐도 부잣집 아들 같은 동아리 선배가 불쑥 자기집으로 가자했다. 태어나서 나는 옷방을 따로 가진 강남의 저택을 처음 보았다. 거의 5개월 만에 갓 지은 밥에 뜨거운 물로 샤워할 수 있었다. 선배는 내가 왜 동아리방에서 방학을 보내는지 묻지 않았다.  1996년 8월, 저녁마다 짜장면을 사주던 총학생회실이 긴박해졌다. 어느 날, 전공도 알 수 없던 선배가 갑자기 나를 불러 세브란스 병원으로 뛰어갔다. 세브란스 병원 응급실엔 경찰의 곤봉에 맞아 머리가 터지고 입술이 부르튼 같이 짜장면과 군만두를 나눠먹던 총학생회 누나들과 형들이 있었다. 그 중에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형이 나에게 다가와 같이 병원 밖으로 나갈 수 있냐고 했다.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러겠다고 했다. 총학생회실에서 나만 보면 그는 탕수육을 시켜주었기 때문이다.  학교 정문 옆에 병원입구를 나서는데 경찰들이 엄청나게 길을 막고 있었다. 그 중에 한 명이 나에게 물었다. 옆에 형은 누구냐고 어디 갔다가 가는 길이냐고 물었다. 왜 그렇게 대답했는지 지금도 알 수 없지만 세브란스의 재활병동에 가는 길이라고 했고 나와 전혀 닮지 않은 한총련 간부를 친형이고 내 보호자라고 했다. 신촌역까지 5번의 검문이 있었지만 정문을 나와서는 누구도 우리를 잡지 않았다. 서슬 퍼런 전경들도 초록색 어깨 완장을 얹은 간부들도 어여 비켜주라고 했다. 96년 연세대 항쟁이라는 역사 현장에서 내 장애와 내 목발은 아무도 모르는 투사가 되었다. 장애인이라 의심하지 않는 것이 살짝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들을 속였다는 것이 더 짜릿했다.  신촌역에서 만난 나만 보면 구박하던 여자 선배는 화장실 앞 자판기에서 한참을 서 있다가 나를 발견하고는 갑자기 여자 화장실로 나를 끌고 갔다. 무서웠지만 그 선배는 조용히 울고 있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선배는 생리대 45개를 내 온몸 구석구석에 붙여 놓고는 튀어나오지 않게 압박 붕대로 감더니 우리 학교 제일 높은 곳 종합관으로 배달을 부탁했다. 목발을 짚고 있으면 유일하게 몸수색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종합관에는 갇힌 채 보름 넘게 집에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생리대를 처음 보았고 처음 몸에 붙여 보았고 목발을 사용할 때 겨드랑이에 사용하면 훨씬 덜 아프다는 것도 그 때 처음 알았다.  그렇게 탈출시킨 학생 운동하는 사람들은 늘 분단이 한국사회모순의 출발점이며 분단 조국의 '통일'만이 이를 해결하고 장애 해방도 가능하다고 했다. 또 어떤 이는 노동 해방을 이루면 장애 해방도 이룩된다고 했다. 그들의 논리는 빈틈이 없었고 반박할 수도 없었다. 단지 궁금해졌다. 노동해방이 될 때까지 통일이 될 때까지 우리는 하숙집에서 쫒겨나야 되는건가? 노동 해방이 될 때까지 통일이 될 때까지 우리는 도서관도 못가고 화장실도 가지 못한 채로 오줌통을 들고 다녀야 하는 건가?  민주 광장에 모였다 하면 일만 명이 족히 되었던 그들, 저들 중 백 명만 있으면, 아니 50명만 있으면 당장 경사로를 만들 수 있는데, 당장 점자책이라도 구비할 텐데. 저들은 일만명이나 모였다면서 경찰에 걸려 내가 탈출시켜야 하는 걸까? 정말 궁금했다. (다음 호에 계속)
2018-03-21 | hrights | 조회: 352 | 추천: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