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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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는 언론계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이 멘토가 되어, 작성한 칼럼에 대한 글쓰기 지도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창용, 김치열, 이현종, 이희수, 정진이, 홍세화, 황은성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김도원(YTN),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이오성(시사인), 임아영 (경향신문), 장형우(서울신문), 조일준(한겨레)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김현진/ 회원 칼럼니스트  학교에서 한해의 시작은 3월이다. 그래서 새 학년의 개학은 3월 2일이고 교사나 학생들 대부분은 3월 1일 밤에 설레면서 또 긴장도 하면서 잠을 청한다. 학생들은 ‘어떤 친구 혹은 어떤 선생님을 새롭게 만날까?’를 걱정하면서, 교사들은 ‘어떤 학생, 어떤 동료교사를 만날까?’를 기대하면서 3월 1일 밤을 보낸다.  교사들은 새 학년을 맞이하기 위해 겨울 방학을 이용해 여러 가지 연수도 받는다, 행복하게 학급을 이끌어가는 법이나 학생 개개인의 성장을 잘 정리할 수 있는 평가방법에 대한 연수를 받기도 한다. 요즘이야 교사들이 이렇게 3월을 준비하지만 내가 초임교사였을 때 선배 교사들이 가장 많이 알려준 3월을 맞이하는 법은 ‘3월 내내 웃지 않기’와 ‘3월 첫날 수업에 들어갔을 때, 까불거나 개기는 놈은 보기 좋게 정리하기’였다. 정리하기는 좀 순화한 표현일 뿐이다. 3월에 저 두 가지를 못 하면 1년을 고생한다는 것이다. 순진한 나는 선배들 말을 믿고, 그대로 했다. 3월 내내 웃지 않았고, 수업시간에 까부는 놈은 앞으로 불러내서 다시는 그러지 못하도록 했다. 나는 그런 교사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부끄러운 일이다.  그런데 교사들이 이런 노하우를 공유하는 것을 탓할 수만은 없다. 교사가 만나는 학생 수는 도서벽지 학교를 제외하면 적지 않다. 나는 장학사로 전직하기 전에 중등 국어교사로 살았는데, 2017년 마지막으로 근무한 학교에서는 한 학급에 35명씩 있는 세 학급의 수업을 했다. 100명이 넘는 학생과 수업을 하고 또 그 학생들의 평가도 해야 하는 것이다. “1년간 100명을 만나는 것이 무엇이 힘드냐?”라고 학교 밖 사람들은 말하겠지만 그 100명과 온전히 인격적으로 만나려면 교사가 감당해야할 감정노동의 강도는 매우 세다. 학생은 100명이지만 그들이 갖고 있는 잠재력과 개성과 그리고 각각의 삶들이 모이면 세 개의 교실엔 100개의 우주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사들은 아주 편하거나 아주 고단한 방법 사이에서 고민한다. 물론, 고단한 길로 방향을 잡는 교사들이 더 많으니 걱정 마시길.  교사가 학생을 인격적으로 대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학생도 교사를 인격적으로 대해야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학교의 물리적 환경은 교사와 학생이 서로를 인격적으로 대하기엔 아직도 한계가 있다.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지만 여전히 차갑고 딱딱한 교실, 들어가기에 조금 망설여지는 교무실, 그리고 나 스스로의 존엄성을 확인하며 한 끼 밥을 먹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한 급식소, 위생상의 문제와 관리의 편리함으로 벗어나지 못하는 스테인리스 식판. 이 모든 것들이 아무렇지 않게 오랫동안 익숙한 것이지만, 학교에서의 익숙함은 어쩌면 교사와 학생을 인격적 만남을 방해하는 디테일한 악마였을지 모른다. 사진 출처 -  한겨레  학교 공간이 더 따뜻해지면 좋겠다. 직선을 곡선으로 회색은 봄빛으로, 급식소는 줄을 서서 흘리지 않고 먹어야 하는 곳이 아니라 충분한 시간 여유를 갖고 친구들과 재잘재잘 나누는 이야기 소리가 잘 들릴 만큼의 쾌적한 곳으로 바뀌면 좋겠다.  학교를 떠나 교육지원청 장학사로 생활한 지 17개월이 지났다. 그리고 두 번째로 맞이한 이번 3월, 교육청에서도 학교의 새 학년 시작을 돕기 위한 어마어마한 업무로 폭풍 같은 첫 주를 보내고 나니 학교의 3월은 학교 구성원 모두가 수고하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3월이 끝날 무렵엔 서로에게 이 시를 읽어주면 좋겠다. 수고했습니다 / 박 노 해 3월에는 수고했습니다 라고 말하자 풀꽃에게도 새싹에게도 이웃에게도 수고는 고통을 받아 안는 것 고통을 안고 새 힘을 선물받는 것 수고했습니다 겨울 속에서 새롭게 피어나느라 수고 많았습니다 힘겨움 속에서 새롭게 태어나느라   김현진 : 18년 간 국어교사로 살다가 더 많은 사람들과 행복해지고 싶어서 직업을 바꾼 철들기 싫은 어른
2019-03-20 | hrights | 조회: 379 | 추천: 4
임영훈/ 회원 칼럼니스트   3·1운동 100주년이 대대적인 기념행사와 함께 지나갔다. 백세까지 바라보시는, 가족 중 가장 장수하시는 외할머니께서는 내가 아는 사람 중 유일하게 일제시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분이다. 구순이 넘으셨고, 1929년생이시니 광복이 되던 1945년에는 만 16살이셨다.   최근 2-3년 사이로 동생들이 결혼하면서 집안에 처음으로 며느리라는 여자 사람이 생겼다. 명절 등 모일 일이 있을 때마다 만나지만, 며느리들과 소소한 대화를 나눌 만큼 가까워지긴 힘드니 할머니의 대화 상대가 전보다 늘어나지는 않았다.   작년인가 할머니께서 마루에 가족들이 있을 때 혼잣말하시듯 입을 여신 적이 있었다. “옛날에는 여자들이 정말 너무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그렇게 힘들게 종일 집안일, 애 키우며 살다 보면 40 정도에는완전히 폭삭 늙어서 말 그대로 할머니가 됐어...” 여럿이 있으니 애매했지만 아무래도 눈 앞에 있는 손주 며느리한테 하신 말씀인 것 같았다. 그런데 제수씨는 못 들었는지 다른 곳에 시선을 두고 원래 하던 일을 하며 반응이 없었다.   아마도 그런 말들이 요새 사람들에게는 무척 듣기 싫은 말이었을 것이다. 나도 오래전 친할아버지, 친할머니가 살아계실 때에는 아주 가끔 듣던 옛날 얘기도 현실과는 동떨어진 전래 동화 속의 타령들로 여겨졌다. 외할아버지는 내가 돌 때 돌아가셨으니, 품 안의 그 애기에게 뭐라고 하셨을지는 짐작만 할 뿐이다.   하여튼 그러고 보면 이해도 된다. 아버지, 어머니가 '옛날에는 말이지,' 이렇게 얘기만 꺼내도 '벌써 잔소리 듣겠구나'하는 생각에 귀가 무거워지는데 무려 두 세대 이전인 할머니, 그것도 평생 모르고 살던 시댁 할머니께서 옛날 얘기를 하시면 누가 듣고 싶겠나 싶다.   다만 어릴 때부터 출근하시는 어머니 대신 나와 동생들, 더하여 사촌들까지 도맡다시피 있는 정 없는 정 다 쏟아 부어 키우시고 심지어 몸이 많이 불편해지신 아직까지도 내리 사랑을 매일같이 보여주시는 할머니시기에 가끔씩 다른 사람들이 할머니의 사소한 말이라도 무심코 지나치는 느낌이면 마음이 아프다. 평생 고생만 하신 할머니께는 응당 공경과 보답이 당연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여전히 주말에 찾아 뵈면 나는 식탁 근처에 도와드리러 가도 쉬라고 하시면서 뭐라도 더 먹고 입게 하실 생각에 마음과 몸이 바쁘시기에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할머니는 고등학교까지 졸업하셨다. 그 옛날에 학교를 졸업한 사람 자체가 귀했을 것이고, 졸업 후에 시골 우체국에서 일하셨다고 한다. 그 때 우체국에서 당시 육군 장교셨던 할아버지의 눈에 띄어 혼사까지 이르게 되셨다고 한다. “너희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보시고는 마음에 드셨는지 저 처자가 뉘 집 딸인지 알아봤단다!” 이 얘기를 하실 때의 할머니 얼굴은, 만면에 퍼지는 흐뭇한 미소가 내 마음도 무척 밝게 하는 그런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예전에 여성으로서의 삶이 얼마나 고달팠는지에 대해서도 가끔 얘기하신다. “예전에는 여자들이 며느리로 살기가 너무나 고달팠다. 같은 동네에서 어느 집 새댁이 두부를 부치다가 갑자기 젊은 나이에 죽었다. 두부가 귀해서 힘들게 부쳐 봤자 자기는 먹을 수가 없으니, 내가기 전에 얼른 하나 삼키려다가 그 뜨거운 것이 그만 목구멍을 막았다지 뭐냐…” 이 얘기는 아마 열 살 때쯤 처음 들었다. 이 말을 들을 때 내가 느꼈던 비애와 비통은 어린 아이의 감수성과 맞물려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지금은 많이 무뎌졌는데도 이 얘기를 다시 떠올리면 당시 여성들의 삶이 사무치게 안쓰러워 공감이 되다 못해 가슴이 미어지는 듯하다.   남성, 여성과는 상관없이 배고팠던 시절의 어려움도 가끔 말씀하셨다. 할머니와 드라마를 같이 볼 때였는데, 전쟁 통에 군인들이 민가로 들어가 밥을 달라고 하는 장면이었다. 처음에는 말도 없이 부엌에 몰래 들어가 솥에서 밥을 퍼 먹으려다 배가 너무나 고픈 나머지 급하게 손으로 허겁지겁 집는 통에 시커먼 옛날 부엌 바닥에 떨어졌다. 그런데 드라마 속 군인들은 그걸 도로 손으로 밥풀까지 주워서 허겁지겁 먹었다. “예전에는 저렇게 배가 고팠다. 다들 살기가 너무나 어려웠어.” 하면서 안쓰럽게 혀를 끌끌 차시던 할머니, 그 표정까지 생생하다.   할머니의 삶 자체가 안쓰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일제시대를 관통하며 지내신 어린 시절, 해방과 함께 끝났을 학창시절, 짧게 우체국에서 일하셨던 시절과 이른 나이에 결혼해 네 명의 아이와 열 명 가까운 손주를 수십년 동안 키워 내신 할머니의 삶. 아직까지 혼자 살고 있는 나로서는 상상이 가지 않는다. ⓒ 사진작가 최민식   어머니, 그리고 외삼촌들과 이모는 할머니의 희생으로 흔히 말하는 좋은 대학을 나와서 번듯한 직장을 얻으셨다. 고도 성장기와 더불어 다들 20대에 결혼하셔서 아들 딸 낳고, 시집, 장가까지 보낸 뒤 노년을 바라보고 계신다. 어머니만 생각해보면, 중고교 시절부터 서울에서 유학하고 대학까지 나오셨다. 가끔 내가 현대식 교육의 근거 없는 우월감, 박정희 시대의 옛날식 교육을 받으셨다는 편견으로 어머니를 무시하려 해도 쉽게 제압당하지 않으신다. 반면 할머니는 가끔 종이에 뭔가 써서 보여주실 때, 한글 문법이나 맞춤법에 자신 없어 하시는 듯해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역사의 깊은 질곡만큼, 한 세대차이지만 그분들의 세대는 나에게는 그만큼 대비된다.   당시 여성으로서는 많은 교육을 받으신 편이지만, 지금 기준으로 할머니는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하셨다. 구순에도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매일 이런저런 일을 하실 만큼 성실하신 할머니가 공부를 원없이 하셨다면 얼마나 잘 하셨을까. 그런 할머니의 희생을 바탕으로 대학까지 나와 남부럽지 않게 사는 다른 가족들과 나를 생각해보면 이게 과연 당연한 나의 권리일까?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뭔가 허전한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다.   때로는 조금 다른 생각도 한다.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하시고, 책을 많이 보셔서 생각이 많으신 어머니, 또 비슷한 걸 공부하고 (문과대학 다녔으니) 역시나 (책은 안 봤지만) 신문 잡지를 하도 봐서 잡생각에 하루가 다 가는 나, 이런 사람들, 소위 먹물이라는 사람들이 과연 할머니보다 행복했을까 하는 의문이다. 평생 희생하신 것만 같지만, 가족들로부터 항상 감사와 공경, 사랑을 받으셨고, 아직은 건강하셨던 환갑 즈음에는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부채춤도 배워서 공연도 하셨었다. 평생 헌신 하셨기에, 남부럽지 않은 가정을 일구실 수 있었고 가끔은 작은 여유나 문화 생활도 덤으로 여성적인 취미로 가지실 수 있었다. 다만 현대 여성들처럼 스키도 타고, 스쿠바 다이빙을 하는 등의 전폭적 자유는 동시대 남성들에게도 쉽지 않았듯 할머니에게는 허용되지 않았다.   10년 넘은 얘기가 되어버렸지만, DJ의 첫 정권 교체 이후 노무현 후보가 혜성 같이 나타났던 시절, 할머니는 대법관 출신 이회창 후보한테 호감을 보이셨다. 서울 살이 한 지 오래 되셨지만 그래도 젊은 시절은 오롯이 호남에서 보내신 할머니의 선택은 나로서는 의외였다. 화려한 대법관과 총리 경력을 자랑하는 이 후보가 안정감 있게 국정을 수행할 것 같다고 말씀하셨던 할머니, 나는 그 말이 또렷이 기억난다. 오히려 당시 젊은 층에 지역 감정이 더한 것만 같아 속했던 인터넷 커뮤니티에 당시의 소회를 짧게 적은 것도 같다. 하긴 할머니는 일제 시대는 적어도 안정적이었고, 일본 사람들은 적어도 원칙이 있었다는, 그런 말도 하셨었다. 구한말 이후의 삶을 사셨으니, 할머니가 일제 시대와 비교하시는 것은 해방 후의 혼란상일 것이다. 극심한 혼란과 난리 (6/25), 이런 시기가 일제 시대보다 일반 민중들에게 살기 좋았을 리가 없다. 그 때 그 시절을 살아 보신 분의 말씀에 누가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까… 분단으로 내몬 외세의 폭압과 망동 탓이겠지만 한국전쟁 후의 참상이야 여기서 다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적어도 일제 시대에도 그늘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는 것을 ‘가정 교육’으로 알게 된 계기였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인터넷에 떠도는 각종 설이나 주장들과는 달리, 실제 생활에서 우러나오는 말씀이었기에 그 한 마디는 있는 그대로 와 닿았었다.   할머니는 자본주의, 공산주의에도 관심이 없으시고 당연히 페미니즘이나 마초이즘에도 신경 쓸 여력이 없으시다. 아마 시간이 주어져도 관심을 갖고 싶어하지도, 고민할 이유도 찾지 못하실 것이다. 이 점이 과연 할머니의 결핍이나 부재일까? 아직도 누군가의 삶을 이래야만 한다고 규정하고, 나는 이렇게 깨이고 배운 사람이니 못 배운 사람들을 계몽하려는 교조주의로 가득 찬 사람들이 오히려 강압적이고 탄압적인 사람들은 아닐까? 이제, 너무나 많은 생각들과 주장들에 지친 나는 이런 생각에 머문다. 임영훈: 미국에 실을 팔고 있습니다. 가끔 천도 팔지만 어떻게 해야 팔리는지는 모릅니다.
2019-03-15 | hrights | 조회: 472 | 추천: 15
최우식/회원 칼럼니스트  2011년, 병역 거부에 대해서 잠시나마 심각하게 고민했다. 나는 무교다. 따라서 종교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스무 살, 어린 나이였으므로 질문은 단순했다. 나 살자고 다른 사람을 죽이는 행위는 과연 정당한 것인가. 선뜻 답이 나오지 않았다. 내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정말 전쟁이 발발한다면 나는 전투에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오히려 발목만 잡는 것은 아닐까.  당시 나는 전쟁을 몇몇 위정자들의 욕심이 낳은 강요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 내가 역사책에서 배운 전쟁이란 으레 그런 것들이었으니까. 대다수 시민의 의지와는 동떨어진 그런 것 말이다. 내가 알지도 못하는 의사결정과정을 거처, 알지도 못하는 공간으로 끌려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총을 겨눠야 하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비폭력 불복종으로 저항해야 하는 건 아닐까.  그런데도 나는 군대에 갔다. 솔직한 말로 전쟁이 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군대에 가서 얻게 될 이익과 가지 않으므로 받게 될 불이익을 견주어 봤다. 내 목숨이 희생될 확률은 거의 제로에 수렴했지만 내가 병역거부로 받을 불이익은 벌써 눈에 보였다. 졸업하면 취업도 힘들 것 같았다. 그래서 내 고민은 그 성격과는 전혀 다른 지점에서 손쉽게 해결되었다.  2년을 무사히 마치고 예비군 훈련에서 반복적으로 교육을 받은 탓일까. 우리나라를 수호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나는 본분을 다할 준비가 되어 있다. 10년이라는 시간이 나를 바꿔놓은 것이다. 물론 달라진 내 모습을 인정해달라고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다만, 2011년 어쩌면 내 인생의 변곡점이 될 수도 있었던 그 순간,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싶다. 그때 내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지금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반전 평화주의자 존 레논 (출처: 존 레논 페이스북)  나는 지금까지 자신을 반전주의자, 평화주의자라고 소개하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다. 여기에는 군 복무를 정상적으로 마치지 않으면 ‘이상한 애’로 낙인찍는 사회의 분위기가 한몫했을 것이다. ‘의무를 방기하는 자신만 아는 애’라는 사회적 시선이 그 분위기 저변에 깔려있다. 국내 기업 입사지원서 대부분에는 복무기록 입력란이 있다. 군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가 업무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혹시나 있을 병역거부자를 걸러내기 위한 장치가 아니고서는 좀처럼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런 사회에서 자신을 반전주의자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인구 오천만의, 세계 경제순위 10위권의 국가에서 반전주의자 한 명을 보기 힘들다는 것은 어딘지 서글픈 일이다. 하지만 부유한 집에서 태어난 마르크스가 노동자 해방을 외쳤던 것처럼 작금의 현실에서도 반전주의나 평화주의를 꿈꾸는 사람은 어딘가 분명 존재할 것이다. 2001년 오태양 씨의 양심적 병역 거부 선언은 그것의 똑똑한 증언이다.  우리 사회가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획일적인 평화관은 과연 ‘평화’라는 가치에 얼마나 기여하고 있을까. 오히려 평화라는 가치의 다양한 해석을 막고 다양한 논의의 싹을 자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의 획일성은 휴전 상황에서 단일 대오로 국민들을 뭉치게 하는 힘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은 불가능할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근현대사를 겪은 우리나라의 아픔은 평화라는 가치에 꽃을 피울 수 있는 자양분이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천천히 휘발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최근 정부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라는 기존의 명칭을 ‘종교적 병역거부자’로 변경한다고 밝혔다. 그뿐만 아니라 병역거부자들의 신념을 검증하기 위해 총을 쏘는 FPS 게임의 접속 여부를 확인한다고 하니 그들의 상상력에 기가 찬다. 이제는 선천적 평화주의자와 후천적 평화주의자를 갈라서 전자만을 인정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요즘 들어 ‘한 전장에서의 승리는 다른 전장에서의 패배로 수포가 된다.’라는 말이 자꾸 떠오른다. 헌법재판소의 역사적인 판결 이후 우리는 왜 더 나아가지 못하고 후퇴하는 것일까. 일부는 병역을 피하는 영악함을 걱정하지만 정말로 영악한 사람이라면 이러한 사회적 편견을 감당하려고 할까? 어불성설이다. 우리 사회는 오랜 시간 끝에 일보를 전진했다. 우리가 바라는 사회는 공간을 이만큼 열어줬으니 어디 한번 이용해봐 라며 몽둥이를 들고 있는 사회가 아니라, 이만큼 문이 열렸으니 그대가 해당한다면 지켜주겠다고 방패를 들어주는 사회다. 몽둥이를 내려놓고 방패를 들자. 최우식 : 사람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피디 지망생
2019-02-26 | hrights | 조회: 419 | 추천: 4
조소연/ 회원 칼럼니스트  곧 민족의 대명절이라는 설 연휴가 시작된다. 5일이라는 긴 연휴에 먼 친척까지 다 같이 모여 차례를 지내는 가족도 있을 것이고, 함께 쉬러 여행을 떠나는 가족도 있을 것이다. 여행을 떠나는 가족이라면 소위 말하는 ‘명절 스트레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겠지만, 여행을 떠나도 사라지지 않는 스트레스가 있다. 바로 ‘호칭 스트레스’이다.  우리나라의 친족 간 호칭은 생각보다 복잡하고 헷갈리기 때문에, 본인이 결혼하거나 형제자매가 결혼하게 되면 한 번쯤은 네이버에 ‘가족 호칭’을 검색해보게 된다. 그러나 호칭 스트레스는 단순히 호칭이 어렵다는 것에 오는 스트레스는 아니다. 결혼한 여성에게는 호칭의 성차별적인 요소가 큰 스트레스로 다가오기도 한다.  국립국어원의 2011년 <표준언어예절>에 따르면, 여성이 결혼한 경우 배우자의 동생에게 ‘아가씨’ 또는 ‘도련님’이라는 높임말을 써야하는 반면, 남성이 결혼하면 배우자의 동생에게 ‘처제’ 또는 ‘처남’이라는 호칭을 쓰게 되어있다. 또, 결혼한 여성이 배우자의 친족을 부르는 호칭은 나이 불문 배우자 집안의 서열을 따르게 되어있지만, 결혼한 남성의 경우 나이에 따라 배우자의 친족을 부르는 호칭이 달라진다는 점도 많이 지적된다. 계속되는 민원에 여성가족부는 결국 작년 8월 말 성차별적 가족 호칭의 개선을 추진한다고 밝혔고, 마침 설을 앞둔 1월 22일, 또 한 번 가족 호칭 문제에 대안을 마련해 추진한다고 발표했다.  이 발표를 듣고 호칭 하나 바꾼다고 이미 현존하는 성차별적 인식과 문화를 바꿀 수 있는지 의구심이 들 수 있다. 만일 언어가 단지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반영된 결과물일 뿐이라면 가족 호칭 개선 논의는 큰 의미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어는 단순히 사고방식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유지, 강화시키는 힘을 갖고 있다.  역사적으로 사람들의 인식을 변화시키려고 언어를 사용한 사례는 많다. 대표적으로 한국의 존·비어체계는 조선시대 유교 지식인 지배층이 자신들의 지배이데올로기를 강력하게 유지하고 재생산하기 위한 택한 여러 장치 중 하나였다. 덕분에(?) 조선시대 이후로도 한국의 존·비어체계는 강력한 규범력을 갖고 한국의 수직적 사회구조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 몇 년 전부터 IT업계나 스타트업에서는 호칭을 통해 문화를 만들려는 움직임이 많이 보인다. 카카오에서는 모든 사원이 별명을 만들어 직급 대신 그 별명으로 부르고, 페이스북 코리아에서도 직급 대신 ‘OO님’이라는 호칭을 쓴다. 이윤을 추구한다는 기업이 굳이 추가적인 자원을 들여서까지 사원에게 호칭에 대한 교육을 하고 있다. 사진출처 - 수신지 작가의 웹툰 <며느라기> 중  결혼 뒤 느끼는 차별 문제를 다룬 수신지 작가의 웹툰 <며느라기>가 최근 여성들의 폭발적 호응을 얻었다. 웹툰의 제목 ‘며느라기’는 며느리를 부르는 ‘며늘아기’를 빗댄 말로 ‘시댁 식구한테 예쁨받고 싶고 칭찬받고 싶은 시기’라는 의미이다. 결혼한 여성이 ‘며느라기’에 빠져 자신을 ‘참고 희생하는 며늘아기’로 만들어 버리는 이 상황이 어쩌면 배우자의 가족을 ‘아가씨’, ‘도련님’으로 귀하게 모셔야 한다는 무의식으로부터 시작된 건 아닐까?  문화, 전통, 예절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차별적 언어와 행위가 정당화되고 있다. “예(禮)”란 “존경의 뜻을 표하기 위하여 나타내는 말투나 몸가짐”이라고 한다. 이 존경심이 결혼한 여성에게만 일방적으로 강요되고 있진 않은지, 결혼한 여성은 충분한 존경을 받고 있는지, 깊은 고민을 해봐야 한다. 조소연: 프로불편러 대학원생. 저를 불편하게 만드는 일들에 대해 나누고 싶습니다. 나누다 보면 불편할 일들이 점점 사라질 거라고 믿습니다.
2019-02-08 | hrights | 조회: 425 | 추천: 3
-2019 겨울 인권교육 직무연수를 마치고- 주윤아/ 회원 칼럼니스트  인권연대의 겨울 인권교육 직무연수를 마쳤다. 이번 연수는 ‘인권, 세계를 이해하다’라는 주제로 ‘인권’의 렌즈로 다른 나라의 모습을 재조명해보는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다른 나라의 문화를 주로 책으로 접하다 강사들의 생생한 현지 경험담을 들을 수 있어 특히 좋았다.  팔레스타인 현대사 강의(홍미정 교수)를 통해 그동안 어렵게만 느껴졌던 중동 분쟁의 본질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중동 분쟁은 내부 정치 문제만이 아니라 이 지역 강국들의 경쟁관계와 세계적 열강들의 개입이 얽혀 복합적으로 접근해야 하므로 한 두 번의 강의만으로는 이해가 녹록치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몇 가지 선명해진 내용이 있다.  이스라엘 건국과 중동 전쟁, 그리고 반 세기가 넘도록 이어지고 있는 팔레스타인 탄압에 결정적 구실을 제공한 나라는 영국이다. 그렇지만 나치 독일이 저지른 홀로코스트가 유대인들의 국가 건국에 대한 결심을 강화하게 한 배경이라는 것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므로 현재 독일의 과거사 사죄 퍼포먼스를 마냥 환영하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물론 과거사를 부정하고 왜곡하는 일본에 비한다면 바람직한 것은 분명하지만 말이다.)  한편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 저지르는 범죄에 면죄부를 줄 수도 없다. 강의를 들으며 그동안 나치 정권의 유대인 학살(홀로코스트)만 강조한 우리의 학교 교육에서 유대인에 의한 팔레스타인인들의 피해와 현재 그들의 처지에 대한 역사적 배경 또한 비슷한 비중으로 다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출처 : 장애인권법센터 DRAC 홈페이지(http://www.draclaw.kr/human.html)  독일의 민주시민교육(김누리 교수)에 대한 강의를 들을 때는 부러움이 일었다. 교사이기 이전에 독일의 학생이 되어 교육을 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다. 독일의 민주시민교육은 성교육, 정치교육, 생태교육에 큰 비중을 두고 이루어진다. 정치나 생태교육은 그 수준이나 실용성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나라 학교에서도 다루고 있으나 성교육은 확연히 다르다.  독일은 성교육을 민주주의 교육의 핵심으로 간주하여 초등학교 무렵부터 비중있게 시행한다. 청소년의 성 권리를 인정하되 이에 따른 철저한 책임을 묻고 사회가 그 책임을 다 할 수 있도록 돕는 인권의 영역으로 성교육 내용을 구조화하였다. 즉 성을 무조건 억압하지 않는 성교육을 통해 불의한 권력에 맞설 수 있는 ‘강한 자아’를 지닌 민주시민을 기를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독일의 성교육은 우리의 교육 현실에 비추어 이상적으로 들리지만 분명 참고할 점이 있다. 여태껏 대한민국에서는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은 자도 없고, 정확하고 실질적인 성교육 매뉴얼이 만들어진 적도 없으며, 현재도 이를 교육하고 연수할 전문가나 강사 등의 인력도 턱없이 부족하니 말이다.  그렇다고 좌절하고 마냥 미룰 수는 없다.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은 이미 초등학교 전후부터 사랑과 연애를 시작하며, 기성세대의 연애 패턴과는 상당히 다른 양상을 보인다. 그러나 이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어른이나 교사는 거의 없으며, 우리가 혹시 하고 예측하는 다양한 성적 행동을 하고 있음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더 이상 ‘성’을 윤리적 영역으로 분류하여 부정하고 억압하거나 유보하라고 협박만 할 수는 없다. 제대로 된 성교육과 성평등 교육을 실시하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에서의 성은 음지로 향하고, 약자와 여성을 대상화하며 이들을 소비하고 착취하는 현실의 성문화는 전혀 개선되지 않을 것이다.  연초부터 터져 나온 스포츠계의 미투 운동에서 재확인하듯, 우리 기성세대는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혼자 고통받는 청소년들의 현실을 직시하고 앞으로 누구도 이러한 눈물을 흘리지 않도록 행동할 때이다. 시기를 묻는다면 바로 지금이다! * 참고자료 : 인권연대 겨울 인권교육 직무연수 ‘인권, 세계를 이해하다(35기) 자료집 중 - (단국대 중동학과 홍미정, 중앙대 독어독문학과 김누리 교수님 강의안) 주윤아: 성평등 민주주의를 꿈꾸는 교육노동자
2019-01-23 | hrights | 조회: 438 | 추천: 13
최우식/회원칼럼니스트 지난해를 보내는 아쉬운 마음과 새해를 맞이하는 두근거리는 마음이 교차하는 시기다. 새해 소망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대한민국 국민 대부분 꿈은 자기 집이 아닐까. 소박하지 않은 꿈이다. 월급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몇 년을 모아야 한다느니 하는 계산법도 이제 익숙하다. 송년회를 겸해서 서울에서 자취하는 친구들에게 물었다. 너에게 집은 어떤 곳이냐고. A의 역사 Q. 원룸의 역사가 어떻게 돼? A. 2010년에 올라왔지. 맨 처음에는 광진구. 500에 55. 8개월 살았다. 이때는 혼자 살았어. 8개월 뒤에 군대 갔지. 그리고 전역을 했는데 마침 비슷한 시기에 전역한 친구한테 먼저 연락이 왔어.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같이 올라가면 좋지 않을까? 그래서 콜! 너랑 살면 괜찮아. 둘이서 어린이대공원에서 2년을 살았지. 1년을 더 살려고 했는데 갑자기 아저씨가 5만 원을 더 올린다고 하는 거야. 그게 부담이 돼서 나왔어. 그때 잠깐 학교 기숙사에서 살았고 지금 집으로 오게 됐다. 여전히 친구와는 함께 산다. Q. 좁은 집에서 둘이 사는 게 힘들 것도 같다. A. 지옥이지. 씻는 것, 임무 분담을 하는 것도 문제야. 하지만 이런저런 문제보다도 친구 둘이 사는데도 떠들지 못하는 것이 제일 힘들어. 친구랑 원룸에서 둘이 살면 얼마나 신나냐? 컴퓨터 두 대 놓고 재밌게 살려고 했다. 밤새도록 게임하고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점점 옆방에서 컴플레인이 들어왔다. 아저씨들이 와서 조용히 좀 해줬으면 좋겠다. 이게 시작이었다. 그러다가 우리가 노이로제가 왔다. 말을 크게 하지 못하는 노이로제. Q. 학생 때가 아니고 돈을 벌잖아. 지금 같이 사는 이유는 뭐야? A. 돈이야. (Q. 지금도 돈이야?) 일단 가장 큰 문제는 월세를 내기 시작하면 돈을 못 모아. 우리는 돈을 반반씩 내면서 돈을 모으고 있어. 그게 되는 거야. 쉽게 말하면, 그게 아니었으면 부모님에게 손을 벌렸을지도 몰라. 아끼는 돈이 30만~40만 원 정도 돼. 그 돈 아끼는 대신 내 개인을 주는 거지. Q. 그럼 혼자만의 공간이 필요할 때는 어떻게 해결하나? A: 이거는 다년간 이 친구와 같이 살아서 느낀 건데. 우리는 좌식 의자가 있어. 좌식 의자를 벽 끝까지 밀어붙인 다음에, 벽만 보고 혼자 있어 그냥. 핸드폰 하면서 혼자 있어 그냥. 이어폰 끼고 혼자 있어. 그리고 우리 둘은 에어팟 나오자마자 에어팟을 샀다. 왜냐하면, 서로 이어폰을 끼고 다녀 그냥. 집안에서. 애가 말하는 것도 안 들리고 내가 말하는 것도 안 들리니까. 우리는 그런 식으로 극복을 하고 있어. 근데 지옥 같아. 이어폰 그만 끼고 싶어. 잘 때도 에어팟 끼는 것도 짜증나고. Q. 그 밖에 문제는 뭐가 있을까. A. 나는 책을 사다 갖다 놓는 편이고 친구는 옷을 사다 갖다 놓는 편이다. 그래서 나는 책 50권을 딱 정해놔. 50권이 넘어가면 나머지 책은 버려. 친구도 일정량을 사면 버려. 우리는 집에 그게 정해져 있어. 옷걸이가 정해져 있어서 그 이상이 되면 버려. (Q. 너 한 달에 책 20만 원어치 산다며?) 나머지는 다 중고서점에 파는 거지. 그렇게밖에 할 수 없더라고.   B의 역사 Q. 역사가 어떻게 돼? B. 고등학생 때 6인실 기숙사가 시작이었지. 수험시절에는 예민해서 많이도 싸웠다. 2년이 지나자 서로가 알아서 조심하게 되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대학생이 되고 나서였다. 서로의 시간이 정반대였다. 저녁 8시에 불을 끄고 새벽 5시에 불을 켜는 친구와 함께 살았다. 게임하는 친구도 만났고 전도하는 친구도 만났다. 나이가 들고 못 살겠다는 생각에 원룸으로 나왔다. Q. 고시원이랑 하숙집은 언제 살았던 거야? B. 둘 다 재수 때. 고시원에서 3개월 살다가 옆집이 너무 무서워서 나왔다. 밤마다 이상한 주문을 외웠다. 고시원을 나와서 하숙집을 들어갔다. 재수생 여자 전용 하숙집이었다. 여기는 좋았다. 1층에 스터디 룸이 있고 도시락 싸주시고 아침에 깨워주시고 좋았다. 120만 원이었다. 삼시 세끼 다 주니까 나쁘지는 않았다. Q. 원룸 살기 시작하고 생긴 문제점은 뭐야? B. 집주인과의 트러블? 예를 들면 보증금을 잘 안 주려고 하든가. (Q. 보증금을 안 주려고 해? A. 안 주려고 하지, 많이) 나는 그래도 학교 앞이니까 소문나니까, 주긴 다 줬어. 근데 그걸 안 주려고 안간힘을 쓰는 거야 막. 계약서 이 조항의 이 조항이 뭐다. 아니면 뒷사람이 안 들어와서 돈을 못 준다. 월세 안 받았다. 막 이런 경우도 있었음. 그런데 장부에 받았다고 적혀 있어서 넘어갔지. 카드 보증금 5000원 못 받은 경우도 있다. 청소 보증금도 있다. 나갈 때 무조건 내야 해. 금액을 빼서 준다.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다음 사람이 들어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명목이다. 사진출처- 뉴시스(광안리 황금돼지 조형물) 한국개발연구원의 발표에 따르면 30세 이하 청년층의 월 소득 평균의 34.2%를 주거비로 부담한다고 한다. 100만 원을 벌면 34만 원을 주거비로 사용한다는 것인데. 실제 주거비는 그에 두 배에 달하는 게 보통이다. 취업한 청년들이 수치를 많이 낮추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대다수 청년의 실제 부담률은 훨씬 더 높을 것이다. 하지만 주거 문제는 청년 문제의 한 단면에 불과하다. 식비를 포함해 절대적 빈곤 비용을 정산하면 상대적 빈곤 비용을 계산해야 한다. 통신비와 화장품, 옷값에 술값을 조금 계산에 포함한다. 여기에 다달이 갚고는 싶은 학자금 대출과 취업에 들어가는 비용을 생각하면 글쎄 계산이 될지 모르겠다. 결국 이 모든 것을 견디게 만드는 원동력은 취업이다. 하지만 청년 체감실업률을 보여주는 확장실업률은 22.8%로 통계 작성 이후 가장 높았다고 한다. 게다가 19년 경제 전망은 하나같이 어둡기만 하다. 내 친구 A가 8평짜리 원룸을 친구와 나누어 사는 행위는 이런 상황을 극복해보려는 나름의 노력이었을 것이다. 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가령 창문 없는 고시원을 선택하는 식으로 말이다. 뾰족한 수가 있을까. 나는 인터뷰 마지막 질문으로 어떤 집을 꿈꾸고 있느냐고 친구들에게 물었다. A는 월세를 내지 않는 집으로 가고 싶다고 답했다. B는 아파트에서 살고 싶다고 말했다. 해결책은 무엇일까. 둘 다 취업이었다. 뭐 그렇다. 이미 이곳은 제로섬의 게임이 지배하는 곳인 것이다. 하지만 윈-윈 게임이 아니라고 절망할 필요가 있을까. 제로섬 게임의 승자가 되고 나서 이 문제를 외면하지만 않는다면, 나만이 아니라 사회가 외면하지 않는다면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우리는 그렇게 그날을 보냈다. 어쨌거나 19년 기해년은 꿈에서라도 나오면 복권을 사야 한다는 자본주의의 영물, 돼지의 해이지 않은가. 적어도 19년은 돈 문제로 덜 걱정하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란다. 최우식 : 사람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은 피디 지망생
2019-01-16 | hrights | 조회: 391 | 추천: 3
임영훈/회원 칼럼니스트   갈수록 ‘중용’이 아쉽다. 풀어보면 ‘中’이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것, ‘庸’이란 평상(平常)을 뜻한다. 극한적 대립을 통해 주장을 관철하려고 하는 각계각층,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안타깝다. 길거리에서 싸움이 나도 억울하면 인터넷에 일방적 주장을 올린다. 술에 취해 타인을 비하하는 욕설을 쏟아내며 모르는 사람과 다툰 일로, 청와대 청원까지 해서 ‘내 잘못은 없다’고 강변하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시대에 살다 보니 더더욱 안타깝다. 어릴 때 회색분자나 비겁한 양비론으로 치부해버렸던 중용의 자세는, 그나마 시간이 갈수록 이런저런 인생 선배의 조언들과 다양한 인간 관계들을 겪으며 더욱 그 중요성을 실감하게 된다. 종종 잔혹 범죄 뉴스가 들려온다. 잊을 만하면 일상적이지 않은 살인이나 폭행 치사, 강간과 같은 이해하기 힘든 중범죄들이 일어난다. 더하여 이런 뉴스가 퍼질 때마다, 그에 따르는 무수한 댓글들도 상당히 가혹하고 잔혹하다. 신체 훼손 같은 경우에는 똑같이 해주라느니, 저런 놈들을 보면 사형제 폐지는 말이 안 된다라던지, 이런 글들이 넘쳐난다. 이미 한 번 대중에 의해 사회적, 심리적으로 돌에 맞아 죽은 피의자들은 수사와 재판의 단계를 밟아 나갈 때마다 인민재판에 의해서 여러 번 다시 죽고 정신적으로 능지처참 당한다. 어느 한 쪽의 감정에 이입돼 극도의 증오를 쏟아내고, 구약 성경이나 중동 과격 단체에서나 나올 법한 섬뜩한 말들이 쏟아진다. 평상심을 유지하고, 사안의 양면을 보려고 하는 중용이 너무나 아쉬운 순간이다. 짚고 넘어가자면, 많은 인권 단체에서 피의자들과, 또 기결수라 할 지라도 수감과 출소를 거치며  나락으로 떨어진 분들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인권 단체들, 특히 인권연대의 다방면의 노력에 대해서는 경의를 표한다. 개인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일이고, 기부 한 기억도 없다. 주변에 이렇게 희생하는 분들이 계시지만, 나는 아직 해외 아동 원조와 같은 먼 나라의 일에 자의반 타의반 가입되어 있을 뿐,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까지 살피는 그런 따스함, 어려운 이웃을 구체적으로 돌보는 세심함에 미치지 못한다. 인권 단체들은 개개인이 처한 어려운 상황을 돌보는 데 있어서는 일종의 사회의 균형 추를 자임하는 중용의 덕을 실천하고 있다. 실패의 나락에서 재기하고 삶의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사람들에게 반대편의 밝은 면을 보게 해준다. 잔혹한 범죄는 아니지만 그 전초전이랄까, 학교 다닐 때의 오래된 기억이 있다. 아이의 몸으로 술, 담배에 본드까지 하던 불량아들, 10대로 보기에는 험상궂고, 수업 시간에는 맨 뒷자리로 옮겨 잠만 잤으며, 학교를 안 나오거나 중간에 사라지기 일쑤였다. 가끔 붙들려서 혼나면 만만한 선생님들한테는 눈 앞에서도 대들었다. 아직 체벌이 있을 때였지만, 안 맞으려고 완력을 행사하거나, 점잖은 선생님에게는 말대답을 했다. 잊지 못하는 장면도 있다. 두 명이 종례 시간에 다투어서 시끄러워지자 선생님께서 한 명을 교단 앞으로 불러내셨다. 그런데 나머지 한 명이 분을 못 참아 의자에서 나무 조각을 뽑아서 앞으로 던졌다. 못이 박힌 채로 그 나무 조각은 애들 머리 위로 날아갔고, 칠판에 맞아 떨어졌다. 그 때 당황하신 선생님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속으로는 얼마나 분노하셨을까, 그래도 그 분은 끝까지 이성을 유지하려고 하셨다. 한편 무지막지하게 힘으로 치는 체육 교사와 같은 덩치에게는 애들도 설설 기었다. 중학생 애들이었지만 영악했다. 이런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던 나에게 어머니가 해주신 말씀이 있다. “너와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라온 애들이야. 니가 이해해야지. 집에서 이미 스트레스를 받고 학교에 오는 애들을 어떻게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해결해주니?” 철없는 십 대 시절 그런 말이 와 닿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개인의 환경까지 고려해서 생각하는 배려가 있었다면, 학교 생활이 괴롭지 만은 않았을 것 같다. 중용을 일찍이 깨달았다면, 친구처럼 가깝게 지내면서 나와는 다른 사람을 챙겨주는 능력마저 생겼을 것이다. 현실은 선과 악으로, 모범생과 문제아로 나뉜 이분법이 적용되었고, 결과적으로 나의 학창시절은 그렇게 조화롭지 못했다. 사진출처-구글 예를 더 들어본다. 타고난 보수적 성향과도 겹쳐져 (타고난 진보적 성향도 있지만), 빈부격차와 사회적 불행은 어느 시대와 사회를 막론하고 일정 부분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 점을 완전히 없애겠다는 것은 전체주의적이고 사회주의적이며, 인간 사회에 그런 앞뒤 꽉 막힌 시스템이라는 것은 실패한다는 것이 역사적, 경험적으로 증명이 되었다. 적어도 경제적 약자에게는 혜택이 될 것만 같았던 최저임금을 올리는 시도마저, 의도하지 않은 뜻밖의 결과로 돌아오게 되는 것이 사회의 복잡성, 복합성이다. 무엇보다 최근 가장 큰 이슈가 된 최저임금 인상은, 대기업이 아닌 영세 자영업자에게, 무엇보다도 최저 임금의 혜택을 받아야 하는 경제적 약자들에게 외려 실직과 근로 시간 감소라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실없는 예도 있다. ‘미친 놈’이란 말을 군대나 회사에서 수 없이 듣는다. 심지어 남자들 간에는 허물없이 쓰기도 한다. 남자들은 이런 말을 심심찮게 들어도 참아야 하고, 여자에게 ‘년’이란 말은 쓰면 안 된다는 암묵적 사회적 합의가 있다. 같은 의미이지만 어감의 차이와 받아들이는 사회적 분위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오만 것에 평등을 좇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일체의 차별을 거부하는, 온갖 것에 숨은 차별을 찾아내서 기계적 평등을 이뤄야만 한다는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쓰이는 욕설 등에서는 왜 굳이 남녀를 구분하고 일일이 그건 안 되고 다르다고 강조를 할까? 좋은 것이건 나쁜 것이건, 의무건 책임이건 권리건, 가리지 않고 평등을 주장해야 그 주장은 양쪽을 아우르는 중용의 덕을 갖추고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인권 전반, 피의자의, 학교 현장의 인권 문제의 해결점이 무엇일까? 그런 정답이 있다면 이렇게 역사가 돌고 돌지는 않을 것이다. 교육에는 관심이 없고 애들을 구타하거나 착취하는 데에만 관심있던 일부 교사들, 공부에는 전혀 관심이 없던 문제아들, 학교 베란다가 떨어져 나가고 무너지는데 돈은 어디로 빼돌리는지 특목고 합격자 수만 늘리려고 했던 재단과 교장…. 중학교를 다닐 때, 또 졸업하고 나서도 그들만 솎아내면, 속칭 ‘적폐 청산’만 하면 이런 지긋지긋한 일들이 다 해결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렇지 만도 않다는 생각이 든다. 그 적폐라는 것들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많은 이들이 아직도, ‘내가 너 같은 범죄자보다는 훨씬 도덕적이야, 내가 너보다는 약자를 배려해, 난 여성이니까 너보다 당하며 살아 왔어, 난 가난하니까 부자인 니가 그동안 내 몫을 뺏어온 거야.’ ‘교육 현장은 너 같이 이상한 선생과 아이들, 교육부, 부패한 재단들이 망쳐 왔어. 그러니 내 아이를 학원에 보낼 수 밖에.’ 이렇게 외치며 불평하고 투쟁한다. 어떤 면에서 맞는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어느 단체건 그 구성원들에게는 나름의 역할과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런 것들을 종합적으로 판단하고 자신과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함께 갈 수 있는 능력이 또한 중용의 힘이다. 이렇듯 사회 구조를 바꾸고 싶어하는 열망과, 계층이던 성별이던 자신이 속하지 않은 집단에 대한 조소와 경멸은 다르다. 구조의 치환은 피비린내 나는 혁명이 아닌, 구조 자체를 바꾸려는 지속적인 노력으로 달성될 수 있다. 종교 전쟁과 같이 서로의 생각과 이념이 다르다고 인류가 그 동안 흘린 피와 파괴한 도시들, 자연 환경이 셀 수 없다. 역사적으로 퇴행하고 싶지 않다면, 같은 사회 안에서의 갈등을 치유하지 않고 조소와 경멸, 비하와 욕설로 증폭시킬 필요가 없다. 그렇게 타자를 무차별적으로 비난하므로서 헤게모니를 잡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잡은 헤게모니가 그토록 비난하던 권력과 달라질 지의 여부는 거꾸로 자기 반성에 달려있다. ‘그들의 잘못이 아니야. 그들은 그렇게 살아 왔어. 그게 잘못된 것도 아니고. 단지 그렇게 습관이 든 것일 뿐이야.’ 청년 단체 안에서의 갈등으로 고민하던 때, 모든 일이 습관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을 대학 시절 아버지께 들었다. 새벽에 일어나는 사람은 그게 습관이 되어 거뜬하고, 늦게 일어나는 사람은 또한 그게 습관이 되어서, 오후에 일어나다 정오에 깨라고 해도 힘들어한다. 여기서 상호 간의 이해가, 중용이 출발한다. 한때 지나간 과거를 일일이 공부하는 게 싫어서 역사학이 아닌 사회학을 전공했다. 현실이 작동하는 원리만 알면 됐지 미주알고주알 지난 일을 다 알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갈수록 그게 얼마나 근본 없는 생각이었던가 싶다. 인류의 역사라는 것이 그렇게 기계적 도식으로 맞추어서 어떤 시대를 의미 없고 잘못된 것으로 단순히 뭉개버릴 만큼 간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문화, 아이들이 길들여지게 된 폭력,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관습, 이런 것들은 모두 현실 세계를 지탱하는 과거라는 큰 축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현재는, 미래로 나아가려는 발걸음을 ‘중용’으로 맞춰 나갈 수 있다. 과거를 무시하거나 부정하고 현재를 설계할 수는 없다. 과거의 전통적 기반에서 새로움을 모색할 때 현재는 튼튼히 뿌리내리게 된다. 여전히 반복되는 아이들의 폭력성, 갈수록 증폭되는 남녀갈등, 그리고 수시로 불이 지펴지는 계층 갈등에서 인권의 의미를 찾는다면, 케케묵은 ‘중용 사상’이 필시 그 등대가 된다고 생각한다. 아이들 간의 평화도, 남녀 간의 이해도, 노사 간의 협력도 중용에서 출발하지 어떤 일방적인 생각의 노골적 강요에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나 또한 다른 생각을 존중하고 싶다. 하지만 중용의 바운더리를 벗어난 경멸과 무시, 일방적 폄훼와 싸잡아 욕보이기, 배려와 존중 없음을 존중할 만큼 너그럽지는 못하다. 그리고 중용은 나 자신의 인권 뿐만 아니라 모든 단체와 그 구성원들의 인권에도 중요하다. 누구던 ‘인간 답게’ 살 권리가 그들 자신의 인권이기도 하므로. 임영훈: 미국에 실을 팔고 있습니다. 가끔 천도 팔지만 어떻게 해야 팔리는지는 모릅니다.
2019-01-15 | hrights | 조회: 368 | 추천: 2
박선영 / 회원칼럼니스트  아직도 어떤 장면이 눈에 선하다. 길목에 널브러져 팔다리를 버둥거리는 수많은 아기 돼지들과 한 손에 망치를 들고 그 사이를 걸어가며 돼지의 머리를 내리치는 노동자의 뒷모습이. 얼마 전에 경남 사천의 한 축산 돼지 농장에서 아기 돼지를 망치로 때려죽이는 영상이 공개되었다. 2만 마리 규모의 돼지를 사육하여 도축하는 전형적인 공장식 축산 농장이었다. 그 농장에서는 아기 돼지들을 임의 선별하여 비숙련자로 하여금 잔인하게 때려죽이게 하고 있었다. 느리게 자라거나 아파서 ‘상품성이 떨어진다’는 것이 잔인무도한 살해의 이유였다.  인간은 어떻게 하면 자연과 동물을 더 잘 이용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를 놀랍도록 발전시켜왔다. 동물을 인간에게 종속시키는 철학적 논리는 ‘이원론적 세계관’이다. 이원론은 육체와 정신을 서로 대립된 성질을 지닌 것으로 쪼개는 것이고, 나아가 그 둘 사이에 위계를 설정해서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신을 제외하면 정신의 대표자는 인간이고, 물질적인 것의 대표는 자연이니,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것이 가능해 진다. 그런데 이러한 이원론적 세계관은 비인간 존재에 대한 억압과 착취만을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 사회에서 약자에게로 향하는 모든 폭력과 지배는 이원론적 세계관으로부터 비롯된다.  에코페미니스트인 발 플럼우드는 이원론을 통해서 특정한 인간 집단을 배제하고 차별하는 논리적 장치를 분석했다. 여성의 재생산 노동이 무가치화되고 잘 드러나지 않는 것처럼 동물의 재생산 노동이나 사육, 도살 과정은 의도적으로 감춰지고, 우리는 동물로부터 얻은 생산물을 부채감 없이 소비한다. 또한 우리 사회의 약자들은 본능적이고, 비합리적이고, 동물적인 열등한 속성을 가진 것으로 정형화된다. 여성은 감성적이고 임신, 출산 기능을 갖고 있음에 따라 모성애가 있기 때문에 사적 영역에서의 노동에 적합하다고 하는 것이 이와 같은 논리이다. 이렇게 권력을 가진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 사이의 차이를 강조하여 특정 집단을 사회의 중요한 영역과 결정과정에서 배제하고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사진출처 - 걷는사람  인간은 삶의 전 과정에서 이러한 지배 논리와 구조를 맹신하고 이것에 공모하도록 지속적으로 주입 당해왔다. 오래 전에 동물, 유색인종,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등의 상황과 조건은 지금보다 훨씬 처참했다. 그러나 인간은 역사적으로 이들에 대한 공감 능력이 계속 향상되었다. 이때 인간의 경직된 사고와 감정을 유연하고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 ‘이야기’이다. <무민은 채식주의자>의 단편 소설들은 인간과 동물이 교감한다는 것을 넘어 인간과 동물의 고통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쟁터에서 탱크 폭발 작전에 이용되는 개를 훈련시키던 사람, 동물 보호소에서 버려진 반려동물들을 안락사시키는 일을 하던 수의사, 구제역 살처분에 참여했던 사람. 이들은 소설 속에서 극심한 슬픔과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야기’는 나와 상관없는 존재에 귀 기울이고 집중하게 만든다. 이것이 이야기의 힘이고, 문학과 예술이 우리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다. 물론 인간의 공감 능력이 아무리 발달한다고 해도 우리 사회의 약자들이 겪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그래서 공감 능력은 단순히 ‘착하고 배려하는’ 영역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이 사회에서 어떤 존재들을 끊임없이 낮은 곳으로, 보이지 않는 곳으로 밀어내는 구조를 이해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변화를 위한 움직임과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 앞으로 더 많은 이야기들이 더 많은 존재들을 연결시켜 주길 기대한다. 사진출처 - 걷는사람  그래서 내가 채식주의자가 되었냐고? 아니다. 어제의 나는 카레집에서 수많은 토핑 중에 돈까스를 선택했다. 오늘의 나는 요즘 즐겨보는 <밥블레스유>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출연진들이 새끼 돼지로 만든 ‘애저’ 요리를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나도 먹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이 질문에 ‘아직’ 아니라고 답하고 싶다. 여전히 돈까스 카레를 맛있게 먹는 나이지만, 이런 내가 <무민은 채식주의자>를 읽으며 동물의 죽음 앞에서 펑펑 울기도 한다. 아기 돼지를 망치로 잔인하게 살해하는 구조에 분노하기도 한다. 비인간 존재와 나와 다른 인간 존재의 고통이 연결되어 있기에 나도 언젠가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있지 않을까. 박선영: 초등학교 교사 5년차. 페미니스트가 된 후 이전의 삶이 모두 흑역사가 되어 버렸습니다. 삶을 다시 쓰는 중.
2018-12-31 | hrights | 조회: 467 | 추천: 8
  조소연/ 회원 칼럼니스트 사진 출처 - 한겨레  세 명의 여성이 청계천에 발을 담그고 있는 이 사진은 1920년대 지식인 사회에 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사진 속의 주세죽, 허정숙, 고명자가 당시 여성 지식인 중 최초로 단발을 감행하고 여성단발운동을 적극 주도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단발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여러 신문사가 취재했고, 위 사진이 보도된 후 거센 비난을 받았다. 단발운동을 둘러싸고 갑론을박이 심하던 당시 허정숙이 <<신여성>> 잡지와 <<동아일보>>에 여러 칼럼을 기고했는데, 이를 엮은 책 <나의 단발과 단발 전후>가 최근 발간되었다.  허정숙의 <나의 단발과 단발 전후>에서 당시 단발운동을 둘러싼 팽팽한 긴장관계를 느낄 수 있다. 단발운동을 비난하던 어떤 기사에서는 신여성들을 “불완전한 준인간”에 비유하고 “미성품”이라고 표현한다. “신여성의 우대를 받는 것만큼 책임감과 의무감을 갖느냐”, “책임을 깨닫고 동시에 철저한 실행이 있느냐”며 여성운동을 하는 ‘신여성’에게만 엄격한 책임감의 잣대를 부여하고, 운동의 크고 작은 실패에 대해서 ‘철저한 실행’이 없다며 맹렬히 공격하기도 한다.  일제강점기 때 쓰인 허정숙의 칼럼은 약 100년이 흐른 지금의 페미니즘을 떠올리게 한다. 그의 글에 나오는 갈등은 최근 한국에서의 페미니스트 운동을 둘러싼 격한 갈등과 겹치는 점이 많다. ‘권리에는 의무가 따른다며 여자도 군대나 갔다 와라’는 반박이나, 혜화역 시위에서의 일부 극단적 행위를 빌미로 페미니즘 자체를 부정하는 글, 상의탈의 시위에 대해 눈살을 찌푸리며 ‘관종’이냐는 반응들. 이렇게 비현실적인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며 완전무결 흠잡을 데 없는 ‘보기 좋은’ 사회운동을 요구하는 여론은 단지 단발운동이나 지금의 페미니즘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 많은 시민운동이 겪어왔던 반응이다.  예컨대 1960년대의 미국 시민권 운동을 떠올려보자. 미국 시민권 운동이 성공할 수 있었던 주요인으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비폭력 사상이 강조되곤 한다. 그 바람에 1960년대의 흑인인권을 위한 시위들이 언제나 평화로웠던 것처럼 오해하기 쉽지만, 그가 주도한 시위들에서도 격한 육체적 충돌과 소동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흑인인권운동에 대한 여론의 반응은 지금 생각하는 것처럼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다. 흑인인권운동의 반대세력 중에는 극우 인종차별주의자들이 물론 있었지만 주로 대결해야 했던 상대는 인종차별을 타파해야 한다는 당위에는 공감하면서도 운동은 지지하지 않는 많은 백인 온건주의자들이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1963년 “버밍엄 감옥으로부터의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흑인인권운동을 통해 자유를 찾는데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은 백인시민위원회도, 쿠 클럭스 클랜(KKK)도 아니다. 바로 정의보다는 질서를 선택한 온건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정의가 구현되는 적극적 평화보다 갈등이 없는 소극적 평화를 선호한다. 그들은 ”너희들 취지는 알겠으나, 시위라는 방법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한다.  페미니즘 운동에 대해 대화를 나눠보면 대부분이 진심으로 성차별을 경멸한다. 페미니즘의 궁극적 목표를 지지한다고 한다. 그러나 동시에 혜화역 시위에서의 문구는 너무 극단적이었다고 말한다. 상의 탈의 운동은 보기에 흉하지 않으냐고 묻는다. 그런데 역사 속에서 사회를 바꿔온 시민운동들을 가만히 돌이켜보면 미국 시민권 운동에서부터 여성 투표권 운동, 그리고 동성혼 합법화 운동까지 우리가 바라는 얌전하기만 한 운동은 없었다. 주위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는 시민운동의 바로 그런 면이 주위를 환기시키고 인식을 변화시킴으로써 결국엔 사회를 바꾸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혜화역 시위 중의 일부 위법한 일탈행동들에 대한 정당한 비판은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완벽한 시위’가 아니라는 이유로,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는 이유만으로 페미니스트 운동 자체를 계속 부정한다면, 더운 날씨에 몇 시간씩 피켓을 들고 평화롭게 시위하던 2만 명이 넘는 시위자들의 의지는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우리는 그들을 시위로까지 뛰쳐나오게 한 장시간 쌓여온 부정의를 영원히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양성평등을 원하지만 탈코르셋 운동과 상의탈의시위는 왠지 과하다고 느껴지고, 몰카는 나쁘지만 혜화역 시위는 너무 격하다고 하는 우리들 스스로에게 허정숙의 글을 빌어 반문하고 싶다. “우리들이 완전무결하게 다하여 놓은 것은 어디 있느냐” 라고. 조소연: 프로불편러 대학원생. 저를 불편하게 만드는 일들에 대해 나누고 싶습니다. 나누다 보면 불편할 일들이 점점 사라질 거라고 믿습니다.
2018-12-19 | hrights | 조회: 461 | 추천: 4
주윤아/ 회원 칼럼니스트  늦은 밤 <보헤미안 랩소디>를 보았다. 이 영화는 ‘보았다’가 아니라 ‘들었다’고 하는 편이 낫겠다. 내가 유일하게 밴드의 모든 노래를 알고 있는 ‘퀸’의 음악을 러닝 타임 내내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백하자면 학창 시절 몇 년간 ‘퀸’의 노래만 들을 정도로 심취되어 있었지만 프레디 머큐리의 해괴한 무대의상, 사생활 루머까지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 그런데 영화를 보는 동안 그간 오해와 편견으로 엉킨 매듭들이 스르륵 풀렸고, 중반부에 이르자 어렴풋한 기시감이 들더니 엔딩 즈음에는 확신까지 들었다. 평행 이론처럼 누군가의 삶과 흡사한 느낌~누구더라? 바로 여름에 보았던 영화 <휘트니>의 휘트니 휴스턴이었다. <휘트니>는 생전 그녀의 활동 영상과 홈비디오를 샅샅이 찾아내 만들어진 다큐멘터리 영화라 좀 더 객관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피부색, 국적, 성별, 음악 장르 등 모든 것이 다르지만 이들의 삶은 기묘하게 닮아 있다. 휘트니는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흑인치고는 하얀 피부색으로 인해 어렸을 때부터 흑·백인 모두로부터 따돌림을 받았다. 아프리카에서 태어난 파르시(인도에 거주하는 조로아스터교도)의 후손인 이민자 프레디 역시 인종과 종교의 차별을 끊임없이 받았다. 외모면에서도 휘트니가 인기가 절정이던 시기에도 피부색 때문에 흑인과 백인에게 번갈아가며 인신공격을 받아왔듯, 프레디 역시 외모(돌출된 앞니)로 외면당한 경험들 때문에 이 컴플렉스에서 평생 벗어나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성적 정체성(영화에서 휘트니 역시 동성 연인으로 암시되는 인물이 나옴)을 공식적으로 드러내지 못했기에 내면의 혼란과 고통이 극심하였을 것이다.  설상가상 휘트니는 어릴 때 성적 학대를 당했지만 누구에게도 알리지 못한 채 평생 트라우마를 안고 살았다. 프레디 역시 이성의 연인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한 채 동성 연인들을 만나는 동안 느끼게 되는 혼돈과 억압 등 여러 가지 부정적 감정이 늘 내재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에이즈(AIDS) 환자들은 ‘악마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극단적인 지탄을 받는 시대였으므로 결국 프레디는 발병 사실을 숨기며 적극적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요절했다. 휘트니는 수년 동안 마약을 비롯해 온갖 종류의 범죄를 저지르는 남편을 뒤치다꺼리하며 자신도 마약에 중독되어 피폐한 시절을 보내다 어렵게 재기를 준비하던 중 갑자기 사망하였다. 성적 다양성이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금기시되던 시절이었기에 이들은 성소수자로서의 고민을 혼자 감당하며 고통 속에 살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당시는 이러한 고민을 의논하거나 의지할 대상이 거의 없었을 것이기에 그들의 삶이 더욱 가슴 아프다.  그런데 나는 휘트니 휴스턴의 다큐 영화를 보면서 프레디에게서 느낀 것의 갑절 이상의 연민으로 내내 눈물을 흘렸다. 물론 <보헤미안 랩소디>가 대중적 상업 영화인 이유도 있겠지만 극영화 속의 프레디는 독실한 파르시의 삶을 강요하는 아버지에게서 독립할 때도, 이성과 결혼(사실혼) 후 결별하고 또 동성의 연인을 만날 때도, 당시로선 파격적인 음악의 장르와 음반을 발매할 때도 대체로 모든 것을 주도적으로 선택하고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반면 휘트니는 여느 여성들처럼 가부장제 질서 속에 억압된 여성의 삶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휘트니는 아주 어린 시절 부모의 돌봄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동성 사촌에게 성적 학대라는 충격적 경험까지 하고, 부모의 불화와 이혼으로 불안정한 성장기를 보냈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에게서 혹독한 보컬 트레이닝을 받으며 천부적인 가창력과 열정으로 당시 미국인이자 흑인 솔로 여가수로서는 유일무이하게 세계적 명성까지 얻게 되었다. 그러나 각종 범죄를 일삼는 남편과의 불행한 결혼 생활로 인해 음악인으로서의 그녀의 삶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불행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자신이 꾸린 가정만큼은 끝까지 지키려 고군분투하지만 결국 원인조차 불분명한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다. 게다가 그녀가 벌어들인 수입은 아버지와 오빠들에게 관리되다 어디론가 사라지고 급기야 극심한 생활고까지 겪게 된다. 이렇듯 평생 그녀의 삶에서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고, 대체로 가족이나 남편, 타인과 언론 등에 종속되거나 결정되는 일들이 많았을 것이다. 물론 어떠한 이유로도 마약, 약물 등에 빠진 그들의 선택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영화에서 두 사람 모두 늘 노래를 흥얼거리는 장면들이 많은데 그것을 보며 또 가슴이 아렸다.   사진 출처 - 사단법인 시민과 같이가치 with kakao의 #더불어삶 프로젝트 공모전 이미지  내가 휘트니나 프레디를 칼럼에 소환한 이유는 그들의 주옥같은 음반 때문만은 아니다. 두 사람은 인종, 성적 정체성, 종교, 경제적 배경, 심지어 외모까지 모든 것이 주변인이었다. 3옥타브를 넘는 천재적인 음악성으로 최고의 인기를 얻는 순간에도 주류 세계의 차별과 혐오에 시달렸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여전히 차별과 혐오에 맞서 싸우고, 또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세계적 스타들의 삶도 이러할진대, 우리 주변의 이름 없는 소수자와 약자들의 삶을 새삼 돌아보게 되는 추운 겨울이 또 왔다.  ※ 영화를 보고 작성한 내용이므로 실제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주윤아: 성평등 민주주의를 꿈꾸는 교육노동자
2018-12-11 | hrights | 조회: 417 | 추천: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