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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할 것인가 기억할 것인가 (한은석)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8 10:48
조회
388
한은석/ 청년 칼럼니스트

아마도 이 칼럼을 읽고 있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일베는 이해할 수 없는 존재다. 스스로를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의 계승자를 자처하는 역사의식의 소유자들이 있다는 것만을 알고 있다. 그러나 87년 6월 항쟁을 저주하며, 80년 5월 광주를 혐오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80년 5월 광주의 희생과 87년 6월 항쟁이 만든 민주화는 도대체 어떻게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일베를 만들어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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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5·18 왜곡 프로 폐지 요구, 일베 폐지 법적 검토”
사진 출처 - 미디어 오늘


 

그러나 일베의 역사의식은 낯선 게 아니다. 물론 내용이 아니다. 바로 형식이다. 역사의식을 가진 계승자들, 역사적 정통성을 가진 정치세력, 현실정치에서 청산하고 극복해야 할 적대자들, 모두 익숙한 것들이다. 50년 역사를 가진 정통 민주화 세력인 야권도 사용하고 있는 형식들이다. 내용에 있어서 일베와 민주화 세력은 극과 극이지만 형식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다.

일베와 야권에게 있어 역사는 전쟁의 기록에 가깝다. 다른 정통성을 가진 정치적 세력들 간의 전쟁의 기록 말이다. 오늘날의 문제들은 모두 과거에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것이다.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빨갱이들을 쓸어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역사의식은 정통성 있는 세력을 지지해야 하는 것이며, 잘못된 세력을 청산하는 의무를 가지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 그렇게 단순한 문제일까? 역사의식이 오늘날의 정치 문제들을 해결해줄 것이라는 생각은 사실 신화에 가깝다. 일베의 극우 네티즌들이 스스로 칭하듯 ‘잉여’로 전락하게 된 것은 그들이 지지한 새누리당의 대기업, 기득권 위주의 정책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야권이 제기하는 비정규직 증가, 양극화 같은 문제가 본격화된 것은 민주화 세력 집권 기간 10년이었다.

과연 정통성을 갖지 못한 반역사적 집단을 현실 정치의 권력에서 몰아내는 인적 청산만이 역사 청산의 유일한 해답일까? 독일의 사례를 살펴보자. 2차 대전 종전 직후 독일에서도 나치 세력은 완전히 청산되지 못했다.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처벌받은 이들은 일부 수뇌들일 뿐, 부역 세력 대다수는 냉전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미국의 보호를 받았다. 해방 직후 우리나라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심지어 나치의 부역 세력들은 스스로를 미화하기도 했다. 무수한 전쟁범죄를 저질렀던 독일국방군은 무장친위대에 떠넘기는 방식으로 자신들을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전쟁을 벌인 애국자들로 미화했다.

2차 대전 내내 수많은 전공을 세워서 초고속으로 승진한 엘리트 기갑장교였던 핫소 폰 만토이펠은 우파 정치가로 성공해서 서독연방군 창설을 주도했다. 독일국방군 장교들은 서독연방군에서도 중책을 맡아 승승장구했고, 은퇴한 장성들은 원로라는 이름으로 계속 명예를 보장받았다. 영광은 산 자들뿐 아니라 죽은 자들에게도 있었다.

죽을 때까지 히틀러와 나치에 충성을 바치고 민주주의를 경멸한 해군제독 칼 데니츠는 정치에 상관없이 조국을 위해 최선을 다한 참군인으로 미화되었고, 승진을 위해 히틀러에게 아부하고 전공을 위해 무리한 공격으로 부하들을 떼죽음 당하게 했던 롬멜은 인격자로 미화되었다.

그러면 독일의 역사 청산은 실패하고 만 것일까? 그러나 독일의 역사 청산은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인 성공 사례로 꼽힌다. 우파인 기민당이 여전히 유력한 거대 정당인데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독일의 역사 청산은 정당화되고 숨겨졌던 역사적 상처들을 드러내는 꾸준한 과정으로 이루어졌다. 의회는 마지막에 오는 형식적인 장소였지 최전선이 아니었다.

이 과정은 꾸준히 계속되고 있는데 1990년대에는 독일국방군의 전쟁범죄만을 모은 전시회가 개최되어서 여론의 큰 주목을 받았고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이때 여론에 힘입어서 독일국방군 장성의 이름을 딴 군부대의 이름을 유대인들을 보호하다 처형당한 오스트리아인 육군 상사의 이름으로 바꾸기도 하였다. 물론 독일연방군 내에서도 많은 논란이 있었다. 독일연방군을 군대답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논쟁 끝에 독일연방군은 자신들이 기억해야 할 것으로 독일국방군의 장성 대신에 무명의 오스트리아인 육군상사를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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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국방군 2차 대전과 깨끗한 독일군의 신화
볼프람 베테 저 김승렬 역 미지북스 2011
사진 출처 - yes24


 

다시 우리 사회로 돌아와서, 과연 역사를 청산하면 문제가 해결될까? 애초에 역사라는 게 청산될 수 있을까? 독일의 역사 청산이 숨겨지고 망각된 것을 기억해내는 과정이었던 것처럼, 역사는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닐까? 독일의 역사 청산에서 의회는 최전선이 아니라 마지막에 오는 형식적인 장소였던 것처럼, 역사의식이 정말로 중요한 것은 정치적 정통성 때문이 아니라 기억이 가지는 힘 때문이 아닐까? 국가주의의 수호자인 독일국방군이 제복을 입은 시민인 독일연방군으로 바뀐 것처럼, 역사는 기억-정치가 아닐까?

따라서 민주 정권 10년의 결과로 일베가 탄생한 것은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역사를 민주주의적으로, 나와 똑같은 시민의 기억과 상처가 얼마나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저 민주화의 정통성을 가진 자신들을 지지해야 하는 이유로 삼은 야권의 오만을 보고 배운 결과가 일베가 아닐까? 일베가 민주주의를 모욕하는 것은 야권이 민주화의 역사를 편의를 위해 이용해온 것을 그저 따라하는 것이 아닐까? 일베 현상은 학교에서 역사 과목을 배우지 않아서가 아니라 무엇을 왜 기억해야 하는지를 배우지 않아서, 알지 못해서 생긴 일이 아닐까?

한은석씨는 사회 내 불평등에 관심이 있는 경제학과 학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