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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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이동화(아디 활동가),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 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이상재/ 대전충남인권연대 사무국장 지난여름 대전에 위치한 모 대학 군사관련학과 1학년 학생 60여 명이 선배 학생회 간부들에게 1시간 넘게 계속해서 집단 기합을 받다가 그 후유증으로 열 명이 입원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선배들이 기합을 준 이유는 후배들이 수업에 자주 빠지고 태도가 바르지 않아 기강을 잡겠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비단 이번 사례뿐만 아니라 매년 전국의 대학에서는 위와 유사한 집단폭력 사건이 심심찮게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리고 그럴 때 마다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는 폭력을 휘두른 이유는 거의 언제나 후배들의 ‘기강을 잡는다는 것’이다. 하나의 성숙하고 독립적인 인격체로서 존재해야 마땅한 대학생들에게 과연 일률적인 ‘기강’이란 것이 가능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은 둘째 치고라도, 도대체 그 기강을 잡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인 집단적인 폭력행사는 도대체 어디에서 배워온 것일까? ‘기합’이란 말과 함께 ‘얼차려’ ‘선착순’과 같은 군대에서 흔히 사용하는 용어도 대학 내 폭력사건을 언급할 때 언론에서 자주 볼 수 있다. 학원 내에서 벌어지는 폭력행위는 군대에서 병사들에게 집단적 혹은 개인적으로 육체적인 고통을 주는 일련의 행위와 많은 점에서 유사한 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폭력’의 행사는 비인권적인 처사로 비난받거나 심하면 법의 심판을 받을 수 있는 매우 반사회적인 사건이지만 그것이 ‘군대’ ‘기강’ 등과 한 문장에서 사용되면 우리 사회의 한편에서는 같은 폭력이라 할지라도 용인하거나 덮어두려는 분위기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미국독립선언과 프랑스인권선언이라는 1차 인권혁명의 시발점에서 현재까지로 인권의 역사를 좁혀서 살펴봐도 인류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인권침해의 현장은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간 ‘전쟁’이었다. 그 전쟁을 수행하는 군대의 기본적인 행동원리는 갖가지 무기를 이용한 폭력의 행사이기 때문에 군대는 태생적으로 ‘폭력’과 떨어져서는 이해할 수 없는 조직이다. 하지만 그 ‘폭력’은 전쟁이란 특별하고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적에게만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최근 대한민국 군대에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군대내 폭력사고의 일반적인 형태는 전쟁시 적군에 맞선 아군의 폭력행사가 아니라 비전쟁상태에서 아군이 아군에게 행하는 폭력이라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과거에 징집의 형태로 군대를 모집했거나 현재도 대규모 군대병력을 보유하고 있는 독일, 미국과 같은 서구 대부분의 군대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군대 내에서 폭력적인 방법으로는 기강과 강한 전투력을 유지할 수 없다는 사회적 합의를 이루고 병영 내 상하급자 관계에서 오는 폭력문화를 없앴다. 하지만 대한민국 군대는 전신인 일제 강점기 시절부터 전해져 왔다고 알려진 병영 내 악습인 각종 얼차려와 기합, 언어폭력과 같은 폭력행위가 아직까지도 여전히 잔존하고 있다. 사진 출처 - 레디앙 그러한 불미스런 군대 내 폭력이 정지 없이 내 달릴 경우에는 ‘윤일병’ 사건과 같은 참혹하고 비극적인 사건까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현재 대한민국 군대의 우울한 자화상일 것이다. 우리의 군대 폭력문화가 더욱 심각한 것은 서두에서 예로 든 대학 내에서 행해지는 기합문화와 같이 사회의 많은 영역으로 군대의 비합리적인 폭력문화가 유입되고 있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군대에서 벌어진 폭력사고의 공통점은 엄격한 위계질서 하에서 계급이 높은 상관이나 선임자가 부하에게 비합리적이고 비정상적인 권위를 지시하고 강제한다는 것이다. 여군에게 뿐만 아니라 같은 성(性)인 남성군인에게도 성추행과 성폭행을 저지르고 변기를 핥게 하고 물고문까지 시키는 반인권적인 범죄행위를 해 놓고도 가해병사는 별다른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고, 피해병사는 참는 것 외에 자구책을 찾지 못한다. 이는 대한민국 군대의 구조적 문제이기도 하지만 명백하게 잘못된 권위에 대해서 반대하거나 항거하는 방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우리 사회 전체의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군대라는 특수한 공간과 지나치게 엄격한 계급문화가 던져준 잘못된 권위에 대한 순응과 학습은 고참이 되어서 후배병사에게 그대로 폭력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이른바 폭력의 내면화로 귀결된다. 비극적인 인권침해 사건은 타인을 나와 다른 존재로 이원화 시키는 ‘타자화’가 일어날 때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나치가 저지른 홀로코스트 만행이 그랬고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는 종교분쟁, 종족 분쟁 시 발생하는 제노사이드 역시 마찬가지 사례일 것이다. 대한민국의 군대 시스템은 군대라는 특수성을 강조하면서 부하나 후배병사를 타자화 시켜 폭력의 행사를 둔감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 군대내 폭력의 본질이 아닌가 의심해 볼 때다. 현재의 대한민국 군대는 혈기왕성한 20대 초반의 젊은 남성 청춘들에게는 너무나 불편한 곳이다. 인권은 불편함을 먹고사는 개념이기 때문에 당연히 군대 내에서 인권문제는 제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불편을 강요된 애국심과 폭력적 방법으로 뭉개고 있는 것이 지금 대한민국 군대의 불편한 모습이 아닐까 싶다. 전후세대를 지나, 한국전쟁이 언제 일어났는지도 잘 모르는 세대가 군대에 징집되는 시대로 시간은 흘러왔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갈수록 다원화되고 개인주의화 되는 우리의 젊은 세대가 인생을 통틀어 ‘국가’라는 존재와 정면으로 마주하는 거의 유일한 시간이 입영해서 병영생활을 하는 기간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그동안 우리의 국가와 군대가 젊은 청춘들에게 이제는 좀 더 인권적이고 합리적인 모습으로 다가서야 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과제가 되었다. 그 과제를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깨어있는 시민들의 참여와 노력은 언제나 중요할 것이다. 특히 군대 경험을 한 남성들, 어떤 면에서는 군대폭력의 사회적 내면화가 진행된 사람들의 생각이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남성들이 “요즘 군대는 우리 때에 비하면 편하지”, “좀 맞아야 사람 되고 군인이 되는 거야” 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에도 그 분들의 아들과 손자들이 군대에 입영해야 하는 시간은 계속해서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정말 자신들이 겪었던 군대와 똑같은 병영 환경에 자신들의 후손을 보내고 싶다는 것인지 스스로 반문해 봐야 할 것이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349 | 추천: 0
강국진/ 서울신문 기자   담뱃값 인상 문제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난데없이 ‘서민증세’란 말이 횡행한다. 다양한 반론이 쏟아진다. 시민단체는 물론 야당에서도 정부 발표를 비판한다. 먼저 몇 가지 쟁점에 대해 정리해보자. 담뱃값 올리는 게 세수확대를 위해서일까? 그건 분명해 보인다. 정부가 담뱃값 인상에서 설득력을 가지려면 늘어나는 세입을 대폭 건강증진에 써야 앞뒤가 맞을 것이다. 하지만 정부는 그렇게 할 생각이 없는 듯하다. 정부가 마치 국민건강 핑계 대는 게 짜증난다는 반응을 보이는 분들이 있다. 전적으로 공감한다. 만약 정부가 국민건강을 그렇게나 염려했다면 담뱃값을 1만 원(혹은 9,900원)으로 올린다고 발표했을 것이다(사실 개인적으로 정부가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국민건강을 생각하는 정부라면 카지노와 토토, 로또 등 ‘보이지 않는 세금’인 도박에 대해 중과세를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역시 정부는 그럴 의사가 없어 보인다. 담뱃값 인상 때문에 서민부담이 늘어날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그것 역시 동의한다. 21세기에 담배란 대체로 한줄기 연기 속에 버거운 일상을 씻어내고 싶은 사람들이 자주 찾는 물건이다. 우리 모두 분명히 알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 이하 국무위원을 비롯한 장관급 인사들 중 담배 피우는 사람이 있다는 얘길 들어본 적이 없다. 정부 행태는 분명 비판받아야 한다. 담뱃값 인상은 확실히 꼼수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말이다.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뱃값 인상을 찬성한다. 담뱃값은 올라야 한다. 자동차세도 더 올라야 하고 주민세도 더 올라야 한다. 물론 소득세와 법인세도 올려야 한다. 특히 종합부동산세와 금융소득종합과세는 대폭 올려야 한다. 거기에 더해, 필요하다면 부가가치세도 올라야 한다. 담뱃값을 올리면 정부 세입이 늘어날 수도 있고, 흡연율이 낮아져 세입이 오히려 줄어들 수가 있다. 이건 마치 나막신 파는 아들과 우산 파는 아들 사이에서 고민하는 어머니 같은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옛이야기에서 나오듯이, 양쪽 모두 국가로서 혹은 국민으로서 나쁘지 않은 결과를 유도한다. 거칠게 표현한다면, 담뱃값 올렸는데 흡연율이 낮아지지 않으면 세수가 늘어 좋고, 흡연 인구가 줄어들면 간접적으로라도 건보료 부담 줄어들고 국민건강에 도움이 되니까 좋다. 좀 더 깊이 들어가 보자. 담뱃값 인상에 대한 비판론은 “조세부담률을 높이는 등 좀 더 근본적인 대책마련이 필요하다”는 지적과 함께 등장하는 직접세 인상, 즉 부자증세 얘기가 많다. 특히 서민부담 증가, 이른바 ‘서민증세’ 얘기는 꽤나 강력한 비판담론이고 국민들에게 적잖은 호응도 얻고 있다. 심지어 어떤 신문은 폭탄 이미지를 사용함으로써 과거 종합부동산세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등장했던 ‘세금폭탄’ 이미지를 차용하기도 했다. 근본적인 해법. 그걸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담뱃값이 올라서 관련 세금이 늘어나면 조세부담률도 늘어난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 복지확대를 위해서는 조세부담률을 늘려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서민부담도 늘어나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에겐 부자증세도 필요하지만 좀 더 ‘근본’적으로 보편증세가 필요하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복지국가는 부자에게만 세금을 많이 걷는다는 환상이다. 사진 출처 - 서울신문 사실은, GDP 대비 전체 사회지출이 많은 국가일수록, 즉 복지국가일수록 총소득 중 세율이 높다. 또한 이런 국가들은 전체 조세 가운데 간접세 비중도 높다. 심지어 보통 죄악세라고 부르는 세금 비중도 높다. 다시 말해 복지국가는 모든 국민에게 세금을 많이 거둬서 모든 국민을 위해 복지지출을 한다. 나로서는 세금폭탄과 부자감세가 끊임없이 충돌하는 도돌이표 속에서 정작 조세문제는 해법을 찾지 못하는 상황이 매우 위태로워 보인다. 직접세만 늘리면 되는 것처럼 얘기하는 분들이 많은데 전체 조세 중에서 직접세 비중이 높은 걸로 치면 오히려 미국이 스웨덴보다 훨씬 낫다. 북유럽은 간접세 비중이 매우 높다. 최신 연구 성과를 간략히 인용한다면, ‘높은 복지지출 수준이 높은 조세수준을 요구한다’고 할 수 있다. 복지지출 수준이 높은 유럽 복지국가들이 간접세 의존도가 높은 이유는 뭘까. 한마디로 말해 이런 나라에선 조세수준이 높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높은 조세수준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 왜 조세수준이 높아야 할까. 바로 세입을 최대한 확보해서 그 예산으로 복지예산을 늘리기 위해서다. 중요한 건 직접세냐 간접세냐 하는 게 아니다. 조세를 통한 소득재분배도 사실 따지고 보면 핵심을 놓치고 있다. 중요한 인식차이는 우리 사회가 전반적인 ‘선호’를 연대와 평등에 둘 것이냐, 효율성과 경쟁에 둘 것이냐 하는 것에서 갈라진다. 우리가 연대와 평등을 지향하는 사회를 원한다면 어떻게든 조세수준을 높이는 방향을 고민해야 한다. 간접세라 하더라도 '우리 모두를 위한 복지재원'으로 쓸 수 있다면 그 길을 택해야 한다. 복지는 부자한테 뺏은 돈으로 하는 '홍길동' 방식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낸 돈으로 우리 모두를 위해 사용하는 '공동구매'이기 때문이다. 비록 그것이 눈에 빤히 보이는 꼼수일지라도 말이다. 지금 ‘서민증세’를 무기로 담뱃값이나 주민세 인상조차 못하는 사회에선 부자증세도 어림없는 노릇이다. 서민증세에 동의해주고, 거기서 더 나아가 부자들 세금도 더 늘리자고 요구하는 게 좀 더 미래지향적인 방향이 아닐까? 우리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담뱃값을 올려서라도 '유아교육과 영유아보육 완전국가책임제'와 '소득에 상관없이 모든 노인에게 기초연금 20만 원 지급' 같은 공약을 지키자고 하는 것과, 담뱃값을 줄여서라도 세금을 줄이고 복지요구도 흐지부지하는 두 가지 길이다. 박근혜 대통령 입장에서는 어떤 국민 여론이 더 무서울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221 | 추천: 0
이동화/ 민변 국제연대위 간사   약 2달에 걸친 이스라엘의 공습과 폭격이 중단되었습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무기한 휴전이라고 합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공포 속에서 지냈을 가자지구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생각하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 의해 좌지우지될 휴전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불안하기만 합니다. 지난 6월 8일, 3개월간의 안식월을 보내기 위해 팔레스타인으로 향했습니다. 개인적으로 국제연대활동을 시작했을 때의 초심을 되찾기 위해 여행을 떠난 것이지요. 팔레스타인에 도착하여 짐 정리도 마무리 못했던 6월 12일, 이스라엘 정부는 자국민 불법정착촌 3명이 납치되었다고 발표하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와 마을을 공격하였습니다. 매일 밤 중무장한 이스라엘 군인들과 국경수비대원들은 팔레스타인 서안지구 전역의 마을에 난입하여 무차별적으로 집에 쳐들어가서 사람들을 위협하고, 가구를 부수고, 돈을 몰수하며 저항하는 사람들을 구타하고 체포하였습니다. 체포이후에도 어디에 수감되어 있는지 알려주지 않았기에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납치된 것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상황이었지요. 이러한 반인권적이고 무법천지의 상황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 지프차나 장갑차에 돌을 던지는 것 뿐 이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군인들은 최루탄 또는 고무탄, 때때로 실탄을 발포하였고, 이로 인해 수십 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당했습니다. 그렇게 20여일이 지나서 납치된 3명이 살해된 채로 발견되자 이스라엘은 가장 먼저 납치된 지역 인근의 마을에 쳐들어가서 하마스 조직원으로 추정되는 집 2채를 날려버리고 수십 명을 체포하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아는 바처럼 가자지구를 51일 동안 공습하고 포탄을 쏟아 부었습니다. 가자지구는 가로 40킬로미터, 세로 5~10킬로미터 크기로, 전체 인구가 180만 명으로 세계적으로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 중 하나이며, 도시 전체가 10미터 콘크리트 벽으로 막혀있고, 콘크리트 벽으로부터 500미터 이내의 지역은 출입통제구역으로 무단으로 들어가면 이스라엘 군인이 발포하는 끔직한 구역입니다. 또한 가자지구로 출입할 수 있는 통로는 고작 3군데에 불과하고 이 역시 이스라엘에 의해 출입이 통제되며, 2달간의 공습기간에 이 곳을 막아버려서 가자지구의 사람들은 피난을 가고 싶어도 나갈 수가 없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감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곳에 이스라엘은 51일 동안 수천발의 미사일과 포탄을 쏟아 부었습니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활동하는 인권단체인 PCHR(Palestine Center for Human Rights)에 따르면 2달간의 이스라엘 군사행동으로 가자지구에서만 2,168명이 사망하였고(이중 519명은 아이들이고 297명은 여성이었음), 10,895명이 부상당했고, 수천채의 가옥이 파괴되었다고 합니다. 정말 엄청나게 많은 이들이 무고하게 희생되었습니다. 이스라엘 공중 폭격으로 부서진 가자지구 건물 사진 출처 - ISM 팔레스타인에서 체류했던 5주 동안, 눈앞에서 벌어지는 이스라엘의 반인권, 전쟁범죄 앞에 무엇이라도 해야 했기에 원래의 계획을 접고 팔레스타인 내에서 활동하는 인권단체에서 자원 활동을 지원하였습니다. 돌을 던지며 저항하는 팔레스타인 사람 옆에서 그들이 이스라엘 군인들에 의해서 체포되거나 희생되지 않게 하는 활동, 이스라엘 정착민과 군인들에 의한 직접 피해를 당하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집에 함께 있었고, 또한 피해를 받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이를 외부에 알리는 활동 등을 하였습니다. 이 활동을 통해 만난 많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통해서 대부분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가족 중 1~2명은 이스라엘 군인에 의해 희생당했고, 수 명이 현재 감옥에 복역 중이거나 수감생활을 한 적이 있다는 나라 전체차원의 공통의 경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수 십 년 동안 이스라엘의 점령 전쟁에 저항하며 지내왔다는 사실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외부 사람들은 이 지역에서의 피해자와 가해자를 혼동하며,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테러를 저지르고 이에 대해서 이스라엘이 최소한의 수준으로 군사대응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는 전 세계의 주요한 언론이 사실과 진실에 부합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일방적인 내용을 중심으로 보도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번 가지지구 침공을 통해 더욱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언론이 자꾸 현재의 상황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간의 전쟁 또는 분쟁으로 묘사를 하는데 이로 인하여 사람들은 마치 양측이 어느 정도 대등한 위치 또는 수위의 군사력이 있고, 이 비극의 책임이 쌍방에게 있는 것이 아닌가하게 생각하게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현장에서 보았던 모습은 언론이 말하는 것과 정반대이거나 적어도 이 비극을 만들고 유지하며 확대하는 쪽은 쌍방에 있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불안한 휴전선언으로 인해 팔레스타인의 참상을 보여주었던 사진과 뉴스는 점차 사라져 가고, 더불어 팔레스타인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도 서서히 희미해져 갈 것입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에 아직 평화는 오지 않았고, 2천명이 넘는 사망자와 만 명 이상의 부상자, 그리고 그 수배에 달하는 사상자들의 가족들은 그 슬픔을 치유할 새도 없이 여전히 이스라엘 총구 아래서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점령 종식을 이야기하지 않은 채 팔레스타인의 평화를 바라는 것은 허무한 주장입니다. 수십 년 동안 자신이 살고 있던 땅에서 쫓겨난 채 자신들 앞마당에 어느 날 폭탄이 떨어져도 자신의 잘못이라고 치부 받는 이 현실 속에서 5주 동안 짧게 보았던 것은 그 곳에서 여전히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며 싸우고 있는 팔레스타인 민중들의 저항과 그들의 의지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점령이 끝나는 그날까지 저항하며 싸울 것입니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192 | 추천: 0
홍성준/ 투기자본감시센터 사무처장   변양호라는 사람이 있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한 때는 총망 받던 금융관료였고, 얼마 전까지는 금융시장에서 큰 손으로 활약을 했던 사람이다. 1954년생이니, 올해로 60 갑자를 산 사람이다. 경기고와 서울대를 나와, 미국 노던일리노이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가 되어 귀국했다. 소위 말하는 ‘엘리트 코스’를 모두 밟을 정도로 학벌이 무척 높다. 그리고, 관운도 좋았다. 행정고시 19회를 수석으로 합격하였고, 재경부에서 금융관료로서 승승장구 했다. 이른바, ‘모피아’ - 금융 마피아의 일원이다. 그보다, 그의 선배 모피아 중에 유명한 이헌재에 대해 알아야 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헌재는 70년 전 중국 상해에서 태어나 경기고, 서울대를 나와 미국 유학을 했고, 1968년도에는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그 후, 재경부 모피아로서 승승장구하여 재정경제부 장관을 2번, 부총리를 1번, 국무총리 권한대행을 2번 역임했다. 관운이 참 좋은 자이다. 그러다 보니, 그를 따르는 모피아 관료집단이 있는데, 이른바 ‘이헌재 사단’이라고 한다. 그와 그의 집단이 유명한 것은 IMF사태를 당한 한국에서 기업의 구조조정과 해외 매각, 금융자유화, 그에 따른 정리해고 등을 그들이 주도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금융·투기자본의 본거지인 미국 월스트리트에서는 환호했고, IMF의 관료들이 당시 남긴 보고서에는 ‘김대중 정권은 우리가 요구하는 것 이상으로 경제개방, 재벌개혁, 해외매각 등을 매우 잘 한다’라는 칭찬이 남았다. 이헌재는 IMF사태 당시 김대중 정권이 신설한 ‘금융감독위원회’ 초대 위원장이었다. 얼마 전, 귀국한 전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은 당시 대우자동차, 대우전자 등의 해외매각과 “국부유출”을 거론하며, 이헌재 사단과 당시 김대중 정권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을 해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이헌재는 인기 많은 정치인 안철수의 “멘토”로 소개되는 등 여전히 살아 있다. 아무튼, 당시 정권이 한 악행은 역사에 뚜렷하게 기록으로 남아 있어서 더는 언급하지 않겠다. 다만, 김대중 대통령과 “민주화 운동”을 했다는 그의 동지들이 ‘무식’해서, ‘신자유주의로 무장한 모피아 관료집단’에게 속아서 이런 짓들을 했다는, 얼토당토 않는 평가에 대해서 한마디 하고자 한다. 그것은 마치 왕조시대에 “왕은 천성적으로 좋은 성품을 지니셨지만, 주변의 ‘간신들’ 때문에 ‘혼군’이 되었다”는 말처럼, 웃기는 소리일 뿐 이다. 그들의 정치 - ‘자유주의’는 신자유주의와 이미 친연성을 가진 상태에서, 자본주의의 세계적 동향에 대한 고급 정보를 가진 관료들, 학자들에게 쉽게 동화되어서 한국의 국부를 금융·투기자본에게 헐값으로 팔아넘긴 것이다. 이것이 소위, “민주정부”에 대한 공정한 평가일 것이다. 아무튼, 그런 이헌재 사단의 총아가 바로 변양호였다. 관료들의 익명성을 넘어 그가 언론과 세상에 노출된 것은 ‘론스타게이트’사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이 드러나면서 부터이다. 2003년 당시 변양호는 시중 은행을 관리감독 하는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장이었다. 실무적으로 그가 주도하여 투기자본 론스타에게 외환은행을 불법적으로 매각을 한 것이다.(참고로, 당시 김진표 재경부 장관-이후, 새정치연합소속의원-은 검찰조사만 받고 풀려나 그의 뒷선은 의혹이 여전히 남는다.) 2006년, 검찰이 그를 기소한 부분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부실은행이 아닌 외환은행을 법에도 없는 “예외승인”을 하여 ‘사모펀드’인 론스타에게 매각한 것, 그 과정에서 외환은행 회계(BIS비율) 조작, 인수가에서 특혜 등등에 대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론스타로부터 뇌물수수를 한 혐의이다. 하지만,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무죄판결을 받았다. 관료의 정책결정에 대해 형사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지어, 론스타 측의 뇌물을 전달한 하종선 변호사(현대해상 전 회장)가 구체적으로 자신의 범죄사실을 법정 진술했음에도 “수뢰 당사자가 뇌물로 생각하지 않으면 뇌물이 아니다”식으로 무죄판결이 났다. 생각할수록 웃기는 대법원 판사들이다. 나는 당시 론스타게이트 사건 재판을 참관하면서 그를 처음 보았다. 그때 받은 두 가지 인상은 지금도 내게 강하게 남아있다. 단언컨대, 그는 ‘확신범’이다. 자신이 외환은행을 불법적으로 투기자본 론스타에게 매각을 하여 천문학적인 “국부유출”이 일어났고, 은행공공성이 무너지고 노동자와 시민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음에도, 그는 그것이 올바른 정책결정이었다고 재판 내내 주장했다. 최후 진술에서도 당시 발생한 ‘남대문 화재’ 사건을 예로 들며, 자신이 선제적으로 외환은행을 해외매각을 하여 한국경제 전반으로 번질 불안정성을 잠재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애국심’을 의심하는 시민단체(내가 일하는 투기자본감시센터를 의미하는 듯)에 의해 고발당해서 억울한 구속과 재판을 받고 있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중국 드라마 ‘강호풍운정’에서 명나라 신종의 의심으로 죽은 명장이며 충신인 원숭환(袁崇煥)과 자신을 비교하기도 했다. 훗날, 자서전 『변양호 신드롬-긴급체포로 만난 하나님』에서도 같은 주장을 되풀이 했다. 되돌아보면, 참 가소로운 소리이다. 내가 보기에는 변양호의 일생은 같은 시기를 산 오삼계(吳三桂)와 오히려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오삼계는 젊은 나이에 황제의 신임을 얻어 대치중인 청나라와의 최전선인 산해관 수문장이 되었지만, 청나라의 앞잡이가 되었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관문을 열고 청나라 군대를 맞이하고 “대명천지(大明天地)”를 청나라에 바치며 출세했고, 평서왕(平西王)에 올라 운남성을 차지했다. 하지만,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청나라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망하고 자살했다. 변양호에 대한 또 다른 인상은 그에 대한 후배 모피아들의 존경심이 엄청 크다는 것이다. 그의 뇌물수수 재판에서 안 사실이 있다. 그의 생일이 7월 30일인데, 해마다 매년(!), 그의 생일날에는 재정경제부 후배 모피아들이 주축이 되어 생일잔치가 열린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그의 학교 동기동창 변호사들도 초대되어 온다고 한다. 뇌물을 전달한 하종선도 손님이고, 변양호를 변호하는 변호사들도 손님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생일잔칫날에 변양호가 소위 ‘스폰서(sponsor)’ 노릇을 해준다는 여가수가 등장을 했다.(이때, 나는 연예인 X파일이 대부분 진실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당일, 그 여가수의 옷값으로 쓰라고 수백만 원짜리 수표를 하종선이 변양호에게 줬는데, 그 수표를 가지고 여가수는 실제로 옷을 샀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변양호를 위해 증언석에 앉은 후배, 현직 모피아는 검사가 묻지도 않았는데, ‘순수한’ 스폰서라는 말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아마도, 법정에서 재판참관 중이던 변양호의 아내와 딸에게서 선배 변양호를 변호하고자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표현 하나하나까지 세심하게 변양호의 인격에 흠집을 남기지 않으려 노력하는 후배 모피아의 태도와 그런 모피아들이 현직을 떠난 지 꽤 된 선배 모피아를 위해 매년 잊지 않고 그의 생일잔치에 모인다는 그들 패거리 내의 갸륵한 ‘의리’를 난 보았다. 아마도, 같은 생일잔치는 지금도 열리고 있을 것이다. 변양호가 모피아로서 관료사회는 물론, 우리사회에 남긴 것 중에는 “변양호 신드롬”이란 말이 있다. 이 조어는 중앙일보에서 처음 생산해낸 것인데, 변양호 이후 세상의 비난이 두려운 관료들이 소신 있는 정책결정을 못한다는 의미란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인허가권을 가진 고위 관료가 권한을 사용하지 않아 자본이 시장에서 수익을 남기지 못했다는 의미, 고수익의 기회를 놓친 소수의 자본, 금융·투기자본들이 내는 안타깝다는 목소리일 것이다. 이런 유치한 조어가 있는 것도 문제이지만, 이 조어가 주요 시사용어라고 해서 언론과 기업 등에서 입사 문제로 출제된다는 소문을 들고 아연실색 한 적이 있었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변양호는 2005년 재정경제부 금융정보분석원 원장을 끝으로 잘 나가던 관료의 길을 접고, 같은 9월 2일 ‘보고 펀드’라는 사모펀드를 설립, 금융감독위원회에 등록을 했다. 바로 이 때문에 후배 모피아들은 그를 더욱 존경하게 된 것이다. 보고 펀드의 출자금은 대부분 자신의 현직 모피아 시절 관리감독을 하던 시중은행에서 받은 것이다. 당시 외환은행의 경우, 그에게 은혜를 입은 론스타가 장악하고 있었는데, 400억 원을 출자했다. 이 때문에 “사후 뇌물”이라고 검찰 고발을 한 바도 있다. 거기에 실제 수익률은 형편이 없음에도 고가의 수수료를 은행들은 매년 그에게 바쳤다. 여전히 ‘갑-을 관계’인 것이다. 또한, 한국의 자유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언론은 이 보고 펀드에 대해 우호적인 보도를 쏟아냈었다. 론스타 등 해외 투기자본으로부터 국내의 금융기관과 기업을 지키면서, 고수익도 내게 되었다고 호평을 한 것이다. 보고 펀드의 “보고”도 신라 말 해상왕 장보고(張保皐)에서 따온 것이라니, 얼마나 좋은 것이냐는 것이다. 이른바, 투기자본에 맞서는 ‘토종 펀드’라는 것이다! 하지만, 단기간에 고수익을 내기 위해 생산과 고용을 파괴하고, 납세조차 회피하는 사모펀드의 본질을 왜곡하는 보도일 뿐이다. 도둑놈, 강도도 외국인이 아니고 한국인이라면 다 좋다는, 허무맹랑한 소리를 만들어 혹세무민(惑世誣民)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 보고 펀드가 드디어 망했다. 2006년 동양생명보험, 노비타, 2007년 아이리버, LG실트론, 2009년 비씨카드, 2011년 한국 버거킹을 운영하는 BKR, 2013년 미국 셰일오일과 가스를 생산하는 아나다코, DSLR용 카메라의 교환렌즈를 생산하는 삼양옵틱스 등에 대해 공격적인 투자를 했었다. 또한, 설립 파트너로 리먼 브라더스의 전 한국 대표 이재우, 모건 스탠리 한국지사 신재하, 2010년에는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 박병무를 불러 모았는데, 모두가 투기자본 먹튀에 조력한 한국인들이다. 그런데, LG실트론 등에서 수 조 원의 투자실패가 발생했다. 그리고, 투자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변양호가 최근 보고펀드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천년만년 흥청망청 할 수 는 없는 법이다. 보고펀드의 존립도 어려울 것이라는 말이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그에게 출자한 시중은행들은 엄청난 손해를 입었음에도, 그의 투자실패에 대해 책임을 묻는 그 어떤 법적조치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불만의 소리조차 없다. 오히려, 그를 찬양했던 언론은 변양호와 그가 만든 국내 1호 토종펀드가 실패했지만 사모펀드 전성시대가 저문 것은 아니라고, 열심히 “쉴드(shield)”를 치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애쓴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모피아의 총아, 변양호의 성장, 출세, 위기, 도약, 그리고 몰락을 내가 아는 바대로 짧게나마 정리해 보았다. 그는 이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 시대를 살다간 전형적인 엘리트 모피아였다. 그의 극적인 몰락을 보며, 이 시대는 소멸해 가고 있고, 이 시대의 전형도 이제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마치, 빚더미 호화주택 풀장에서 오지 않는 옛 애인의 전화를 전전긍긍 기다리다 복수의 총탄으로 허무하게 죽어간 영화 속의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 같다고나 할까. 그런데, 아직도 사라진 그 전형을 그리워하며, 헛된 꿈을 꾸고 있는 후배 모피아들, 그들의 동료들 - 자유주의 정치인, 금융자본을 대리하는 교수, 기자, 변호사, 온갖 사이비 전문가 등등은 아직 많이 있다고 보인다. 여전히 “사모펀드 활성화”야 말로 위기의 한국경제를 구원할 것이라고 떠들고 있다. 이제, 곧 가을이다. 모든 것이 사라지는 가을이다. 더는, 끼리끼리 패거리를 만들어, 까불며 세상을 농락하지 말고, 부디 자숙하기 바랄 뿐이다. 더는 과거가 반복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638 | 추천: 0
임아연/ 당진시대 기자 군대. 보통의 삶에서 군대에 대한 비판적인 의견을 개진하는 것은 조금 껄끄러운 일이다. 내 주변의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러하듯, 거의 모든 대한민국 남자들이 군대를 경험했기 때문에, 군대에 대한 내 생각을 얘기하면 별로 좋아 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특히 수년이 지났어도 군대에서 경험한 일들을 무용담(?)처럼 얘기하거나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사람일수록 더 그랬다. 나는 군대가 싫었다. 지금도 그렇다. 어렸을 때 주입 당했던 것처럼 ‘군인 아저씨’들이 나라를 지켜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요즘 같이 버튼 하나로 도시 전체를 날려 버릴 수 있는 시대에 매년 팔팔한 청춘들로 군대 내 머릿수를 채운다 한들 국방이 더 튼튼해진다고 믿지 않는다. ‘군대를 다녀와야 진정한 남자가 된다’는 말은 결국 자기 위안과 합리화일 뿐이다. 나는 대한민국 모든 남자가 군대에 감으로써 사회에 끼치는 악영향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징병제와 모병제에 관한 것은 여기에선 차치하도록 하자. 오로지 군대의 영향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사회 곳곳에 군대 문화가 스며 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지독한 위계와 토론 아닌 복종을 강요하는 것이 그렇다. 다수가 소수를 짓밟고, 다양성 보다는 획일을 강조하고,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 짓는 전형적인 집단이 군대다. (생물학적 구분으로) 남과 여를 반반으로 본다면, 인구의 절반이 군대를 경험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회에 군대 문화가 퍼질 수밖에 없다. 특히 군대는 효율적이고 손쉬운 방법으로 사람을 통제할 수 있어, 대부분의 조직에 군대 문화가 스며 있다. 나는 군대를 직접 경험한 바 없지만, 사람들이 군대와 비슷한 문화를 경험하는 건 학교라고 생각한다. 그땐 당연하게 여겼는데, 조회시간마다 운동장에 아이들을 전후좌우로 일렬로 세워놓고 앞으로 나란히, 좌우로 나란히를 시켰는지 모르겠다. 반듯하게 줄을 잘 서야만 교장 선생님의 목소리가 귀에 쏙쏙 들어오는 것은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요즘 학교도 이러는지는 모르겠다). ‘차렷, 경례, 뒤로 돌아, 좌로 한발, 우로 한발, 앞으로 가’와 같은 통제의 언어와, 엎드려뻗쳐, 선착순 달리기 등 아무런 상황 설정을 두지 않는다면, 이게 학교의 모습인지, 군대의 모습인지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교사와 학생 간의 관계는 물론이거니와, 선배와 후배 사이도 그랬다. 나는 여고 출신인데 동아리 활동을 했던 친구들은 대부분 선배들의 ‘쪼임’에 시달려야 했다. ‘왜 90도로 인사를 하지 않느냐’부터 시작해서 별의 별 것으로 후배들을 쪼아대는 선배들 때문에 동아리 활동을 계속 해야 하나 고민하기도 했다. 선배들이 혼낼 땐 절대 선배의 눈을 쳐다봐서는 안 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야만 했다. 더 큰 문제였던 건, 그렇게 선배에 대한 불만과 분노 속에 1학년을 보낸 아이들이 2학년이 돼서 신입생에게 똑같은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언어)폭력과 정신적 스트레스의 대물림이 꼬리의 꼬리를 물고 해마다 이어졌다. 군대를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여고생들이 군대에서나 있을 법한 문화를 그렇게 체득해 갔다. 전남 화순군 북면 금호리조트 옆 빈 공터에서 광주·전남지역 대학 신입생들이 선배들로부터 팔굽혀펴기, 귀잡고 뜀뛰기 같은 얼차려를 받고 있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대학에 입학하니 MT때마다 남학생들은 선배들 앞에서 엎드려뻗쳐와 같은 얼차려를 받았다. 내가 속한 학과의 경우 그나마 여학생들은 얼차려에서 제외됐는데, 갓 입학한 남학생들은 군대를 다녀온 선배들로부터 ‘이 새끼’ 소리부터 들어야 했다. 학생들은 얼차려 때문에 뉴스에 나온 다른 학생들을 그저 운이 없는 ‘놈’들 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많은 대학에서 해마다, 지속적이고 보편적으로 얼차려가 행해졌다.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남자들 사이에선 나이에 따라, 직급에 따라 어딘지 모를 불편한 문화가 자꾸만 눈에 띈다. ‘윤 일병 사건’으로 다시 군대를 생각한다. 나는 윤 일병을 악마처럼 괴롭힌 이 병장과 가해자들이 윤 일병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 병장은 또 다른 윤 일병이다. 윤 일병이 그 ‘군대 문화’에 빠르게 적응하면서 살아남았다면, 그는 또 다른 이 병장이 됐을지도 모른다. 군대의 특성상 어느 정도의 통제가 필요하다고 인정한다 하더라도 인구의 절반이 군대를 가고 수개월 동안 폭력적인 문화를 체득해야 한다면, 이는 고스란히 사회 곳곳에 이식될 수밖에 없다. 군대 문화의 폭력성은 계속해서 대물림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람은 결국 체제에 순응하면서 익숙한 대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윤 일병 사건은 수면 위로 드러난 한조각의 비참한 단면이다. 군대 체제가 변하든지, 군대의 문화가 변하든지, 혹은 한국 사회가 변하든지, 악순환을 끊기 위한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 왔다. 2
2017-07-12 | hrights | 조회: 302 | 추천: 0
송채경화/ 한겨레21 기자   최근 결혼 선물로 받은 카세트 플레이어 덕분에 10년도 더 된 카세트 테잎를 꺼내 들었다. 대학교 때 선배가 선물로 만들어준 것이었다. 주로 저항 시인들이 쓴 시를 가사로 붙여 만든 곡들이 이 안에 들어 있었다. “사람들은 맨날 겉으로는 소리높여 자유여 해방이여 통일이여 외치면서 속으론 제 잇속만 차리네” 가수 안치환의 목소리로 부른 김남주 시인의 <자유>가 나오자 같이 듣던 누군가가 지금의 상황과 너무 흡사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적극 공감했다. 새정치민주연합의 얘기다. 새정치연합은 공천 파행을 거듭하다 7·30 재보선에서 대패하더니 최근에는 껍데기뿐인 세월호 특별법에 덜컥 합의했다. 유가족들은 순식간에 뒤통수를 맞았고 이를 지켜보던 야당 지지자들도 등을 돌렸다. 새정치연합의 지지율은 호남에서조차 30%대로 역대 최저를 기록했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여러 가지 진단이 나온다. 당내 계파싸움이 원인이라거나, 야당으로서의 선명성을 드러내지 못했다거나, 거꾸로 너무 반대만 하는 모습을 보였다거나…. 그러나 내가 보기에 정답은 김남주 시인의 시 안에 들어 있다.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130명의 새정치연합 의원들, 그들이 문제다. 서울 광화문광장 이순신 동상 앞에 마련된 세월호 유가족 단식농성장 모습. 사진 출처 - 한겨레 정치권 안팎에서 심심치 않게 들리는 얘기가 있다. 새정치연합 의원들은 정권교체 의지가 없다는 것이다. 골치 아픈 여당보다는 여러모로 야당이 의정생활을 하기에 편하고, 정권을 획득하지 못 하더라도 어차피 지역을 기반으로 한 기득권은 그대로 유지될 것이기 때문이란다. 참 어이가 없다. 7·30 재보선에서 이정현 새누리당 의원이 전남 순천·곡성 지역에서 당선된 것은 지역민들이 새정치연합의 이런 인식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그들만 모르고 있다. 기득권 지키기에 급급한 그들은 더 이상 진보가 아니다. 어느샌가 권력에 안주하고 변화를 두려워하기 시작한 새정치연합은 스스로 보수가 됐다. 그들이 이제껏 내세웠던 ‘혁신’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껍데기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 국민들이 내린 평가다. 새정치연합은 큰 선거에서 패할 때마다 혁신보고서를 작성해왔는데 벌써 4개나 있다. 그때마다 반복해서 했던 말은 ‘뼈를 깎는 쇄신’이다. 이제 새정치연합에는 ‘그때마다 뼈를 깎았으면 지금쯤 이쑤시개가 됐을 것’이라는 비웃음만 남아 있다. 이제 어찌해야 할까. 기득권 지키기가 문제였다면 해결책은 단순하다. 기득권을 내려놓으면 된다. 그 첫 번째 발걸음이 바로 선거제도 개편이다. 이 시점에서 새정치연합이 추구하려는 목표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새정치연합의 정강정책에는 “보편적 복지를 통한 정의로운 복지국가를 지향한다”고 돼 있다. 이들의 최종 목표가 복지국가라면 다른 선진 복지국가들이 어떻게 이를 실현해왔는지를 봐야 한다. 특히 이들의 정치제도에 집중해서 본다면 하나의 공통점이 발견된다. 바로 이들 모두가 비례대표제와 다당제, 그리고 연립정부 형태의 권력구조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최태욱, <‘경쟁력을 위한 사회합의주의’ 발전의 정치제도 조건>) 이러한 공통점은 복지국가를 이루기 위한 중요한 핵심요소가 노·사·정 합의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합의주의’라는데 기초한다. ‘사회적합의주의’는 우리나라와 같은 양당제보다는 다당제에서 실현 가능성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양당제의 경우 승자 독식이라는 구조 때문에 ‘합의’ 자체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일단 선거에서 승리한 쪽이 장관을 비롯해 모든 권력을 독점하고 이들은 이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지지 기반이 되는 특정 계층만 대변할 가능성이 크다. 지금의 새누리당이 바로 그렇다. 반면, 다당제의 경우 특정 정치세력이 권력을 독점할 수 없기 때문에 각각의 정치세력들간의 합의가 중요해진다. 자연히 ‘사회합의주의’를 이룰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된다. 새정치연합 스스로도 이를 아주 잘 알고 있다. 새정치연합 출범 직후 만들어진 ‘새정치비전위원회’는 <국민을 위한 새정치>라는 보고서에 “지금까지 우리의 정당체제는 지역기반 양대 정당의 독과점체제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 체제에서는 정당이 민주적 시장경제와 복지국가 건설 같은 전국적 개혁 이슈에 혼신의 힘을 다해 매진할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적었다. 양당제의 폐해를 인정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해결책도 제시했다. “선거제도의 비례성을 크게 높여야 한다. 그래서 지역주의에 기반을 둔 지금의 독과점적 정당체제를 타파하고 민의 반영이 충분히 이뤄지는, 즉 다양한 사회 경제적 이해관계를 포괄적으로 대표할 수 있는 정당체제를 확립해야 한다.” 문제는 실행력이다. 새정치연합은 이러한 가치를 ‘지향’은 하지만 ‘실행’은 하고 있지 않다. 비례대표제를 확대하고 지역주의를 타파한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들의 기득권을 버려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크게 보면 새정치연합의 분열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 이들의 기득권 지키기에도 한계가 왔다. 이제는 놓을 때다. 이순신 장군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명량>이 최단기간 1000만 관객 돌파라는 기록을 세우고 있다. 이순신은 ‘필사즉생 필생즉사(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것이 지금 새정치연합에 가장 필요한 정신이 아닐까.
2017-07-12 | hrights | 조회: 203 | 추천: 0
전국완/ 중학교 교사   세월호 사건이 터진 지도 벌써 넉 달이 되어 가고 있다. 대통령은 '국가개조', '적폐 척결' 등의 어마어마한 용어를 써 가며 세월호 이전과 이후는 확실히 달라져야 하고 달라지겠다고 다짐했었다. 하지만 청와대와 정치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면 무엇 하나 미더운 게 없다. 진상조사도, 특별법 제정도 그들의 정치적 계산 앞에서 한 치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7.30 보궐선거가 여당의 압승으로 끝나면서 청와대와 새누리당은 ‘이제는 경제를 살리자’며 노골적으로 손을 털고 있다.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농성하고 있는 유가족들을 ‘노숙자’ 운운하며 비난하는 여당의원들의 뻔뻔함에도 치가 떨리지만, 선거참패로 특별법 제정은커녕 자신들 코가 석자인 야당의 지리멸렬에 더 절망스럽다. 살아가는 이유였을 자식의 허망한 죽음 앞에서 가슴이 찢어지고 피가 끓었을 유족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재발방지를 위해 엄정한 진상규명과 이를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는 일이 정치인들에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모든 방송에서 클로우즈업해 보여주었던 ‘대통령의 눈물’. 그는 화면 속에서 희생자들의 이름을 부르며 주르르 눈물을 흘렸고, 우리는 그 눈물에서 희망을 가져보려 했다. 그런데 그걸로 끝이다. 100일이 넘도록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절규하는 그들을 어쩌면 이리도 철저하게 외면할 수 있는지……. 세월호 사건 100일 째 있었던 추모제가 끝나고, 행진을 시도했던 유족들의 절절한 요구에 정부당국은 수백 대의 경찰차와 병력으로 응대했다. 어제 오늘 일이 아니겠지만, 끊이지 않고 터지는 군 내 폭행사건을 처리하는 군 당국의 태도도 똑같다. 사건이 터지면 진상조사보다는 은폐하기에 급급하고, 은폐에 실패하면 뒤늦게 찔끔찔끔 사과하고 재발방지 약속하고,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고 사건은 또 터지고……. 사건의 진상규명과 실질적인 재발방지보다는 숨길 때까지 숨겼다가 시간을 끌고 사람들의 건망증을 이용해 차고앉은 자리를 보전하는 게 먼저인 것이다. 실질적으로 개선된 것은 없는데, 자고 일어나면 뻥뻥 터지는 대형 사고들 덕에 많은 사람들이 이제 웬만한 인명사고에는 눈 하나 깜박 안 하는 담대함(?)을 가지게 된 건 아닌지 싶다. 이런 담대함과 건망증이 아니고서는 이 사회에서 살아내기가 어려울 테니 말이다. 어처구니없는 사건과 사고들이 줄을 잇고, 제대로 된 해결도 대책도 무망하다면 정치는 왜 필요한 건지, 피같은 세금은 왜 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몇 해 전 모 방송에서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의 대사가 떠오른다. 현실 속에서 “정치란 정당끼리 치고 박고 싸우는 것, 정 떨어지고 치 떨리는 것, 정기적으로 치사한 짓 하는 것, 정 줄만 하면 뒤통수치는 것, 정상인은 없고 치기배만 가득한 것, …… 정리하면 정마담 치마폭보다 더 구린 것.”이란다. 지난 7월 24일 `세월호 참사 100일 추모 시낭송 그리고 음악회`가 열린 서울 시청광장에서 가수 김장훈씨가 이보미양이 생전에 남겨놓은 영상과 함께 <거위의 꿈>을 부르고 있다. 사진 출처 - 한겨레21 세월호 사건으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유족의 아픔을 같이 아파하기는커녕 한쪽에선 ‘보상금’ 들먹이며 ‘시체장사’로 폄훼하고 있고, 정부와 여당은 이런 분위기를 나서서 조장하고 있다. 특별법 타령은 그만하고 보상금이나 챙겨서 꺼지라는 투다. 이제 그만 경제를 살려야한다는 거다. 도대체 누구의 경제를 살리려는 건가? 정치가 이런 것이고, 정치인들이 이런 족속들이라면 우리는 그들에게 권력을 주어선 안 되 는 거였다. 그들이 ‘국민’을 내세워 사욕을 채우고 우리 위에 군림하도록 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눈곱만큼의 진정성도 없는 자들이 거짓시늉으로 권력을 휘두르게 놔둬서는 안 되는 거였다. 정치란 원래 그런 것이고, 정치가란 작자들도 원래 그런 거라고 손놓고 있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세월호 100일 째에 진행된 문화제에서 고인이 된 이보미양은 가수 김장훈씨와 함께 ‘거위의 꿈’을 듀엣으로 불렀다. 영상 속에서 노래하는 딸아이를 바라보며 실신할 듯이 절규했던 어머니의 모습에 아직도 가슴이 먹먹하다. 20일이 넘도록 단식을 끝내지 못하는 세월호 유족의 모습을 외면하지 못하고, 함께 단식에 참여한 가수 김장훈씨를 보며 우리 정치가 저버린 ‘인간에 대한 예의’를 생각한다.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다. 서로 기대고 지탱해 주어야 살아갈 수 있기에 ‘人’일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드라마 속 주인공이 바라는 정치는 이런 것이었다. “근데 내가 바라는 정치는 정성껏 국민의 삶을 치유하는 것, 그거예요.” “정치요? 그까짓 게 뭔데요? 못사는 사람은 잘 살게, 잘 사는 사람 베풀게 하면 되는 거잖아요.” 옳고 그름이 바로 서지 않는 지금, 기득권자들이 ‘국민’의 이름을 훔쳐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짓밟는 지금, ‘정치’란 함께 살아야 하는 우리들의 매순간의 삶이며, 그래서 결국 우리 개개인 모두가 지고 가야 할 우리들의 몫이라는 걸 무겁게 깨달아야 한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213 | 추천: 0
허창영/ 광주교육청 조사구제팀장, 전임 간사 최근 들어 ‘안전’이라는 말 참 많이 보고 듣습니다. 지금도 그저 기가 막히기만 한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우리사회는 안전이라는 말이 화두가 되었습니다. 얼마 전 있었던 6․4 지방선거에서도 거의 모든 후보가 빠트리지 않고 얘기했던 말이 안전이었습니다. 시장은 안전한 도시를, 교육감은 안전한 교육환경을 약속했습니다. 정부부처에서도 안전과 관련한 다양한 정책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이제 곧 우리사회는 정말로 안전한 사회가 되어 ‘안전할 권리’가 충분하게 보장될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저는 지금 나오고 있는 안전과 관련한 정책들이 하나같이 못마땅하기만 합니다. 현 정부가 집권 초기에 국민의 안전을 강화하겠다며 ‘행정안전부’를 ‘안전행정부’로 만들었던 삽질과 다르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 삽질은 이제 ‘국가안전처’를 만들겠다는 것으로 가고 있는데, 이것조차도 그대로 닮아 있습니다. 다들 안전과 관련한 부서를 만들겠다, 위원회를 만들겠다, TFT를 구성하겠다는 발상들입니다. 이런 점에서 답답합니다. 그 답답함을 얘기하기 전에 우선 하나 묻겠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재난’인가요? 아니면 원칙 없는 규제 완화와 자본의 탐욕, 관료들의 불감증, 석연찮은 의문들이 복합적으로 만든 ‘인위적 위험’에 의해 발생한 ‘인재’인가요? 사실 세월호 참사에 대해 우리사회가 ‘인재’라는 결론에는 어느 정도 합의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대응은 ‘재난방지’ 또는 ‘사고예방’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재난을 방지하고 사고를 예방하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이에 대해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체계를 만들고 최대한 피해를 줄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또 이런 상황이 벌어졌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교육하는 일도 빼 놓을 수 없는 일입니다. 생존력을 높이기 위해 수영 등 기술을 익히도록 하는 것도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겠지요. 필요하면 한 달에 한 번 하는 ‘민방위 훈련’을 전 시민이 참여하는 ‘재난대응 훈련’으로 한다고 해도 막지는 않겠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런다고 세월호 참사와 같은 일이 또다시 일어나지 않을까요? 정말로 안전들 하신 겁니까? ‘인위적 위험’이 만든 일에 ‘재난대응’만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것이냐 말입니다. 위험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 보다는 위험이 발생한 후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느낌입니다. 자본의 탐욕스런 작동이 가능하게 했던 원칙 없는 규제 완화와 관료들의 불감증은 쳐다보지도 않는 느낌입니다. 그러니 ‘세월호 특별법’에서 국민들은 ‘진실규명’을 외치는 반면, ‘교통사고’라고 생각하는 한심한 작자들은 ‘목숨값 문제’나 ‘특례’로 몰고 가려는 것이겠지요. 애초부터 그 이면의 진실은 캐고 싶지도 않았고, 인위적 위험을 제거하려는 의지는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유가족들의 빈소에서 사진이나 찍는 작자들 아닙니까?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단식 농성 중인 서울 광화문 광장 단식 농성장의 모습. 사진 출처 - 민중의 소리 우리사회는 이미 ‘총체적 위험사회’입니다. 세월호 참사도 거기에서 비롯됐고, 이를 풀기 위한 해법도 그 위험요인을 줄이는 것에서 찾아야 합니다. 무너지려는 둑을 손으로 막는 것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위험요인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해야 합니다. 원인을 알 수 없으면 결과 역시 막을 수 없는 것이니까요. 교육만 해도 그렇습니다. 세월호 참사에서 가장 큰 희생을 치른 것은 학생들이었습니다. 때문에 교육 당국의 충격은 매우 컸고, 반성과 대안들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대책이라고 하는 것들이 수학여행을 보내지 않는다거나, 안전교육을 강화하고 안전관리 체계를 수립하겠다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쉽게 얘기하자면 재난에 대한 대응 외에는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습니다. 늘 어떤 사고가 벌어지면 나오는 얘기들 딱 그 수준입니다. 하지만 학교를, 또는 아이들을 정말로 위험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미 우리사회에서는 한 해 200여명의 아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습니다. 광주에서는 지난 21일에도 한 꽃다운 18살 청춘이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죽음을 선택하도록 만든 우리사회의 책임은 회피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계속되는 아이들의 죽음에 대해 ‘자살’이 아니라 ‘사회적 타살’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교육에 대한 총체적 고민 없이 재난대응을 잘 한다고 이런 죽음을 막을 수 있는 것일까요? 지금은 사회 전체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때입니다. 몇 몇 주변부적인 일들을 ‘땜빵’한 것으로 면죄부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세월호 참사가, 294명의 억울한 죽음이 주는 교훈은 제대로 된 ‘국가개조’를 하라는 것입니다. 자본의 탐욕을 제어하고, 이를 확고하게 하는 법과 제도를 정비하고, 기업의 부품으로 전락한 교육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소수의 기득권에 의해 권력이 동종 교배되는 현상도 막아야 합니다. 그 출발이 바로 세월호 참사에 대한 ‘진실규명’과 ‘책임자 처벌’입니다. 어느 날 너무도 당혹스러운 시신으로 나타난 유병언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 씌워서도 안 됩니다. 우리 국민들은 ‘사실’ 뒤에 숨어 있는 ‘실체적 진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를 위한 수사권과 기소권 하나 내놓지 못하면서 국가를 개조하겠다는 것도 웃기는 말입니다. 그리고 사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그것도 못한다면……, 차라리 국가를 포기해야겠지요.
2017-07-12 | hrights | 조회: 205 | 추천: 0
이현정/ 흥사단 민족통일운동본부 부장 고등학생 수 십 명이 지금 국회를 향해 도보행진 중이다. 바로 4.16 세월호 참사 생존 학생들이다. 어제 출발하여 오늘 새벽 2시까지 걷고, 다시 아침부터 걷고 있다. 이 글이 나가는 시점에서는 국회에 도착했을 것이다. 그리고 국회에서 단식, 노숙 농성 중인 부모님들과 희생당한 친구 부모님들을 만난다. 끝내 책상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국회 국정조사 특별위원회가 무늬만 특별법으로 누더기로 만드려는 것에 나섰다. 더 이상 정부와 국회를 믿을 수 없다는, 희생당한 친구들과 선생님을 향한 간절한 몸부림이다.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는 여름의 아스팔트를 걷는 학생들은 힘들어했다. 그러나 수 백 명의 시민이 함께 걸어주고, 또 거리에 나와 박수와 간식으로 응원해주니 힘들어도 지치지는 않는단다. 그러면서 본인들이 할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다며 1박2일 도보행진을 펼쳤다. 도보행진 모습 사진 출처 - 한겨레 난 이 학생들이야말로 민주주의 사회의 ‘좋은 시민’이라고 본다. 한나 아렌트의 책 <공화국의 위기>에 언급된 것처럼 좋은 국가를 만들기 위한 시민불복종은 위법행위이거나 과격한 행동이 아니다. 좋은 시민으로서의 존재방식이다. 프랑스에서는 고등학생들이 이주자 추방을 반대코자, 또 자신들의 수업시간 연장에 반대코자 거리에 나와 집회시위를 펼친다. 이들 또한 좋은 시민의 존재방식을 이렇게 표출해왔다. 어느덧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는 무관심 또는 혐오 속에서 ‘도망자 민주주의’가 되어버렸다. 셀든 윌린의 얘기처럼, 우리 사회의 대의민주주의제는 시민들의 정치참여를 극도로 제한해버렸다. 이러한 제한된 틀에서 시민 스스로가 사유하지 않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이뿐인가. 민주주의가 도망쳐버린 자리에 시민들은 정치엘리트들의 비민주적 행태에도 그냥 구경꾼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결국 한국 사회도 슬프게도 구경꾼 민주주의로 확장되어버렸다. 그러면서 최근 위법적인 절차와 공권력이 남용되는 밀양 송전탑 설치, 강정 해군기지 건설, 쌍용자동차 불법 해고 등에서 시민들은 구경꾼으로 몰락하고 말았다. 지난달 밀양에서 경찰 수 천 명이 765,000v 송전탑 설치 반대 농성 중이던 70, 80대 동네 노인들과 기도중인 수녀들을 강제로 끌어냈다. 움막은 강제 철거되었고,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할머니들은 옷 하나 걸치지 않고, 온 몸에 쇠사슬을 묶어 더 이상 억압하지 말라고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당시 할머니 편지에는 이는 국가사업이 아닌 개인사업이고, 발전소 핵폭발하면 누가 책임질 것이며, 국가가 법도에 어긋날 일을 하지 말고, 물질만 탐하지 말고 좋은 나라를 만들며, 이것은 정치가 아니다는 이유 있는 항변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경찰 공권력에 의해 강제로 진압되었고, 노인들의 부상 후송이 있었다. 이후 나는 여기에서 소름끼치는 사진을 보았다. 강제 집행 이후, 여경들은 그 현장에서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며 환하게 웃는 얼굴로 기념촬영을 한 것이다. 무서웠다. 저 ‘사유 없는 복종’이. 좌측: 할머니 진압 / 우측: 경찰 기념촬영 모습 사진 출처 - 프레시안 한나 아렌트는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유태인 학살 범죄자 아이히만의 재판을 오랫동안 지켜보면서 ‘악의 평범성’을 강조하였다. 군인으로서 상사의 명령을 따랐던 아이히만의 근면성 자체가 범죄는 아니었으나, 자신의 행동의 의미를 사유하지 않은 것이 큰 범죄라는 것이었다. 결국 아렌트가 강조한 것은 사유 없는 복종에서 나오는 인간의 ‘악의 평범성’이었다. 저 밀양 여경들의 모습은 다르지 않은 건지. 또 하나. 난 2011년 나경원 서울시장 후보의 인권유린 장면이 기억난다. 불빛이 강한 영화조명을 켜놓고 카메라와 기자들 앞에서 장애가 있는 아이 알몸 목욕을 시키던 그 끔찍한 장면을 잊지 못한다. 너무 큰 충격이었다. 이것이 진정 장애아 복지정책 홍보활동이었던가. 그걸 지켜보는 유권자들이 그들의 진정성을 어떻게 보았을까. 그녀가 이번에 7.30 재보궐 선거에 출마하면서 국가를 위해 나왔다던데, 진정으로 권력을 위한 국가가 아닌 시민국가 모습을 생각해달라는건 무리일까 반문해본다. 앞서 말한 단원고 학생들의 국회행 1박 2일 도보행진, 그리고 유가족들의 국회 앞 단식과 노숙농성은 좋은 정치를 펼치지 못하는 대의제 불신에서 나온 시민들의 불복종 운동이다. 좋은 시민으로서의 당연한 존재방식을 직접행동으로 표출한 것이다. 현재 무늬만 특별법이 되어가고 있다. 청와대에서는 야당이 요구한 269건 자료 중 단 13건만 제출하였다. 대통령은 4.16 사고 당일 행방이 묘연하다. 여당 의원은 유가족들에게 막말을 해댄다. MBC 방송국은 증인 출석도 하지 않았다. 이러한 가운데 사유하는 시민으로서 희생자 가족들과 생존자 가족, 학생들이 앞장서 나서고 있는 것이다. 도망자, 구경꾼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들은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하는 것일까. 지금은 ‘시민적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사회적 아픔을 공유하고, 스스로 끊임없이 사유하고, 정의를 얘기하고, 시민불복종 행동을 펼쳐야 할 때이다. 더 이상 도망자로, 구경꾼으로 살아가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숭고한 시민적 지위’를 스스로 내팽개치는 꼴이 되겠다. 지금 우리를 둘러싼 많은 사회적 문제점들에 나서자. 그럼 우리 사회는 분명코 시민적 지혜가 더 많이 발현되는 좋은 곳으로 바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의 역사가 바로 그 분기점이 될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말을 인용해본다. “역사는 이렇게 기록할 것이다. 사회적 전환기의 최대 비극은 악한 사람들의 거친 아우성이 아니라, 선한 사람들의 소름끼치는 침묵이었다고.” 우리 도망자, 구경꾼 민주주의를 벗어던지자. 그리고 끊임없이 사유하자.
2017-07-12 | hrights | 조회: 272 | 추천: 0
이상재/ 대전충남인권연대 사무국장 6·4 지방선거가 끝났다. 길게는 1년여 전부터 후보자의 하마평과 선거구도, 여야의 이해득실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술 안주거리를 제공해 주던 선거가 끝나니 어느덧 올해의 상반기도 훌쩍 지나가 버렸다. 충청지역은 대체로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이 선전한 것으로 평가받는 분위기이다. 대전시장과 세종시장선거에서 처음으로 새정치민주연합(구 민주당계열 포함)의 후보가 당선되었고 충남과 충북도지사도 새정치민주연합 후보가 재선에 성공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번 충청지역 지방선거의 가장 놀라운 결과는 이른바 진보교육감 후보의 대거 당선일 것이다. 대전시를 제외한 세종시와 충남, 충북에서 진보성향의 후보들이 사상 처음으로 지방 교육행정의 수장이 되었다. 대전도 이런 분위기속에서 진보교육감이 당선될 가능성이 높았지만 4년 전 선거에서는 후보를 구하지도 못했던 진보후보가, 이번 선거에서는 두 명이나 나와서 시민들을 헷갈리게 하더니 결국 2,3위로 나란히 낙선하고 말았다. 대전의 결과야 이제는 어쩔 수 없는 것이고 다른 충청지역 세 곳에서는 당당히 진보교육감들이 첫발을 내딛었는데 지역 교육정책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던 학부모와 시민들은 기대와 호기심어린 심정으로 진보교육감 시대를 맞이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당선된 진보교육감들의 공약을 살펴보고 나니 왠지 모를 허전함이 밀려온다. 한국사회에 진보교육감에 대한 존재감을 확실히 보여주었던 대표적인 정책은 ‘혁신학교’와 ‘학생인권조례’일 것이다. 충남, 충북, 세종에서 당선된 교육감의 공통적이며 대표적인 공약은 ‘혁신학교’의 도입이지만 ‘학생인권조례’는 충남을 제외한 두 곳의 공약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나마 충남의 김지철 교육감은 ‘학교가기 좋은날! 폭력 없는 학교’라는 큰 공약카테고리 안에 있는 여러 실천공약중의 하나로 ‘학생인권조례 제정 및 교권보호정책 추진’이라고 되어 있을 뿐이다. 아예 문구조차 찾아볼 수 없는 다른 두 지역 보다야 낫지만 학생인권조례의 참의미를 살릴 수 있을지, 또 다른 공약과의 비중을 비교해볼 때 과연 제정이 제대로 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의구심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한국사회의 학생들이 겪고 있는 여러 가지 어렵고 불편한 현실들을 감안할 때 ‘학생인권조례’는 여전히 유의미하며 강력하게 요구되는 정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왜 ‘진보’를 표방하는 교육감후보들이 이번 선거에서 ‘학생인권조례’를 애써 무시하거나 비중을 약하게 두었을까? 각 선거캠프가 내 놓은 공약 하나 하나의 전후 사정을 완벽하게 파악 할 수 없는 내 처지에서는 그 이유를 뭐라 단정 짓기는 쉽지 않다. 그래도 그 이유를 어렴풋하게라도 추측하자면 ‘부담감’이 아니었을까 싶다. 대전과 충남은 전국적으로도 교육집행부나 시민사회단체에서 ‘학생인권조례’나 그 비슷한 것도 제대로 추진한 적이 없는 학생인권만 놓고 보면 아주 보수적인 지역에 속한다. 충북은 시민사회단체에서 ‘주민발의 충북학생인권조례제정운동본부’를 결성하고 학생인권조례 제정을 추진했지만 2013년 당시 이기용 교육감이 충북교육청법제심의위원회의 결정을 구실삼아 충북학생인권조례안을 최종 각하 처분해버리고 말았다. 작년까지 ‘충북학생인권조례제정운동본부 상임대표’를 맡았던 김병우 신임 충북교육감 당선자는 이 과정에서 지역의 학생인권조례를 반대했던 강력한 보수여론을 의식한 때문인지 교육감직 인수위원회 공식 의견으로 학생인권조례를 재추진하는 것은 아니고 ‘교육주체권리헌장'을 만드는 것이 정확한 공약이라는 발표까지 했다. 경기도와 서울에서도 반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한 때 진보교육정책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학생인권조례가 불과 몇 년 사이에 진보교육감 후보에게 부담스런 정책이 돼 버린 것이다.   충북학생인권조례제정운동본부가 지난 2013년 3월28일 충북도교육청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전국 최초로 주민의 권리 행사로 성사된 학생인권조례안을 각하 처리한 이기용 교육감은 사퇴하라"고 촉구했다. 사진 출처 - 충청일보 한국사회에서 학생과 청소년이 보호받고 존중받아야 할 ‘인권’이 가야할 길은 아직까지 너무나 멀게 느껴지는데 진보교육감의 공약에서도 제대로 된 ‘학생인권조례’를 찾지 못하는 심정은 안타깝기만 하다. 학생은 학교안의 독립적인 구성원인 주체로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감시하고 보호받아야만 하는 미성숙한 존재로 여겨지는 것이 학교현장의 현실이다. 내가 살고 있는 대전의 경우만 해도 0교시와 야간자율학습은 당연한 것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학생에 대한 체벌, 언어폭력 또한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이 많은 학부모와 교사들의 의견이다. 이미 학생인권조례를 제정한 지역에서 간간히 들려오는 ‘학생인권조례’의 부작용과 피로감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근대적인 교육정책이 시행된 이후 일제 강점기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거의 변하지 않았던 것이 우리 사회의 ‘학교’라는 시스템이다. 그 시스템 속에 학생인권조례를 정착시키려고 한다면 일정 정도의 진통은 감수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미국의 인지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는 그의 책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에서 정치 공간에서의 ‘프레임(frame)’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위력을 발휘한 ‘세금폭탄’ 논쟁과 같이 옳고 그름을 떠나 상대가 설치해 놓은 프레임에 갇혀 버리면 ‘사실’은 더 이상 힘을 갖지 못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프레임은 사실을 이긴다. 프레임은 유지되고 사실은 튕겨나간다.” 는 것이다. ‘학생인권을 강화하면 할수록 교권은 더 추락 한다’, ‘청소년은 권리주체가 아니다’, ‘학생인권조례의 내용은 너무 진보적이고 불안하다’는 명제들은 사실이 아님을 교육 선진국의 사례나 많은 교육 전문가의 견해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 프레임에 갇혀서 치른 선거가 지난 6·4 교육감선거는 아니었는지 우려스럽다. 지역의 진보교육감들이 허구의 프레임을 과감히 깨고 ‘학생인권조례’ 제정과 시행을 통해 제대로 된 진보 교육정책을 펼쳐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앞으로 4년 내내 가져볼 것이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264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