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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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이동화(아디 활동가),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 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누군가는 군사작전, 누군가는 전쟁범죄   이동화 / 사단법인 아디 활동가   최근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무장 세력을 소탕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팔레스타인 북부의 제닌 난민촌을 초토화시켰다. 다수의 언론보도를 종합하면, 이스라엘은 지난 7월 3일과 4일 이틀간에 걸쳐 항공기와 무장헬기, 드론, 1,000명의 지상군과 장갑차, 탱크, 불도저를 동원하여 인구 약 14,000명의 제닌 난민촌을 폭격하고 침탈한 결과, 팔레스타인 측 13명이 사망했고 부상자는 120명 이상 그리고 난민촌 내 피란민은 4천 명이 발생했다. 아디의 팔레스타인 여성지원센터와 트라우마힐링센터가 제닌 난민촌으로부터 차로 1시간 거리에 있기에 아디 역시 현지 상황에 대해 계속 점검하고 논의했다. 그런데 국내 뉴스를 보며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이스라엘, 서안서 20여년만에 최대작전...사상자 수십 명, 파이낸셜 뉴스, 2023.7.3.” “이스라엘군, 서안서 20여년만에 최대 규모 작전...8명 사망, 아시아경제, 2023.7.3.” “테러세력 소탕할 것 이스라엘, 20년만 최대 작전 서안에서 전개, 한국일보, 2023.7.3.” “이스라엘, 서안에서 드론 동원 대규모 작전...최소 8명 사망, KBS, 2023.7.3.“ “이스라엘군, 서안서 20여년만에 항공기까지 출동 최대 작전...최소 8명 사망, 중앙일보, 2023.7.3.” 7월 3일 자 네이버 기사 검색을 통해 검색된 기사들의 제목이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관련해서 국내의 기사가 많지 않은 것을 감안하면 이번 이스라엘의 제닌 ‘군사작전’은 그 규모와 피해가 엄청나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그런데, 기사 제목이 온통 ‘작전’이고 ‘이스라엘’로 시작한다. 국내 언론이 이스라엘-팔레스타인에 특파원을 보냈을 리는 만무하고 제목이 대부분 비슷한 것으로 봐서 기사 소스 역시 이스라엘 국방부나 언론의 발표를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도무지 제닌 난민촌에서 살아가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이야기는 찾아볼 수 없다. 사진. 이스라엘의 군사공격으로 인해 파괴된 제닌 난민촌 도로의 모습(출처: 한국NGO신문) 몇 년 전 방문했던 제닌 난민촌의 기억을 떠올려 봤다. 팔레스타인 내 난민촌이 대부분 그러하지만 제닌 난민촌은 아주 작다(UNRWA 자료, 0.43㎦). 그리고 사람들은 정말 많다(UNRWA 자료 23,628명) 제한된 공간에서 건물들은 위로만 올라가고 개인들의 프라이버시는 지켜지기 어려울 만큼 인구밀도가 높다. 그러한 곳을 항공기가 폭격하고 무장헬기와 드론이 공격한 것이다. 중무장한 지상군은 난민촌을 포위한 상태에서 대포와 총을 쏜 것이다. 백번 양보해서 이스라엘 측이 주장한 대로 팔레스타인 무장 세력을 공격했다고 하더라도 난민촌의 특성상 민간인의 피해는 피할 수 없다. 또한 현지 활동가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스라엘 공중 공격으로 많은 건물이 피해를 봤고 이스라엘군이 퇴각할 때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이스라엘 탱크와 불도저로 인하여 도로가 모두 파헤쳐졌다고 한다. 난민촌 전체가 쑥대밭이 되었다. 사진. 이스라엘의 군사공격으로 인해 파괴된 제닌 난민촌 도로의 모습(출처: 알 자지라 뉴스) 언론 기사에서 이야기하는 ‘군사 작전’에는 무고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죽음과 희생이 드러나지 않는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군사 작전이겠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학살이고 전쟁범죄이다. ‘군사 작전’이라고 칭하면서 명백한 가해자인 이스라엘의 행동에 대해 어떠한 이유와 서사가 부여하는 것이다. 현지의 소식을 기사로 접한 일반인에게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공격하고 학살하는데 뭔가 복잡하여 잘은 모르지만 나름의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게 한다. 하지만 이번 이스라엘의 제닌 난민촌 공격은 ‘적대행위에 직접 참여하지 아니하는 민간인에 대한 공격이고 명백히 과도하게 민간인인데 대하여 부수적으로 인명의 살상이나 상해, 민간 대상물에 대한 손해를 끼친’ 전쟁범죄이다. 또한 유엔사무총장은 이스라엘의 제닌 공격에 대해 ‘테러와 동급’이라고 비판했고, 3명의 유엔인권전문가들은 이스라엘의 공습과 지상 작전을 가리켜 “무력 사용에 대한 국제법과 기준을 악질적으로 유린한 것이며 전쟁범죄가 될 수도 있다”라고 지적했다. 다시 돌아와서, 한국 언론의 보도한 이스라엘의 제닌 난민촌 공습과 지상군 공격은 ‘이스라엘의 군사작전’이 아닌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전쟁범죄’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전쟁범죄는 수십 년째 이어지고 있다. 비정한 국제사회의 질서 속에서 힘이 없는 이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가해자의 서사는 현실을 지배하고 있다. 언론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 대해 무지(無知)할 순 있다. 그래도 기자님들에게 부탁건대, 자신들의 기사가 많은 이들의 판단기준이 되고 사회여론 형성에 근거가 될 터이니, 다음 기사 작성 시에는 이스라엘의 일방적 주장만을 담지 말고 적어도 비슷한 만큼의 피해자의 절규와 주장도 다뤄줬으면 한다. 그 정도의 기계적 중립마저도 지키기 어렵다면 제발 기사를 작성하지 말아 주시라.
2023-07-25 | hrights | 조회: 406 | 추천: 12
신종환 / 공무원   91년 김지하가 조선일보에 기고한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글이 요새 생각난다. 그의 글이 가진 문제점들은 종이 한두 장으로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의 글로 연상되는 당시 반대 입장에서 연이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죽음들 속에서 죽은 이들이 어떤 마음으로 불을 질렀는지 그 주변의 마음은 어떠했는지 조금은 짐작해 볼 수 있다. 출처 - 뉴스민   여러 가지 자살 방식이 있지만 삶을 체념한 사람이 분신을 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래 너무나 고통스러울 것이고, 많은 이가 보게 되며, 살게 되어도 큰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하는 방식을 택한 것은 무언가를 자신의 삶 이상으로 여기고 간절히 바랐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아가 사람 목숨의 무게를 모두가 알고 느끼기에 자신의 뜻이 전해지리라 믿었을 것이다. 이후 지금까지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이 바랐던 사회적 삶에 우리는 가까워진 것 같지 않다. 멀어졌다기보다는 예전보다 그 가치가 점차 농도가 옅어지고 쉽게 지워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삶과 죽음의 무게가 예전 같이 다뤄졌다면 최근 벌어진 gs건설의 부실시공에 대한 태도도 보다 분노가 서리고 진지한 단어들로 인터넷에 유통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노 대신 빠르게 유통되는 것은 앞다투어 창의성을 다투는 gs건설에 붙여진 별명들이다. 하자이, 순살자이, 살아남자이, 백숙자이 등 하나하나 열거하기 어려운 조롱 섞인 별명들은 사람들이 간편하고 빠른 마음의 길을 가려는 경향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이를 제외한 많은 진득하고 긴 시도들이 무산되고 지양되고 잊혔다고 보이기도 한다. 물론 삼성반도체 노동자의 사망에 대한 삼성의 사과 등 너무나 가치 있는 승리들이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은 공고하고 삼성의 노조 등 사람 다우려는 사람들은 즈려밟힌다.   사는 것을 살고 싶은 대로 살 뿐 아니라 살아지는 흐름대로 가기도 하기에 말소된 소용감은 말라붙고 무시되는 감정들이 자조적 비웃음과 대가를 치르게 하고 싶은 대상에 대한 조롱으로 흐른다. 그런 경향 속에서 나타난 결과가 최근 잇따른 죽음에 대한 책임 있는 사람들의 태도라는 생각이 든다.   죽음 중에서도 열거하기 힘든 다수의 죽음들을 비교하는 일은 그 자체가 죽음의 무게를 상대화하는 일이 될 수도 있기에 하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이를 무릅쓰고 세월호 참사 직후 박근혜 정권의 태도와 이태원 참사 직후 윤석열 정권의 태도는 당시 상황을 둘러싼 여러 정황을 차치하고도 상이한 인상을 준다. 불가피한 일이었으며 책임을 다했으며 자신들 또한 고통받고 있다는 일련의 반응들은 그렇게 뻔뻔해도 되며 실제로 그렇든 아니든 어떤 사람들은 속으로 뻔뻔하게 버티다 보면 죽음은 휘발되며 가벼워지고 희미해진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책임을 진 사람은 없고 현장에서 분투한 소방서장만 책임의 대상으로 올라왔었다. 책임감을 갖고 분투하면 돌아오는 건 책임질 일 뿐.   출처 - 서울신문   7월 들어 이어진 폭우로 인해 한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직‧간접인 실종되고 사망했다. 조선일보에 웬일로 일선 공무원들의 항변 관련 기사가 떠서 읽어보니 요는 사람들의 태도에 대해 불가피한 재난을 책임질 수 있는 것으로 파악해 비난한다며 일각의 공무원들의 의견을 대문짝만하게 확대한 기사였다. 그 당당함에 헛웃음이 났다. 최인훈 작가는 본인의 책 ‘바다의 편지’에서 ‘민족이라는 단어의 유통기한이 다 되었다면 이를 대신할 수 있는 개념을 개발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와 같이 이 사회가 생명의 가치라는 의미를 품기에는 유통기한이 만료되었고 그 여파로 이제 조롱섞인 응보심이 큰 줄기처럼 흐르는 것 같다. 출처 - pinterest 물은 범람하고 사람들은 눈물과 비명은 높고, 비웃음과 조롱은 짙다. 이 물결이 가야할 사람들에게 가 닿으면 사회는 더 바르고 단단한 그릇을 가질까. 가질 때까지 비웃음과 조롱의 농도는 짙어질 것 같다.
2023-07-18 | hrights | 조회: 302 | 추천: 2
윤요왕 / 전)춘천별빛 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 지난달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왔다. 성지순례나 걷는 것에 대한 간절함은 아니었다. Gap Year로 지내고 있는 올해 우연히 친구로부터의 좋은 제안에 20여일간 순례길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가보니 생각지못했던 많은 한국인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인생의 버킷리스트로 정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뒤돌아 볼 시간도 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삶의 긴 여정에서 오롯이 걷고 먹고 자는 거에만 집중하며 일상에서의 자유와 일탈을 통해 무언가 자신을 돌아보고 깨달음이나 삶의 전환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것을 알게 되었다. 출처 - 한국경제 그런데 나의 눈에는 보통의 순례자들과는 조금 다른 것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바로 ‘길’이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라는 스페인 성지까지 이르는 순례길 전후로 포르투갈의 리스본, 파티마, 포르투 그리고 스페인의 크고 작은 마을과 바르셀로나까지 시골길과 도시의 골목길 그리고 차가 다니는 큰 도로길 등을 걷게 되었다. 평소 비교적 걷지 않았던 내 일상에서 하루종일 두 발로 걸어다녀야 했던 고된 여행길이었다. 어느 도시, 마을을 가나 이 길이 내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이 길(도로)의 주인은 누구인가?’를 보게 되면서부터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길의 주인은 너무도 당연하게 ‘사람(보행자)’이었다. 우리나라와는 너무나 다른 유럽 두 나라의 인상깊었던 길을 만나게 된 것이다. 출처 - 브런치 첫 번째로 예전의 건물과 그 사이사이의 골목길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대항해시대를 열었고 제국주의로 전세계를 지배하며 융성했던 적이 있던 대국으로서의 포르투갈과 스페인이다. 중세시대 그 어느나라보다 번성했을 것이고 당시 건축물과 성당, 주택 등 도시계획에서도 엿볼수 있었다. 그런데 그 골목길들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었음에 더 놀라웠다. 건물을 허물어 아파트를 짓고 차도를 넓혀 전혀 새로운 도시를 계획하는 우리나라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 도시 어디를 살펴봐도 똑같았다. 그 골목길에 차도 다니지만 여전히 골목길의 주인은 걸어다니는 사람이었다. 이런 골목길들이 보존되고 있기에 골목길 곳곳에 상가와 주택가가 존재하고 있었고 여느 유럽풍경하면 떠오르는 인도에 테이블과 식사,차를 마시는 여유로운 공간이 조성될 수 있었던 것 같다. 출처 - 저자 출처 - 저자 두 번째로 도로의 구조가 우리와 달랐다. 차도보다 인도, 자전거도로가 더 넓은 곳이 많았다는 점이다. 보통 큰 도시라 할 지라도 편도 1,2차로인데 인도와 자전거 도로가 차도만큼이나 넓고 양옆으로 확보되어 있으니 차를 위한 도로라기보다는 보행자 중심의 길인 것이 확연했다. 몇 차선인지 세기도 힘든 서울 등 대도시의 우리나라와는 비교불가였다. 순간 도시의 풍경속에 이런 도시설계가 현재 살아가는 그들의 안전하고 여유로운 일상을 가능케하고 그 풍광이 전세계 사람들을 유럽으로 끌어들이고 있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세 번째로 시내 곳곳에서 휠체어를 탄 장애인과 시각장애인을 종종 마주할 수 있었던 점이다. 보호자가 동행하는 모습도 있었으나 홀로 나와 다니는 모습은 우리나라에서 는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유심히 보니 길의 문제였음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일반 보행자 위주를 넘어서 장애인들이 다니기 편한 인도와 신호등 그리고 사람들의 문화가 있기에 가능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또한 횡단보도든 무단횡단이든 무조건 차가 멈춘다. 처음에는 횡단보도 신호가 빨간불인데도 사람들이 건너기에 ‘준법정신이 부족한가?’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것이 일상적인 문화같은 것이었음을 느끼면서 ‘도로는 사람이 먼저다’라고 하는것이 그들의 문화라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이러하니 몸이 불편한 장애인분들도 거리를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게 아니었을까. 경제적으로는 현재 우리나라보다도 한참 뒤쳐져 있다는 포르투갈, 스페인이라고 한다. 그러나 오랜 역사를 소위 일부 개발론자들의 경제적 논리로 갈아엎지 않는 행정과 의회의 결단이 부러웠다. 그 뒤에 숨겨져 있는 시민력도 작동했으리라 짐작한다. 그리고 여전히 길(도로)의 주인은 사람(보행자)임을 잃지않고 있는 도로(길) 시스템은 우리가 눈여겨보고 배워야 할 대목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결국, 도로도 건물도 그 나라 국민들의 행복하고 편안한 삶을 위해 존재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유럽의 ‘길’들은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았다.
2023-07-11 | hrights | 조회: 292 | 추천: 6
김형수 / 장애인학생지원네크워크 사무국장   ‘정지’는 부엌을 이르는 경상도 지역의 방언이다. 은평구 구산역에 새로이 생긴 가게에서 커피나 먹자 한 것이 우리집에서 오븐을 데우는 동네 친구들 모이는 저녁 준비 자리가 되었다. 돼지 통삽겹살 스테이크는 수육용으로 잘못 주문했고 로봇청소기는 투다닥 혼자 성내며 돌아가지만 청소 하루만에 널브러진 살림살이는 일찍감치 포기했다. 소금 후추 올리브를 한꺼번에 뿌리고 팬을 데워 대충 버터와 마늘 거뭇거뭇 태운 다음 수육살을 숯을 만들만큼 바짝 구워댄다. 그 사이 오븐은 200도로 준비 완료로 계속 삐삑거린다. 어느 때부터 아니 목발로 걸음마를 배울 때부터 나는 시골 정지에서 외할머니 제사상을 거들고 부산 단칸방에 딸린 부엌에서 엄마에게 요리를 배우면서 자랐다. 쌀통을 쓰러지지 않고 붙잡고 있는데, 1년 가스불 켜는데 1년 이런 식이었다. 언제나 정지에 온갖 사람들은 나를 중요하고 필요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혼자 새벽 김밥을 마는 어머니 말벗을 시작으로 냄비밥 앞에 사람이 없으면 밥내음을 감시하거나 24시간 조청을 졸여내야 하는 아궁이의 불앞을 불침번으로 지키거나 누군가를 위해 식사를 준비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누구보다 중요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대학 모꼬지에서 밥짓기에 물만 맞추고, 카레 가루만 잘 부셔 내어도 내 주위에는 친구들이 모여서 내가 무언가 완성하길 오랫동안 기다려 주었다. 출처 - 밀알공동체 그래서 나는 늘 외롭거나 무기력하면 사람들을 초대하여 그들을 위해 요리를 했다. 처음엔 응하는 이가 없었지만 점차 아무 이유없이 찾아와서 먹을 것을 빨리 내놓아라, 맛이 있다, 없다, 편하게 마음껏 구박하며 너무나도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우리집에 모이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출처 - freepik 대학 근처 연남동에 살 때에는 버스와 지하철이 끊긴 후배들이 쳐들어와 냉장고를 싹싹 비워주는 것을 시작으로 이제 은평구로 이사 와서는 완벽한 나혼자 산다를 완성하니 은평구에서 새롭게 연 장애인 복지관 관장부터 동네 사람들, 멀리 사는 친구들, 심지어 얼굴 한번 본적 없은 SNS 에서 만난 뜬금없는 외국인까지 신나게 식탁을 차려주고 배터지게 같이 먹었다. 혼자 사는 내 집에 너무 힘든 7kg 수박을 깍둑설기 해주고, 한달 먹고도 남을 맥주 한짝을 들고 와서 헤어질 때는 산같은 온갖 쓰레기를 몽땅 가져가는 밥식구 손님들이었다. 손쉽게 외출하여 서로를 살피기에도 힘들기에, 고독사하지 않기 위하여, 인간답게 살기 위해, 우리 집에서 밥을 차릴 때 만이라도 누군가에게 의미있고 필요한 존재가 되기 위한 나만의 고육지책일지 모른다. 출처 - 연합뉴스 2020년 장애인실태조사'에서 전체 장애인 가구 중 1인 가구의 비율은 27.2%로 71만3000명으로 추정된다. 나도 이제 그들 중에 한 명으로서 장애와 더불어 50대에 임박한 혼자 사는 남성으로 고독사 고위험군으로 분류되었다. 그래도 최근까지는 잘 모르는 사람들이 방문한다고 해도 SNS에서 불쑥 말을 걸어도 괜찮았다. 오히려 안심되고 반가웠다 혼자 사는 시각장애인 분이 홀로 화재 속에 돌아가시는 비극에도 견딜만 했다. 그런데 올해 들어 하루가 멀다 하고 홀로 사는 어르신 분들과 여성들, 장애인들이 방문한 불특정 개인이 저지르는 범죄에 희생되는 끔찍한 사건들을 보니, 우리 집 정지의 오븐을 데우는 일을 이제 그만두어야 하나 고민을 한다. 사람들을 나혼자 사는 이 큰 아파트 저녁 식사 시간에 초대하는 것을 중단해야 할까? 출처 - 연합뉴스 같이 불광천을 산책하자는 동네 주민의 제안도 한층 경계하고 괜시리 나랑 친하고 싶다는 메시지도 불안하기만 하다. 새 아파트의 그 두꺼운 출입문도 올가미로 열어 제낄 것 같고 힘센 이가 우리집에 밀고와서 겁박하고 감금하면 어쩌나 하는 공포감에 시달린다. 이 공포와 불안은 실제 사건이 없어도 공기처럼 전염된다. 약자들을 향한 범죄는 이렇게 모든 사람들 사이의 신뢰와 연대감을 약화시켜 개개인을 모두 고립시킨다. 인권이라는 기본 개념을 좀먹는 좀비와도 같다. 출처 - freepik 우리는 그럴수록 우리 부엌에 우리 혼자 식사하면 안된다. 모두 용기를 갖고 서로를 신뢰하며 각자를 보호하고 사람들을 친절하게 인권의 식탁으로 초대하여 함께 요리를 나누어야 한다. 나는 늘 우리집 오븐 스위치를 함부로 내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의 인권 스위치를 끄지 않을 것이다.  
2023-07-04 | hrights | 조회: 270 | 추천: 2
정한별 사회복지사   네이버 국어사전: 자립(自立). 남에게 예속되거나 의지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섬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남에게 예속되거나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살아가고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 자신의 삶을 살고 있다는 사람들 중 정말 자신 혼자만으로 자신의 삶을 이뤄내고 타인에 의존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기는 할까? 퇴근하는 길 전화벨이 울린다. 엄마다. 비가 많이 오는데, 집 옥상에 균열이 있으니 균열을 메워달란다. 철물점에 가서 외부용 실리콘을 사 놓으라고 말한 뒤 엄마에게 갔다. 실리콘 총을 들고 옥상에 균열이 난 곳들을 메웠다. 엄마는 고생 많았다며, 검정색 비닐 봉투에 상추를 잔뜩 넣어줬다. 옥상에서 키운 무농약 상추라며, 씻어서 먹으란다. 집으로 돌아오자, 하루 종일 나를 기다린 아내는 그제서야 숨을 돌린다. 코로나에서 일상으로 복귀한 뒤 아이들은 더욱 자주 감기에 걸렸다.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병원에 갈 엄두가 도저히 나지 않은 아내는 장모님을 소환했다고 했다. 하루종일 보채는 아이들을 돌보느라 아내는 진이 다 빠졌고, 아이들은 겨우 방금 잠이 들었단다. 아빠는 언제 오냐고 묻더니, 대답을 듣기도 전에 잠이 들었다고 했다. 아내에게 고생 많았다며 등을 쓸어주는 것 외에 특별히 해 줄 수 없는 미안함을 뒤로 하고 땀에 젖은 옷을 벗었다. 적당히 따뜻한 물에 땀을 씻어내고 나니 저녁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제육볶음에 상추쌈 그리고 시원한 맥주로 저녁 일과가 시작된다. 저녁 설거지를 하는 동안 아내는 몇 시간 뒤 다시 전쟁통이 될 집을 치웠다. 집을 치우는 일은 집을 깨끗하게 하기 위함이 아니다. 아이들이 다시 지저분하게 어지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주기 위해 하는 일이다. 설거지를 마치고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돌아오니, 빨래 건조대에 있던 빨래들이 거실 바닥으로 내려왔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의식이 시작되었다. 빨래를 개면서 오늘 하루 동안 있었던 일들을 묻고 대답하기. OTT로 드라마 보기.   12시가 조금 넘었다. 빨리 침대에 누워야 한다. 두 시간 후면 잠에서 깰 아이가 엄마를 찾아올 수 있게...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의 일상 중 그 어떤 날도 혼자서 이뤄지는 날이 없다. 성인이 된 아들의 삶의 궤적에 여전히 엄마가 있었으며, 엄마가 된 딸의 옆에도 든든한 조력자인 친정엄마가 있었다. 부모가 된 두 남녀는 서로 약속하지는 않았지만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고 있다. 때론 삐걱대는 바퀴에 맥주를 붓기도 하면서 말이다. 사람이 사회에서 건강하게 살아가기 위해선 소속이 필요하다. 가족, 친구, 연인, 학교, 직장, 동네, 국가. 개인이 타인과의 관계에 엮여 있다는 것은 일종의 안전장치가 있다는 뜻이다. 관계란 도저히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시커먼 바닷속에 빨려 들어가는 것을 붙잡아 주는 생명줄이다. 관계가 다양하고 깊을수록 사람은 안전하다. 타인에 대한 의존, 의지, 예속에서의 탈출이 자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주변에 있는 타인과의 관계를 자신의 생존을 위해 적절히 이용할 수 있는 것이 자립의 진정한 의미이다. 자립은 국어사전의 개념, 한자어의 뜻풀이처럼 고정적으로 해석해선 안된다. 100명의 사람이 있다면 자립의 개념은 100가지가 될 수 있다. 세상에 유일한 개인이 타인에 의존하고 관계에 의지해서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한다면 그 사람은 그 모습 그대로 자립을 한 것이다. 우리 사회는 특히 발달장애인(지적장애인+자폐성장애인)이 장애인거주시설이 아닌 동네에서 이웃으로 살아가는 것에 두려움과 걱정이 크다. 발달장애인이 혼자서 뭘 할 수 있겠냐 묻고는 한다. 혼자서 요리를 할 수 있냐고, 혼자서 공과금을 납부할 수 있냐고, 혼자서 여행을 갈 수 있냐고 걱정을 하고, 혼자 살다가 화재를 내는 게 아니냐며 두려워 한다. 이 모두 전혀 합리적이지 못하다. 요리를 못하면 음식을 사 먹는 방법을 배워도 된다. 공과금 납부와 세금 납부를 어려워 하는 어른들은 의외로 많지만 어느 누구도 이를 능숙하게 하지 못한다고 동네에서 사람들과 함께 살면 안된다고 권리를 제한하지 않는다. 혼자서 여행 가는 일을 어려워 하는 사람 역시 의외로 많다. 가스렌지 사용으로 인한 화재를 걱정하는 것 역시, 요즘 세상엔 기우이다. 가스렌지 대신, 인덕션을 사용하면 될 일이며, IOT의 발전으로 가정 내의 모든 사물을 관리하는 일이 더욱 쉬워졌다. 발달장애인이 자립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발달장애인은 자립할 수 없다는 합리적 근거가 빈약한 편견, 자립의 개념을 지극히 사전적인 의미로만 해석하는 편협한 인식 때문이다. 출처 - 국민도서관   “인간은 의존적이다. 태어난 후, 고령으로 죽음을 맞기 전, 장애가 있을 때, 아플 때,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의존적이다. 누군가의 돌봄을 받아 생을 이어왔고, 붙여왔으며, 이 과정에서 누군가의 돌봄에 전적으로 의존했었다. 따라서 의존이라는 것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며 벗어나거나 극복해야 하는 과제가 아니다. 누구에게나 예외 없는 존재론적 사실이다.”   「돌봄:사랑의노동」, 2021, Eva Feder Kittay 저, 김희강, 나상원 역  
2023-06-20 | hrights | 조회: 359 | 추천: 4
이동화 / 사단법인 아디 활동가 지난 5월 11일은 팔레스타인 언론인인 쉬린 아부 아클레(Shireen Abu Akleh)가 이스라엘에 의해 살해된 지 1주기가 되는 날이다. 미국과 팔레스타인 이중국적을 지닌 그녀는 중동의 대표적인 언론사인 알 자지라 방송사에서 팔레스타인 특파원으로 25년 동안 활동한 베테랑 언론인이며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받는 언론인 아이콘과 같은 존재였다. 2022년 5월 11일 이른 아침, 이스라엘 군대가 서안지구 북부에 위치한 제닌(Jenin) 난민촌을 공격한다는 연락을 받고 동료 4인과 함께 제닌 난민촌에 도착한 쉬린은 'PRESS'라고 큼지막하게 적힌 조끼와 헬멧을 착용하며 이스라엘 군인의 동태를 취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곧바로 몇 발의 총성이 울렸고, 그녀는 땅에 쓰러졌다. 당시 쓰러진 그녀를 구조하기 위해 동료 언론인이 그녀에게 다가가자 그에게도 총이 발사됐다. 이후 그녀는 병원으로 급히 이송되었으나 오전 7시 15분에 사망했다.   사진 1. 이스라엘에 살해당한 쉬린 아부 아클레<출처: 트위터 쉬린 아부 아클레 추모계정> 사건 발생 직후 이스라엘은 그녀가 팔레스타인 무장세력이 쏜 총에 맞아 사망했을 거라고 발표했으나 당시 총격현장이 찍힌 영상에서 이스라엘 군과 팔레스타인 무장세력과의 교전이 없었고, 쉬린을 구하기 위해 접근하는 이에게도 조준 사격이 있었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이스라엘 정부는 그녀가 이스라엘 측 또는 팔레스타인 측에서 발포한 총격에 의해 사망했을 거라고 발표를 정정했다. 하지만 유엔과 외신의 독립적인 조사 결과에 따르면 그녀는 이스라엘 군의 발포에 의해 사망했고, CNN은 그녀가 이스라엘의 ‘조준’사격에 의해 사망했다고 결론 내렸다. 이후 이스라엘은 그녀의 장례식 때 관을 운구하는 사람들과 장례식에 모인 사람들에게도 최루탄과 고무총탄을 발포하며 장례식을 막으려 했다. 이스라엘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장례식에는 수만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모여 그녀의 죽음을 추모하며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이스라엘이 언론인을 살해한 사건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국제언론인단체인 CPJ(Committee to Protect Journalists)의 발표에 따르면 지난 2001년 이후 이스라엘 방위군(Israeli Defence Force)이 살해한 언론인은 최소 20명이고 이 중 팔레스타인 사람이 18명, 유럽인이 2명이라고 확인했다. 하지만 이스라엘 군인 누구도 죽음에 대한 책임을 지거나 처벌받은 사례는 없다고 강조했다. 또한 2021년 가자지구 침공 시 이스라엘은 국제적인 언론사인 AP와 알 자지라 방송사가 입주한 건물을 폭격하여 수십 명의 소속 언론인이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에서 이스라엘의 점령폭력을 취재하는 언론인을 표적으로 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은 일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SNS도 자국 보안을 핑계로 광범위하게 감시하고 이스라엘 정책을 반대하는 이용자들을 탄압하고 있다. 2020년 아디의 팔레스타인 여성지원센터에서 ‘여성활동가 역량강화 교육 프로그램’을 받았던 현지 여성활동가 리나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스라엘 점령을 반대하는 게시글을 올렸다는 이유로 2022년 6월에 체포되어 현재까지도 이스라엘 감옥에 수감되어 있다. 이러한 감시와 탄압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 여성들 중에 언론인을 꿈꾸며 진실을 전달하고자 하는 이들은 많다. 사람들은 아랍 무슬림 여성들이 수동적이라고 생각하지만 2018년부터 매년 팔레스타인 인권보고서를 제작하고 ‘팔레스타인 여성지원센터’를 운영했던 경험에 비추어보면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스라엘 점령폭력에 대한 팔레스타인 여성들의 억울함과 분노는 더욱 진실을 알려야 한다는 동기부여가 되었고, 여성을 억누르는 가부장적 사회로 인해 여성들은 더욱 도전적이고 스스로 변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게 됐다. 아디가 팔레스타인에서 활동하면서 팔레스타인의 진실을 알리고자 하는 그녀들의 열망은 늘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아디는 현지 여성단체, 언론단체와 함께 팔레스타인 여성들을 독립언론인으로 성장시키는 캠페인을 추진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여성 독립 언론인을 세우는데 함께 해주세요” 이 캠페인에는 굶주림에 힘겨워 하는 아이들의 사진이 없고, 파괴된 가옥에서 처절하게 살아가는 여성들의 사진도 없다. 그렇기에 누군가는 이 캠페인이 잘 안될 거라 비관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여성들은 기꺼이 제 2의 제 3의 쉬린이 되고자 열망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탄압을 뚫고 그녀들이 보다 자유롭고 다채롭게 현실을 기록하고 진실을 전달하는 세상을 꿈꿔본다. 아마 조금 더 평화롭고 평등한 세상이 아닐까? 언제까지 어쩔 수 없는 현실만을 탓할 수는 없지 않는가?  
2023-06-14 | hrights | 조회: 168 | 추천: 1
신종환 / 공무원 물이 마를 때, 잉어들은 서로의 침을 묻혀 서로 습기를 나눈다. 그러나 큰 호수에서는 서로를 잊고 사는 것이 나으리라. 나는 서경식 선생의 책 ‘시의 힘’에서 이 말을 처음 읽고, 그 말이 루쉰이 했음직하다고 생각해서 지금까지 루쉰의 말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글을 쓰며 확인차 찾아보니 장자가 도의 큰 덕을 비유한 상유이말이란 사자성어의 뜻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루신과 그 말을 떠올리면 마음이 동한다. 루쉰의 길에 대한 비유와 강철로된 방에 대한 비유, 그리고 자신의 마지막 유언조차 뜻대로 이뤄지지 않은 삶. 루쉰은 자신의 죽음을 소박하게 마무리달라고 했지만 그의 장례식에는 인파가 구름같이 몰려들었고 루쉰 기념관이 세워졌다. 낙관한 현실이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미래를 무이자로 끌어오지만 일본에서 활동하던 나카노 히게하루에 대한 조문 등을 제외하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대부분의 루쉰의 글에서 읽히는 낮은 온도의 전망은 그가 거의 미래에서 낙관을 끌어오지 않았다고 생각하게 한다. 어두운 전망을 직시하며 걷기로 마음먹을 때 그는 어떤 마응이었을까. 출처 - 저자 큰 기관이나 단체부터 작은 모임까지 배움이 걸쳐 있다면 그게 최종목적이든 활성화를 위한 수단이든 내부에 의견이 교차하는 장을 만들고 활성화하고자 한다. 의견이 교차하며 타인의 의견과 의중을 숙고하고 자신을 되돌아보고 생각이 입체화되고 깊어지면서 행동이 변화하거나 같은 행동이라도 의미가 달라질 계기의 장이 만들어지곤 한다. 과거에는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그런 장을 많이 제공했고 거기서 많은 생각이 활발히 오갔다. 커뮤니티의 구성원들의 특색과는 무관하게... 하지만 일간베스트나 워마드 등의 타자에 대해 누가 더욱 원색적이고 새로운 언어로 적의를 드러내는지가 자랑인 커뮤니티들이 한때 많은 이용자를 보유하고 또 그들의 언어가 사회에서 유통되는 시점과 맞물려 사유 교차의 장은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나아가 이동진 평론가의 ‘직조’라는 말이 굳이 그런 말을 써야 하느냐는 논란을 일으킬만큼 지적활동이나 그 교류를 굳이 해야하느냐는 넘어 까닭없이 적대하는 의견을 가진 이들도 점점 확대되고 있다. 비논리적인 비난이 가깝고 쉽고 즐겁다는 걸 많이들 느끼면 이를 부정하는 이들도 결국 단편적인 조롱과 비난만을 교차하게 된다. 그럼 어렵다고 느껴지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그런 장을 만드는 일은 중요하다고 느껴져서 우리 노조의 영화모임에서도 그런 장의 역할을 했으면 해서 매 모임마다 개발과별로 쓴 발제문을 들고 간다. 최근 시내 극장 하나가 문을 닫아버려서 이번 모임에서는 영화 ‘다음 소희’를 각자 보고 주민센터 근처의 족발집에서 모였다. 발제문을 돌리고 몇마디는 떠들고 시작하려는데 우선 참석한 일곱명 중 세명은 영화를 보지 않았고 두명은 유튜브 축약본을 봤다고 기습고백을 했다. ‘음 그럴 수 있지. 예상범위 안이야.’ 라고 생각하며 발제문 내용을 떠들어대려는데 노조 청년부장을 맡고 있는 친구가 갑자기 말했다. ‘아 이런거 써오지마 그냥 술이나 먹는 게 좋은 모임이야.’ 음... 맞는 말이다, 두드려 맞는 말. 속으로 이제 이런 말을 들으면서도 웃는 스스로의 인내심의 증진에 감탄하며 술을 따라가며 축약본이라고 보고 온 친구들과 말을 이어간다. 예전에는 농담으로 ‘좋은 내용입니다. 물론 읽지는 않았습니다.’라는 말이 농담조로 쓰이곤 했지만 이제는 ‘좋은 말을 읽어야 하나요? 당신의 이게 좋은 말이라고 어떻게 단정하나요?’로 따지는 태도들이 여기저기서 복병처럼 등장한다. 노조가 지원하는 무료 알콜의 힘에 기대어 어찌어찌 화기애애하게 다음달을 기약하고 돌아오면서 평온한 마음으로 모임의 내일을 생각한다. 대단히 모임에 호의적인 친구는 사람들에게 돌아가며 글을 쓰게 하면 모임이 활성화되지 않겠냐고 고마운 의견을 주었지만 그렇게 되면 술집에서 나혼자 등신대 거울을 보며 ‘그대의 망한 모임에 치어스’하게 될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이 사람 괜찮다 싶으면 도청 발령으로 도망가는 일의 반복이라 큰 기대도 비관도 없이 모임을 꾸리는 데 익숙하다. 다만 목적한 바를 달성하지 못한다면, 앞으로도 이룰 가능성은 다소 요원하다면 모임의 의미와 까닭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루쉰처럼 올지도 모를 낙관적 상화이 나를 볼 수 있게 지표처럼 있자는 마음으로 임해야 할지 오장완의 ‘프란츠 카프카’에서 제자를 ‘미친’이라고 표현하는 조소로 임할지 모르겠다. 가기는 가는 이길,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걷고 있나.  
2023-06-07 | hrights | 조회: 174 | 추천: 3
정한별 / 사회복지사 어린이에 대한 사랑과 보호의 정신을 높임으로써 이들을 옳고 아름답고 슬기로우며 씩씩하게 자라나도록 하기 위하여 매년 5월 5일을 어린이날로 한다(아동복지법 제6조). 1923년 방정환을 포함한 '색동회'가 주축이 되어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하였다. 첫 번째 어린이날 기념행사에서 방정환은 '어른들에게 드리는 글'을 배포했다.   출처 - 미디어오늘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쳐다보아 주시오. 어린이에게 경어를 쓰시되 늘 부드럽게 하여 주시오. 이발이나 목욕, 의복 같은 것을 때 맞춰하도록 하여 주시오. 잠자는 것과 운동하는 것을 충분히 하게 하여 주시오. 산보와 원족 같은 것을 충분히 하게 하여 주시오. 어린이를 책망하실 때는 쉽게 성만 내지 마시고 자세히 타일러주시오. 어린이들이 서로 모여 즐겁게 놀만한 놀이터와 기관 같은 것을 지어 주시오. 대우주의 뇌신경의 말초는 늙은이에게 있지 아니하고 젊은이에게 있지 아니하고 오직 어린이들에게만 있는 것을 늘 생각하여 주시오.   갓 태어난 고작 팔뚝만한 아이가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몇 가지 되지 않는다. 배가 고프다고, 졸리다고, 기저귀를 갈아달라고, 아프다고 운다. 그저 운다. 자신에게 필요한 일들을 부모가 처리해 줄 수 있도록 우는 일이 그 첫 번째다.   내내 울고 잠을 자기만 하는 아이가, 가끔 부모를 보고 웃는다. 정말 부모를 보고 웃는 것인지, 기분이 좋아 웃는 것인지, 반사반응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 조그마한 아이가 배냇짓을 한다. 아이의 우는 소리에 지치다가도 가끔 보여주는 배냇짓에 부모는 따라 웃고는 한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우는 소리에 힘겨워 이 아이가 정말 죄없이 맑고 깨끗한 존재인가를 의심하다가도 아이의 웃음에 부모는 육아로 지친 마음을 위로 받는다. 동시에 아이로 인해 차올랐던 분노가 사그라드는 것을 느낀다.   자신 스스로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갓난 아이는 외부(부모)에 의존해 살아 남는다. 아이는 기고 앉고 일어서고 걷고 뛰게 된다. 울고 웃고, 옹알이를 하고 엄마, 아빠, 맘마 하다, 말을 하게 된다. 아이는 점점 외부(부모)의 의존에서 떨어져 독립적인 존재로 성장한다.   아이가 성장하는 만큼 부모도 성장이 필요하다.   방정환이 첫번째 어린이날 행사에서 보낸 편지처럼 아이를 독립적인 인격체로 인정하고 아이를 존중할 수 있는 성숙한 마음을 갖는 일, 아이가 자신의 소유가 아닌 것을 인정하는 일, 아이의 성장에 비례하여 부모의 개입을 줄이는 일, 아이가 충분히 배울 수 있도록 부모 스스로가 모범을 보이는 일.   성장하지 않는 부모 아래서 아이가 건강하게 성장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고작 8살짜리 아이가 그릴 수 있는 유일한 세상은 부모와 자신이 함께 있는 집이다.   그 또래의 아이들이 그렇듯 꽤나 소란스럽고, 어지간히도 말을 듣지 않고, 제법 건방진 아이. 그런 아이 곁에 있는 부모는 어떤 사람이어야하나.   부모는 사는게 녹록치 않았다.   아이의 아빠는 오랜 시간 일을 했다. 아이의 얼굴을 제대로 보기 어려울만큼 일을 할수록 아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일은 되려 어려워졌다. 아이를 어떻게 돌봐야 할 지 고민해 본 일 없던 아빠에게, 자신의 뜻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아이뿐이었다.   아이를 돌보는 일은 온전히 엄마의 몫이 었다. 다른 가족과 친구를 떠나 남편만 보고 이룬 가정이 아이의 엄마에겐 점점 섬처럼 변했다. 엄마가 속한 섬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은 아이를 다루는 일 뿐이었다.   어느덧, 커가는 아이의 곁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존재는 부모가 아닌 스마트폰이 돼버렸다. 친구도 스마트폰을 통했고, 세상도 스마트폰을 통했고, 부모 역시 스마트폰을 통해서만 소통할 수 있을 뿐이었다.   사실 스마트폰을 사달라고 떼를 쓴 것은 아이가 아니라 부모였다. 부모의 요구로 아이에게 쥐어준 스마트폰. 아이를 보는 일이 힘들어서, 아이가 혼자 있는 게 불안해서, 아이가 심심해 할까봐 쥐어준 스마트폰은 어느덧 부모 자신의 권위를 대체해버렸다.   늦은 밤, 일을 마치고 돌아온 아빠는 아빠 대신 스마트폰을 보고 웃는 아이에게 화가 났다. 늦은 시간까지 스마트폰을 하면 안된다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웠지만, 사실은 존경과 사랑을 빼앗긴 분노에 불과했다. 아빠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를 때리고 욕을 했다. 엄마는 남편의 옆에는 있었지만 아이의 곁에는 없었다.   며칠이 지나, 아이의 엄마도 아이를 때렸고 아이는 폭력을 피해 경찰에 신고를 했다.   경찰 조사를 앞둔 부모는 아이가 배냇짓을 하던 때처럼 한없이 사랑해 주었다.   "엄마한테도 혼이 나긴했는데, 기억은 잘 안나요. 지금이 너무 좋아요. 엄마, 아빠 모두 잘 해줘요."   아이는 부모를 끝없이 용서한다. 학대의 원인을 자신 안에서 찾는다. 내가 사랑하는 부모가 날 미워할 리 없다. 부모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 내 잘못 때문에 화가 난 것이다. 부모가 내게 사과를 했다. 이제 괜찮다. 내가 조금만 더 잘하면 부모는 날 다시 예뻐할 것이다.   아이의 용서는 생존을 위한 선택이다. 한없이 연약한 존재가 더없이 거친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 선택하는 본능이다. 울고, 웃고, 용서하는 아이의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마주한 어른들 역시 선택을 해야 한다. 100년 전 첫 번째 어린이날에 방정환이 쓴 편지는 민법상 징계권(민법 제915조 부모의 징계권은 2021년 삭제됨)이 사라진 2023년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2014년 아동학대로 사망한 아동의 수 14명, 2015년 16명, 2016년 36명, 2017년 38명, 2018년 28명, 2019년 42명, 2020년 43명. 2014년 아동학대 발생 건수 10,027건, 2015년 11,715건, 2016년 18,700건, 2017년 22,367건, 2018년 24,604건, 2019년 30,045건, 2020년 30,905건. 2021년 아동학대 발생건수 37,605건, 하루평균 아동학대 피해아동수 103명, 재학대 발생건수 5,517건(재학대 발생비율 14.7%), 아동학대로 사망한 아동 수 40명. <출처: 아동학대 주요통계, 보건복지부>
2023-05-09 | hrights | 조회: 352 | 추천: 2
이동화 / 사단법인 아디 활동가 고대 버마달력으로 새해인 4월에는 미얀마와 태국, 라오스 등에서 최대 물 축제가 열린다. 미얀마에서 띤잔(Thigyan)으로 알려진 이 축제는 지난 한 해 동안의 잘못과 불결함, 불순함을 정화하는 의미로 서로에게 물을 뿌리며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는 미얀마 최대 축제이자 연휴이다. 하지만 2021년 군부 쿠데타 이후 미얀마에서 기존의 띤잔 축제의 모습은 사라졌고, 특히 올해는 미얀마 사람들에게 가장 충격적이고 슬픈 띤잔 축제로 기억될 것이다. 띤잔 기간인 지난 4월 11일, 미얀마 군부는 전투기와 무장헬기를 동원하여 쿠데타 이후 최대 규모의 학살을 자행했다. 당일 아침 8시, 미얀마 중부 사가잉 주(州) 파지기(Pa Zi Gyi)마을에서는 미얀마 군부에 저항하는 인민방위군(People Defence Force)의 지역사무소 개관식이 개최됐고, 이 행사에 약 800명의 지역주민이 모여 음식과 차를 나눠 먹고 있었다. 하지만 미얀마 군부는 전투기를 출동시켜 이 장소를 폭격하였고, 폭격 직후 무장헬기를 통해 폭격피해를 받은 지역주민들에게 무차별 사격을 한 것이다. 이로 인해 34명의 아이들을 포함한 최소 165명의 주민들이 사망했고 30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기에 폭격피해를 받은 이들의 시신은 사방으로 찢겨졌다. 부상자를 구조하고 가족들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접근하는 주민들에게 군부의 헬기는 재차 출격하여 사격을 하는 잔혹성을 보여 주기도 했다. 당일 저녁 군부 대변인은 파지기 마을에 군사공격이 있었음을 확인하였지만 민간인 피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미얀마 군부 공습으로 피해 받은 파지기 마을 현장 / 출처 - Myanmar Now 홈페이지 명백한 민간인 학살이고 전쟁범죄이다. 군부 쿠데타 이후 군부는 자국민의 저항과 시위를 무력진압 했고, 시위 연루와 상관없는 이들까지 무차별적인 체포와 구금을 하였으며, 저항인사를 강제 사형 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이번 사건을 통해 자국민에 대한 집단 학살도 서슴지 않는 극악한 정권임을 자처했다. 그럼에도 외부의 원조와 지원이 절실한 미얀마 군부는 정상국가 이미지를 위해 매년 띤잔 축제에 군인들과 공무원을 동원한 평온한 물 축제의 모습을 연기한다. 큰 도시마다 물 축제를 할 수 있는 무대와 부스를 강제 설치하고 일반인들의 참여를 유도하지만 미얀마 사람들은 군부가 주도하는 물 축제 참여를 보이콧 하고 침묵으로 군부의 통치를 거부하고 있다. 한편 파지기 학살이 있기 3일 전, 띤잔이 시작되는 4월 8일 토요일, 아디의 미얀마 메이크틸라 평화도서관에서 ‘평화와 희망 만들기’ 수업에 참여하는 아이들은 도서관에 띤잔 축제를 맞아 작은 행사를 열어달라고 요청했고 선생님들은 아이들만이라도 청결한 몸과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하며 축제를 자유롭게 즐기길 위하는 마음으로 작은 물 축제를 결정했다. 도서관 아이들은 한자리에 모여 서로에게 물을 뿌리는 물놀이를 하고 띤잔 축제 때 즐겨먹는 음식인 ‘몽로예보(Mont Lone Yay Baw)’를 함께 만들며 나눠 먹었다. 웃음과 흥겨움이 사라진 미얀마의 띤잔축제가 도서관에서 작게나마 부활한 것이다. 참여한 아이들은 “친구들과 함께 띤잔 축제에 참여하고 싶었는데, 도서관에서 자유롭게 즐길 수 있었고 전통과자를 함께 만들 수 있어서 좋았어요.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과자를 만들어 보고 싶습니다.”라고 소감을 전했다. 군부의 폭력과 공포통치가 온 미얀마를 억누르는 상황에서도 미얀마 인들의 삶은 지속되고 미얀마의 아이들은 희망과 평화를 위한 공부를 이어가고 있다.
2023-05-04 | hrights | 조회: 212 | 추천: 2
신종환 / 공무원 이번 글을 얼마 전에 개봉했던 ‘다음 소희’에 대한 스포일을 담고 있다.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사이 어딘가에서 활동하던 친구는 종종 ‘운동에는 반동이 따른다’고 했다. 나는 구 공산권의 몰락에 좌절했다는 과거의 대학생들이 겪은 일을 책으로 알고는 남 얘기인양 측은해하는 한편 조소하며 ‘우리’라는 개념이 소실되는 반동이 물러가길 바라며 ‘동지’라는 구호를 부르짖으며 짧은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나는 7급 지방행정직으로 2023년을 살고 있다. 그리고 그때는 몰랐던 ‘반동 또한 운동이며, 반동에는 운동이 생긴’다는 사실을 조금씩 느낀다.   영화 '다음 소희' 중   영화 ‘다음 소희’를 봤다. 반짝이는 꿈을 가진 소희는 욕받이인 직장, 고충을 말하기 어려운 집, 사정과 무시가 섞인 담임, 자신처럼 무너져가는 남자 동기 사이에서 추위에 얼어가는 성냥팔이 소녀처럼 죽어가고 소녀의 성냥불처럼 영롱한 그녀의 춤이 참담한 현실에 대비되어 더욱 암담하게 그녀를 비춘다. 그녀를 보며 폰 샤미소의 소설 ‘그림자를 판 사나이’에서 그림자의 개념을 김현경 씨가 본인의 책에서 ‘환대’에 비교하여 언급한 것이 생각났다. 환대란 이를테면 가치에 부응한다는 인정이고 그림자는 그 상징인데 소설의 주인공에 빗대자면 그녀는 그림자를 팔지도 않았지만 박탈당했다. 어디에서도 그녀는 응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 그녀 주변은 그녀의 상황에 대해 잘 모르고 나아가 굳이 알려 하지 않았다. 주변에서 어떠한 노력의 증여도 받지 못했으므로 그녀는 자신의 자리를 잃었고 방향과 좌표를 잃었다. 방향과 좌표를 잃은 사람은 고통을 해석할 실마리가 없고 그것은 지옥이다. 그리고 그녀는 자살한다. 그녀는 찬 물 속으로 들어갔다. 돌아나올 순간이 계속 있었을 자살방식을 그녀가 택함으로써 영화는 소희의 내면이 완전히 붕괴되었다고 보여주는 것 같다.   후반부터는 소희의 죽음을 규명하려는 배두나를 주목하지만 거기에 이르기까지 영화가 연출한 소희의 부모, 담임, 교장, 교육청, 회사 사람들이 렌즈에 더 많이 비춰진다.   영화 특성상 화나게 하는 사람들이 음성이나 극중 인물로 등장하지만 결국 직접적인 가해자는 보이지 않는다. 물론 누구도 타인에게 욕을 해서는 안되지만 대기업 하청 콜센터의 업무특성 상 서비스 해지까지 아주 어렵게 만들어진 구조는 가뜩이나 화 많은 사람들을 더 화나게 한다. 죽은 팀장도, 새로 부임한 팀장도, 주변 동료, 담인 선생, 교육청 직원 모두 비슷한 결을 가진다. 손에 바늘을 쥐고 다른 이의 항문을 꿰메지 않으면 자신의 항문이 꿰메일 것처럼 도망치는 동시에 타인을 쫓는 쥐처럼 보인다.   배두나는 그런 간접 가해자들 속에서 진범을 찾다 실패한다. 그림자가 누구인지는 알지만 거기까지 이르는 길은 좁고 복잡하기에. 김수영 시인이 ‘아, 그림자가 없다’에서 사람들이 정처 없듯이.   영화를 보며 쓰면서 몇몇 순간들이 머릿속에서 겹쳤다. 자기도 처음 들어왔을 때 찻길에 발을 넣었다 뺐다 했다는 선배. 씨발놈 개발놈 하는 민원인 앞에서 소희처럼 욕하지는 못하고 울더니 공황장애가 생겨 휴직하고 다시 복직하기는 무섭다던 누나. 조직에는 희망이 없다며 면직 후에 교육행정직으로 다시 시험 쳐서 들어간 동기. 과거의 자신을 타자화하는 데 성공한 사람은 조직에 남아 선두에 섰고, 무너진 자신과 이별하지 못한 사람들은 휴직자란 이름을 달고 조직에서 언젠가 떠날 사람으로 분류되었다. 몇몇은 그사이 어딘가에서 울기에도 웃기에도 애매한 마음으로 월급표를 기다린다.   노동 가수 ‘박준’은 본인의 노래에서 ‘옆을 쳐다’보라고 했다. 우리가 앞만 보지 않고 옆을 쳐다볼 때 모두 노동해방에 대한 열의와 동료의 부당함에 대한 의분이 생기리라 믿었던 것 같다. 신영복 선생님의 마지막 책인 ‘담론’에서 선생께선 ‘인간’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그 존재의 핵심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때에는 너와 내가 남이 아닌 ‘우리’라는 자각이 옳은 사회로 가는 원동력이라고 모두들 여겼던 것 같다.   이제 사람들은 공공적 연대, 우리라는 개념에 기반해 의분을 느끼지는 않지만 개별적인 분노가 투명한 사회에서 응집한다. 부당함에 대한 투명한 분노가 동시에 많은 사안들을 바라보고 향한다.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면 참을 수 없으니 너에게 일어난 일도 참을 수 없고, 기술은 서로의 분노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어 연대보다는 산불처럼 타오른다.   학대와 비인간화가 치밀하게 계획되어 아래로 흐른다면 우리의 분노는 직관적으로 위로 향해 올라간다.   ‘다음 소희’의 관객은 11만명 정도로 기록된다. 최소 500만명부터 시작된다고 여겨졌던 ‘헤어질 결심’의 관객이 189만명임을 감안하면 20만명이 손익분기점이라던 영화가 사람들의 외면을 받았다고 속단하기는 어렵다. 속초에서 우리 노조 모임은 영화를 단체관람 하려 했지만 영화가 이틀만에 내려버리는 통에 관람하지 못했다. 그런 상황이 지방에는 훨씬 많았을 것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적지 않은 호응에도 어떤 갈증같은 아쉬움이 남는 것은 배두나가 소희의 친구에게 연락하라고 말하는 선제적 온정과 사회 전반에 타오르는 분노의 궤가 다소 다르게 느껴지기 때문인 것 같다. 무수한 ‘나’들은 응징하지만, ‘우리’는 어떤 ‘나’가 허물어지기 전에 서로를 지킨다. 영화가 주는 강렬함과 아쉬움은 아마 ‘나’들이 아직 ‘우리’로 발아하지 못했음을 느끼고 또 한편으로는 그런 열망을 강하게 촉발하기 때문인 것 같다. 영화가 모두에게 이 일말의 갈증을 느끼게 하고 같이 발아하는 마중물의 역할을 하기를 바라본다. #인권연대 #사람소리 #목에가시 #신종환 #참지않는'나'들너머를기다리며
2023-04-25 | hrights | 조회: 228 | 추천: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