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home > 인권연대세상읽기 > 우리시대

‘우리시대’는 언론계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이 멘토가 되어, 작성한 칼럼에 대한 글쓰기 지도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태민, 이서하, 전예원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안동환(서울신문),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기독유감(基督遺憾) (박정훈)

작성자
hrights
작성일
2017-06-28 10:36
조회
293

박정훈/ 청년 칼럼니스트



그들의 태도

“나는 레즈비언과 게이 크리스천 운동 단체가 존재하는 사실 자체가 교회를 책망하는 표시라고 생각한다. 동성애 성향의 핵심에는 깊은 외로움, 상호적 사랑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 갈증, 정체성의 추구, 그리고 완전함에 대한 갈망이 있다. 동성애자들이 이를 지역 ‘교회 가족’ 내에서 찾을 수 없다면 우리는 그러한 표현을 쓸 자격이 없다.” -존 스토트, 『동성애 논쟁』 중

존 스토트는 종교 교리와 각종 사회적 이슈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으로, 오래전부터 기독교계에 영향력을 끼쳐왔다. 그 역시 여느 기독학자들처럼 동성애는 명백히 하나님의 질서에 어긋나는 죄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동성애를 조심스럽게 다룬다. 또 동성애자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그의 태도는 사회적으로 수긍할 수 있는 범주에 속한다.

하지만 근래에 사람들이 목도한 기독교인들의 행태는 수긍하기 어려운 정도에 이르고 있다. 국회에서 ‘동성애 차별금지’를 포함한 차별금지법이 발의되어 통과될 조짐이 보이자, 국내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마치 국가적인 소명이라도 받은 것처럼, 조직적이고 적극적으로 반대운동을 펼쳤다.

필자 역시 아는 교회 지인으로부터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교회에서 동성애를 죄라고 설교할 수 없게 되는 등 종교 활동이 제약될 수 있으니, 법안 통과를 저지하는 운동에 동참해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단정할 수 없으니 조금 더 알아보고 동참할 필요가 있지 않겠냐’는 내용의 유보적인 답문을 보냈다. 한편으론 의문이 들었다. ‘교회에서 언제부터 동성애에 대한 설교를 그렇게 많이 했지?’ 필자도 나름대로 교회에서 잔뼈가 굵다면 굵은데, 동성애에 대한 설교를 들어본 일이 가물가물하다.

 

IMG_4635.jpg
사진 출처 - 참세상



그들의 배타성

사실 차별 행위를 법을 통해 규율해야만 하는지에 대해선 명확한 판단이 안 선다. 법을 공부하고 있는 학생임에도, 법에 의한 규율이 얼마나 실효성이 있는지 혹은 그것이 바람직한지에 대해선 여전히 확언할 수 없다. 하지만 차별금지법을 대하는 기독교계의 태도에 대해선 바람직하지 않다고 확신할 수 있을 것 같다.

기독교인들의 배타적이면서도 공격적인 태도는 이미 오래전부터 뭇사람들로부터 질타를 받아왔다. 그리고 그 이면의 정서는 종종 ‘포비아(phobia, 공포증)’라는 단어로 표현된다. ‘이슬람포비아(Islam phobia)’, ‘호모포비아(homophobia)’가 대표적이다. 이렇게 보면 기독교인들은 항상 겁에 질려 사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분명히 성경에선 하나님이 믿음을 가지고 담대히 살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 말이다. 이면의 정서야 어찌됐건 그들이 견지한, 타자에 대한 배타적 태도는 우리나라의 기독교 성도 수를 뚝뚝 떨어뜨리는 데 한 몫 했다.

교회를 건강하게 세워가는 일과 국가를 건강하게 세워가는 일은 분명히 다르다. 예수가 보여준 하향성의 삶, 사랑을 중심에 둔 연대의 원칙에 비춰 보건대 지향점과 수단, 작동원리 등 어느 하나 일치할 수 없다. ‘오직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세상에 대해 배타적이다.

그럼에도 기독교인들은 종종 이를 혼동한다. 헌법에 명시된 대한민국의 작동원리는 민주주의시스템이다. 민주주의는 국민 다수에 의해 운영되지만, 동시에 소수자에 대한 배려를 잃지 않는다. 그리고 그 운영 과정은 평화적이어야만 한다.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는 잘 모르겠으나 그들만의 윤리적 판단기준을 국가에 강요하는 일은 타당하지 않다. 설사 그들이 우리나라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한다 하더라도 소수자에 대한 차별적 언행이 정당화되진 않는다. 그리고 그들만의 잣대를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는 행위, 차별금지법 발의에 대한 그들의 대응방식 등은 어떤 면에서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헌법상 보장된 종교 활동의 자유가 침해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오히려 교세를 이용한 집단적 행동이 헌법에 명시된 정교분리 원칙과 평등권을 침해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모든 사회적 쟁점은 헌법상 권리의 충돌로 나타난다. 충돌하는 각 권리의 제한 범위를 확정하는 일이 법집행이자 법에 대한 판단이다. 법을 집행하고 판단하는 기관은 사회 일반인의 관점에서 어느 정도까지 그 권리를 제한할 수 있을지를 판단하며, 설사 제한한다 하더라도 그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하지 않도록 한다.

생각하건대 ‘교회’에서 동성애와 관련한 ‘교리적인 판단’을 ‘예배시간’에 언급한다고 해서 그 목사를 차별금지법 위반으로 처벌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예배는 무엇보다도 본질적인 ‘종교 활동의 자유’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동성애자들은 민주주의 사회에서 본질적인 헌법상의 평등권과 행복추구권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기독교인들도 그러한 권리를 보장하는 차원의 ‘차별금지법’이라면, 관용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그들의 소명

남 얘기 하듯 ‘그들’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필자 역시 기독교인이며 예수를 신앙의 모델로 삼고 있다. 다만 지금의 교회가, 그들이 말하는 ‘죄인’들에게 조금 더 호의를 보여줬으면 하는 바람에서 글을 쓴다. 예수는 건강한 자에겐 의원이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 필요하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예수의 정신과 민주주의의 관용 정신은 양립할 수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 상통한다고 생각한다.

박정훈씨는 노동과 소수자 인권에 관심이 있는 법학전문대학원에 재학 중인 학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