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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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는 언론계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이 멘토가 되어, 작성한 칼럼에 대한 글쓰기 지도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이상욱/ 청년 칼럼니스트 대선의 영향인지 작품의 명성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영화 「레 미제라블」이 장기 흥행을 기대하고 있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이 원작인 이 작품은, 프랑스 혁명 이후의 반동기를 그리고 있다. 작품 속에서 혁명의 열정이 청년활동가들을 감싸면서 권력의 동요는 극에 달한다. 그러나 시민의 피로감과 낙차는 정치적 동요의 파고(波高)만큼 깊다. 이 격동기를 겪는 불우한 이들의 생동하는 비극을 그렸기 때문에, 아마도 원작의 제목도 ‘레 미제라블(Les Misérables: 비참한 사람들)’일 것이다. 우리 사회의 시민들도 당대의 프랑스에 뒤지지 않는 질곡을 경험해 왔다. 지난 5년도 그렇지만, 시민들의 땀과 눈물로 써내려온 한국현대사였다. 이번 대선에서도 당선인을 지지한 절반의 국민이 아닌 수많은 시민은, 빛과 어둠이 교착하며 이루어져온 한국현대사의 익숙한 ‘레 미제라블’을 경험하게 될지도 도른다. 3%의 득표 차이를 보이긴 했지만, 국민의 절반은 당선인을 지지했고 나머지 절반은 낙선인을 지지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마어마한 수의 시민들이 대선 결과에 낙담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게다가 지난 5년 동안 국정에 대한 피로감이 두껍게 쌓여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절반의 시민들은 2013년 이후를 낙관하기 어려울 것이 분명하다. 새해 벽두의 답답한 풍경들 희망으로 생동해야 할 새해 벽두에도 많은 시민들은 자신과 사회의 운명을 마냥 기쁘게 전망하기 힘들어 보인다. 무엇보다 민생을 우선시하겠다던 두 거대정당이 새해 벽두부터 초중고 비정규직노동자들을 지원하는 예산을 전액 삭감하고, 대신 국민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제주도 해군기지 예산을 슬그머니 통과시켜 버렸다. 인터넷과 SNS를 달구는 유명 연예인 열애설의 틈바구니에서, 민생예산 삭감의 진실은 오히려 불우하다. 게다가 지난 5년 동안 정권의 눈치를 보던 공영방송에서는 이제 대놓고 ‘5.16 군사반란’의 명칭에서 ‘군사반란’이나 ‘쿠데타’를 빼버리고, ‘5.16’을 어떻게 호명할지 고민하는 눈치다. 당장 대학을 다니는 내 또래들도 걱정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작년만 해도 여야를 가리지 않고 ‘반값등록금’을 약속했었다. 그러했던 정치권이,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등록금 인하가 아닌 ‘장학금 확충’으로 말을 바꾸더니, 아예 이번 대선에서 모 정당은 ‘등록금 부담을 반으로’라는 구호를 내걸면서 ‘반값등록금’ 공약으로부터 발을 빼기도 했다. 이는 5년 전 이명박 대통령이 선거 과정에서 ‘반값등록금’을 약속했다가, 나중에는 ‘심리적 부담을 반으로 하겠다’고 입장을 바꾼 일을 떠올리게 한다. 결국 대학생들은 내년에도 등록금액이 반으로 줄어든 등록금 고지서를 받아보진 못할 성싶다. 이것저것 조건이 붙은 장학금만 확충이 되고, 대학교육의 공공성이 강화되고 모두가 마음 편히 공부할 수 있는 대학생활을 만들어가는 일은 꽤나 멀어 보인다. 더욱이 장학금 지급은 생색만 내고 제 배 불리기에는 열심인 사립학교에서 장학금을 어떻게 운용할지를 생각하면, ‘반값등록금’을 희망했던 우리의 기대가 얼마나 순진했던 것인지 때 아닌 자성(自省)까지 하게 된다. ‘패인의 분석’이 아니라, ‘패인 분석의 잘못된 태도’ 우리를 더 힘 빠지게 하는 것은 선거에서 그토록 지지를 호소했던 분들이다. 선거 결과가 나오자마자, 그 분들은 자신들에게 표를 던진 유권자들 앞에서 ‘패배의 책임 소재’를 가리는 난타전을 시작했다. 후보가 문제다, 어느 계파가 문제다, 우리가 아니라 진보정당이 문제다 라는 등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어느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사람이 먼저다’라는 야당의 슬로건을 바꾼 ‘사람이 문제다’라는 풍자가 퍽이나 통찰력이 있었던 듯도 싶다. 패장들이 사분오열하는 와중에, 오히려 상처가 깊어지는 이들은 뚜렷한 야당 지지를 보여주었던 지역과 세대의 구성원들이다. 선거 전략의 당사자들이 자신의 주체적 반성을 회피하고자 ‘지역주의의 벽’과 ‘2030 대(對) 5060 대결의 패배’를 운운하는 가운데, 정작 야당을 지지했던 호남 지역과 젊은 세대의 마음은 착잡할 따름이다. 대한민국에서 고립된 지역과 세대로서의 소외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호남 유권자들과 청년들의 폭넓은 지지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성취하지 못한 스스로의 책임을 도외시한 채, 마치 방관자인 양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논평하는 태도는 그래서 배신감마저 들게 한다. 지금 그들이 고민해야 할 일은 자신들의 호소에 응답했던 이들의 소망을 어떻게 부활시킬 것인가의 문제이지, 패배의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고 평론가처럼 지지자들을 평가하는 일이 아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최근 우리가 지켜보고 있는 풍경은 과학적인 패인의 분석이 아니라, 패인 분석에 임하는 태도의 오류라고 할 수밖에 없다. 영화 '레 미제라블' 사진 출처 - 씨네21 아름다운 패배와 승리의 확신 영화 「레 미제라블」의 배경이 되는 1800년대 초중반은 프랑스 혁명 이후의 반혁명과 그에 저항하는 청년운동이 격돌하는 시기였다. 그리고 「레 미제라블」은 젊은 혁명가들의 항쟁이 좌초하는 모습을 그리면서, 주인공 장발장이 위협적인 시대 속에서 어떤 삶을 만들어 가는지를 묘사한다. 영화의 마지막은 또 한번의 장엄한 패배 뒤에 빛나는 승리를 기약하는 웅장한 합창으로 그려진다. ‘민중의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는가’라는 노랫말을 반복하면서, 프랑스인들은 뼈아픈 좌절에도 불구하고, 선대의 희생이 언젠가는 거대한 항쟁의 역사를 창조할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 좌절감에 빠진 많은 시민들에게 지금 이 순간 필요한 것도 아름다운 패배일 것이다. 민들레 홀씨가 멀리 날아가서 비로소 한 송이의 꽃을 힘겹게 피워내듯이, 지금은 추락한 희망일지라도 그것이 다음의 발자국을 내딛게 하는 원동력으로 남을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건강한 정치권력의 창출은 곧 민들레 홀씨처럼 사회 곳곳에서 다시 일어설 때 어느 먼 훗날 또는 가까운 미래에 이루어질 하나의 ‘결과’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절실하다. 그렇다 할지라도 패배란 뼈아픈 것임에 틀림없다. 어떠한 아름다운 패배도 승리의 기억에는 비할 바 못 된다. 한 번의 승리는 백번의 패배보다 더 큰 변화를 만들 수 있는 자신감을 선사한다. 그러나 ‘광주 이후’를 살아내었던 이들의 그 숱한 패배의 기억들이 마침내 6월의 환희를 만들어낸 거름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승리를 믿는 사람만이 당장의 승패에 초연하게 패배에 익숙해질 수 있지 않을까. 오늘의 패배를 내일의 승리를 위한 ‘아름다운 패배’로 갈무리하고, 다시 자신이 발 디딘 땅에서 한 톨의 씨앗을 뿌리는 작은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지 않을까. 오늘의 패배와 별개로, 우리 사회의 사각지대는 생생히 살아 있다. 그리고 승리의 내일을 소망하는 확신의 크기는 그 사각지대의 어둠을 넘어서야 한다. ‘진정 곧은 풀은 바람이 세차게 불 때에야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는 상투적인 가르침도 지금은 유효하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17 | 추천: 0
박용석/ 인권연대 간사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 두 분과 며칠 간격으로 만났다. 자리에 앉기 무섭게 이십대 후반에 인권단체서 일하는 나에게 오십줄 교장선생님은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요점은 ‘하라는 대로 하는데 위에서부터 싸우니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다’는 거였다. ‘학교폭력 생활기록부 기재 방침’의 시행여부를 두고 교육과학기술부가 전라북도와 경기도의 ‘진보’ 교육감을 고소한 바로 그 즈음이었다. 그 두 번의 대화는 똑같이 교장선생님들의 푸념으로 마무리됐다. “차라리 몇 대 쥐어박고 회초리 칠 때가 나았는데……” 한숨 섞인 그 한마디는 내게 회초리처럼 아프게 다가왔다. 나이 든 교육기관 수장들의 웃음엔 주름이 깊었다. 나이 어린 내게 보이기 위한, 애써 쥐어짜낸 웃음이었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의례적’인 인권 교육을 하러 간 자리였다. 언젠가 그들이 가르쳤을 제자보다도 어린 나지만, 그 깊은 주름을 향해 무슨 말이라도 대꾸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수많은 말들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왔다가도 꾸역꾸역 되넘어갔다. 그러다 나온 당치않은 한마디는 물음도 탄식도 아니었다. “인권이란 게 참 쉽지 않네요.” 고작 그 말이 위로가 되었는지 그 분들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 말은 자위에 가까웠다. 이 숨 막히게 답답한 순간에 처한 나를 위로하는. 그 말에 답하느라 끄덕거리고 있는 고개는, 어쩌면 이 불편한 상황을 에두르기 위한 약속된 신호였다. 우리는 서로가 보내는 신호를 알아차렸고 대화는 그렇게 끝났다. 불과 한 달이나 지났을까. 나는 현란한 텔레비전 화면에 빠져 엄마를 고생시키는 돌잡이 딸 엉덩이를 팡팡 두들겨 주고 있었다. 아이는 이내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아내의 칭찬을 기다렸다. 밥을 먹지 않고 도망 다니는 아이의 못된 버릇을 고쳐준 당당한 아빠로서. 그건 상식이었다. 그런데 웬걸, 아내는 앙칼진 목소리로 대들었다. “애가 뭘 안다고 그래, 꼭 그렇게 애를 울려야 돼?”라고. 인권단체서 회원들이 내준 회비의 일부로 생활하는 내가 아이 엉덩이를 때린다는 건, 그건 좀 아니었다. 어려운 인권에 비해 상식이란 녀석은 늘 쉬웠다. “차라리 몇 대 쥐어박고 회초리 칠 때가 나았는데……”라 말하는 상식, 아이 엉덩이는 몇 대쯤 팡팡 두들겨 줘도 된다고 생각하는 상식, 1번 아니면 2번을 찍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상식들 말이다. 사진 출처 - 뉴시스   교장 선생님만 탓할 일이 아니었다. 최악과 차악을 두고 선택해야 하는, 18대 대통령 선거보다 더 어려운, 그리고 나쁜 객관식 문항이 그들 앞에 있었다. 그런 그들의 하소연이 아팠던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내 이야기와 다르지 않았다. 최악과 차악이 있을 때, 최악을 피한다며 차악을 선택하는데 우리는 익숙해져 있었다. 때론 말도 되지 않는 허깨비 최악을 상정하고, 진짜 최악일지도 모를 선택지를 합리화 하는 것은 또 얼마나 편한지. 그런 이들을 한심하다며, 때론 문제라며 비판하거나 비웃곤 하던 나였다. 그러면서 1번과 2번은 최악과 차악일 뿐이니, 최선인 3번을 찍어야 한다고 외치곤 했다. 하지만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어려운 인권은 쉬운 상식에게 자리를 내어주곤 했다. 상식은 힘도 셌다. 지금 당장 최선을 선택할 수 없을 때 차악을 선택하는 것은 늘 쉬웠다. 다행히 아내의 앙칼진 물음은 내게 작은 희망을 가르쳐 주었다. 또 그 작은 희망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 작은 희망의 기준으로 세상을 본다면 인권도 그리 어렵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더 이상 힘 있는 상식에 내쫓기지만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사실 오래전부터 그 답을 알고 있었다. 아이 엉덩이쯤 팡팡 두들겨도 된다는 내 상식에 앙칼지게 대들었던 아내, 우리 둘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내는 우리의 아이를 나보다 조금 더 많이 사랑했다. 사랑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는 낭만이나 떠들자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바꿀 힘은 결연한 의지와 확고한 신념과 해박한 이론 같은, 우리가 최선이라 부르던 어려운 것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그 답은 사실 그리 어렵지 않은데, 그간 나는 아주 어려운 또 다른 선택만 강요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알게 된 작은 희망은 그 고민의 답이 언제나 주관식이었단 것이다. ‘사랑’은 새로운 주관식 답안의 여러 소재 중 하나일 뿐이다. 그 깊은 주름에게 이제야 대답할 수 있다. 답은 아주 많습니다. 그만큼 우리에겐 희망도 많습니다. 나는 당신이 쓸 새로운 희망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77 | 추천: 0
권지은/ 청년 칼럼니스트 우리끼리만 하는 이야기가 있다. 여기서 ‘우리’라는 건 20대를 뜻하고, 직접적으로는 내 주위 친구들과 지인들을 말한다. 왜 굳이 ‘내 친구들’이라고 집어 표현해야 하냐면, 이 이야기는 사석에서만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는 비밀이다. 얼마 전 관객들의 성원과 눈물로 막을 내린 <인당수 사랑가>라는 뮤지컬을 보았다. 심봉사의 딸이 심청이가 아닌 심춘향이라는 설정을 배경으로 한 현대식 퓨전 사극이다. 극에서 춘향이는 자신에게 그 무엇보다 소중한 몽룡이와의 사랑을 지킬 수 없는 상황으로 몰려갔다. 그러다 결국 인당수에 몸을 던졌다. 자살이다. 딸을 잃은 심봉사는 오열했다. 하지만 춘향이가 인당수를 선택했던 데에는 춘향이의 연인인 몽룡이 아니라, 변사또에게 시집가도록 요구한 심봉사 자신의 역할이 컸다. 춘향이는 아버지 심봉사를 정말 사랑했고, 심봉사 또한 딸 춘향을 누구보다 사랑했다. 나는 이 비극적 결말이 비현실적인 극적 설정이라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생활 속에서 수많은 심봉사와 춘향이들을 본다. 듣는다. 부모님 이야기다. 타자를 치는 손가락이 무겁다. 한국에서 ‘효’는 최고의 도덕이다. 전통적 의미의 가족관계가 붕괴되었고, 효의 가치가 사라지고 있다는 숱한 통탄 속에서도, 그것에 대해 ‘다른 말’을 덧붙인다는 것만큼은 여전히 금기다. 슬프게도 서로 너무 다른 삶을 살았다. 20대와 20대의 부모는 말이다. 우리의 부모님들은 유교적 관습과 독재정권 아래에서 자라 권위주의 문화에 익숙하다. 먹을 것이 귀했기 때문에 원초적 가난의 처참함을 기억하고 있다. 가족에게 희생하는 삶도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경제성장의 호황기를 보내면서 더 풍요로운 미래를 꿈꾸거나 성취할 수 있었다. 지금의 20대는 이상하리만치 그 반대의 삶이었다. 민주화, 경제성장, 세계화의 분위기에서 어린 시절을 부모세대보다 풍요롭고 민주적으로 보냈다. 문화와 교육의 혜택도 양적으로 많았다. 하지만 극심한 경쟁사회가 종용하는 입시스트레스와 취업스트레스를 겪으며 청춘이라는 소중한 시간이 메말라 버렸다. 지금 20대들은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사는가?”라는 질문을 가슴에 늘 품고서 산다. 취업에 성공했다 해도 마찬가지다. 계속되는 무의미한 경쟁 속에서 이제 스스로를 찾고 싶어 한다. 드디어, 조금씩, 용기를 내기도 해본다. 그런데 부모님은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기가 힘들다. 그들에겐 너무 오래 묵혀둔 감정이다. 그래서 종종 부딪히고, 멀어진다. S는 기약 없는 공무원시험공부를 그만두고서 자신이 진심으로 하고 싶은 직업 바리스타가 되기까지, 누구보다 부모님에게 ‘고백’하는 용기와 그것을 ‘용인’ 받는 고단한 시간이 필요했다. Y는 취업경쟁을 그만두고 자신의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거듭됐지만, 부모님의 강력한 반대와 강요로 자살까지 떠올렸다. 정신적 혼란이 컸다. 직업이나 회사를 옮기려 하거나,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싶어 하는 이들의 마음을 접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는, 늘 부모님이다. 그래서 20대의 가장 큰 딜레마가 됐다. “나의 것을 찾고 싶다”, “부모님의 노고에 보답해야 한다”. 안정적인 공무원이 되길 바라는, 남들이 인정하는 회사에 취직하길 바라는, 좋은 사람 만나 일찍 결혼하길 바라는 마음. 다 자식들이 행복하길 바라는 부모의 자연스러운 마음이다. 그런데 심봉사도 그랬다. 춘향이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고, 누구보다 춘향이의 행복을 원했다. 뮤지컬 '인당수 사랑가'의 한 장면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하지만 심봉사는 춘향이에 대해서 잘 알.지.못.했.다. 춘향이가 무엇을 해야 행복한 사람인지, 몰랐다. 권력을 가진 변사또에게 시집가는 것은, 춘향이로선 몽룡이를 배반하는 선택일 뿐 아니라, 삶을 저버리는 것이었다. 남들에겐 가치 없어 보일지라도, 몽룡이를 기다리는 일은 춘향이에게 사랑이자, 꿈이자, 자기 자신의 모습을 지키는 유일한 삶의 방법이었다는 걸. 아버지 심봉사는 몰랐다. 사람은 자신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살 때에 행복을 느낀다. 사람들은 모두 다르게 생겼다. 하지만 사회는 네모난 틀에 우리를 찍어냈다. 그래서 ‘내가 어떤 모양인지’ 알아내기가 무척 어려워졌다. 그래서 또 타인에게도 그 사람만이 가진 모양이 있다는 걸 알아주기가 힘들다. 우리에게 ‘사랑’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의 모양을 잘 알아주는 것이 아닐까? 그 모양을 잘 찾고, 부서지지 않게 가꿔서, 행복하길, 기도해주는 것 말이다. 하지만 우리의 공동체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도 그 사랑을 나누는 걸 방해하는 것 같다. 몇 가지의 직업과 회사에만 편안한 환경, 사회적 평판, 좋은 돈을 책정해 놓았다. 사람들의 모양은 수만 개인데, 10가지 모양에만 돈을 모아 주었다. 그래서 부모는 자꾸만 자식을 ‘사랑’하기보다 ‘걱정’하게 된다. 10가지 중 하나가 반드시 되어라, 되었으면, 한다. 심봉사는 춘향이를 아내로 삼길 원하는 변사또의 막강한 권력이 춘향이를 괴롭힐 수도 있다고 걱정했다. 그래서 가진 것 없이 고생스레 살아온 딸이 변사또와 결혼해 편안하게 살게 되기만을 바랬다. 하지만 신분제사회의 억압이라는 ‘제도적 불행’은 심봉사의 걱정이 덧붙여져 춘향이의 자살이라는 더 큰 불행을 만들었다. 불행이 더 큰 불행을 낳는 구조. 자살공화국. 우리는 우리의 모양대로 살지 못해서 불행하다. 언제까지 불행은 되물림되어야 할까. 우리의 딸들에게도 “너의 모양을 버려야만 잘 살 수 있는 거야”라고 하는 말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져야 하고, 그 딸은 그 아들에게 똑같은 말을 전해야 하는 걸까? 다양한 모양을 가져도 크게 다치지 않을 수 있는 삶. 그런 삶이 가능한 사회를 위한 새로운 노력이 정치 속에서도, 관계 속에서도, 시작되어야 한다. 대선 결과와는 상관없이, 우리는 ‘서로의 모양’을 응원하기 시작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의 싸움이고, 사랑이다. 그리고 자살공화국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624 | 추천: 0
김종현/ 청년 칼럼니스트 휴대폰 진동이 울린다. 오늘만 세 번째다. 졸업학기에 접어드니 학교에서 보내주는 문자 메시지가 부쩍 많아졌다. 각종 공지 메시지들이다. 취업특강, 잡 코칭, 국내·외 인턴십, 취업 박람회, 취업 설명회…. 이뿐만이 아니다. 지도교수의 졸업논문 상담, 졸업사정과 진로상담 안내 메시지는 조용한 내 휴대폰을 쉴 새 없이 깨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졸업준비생이자 취업준비생으로서의 정체성을 새삼 깨닫곤 한다. 그래, 나도 졸업을 하긴 하나보다. 취업학원으로 전락한 대학에 비판적이지만, 솔직히 나도 학교가 주관하는 취업특강에 종종 참여한다. 졸업 뒤에 먹고 사는 문제는 나에게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특강이 끝난 뒤 내 수첩은 메모로 빼곡하게 채워진다. 이력서 쓰는 법, 매력적인 자기소개서 작성법, 면접의 기술, 요약하자면 ‘잘 뽑히는 기술’이다. 아니, 차라리 철저히 ‘자신을 버리는 기술’이라고 하는 게 낫겠다. 가득 정리된 요령들은 취업 준비생으로서 내가 따라야 할 의무이다. 그 속에 나의 권리는 없다. 노동자의 권리 투쟁을 역사 속의 이야기라고만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 때, 대학교 때 거듭 <전태일 평전>을 읽으면서도, 40년 전 노동자에 대한 부당한 처우에 분노했을 뿐 오늘날의 이야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은 그래도 다들 인간답게 사는 것 아닌가? 그런데 지난해 여름, 지상 35미터 높이 크레인에서 고공 농성을 벌이는 한진중공업 김진숙 지도위원에게서 전태일을 만났다. 40년 전의 이야기를 오늘날의 현실로 마주하면서 난 당혹스러웠다. ‘분신을 투쟁의 수단으로 삼는 시대는 지났다’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은 완전한 거짓이었다. 노동자는 여전히 온몸으로 저항하고 있었다. 김진숙 위원을 직접 만나고 싶었지만 돌아온 것은 경찰의 최루액과 진압봉. 쓰라린 아픔 속에서 흘렸던 눈물엔 동정과 분노, 아픔이 섞여있었다. ‘노동권을 보장하라’는 전태일의 외침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전태일은 더 이상 역사 속 인물이 아닌 현실 속 우리의 모습이었다. 유성기업 노동자,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대법원 확정 판결조차 소용이 없었던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외로운 싸움은 그 옛날 전태일의 분신과 다름이 없었다. 이런 현실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열리는 취업 프로그램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취업이란 나에겐 곧 노동의 시작이다. 하지만 수많은 취업 특강 가운데 노동자의 권리에 관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노동 기본권은 무엇인지, 노사 교섭은 어떻게 하는지, 부당 노동행위를 당했을 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단지 기업의 요구와, 그 요구에 어떻게 부응해야 하는지만 강조할 뿐. 우리 사회 곳곳에서 아직도 전태일의 비명이 터져 나오는 이유는 바로 노동권에 대한 교육 없이 취업 자체가 목적이 돼버린 이 같은 현실 때문일 것이다. 그토록 대학생 친구를 원했던 전태일이 만약 취업 특강에 참여한 나를 봤다면 무슨 말을 했을까? 내 앞에서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야!”라고 고함을 치지 않았을까? 기호 5번 김소연 후보(왼쪽)는 금속노조 기륭전자 분회장을 지냈고, 기호 7번 김순자 후보(오른쪽)는 후보 등록 며칠 전까지만 해도 울산과학대에서 청소노동자로 일했다. 사진 출처 - 한겨레   얼마 전, 유력 대선 주자에서 사퇴한 안철수 후보의 거취에 여전히 모두의 관심이 쏠려있는 동안 두 명의 노동자가 18대 대선 후보등록을 마쳤다. 기륭전자 비정규직 투쟁을 이끌었던 김소연 전 노조위원장과 진짜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는 청소노동자 김순자 씨이다. 노동권조차 아직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 우리 사회에서 혹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람은 집권 여당과 야당의 대선 후보보다는 이 두 명의 노동자가 아닐까? 그러나 우리의 외면 속에서 두 노동자 후보는 험난한 선거전을 치루고 있다.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은 쉽지 않아 보인다. 이러한 현실에서 취업 준비생의 권리를 말하긴 더더욱 어렵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나는 외쳐본다. “취업 준비생에게도 권리는 있다, 취업 준비생의 권리를 보장하라!”
2017-06-28 | hrights | 조회: 315 | 추천: 0
최수범/ 청년 칼럼니스트 7개월 전, 나는 블로그에 국가보안법을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 이 글은, 당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박정근 씨를 옹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인권연대 청년 칼럼니스트에 지원하기 위해서 썼던 글이다. 박정근 씨가 구속된 이유는 황당하다. 트위터에 북한과 '관련'된 글을 썼다는 것이 그의 구속 사유의 전부다. 검찰은 의도적으로 풍자적인 글을 무시했다. 정황을 잘 모른다면 이적성 글로 오인할 수 있는 글만 증거자료로 제출했다. 이 사건을 보고 나는 ‘우리나라가 과연 자유민주주주의 국가인가’ 하는 회의가 들었다. 박정근 씨는 구치소에서 고초를 겪는 가운데서도, 발랄함을 잃지 않았다. 그는 구치소에서 ‘이명박 대통령 각하께 보내는 공개서한’을 썼다. 그는 편지에서 이렇게 밝혔다. “체제 찬양으로 보이는 글들은 대부분 농담이었으나 저는 이 편지에서 농담을 일일이 설명하진 않을 것입니다. 농담을 변명하는 건 농담에 대한 예의가 아닐뿐더러 그렇게 하면 농담이 더 이상 농담이 아니게 되니까요.” 박정근과 북한의 선전물을 합성한 그림. 출처 - 박정근 홈페이지   나는 그를 옹호하기 위해서 농담이 듬뿍 들어간 지지의 글을 썼다. ‘주사파’를 일주일에 4번 학교를 가는 대학생인 ‘주4파’와 비교했다. 수강신청에 승리해서 학우들을 질투와 시기에 빠트리는 ‘주4파’가 검찰이 규정하는 ‘주사파’보다 훨씬 국민 통합에 방해가 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이번학기에 ‘주5파’인 나는 ‘주4파’ 친구들을 볼 때마다 가끔 분노에 빠지곤 한다. 글 마지막 부분에는 ‘김정은 만세’를 길게 외쳤다. 나는 예전에 배우 김정은 씨가 진행하는 <김정은의 초콜렛>을 방청한 적이 있다. 당시 관심이 있던 친구와 함께 공연을 즐겼다. 그 덕인지, 나는 그 친구와 연애를 하게 됐다. 이 정도면 만세를 부를 만하지 않는가. 혹시 오해의 소지가 있을지 모르니 ‘나를 국가 보안법으로 잡아 가려고 한다면, 배우 김정은을 찬양한 거라고 우길 것이다’라고 명백히 적었다. 나는 친절한 남자다. 블로그에 글을 올리고 나서 2달이 지난 후, 나는 한통의 이메일을 받았다. 발신자는 자신이 정보과 형사라고 밝혔다. 그는 내가 올린 글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가 있으니 수사에 협조해달라고 요구했다. 나는 황당했다. 도대체 내 글이 어떻게 국가보안법 위반이 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조금 겁이 났다. 나의 농담이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된다니! 나는 어제도 농담을 했는데! 내가 그렇게 위험한 사람이란 말인가. 내 블로그는 일일 방문자수가 100명 남짓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이메일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했다. 전화를 받은 경찰은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수사에 협조해주어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는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나의 글을 접했다고 말했다. 경찰은 조목조목 내 글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검찰을 비판할 수는 있으나, 맥락을 잘 모르는 사람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어떻게 ‘주4파’가 ‘주사파’보다 더 사회에 해로울 수 있나. 김정은 동지 만세를 외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허용되지 않는다. 배우 김정은을 찬양한다고 우긴다는 것은 억지가 아닌가.” 나는 일일이 나의 글을 해명했다. 웃음이 나오긴 했지만, 농담을 진지하게 설명하는 일은 창작자 입장에서 슬픈 일이다. 경찰은 나의 해명을 듣고 ‘경위서’를 작성해달라고 요구했다. 경위서를 쓰는 것은 불쾌했다. 하지만 나도 이 일에 더 이상 시달리기 싫었다. 결국, 타협을 했다. 나는 경위서에 “국가보안이 폐지되어야 하며, 일개 대학생의 글을 문제 삼는 상황은 비정상이다. 이는 한국 사회의 미성숙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라고 썼다. 경위서를 받은 경찰은 내 글을 블로그에서 지우길 권했다. 나는 거부했다. 지난 10월 11일 진보신당 당원 김정도 씨는 자신의 집을 압수수색 당했다. 국가보안법 위반 때문이다. 김씨는 북한 가요인 ‘장군님 축지법 쓰신다’의 가사를 리트윗 했다는 이유로, 예의 ‘찬양고무’와 ‘이적표현물 배포’라는 혐의를 뒤집어썼다. ‘장군님 축지법 쓰신다’는 한국, 일본의 사이트에서 유머 코드로 쓰이는 노래다. 북한 바깥에서 보면, 장군님 찬양은 우습게만 보일 뿐이다. 이 노래를 듣더라도, 그 누구도 김정일이 미사일을 맨손으로 때려 부순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축지법은 허경영 씨도 쓴다고 주장하지 않는가. 북한에 대한 풍자는 유머감각 없는 검찰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독해력 부족과 풍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센스부족은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이를 형사처분으로 해결하려는 것은 촌스럽다. 우리나라가 북한에 비해 확실히 우월한 점 중 하나는 민주주의의 원리에 따라 ‘자유’를 보장한다는 것이다. 북한을 탈출하면 3대를 멸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북한 김정은 체제와 우리는 다르다. 민주주의 국가라면 표현의 자유가 열려 있고, 관용과 이에 따른 비판도 열려있어야 한다. 만일 박정근 씨의 풍자가 재미없다면, 그의 트위터를 팔로잉하지 않으면 될 일이다. 검찰같이 똑똑한 사람들이 이렇게 이해력이 떨어지다니. 이것이야말로 국가안보에 더 큰 위협으로 느껴진다. 국가보안법이 사라진다면, 우리나라 국민들이 북한의 선동에 놀아 날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렇다면, 차라리 자유민주주의를 포기하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 것이다. 우리의 자유민주주의는 그렇게 허약하지 않다. 무엇이 그렇게 두려운가. 주사파를 감옥에 가두는 대신에, “저렇게 못난 북한 체제를 열심히 응원하고, 그 결과를 보여주려면 3세기는 혀 빠지게 노력 하셔야겠어요.”라는 냉소가 필요하다. 이것이 진정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사랑하는 사람의 자세다. 체제의 강력함은 경직된 촌스러움이 아닌 자연스러운 자신감에서 나온다. 유엔 인권이사회는 지난 10월 25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한국 인권 실태를 집중 검토한 ‘보편적 정례 인권검토(UPR)’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국가보안법은 폐지권고 대상에 올랐다. 독일 대표는 국가보안법을 우려하면서 보안법 규정에 모호성이 없도록 해달라고 권고했다. 북한 대표는 프랭크 라뤼 유엔 표현의 자유 특별보고관이 2011년 국가보안법에 심각한 우려를 표했음을 상기시켰다. 보안법이 인권 침해의 근원이라고 지적했다. 오바마 캠프 한국 팀장 출신인 프랭크 자누지 국제앰네스티(AI) 워싱턴 사무소장은 곧 국제앰네스티가 한국의 국가보안법 관련 보고서를 발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그는 “한국의 일부 국민이 국가보안법으로 인해 표현의 자유를 부당하게 침해당하고 있다”면서 “이번 보고서에서 국보법이 국제 인권규범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고 밝혔다. “한국의 차기 대통령이 누가 되든 이 보고서를 건설적인 비판으로 봐주길 바란다.”고 말하며, 국가보안법 개정을 촉구하기도 했다. 세계의 눈이 국가보안법을 향해있다. 최근, 영화 <남영동 1985>이 개봉했다. 영화에는, 영문도 모른채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는 주인공 김종태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김종태는 무자비한 고문으로 거짓 자백을 하게 된다. 영화의 말미, 20여 년 후의 김종태는 국무회의 석상에서 국가보안법 철폐 안건에 대해 의견을 내놓는다. 김종태는 고 김근태 의원을 각색한 인물이다. 김근태 의원은 자신의 책 ‘남영동’에서 고문 받았던 대공분실을 ‘인간도살장’으로 비유했다. 김근태 의원을 인간 도살장으로 끌고 간 것은 바로 ‘국가 보안법’이다. 지난 21일 재판부는 박정근 씨에게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그가 작성한 이적표현물 133건 중에는 "김정일 가슴 만지고 싶다", "김정일을 퇴치하자, 병균퇴치, 암퇴치." 같은 트윗이 포함돼있다. 과연, 이 트윗이 국가안보를 해친다고 생각하는지 재판부에게 묻고 싶다. “김일성 만세” 1960년에 시인 김수영은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한국 언론자유의 ‘출발’이라고 말했다. 52년이 흐른 지금도, “김정은 만세”를 외칠 수 없다. 한국 언론자유의 출발은 시작도 하지 못했다. 오히려 한국사회의 관용과 표현의 자유는 더 허약해졌다. 굳이 표현의 자유와 인권을 들먹이지 않아도, 국가보안법을 ‘상식선’에서 단호히 폐지하는 사회가 됐으면 한다. 국가보안법은 자유로운 정신과 다양성을 위축시킨다. 우리 삶을 더욱 지치게 한다. 12월 19일 유머와 표현의 자유를 허하는 후보를 선택하자. 마지막으로 이 말을 외치며 이 글을 끝마치려고 한다. “김정은 동지 만세! 만세! 만만세!” 이번에도 뭐라고 하면, 배우 김정은 팬클럽 가입한 캡처 사진만 보내줄 테다! 잔소리 많은 우리 어머니도 <울랄라 부부>를 시청할 때는 집중해서 잔소리를 안 한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401 | 추천: 0
정지혜/ 청년 칼럼니스트 연말이 다가와서 그런 지, 학기 말이라 그런 건지 익숙한 얼굴들이 캠퍼스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다. 몇 명의 남자 선배들은 군대에 있고, 학교에 있던 많은 선배들은 졸업 후 성공적인 사회 진출을 준비하기 위해 자취를 감췄다. 소위 취준생(취업준비생)이라는 이들은 가끔 페이스북에 나타나다 흔적을 남기고는 다시 사라진다. 몇 주 전에 과제 준비 때문에 알게 된 선배가 한 명 있다. 우리 학교에서 복수전공 인기 상위 순위에 속하는 경영·경제학과를 전공한 이었다. 친목 겸 같이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 하다가 그 선배가 내년 2월에 졸업을 한다고 해서 미리 축하드린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는 “졸업 안 할 수도 있어! 내년에도 계속 학교에서 만날 수 있을 거야. 나이 많아 보이는 사람이 학교에서 혼자 지나다니는 게 보이면 그 오빠인가 보다 생각해줘~!”라며 그 때에도 반갑게 인사하자고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특유의 능청스런 말투와 분위기를 무겁게 하지 않으려는 그의 노력을 눈치 챈 나는 깔깔 웃음으로 화답했다. 하지만 웃음 뒤에는 씁쓸함이 진하게 남았다. 그 뒤에도 계속 자신의 처지를 희화화하는 그의 모습이 조금 안타까워 보였다. 처음에는 다들 이 개그에 웃어야하나 말아야하나 망설였지만 점점 사람들은 그 개그 아닌 개그를 재밌게 웃어넘겼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선배의 개그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상황을 굳이 개그로 표현했어야 했던 것일까. 그리고 우리는 왜 이 씁쓸한 개그에 웃었던 것일까. 취업을 못해서 졸업을 미루는 풍경은 이제 낯설지 않다. 실업자 신세로 대학 밖을 나서면 너무나 춥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기 때문에 이미 졸업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청춘들이 서류상으로는 ‘아직’ 엄연한 대학생 신분으로 하루를 보내고 있다. 한산한 채용박람회 모습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취준생의 꿈은 졸업과 동시에 취업하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대학생들은 남들보다 먼저, 그리고 더 좋은 직장을 갖기 위해 취업준비에 매진한다. 자격증은 방학마다 하나씩 추가해야 할 필수품이 되었고, 노량진 고시촌은 고시생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인다. 승자와 패자가 크게 갈리는 이 경쟁 사회에 뛰어들기 위해 더 지독한 경쟁을 하고 있는 셈이다. 어처구니없는 경쟁의 모습은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유행했던 ‘나만 아니면 돼!’, 혹은 ‘무한 이기주의’라는 대사를 떠올리게 한다. ‘나만 아니면 돼!’를 큰소리로 외치는 연예인들을 보면서 경쟁으로 피폐해진 사회와 사람들에 대해서 걱정하는 이들은 드물다. 오히려 깔깔거리며 박장대소를 한다. ‘나만 아니면 돼!’가 개그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경쟁의 목표가 작고 사소한 게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스타급 연예인들이 밥 한 끼를 가지고 물불가리지 않고 경쟁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배꼽을 잡는다. 밥 한 끼 정도는 유명 연예인들에게, 휴일에 텔레비전을 시청할 능력이 되는 사람들에게 그리 값비싼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만약 밥 한 끼도 제대로 먹을 형편이 안 되는 사람이 그 프로그램을 보았다면 ‘나만 아니면 돼!’라는 대사가 온전히 개그로만 들렸을까. 직장인들에게 직장은 가끔씩 도피하고 싶은 노역의 장소이겠지만, 취준생에게 직장은 절박한 꿈의 장소이다. 직장인들은 밥 한 끼처럼 가벼운 야근에 낙점된 동료에게 ‘나만 안하면 돼!’ 하며 키득거리겠지만, 그게 가벼운지 무거운지 한 번이라도 경험해보고 싶은 취준생은 웃을 수가 없다. ‘내년에도 학교에서 반갑게 인사하자.’는 그 선배의 개그는 사실 개그가 될 수 없었다. 너나없이 취업에 목숨을 걸고 싸우는 마당에 취업을 개그 소재로 활용하는 것은 애당초 웃기기를 포기한 것이다. 그런데도 굳이 그가 취업 전쟁을 개그로 표현하고, 우리가 그 개그일 수 없는 개그에 깔깔대며 웃었던 것은 아주 잠깐이라도 ‘휴전’의 평화를 맛보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이 일은 나의 일이 아니라며 현실을 잠시 외면하기 위해서, 우리는 아무리 웃어도 결코 개그가 될 수 없는 개그를 선보인다.
2017-06-27 | hrights | 조회: 261 | 추천: 0
이상욱/ 청년 칼럼니스트 18년이라는 시간은 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성인으로 성장해가는 긴 시간이다. 그 동안 누군가는 걸음마를 배우고, 말을 배우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하나의 인격으로 자라난다. 어느 시인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18년 정도의 시간이라면 그야말로 ‘한 세상이 오고 있는’ 무게를 갖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도 묵직한 시간을 길에서 싸워온 노부부가 있다. 성북구 안암동에서 대학생들이 생활하는 하숙집을 운영하면서 생계를 이어오던 어느 부부는, 어느 날 삶의 터전을 빼앗기는 일을 겪었다. 지역의 유지이자 건축사업가인 구의원 한 명이, 부부의 집이 있는 땅이 자신의 소유로 되어 있다면서 불법건축물을 철거해달라고 행정기관에 요청한 것이다. 노부부의 생계는 막막해졌다. 노부부는 하루아침에 집도 빼앗기고, 차가운 행정논리 앞에 원통함을 삼켜야만 하는 삶을 강요받게 됐다. 그리고 기나긴 18년간의 투쟁이 시작되었다. 18년 동안 노부부는 힘겨운 날들을 버텨 왔다. 구청과 시청 앞에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외로운 투쟁을 벌여 왔다. 그 과정에서 뜻있는 학생들 몇이 지속적으로 연대해오고 있다. 하지만 성북구청의 말 바꾸기와 모르쇠, 서울시청의 무관심 속에서 노부부의 아픔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란 난망해 보일 따름이다. 얼마 전, 할머니는 1년 전에 당선된 서울시장에게 문제의 해결을 청원하기 위하여 시청을 찾아갔다. 하지만 서울시장을 만나기란 쉽지 않았고, 노쇠한 할머니는 이윽고 혜화동에 있는 서울시장 관사 앞에서 하염없이 그를 기다렸다. 벌써 며칠 째, 해가 지면 퇴근하는 그를 만날 수 있을까 하여 늦은 밤까지 문 앞에서 기다리곤 했다. 학생들도 최대한 시간을 내어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며 관사 앞을 지켰다. 그러나 며칠 전 어느 날, 시장은 수위 아저씨를 통해 ‘만날 용의가 없다’는 말을 전해왔다. 관사 대문 구석에 쪼그려 앉으면 언뜻 발견하기도 쉽지 않은, 작은 체구의 할머니가 차가운 밤공기를 견디면서 기다린 결과는 겨우 그것이었다. 할머니가 전하려고 한 이야기는 구청과 시청의 공무원들이 그간의 행정적 실책을 숨기려고 사건의 해결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읍소에 다름없었다. 그리고 수많은 이들의 기대를 안고 당선된 서울시장이 그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처리해달라는 하소연이었다. 어려운 이야기도, 정치적으로 책임을 요구하는 일도 아니었건만 그 짧은 대화를 성의 있게 진행할 ‘용의’는 왜 없었던 것일까. 그 시각에 모 대선후보에게 퀵서비스로 핸드폰 케이스를 선물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다음날엔, 작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대학생유세단으로 활동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지기까지 했다. 물론 막중한 지위에 있는 분이, 시민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사연을 모두 경청하기란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매일매일 억울함을 호소하려 집 앞을 직접 찾아오는 사람에게 5분, 10분을 내어주기란 그다지도 어려운 일이었을까. 서울시장 그 분을 원망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밤공기보다 차갑게 느껴졌던 전언(傳言)은, 다른 누군가의 느낌을 공유하는 일의 진정성을 고민케 했다. 외로운 싸움을 계속해나가는 할머니의 눈물과, 그것을 대하는 서울시장의 태도는 그 사람의 진정성을 의심케 했다. 좋은 대학을 나온 박원순 시장은 시민운동을 오래 했지만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에 비하여 훨씬 유복한 환경에서 생활한 분이다. 할머니가 하숙을 하면서 맺었던 학생들과의 인연을, 동네에서의 추억과 데모하는 학생들을 숨겨주던 그 마음을, 그 분은 알지 못할 것이다. 소박한 생활이 파괴되었을 때의 원통함과, 나랏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느끼는 허탈함을 온전히 받아들이지는 못할 것이다. 사람은 모두 자신의 그릇에서 밥과 국을 떠먹을 따름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의 슬픔을 공감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분은 노부부의 사연에 진심을 기울일 만큼 노력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대선후보들의 지혜로운 정책들은 나름의 합리성을 담보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진정성은 정치권력의 획득을 둘러싼 열정에 국한되는 협소한 성격을 쉽게 벗을 수 없다. 사진 출처 - 노컷뉴스   세간의 기대와 상찬을 모으고 있는 이 덕망 높은 분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한 사람의 20대로서 매일매일 맞부딪히는 삭막한 일상, 이 노부부와 같이 주변에서 접할 수 있는 아픈 사연들,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있는 사회의 사각지대는 우리 사회가 ‘진정성의 위기’에 놓여 있음을 웅변하고 있다. 그것은 전사회적인 공감의 빈곤이기도 하다. 옹색한 생활 속에 갇혀서 바쁘게 살아가는 생활인들의 가슴 속에 드넓은 공감의 영토를 확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나 같은 20대들만 해도 당장 눈앞에 가로놓여 있는 야멸찬 교육환경과 청년실업에 대한 공포의 무게 때문에 ‘느낌이 없는’ 대학생활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이 황량한 사회를 넘어서보려고 하는 이들의 노력 속에서도 다른 차원의 ‘진정성의 위기’가 발견되고 있다. 대선을 얼마 앞두고, 우리 사회의 황폐함을 치유하기 위한 이런저런 담론들이 쏟아져 나온다. 장삼이사들의 생활을 담보하라는 요구에 ‘경제민주화’ 논의가 나오는가 하면, 정치혐오에 물든 국민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각종 ‘정치혁신’ 대책이 출시되는 형국이다. 그러나 정작 공감있는 사회를 필요로 하는 이들은 논의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 있다. 노부부 앞에 기다리고 있던 시장 관사의 높은 대문은 그러한 역설을 상징하는 광경일 것이다. 새로운 세상을 이야기하는 대선주자들의 열정은 아래로 흐르지 않는 못과도 같아 보인다. 오히려 불우한 이들의 너덜너덜한 삶에서 더 확실한 진심을 본다. 그것은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절실하게 원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근거하고 있을 것이다. 벌써 4년째 힘겹게 싸우고 있는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은 온몸으로 진심을 번져나가게 하고 있다. 서울시청이 보이는 단식농성장의 풍경은, 정리해고 반대투쟁을 하던 2009년 여름의 기억을 다시금 호출한다. 눈앞에서 뜯겨나가던 쌍용차 공장 앞 가족대책위원회 천막을 떠올린다. 공장이 함락되던 날, 전투경찰과 용역깡패들을 저지하려던 우리의 연약한 연대대오를 생각한다. 폭력투쟁을 통해서라도 저 억울한 사람들을 구해내려던 기이한 절박함과, 내 손에 들려 있던 끝내 쓰지 못한 짱돌을 기억한다. 그러한 기억들은 비로소 우리 모두가 나눌 수 있는 공감의 지반을 조금씩 넓혀나간다. 대선후보들의 지혜로운 정책들은 나름의 합리성을 담보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진정성은 정치권력의 획득을 둘러싼 열정에 국한되는 협소한 성격을 쉽게 벗을 수 없다. 통치의 영역에 차마 다 담길 수 없는 아픈 진실이 아직 우리 사회에는 존재하고 있다. 그 인간적 진실에 조금씩 접근해가는 일은 몸으로 부딪히고 눈으로 목격한 아픔의 현장에 한 발짝씩 다가가는 일일 것이며, 현장에서 호흡한 공기는 오래도록 공감의 토대를 이루는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타인의 삶을 껴안고, 공동체의 힘겨움을 책임진다는 것은 역시 현실적 방책을 필요로 한다. 정치권력이 근본적으로 지향해야 하는 것은 ‘책임성’이며, 그것을 위해 각종의 방책을 고민해야 한다. 12월 선거를 앞둔 우리 사회의 양지에는 그러한 대안적 구상과 정책들이 범람한다. 하지만 문제의 정확한 해결을 지향하는 대책은, 사람 사는 세상에서는 대안의 한 짝일 뿐이다. 다른 한 짝은 어디까지나 뒤켠에서 이루어지는 고통의 공감과 슬픔의 공유에 있다. 삭막한 세상에서 힘겨운 싸움을 이어나가는 노부부에게 필요한 것은 확실한 행정적 처방이기도 하지만, 그분들의 응어리진 억울함을 조금이나마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높은 대문을 열고 나와 더 아픈 마음, 더 낮은 곳을 정직하게 응시하는 순간에, 비로소 많은 삶을 지켜낼 수 있는 가장 정확한 방책도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타인의 아픔을 책임지는 자세이며, 새로운 미래를 열어가는 지름길이다. 결국 사랑하는 사람이 책임진다. 마음의 온도가 높은 사람이 책임진다. 서울시장 관사의 문이 오늘밤엔 활짝 열리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그 광경을 확인하기 위한 나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을 것만 같다.
2017-06-27 | hrights | 조회: 288 | 추천: 0
김은성/ 청년 칼럼니스트 “무서워요. 저 이러다 히키코모리 되는 거 아닐까요.” 카카오 톡 알람에 잠이 깼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더 놀라웠던 것은 발신자의 정체. 내가 가르치는 모 수업의 수강생 중에서 가장 앞날이 걱정 없어 보이는 아이였기 때문이다. 사소한 질문을 할 때조차 “저어, 뭣 좀 여쭈어 봐도 될까요?” 하던, 예의에 있어 보기 드물게 조심스러웠던 그녀의 갑작스러운 메시지. 잠이 화들짝 달아나서 10줄이 넘어가는 카톡 창을 읽고 또 읽었다. ‘자살’과 같은 불경스러운 단어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새벽 4시 30분이었다. 그녀를 ‘우리 모범생’이라고 부르며 맘에 드는 여자아이에게 치근대는 초등학생처럼 농담을 걸곤 했던 나다. (번역과 작문 등을 가르치는) 아카데미의 수강생 중 물리적 나이가 가장 젊은 스물 넷, 마감 기한을 100퍼센트 정확하게 엄수하는 성실성, 과제의 내용이 ‘너무 월등해서 샘조차 안 날 정도로’ 기발하고 매력적이라는 점. 호감의 이유는 충분했다. 말을 걸고 싶던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그녀가 일절 말을 하지 않았으니까! 겁에 질린 토끼 같은 표정이 안쓰러웠다. 웃으면 정말 예쁠 얼굴인데 웃질 않으니 그 속내가 자못 궁금했다. 필요한 질의응답 외의 이야기를 삼가는 그녀의 표정변화란 성과를 칭찬했을 때 지어보이는 예의바른 미소 뿐. 각자 제 말을 하고 싶어 팔을 휘두르는 에너지 넘치는 학생들 사이에서 사적인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은 채 뒤풀이 시간을 채우는 그녀는 “지구인들과 말하지 말라”는 지령을 엄수 중인 외계인 같기도 했다. 새벽 4시 30분까지 잠 못 이룬 채, 인사와 질의응답만 주고받던 강사에게 SOS 신호를 보낸 마음이 어떠할까. 악착같이 부여잡고 있던 예의와 자존심을 외면하고 send 버튼을 누르도록 그녀를 패닉상태로 몰아넣은 것은 무엇일까. “졸업한지 1년이나 됐는데 아직까지 월세를 부쳐주시는 부모님께 면목이 없다, 면접 거절문자를 볼 때마다 심장이 터질 것 같다, 멋지게 입사하고 나서 친구들을 만나려고 했는데 이젠 자신이 없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어 숨어만 있고 싶다, 그런데 은둔자가 될까 봐 두렵다”는, 신문과 방송에서 100번은 본 요즘 청춘들의 고민이 메시지의 주 내용이었다. 잠옷 바람으로 당장 그녀에게 장문의 E-메일을 썼다. ‘너만 힘든 것은 아니야’라는 무책임한 문장만은 피하고 싶었지만, 결과적으로 이지성이나 김난도의 자기계발서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진심이었듯, 나도 진심이었다. “누구도 너를 흔들지 못하게 밥 잘 먹고 잠 잘 자고 땅을 잘 딛고 서 있자. 아직 포기하기엔 이르잖아. 너는 재능이 넘치는 소중한 존재란다.” 로 요약될 마음을 A4 1장 가득 썼던 것은 ‘죽거나 망가지지 말자’고 프리랜서인 나 스스로에게 보내는 주문 같은 것이었을 테다. 모든 위로는 결국 자신에게 하는 말에 다름 아니다.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판매대에 진열된 자기계발서들. 사진 출처 - 한겨레 말없는 자는 자기계발서에 줄을 긋는다 두 주 정도 지났을까. 입사 합격 문자를 받자마자 그녀가 찾아왔다. 해방감 때문인지 흥분 때문인지 그녀는 발갛게 홍조를 띄고 자신의 이야기를 쏟아냈다. 그토록 귀엽고 수다스러운 사람인지 처음 알았다. 그녀는 마음을 열듯, 두꺼운 일기 노트도 열어 보여주었다. 세상에! 그렇게 많은 종류의 자기계발서가 존재하는지 처음 알았다. 게으를 때, 포기하고 싶을 때, 두려울 때, 남과 비교하게 될 때, 죄책감에 시달릴 때 읽으면 좋은 자기계발적인 문장들을 빼곡히 필사해 놓았더라. 입을 닫았던 시간 동안 그 문장들을 꼭꼭 눌러 쓰고 있었던 거였다. 호감 가는 여자아이와 친해진 초등학생처럼, 나는 많이 기뻤지만 조금 서글펐다. 바보 같은 말, 별 것 없는 말, 못난 말, 기운 빠진 말, 분노하는 말... 그런 ‘나의 말’도 좀 해도 좋았을 텐데. 입 꾹 다물고 빛나고 자랑스러운 말들만을 받아 적었을 청춘은 그녀뿐이 아닐 거다. 나의 말이 아닌 말들을 하며 살아가는 모습은 면접장에 선 자아의 확장판이다. 옳은 말, 진취적인 말, 백번 맞는 말, 하지만 그건 자신이 아니다. 그리고 그 말들의 모음집들이 힐링, 멘토, 치유 등의 띠지를 두르고 서점에 누워 있다. “세상을 내가 이렇게 만들었니. 그렇다고 네가 그렇게 만든 것도 아니야.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지가 중요하겠니, 네가 살아남는 게 중요하겠니? 답이 나와 있잖아. 분노할 시간에 너의 성공에 충실해”라고 <아프니까 청춘이다>의 저자는 말했고, 그 말들의 모음집은 천만 청춘의 사랑을 받았다. 친한 후배가 힘들다고 찾아오면 소주 한 잔 따라주며 나도 김난도 교수처럼 말할 것 같다. 우선 너부터 살고 보라고, 만 원짜리 구겨졌다고 오천원 되겠냐고, 너는 빛나는 존재라고. 하지만 고통의 시간은 쉽사리 끝나지 않고, ‘나중에 해야지’ 마음먹은 자신의 말들이 사그라진다. 일상의 세심한 결들을 표현한 예쁜 말, 속이지 않는 진심으로 “졸라 힘드네!” 소리치는 성난 말이 놓일 공간과 시간은 어디에도 없다. 신입사원이 된 그녀는 이제 자신의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다지 희망적이지는 않다.
2017-06-27 | hrights | 조회: 315 | 추천: -1
김종현/ 청년 칼럼니스트 지난 4월, 총선을 앞두고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대학 동아리 후배들과 작은 세미나를 준비했다. 선거를 계기로 국회의사당 안에만 갇혀있는 정치가 아닌, 바로 지금 여기에서 주권자인 우리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정치를 상상하자는 주제였다. 많은 학생들이 함께 하길 바라며 세미나 포스터와 현수막을 만들고, 게시 허가를 받으러 학교 행정실을 찾았다. 그런데 웬걸? 행정실 직원은 부착 허가를 내줄 수 없다고 말했다. 세미나 주최 측에 민주노총이 포함돼있다는 이유였다. 총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정치적 색깔이 있는 민감한 행사를 여는 것은 다른 학생들이 동요할 수 있고, 보기에도 별로 안 좋다는 것이었다. 엄연히 투표권을 가진 성인인 학생들이 동요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도대체 누가 보기에 별로 안 좋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사실 행정실의 이런 태도는 예상된 일이었다. 우리 동아리는 이미 학교 당국에 ‘빨갱이 동아리’로 낙인찍힌 상태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동안 교내 청소 노동자, 비정규직 교수 노동조합과 함께 학교에서 벌어지는 노동권 탄압 사례에 문제를 제기해왔다. 교육 환경 상품화 비판, 장애인권 보장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높여왔다. 이런 우리는 학교 측에서 볼 때 눈에 거슬리는 문제아들이었다.   홍대 외부세력 대놓고 지지합니다 사진 출처 - 공잠   당황스러운 것은 동아리 학생자치회마저 우리 편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자치회는 ‘학교와 싸우는 시대는 갔다’며, 학교와 자치회의 화합을 위해 괜한 분란을 일으키지 말라고 압박해왔다. 학교의 평화를 위해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는 얘기다. 사실 언젠가부터 침묵은 내 익숙한 습관이다. 대학 친구들 사이에서 내 별명은 빨갱이다.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말하거나, 기존 관념에 비판적인 이야기를 해도 친구들은 내 얘기를 진지하게 듣지 않는다. “넌 빨갱이니까”하고 치부해버리는 것이다. 거기서 내 의견을 무리하게 고집해봐야 감정싸움이 되고 이래저래 서로 상처받고 피곤해질 뿐이다. 우정의 평화를 위해 내가 침묵하는 셈이다. 빨갱이라는 말이 무시무시한 위력을 가진 시절이 있었다. 반공 이데올로기가 맹위를 떨치던 시절, 빨갱이로 몰리는 것은 글자 그대로 죽음을 의미하던 때가 있었다. 전쟁까지 겪은 극한적인 이념 대립의 산물이었다. 이제 언뜻 시대는 바뀐 것처럼 보인다. 빨갱이 소리를 예사로 듣고 살지만 난 아직 살아있다. 어떻게 보면 친구에게 빨갱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색깔론이 사라졌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과거 무고한 사람을 빨갱이로 몰아 처형했던 사건에 대해선 집권 여당의 유력 대선 후보도, 진정성에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어쨌든 공식적으로 사과의 뜻을 밝혔다. 정치권에서도 이제 색깔론이라는 말은 청산해야 할 구태 정치의 대명사로 쓰인다. 하지만 색깔론은 진짜 사라진 걸까? 비판적 시각을 불온하게 여기고 거부하는 태도는 여전하다. 대상이 ‘친북 세력’에서 ‘반시장 세력’으로 바뀐 것뿐이다. 돈이 아니라 사람이 먼저라고, 인간의 권리와 자유를 보장해달라고 말하는 사람은 또 다른 빨갱이가 돼 억압받는다. 대학 당국이 우리 동아리를 못마땅해 하는 이유도 이런 것일 테다. 당장 돈이 안 되는 기초학문은 구조조정의 대상일 뿐이고, 취업에 유리한 실용 학과를 유치하는 데 여념이 없는 대학이 우리의 문제제기를 달가워할 리 없다. 대통령 선거가 다가온다. 모든 후보들이 국민 통합, 사회 통합을 강조한다. 그게 우리 학교에서 내가 겪었듯이, 나라의 평화를 위해 누군가 침묵을 강요받는 그런 형태의 통합이 아니길 바란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한 빨갱이의 바람이다.
2017-06-27 | hrights | 조회: 290 | 추천: 0
정다운/ 청년 칼럼니스트   나는 사랑을 믿는다. 사랑이 가진 힘을 믿는다. 이건 신파 드라마 속 대사가 아니다. 감수성 풍부한 20대 처녀가 그저 새벽감성에 취해 뱉은 말도 아니다. 가슴 저 밑의 깊은 확신을 끌어올려 진지하게 고백하는 것이다. 세상 모든 일은 사랑하는 일이다. 세상 모든 일이라고 한 만큼, 사랑을 주고받는 모습은 다양하다. 그것이 넘치거나 모자라서 혹은 달기보단 씁쓸해서 이런 저런 일들이 생긴다. 오늘 내가 페이스북에 남긴 한 자락 글은 사랑 받기 원하는 내 마음이다. 가수 싸이 신드롬은 곧 서로가 서로를 공유하고 싶었던 사랑이다. 지난날 김진숙 지도위원이 한진중공업 크레인 위에서 벌인 사투는 나보다 너와 우리를 사랑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하다못해 얼마 전까지 신문 지면을 가득 채우던 치정과 흉악범죄들도 사랑이 모자라서 혹은 사랑을 오해해서 벌어진 일들이었다. 추석연휴에 친척들로 북적 이는 밥상 앞에서 나는 혼자 사랑타령을 하고 있었다. ‘사랑이 답이구나.’ 내가 혼자 사랑을 논하는 동안, 어른들은 간만에 대화의 꽃을 피웠다. 서로 못보고 지낸 시간만큼 할 말도 많았다. 끝날 줄 모르는 수다는 역시 저녁상을 물리고, 과일을 먹으며 절정에 달했다. 초저녁부터 혼자 연신 떠들어대던 텔레비전이 간만에 재미있는 화두를 던졌다. 화면에는 이번 대선후보들의 얼굴이 나오고 있었다. “누구는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 되고. 누구는 어디 출신이라 성격이 어떻고, 누구는 공약이 맘에 안 든다.” 모두 한마디씩 보태며 유력한 세 후보에 대해 평가했다. 그런데 계속 듣고 있다 보니, 이야기가 뱅뱅 돌고 있는 느낌이었다. 대통령 자격 평가 기준이 모두 달라서였을까? 아니, 실은 기준이라고 할 것이 딱히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나마 공약보다는 과거 경력을 먼저 보겠다는 우선순위라도 있으면 다행이었다. 사관학교 생도인 내 동생은 말을 빨리 하거나 짧게 하는 후보를 선택하겠다고 했다. 사열을 빨리 끝내야 한다나. 그 말에 남자 어른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으로 던진 말이었지만, 왠지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기업에서 신입사원 한 명을 뽑을 때도, 3차, 4차에 걸쳐 시험과 면접을 진행한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대통령을 뽑을 때 그런 체계적이고 깐깐한 기준은 없었다. 연일 후보들과 관련하여 터지는 ‘뉴스’와 그 뉴스에서 오는 ‘이미지’가 우리의 판단을 좌우하는 듯 했다. 무엇보다도, 그러한 이미지가 시대의 요구, 그리고 나의 욕망과 맞아 떨어졌을 때, 우리는 그이와 흠뻑 사랑에 빠진다. 그이의 얼굴에 난 여드름자국도 사랑스러운 주근깨처럼 보인다. 그야말로 눈에 콩깍지가 쓰인다. 그런데 슬프게도 이것은 짝사랑이다. 2007년 12월 우리의 선택이 그러했다. 우리는 당시 이명박 후보가 선함이나 인간성, 정직, 청렴 등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를 선택했다. 30대에 최연소 CEO로 자수성가한 독종, 청계천, 버스중앙차로 등 가시적인 결과가 두드러졌던 야무진 행정가. 사람들은 BBK를 비롯한 여러 비리의혹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 당시 이명박이 가진 ‘경제 및 경영능력’에 관한 이미지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는 우리에게 반드시 잘 살게 해주겠노라 장담했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것이 어찌되었든, 일 하나는 끝내주게 ‘잘’하는 저이라면…… 나도 ‘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열렬히 그를 사랑했다.   5년 전 대선에서 선거유세에 나선 MB가 시민들을 향해 ‘사랑해요’ 하트 모양을 만들며 인사하고 있다. 사진 출처 - 오마이뉴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잘’살고 있는가? 747이라는 환상적인 비전은 벌써 한참 전에 파쇄기로 들어가 드르륵 갈려 없어졌다. 대규모의 촛불집회와, 시위. 그리고 죽어나간 사람들. 대한문 앞의 쌍용차 분향소나, 연일 신문에 오르내리는 ‘자살’사건만 보아도, 지난 5년은 유난히 삶의 무게를 견뎌내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는 정말 잘 살고 있는 것일까? 슬로건은 곧 콤플렉스라고 한다. 현재 대선 후보들의 슬로건을 보면, 우리의 콤플렉스가 드러난다. 저녁이 없는 삶, 사람이 나중인 사회, 공평과 정의가 없어서 내 꿈이 이루어지기 힘든 나라. 우리는 지난 5년을 이렇게 회고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우리를 잘 살게 해주겠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우리는 지금 ‘잘’ 못살고 있다. 모두 눈 뜬 채로 속았다. 이명박 대통령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에게 말이다. 그가 말한 ‘우리’가 실제 우리일 것이라 착각했고, 자수성가한 저 사람, 저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을 찍으면 내 삶도 그렇게 되겠지 하는 환상에 빠졌다. 그리고 내 선택의 이유를 시대의 부름인 양 합리적 근거들을 붙여 포장했다. 개혁을 위해!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 우리는 아직도 ‘잘’살고 싶다. 그렇다면 이제는 방점을 ‘잘’이 아니라 ‘살다’ 그 자체로 바꿔야 한다. 좋은 대학에 못 가도, 당장 취업에 실패해도, 늙어 능력이 없어도 ‘사는 것’이 당연해야 한다. ‘비관자살’처럼 말도 안 되는 일들이 횡행 하다면, 그 사회는 가치관부터 잘못되었다. 삶은 삶 자체로 아름다워야 하고 우리 스스로가 그렇게 느껴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는 존재 자체로 충분히 사랑 받고 있다고 느껴야 한다. 그래서 사랑이 답이다. 새 대통령은 반드시 사랑을 할 줄 아는 사람이어야 한다. 사랑의 그릇이 큰 사람이어야 한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로 말문을 여는 사람은, 안 해본 일은 모른다. 아니 관심이 없다. 해보지 않고 겪어보지 않은 일일 지라도,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 그런 공감의 능력이 있는 사람. 그래서 도저히 나서지 않고는 밤에 두 다리 뻗고 못 자는 그런 오지랖 넓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 대통령의 오지랖은 소수의 ‘우리’가 아니라 5천만 국민 전체를 향해 있어야 한다. 그이의 주변에 그처럼 감수성 풍부한 이들이 많은지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들의 비판을 겸허히 수용하는 자세가 되어있는지도 중요하다. 자신의 방식대로 사랑을 주는 것에만 집착하는 것은 상대를 행복하게 할 수 없다. 어쩌다 마주친 김수영의 시 <누이야 장하고나>의 한 구절이 가슴 한 구석을 쿡 찌른다. 모르는 것 앞에는 엎드리는 것이 / 모르는 것 앞에는 무조건 숭배하는 것이 / 나의 습관이니까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과거에 저 후보가 어떤 일을 했는지. 그게 그 당시엔 왜 문제였는지. 지금에 와서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지금 이 공약은 얼마나 실현 가능성이 있는지. 이 사람이 얼마나 그 일을 해낼 수 있을지. 수학문제 풀듯이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잘못된 감각에 판단을 맡겨왔는지도 모른다. 모르는 것 앞에서 습관처럼 엎드려 절하면서, 판단의 순간엔 눈에 콩깍지를 쓰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것이 인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이번엔 반드시, 사랑에서 답을 찾아보자. 사람을 제대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랑의 그릇이 큰 사람인지 그런 감수성이 있는지. 즉 인권을 좀 아는 사람인지 보자는 것이다. 인권이 살아 있을 때, 바로 당신이 ‘잘’ 그리고 ‘살 수’있다. 사랑, 즉 인권 감수성은 대통령을 선택하는 모든 기준 가운데 가장 선명하고 옳다. 후보들의 삶의 이력을 보며, 공약을 보며 꼭 물어보자. 정말 나를 잘 살게 해줄 수 있나요? 가 아니라, 정말 나를 사랑하나요? 라고.
2017-06-27 | hrights | 조회: 317 |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