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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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이동화(아디 활동가),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 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이회림/ 00경찰서  "담배 한 대 하러 가자~"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21년차 경찰 선배가 말씀하십니다. 비흡연자인 저에게 백해무익한 담배를 강권하는 50대 아재일까요? 알고 보면 답답한 사무실보다는 하늘도 보이는 곳에서 허심탄회하게 대화 좀 하자는 그런 시그널이지요.  왼손엔 달달한 믹스커피, 오른손엔 전자담배 아니고 진짜 담배, 건강에 해로울 수밖에 없는 두 가지를 양손에 야무지게 챙겨 들고는 씽긋 미소 짓는 선배를 따라 오늘도 야외 흡연실로 따라갑니다.  "이 경사, 니 요새 안 디나(안 피곤해)? 살살해라 살살~ 그렇게까지 안 해도 된데이~~"  선배와 저 그리고 저의 후배, 우리 셋은 지난 11월에 신설한 경찰서에 학교전담경찰관으로 발령을 받아 51개 초중고등학교를 17개씩을 맡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1회 이상 방문해야 하는 A등급 학교, 한 달에 2회 이상 방문이 요구되는 B등급 그리고 한 달에 1회 이상 방문하게 되어있는 C등급 학교로 나누어져 있지요. 이렇게 A, B, C로 등급을 나누는 기준은 이전 해까지 집계된 각 학교의 학교폭력 범죄 발생 현황과 상관관계에 있습니다.  A등급 학교인 H고에서 최근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H고 1학년 여학생 지민(가명)이는 평소 교내에서 일진이라고 불리는 아이들 무리가 12명 있는 것이 늘 불편하게 느껴졌습니다. 특히 12명 중의 우두머리인 해룡이(가명)가 “ㅋㅋㅇ 단체톡방”에서 특수반 장애학생 남준(가명)에게 욕설을 하며 놀리는 모습을 보면서 더욱 그러했다고 합니다.  그날 밤 지민이는 단체톡방 안에서 남준이를 도와주지 못한 미안함에 잠을 이루지 못했고 고민 끝에 담임 선생님을 찾아가 모든 일을 알렸다고 합니다. 담임 선생님은 해룡이를 불러 주의를 주고, 문제의 그 단체톡방을 해체하도록 조치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도 해룡이를 비롯한 12명의 일진은 활개 치고 다녔고, 선생님들의 시선을 피해 여전히 아이들을 괴롭혔다고 합니다. 사진 출처 - gettyimage  일진들의 비행이 점점 교묘해져 선생님들이 관리할 수 있는 영역 밖으로 치닫고 있다고 느낀 지민이는, 어느 토요일 오후, 용기를 내 동네 지구대로 찾아갑니다. 지민이의 호소를 들은 순찰 요원분들은 스쿨폴리스인 저에게 이 사실을 전달해주었고, 저는 지민이에게 전화를 걸어 간단히 1차 전화 면담을 진행하였습니다. 월요일 방과 후, 지민이를 만나 그간의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고 화요일에는 H고로 찾아갔습니다. H고 교감 선생님은 늘 저에게 “정말 열심이시네요, 열정이 대단하시네요~” 하시면서 격려를 아끼지 않던 분이라 마음 편히 신고 사실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교감 선생님은 12명 일진의 존재에 대해 매우 놀라워하시며 전혀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한 달 정도 열심히 파고든 노력 끝에 피해 학생 4명과 목격한 학생 2명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로부터 놀랄만한 말을 듣게 됩니다.  교감 선생님이 전교생들을 다 모아놓고 “애들아~ 앞으로 학교폭력 등 문제가 생기면 스쿨폴리스에게는 말하지 말고 선생님한테 먼저 말하도록 하자~ 학교 위신 깍이니까”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교감 선생님의 말씀이 너무 이해가 안 된다며 저에게 알린 것이었지요. 저는 이 말을 듣고 나서부터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이날 이후로부터 교감 선생님 등 학교 측에는 제가 수집한 정보를 전부 다 알리지 않고 일부만 선별해서 알렸습니다. 학교 측이 가해 학생들의 편에 서 있는 것은 결코 아니겠으나 교감 선생님의 “위신 깎인다”라는 그 한마디에 저와 피해 학생들은 학교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뒤로 H고를 방문해 교감 선생님을 뵐 때마다 ‘열정적이라 보기 좋습니다’ 와 ‘위신 깎이니까 스쿨폴리스에게 말하지 말아라’ 두 마디가 교감 선생님의 얼굴 좌, 우 말풍선 안에 들어있는 듯했습니다.  이후, H고 12명 일진사건 뿐만 아니라 B, C등급 학교에서도 ㅋㅋㅇ톡 개정 갈취 사건 등 연이어 심각한 수준의 학교폭력이 발생하였습니다.  "안 디나? 살살해래이~~"  담배도 안 피우는 저를 굳이 하늘이 보이는 야외 흡연 공간으로 불러 내 이렇게 격려의 말씀을 해주시던 선배님께 이렇게 대답합니다.  “선배님~ 저 이제 7개월 차 스쿨폴리스이지만 확실히 알게 된 거 하나 있어요. 어디에서나 어른들이 제일 문제라는 거네요~ 그 교감선생님처럼요”  “그래 맞데이~ 학교폭력도 가해 학생들 가정환경 보면 답 나온다 아이가~~ 가해 학생들도 어찌 보면 다 피해자다, 피해자!”  허허로운 담배 연기를 허공에 확 뿜으시며 이렇게 한마디 하시는 선배가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교감 선생님 같은 사람도 있고 이런 선배도 있고 뭐 그런 건가요?
2021-05-26 | hrights | 조회: 573 | 추천: 5
홍세화/ 대학생  어느덧 대학교 4학년, 사회에 나갈 준비를 하며 느낀 점들이 있다. 확실히 부모님 세대에 비해 지금의 나는 어른이 되지 못했다. 어렸을 땐 하루빨리 나이를 먹어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막상 성인이 된 이후에는 아니었다. 그 이유로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로는, 어른으로서 지녀야 하는 책임과 의무에 대한 부담감이다. 어린 시절에는 내가 성인만 되면 나를 속박하던 제재들은 사라지고 자유만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성인이 되어 나를 반긴 것은 자유보다는 이에 따른 책임과 의무이다. 나를 속박하는 것으로 여겼던 제재들은 나를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었고, 나를 보호해줄 울타리 밖으로 나온 지금은 개인적인 일들이나 금전적인 부분에서 온전히 나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져야 할 일들이 늘어나고 있단 사실에 부담이 생겼다. 때문에 이런 일들이 앞으로 더욱 많이 일어날 텐데 내가 잘 헤쳐 나갈 수 있을지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들은 늘어만 갔다. 이러한 고민과 함께 그 옛날 지금의 나보다 두 살 밖에 많지 않던 스물여섯의 엄마는 어떻게 그 나이에 결혼을 하고 언니까지 낳으실 수 있었을까 놀라운 마음과 존경심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책임과 의무를 회피하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된, 아직 어른이 되기 싫은 ‘어른’과 ‘어린이’의 중간인 ‘어른이’인 상태이다. 사진 출처 - 구글  두 번째 이유는 요즘 들어 더 이상 나이 들고 싶지 않은 가장 큰 이유인데, 내가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나 혼자만 나이 먹는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모든 인간은 시간이 흐를수록 나이를 먹고 늙어가며 노화가 찾아오는 것이 당연하다. 올해 스물 네 살인 나도 이제는 육체의 성장이 한계에 이르렀고, (나보다도 어른이신 분들이 들으신다면 기가 찰 말이겠지만) 점차 노화가 찾아와 체력이 점점 떨어져 가는 게 느껴진다.  하지만 나의 노화가 시작되었다는 것보다 더 괴로운 것은 앞서 말했던 어린 시절의 나를 지켜주고, 사랑해주셨던, 그리고 여기까지 이와 같은 것들을 베풀어주시는, 나에게 진정 ‘어른’들이라고 생각되는 분들의 노화가 가속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얼마 전 한 인터넷 기사에서 스탠포드 대학의 연구 결과 하나를 보았는데, 인간의 노화는 각각 34세, 60세, 78세를 기점으로 단계별 노화가 가속된다고 한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후 요즘 들어 부쩍 부모님과, 나를 돌봐주셨던 가족들께서 연로해지시고 많이 쇠약해지고 계시다는 것을 느끼게 되어 마음이 아팠다.  ‘피터팬’을 보면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 네버랜드에 가게 된다. 나는 부모님과 같은 소중한 가족들이 있기 때문에 나이를 먹지 않을 수 있는 환상의 나라가 있다면 그곳으로 다 같이 떠나고 싶은 마음이다. 이러한 몽상과 더불어 첫 번째 내용과는 모순되지만, 내 성장 과정 속 많은 어른의 베풂에 보답하기 위해 어서 안정적인 직장에 자리를 잡고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이분들을 부양하고 싶은 마음도 생겨나고 있다.  최근 내가 쓴 ‘칼럼’이라 칭하기엔 민망한 글들을 찬찬히 읽어보았다. 대부분 이 시대에서 살아가는 청년들의 아픔과 설움 등을 주제로 다뤘지만 사실상 그 글을 쓰는 나는 제대로 노력도 해보지 않았고, 그저 징징대는 글들에 가까워 보였다. 이제 와서 읽어보니 일종의 도피성 글인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현실을 마주하고 ‘어른이’가 아닌 ‘어른’이 되어야 할 때인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바로 어른으로서 성장하긴 어렵겠지만, 이제는 적어도 내가 받은 것을 돌려줄 수 있는, 성숙한 사회구성원으로서 성장할 것을 다짐할 줄 아는 어른이로 나아갈 것이다.
2021-05-06 | hrights | 조회: 716 | 추천: 7
김형수/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부산에서 나보다 3년 먼저 대학 신입생이었던 친형은 사흘이고 나흘이고 집에 들어오지 않은 날이 잦았다. 어느 날은 지리산에서 전화가 오고 어떤 날은 서울의 대학 학생회관에서 생존만을 확인시켜 주는 전화를 가끔 할 뿐이었다.  유스호스텔 (youth hostel) 동아리 활동이었다. 정신없이 대학에서 첫 중간고사를 끝내고 국제학사로 돌아오는 청송대 긴 의자에서 결심했다. OX 문제로 전공시험을 내는 자괴감 가득한 문과대학을 탈출하자 혼자 결의했다. 돌아올 체력이 부족할까 대학 정문까지는 내려가지는 못하더라도 다른 학과 학생들을 만나는 동아리들이 있는 학생회관까지 진출해 보자 결정했다. 나도 여행동아리에서 태백산맥 전국을 다니리라 했다.  입학한 대학에는 매주 필수로 들어야 했던 예배 수업이 있었다. 그 대강당 2층 맨 끝에 그 동아리가 있었다. 그런데 대강당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따로 손잡이가 없이 넓은 돌난간만 있었다. 손으로 잡기에 너무 미끄럽고 넓어서 올라가기가 너무 어려웠다. 몇 번이나 미끄러져서 정강이에 피멍이 들었다. 길고 긴 백두대간의 여행보다 그 돌계단이 나의 최초 동아리 가입을 가로막았다. 국제학사 지하 1층에서 우연히 만난 얼굴이 하얀 유스호스텔 선배가 다시 학생회관 3층의 한 동아리를 소개했다.  이제는 강제로 폐지된 총여학생회가 있는 학생회관 3층에는 왼손잡이를 위한 손잡이는 없었다. 대신에 따뜻하고 얇은 나무 손잡이가 4층까지 이어졌다. 승강기가 없어서 힘들었지만, 발을 단단히 못 디뎌 다치는 일은 별로 없었다.  12년 전쯤, 1980년대에는 서울 보라매 공원 안에 있었던 이름있는 학교, 7살짜리 나를 업고 부산에서 올라와 기숙사 앞에서 하염없이 고민했던 어머니께서 차마 맡기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던 그 학교에, 어쩌면 나의 모교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바로 그 학교에 주말마다 학습지도 봉사활동을 가는 동아리였다.  설레임을 안고 들어갔다. 입학은 안 했지만 친한 후배들을 만나는 것만 같았다. 동아리 무리 사람들은 말로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매주 갈 것처럼 했지만 실제로 매주 봉사를 가는 사람들은 드물었다. 나도 딱 한 번 그곳으로 봉사활동을 갔다. 나처럼 걷고 나처럼 손짓하고 나처럼 말하는 많은 아이들을 만났다. 이름있는 학교의 대학생이라니 그곳 후배들은 나를 선망의 눈빛으로 바라보아 주었지만 나는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을 삼켰다. 주말마다 경기도 광주 그 학교로 봉사 가겠다던 동아리 친구들은 신촌로터리에 돌아오면 마을버스조차도 잘 오지 않은 경기도 광주의 그 아이들에 대해서 안줏거리로라도 말하는 법은 없었다.  왜 그 학생들은 버스조차 잘 이용할 수 없어 외출조차 못 하는지 분노하는 대학생은 거의 없었다. 아니 내 동기 중에는 딱 한 명 있었다. 학술부에서 활동하면서 ‘시대의 어둠을 넘어 실천하는 인간사랑’ 동아리의 목표 규칙 학기마다 표지로 실었지만, 그 딱 한 명의 동기가 지면을 빌어 에둘러 대학생들의 맥주잔을 깨자고 비판을 했지만, 그들은 또 술에 취해 주말에 늦잠을 잤다.  여전히 대강당에 내가 잡을 만한 손잡이는 생기지 않았고 4층짜리 학생회관에 승강기는 만들지 않았다. 광주에 그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이 여기 대학교에 와서도 안전하고 독립적으로 자유롭게 멋지게 동아리방들을 돌아다닐 수는 없을 것 같았다.  학생회관 3층 총여학생회 맞은편에 자리 잡았던 동아리는 다른 곳보다 훨씬 넓었다. 낡고 오래된 갈색 소파에서 여름방학을 보냈다. 새내기 학부생은 국제학사에 방학기간 동안 더 이상 머무를 수 없었다. 외국인 유학생을 위한 국제학사에 들어 가는 것을 도와주었던 91학번 선배와 함께 처음으로 학교 정문 밖에서 함께 하숙집에 들어가고 싶었으나, 가파른 철제 계단 옆 싼 가격의 집들은 모두 나의 부상을 걱정하게 했다고 선배는 귀띔해 주었다. 그렇게 나는 1학년 여름방학을 한 달 넘게 동아리방을 자취방 삼아 먹고 잤다. 학생회관 화장실에서의 샤워는 정말 차가웠지만, 창문도 없는 동아리방의 여름밤은 정말 꾸덕꾸덕 진저리나게 더웠다.  더위를 정 참기 어려우면 학생회관에서 세브란스 병원 넘어가는 길에 걸려 있는 큰 종 밑의 화강석에 누워서 잤다. 화강석은 해가 떨어지면 열기가 주변보다 빨리 식기 시작해서 새벽에는 한기가 들 만큼 차가웠다. 병원에 인턴 의사들이 출근하기 시작하면 일어났다. 더위를 피할 수 있다면 수십 마리의 모기라도 내버려 둘만 했다.  동아리 방에서 처음으로 농활도 출발했고 농촌 아이들의 울음을 뒤로하고 일주일 뒤에 다시 동아리 방으로 돌아왔다. 열흘 넘게 몸을 씻지 못하면 강남에 사는 선배가 집에서 욕실을 사용하게도 해주었다. 1990년 MBC 드라마 ‘우리들의 천국’ 한 장면을 구현해 버렸다. 그러나 농촌 현실을 체험하면서 우루과이라운드를 반대하는 나의 대학의 친구들은 나와 함께 대학에 들어온 21명의 특수교육대상자의 학교생활은 체험해 주지 않았다. 백 년이 넘었다고 기념 우표도 발행하고 당시에 우리나라 최초의 지체 장애인 특수학교를 열었던 대학에서 휠체어가 접근 가능한 화장실은 정문과 학생회관 사이에 있는 백주년 기념관에 딱 하나 있었다. 친구들은 당연하게 오줌통을 들고 다녔다.  신촌에서 대학 정문까지 휘젓고 올라오면 축축한 잔디밭 말고는 마땅히 쉴 곳이 없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백주년 기념관 앞까지 오면 백양로 길가까지 삐죽이 나온 하얀 계단석에 편히 앉을 수 있었다. 그래도 우리 학교의 유일한 장애인 화장실은 뒤풀이가 끝난 동아리 가는 길에는 사용할 수 없었다. 기념관 운영 시간에 따라 늘 문이 잠겼기 때문이다. 학생들을 위한 건물 투자에 필요한 기성회비를 다 내었지만,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도서관도, 강의실도, 연구실도 거의 없었다. 등록금을 낼 것을 다 내고 입학했지만, 우리가 읽고 쓰고 싸는 것에 쓰이지 않았다. 누구는 우리를 보고 소수를 위한 과잉 투자라고 비아냥거렸지만, 그 누구는 우리들의 기성회비와 등록금으로 ‘무임승차’ 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일어나는 차별과 어려움의 고달픔보다 입학을 ‘허가’해 주었으니 마냥 고마워하라는 것이 더 서글펐다.  어느 날 사회학과 대학원생 서동진 씨가 연세대 학보인 ‘연세춘추’에 ‘게이ㆍ레즈비언 회원을 모집한다’는 글과 함께 자신의 삐삐번호를 공개했다. 한 달도 안 되어서 대학 최초의 성소수자 모임 ‘컴투게더’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중앙도서관 앞에 천막 동아리방이 열렸다. 대학 오기 전까지 동성애가 무엇인지 성소수자가 누구인지 몰랐고 게이나 레즈비언이란 단어도 처음 들었지만 솔직히 부러웠다. 그 분들을 향한 욕설과 혐오조차 부러웠다. 하루가 멀다하고 그들을 향한 기사들이 학교 안팎에서 쏟아졌다. 하루는 그 천막에 가서 여쭤보았다.  “저희도 우리의 인권과 문제를 알리기 위해 농성하고 싶어요. 어찌하면 좋을까요?” 우리가 천막에 다다르기도 전에 우리 앞에 무리지어 앉았던 그들은 대답했다. “우리가 곧 철수하는데 다 남겨주고 가겠다. 천막 간판만 ‘동성애’에서 ‘장애인’으로 바꿔 달아주겠다.” 얼마되지 않아 그분들이 남겨 준 책상과 서명판을 가지고 학생회관 앞에서 서명 운동을 시작했다. 전동 휠체어를 탄 동기가 고무 타는 냄새가 날 정도로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붙잡고 다녔으나 바삐 가는 사람들을 쉬이 잡을 수는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사람 많은 중도까지 다 들리도록 소리만 빽빽 지르고 있었다. 갑자기 수십 명의 여성이 책상 앞으로 몰려들었다. 양쪽 손 가득히 김밥과 생수를 안겨주고는 서명지와 요구안을 들고 갔다. 한 두 시간 뒤에는 더 많은 여성이 몰려 왔는데 온몸에 요구안을 손으로 적은 긴 플랭 카드를 잔뜩 들고 와 우리 앞뒤 가로수에 잔뜩 걸어 주고는 서명지도 잔뜩 복사해서 서명을 받기 시작했다. 그 플랭 카드 아래에는 온통 총여학생회라고 적혀 있었다.  해가 지고 나서는 총여학생회에서 짐을 두고 정리하라고 초대받아 올라갔다. 어안이 벙벙해서 물어봤었다. “우리를 왜......?” 그중에 한 분이 조용히 이야기했다.  “너의 문제는 나의 문제, 너의 차별은 나의 차별,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사진 출처 - 게르니카 페이스북  장애인 인권운동 동아리 ‘게르니카’는 그렇게 탄생했다.
2021-05-06 | hrights | 조회: 720 | 추천: 3
최유라/ 지구의 방랑자  목욕 후에 잔뜩 불어있는 손끝처럼 생긴 밥알이, 영롱한 아이보리 빛깔의 물 안에서 수중 여행 중이다. 그냥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침샘만 더욱 자극된다. 아는 맛이 무서운 법. 참다못해 한입에 털어 넣는다. “캬아~ 이 맛이지!” 차오르는 기쁨도 잠시, 언제 먹었냐는 듯 또 침샘이 작동한다. 고장 난 걸까?  자기소개만큼 괴로운 게 없다. 딱히 소개할 것도 없건만.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다 그만 머리가 하얘진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 헤매고 있는 사이, 옆에서 이름, 나이, 사는 곳, 순서대로 나열하듯 돌아 돌아 이어진다.  ‘딱히 그대들의 나이도 사는 곳도 알고 싶지도 않은데 마치 그것이 공식인 양 저렇게 읊을까?’ 공식을 부수고 싶은 이상한 욕망이 피어올랐다가 주목받고 싶지 않아 나도 그들과 같은 공식 아래 동행을 결정한다.  “안녕하세요. 저는 최유라고 나이는…. 사는 곳은…….”  언제부터인가 자기소개가 부담스러워서 새로운 공간을 가지 않게 되기 시작했다. 자기소개하는 동안, 그 안에서 흐르는 공기를 견디기 힘들어서다. 어색하기도 어색한데 마치 AI들이 모여 자신의 신상을 이야기하는 느낌이랄까.  “입력된 명령 값을 아주 잘 수행하고 있군.”이라고 개발자가 흡족해할 것만 같은 상상을 해본다.  호주에서 5개월 정도 살면서 그곳에서 현지인들에게 비슷한 질문을 받은 경험이 있다.  “왜 한국인들은 처음 만날 때 나이, 사는 곳, 혈액형, 연애 여부, 결혼 여부 등등의 개인정보를 말해?”  이 질문들에 답을 하지는 못했다. 모르기 때문에.  관습 때문에? 교육 영향 때문에? 나를 설명할 때 외부 요인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다 웃음이 터졌다. 마치 나는 그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처럼 거리를 두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게 하나의 관습으로 굳어진 것이라고 한다면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사진 출처 - gettyImagesbank  고민 이후 나는 자기소개를 요청받을 때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위주로 나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식혜의 매력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대게 회사에 커피 머신이 있잖아요. 저의 아주 작은 바람 중 하나는 식혜 머신이 회사에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인데요. 저에게는 그것이 최고의 복지인 거죠. 다들 식혜하면 떠올리는 이미지가 두 가지 정도 있을 텐데요. 비락식혜 혹은 찜질방 식혜. 식혜라고 모든 식혜를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저 나름의 기준이 있죠. 바로 생강 맛이 나지 않는 식혜. 비락식혜는 생강 맛이 진하게 나잖아요. 제 기준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죠. 또 다른 기준은 바로 오동 통통한 밥알입니다. 식혜를 모조리 마시고 남은 달달한 밥알은 마치 월급 다 쓴 후 보너스를 챙겨 받는 느낌이랄까요. 이런 이유로 저는 비락식혜와 연이 없습니다. 그러면 찜질방 식혜라고 바로 생각하실 수 있는데요.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땀을 빼고 목이 타들어 갈 때야 식혜가 담긴 용기에 관심이 없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플라스틱 통에 담긴 식혜는 눈에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식혜는 도자기 그릇에 담아 마셔야 그 맛이 삽니다. 이것은 저만의 과학으로 실제 과학과는 거리가 있을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이렇게 한잔, 두 잔 마시다 보면 끝도 없을 때가 있는데요. 그러다 이렇게 하루에 설탕을 많이 섭취해도 될까 하는 고민이 들죠. 식혜를 포기할 수 없었던 저는 바로 호박 식혜로 갈아탔습니다. 다들 호박즙이 부기 빼는 데 좋다는 건 아실 겁니다. 그 효능을 바로 연결해…. 쿨럭……. 물론 턱도 없음을 알지만 포기하지 못하는 그런 저랍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당신 차례입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요?
2021-04-14 | hrights | 조회: 681 | 추천: 5
이동화/ 사단법인 아디 활동가  미얀마 ‘군(軍)의 날’이기도 한 지난 3월 27일, 미얀마 전역에서는 군부의 쿠데타를 반대하는 미얀마 사람들의 집회가 열렸고, 아디의 ‘미얀마평화도서관’이 위치한 메이크틸라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전 7시 메이크틸라 시내 중심가에 모이기 시작한 주민들은 8시가 되자 약 600명까지 늘었고 사람들은 4그룹으로 나뉘어져 시위를 시작했다. 시위대는 “시민혁명은 승리하리라, 우리의 요구는 민주주의이다. 군부독재는 반드시 실패한다.”는 구호를 외치며 메이크틸라 시내를 누볐다.  비슷한 시간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군인들도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고 시위대로부터 약 300미터 떨어진 후미에서 시위대를 따라 움직였다. 오전 9시, 군인들은 첫 번째 그룹에 최루탄을 발사하며 진압을 시작했다. 진압에 쫓긴 첫 번째 그룹은 다른 그룹과 합류하여 군인들의 공격에 저항하였다. 그리고 10시경 미얀마 군인들은 시위대의 퇴로를 막은 채 최루탄과 실탄, 고무총탄을 발사하였다. 미얀마군의 발포로 인하여 시위대 중 일부는 부상을 당한 채 도로에 쓰러져 있었고 시위대는 그들을 챙기기 위해 돌을 던지며 격렬히 저항했다. 이미 사망한 듯 보이는 시신도 발견됐다. 시위에 참가한 현지 활동가는 그 모습을 보며 ‘지옥과 같았다’라고 이야기했다. 3월 27일 메이크틸라 시위 사진 사진 출처 - What's Happening in Meikhtila 페이스북  미얀마군의 살인진압이 있던 현장 도로 옆에 살고 있는 판이피유(Pan Ei Phyu)는 군인들이 도로에 몰려나오는 소리를 듣고 집안의 문을 닫으려는 순간 갑자기 쓰러졌다. 군인들이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쏜 총알이 대나무로 얼기설기로 엮은 집 담벼락을 뚫고 그녀의 가슴을 관통한 것이다. 가슴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로 물든 그녀를 부여잡고 어머니는 절규했다. 그녀의 나이는 14살이었다.  미얀마 군인들의 시위진압은 여러 뉴스를 통해 알려진 것과 같이 학살 그 자체였다. 시위해산 명령도 진압예고도 없다. 군인들은 시위대뿐만 아니라 주변의 민가도 개의치 않고 실탄과 고무총탄을 발포했다. 당일 메이크틸라에서 벌어진 시위진압으로 판이피유를 포함한 4명의 주민이 사망했고 6명의 시위대가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 주변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진압현장에서 빠져나온 부상자들은 치료를 위해 한시바삐 병원에 가야 했지만, 당시 부상자들이 갈 수 있는 병원은 없었다. 이미 군인들이 메이크틸라 주요병원을 점거하며 시위에 참가한 부상자를 색출하고 구금시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상자들이 향한 곳은 메이크틸라내 사원이었다. 스님들은 사원을 개방하여 부상자를 치료할 장소를 제공하였고, 의사들은 무료로 부상자들을 치료했다. 또한, 주민들이 십시일반 기부하여 음식과 치료 물품을 마련했다. 우리가 기억하는 5.18의 모습과 똑같다.  미얀마 군부의 쿠데타가 발생한지도 2달이 넘었다. 여전히 미얀마 최대도시인 양곤과 2번째 도시인 만달레이에서는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3월 27일 이후 메이크틸라에서도 여전히 수십명의 사람들이 그룹을 지어 매일 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이전과 달라진 것은 군인의 진압을 피하기 위해 오토바이를 타며 빠르게 이동하며 시위한다는 점이다. 시위를 중단시키기 위해 군부 쿠데타 세력은 시위참가자들에게 “머리와 등에 총을 맞을 위험에 처할 수도 있다”고 국영방송을 통해 협박하고 있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미얀마 사람들은 절망하지 않는다. 아디의 메이크틸라 현지 활동가들은 “우리는 민주주의에서 살거나 이를 위해서 죽을 각오를 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경험했던 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우리 아이들에게 넘겨주지 않겠다”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한국 사람들이 보여준 지지에 정말 감사한 마음이다. 한국 사람들이 미얀마 연방의회 대표위원회(CRPH)를 지지하면 좋겠다”라고 전했다. 그들은 쿠데타 발생 이후 은행 업무 중단으로 2달 넘게 급여를 받지 못하고 있지만, 여전히 활기차게 ‘미얀마평화도서관’문을 열며 책을 읽으러 오는 아이들에게 평화교육을 준비하고 있다.
2021-04-07 | hrights | 조회: 603 | 추천: 7
이회림/ 00경찰서  여러분은 ‘학교폭력’ 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가요?  저는 제일 먼저 어느 엘리베이터 안이 떠오릅니다. 한 남자아이가 주저앉아 눈물을 훔치고 있는 모습이 보이네요. 아이의 막막한 뒷모습은 엘리베이터의 스테인리스 표면에도 흐릿하게 비칩니다. 문득 떠올리면 곧바로 눈물이 왈칵 차오르는 그런 슬픈 이미지들이 몇 개 있는데요, 이 아이의 마지막 모습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예전 기사를 검색해서 찾아보다가 아이가 가족들에게 남긴 유서를 읽으면서 가슴이 턱 막혀 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탁인데 저희 집 도어키 번호 좀 바꿔주세요. 몇몇 애들이 알고 있어서 제가 없을 때도 문 열고 들어올지도 몰라요. 죄송해요, 엄마 사랑해요. 먼저 가서 100년이든 1000년이든 기다리고 있을게요. “  2011년 12월, ‘대구 중학생 자살 사건’으로 불리게 된 이 아이의 마지막 모습은 국민적 공분을 불러일으켰습니다. 2011년 12월 대전 여고생, 같은 달 대구 중학생, 2012년 1월 광주 중학생 그리고 대전 여고생의 같은 반 친구 등 비슷한 시기에 4명의 아이가 학교폭력으로 인해 가족의 곁을 떠나버렸습니다. 이로 인해 범정부 차원에서 학교폭력 TF가 꾸려졌고 2012년 2월에는 학교폭력예방법이 개정되었습니다. 이후 학교폭력이 발생하면 학교폭력위원회를 열어 가해자를 처벌하게 되었고 각 학교를 담당하는 학교전담 경찰관이 배치되었습니다. 사진 출처 - adobe stock  미디어도 힘을 보탰습니다. SBS는 제작 기간만 10개월이 소요된 ‘학교의 눈물’이라는 3부작 다큐멘터리를 방영함으로써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전국민적 관심과 공감을 이끌어내었고 고교를 졸업한 지 얼마 안 되었거나 아직은 고등학생이던 그룹 방탄소년단은 동명의 노래(‘학교의 눈물’ 2013. 1. 20. ‘BTS 믹스테이프)를 조용히 발표하기도 하였습니다.  다큐멘터리 ‘학교의 눈물’ 은 이렇게 흘러갑니다.  1부 ‘일진과 빵셔틀’은 잔인한 폭력이 게임처럼 펼쳐지고 있는 병든 교실로 시청자를 안내하면서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살펴보고 그 해결책으로 ‘소나기 학교’를 제시해 줍니다.  2부 ‘소나기학교’ 에서는 학교폭력의 힘든 경험이 비옥한 땅을 만드는 소나기처럼 그저 지나가는 일로 남을 수 있도록 돕겠다는 의미로 만든 8박 9일 임시 학교를 보여줍니다. 소백산 자락의 폐교를 리모델링한 이 ‘소나기학교’에서 학교폭력 가해, 피해 경험을 용감하게 고백한 14명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상담과 치료가 이루어집니다.  마지막 3부 ‘질풍노도를 넘어’ 에서는 학교폭력이 모든 사회 구성원이 힘을 모아 해결해야 하는 문제임을 시사하면서 전문가 인터뷰와 해외의 학교폭력 사례들 그리고 학교폭력 가해율이 가장 낮은 나라 ‘스웨덴’을 소개합니다.  다큐에 나온 스웨덴의 다양한 노력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무엇보다 ‘학교법을’ 개정하고 ‘학생권리보호위원회’를 신설한 것이었습니다. <스웨덴 학교법 제6장 학교폭력에 관한 조치 제9조 ~ 12조> 제9조 “책임 당국 또는 직원은 학생을 굴욕적인 대우에 노출시켜선 안된다” 제10조 “피해자가(학생) 수치심만 느껴도 학교폭력 조사가 시작되고 그것을 입증할 책임은 학교에 있다” 제12조 “피해가 입증될 경우 폭력의 가해자보다 그것을 막지 못한 학교가 더 무거운 책임을 지게 된다”  이 제도가 2006년 스웨덴 사회에 도입됨으로써 학생권리보호위원회 위원장은 피해자를 대신하여 학교에 손해배상청구(최소 80만~최고 3500만 원까지 배상)를 진행할 수 있게 되었고 이로 인해 실질적인 학교폭력 문제 개선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학교법을 엄격하게 제정해 놓고 학교에 학교폭력에 대한 의무를 지워 놓으니 학교가 파산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학교폭력 예방에 온 힘을 쏟아야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해 보입니다.  가해 학생들은 아이들을 괴롭힐 때 말할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고 말하고 또 어떤 학생은 폭력을 당하지 않기 위해 시키는 대로 나약한 장애아동을 괴롭혔다고 합니다. 반면에 피해 학생들은 학교를 가리켜 오로지 ‘눈물’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2012년 ‘학교의 눈물’로부터 10여 년이 흐르고 있는 지금, 아이들의 눈물은 얼마나 줄었을까요? 아마도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2012년과 2020년 학교폭력실태 조사 결과를 통해 어림짐작할 수 있을 듯합니다.  먼저 2012년, 2020년 학교폭력실태 조사 개요를 살펴보겠습니다.  ■2012년 제1차 학교폭력실태 조사 결과 / 2012년 4월 20일 교과부(장관 이주호) 발표■  -조사 기간 : 2012. 1. 18 ~ 2. 20  -조사 대상 : 558만 명(초등학교 4학년~고등학교 3학년 전체 학생)  -조사 방법 : 우편을 통한 설문지의 발송·회송  -조사 참여율 : 139만 명(558만 명 중 25% 참여율)  ■2020년 학교폭력실태조사 결과 / 2020년 1월 20일 교육부(장관 유은혜) 발표■  -조사 기간 : 2020. 9. 14.~10 .23.(6주)  -조사 대상 : 초4~고2 재학생 전체(약 357만 명)  -조사 방법 : 온라인 조사(코로나19 상황에서 학생들의 자발적 참여를 원칙으로 조사 진행)  -조사 참여율 : 295만 명(357만 명 중 82.6% 참여율)  ‘12년 제1차 학교폭력실태 조사 결과는, 학교폭력 피해 응답률 12.3%로, 전체 응답자 139만 명 중 17만 명의 학생이 피해 경험에 대해 응답하였고 초등학교(15.2%) 중학교(13.4%) 고등학교(5.7%) 순으로 나타났습니다. 피해 유형별로는 협박이나 욕설, 언어폭력(51.2%), 집단 따돌림(13.3%)이 전체 응답 유형 가운데 64.5%를 차지하였습니다.  ’20년에는 ’19년 1차 조사 대비 학생 1,000명당 피해 응답률 0.9%로 감소세를 보였고 피해 유형별로는 언어폭력(33.6%), 집단따돌림(26.0%), 사이버폭력(12.3%) 순으로 나타났습니다. 2019년 1차 조사와 비교하여 다른 피해 유형의 비중이 감소한 것과 달리 사이버폭력(3.4%), 집단 따돌림(2.8%)의 비중은 증가하였고, 집단따돌림은 초> 중> 고 순으로, 언어폭력은 초등학교에서, 사이버폭력은 중학교에서 비중이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20년 2월 이후부터 우리나라에 코로나19 확진자 수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비대면 수업으로 전환 되는 등 교육환경에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않으니 학교폭력만큼은 크게 감소하는 장점이 있을 것이라는 어른들의 예측이 있었습니다만, 학교폭력 지표상으로는, ‘19년 대비 소폭 증가하였다고 합니다.(*언어폭력 33.6%, 집단따돌림 26%, 사이버폭력 12.3% 순) 특히 피해 학생의 메신저 계정을 빼앗아 도박 사이트에 팔아넘기거나, 나체 영상에 피해 학생의 얼굴을 합성한 딥페이크 영상을 만들어 SNS에 유포한다고 협박하는 등 사이버 폭력의 비율이 12.3%로 집계되어 ‘18년 8.7%, ‘19년 8.9%에 비해 현저한 증가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2012년 이후 10여 년 그리고 2020년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여전히 학교폭력이 증가 추세에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았고, 변화한 것은 학교폭력의 양상이 ‘사이버폭력’으로 확대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변화에 맞추어 경찰청은 ‘21년 학교폭력 근절 및 위기청소년 보호 종합 대책(2021년 3월)’을 수립하였고 맞춤형 범죄예방교육의 활성화, 온라인 신고 채널 적극 활용, 청소년 참여 정책자문단 확대 실시 등 학생 참여 중심 학교폭력 예방 활동 등을 대책으로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학교 현장에서 학생들을 만나 면담을 해 보면 일진으로 불리는 집단이나, 단체 톡방 등 메신저상에서 욕설과 협박을 일삼는 아이들 그리고 장애인 학생을 겨냥한 이유 없는 폭언 등이 끊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통계에서도 드러나듯이 카톡 계정, 페북 계정 등을 갈취해 어른들에게 팔거나 돈을 뜯어내기 위한 목적으로 딥페이크 영상을 만들어 협박하는 식으로 신종 사이버 범죄 피해 또한 학생들 사이에서는 더 이상 새로운 일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연이은 아이들의 희생으로 인해 학교폭력예방법개정, 학교전담경찰관 창설, 117학교폭력 신고상담전화 통합 등 2012년에는 어른들이 아이들을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지만, 그 후 10년, 그리고 코로나19 상황에서는 우리 학생들에 대한 관심이 점점 줄어들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피해 학생들이 학교를 자퇴하고 ‘학교 밖 청소년’의 길로 가는 사례가 늘고 있는 것을 보면 결국 아이들의 눈물을 줄이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용돈벌이 하느라 카톡 계정을 팔아버려 카톡이 없다는 아이들이 주변에 심심찮게 보입니다. 아이들의 계정을 사서 도박, 마약 거래 등의 범죄에 악용하는 이들은 모두 어른들이고 이를 막지 못하고 있는 것도 어른들입니다.  2011년 슬픈 그날들처럼 아이들이 연이어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전에 우리 어른들이, 사회가 다시 총력을 기울였으면 좋겠습니다. 예상치 못한 새로운 범죄가 생겨나서 아이들의 영혼을 어지럽히고 더 위험한 상황에 던져 놓기 전에 말입니다.
2021-03-31 | hrights | 조회: 728 | 추천: 8
김아현/ 인권연대 간사  버스가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차 안의 조명이 꺼졌다. 동이 트려면 두어 시간 남은 새벽이었다. 설핏 든 잠을 깨운 것은 뒷자리에서 들려오는 기계음성이었다.  “박**님, 시월. **일, 잔액은 삼천. 이백. 팔십. 원. 입니다.”  자리에 앉기 전 보아둔 덕에, 뒷자리에 누가 앉았는지 알고 있었다. 집에서 준비해온 작업용 앞치마를 두르고 머리를 단단히 동여 묶은, 오십 대 중후반 정도로 보이는 아주머니였다. 물건을 포장하는 손이 무척 잽싸고 일이 능숙해 보였기 때문에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아마 모바일 뱅킹을 다루는 일이 익숙지 않아 폰뱅킹을 하는 것 같았다. 적당한 소음, 흔들리는 어둠과 피곤 속에 거의 모두가 곯아떨어졌을 무렵, 그 기계음은 이상하리만치 선명했고 나는 그 이후 다시는 쿠팡 셔틀버스를 타지 않았다.  몇 해 전 그 무렵 나는 어떤 분야의 창작을 하고 싶었는데, 집회 및 시위, 잡다한 사무, 여행 같은 것 말고 삶의 경험이 많지 않다는 사실은 큰 걸림돌이었다. 선생님은 고군분투와 갈등 같은 상황을 만들어보거나, 독특한 소재가 없으면 묘사를 잘 해볼 것, 사물과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을 달리해 볼 것을 주문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집회나 시위, 잡다한 사무, 여행 같은 내 경험치 안에서는 매력적인 이야기가 나올 것 같지 않았다. 쿠팡 물류센터 알바는 그래서 시도해본 여러 가지 일 중에 한가지였다.  쿠팡 물류센터에 ‘문자로’ 지원을 하고, ‘문자로’ 합격(?)통지를 받고, 출근 셔틀버스 탑승지 안내를 받았다. 나는 야간조에 지원했는데, 오후 6시부터 일을 시작하려면 4시에 출발하는 셔틀버스에 올라야 했다. 대부분의 물류센터가 경기도 외곽에 있기 때문이었다. 출근 셔틀버스를 타기 위해 오후 3시쯤 집을 나섰다. 버스가 도착하기도 전에 미리 와서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척 하며 곁눈으로 줄 선 사람들을 살폈다. 나이키 트레이닝복 세트를 갖춰입은 젊은 커플부터 왠지 표정이 어두워 보이는 아저씨, 느즈막히 나타나 줄 선 사람들 일부와 인사를 나누는 아주머니, 그야말로 남녀노소가 거기에 다 있었다.  내가 하게 된 일은 개인별로 지급된 PDA를 보며 화면에 뜨는 선반의 위치를 찾아 물건을 카트에 싣고 포장대 앞으로 옮기는 일이었다. 어렵지 않아 초보자도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팔다리의 근력을 쓰는 일에 특히 무능한 자에게 진짜 장벽은 따로 있었다. 비인간적으로 광활한 물류센터의 규모나, 물건이 담긴 박스의 무게 같은 것은 실재하는 장벽이었다. 일이 끝나는 새벽 4시까지 쉴새없이 움직여야 했고 일을 시작하고 세 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종아리와 발바닥, 어깨가 조용히 울기 시작했다. 사람의 키가 닿지 않는 높이의 선반에서 물건을 픽업하는 지게차들이 온전히 걸음에 의존해 물건을 나르는 사람들 사이를 분주히 오가고, 사람과 지게차가 부딪히지 않도록 여기저기서 경고음이 울려대는 혼돈 속에서 그날의 목표는 오직 새벽 4시까지 버티는 것 뿐이었다.  한 시간의 식사시간이 주어졌다. 하지만 작업장이 있는 층에서 식당까지 오가는 데 식사시간의 대부분이 소요됐다. 물류센터는 층고가 높아 한 개 층이 일반적인 건물 2~3층 높이에 달했다. 3층에 있는 식당에 가려면 엘리베이터를 이용하거나 계단을 올라야 했는데 아무리 봐도 스무 명을 채 감당하지 못하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기란 로또 당첨과 다름없었고, 계단을 꾸역꾸역 오르고 나면 이번에는 허벅지 근육이 오열하고 있었다. 십 분이 안 되는 시간 안에 밥을 우겨넣고 급히 내려와야 자판기 커피라도 한 잔 마실 여유가 생겼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관찰하거나 대화를 나누려던 애초의 계획은 잊어버린지 오래였다. 출퇴근용 셔틀버스를 타지 않으면 도중에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으니 그야말로 광활한 노역장 같았다.  그곳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눈 사람들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주말을 이용해 세 번 정도 그곳에 갔고, 창작의 소재로 쓰려면 쓸 수도 있을 것 같은 다양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과 잠시 친해져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지게차를 운전하는 한 청년은 한눈에 보기에 흑인이었는데 주로 신라의 후손들이 많이 사는 지역 사투리가 유창해 나의 편견을 돌아보게도 만들었고, 피팅모델을 겸하며 옷가게를 하다 가게를 접고 잠깐씩 나온다는 젊은 여성은 중간중간 몰래 쉬는 팁을 알려주기도 했다. 택배일을 하다 왔다는 한 무리의 남성들은 택배사별 노동환경이나 처우의 차이 같은 것들에 대해 썰을 풀어놓기도, 이 일을 하며 얻은 것과 잃은 것에 대해 읊기도 했다.  뒷자리 아주머니의 박한 은행잔고를 기계음으로 들은 것은 쿠팡 물류센터에 세 번째 출근했던 일요일 새벽이었다. 서울에 도착하기까지 좀처럼 깊은 잠을 잘 수 없었다. 집에 도착하니 이미 동이 튼 지 오래였다. 겨우 몸을 씻고 자리에 누워서도 잠이 오지 않았다. 밤낮이 바뀌었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식사시간 한 시간을 제외하고 여덟 시간을 일하기 위해 들여야 하는 시간, 그러니까 서울과 경기를 오가는 시간이라든가 셔틀버스가 기다리는 곳까지 오가는 데 드는 시간을 고려하면 온전히 하루를 통으로 바친 셈인데도, 돌아오는 노동의 대가는 정확하게 여덟 시간 어치의 법정 최저임금뿐이었다. 체력적으로도 수월한 일은 결코 아니었다. 그럼에도 남녀노소가 그곳으로 모여드는 이유는 간단했다. 임금이 다음날 또는 당일에 바로 입금되기 때문이었다. 친구나 애인과 재미 삼아 함께 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당장 돈이 급한 사람들, 차별과 편견 혹은 경쟁이라는 장벽이 엄연히 존재하는 노동시장에서 잠시 밀려났거나 진입을 거부한 사람들의 절박한 형편들이 거기에 존재했다.  더 이상 그곳에 가지 않기로 한 것은, 누군가의 삶을 알량한 창작의 소재로 삼아보겠다는 구상을 몹시 부끄러워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매일같이 고된 일을 하면서도 어느 시점의 잔고가 삼천 이백 팔십 원인 분의 삶을 훔쳐다 쓸 생각은 처음부터 감히 하지도 말았어야 했다. 사진 출처 - 고용노동부  유난히 자주 거론되는 그곳의 산재사고 소식을 들을 때마다, 사방에서 울려대던 지게차 경고음을 떠올렸다. 법의 지도를 아슬하게 피해갈 정도의 임금만 받으며, 에어팟 케이스나 고양이 화장실, 차량용 방향제 같은 물건의 새벽배송을 책임지기 위해 분주히 움직일 사람들과 지게차들이 그려졌다. 숫자로만 호명되던 이들 속에 행여나 나와 눈을 맞추고 짧은 대화를 나누고 자판기 커피를 뽑아주었던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기 시작하면 몇 분 정도는 일에 집중을 하기 어려웠다.  쿠팡이 뉴욕증시에 상장되고 시가총액이 단숨에 삼성전자와 SK 하이닉스의 뒤를 이었다던 날, ‘축포를 쏘아올렸다’는 대동소이한 기사들을 눈으로 훑으며 다시 한 사람을 떠올렸다. 한국 유니콘 기업의 전망을 두고 설렘과 우려가 떠들썩하게 오가는 와중에 다만 한 사람만을 떠올렸다. 업계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적자와 출혈을 감수하고 파이를 키워 끝내 대기업의 반열에 올라타는 쿠팡에서, 회계상 적자 말고 진짜 피를 흘리거나 목숨을 잃어간 사람들도 떠올렸다.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버스 안의 무겁고 소란한 정적 안에서도 귓가를 때렸던 그때의 고단한 삶은 지금 어디쯤 놓여있을까 몹시 궁금하다. 광활한 물류센터 안을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 지게차들 사이로, 작지만 환한 축포 한 번이 터질지 궁금하다.
2021-03-17 | hrights | 조회: 885 | 추천: 19
홍세화/ 대학생  월요일 아침 아홉시, 대학 동기들이 있는 단톡방이 시끄럽다. 방학 중에는 아침부터 단체 톡방이 활성화될 일이 거의 없었는데 최근 들어서는 이런 일이 잦아졌다.  ‘아 상한가다. 저번 주에 추매했어야 했는데 못했네…’, ‘예약 매도해두는 거 깜빡했다 망했다…’, ‘이번에 알바비 들어와서 예수금 두둑이 넣어둠…’ 등등 아직 나는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들이 오가고 있었다. 이젠 20대 초중반의 청년들도 주식 시장에 뛰어든 것이다.  불과 3~4년 전만 해도 주변 친구들은 아르바이트를 하고 월급을 받으면 그중 일부는 적금통장에 입금하여 그저 돈을 안정적으로 차곡차곡 모았다. 이것이 일반적인 청년들의 재테크 방식이었다. 그러나 점차 청년들은 아르바이트비나 월급을 받으면 그중 10~20% 정도의 금액은 장래가 유망해 보이는 주식을 한 주씩 사는 등의 방법으로 재테크를 하고 있다고 한다. 사진 출처 - 게티 이미지 뱅크  더 이상의 경제 성장을 바라기는 어려운 시대적 상황과, 코로나19로 인해 더욱 나빠진 경기로 인해 은행의 금리는 더욱 낮아지게 되었다. 옆 나라 일본은 이미 은행 금리가 마이너스를 찍은 시점에서 이제는 은행 적금에 돈을 쏟으면 뒤처진다는 인식이 생긴 듯, 청년들 또한 너도 나도 주식 시장에 뛰어들며 주식시장의 주 소비자층이 ‘밀레니얼 세대’로 교체된 것이다. 한국경제의 조사 1) 에 따르면 청년 주식 투자자들의 증가 원인에는 ‘부동산 막차’를 놓쳤다는 좌절감이 어려있다고 한다. 주변의 아파트나 부동자산 등은 급등하는 중인데 예·적금으로만 자산을 운용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생각되는 것이 당연하다. 원금 회수 수준의 은행 예·적금으로는 급등하는 부동산 가격을 따라잡아 내 집 마련의 꿈을 실현하기에는 역부족인 것이다. 한국경제의 기사 속 “가만히 있으면 근로소득이 전부인 무주택자는 꾸준히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위기감”이란 인터뷰 내용을 통해 주식시장에 뛰어든 청년들의 저변에 자리 잡고 있는 생각을 알아볼 수 있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미 보이지 않게 형성된 계층 사회에서 계층의 상승을 꾀하기 위해서는 근로소득만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리스크를 감수하더라도 주식 투자를 시작하게 되었다는 입장도 있었다. 이제는 ‘노오력’만으로는 성공한 인생을 얻기 어렵게 됐다. 그러니 비교적 수익이 많이 불어날 수도 있는 주식시장에 청년 개미들 또한 자연스레 불어날 뿐이다.  얼마 전 친구들과 강남의 한 대로변을 걷다 나눈 대화 중 인상 깊은 대화가 있었다. 오늘은 그 대화 내용으로 씁쓸한 청년들의 이야기를 마무리 지으려 한다. “이 많은 건물들의 소유주는 실상 얼마 안 된대.” “그럼 몇 안 되는 사람들이 이 많은 건물을 다 갖고 있다는 거네?” “그렇지.” “요즘 자취하면서 느낀 건데 집세, 전기세, 수도세, 관리비… 이런 거 다 내면서 엄마 아빠는 어떻게 우리까지 키우신 건가 싶어.” “그러니까. 예전에는 성인 되면 우리 부모님들처럼 평범하게 결혼하고 집 얻고 아이 낳고 사는 게 당연한 건 줄 알았어.” “그러게. 요즘에는 ‘평범하게’ 사는 게 가장 어려운 거 같다.” 1) ⌜부동산 막차 놓친 2030…"주식은 생존수단"⌟, 한국경제, 2020.09.25., https://www.hankyung.com/finance/article/2020091346211
2021-03-09 | hrights | 조회: 739 | 추천: 2
김형수/ 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저, 제가 살던 곳에서는”, 앨리스는 숨을 헐떡이며 말을 이었다. “지금처럼 오래 달린다면, 당신들은 어딘가 다른 곳에 가 있을 거예요.” “게으른 나라군”, 여왕이 말을 이었다. “여기서는, 네가 보다시피, 같은 장소에 머물기 위해서는 네가 할 수 있는 한 달려야 돼. 네가 만약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면, 그것보다는 최소한 두 배는 더 빨리 달려야 하지.” - 루이스 캐롤, ⌈거울나라의 앨리스⌋  4학년 때, 과학실이 생겼다. 학교 뒤편 별관 끝으로 가려면 늘 꼴찌였다. 기다란 계단을 버정거리며 휘젓휘젓 갔다. 그 때부터 다른 아이들은 나를 공룡이라 불렀다. 티라노사우르스라고 했다. 멸종해야 하지만 살아남아 쿵쿵거리며 걸었기 때문이다. 과학실에서는 자주 용해 실험을 했는데 물에 녹은 황산구리가 결정을 이루는 것에서 기간제 뽀글뽀글 과학 선생님은 위험하니 청산가리와 헷갈리지 말라 하셨다. 하얀색의 청산가리는 일본 표현이다 하셨다.  회색 고무 따꿍(뚜껑의 사투리) 작은 시약병에 그 결정을 넣었다. 겉면에 청산가리라 적었다. 몇몇이 티라노! 뭐라노? 와그라노? 라며 부를 때마다 왼쪽 주머니 시약병을 만지작거렸다. 눈물처럼 녹아서 멸종되지 않으리라. 저 멀리 아름다운 대지가 천방지축 흔들 때까지 땅을 힘껏 박차고 달리리라.  중학교 때는 따라다니며 쿵쿵하던 그들에게 아침마다 복수를 상상했다. 오늘, 지금에도 가장 강렬한 기억이다. 햄에 파란색 한 방울을 떨어뜨리는 조커가 되는 상상도 했었다. 굵은 목에 걸고 등교한 보온 도시락에서 비싼 햄 반찬만을 골라 날쌔게 도망갈 때마다 바람돌이에게 소원을 빌고 싶었다. 알고도 자연스럽게 내게 죽은 사과씨 냄새가 나서 그들에게 발견되기를 원했다.  사춘기가 수두처럼 왔던 중학교 때까지 그 시약병을 품고 다녔다. 사람들이 나를 따라 걸어오면서 넘어뜨릴 때마다 학교 옥상에 올라가서 저녁놀 질 때까지 하늘을 보았다. 다른 친구들이 학교를 마치고 학원과 체육관으로 떠나면 집으로 왔다. 사람 말을 듣는 것은 라디오와 TV밖에 없는데 ‘2시의 데이트’ 라디오 방송이 끝나면 밖에서 돌아다니는 또래들 이야기뿐이었고 TV 화면은 온통 은회색으로 지글거리거나 화면조정을 할 뿐이었다. 5시 반까지는 그랬다.  유일하게 사람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은 채널 2번 AFKN(AFN Korea) 미국 방송이었다. 날은 몹시 맑았지만, 집에 형도 어머니도 없었다. 가끔은 EBS 교육 방송이 지루한 다큐멘터리를 가장 먼저 할 때도 있었지만 사람 목소리를 듣는 곳은 역시 영어뿐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대화 소리가 아닌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비가 오듯 파도가 밀려오듯 조그마한 TV의 자글거리는 화면이 열렸다. 동그란 모자를 쓴 여주인공이 기타 가방과 큰 가방을 들고 길거리를 뛰어가면서 신나게 노래를 부르며 어느 고성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지만, 멜로디는 익숙했다.  국민학교 시절, 갑자기 등장한 뽀글뽀글 머리의 젊은 영어 선생님께서 외우다시피 불러준 ‘에델바이스’였다. 머리를 뒤로 올린 멋진 배우가 기타를 치며, 독일 나치를 피하기 위해 불렀다. 라디오에서 그 노래가 나오면 토요일 아무도 없는 집에 하루종일 혼자 있어도 무섭지 않았다. 사진 출처 - 구글  빨간 한쪽 스피커만 달린 라디오만 있으면 되었다. 두근거리고 명랑해졌다. 밤 10시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에서 들려주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함께 하고 자정이면 ‘이선영의 영화음악실’의 시그널 음악이 들려오면 갈 수 없는 영화관에 나는 이미 홀로 가 있었다. 남아공의 차별과 억압에 홀로 싸운 영화 ‘power of one’ 주제곡을 엽서로 신청하면 그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에 월요일 등굣길에도 왼쪽 주머니의 푸른 시약병은 더 이상 손에 잡지 않았다.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 세상을 향해 복싱할 수 있었다. 단 한 사람의 힘으로도 비를 내리게 하듯 학교는 그저 단 한 명의 도시락을 같이 먹는 친구를 만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낌없이 주는 곳이었다. 그 한 명의 친구가 없을 때에도 어느 한구석 학교 벤치에 앉아 점심을 먹을 때 사그락거리는 낙엽과 바람들은 소리 없이 나를 지키는 무한한 힘이 되었다.  가끔은 학교 옥상에 맞닿은 계단에 걸터앉아 숨도 쉬지 않을 만큼 울음을 울 때가 있었지만, 어머니가 싸주신 도시락은 다음날에도 살아있을 충분한 낭만이 되었다. 그 서러운 때에도 오히려 아이들을 피해 홀로 밥을 먹을 수 있을 때, 오롯이 자유롭고 독립적인 존재가 된다고 느꼈다.  학교와 몇몇 아이들은 나를 공룡처럼 멸종시키려고 했지만 난 살아남았다. 살아남아야 했다. 내 학창 시절은 그런 멸종의 시대였다. 나의 인종과 나의 걸음걸이와 나의 몸뚱아리가 남에게 조롱당하고 혐오 되어도 나는 살아남았다. 모두가 냄새나고 꼴 보기 싫다 하여도 나는 살아남았다. 나는 공룡이 되었다. 우리 모두 공룡이 되어 살아남자. 살아있자. 세상 모두에게 외쳐보자 그래서 ‘어쩌라고?!’
2021-03-03 | hrights | 조회: 648 | 추천: 6
주윤아/ 교사  ‘지구살리기’나 ‘친환경’이라는 말을 모르거나 이에 동의하지 않는 이가 있을까? 그런데 ‘기후위기’라는 용어는 아직 생소하거나 낯선 이가 더 많지 않을까 싶다.  나 역시 빌려 쓰는 지구에 대한 부채감과 환경 운동에 대해 의무감만 지닌 채 실천을 차일피일 뒤로 미루고만 지내던 차에 작년 1월 지인의 권유로 ‘기후행동학교 활동가 양성을 위한 워크숍’에 호기심 반 의무감 반으로 참가했다. 워크숍 마지막에 모둠별 토의를 하다 보니 참가자 대부분이 전국의 환경단체나 각계각층의 기후위기 현장 활동가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머리로만 알고 실제 별다른 실천은 하지 않고 있던 나는 부끄러워 제대로 발언조차 할 수도 없었다. 특히 청소년 참가자들이 기후위기를 자신의 현실로 직시하고, 그렇기에 지금 당장 행동할 수밖에 없는 당사자로서의 시급성을 이야기할 때는 기성세대로서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틀이라는 짧은 워크숍 기간 기후위기에 대한 과학적 배경, 연관된 다양하고 방대한 이슈를 고루 다루다 보니 귀갓길에 이미 내용 지식은 다 날아가 버렸다. 그저 남은 것은 시급성에 대한 불안과 심각성에 대한 충격, 그리고 코로나 블루의 나날에 우울한 이유 하나가 더 추가되었을 뿐이었다. 특히 일회용품과 플라스틱 사용을 줄이고 분리수거를 열심히 하는 개인의 노력은 빙산의 일각일 뿐, 정부와 기업, 그것도 한 국가가 아닌 전 세계가 탄소중립을 위한 즉각적 법 제정과 정책적 실천 없이는 기후위기가 극복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사실에 가장 절망했던 거 같다. 이제까지 언론 보도와 캠페인에 휩쓸려 그저 텀블러를 챙기고 친환경 제품 사용을 늘려가며 쓰레기 분리수거에 집중했던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했던’ 지난날들이 허망하게 느껴지면서 정부나 기업의 안일함에 분노하고,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그들의 무책임과 교묘한 술수에 이용당한 거 같아 울화가 치밀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알게 된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법, 뭐라도 해야 한다는 작심도 동시에 올라왔다.  그전까지 ‘기후이상’이나 ‘지구온난화’라는 말이 더 익숙했는데, 기후가 이상하다고 그저 의아해할 시간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 우선 사용하던 용어부터 ‘기후위기’로 일시에 바꾸기로 하고, 관련 책부터 읽기 시작했다. 최근 쏟아지고 있는 기후위기 책들은 이론서부터 실천서까지 주제별로 다양하지만, 기후위기에 관한 교과서로 불리는 책부터1) 집어 들었다. 그리고 지역에 환경 관련 단체가 별로 없어 자치구의 환경정책이 무방비 상태에 놓여 있는 실정이라 같이 워크숍에 참가했던 지인과 함께 거주지역에 ‘기후위기 (지역명)비상행동’ (시민)모임을 만들었다. 이 모임은 거주지역의 환경단체나 시민단체, 개인 등 다양한 이들이 참여하고 있는데, 개인별 실천이나 캠페인 활동을 기본으로 마을의제사업 추진, 나아가 지자체, 국회, 정부가 기후행동을 할 수 있도록 영향력을 행사하는 활동 등을 하며 보다 직접적인 해결을 목표로 움직이고 있다. 낮에 주로 활동하는 시민단체의 특성상 주도적으로 활동하긴 어려웠지만, 전국 기후위기 비상행동이나 지역별 비상행동 모임들과 실시간 정보 공유를 하며 작년엔 학교 안팎에 심각성을 알리는 학생 주도의 캠페인 활동을 진행해 보았고, 이번 겨울 방학 기간에는 관내 교사, 학생,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기후위기’ 온라인 연수도 실시했다. 급하다고 해서 두 걸음씩 갈 수는 없는 법, 한 걸음씩이라도 중단없이 움직이려 한다.  지역 비상행동모임을 시작한 지 1년이 흐른 지금도 나는 ‘기후위기’를 누군가에게 체계적으로 잘 설명하지도 못하고, 또 관련한 여러 주장에 대해 명쾌한 결론도 갖고 있지 않다. 입장을 온전히 정리할 때까지 행동을 주저하던 나는 최근에 읽은 책에서 ‘오십 보와 백 보는 명백히 다르다’라는 구절에 눈이 번쩍 뜨였다. 지구 온실가스 배출량의 15%는 가축 사육에서 나온다고 하니 채식이 지구를 살리고 동물권도 보호(나아가 동물해방)한다는데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채식이 다른 실천보다 유독 더 어렵기에 시작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다가 할 수 있는 것부터라도 시작하는 첫걸음이 있어야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고 마음을 고쳐먹게 되었다. 더불어 이 여정은 나 혼자가 아니라 하나둘 같이 갈 사람을 늘려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특히 식탁을 공유하는 가족 구성원이나 점심을 같이 먹는 직장 동료 중 단 한 사람이라도 채식 실천에 동참하는 것이 효과적인 방법일 것이다. 완전한 채식주의자(비건)가 아니어도, 혹은 시도하는 족족 실패하더라도 괜찮다. 한 끼 채식이라도 실천해 보려는 의지가 아예 안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  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부와 기업이 탄소중립/배출제로 정책을 즉각 실시하도록 촉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동시에 무한 소비를 권장하는 자본주의의 시대를 사는 개인들의 삶의 방식도 변해야만 한다. 그래서 가족들조차 감지하기 어려운 미약한 변화이긴 하지만 내 나름의 소소한 실천을 소개하며 동참을 호소해 본다. 사진 출처 - 대학생기후행동(https://blog.naver.com/ecoaction20)  1. 구매를 망설이는 물건은 사지 않는 쪽을 택한다. 넓지 않은 집에 여기저기 들어찬 물건들이 버겁고 청소도 힘들어 막연히 미니멀리즘을 동경해 왔기에 틈만 나면 사용하지 않는 물건을 정리하여 기부 단체에 보냈다. 그런데도 신기하게 물건은 어느새 늘어나 정리한 티가 나지 않는다. 재학 중인 자녀들이 있어서 그런 거라고 변명해보기도 하지만 사실 내 물건도 옷장이며 서랍마다 그득하다. 특히 요즘 같은 패스트패션 시대에 지인이 ‘한 해 동안 옷 안 사기’를 실천하고 있다고 해서 감동은 받았지만 나는 본받기 어려웠다. 결국, 긴요치 않은 물건은 사지 않으리라 마음먹었지만, 작년 코로나 19로 온라인 주문을 이용하다 보니 계획하지 않았던 소비도 늘고 일회용 쓰레기가 늘어나 마음이 괴로운 한 해였다. 더구나 감염병 시대의 종식이 당분간은 요원해 보이니 비록 작심 1일이라도 계속 작심하며 계획 없는 소비는 하지 않고, 다회용품 사용을 늘리는 방법을 궁리해 보는 수밖에 특단의 대책은 없는 거 같다.  2. 자가용은 출퇴근이나 무거운 물건 운송 시에만 사용한다. 직장이 멀어 출퇴근은 부득이 자가용을 이용할 수밖에 없으나, 전철 한 두 정거장 거리는 걷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역시 코로나19로 대중교통 이용도 자유롭지는 않지만, 부족해진 운동을 걷기로 대체할 겸 자동차가 배출하는 온실가스를 줄여본다.  3. 환경오염 제품 사용을 줄인다. 생활용품들은 친환경 제품으로 바꿔나가고, 필수가 아닌 제품들은 사용하지 않는다. 마침 청춘을 피곤하게 했던 꾸밈노동을 많이 줄여 사용하는 화장품 종류도 별로 없고, 20여 년 만에 숏커트로 머리스타일도 바꿔 샴푸량도 줄였다. 헤어린스나 섬유유연제 등은 사용하지 않으며, 액체 형태의 세제가 흘려보내는 잔여 세제량이 월등히 많다고 하니 고체 형태의 제품으로 하나씩 바꾸는 중이다. 미용실에 갈 때마다 샴푸 외 헤어제품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면 매번 질겁하며 놀라곤 하는데 그것도 참 의아한 일이다.  4. 에너지 사용 제품 구매에 신중을 기한다. 그야말로 악순환의 연속이다. 우리가 훼손한 환경으로부터 다시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전기제품을 사용하니, 지구의 온도가 더 올라가고 있다. 공기청정기, 제습기, 정수기, 연수기, 식기세척기, 의류건조기, 의류관리기 등 예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제품들이 필수 가전처럼 광고되고 있으며, 한집에 1대꼴이던 컴퓨터, 전화기 등 디지털 제품을 이제는 1인당 1개 이상 휴대용으로도 보유하는 등 그야말로 신속과 편리함의 욕망은 끝이 없는 듯하다. 물론 쾌적하고 편리한 용품들이겠지만 반면 굳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제품들도 많다. 지구의 온도를 올리는 제품의 수를 늘려가면서 느끼는 죄책감이 아니라 조금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이 미래를 위한 우리의 당연한 선택이어야 할 것이다.  5. 자율적 선택이 보장되거나 혼밥을 하는 경우 채식 메뉴를 고르려고 노력한다. 외식이나 단체 회식을 하는 경우 으레 육식하는 경우가 많은데, 고기나 치킨에 집착하지 않고 다양한 음식을 제안해 본다. 일주일에 몇 회 채식이라던가 하는 등의 엄격한 계획을 잡기보다는 마인드를 바꾸는 방식으로 유연하게 채식 실천을 시작해보려고 한다. 최근 채식 관련 책2)을 연속으로 읽다 보니 실제로 고기에 대한 입맛이 예전 같지 않고 조금씩 줄어드는 경험(이제 고기를 보면 음식 이전에 원래의 동물/생명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을 하고 있으며, 단체 급식 시 고기반찬을 담지 않거나 먹는 양을 줄여가고 있다. 하루빨리 공공급식에 채식 선택권이 보장되어 도입되기를 바란다.  당신은 2019년 6개월간 이어졌던 호주의 산불, 폭염으로 유명한 텍사스에 최근 닥친 한파, 작년 여름 한반도의 최장 장마, 그리고 현재 진행형인 코로나19 등이 기후위기의 징후라는 것에 동의하는가? 이에 대해 동의하고 지구와 인류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다면, 개인의 실천은 물론 지금 당장 우리 동네와 직장에 기후위기 비상행동3)의 작은 모임을 만들어 함께 할 것을 간곡히 부탁드린다. 왜냐면 지금이 아니면 내일은 없기 때문이다. 1) 『파란하늘 빨간지구』 (조천호, 동아시아) 2) 『비거닝』 (이라영 외, 동녘), 『나의 비거니즘 만화』 (보선, 푸른숲). 『고기가 아니라 생명입니다』 (황주영 외, 들녘), 『동물해방』 (피터싱어, 연암서가) 등이 실천에 큰 도움이 되었다. 3) 전국 기후위기 비상행동 홈페이지(http://climate-strike.kr)에서 도움받을 수 있다.
2021-02-17 | hrights | 조회: 835 | 추천: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