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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대학에서 여성주의 말하기 (이윤소)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8 10:38
조회
334

김창남/ 인권연대 운영위원



“안녕하세요 중앙대학교 여성주의 교지 <녹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이윤소입니다.”

“두산대에 아직까지 여성주의 교지가 있어?”

새로운 자리에서 나를 소개할 때 종종 놀라움 섞인 질문을 듣곤 한다. 학보사나 교지 등 대학 언론도 예전만 못하다는 말이 나오는 지금 이 시점에 ‘여성주의’ 교지라니 신기하게 여겨지나 보다. 나는 현재 중앙대학교 여성주의 교지 <녹지>에서 활동하며 대학 내에서 여성주의를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명맥을 잇는 대학 여성주의 언론은 <녹지> 뿐만 아니라 고려대학교 여성주의 교지 <석순>, 성공회대학교 여성주의 저널 <n[앤]>, 성균관대학교 여성주의 교지 <정정헌>등이 있다. 현재 대학 내에서 여성주의적인 가치가 약해지면서 여성주의 언론도 이에 영향을 받고 있다.
대학 내 여성주의의 위기

현재 대학 내에서 여성주의의 입지는 매우 불안정한 상태이다. 우선 총여학생회의 존재가 희미해져 가고 있다. 최근 건국대학교 전체 학생 대표자 회의에서 ‘총여학생회 폐지’ 안건이 압도적인 찬성표를 받고 통과되었다고 한다. 현재 서울권에서 총여학생회가 제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대학도 경희대, 연세대, 한양대, 홍익대 정도라고 한다. 또한 ‘여권은 이미 신장되었다.’, ‘요즘처럼 평등한 세상에서 여학생들의 복지를 운운하는 것은 역차별이다.’라며 여학생의 권리를 주장 할 수 없게 말하는 분위기가 대학 사회 전반에 퍼져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근 중앙대학교에서는 학교 전체에 단 하나뿐이던 여학생 휴게실을 남녀공용 휴게실로 바꾸기도 했다. 학교에서는 총여학생회의 공백을 틈타 이용 당사자인 여학생들의 의견은 들어보지도 않은채 방학 중에 이런 결정을 내렸다. 이 과정에서 중앙운영위원회에 소속된 각 단과대의 학생 대표자들조차 별다른 고민 없이 여학생 공간의 축소에 찬성했다. 즉 대학 내의 구성원 중 다수가 성평등의 가치에 대해서 어떤 고민이나 성찰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대학 내에 여성주의가 필요한 이유

그러나 대학 내에서 ‘여성주의’는 여전히 중요한 가치다. 왜냐하면 요즘 유행하는 ‘역차별’이나 ‘여성상위시대’ 같은 단어들과는 달리 대학은 여성에게 아직도 평등한 공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힘들었던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대학에 진학하면서 ‘어떠한 권위나 위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대학 생활’을 꿈꿨다. 그러나 막상 대학생이 되고 보니 ‘대학은 평등한 공간이 아니’었다. ‘후배’이며, 심지어 ‘여자’이기까지 한 나는 학교 안에서는 항상 약자일 수밖에 없었다. 성폭력 사건이나, 여성에 대한 편견을 거리낌 없이 말하는 교수 같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도 대학생의 일상에서는 권위적이고 성차별적인 발언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선배들은 술자리에서 항상 ‘여자’ 후배의 외모를 안주삼아 난장을 벌였다. 그 자리에 앉아 있던 나는 마치 내가 평가 받는 듯한 느낌이 들어 불편하고 화가 났다. 하지만 나만 빼고는 모두 화기애애했던 술자리 분위기를 깨면서 항의할 자신이 없기에 나는 먼저 자리를 피했다. 게다가 남자 선배들은 조금 친해졌다 싶으면 항상 ‘이제 선배라고 하지 말고 오빠라고 불러봐~’라고 말했는데, 나는 정확히 뭐라고는 설명할 수 없는 불쾌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 때 나는 내가 느낀 불편함을 남에게 말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내 주변에서는 나 말고는 이런 고충을 토로하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다들 당연한 일이라 여기기에, 한 몇 년을 ‘나만 이상한 사람인가? 내가 예민한 건가?’라며 내 탓을 했었다.

그러던 차에 <녹지>에서 활동하게 되면서, 나는 여성주의적인 시선으로 내 고민을 바라보게 되었다. 여성주의에서는 그동안 내가 느꼈던 불편함에 대해서 그것은 네 탓이 아니라고 말해주었다. 또한 살아가면서 혼자서 수없이 고민했던 일들을 나의 언어로 말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나는 <녹지>의 구성원들과 내가 겪었던 불쾌한 일, 불편하지만 말할 수 없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서로의 고민을 묻고 답하면서 우리는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판점을 지닌 사회적, 논리적인 구조를 발견하게 되었다. 또한 불합리한 사회 구조 속에서 나에게 강요되는 역할에 저항하게 되었다. 여성주의자로 살아가면서 우리는 서로 연대하고 지지해준다. 나는 여성주의를 시작한 이래로 내가 문제를 제기 했을 때 나의 발언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내집단이 생겼다는 느낌에 강한 안정감을 느낀다. 즉 사회적으로 약자인 사람도 주체적으로 말할 수 있게 지지해주는 공간이 바로 여성주의인 것이다.
대학 내에 여성주의 언론이 필요한 이유

현재 사회 전반적으로 성평등 의식이 부재한 상황에서 대학 사회도 여성주의에 대한 편견과 무지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러한 상황에서 여성주의 언론은 여성주의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전환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학내 여성주의 언론을 읽으며 대학생들이 최초로 여성주의적인 시각을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부러 여성학 강의를 찾아 듣지 않는 한, 평범한 사람이 여성주의를 접할 기회란 많지 않다. 반면에 여성주의 매체는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학교 곳곳에 놓여있기 때문에 ‘여성학’ 강좌에 비해 접근성이 높다. 이러한 지점에서 여성주의 언론은 대학생이 처음으로 성평등 의식에 대해 고민해보는 발화점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

또한 여성주의 언론은 대학의 권위주의적인 분위기 속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위안을 줄 수 있다. <녹지> 47집을 내고 나서 독자들에게 잘 읽었다는 문자를 받았다. 그들 대부분도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것 같다. ‘남들은 괜찮다는데 왜 나만 불편할까. 내가 이상한 사람인 걸까?’ ‘찜찜한 일이 있는데 정확히 왜 그런지 설명할 수가 없어서 답답하다.’는 고민 말이다. 독자들이 보낸 문자 말미에는 ‘혼자서 고민하던 부분을 공감할 수 있는 말로 풀어내 주어 고맙다.’고 적혀있었다. 나는 그 때 보람을 느꼈다. 독자가 내가 문제시하는 지점에 대해서 공감하였고, 나의 글을 읽고 해소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물론 여성주의 언론의 글을 읽고 좋아하는 사람들 보다, 오히려 글을 읽으면서 불편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들이 느낄 불편함에도 나름의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글을 읽으며 불편함을 느낄 때, 평소에 당연시 하던 통념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는 보편적인 일상에 질문을 던지며 새로이 보편타당한 대답을 찾아나간다. 그래서 나는 여성주의를 말하며, 여성주의 언론 또한 이를 목표로 계속되고 있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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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설명) <녹지>는 1967년도에 여학생 교지로 시작하였다가 1980년대 이후 여성주의 교지의 정체성을 확립하여 2013년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녹지>는 2009년도에 교지 대금을 삭감하겠다는 중앙대학교의 학내 언론 탄압 시도에 의해 위기를 겪었다. 하지만 학생들의 항의로 인해 학교의 시도는 무산되었다. 현재는 재학생들이 교지 대금을 자율적으로 납부하는 형식으로 예산을 꾸려가고 있다.
<녹지>는 일 년에 두 번 봄, 가을에 발간되는데, 최근에 47집 봄 호를 냈다. 이번 호에서는 ‘폭력’이라는 주제를 바탕으로 정치, 학내, 미디어, 국가, 가정 등의 영역을 다루었다.



이윤소씨는 여성 인권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는 청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