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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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젊은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젊은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아현(인권연대 연구원),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사무국장), 다솜(미디어 활동가), 손상훈(교단자정센터 원장), 송채경화(한겨레21 기자), 이동화(아디 사무국장), 이상재(대전충남인권연대 사무국장), 이현정(꽃씨네농작물 대표), 허창영(광주교육청 조사구제팀장, 전임 간사)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이상재/ 대전충남인권연대 사무국장   선거가 끝났습니다. 인수위 기간이 없는 선거라 그런지 하루 만에 주요 내각과 대통령비서실장의 인선이 발표되고 그 밖의 내각 세평도 언론과 주변 사람들에게 들을 수 있습니다. 후보 면면과 서로 누구를 찍었는지에 대한 후일담도 만나는 사람마다 한창입니다. 제 주변 사람들은 대체로 1번, 5번을 찍었다고 하며 저는 누구를 찍었는지 물어봅니다. 저는 5번 심상정 후보에게 투표했습니다. 결혼하고 나서 각종 선거에서 아내와 투표하는 후보가 항상 같았는데 이번에는 처음으로 서로 달랐습니다. 아내의 선택도 합리적이라 생각되어서 서로 지지 후보를 가지고 다투는 일은 없었습니다. 저는 왜 5번 심상정 후보에게 투표했을까요? 저는 선거 초반에 이미 이번 대선은 정의당에 투표하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간 지역 문제를 처리하는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아쉬움과 그에 비해 정의당이 보여준 남다른 헌신과 진정성이었습니다. 대전지역의 주택 보급률이 2015년 기준 100%를 넘은 상황인데도 더불어 민주당 소속의 권선택 대전시장은 도시의 허파 구실을 하는 월평공원 녹지를 개발해 수천 가구의 아파트를 짓겠다는 계획을 발표해 환경단체의 강한 반발을 사고 있습니다. 최근에 심해진 미세먼지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도심 속 녹지의 가치는 훨씬 더 중요해졌는데도 불구하고 대전시는 요지부동으로 아파트 분양을 위한 과정을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역 개발문제에 대해 환경단체 외에 지속해서 관심을 가지고 반대를 하는 정당은 정의당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비단 월평공원 난개발 문제뿐만이 아니라 지역의 각종 갈등 사안에 대한 시의회 다수 정당이며 시장 소속정당인 더불어민주당의 일회성 의정활동과 관심 부족을 접할 때마다 대전의 원외 정당인 정의당의 지속적인 관심과 활동은 많은 부분에서 비교되었습니다. 지난 19대 국회에서 제가 개인적으로 더불어민주당의 가장 큰 성과 중의 하나로 꼽았던 ‘을지로위원회’ 활동도 지역에서는 위원장만 있었지 구체적인 활동은 볼 수 없었습니다. 대전학생인권조례는 개신교와 일부 극우단체의 터무니없는 공세 속에 대전시의회 교육상임위원회에서 눈치 보기만 하다가 3개월 사이에 결국 보류만 두 번을 해버려 사실상 안 자체가 폐기될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웃한 충남도의회가 보수적인 자유한국당 일색인 것에 비해 의회와 상임위원회가 더불어민주당이 다수를 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라 더 황망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의당은 학생인권조례안 자체뿐만 아니라 개신교계의 동성애혐오 공세에 대해서도 당 차원에서 대응해 주었습니다. 그 외에도 정의당과 당원들은 세월호를 잊지 말자는 캠페인과 리본 만들기, 지난겨울 동안 벌어졌던 촛불 항쟁에 누구보다 열심히 참여하고 노동운동의 현장에도 힘을 보탰습니다. 누군가는 국정운영을 하는 대통령선거에 당의 지역 활동을 투표근거로 삼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비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대통령의 국정운영만 그럴듯하고 정작 국회의원과 시의원들의 지역 활동은 미비하거나 태만하다면 그것도 비정상이란 생각이 듭니다. 국정운영의 지역화란 측면에서 지역에서의 당 활동도 충분히 대통령선택의 근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진 출처 - 청소년이 직접 뽑는 제19대 대한민국 대통령 운동본부 블로그 누군가는 미래를 위해 진보정당에 투표하자고 했고, 또 누군가는 그럴듯한 이유를 들며 거대 야당 후보의 당선을 위해 언제나 그랬듯이 진보정당의 양보를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미래’라는 추상적인 가치보다는 정의당의 과거 활동을 보고 대한민국의 현재를 위해 정의당 심상정 후보에게 투표했습니다. 한국의 진보정당에 투표하는 유권자가 제1야당에게는 5년마다 타 먹는 정기적금도 아닐 터인데 선거 때만 되면 어김없이 정권교체를 위해 자당 후보에게 양보하라는 꾸준한 염치없음도 귀에 담지 않았습니다. 한국YMCA전국연맹에서 19세 미만 청소년 5만여 명을 대상으로 한 투표결과에서 심상정 후보는 1만 8,629표(36.02%)를 얻어 문재인 대통령과 불과 3% 차이로 2위를 차지했습니다. 오늘의 분투가 계속 이어진다면 진보정당의 미래도 밝으리라는 것을 확인해 주는 소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당원은 아니지만, 그간 부족한 선거자금으로 헌신적인 선거운동을 벌여왔던 정의당 당원들과 안보와 경제, 복지, 인권 등에 있어 진보의 가치를 제대로 각인시켜준 심상정 후보에게 고마움의 뜻을 전합니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5 | 추천: 1
신혜연/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재학생 연 10억 원.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에서 부양의무제를 폐지하는 데 드는 비용이다. 부양의무제는 기초생활수급자를 거르는 기준 중 하나다. 수급권자가 되려면 자신의 부양의무자(자녀 및 그들의 배우자)가 부양능력이 없음을 입증해야 한다. 만일 부양의무자 중 한 명이라도 소득과 재산이 일정 수준을 넘어가면 수급권이 박탈된다. 이 제도 때문에 2010년 기준으로 117만 명이 기초생활수급자 심사에서 탈락했다. 연락이 두절된 자녀를 둔 노인들이 주로 피해를 봤다. 일부러 부양책임을 미루는 경우가 아니더라도, 부양의무자 소득인정액 기준이 너무 낮은 탓에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남을 돌볼 처지가 아닌 형제가 경제활동을 한다는 이유로 가난한 가족들이 ‘연대책임’을 지기 일쑤였다. 워낙 문제가 많은 제도다 보니, 부양의무제 폐지는 선거 단골공약이 된 지 오래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지난 대선에서 공약으로 내걸기도 했다. 물론 그가 내세웠던 다른 공약들(기초연금, 반값등록금 등)과 마찬가지로 실천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이번 대선에 나선 후보들도 각기 부양의무제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상황은 고무적이다. 문재인, 심상정, 유승민 후보는 부양의무제를 폐지하겠다고 확답했고, 안철수, 홍준표 후보는 단계적 도입을 내걸었다. 대선 후보들이 하나같이 부양의무제 폐지를 추진하겠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들여다보면, 아직 갈 길이 멀다. 시민단체 연합인 ‘부양의무자 기준 폐지행동’이 각 후보에게 받은 답변서에 따르면 문 후보는 국민적 동의와 재원 확보, 도덕적 해이를 이유로 ‘단계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안 후보도 정부 지원으로 인해 가족들이 노인을 부양하는 경우가 줄어들 수 있다는 우려를 드러내며 부양의무자 범위 축소 및 부양능력 기준 완화 등 우회로를 제안했다. 홍 후보는 ‘효에 대한 전통적인 가치관이 흔들릴 수 있다’고 유보적 의견을 드러냈다. 즉각적인 폐지를 말하는 후보는 없었다. 부양의무제 폐지 공약을 명확히 밝히고 당선된 후보자도 이미 공약을 뒤엎은 전례가 있다. 누가 당선되든 부양의무제 폐지는 매우 느린 걸음으로 진척될 게 뻔하다. 작년 1월, 4월 총선을 앞두고 장애인 단체와 빈민 단체가 모여 ‘장애등급제·부양의무제 폐지당’을 만들었다. 사진 출처 - 비마이너 후보들의 미적지근한 입장에 반해, 부양의무제 폐지는 시급하고도 중요한 과제다. 타당성, 민주성, 정의라는 세 가지 관점에서 살펴보자. 여기서 타당성은 경제에서 말하는 효율성과는 다른 개념이다. 효율성이 비용 대비 효용을 측정한 수치인 반면, 타당성은 ‘사안의 중요성’을 중심으로 비용 투입 여부를 검토한다. 효율성은 이윤 극대화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에서 활용하기 적합하다. 다시 말하면, 민주주의 국가에서 쓰기 적합한 지표는 아니다. 예컨대 한정된 예산을 교육 예산에 투입할지, 토목 사업에 투입할지 결정할 때는 효율성이 아니라 타당성을 따져야 한다. 교육과 토목 사업을 ‘일자리 창출 효과’, ‘세수 증대’ 등 항목으로 나눠 경쟁시킬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단기적 효용이 입증되지 않는다고 해도 사회적 합의를 거쳐 가장 긴급하고 중요한 부분에 예산을 투입하도록 하는 게 타당성이다. 부양의무제 폐지는 타당성이 있는 공약이다. 작년 10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국가별 GDP 대비 사회복지 지출 추산치 비중에서 한국은 10.4%로, 35개 회원국 중 34위를 기록했다. 한국보다 사회복지 지출 비중이 적은 국가는 멕시코뿐이다. OECD 평균은 21%였다. 복지 예산을 늘릴 필요가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지출 여력도 있다. 한국은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이 30%에 불과해 일본(245%)과 미국(123%)에 비하면 한참 낮다. OECD를 비롯한 국제기관들이 한국에 재정 확대를 조언하는 배경이다. 당장 올해 추가경정예산으로 배정된 금액이 11조다. 일부 후보들은 복지 공약만 보면 ‘포퓰리즘’을 연발한다. 그 뜻을 해석하면 이렇다. ‘우매한 군중들을 선동해 도입한 제도이니, 복지 정책은 정당성이 없다.’ 보수언론은 복지 공약을 ‘매표행위’로 단정 짓고 ‘표’퓰리즘이라는 표현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정말 그럴까? 정치는 자원의 분배과정이다. ‘1인 1표’로 작동하는 정치체제를 이용해 대다수 중, 저소득층 국민에게 도움이 되는 정책을 펴는 건 민주주의의 본래 뜻에 맞는 일이다. 포퓰리즘은 ‘민중주의’라는 뜻으로, 데모크라시와 어원상 의미가 같다. 소수 부자에게만 유리한 정책을 펴는 정부는 민주적이지 않다. 한국이 꼭 그렇다. 국회예산정책처가 2014년 OECD 자료를 분석해보니 한국은 조세정책을 통한 빈곤율 완화 효과가 2.4%포인트에 그쳤다. 프랑스(26.8), 독일(23.5)과 10배 정도 차이가 난다. 한국 빈곤율은 세금을 거두기 전 17.3%로 OECD 국가 중 가장 낮았지만, 세금을 걷은 후에는 14.9%로 OECD 국가 중 가장 높았다. 국가가 양극화 해소를 위해 하는 일이 없다는 뜻이다. 부양의무제 폐지 없이 민주주의를 말하기 어려운 이유다. 보건복지부가 만든 맞춤형 기초생활보장제도 홍보 리플렛. 박근혜 정부는 맞춤형 기초생활보장제도가 부양의무제 기준을 대폭 완화했다고 홍보했다. 사진 출처 - 보건복지부 부양의무제 폐지는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각자에게 합당한 몫을 나눠주는 것’이 정의라고 말했다. 세계시민사회 차원에서 보면 모든 인간이 천부적 인권을 보장받는 것이 정의다. 국가 차원에서 보면 모든 국민이 시민권을 보장받는 게 정의다. 영국 사회학자 마셜은 ‘사회에서 당당한 구성원으로 살아갈 권리’를 뜻하는 ‘사회적 시민권’을 현대 사회의 시민권으로 규정했다. 현대 국가는 사회적 시민권을 지키기 위해 사회보장제도를 운영한다. 한국에서 2000년부터 시행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는 IMF 금융위기라는 충격 이후 ‘최소한의 경제 안전망’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돼 생긴 복지제도다. 당시 뉴스에는 중산층 가족이 하루아침에 거리로 나앉는 모습이 드물지 않게 등장했다. 오갈 곳이 없어 길거리에 텐트를 친 4인 가족에게 시민권은 없었다. 이를 지키기 위해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생겼다. 2016년 기준으로 정부가 책정한 4인 가족 최저생계비는 170만 원. ‘정의’를 말하기에는 부끄러운 수준이다. 이나마도 지키려면 부양의무자 기준을 피해가야 한다. 부양의무자 폐지는 한국 사회 복지논쟁의 축약본이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라는 최하위 사회안전망의 구멍을 메우자는 논의다. 이에 대해 ‘세금 낭비’, ‘포퓰리즘’, ‘부정 수급 등 도덕적 해이 우려’라는 비판이 나온다. 부양의무제 폐지를 말하는 대선 후보들 역시 이런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해 ‘단계적 추진’을 말한다. 세 가지 비판은 각기 타당성, 민주성, 정의 측면에서 비판받아 마땅하다. 이에 대해 ‘예산을 줄일 방법이 있다’, ‘소득심사를 통해 단계적으로 추진하겠다’, ‘부정수급을 감시해 공정하게 하겠다’는 논리로 맞서는 건 프레임에 휘말리는 꼴이다. 다음 정권을 누가 잡든, 부양의무제 폐지를 시작으로 모든 복지 공약에서 이 같은 비판에 직면할 것이다. ‘돈이 들지만, 꼭 필요한 일이다. 돈 되는 사업만 하는 건 정부가 아니라 기업이다’, ‘대다수 국민을 위한 일이고, 그런 일을 하라고 있는 게 정치다’, ‘지금 불공정한 대우를 받는 건 117만 명의 수급권 박탈자들이다’라고 정면 대응하는 걸 권한다. 연 10억 원. 큰돈이 맞지만, 한 국가 국민의 인권과 바꾸기에는 적은 돈이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7 | 추천: 1
손상훈/ 교단자정센터 원장 불교 총무원장을 만나면 득표에 도움이 될까. 현재는 아니다. 오히려 만나는 횟수만큼 표가 떨어질 것이다. 만약 오차범위 내 접전이라면 더 그렇다. 사회과학적인 세밀한 분석은 아니다. 시민의 한사람으로 상식의 잣대로 지켜봐온 감이다. 조계종 사찰에서 거의 매년 수십억 원의 국고보조금 횡령 사건이 일어나고, 생떼를 써 가며 대기업에 보상비를 요구하는 조계종 총무원 언저리에 대선후보가 찾아가는 것을 좋아할 불교신자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 부정부패를 일상화하고, 종교권력의 상위 1%가 자기 밥그릇을 챙겨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극소수 종교 세력의 분리수거가 필요하다. 특히 국고보조금을 자기 지갑처럼 사용하거나 도박 등 유흥비로 탕진하는 종교지도자에게 대법원의 양형기준도 바꾸고 검찰의 종교비리 조사도 더 엄정한 기준이 마련되어야 한다. 왜 불교계의 국고보조금 횡령사건은 거의 매년 일어나는데 대부분 불구속 수사이고 솜방망이 처벌이 반복될까. 또한 2013년 경주지청은 총무원장과 같이 도박을 했다고 자수를 했는데도 제대로 수사하지 못하고 검찰은 스스로 궁색해졌을까. 현재 진행 중인 재단법인 선학원 이사장의 반복적인 성추행 사건 등 종교계에 반복되는 부끄러운 일이 근절되려면 검찰의 엄정한 잣대와 국민을 설득할 수 있는 조사결과가 나와야 한다. 교비횡령으로 C대학 총장은 입건되었는데, 같은 사안인 동국대 총장의 교비횡령 사건은 6개월이나 만지작거리고 있는 성남지청의 모습을 대선후보에게 묻고 싶다. 지난 3월30일. 성남지청 앞에서, 동대총장 사퇴를 주장하며 50일 단식한 김건중 전 동국대부총학생회장이 기자회견문을 읽고 있다.(왼쪽에서 네 번째) 사진 출처 - 불교닷컴 건강한 정신을 갉아 먹는 부패한 극소수 종교권력에 대해 어떻게 분리수거해 나갈 것인지, 고액의 정치 후원금이 들어오지 않더라도 종교관련 사건에 대해 검찰과 재판부가 엄정한 기준과 절차를 가지고 국민들을 납득시키게 할 것인지 이런 어리석은 질문을 해 보고 싶다. 그래서 상상해 보고 질문해 본다. 대통령선거 후보들이 종교계를 향해 내는 공약이 하나도 없는 선거는 불가능할까. 아니 언제 가능할까. 부처님오신날 봉축법요식 같은 특정종교행사에 대권후보들이 참석하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되는 것은 어떨까. 교회나 성당에 방문하지 않는 것도 포함해서. 만약 종교시설에 가지 않는다면 그 시간에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들을 만나고 이들을 위한 예산확보 방안이나 공약을 세우는 일이 더 늘어난다면 어떨까. 부활절이나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하는 의미가 더 기분 좋아질 것 같다. 특히 종교를 갖고 있지 않은 국민들은 더 행복해 질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교 총무원장 앞으로, 전통문화예산을 명분삼아 먼저 만나러 가는 후보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또한, 국회의원의 경우 정치후원금의 늘리기에는 도움이 될 것이기에 신도가 많은 대형 사찰이나 총무원장을 만나러 갈 것이다. 그러나 지난 총선 직전에 서울광장에서 조계종이 든 피켓과 현수막을 꼭 기억하고 만나길 바란다. 불교인터넷언론을 탄압하고, 광고를 끊게 만들어 생존을 위협하는 조계종 총무원에 대해 꼭 기억하고 총무원장을 만나길 당부한다. 그리고 기록하고 평가해야 한다. 조계종한전부지 환수위원회의 더민주 총선필패. 피켓 사진 출처 - 불교포커스 최근 조계종 총무원 안팎 핵심 관계자들은 유력한 대선 후보 캠프에 양다리로 인적관계를 만드는데 많은 애정을 쏟고 있고 성과를 내고 있다고 한다. 당선 가능성이 높은 후보그룹에 모두 인간관계를 만들었고 누가 당선되더라도 조계종이 원하는 공약은 챙겨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분위기라고 한다. 이런 조계종 총무원과 중앙종회 등 소위 중앙종무기관들의 태평성대를 깨는 주장과 발언을 조계종 선원수좌회와 적명스님이 하고 있다. 승려대회를 열자고도 한다. 1994년처럼 아래로부터 ‘혁명’을 하자는 뜻으로 이해된다. 찻잔속의 태풍이 될지 실패한 민란이 될지 모르는 일이지만 앞으로 지켜볼 일이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9 | 추천: 1
- 우리 삶을 바꿔줄 진짜 민주주의로 가자! 이현정/ 꽃씨네농작물 농부 불과 몇 달 만에 세상이 바뀌었다. 박근혜와 이재용이 피의자 신분으로 구치소에 갇혔다. 김기춘 등 그 부역자들도.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정치경제 권력을 휘둘렀던 인물들이다. 촛불 혁명이다. 광장의 힘이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는 광장민주주의의 힘이다. 이로 인해 급작스럽게 장미 대선이 시작되었다. 정권교체다 시대교체다 말이 많다. 그러나 난 솔직히 우려된다. 과연 야당으로 정권교체가 된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더 좋아질 수 있을까? 촛불 혁명으로 불리워지는 광장민주주의. 이제 일상에서 구현되어야 한다. 정권교체만으로는 어렵다. 지지율 1, 2위 후보들이 내놓는 정책과 주변 사람들을 보면 어려운 얘기다. 시민들의 힘, 광장의 힘이 모이는 민주주주의가 필요하다. 우리의 일상을 과거와는 다른 것으로 바꾸는 그런 민주주의 말이다. 요즘 유시민 작가가 많이 회자된다. 그가 지금 이 시대에 던지는 화두는 ‘국가와 민주주의’였다. 어려운 주제다. 그런데 방송에서 예능 형식으로 편하게 던져진다. 당연히 시청자들에겐 쉽게 다가온다. 그는 시민 권력이 중심이 되고, 각 권력의 제한, 분산, 상호견제 장치를 두는 민주주의 제도를 강조한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과연 시민 권력이 중심일까. 언제나 정치인 바라기다. 지금 대선 국면도 마찬가지다. 결국 시민들의 투표로 대통령이 선출되지만, 거기까지 일 뿐이다. 좀 더 한다면 광장에서 집회*결사의 자유를 갖는 것뿐이다. 우리에게 행복추구권, 평등권, 노동권 같은 기본권을 되찾아야 한다. 새로 만들자는 게 아니라, 헌법에 있는걸 재확인하고, 되찾으면 된다. 시민권력이 주인 노릇을 하자. 결국 일상 속에서 내 삶의 민주주의를 되찾자. 나와 가족, 우리 공동체의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되찾자. 나와 우리의 평등을 얘기하자. 직업, 재산, 권력 그리고 피부가 다르다고 해서 차별하지 말자. 우리의 노동권을 얘기하자. 땀 흘려 일하는 노동을 귀하게 여기고 대우해주자. 그리고 다른 이들의 비정규직 노동의 어려움을 공감하고 함께 바꾸자. 위 얘기는 현행 헌법에서 모두 다루고 있다. 바쁜 일상에 이 헌법 정신을 모두 잊어버리고 살았을 뿐이다. 더불어 살면서 제대로 배울 기회도 없었다. 이제 우리가 직접 해보자. 헌법 읽기와 헌법정신 실천모임을 지역에서, 마을에서 만들자. 함께 떠들고 배우자. 그리고 나와 우리 주변부터 시민 권력이 주인되는 세상을 위해 하나씩 하나씩 바꾸자. 필자도 낯선 곳 제주 중산간마을로 내려온 지 2년이 조금 지났다. 조금씩 적응을 해가고 있다. 요즘엔 콜라비*브로콜리 농사를 끝내고, 새로운 농산물을 심으면서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러면서 내가 사는 곳 주변에서도 위와 같은 모임을 시작해야겠다. 혹 이 글을 읽는 분 중에 제주 서쪽에 사는 분들에게 소개도 해주셨으면 한다. 이제 우리 삶을 바꿔줄 진짜 민주주의로 가자. 조금씩 하나씩 바꿔보자. 작은 곳에서 더 많은 것을 나누고 더 연대하는, 그래서 개인의 이익과 공동체의 이익이 조화로운 행복한 마을과 지역을 꿈꾸자. 이게 87년 체제 이후의 새로운 진짜 민주주의였으면 한다. 마지막으로 독일 프리드리히 에버트의 말이 떠오른다. “민주주의자 없이는 민주주의는 있을 수 없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7 | 추천: 1
이동화/ 아디(Asian Dignity Initiative, 아시아인권평화디딤돌)활동가 미얀마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라킨주 북부지역, 그곳에는 로힝야(Rohingya)라고 불리는 민족이 살고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이슬람교를 믿는 무슬림들이며 미얀마 내 수많은 소수민족 중 하나이다. 슬프게도 이들을 설명하는 또 다른 수식어가 있는데, 그건 ‘세상에서 가장 박해를 받는 무국적 난민 소수민족’이라는 것이다. 로힝야 사람들은 미얀마의 군사독재시절부터 심각한 인권침해에 노출되었는데, 최근 미얀마 군에 의해서 수 백 명이 학살당하고도 7만 명 이상의 로힝야 사람들이 삶의 터전에서 내쫓긴 너무도 심각한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의 발단은 5개월 전으로 거슬러간다. 2016년 10월 9일, 미얀마 라킨주 국경지역 초소가 괴한들에 의해 공격을 받았고 이 과정에서 미얀마 경찰 9명이 사망했다. 미얀마 정부는 제대로 된 조사도 없이 사건의 배후를 로힝야 무장 세력으로 단정하고 대대적인 로힝야 토벌작전을 시작했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적개심을 품은 미얀마 군인들은 범인색출을 빌미로 마을에 침입하여 마을을 지옥으로 만들었다. 아디가 올해 2월, 방글라데시 난민캠프에서 만난 피해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미얀마 군은 헬리콥터를 타고 마을 위에서 주민들을 조준사격하며 살해했고, 여성을 성폭행하면서 2살 난 아이를 땅에 내동댕이쳐 살해했다고 증언했다.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피해생존자 쏨쏠님. 사진 및 영상촬영은 본인의 동의하에 진행되었습니다. 사진 출처 - 아디 또한 마을의 건장한 청년들을 강제로 끌고 가서 고문을 하거나 살해하였다. 가족 내 남자들이 군인에 의해 끌려간 이후 돌아오지 못한 경우도 허다했다. 피해생존자들은 실종된 가족들이 모두 살해 되었을 거라 여기고 있다. 법과 질서는 사라졌고 오직 폭력과 공포만이 가득했다. 피해증언자들은 하나같이 미얀마 군인들이 로힝야 사람들을 사람취급조차 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3개월 동안 진행된 군사작전으로 로힝야 사람들은 견디지 못하고 맨몸으로 국경을 넘어 방글라데시 난민이 되었다. 최악의 인권탄압 사건을 맞아 국제인권단체와 국제사회는 미얀마 정부에게 즉각적인 군사작전 중지를 요구하며 아웅산 수치가 이끄는 미얀마 민간정부를 압박했지만, 미얀마 정부는 무책임하고 실망스러운 반응을 내놓았다. 공정하고 객관적인 조사를 통해 가해자를 처벌하고, 피해자를 보호할 책임이 있는 미얀마 정부는 도리어 군사작전으로 인한 로힝야 주민의 피해를 인정하지 않고, 미얀마 라킨 주 내 로힝야 주민의 이동을 제한하며 외부로부터 접근도 막았다. 정부의 조직적 방해와 탄압으로 인해 로힝야 주민들의 정확한 피해 규모는 파악이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피해생존자의 증언을 통해 2017년 2월 유엔은 로힝야 인권침해 보고서를 제출했고, 3월 유엔인권이사회에서는 이양희 유엔인권보고관이 로힝야 사람들의 인권참상을 담은 보고서를 발표했다. 또한 3월 16일에는 미얀마 로힝야족 문제해결을 위한 자문위원회 수장인 코피 아난 전 유엔사무총장이 미얀마 양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로힝야족에 대한 ‘범죄’에 대한 독립적이고 공정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방글라데시 난민촌에서 만난 로힝야 피해생존자들의 실상은 절망적이었다. 순식간에 7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피난 와서 캠프촌을 생성하였기에 모든 것이 부족한 상황이다. 로힝야 사람들이 다시 돌아갈 마을도 집도 사라졌다. 당장의 죽음의 공포는 막막한 생존의 공포로 바뀌었다. 긴급구호가 절실하지만 도움의 손길은 보이지 않았다. 아디가 만난 피해생존자들도 공포의 기억들을 끄집어내어 이야기했지만 현재의 어려움도 많이 토로했다. 안타까운 상황이다. 미얀마 군에 의한 군사작전은 중지됐지만 인권탄압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미얀마 정부는 여전히 사건자체를 부인하며 로힝야 주민들을 미얀마국민으로 인정조차 하지 않는다. 인접국인 방글라데시조차 난민의 유입을 꺼려하고 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이자 버마민주화운동의 상징이었던 아웅산 수치여사는 해당사건에 침묵하고 있다. 미얀마 정부와 국제사회가 계속 침묵한다면 철저하게 고립된 로힝야 사람들의 어려움은 계속될 것이다. “제발 우리를 기억해 달라” 피해생존자 중 한 명이 증언 말미에 던진 덤덤하지만 처절한 외침이 가슴에 울린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8 | 추천: 1
이상재/ 대전충남인권연대 사무국장   초등학교 2학년이 되어서 뭍에서 살기 전까지는 경남 남해안의 섬에서만 살았습니다. 집안 사정 때문에 한 곳에서만 산 것이 아니라 세 군데 섬을 옮겨 다녔는데 그중에서 다섯 살 무렵에 살았던 두 번째 섬에 관한 희미한 기억입니다. 그 섬은 다른 두 곳의 섬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크기가 작았는데 전국지도는 물론이고 경남의 지도에도 잘 나오지 않을 정도로 작았습니다. 가구 수는 우리 집을 포함해서 달랑 두 가구였습니다. 집이 한 채 더 있기는 했는데 그 집은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라서 꼬마들의 놀이터 역할을 했습니다. 그 섬에 살았던 총인구수는 우리 집에 3명, 너무 오래전 일이라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지만, 아이들이 많았던 이웃집에 6~7명으로 섬에 사는 모든 사람 수가 10여 명 정도밖에 되질 않았습니다. 섬이 작다 보니 전기는 당연히 들어오지 않았고, 가끔 식수도 모자라서 이웃한 큰 섬에서 커다란 통에 물을 실어오기도 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1970년대, 크기도 작고 거주하는 사람도 적었던 그 섬에 학교가 있었습니다. 이웃집의 자녀 2명만 국민(초등)학교에 다니는 연령대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 아이들을 위한 학교가 그 섬에 있었던 겁니다. 희미한 기억 속의 그때 그 학교 교실은 3-4평 정도 크기였고 정식학생은 2명뿐이었지만 취학연령이 되지 않은 저와 이웃집 아이들도 교실 뒤편에서 수업을 같이 들었습니다. 당연히 수업내용은 이해되지 않았고 지루하기도 했겠지만, 저와 이웃집 꼬마들은 오전 수업이 끝날 때까지 잠자코 앉아있었습니다. 그렇게 했던 이유는 수업이 마치면 선생님께서 꼬마들에게 누런색 종이 포장지에 담겨있던 건빵을 나눠 주셨기 때문입니다. 두 명만 수업을 듣는 삭막한 수업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선생님의 시도와 군것질할 작은 점방 하나 없는 섬에서, 단것에 굶주려 있던 꼬마들의 이해관계가 적절하게 맞아떨어진 풍경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몇 년 후 뭍에서 학교에 다닐 때 저를 알아본 그때 그 선생님과 반갑게 해후를 하기도 했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저의 유년시절 기억을 불러내온 계기는 최근에 지역 언론을 통해 접한 기사 하나 때문이었습니다. 충남교육청은 충남 보령시의 작은 섬 녹도의 분교가 2006년 학생 수 감소로 폐쇄된 이후 10년 만에 순회교육 학습장 형식으로 다시 열기로 했다고 합니다. 녹도에 사는 올해 초등학교 유일한 입학생이자 재학생인 류찬희 군을 위해 충남교육청에서 어려운 결정을 해준 것인데 폐교됐던 지역에서 학교 교육이 다시 시작된 것은 전국 최초의 일이라고 합니다. 녹도의 주민들은 마을잔치를 열어 10년 만에 재개된 마을에서의 공교육을 환영했다고 합니다. 교육은 물론이거니와 세상 모든 것이 효율성과 경제성만을 따지는 세태에 보기 드문 풍경이라 기사를 읽는 내내 마음이 흐뭇했습니다. 이민철 청파초등학교장이 지난 3일 호도분교 녹도학습장에서 류찬희군(오른쪽)과 옆 섬마을 호도분교 고가은양의 입학허가 선언을 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충남교육청 이 기사를 읽고 나서 생각의 끈은 지난 연말연시에 있었던 대전의 변두리 학교인 기성초등학교 길헌분교의 통폐합 논란에까지 닿았습니다. 길헌분교는 전교생이 22명에 불과한 소규모 학교입니다. 지난 연말 대전교육청은 학생 수가 적어서 두 학년씩 같이 수업을 진행하고, 조리실이 따로 없어 급식도 본교에서 가져다 먹는 어려움이 있다면서 길헌분교를 폐쇄하고 본교와의 통합을 추진했습니다. 하지만 길헌분교 학부모 18명 전원은 대전교육청이 통폐합 기준인 학부모 75% 이상의 동의를 얻지 않고 일방적으로 통폐합을 추진한다면서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학부모들은 도심의 큰 학교가 싫어서 일부러 길헌분교에 아이를 보낸 분도 있고 통합되면 먼 기성초등학교까지 통학의 어려움도 상당하다고 합니다. 또한, 학생과 학부모의 의견은 무시하고 무리하게 통폐합하는 것이 교육부로부터 지원받는 인센티브 30억 원을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니냐는 의혹도 주장했습니다. 학부모와 지역 시민단체가 통합반대운동을 펼친 결과, 지난 1월 대전시의회 교육위원회에서 기성초 길헌분교장 통폐합을 다룬 대전시립학교 설치조례 일부 개정 조례안은 학부모와 주민의 의견수렴 부족 등 절차상 하자를 이유로 부결됐습니다. 한 명의 학생을 위해 10년 만에 폐교를 되살린 충남교육청과 학생, 학부모 모두가 반대하지만 22명의 학생을 강제로 본교와 통폐합하려고 한 대전교육청의 정책추진은 많이 다릅니다. 몇 달여 사이에 공교롭게도 이웃한 두 교육청에서 소규모 학교에 대해서 전혀 상반된 모습이 나온 것이라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1970년대와 40년이 훌쩍 지나버린 현재를 비교해보면 각종 경제발전 수치에서 대한민국은 비약적인 성장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커진 빈부 격차와 소득 격차, 그리고 도농 간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실질적 차이는 발전의 과실을 어떤 특정세력과 지역만이 가져간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게 합니다. 대한민국의 섬에 사는 주민들에게 1970년대에는 가능했던 학생 한두 명도 학교를 갈 수 있게 책임지는 공교육이 2017년에는 가능하지 않다면 그런 발전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31조는 교육권에 대한 권리와 의무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모든 국민은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고, 국민은 자녀에게 의무교육을 받게 할 의무가 있다는 내용입니다. 자녀가 의무교육을 받게 하는 것이 대한민국 국민의 의무라면 국민이 어디에 거주하고 있더라도 교육서비스를 제공해야 할 의무가 국가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해 녹도로 이사 온 류찬희 군은 섬에 학교가 없어 이웃 섬마을 학교인 청파초 호도분교로 매일 배를 타고 통학해야 할 처지였다고 합니다. 마땅한 통학수단이 없자 찬희 부모님은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지난해 충남교육청에 “아무리 어려워도 가족은 함께 해야 하며, 의무교육 대상자인 찬희를 국가가 책임져 달라”고 요구했다고 합니다. 이에 충남교육청은 재정적 어려움과 효율성 보다는 한 학생도 포기하지 않는 교육행정이 평등한 교육의 출발선이라며 어려운 논의 끝에 녹도에도 학습장을 여는 결정을 내렸다고 합니다. 한 명의 초등학교 입학생을 위해 10년 만에 학습장을 연 충남교육청의 결정이 22명의 초등학생과 그 학부모 모두가 반대하는데도 폐교를 추진한 대전교육청의 교육행정보다 훨씬 인권적이고 헌법 가치에 충실한 교육행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6 | 추천: 1
송채경화/ 한겨레21 기자   설 연휴를 마치고 첫 출근날. 점심을 먹으려고 모인 여성 동료들 사이에서 명절 스트레스에 대한 얘기가 쏟아졌다. 명절 내내 설거지 하느라고 허리가 휠 것 같았다거나, 열심히 일하는데 낮잠 자고 있는 남자들을 보면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는 얘기는 지겹게도 반복된다. 누구네 시댁은 시골인데 남자들에게만 밥상을 차려주고 여자들은 비좁은 부엌에서 따로 밥을 먹는다더라는 얘기까지 나왔다. 시대가 바뀌어도 시댁 풍경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나는 예외였다. 가까운 곳에 사는 시어머니는 설 음식을 간단하게 준비할 테니 굳이 전날에 와서 도와줄 필요가 없다고 했다. 설날 아침을 먹은 뒤에는 시아주버니가 설거지를 하겠다고 나섰다. 점심에는 남편이 설거지를 했다. 결과적으로 이번 설에는 잔심부름 외에 공식적인 주방 일에서 해방됐다. 이런 얘기를 하니 여성 동료들 사이에서 부러움의 감탄사가 나왔다. 시댁이 남녀평등을 실천하는 훌륭한 가정으로 비쳐진다는 것에 대해 괜히 우쭐해졌다. 그때 동료 한 명이 이런 얘기를 했다. “명절 음식은 결국 시어머니 혼자 다 했겠네.” 아뿔싸. 그랬다. ‘시어머니의 노동’을 잊고 있었다. 묵묵하게 장을 보고 재료를 손질해 차례 음식을 준비한 것은 다름 아닌 시어머니였다. 아들들이 설거지를 하는 동안에도 쉴 틈 없이 남은 음식을 정리하고 자식들 집에 싸 보낼 음식을 분류했다. 나조차도 그런 시어머니의 노동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우쭐했던 마음이 급격하게 부끄러움으로 변했다. 단지 며느리 한 명을 주방 일에서 해방시켰다고 남녀평등이 실천된 것은 아니다. 뒷감당은 결국 여성인 시어머니의 몫이었다. 시어머니는 대학을 졸업한 뒤 교편을 잡다가 결혼과 동시에 전업 주부가 되었다. 시어머니의 노동으로 시아버지는 직장에 전념할 수 있었고 세 명의 자식은 잘 자랐다. 나를 포함한 가족들은 그런 시어머니의 노동을 지금껏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해왔다. 시어머니는 원래부터가 집안을 깨끗이 치우고 손맛이 깃든 요리를 하고 자식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바라보며 보람을 느끼는 존재라고 여겼다. 그런데 만약 그런 시어머니에게도 ‘아내’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모든 집안일을 감당해주고 아이를 키워주고 바깥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누군가가 있었다면? 교사 일을 계속 할 수도 있었을 것이고 아니면 적성에 맞는 새로운 일을 찾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시어머니에게도 무한한 가능성이 있었다. 그 옆에 ‘아내’가 있었다면. 우리는 왜 지금까지 그런 상상은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걸까? 사진 출처 - 한겨레 호주의 저널리스트이자 정치평론가인 애너벨 크랩이 쓴 책 <아내 가뭄>은 이렇게 말한다. “여자에게도 아내가 필요하다”고. 여성의 사회 진출은 늘었지만 여전히 리더로서의 여성이 부족한 이유에 대해 저자는 이렇게 분석했다. “주당 70시간 근무가 성공의 열쇠가 되는 직업군에서 아내가 있다는 것이 어째서 지랄 맞게 유용한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따라서 (아내를 가질 확률은 현저히 낮고 그 자신이 아내가 될 확률은 월등히 높은) 여성들이 이러한 회사의 높은 자리에 오르는 빈도가 남성들 근처에도 못 미치는 이유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시어머니의 시대에는 오로지 여성이 아내의 역할을 강요당했다. 그러나 맞벌이 시대인 지금은 서로가 서로의 아내 역할을 해야 한다. 하지만 그 일은 여전히 지독히도 힘들다. <아내 가뭄>에는 워킹맘들이 겪는 어려움뿐 아니라 워킹대디들이 집안일을 위해 직장의 양해를 구할 때 부딪치는 장벽도 다루고 있다. 육아와 가사 노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는 남성을 사회가 ‘사회적 패자’ 취급을 하는 것, 전업주부 남편이 받는 차별과 사회적 폭력 등도 함께 다룬다.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남성만 바뀌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바뀌어야 한다. 집안일을 아내에게 맡긴 채 야근을 하는 남자에게 “역시 남자가 일을 더 잘하지”라고 말하는 것, 칼퇴근을 하고 어린이집으로 달려가는 여자를 두고 “역시 여자는 이래서 안 돼”라고 생각하는 일 따위를 그만 둬야 한다. 남자에게도 육아와 집안일을 위해 일찍 퇴근할 수 있는 권리를, ‘아내 역할’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 그래야 함께 살 수 있다. 여자에게도 아내가 필요하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7 | 추천: 1
이동화/ 아디(Asian Dignity Initiative, 아시아인권평화디딤돌) 팀장   시리아 이야기를 하려합니다. 2011년 3월 ‘쟈스민 혁명’, ‘아랍의 봄’으로 불리었던 중동지역에서의 민중봉기는 시리아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수십 년 동안 시리아를 독재했던 알 아사드 정권, 그 독재정권을 향해 시리아 민중은 거리로 나와 독재정권의 퇴진을 외치며 다른 중동지역 국가처럼 정권교체를 희망했습니다. 하지만 독재정권은 자국민에게 화학무기를 사용하였고,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였으며, 체포, 고문, 감금, 살해 등의 방식으로 잔혹하게 탄압하였습니다. 계속되는 탄압에 시리아내 민병대와 주변 국가들의 군벌들, 다양한 세력의 군사조직이 반군이라는 깃발아래 모여 독재정권의 정부군과 전쟁을 벌였고, 시리아 각 지역에서 일진일퇴하며 내전은 심화되었습니다. 거기에 잔혹한 민간인 학살과 테러를 자행하는 IS도 시리아 내전에 개입하며 시리아를 둘러싼 전쟁은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됩니다. 이후 정부군을 러시아와 이란이 지원하고, 터키와 주변 아랍국가, 나아가 미국이 반군세력을 지원하면서 시리아 내전은 국제전 양상을 띄게 되며 시리아인들에게 시리아는 죽음의 땅이 되어 버렸습니다. 2016년 12월 30일 러시아와 터키의 중재로 정부군과 반군은 휴전에 돌입하였지만 여전히 정부군측의 공습과 산발적 교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2016년 10월 21일 유엔인권이사회 발표에 따르면 650만 명의 시리아 내부난민(Internally displaced)이 있고, 480만 명의 해외난민이 세계 각지를 떠돌고 있다고 합니다. 이들은 인접국인 터키에 270만 명, 레바논에 100만명 그리고 요르단에 66만명이 머무르고 있고, 수십만명이 유럽과 인근 아랍국가들, 아시아, 한국, 일본, 미국 등으로 목숨을 건 이동을 하고 있습니다. 2011년 시리아 사태가 발생했을 때 시리아 인구가 2300만 명이고 유엔이 발표한 난민수가 1130만명이니 전체 인구의 절반이 난민입니다. 재앙입니다. 또한 시리아인권관측소(Syrian Observatory for Human Rights)는 2016년 12월 현재 시리아 내전으로 사망한 인원이 31만 2001명에 이르며, 그 중 민간인 희생자는 9만 명, 어린이는 1만 6천명에 이른다고 하였습니다. 유엔시리아 특사인 스테판 데 미스투라씨는 2016년 4월 한 외교지와의 인터뷰를 통해서 시리아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는 40만명이 넘었을 거라고 전했고, 2016년 2월 민간단체인 시리아정책연구센터는 희생자를 47만명으로 추산하였습니다. 지구 한편에서 지옥의 모습이 펼쳐지고 있을 때 한국 정부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까요? 2016년 2월 영국에서 개최된 시리아 공여국 회의에서 한국 정부는 1200만 달러의 인도적 지원을 약속하며, 국제사회에서 책임 있는 중견국(?)으로 인도주의 외교를 브랜드화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시리아 사태 이후 한국 정부는 시리아 난민신청자 중 668명에게 인도적 체류 자격을 부여하고 3명을 난민으로 인정하였다고 발표하며 ‘인류애 귀감’이라고 자체 평가를 하였습니다. 참으로 낯 뜨거운 발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겠지만 2015년 하반기 시리아 출신, 주로 알레포 출신의 시리아 난민들은 무려 8개월 동안 인천공항 송환대기실에서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채 사실상 구금 되어 있었습니다. 이 사실은 국내 뉴스뿐만 아니라 CNN에서도 다룬 적이 있습니다. 다행이 국내 난민지원 단체와 법률가 단체에 의해 현재 난민인정 소송을 진행하면서 구금은 풀린 상황이지요. 또한 정부가 자랑삼아 이야기하는 인도적 체류허가란 것도 난민지위와는 달리 추방만 되지 않을 뿐 6개월마다 비자연장심사를 거쳐야 하고 건강보험 등의 혜택은 받을 수 없으며 단순노무직외의 직장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또한 2015년 12월 31일 기준 한국의 난민인정율은 3.8%이고 가족결합과 행정소송 승소건을 제외하면 1.9%에 불과합니다. 어디 나가서 난민관련해서 인류애를 이야기할 수 없는 최저 수준입니다. 또한 정부가 밝힌 인도적 지원도 일본의 지원금액의 1/10수준이고, 한국과 비슷한 수준의 경제규모를 가진 국가와 비교했을 때도 한참 떨어지는 금액입니다. 물론 2012년부터 한국 정부가 약속한 금액은 꾸준히 늘었다는 점은 다행스러운 점이지만 시리아에 인도적 지원을 담당하고 있는 유엔인도주의업무조정국(OCHA)의 자료에 따르면 한국 정부가 매년 약속한 금액이 제대로 다 납부되었는지, 어디에 사용되었는지 확인되지 않습니다. 유엔직원의 인터뷰에 따르면 미국 및 유럽, 아랍 국가, 한국 등이 약속한 금액을 제대로 납부하지 않아서 시리아 난민 지원사업이 매년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국제사회에서 생색내기용 약속일 경우가 많다는 것이지요. 사진 출처 - 쿠르디와 옴란 돌아와서, 시리아의 전쟁과 난민들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특히나 2015년 지중해 연안에서 잠이든 듯이 하늘나라로 간 쿠르디, 알레포 폭격에서 구조되어 얼굴이 피칠갑이고 먼지투성이였던 옴란의 모습은 전세계 많은 이들의 분노와 슬픔을 자아냈습니다. 앞서 밝힌 것처럼 시리아 전쟁의 해결책은 좀처럼 보이지 않고 전세계의 수많은 개인들은 무기력함을 느낍니다. 하지만 국가의 경우 안타깝고 무기력해서만은 안 됩니다. 전쟁을 막기위한 외교적 정치적 방법을 찾아보고 시리아 난민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고민하고 수용할 방법을 찾고 관련 자원들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것이 한국 정부가 스스로 밝힌 국제사회의 중견국(?)으로서의 자세이자 의무이기도 합니다. 시리아는 한국에서 수천 킬로 떨어진 먼 국가입니다. 어찌 보면 우리랑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도 1950년 전쟁을 겪었고 그 폐허 속에서 여기까지 성장하였습니다. 한국인의 노력도 있었지만 전쟁당시와 전쟁이후에 국제사회의 도움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한국정부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유엔인권이사회 이사국으로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본인이 약속한 인도주의 약속을 지키고 이 돈이 제대로 쓰여지고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개인들이 할 수 없는 영역의 일들을 해야 하고 그것이 정부의 존재이유이기도 합니다. 21세기 최대의 재앙을 막기 위해 외교적 수사속에서 면피하려는 모습을 버리고 유엔 회원국으로서, 인권이사국으로서, 국제사회의 중요한 역할자로서 의무를 다하길 진심으로 바라고 정부의 의무이행을 위해 한국의 시민사회도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안타까움고 무기력함을 넘어 고통으로 눈물흘리는 이들의 곁을 지키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7 | 추천: 1
이상재/ 대전충남인권연대 사무국장   지난 11월의 어느 주말에 있었던 일이다. 촛불집회에 가고 싶다는 중학교 2학년 딸아이를 데리고 부부가 함께 서울 광화문에 다녀왔다. 딸아이도 그랬겠지만, 꽤 오랫동안 집회에 나가봤던 우리 부부조차도 그렇게 많은 집회 군중은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박근혜 정부와 비선 실세의 국정농단에 분노해서 거리에 나왔음에도 대개의 시민들은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수많은 사람을 확인한 안도감인지, 아니면 흥겨운 집회 분위기에서 오는 승리감인지 모를 밝은 표정들 일색이었다. 버스를 타고 자정이 넘어 집에 도착했지만, 그냥 자기에는 집회에서의 흥분이 잘 가시지 않았다. 치과 진료차 집에 오셨다가 막내 아이를 봐주고 계시던 장모님도 고생했다며 가볍게 맥주 한잔을 하며 서로를 격려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가 광화문 광장에 있었던 세월호 농성장에까지 이르렀을 즈음 아내가 장모님께 조금은 느닷없는 질문을 했다. “엄마, 엄마는 아직도 죽은 언니와 오빠가 자주 생각나?” 이 질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처가의 아픈 가족사를 꺼내야만 한다. 아내가 아주 어렸을 때 처가에 불이 나서 아내의 오빠와 언니가 저세상으로 가는 슬픈 일이 있었다고 한다. 가족에게는 엄청나게 큰 사고였지만 당시에 아내는 너무 어려 기억이 전혀 없어서 그런지 연애 시절에도 나에게 비교적 담담하게 이야기를 해 준 사건이었다. 그날도 장모님은 세월호 사고 희생자 부모들의 이야기 끝에 나온 아내의 그 질문을 덤덤하게 듣고 있었다. 장모님은 대답하셨다. “그럼 항상 생각하지. 성당 갈 때마다 너희 부부와 손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지만 먼저 간 그 아이들을 위해서도 늘 기도한단다.” 40여 년이 흐른 세월 속에서도 먼저 간 처남과 처형을 위해 항상 기도하신다는 말씀이 무겁게 마음에 와 닿았다. 그리고 또 장모님은 말씀하셨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큰길로 못 다녔어. 아이들을 먼저 보낸 것이 늘 죄스럽고 부끄러워서 작은 골목길로만 다녔어…….” 장모님의 뜻밖의 말씀에 아내도 나도 한동안 다음 대화를 이을 수가 없었다. 아내는 처음 듣는 얘기에 장모님이 안타까웠던지 그런 생각하지 않으셔도 된다는 말끝에 눈시울을 붉히기까지 했다. 장모님은 참 밝고 활동적인 분이시다. 트로트 가요 중에 마음에 드는 것이 있으면 가사를 적어 외워서 부르는 노래가 꽤 있으며, 지역 합창단과 성당 활동도 열심히 하시고 동네일도 거의 꿰뚫고 있으시다. 그런 분의 내면에 우리 부부로서는 도저히 짐작도 못 할 슬픔이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자리 잡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새삼 ‘어머니’라는 존재가 자식에게 얼마나 커다란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 지난 11월 26일 서울 을지로에서 세월호 고래와 함께 광화문광장으로 행진하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국일보 한편 이제 2년이 지났을 뿐인 세월호 사고 희생자 부모들의 마음은 장모님의 그것과 비교해 얼마나 힘들었고 또 아팠을까를 짐작해본다. 혹시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의 심리상태도 그 사고에 대해 부모로서 아이들을 먼저 보낸 ‘부끄러움’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아려온다. 하지만 세월호 사고에 대한 ‘부끄러움’은 희생자 부모의 것이 아니라 당시 각종 부조리로 사고를 일으켰던 선박회사와 구조를 할 수 있었음에도 하지 못하고, 이제껏 진상조사를 위한 어떠한 적극적인 조치도 하지 않는 정부 당국의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연말을 넘어 새해로 넘어가고 있는 촛불집회의 기운이 세월호 진상규명에도 미치기를 염원한다. 11월 어느 주말 밤 시골 장모님께서 얘기해 준 ‘부끄러움’의 사연은 나에게 세상을 보는 또 한 가지 시선을 깨닫게 해 주었다. 부조리한 대한민국 현대사에는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떳떳하게 세상을 활보하며 다니고 그것과 상관없는 대다수의 민중은 창피함과 부끄러움을 느꼈어야 했던 시간이 상당수였다. 이번만큼은 촛불집회에서 많은 사람이 외치고 있는 각종 구호처럼 세상이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데까지 생각이 닿는다. 그래서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었던 위정자들에게 제대로 된 ‘부끄러움’을 알게 해 주었으면 싶다. “당신들은 큰길에 나설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들인가?”하고 말이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4 | 추천: 0
신혜연/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재학생   2012년,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의 여성대통령이 탄생했다. ‘준비된 여성 대통령’을 구호로 내건 박근혜 대선 후보는 TV토론회에서 보여준 부족한 말주변과 공약 실효성에 대한 의구심(그는 과감한 복지정책을 하되 증세는 없다는 모순된 주장을 펼쳤다)을 뒤로 하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리고 2016년, 국민의 80%는 그의 하야를 지지하고 있다. 최초의 여성대통령이 최악의 비리 대통령으로 남게 될 판이다. 박 대통령의 실패를 ‘여성의 실패’로 해석하고 싶지 않은 시민들은 박 대통령의 여성성을 아예 제거해버리는 전략을 택했다. 그가 아버지인 박정희 대통령의 이미지를 내세워 당선됐고, 군사독재 시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켜 승리했기 때문에 여성이지만 여성성과는 거리가 멀다는 식의 논리다. 물론 틀린 해석은 아니지만, 현실과는 다소 괴리가 있는 해석이다. 한국사회에서 박 대통령은 여전히 여성으로 인지되기 때문에 그렇다. 박근혜 대통령은 여성이다. 그가 박정희의 딸이어도 이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박 대통령의 실책과 잇단 비리 연루 의혹에 “암탉이 울어서 나라가 망한다” “박근혜가 아니라 박지만이 대통령을 해야 했다”며 그의 여성성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현실이 이 명백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한국 사회에서 박 대통령은 여성이라는 정체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는 평생 “미쓰 박”으로 호명될 운명이다. 이런 상황에서 박 대통령의 여성성을 부인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는 한가지다. 소수자 개인을 오로지 소수자라는 한 가지 정체성으로 규정하는 일반화의 오류가 그것이다. 작년 10월, 박근혜 대통령이 국회에서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청와대 홈페이지 성급한 일반화는 ‘소수자가 악마일리 없다’는 소수자의 순수성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비롯된다. 돌이켜보면 우리 사회에서 소수자는 늘 순수한 피해자일 것을 강요받았다. 장애인들은 자신의 삶이 얼마나 남루하고 비극적인지 어필함으로써만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있었고, 여성들은 미혼모나 소녀가장 등 절박한 상황에 한해 사회적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나아가 ‘보통 사람만큼의 제도적 혜택’ 혹은 ‘자존감’을 요구하는 순간은 늘 문제가 된다. 우리 사회 ‘일반 남성’이 선망하는 직종에 여성과 장애인에 대한 고용할당제를 도입한다고 하면, 당장 ‘특권’ ‘역차별’이란 반발이 튀어나올 확률이 크다. 이런 제도의 특혜를 보는 이들은 우리 상상 속에 있는 ‘비참한 소수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소수자에 대한 고정관념은 평등으로 가는 길을 저해한다. 현실에 ‘순수한 피해자’는 없다. 단지 공동체 내에서 오랜 기간 억압받아온 소수자적 특성을 지닌 개인들이 존재할 뿐이다. 소수자라고 늘 인권해방에 앞장서거나, 올바른 삶을 살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소수자성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한 사회에서 소수자를 배려하는 제도를 만드는 건 그들이 공동체 안에서 배제 돼 온 과거 맥락을 이해하고 반성한다는 의미에서다. 그런 혜택을 받는 소수자가 특권계층인지, 부도덕한 사람인지는 부차적인 문제다. 잘 배운 엘리트 여성이 여성비례대표 할당제로 국회의원이 되고, ‘최초의 여성’이란 홍보 문구로 대선후보로서 우위를 점하는 건 잘못된 일이 아니다. 이런 맥락에서 박 대통령의 당선은 국내 여성주의 운동에서 의미 있는 첫 걸음이었다. ‘악한 소수자’가 등장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박 대통령은 수많은 비리에 연루된 의혹을 사고 있다. 특권계층의 이익을 대변했고, 심지어 여성 고용에 무지할뿐더러 여성들이 주로 종사하는 서비스 업종에 대한 고용불안도 가중시켰다. 그럼에도 박 대통령은 두 가지 가능성을 한국 사회에 제시했다. 첫째는 여성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점이고, 둘째는 여성도 부패할 수 있다는 점이다. 박 대통령 이전 수많은 전 세계 남성 대통령들이 그러했듯이 박 대통령 또한 부패의 길을 걸었다. 이 때 비리와 부패는 명백하게 박 대통령 개인의 속성이다. 단지 박 대통령은 무수히 많은 여성들 중, ‘권력이 있고 부패한 여성’이었을 뿐이다. 미국 드라마 <굿와이프>에는 소수자적 특성을 가진 변호사들이 등장한다. 장애를 가진 변호사, 임신한 여성 변호사, 어린 여성 변호사 등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악덕하고, 자신들의 소수자성을 이용해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데 능하다. 미국에서 대히트를 친 이 드라마는 악의적으로 소수자를 묘사한 게 아니라, 소수자에 대한 일반인들의 편견을 꼬집고 있다. 소수자는 소수자라는 특성만으로 한 사회 내에서 배제돼 온 맥락이 있다. 그들에게 ‘순수성’과 ‘당사자성’이라는 무고한 짐을 지울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다. 박 대통령이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비판받지 않을 날이 올 때까지, 우리는 다음 여성 대통령에 대한 기대를 남겨 둘 필요가 있다. 박 대통령이 ‘부패한 여성 대통령’이 아니라 ‘부패한 대통령’으로 평가되는 날을 앞당기기 위해서라도 우리 사회 소수자들에게는 더 다양한 역할이 필요하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7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