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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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는 언론계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이 멘토가 되어, 작성한 칼럼에 대한 글쓰기 지도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현진, 박선영, 임영훈, 정석완, 조소연, 주만, 주윤아, 최우식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김도원(YTN),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이오성(시사인), 임아영 (경향신문), 장형우(서울신문), 전진식(한겨레), 조일준(한겨레)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주윤아/ 회원 칼럼니스트  여자들에게 여행이 좋은 이유 중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코 “삼시 세끼 밥을 차리지 않아도 되니까” 라고 이구동성 답할 것이다. 밥 중에 제일 맛있는 밥은 ‘남이 해 준 밥’이라는 명언(?)도 있듯, 여자들에게 매 끼니를 마련하는 일이란 중노동이자 일상이다. 어릴 때는 엄마의 부엌일을 돕고, 청소년기에는 남자 형제들의 간식까지 챙기고, 독립해서는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소박하게 자신의 밥상을 차린다. 결혼과 출산을 거치며 어느덧 자신도 엄마가 되어 가족의 밥상을 차리고 이 정도로는 부족한 건지 어떤 경우에는 자녀의 자녀, 즉 손주들의 밥상까지 또 차려 올리는 것이 여자의 일생이다. 우리는 이것을 여자의 ‘팔자’라고 불렀다.  알고 보면 식사를 집에서 직접 만들어 먹지 않는 나라가 꽤 많다. 이는 부엌이 아예 없거나 최소의 조리 공간만 있는 주거 형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모두가 바쁜 아침 식사는 간편식으로 각자 해결하거나 집이나 직장 근처의 식당에서 가볍게 사먹는 문화가 흔하다. 물론 가격도 부담스럽지 않으니 가능한 일이다. 우리도 이렇게 끼니를 밖에서 해결하는 문화가 (엄마들의 마음에 아무런 죄책감 없이) 자연스럽게 확대되어 정착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집 밥, 그것도 엄마가 손수 해 주는 일명 ‘엄마표 집 밥’을 이리도 애정하는 것일까?  물론 인간에게 먹거리는 매우 중요하다. 먹기 위해 산다는 말을 절대적으로 부정하기도 어렵다. ‘밥이 보약’이라거나 ‘밥심으로 산다’는 말들도 있듯,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 노동하기 위해, 그리고 자아실현을 하기 위해 건강한 음식을 선별하여 거르지 않고 잘 먹는 것은 분명 중요하다. 그런데 왜 꼭 집에서 만든, 그 중에서도 엄마가 지어준 밥을 최상의 가치로 꼽고 예찬하느냔 말이다. 반면 유명 셰프(chef)들 중 남성들만 주로 조명 받는 현실도 아이러니하다. 맛과 간의 조합에 대해 굳이 논하지 않더라도 엄마의 정성으로 만들어진 음식이 원산지도 불분명한 식당 음식보다 몸에 더 좋을 수 있다. 그러나 오롯이 엄마 혼자만의 희생으로 차려진 밥을 먹으며 나머지 가족들만 행복에 겨워한다면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 앞으로도 지속되는 것이 맞는가? 명절 음식도 꼭 엄마와 여자들이 손수 만드는 것이 조상에 대한 예의라고 암묵적으로 강요하는 대목 또한 같은 맥락이다. 어쩌면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남편의 조상들에게 공감은커녕 유체이탈의 상태로 그저 작년처럼 올해도 쭈그리고 앉아 전을 부치고 있을 뿐이다. 하루도 모자라 시댁 가족과 친지들이 시간차 공격으로 방문하는 며칠 동안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여성들은 손님상 차리는 중노동을 반복한다.  결국 너도나도 ‘엄마표 집 밥’을 극찬하는 논리는 엄마에게 가사노동을 전가하며 가부장제를 공고히 할 개연성이 충분하다. 간혹 엄마가 부재할 때나 가족에 대한 이벤트로 아빠나 다른 가족이 차린 밥상은 대체로 간편식이거나 배달 음식이기 십상이다. 물론 가족 중에 요리 솜씨가 있는 이가 있다면 좀 더 근사한 밥상일 수는 있겠지만 어쨌거나 일회성이다. 그래서 동서고금 엄마가 그립고 엄마가 정말 소중한 존재라는 훈훈한 결론으로 미화되어 왔다. 동화작가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책 <돼지책>을 보면 비슷한 문제의식이 잘 드러나 있다. 가사와 돌봄 노동을 전담하고 있는 이름조차 소개되지 않는 엄마가 아무런 말도 없이 가출(?)하고 난 후 아빠와 자식들이 뒤죽박죽 되어버린 일상 속에서 결국 엄마(사실은 엄마의 노동력)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닫고, 엄마가 돌아온 뒤 나름대로 가사 노동을 분담한다는 내용이다. 물론 가사와 돌봄 노동을 공평하게 나눈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누구나 무신경하게 이야기하듯 원래 엄마의 일은 가족들이 잠시잠깐 ‘돕는’ 시혜일 뿐이다. 이 그림책에서 가장 놀라운 부분은(책을 읽고도 모르는 사람도 있는데) 엄마가 전업주부가 아니라 워킹맘이라는 점이다. 집안일을 전담하면서 직장까지 다니는 엄마는 오직 ‘중요한’ 회사와 학교에서만 일하고 공부하는 아버지와 자식들과 존중은커녕 소통도 불가능했던 것이다. 1986년에 발행된 이 그림책을 2018년 대한민국 엄마들이 깊이 공감하는 이유를 가족 모두 성찰해 볼 때다.  30년 전과 지금의 엄마들의 모습을 비교하며 읽어 보세요. 앤서니 브라운의 명작 ‘돼지책’ 사진 출처 - 네이버 이미지  지금은 남녀의 노동과 역할의 구분이 무의미한 시대이다. 시시각각 우리가 미처 파악하지도 못하는 새로운 가족 형태들도 다양하게 만들어지고 있다. 이런 시대에 ‘엄마표 집 밥’에 대한 최고의 찬사는 이제 사양한다. 엄마들더러 이제 밥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밥은 엄마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정부는 저출산 문제의 해법을 ‘대한민국 출산지도’(이 지도는 마치 중세시대 유물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같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을 할 것이 아니라 여성들의 가장 현실적인 부담과 고통을 덜어주는 데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아파트 단지마다 공동 식당을 의무로 조성하거나 저렴하고 안전한 외식 업체들을 안착시켜, 삼시 세끼 집 밥이 아니라 외식도 전혀 거리낌없이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기를 촉구한다. 직장에서 오후 시간 과중한 업무에 치이면서도 ‘오늘 저녁 뭐 해먹지?’하는 고민, 이제 그만 좀 하고 싶다. 주윤아: 성평등 민주주의를 꿈꾸는 교육노동자
2018-10-16 | hrights | 조회: 189 | 추천: 45
주만/ 회원 칼럼니스트  “우리는 5천년을 함께 살고 70년을 헤어져 살았습니다.”  해방에 이은 분단과 전쟁, 지금까지 이어온 남북 대치. 한반도의 지난 70년은 갈등 그 자체였다.  TV 생중계로 지켜본 15만 평양 시민 앞 남한 대통령의 연설 현장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최고 존엄’에게만 충성해야 하는 줄 알았던 북한 인민들은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있었던 남한의 지도자에게 갈채를 보냈다. 남북이 상투적으로 보여 왔던 치열한 기싸움도 없었다. 현장의 분위기는 남북이 대치 중이라는 사실을 잊게 할 정도였다.  어느 한쪽이 승리해야만 끝날 것 같았던 길고도 깊은 갈등. 하지만 능라도에는 의기양양한 승자도, 비참한 패자도 없었다.  대통령을 찬양하거나 이념 대립을 원하는 글은 아니다. 그저 그날, 갈등이 해소되어 가는 현장에 대한 감상을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 삶은 갈등의 연속이다. 갈등을 대화와 타협으로 해결할 수 있는 모범답안도 제시되어 있다. 하지만 결국 자신의 논리로 상대방을 굴복시키려 하는 게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총과 칼을 들지 않았을 뿐, 갈등의 현장은 입으로 싸우는 전쟁터와 다름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인권에 관심을 가진 이유도 갈등에서 승자가 되기 위해서였다. 인간답게 존중받으며 살고 싶다는 나의 소망에 무기가 될 수 있는 것이 인권이었다.  ‘나는 특별하고 귀하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이것이 사회적 갈등과 막막한 나의 삶의 탈출구가 되리라 여겼다.  갈등 상황을 마주하면 인권으로 포장한 나의 신념을 외쳤다. 잘못된 것이라 판단되면 공격적으로 대응하기도 했다. 나 때문에 누군가 불편한 상황에 놓여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모두가 나처럼 자신의 신념을 마음껏 외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하지만 그럴수록 주변은 힘들어했다.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긴장된 분위기가 만들어졌고, 예민해진 분위기에 대부분 피곤해 했다. 어차피 내 생각이 바뀌지 않을 거라 짐작하고는 화제를 돌리거나 말을 아끼는 사람도 있었다.  나 또한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불만스러웠다. 나의 신념에 동의하지 않거나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고민이 없는 사람이라고 치부하기도 했다. 승자가 되어야 한다는 욕심. 은근한 우월감. 어느 순간 나는 누군가에게 불편한, 그리고 누군가를 불편해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신념끼리 대결해 한쪽이 승리하면 갈등이 해소될 거라는 생각은 잘 들어맞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인권이라는 좋은 가치로 오히려 불편함을 만들어내고 있는 내 모습에 절망했다. 무엇이 나를 갈등 해소는커녕 갈등을 조장하는 사람으로 만든 것일까. 좌절했던 나에게 그날 연설은 말하고 있었다. 사진 출처 - 폴리뉴스  “동포 여러분, 우리 민족은 우수합니다. 우리 민족은 강인합니다. 우리 민족은 평화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은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의 연설에 ‘나’는 없었다. 온통 ‘우리’로 가득했다. 반대로 나의 신념에는 ‘우리’가 없었다. 오직 ‘나’만이 가득했다. 승자가 되려는 싸움 없이, ‘우리’라는 말과 함께 갈등이 해소되어가는 현장을 보고 알게 되었다. 갈등을 대하는 나의 자세가 잘못되었음을.  이미 읽었던 인권 관련 서적들을 다시 펼쳐보았다. 그제야 무심코 지나쳤던 ‘우리’가 보였다. 인권 안에서 ‘우리’는 ‘나’만큼 소중했다.  분명 모든 사람의 신념은 존중받아야 한다. 올바른 원칙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사람은 아름답다. 때로는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반드시 싸워야 하는 순간도 있다. 하지만 남과 북이 서로 승자가 되길 원하며 갈등을 지속했다면, 그날과 같은 감동적인 장면을 만들어 낼 수 있었을까.  나는 나의 신념이 반드시 승리하여야만 한다는 생각을 접어두려 한다. 어느 한쪽의 소신이 승리해야 하는 전쟁 같은 세상보다는, 나의 소신과 다른 이의 소신이 화합할 수 있는 감동적인 세상을 추구할 것이다. 풀릴 것 같지 않던 남북 간의 갈등이 ‘우리’라는 가치를 통해 해소되어가는 것처럼, 내 주변의 갈등들도 ‘우리’라는 가치로 해소되길 기대하며. 주만: 서로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고 싶은 작가 지망생
2018-10-10 | hrights | 조회: 81 | 추천: 10
박선영/ 회원 칼럼니스트  여자 고등학생의 일상을 1인칭 게임으로 체험해본다면? 아침에 일어난 학생에게 퀘스트(게임 캐릭터가 해결해야 할 임무)가 주어진다. 첫 퀘스트 ‘무슨 속옷/양말을 입을까?’에서 학생은 검은색 브래지어와 페이크 삭스를 선택한다. 학교에 도착하자 교사는 ‘여학생이 발목을 가려야지, 남자 꼬시려고 검은색 브래지어 입었니?’라고 말하지만 ‘선생님의 말에 반박할까?’에서 학생은 ‘아니오’를 선택한다. 다음 퀘스트에서 하복을 착용한 학생은 같은 사이즈지만 기지개를 켜도 넉넉한 남학생의 하복과 손을 들면 허리가 훤히 보이는 자신의 하복을 비교한다. 복장뿐만이 아니다. 동아리 신청 퀘스트에서 축구 동아리를 신청한 학생은 체육 선생님에게 “여학생은 매니저만 할 수 있다”는 말을 듣는다.  수업 시간에는 더 어려운 퀘스트가 이어진다. 국어 시간에 교사가 문학 작품을 해석하면서 여성적 어조와 남성적 어조로 구분하여 설명하자 학생은 이에 의문을 품는다. 사회 시간, 저출산 고령화를 설명하던 교사는 여자가 애를 안 낳아서 나라가 망한다는 말을 서슴지 않는다. 퀘스트 ‘교사에게 반박할까?’에서 ‘예’를 선택한 학생은 “여자는 애 낳는 기계가 아니에요”라고 교사에게 말했다가 혼이 난다. 학교 복도에 붙어있던 포스트잇을 매일 그냥 지나치던 학생은 퀘스트 ‘나도 붙일까?’에서 ‘예’를 선택한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뉴 룰즈(New Rules)팀의 십대 에디터들이 제작한 영상의 내용이다. 이 영상의 제목은 ‘이상한 학교의 앨리스’. 사진 출처 - 하자센터X닷페이스 미디어 캠프 <뉴-뉴놈>에 참가한 뉴 룰스(New Rules)팀의 십대 에디터들이 제작한 영상 <이상한 학교의 앨리스>  게임 속 이상한 학교보다 현실의 학교는 더 심각하다.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는 ‘스쿨미투’가 이를 증명한다. 얼마 전 서울 노원구 한 여고의 미투로 징계를 받은 교사는 무려 18명이었다. 이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안겨주기도 했지만 스쿨미투의 힘과 학생들의 의지를 보여주었다. 스쿨미투는 단지 피해 사실을 폭로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해당 여고 졸업생들이 ‘OO여고 성폭력 뿌리뽑기 위원회’를 조직했던 것처럼, ‘성폭력을 뿌리 뽑는 것’이 스쿨미투 운동에 참여하는 학생들의 의지다. 최근의 스쿨미투 운동은 트위터를 중심으로 학생들이 주도하고 있다. 학생들이 직접 운영하는 지역별, 학교별 스쿨미투 계정을 통해 학교 안에서 일어나는 성차별, 성희롱, 성추행 등이 공론화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 대해 교사들은 난색을 표한다. 스쿨미투 때문에 ‘교육적 신념을 지킬 수 없으며 무기력해진다’는 것이다. 요즘 아이들은 일찍부터 성교육을 받아와서 자신의 동의 없는 신체 접촉에 불편한 감정을 느끼면 그것을 표현하거나 신고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다고 말한다. 교사들은 단지 그 동안 해오던 방식대로 학생과 소통하겠다는 것일 뿐인데, 예민하고 자기주장이 강한 학생들이 교사의 의도를 왜곡하고 오해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과도한 교육열로 마음의 여유가 없어진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일부 교사들의 일탈행위를 일반화한다고도 말한다. 더 나아가 교사 불신이 확산되어 교권이 추락한다고 걱정한다. 나는 교사들의 이러한 태도를 ‘남탓’이라고 말하고 싶다.  정말 요즘 아이들이 예민한 걸까? 그래서 교사의 언행에 대해서 성차별 혹은 성희롱이라고 쉽게 문제제기 하는 것일까? 현재 미투를 공론화한 학생들이 학교에서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 안다면 그런 생각을 할 수 없다. 학교에서는 미투 제보자를 색출하고, 트위터 계정 삭제를 종용하며, 학생들의 입을 단속하고 있다. ‘양쪽 말을 들어봐야 된다’, ‘문제가 생기면 책임져야 한다’, ‘부모님을 부르겠다’는 식의 회유성 협박도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미투 제보자는 예민하고, 자존감이 낮고, 학교에 적응을 못 하는 학생이라는 ‘프레임’을 만들어 씌우고 있다. 경향신문이 인터뷰한 한 학생에 따르면 교사가 수업시간에 ‘이런 미투 운동을 일으키는 사람은 심적으로 약하거나 자존감이 낮은 친구들이며, 사소한 행동을 오해한 것’이라 말했다고 한다. 미투를 제보하거나 지지한 학생들은 최근 사회적 낙인이 된 ‘메갈’로 찍히기도 한다. 일부 교사와 학생들은 ‘미투’의 의미를 전유하여 폄하와 조롱의 언어로 사용한다.  ‘스쿨미투’는 교권을 추락시킬까? 일부 교사의 일탈행위가 전체 교사의 교육 활동을 소극적으로 만들고 교사에 대한 불신을 키울까? 교권은 교사의 직무에 대한 권위이지 학생을 찍소리 못하게 하는 권력이 아니다. 교사가 학생과의 소통 방식에 대한 문제 제기 앞에서 학생 탓을 먼저 할 수 있는 것은 ‘교권’이 아니라 ‘권력’이다. 스쿨미투는 교사가 학생에 대해 가지는 ‘위력’의 문제이다. 스쿨미투는 우리 사회에서 더 약자인 ‘청소년’, ‘학생’의 말하기이기에 반격에 더 취약하다. 최근 어떤 학교 교사들이 미투 포스트잇을 떼어 오는 학생은 벌점을 깎아준다고 하여 포스트잇을 붙이려는 학생과 떼려는 학생 사이에 몸싸움이 일어났다. 이것이 교사가 학생에 가지는 위력이다. 교사는 위력을 이용해 학생 간의 갈등을 부추겼다. 정말 단지 ‘일부 교사’의 문제라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그들의 편을 들지 말고 학생들의 편을 드는 것이 상식적이다. 교사가 학생들의 고통에 귀 기울이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진정한 ‘교권’이다.  스쿨미투는 요즘 학생과 옛날 교사의 세대 차이 문제가 아니다. 세대 간의 문화가 달라서 서로 이해하지 못하기에 생기는 문제가 아니다. 학생들은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여성 혐오 문화를 더 이상 견딜 수 없고, 그 고리를 끊어내겠다는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공식적인 문제 해결 루트가 제대로 작동했다면 누가 그런 위험을 감수하며 미투를 말하겠는가. 우리 사회가 지금까지 미투에 대해 취한 태도는 미투의 불씨를 꺼뜨리는 것이었지 키우는 것이 전혀 아니었다. 그럼에도 말하려는 학생들을 의심의 눈으로 먼저 보는 교사들이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 교사들은 자신의 말과 행동, 그리고 침묵과 방관이 우리 사회의 불평등을 강화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를 성찰해야 한다. 지금까지 맞다고 믿어왔던 것을 부정하는 과정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적어도 교사라면 학생 탓은 하지 말자.  박선영: 초등학교 교사 5년차. 페미니스트가 된 후 이전의 삶이 모두 흑역사가 되어 버렸습니다. 삶을 다시 쓰는 중.
2018-09-28 | hrights | 조회: 209 | 추천: 14
최우식/ 회원 칼럼니스트  어릴 적 어머니는 자장가로 ‘섬 집 아기’라는 동요를 불러주셨다. 내게 이 노래는 즉효 약이었는데 노래가 감미로워서는 아니었다. 사실 그 반대였다. 공포였다. 책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이상교 글, 김재홍 그림. 사진 출처 - 알라딘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 아기는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노래에 /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아기는 잠을 곤히 / 자고 있지만  갈매기 울음소리 / 맘이 설레어  다 못 찬 굴 바구니 / 머리에 이고  엄마는 모랫길을 / 달려옵니다.  어떻게 이 노래가 자장가가 될 수 있나. 노래는 어머니의 부재를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가사로 어머니의 부재를 느꼈고 가사로 어머니의 존재를 확인했다. 그제서야 나는 묘한 안도감을 느꼈고 잠을 청했다.  며칠 전, 온 가족이 함께 잠을 잤다. 열대야가 원인이었다. 도저히 에어컨이 없이는 잠을 청할 수 없었다. 어머니와 같은 천장을 바라보니 까마득한 옛날 일이 생각났다. 나는 어머니에게 대뜸 물었다. 어떻게 그런 노래를 자장가로 불러 줄 수 있느냐고. 무서워 죽는 줄 알았다고 했다. 어머니는 크게 웃으셨다. 그러고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추억의 자장가를 다시 부르셨다.  우리에게 타임머신은 없지만 그렇다고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건 아니다. 어머니가 자장가를 불러 주시는 순간 나는 과거로 돌아갔다. 노래는 여전히 나를 외롭게 했고 또 안도하게 했는데 그때와 달라진 건 어머니의 주름살뿐이었다. 그것이 나를 더 슬프게 했다. 나는 애써 눈물을 감췄고 너무 늦지 않게 다시 이 순간이 주어진 것에 감사했다. 폭염이 준 선물이었다.  추석이 한 주 앞으로 다가왔다. 추석의 유래에는 이런 설이 있다고 한다. 고대 사회에서는 밤이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보름달이 뜰 때면 축제를 벌였다고 한다. 8월 15일(음력)은 일 년 중 가장 큰 만월을 이루는 날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날을 큰 명절로 여기게 됐다는 이야기이다.  시대가 많이 흘렀다. 추석이라고 집밖으로 나가 축제를 즐기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시대가 달라졌다고 공포마저 사라졌을까. 어머니의 노래를 이십 년 만에 들으면서 나는 어머니의 부재가 무서웠다. 이제 어머니의 부재는 언젠가는 마주하게 될, 피할 수 없는 확실함으로 내게 다가온다.  우리나라는 가구 가운데 ‘1인 가구’의 비중이 가장 높다고 한다. 2045년이 되면 3명 중 1명은 1인 가구로 살아갈 것이라는 통계도 나왔다. 이제는 누군가와 같은 천장을 바라보면서 잠들 기회도 점점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그런다고 우리의 공포가 사라질까.  이번 추석에 모두 어린 시절의 기억을 한 번 떠올려보는 건 어떨까. 이유도 없이 무서워 부모님을 찾아가 같이 자자고 말했던 경험 말이다. 꼭 부모님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오랫동안 같이 잠을 자지 않은 누구라도 좋을 테다. 나이가 들어 남사스런 일일지는 모르나, 혹시 아는가. 어릴 적 그랬던 것처럼, 설명되지 않는 안도감에 단잠에 들지도 모르는 일이다. 최우식 : 사람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피디 지망생
2018-09-19 | hrights | 조회: 147 | 추천: 8
김현진/ 회원 칼럼니스트  가족의 이야기는 참 많다. 그 내용은 따뜻하며 결말은 코끝을 찡하게 한다. 그런데 나는 가족에 대한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마음이 불편하다. 왜냐하면 가족 구성원 어느 한 명의 희생이 아름답게 그려지거나, 말썽만 피우다가 집 나간 자식이 돌아와 가족이 다시 행복하게 살게 됐다는 이야기가 대다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야기에 등장하는 가족은 ‘정상 가족’이어야 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어느 가족]은 비정상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다. 가족의 이야기 외에도 복지 사각지대, 가정 폭력 문제, 노령화 문제 등등 우리 사회의 다양한 것들을 비정상 가족을 통해 보여준다. 감독은 비정상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가족이란 무엇인가?’를 관객에게 묻고 있다.  우리는 가족이 ‘혈연’에 의한 관계로 구성됐을 경우에만 정당성을 부여한다. 그런데 혈연에 의해 맺어진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는 ‘친권’이라는 희한한 권리가 있고, 그 친권은 자녀를 가난과 폭력 속에 가두기도 한다. 알코올 중독에, 가족을 늘 두들겨 패는 아버지라도 그가 친권자라면 미성년 자녀는 친권자와 살 수밖에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미성년 자녀가 원하지 않아도 그렇다. 이런 현상은 아버지 혹은 어머니가 어떠한 ‘개인’인지와 상관없이 ‘그래도 아버지인데 참고 살아야 하지 않겠니?’로 합리화되었다.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가족은 항상 즐거운 일을 함께해야 하고, 여행도 함께 다녀야 하며, 맛있는 음식도 함께 먹어야 한다. 가끔 가족에게 불편한 마음이 있어도 가족이니까, 그냥 참는다.  가족이란 무엇일까? 사회를 구성하는 최소한의 단위? 혈연관계로 이루어진 최소한의 사회? 혈연관계라는 것은 또 무엇인가? ‘혈연’이라는 말만큼 추상적인 말이 있을까? 피가 섞인 구성원으로만 가족은 이루어지는 것일까? 이미 여기서 정상과 비정상 가족이 구분되고 차별이 시작되지 않는가?  비정상 가족인 어느 가족도, 가족으로 산다. 하지만 [어느 가족]에는 누구 하나 온전한 개인이 없다. 할머니를 비롯해 할머니의 연금에 빌붙어 사는 성인 남녀, 두 손을 딱딱 맞대다가 슬그머니 물건을 훔치는 아이. 4번 손님에게 유사 성행위를 하며 돈을 버는 소녀. 겉으로는 더 없이 행복해 보이는 가족에게, 추운 겨울에 쫓겨나 있다가 비정상 가족의 가족이 된 쥬리.  유사 성행위를 정기적으로 하러 오는, 누군가의 가족일지 모르는 4번 손님은 어느 날 소녀에게 옵션으로 무릎베개를 해달라고 요청한다. 소녀는 주절주절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4번 손님은 가만히 누워 소리 없이, 운.다. 가족과 터놓고 하면 좋을 일들을 돈을 내고, 하고 있는 것이다.  할머니에게 가족은 ‘괜한 기대를 하게 되’는 대상이다. 그래서 자신에게 딱 달라붙어 있는 피 한 방울 안 섞인 비정상 가족에게 괜한 기대는 처음부터 접고, 그저 함께 있을 때 느끼는 온기로 사는지 모른다. 혈연관계는 아니지만, 온기는 느낄 수 있는 비정상 가족.  혈연보다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쩌면 마음의 복지가 아닐까 한다.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는 복지가 너무나 당연한 것인 만큼, 의식주를 해결한 개인들이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어갈 수 있는 마음의 복지도 중요하다. 이는 어디에서 올까?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여러 가지 이유로, 가장 원활하고 따뜻한 관계를 맺어야 하는 가족이 그렇지 못할 때가 있다. 이건 아마도 가족을 한 덩어리로만 보는 우리 사회의 습관 때문일 것이다. 가족을 이루는 개인들이 자기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고, 가족에 묻히니 가족이 건강할 리 있겠는가? 아무리 혈연관계라도 말이다. [어느 가족]은 위태로운 개인들이 모여 만든 비정상 가족을 보여주며, ‘도대체 가족이 뭐야?’라고 묻고 있다. 부모에게 늘 매를 맞으며 추운 겨울에 복도에 쫓겨 나있던 쥬리가 왜 그 움막 같은 집과 가족, 늘 물건을 훔치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오빠를 그리워했는지. 다섯 살 여자아이의 최소한의 존엄성도 지켜주지 못한 정상가족은 그저 덧없다.  영화는 가족은 모든 것을 함께해야 해, 라는 말에 이의를 제기한다. 가족은 따로 또 같이 있을 수 있는 가장 편안한 구성원이어야 한다. 그 누구도 다른 가족 구성원에게 자신의 욕망을 투여할 수 없다. 나의 삶이지, 내 딸, 내 아들의 삶이 아니다. ‘나’ 없이 무슨 엄마, 아빠, 딸, 아들이 될 수 있을까? 엄마, 아빠, 딸, 아들은 역할일 뿐인데.  우리 가족은 이번 여름에 모두 흩어져 있었다. 이제 그 시간이 끝났다. 솔직히 아쉽다. 엄마가 아닌 나로서 자유롭게 지내는 시간들이 늘 가능한 것이 아니기에 말이다. 그 시간은 내게 재충전의 시간이었고, 또 영화 [어느 가족]을 몰입해서 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각자 자신의 자리에서 즐겁게 지낸 이번 여름, 다시 모인 우리 가족은 삼겹살을 구워 먹으며 자기만의 얘기를 나누는 시간을 보냈다. 모든 것을 함께 하지 않았어도,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지 못했어도 다시 모인 우리는 가족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나’로 살다가 가족으로 결합하고 또 자기 자리로 돌아가 ‘나’로 살기를 반복하는 가족이다. 그렇게 가족으로 산다. 김현진 : 18년 간 국어교사로 살다가 더 많은 사람들과 행복해지고 싶어서 직업을 바꾼 철들기 싫은 어른
2018-09-11 | hrights | 조회: 77 | 추천: 2
조소연/ 회원 칼럼니스트  몸은 언어다. 사람의 몸은 그 사람의 심리 상태에 대해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달갑지 않은 사람이나 사건이 있을 때, 아무리 감정을 숨기려 해도 행동을 통해 그 심리가 드러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눈을 비비거나, 몸을 기울여 약간 거리를 두는 것, 무릎에 지갑 같은 물건을 올려놓는 것, 출입구 가장 가까운 곳으로 다리를 돌리는 것, 모두 상대방을 회피하고자 하는 심리가 반영된 몸의 언어다.  그렇다면 악수는 어떨까? 악수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흔하게 쓰이는 인사의 제스처이다. 직장에서, 스포츠 경기에서, 여러 만남의 자리에서 서로에게 악수로 예의를 표한다. 서로 손을 마주잡는 이 동작은, 먼 과거로 올라가 보면 손에 무기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며 서로 평화롭게 지내자는 우호적인 표시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현대사회에서 악수는 더 이상 평화만을 상징하지는 않는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상대방의 손을 세게 잡거나 팔꿈치를 툭툭 치는 등 악수로 상대방을 제압한다는 느낌을 주며 우월감을 과시한다. 이렇게 악수를 그 본래 의미와 달리 상대와의 ‘힘겨루기’의 기회로 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악수를 통해 겸손함을 보여주는 이들도 있다. 동양 문화권에서는 악수할 때 본인을 최대한 낮춘다. 한 손도 모자라 두 손으로 상대방의 손을 감싸고, 때로는 허리를 숙이며 최대한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한다는 뜻을 전한다.    반면에 본인을 낮추는 자세를 취하지 않고도 예의를 갖추며 당당하게 악수를 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페이스북의 최고 운영책임자(COO)인 셰릴 샌드버그가 각종 공식적인 자리에서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면서도 당당하게 악수를 하는 장면은 정말 인상 깊다. 보디랭귀지에서 본인에 대한 자신감과 상대에 대한 배려가 동시에 느껴진다. 그런데 미디어를 통해 셰릴 샌드버그와 같은 미국 여성들의 악수하는 모습을 접할 때마다 멋지다는 생각도 들지만, 한국인들에겐 조금은 낯선 모습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사진 출처 - 나무위키 ‘악수’  한국에선 여성들이 악수를 하는 광경을 쉽게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미디어를 통해 보이는 모습은 물론 내 경험에 비추어 보아도 그렇다. 예를 들어 얼마 전 할아버지의 장례식을 떠올려보면, 조문객들은 백이면 백, 내 옆에 서있던 오빠에게는 악수를 건네고 나에게는 간단한 목례만 했다. 오빠의 결혼식장, 교수님과의 식사자리에서도 비슷한 패턴을 발견할 수 있었다. 특히 중년의 남성들이 젊은 여성에게 악수를 청하는 것에 대해 조심스러워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오히려 또 반대로 여성에게 당당히 악수를 건넸다가 그 쪽에서 더 당황해해서 곤란했던 경험을 했다는 남성들의 이야기도 많이 들려온다.  여성과, 또는 여성이 악수하기를 꺼려하는 이 현상에는 아무래도 우리나라의 특수한 역사의 영향이 크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내내 여성들은 버선코도 내보이면 안되고 발목을 드러내서도 안됐다. 양반가 여성은 얼굴을 가리고 눈만 내놓는 장옷을 입고 다녔다. 부르카를 쓰는 이슬람과 별반 다를 바 없이 여성들이 억압받는 문화가 일제 강점기를 거쳐 전쟁통에서도, 그리고 20세기 후반까지 이어졌다. 여성과의 신체접촉은 물론이고 몸을 드러내는 것 자체를 죄악시하던 역사와 문화의 영향으로 아직까지도 한국에서는 젊은 여성의 손을 잡는 것을 꺼려하는 분위기가 있다.  물론 과거 서양 문화권에서도 남성과 여성 간의 인사법의 차이가 존재했다. 20세기까지는 여성에겐 악수를 청하기보다 손가락에 입을 맞추거나 가벼운 포옹 등 다른 가벼운 인사를 하는 문화가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다양한 여성 인권 운동의 영향으로 그런 인사법은 현재 거의 사라졌다. 사적인 자리에서는 모르더라도, 적어도 직장과 학교와 같은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 악수를 한다. 가볍고도 경쾌하게.  한국에서도 최근 들어 여성인권운동이 활발해지고 있다. 이런 사회적 변화에 힘입어 이제는 여성도 당당하게 악수를 했으면 좋겠다. 남성도 더 이상 눈치보지 않고 여성에게 당당하게 악수를 건네면 좋겠다. 남녀가 유별하던 때로부터 긴 시간이 흘러 이제 한국여성은 더 이상 긴치마를 입지 않고 장옷을 입지도 않는데, 인사예절이라고 바뀌지 못하라는 법은 없다.  악수는 단순한 인사를 넘어서 ‘관계의 시작’이다. 관계의 시작점인 악수에서부터 벌써 성별에 따른 차이가 있다면, 그 후 지속될 관계에서 이미 성평등은 기대하기 어렵다. 행동은 말보다 더 크게 말한다. 진급에서의 유리천장, 연봉격차, 직장성희롱 등 해결해야할 문제들은 끝도 없지만, 가장 쉬운 것부터 시작해보면 어떨까. 여권신장. 당당한 악수로 남성과 동등한 파트너로 인정받는데서 시작해보자. 조소연: 프로불편러 대학원생. 저를 불편하게 만드는 일들에 대해 나누고 싶습니다. 나누다 보면 불편할 일들이 점점 사라질 거라고 믿습니다.
2018-09-04 | hrights | 조회: 101 | 추천: 1
주윤아/ 회원 칼럼니스트 # 프롤로그  얼마 전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일정 중간에 우리 팀의 현지 가이드가 다른 한국팀을 인솔하는 가이드 친구를 만나 한참 수다를 떨고 돌아왔다. 무슨 재미난 얘기를 나눴는지 물으니 그들의 표정은 희극으로 보였으나 실제 대화 내용은 비극이었다. 한국 남성이 그 가이드의 결혼 여부를 집요하게 묻고 결국 싱글이라는 대답을 듣고 나서부터는 본격적으로 추근대서 힘들다는 내용이었다. 너무 부끄럽고 미안해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속담이 절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성희롱이 문제시되는 것은 당연하거니와 여기서 지나치지 말아야 할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한국남성이 현지인 가이드에게 결혼 여부를 질문하는 대목이다. 대개의 한국인들은 안면만 트면 상대에게 궁금해서 죽을 것 같은 몇 가지 질문들이 있다. 나이가 몇 살인지, 결혼했는지 혹은 왜 안하고 있는지, 했다면 아이가 몇 명이며 몇 살인지, 둘째는 왜 안 낳는지…. 글을 쓰다 보니 외둥이는 외로우니 동생이 필요하다며 민간 출산장려홍보대사 역할을 자발적으로 수행하던 나의 흑역사가 떠올라 지금에서야 외둥이 부모들에게 사과의 말을 전한다.  우리는 왜 개인정보와 사생활이 궁금한 것일까? 한국인이 유독 궁금증이 많은 DNA를 보유한 것이 아니라면 타인의 사생활 정보에 집착하는 데에는 단순 호기심이나 사실 확인 이면에 다른 사회문화적 배경이 있을 것이다.  일단 나이를 궁금해 하는 것은 연령(차별)주의 때문이다. 관계를 형성하는 초기 단계에 상대가 나의 위인지 아래인지를 파악하여 우선 나이 서열부터 정립하려는 것이다. 연장자에게는 조용히 입 다물고 순응할 예의를 갖출 준비를 할 것이고, 나보다 어린 상대에겐 하대할 위엄을 장착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동갑을 만나게 되면 근거 없는 친밀감과 추상적인 동질감이 자동으로 형성되며, 동시에 얼굴 나이(동안)를 비교하거나 사회적 성취를 가늠하는 경쟁심리가 작동하기도 한다. 신분제가 폐지된 지 100여년이 지난 대한민국 사회에 아직도 무수한 서열과 위계가 존재하지만 연령주의는 성별과 더불어 가장 강력한 차별의 요소다.  두 번째로 결혼 여부이다. 대개는 단지 사실 확인에 그치지 않고, 비혼은 비혼인대로, 기혼은 기혼인대로 그 다음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마치 정해진 대본이라도 사전에 공유한 것처럼 누구나 똑같은 질문들을 한다. 훨씬 더 이상한 것은 결혼을 왜 했는지, 아이는 왜 낳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기혼과 출산의 삶이 ‘정상’이라는 고정관념과 비혼의 삶을 개인의 선택으로 보지 않고 수동적 삶의 결과로 바라보는 비합리적이고 차별적인 통념 때문일 것이다. 특히 비혼 여성에게는 남모를 비운의 사연을 가공하거나 혼자 살 수밖에 없는 독립적 투사의 이미지를 덧씌우기도 한다. 설상가상으로 여자라면 결혼과 출산은 경험해 봐야 한다는 설교를 하며, 지금은 몰라도 늙어서 외로움에 후회할거라며 남의 노후까지 저주해주는 그야말로 대책 없는 사람들이다. 난해한 것은, 이들은 기혼자에게도 자동으로 기혼의 삶에 대한 절망과 넋두리를 공유할 정반대의 대사들도 차고 넘치게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혼의 삶은 정상의 범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도(2018년의 현행 교과서나 성교육 보급 교재들에는 결혼과 출산이 인간의 발달과업처럼 표현되어 있음), 반면 기혼의 삶을 선택한 여성은 결혼과 동시에 성적 매력은 제거되고, 출산하면 공동체 사회에 피해를 주는 기괴한 존재(아줌마, 맘충, 김 여사 등)가 된다. 직장에서도 가사와 돌봄 노동에 치우쳐 공적 업무를 게을리하는 걸림돌로 전락한다. 또한 비혼의 취업준비 여성들에게도 ‘취집’이라도 성공하라며 다양한 언어폭력(김치녀, 된장녀 등)을 무시로 퍼부으며 이들을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자 독립적 인격체로 인정하지 않는다.  우리가 민주적이고 성평등한 공간으로 추측하는 학교도 별반 다르지 않다. 비혼 또는 비출산 여성에게 동료교사나 학생들의 보호자들이 ‘자녀를 낳고 길러보지 않았으니 부모 심정을 알기나 하겠어?’, ‘결혼을 안 해봤으니 가정생활의 희로애락도 모를 것이고 자녀가 없으니 학생들 마음 헤아리는 것도 부족할 거야’라는 언어폭력(그들은 이를 ‘조언’이라고 한다)을 앞뒤에서 하고 있다. 이 또한 자녀에 대한 가사와 돌봄 노동을 여성이 전담해야 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사고다. 흔히 출산여성이 취업을 준비하거나 직장의 저녁 회식에 참석하면 석연찮은 표정으로 “애는 어쩌고?”라고 물으며, 이 상황에서 그녀의 돌봄 노동을 대체할 대상 역시 남편보다는 친정엄마나 시어머니를 자동으로 연상하는 것 또한 성역할고정관념을 보여주는 일상들이다. 하지만 나 역시도 학생에 대한 상담이 필요할 때 으레 어머니에게 요청을 하지 아버지에게 먼저 연락할 생각을 하지 못한다(ㅠ.ㅠ).  결국 우리가 타인에게 미치도록 궁금해 하는 사적 질문들은 2018년 대한민국이 연령과 성차별이 만연한 차별공화국임을 입증하는 것이니, 앞으로 ‘결혼하셨어요?’라는 말은 제발 묻지도 듣지도 않기를 바랄 뿐이다.  '가족을 만드는 것이 핏줄인지, 함께 보낸 시간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다양한 가족의 형태를 진솔하게 응시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어느 가족’ 포스터 사진 출처 - 네이버 영화 #에필로그  여행 말미에 우리 팀의 현지 가이드는 여행사 대표에게 사진을 보내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한국의 남성여행객 팀이 현지 가이드 사진을 보고 가이드를 결정하겠다고 했단다. 우리 일행은 동시에 외쳤다. “Oh My God~!” 주윤아: 성평등 민주주의를 꿈꾸는 교육노동자
2018-08-28 | hrights | 조회: 512 | 추천: 17
주만/ 회원 칼럼니스트  세계인의 스포츠 축제, 월드컵이 막을 올렸던 지난 6월의 이야기다.  우리가 독일과 경기중이던 시각, 멕시코와 스웨덴의 경기도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다. 멕시코는 우리와는 달리 좋지 않은 경기력을 보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는데, 대한민국이 독일에 승리하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16강 진출이 확정되자, 멕시코인들은 한국 대사관 앞에서 “멕시코와 한국은 하나다!”를 외치며 환호했다. 축구가 거의 대국민 종교와 같은 멕시코이기에 가능한 퍼포먼스였다. 비록 몇몇 멕시코인들이 고마움의 표현이라며 SNS에서 눈을 찢는 제스처를 취하기도 했지만 비하하려는 의도가 아니었고, 동양인 차별이 공공연한 남미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감안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사실 멕시코는, 6회 연속 16강에 진출하고도 8강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16강 징크스’에 빠져 있었다. 그런 멕시코가 이번에는 징크스를 깰 수 있을지 축구 팬들의 관심이 모아졌다. 하지만 16강전 상대는 브라질, 결국 멕시코는 8강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우리에게 보내줬던 호의 때문에 멕시코를 응원했던 나는, 마치 우리나라가 떨어진 것처럼 아쉬워했다. 그리고 징크스를 깨기 위한 멕시코 선수들의 투혼에 존경과 위로의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사진 출처 - 뉴스앤미디어   그때, 텔레비전에서 노래가 나왔다.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이제 나는 돌아서겠소.” 김광진의 ‘편지’였다.  그리고 경기에 대한 한 줄 평이 나왔다. ‘축구는 실력이 징크스다.’  이긴 팀에게는 찬사를, 패배한 팀에게는 위로를 보내는 것이 스포츠맨십이다. 그런데 그 지상파 방송사는 오히려 패배한 멕시코를 비아냥거리며 조롱했다. 지금 내가 월드컵을 공식적으로 중계하는 방송을 보고 있는 게 맞나 싶었다.  더군다나 ‘징크스’는 불길함을 의미하는 부정적인 표현이다. 어떻게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한 팀에게 ‘너네 실력이 곧 징크스야’라는 잔인한 말을 던질 수 있는 것일까. 심지어 해설자는 멕시코 선수들이 단체로 염색한 것에 대해 “염색이 너무 일렀다.”며 비수를 꽂았다. 그 염색의 의미는 투지였다.  방송을 본 사람들은 재치 있는 표현으로 멕시코를 ‘팩트 폭행’ 했다며 즐거워했다. 반응들 중, 우리가 16강에 올려줘 봐야 어차피 떨어질 팀이었다는 댓글은 나를 참담하게 만들었다.  월드컵은 국가 간의 갈등을 조장하는 전쟁터가 아니다. 오히려 평화를 도모하는 스포츠 축제다. 하지만 우리는, 아니 적어도 그 지상파 방송국 작가는 경쟁에 눈이 멀어 평화를 도모해야 하는 순간을 분별하지 못했다. 경쟁에 너무나 익숙해 다른 이를 인정하고 응원하는 것에 인색한 우리 사회의 특성이 그대로 반영된 듯 했다. 멕시코 때문에 우리나라가 떨어졌다며 멕시코를 아니꼽게 생각했던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으니 말이다.  우리 사회는 역설적이다. 매 순간 경쟁을 요구하지만, 상대를 대놓고 누르거나 마음껏 밟아 버릴 수 없게 한다. 그 덕에 발전한 ‘비꼬기식 언어유희’가 마냥 재미있게 들리지는 않는 이 순간. 어떻게든 상대를 끌어내려야 하는 무한경쟁보다, 서로 인정하고 응원하는 생태계가 필요함을 절실하게 느꼈다. 비록 짧은 인생 경험이지만, 그것이 사람을 조금 더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해준다고 믿기에.  멕시코가 매번 8강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이유가 ‘실력 그 자체가 징크스’ 이기 때문이라는 매몰찬 말을 던진 그에게 말하고 싶다.  우리가 경제성장과 과학기술의 발전에도 여전히 살아가기 힘든 이유는 인정과 배려가 실종된 ‘인성 그 자체가 징크스’이기 때문이라고. 주만: 서로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고 싶은 작가 지망생
2018-08-21 | hrights | 조회: 120 | 추천: 9
박선영/ 회원 칼럼니스트  <감기 걸린 물고기>라는 동화책에는 배고픈 아귀와 알록달록하고 조그마한 물고기 떼가 등장한다. 아귀는 물고기 떼를 잡아먹고 싶어 하지만, 물고기 떼는 쉬운 상대가 아니다. 똘똘 뭉쳐서 아귀보다도 훨씬 커다란 무리로 헤엄쳐 다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물고기들을 잡아먹을 수 있을까 궁리하던 아귀는 물풀 사이에 숨어 조그만 목소리로 소문을 낸다. “얘들아, 빨간 물고기가 감기에 걸렸대!” 물고기 떼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며 들은 척도 하지 않지만 아귀는 포기하지 않는다. 빨간 물고기는 열이 나서 빨개진 거라고 그럴듯한 설명까지 덧붙인다. 소문은 조심스럽게 무리 속을 파고든다. 그 뒤로는 물고기들의 입을 통해 소문이 부풀려지고, 확신을 불러오는 단계까지 이른다. 결국 무리에서 쫓겨난 빨간 물고기들은 입을 쩍 벌리고 기다리던 아귀에 잡아먹힌다. 빨간 물고기를 먹어치운 아귀는 또 다시 소문을 흘린다. “얘들아, 노란 물고기도 감기에 걸렸대. 그새 옮았다는 구나!” 이제 물고기 떼는 아무렇지도 않게 서로를 의심한다. 다른 색깔의 물고기들도 차례로 쫓겨난다.  성소수자는 아프다. 그들은 우리 사회의 ‘빨간 물고기’다. 반동성애 진영은 동성애가 ‘질병’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전염’되기도 하고, ‘치료’될 수도 있다고 한다. 이런 편견과 배제는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김승섭 고려대 보건정책관리학부 교수팀은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의 ‘성소수자 자살예방프로젝트 마음연결’과 함께 진행한 연구(만 19세 이상 한국의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2,341명 대상)에서 성소수자가 비성소수자에 비해 자살을 생각하고 시도한 비율이 10배에 가까운 것으로 집계됐다. 성소수자의 우울증상 역시, 비성소수자에 비해 약 다섯 배나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주류 문화 구성원들로부터 부정적인 평가를 받을 것이란 두려움도 성소수자의 자살 충동 증가로 이어졌다. ‘고용주는 성소수자를 뽑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소수자들을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등 일반 사회에서 성소수자들을 배제할 것이라고 예상한 경우에는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자살 생각을 두 배 가까이 더 많이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김승섭 교수는 “결국 동성애자여서 아픈 게 아니라, 혐오하고 차별하는 사회 때문에 아픈 것”이라고 말했다.  학교에도 아귀가 있다. 성소수자 청소년의 자살률은 비성소수자 청소년의 자살률보다 5배나 높다. 2014년 국가인권위원회 실태조사를 보면 학교 내 성소수자 응답자의 80%가 교사로부터 혐오표현을 들었고, 54.4%는 다른 학생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경험은 스트레스, 학업의욕 저하, 우울증으로 이어진다. 이런 현실에서 학교와 교사는 무엇을 했을까?  ‘동성애반대 교사연합’이라는 이름의 교사들은 세계 에이즈의 날(12월 1일)에 동성애가 에이즈의 원인이라는 내용의 계기교육(공식적인 교육과정과 상관없이 사회적인 이슈나 사건을 가르치는 수업)을 했다. 동성끼리의 성관계는 불결한 성관계이기 때문에 동성애로부터 학생들을 지켜야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그들은 한국에서 남성 동성애자의 감염률이 높다는 것을 근거로 든다. 그러나 HIV 감염 역학은 국가마다 다르다. 바이러스가 성별이나 정체성을 가려서 감염시키지는 않기 때문에 남성 동성애자가 감염의 원인이라는 것은 맞지 않는다. UNAIDS(유엔에이즈)는 ‘누구도 빠짐없이 인권과 성평등이 보장되는 사회적 조건이 되어야 에이즈도 예방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에이즈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취지로 만들어진 세계 에이즈의 날, 어느 학교의 학생들은 ‘감기 걸린 물고기’에 대한 소문이 진실이라고 배웠다. 사진 출처 - 필자  지난 7월 14일 서울광장에서 19번째 서울퀴어문화축제가 열렸다. 내가 활동하는 전교조 여성위원회에서 처음으로 부스를 운영했다. 뜨거웠던 그 날, 참가자들은 뙤약볕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성소수자가 차별받지 않는 학교, 페미니스트 교사를 응원하는 글귀를 멋진 그림을 곁들여 써주었다. 참가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모습에 오히려 우리가 더 감동을 받았다. 동시에 부끄럽기도 했다. 1년에 한 번, 성소수자들은 세상에 자신을 드러낸다. ‘우리는 어디에나 있다’는 것, 존재로서 자신을 증명하는 것이 그들이 차별에 맞서는 방식이다. 축제 참가자들은 매년 늘어나 올해는 10만에 육박했다. 이 축제 시기 청소년 성소수자 위기지원센터 띵동과 인권교육을 위한 교사모임 샘은 청소년 성소수자를 만나는 교사들을 위한 가이드북 <학교에서 무지개길 찾기>를 발간했다. 가이드북 소개를 하는 인터뷰에 교사들이 익명으로 참여했다. 기사에는 천 건이 넘는 악플이 달렸다. 몇몇 교사들이 노력하고 있지만, 이들의 노력은 그저 ‘용기’있는 행동정도로 치부되거나, ‘비난’의 대상이 되어 손가락질 당하기 일쑤다. 사진 출처 - 필자  성소수자여서 아픈 게 아니다. 사회의 낙인과 차별이 그들을 아프게 만든다. <감기 걸린 물고기>의 아귀는 물고기 떼들의 연대를 깨뜨리기 위해 혐오와 공포를 조장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두려움은 진실을 가렸고, 물고기 사회는 산산조각이 났다. 앞서 소개한 가이드북 <학교에서 무지개길 찾기>에서는 청소년 성소수자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당장 혐오를 멈춰 달라’고 했다. 이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학교는 누구를 위한 곳인가? 우리 사회가 아무리 아귀의 소문에 휘둘려 특정 집단을 배제시키고 있어도 학교는 모두에게 안전한 곳이어야 한다. 학교의 존재 이유는 어느 누군가가 아니라 ‘모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소수자가 ‘안전한’, ‘차별받지 않는’ 학교는 너무 소극적인 목표이다. 학교는 배움의 권리를 가진 모두에게 즐거운 배움터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색깔은 병이 아니고, 죄가 아니다. 일부 교사의 노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학교는 이제 아프지 않은 곳으로 바뀌어야 한다. 혐오에 휘둘리지 않는 곳으로. 아무도 아프지 않은 곳으로. 박선영: 초등학교 교사 5년차. 페미니스트가 된 후 이전의 삶이 모두 흑역사가 되어 버렸습니다. 삶을 다시 쓰는 중.
2018-08-06 | hrights | 조회: 254 | 추천: 14
최우식/ 회원 칼럼니스트  자원재활용법이 시행되었다. 법에 따르면 카페 매장은 물론 테라스에서도 플라스틱 일회용 컵 사용이 불가능하다. 오직 카페 밖으로 음료를 들고 나갈 때만 플라스틱 컵을 이용할 수 있다. 이를 위반하면 사업장에 5만 원에서 200만 원 상당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하지만 아직 법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자주 찾는 카페는 여전히 내게 묻지도 않고 플라스틱 컵에 음료를 준다. 이러면 안 된다고 따져 묻자니 괜한 참견인 것 같아서 얼마 전부터는 텀블러에 담아달라고 부탁드렸다. 이 문제에 유독 관심을 가지는 까닭은 내가 카페 아르바이트생이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 - 환경부  카페 아르바이트생은 입이 아프다. 물어볼 것이 너무 많다. 음료가 따뜻한 음료인지 시원한 음료인지, 휘핑크림을 올릴 것인지 말 것인지 물어봐야 한다. 할인 카드가 있는지, 적립이나 쿠폰을 찍어 갈 것인지도 확인해야 한다. 현금으로 계산하면 현금영수증도 잊으면 안 된다. 성질 급한 손님들은 이쯤 되면 슬슬 ‘비언어적인’ 방식으로 짜증을 내기 시작한다. 그런데 고지할 것이 하나가 더 늘어난 것이다.  ‘매장 안에서 드시면 머그잔이나 유리컵에 드셔야 해요. 법이 바뀌었거든요. 얼마 전에 재활용 문제가 대두되면서 그렇게 됐어요.’ 여기까지 말하면 열에 아홉은 넘어간다. 문제는 열에 하나다. ‘아니 얼마 전에 내가 다른 카페에서 마실 때는 일회용 컵에 마셨는데? 그런 법 있는 거 맞아요?’ 불신하는 눈초리로 바로 옆집 카페 이름을 대며 말한다. 이런 경우는 내가 설명을 해줘도 별 효과가 없다. 그렇다고 손님에게 법을 찾아보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얼마 전 한 손님은 주문을 멈추고 일행에게 가서 성토를 하더니 다시 돌아와서 주문을 했다.  그렇다고 손님의 무지를 탓할 수는 없다. 사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모든 카페가 동시에 법을 따랐으면 손님들의 혼선도 줄어들었을 것이다. 어떤 카페는 법을 지키고 어떤 카페는 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 문제다. 환경부는 정책 홍보에 실패했고 언론은 이를 충분히 보도하지 않았다.  플라스틱은 미세 플라스틱이 되어 미세 먼지처럼 우리의 생명과 행복을 위협한다. 시중에 유통되는 국내 생수 10개 제품을 분석한 결과 4개 제품에서 미세 플라스틱이 발견되었다. 바다에서는 미국, 중국, 일본에 비해 10배나 많은 미세 플라스틱이 검출되었다. 한국해양과학기술원은 일반 시장에서 유통되는 조개에서 미세 플라스틱이 검출되었다고 보고하기도 했다.  나노 크기의 미세먼지는 몸에서 제대로 걸러지지 않는다. 우리가 먹는 음식에는 이미 미세 플라스틱이 침투해 있고 식탁 위에 매일같이 오르고 있다. 전문가들은 플라스틱이 성장을 저해하는 원인이 되어 지적 장애나 자폐증을 초래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2016년 기준 우리나라의 1인당 플라스틱 사용량은 세계 1위이다. 세계는 플라스틱 사용량 감축을 위한 노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맥도날드와 스타벅스는 영국과 아일랜드의 모든 매장에서 플라스틱 빨대 사용을 중단하겠다고 밝혔다. 플라스틱 빨대는 종이 빨대로 대체된다. 또한 영국 스타벅스는 26일부터 일회용컵에 ‘5펜스’(74원) 정도의 부과금을 매기고 머그잔이나 텀블러를 사용하는 손님에게는 ‘25펜스’(370원)를 할인해주는 ‘라떼 부과금’을 도입한다고 밝혔다.  매장에서 일회용컵을 사용하지 못하게 한 법은 효과적이다. 나는 마감 시간에 일을 하기 때문에 매일 배출되는 쓰레기양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 매장에서 플라스틱 사용량은 4분의 1 수준으로 줄었다. 사진 출처 - 필자 사실 카페 아르바이트생들은 이 법을 싫어할 것이다. 플라스틱 컵은 계량도 쉽고 처리도 간단하다. 하지만 머그잔이나 유리컵은 일일이 설거지를 해야 하고 말려야 한다. 또한 부피도 크고 깨질까봐 신경을 더 쓰게 된다. 바쁠 때는 법도 해야 하고 설거지도 해야 하니 이중으로 일이 쌓인다. 그래도 괜찮다. 홀쭉해진 재활용봉투를 들 때는 왠지 모를 뿌듯한 마음이 든다.  이제 곧 8월이 다가온다. 환경부는 계도기간을 끝내고 과태료를 물릴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카페 사업자가 이 법을 잘 모르는 것 같다. 언론과 환경부의 홍보가 절실한 시점이다. 일반 시민에게도 나쁠 것 없다. 사실 유리컵이나 머그잔이 사진도 더 예쁘게 찍힌다. 문제는 카페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다. 법을 설명하는 일도 설거지도 모두 그들의 몫이니까. 하지만 법을 설명하는 일이라도 줄어든다면 그것도 큰 도움이 될 테다. 최우식 : 사람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피디 지망생
2018-07-31 | hrights | 조회: 284 | 추천: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