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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상대평가를 폐지하자’는 구호를 폐지하자 (김원진)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8 10:51
조회
402

김원진/ 청년 칼럼니스트



쉽게 내뱉는 언어가 있다.

정치학이나 사회학 수업을 듣다보면 매시간 적어도 한 번씩은 ‘신자유주의’라는 말이 튀어 나온다. 교수의 입, 학생의 입을 가리지 않는다. 모든 문제의 근원에 신자유주의를 갖다 붙이면 그만이다. 추상적인 개념의 매력이자 맹점인데, 주로 자신이 ‘진보’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자주 사용하는 일종의 레토릭이다. 문제는 이런 추상적인 용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자신들조차 그 언어의 정확한 의미를 모른다는 점이다. 나도 가끔 대화중에 이런 함정에 빠지는데, 누군가가 “네가 생각하는 공공성은 뭔데?”, “네가 정의하는 보수는 어떤 개념인데?”라고 물으면 한참동안 생각을 정리하고 나서야 대답하곤 한다. 엄밀하게 다져지지 않은 채, 세상 구경에 나선 언어들은 이렇게 공허하다.

아마 대학사회에서 신자유주의만큼이나 전가의 보도처럼 입에 오르내리는 게 아마 성적의 ‘상대평가’가 아닐까 싶다. 흔히들 상대평가가 문제다, 상대평가를 폐지해 경쟁의 늪에서 벗어나자는 식의 주장을 한다. 이번 학기 토론 수업에서 대학의 상대평가를 주제로 준비하면서 느낀 것도 어떤 공허함이었다. 상대평가와 관련된 국내 연구 자료는 거의 전무했다. 교육사회학을 전공한 선생님에게 여쭤도 봤지만, 아마 자료를 찾기 힘들 거라는 대답만 들었다. 그렇다고 언론이 깊게 상대평가의 문제점에 대해 분석했을까. 그것도 아니다.(다만 중, 고교의 절대평가, 상대평가에 관한 기사와 연구는 제법 찾을 수 있다. 이는 아마 한국 사회 초미의 화두인 입시 때문일 것이다.) 다수의 칼럼이나 사설만 눈에 띄는데, 논리는 없고 다들 감정만 앞선다. 이런 주장에 대체 누가 공감할까. 대표적으로 2009년 한겨레에 실린 우석훈 씨의 칼럼 <대학, 절대평가로 바꾸자>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채점 방식을 지금의 상대평가에서 절대평가로 바꾸는 것이다. ... 절대평가만 도입해도, 학생들끼리 서로 협력해서 공부하고 문제를 풀 수 있는 최소한의 ‘협동’과 ‘연대’가 시작될 것이다. 동료들을 적으로 보고 상대방을 제거하기 위한 미션 임파서블, 그 불신 지옥은 이 간단한 장치만으로도 해소할 수 있다. ... 절대평가가 지금 우리 대학생들에게는 절대로 필요하다. 우리는 지금 구조적으로 친구를 적으로 돌리게 하는 교육을 하고 있다. 학문도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고, 기업도 혼자 하는 게 아니다. 한국 자본주의, 지금 밑에서부터 흔들리고 있는 중이다. 창의와 협동 없는 암기기계들과 21세기를 열 수는 없지 않은가?”

실제로 우석훈 씨가 지적한 현상은 대학사회에 존재한다. 2000년대 초반부터 각 대학의 심리상담센터엔 학점 문제로 상담을 요청하는 학생이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그만큼 경쟁이 치열해지고 학점 따기가 만만치 않은데다가, 학점이 취업에 상당 부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다들 학점에 민감한 것이다. 또, 상대평가는 평가의 기준이 명확해야 한다. 이 때문에 성적은 대체로 암기력과 누가 더 많은 시간을 공부하느냐에 달려있다. 신입생들이 고등학교 내신과 대학 시험이 뭐가 다르냐고 하소연을 하는 이유다. 국가의 어젠다는 ‘창조경제’지만 여전히 대학생들이 당면한 현실은 ‘성실함’에 머물러 있다. 다만, 이것은 현상이다. 보다 깊은 구조의 문제를 단순히 신자유주의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것보다, 신자유주의 때문이라면 어떤 맥락에서 ‘상대평가’가 대학사회에 파고들었는지 여러 결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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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경향신문


 

크고 작은 그림은 이렇다. 80년대 영국의 대처 정부가 집권한 후, 영국 기업에도 하나둘씩 직원평가제도가 도입된다. 평가방식은 에누리 없는 상대평가다. 즉, 1등급이 꽉 차면 아무리 성적이 좋아도 그 아래부턴 2, 3등급에 속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이 시스템은 외환위기를 맞은 97년 이후 한국 기업에도 정착한다. 2000년대 중반, 대학 사회 전반에선 기업의 평가시스템과 유사한 상대평가를 실시한다. 사실 한국 대학에서 성적의 상대평가는 70년대부터 있어왔다. 다만 지금처럼 교수가 1명이라도 더 A를 주면 전산처리가 안 되는 일은 없었다.

어디 학생들의 성적만 그런가. 언제부턴가 교수의 논문은 양으로 측정해서 점수를 매긴다. 어떤 교수는 수업시간에 하소연을 하기도 한다. 여기에 2000년대 중반부터 강의평가도 도입된다. 학생들이 이 결과를 크게 신뢰하진 않지만,(다들 대충하기 때문에) 내가 다니는 학교는 평가결과를 학생들에게 공개한다. 학교도 평가받는다. 교육부는 평가 지침을 내리고 이를 충족하라고 주문한다. 취업률, 영어강의 비율이 대표적이다. 교육부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몇몇 대학처럼 구조조정의 압력을 받고 국가의 지원이 줄어든다. 여기에 언론도 가세한다. 언제부턴가 주요 언론 몇 군대에서 대학평가를 연례행사처럼 시행한다. 대학들이 눈치를 많이 보는 모양이다. 생각보다 이 순위에 중, 고등학생 자녀를 둔 학부모들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탓이다. 올해부터 한 언론사는 ‘학생 만족도’라는 항목을 신설했다. 학생들이 직접 학교를 평가할 수 있게 된 셈이다.

학생은 교수와 학교를, 학교는 교수를, 다시 교수는 학생을 평가하는 이 연결고리가 스스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 평가시스템이 이렇게 공고히 자리 잡게 된 배경엔 또 다른 주체들이 있다. 정론지를 표방하지만 실제론 기업처럼 움직이는 언론. 사적 영역의 기업인지 국가의 행정부처인지 모를 교육부. 그리고 신뢰할 만한 성적을 대학에 요구하는 기업. 이것이 소위 신자유주의라고 불리는 용어의 민낯이 아닐까. 상대평가를 아무런 논리와 분석 없이 때리면 때릴수록, 이 민낯에 근접하기 어려울뿐더러 누군가를 설득하기도 어렵다. 이때 ‘상대평가를 폐지하자’는 외침은 그저 텅 빈 구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럴 바엔 차라리 알맹이 없는 지금의 상대평가 폐지 주장은 폐기되는 게 낫다.

오히려 대학 사회 전반에 걸친 평가 문제를 폭넓게 접근하면서 현실적인 대안을 내놓는 게 더 나은 접근일 수 있다. 엄격한 학점별 쿼터 대신 교수에게 일정정도 재량권을 주고, 졸업 후 성적표에 각 과목별로 전체 수강생 수, 난이도, 시험문제 유형 등을 첨부하는 방안도 고려해볼만 하다. 교육의 본디 목적인 ‘인간의 성장’을 위해 상대평가를 폐지하고 절대평가를 도입하자는 도덕적인 구호는 훈계조로만 들릴 뿐이다.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함과 동시에 신자유주의에 포획된 대학 사회 전반의 평가시스템을 건드리는 것이 문제해결의 출발점이다.

김원진씨는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고 언론인권센터 모니터링팀에서 활동 중인 청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