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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국선언의 당사자적격 (박정훈)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8 10:52
조회
326

박정훈/ 청년 칼럼니스트



국정원의 선거개입과 관련하여 전국적으로 시국선언이 한창이다. 각 대학 총학생회를 비롯한 대학생 단체들을 필두로 해서, 종교인, 방송인, 대학교수, 농민, 경찰, 의사, 고등학생에 이르기까지 선언의 주체 또한 다양하다. 최근에는 (비록 참여한 학교명단에는 없으나) 필자가 속한 인권법학회 이름으로도 시국선언이 발표된 바 있다.

잡다한 것에 관심이 많은 탓에, 법학전문대학원(이하 ‘법전원’)에서도 학업 이외에 이런저런 활동들을 병행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시국선언과 관련해서도 의사표명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관한 논의에 참여할 기회가 몇 번 있었다. 그 몇 번의 논의는 ‘일단 지켜보자’는 쪽으로 결론이 났고, 실제로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이전에도 몇 번, 이와 유사한 경험이 있었다. 사실, 법학도나 법조인들은 보수적인 성향을 띌 수밖에 없다. 사회의 안정을 꾀하는 법의 성질이 본질적으로 보수적이기 때문이다. 법원 내 진보성향의 법관모임인 ‘우리법연구회’의 회장을 지냈던 문형배 판사가 소위 ‘4대강 소송’에서 당해 사안이 적법하다는 판결을 내리며 했던 말-"본의 아니게 좌파라는 딱지가 붙었는데 판사는 기본적으로 우파지, 좌파가 될 수 없는 것"-은 이러한 취지를 잘 드러내 준다.

법전원 학생들이 시국선언을 하지 말고 지켜보자는 논거는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법전원(혹은 그에 속한 단체)은 다른 단체들과 성격이 다르다는 것. 정치적으로 예민한 발언을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적이고 사회적인 발언을 할 자유는 특정 단체나 개인에 국한되지 않는다. 게다가 국정원 사건의 경우 정치적이기 이전에 민주적 헌법질서 자체에 대한 도전으로 볼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법전원생이 제3자라고 볼 수도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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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4개 대안(고등)학교 학생들이 지난 6월 29일 서울광화문 이순신 동상 앞에서
국가정보원의 대통령선거 개입사건과 관련해 시국선언을 하고 있다.
사진 출처 - 경향신문


 

광주지역 의사들의 시국선언을 주도했던 홍경표 원장(홍경표 내과의원)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옳지 않은 것은 옳지 않다고 정확하게 지적하고, 잘한 것은 잘했다고 칭찬해야 국민도 의사들이 옳은 말 한다고 인식을 할 수 있다. 그래야 의약분업이나 포괄수가제 같은 이슈가 있을 때 국민이 의사들 주장에 귀 기울여주는 것 아니겠나. 아무리 잘못된 일이 벌어져도 침묵하고 있다가 의사들의 이해관계와 관련된 것에만 목소리를 내고 단체행동을 한다면 국민에게 외면 받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시국선언을 낸 것이다.”

법전원생들이 ‘예비시험’이나 ‘변호사시험 합격자 수’에 대해 하는 주장 역시 마찬가지 아닐까. 국민들의 정당한 문제제기에 동참하지 않으면 언젠가 법전원생들의 주장도 국민들에게 외면 받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둘째는, 외부에서 부정적으로 볼 수 있다는 우려다. 물론 사회에 제대로 뿌리내리지 않은 법전원의 상황에 비춰볼 때 학생들의 이런 우려는 수긍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외부’는 국민이라기 보단 법전원의 지위와 법전원생의 진로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세력일 가능성이 높다. 법전원 제도에 있어 국민들은 간접적 당사자에 불과할 뿐이고, 실제로 큰 관심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건대, 권리는 상대방에게 잘 보여서 얻는 것이 아니라 싸워서 쟁취해 내는 것이다. 설사 잘 보여서 뭔가를 얻어낸다 한들 이는 여전히 불안정할 뿐이거니와, 힘에 굴종하여 얻어내는 방식을 일찌감치 터득하는 것 역시 뒷맛이 개운치 않다.

셋째는, 아직 혐의가 확실치 않으니 좀 더 두고 보자는 주장이다. 어디까지 윗선의 관여가 있었느냐에 관해선 아직 불확실하다고 하겠으나, 이미 검찰 수사를 통해 선거개입 행위에 관한 부분에 있어서는 상당 부분 입증되었다고 볼 수 있고, 당사자인 국정원 역시 이미 이를 인정한 바 있다. 여야 의원들 역시 이와 같은 현실인식에 근거해 국정원에 대한 국정조사에 착수했다. 무엇이든 판결이 나 봐야 확실해 지는 걸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최종적인 법적 책임을 묻는 것에는 판결이 필요하지만, 국가기관에 대해 최소한의 도의적 책임, 정치적 책임을 묻는 것에 있어 법원의 판결은 하나의 근거에 불과하다.

사회적 이슈에 관해 어떤 입장을 견지하고 어떻게 행동할지는, 전적으로 개인에게 달린 선택의 문제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듯 보여도 함부로 그 태도를 비난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 태도가, 어떤 신념에 따른 것이기 보다 개인적 이익 내지는 집단적 이익을 위한 것일 때가 있다. 내면은 감추고 그럴듯한 논리로 치장한다. 정치에 초연한 듯 보이지만 오히려 가장 정치적인 사람들. 법조인이나 법학도는 균형 잡힌 시각을 견지해야 한다는 이유로 종종 판단을 유보한다. 하지만 때로는, 신중한 듯 보이는 그 태도가 역겨워 보일 때가 있다.

박정훈씨는 노동과 소수자 인권에 관심이 있는 법학전문대학원에 재학 중인 학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