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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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젊은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젊은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아현(인권연대 연구원),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사무국장), 서동기(대학생), 손상훈(교단자정센터 원장), 송채경화(한겨레21 기자), 이동화(아디 사무국장), 이상재(대전충남인권연대 사무국장), 이현정(꽃씨네농작물 농부), 이회림(○○경찰서), 허창영(광주교육청 조사구제팀장, 전임 간사)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홍성준/ 약탈경제반대행동 사무국장   이번에 쓰는 글은 전부터 쓰던 글과 주제나 내용이 많이 다르다. 요즘, 박근혜 정권이 저지른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화” 때문에 온 사회가 반대 여론으로 들끓고 있다. 이에 대한 나의 솔직한 생각을 정리해 봤다. 지난해 제법 큰 논란을 일으켰던 김상구 저 “김구 청문회”를 아는가. 이 책에서 김구(金九)는 누구나 인정하는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요, 조국 통일의 제단 위에 흉탄으로 쓰러져 간 애국자이다. 감히, 훼손할 수 없는 김구의 그 명성에 대해서, 그것은 김구 자신과 지지자들, 그리고 대표적인 “친일파” 이광수(李光洙)가 공모하여 저지른 ‘역사 왜곡’이며 ‘조작된 신화’에 불과하다고, 김상구라는 “재야 사학자”는 이 책을 통해 주장했다. 사실, 아주 오래 전 김구의 자서전 “백범일지”를 읽을 때부터 약간의 의혹이 있었다. 가령, 동학혁명군을 학살한 양반지주의 민병대(民保軍) 사령관 안태훈(安泰勳)-안중근(安重根) 집안이 동학군 출신이라는 김구를 거두어들이고 깊은 인연을 맺었다는 것도 수상하고, 일본군 정보장교를 치하포에서 때려 죽였다는데 김구는 비밀 임무를 수행 중인 자를 어떻게 알아보았는지 등등의 의문이 있었다. 1990년대 중반에 본 인상적인 얇은 책 한 권이 있다. 최갑룡이란 사람이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민족해방운동을 했던 주요 ‘아나키스트(anarchist)’들의 활동을 정리한 “황야의 검은 깃발”이란 책이다. 거기에 보면,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의거 후 일제의 탄압과 검거를 피해 임시정부는 피난길에 오르고, 거액의 현상수배범이 된 김구는 자싱(嘉興)으로 도피하여 숨어 지낼 때의 일을 몹시 흥미롭게 기술하고 있다. 최갑룡의 책에는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들이 자싱으로 찾아가 김구를 혹독하게 꾸짖는다. “엄청난 거사 후 정부의 수반(김구)이 숨어서 젊은 여인과 ‘윤락(淪落)’에 빠져 지내는 것은 무책임한 짓”이라는 것이다! 거기에, 김구의 비서 안공근(安恭根)이 공금까지 횡령했다고도 한다. 그 후, 김구는 정신을 차리고 임시정부를 수습했다는 것이다. 반면에, 백범일지에는 “먼 타국의 노(老)혁명가인 자신을 목숨을 걸고 불철주야 보살펴 준 중국 여인 주아이바오(朱愛寶)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헤어질 때 여비조차 변변하게 주지 못한 연민.. 그리고 평생 잊을 수 없는 고마움.. 분명히 ‘윤락’같은 육체적인 관계는 아니다. 또, 안공근도 공금 문제가 아니라 피난 중 안중근 의사의 가족 보호를 소홀하게 처리한 것으로 질책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아무튼, 같은 사건과 같은 인물에 대해 각자 다른 기억과 기록이 동시에 있다. 무엇이 진실일까. 솔직히 난 모르겠다. 2000년대 초반 나는 “공공근로”로 연명하고 있었다. 그때 일했던 곳이 “광복군동지회”라는 단체였다. 널리 알려진 대로, 여기서 광복군이란 임시정부의 군대이고, 회원들은 생존한 독립운동가들이다. 어느 날 회장님에게 조심스레 여쭈었다. 자싱의 피난처와 양쯔강(楊子江) 위의 배에서 김구와 그녀에 대해서 말이다. 그는 그랬다. “난 모르지.. 다만, 언제 죽을지 모르고 쫒기는 불안한 사내와 그를 돕는 젊은 여인이 좁은 배 안에서 종일 함께 있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 아닐까?” 광복군동지회의 주요한 행사는 제사다. 1월 15일 동작동 현충원에서 치르는 총사령관 지청천(池靑天) 장군에 대한 제사와, 수유리 이시영 선생 묘소 아래 무후선열(無後先烈) 비석 앞에서는 중국에서 항일작전 중 자손도 없이 죽은 젊은 옛 동지들에 대한 합동 제사가 5월에 있다. 처음 출근해서 한 일이 지청천 장군 제사의 보조였다. 함박눈이 쏟아지는 날, 제사를 마치고 언 몸으로 찬 건물에 모여 식사(飮福)을 하는데, 좀 이상했다. 추운데도 서로 멀리 떨어져 식사를 하고 있었다. 조심스레 어느 한 분에게 여쭈었다. “저쪽은 온풍기도 있고, 저분들과 함께 모여 드시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그러자, 그 분은 웃으며 “1지대는 ‘좌파’야!”라고 했다. 순간, 머리를 한 대 맞는 듯 현기증이 일었다. 70년이 지나서도 좌파라니! 광복군 1지대는 혁혁한 무장투쟁으로 유명한 조선혁명당 김원봉(金元鳳)의 조선의용대에서 출발했다. 조선의용대는 내부 사상투쟁을 겪고 둘로 나뉘어 상당수의 대원이 옌안(延安)의 중국공산당 해방구로 들어가 소위 “연안파” 공산주의자가 되고 나머지는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이 된 것이다. 반면, 2지대는 이범석(李範奭)으로 대표되는 강경한 우익 민족주의였다. 만주에서 김좌진(金佐鎭) 장군의 화요파 공산주의자에 의한 암살과 “자유시 참변”을 겪은 노병들에게는 특히 그랬을 것이다. 비교적 뒤에 성립하는 김학규(金學圭)의 3지대는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의 최대치나 장준하(張俊河) 선생처럼 일본군을 탈출한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성립이 되었다. 이범석은 해방 후 이승만 정권에서 국무총리가 되었지만, 김학규는 정치범으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수감 생활을 했다. 김원봉은 널리 알려진 대로, 해방 후 종로경찰서의 “친일 경찰” 노덕술(盧德述)에게 고문당하고 월북해서 고위직이 되었다가 끝내 정치적 “숙청”을 당했다. 아무튼, 생사를 함께 한 전우였어도, 정치적 입장이 다르면 영원히 다른 것이다. 후대에 아무리 통합해서 역사를 좋게 저술해도 마찬가지이다. “사랑은 비극이어라. 그대는 내가 아니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나의 이별은 잘 가라는 인사도 없이 치러진다.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나만 혼자 이렇게 달라져 있다.” 는 노래, “바람이 분다”를 들으면, 그런 것이 역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같은 사건과 같은 인물에 대해 각자 다른 기억과 기록이 동시에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각자의 정치적, 사상적, 실천적 입장에 의해 전혀 다른 기억과 기록으로 계승될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김구는 김원봉이 아니고, 같은 김구를 읽어도 나는 다른 김구를 생각한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화”를 생각해 보자. 모두들 문제는 크게 두 가지라고 한다. 하나는 “국가가 단일한 역사(國史)를 정리하는 것”이 부당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현 정권의 입장이 반영되어 ‘친일’과 ‘독재’가 정당화”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의 기저에는 국가가 ‘위험한 국사’로 자라나는 새로운 세대를 “세뇌(洗腦) 교육”을 시킬 것이라는 공포심이 있다. 하지만, 학교 교육을 통해 사람들이 세뇌가 될 것이라는 것은, 조금만 역사를 이해하거나, 우리 세대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기우(杞憂)’에 불과하다. 사람들이 진정으로 역사에 관심을 가지는 시작은 대개 부당한 현실을 마주할 때 일 것이다. 국가의 공식적인 설명이나 사회의 통념에 부합하지 않는 현실에 괴로운 사람은 반드시 그것 밖에서 답을 찾을 것이다. 그것이 역사라고 생각한다. 내 기억에 1980년대 베스트셀러가 “해방전후사 인식”이었다. 거기에는 그때까지 배운 국사책에는 없는 내용이 많았다. 또, 지금도 학교에서 노동의 권리를 가르쳐 주지 않지만, 졸업생 대부분은 노동자가 되어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싸우면서 “노동해방의 역사”를 배울 수밖에 없다. 왜곡된 역사교육으로 악명이 높은 일본의 아베 정권하 젊은 세대가 최근 “아베를 용서하지 않겠다!”며 거리로 나와 투쟁하는 것도 언론을 통해 알고 있다. 오히려 너무 학교 교육에 많은 가치를 두는 이 사회 통념이 세뇌교육에 대한 과도한 공포심을 조장한 것이 아닐까, 의심해 본다.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현행의 “국가 검인정 하의 한국사 교과서”라고 생각한다. 그것 또한 국정교과서 같이 국가가 인정하고 허락한 내용만 담도록 강제하고 있다. 결국은 같은 것이다. 일본도 국정교과서를 만들지 않지만, 검인정 제도를 이용해서 국가 권력의 요구대로 교과서를 만들고 있다. 그런데, 국정 교과서 반대론자들은 검인정 교과서는 다른 것처럼 대중을 호도하고 있다. 그래서 교학사의 한국사 교과서만 나쁘고, 다른 출판사 교과서는 좋은 것이라고. 나는 현재의 검인정 제도로 만들고 있는 한국사 포함, 일체의 교과서에 반대한다. 국가 권력이 교과서를 만들어 “국민 교육”을 하는 것, 그 자체가 부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지배자들에게 예의바른, 충성하는 군인과 그들을 위해 생산하는 “근로자”를 만드는 것이 원래 의도였으니까. 그 방식이 soft하던, hard하던 간에. 사진 출처 - 허핑턴포스트 나는 이참에 “교과서 자유발행제”가 우리시민 사회의 ‘공론’이 되길 희망한다. 앞서 말했듯이 역사는 서로 다른 입장으로 서술이 가능하다. 나도 현재의 주류 역사에 많은 이견이 있고, 내가 한국사를 쓴다면 분명히 현재의 교과서들과는 많이 다를 것이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다. 교과서의 자유발행이 가능하다면, 다양한 우리사회를 반영해서 수백 수천 종의 교과서가 출현할 것이다. 그냥 대형서점 가판대를 상상하면 될 것이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며, 그 자체로 우리사회가 건강하다는 증거일 것이다. 물론, 누군가(아마도 보수 우파)는 그것이 ‘혼란’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결국에는 주요한 몇 가지 교과서가 가장 많이 읽힐 것이다. 그것이 사상의 자유시장(marketplace of ideas) 원리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소수자에게도 자유롭게 사상을 경쟁할 권리를 인정하는 것과 사상에 대한 판단을 국가 권력이 아닌 시민들 각 개인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나는 늘 시장을, 시장의 지배자 자본을 국가가 철저하게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그래야 시장의 다수 약자가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민주주의’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편으로는 그런 이유에서 “자유주의”를 반대하고 자유주의자들을 혐오해왔다. 하지만, 국가가 모든 것을 통제하는 것이 좋을까? 결코 아닌 것도 있다. “사상의 자유”와 “자유 시장”은 분명히 다른 범주의 문제이다. 그래서 교과서의 자유발행제를 주장하는 것이다. 끝으로, 한 가지 첨언을 한다. 새정치민주연합과 문재인 의원에게 이 문제를 ‘의탁’하거나 ‘연대’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최근, 그들은 역사교과서 국정화 예산 등, 이른바 “박근혜 표 예산”이 포함된 2016년도 예산안을 여당과 합의하여 ‘무수정 통과’시켰다. 지금도 겉으로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 반대”의 소리를 높이고, TV를 통해서는 그런 내용을 담은 플래카드 아래에서 당의 회의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정치집단인 것이다. 생각해 보면, 그들은 늘 그랬다. 늘 자유주의적 개혁을 말하며 “수구 꼴통” 정치세력과 대립각을 세우지만, 언제나 부패했고 배신을 해왔다. 국회의 과반 의석과 대통령을 가졌을 때도 그랬다. 따라서 그들의 “자유주의”는 믿을 수 없으며, 반드시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사라져야 할 것들이라고 본다. 올바른 시민운동이라면, 스스로 박근혜 정권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맞서 싸워 교과서 자유발행제를 쟁취해야 한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59 | 추천: 0
이동화/ 민변 국제연대위 간사   2015년 11월 13일 프랑스 파리에서는 동시다발적인 테러로 132명이 사망하고 350여명 이상의 시민이 부상당한 안타까운 사건이 발생했다. 이 테러에 대해 IS는 본인들의 소행임을 밝히며, 다시 한 번 전 세계인을 충격과 공포에 빠지게 하였다. 이후 프랑스와 미국을 중심으로 서방국가들은 IS 점령지에 대한 직접 폭격을 진행하고 있고, 유엔차원에서는 모든 수단(군사적 방안포함)을 동원하여 IS를 몰아내기 위한 결의안이 채택되는 단계로 진화하고 있다. 2001년 911 테러이후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침공 모습이 다시 재현 되고 있다. IS와 한국은 이미 한차례 악연이 있다. 2004년 이라크에서 발생한 김선일 씨 납치와 살해 사건이 바로 IS의 전신인 ‘유일신과 성전’이라는 단체가 자행한 것이다. 이라크 전쟁이후 미국에 의한 점령시기부터 IS의 전신인 ‘유일신과 성전’이라는 단체는 이라크 바그다드 인근 도시인 팔루자, 티크리트, 라마디, 소위 수니 삼각지대에서 반미와 반제국주의에 기대어 세를 확장시켰고, 이라크의 혼돈과 시리아의 내전으로 인해 결정적인 세력 확장을 이뤄낸 무장 세력이다. 알고 보면 지금의 IS를 탄생시킨 배경에는 미국에 의한 이라크 전쟁과 점령이 있는 셈이다. 이라크 내 수많은 무장 세력과 종교 세력도 IS의 잔혹함과 극단적 방식에 대해서 치를 떨고 있고, 알 카에다 조직도 공식적으로 IS와의 단교를 선언하고 최근 선전포고도 한 상태로 알려졌다. IS가 잔혹한 테러를 계속하면서 전 세계적인 이슬람포비아와 적개심이 높아가고 있다. 그리고 무장 세력에 대한 군사적 공격 또한 별다른 저항 없이 용납되고 있다. 지난 9월, 세 살배기 시리아 난민 아기 쿠르디의 사진으로 인한 시리아 난민에 대한 우호적 분위기와 시리아 내전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은 IS의 파리 테러로 그 갈 길을 못 찾고 헤매고 있다. 그 와중에 이스라엘에서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무차별적 군사공격으로 십 수 명의 이스라엘인들과 90명 이상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사망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하고 있다. 여전히 팔레스타인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과 살상은 계속되고 있고 이에 대한 팔레스타인의 저항도 계속되고 있다. 파리 테러가 발생한 바타클랑 주변에 꽃다발을 갖다 놓는 시민 사진 출처 - EPA=연합뉴스 페이스북을 중심으로 파리 테러이후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 국기를 페이스북 프로필 사진(플픽)으로 올리며 파리 테러에 의해 희생된 이들을 애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IS가 자행한 다른 테러(이라크와 시리아, 레바논에서의 테러와 암살)와 파리 테러의 희생자들을 비교하며 프랑스 국기 플픽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도 존재한다. 개인적으로 본인의 페이스북 플픽에 프랑스기를 올린 것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더욱이 그들이 다른 테러에 눈감고 파리 테러에만 반응한다고 생각지도 않는다. 하지만 파리 테러를 비롯한 IS의 만행이 지속되는 이 순간에도 서방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공중폭격과 군사적 행동은 그 지역의 무고한 사람들의 희생을 야기하고 있다. 언론에서 이에 대한 뉴스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IS의 공포가 전 세계를 뒤덮은 현재, 테러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고 올바른 대응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힘을 잃고 있다. 현재 한국에서는 ‘테러방지법’을 제정하여 테러를 방지하자는 입법 활동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 이미 911 테러 이후 미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가 테러방지법을 제정하였지만, 테러가 줄어들기는커녕 현재의 모습처럼 더 만연되고 있다. 국회에서 제정하려는 테러방지법은 테러행위와 테러위험인물, 외국인테러전투원 등에 대한 정의가 모호하고 자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많고, 이미 현행 국내법으로 항공기납치, 폭탄테러, 인질, 국제범죄조직 등을 처벌할 수 있음에도 국가정보원에 테러관련 예방과 대응에 대한 권한을 위임하여, 그렇지 않아도 문제가 가득한 국가정보원에 무소불위의 날개를 달아주려 한다. 만약 테러방지법이 제정되면 국정원은 ‘테러’라는 명분으로 민간단체를 테러단체로 규정하고, 휴대폰을 도감청하며, 금융정보를 마음대로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이미 대선에 개입하고 서울시 공무원을 간첩으로 조작한 국정원에게 그러한 권한을 넘겨주는 것은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한 것임이 명백하다. 이제 한국의 많은 사람들도 테러로부터 자유롭지 않다고 느끼고 있다. 불안과 공포가 가득하다. 언론은 균형을 잃은 지 오래고, 국회는 국민의 불안과 공포를 활용해 국정원에 통제할 수 없는 권한을 몰아주려 하고 있다. 우리가 지금 지켜봐야 할 대상이 IS만은 아닐 것이다. IS를 만들어 냈던 전쟁과 점령, 그 이전부터 지속되고 있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과 탄압, 그리고 테러방지법까지, 하나하나 실에 꿰어진 구슬처럼 하나의 관계로 인식해야 한다. 그래야 부분이 아닌 전체가 보이고, 문제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쿠르디를 잃었던 슬픔 마음을, 파리 테러에서 희생된 이들을 추모하는 마음을 하나하나 엮어야 이 비극적인 상황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이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54 | 추천: 0
이상재/ 대전충남인권연대 사무국장   나만 그런 것인지 모르지만, 가끔 지난 일이 갑자기 떠오를 때가 있다. 창피한 기억이면 나도 모르게 맘이 오그라들고 슬픈 장면이 떠오르면 주책없이 눈시울까지 붉어지기도 한다. 지난 기억이 생각날 때의 공통점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과의 연관성일 것이다. 11월 14일 광화문 집회 소식을 SNS를 통해 실시간으로 접했을 때도 그랬다.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이 불현듯 생각났다. 중학교 때였다. 9시 뉴스는 거의 매일 대학생들의 집회, 시위장면을 보여주며 당장 나라가 망할 것 같은 어조로 비판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까지 집회, 시위는 물론이고 대도시에서 학교를 다녔던 내 나이 또래가 대부분 맡아봤던 최루탄 냄새 역시 한 번도 접하지 못했다. 그러니 그 당시 대학생들의 데모질에 대한 내 의식 수준은 뉴스 진행자가 전하는 논조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식당을 했던 어머니가 뉴스에 나오는 시위장면을 제대로 봤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와 늦은 저녁을 먹으며 TV에 나오는 시위장면을 보다가 나는 어김없이 쌍시옷으로 시작되는 남쪽 해안가 특유의 욕을 시위대에게 내뱉었다. 그때 물끄러미 TV를 보고 계시던 어머니께서 내가 아직도 기억하는 바로 그 말씀을 하셨다. “힘들게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간 학생들이 저리 마이(많이) 길바닥에 나와서 데모를 하는 거는 아마도 무슨 이유가 안 있겄나?” 솔직히 그 당시 대학생들이 외쳤던 ‘호헌철폐’ ‘독재타도’라는 구호가 이후에도 내 머리에 제대로 이해되어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 어머니의 말씀 이후 가끔 궁금하기는 했다. ‘왜’ 저 많은 형님들과 누나들은 경찰에게 잡히면 신세 망칠 게 뻔 한 데모질을 저렇게 허구한 날 하는 것일까? 1987년6월10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주최의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경찰의 원천봉쇄에도 불구하고, 전국 18개 도시에서 가두시위 형태로 전개됐다. 서울 명동입구 도로 앞에서 시위를 저지하기 위해 경비중인 경찰병력이 도로를 완전 봉쇄하고 경비를 서고 있는 모습.(보도사진집 "그날 그거리") 사진 출처 - 뉴시스 민주노총과 전농을 비롯한 많은 시민 사회단체들이 12월 5일 2차 민중 총궐기 집회를 연다고 한다. 하지만 전농이 낸 집회신고에 대해서 경찰은 불법폭력 시위가 예상된다면서 집회금지통고서를 전달했다. 신고제인 집회에 경찰은 관심법이라도 있는 것인지 ‘예상’에 근거해 집회 금지를 통고한 것이다. 12월 5일 집회의 명칭은 <백남기 농민 쾌유기원·살인진압 규탄·공안탄압 중단·노동 개악 중단 민중 총궐기>라고 한다.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생명이 위태로운 한 농민의 쾌유를 빌고, 정권의 공안탄압과 노동 개악을 중단하라는 집회의 요구 내용은 사라지고 헌법이 보장한 ‘집회’ 그 자체의 불법성 여부만을 종편을 비롯한 보수 언론에서 단물이 빠질 때까지 씹어대고 있다. 그래서 매일 아침 배달된 신문을 집어 든 사람들, 혹은 식당에서, 사우나에서 종편 뉴스를 보며 혀를 차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30년 전의 우리 어머니가 내게 했던 말씀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이 추운 겨울날 저렇게 많은 사람이 한곳에 모여 정부를 향해 외치는 분노의 내용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농민과 노동자와 청년들의 분노와 한숨의 장이 된 저 집회는 나와는 정말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일까?” 두 번째 기억은 비교적 최근이었다.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경선이 한창인 2007년, 고향에서 누나를 만났을 때였다. 그때 누나는 내게 박근혜 씨가 대통령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했다. 고향의 정치적인 분위기를 생각할 때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이명박 후보도 인기가 많았기 때문에 굳이 박근혜 씨를 지지하는 이유를 누나에게 물었다. “저거 아부지가 대통령할 때 잘잘못을 옆에서 누구보다 자세히 봤고, 아부지가 그리 험하게 죽은 거를 겪었으니 자기가 대통령이 되면 정치를 제대로 안 하겄나 말이다.” 그때 나는 내 나름의 논리로 박근혜 씨가 후보가 되면 안 되는 이유를 누나에게 설명했다. 하지만 그 대안으로 이명박 씨를 지지하라고 할 수도 없고 지리멸렬했던 당시 여권 후보는 씨도 먹히지 않을 분위기라서 내 말은 그다지 힘이 없었던 것 같다. 누나가 나름의 근거를 대며 지지했던 대통령 후보는 그로부터 5년 후에 그렇게 바라던 대통령이 되어서 오늘에 이르렀다. 하지만 누나의 그때 당시 지지 근거는 현재까지 상황을 볼 때 상당히 엇나가거나 틀린 바람이 되어 버린 것 같다. 오랜 세월 우리 사회가 어렵게 쌓아왔던 민주주의의 퇴적층은 국정화 교과서 추진과 같은 권위주의 통치방식으로 인해 급격하게 허물어지고 있다. 여러 가지 경제지표는 위험신호를 보내고 있는데 그에 대한 정부 차원의 실질적인 대응은 찾아보기 쉽지 않다. 그로 인해 불안해하고 고통 받는 시민들은 오히려 공약으로 내밀었던 각종 복지정책 대부분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심지어 시위 군중을 테러집단에 비유하는 대통령의 언사는 자기 아버지의 집권 말기 상황을 떠오르게까지 한다. 어머니에 관한 흐뭇하고 즐거운 기억은 너무나 많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분위기를 볼 때 30여 년 전 어느 늦은 저녁 밥상에서 TV 뉴스 속 데모 학생을 보고 하신 서늘한 말씀은 계속 생각날 것 같다. 정말 바라지 않았던 대통령이었음에도 현실화된 이상 누나가 2007년에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했던 이유가 현실화되기를 바랐다. 하지만 집권 3년을 다 채워 가는 현재 나의 바람은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어 보인다. 어머니는 맞고 누나는 틀렸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51 | 추천: 0
강국진/ 서울신문 기자   셰리프라는 미국 사회심리학자가 꽤 흥미로운 실험을 1930년대에 한 적이 있다. 실험 참가자들을 몇 개 집단으로 나누어 벽 중앙에서 불빛 한 점을 볼 수 있는 어두운 방에 들어가게 했다. 이들은 불빛이 얼마나 멀리 움직이는지 보고해야 했다. 방 안이 너무 어두웠기 때문에 달리 거리를 측정할 방법은 없었다. 실험 대상자들은 불빛이 '객관적으로' 얼마나 움직였는지 의견일치를 봤다. 하지만 집단마다 결론이 다 달랐다. 사실 그 불빛은 실험 내내 제자리에 있었다(Babbie, 2007: 61). 근대 사회과학을 지배한 것은 개인의 인지적 사고에서 독립된 객관적 실체에 대한 믿음이었다. 셰리프의 실험에 참여한 각 집단은 특정한 망상에 합의했다. 그렇다고 실험 대상자들이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다. 다만 그것은 ‘창조된 실체’, 즉 사회적으로 구성된 실체였을 뿐이다. 우리는 이쯤에서 이런 질문을 던져야 한다. ‘객관성’이란 관념은 과연 얼마나 객관적인가? 여전히 많은 이들이 ‘과학은 객관적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객관적’인 것이 올바르다고 간주한다. 주관적인 역사는 있는 사실을 무시하는, 역사가 아닌 ‘소설’ 혹은 역사왜곡일 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저마다 생각하는 ‘올바른’ 역사는 다를지 모르지만 어쨌든 ‘올바른’ 역사는 있다는 게 ‘상식’이다. 중요한 건 5·16을 쿠데타로 보는게 올바른 역사인가, 아니면 불가피한 결단으로 보는게 올바른 역사인가 하는 차이 뿐이다. 하지만 과연 그러할까. 박근혜를 비롯한 새누리당 정권이 국정 교과서를 “올바른” 역사교과서라고 명명하는 밑바닥에는 자신들이 객관적인 역사관을 갖고 있으며, 절대다수 국민들은 틀린 역사를 배우고 있다는 믿음이 자리 잡고 있다(이명박근혜 정권 교육부장관들이 우리 아이들에게 주체사상을 가르치게 했다.). 이들은 끊임없이 '편향된 역사교과서'를 문제삼는다. 물론 그 편향이란 대부분 해석을 둘러싼 것이다. 사진 출처 - 서울신문 박근혜가 말하는 객관성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객관성이 외치는 ‘누가 보아도 명백하다’는 얼피 견고해 보이는 차벽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단 한 사람 앞에서 무너진다. 결국 객관성이 객관적이려면 ‘사람의 눈’이 아닌 ‘사물의 눈’을 빌어야 한다(조용환, 1999: 26). 박근혜로서는 자기 관점이 객관적이란 걸 입증해 (온 우주가 나서서 국정교과서를 도와주게 만들기 위해서는) '그런 기운이 느껴진다'고 말하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없다. 거기서부터 유체이탈은 시작된다. 바비(2007: 62)라는 학자는 이렇게 지적한다. “과학이 객관적 세계를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실증주의자들의 믿음은 궁극적으로는 신앙적 신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심지어 객관적인 실체처럼 보이는 계급조차도 반드시 객관적이진 않다. 아벨만이란 학자가 한국 여성의 계급의식을 다룬 연구를 보면 이들은 자신이 현재 속한 객관적인 계급지위보다는 과거 자신이 속했던 친정의 계급 기반과 미래에 자기 자녀들이 갖기를 바라는 계급 지위에 더 영향을 받는다. 서울 빈민지역에서 전세로 얻은 세탁소를 운영하는 50대 후반 강 씨 부인은 객관적으로는 하류층일지 모르지만 본인은 자신을 중산층으로 인식한다. 자신이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고 친정 형제들이 중산층인데다 자녀들도 웬만큼 살기 때문이다. 비록 자신이 “때를 잘못 만났고” “남편을 잘못 만나서 평생 고생”을 하지만 강 씨 부인에게 중요한 건 객관적인 계급지위가 아니라 친정의 계급기반, 그리고 자녀들이 ‘객관적인’ 중산층이 됐다는 주관적인 계급의식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올바르다는 것은 과연 누구에게 올바른 것인가? 비록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침몰하는 것 같은 암담함을 느낀다 하더라도 저들의 “올바른” 역사에 대항하기 위해 우리가 또 다른 “올바른” 역사를 찾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더 나아가 “올바른” 역사라는게 과연 있기는 한걸까? 차라리 올바르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구성된, 헤게모니를 놓고 투쟁하는 담론이라고 생각해보면 어떨까. 객관성을 중시하는, 그러므로 올바른 역사를 지향하는 전통적인 역사서술은 보통 극좌에서 극우까지 1에서 10까지 단선으로 가정한 뒤 5에 위치한, 이른바 중립적인 균형점을 유지해야 한다는 관념에 입각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건 애초에 불가능한 목표다. 올바르게 쓴 역사책이 아니라 공정한 역사책이 이 세상을 좀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지 않을까? 이런 기준으로 본다면 역사에서 해석을 독점하는 단 한 권만 존재해야 할 이유 자체가 사라진다. 영국 역사학자 젠킨스(1999)가 강조하는 공정한 역사는 이런 식이다. 각자 입장 위에 1에서 10에 이르는 추를 맞춘다. 각자 정치적 성향이나 세계관에 따라 1에 위치할 수도 있고 10에 위치할 수도 있다. 중요한 건 각자 입장 위에서 1에서 10을 ‘공정’하게 다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가 ‘무엇이 역사인가’ 혹은 ‘어떤 역사적 사실이 있었는가’라고 묻지 않고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라고 묻는 이 이다. 객관적 실체 자체를 회의하는 관점은 허무주의에 빠지거나 ‘너도 옳고 나도 옳은’ 양비양시론에 빠진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 개인 경험에 비춰본다면 ‘객관적인 역사’에서 ‘공정한 역사’로 세계관을 바꿨을 때 조금은 더 세계가 명쾌하게 보였다. 나와 다른 해석을 인정하고, 헤게모니를 가진 역사담론을 비판적으로 접근하는 인식론을 통해 세계를 바꿔 나갈 수 있는 희망의 근거를 발견했다. “지식이란 항상 권력과 연관되기 때문에 사회구성 안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쥔 사람들은 자기 이해에 부합되는 ‘지식’을 최대한 퍼뜨리고 정당화시키려 한다. 이 점을 이해할 수 있어야 권력을 분석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이론적 상대주의에서 빠져 나올 수가 있다. 여러분은 상대주의적 관점을 통해 절망에 빠지기보다는, 사태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재평가를 새롭게 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곧 해방의 의미다. 반성을 통해서 여러분 또한 역사를 만들 수 있다(젠킨스, 1999: 87).” <참고문헌> 조용환(1999). 『질적 연구: 방법과 사례』. 교육과학사. 케이스 젠킨스.(1999).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 최용찬 옮김. 혜안. 얼 바비(2007). 『사회조사방법론(제11판)』. 고성호 외 옮김, 센게이지러닝코리아.
2017-07-12 | hrights | 조회: 71 | 추천: 0
홍성준/ 약탈경제반대행동 사무국장   정부가 최고의 투기자본 오래 전, 지하철 9호선의 “혈세 낭비”문제로 투자은행 맥쿼리와 한창 싸울 때 일이다. 맥쿼리에서 사무실로 내방을 하겠다며 면담 요청이 들어왔다. 맥쿼리의 상무가 직접 자신들을 반대하는 시민단체와 정치인을 상대로 해명을 한다고 했다. 결과는 충분히 예상이 되지만, 굳이 만남을 거절할 이유가 없어서 만났다. 그는 30년 간 장기간 투자를 하는 것 등의 이유를 들어서 자신들이 “투기자본”이 아니라고 했다. 즉, 자신들은 ‘단기간에 먹튀’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인데, 별로 설득력은 없었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 항변에 대해서는 반박하기 어려웠다. 그는 “우리 맥쿼리의 (고)수익 모델을 두고 투기자본이라 한다면, 한국정부가 가장 큰 투기자본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 말은 맞다. 맥쿼리를 포함해서, 한국에서 이름을 날린 사모펀드 등 투기자본들의 금융사에 최대의 투자자는 정부이다. 정부가 혈세를 투입하고 직접 운영을 하는 국민연금과 모든 공적 연기금, 정부가 관리감독을 하는 시중 은행과 모든 금융기관은 경쟁적으로 사모펀드 등에 투자를 하고 있다. 그 결과, 다른 투기자본들과 고수익을 함께 나누며 성장하는 자본(?)이 바로 대한민국의 정부이다. 최근, 국내 유수의 유통업체인 홈플러스를 7조 원에 인수한 사모펀드 MBK파트너스의 주요 투자자도 국민연금이다. 케이블 방송 C&M 사태에서 드러난 MBK파트너스 행태는 시민사회에서도 이미 널리 알려진 일이다. 인수가 2조 2천억 원 중 70%, 1조 5천억 원 이상을 C&M의 자산을 담보로 국민연금과 금융기관의 자금을 차입해서 C&M을 인수(이른바, 차입매수-LBO)했다. 그 결과, 천문학적인 이자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고배당 등으로 C&M의 자산을 끊임없이 ‘약탈’했다. 더하여, 동종 업계 최저임금 강요와 열악한 근무환경 제공, 끊임없는 해고와 구조조정으로 노동자들을 공격했다. 또, 방송가입자에게는 자신들의 과도한 수익을 위해 수탈적이고 불법적인 영업을 하였다. 위탁계약을 맺은 협력업체들에게 수수료 단가를 일방적으로 조정하거나, 협력업체에게 고객 요금의 대납을 요구하는 등으로 불이익을 주는 이른바, “슈퍼 갑질”,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수시로 저질렀던 것이다. 그에 따라, 매번 국회 국정감사에서 지적을 받았으며, 공정거래위원회에서도 조사와 시정조치를 한 바 있다. 즉, MBK파트너스가 C&M를 장악한 후, C&M의 모든 이해관계자는 그들에게 가공할 약탈을 당한 것이다. MBK파트너스는 C&M 뿐 아니라 한미캐피탈, HK저축은행 등 국내 금융기관들과 중국, 일본, 대만의 기업들도 공격적으로 인수를 하였는데, 국민연금과 금융기관의 적극적인 투자로 가능한 일이었다. 지금도 MBK파트너스는 여전히 승승장구 하고 있다. MBK파트너스뿐일까? 아니다. 이랜드, 한진중공업, 쌍용자동차... 국민연금이 투자한 기업에서 일어난 해고와 노동권 약화, 그리고 광범위한 ‘약탈’이 일어나는 것은 이미 익숙한 일이 되었다. 국민연금만이 아니다. 퇴역군인들의 노후를 위한 군인공제회는 앞서 거론한 맥쿼리와 투자약정을 맺고 주요 국가기간 시설에서 세금을 ‘약탈’해서 성장해왔다. 국민연금과 연기금들은 국민들의 노후를 위해서 무자비한 수익창출은 불가피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오히려, 소득저하와 인구감소로 납부액이 줄어들자 국민연금과 공적 연기금의 지급률을 무조건 낮추고 있다. 이를 두고 모두들 “연금개혁”이라고 말한다. 실상은 말이 좋아 개혁이지, 복지란 미명으로 자행되는 ‘사기’일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유니슨캐피탈, 보고인베스트먼트, MBK파트너스 등 사모펀드들로 구성된 국민연금의 위탁운용사들이다. 이들이 국민연금의 실제 주인이다. 매년 수 조원의 운용보수를 챙기고 있다. 이들은 자신과 자신들과 같은 사모펀드 등에 지금과 같은 거액의 투자를 계속하고 있고, 그들(국민연금)이 투자한 기업에서는 지금과 같은 약탈이 멈추지 않는다. 요즘 논쟁이 되고 있는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공사화”도 정부는 국민연금을 걷는 일만 맡고, 그 운용은 (사모펀드들이) ‘독립적’으로 하겠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옳다. 이런 현상은 한국에서만 일어나는 것일까? 아니다. 세계의 주요 국가는 천문학적인 공적 연기금(한국의 경우 국민연금은 500조 원으로 세계 3위)을 쌓아 놓고, 고수익을 위해 투기자본으로써 시장에서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다. 따라서 세상의 모든 국민연금과 공적 연기금을 ‘폐지’하고, 본래의 “부과식 연금”으로 되돌아가거나, 전적으로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적 부조에 기반을 한 복지체계를 만들지 않는다면, 전지구적 ‘약탈’은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또한, 불안한 노후를 걱정하는 납부자를 상대로 “연금개혁”이란 사기극도 계속될 것이다. 홈플러스 노동조합이 지난 22일 오후 서울 종로구 MBK파트너스 사무실 앞에서 연 확대간부 결의대회에서 참가자들이 MBK에 노조와의 대화와 고용보장을 요구하고 있다. 사진 출처 - 민중의소리 흡혈자본은 세계경제의 동력 지난 2월, 내가 속했던 단체는 공동대표의 부적절한 금품수수 사건으로 회복 불가능한 치명상을 당했다. 그날 이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무엇을 말하거나 행동해도 언론은 외면했고, 공개 토론장에서는 적들에게 모욕도 당하고, 어떤 연대단체에게는 조롱도 당했다. 결국, 조직을 해체하고 새롭게 재구성해야 했다. 회원들과 연대단체 동지들과의 오랜 숙의 속에서 찾아낸 것은 단순히 2월에 일어난 사건의 문제가 아니라, 조직과 이념을 전면 혁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과거 단기간에 고수익을 내고 먹튀를 하는 자본의 행태보다는, 보다 장기적인 약탈 행위에 대한 대응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경제, 나아가 세계 경제의 주요한 동력은 무엇인가? 시장에서의 약자에 대한 ‘상위 포식자의 무자비한 약탈’이라고 본다. 때로 이것을 성장이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그 상위 포식자란 누구인가? 미국의 월스트리트를 중심으로, 글로벌 금융거래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있는 ‘각국의 금융회사들’과, 거기에 투자하는 각국의 부유한 크고 작은 ‘자산가 계급(property classes)’인 것이다. 이들이 주도하는 오늘날의 자본주의를 “약탈적 자본주의(predatory capitalism)”라고 정의하였다. 이것을 바로 세계경제의 동력으로 지목하고, 이것을 동시에 “약탈경제”로 명명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전혀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새로운 유형의 ‘생산적 경제’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던, 베블렌, 케인스, 마르크스, 갈브레이스 같은 위대한 경제학자들이 “아무런 생산적 기여를 하지 않으면서 약탈에 의존하는 자산가 계급, 유한계급이 자본주의의 무덤을 스스로 파고 있다”고 한 그들의 비판에서도 이것의 정체를 찾을 수 있다. 앞에서 국민연금과 사모펀드의 약탈 문제를 단순히 어떤 사건과 특정 행위가 아닌 구조적인 경제 문제로 거론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단지 특정 기업과 노동자를 공격했던 어떤 사건의 문제가 아닌, 약탈의 빨대를 꽂아 두고 계속해서 성장하는 자본을 “국민경제” 속에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그 예시를 든 것이다. 우리단체 이름을 정할 때 일이다. 출범 준비회의에 참석했던 연대단체 젊은 여성 동지는 “약탈이란 말이 너무 ‘Old’합니다. ‘흡혈귀’, ‘흡혈자본’란 말이 이것들의 실체에 더 정확한 표현이고, 감성적으로도 젊은 사람들에게 맞을 것입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런 갑론을박(甲論乙駁) 속에서 단체의 영문 이름은 Vampire Capital Hunter가 출현한 것이다. 사실, 나는 준비회의 상에서 “약탈경제”란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조금 당황했다. 그것은 고구려(高句麗)나 유목국가의 경제를 지칭하는 “역사 용어”였기 때문이다. 차차 생각해보니, 그 둘의 범주는 다르지만, 유사한 개념의 말이라는 것에 결국 동의하게 되었다. 예속된 하호(下戶)들이 멀리서 쌀과 식량, 생선과 소금 등 져다가 바친 것을, 아무런 생산 활동을 하지 않고 앉아서 받아먹은 고구려 1만여 명의 “좌식자(坐食者)”나 오늘날의 자산계급이나 결국은 같다. 그리고 시민운동이란 ‘전문가와 엘리트를 통한 대의’가 아닌 궁극적으로 시민들의 “직접 행동”이어야 하니, 약탈경제에 반대하는 시민들의 행동을 강조해 단체 이름에 “행동”이 들어갔다. 좋은 이름이라 자평한다. 그렇게 지난 8월 31일 우리단체는 출범했다. 하지만 고민이다. 여전히 개별 피해자들과 함께, 특정 (약탈)자본의 범죄행위를 찾아 고발하고, 응징하는 것이 나의 주요 임무이다. 가야할 방향은 명확히 찾았지만, 가야할 길이 너무 먼 것이다. 그렇다고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옛 성인도 “성자천지도(誠者天之道)이고, 성지자인지도(誠之者人之道)라” 했지 않았는가! 우리가 가는 이 길이 진실로 옳다면, 우리는 이 길을 걸어가면 되니까!
2017-07-12 | hrights | 조회: 158 | 추천: 0
임아연/ 당진시대 취재팀장   한 사람을 만났다. 25살 여성인 A는 얼마 전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했고, 졸업식에서 학생대표로 졸업연설을 맡았다. 그는 중학교 2학년 때 친구와 단둘이 미국여행을 했을 정도로 당찬 사람이다. 교육 여건이 그리 좋지 않은 당진이라는 소도시에서 살면서 서울대까지 갔으니 중고등학생 때 꽤 공부도 잘하고 똘똘한 학생으로 주목받았을 것이다. 대학에선 연극반 활동을 하면서 무대에도 올랐고, 장애인·다문화가정을 돕는 여러 가지 봉사활동도 했다. A는 장애인이다. 그는 선천적인 뇌성마비로 인해 걷지 못한다. 사람들에게 A가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말해주지 않고 그에 대해 얘기하다 그가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나중에 밝히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감탄했다. 비장애인들에게는 걷지 못해 휠체어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장애인이 학교생활도 잘하고, 여행도 많이 하고, 연극 무대에 올랐으며, 봉사활동까지 한다는 사실이 놀라울 법하다. 그러나 A에겐 보통의 사람들처럼 그런 일들을 하는 게 비장애인보다는 조금 더 번거롭고 오래 걸리는 일이지만 불가능의 영역은 아니라고 했다. A는 말했다. “비장애인들은 계단을 자유롭게 오를 수 있어요. 하지만 장애인들은 계단을 오르내릴 수 없기 때문에 신체적 결함이 장애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경사로를 설치해 장애인들도 갈 수 있도록 만든다면, 신체적 결함은 더 이상 장애가 되지 않아요. 장애인을 위한 복지정책은 그들이 불쌍하니까 도와줘야 하고, 배려해줘야 하는 차원을 넘어서야 해요. 보통의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을 장애인들도 할 수 있게끔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것, 그래서 더 이상 장애가 장애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장애인을 위한 정책이라고 생각해요.” A와 대화를 나누면서 든 생각. 나는 지금 한국사회가 신체 멀쩡한 사람들까지도 ‘사회적 장애인’으로 만든다고 생각한다. 이를 테면 여성의 사회참여와 권익이 향상됐다고 해도 어쩔 수 없이 육아와 일을 병행하거나 출산 이후의 재취업이 쉽지 않다는 것은 이미 다 알고 있다. 청년도 마찬가지다. 일할 능력이 있는 수많은 청년들이 취업을 하지 못해 연애·결혼·출산에 이어 내 집 마련과 인간관계, 그리고 꿈과 희망까지도 포기한다는 ‘7포 세대’라는 말까지 나오는 현실이다. 보통의 삶을 살아 갈 수 없게 만드는 사회, 결국 사람들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장애인으로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 단지 신체적 결함만을 장애라고 규정지을 수 있을까. 사진 출처 - 국민일보 그런 한국을 두고 젊은이들은 ‘헬조선’이라고 부른다. 헬(Hell, 지옥)과 조선의 합성어로 ‘한국이 지옥에 가깝고 전혀 희망이 없는 사회’라는 의미다. 침체가 십 수 년 째 지속되면서, 처음엔 목소리를 내던 사람들도 이젠 무기력해지는 것을 느낀다. ‘나아지겠지’라는 막연했던 희망마저, 안타깝게도 지금 한국사회에선 사치인 것만 같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54 | 추천: 0
이상재/ 대전충남인권연대 사무국장 얼마 전 대표적인 인터넷언론사에서 기획한 모금행사에 약간의 돈을 보냈다. 기획의도도 좋고 기획기사의 주인공도 평소 알고 지내던 지역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모금기획이 종료되고 난 후 그 언론사로부터 문자 한통을 받았다. 모금에 참여한 사람들의 성의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자기네 언론사 대표의 특별강연에 무려 ‘무료’로 초청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전에도 이런 내용의 문자가 심심찮게 올 때마다 그냥 넘겼지만 그날따라 기분이 그렇게 좋지 않았다. 대전사는 사람에게 서울에서 하는 강연행사에 무료로 초대한다는 발상이 약간은 웃기고 또 얼마간은 황당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서울 사는 독자들은 지하철비용 2~3천 원에 다녀올 수 있는 무료 강연이지만 지방에 사는 독자들은 왕복 KTX기준으로 5만 원 이상의 비용과 적어도 반나절 이상의 시간을 들여야 되는 행사를 어떻게 무료 초대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인터넷언론사인 만큼 스마트폰에서도 이 언론사의 기사를 볼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느끼는 감정은 지방에 사는 독자로서의 소외감이다. 정치, 사회, 경제, 교육, 여성, 여행 등으로 자세히 분류 되어있는 기사 카테고리에 지역은 빠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 지역의 기사를 읽어 보려면 PC로 접속하거나 스마트폰에서는 PC버전으로 들어가서 다시 깨알 같이 작은 글씨의 지역 면을 그야말로 조심스럽게 터치해야 겨우 들어갈 수 있다. 큰 카테고리에 ‘스타’를 배치하고 그 아래에 다양한 연예계 기사 카테고리를 배치한 것에 비하면, 스마트폰에서 접하는 이 언론사의 ‘지방’에 대한 정책은 차라리 거의 없음에 가깝게 느껴진다. 몇 달 전 모 신문에서 충남과 세종시를 담당했던 기자가 부서이동으로 인해 서울 본사로 떠났다. 지역 시민사회의 크고 작은 현장에 대해 훌륭한 기사를 썼던 기자인지라 지역 사람들의 아쉬움이 컸다. 그래도 난 사람이 있으니 곧 든 사람이 있을 줄 알았지만 6개월여가 지난 지금까지 그 자리에 신입이나 경력기자가 새로 왔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더구나 그 신문사는 그 기간에 정기 신입기자 채용까지 있었는데 말이다. 충남, 충북, 대전, 세종, 강원이 한 면에 실리는 그 신문의 지역 면에서 이제 충남과 세종의 기사, 특히 예전과 같은 현장밀착형 기사는 좀처럼 찾아 볼 수가 없다. 신문사의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분에게 기자 충원 소식을 물어봤지만 몇 가지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에 당장은 힘들다는 대답만이 돌아왔다. 그 신문사의 사회부나, 정치부, 혹은 다른 부서에도 이렇게 기자 한 명이 비면 그냥 그대로 오랜 시간 내버려 두는지 궁금하다. 충남과 세종 담당 기자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는 언론사의 사업방식을 지켜보는 지역의 한 구성원으로서의 심정은 답답함을 넘어 분노까지 느껴진다. 앞서 얘기한 인터넷언론사와 나중에 언급한 신문사는 우리사회의 대표적인 진보언론사라 일컬어지는 곳이다. 언론사도 그렇지만 서울권역에서 활동하는 진보적인 시민단체에서도 느끼는 답답함 중의 하나는 지역에 대한 인식과 감수성이다. 사실상 서울 언론사, 서울 시민단체인데도 중앙언론사로 자칭하거나, 단체명에 서울이라는 지역명을 아예 붙이지 않아 마치 전국구 단체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변방이 없는 중앙이 있을 수는 없다. 변방이 있어야만 중앙이 인식되고 중앙의 존재가치가 생기는 것이다. ‘중앙’언론사가 되고 싶다면 변방에 신경 쓰고 투자하길 바란다. 그것이 올바른 진보이고 진정한 중앙언론사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버겁고 힘들다면 아예 ‘서울언론사’로 거듭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정론직필하는 제대로 된 언론사가 드물어서 그렇지 지역 언론사는 솔직히 차고 넘치는 것이 현실이니 말이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67 | 추천: 0
이동화/ 민변 국제연대위 간사   그를 처음 만난 건 2007년 10월 어느 날이었습니다. 당시 민변을 포함한 한국의 시민단체들은 버마(미얀마) 시위대에 대한 버마군부의 무차별 총격 및 유혈 강제진압에 대한 국제연대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한 자리에 모였고, 그 곳에서 버마(미얀마)의 참혹한 실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버마(미얀마) 활동가를 만났습니다. 그의 이름은 내툰나잉(Nay Tun Naing)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NLD(아웅산 수찌 여사가 이끌던 미얀마 야당)지부 소속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버마(미얀마) 인권상황에 무지한 나를 포함한 한국의 시민단체 활동가들에게 진지하고 열정적 자세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었고, 한국 시민단체들과 버마(미얀마) 단체들 간 연대체 결성 및 공동대응에 함께하였습니다. 이것이 그와의 첫 번째 만남이자 연대활동이었습니다. 그는 난민입니다. 1990년 미얀마 총선 때 아웅산 수찌 여사의 NLD 활동을 했던 그는 1994년 미얀마에서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한국에 산업연수생으로 입국하였고, 이후 미등록(불법?)체류자격으로 지내야만 했습니다. 그러던 중 조국 미얀마의 민주화 투쟁을 위해 2001년 한국 정부에 난민신청을 하였고, 2003년에 어렵게 난민지위를 획득하였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난민인정에 인색하기 그지없는 한국 정부를 상대로 버마(미얀마)인이 최초로 정치적 박해를 이유로 하여 난민인정이 된 것입니다. 이 일로 당시 민변 회원들과 인연을 맺었던 그는 나중에서야 “그때가 민변과의 첫 번째 인연이었고, 너무 고마웠다.”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고국의 민주화뿐만 아니라 아시아 지역의 인권과 민주주의를 위한 활동에 소위 ‘올인’을 하였습니다. 버마(미얀마) 민중들의 절박한 투쟁에도 버마(미얀마)는 여전히 군부 독재 지배하에 있습니다. 버마(미얀마)의 민주화를 원했던 한국의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버마 상황에 의해 일회일비 할 수 밖에 없었지만 내툰나잉을 포함한 버마(미얀마)출신 활동가들은 매주 한국 주재 버마(미얀마)대사관 앞에서는 시위를 개최하는 등 고국의 민주화를 위한 끊임없는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한국의 시민사회는 그들과 때때로 함께 하였으나 여전히 자신들의 상황에 묻혀 다른 나라의 인권문제는 뒤로 밀렸습니다. 하지만 버마(미얀마)에서 나쁜 소식이 있거나, 한국에서 미얀마 관련 행사가 있거나 캠페인을 할 때면, 나를 포함한 국제연대 활동가는 항상 내툰나잉을 찾았습니다. 그는 매번 수줍은 미소를 보이며 성심성의껏 응답을 해 주었고, 한번쯤 귀찮은 내색을 보일만도 했지만 그는 한 번도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얼굴 한 번 찡그리는 일을 본 적이 없었고, 그 것이 당연한 줄 알았습니다. 2007년 1월 2일 진행된 1차 Free Burma Campaign에 함께했던 내툰나잉(Nay Tun Naing)씨의 모습 2013년 민변 내에 아시아인권을 위한 내부 팀이 만들어지고 처음으로 연락한 사람이 내툰나잉이었습니다. “법률가 단체인 민변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라는 내 질문에 그는 ‘2008년 미얀마 헌법’에 대한 활동을 제안하였습니다. ‘2008년 미얀마 헌법’은 군부에게 지방의회와 국회의원 1/4명의 지명권을 보장하고 있고, 아웅산 수찌 여사의 대통령 출마를 불허하는 조항을 가진, 한마디로 한국의 유신헌법처럼 군부의 권력을 보장하는 반인권적인 헌법이었습니다. 이후 ‘2008년 미얀마 헌법’ 개정을 위해 민변은 2013년 사전답사를 다녀왔고, 2014년 2월 한국에서 미얀마 법률가 2인을 초청하여 국제심포지엄을 개최하였으며, 2014년 7월 아시아인권팀 10명은 현지방문을 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였습니다. 이 모든 활동을 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은 내툰나잉의 헌신적인 노력과 도움이었습니다. 현지 방문 시, 누구와 만나야하는지, 어디에서 머무를지 다 조직해주었고, 미얀마 법률가 초청 시에도 내툰나잉은 적극적으로 나서 주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2008년 미얀마 헌법’은 개정되지 않았습니다. 민변, 버마(미얀마)와 관련된 여러 활동을 함께 하며 내툰나잉과 개인적으로 가까워졌고 서로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미얀마 2번째 방문 이후 어느 자리에서 내툰나잉은 “올해(2015년)에는 미얀마에 다시 돌아가려 해. 돌아가서 NLD 선거에 도움을 주고 싶어”라고 말했습니다. 미얀마는 여전히 군부독재 정권이지만 최근 해외의 민주화투쟁 활동가에게 준법서약서를 작성하면 입국이 허락되었고 그 소식을 들은 내툰나잉은 준법서약서 작성을 거부하고 여전히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터였습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듣고 내심 놀랐지만, 만약 돌아간다면 21년만의 귀국이니 무척이나 뜻 깊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사랑하는 연인도 버마(미얀마)에 있었기 때문에 그가 얼마나 고국을 그리워했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그가 자신의 고국으로 돌아가길 희망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갑자기 그의 부고를 들었습니다. 심장질환이라고 합니다. 멍하니 아무생각이 들지 않다가 장례식장에서 그의 영정사진을 보고서야 실감을 하게 되었습니다. 무척 슬프고 안타까웠습니다. 그토록 그리던 고국에 다시 돌아가려 했던 그였기에,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 동지, 친구가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을 그였기에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장례식장에서 문득 깨달았습니다. ‘내툰나잉에게 항상 부탁만 하였고 그는 한 번도 내 부탁을 거절한 적이 없었구나’, ‘항상 내가 필요할 때만 연락을 했구나’ 그에게 많이 미안하고 그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지 못한 내 자신이 원망스러웠습니다. 한국의 시민사회는 오늘도 우리의 이야기를 말하며 연대를 외칩니다. 1990년도와 2000년도 초, 무서우리만큼 무관심한 한국사회 속에서, 그는 자신의 나라의 민주주의를 외치며 한국의 시민사회에 손을 내밀었습니다. 다행히 그 손을 붙잡았지만 붙잡은 내 손이 이기적일 때가 더 많았기에 부끄럽습니다. 어쩌면 일상의 무게에 눌려 다시 입으로만 국제연대를 외칠지도 모르지만 그가 보인 열정과 진심은 한동안 큰 울림으로 남을 것입니다. 열정과 진지, 미소와 따뜻함을 지녔던 내툰나잉을 기억하며, 먼 곳에서나마 고국과 고향, 가족과 친구들을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59 | 추천: 0
강국진/ 서울신문 기자 정부가 임금피크제 도입에 팔을 걷어붙였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임금피크제를 도입 하지 않으면 당장 나라가 망할 것처럼 덤빈다. 대통령이 느닷없이 노동개혁만이 살 길이요라며 외치고, 곧이어 정부와 집권당이 똘똘 뭉쳐 노동개혁을 외친다. 그런데 노동개혁의 핵심이 임금피크제다. 임금피크제를 도입해야 인건비를 절약해 청년일자리를 늘릴 수 있다고 한다. 기획재정부 장관이란 분은 올해 안으로 임금피크제를 도입하지 않는 공공기관은 내년 임금 인상 때 불이익을 받는다고 엄포를 놓는다. 임금피크제는 근로자가 특정 연령이나 호봉에 도달하면 그 뒤로는 임금을 삭감하는 제도다. 정부는 임금피크제 도입을 통해 공공기관은 인건비 부담을 줄이고, 절약하는 인건비로 신규 채용을 확대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임금피크제만 도입하면 청년실업 문제가 다 해결될 것처럼 호도하는 발언이 이어지고 있다. 가령 지방공기업에 임금피크제 도입을 독려하는 행자부 공기업과 관계자는 “정년을 연장하는 기관은 정년 연장으로 인해 줄어드는 퇴직자 수만큼 신규채용 목표를 설정해야 하며, 이미 정년이 60세 이상인 기관은 정년이 1년 남은 재직자 수만큼 신규채용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런 목표설정은 과연 얼마나 현실성이 있을까. 냉정하게 말해 정부의 태도는 정책이 아니라 마술 혹은 자기최면에 빠져 버렸다. 생각해보면 냉정한 진단에 근거한 처방이 아니라 자기가 믿고 싶은 희망에 근거해 도입한 정책이 결국 원래 취지는 온데간데없이 남아있는 사례는 숱하게 많다. 식량안보를 명분으로 내걸고 시작했던 새만금사업은 지금은 세계적인 제조업 물류 관광 레저 중심도시를 지향하는 사업이 돼 버렸다. 심지어 4대강사업은 원래 취지가 하도 바뀌어서 지금은 왜 시작했는지도 가물가물하다. 공공부문 인사제도에 대해 말한다면 성과평가제도가 딱 그런 사례가 아닐까 싶다. 개개인의 성과를 평가해 급여에 차등을 두면 공공부문 성과가 늘어날 거라며 시작했지만 그 제도 덕분에 성과가 늘어났는지는 모르겠고 조직 내 위화감과 갈등의 원천이 된건 알겠다. 임금피크제를 통한 정책효과가 정부가 기대하는 것보다 훨씬 적을 것이라는 반론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어 보인다. 김준 국회입법조사처 환경노동팀장이 6월에 쓴 임금피크제 관련 보고서에서 이 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이 보고서는 “임금피크제는 마법의 열쇠가 아니다”면서 “전체 공공기관에 임금피크제를 전면도입하겠다는 정부 정책은 다소 속도조절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정부가 강조하는 것과 무척이나 다른 맥락이다. 특히 임금피크제가 정년연장과 맞물려 등장했기 때문에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더라도 인건비 절감효과가 과연 얼마나 될지 미지수이고, 따라서 청년일자리 창출에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될지 미지수라는 지적은 진지하게 새겨들어야 할 지적으로 보인다. 4개월 만에 손잡은 노사정 지난 8월 27일 오후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노동 개혁 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노사정위원회 4자 대표자회의가 열리기에 앞서 참석자들이 손을 맞잡고 있다. 왼쪽부터 박병원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 김대환 노사정위원장, 김동만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 이들은 지난 4월 8일 협상 결렬 이후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였다. 사진 출처 - 서울신문 해당 공공기관 노조에서 임금하락을 이유로 임금피크제 도입을 반대하는데 그걸 어떻게 설득할지도 미지수다. 근로기준법 제94조는 취업규칙을 근로자에게 불리하게 변경하려면 노조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규정한다. 정부에선 가이드라인이나 정부시책 등을 이유로 내세우지만 그럴수록 현장에선 충돌만 거세진다. 거기다 정부가 자꾸 '반드시 언제까지 달성하겠다'는 방식 역시 지난해 공무원연금개혁 얘기가 나오고 나서 마감시한이 몇 번이나 바뀌었는지 기억을 떠올려보면 무척이나 식상해 보인다. 임금피크제는 2003년 신용보증기금이 처음 도입했다. 최근 국회입법조사처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6월 기준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사업장은 2만 2231곳(도입률 9.9%)이다. 100인 이상 사업장은 16.9% 300인 이상 사업장은 23.2%에 이른다. 반면 임금피크제 도입할 계획을 가진 사업장은 5.6%에 불과하다. 지방공기업 중에서는 광주도시공사, 송파구시설관리공단, 경기도시공사 등 세 곳뿐이다. 왜 이렇게 임금피크제 도입이 제대로 안되는지, 단순히 '노조 반발'이 아니라 뭔가 기존 제도와 상충되기 때문은 아닐지 생각해보는 게 먼저가 아닐까 싶다. 임금피크제를 강조하는 의도 역시 불순해 보인다. 임금피크제를 우선 도입하겠다는 대상은 주로 공공부문 정규직이다. 지금처럼 노동시장 양극화가 극심한 상황에선 그나마 처우와 급여가 좋은 편에 속하는 이른바 상층노동부문이다. 노조 조직률도 상대적으로 높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대중들의 질시와 부러움의 대상이다. 이들의 처우를 낮추는 개혁은 노동시장 양극화에 기대 대중의 대리만족을 추구하는, 그럼으로써 내년 총선에서 유리한 구도를 만들려고 하는 것 아닌가. 이런 문제제기에 대해 정부가 진솔하게 대답해주길 바란다(물론 그럴 거라는 기대는 애초에 하지도 않겠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53 | 추천: 0
임아연/ 당진시대 취재팀장   휴가철이 지나고 있다. 7월 말부터 8월 초중순까지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시기에 휴가를 보낸다. 학생들 방학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정작 휴가는 휴가가 아니다. 휴가철에 사람들이 몰리다 보니, 도로는 주차장이 되기 일쑤고, 휴양지·피서지·관광지마다 사람들로 넘쳐나 쉼이 아닌 피로가 몰려온다. 휴가(休暇)라는 말이 무색하다. 고등학생 때부터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가장 덥고, 가장 추울 때 방학을 하는데, 차라리 그 시기에 학교에서 제공되는 시원한 에어컨 아래서, 또는 따뜻한 온풍기 아래서 공부하게 하고, 가장 나가 놀기 좋은 봄·가을에 방학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따뜻한 봄볕과 가을볕이 완연할 땐 외려 시험 기간이었다. 그래서 나는 종종 혹은 자주 시험을 망쳤다. 7~8월은 삼복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가장 더운 때다. 게다가 비가 자주 와서 날씨를 가늠하기도 어렵다. 휴가 혹은 여행을 떠나기에 가장 좋지 않은 시기다. 2~3주 사이에 우리나라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휴가를 보내다 보니, 한적하게 시간을 보낼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관광지마다 ‘한 철 장사’를 하느라 물가는 폭등한다. 한국의 휴가는 여러모로 비효율적이다. 사진 출처 - 당진시대 지역에서 일을 하다 보니 휴가라는 문화가 특히 직장인들에게서 나타나는, 산업화의 산물이라는 것이 더욱 명확하게 보인다.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일하는 때와 쉬는 때를 크게 구분 짓지 않는다. 해가 중천에 뜨기 전 이른 아침 시간에 일하고, 뜨거운 한낮에는 반주로 막걸리 한 사발 들이켜고 낮잠을 잔다. 혹은 사회생활을 하든, 개인의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해가 기울어지면 다시 밖에 나가 농사일을 하고 어두워지면 집에 들어온다. 게다가 한창 모를 심을 때와 수확기 이외엔 비교적 한가하다. 농한기에 경로당에 모인 노인들은 윷을 놀거나 장기를 둔다. 일과 쉼은 자연의 주기에 맞춰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뤘다. 그러나 산업화로 인해 새롭게 형성된 노동자들은 고된 노동으로부터 해방되는 휴식시간이 필요했다. 물론 고용주들은 근로자들의 휴가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노동자들이 임금인상 투쟁과 근로시간 단축 투쟁을 벌인 후에야, 휴가도 노동자들의 권리로 인정되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사회에서도 산업화가 본격화된 1960년대 이후 휴가문화가 조금씩 이식되기 시작했다. 월차휴가나 연차휴가가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지만 노동자들은 여전히 사용자와 동료들의 눈치를 볼 때가 많았다. 휴가자의 업무를 대체할 인력이 없고, 기존 근로자들이 업무를 맡아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근로자들이 동시에, 대신 최소한의 기간 동안만 휴가를 가는 독특한 휴가문화가 만들어졌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휴가기간은 물론 휴가지역도 한정될 수밖에 없어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여유로운 휴가를 보내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러한 산업화의 산물이 여전히 이어져 내려왔다. 국민소득이 향상되면서 삶의 질, 여가 문화가 확대됐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의 여행문화는 여전히 최대한 많은 곳을 ‘찍는’ 문화에 익숙해져 있다. 사진을 찍고 빨리 장소를 옮겨가는 여행 아닌 관광이다. 지난해 독일을 여행하다 어느 명소에 가게 됐다. 한적한 나무 그늘 밑에서 책을 읽는 사람들, 전망 좋은 곳에서 오래도록 친구와 대화 나누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오랜만에 휴식을 느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한국인을 실은 버스와 중국인들을 실은 버스가 연이어 도착하면서 뷰포인트(일명 포토존)에서 부랴부랴 사진을 찍고 바쁘게 또 다른 곳을 향하는 모습을 봤다. 대조되는 두 장면을 한 장소에서 보면서 이제 우리에게도 노동의 가치만큼 쉼의 가치도 필요하지 않나 생각했다. 휴가조차 스트레스가 되고, 일이 되는 사회는 너무 피곤하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54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