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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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이동화(아디 활동가),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 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이동화 / 사단법인 아디 활동가 지난 10월 7일, 이스라엘과 하마스간 무력 충돌 당시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에서 평화여행을 수행하고 있던 필자와 소속단체 활동가들은 급히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 귀국 후 이스라엘의 잔인한 보복 공격도 걱정이지만 단전, 단수, 생필품 의약품 반입 중단과 같은 조치는 가자 지구 전체 주민들을 죽음의 재앙으로 몰고 갈 것이기에 이 들을 살리기 위한 노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국내 단체들과 첫 번째 대응회의를 했을 때 가자 지구 주민들에 대한 긴급구호 모금 캠페인을 제안했고 참여한 모든 단체들은 흔쾌히 뜻을 모아주었다. 서둘러 서울시에 기부금품 모집 신고절차를 완료하고 11월 10일 처음 모금함을 개설했다. 모금기간은 총 50일, 목표 모금액은 5천만 원이었다. 가자 지구의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났기에 설정한 금액이지만 설마 되겠느냐 라는 생각도 들었다. 왜냐하면 2021년 4차 가자 전쟁이 끝난 후 필자가 속한 단체는 가자 지구 폭력 피해생존자 지원을 위한 모금을 2달 동안 진행했고 당시 모았던 금액은 천만 원 남짓이었다. 이 중 절반은 국내 한 재단이 기부했고 일반인들의 모금은 5백만 원이었기에 목표액 5천 만원은 어쩌면 불가능한 수치라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모금함을 개설하니 필자의 예상은 다행히 빗나갔다. 초기 며칠은 2~3건에 불과했던 모금 참여가 거리 집회에서 홍보하고 연대체에 모인 단체에게 참여 메일을 보내고 나니 갑자기 참여횟수가 오르기 시작했다. 추세를 보아하니 모금 개설한지 한 달이 되는 12월 10일에 목표액을 넘어설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해당 모금은 서울시에 등록신고를 마쳤고 목표액을 상회해서 모금할 수 없기에 다시 서둘러서 서울시에 목표 모금액을 1억으로 변경하고 모금 기한도 1월 10일로 늘리는 신고절차를 진행했다. 그때 만해도 많은 이들이 관심 가진다고 해도 팔레스타인 모금 이슈로 1억을 넘기기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 예상은 다시 한 번 빗나갔다. 12월이 되어서도 모금 참여 열기는 식지 않았다. 아니 연말이 다가오면서 더욱 참여는 늘어갔다. 한번 참여했던 사람이 두 번, 세 번 참여하는 경우도 생겼고, 수녀님이나 수사님처럼 돈과는 관련이 적어보이는 분들에게서 적지 않은 모금이 걷혔다. 누군가는 자신의 생일에 나이에 맞게 기부하는 이도 있고,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활동가 부부는 자신의 아이를 떠올리며 부부 월급의 절반에 해당되는 거금을 기부하였다. 돼지 저금통의 배를 갈라 기부한 듯한 몇 십 원 단위까지 찍혀있는 모금액에 더 많이 기부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사연까지 접하면서 정말 마음이 뭉클해졌다. 그리고 연말 연 초 연휴가 끝나고 다시 모금액을 확인하자 목표액인 1억 원을 분명 초과할 거라 예상됐다. 또 다시 부랴부랴 서울시에 목표 모금액을 늘리는 절차를 진행했고 담당 공무원은 너무 자주 바꾼다는 핀잔도 주었지만 마음은 뿌듯했다. 아마도 모금기한을 계속 연장했다면 더 모였겠지만 팔레스타인 현장에 속히 모금액이 전달되어야 하기에 예정했던 1월 10일에 모금을 마감했다. 그리고 거의 1000명에 육박하는 개인과 단체가 참여해 주었고 총 모금액은 1억 3천만 원이 조금 못 미쳤다. 팔레스타인 개발사업과 모금활동을 4년 동안 지속하면서 처음으로 맞이하는 참여자수와 모금액이었다. 처음 모금계획을 팔레스타인 활동가와 논의하면서 예상했던 금액이 약 3만 4천 유로였지만 결국 2.5배에 이르는 약 9만 유로를 모았다는 소식에 팔레스타인 활동가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모금에 참여한 모든 이들에게 감사를 전했다. 가자 지구 피해주민 긴급구호 모금 모집 보고 아디 홈페이지 내용 캡쳐 최근 국제사법재판소는 이스라엘에 가자지구 주민에 대한 집단학살을 막기 위한 모든 조치를 강구하고 인도주의 지원을 더욱 확대할 수 있도록 결정을 하였지만 이스라엘은 지금도 가자 지구의 병원을 공격하고 인구 2백만의 가자 지구를 지옥으로 몰고 있다. 국제사회 역시 휴전 결의안을 채택하며 이스라엘을 압박하지만 미국을 비롯한 이스라엘 우방 국가들(한국도 포함)은 이스라엘의 자위권은 인정한다며 이 미친 학살에 힘을 보태고 있다. 비록 피해가 너무 커서 모금된 금액으로 피해를 복구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라겠지만 온통 절망적인 소식 하루를 힘겹게 버티고 있는 가자 지구 주민들에게 한국의 천명의 시민과 단체가 보여준 연대의 모금은 분명 모금 이상의 의미를 전달 할 것이다. 그리고 이번 모금을 통해 조금이나마 존엄을 유지하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모습은 다시 한국 사회에 전해져 더 두꺼운 희망과 연대의 이음줄을 만들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2024-01-30 | hrights | 조회: 116 | 추천: 3
신종환 / 공무원  내가 처음 정신과에 간 건 오히려 예전 부서들에 비하면 야근이 훨씬 적은 지금 부서에 근무하고부터였다. 맨 처음 주민센터에서 복지상담을 담당했을 때 나는 세상 경험이 적은 사회초년생이라는 점과 맞물려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고, 당시 민원대를 맡아달라는 팀장의 말에 민원인 침 때문에 건조할 일은 없겠다며 너스레를 떨던 선임의 말처럼 욕설은 늘 넉넉하게 들었다. 그래도 두어달 뒤 즈음부터 긴장은 되었지만 불행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건 어쨌든 내가 들인 품이 누군가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 쉽게 느낄 수 있었고 미우나 고우나 마주하는 사람들 중 누군가는 내게 큰 보람을 주었고 그 느낌은 내안에서 나를 지탱했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 회계업무를 맡고 나서는 내가 두려워 하는 숫자들이 주는 압박들을 느꼈고 그 고통들에 대해 내가 마주서야할 당위성을 찾지 못한 것이 당시 마음 속 붕괴의 단초였다는 생각이 든다. 당위를 찾지 못하니 일이 하찮게 느껴지고 그런 일을 처리하지 못하는 스스로도 당연히 하찮고 예전에는 살아있는 실감을 줬던 것들이 이제는 사라지니 살아갈 보람 대신 날 죽지 못하는 하는 이유들만 원망스럽게 쳐다보던 무섭고 슬픈 시절. 화장실에 들어가면 마약중독자가 불안을 해소하려 마약을 복용하듯 유튜브 쇼츠와 웹툰을 보고 화면을 끄면 바로 불안과 두려움이 찾아들던 시절. 다행히 다른 동기들과는 달리 나는 정신과 약이 잘 맞았고 사지가 멀쩡해 다시 운동을 할 수 있어 급할 때는 술 대신 헬스장을 찾을 정도의 정신머리는 유지하고 살고 있다.  하지만 다들 나처럼 운이 좋지는 않아서 얼마 전 임용 동기였던 친한 사람은 수년의 휴직 끝에도 내적상태가 호전되지 않아 면직했다. 그들 자신을 포함해서 ~~해도 괜찮다는 많은 말을 하는 이들과 아픈 이들이 애사심을 갖고 떠나지 않게 각자의 이름을 가진 나무를 심자는 사람들 전부 왜 그들이 떠나는지에 대해서 초점들이 어긋난 느낌을 준다.  괜찮다는 말로 건네는 위안과 자살하거나 퇴직한 사람들의 고통을 구체화해 해소할 것을 주장하는 말은 틀린 건 아니지만 그 말들에는 어떤 가치가 지향할 법하고 어떤 삶이 살아볼 법한 것인지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끽해야 저녁이 있는 삶 정도의 얘기가 나온다. 저녁이 있는 삶은 중요하지만 그건 가치있는 삶을 위한 제반조건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 눈에 띠는 건 도처에 널린 동정과 비명 뿐이라 살아갈 방향에 대한 자력을 느끼기는 어렵다. 어떤 고통은 살아있다는 실감에 뿌리를 두지만 어떤 고통은 살 이유를 찾지 못한 메마른 공허감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런 방향성과 구체적인 욕망의 부재로 인한 회의감과 우울감, 공황을 생각하면 몇몇 사람들과 그들의 말이 떠오른다. 김준산은 본인의 책 ‘철학 듣는 밤’에서 ‘신체적으로 바쁜 이들에게는 우울이 잘 찾아오지 않는다. 몸은 나름대로의 자정기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라고 말했고 니체는 ‘도덕적 현상이란 없다. 다만 현상에 대한 해석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김준산의 말을 얼핏 들으면 요새 사람들은 빡세게 일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발상으로 시작하는 라떼식 심정의 산물 같지만 세상 돌아가는 걸 보고 있자면 그의 말과 상통하는 면은 있는 것 같다.  매체들에서는 세대를 나누어 특정 나이대에 벌어지는 현상을 그 세대에 선천적으로 주어진 특징처럼 얘기하지만 상식적으로 그 몇십년 사이에 유전적 차이가 발생했을 리는 없고 상황이 나아져서 그랬다면 과거 세대들도 부유한 집들의 자녀 출신들은 더 많이 고통에 취약했어야 하지만 그렇다는 말도 없다. 다만 살아갈 이유를 찾기가 어렵고 사는 이유를 뚜렷히 보여주고 자신의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며 그 대신 단편적인 구매욕과 자극이 내면의 척도를 더욱 어그려뜨렸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민원 상담직에게 액션캠을 달아주고 비상벨을 설치하는 건 중요하지만 앞서 언급했든 그런 것들만으로는 큰 이유 중 하나인 삶의 척도가 없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고통을 이겨낼 심적 까닭을 보여주는 일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고통을 삶에 적절히 위치시키려 부단히 애쓰고 애쓰는 보람이 있는 삶을 보여주는 것. 어떠한 것을 하지말자라는 문장, 어떠한 것을 하자는 말보다 맥동 있게 다가오는 건 직접 그런 삶을 보여줌으로써 죽고 싶지 않다는 부정이 아닌 저렇게 살고자 하는 건강한 욕망을 자극 하는 일이다.  언젠가 그런 삶을 보여주고 고된 사람들에게 말해주지는 못해도 최소한 삶은 어떤 건강한 지향이 있다면 견딜 수 있음을 상기시켜주고 싶다. 어떻게 그런 삶을 살지는 모르지만 우선은 잘 먹고 잘 자고 제 때 청소하고 운동하고 가끔 글 쓰며 살고 있다. 다들 건강한 하루를 소중히 하고 잘 지켜낼 수 있기를.
2024-01-24 | hrights | 조회: 262 | 추천: 3
이원영 / 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배우 이선균의 죽음. 그 죽음은 많은 이들을 슬프게 했다. 마약 사범으로 몰려 비난과 공격의 화살을 맞고 만신창이가 된 한 인간의 쓸쓸한 뒷모습. 결국 그는 고통을 감당하지 못해 소중한 목숨을 버리고 말았다. 공격하는 자는 많았지만 그를 지켜주려고 나선 사람은 없었다. 그가 마약을 하지 않았기를 바라는 마음은 결국 지켜주지 못한 안타까움, 그리고 속절없는 원망으로 우리를 칭칭 감아버렸다. 혼자서 아픔을 감당해야 할 때, 주변의 차가운 시선을 견뎌야 할 때, 억울한 마음이 커져 갈 때 누군가 함께 울타리가 되어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돌아보고 부정해보아야 아무런 소용없었다. 영화도, 드라마도 자주 보지 않다 보니 이선균이라는 배우에 대해 친근감, 애틋함이 강하지는 않았다. 어느 날부터 ‘나의 아저씨’ 드라마 짤(짧은 영상)이 내 핸드폰 유튜브에 자주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연기와 이야기가 슬플 때 나를 위로해 주는 친구처럼 불쑥 다가왔다. 저절로 그의 팬이 되었다. 연기자들이 그렇게 많은 사랑을 받는 것은 이런 이유일 것이다. 어쩌면 배우라는 직업은 참 숭고한 점이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그런 인기, 배우라는 직업의 함정이 그를 외로운 죽음으로 몰고 갔는지도 모른다. 특히, 경찰과 언론의 무차별 공격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에 그의 죽음은 파장이 클 수밖에 없다. 누군가의 인격이 무너지는 순간에 새해는 갑진년이다. ‘년’이라는 말이 좀 그렇지만 ‘갑진’이라는 말은 참 어감도 뜻도 좋다. 연초부터 갑진년, 갑진년 인사말을 주고받으면서 상쾌한 출발을 기대해본다. 소시민들의 이런 일상의 바람과는 달리 지금 시대 상황은 어둡고, 칙칙하다. 극단적인 대결과 혐오로 치닫는 정치도 그렇고 고물가, 고금리, 치솟는 가계부채 상황도 서민들 마음을 겨울바람처럼 차갑게 꽁꽁 얼리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겨울이 너무도 싫었다. 시민운동 하면서 각종 집회와 농성을 할 때면 찬바람이 온몸을 냉동시켜버리는 고통이 견디기 힘들었다. 거기에 더해 겨울이면 두꺼운 옷을 입어야 하고 난방비가 급등하는 통해 가난한 이들의 살림살이가 더 힘들어지는 것이 걱정되었다. 평상시 5만 원 하던 집과 사무실의 도시가스비가 어떨 때는 20만 원이 넘게 나오기도 했다. 자연의 섭리를 어쩌랴마는 감정적으로 안 좋을 수밖에 없는 처지 때문이었다. 그래서 겨울로 접어들고 날씨가 추워지면 주변에 걱정하는 소리가 더 크게 들리는 것 같다. 추운 겨울일수록 더욱 힘든 이들. 경기가 안 좋을수록 버티기 힘든 이들에게는 나의 아저씨가 있어야 한다. 가난한 이들에게 정부(정치)가 나의 아저씨처럼 위안이 되길 바라는 것은 과한 욕심일까? 누군가 곁에서 위로의 말을 건네고 따뜻한 밥 한 끼를 대접하는 공동체를 만들 수는 없을까? 누군가의 인권이 무너질 듯, 위태로울 때 마지막까지 지켜줄 버팀목이 있다는 것을 증거하는 사회는 불가능할까? 이런 근원적이고 도전적인 질문을 던져본다. 새해에는 좋은 일들이 더 많기를 바란다. 역시 새해 덕담도 가볍지는 않다. 좋은 선택과 행동이 많아야 좋은 사회 사회에 드리운 짙은 우울감과 분노를 매일 실감한다. 유유상종이어선지 내 주변에는 진보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정치 문제에 관한 뜨거운 토론이 자주 벌어진다. 무엇보다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 것을 느낀다. 개인적으로는 현 정권을 파시스트 정권이라고 부르고 싶다. 검찰 독재는 물론이고 정권의 일거수일투족이 민주주의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외교 등 현 정부의 모든 정책은 시대를 역주행하고 있다. 권력을 손에 쥔 자와 세력이 나쁜 방향으로 선택을 반복하고 있어 그 피해가 국민에게 돌아가고 있다. 올해 4월 총선은 그래서 매우 중요하다. 현 정권의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 단순하지는 않지만, 우리의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좋은 삶을 사는 방법은 좋은 선택을 자주 하는 것이다. 사회도 마찬가지일 게다. 좋은 선택과 행동이 모여야 좋은 사회로 갈 수 있다. 어떤 선택이 좋은 것일까? 견리망의(見利忘義)라는 사자성어가 던지는 메시지를 생각한다. 이익이 보일 때 의로움을 선택하는 용기를. 그런 용기가 서로 연결되어 더 강해지기를. 답답할 때마다 되새겨 보련다.
2024-01-16 | hrights | 조회: 234 | 추천: 3
윤요왕 춘천별빛 사회적협동조합 상임이사 AI, GPT, 코딩 등으로 상징되는 디지털 미래사회는 이미 우리 앞에 와 있는 듯 하다. 몇 년전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을 보면서 딥러닝(Deep learning : 인간의 두뇌에서 영감을 얻은 방식으로 데이터를 처리하도록 컴퓨터를 가르치는 인공 지능(AI) 방식)에 대해 전 세계는 놀라움을 넘어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빠지기도 했다. 이렇게 인공지능 시대를 맞는 우리나라도 교육계를 중심으로 앞다투어 디지털 미래교육을 주요한 교육의 화두로 잡고 다양한 준비와 본격적으로 실행하기에 이르렀다. 인공지능의 놀라운 기술진보로 그만큼 좋아질 것만 같은 미래사회를 어떻게 바라보고 무엇을 준비해야할까? 마냥 편리해지고 삶이 윤택해지기만 하는 걸까? 수많은 직업이 없어진다고도 하고 혹시 인공지능 로봇에 인류가 위협받지는 않을까 불안해하는 목소리들도 나온다. 특히 내가 고민하는 지점은 지금 청소년, 청년들이다. 그들이 안고 살아가야하는 미래에 혹시 이런 기술진보로 더욱 피폐해지는 건 아닐지 걱정스러운 마음을 지울수가 없다. 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진보하고 변화를 가져오는데 현재 우리사회는 어떤 면에서 퇴보하는 건 아닌가 하는 절망의 뉴스들이 포털기사를 도배하고 있다. 며칠 전 상상조차 하기 힘든 야당대표에 대한 일반시민의 피습사건이 그렇고, 갈수록 심해지는 빈부의 격차가 그렇고, 세대간 성별간 혐오와 폭력이 그렇다. 우리사회의 미래를 책임질 청소년, 청년들의 막막하고 불안한 희망없는 미래는 과연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는지 해답이 보이지 않는다. 현대의 인류사회는 촘촘한 그물망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청소년,청년들의 이런 불안감은 자살율 증가의 결과로 나타나고 은둔형 외톨이, 취업포기-결혼포기 등 심각한 사회문제의 원인으로 작동되고 있음을 알수 있다. 혹시, 기술진보의 혜택을 과거나 지금보다도 더욱 일부 소수 특권층만이 누리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흘러가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나는 청소년시기 교육을 통해 이 예측되지 않는 미래시대를 준비해 대응하지 않으면 디지털기술에 종속되어 결국은 인류의 재앙으로 다가올 수도 있음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이 지점에서 디지털 혁명이라고 불릴만큼 기존의 패러다임과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미래시대를 ‘미래교육’이라는 관점으로 몇 가지 이야기 하고자 한다. ChatGPT에 물어봤다. “미래교육의 핵심 키워드는 무엇인가?” 인공지능은 <1.문제해결 능력 강화 2.기술과 디지털리터러시 3.협업과 커뮤니케이션 4.융합적 사고 5.자기주도적 학습과지속적 역량강화 6.윤리적 사고와 다양성 인식>이라고 몇 초만에 답을 내 놓았다. 나의 예상과는 많이 다른 답변에 뒷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보통 우리가 미래교육이라고 하면 앞서 얘기한 디지털, AI, GPT, 코딩 등을 익히고 다루는 교육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2. 기술과 디지털 리터러시> 이외에는 인문적 역량(필자 표현)이 미래교육의 핵심역량이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우리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많은 사회문제 대부분이 위에서 ChatGPT가 답한 미래에 필요한 인문적 사고와 관점, 관계의 어려움에서 생기는 문제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교육계는 물론 우리사회가 미래의 핵심역량=인문역량을 가르치고 익힐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하는데 현장에서는 체감할 수가 없다. 오히려 약육강식의 사회를 기정사실화 하고 그 속에서 살아남는 경쟁과 승자독식의 방법만을 강요하고 있지는 않은지 심각하게 돌아봐야 한다. 대표적인 예로 2023년 보건사회연구원 발표를 보면 국민 상위 1%가 전체의 10.9%, 상위 10%가 전체의 43.2%의 순자산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사회의 현실에서 청소년, 청년들을 경쟁사회속에서 승리자 vs 패배자라고 하는 이분법적 사고를 종용받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20대 자살률이 높은 이유가 ‘취업 스트레스, 경제적 빈곤으로 인한 압박감’이라는 연구보고서가 말해주듯 다수의 청년들에게 미래는 암울한 절벽 그 자체임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미래교육=인문역량이라고 힘주어 얘기하는 이유는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자본주의의 빈부격차, 소득불균형 등의 문제를 사회안전망 구축, 자유와 성숙한 민주주의가 떠받치고 있으며 앞으로 더욱 요구되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을 위시한 대도시의 근사한(?) 대학과 직장을 다녀야 대접받는 기득권이 되는 작금의 현실속에서 다수의 국민들이 우울감과 패배감을 느끼는 건 어쩌면 당연할지 모른다. 미래의 기술진보의 혜택은 그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수입을 올려야만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국가와 사회는 다수의 특히, 사회적약자가 행복하고 안전할 수 있는 시스템과 장치를 만들어 국민 누구나가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해야하는 게 당연한 책무일 것이다. 정치인들 모두가 그렇게 떠들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나, 갈수록 사회는 소수의 그들만의 리그로 가속화되어가고 있는 현상을 볼 때 ChatGPT가 얘기한대로 인문역량이 없어서는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미래교육의 핵심역량이 인문역량을 기르는 것이라고 할 때, 이 인문적 사고와 관점에 대한 교육은 우리사회의 불평등, 빈부격차, 사회의 안전망, 관계성 회복 등을 통해 그래도 살만한 세상을 구현하는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할 것이다. 10여년 전부터 학교교육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삶의 배움을 ‘마을교육공동체’란 이름으로 전국적에서 다양하게 진행하고 있다. 2024년 올 해 교육부에서 일몰시킨 사업으로 분노와 허탈감에 빠진 마을교육 활동가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미래교육=마을교육이라는 가치와 의미를 가슴에 새기고 여전히 아이들과 함께 미래시대를 맞이할 ‘마을교육’을 준비하고 있었다. 돈과 권력이 최고의 가치로 평가되는 이 사회에 그래도 국가와 사회가 최소한의 인간적 삶을 보장해주는 안전망으로서 작동되기 위해서는 미래세대에 대한 건강하고 올바른 교육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결국 모두가 함께 어울리며 토닥이며 살 수 있어야 위정자들이 한결같이 얘기하는 진정한 자유와 민주주의가 살아있는 복지국가로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몇 달 후 치뤄지는 총선의 소용돌이속으로 벌써 온 나라가 빠져들고 있다. 그러나, 국민들 서민들의 하루하루는 힘겨움에 고통스런 2024년을 맞고 있음을 제대로 돌아봐야 할 것이다.
2024-01-10 | hrights | 조회: 115 | 추천: 4
김형수 / 장애인학생지원네크워크 사무국장 장애라는 이름이 부끄러운가? 지금도 어떤 사람들은 나를 만나면 다른 사람에게는 잘하지 않는 인사말을 할 때가 있다. “생각보다 참 밝으시네요.” 한참 어릴 때는 명절 때마다 나이가 한참 나이가 높은 친척들이 나를 보면, 내 몸을 어루만지시며 ‘병신 자식이 효도한다시며 같이 죽으러가자’ 고 말씀하시고는 했다. 40여 년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그런 말들이 소름끼치게 두렵고 무서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저 관용구는 분명 그런 뜻으로 쓰는 말이 아닐진대, 왜 그때 사람들은 장애인이 효도라도 하려면 빨리 죽은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을까? 아니, 왜 그런 슬프고 잔인한 저주를 어린 당사자에게 아무렇지 않게 내뱉을 수 있었을까? 그런 표현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오히려 따뜻한 격려와 다정한 걱정처럼 여겨졌을까? 저런 장애에 대한 사람들의 언어와 표현들은 반세기가 지났어도, UN인권 이사국이 되고 아시아 최초 국가 차원의 장애인차별금지법을 만들어도 심각하게 문제제기 되거나 비난받지 않을까? 왜 우리 사회는 장애인 인권교육과 통합 교육이 법제화된 선진국이 되었어도 정치인이나 언론들이 장애인을 비하하거나 장애 때문에 일어난 일을 범죄화 하거나 장애인을 비장애인으로부터 분리하고 격리하는, 이제 더러운 화장실 벽에 조차 잘 쓰지 않을 장애의 혐오 표현과 차별 발언을 공식석상에서 마이크를 통해서 기사를 쏟아내어도 사회적으로 지탄받거나 강력하게 제지받지 아니한가? 여전히 장애인을 양육하는 부모들은 자녀의 장애를 당사자 뿐만 아니라 당신들의 지극히 극심한 불행으로, 심지어 구원받을 수 없는 죄로 여긴다. 그래서 비장애인 자녀였다면 사사로운 개인 대화에서조차 당장 아동 학대로 신고될 자녀살해후 자살 같은 것들을 너무 쉽게 표현한다. 그리고 이렇게 전근대적이고 비과학적인 장애에 대한 사람들의 개인 사사로운 감정 표현들을 주요 언론과 정치인들은 너무라도 거리낌없이 대중들에게 언어로 공개적으로 발표하여 공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장애인 당사자 조차도 장애를 드러내고, 알리고, 국가에 알리는 것을 감추고 수치스러워하며 우리 사회는 이를 방조하고 묵인하기까지 한다. 이는 최근 심한 장애가 있던 20대 삼형제가 집에 감금 당한 채로 아버지에 의해 살해당한 사건에서 너무도 잘 드러난다. 그 현실을 매주 특수교사가 직접 목격했음에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신고하거나 고발하지 못했다. “장애인을 차별하거나 혐오 하는 것이 진정한 차별입니다.”라는 표어처럼 장애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극복하려고 되레 장애혐오 표현을 동원하고 장애에 대한 부정인식을 강화하고 퍼뜨리는 것이 가장 대표적이다. 전형적인 순환 혐오이자 이중 혐오다. 혐오가 혐오를 낳고 전파하고 심지어 그 비판까지도 다시 혐오로 전염 시킨다.  장애와 장애인은 사회가 당사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만든 사회제도이자 행정임을 이론으로 지식으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만 우리의 인식과 말과 행동은 조선시대가 더 나았다고 평가할 지경이다. 바로 그것이 언어 대중들의 공개적인 장애와 장애인 ‘혐오표현’의 권력이자 결과이다. 그 혐오 표현을 부리는 사람은 그것을 듣거나 보거나 느끼는 사람에게 불안과 공포, 죄책감을 안기면서 스스로를 혐오하는 대상보다 우월하고 정상이라는 일종의 안정감과 안심을 받는다. 그래서 극단적으로 즐거움까지 얻는다. 그래서 혐오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다. 나아가 작금은 소통의 도구로 혐오 표현이 많이 사용된다. 많이 사용된다는 뜻은 혐오 표현을 했을 때 그것을 수용하고 이해하고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다. “나만 아니면 돼!!” 개인의 욕설로서의 장애혐오와 장애인의 모욕이라도 당사자나 상대방이 직접 듣거나 대면한다면 엄연히 장애인 복지법 8조 위반의 범죄 행위이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법적으로 이를 제대로 연구하거나 처벌하여 사람들에게 ‘범죄’라고 분명한 범죄 예방의 메시지를 분명히 한 적이 없다.        과거 2000년 불결한 성관계가, 장애아를 낳는다는 취지의 발언을 kBS 방송에서 감행한 개그맨 이창명 씨의 발언과 장애인 낙태는 어쩔 수 없다는 이명박 전대통령의 설화와 함께 2000년 초부터 게시판을 달궜던 초등학생들의 ‘애자’라는 놀림말의 사용, 그리고 장애인들을 아무데서나 공개적으로 목욕시킨 정치인들의 행동과 더불어 매주 장애인은 절대 함께 웃을 수 없는 개그프로그램들과 언론들이 전염시키고 길러낸 사회적 양육의 예견된 결과일 뿐이다. 장애인을 위해 투자하고 지원하는 일이 중요하고 필요한 정책이나 지원이 아니라 아직까지도 개인의 착한 일로 궃은 일로 해석되고 표현되는 것이라면 이는 역설적으로 언제든 혐오로 오염될 양분이 될 뿐이다. 언제든 사람들의 감정이나 기분, 상황에 따라 장애인에 대한 입장과 자세를 바뀌는 것을 허용하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애와 장애인에 대한 올바르고 인권적인 표현을 쓰는 것은 단순 에티켓이나 예의가 아니다. 더구나 단순히 매너라고 해도 어기면 사회적으로 비난받기도 하는데 장애인 혐오표현은 그런 비난조차 비켜간다. 감정적으로 혐오와 은유를 생산하는 것은 용서되어 버린다. 장애인을 사랑합시다라고 외치는 순간 사랑하지 말아야 할 혐오의 대상이 된다. 우리가 장애이해교육이나 인식개선 교육이라고 칭할 때도 그래서 신중해야 한다. 다른 소수자 교육에서는 쓰지 않으니 인식 개선이나 이해는 혐오의 지식이나 양분이 되기도 한다. 작년에 어느 드라마 때문에 자폐인과 같은 장애인에게 그렇게 관용적이고 통합적인 사람들과 올해 교사들을 둘러싼 뜨거운 이슈에 장애인에 대해 가장 인권적이고 전문적인 특수교사들이 자신의 직업적 어려움을 대중들에게 설득하고 부각시키기 위해 얼마나 장애인 학생의 장애를 부정적으로, 모멸적으로 강제 아웃팅 했는가를 보면 자명할 뿐이다. 언론 조차도 이런 일을 다루면서 외국의 100년 전 개인 교사로 폭력적으로 특수교육을 했던 설리반을 찬양하는 표현으로 일관하고 장애인 학생들이 특수학교나 특수학급에만 머물라는 분명 국제 조약에 위배되는 주장을 마치 정답인 것처럼 진정한 인권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마약 사건에서 마약에 취한 모습을 틱 장애에 비유하는 주요 뉴스를 보면 우리 사회의 전문가들과 언론들이 얼마나 장애인 혐오에 대해 둔감하고 자기 주관적인가를 알 수 있다. 그와 같은 밑바탕에는 요즘 각종 매체에서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는 말이 깔려 있다. “나만 아니면 돼” 이 말을 공개석상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의 혐오 문제는 결코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누군가의 곤란함과 기회박탈과 차별을 공동체의 민주적인 규칙과 여론으로 착각하는 이런 인식표현을 대중들과 매체들이 당연시 하는 것을 이제 멈추어야 한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아야 한다. 지금은 각종 집단 칼부림  사건에서 보듯이 한국 사회의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가 전면에 혐오 범죄나 증오 범죄로 등장할 수 있는 사회 발전 단계의 시간대인 동시에, 우리가 타인의 삶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며 함께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라고 믿는다. 표현은 우리가 누구인지 드러내는 도구이자 시간이기도 하니까. 출처: 베이비뉴스 이제 우리는 반드시 장애를 겪고 장애인으로서 삶을 마감하는 인간 수명 시대에 산다. 이제 우리는 반드시 장애인을 가족으로 맞이하는 시대에 산다. 이제 우리는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낳기라도 하면 국가와 사회가 책임을 져야 공동체가 존속할 수 있는 시대에 산다. 지금 당장 장애인 혐오를 멈추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는 혐오의 폭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경솔하고 천박한 말이 입에서 튀어나오려고 하면 재빨리 마음을 짓눌러, 그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일단 입 밖으로 내뱉고 나면 다른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해로움이 따르게 될 텐데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조선 후기 이덕무 수양서 <사소절(士小節)> 중에서)
2024-01-08 | hrights | 조회: 81 | 추천: 3
정한별 / 사회복지사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밝혀둘 것이 있다. 난 퇴사하지 않았다. 아직도 버티고 있다. 소위 고인물이 되었다.  직업으로서 사회복지를 한 지 10년이 넘었다. 10년 넘게 이 일을 하면서, 사회복지사라는 직업의 의미를 계속 고민하고 있다. 사회복지사는 사회복지에 관한 지식과 기술을 갖고 사회복지서비스 관련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관련 공부를 하고, 자격을 취득한 후 대개는 사회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관에 취직을 하고는 한다. 그렇다. 특정한 조건을 갖춰 본인이 직접 사회복지서비스를 제공하는 기관을 운영하지 않는 이상 보통의 사회복지사들은 직장인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내 주변의 사회복지사들 역시 자신이 다니는 사회복지시설을 ‘회사’라고 칭하는 경우들이 있었다. 자신이 다니는 사회복지시설을 회사라고 칭하는 사람들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갖기도 했다. 어쭙잖은 소명의식이라고 해야할까. ‘사회복지는 사람을 돕고, 사람의 행복을 위해 노력하는 일인데 수익을 추구하는 회사라고 칭하는 게 맞아?’라는 식의 감정들이 꽤 오랜 시간 동안 마음속에 들어차 있었다.     사회복지사로서 일하게 된 첫 직장에 이제 조금 적응이 됐을까. 나보다 3년 정도 먼저 일을 하기 시작한 선임 사회복지사가 날 불렀다. 조금 차갑다는 평이 있긴 했지만, 다른 직원들에게 피해를 주는 일도 없고, 무엇보다 일은 성실히 잘한다는 평을 받던 직원이었다. “샘, 저 말할 게 있어요. 퇴사하려구요. 더 이상 하면 안 될 것 같아요. 저는 더 못 할거 같아요. 샘은 잘하고 있으니, 지금처럼만 하면 돼요”  퇴사 예고를 처음 들은 신입 직원인 나의 머릿속은 상당히 복잡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퇴사하지 말라고 잡는 게 맞는걸까’ 하는 많은 고민들이 찰나의 순간을 채웠다. 이제 입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신입 직원에게 퇴사를 결심하고 퇴사 전에 미리 말을 하는 그 진심이 어디 간단한 마음이랴 하는 생각에 도저히 그를 잡을 수가 없었다.  “예... 많이 힘들어하고, 많은 고민 끝에 하신 말 일 테니, 퇴사 응원할게요. 고생 많으셨어요.”  퇴사 예고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드물게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었다. 2년 동안 일했던 첫 직장은 나를 포함한 전체 사회복지사의 7할이 퇴사를 했다. 퇴사의 이유는 다양했지만, 본질은 같았다. “너무 힘들다. 더 이상은 할 수가 없다.”라는 것. 박봉으로 유명한 사회복지사의 임금이 영향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더는 할 자신이 없다’라는 것이 퇴사의 공통된 변이었다. 퇴사한 직원의 3분의 1은 사회복지사라는 직업 자체를 그만두기도 하였다.  첫 직장에 다니면서, 딱 두 번 퇴사를 고민했다. 취업을 한 지 1년 정도 지났을 즈음이었다. 열심히 한 일에 비난이라는 이자가 붙어 돌아오는 것을 경험한 사건이 있었다. 그 일을 겪은 후, 지금 일하고 있는 곳이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운영되고 있다는데, 그 ‘사람들의 행복’ 안에 사회복지사의 행복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후 1년이 지난 가을, 내가 맡지도 않은 일에 또 한 번 비난이 붙어 날 괴롭힌 사건이 있었다. 결국 그해 12월 31일 첫 직장에서 퇴사했다. 퇴사하기 한 달 전, 퇴사 인사를 다닐 때 있었던 일이다. “죄송해요. 갑자기 그만두게 되어서...올해까지만 일하고 이제 그만두려구요. 다음 직원에게 잘 설명해 놓을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퇴사 인사의 반응은 두 가지로 갈렸다. “이럴 줄 알았어... 샘은 좀 오래 있을 줄 알았는데... 정 다 들게 해 놓고 왜 그만두는 거야... 또 속았어...”라며, 눈물을 훔치던 사람들. “어째 오래 일한다 했어요. 매번 그렇게 바뀌네. 뭐가 문제에요? 돈이 너무 적지? 일은 너무 많고? 내가 어따 좀 말을 해볼까?”  짧지만 강렬했던 첫 직장에서의 퇴사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퇴사를 결심하기 전 이렇게까지 울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눈물이 흘렀고 퇴사 인사를 다니는 한 달 동안은 눈물을 흘린 흔적을 들키지 않으려고 심호흡을 하고 사무실에 들어가는 일이 여사였다.  첫 퇴사 후 아직까지 자발적으로 퇴사를 하지 않았다. 대신 수도 없이 떠나는 동료들을 마주했다. 입사 첫날 나를 보며 자신은 퇴사를 한다며 기분 좋게 인사하던 직원부터, 더 같이 있지 못하고 퇴사를 하게 되어 미안하다며 퇴사는 해도 퇴근은 하지 않던 직원까지(그는 퇴사 일까지 야근을 하는 것도 모자라 퇴사 후에도 출근을 했다). 다들 떠났다. 함께 일하는 직원 중 고민을 편하게 함께 나눌 수 있는 동료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10년 넘게 일을 하는 동안 마음 편히 대화할 수 있는 직장동료들이 모두 사라졌다는 것을 요즘에서야 깨닫게 되었다.  사회복지시설을 ‘회사’라 칭하던 사회복지사의 마음을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다. 사회에서 흔히 생각하는 가치 있는 일, 좋은 일도 사실은 고용주에게 고용된 노동자가 하는 일이라는 것. 그 어떤 인간에 대한 고귀한 가치나 사회에 대한 가치 이전에 사용자에게 고용된 노동자가 행하는 노동이라는 것. 노동에 지친 동료들이 현장을 떠나는 동안 내가 아직도 퇴사하지 않고 지금 여기에 고여 있는 것은, 다행히도 내 마음의 우물이 메마르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사회복지사가 사회개혁가는 아니지만, 오늘따라 소로의 말이 더욱 슬프게 들린다.  “나는 사회개혁가가 슬픔을 느끼는 이유는 곤궁에 처한 동료 인간에 대한 연민 때문이 아니라, 비록 그 자신이 신의 가장 성스러운 아이임에도, 개인적인 괴로움에서 헤어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 중에서  2023년 12월 18일 12시 32분. 착각인지 모르겠으나, 붉어진 눈시울로 퇴사의 변을 말하던 동료의 모습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2023년의 마지막 날, 괴로움 끝에 퇴사를 결정한 그가 다른 사람을 돌보느라 자신을 소홀히 했던 날들을 떠나보내고, 아주 조금만 더 자신을 챙길 수 있길 바라본다. 말라버린 마음에 다시금 물이 고일 수 있길 바라본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팀장님.
2023-12-20 | hrights | 조회: 242 | 추천: 12
이동화 / 사단법인 아디 활동가 10월 7일 이후 너무도 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죽거나 부상당하고 있다. 수치로 확인하면 팔레스타인 전체 사망자는 18,483명이고 부상자는 53,010명이다.(12월 12일 14시 기준, 가자지구와 서안지구 사망자 부상자 합산 수치, 알자지라 뉴스 자료 인용) 여기에 건물 잔해에 묻히거나 실종된 인원이 최소 7,780명이라고 하니 사망 및 실종만 2만 6천 명을 상회한다. 이는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완전히 봉쇄한 2007년 이후, 4번의 가자 전쟁(2008~2009년, 2012년, 2014년 그리고 2021년)을 포함한 총 17년 동안 이스라엘의 군사공격에 의해 살해된 팔레스타인 사망자 숫자(5,365명)의 거의 5배에 이르는 수치다. 또한 약 2년에 걸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전체 사망자(9,614명)의 2.5배를 넘는 수치이다. 출처: 알자지라 뉴스 두 달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기록된 이 처참한 피해의 또 다른 특징은 여성과 아동의 심각한 피해이다. 지난 11월 22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제출된 자료에 따르면 “전체 사망자의 2/3가 여성과 아동(18세 이하)이고, 매일 1시간마다 2명의 어머니가 살해되며, 매일 2시간마다 7명의 여성이 사망한다. 또한 가자지구는 아이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장소가 됐고 전체 사망자의 40%가 아동이다”라고 밝혔다. 왜 이렇게 여성과 아동의 피해가 심각한지에 대해 팔레스타인 여성 언론인이자 전직 팔레스타인 정부 대변인인 누르 오데(Nour Odeh)는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공습과 폭격으로 인해 팔레스타인의 의료시설이 붕괴되고 의약품, 생필품, 식수가 고갈된 상황에서 취약계층인 여성과 아동의 치료와 보호가 어려운 점도 있지만, 이스라엘의 주요 공격 지점이 주거지역과 피난민들이 모여 있는 공용공간, 병원과 유엔 시설, 대피처에 집중이 되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이동이 어렵고 집단으로 모여 있는 여성과 아동의 피해가 크다“라고 밝혔다. 다시 말하면 팔레스타인 상황에서 성인 남성에 비해 이동과 공간의 제약이 있는 여성과 아동 다수가 밀집된 공간에서 함께 생활하는데, 이 밀집된 공간이 공습과 폭격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공습으로 파괴된 빌딩의 피해를 조사하고 부상자를 찾는 팔레스타인 주민들. 10월 7일.>사진출처: 알자지라 뉴스, Abed Khalid_AP Photos 더불어 10월 7일 이후 이스라엘 정부가 가장 빨리 내린 조치 중 하나는 가자지구로 향하는 전력, 식수, 생필품과 의료품을 끊어 버린 것이다. 이미 2007년 이후 가자지구를 거대한 감옥으로 만들었고 감옥의 열쇠를 쥐고 있던 이스라엘 입장에서, 230만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그나마 제한적으로 허용되던 전기와 물, 생필품을 막아버린 것은 그 지역 내 사람들을 절멸 시키겠다는 것과 다름이 아니다. 그렇기에 11월 7일 유엔의 사무총장은 “가자는 공동묘지가 되고 있다”라고 표현하며 즉각적인 휴전을 촉구하였다. 또한 12월 4일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지하에 건설된 터널에 바닷물을 쏟아부어 침수시킬 계획을 드러냈다. 17년간의 이스라엘의 봉쇄를 피해 식자재와 생필품이 오고 갔던 그 터널 안에 누가 있는지, 어떤 환경인지도 파악하지 않은 채 바닷물을 쏟아붓겠다는 계획은 민간인 피해와 나아가 생태계 파괴를 전혀 고려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안토니오 쿠테흐스 UN 사무총장> 출처: MBC뉴스 이 모든 야만적 행위는 ‘하마스 제거’라는 미명하에 이스라엘 군에 의해 지금도 진행 중이다. 국제인권규약 및 국제인도주의법, 전시국제법에서 규정하는 집단학살과 반인도주의범죄, 전쟁범죄의 혐의가 너무도 분명하지만 국제사회가 합의한 법과 제도는 이 야만의 시간을 막지 못하고 무력하다. 거기에 미국은 이스라엘에 막대한 군사 장비와 예산을 지원하고 있고, 한국 역시 이스라엘에 무기수출을 이어가고 있다. 덧붙이면 지난 10월 27일 유엔총회의 휴전 결의안에 한국 정부가 기권하면서 이스라엘 외무부 장관은 한국 외교부장관에게 감사의 인사를 표하기도 했다. . 이스라엘의 자위권 행사라는 이번 전쟁은 현대 전쟁에서 찾아볼 수 없는  사상자와 피해를 기록하고 있다. 가자지구 사람들은 폭격과 공습으로 인한 사상 외에도 이미 심각한 물자부족으로 ‘절멸’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소수의 친이스라엘 국가를 제외한 다수의 국가들은 즉각적인 휴전을 요구하고 있고 국제사회의 집단학살 규탄의 목소리는 커져가고 있다. 가자지구에서 거주하는 한 여성활동가는 “이번이 첫번째 전쟁도 아니고 우리는 끝까지 살아남아 이 참상을 기억할 것이다. 우리의 저항에 함께 해달라”라는 메세지를 아디에 전달해 왔다. 전 세계적으로 이스라엘의 전쟁범죄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더욱 커지고 휴전을 요구하는 국제사회의 압박이 더욱 세진다면 가자지구의 비극은 더 빨리 멈출 것이다. 그리고 이 전쟁의 끝은 휴전이 아닌 이 모든 사태의 근본적 원인인 이스라엘의 군사점령이 종식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어야 한다.
2023-12-13 | hrights | 조회: 84 | 추천: 7
신종환 / 공무원 속초시 공무원으로서 내 첫 업무는 속초시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노학동 주민센터의 복지 민원대 상담이었다. 주민센터의 별명은 복지 놀이터였다. 시에서 가장 많은 수급자 분들이 거주하는 복지 아파트가 주민센터 바로 건너편에 있어서 수급자 분들이 자주 방문했기 때문이다. 선임자 분은 전반적으로 착하고 원만하신 분이었다. 그 분께서 인수인계 해주신 내용 중 고령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은 만 85세 이상 중 특정 조건 충족하는 분들께 드리는 공경봉양수당과 100세 이상의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하는 장수수당 두 가지가 있었다. 장수수당을 설명하시면서 선배는 나에게 위로하듯이 “이제 몇 분 남지 않아서 곧 끝낼 수 있을 거에요”라고 말했다. 당시 내 마음속은 거의 아이히만이란 사람을 면밀히 조사해보니 보통사람과 다를 게 없다는 걸 알게 된 유럽사람들의 그것만큼이나 충격을 받았었다. 어떻게 저렇게 친절하게 민원을 응대하고 사람들을 위해주는 사람이 한편으로는 사람의 죽음을 건조기가 발명되면 덜 귀찮아질 세탁물처럼 희망차게 말할 수 있는건지. 마음이란 어떤 보호막을 벗어나면 빠르게 마모되기 마련이란 걸, 섬세한 마음은 강한 의지로 늘 아픔을 향하거나 아니면 어느정도의 뜻과 그 뜻에 부응하는 사람들이 서로 교응해 서로의 고통을 풀어보고 나누며 해석하지 않으면 덜 힘들기 위해 마음이 뭉툭해지기 쉽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그렇게 뭉툭해진 마음은 자신에게 물질적인 위로를 건넬지언정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만들어줄지 고민하기에는 적적한 형태가 아니라는 것도. 임용되고 시간이 약간 지난 지금은 어느새 예전 선임자처럼 모니터 속의 사람들이 사라지길 바라는 한편 아파서 병가휴직에 들어간 이에게 마음 아파하는 동료들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게 되었다. 한편 가끔 예전의 마음을 가끔 마주하거나 대학생 시절 쓴 글을 다시 보게 되면 세상을 향한 선명한 태도에 흠칫 놀라고, 이 낯선 사람이 나였다는 게 조금 당황스럽게 느껴진다. 지금부터 그때까지를 따라가다보면 그 선명한 생각 너머로 물러나면 뭐가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그래서 그 생각들에 기대 떨림은 가라앉히려는 마음들의 느껴져서 기분이 좀 복잡해진다. 그러다 이제 어느 정도는 남이 되어 버린 그때의 내게 ‘나는 네가 그렇게 경계하던 선명하지 않고 풍화된 나날에 있단다. 이렇게 될 것 같았지. 근데 완전히 망하지는 않고 어찌 어찌 있단다.’ 라고 말을 건넨다. 이런 되새기는 모습과 생각이 스스로도 하잘 없게 느껴지는데 이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도움과 연대가 절실한 사람들이 곳곳에 있기 때문이고, 오랜만에 찾은 내 마음의 한적함이 그들의 절실함을 중요하지 않게 여긴다는 반증 같아서 같다. 하지만 그래도 그런 하잘 것 없는 고민과 흐지부지한 생각들을 계속 주워 섬겨야 할 것 같은  같은 이유는 아직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가닿는 글을 아직 많이 보지 못한 까닭 같다. 예전 나의 시선으로는 인권연대를 비롯한 곳에서 여러 필자들이 쓰는 글은 그 집단의 구성원들에게는 약간 재생산되어 서로의 마음을 공공히 하지만 지금의 내눈으로 보면 같은 글이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시선을 견지하지 못하는 잘 보이지 않을뿐더러 세상의 이격됨을 더욱 선명히 하는 것만 같다. 2014년 출간된 각지의 투쟁 현장의 풍경을 엮은 책 ‘섬과 섬을 잇다’는 현장의 화, 눈물, 좌절, 결의를 더욱 세밀하게 그려 전달하면 서로를 이을 수 있을거란 소망을 제목과 내용에서 느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보여주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지 않은 책들은 그런 절실함을 미처 전달하지 못했다는 반증으로도 보였다. 그래서 엄청나게 몇 달마다 부끄러운 오늘같은 날 오히려 닳을대로 닳은 마음에서 주운 뭉툭한 말들을 억지로 내보이며 글을 쓴다. 섬세한 사람들이 용기내어 벗은 마음으로도 우리를 불러낼 수 없다면, 우리의 뭉툭한 마음 속에 서툰 온기의 씨가 그들의 애환과 같은 것임을 문득 느끼지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서 마모된 생각들로 더듬더듬 만들고 어쩌라는 건가 싶은 글을 계속 쓰고 싶다. 그런 시도가 서로 뭉툭해진 손가락 같은 마음이 덮지 못해 시려서 마비된 마음을 덮어주면 큰 기쁨이고, 그러지 못해도 덮어주지 못해서 크게 나버린 구멍을 보여주면 헛된 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그 때 문득 느낀 한기와 거기서 비롯된 그리움이 신영복 선생님의 말씀으로 말하면 인간-서로와 서로의 관계가 우리의 전부임을 깨닫는 것이고 철학자 한병철이 말한 순식간에 우리를 어느 장소로 보내주는 향기의 단초라고 생각해서 이 찬 시절에 쓸데 없는 소리를 쓰고 쓰려고 한다.
2023-12-05 | hrights | 조회: 121 | 추천: 3
이원영 / 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기자에서 활동가로 진로를 바꾼 이유 가난한 삶을 꿈꿔왔다. 이타적인 삶을 결심했다. 불편한 삶을 살아왔다. 고등학교 때부터 정의로운 시민으로 살려고 구체적인 미래를 계획했는데 직업으로 언론 기자를 생각했었다. 그런데 대학신문 기자를 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기자는 모름지기 현장에서 누군가의 목소리를 대변해야 한다는 점을 배웠는데 막상 기사 마감 스트레스가 견디기 힘들었고 어떻게 쓸 것인가 보다 어떤 내용으로 채울 것인가를 더 고민하는 나를 발견했다. 그래서 진로를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이른바 활동하는 삶, 노동운동이나 시민운동을 하는 활동가의 삶이었다. 세상을 바꾸는 삶을 직업으로 선택하였다. 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그런데 언론 보도에 목마르더라, 사회적 울림 때문에 대학 졸업 후 25년 동안 교육운동 단체와 진보정당 국회의원 보좌관, 지역 풀뿌리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면서 글도 많이 쓰고 이런 저런 집회 등 행사와 기자회견을 자주 했다. 시민단체 활동, 진보정당 활동을 하면서 어떤 주장과 목소리를 내는 과정에 언론이 중요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얽히고설켜서 돌고 돈다더니 역시 세상은 그렇게 연결되어 굴러가고 있었다. 좋은 언론, 열혈 기자를 접할 때면 얼마나 고맙고 반가운지 모른다. 언론에 보도되어야 울림이 커지기 때문이다. 사회적 울림이 있어야 변화가 만들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분노에 머물지 않고 대안을 모색하는 지혜를 배워야! 시민단체 활동가와 진보정당 당원이라는 양 날개를 펼치고 불편하고 가난한 삶을 살면서 참 답답한 점을 많이 느꼈다. 왜 세상이 이렇게 더디게 바뀌는가? 왜 나쁜 놈들이 더 많은 권력을 가지고 있는가? 이후 선악의 개념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선악으로 바라보면 누군가, 어떤 집단을 적대시하면 싸우기 수월하고 감정적으로는 편할 수 있겠지만 사회가 그렇게 단순하게 굴러가지 않는다는 점을 느꼈다. 문제가 있다면 이유를 찾아야 하고 그 이유에 근거해 세상을 바꾸는 법을 찾는 길을 모색하는 게 훨씬 지혜롭다는 것을. 분노에서 시작해 대안을 설계하는 작업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을. 물론 생각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내 안의 부조리와 한계에 직면하면 아주 고통스럽기도 하다. 고통 속에 진주가 만들어지듯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가 활동을 잘하는 방법으로 터득한 게 있다. 바로 좋은 조건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더 나은 조직 구성과 운영, 필요한 재정 확보 등. 그 조건이 잘 만들어지면 어떤 목표에 더 빠르게 효율적으로 다다를 가능성이 커진다. 부자들이 지배하는 나라, 뉴스타파의 보도를 보고 시민단체 활동가는 억울한 상황에 관한 이야기를 밥 먹듯이 자주 접한다. 대부분 억울한 일은 가난한 이들에게 많이 발생한다. 가난한 이들에게는 힘이 없어서일까? 힘없는 이들에게는 권력이 없다. 무언가를 강제하는 힘, 권력이 없으면 억울한 일을 당하고 살게 된다. 출처: 뉴스타파 언론 기사를 검색하다가 뉴스타파의 기획 보도를 접했다. 부자가 지배하는 나라, 고위공직자 재산 30년 치 분석. 방대한 자료 분석 시도가 놀랍다. 이런 언론이 있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고마웠다. 고위공직자 재산 30년 치를 분석해보니 우리 사회는 부자들이 권력을 가지고 지배하는 나라였다는 결론이다. 매우 뻔하지만, 결코 뻔하지 않다. 왜냐하면, 구체적인 사실이 적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사의 작은 제목만 언급해보자. 국회의원 70.6%는 상위 10% 부자 / 국회의원 절반은 다주택자, 무주택은 11%에 불과 / ‘강남 3구 집주인’ 국회의원 연평균 78명 / 국회의원 1인당 토지 4724평 보유, 일반인 8배 그렇다면 왜 부자 국회의원이 많은 것일까? 주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선거비용의 부담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정치할 조건이 안된다는 것이다. 뉴스타파 기사를 그대로 인용해 보겠다. “2019년 전용주 동의대 교수가 20대 국회를 분석해 발표한 ‘후보의 선거 경쟁력 결정 요인에 관한 연구’를 보면, 개인 재산이 평균 득표율과 높은 상관관계가 있다. 연구진은 “한국의 선거에서 후보의 선거자금 대부분은 개인 재산에 의존하고 있다”라며 “실제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후보의 선거자금 중 약 60%를 개인 재산이 차지하고 있었다”라고 밝혔다.” 시민운동과 정치가 가난한 이들의 목소리가 되려면 개인적인 이야기에서 시작해 갑자기 부자가 지배하는 나라에 관한 이야기까지 주제를 확장해보니 더욱 답답한 마음이 내 머리를 짓누른다 시민운동을 하면 할수록 정치가 바뀌어야 세상이 바뀐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거꾸로 말하면 지금 상태의 정치 상황에서는 세상이 바뀌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적절하게 반영되는 정치구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부자들로 이뤄진 정치구조이다 보니 우리 사회를 이루는 다양한 구성원들의 목소리가 골고루 반영되기가 매우 어렵다. 물론 변화의 가능성을 만들고 조건을 형성해 나가는 것은 시민들의 몫이라고 생각하기에 오늘도 사회문제에 예민하게 대응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종종 세상을 바꾸는 일을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고 비유한다. 그만큼 어려워서다. 그런데 무수히 많은 계란이 깨지면서 세상은 바뀌어 왔다. 지금은 부자들이 지배하는 나라이지만 뉴스타파가 분석한 바에 의하면 조금씩 부자들 비율이 줄어들고 있단다. 결국에는 우리 사회의 다수인 가난한 이들이 정치 권력을 가진 나라가 되지 않을까? 매일 매일 정치개혁 이슈에 관심을 가지고 작은 몸부림을 치는 이유이다.
2023-11-28 | hrights | 조회: 426 | 추천: 8
윤요왕 / 전 춘천별빛 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이웃마을 원주에 마지막 남은 단관극장인 ‘아카데미 극장’이 논란과 갈등 끝에 철거가 되었다. 원주지역 시민단체들과 종교계는 물론 한국영화학회, 한국사회학회, 역사문제연구소 등 역사·기록·문화·예술·건축·사회 등 다양한 학제를 망라한 단체들까지 나서서 긴급 호소문을 발표하고 국회포럼을 여는 등 보존에 대한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원주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도 현장 농성장에 가서 찬반의 이야기를 들어봤지만 어쩔수 없는 ‘힘’ 앞에 무기력한 생각이 들면서 씁쓸함과 허탈감이 들었다. 시민들의 여론조사를 통해 보존-철거의 결정을 내리자는 시민사회의 마지막 요구도 무산되었다. <‘깊은 민주주의’의 또 다른 예> "선거로 선출되었다는 단 하나의 근거로 국민(혹은 주민)들의 의사는 묻지 않고 마치 제왕처럼 군림하는 정치지도자, 행정책임자들에게 너무나 길들여진 우리로서는 그저 부러워만 하고 있어야 할까?" <경향신문 2015년 / 고 김종철 | 녹색평론> 얼마 전 ‘깊은 민주주의’(Deep Democracy) 관한 포럼에 참가하면서 2015년 경향신문에 기고한 故 김종철 녹색평론 편집장님의 글을 읽게 되었는데 원주 아카데미 극장 철거현장이 오버랩되었다. 그동안 마을자치, 주민자치, 마을공동체 활동과 정책사업들을 통해 직접민주주의의 노력들이 다양한 곳에서 펼쳐지고 있지만 아직 멀었구나 생각되었다. 지방자치, 지방분권은 지방자치단체와 지방의회까지만 내려온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다.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 풀뿌리 직접민주주의(마을자치 등)를 통해 주민,시민,국민들의 권한과 자치를 위해 노력해 온 것이 아직 멀었구나 하는 자괴감까지 든다. 비단 지방작은 소도시만의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2024년은 알 수 없는 국가의 경제위기, 소득불균형으로 그 어느때보다 힘든 한해가 될 거란 예측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오고 있다. 국민의 세금으로 걷어진 예산이 정권이 바뀌었다는 이유하나로 하루아침에 없어진다는 통보를 받아야만 하는 오늘의 현실에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깊은 민주주의’(Deep Democracy) 관한 포럼에서 발제를 한 성공회대 김찬호 교수님의 한국 민주주의의 자화상에 대한 분석을 새겨 봐야 할 것이다. 첫째, 옅은 민주주의 측면에서는 선진국이다(선거,법의 지배 등) 둘째, 뿌리없는 정당의 포플리즘 공세로 편가르기 속의 혐오아 적대 감정의 격화로 과제해결 능력의 퇴화가 가져온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는 정치 셋째, 특정 소수의 단기적 이익 넷째, 불신과 냉소주의가 만연되어 돈과 권력과 사회적 위세를 향한 질주로 진단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치현실의 대안으로 ‘파커 파머’의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에서는 정치권력과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면서 ‘마음(heart)’을 화두로 던지고 있었다. 마음이 열린 사람들이 정치의 주축이 될 때, 보다 평등하고 정의롭고 자비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어찌보면 너무나 당연한 것 같은 얘기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는 민주주의를 얘기하면서 제도나 체계, 질서, 법 등을 강조하면서 역설적이게도 형식적 민주주의만을 구축한 건 아닌가 성찰해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 홋카이도의 작은 시골마을 ‘히가시카와’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8,000명의 주민들이 사는 작은 산골농촌마을이었다. 이 마을에서 어떻게 민주주의(자치)와 마음이 정책화되고 마을을 가꾸어 가면서 지역소멸의 위기를 극복하고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 있는지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내 호기심과 관심을 끈 것은 근사한 중장기 정책도 상큼한 아이디어도 아닌 주민들과 행정의 지역의 아이들에 대한 ‘마음’이었다. ‘너의 의자’ ‘배움의 의자’라고 불리우는 태어난 아이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는 작은의자였고 중학생들이 3년동안 공부하는데 앉는 의자였다. 지역의 마음의 선물로 시작한 의자가 산업화되고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키는 단초가 되었다. 여기서 하나 더 궁금한거는 행정과 어떻게 이게 논의가 되고 합의가 되었는지였다. 우리보다 훨씬 앞서서 또 깊어진 풀뿌리 지방자치(마을자치)가 민주주의의 방식으로 실현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음을 알게되었다. 히가시카와 행정공무원들이 일을 함에 있어서 지켜야 하는 원칙같은 것이 있는데 ‘3無’라고 한다. 이 3無는 공무원들이 ‘예산이 없어서 못한다, 다른지역 사례가 없어서 못한다, 우리지역에는 없다’라는 변명과 핑계가 없다는 뜻이다. 다양한 마을의 분과위원회가 있고 자생단체와 주민들의 의견이 제안되고 토론해서 협의하면 행정은 최대한 그것이 가능하도록 방안과 정책을 찾는다고 한다. 그러니 주민들의 효능감이 높아져 참여가 왕성하다는 설명이다. 결국 민주주의는 국민들 각자가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 민주주의가 ‘마음((heart)’을 기본으로 권한과 권력을 국민들에게 가능한한 이양해야 하는 단계로 발전되어야 하리라 생각한다. 선거라는 그 제도 하나로는 국민이 주인인 국가를 만드는 성숙한 사회로 나아갈 수 없음을 우리모두 깊이 깨달아야 한다. 권력을 권한을 가졌다고 모든 것이 통용되던 시대는 지나갔다. 시민들에게 묻고 확인하고 대화하는 최소한의 민주적인 절차를 거치는 정치인들을 보고 싶다. 또한, 시민들의 삶은 우리들의 마음과 행동에 달려있음을 다시한번 이야기하고 싶다.
2023-11-22 | hrights | 조회: 279 | 추천: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