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에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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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에가시’는 현장을 살아가는 활동가들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칼럼 공간입니다.

‘목에가시’는 김형수(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 총장), 신종환(공무원), 윤요왕(재)춘천시마을자치지원센터장), 이동화(아디 활동가), 이승은(경찰관), 이원영(용산시민연대 공동대표), 정한별(사회복지사) 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송채경화/ 한겨레 기자 나는 흡연자다. 원래는 술을 마실 때만 남에게 빌려 피우는 ‘비상시적’ 흡연자였지만 지난해 정치부로 옮긴 뒤부터는 ‘상시적’ 흡연자가 됐다. 여성으로서 ‘나 흡연자요’라고 선언하는 것은 놀랍게도 21세기 대한민국에서는 여전히 대수로운 일이다. 물론 화장실에 숨어서 담배를 피우던 암울했던 여성 흡연자의 시대는 진작에 갔다. 이제는 여자든 남자든 웬만한 화장실은 모두 금연이다. 그렇지만 여성들은 여전히 자신이 흡연자임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나처럼 ‘대놓고’ 담배를 피우는 여성은 아직도 따가운 시선과 불편을 감수해야만 한다. 그래도 서울에서는 워낙 눈에 보이는 여성 흡연자들이 많고 금연구역과 흡연구역이 비교적 잘 구분돼 있기 때문에 큰 불편은 없다. 실외 흡연공간에서 담배를 피우면 흘끗 쳐다보는 이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거야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면 될 일이다. 그러나 지역에만 내려가면 여전히 담배 피우는 여성은 관심(?)의 대상이 된다. 지난 총선 때 취재차 부산에 내려갔는데 엄연히 흡연구역에서 담배를 피고 있었음에도 주민들로부터 손가락질과 혀차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지난달 김두관 경남도지사를 인터뷰하러 경남도청을 방문했을 때는 도청 공무원에게 이런 이야기도 들었다. “최근 한 여기자가 경남도청에 왔었는데, 밖에서 담배를 피우더라. 우리 도청에서 담배를 피운 최초의 여자가 됐다. 대단하다.” 도청에서 ‘대놓고’ 담배를 피운 것이 신기록으로 남은 것이다. ▲ 여성의 흡연모습은 각인된다. 영화 <타짜>의 한 장면.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더구나 최근 들어 혐연권이 강조되면서 남녀를 떠나 일반 흡연자에 대한 인식이 자체가 점점 안 좋아지고 있다. 언젠가부터는 방송에서도 담배를 피우는 장면이 나오지 않게 되어 버렸다. 버스나 기차에서 담배를 피웠던 시절에는 흡연에 자체 대해서는 관대했지만 남성주의 문화가 강했기 때문에 여성 흡연이 백안시됐었다면, 지금은 혐연권이 강조되면서 동시에 여성 흡연에 대한 거부감은 바뀌지 않아 이중고를 겪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런 거부감에는 임신과 출산 등 건강에 대한 우려를 동반한 과도한 ‘여성 보호’가 포함돼 있어서 여성 흡연 자체가 ‘악’으로 받아들여지는 상황이다. 흡연으로 인한 가장 난감한 상황은 내가 출입하는 국회에서 상시적으로 일어난다. 국회 기자실 출입구 옆에 흡연구역이 마련돼 있는데, 하필이면 그곳이 국회에 견학온 학생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곳이다. 봄이 되면서부터 하루에도 몇번씩 전국에서 올라온 초·중·고등학생, 심지어 유치원생들이 두줄로 길게 늘어서 걸어다. 그곳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으면 열맞춰 걸어가는 수십명의 학생들 가운데 나를 쳐다보지 않는 학생들은 단 한 명도 없다. 이들 가운데는 입을 손으로 가리고 매우 충격적인 장면을 본 듯이 놀라거나, “저거 봐. 저 여자 담배 피운다”라고 큰소리로 떠드는 아이들도 있다. 나와 생각이 다른 어른들로부터의 손가락질이야 별 일 아닌듯 넘어가면 되지만, 아이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으면 참 난감한 기분이 든다. 흡연은 무조건 나쁘고 건강에 해로우니 절대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치기 보다는, 흡연도 개인의 기호로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만 않는다면 존중받아야 마땅한 권리라는 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여성 흡연 ‘커밍아웃’이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되길 기원하며, 나도 이제 부모님께 커밍아웃을 해야겠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3116 | 추천: 8
임아연/ 당진시대 기자 나는 항상 B급, 아니 C급이었다. 몇 편 안되는 나의 지난 글들을 읽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듣보잡(듣도 보도 못한 잡다한)’ 지방대학 출신에 가난한 두부장사의 막내딸로, 천 만 원이 넘는 학자금대출 빚을 안고 작은 지역 언론사에서 사회에 첫 발을 내딛게 된, 그야말로 B급도 안 되는 ‘C급 인생’이다. 실력 탓이 크겠다. 썩 좋지 않은 머리로 ‘죽어라’ 공부하지 않았으니 지방대를 갔던 것이고, 이렇다 할 스펙도 없으니 중앙 언론사엔 고개도 못 내밀었다. ‘A급 인생’을 꿈꿔보지 않은 건 아니다. 흔히들 말하는 성공에 대한 욕심이 없던 것도 아니다. 비겁하게도 나는 'A급 인생'을 살기위해선 필수적일 수밖에 없는 경쟁에 뛰어드는 게 자신 없었다. 길게 줄 세워진 대열에서 차라리 뒤부터 세는 게 편할지도 모르는 내 위치를 확인하는 게 나는 솔직히 두렵기도 하고 ‘존심 상했다.’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지 않는 것”처럼 ‘C급 인생 지질이’라고 해서 자존심이 없는 건 아니니까. 우습지만 이런 나 역시 초등학교를 거쳐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시험 점수 1, 2점 가지고 웃었다, 울었다 했다. 경쟁은 상위권에서만 피터지게 이뤄지는 것은 아니었다. 중위권에서도, 하위권에서도,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자신을 발견하기위해 모두가 아등바등 했다. 누군가를 누르고 올라서고 싶어 안달하고 그 목적이 달성되면 뭔지 모를 짜릿함을 느꼈다. 그러나 이 쾌감은 이내 또 다른 경쟁으로 무너지곤 했다. 우리의 존재감은 매순간, 경쟁을 통해서만 확인됐다. ▲ 사진 출처 - 한겨레 (일러스트레이션 김선웅) 비교와 경쟁은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10대 땐 점수로, 20대 취업 전엔 '스펙'으로, 취업 후엔 결혼으로, 30대 땐 연봉, 4~50대엔 재산과 자식으로, 그렇게 사회에서 값이 매겨진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모든 인간은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갖는다"는데 경쟁사회의 프레임에 갇혀 있는 한 그 누구도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경쟁과 비교로 미쳐있는 세상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방법으로 나는 'C급 인생'을 자처하기로 했다. 당신들이 정해 놓은 낙인을 내게도 찍어 놓길 바란다면, 어떻게든 A급 도장 받으려고 쫒아 다니거나, 하급 도장 피하려 도망 다니지 않겠다. 그냥 나는 행복한 'C급'으로 살겠다. '함께', 그리고 '연대'라는 말을 생각한다. 누군가가 이기면 지는 사람이 생기고, 누군가가 우월감을 가지면 열등감을 갖는 이들이 있다. 때로는 상대방이 자신에 대해 느끼는 열등감을 에너지로 쓰는 사람도 있고, 그 반대편에선 도태된 자신에 대한 실망과 피해의식으로 절망하고 있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함께 연대하자"는 말은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보듬는 말이다.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을 경쟁을 통해 줄 세우는 게 아니라, 주저앉아 있는 사람을 부축해 함께 가는 것이다. 좀 모자라고 초라한 나 같은 이들도 서로 다독이며 같이 살아갈 수 있는 사회였음 싶다. 나이, 외모, 학벌, 재산, 부모에 까지 점수를 내고 급수를 매겨 결혼하는 세상에서 최상급은 언제나 주목 받지만, 주목받지 못하는 나와 내 주변의 사람들이 있다. 이들의 이야기에 더 귀를 기울이기로 했다. 다른 '언론고시생'들에 비하면 길지만은 않은 몇 달간의 서울살이를 접고, 당진이라는 작은 도시로 내려왔다. 한창 땅을 파헤치고 바다를 메워 공장 짓는 소리가 요란하지만 아직까지는 소박한 사람들의 소소한 이야기로 가득한 곳이다. 지긋지긋했던 경쟁으로부터 도망쳐 '오프로드'로 밀려난 내가 이들과 부데 끼며 살게 될 날들이 정말로 기대된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219 | 추천: 0
손상훈/ 소셜리서치앤멘토르 기획국장 종교인 도박, 혁신과 용퇴사이만의 문제인가 2년간 은둔과 잠적을 했던 수경스님과 불교계의 선방스님들이 조계종 총무원장 용퇴를 주장하고 나섰다. 성명서 발표이후 계획은 없고 현 총무원장의 반응과 평신도인 재가불자들의 입장을 보고 판단하겠단다. 시나브로 종교를 갖고 있는 53%종교인들도 우리 자신들이 믿는 종교계지도자들은 도박이나 성매매에 자유로운지 같이 살펴볼 일이다. 친종교성향을 갖는 무종교인들은 정보가 없으니 더 괴롭다. 종교비판에 자유로운 온전한 무종교인들은 배설적인 비판과 즐겁게 관전하는 상황이다. 이러한 때 쓴 소리를 시기적절하게 했던 종교계 시민단체 현직 일꾼이나 전직 활동가들은 무얼 하고 있는 걸까! 현재까진 성명서와 겹치는 조직 출범밖에 없다. 주요한 불교단체의 평신도 지도자들은 눈치만 보고 있거나 ‘재수가 없었다’거나 ‘상습도박이 아니어서 무죄판결을 받는다’는 등 국민의 눈높이와 동 떨어진 이야기만 들린다. 무능한 활동가였던 내가 보기에도 한심하거니와 처량해 보이기도 하다. 내가 몸담았던 교단자정센터는 개점 휴업상태이고, 심지어 주변에선 폐업했다는 주장까지 한다. 부끄럽고 가슴이 아프고 쓰리다. 종교의 가르침이 살생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수경스님을 비롯한 열 분의 스님들 주장만이 전부일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왜냐하면 현 총무원장스님은 자신의 자리를 걸고 용퇴하거나 그동안의 삶을 반성하고 죽을 각오로 해결을 할 의지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저 최고경영자인 시이오(CEO)자리에서 난 최선을 다하고 있고 나의 진정성을 믿어달라는 것이다. 진정성은 이미 보여준 현 총무원장 스님이다. 역대 총무원장이 하지 못한 다양한 소통과 인내도 보여주었다. 여기까지다. 아무리 진정성을 앞세워 조계종을 잘 먹여 살리겠다고 해도 실력이 없다는 평가를 받고 벼락같은 혁신의 모습이 부족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당선이후 벌인 다양한 수익사업들의 수치가 보여준다. 모든 것을 걸어야 새로운 길이 보이는 법이다. 총무원장 스님의 이런 모습도 확인하지 않는 불교시민사회가 더 안타깝다. 그럼 무엇을 해야 할까! 간단한다. 그동안의 장점인 진정성을 살려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추상같은 혁신을 하던지, 선방스님들의 주장처럼 수임기구를 만들어 질서 있게 용퇴하는 방법 두 가지 가운데 하나이다. 그래도 아쉽다면 황당한 꿈을 ‘목에가시’처럼 상상해보면 어떨까! 개그콘서트를 만들어 국민들을 위로하는 천재들이 나타나 네 가지를 만든다. 모든 종교계 지도자들 가운데 도박을 했거나 평신도들이 용납하기 힘든 부정행위를 했다면 스님, 신부님, 목사님 모두 나서서 ‘반성박람회’를 개최하게 평신도들이 나서는 것이다. 개그콘서트 '네가지‘처럼 같이 공감하는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내실 있는 종교인들의 큰 반성의 울림이 평범한 종교인들의 다친 가슴을 치유할 수 있게 크게 웃고 우는 축제를 열어보는 상상이다. 밤새워 놀이문화, 친교라는 허울로 밤새워 화투, 포커를 했던 모든 종교지도자분들이 공명하고 화답해 주기를 말이다. 2010년 문수스님 입적 후 은둔에 든 수경스님. 평신도인 재가지도자, 불교시민사회 제 역할 못해 더 실망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말처럼 불교계 시민단체의 지도자였고, 조계종을 대표하던 사찰의 주지를 맡았던 이가 도박사건에 연류된 것은 부끄럽고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고 불교계 시민사회는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 나를 비롯해 더 반성해야 하는 재가불자 지도자들이 더 큰 문제다. 최근 몇 주 사이에 모두 현 총무원장에 의존하거나 눈치 보는 입장 말고는 들어보질 못했다. 폭로하는 사람들만을 비판하거나 비난한다. 불교계시민단체를 이끌어온 대표나 현직 활동가들은 ‘교단자정센터’에서 10여 년간 추진했던 종교자정 메뉴얼과 내부규정의 절차인 당사자 확인도 하지 않고, 구체적인 활동계획도 없이 관망만 하겠단다. 관망이란 회원들에게 향후 계획을 제시하는 예상지도에 따라 여지를 두고 지켜보는 방식이다. 교단자정센터의 내부적인 활동계획도 없이 관망한다는 것은 직무유기뿐만 아니라 대응시기를 놓쳐 종교계 시민사회 전체를 먹칠하거나 똥칠하는 일이다. 종교계 자정을 10여 년간 이끌어 왔던 평신도 재가불자조직이 활동의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고 있다. 교회개혁실천연대, 개혁을 위한 종교인네트워크를 함께 했던 평신도 종교지도자 활동가들은 지금 당장 새로운 제안을 위한 모임을 주선해야 한다. 이게 마중물이고 품앗이, 두레이다. 모든 종교계 평신도, 지도자, 시민사회 함께 나서야 불교계 시민사회가 제대로 종교자정을 못하고 있다는 생각을 같이 한다면, 광화문광장이나 시청마당, 큰 사찰에서 조직적이고 공개적인 반성운동이 이웃종교와 함께 기획되고 제안해야 한다. 교단을 개혁하려는 모든 양심적인 종교인들이 모여 만민 공청회를 열어 허물을 드러내길 바란다. 수경스님 등 선방스님들이 던진 ‘용퇴’를 재가불자 지도자들은 어떻게 화답할까! 뼈를 깎는 쇄신과 혁신으로 이어갈까, ‘네가지’를 만들까! 눈 밝고 지혜로운 평신도들의 지혜가 융합되길 지켜볼 일이다. 더 뜨거워져 통제 불가능한 여름이 오기 전에..
2017-07-12 | hrights | 조회: 201 | 추천: 0
홍성준/ 투기자본감시센터 사무처장 세금 퍼주기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세 대륙에 걸친 오스만 터키라는 거대한 제국이 있었다. 모든 것의 발단은 제국이 끝내 이긴 크림전쟁이었다. 크림전쟁으로 국채를 발행했는데, 그 국채를 사들인 영국과 프랑스가 채권회수를 직접 하겠다고 나섰다. 핑계는 제국의 조세제도도 못 믿겠고, 야만의 동양의 전제왕정국이라서 제국의 신용도 못 믿겠다는 것이다. 결국, 영국과 프랑스는 수도 이스탄불에 직접 “공채관리국(Public Debt Administration)”을 세워 5,000명의 관리(직원?)를 고용하여 제국 전역에서 세금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조세가 부족하게 되고, 그 때문에 국가재정이 다시 어려워지자 제국은 국채를 더 발행했다. 다시 이를 사들인 영국과 프랑스는 공채관리국을 통해 더 많은 제국의 세금을 빼앗아갔다. 그런 악순환이 30년, 40년 지속되자 제국은 서서히 망해갔다. 더 이상, 제국의 근대적 발전을 위한 투자는커녕, 자신의 고유 영역조차 방비할 비용조차 마련하지 못했다. 결국, 지금의 터키반도와 이스탄불을 제외한 모든 지역은 차례차례 영국과 프랑스의 것이 되었다. 그렇게, 오스만 터키는 망했다. 국가재산 바치기 500년이나 긴 역사를 자랑하는 왕국이 있었다. 너무 길어서 아놀드 토인비 같은 서양학자는 비웃었지만 말이다. 그런 500년의 조선 왕이 어느 날 밤에 자신의 궁궐에서 일본 제국주의 용병과 그들의 앞잡이인 자신이 만든 최신식 군대에 의해 죽음에 내몰렸다. 그냥 공포가 아니라 그의 부인, 민자영은 그날 밤 침입자들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되었다. 그날 이후, 죽음의 공포와 불신 때문에 불면의 밤을 보내야 했다. 그런데 그의 침상을 지킨 사람들이 있었다. 외국의 공사들과 기독교 선교사들이었다. 이들이 있어야 편히 잠이 들었다. 급기야는 죽음의 공포를 피해 자신의 궁궐에서 도망쳐 외국 공관으로 도피하여 살았다. 이 유명한 이야기의 주인공은 이명복, 즉 고종과 을미사변, 아관파천이란 역사적 사건이다. 그런데, 자신의 잠자리를 지킨 대가를 외국인들에게 주어야 했다. 국가의 주요 광산과 전기 같은 국책사업, 철도 같은 기간 교통망, 산림, 토지를 다 내주어야 했다. 잠자리를 제공한 러시아에게는 통 크게 가장 많이 내주었다. 친절한 미국에게는 운산의 금광과 경인선을 내주었다. 잠자리의 안전을 지킨 대가치고는 너무 큰 것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노다지’의 어원이 평안도 운산의 금광에서 노동하는 조선인 노동자에게 미국인 광산주가 “no touch!”라고 하는 야멸찬 멸시의 말이라고 한다. 심지어 광산주가 지역토지를 강탈하고 지역농민을 죽여도 처벌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대한제국”이고, “광무황제”라고 한다. 그리고 “광무개혁”을 해서 근대화를 하겠다고 떠들어 댔다. 물론, 당시에도 이 터무니없는 국가자산의 외국자본 침탈에 저항이 많았다. 조선 최초의 시민단체인 독립협회가 만민공동회라는, 종로에서의 대중 집회를 열어 담당 대신들과 공개토론회를 여는 등 반대여론을 이끌었다. 하지만, 국가 자산을 헐값 또는 공짜로 외국 자본에게 퍼준 조선의 왕은 독립협회를 무력으로 해산시켰다. 그리고도 개혁을 한다고 꼴값을 떨었다. 하지만 국가 재산과 시민을 망가트리며 한 그 개혁은 필연적으로 실패했다. 그리고 망했다. 일본 제국주의가 강해서가 아니라 왕이 잘못해서 조선은 망했다. 맥쿼리와 민자사업 이번 기고의 시작을 두 나라의 망국으로 한 것은 요즘, 같은 심정으로 지켜보고 있는 사건이 있어서이다. 맥쿼리와 소위 민자사업 문제이다. 지하철 9호선의 일방적이고 부당한 50% 고율의 요금인상 문제로 시끄러워지며 이 문제가 사회적으로 크게 부각되었다. 더욱 가관인 것인 서울시가 만류함에도 막무가내로 강행하겠다고 나서니 그 배경에 의혹이 쏠리고 있다. 서울시의 공공재인 지하철 그리고 그것을 운영하는 민간회사와의 부조화와 파열음에는 “맥쿼리”라는 호주의 투자은행, 투기자본이 있기 때문이다. 맥쿼리는 한국에 진출해, 2002년 12월에 맥쿼리한국인프라투융자회사(Macquarie Korea Infrastructure Fund, MKIF) 또는 약칭 맥쿼리 코리아를 설립했다. 아시아 최대 상장 인프라 펀드로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민간투자법에서 허용하는 대한민국의 인프라 자산에 투자를 하는 회사다. 문제는 이들의 수익구조에 있다. 맥쿼리는 서울메트로 9호선(주)에 투자해서 대주주가 된 뒤 그 회사에 고금리 대출을 했고, 수익구조가 악화돼도 정부 보조금으로 그 수익을 보전하게 되어있다.(최소운영수입보장제(MRG)) 서울도시철도 9호선에 연간 영업손실이 26억 원에 불과하지만 맥쿼리 등 채권자에 물어주는 이자는 461억 원이나 된다. 그뿐이 아니다. 국가 재정으로 수익을 내는 것에 만족을 못하는 맥쿼리나 서울도시철도 9호선을 운영하는 여타 자본들은 이용료를 시민들에게 직접 받고 있다. 그것이 이번 고율요금 인상이다. 또, 같은 방식으로 민간자본이 운영하는 고가의 유료도로마다 시민들 원성이 자자한 것이다. 맥쿼리는 전국 8도 주요 14개 교통망 사업에 1조7000억 원을 투자했는데 작년에만 1,628억 원의 이자수익을 올렸다. 앞으로도 짧게는 24년에서 길게는 30년을 국민의 막대한 혈세를 퍼주어야 한다. 거기에 더하여 고가의 이용 요금을 직접 걷고 있다. 이 때문에 이용하는 시민들과 곳곳에서 마찰이 일어나고 있다. 문제점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현재의 민자사업이 가지는 자체의 문제가 있고, 둘째, 투기자본으로서의 맥쿼리 자본의 문제, 셋째, 경제관료, 김앤장 법 등 전문가 집단과 관련된 부패의 문제가 있다. 특히, 맥쿼리 코리아의 이사인 김앤장 출신의 조대현, 세계은행 출신의 송경순, 임대형 민자사업 제도(BTL)를 도입한 경제관료 출신의 윤대희. 이 3인의 역할에 의혹이 쏠리고 있다. 해법 국가의 인프라 건설과 유지는 국가 스스로 세금으로 해야 옳다. 꼭 필요하다면 세금을 인상해야 한다. 지금같이 민간자본, 그것도 외국계 투기자본에게 내맡긴다면, 재정낭비, 세금 퍼주기를 계속 하면, 그 폐해는 상상이상으로 크다. 위에서 거론한 오스만 터키나 조선같이 망국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피해는 다수 시민들이 짊어져야하므로 부당한 것이다. 따라서, 문제의 민자사업 방식에 대한 폐기 또는 전면적 개혁, 투기자본 맥쿼리에 대한 규제와 처벌이 필요하다. 또, 전관예우와 회전문인사로 연결된 전현직 경제관료들의 투기자본과의 결탁 의혹도 규명이 필요하며, 재발방지책도 마련되어야 한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227 | 추천: 0
김현진/ 자유기고가 오원춘 사건은 물론 끔찍하고 무섭다. 게다가 가장 안타까운 것은 피해자가 늦은 시간까지 근무하다 변을 당한 젊은 비정규직 여성이었다는 것이다. 이번 사건으로 인해 경찰의 무능력이 한참 질타를 받았다. 그러나 외국에 다녀온 사람들은 한국의 치안 수준은 세계적인 편이라고 입을 모은다. 나는 외국에 나가 본 적이 없으나 범죄자 검거율이 높다는 통계를 봤으므로 그 말이 맞을 거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 검거율에 기여하는 것은 CCTV 설치나 전 국민이 필수적으로 지문을 국가에 등록해야 하는, 국민을 감시와 관리의 대상으로만 보는 발상에 큰 몫이 한다는 것이 우리나라가 안전하다고 좋아하기에는 찜찜한 점이다. 최근 이자스민씨가 국회의원이 되기도 하는 등 이른바 ‘다문화’에 대한 관심이 뜨거운데 대부분 혐오로 불탄다. 다문화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단문화일까? 주부들이 주로 방문하는 대형 커뮤니티에는 정부의 다문화 정책 반대에 서명해 달라는 글이 심심찮게 올라온다. 지금 우리나라 국민들도 실업 때문에 고통받는데 외국인들이 한국 사람이 일할 자리를 다 빼앗아 버린다는 주장이 가장 흔하고 그 다음으로는 안산이나 가리봉 등 거리 분위기를 외국인들이 다 망친다고 한다. 이번 사건으로 이것저것 알아보기 전에는 나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는데, 외국인 노동자가 신고제라니 일하고 싶은 한국인의 일자리를 빼앗는 모양새는 아닌 셈이다. 즉, 외국인이 꾸역꾸역 입국해서 일자리를 선점해 일하고 싶은 한국인에게서 일자리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사업주가 일할 내국인이 없으니 이만큼의 외국인 노동자가 필요합니다, 라고 국가에 신청을 해야 한다는 거였다. 내가 태어나서 먹어 본 것 중 가장 황홀한 중국음식은 가리봉동 <미미식당>의 음식이었다. 한국어가 씌어 있는 메뉴판도 없었다. 어쨌거나 다문화 사회가 되어 가면서 이런 장점도 있는 셈이다. 그러나 조금이라도 이런 말을 할라치면 너나, 네 가족이 이런 일을 당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물음이 바로 돌아온다. 물론 내가 살아남는다고 해도 내 인생의 상당 부분은 망가질 것이고, 아마 나는 가해자를 평생 미워할 것이다. 그러나 중국인 혹은 조선족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남자라는 종을 미워할 것 같다. 우리 사회는 마음 먹으면 여자 하나 죽이는 건 쉬운 사회다. 특히 보호자 없는 젊은 여성 하나 죽이는 건 쉽다. 그러니 <살인의 추억> 같은 사건이 아직 미제로 남았을 것이다. 여자 뿐 아니라 아이도 그렇다. 한국 사회가 더욱 강퍅해지면서 힘센 놈이 마음만 먹으면 저보다 약한 것 짓밟는 것이 점점 쉬워진다. 사회의 정글화가 심화된다. 얼마 전에도 성폭행당한 후 가해자를 신고했다가 신원이 제대로 보호되지 않아 앙심을 품은 가해자에게 피해 여성이 결국 살해당했다. 남자친구의 힘을 빌려 염산 테러를 한 사건도 그렇다. 십대들도 토막 살인 후 땅에 묻었다. 남자와 여자 구도로 갈라서 보자는 것이 아니라, 사회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부자와 빈자뿐 아니라 강자와 약자간의 거리 역시 까마득하게 멀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다. ▲ 경기도 안산 중앙역 앞에 서 있는 수코초(인도네시아인). 외국인 노동자들은 한국 사회에 젖어들고 싶어 하지만 그들에 대한 편견과 오해 때문에 한국 사람들로 붐비는 번화가에는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서울신문 이런 사회일수록 증오범죄가 늘어난다는 것은 상식이다. 오원춘은 경제적으로는 약자였지만 완력으로는 강자였으므로, 그가 광적인 증오를 표출하고자 했을 때 노동에 지쳐 집으로 돌아가는 젊은 여성은 간단히 희생되었다. 경찰은 그 여성을 구해내지 못했다. 우리나라 뿐 아니라 미국의 경우에도 통계상 살해당한 여성의 대다수가 현재, 혹은 과거의 파트너에 의해 희생당했다고 한다. 점점 약한 사람이 희생당하기 쉬워지는 나라가 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려면, 밟기 쉬워지는 나라가 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려면 우리 사회 구조에 대해 처음부터 생각해야 하는데, 그것은 아주 귀찮고 성가신 일이다. 대신에 조선족이 문제야! 중국 놈이 문제야! 라고 말해 버리는 것은 쉽고 간단하다. 오원춘 사건은 그가 미친놈이었기 때문이지 외국인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한국인이었다고 해서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우습게도, 외국인 노동자는 무섭고 혐오스러운 존재지만 영어 학원의 백인 강사들은 무섭지 않다. 그들도 외국인 노동자가 틀림없지만, 젊은 층이 주로 하는 ‘랭귀지 익스체인지’에서 백인들은 어떤 동네에서 왔든 인기 만점이다. 프랜차이즈 빵집에서도 프랑스인 제빵사가 손수 빵을 굽는다고 소문이 난 서래마을은 누구나 가고 싶어한다. 한국에 살고 있는 영어권의 백인이라면 설사 그가 불법체류를 하고 있다 하더라도 다들 영어로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가 되고 싶어한다. 청년이 잔인하게 살해된 적이 있는 이태원 역시 여전히 인기다. 서래마을과 이태원은 좋지만 가리봉과 안산은 싫은 것이다. 최근 어느 광역시를 방문했다가 침체되어가는 상가를 살리기 위한 시의 계획이 실린 팸플릿을 읽었다. ‘영어마을’을 모델로 한 것 같은 ‘영어상점가’를 만들겠다는 계획이었다. 카페나 식당, 옷이나 액세서리 가게 등 여러 가지 상점을 유치하되 모든 점원을 원어민으로 고용하겠다는 내용이 그 팸플릿에서 가장 큰 글씨로 씌어 있었다. 아마 그들이 말하는 영어에 능한 원어민이란, 절대로 영어를 모국어로 쓴 필리핀은 아닐 것이다. 아까 가 본 대형 커뮤니티에서 어떤 사람들은 요즘 조선족 가정부들이 서로 담합해서 휴일을 요구하고 임금을 올리자고 한다며 무조건 가정부 여권을 주인이 틀어쥐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외국인 노동자의 문제는 사장들이 풀어 줘서 그렇다, 무섭게 할 때는 찍 소리도 못하던 것들이 인권센터(아마 그들 생각에 인권연대 같은 곳은 아마 '주적'일 것이다) 같은 인권팔이(그들의 표현이다)가 끼면서 제 세상인 듯 날뛴다는 의견도 흔했다. 결국 차마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생각이 들고야 말았다. 아,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 보지 않는구나. 불과 몇십 년 전 외화를 벌기 위해 독일에 광부와 간호사로, 중동 지역에 노동자로 떠났던 한국인들도 외국인 노동자였건만 그새 우리나라가 참 잘살게 되긴 한 모양이다. 그러나 그게 꼭 좋은 일 같지만은 않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339 | 추천: -1
이상재/ 대전충남인권연대 사무국장 몇 년 전, 출근하다 내가 탄 택시가 운전사의 부주의로 신호대기하고 있던 버스를 뒤에서 들이받는 사고를 내고 말았다. 꽤 빠른 속도로 가던 터라 운전사는 크게 다쳐서 의식을 잃고 뒷좌석에 앉아있던 나도 조수석의 시트가 찢어질 정도로 세게 부딪치는 바람에 온 몸에 타박상을 입어 병원에 한 열흘 정도 입원했었다. 퇴원 후에도 몇 번의 물리치료 끝에 거의 다 나았다는 생각이 들 즈음, 사고 후 처음 택시를 탔는데... 나는 그야말로 식겁을 하고 말았다. 예전 같았으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택시기사의 격한 운전과 한 박자 늦게 밟는 브레이크는 목적지까지 가는 내내 나의 발에 힘이 잔뜩 들어가게 했고 가슴은 몇 번이나 철렁 내려앉았다. 이러한 증세는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가급적 택시를 타려고 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타게 되면 “내 돈 내고 이게 무슨 고생이람......”을 몇 번이나 되뇌게 된다. 93년, 전국을 그야말로 시끌벅적하게 만들었던 ‘대전엑스포’가 열리던 기간에는 정말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대전을 찾았는데 그 틈에 나의 친인척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외삼촌께서 그 당시 일흔 즈음이셨던 외할머니와 때마침 방학을 맞은 외사촌동생과 조카를 비롯한 예닐곱 명의 코흘리개들을 데리고 대전의 이모님 댁으로 오셨다. 한 번 가봤다는 이유로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낮에는 엑스포 구경을 갔었고 저녁밥을 먹고 나서는 외할머니까지 모시고 그 당시 엑스포 개최를 축하하며 매일 밤 벌어졌던 불꽃놀이 구경을 하러 둔산 방면의 신시가지 쪽으로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대포소리와 함께 화려한 불꽃놀이가 벌어지자 아이들은 제각기 탄성을 질러대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외할머니는 승합차 안에서 꿈쩍을 하지 않고 나오시질 않는 것이다. 진짜 대포가 아니라고, 괜찮다고 아무리 설명해도 나중에는 아예 고개까지 숙이고 계신 것이 아닌가? 아이들은 불꽃놀이도 재미있지만 할머니의 이런 반응도 재미있는지 자기들끼리 깔깔거리고.....나 역시 아무리 시골할머니지만 아기같이 너무 순박하신 것 같아 실없는 웃음만 흘리고 말았다. 사진 출처 - 세계일보 그리고 몇 해가 지난 어느 날, 그때 할머니를 모시고 왔던 외삼촌과 말씀을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우연하게 예전 엑스포 때의 얘기가 나와서 다들 웃는 중에 삼촌께서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너그 할머니가 그리 대포소리를 무서버 하능 거는 6.25때 폭격하는 비행기 피한다고 엉겁결에 논 옆 고랑에 빠져서 겨우 살아나신 경험이 있어서 그런 걸 거야”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 사전적 정의로는 충격 후 스트레스장애·외상성 스트레스장애라고도 한다. 전쟁, 천재지변, 화재, 신체적 폭행, 강간, 자동차·비행기·기차 등에 의한 사고에 의해 발생하며 생명을 위협하는 신체적·정신적 충격을 경험한 후 나타나는 정신적 질병이라고 한다. 택시만 타면 간이 콩알만 해지고 놀라는 나의 증상이 ‘트라우마 증상’이라는 걸 안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는데, 외삼촌의 말씀을 듣고 나서는 불꽃놀이 당시의 할머니에 대한 나의 웃음이 정말 죄송스러웠다. 나는 겨우 타박상정도에도 후유증이 남았는데 생사를 오고갔던 전쟁터에서 할머니의 충격과 후유증은 얼마나 심각했을 지에 대한 안타까움과 함께 50년이나 지났는데도 치유되지 않는 ‘트라우마’의 끈질김에 놀라기도 했었다. 문득 해방이후부터 한국전쟁을 포함한 우리의 현대사가 민중들 개개인에게 얼마나 깊은 트라우마를 입혔을까 생각해 본다. 커다란 재난을 비롯한 사고도 많았지만 특히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국가권력에 의한 폭압과 고문, 심지어 살인까지, 민중들에 대한 국가의 가해와 위협은 ‘군사’와 ‘독재’라는 말이 ‘정부’라는 단어와 결별하기까지는 계속해서 우리의 현대사 곳곳에 상존하고 있었다. 커다란 충격후의 트라우마 증상은 여러 가지로 나타나지만 나와 할머니의 경우처럼 비슷한 경험을 다시 겪을 경우에, 히스테리성 증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표현의 자유억압, 언론통제, 민간인 사찰 등의 기사가 하루가 멀다 하고 언론에 오르내리는 요즈음 독재와 군사정부 때의 기억 때문에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시민들은 없는지 살펴볼 일이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239 | 추천: 0
전국완/ 중학교 국어교사 지난 밤 동료들을 배웅하고 집 앞을 산책하면서 만난 촉촉한 봄비. 참 신기하기도 하지. 이제 막 돋아난 새순 다치지 말라고 요렇게 보드랍게 내리는구나. 자연의 조화란 참 ……. 이 비(혹은 는개?)를 온몸으로 맞으며 공원을 몇 바퀴 돌면서 보니, 아침에는 산수유 몇 그루만 꽃을 피웠었는데 어느새 나무들마다 꽃망울이 영글어 내일쯤이면 꽃을 볼 수 있겠다 싶다. 울타리에 심어 놓은 쥐똥나무, 그 작은 새 잎들도 알알이 물방울 하나씩 보석처럼 달고 있는 모습이 어찌 그리 어여쁜지 소리 없는 탄성을 질렀다. 그 팍팍한 겨울동안 온몸으로 추위를 받아내며 서 있던 나무들, 이제는 축복처럼 내리는 봄비에 한껏 힘을 내고 있다. 결전의 날이 밝았다. 머리맡 창밖에서 지저귀는 새소리에 이른 기상을 했다. 괜시리 어정댄다. 지난 몇 년 간, 살다 살다 별 해괴한 일들이 자고 나면 뻥 뻥 터져서 이제 웬만한 일 앞엔 눈 하나 껌벅이지 않은 정도로 단련이 됐다 싶은데도 밤새 뒤척이다 일어났다. 가슴만 두근거리는 게 또 증상이 도졌지 싶다. 스스로 기대는 이제 그만! 이라 구겨박는데도 이놈의 희망이란 놈이 또 슬금슬금 밑에서부터 기어오른다. 지난 80년대엔 그래도 상대할 괴물들이 이렇게 많진 않았던 것 같다. 무식한 군부독재 앞에 넥타이부대까지 스크럼 짜고 외치면 매운 최루탄을 마셔도 우리는 외롭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뭐 사방이 괴물들이다. 국민의 소리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그것도 모자라 시민들 뒷조사에 겁박까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오만무식한 정권에, 선거철에만 국민 운운하고 여의도가면 기득권이나 챙기는 금배지분들에, 정권에 개노릇이나 하는 검찰에, 서민들 삶이야 어찌 되든 제 배불리는데 혈안이 돼 있는 재벌에, 이 괴물들 변호하느라 진실왜곡에 여론조작까지 못할 짓이 없는, 이미 또 다른 괴물이 돼 버린 언론까지 ……. 하지만, 이 괴물들을 이만큼 키운 건 정작 우리들 자신이었음을 뼈아프게 인정해야 한다. '부자 되세요!’, ‘1% 당신을 위한 차’, ‘당신이 사는 집이 당신을 말해 준다’ 는 자본의 달콤한 독약에 취해서 자신의 계급정체성도 망각한 채 그 괴물들이 빨대 꽂고 우리를 빨아먹도록 내버려 둔 건 우리 자신이다. 지난 세월 수많은 청춘들이 흘린 피의 대가로 얻은 민주주의의 많은 것들이 부정되고 헌 걸레처럼 발에 채이도록 방기한 것도 우리들이다. '4.11민주항쟁'이 52주년이 되었다. 김주열 열사 시신인양지점 지금, 그렇게 ‘부자’가 되고 싶었던 우리 국민들은 반 이상이 ‘비정규직’이고, 고용유연성을 위해 많은 우리들은 해고자가 되고, 사교육비 · 아파트 대출금에 빚더미에 앉았고,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또 철거민이 되고, 이제는 우리의 산하까지 회복 불가능의 상태로 파헤쳐지고 있다. 눈뜬 장님처럼 달콤한 유혹에 빠져 참·거짓도 분간하지 못하도록 어리석었던 우리들 탓이다. 기득권세력들이 귀신같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파악하고 선점한 정보들을 총동원해 날쌔게 그들의 파이를 늘려가는 동안에 우리는 그저 침 흘리고 바라보고만 있었던 거다. ‘나도 언젠가는 저 파이를 먹을 수 있겠지.’ 하고 말이다. 10년 전 우리를 흥분케 했던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의 장면들이 떠오른다. 거대한 몸집의 괴물이 끔찍스럽게 큰 입을 쩍 벌리고 많은 것들을 삼켜대던 장면, 끝내 괴물에게 먹힐 뻔한 딸을 구해내던 아슬아슬한 장면 ……. 어리석었던 만큼 잃었던 걸 되찾으려면 할 일이 많다. 문제는 시스템일 것이다. 지금 괴물들이 합동으로 만들어 낸 시스템이 더 이상 제대로 작동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 그 첫 번째는 우리 스스로 우리의 계급정체성을 제대로 확인하는 일이다. 그리고 다행히 아직 빼앗기지 않은 우리의 단추를 제대로 누르는 것이다. 우리의 소중한 사람들이 더 이상 그 입에 빨려들어가지 않도록 이제는 단추를 제대로 누르자. 그래서 저 잔혹한 시스템을 멈추게 하자! 그것만이 기득권의 철옹성에 균열을 낼 수 있으리라. 그리고 절망하지 말자. 다들 내맘같지 않다고 섣불리 냉소적이 되지도 말기로 하자. 그들의 철옹성이 어디 쉽게 허물어질 수 있겠는가? 수십 수만 개의 균열이 모여 허물어지는 그 때까지 마음의 스크럼을 짜고 버텨야 할 것이다. 어째 점점 글이 비장해지고 있을 즈음, 경남에 계신 지인으로부터 아름다운 메시지를 받았다. 어제 내린 봄비를 맞으며 보았던 꽃망울만큼이나 감동적이다. 오늘 선거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봄은 올 것이고, 피어날 것이다. 그 분의 메시지를 읽으면서 우리에게는 아직 절망할 권리가 없음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오늘은 김주열 열사의 시신인양 52주년일입니다. 불의를 미워하고 선을 실현하기 위해 온몸을 던졌습니다. 3·15와 4·19의 사이에서 열사의 선한 눈빛을 마음에 담습니다. 아침 대한통운 앞 바닷가에 왔습니다. 벌써 누군가가 하얀 국화꽃을 바쳤군요. 저도 집 앞을 예쁘게 장식하고 있던 동백꽃과 목련을 제단에 올렸습니다. ‘악에 분노하고 선의 실현을 위해 행동하라’ 열사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명복!
2017-07-12 | hrights | 조회: 223 | 추천: 0
허창영/ 전남대 공익인권법센터 연구원   민간인 사찰 문제가 화두로 떠올랐다. 총선 정국을 요동치게 할 정도로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다. 여야 할 것 없이 서로를 질타하고 있다. 민간인에 대한 불법적인 사찰은 흔히 도덕적 문제로 인식돼 선거에서 치명타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있다. 성격이 약간 다르기는 하지만 미국의 ‘워터게이트’ 사건이 보여준 사회적 파장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여야는 서로 인정도 하지 않거니와 먼저 나서 사과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뭐 묻은 개가 재 묻은 개 탓하는 격이다. 물론 현 정부에서의 사찰과 지난 정부에서의 정보활동은 성격에서 차이가 있다. 현 정부에서의 사찰은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에서 자행되었다. 공직윤리지원관실은 소위 공직윤리를 바로잡기 위해 있는 기관이다. 이러한 성격의 기관은 이름만 달리 했을 뿐 참여정부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사찰의 범위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혹 공직비리와 관련된 민간인이 있을 경우에는 민간인에 대한 조사권한이 있는 기관으로 이첩해서 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 현 정부에서는 이를 민간인 조사에 대한 법적 권한이 없는 공직윤리지원관실이 직접 ‘암약’하며 사찰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공직비리와 특정한 연관이 없는 연예인들까지 포함해 광범위하게 사찰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공직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설치한 기관이 전근대적이고 광범위한 민간인 사찰을 통해 ‘국민기강’을 바로잡으려 했던 셈이다. 정말 한마디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아니 ‘막걸리보안법’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것처럼 뒷덜미가 서늘해질 일이다. 그런데도 관련자들은 입 다물고 있고, 관련 있을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은 손사래를 치고 있다. 검찰이 칼을 빼어 들었으니 이번에는 제발 무라도 자르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지켜볼 일이다. 그런데 이번일과 관련해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다. 사찰파문에 기름을 부은 것은 ‘KBS 새노조’가 ‘리셋 KBS 뉴스9’에서 사찰보고서를 공개하면서부터다. 그런데 이중 80%는 지난 참여정부 때 작성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는 정부와 여당이 ‘사찰은 참여정부에서도 자행되었다’며 물타기를 하는 빌미가 되고 있다. 이에 대해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는 공개된 보고서가 경찰에 의해서 이루어진 통상적인 정보활동이라고 일축했다. 다시 말하면 법적 권한이 있는 경찰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니 현 정부에서의 불법적인 민간인 사찰과는 차원이 다르고, 내용도 사찰이 아니라 정보활동이라는 얘기다. 물론 일면 수긍이 가는 부분이 있다. ‘민간인 불법사찰 진상규명 및 책임자 처벌 촉구’ 기자회견에 참석한 각계 인사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사진 출처 - news1 하지만 문 후보가 한 얘기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현대자동차 노조 동향에 관한 보고서, 화물연대에 관한 보고서, 전공노 동향에 관한 보고서 3건을 보면 불법사찰에 관한 자료가 아니라 일선 경찰의 정보보고, 통상활동, 직무범위 내에서 당연히 해야 하는 활동 보고서”라고 했다. 즉 경찰이 노조활동에 대해 정보활동을 빌미로 ‘합법적인 사찰’을 했다는 얘기다. 그리고 이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인식이다. 사실 이런 식의 경찰 정보활동은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노조뿐만 아니라 시민단체들의 활동에 대해서도 동향을 살피고 있다. 심지어는 사무실에 직접 전화를 걸거나 찾아와 행사의 성격과 목적 등을 ‘캐묻는’ 대담함을 보이기도 한다. 사찰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동향보고’ 또는 ‘정보활동’이라는 그럴싸한 말로 포장만 했을 뿐 그 내용은 사찰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경찰은 사회갈등을 최소화하고 평화적 조정자가 되기 위해 정보활동을 한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노조활동이, 시민단체의 활동이 사회갈등으로 치부되는 것이 정당한가? 그리고 경찰이 평화적 조정자를 자임할 이유 또한 뚜렷하지 않다. 그보다는 정권에 대한 충실한 ‘하수인’이라는 지적이 더 설득력이 있다. 이런 활동에 대해 차기 대권주자로까지 거론되고 있는 사람이 문제가 없다고 인식하는 것은 실망스럽다. 현 정부에서 이루어진 민간인 사찰과는 성격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 그리고 ‘물타기’도 적절치 않다. 그렇지만 경찰에 의한 광범위한 정보수집이 과연 꼭 필요한 일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권력의 입장에서는 매일매일 간략하게 정리된 동향보고서가 매력적인지 몰라도 국민의 입장에서는 공포스러운 일이다. 그것이 경찰에 의해서 건 아니면 검찰 또는 공직윤리지원관실이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불필요한 정보활동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 자체가 국민에게는 공포다. 따라서 지금의 논의는 민간인 불법사찰에 그쳐서는 안 된다. 합법의 탈을 쓰고 있는 불필요한 정보활동 전체가 재검토되어야 한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208 | 추천: 0
이동화/ 민변 국제연대위 간사 2012년 3월 20일, 이라크 전쟁이 발발한지 정확히 10년이 지났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짧지 않은 시간이다. 10년 전을 되돌아보면 나와 우리(주변 소위 운동권이라 불리는이들)는 미국의 이라크 전쟁을 반대하고 이라크에 평화를 소리높여 외쳤다. 그리고 그해 여름 1차 파병, 그리고 그 다음해 2차 파병(자이툰 부대), 그리고 계속 이어지는 파병, 우리의 외침은 조금씩 사그라졌다. 모든 경우가 그렇지는 않지만 한국의 운동권(?)에게 시작은 뜨겁다. 뜨겁다 못해 과열이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하지만 그 뒤를 받쳐주고 이어나갈 책임감과 진득함은 매번 아쉽다, 또한 누구의 시각과 입장에서 외쳤는지도 의문이다. 2003년 3월, 우리는 미국에 의한 이라크 전쟁에 분노하였다.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이유로(납득이 된다고 하여도 그것이 전쟁의 이유가 될 순 없지만) 미국의 대통령이 전쟁을 선포할 때 우리는 계속 거리에서 규탄했다. 미국을 규탄하며, 미국의 뒤에서 눈치 보며 전쟁의 한 몫을 담당한 한국 정부를 규탄하였다. 오랫동안 이라크를 독재하였던 사담과 그의 군대는 사람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무력하였고 전쟁은 빨리 마무리 되었다. 기회가 닿아 이라크에 가게 되었을 때, 그곳에서 만난 이라크 인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미국에 대한 분노 못지않게 독재자 사담일가에 대한 분노도 가득했다. 우리는 그들의 절반의 분노를 이해하지 못했고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2004년 겨울, 한국의 자이툰 부대 파병안이 국회에서 통과 되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군대로 평화를 유지한다는 모순적인 이유도 그렇고, 실재 파병이 된 곳도 이라크 내에서 교전지역이 아닌 곳으로, 도무지 무엇 때문에, 가서도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불분명한 곳으로 한국의 젊은이들을 매년 수천 명씩 보내는, 국익이라는 블랙홀 같은 명분으로 파병이 정당화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 분노했고 거리로 나가 정부와 국회를 규탄하며 치열하게 투쟁했다. 이 소식을 접한 이라크인들도 분노했다. 그들에게 한국의 자이툰 부대를 물으면 그들은 반대했다. 동시에 이라크는 급격히 무너지고 있었다. 지속되는 폭탄공격, 무력과 폭력이 이라크를 지배하게 되었다. 법과 질서는 너무도 무력했고, 전쟁의 당사자인 미국을 포함한 파병국의 군인들도 무력했다. 초기 파병을 반대했던 이라크인들에게 파병국의 군인들은 점점 관심의 대상에서 멀어졌다. 본인들의 생존이 가장 시급했을 것이다. 그 이후 2008년 한국의 자이툰 부대는 이라크에서 철수했고, 2011년 미군 역시 이라크에서 소수의 인원만 남기고 철수하며 전쟁종료를 선언하였다. 수년이 지났다. 하지만 우리의 외침에서 더 이상 이라크의 평화와 점령 반대를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2005년 이후 이라크 난민은 이라크 내부적 상황으로 인하여 급증하게 되었고, 2009년도 유엔난민기구추산 인구의 17%인 약 450만 명에 이르게 된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이후 최대의 난민 숫자이다. 2009년 WHO 집계 약 10만에서 22만명의 민간인이 사망하였고, 종파간 분쟁으로 인한 사망자수는 이라크 정부 추산 8만 5천명이다. 최근 SNS로 접하는 현재의 이라크인들의 모습은 2003년에 비교해서 그리 나아진 것 같지 않다. 여전히 하루의 절반시간정도 정부가 제공하는 전기를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곳을 한국 정부는 2007년부터 여행금지국가로 지정하였다. 이라크는 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변한 것이 없다. 하지만 우리의 외침에는 큰 변화가 있다. 물론 어떠한 운동도 처음의 치열함을 지속하기란 불가능 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관심을 가졌던 것이 미국에 의한 전쟁, 한국 군대의 파병, 한미관계, 국익 정도였지 않았나? 그리고 우리가 전쟁 후 점령, 점령이 가져다주는 수많은 인권침해, 폭력과 무력에 의한 지배, 불처벌(impunity) 현실에 대해서 직시하고 함께 나누려는 노력이 부족 않았나?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이라크 전쟁은 우리 시대의 커다란 불행이었고, 이를 막기 위해 많은 사람들은 치열한 투쟁과 노력을 기울였다. 비록 전쟁을 막지도 점령을 멈추지도 못했고 이라크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점령은 끝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우리의 지난 노력과 투쟁이 헛되지 않고 다른 차원의 운동을 만들고 연결하기 위해서 지난 운동에 대해 우리는 한번 쯤 가슴 아프게 되돌아 보야 할 것이다. 그래야 다시 한걸음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231 | 추천: -1
권력의 사유화가 넘쳐나는 이명박 정권을 심판하자. - 그리고 시민권력 확대를 시작하자. 이현정/ 흥사단 민족통일운동본부 부장 요즘 개그 유행어 중에 “어렵지 않아요~”가 있다. 어제 이영호 전 청와대 비서관의 민간인 불법사찰 기자회견이 딱 그꼴이다. 민간인 사찰하고 입 막는거, 그거 어렵지 않아요~ 먼저 대포폰 사용 등 온갖 불법으로 사찰한 후, 조용히 있으면 돼요~ 만약 알려지면 증거 및 자료를 없애면 되요. 또 없애면 되요. 혹시 모르니 담당 주무관에게 입막음용 돈 몇 억과 다른 공무원 자리 제공해주고 꼬리 자르면 돼요~ 그래도 안 되면 한참 뒤에 최종 윗선과 뒤처리 조율을 마치세요. 이후 실무 윗선에서 역정을 내면서 억울하다고 울먹이며, 또 정치공작이라고 고함을 지르면서 기자회견을 하면 돼요~ 보세요~ 민간인 불법사찰 하는거, 하나도 어렵지 않아요~ 딱 여기까지다. 누가 봐도 몸통이 아닌데 본인이 몸통이라며 난리를 쳤다. 이게 지금 청와대 권력의 현 주소이다. 권력의 사유화를 여실히 보여준 꼴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과거와 상황이 다르다. 자르려고 했던 꼬리 담당 주무관이 평생 먹고 살게 해주겠다는 권력의 유혹을 뿌리치고 양심선언을 했다. 견제 받지 못하는 권력이 이제 심판을 받을 때이다. 도덕적으로 완벽하다고 말한 이명박 정권의 권력의 사유화. 참 염치도 없다. 너무도 막 나간다. 검찰, 언론 등 견제할 곳도 없다. 브레이크 없는 폭주 기관차이다. 공공성 확대를 위해 공정한 힘을 행사해야 할 권력이 어느덧 사적 권력 프렌드리가 되어버렸다. 지난 몇 년 동안 이런게 한 둘이 아니다. 행정, 사법부의 사유화, 견제기관 검찰, 언론사 등 사유화, 4대강, 용산, 제주 강정 등 위법 행위와 경찰의 폭력, 10.26 선관위 부정 선거, 내곡동 사저, 저축은행과 이국철 게이트, 형님, 영부인, 아들, 사위, 조카, 사돈 등 온갖 친인척 비리에 최시중, 박희태 등 측근 비리까지 너무 많아 나열하기도 힘들다. 민주통합당 한명숙 대표가 12일 4ㆍ11 총선과 관련해서 발언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우선 먼저, 이번 4.11 총선에서 이들을 심판하자. 국민을 섬기고 봉사한다고 말하던 권력, 새누리당의 거짓이 드러났으니 다시 이 권력에게 정당성을 주지 말자. 간판은 새누리당으로 바꿨으나, 결국 ‘이명박근혜 정책’이 나돌듯이 또 다시 속아서는 안 될 것이다. 이번 총선에서 여당 심판만으로는 권력의 사유화를 모두 막을 수 없다. 일회성 정치참여로는 미봉책에 불과하다. 한 정치인이 이런 말을 했다. “모든 권력은 어떠한 경우건 견제되어야 하고 균형을 이루어야 하며 오로지 시민을 위해서만 작동되어야만 한다. 권력의 사유화야말로 이 시대 최고의 위협이다.” 결국 권력에 대한 시민의 통제가 상시적으로 추진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아래로부터의 이해와 요구, 즉 시민 및 민중권력의 이해를 대변할 수 있는 소통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이게 바로 권력의 사유화를 감시하는 직접민주주의의 시작이다. 자 보자. 이번 총선을 앞두고 몇 달 사이에 새로운 정당들이 나타났다. 새누리당, 민주통합당, 통합진보당, 녹색당, 청년당 등 다양하다. 앞에 세 당은 기존 정당에서 새 옷을 입은 곳이다. 강령에 국민행복, 복지를 강조한 새누리당, 경제민주화를 강조한 민주통합당, 정권심판을 위해 진보정치연대를 강조한 통합진보당. 이들이 왜 이름도 정책도 바꾸고 전반적으로 좌클릭을 했을까? 결국 지금의 현실, 양극화 시대 속에서의 경제민주화 해결이 시대적 과제라고 생각했고, 이것이 표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정책지형 변화의 핵심과 동력은 여전히 시민, 민중에게 있다는 것임을 2012년 3월에 우리는 다시금 확인하고 있다. 대의제로 대표되는 정당정치는 여전히 유효하다. 차별화된 각 정당의 정책에 시민들이 참여하고 투표하는 정치행위도 권력의 사유화를 막는데 도움이 된다. 실제로 지난 수십 년간에 한국 정당정치의 작동기제가 이렇지 못하다보니 부정적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이제는 정당정치 대의제와 함께 시민, 민중들이 권력을 더 견제, 감시할 수 있는 직접민주주의의 구조를 만드는 것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다시 한 번, 이번 4.11 총선에서 권력의 사유화를 행했던 정치조직을 철저히 심판하자. 그리고 권력의 사유화를 막고 지속가능한 민주주의를 가능케 하는 시민권력 확대를 고민하자. 풀뿌리운동과 시민운동의 확대, 선거 추첨제, 주민, 국민 발의, 권력감시 시민기구 확장, 민관 거버넌스 협력 확대 등의 지속가능한 민주주의를 시작하자. 시민권력의 확대, 이게 진짜 권력이다.
2017-07-12 | hrights | 조회: 220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