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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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는 언론계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이 멘토가 되어, 작성한 칼럼에 대한 글쓰기 지도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시골에서 정겨운 모습으로, ‘왜 사냐건, 웃지요’ 할 것만 같은 할배, 할매들이 몇 년 째 기나긴 싸움을 이어 나가고 계신다. 이 지겹도록 길고 긴 싸움은 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데 어느새 우리 할배, 할매가 원하지 않던 엔딩으로 달려가는 것만 같아 나로서도 답답할 노릇이다. 지치고 힘든 몸을 이끌고 서울 구경도 아닌 투쟁을 위한 서울행을 하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비장하다. 한 할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우리가 이렇게 반대하는 거 님비 아니냐고, 보상금 모자라서 그런 거 아니냐고들 하는데 그럼 보상금 협상을 했지, 송전탑 세우지 말라고 지중화 하라고 그러겠냐. 다만 우리는 평생 일궈온 땅, 어렵게 마련한 땅을 지키고 싶었다. 나중에 손주들 커서 시집 장가갈 때 땅 팔아서 보태줄 수도 있지 않겠냐. 그런데 이제 땅을 팔기는커녕 농사도 짓기 힘들어지게 생겼다.” 할머니께서는 끝끝내 참았던 눈물을 보이셨다. 자신들을 향한 ‘이기주의자’라는 눈초리와 비난이 억울할 법도 하다. 한 할아버지는 힘들게 생활비를 아끼고 아껴 샀던 산에서 밤나무 농장을 하신다. 1년에 700-800만 원 정도를 벌어서 생계를 이어 나가고 계신데, 그 산에 대한 보상금은 고작 157만원. 157만원으로는 월세 보증금도 내기 어려운 세상에 이것이 보상금이라고 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밀양 송전탑 문제와 관련한 ‘전문가 협의체’의 보고서를 검토했던 국회 산업통산자원위원회는 한국전력공사와 주민 간의 ‘대화‘를 권고했다. 사진은 ‘밀양 765kV 송전탑 백지화 및 공사중단을 위한 경남공동대책위’가 지난 10일 저녁 창원 정우상가 앞에서 집회를 열었을 때 모습.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한전은 주민들을 위해서 다양한 보상 방안을 내놓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보상 방안이라는 것이 참 현실성이 떨어진다. 철저하게 자기들의 입장에서 내놓은 보상 방안이다. 주민을 위한 보상 방안임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는 주민이 없다. ‘설비 주변지역 주민 또는 자녀 인턴채용 우대’와 같은 방안은 한전이 얼마나 안이하게 준비했는가를 보여준다. 송전탑이 마을 가운데를 ‘시원하게’ 가로질러서 나가는 마을의 주민 대다수는 70세 이상의 어르신이다. 어르신의 자녀는 30~50대의 어엿한 기성세대일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한전 인턴을 한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주민들이 힘들어 하는 것들은 반대 과정에서 일어나는 주민간의 충돌, 주민과 한전의 충돌 속에서 받는 충격들이었다. 한전의 기나긴 설득과 회유와 로비 끝에 송전탑 건설에 동의한 주민들도 없지는 않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주민과 반대하는 주민들은 아주 오래 동안 얼굴을 보고 가족처럼 지낸 사이이기도 하고, 실제로 가족이거나 가까운 친척인 경우가 대다수다. 이러다 보니, 어머니와 아들이 인사도 하지 않고 모른 척 지나가는 상황이 생기기도 한다. 한전에서 내보낸 용역은 어르신에게 인격을 모욕하는 말을 내뱉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그냥 돈 받고 떨어져 나갈 것이지 쓸데없이 반대한다며 비난하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어차피 송전탑이 필요하다는데 딴 데 보다 여기 세우는 게 낫지 않냐고도 했다. 이런 충격 때문에 건설 현장을 비롯하여, 곳곳에서 싸우고 계신 주민들의 약 70%가량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겪고 계시다고 한다. 전쟁이나 9.11 등을 겪은 사람들의 10~30% 정도가 이런 증상을 겪는 것을 감안한다면 엄청난 수치라고 볼 수 있겠다. 사실 765kV 송전탑 건설은 비단 밀양의 문제만은 아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그 끝은 원전, 핵과 맞닿아 있다. 사실 밀양은 마을 가운데로 가로질러 간다는 엄청난 문제 때문에 이렇게 어르신들이 힘을 합쳐 싸우고 있고, 많은 시민사회단체들의 지원 속에서, 그리고 한전의 언론에의 호도 때문에 많이 알려져 있는 편이다. 그런데 이 송전선로로 전기를 보내는 시발점은 부산 기장의 신고리 발전소라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잊고 있는 것 같다. 나는 부산 기장 사람이다. 원전이라는 것에 대해 수없이 많이 들어 왔고, 견학을 가보기도 했고, 원전에서 주는 혜택을 많이 누려 보았다. 적어도 중학생 때까지는 그래도 원전은 안전하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다. 한수원은 지역 공동체를 위하여 많은 것을 제공하는 마냥 좋은 회사로 보였다. 그렇지만 그것이 바로 주민들의 눈과 귀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땐 일종의 배신감이 느껴졌다. 기장의 초등학교들은 원전으로 많이들 현장학습을 간다. ‘원전은 우리에게 전기를 제공하는 아주 고마운 것이고, 심지어 매우 안전하기까지 하지. 없어선 안 될 존재야’라고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말해준다. 그러나 많은 학자의 연구와 주변국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그게 아님을 알 수 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도 그랬다. 지진에도 끄떡없다고 하던 그 원전은 보기 좋게 무너졌다. 후쿠시마의 사람들은 공포에 떨며 ‘그나마’ 안전하다고 하는 원전으로부터 30km 떨어진 곳으로 도망치듯 끌려 나갔다. 방사능 수치가 떨어지고, 옥내대피가 가능하다는 지역에서도 사람들은 물밀듯 대피해 나갔다. 남아 있는 몇 사람을 위해 파견된 도쿄전력과 자위대는 잠깐의 외부 활동은 괜찮다는 학자들의 발표를 믿지 못해 방진복으로 온몸을 꽁꽁 싸매고 정해진 시간만 채우고는 도망 나가기도 했다. 그렇게 안전하다면서도 일본 정부 고위인사는 후쿠시마에 방문하지 않았고, 원전을 관리하는 도쿄전력의 책임자들도 방문하지 않았다. 그들은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기장에서는 송전탑 건설과, 신고리 원전 건설 자체를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밀양처럼 작은 마을 단위로 사람들이 정겹게 사는 곳이 아니라 그런지 사실 밀양 어르신처럼 다 같이 바깥으로 나온 적은 없는 것 같다. 그렇지만 고리원자력발전소 근처에는 많은 지역 단체들이 원전을 반대한다는 플래카드를 걸고 나름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하지만 포기하다시피 한 국회의 중재 역할은 결국 정부에게까지 넘어 왔고 이제 765kV 송전탑을 들어서지 않게 하기 위한 투쟁은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 왔다. 파행과 베끼기로 끝난 전문가 대책위, ‘대화’로만 해결하라는 국회, 이제 어쩔 수 없이 공사해야 하지 않겠냐는 정부. 이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만 생각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밀양의 문제는 단지 밀양의 것만이 아닌, 우리 모두의 문제다. 서울시청 부근 대한문 앞에서 시청 쪽을 바라보면 보이는 한밤중에도 달보다 더 달처럼 세상을 환히 밝혀 주는 모 보험회사의 전광판을,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건물 외벽 전체를 나름 아름답게 수놓고 있는 그 무지개 빛깔의 조명을 잠시 꺼두기만 해도 765kV 송전탑은, 그리고 원전은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속에서 그 기록을 남긴 사사키 다카시 선생의 ‘원전의 재앙 속에서 살다’라는 책 제목처럼, 우리는 지금 이미 원전의 재앙 속에서 살고 있다. 그리고 밀양의 어르신들이, 우리 할배 할매들이 그 재앙을 막기 위해서 몸소 싸우고 계신다. 농사는 올해 못 지으면 내년에도 또 지을 수 있지만, 송전탑은 한 번 막지 못하면 지어지고 마는 것이라며 짓고 싶은 농사도 마다하시는 우리 어르신들에게 이 젊은이는 괜스레 죄송한 마음이 밀려온다. 이현정씨는 한국 현대사에 관심이 있는 사학과 학생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06 | 추천: 0
박정훈/ 청년 칼럼니스트 국정원의 선거개입과 관련하여 전국적으로 시국선언이 한창이다. 각 대학 총학생회를 비롯한 대학생 단체들을 필두로 해서, 종교인, 방송인, 대학교수, 농민, 경찰, 의사, 고등학생에 이르기까지 선언의 주체 또한 다양하다. 최근에는 (비록 참여한 학교명단에는 없으나) 필자가 속한 인권법학회 이름으로도 시국선언이 발표된 바 있다. 잡다한 것에 관심이 많은 탓에, 법학전문대학원(이하 ‘법전원’)에서도 학업 이외에 이런저런 활동들을 병행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시국선언과 관련해서도 의사표명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관한 논의에 참여할 기회가 몇 번 있었다. 그 몇 번의 논의는 ‘일단 지켜보자’는 쪽으로 결론이 났고, 실제로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이전에도 몇 번, 이와 유사한 경험이 있었다. 사실, 법학도나 법조인들은 보수적인 성향을 띌 수밖에 없다. 사회의 안정을 꾀하는 법의 성질이 본질적으로 보수적이기 때문이다. 법원 내 진보성향의 법관모임인 ‘우리법연구회’의 회장을 지냈던 문형배 판사가 소위 ‘4대강 소송’에서 당해 사안이 적법하다는 판결을 내리며 했던 말-"본의 아니게 좌파라는 딱지가 붙었는데 판사는 기본적으로 우파지, 좌파가 될 수 없는 것"-은 이러한 취지를 잘 드러내 준다. 법전원 학생들이 시국선언을 하지 말고 지켜보자는 논거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법전원(혹은 그에 속한 단체)은 다른 단체들과 성격이 다르다는 것. 정치적으로 예민한 발언을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적이고 사회적인 발언을 할 자유는 특정 단체나 개인에 국한되지 않는다. 게다가 국정원 사건의 경우 정치적이기 이전에 민주적 헌법질서 자체에 대한 도전으로 볼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법전원생이 제3자라고 볼 수도 없지 않을까. 전국 4개 대안(고등)학교 학생들이 지난 6월 29일 서울광화문 이순신 동상 앞에서 국가정보원의 대통령선거 개입사건과 관련해 시국선언을 하고 있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광주지역 의사들의 시국선언을 주도했던 홍경표 원장(홍경표 내과의원)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옳지 않은 것은 옳지 않다고 정확하게 지적하고, 잘한 것은 잘했다고 칭찬해야 국민도 의사들이 옳은 말 한다고 인식을 할 수 있다. 그래야 의약분업이나 포괄수가제 같은 이슈가 있을 때 국민이 의사들 주장에 귀 기울여주는 것 아니겠나. 아무리 잘못된 일이 벌어져도 침묵하고 있다가 의사들의 이해관계와 관련된 것에만 목소리를 내고 단체행동을 한다면 국민에게 외면 받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시국선언을 낸 것이다.” 법전원생들이 ‘예비시험’이나 ‘변호사시험 합격자 수’에 대해 하는 주장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국민들의 정당한 문제제기에 동참하지 않으면 언젠가 법전원생들의 주장도 국민들에게 외면 받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둘째는, 외부에서 부정적으로 볼 수 있다는 우려다. 물론 사회에 제대로 뿌리내리지 않은 법전원의 상황에 비춰볼 때 학생들의 이런 우려는 수긍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외부’는 국민이라기 보단 법전원의 지위와 법전원생의 진로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세력일 가능성이 높다. 법전원 제도에 있어 국민들은 간접적 당사자에 불과할 뿐이고, 실제로 큰 관심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건대, 권리는 상대방에게 잘 보여서 얻는 것이 아니라 싸워서 쟁취해 내는 것이다. 설사 잘 보여서 뭔가를 얻어낸다 한들 이는 여전히 불안정할 뿐이거니와, 힘에 굴종하여 얻어내는 방식을 일찌감치 터득하는 것 역시 뒷맛이 개운치 않다. 셋째는, 아직 혐의가 확실치 않으니 좀 더 두고 보자는 주장이다. 어디까지 윗선의 관여가 있었느냐에 관해선 아직 불확실하다고 하겠으나, 이미 검찰 수사를 통해 선거개입 행위에 관한 부분에 있어서는 상당 부분 입증되었다고 볼 수 있고, 당사자인 국정원 역시 이미 이를 인정한 바 있다. 여야 의원들 역시 이와 같은 현실인식에 근거해 국정원에 대한 국정조사에 착수했다. 무엇이든 판결이 나 봐야 확실해 지는 걸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최종적인 법적 책임을 묻는 것에는 판결이 필요하지만, 국가기관에 대해 최소한의 도의적 책임, 정치적 책임을 묻는 것에 있어 법원의 판결은 하나의 근거에 불과하다. 사회적 이슈에 관해 어떤 입장을 견지하고 어떻게 행동할지는, 전적으로 개인에게 달린 선택의 문제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듯 보여도 함부로 그 태도를 비난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 태도가, 어떤 신념에 따른 것이기 보다 개인적 이익 내지는 집단적 이익을 위한 것일 때가 있다. 내면은 감추고 그럴듯한 논리로 치장한다. 정치에 초연한 듯 보이지만 오히려 가장 정치적인 사람들. 법조인이나 법학도는 균형 잡힌 시각을 견지해야 한다는 이유로 종종 판단을 유보한다. 하지만 때로는, 신중한 듯 보이는 그 태도가 역겨워 보일 때가 있다. 박정훈씨는 노동과 소수자 인권에 관심이 있는 법학전문대학원에 재학 중인 학생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21 | 추천: 0
김원진/ 청년 칼럼니스트 쉽게 내뱉는 언어가 있다. 정치학이나 사회학 수업을 듣다보면 매시간 적어도 한 번씩은 ‘신자유주의’라는 말이 튀어 나온다. 교수의 입, 학생의 입을 가리지 않는다. 모든 문제의 근원에 신자유주의를 갖다 붙이면 그만이다. 추상적인 개념의 매력이자 맹점인데, 주로 자신이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일종의 레토릭이다. 문제는 이런 추상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자신들조차 그 언어의 정확한 의미를 모른다는 점이다. 나도 가끔 대화중에 이런 함정에 빠지는데, 누군가가 “네가 생각하는 공공성은 뭔데?”, “네가 정의하는 보수는 어떤 개념인데?”라고 물으면 한참동안 생각을 정리하고 나서야 대답하곤 한다. 엄밀하게 다져지지 않은 채, 세상 구경에 나선 언어들은 이렇게 공허하다. 아마 대학사회에서 신자유주의만큼이나 전가의 보도처럼 입에 오르내리는 게 아마 성적의 ‘상대평가’가 아닐까 싶다. 흔히들 상대평가가 문제다, 상대평가를 폐지해 경쟁의 늪에서 벗어나자는 식의 주장을 한다. 이번 학기 토론 수업에서 대학의 상대평가를 주제로 준비하면서 느낀 것도 어떤 공허함이었다. 상대평가와 관련된 국내 연구 자료는 거의 전무했다. 교육사회학을 전공한 선생님에게 여쭤도 봤지만, 아마 자료를 찾기 힘들 거라는 대답만 들었다. 그렇다고 언론이 깊게 상대평가의 문제점에 대해 분석했을까. 그것도 아니다.(다만 중, 고교의 절대평가, 상대평가에 관한 기사와 연구는 제법 찾을 수 있다. 이는 아마 한국 사회 초미의 화두인 입시 때문일 것이다.) 다수의 칼럼이나 사설만 눈에 띄는데, 논리는 없고 다들 감정만 앞선다. 이런 주장에 대체 누가 공감할까. 대표적으로 2009년 한겨레에 실린 우석훈 씨의 칼럼 <대학, 절대평가로 바꾸자>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채점 방식을 지금의 상대평가에서 절대평가로 바꾸는 것이다. ... 절대평가만 도입해도, 학생들끼리 서로 협력해서 공부하고 문제를 풀 수 있는 최소한의 ‘협동’과 ‘연대’가 시작될 것이다. 동료들을 적으로 보고 상대방을 제거하기 위한 미션 임파서블, 그 불신 지옥은 이 간단한 장치만으로도 해소할 수 있다. ... 절대평가가 지금 우리 대학생들에게는 절대로 필요하다. 우리는 지금 구조적으로 친구를 적으로 돌리게 하는 교육을 하고 있다. 학문도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기업도 혼자 하는 게 아니다. 한국 자본주의, 지금 밑에서부터 흔들리고 있는 중이다. 창의와 협동 없는 암기기계들과 21세기를 열 수는 없지 않은가?” 실제로 우석훈 씨가 지적한 현상은 대학사회에 존재한다. 2000년대 초반부터 각 대학의 심리상담센터엔 학점 문제로 상담을 요청하는 학생이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그만큼 경쟁이 치열해지고 학점 따기가 만만치 않은데다가, 학점이 취업에 상당 부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다들 학점에 민감한 것이다. 또, 상대평가는 평가의 기준이 명확해야 한다. 이 때문에 성적은 대체로 암기력과 누가 더 많은 시간을 공부하느냐에 달려있다. 신입생들이 고등학교 내신과 대학 시험이 뭐가 다르냐고 하소연을 하는 이유다. 국가의 어젠다는 ‘창조경제’지만 여전히 대학생들이 당면한 현실은 ‘성실함’에 머물러 있다. 다만, 이것은 현상이다. 보다 깊은 구조의 문제를 단순히 신자유주의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것보다, 신자유주의 때문이라면 어떤 맥락에서 ‘상대평가’가 대학사회에 파고들었는지 여러 결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크고 작은 그림은 이렇다. 80년대 영국의 대처 정부가 집권한 후, 영국 기업에도 하나둘씩 직원평가제도가 도입된다. 평가방식은 에누리 없는 상대평가다. 즉, 1등급이 꽉 차면 아무리 성적이 좋아도 그 아래부턴 2, 3등급에 속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이 시스템은 외환위기를 맞은 97년 이후 한국 기업에도 정착한다. 2000년대 중반, 대학 사회 전반에선 기업의 평가시스템과 유사한 상대평가를 실시한다. 사실 한국 대학에서 성적의 상대평가는 70년대부터 있어왔다. 다만 지금처럼 교수가 1명이라도 더 A를 주면 전산처리가 안 되는 일은 없었다. 어디 학생들의 성적만 그런가. 언제부턴가 교수의 논문은 양으로 측정해서 점수를 매긴다. 어떤 교수는 수업시간에 하소연을 하기도 한다. 여기에 2000년대 중반부터 강의평가도 도입된다. 학생들이 이 결과를 크게 신뢰하진 않지만,(다들 대충하기 때문에) 내가 다니는 학교는 평가결과를 학생들에게 공개한다. 학교도 평가받는다. 교육부는 평가 지침을 내리고 이를 충족하라고 주문한다. 취업률, 영어강의 비율이 대표적이다. 교육부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몇몇 대학처럼 구조조정의 압력을 받고 국가의 지원이 줄어든다. 여기에 언론도 가세한다. 언제부턴가 주요 언론 몇 군대에서 대학평가를 연례행사처럼 시행한다. 대학들이 눈치를 많이 보는 모양이다. 생각보다 이 순위에 중, 고등학생 자녀를 둔 학부모들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탓이다. 올해부터 한 언론사는 ‘학생 만족도’라는 항목을 신설했다. 학생들이 직접 학교를 평가할 수 있게 된 셈이다. 학생은 교수와 학교를, 학교는 교수를, 다시 교수는 학생을 평가하는 이 연결고리가 스스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 평가시스템이 이렇게 공고히 자리 잡게 된 배경엔 또 다른 주체들이 있다. 정론지를 표방하지만 실제론 기업처럼 움직이는 언론. 사적 영역의 기업인지 국가의 행정부처인지 모를 교육부. 그리고 신뢰할 만한 성적을 대학에 요구하는 기업. 이것이 소위 신자유주의라고 불리는 용어의 민낯이 아닐까. 상대평가를 아무런 논리와 분석 없이 때리면 때릴수록, 이 민낯에 근접하기 어려울뿐더러 누군가를 설득하기도 어렵다. 이때 ‘상대평가를 폐지하자’는 외침은 그저 텅 빈 구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럴 바엔 차라리 알맹이 없는 지금의 상대평가 폐지 주장은 폐기되는 게 낫다. 오히려 대학 사회 전반에 걸친 평가 문제를 폭넓게 접근하면서 현실적인 대안을 내놓는 게 더 나은 접근일 수 있다. 엄격한 학점별 쿼터 대신 교수에게 일정정도 재량권을 주고, 졸업 후 성적표에 각 과목별로 전체 수강생 수, 난이도, 시험문제 유형 등을 첨부하는 방안도 고려해볼만 하다. 교육의 본디 목적인 ‘인간의 성장’을 위해 상대평가를 폐지하고 절대평가를 도입하자는 도덕적인 구호는 훈계조로만 들릴 뿐이다.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함과 동시에 신자유주의에 포획된 대학 사회 전반의 평가시스템을 건드리는 것이 문제해결의 출발점이다. 김원진씨는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고 언론인권센터 모니터링팀에서 활동 중인 청년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98 | 추천: -2
김지영/ 청년 칼럼니스트 올해 우리나라 국가 총예산이 342조원인데 비해 국가정보원, 즉 국정원 1개 부처가 쓰는 예산은 무려 1조원이나 된다. 국정원은 예산을 1조원이나 쏟아 부을 만큼 국가의 안보를 책임지는 중요한 기관이기 때문이다. 드라마 아이리스나 영화 7급 공무원만 봐도 그렇다. 국정원 직원들은 총을 들고 뛰어다니며 기밀 누출이나 테러를 방지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는다. 그러나 작금의 국정원은 다르다. 야당 정치인들을 깎아내리고 정부에 입바른 소리를 하는 국민들을 종북으로 매도하는 키보드 워리어들로 가득하다. 특히 지난 대선 때 국정원 댓글부대들의 활약은 더욱 눈부셨다. 문재인 후보와 지지자들을 비하하고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를 찬양하는 댓글들을 체계적으로 달았다. 국정원 인원으로는 부족했는지 심지어 댓글알바까지 고용했다. 덕분에 박근혜 대통령은 부정선거의 최대 수혜자가 됐다. 국가 직속기관인 국정원이 일베와 다름없는 행동을 해왔던 것이다. 물론 제대로 된 상식을 갖고 있는 몇몇의 국정원 직원들은 여전히 우리나라의 안보를 위해 땀흘려 일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국민들이 바라보고 있는 국정원은 원세훈 국정원장 주도 하에 변질된 전문적 일베 양성기관에 불과하다. 일베나 다름없는 국정원의 모습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지난 1일 오마이뉴스가 공개한 검찰공개수사기록에 따르면 국정원은 광주민주화운동을 비롯하여 전라도 사람들을 비하하는 댓글들을 달아왔다고 한다. 그것도 일베에서 자주 사용되는 용어들을 써가면서 말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이 어떤 운동인가? 광주 사람들이 피를 흘려가며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독재로부터 민주주의를 지켜낸 민주화 운동이다. 우리가 선거를 할 수 있는 권리, 심지어 일베들이 인터넷으로 글을 쓸 수 있는 권리조차 이분들의 희생덕분에 얻은 것이다. 그런데 국가안보를 보장하는 대통령 직속기관이라는 국정원은 헌법에 명시된 민주화 운동을 부정하고 고작해야 여당에게 유리한 댓글부대나 양성해왔다. 평범한 민간인이 저질러도 심각한 일인데 국가 직속기관이 앞장서 왔던 것이다. 이러한 행태는 독일 연방정보부가 나치를 찬양하고 미국 CIA가 댓글부대를 양성한 것과 다름없는 일이다. 만약 실제로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면? 해당 관계자들은 즉각 파면되는 동시에 엄중한 처벌을 받았을 것이다.   한목소리로 국정원의 대선개입을 규탄하는 시민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하지만 우리나라 정부는 처벌은 커녕 뾰족한 수를 내놓지 않고 있다. 또한 학생들과 시민들은 촛불을 들며 국정원의 심각한 정치개입을 규탄하고 있지만 최대수혜자인 박근혜 대통령은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을 뿐이다. 모르쇠로 일관하면 국정원 사태의 책임을 피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진짜로 몰랐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백번 양보해서 몰랐다 쳐도 어쨌든 실질적인 수혜자는 박근혜 대통령이다. 그리고 현직 대통령이 된 이상 대통령 직속기관인 국정원이 일베 전문기관처럼 된 것에 대한 책임을 면피할 수 없다. 이번 국정원 사태는 잠깐 들끓었다가 가라앉을 만한 사안이 아니다. 시민들의 끝없는 관심과 정부의 국정조사 실시 하에 명백한 진상규명이 이루어져야 할 일이다. 김지영씨는 위안부, 쌍용차 노동자 등의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는 청년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271 | 추천: 0
한은석/ 청년 칼럼니스트 아마도 이 칼럼을 읽고 있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일베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다. 스스로를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의 계승자를 자처하는 역사의식의 소유자들이 있다는 것만을 알고 있다. 그러나 87년 6월 항쟁을 저주하며, 80년 5월 광주를 혐오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80년 5월 광주의 희생과 87년 6월 항쟁이 만든 민주화는 도대체 어떻게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일베를 만들어낸 것일까?   민주당 “5·18 왜곡 프로 폐지 요구, 일베 폐지 법적 검토” 사진 출처 - 미디어 오늘   그러나 일베의 역사의식은 낯선 게 아니다. 물론 내용이 아니다. 바로 형식이다. 역사의식을 가진 계승자들, 역사적 정통성을 가진 정치세력, 현실정치에서 청산하고 극복해야 할 적대자들, 모두 익숙한 것들이다. 50년 역사를 가진 정통 민주화 세력인 야권도 사용하고 있는 형식들이다. 내용에 있어서 일베와 민주화 세력은 극과 극이지만 형식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다. 일베와 야권에게 있어 역사는 전쟁의 기록에 가깝다. 다른 정통성을 가진 정치적 세력들 간의 전쟁의 기록 말이다. 오늘날의 문제들은 모두 과거에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다.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빨갱이들을 쓸어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역사의식은 정통성 있는 세력을 지지해야 하는 것이며, 잘못된 세력을 청산하는 의무를 가지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 그렇게 단순한 문제일까? 역사의식이 오늘날의 정치 문제들을 해결해줄 것이라는 생각은 사실 신화에 가깝다. 일베의 극우 네티즌들이 스스로 칭하듯 ‘잉여’로 전락하게 된 것은 그들이 지지한 새누리당의 대기업, 기득권 위주의 정책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야권이 제기하는 비정규직 증가, 양극화 같은 문제가 본격화된 것은 민주화 세력 집권 기간 10년이었다. 과연 정통성을 갖지 못한 반역사적 집단을 현실 정치의 권력에서 몰아내는 인적 청산만이 역사 청산의 유일한 해답일까? 독일의 사례를 살펴보자. 2차 대전 종전 직후 독일에서도 나치 세력은 완전히 청산되지 못했다.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처벌받은 이들은 일부 수뇌들일 뿐, 부역 세력 대다수는 냉전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미국의 보호를 받았다. 해방 직후 우리나라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심지어 나치의 부역 세력들은 스스로를 미화하기도 했다. 무수한 전쟁범죄를 저질렀던 독일국방군은 무장친위대에 떠넘기는 방식으로 자신들을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전쟁을 벌인 애국자들로 미화했다. 2차 대전 내내 수많은 전공을 세워서 초고속으로 승진한 엘리트 기갑장교였던 핫소 폰 만토이펠은 우파 정치가로 성공해서 서독연방군 창설을 주도했다. 독일국방군 장교들은 서독연방군에서도 중책을 맡아 승승장구했고, 은퇴한 장성들은 원로라는 이름으로 계속 명예를 보장받았다. 영광은 산 자들뿐 아니라 죽은 자들에게도 있었다. 죽을 때까지 히틀러와 나치에 충성을 바치고 민주주의를 경멸한 해군제독 칼 데니츠는 정치에 상관없이 조국을 위해 최선을 다한 참군인으로 미화되었고, 승진을 위해 히틀러에게 아부하고 전공을 위해 무리한 공격으로 부하들을 떼죽음 당하게 했던 롬멜은 인격자로 미화되었다. 그러면 독일의 역사 청산은 실패하고 만 것일까? 그러나 독일의 역사 청산은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인 성공 사례로 꼽힌다. 우파인 기민당이 여전히 유력한 거대 정당인데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독일의 역사 청산은 정당화되고 숨겨졌던 역사적 상처들을 드러내는 꾸준한 과정으로 이루어졌다. 의회는 마지막에 오는 형식적인 장소였지 최전선이 아니었다. 이 과정은 꾸준히 계속되고 있는데 1990년대에는 독일국방군의 전쟁범죄만을 모은 전시회가 개최되어서 여론의 큰 주목을 받았고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이때 여론에 힘입어서 독일국방군 장성의 이름을 딴 군부대의 이름을 유대인들을 보호하다 처형당한 오스트리아인 육군 상사의 이름으로 바꾸기도 하였다. 물론 독일연방군 내에서도 많은 논란이 있었다. 독일연방군을 군대답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논쟁 끝에 독일연방군은 자신들이 기억해야 할 것으로 독일국방군의 장성 대신에 무명의 오스트리아인 육군상사를 택했다.   독일국방군 2차 대전과 깨끗한 독일군의 신화 볼프람 베테 저 김승렬 역 미지북스 2011 사진 출처 - yes24   다시 우리 사회로 돌아와서, 과연 역사를 청산하면 문제가 해결될까? 애초에 역사라는 게 청산될 수 있을까? 독일의 역사 청산이 숨겨지고 망각된 것을 기억해내는 과정이었던 것처럼, 역사는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닐까? 독일의 역사 청산에서 의회는 최전선이 아니라 마지막에 오는 형식적인 장소였던 것처럼, 역사의식이 정말로 중요한 것은 정치적 정통성 때문이 아니라 기억이 가지는 힘 때문이 아닐까? 국가주의의 수호자인 독일국방군이 제복을 입은 시민인 독일연방군으로 바뀐 것처럼, 역사는 기억-정치가 아닐까? 따라서 민주 정권 10년의 결과로 일베가 탄생한 것은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역사를 민주주의적으로, 나와 똑같은 시민의 기억과 상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저 민주화의 정통성을 가진 자신들을 지지해야 하는 이유로 삼은 야권의 오만을 보고 배운 결과가 일베가 아닐까? 일베가 민주주의를 모욕하는 것은 야권이 민주화의 역사를 편의를 위해 이용해온 것을 그저 따라하는 것이 아닐까? 일베 현상은 학교에서 역사 과목을 배우지 않아서가 아니라 무엇을 왜 기억해야 하는지를 배우지 않아서, 알지 못해서 생긴 일이 아닐까? 한은석씨는 사회 내 불평등에 관심이 있는 경제학과 학생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83 | 추천: 0
조아라/ 청년 칼럼니스트 # 흐엉 이야기 한 달 전 아기를 낳았다. 내 눈과 남편의 코를 빼닮은 예쁜 딸이다. 시어머니가 나를 돌봤다. 한 달 내내 미역국을 먹었다. 한국에 오기 전까진 미역국을 먹어본 적 없다. 씹을 때 물컹물컹한 느낌이 낯설다. 베트남에선 아이를 낳으면 ‘깐’을 먹는다. 돼지고기를 졸인 음식이다. 또 ‘자오응엇’이라는 국을 계속 마신다. 나뭇가지를 우려낸 따뜻한 물이다. 베트남 말을 쓰고 싶지만 어머니는 집에선 한국말만 쓰라고 말했다. # 너이 이야기 얼마 전 한국어교실에서 ‘연애’와 ‘소개’라는 단어를 배웠다. 나는 남편과 연애 결혼했다. 라오스를 여행하던 남편은 식당에서 나를 보고 반했다고 했다. 그는 몇 달 뒤 다시 라오스에 왔다. 라오스 말로 내게 청혼했다. 처음에는 부모님도 반대했다. 하지만 남편이 잘 웃고 착한 사람이라는 건 가족 모두 오래지 않아 알게 됐다. 결혼한 지 2년, 아이를 가진 지 8개월째다. 아이는 간호사를 불러 집에서 낳기로 했다. 라오스에서 하는 대로 말이다. 가끔은 파파야로 만든 샐러드인 ‘땀막홍’이 먹고 싶다. 하지만 한국에선 파파야를 구하기 어렵다. 지금은 남편과 시어머니, 올케와 같이 살고 있다. 남편이 버는 돈으론 네 가족이 먹고 쓰기에는 빠듯하다. 임신 전에는 나도 뷔페에서 초밥을 만드는 일을 했다. 주말에만 일해도 하루에 7~8만 원씩 벌었다. 아이를 낳고 나면 다시 일을 하고 싶다. # 수안 이야기 남편은 집에서 40분 거리 회사에서 용접 일을 한다. 7시면 출근해야 한다. 나는 매일 아침을 챙겨준다. 나도 10시부터 부업을 한다. 옷에 단추를 붙이거나, 상자를 포장하는 일이다. 단추를 500개 붙이면 5000원을 받는다. 나는 하루에 1,000개 정도 붙인다. 다 붙이는 데 4시간 걸린다. 어깨도 허리도 쑤신다. 남편 월급으로는 두 사람 살기에 넉넉지 않다. 한국말을 잘 못하고, 한국인 친구도 없다. 그래서 내가 찾을 수 있는 일자리로는 큰돈은 못 번다. 남편과의 결혼은 하루 만에 결정됐다. 결혼소개소 사장이 내게 나오라고 했다. 여자들은 3명 있었고, 지금의 남편은 우리들과 면담을 했다. 그는 나를 선택했다. 친정에도 보탬을 주고 싶다. 남동생은 베트남에서 의과대학을 다니고 있다. 동생이 편안하게 공부하면 좋겠다. 동생이 인터넷으로 사진을 보내줬다. 볼 때마다 그립다. # 아라 이야기 “몇 살이에요?” “결혼한 적 있어요?” 주말마다 이주여성을 위한 한국어교실에 나간다. 그녀들이 내게 묻는다. 난 결혼한 적도, 아이를 낳은 적도 없다. ‘선생님’이라고 불리지만, 사실은 그들이 내 인생 선배다. 흐엉, 너이, 수안은 우리 반 학생들이자 나의 친구들이다. 내가 사는 인천에는 외국인이 많다. 이주여성들은 주로 시골에 살 것 같지만, 사실은 서울과 경기 지역에 가장 많이 산다. 여성가족부 통계자료를 보면 2012년 한국에 들어온 결혼이주여성은 196,789명이었다. 이 가운데 서울과 경기 지역에 자리 잡은 사람이 92,751명이었다. 10만이 넘는 중국 여성이 한국에 들어왔다. 뒤이어 베트남(47,187명), 필리핀(13,148명), 일본(10,335명) 순으로 많았다. 이주여성들에겐 집이 마냥 안전한 공간은 아니다. 더욱이 우리나라에선 집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가정의 몫으로 남겨두려는 경향이 강하다. 이주여성은 한국 문화에 익숙지 않은데, 한국의 가족들은 그녀가 습득할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는다. 아내 또는 며느리가 김치를 잘 담그고, 고향의 언어는 쓰지 않기를 바란다. 필리핀에서 온 제니(22)는 인천에서 살고 있다. 남편인 박 모(45)씨는 일을 그만두고 술을 마시며 하루를 보낸다. 갓난아이가 있어 정부 보조금으로 20만원을 받는다. 그나마도 월세로 나간다. 어느 날 남편은 소주병을 제니의 얼굴에 던졌다. 어깨를 잡고 흔들기도 했다. 제니는 112에 신고했지만, 경찰은 출동하지 않았다. 때로 가정은 바깥보다 더 위험하다. 여성의 희망을 앗아갈 때도 있다. 반대 상황도 있다. 이주여성이 한국 문화를 거부하거나, 가족과 잘 지내보려는 생각을 하지 않을 때다. 베트남에서 온 A씨는 한국인 남편과 불화했다. A씨의 말만 들었을 때는 남편의 게으름과 무관심에 책임이 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A씨는 자신이 텔레비전이나 가구를 부수고, 한국문화를 배척한 일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은 이혼했다. 한국으로 귀화하지 않은 이주여성에게 이혼의 책임이 있을 땐 고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주여성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데는 경제적 요인이 크다. 한국어 소통이 서툴러 취업이 쉽지 않다. 상당수 이주여성의 남편은 임금 수준이 높지 않다. 때문에 이주여성도 경제활동에 뛰어들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서울 한울타리 다문화가족지원센터의 곽아름 담당자는 “‘한국어’와 ‘사무 능력’이 취업의 열쇠”라고 말했다. 이주여성 대부분이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일자리를 원한다. 하지만 학력이나 컴퓨터 기술, 한국어 능력이 뒷받침되지 않을 땐 단순 노동에 종사할 수밖에 없다. 서울시 여성가족정책실에선 ‘결혼 이민자 출산 전후 돌봄 프로그램’을 계획해 9월부터 선보일 예정이다. 외국의 출산 문화를 알고 돌봄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취지다. 여성가족정책실의 박경길 담당자는 “산후조리원에 매뉴얼을 보급하는 방식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주여성에게 더 나은 삶을 꿈꾸게 할 방법은 없을까? 다른 나라의 다문화정책을 살펴보자. 독일에선 외국인이 장기체류하려면 반드시 통합 언어강좌를 900시간 이수해야 한다. 독일어를 습득하고 문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호주는 ‘모든 사람의 가치를 인정한다’는 원칙으로 다문화정책을 입안한다. 특히 시드니는 인구의 35%가 외국 출신이다. 시내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직원의 4분의 1이 외국 태생이다. 원주민과 토레스 섬 주민의 문화도 인정한다. 물론 비판도 만만치 않다. 2010년 호주 다문화자문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이민자 4명 중 1명이 인종 또는 국적 차별을 겪었다고 나타났다. 기존 백인 중심 사회의 권력관계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문화의 다양성을 관리하는 다문화주의 정책이었다는 지적이 있다. 우리나라의 2012년 다문화지원사업 예산은 996억 원이었다. 다문화가족 자녀의 생활지원 서비스에 256억 원이 배정됐다. 그밖에 통번역 및 양육지원 서비스(30억 원), 한국어교육(21억) 등에 예산이 쓰였다. 하지만 취업을 지원하는 데는 예산이 부족한 상황이다. 여성가족부는 전국에 ‘새일센터’ 120곳을 두고 결혼이주여성의 취업과 자립, 경력개발을 지원한다. 이곳 한해 예산은 14억이다. 1인당 300만원까지 지원할 수 있어, 한 해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여성은 600명 남짓에 불과하다. 서울시가 시민참여형 홍보시스템을 만드는데 쓰기로 한 올해 예산(3027억원)의 200분의 1 수준이다. 이주여성이 진짜 원하는 정책이 무엇인지, 얼마나 많은 여성이 혜택을 보는지 체계적으로 따져 봐야 한다. 서비스를 몰라서 이용하지 못하는 이주여성들도 많다. 상당수는 본인의 취업과 아이들의 교육 문제를 가장 크게 걱정한다.   이주여성이 한국에 온 건 행복하게 잘 살기 위해서다. 그들을 ‘수혜의 대상’ 으로만 바라봐선 안 된다. 앞으로는 그들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직업교육과정이 확충돼야 한다. 컴퓨터나 운전면허 등 실생활에 필요한 교육 기회가 더 많은 이주여성들에게 돌아가야 한다.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차별받지도, 외롭게도 살지 않도록 그녀들을 보듬는 정책이 필요하다. 조아라씨는 교육과 언론에 관심을 갖고 이주여성을 위한 한국어 교실 강사로 활동 중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765 | 추천: 0
이한솔/ 청년 칼럼니스트 생태주의자 볼프강 작스가 전한 이야기다. 한 관광객이 해변에 갔다가 어부가 고깃배에서 꾸벅꾸벅 조는 모습을 보고는, 왜 이렇게 누워서 빈둥거리느냐고 물었다. 어부는 자신이 오늘 아침에 필요한 만큼 충분히 고기를 잡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고, 그러자 관광객이 말했다. “이걸 한번 상상해보시오. 만약 당신이 하루에 서너 차례 바다에 출항한다면 서너 배는 더 많은 고기를 잡아올 수 있소. 한 일 년쯤이면 당신은 통통배 한 척을 살 수 있게 될 겁니다. 그리고 3년이 지나면 작은 선박 한두 척을 살 수 있게 될 테고. 언젠가는 당신 소유의 냉동 공장을 지을 수 있겠지요. 결국에는 당신 소유의 여러 척의 어선들을 지휘하여 물고기를 추적할 헬기를 장만하게 되거나, 아니면 당신이 잡은 고기를 대도시까지 싣고 갈 트럭을 여러 대 사겠지요. 그러고 나면…….” “그러고 나면?” “그러고 나면, 당신은 조용히 멋진 해변에 앉아 햇볕아래 꾸벅꾸벅 졸면서 아름다운 바다를 바라보게 될 겁니다.” 그러자 어부가 황당하단 표정으로 관광객을 쳐다보며 말하였다. “그게 바로 당신이 여기 오기 전까지 내가 하고 있었던 거잖소!”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 노동에 열중하는 것과 삶을 즐기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 보게 만드는 일화이다. 솔직히 노동과 관련된 단어 치고 과연 좋은 어원을 갖는 게 있을까. 프랑스어의 ‘travail’은 고문 도구를 의미했던 라틴어 ‘tripalium’에서 나왔고, 독일어 ‘arbeit’ 역시 고통, 수고 등을 의미한다. 고대 그리스의 정치가 크세노폰은 시민 중에 노동에 종사한 사람을 공직에 써서는 안 된다고 했고, 성경에서조차 신은 아담에게 노동을 형벌로써 부과하였다. 그래서인지 인류학의 다양한 민족지는 사람들이 오늘날처럼 죽자 살자 일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남미의 투피-과라니족(族)은 4~6년마다 경작지를 옮겨 다녔다. 지력이 고갈되었거나 제거하기 어려운 기생식물이 자라서다. 돌도끼로 새로운 경작지를 만드는 데에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는데, 부족의 남자들은 1~2개월가량 이 작업에 집중한다. 이들 부족의 남성은 평균 4년에 2달만 일한 것이다! 그럼 여성은? 씨뿌리기, 추수하기와 같은 농사의 나머지 부분을 담당한 여성도 많아야 하루 2시간미만 일했다. 다른 부족도 마찬가지, 인류학자 클라스트르에 따르면 오스트레일리아의 안헴 지역 수렵 채집인들은 하루에 3~4시간 일했다. 아프리카 남부 칼라하리 사막에 거주하는 부시먼은 하루나 이틀 일하고 일주일을 쉬었고, 아마존의 야노마미족은 성별과 계절에 따라 다르지만, 일주일에 평균 1.85일 일했다. 그래서 남태평양 사모아 제도의 투이아비 추장이 20세기 초 유럽을 방문하고 돌아와, 빠빠라기(유럽인, 백인)들은 생존을 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노동에 바친다고 했을 때, 고향사람들은 경악하였다. 전시의 성격을 띠는 음식물의 대분배인 사갈리, 말리노프스키는 트로브리안드 도민들의 생활이 선물체계에 ‘물들어 있다’고 말한다. 그만큼 그들의 생활은 끊임없는 ‘주고받기’다. 사진 출처 - 한겨레(한길사 제공) 더 일할 수 있는 ‘기회’도 이들의 삶의 방식을 바꾸지 못하였다. 가령 철도끼는 돌도끼보다 10배 더 효율적이다. 즉 같은 시간에 10배를 생산하거나, 같은 일을 10분의 1의 시간동안 마칠 수 있다. 유럽인들이 남아메리카 인디언에게 철도끼를 주었을 때, 이들은 열배 더 생산했을까. 그러지 않았다. 레비-스트로스의 관찰은 이들이 더 생산하는 대신, 더 적게 일하는 쪽을 택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인디언들은 거의 일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은 굶어죽지 않았다. 원주민의 삶을 상상할 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하루하루 기아에 허덕이며 먹을 것을 찾아 정글을 헤매는 모습을 그릴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최소한의 필요노동만을 행했고, 그 외의 시간은 인생을 즐기는데 사용했다. 하루 21시간을 문자 그대로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낮잠, 목욕, 논쟁, 마약, 음주, 섹스와 같은 오락을 하는데 보냈으며, 때때로 벌어지는 사냥과 그들이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전쟁에 지루할 겨를도 없었다. 중세 유럽 사람들도 언제나 놀고 싶어 했다. 공휴일은 150일이 넘었기에, 실제 노동 일수는 절반이 채 안되었다. 그마저도 노동 시간은 극히 불규칙했고, 축제(축일)와 전야제에 묻혀 흐지부지 되기 일쑤였다. 이것도 모자랐는지 일요일에 놀았으므로 예의상 쉬어주는 ‘성 월요일(Saint Monday)’을 엄수했고, 이는 빈번히 ‘성 화요일’로까지 이어지곤 했다. 돈을 미끼로 사용하는 것도 그다지 쓸모가 없었다. 차라리 일을 덜하고 돈도 덜 받는 것을 택했기 때문. 사람들은 항상 일보다는 노는 것에 더 큰 관심을 가졌다. 반면 2012년 한국인들은 일주일 평균 44.6시간 일했다(OECD 구조개혁평가보고서). 하루 8시간이 좀 넘는 시간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정신없을 정도로 많은 것들을 생산해내고, 다시 그것을 소유하기 위해 끊임없이 일하고 있다.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루 최대 4시간만 일하고 줄곧 즐겁게 놀았던 이전 사회와, 최소한 8시간을 일해도 돈 때문에 놀지 못하는 자본주의 사회. 그렇다고 행복지수(만족도)는 그들의 발끝도 쫓아가지도 못하는 것이 이 사회의 현실이라면? 지금이야말로 쉬엄쉬엄 일하며 삶을 즐겼던 과거의 추억을 되살려볼 때가 아닐까.   이한솔씨는 중등대안학교인 마리학교에서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18 | 추천: 0
이현정/ 청년 칼럼니스트 쌍용차 분향소 철거 지난 4월 4일 화요일, 아침 9시부터 수업이 있던 나는 나갈 채비를 마치자마자 강의실로 향했다. 다행히 늦지 않아 한 숨 돌릴 겸 늘 그랬던 것처럼 휴대폰으로 뉴스를 보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하며 내가 누른 기사는 ‘서울 중구청의 대한문 쌍용차 분향소 습격’이었다. 새벽에, 그것도 5시 30분에, 공무원들이 출동하여 자는 사람들을 깨워 내쫓다 저항하면 연행하고, 천막을 없애고 그 위에 화단을 만들었다는, 아침의 평화를 깨는 소식이었다. 순간 어안이 벙벙했다. 그리고 곧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정보공개센터의 자료에 의하면 이 날 집행된 불법시설물 정비 및 화단 조성은 최창식 구청장이 당일 결재한 것으로 나온다. 구청장이 결재를 위해 새벽잠도 마다하고 일어나 결재를 하고, 결재를 하자마자 공무원들이 집행에 나선 것일까. 뭐가 그리 급했는지, 계획안에는 예정 날짜도, 시간도 미정이다. 비밀 첩보 작전도 아닌데 날짜는 D-day로, 시간은 H시로 기재 되어 있다. 화단 조성에 든 비용은 총 87만원. 꽃을 사는 데만 87만원이 들었다. 87만원 어치의 꽃으로 24명의 넋을 덮어 버렸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당일 저녁, 쌍용차 대한문 분향소 철거 규탄 촛불문화제가 열렸다. 4월이었지만 저녁 날씨는 쌀쌀했다. 사람들의 마음도 쌀쌀했다. 사람들을 둘러싸고 있던 경찰들의 마음도 쌀쌀했을 터. 8시 경, 천막 재설치를 위해 차가 들어오자 경찰들이 달려들었다. 시민들도 달려들었다. 서로 천막을 쥐고 놓지 않았다. 아니, 놓지를 못했다. 대한문 앞은 한 마디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밀고 밀리는 몸싸움 속에서 또 누군가는 끌려갔다. 한 쪽의 폭력은 또 다른 쪽의 폭력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라고 그들에게는 인식되기 때문이었다. 빼앗으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 모두가 빼앗으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였다. 시민들은 화단을 빼앗고 다시 분향소를 지키려고 했고, 경찰은 천막을 빼앗고 화단을 지키려고 했다. 잠시 휴전 상태로 돌아가 다시 자리를 잡을 때,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한 뼘 남짓 떨어진 차도에서 버스와 승용차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좀 더 멀리에는 국가인권위원회가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어떻게 보면 두 공간은 같은 공간이었다. 그런데 한 뼘을 사이에 두고 한 쪽은 일상의 평화를 누리고 있고, 한 쪽은 누군가의 삶 또는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한 투쟁에 조금은 지쳐 보였다. 순간 ‘왜 다른 사람들은 공감해 주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자신들의 평화를 깨고 싶지 않아서 일까. 아니면 타인의 고통에는 관심이 없기 때문일까. 어떤 이가 나에게 말했다. 그들의 상황과 처지, 그리고 그 슬픔과 분노에 대해 공감하고는 있지만 내가 나서는 것은 부담스럽다고. 나는 생각했다. 공감하지 않는 행동이 있을까, 공감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것은 진정한 공감일까? 진주의료원 폐업 2월 말에는 경상남도가 진주의료원 폐쇄를 결정했다. 적자와 부채 등으로 인해서 운영 중지가 불가피 하다고 했다. 많은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왔다. 공공의료의 위기가 눈앞으로 다가 왔다고 했다. 언론에서는 전문가들이 진주의료원의 부채가 폐업할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했다고 전했다. 그렇지만 경남도는 진주의료원의 부채가 너무 많다고 한다.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까. 그러자 다른 자료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전국 의료원 중에서 흑자인 의료원은 단 한 곳뿐이었다. 그렇다. ‘공공의료’라는 것을 수익을 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4월 12일, 경남도 의회에서 진주의료원 폐업조례안이 날치기 처리 되었다. 4월 13일, 창원으로 전국 각지에서 버스들이 향했다. 진주의료원 폐업 철회를 촉구하는 전국노동자대회가 열리기 때문이었다. 당일 아침, 나도 그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는 대한문 앞에서 출발했다. 대한문을 지나며 생각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모였을까. 창원에 도착하니 엄청난 인파가 창원 만남의 광장에 모여 있었다. 하는 일이 다른 다양한 사람들이 그날 하나의 생각을 가지고 모였다는 게 참 신기했다. 그것은 분노와 공감의 힘 아니었을까.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만남의 광장에서 경남도청까지 약 3km 정도 되는 구간을 거리행진 했다. 거리행진을 하려면 교통 통제가 필요했고, 차선 세 개 정도를 이용했다. 폴리스라인 안으로 모여 걸었다. 누구는 구호를 외치고, 누구는 피켓을 들고, 누구는 차에서 방송을 했다. 이 진주의료원 사태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 달라고, 폐업은 당치도 않다고. 지나가는 창원 시민들이 사진을 찍었다. 어떤 운전자는 거리행진 때문에 차가 막힌다며 경찰에게 화를 냈다. 똑같았다. 4월 4일의 저녁과. 같은 공간에 있지만, 공감을 얻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경남도청 앞에 도착하니 도청은 잘 보이지 않았다. 경찰 버스와 바리케이드가 사람들을 열렬히 반기고 있었다. ‘올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바리케이드는 말을 들어주지는 않았다. 바리케이드 안에 있는, 그 사람도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와 나는, 그리고 우리는 다른 세계 사람이기 때문이었을까. 그리고 6월이 된 지금도 이 문제는 해결되지 못하고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약 아홉 차례의 노사교섭에도 불구하고 진전이 없는 것은 서로가 서로의 입장에 ‘공감’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 너, 그리고 우리 몇 달 전에도 '공감'이라는 것에 대해서 고민한 적이 있었다. 사실 그 때 공감에 대해서 고민했던 것은, 친구의 처지를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마음으로는 이해하지 못하고 마냥 서운해 하는 나에 대한 한탄과 반성 때문이었다. 그런 나에게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공감을 하려면 '철저하게 타인이 되어야 한다'고. 듣고 보니 그랬다. 나를 타자화하여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 그리고 상대방의 고통과 행복을 느끼는 것, 그것이 공감이지 않을까.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성어도 있지 않던가. 어쩌면 내가 지금까지 했다고 믿는 '공감'들은 철저하게 나를 타자화 하지 못한, 허울뿐인 공감일 수도 있다. 내가 쌍용차 분향소 앞에 갔던 것, 진주의료원 폐업에 반대하며 길을 걸었던 것은 어쩌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공감은 아닐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공감을 하려는 '시도'나 '노력'이라고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냥 나의 곁을, 우리의 곁을 지나치던 수많은 사람들 모두가 그런 공감을 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한 번쯤 주변을 둘러보고 눈에 들어오는 무언가가 있다면, 주저 말고 대화의 몸짓이나 눈빛을 보내는 것, 그게 바로 공감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하면 처음에 '나, 너, 우리'라는 것을 먼저 배운다. 물론 여기서도 내가 먼저이긴 하다. 그렇지만 나와 너는 결국 우리가 된다. 길을 지나치는 우리 모두가 진짜 '우리'가 되는 것은, 너를 알아가려는, 너를 공감하려고 해보는 작은 몸짓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이현정씨는 한국 현대사에 관심이 있는 사학과 학생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278 | 추천: 0
김창남/ 인권연대 운영위원 “안녕하세요 중앙대학교 여성주의 교지 <녹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윤소입니다.” “두산대에 아직까지 여성주의 교지가 있어?” 새로운 자리에서 나를 소개할 때 종종 놀라움 섞인 질문을 듣곤 한다. 학보사나 교지 등 대학 언론도 예전만 못하다는 말이 나오는 지금 이 시점에 ‘여성주의’ 교지라니 신기하게 여겨지나 보다. 나는 현재 중앙대학교 여성주의 교지 <녹지>에서 활동하며 대학 내에서 여성주의를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명맥을 잇는 대학 여성주의 언론은 <녹지> 뿐만 아니라 고려대학교 여성주의 교지 <석순>, 성공회대학교 여성주의 저널 <n[앤]>, 성균관대학교 여성주의 교지 <정정헌>등이 있다. 현재 대학 내에서 여성주의적인 가치가 약해지면서 여성주의 언론도 이에 영향을 받고 있다. 대학 내 여성주의의 위기 현재 대학 내에서 여성주의의 입지는 매우 불안정한 상태이다. 우선 총여학생회의 존재가 희미해져 가고 있다. 최근 건국대학교 전체 학생 대표자 회의에서 ‘총여학생회 폐지’ 안건이 압도적인 찬성표를 받고 통과되었다고 한다. 현재 서울권에서 총여학생회가 제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대학도 경희대, 연세대, 한양대, 홍익대 정도라고 한다. 또한 ‘여권은 이미 신장되었다.’, ‘요즘처럼 평등한 세상에서 여학생들의 복지를 운운하는 것은 역차별이다.’라며 여학생의 권리를 주장 할 수 없게 말하는 분위기가 대학 사회 전반에 퍼져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근 중앙대학교에서는 학교 전체에 단 하나뿐이던 여학생 휴게실을 남녀공용 휴게실로 바꾸기도 했다. 학교에서는 총여학생회의 공백을 틈타 이용 당사자인 여학생들의 의견은 들어보지도 않은채 방학 중에 이런 결정을 내렸다. 이 과정에서 중앙운영위원회에 소속된 각 단과대의 학생 대표자들조차 별다른 고민 없이 여학생 공간의 축소에 찬성했다. 즉 대학 내의 구성원 중 다수가 성평등의 가치에 대해서 어떤 고민이나 성찰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대학 내에 여성주의가 필요한 이유 그러나 대학 내에서 ‘여성주의’는 여전히 중요한 가치다. 왜냐하면 요즘 유행하는 ‘역차별’이나 ‘여성상위시대’ 같은 단어들과는 달리 대학은 여성에게 아직도 평등한 공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힘들었던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대학에 진학하면서 ‘어떠한 권위나 위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대학 생활’을 꿈꿨다. 그러나 막상 대학생이 되고 보니 ‘대학은 평등한 공간이 아니’었다. ‘후배’이며, 심지어 ‘여자’이기까지 한 나는 학교 안에서는 항상 약자일 수밖에 없었다. 성폭력 사건이나, 여성에 대한 편견을 거리낌 없이 말하는 교수 같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도 대학생의 일상에서는 권위적이고 성차별적인 발언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선배들은 술자리에서 항상 ‘여자’ 후배의 외모를 안주삼아 난장을 벌였다. 그 자리에 앉아 있던 나는 마치 내가 평가 받는 듯한 느낌이 들어 불편하고 화가 났다. 하지만 나만 빼고는 모두 화기애애했던 술자리 분위기를 깨면서 항의할 자신이 없기에 나는 먼저 자리를 피했다. 게다가 남자 선배들은 조금 친해졌다 싶으면 항상 ‘이제 선배라고 하지 말고 오빠라고 불러봐~’라고 말했는데, 나는 정확히 뭐라고는 설명할 수 없는 불쾌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 때 나는 내가 느낀 불편함을 남에게 말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내 주변에서는 나 말고는 이런 고충을 토로하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다들 당연한 일이라 여기기에, 한 몇 년을 ‘나만 이상한 사람인가? 내가 예민한 건가?’라며 내 탓을 했었다. 그러던 차에 <녹지>에서 활동하게 되면서, 나는 여성주의적인 시선으로 내 고민을 바라보게 되었다. 여성주의에서는 그동안 내가 느꼈던 불편함에 대해서 그것은 네 탓이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또한 살아가면서 혼자서 수없이 고민했던 일들을 나의 언어로 말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나는 <녹지>의 구성원들과 내가 겪었던 불쾌한 일, 불편하지만 말할 수 없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서로의 고민을 묻고 답하면서 우리는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판점을 지닌 사회적, 논리적인 구조를 발견하게 되었다. 또한 불합리한 사회 구조 속에서 나에게 강요되는 역할에 저항하게 되었다. 여성주의자로 살아가면서 우리는 서로 연대하고 지지해준다. 나는 여성주의를 시작한 이래로 내가 문제를 제기 했을 때 나의 발언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내집단이 생겼다는 느낌에 강한 안정감을 느낀다. 즉 사회적으로 약자인 사람도 주체적으로 말할 수 있게 지지해주는 공간이 바로 여성주의인 것이다. 대학 내에 여성주의 언론이 필요한 이유 현재 사회 전반적으로 성평등 의식이 부재한 상황에서 대학 사회도 여성주의에 대한 편견과 무지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성주의 언론은 여성주의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전환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학내 여성주의 언론을 읽으며 대학생들이 최초로 여성주의적인 시각을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부러 여성학 강의를 찾아 듣지 않는 한, 평범한 사람이 여성주의를 접할 기회란 많지 않다. 반면에 여성주의 매체는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학교 곳곳에 놓여있기 때문에 ‘여성학’ 강좌에 비해 접근성이 높다. 이러한 지점에서 여성주의 언론은 대학생이 처음으로 성평등 의식에 대해 고민해보는 발화점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 또한 여성주의 언론은 대학의 권위주의적인 분위기 속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위안을 줄 수 있다. <녹지> 47집을 내고 나서 독자들에게 잘 읽었다는 문자를 받았다. 그들 대부분도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것 같다. ‘남들은 괜찮다는데 왜 나만 불편할까. 내가 이상한 사람인 걸까?’ ‘찜찜한 일이 있는데 정확히 왜 그런지 설명할 수가 없어서 답답하다.’는 고민 말이다. 독자들이 보낸 문자 말미에는 ‘혼자서 고민하던 부분을 공감할 수 있는 말로 풀어내 주어 고맙다.’고 적혀있었다. 나는 그 때 보람을 느꼈다. 독자가 내가 문제시하는 지점에 대해서 공감하였고, 나의 글을 읽고 해소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물론 여성주의 언론의 글을 읽고 좋아하는 사람들 보다, 오히려 글을 읽으면서 불편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이 느낄 불편함에도 나름의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글을 읽으며 불편함을 느낄 때, 평소에 당연시 하던 통념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는 보편적인 일상에 질문을 던지며 새로이 보편타당한 대답을 찾아나간다. 그래서 나는 여성주의를 말하며, 여성주의 언론 또한 이를 목표로 계속되고 있는 것 아닐까. 필자 설명) <녹지>는 1967년도에 여학생 교지로 시작하였다가 1980년대 이후 여성주의 교지의 정체성을 확립하여 2013년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녹지>는 2009년도에 교지 대금을 삭감하겠다는 중앙대학교의 학내 언론 탄압 시도에 의해 위기를 겪었다. 하지만 학생들의 항의로 인해 학교의 시도는 무산되었다. 현재는 재학생들이 교지 대금을 자율적으로 납부하는 형식으로 예산을 꾸려가고 있다. <녹지>는 일 년에 두 번 봄, 가을에 발간되는데, 최근에 47집 봄 호를 냈다. 이번 호에서는 ‘폭력’이라는 주제를 바탕으로 정치, 학내, 미디어, 국가, 가정 등의 영역을 다루었다. 이윤소씨는 여성 인권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는 청년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28 | 추천: 0
박정훈/ 청년 칼럼니스트 그들의 태도 “나는 레즈비언과 게이 크리스천 운동 단체가 존재하는 사실 자체가 교회를 책망하는 표시라고 생각한다. 동성애 성향의 핵심에는 깊은 외로움, 상호적 사랑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 갈증, 정체성의 추구, 그리고 완전함에 대한 갈망이 있다. 동성애자들이 이를 지역 ‘교회 가족’ 내에서 찾을 수 없다면 우리는 그러한 표현을 쓸 자격이 없다.” -존 스토트, 『동성애 논쟁』 중 존 스토트는 종교 교리와 각종 사회적 이슈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으로, 오래전부터 기독교계에 영향력을 끼쳐왔다. 그 역시 여느 기독학자들처럼 동성애는 명백히 하나님의 질서에 어긋나는 죄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동성애를 조심스럽게 다룬다. 또 동성애자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그의 태도는 사회적으로 수긍할 수 있는 범주에 속한다. 하지만 근래에 사람들이 목도한 기독교인들의 행태는 수긍하기 어려운 정도에 이르고 있다. 국회에서 ‘동성애 차별금지’를 포함한 차별금지법이 발의되어 통과될 조짐이 보이자, 국내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마치 국가적인 소명이라도 받은 것처럼, 조직적이고 적극적으로 반대운동을 펼쳤다. 필자 역시 아는 교회 지인으로부터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교회에서 동성애를 죄라고 설교할 수 없게 되는 등 종교 활동이 제약될 수 있으니, 법안 통과를 저지하는 운동에 동참해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단정할 수 없으니 조금 더 알아보고 동참할 필요가 있지 않겠냐’는 내용의 유보적인 답문을 보냈다. 한편으론 의문이 들었다. ‘교회에서 언제부터 동성애에 대한 설교를 그렇게 많이 했지?’ 필자도 나름대로 교회에서 잔뼈가 굵다면 굵은데, 동성애에 대한 설교를 들어본 일이 가물가물하다.   사진 출처 - 참세상 그들의 배타성 사실 차별 행위를 법을 통해 규율해야만 하는지에 대해선 명확한 판단이 안 선다. 법을 공부하고 있는 학생임에도, 법에 의한 규율이 얼마나 실효성이 있는지 혹은 그것이 바람직한지에 대해선 여전히 확언할 수 없다. 하지만 차별금지법을 대하는 기독교계의 태도에 대해선 바람직하지 않다고 확신할 수 있을 것 같다. 기독교인들의 배타적이면서도 공격적인 태도는 이미 오래전부터 뭇사람들로부터 질타를 받아왔다. 그리고 그 이면의 정서는 종종 ‘포비아(phobia, 공포증)’라는 단어로 표현된다. ‘이슬람포비아(Islam phobia)’, ‘호모포비아(homophobia)’가 대표적이다. 이렇게 보면 기독교인들은 항상 겁에 질려 사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분명히 성경에선 하나님이 믿음을 가지고 담대히 살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말이다. 이면의 정서야 어찌됐건 그들이 견지한, 타자에 대한 배타적 태도는 우리나라의 기독교 성도 수를 뚝뚝 떨어뜨리는 데 한 몫 했다. 교회를 건강하게 세워가는 일과 국가를 건강하게 세워가는 일은 분명히 다르다. 예수가 보여준 하향성의 삶, 사랑을 중심에 둔 연대의 원칙에 비춰 보건대 지향점과 수단, 작동원리 등 어느 하나 일치할 수 없다. ‘오직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세상에 대해 배타적이다. 그럼에도 기독교인들은 종종 이를 혼동한다. 헌법에 명시된 대한민국의 작동원리는 민주주의시스템이다. 민주주의는 국민 다수에 의해 운영되지만, 동시에 소수자에 대한 배려를 잃지 않는다. 그리고 그 운영 과정은 평화적이어야만 한다.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는 잘 모르겠으나 그들만의 윤리적 판단기준을 국가에 강요하는 일은 타당하지 않다. 설사 그들이 우리나라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하더라도 소수자에 대한 차별적 언행이 정당화되진 않는다. 그리고 그들만의 잣대를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는 행위, 차별금지법 발의에 대한 그들의 대응방식 등은 어떤 면에서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헌법상 보장된 종교 활동의 자유가 침해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오히려 교세를 이용한 집단적 행동이 헌법에 명시된 정교분리 원칙과 평등권을 침해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모든 사회적 쟁점은 헌법상 권리의 충돌로 나타난다. 충돌하는 각 권리의 제한 범위를 확정하는 일이 법집행이자 법에 대한 판단이다. 법을 집행하고 판단하는 기관은 사회 일반인의 관점에서 어느 정도까지 그 권리를 제한할 수 있을지를 판단하며, 설사 제한한다 하더라도 그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하지 않도록 한다. 생각하건대 ‘교회’에서 동성애와 관련한 ‘교리적인 판단’을 ‘예배시간’에 언급한다고 해서 그 목사를 차별금지법 위반으로 처벌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예배는 무엇보다도 본질적인 ‘종교 활동의 자유’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동성애자들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본질적인 헌법상의 평등권과 행복추구권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기독교인들도 그러한 권리를 보장하는 차원의 ‘차별금지법’이라면, 관용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그들의 소명 남 얘기 하듯 ‘그들’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필자 역시 기독교인이며 예수를 신앙의 모델로 삼고 있다. 다만 지금의 교회가, 그들이 말하는 ‘죄인’들에게 조금 더 호의를 보여줬으면 하는 바람에서 글을 쓴다. 예수는 건강한 자에겐 의원이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 필요하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예수의 정신과 민주주의의 관용 정신은 양립할 수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 상통한다고 생각한다. 박정훈씨는 노동과 소수자 인권에 관심이 있는 법학전문대학원에 재학 중인 학생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288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