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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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는 언론계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이 멘토가 되어, 작성한 칼럼에 대한 글쓰기 지도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칼럼니스트로 선정된 김시형, 박용석, 방효신, 서동기, 서진석, 정석완, 조동순, 조예진님이 돌아가며 매주 한 차례씩 글을 씁니다. 칼럼니스트를 위해 김도원(YTN), 안영춘(한겨레), 우성규(국민일보), 이오성(시사인), 장형우(서울신문), 전진식(한겨레), 조일준(한겨레) 기자가 멘토 역할을 맡아 전문적인 도움을 줍니다.

서진석/ 회원 칼럼니스트 2011년, 크로스핏(Cross-Fit)이 한국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크로스핏을 하고 있던 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그게 무슨 운동이야?”라는 질문을 종종 받아왔다. 그럴 때면 ‘단기간 다이어트에 성공할 수 있는 운동’으로 설명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명쾌한 설명을 들었다. 크로스핏은 ‘아령 들고 달리기’라는 것이다.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신체 능력을 골고루 향상시키는 운동이라는 점을 강조한 표현이었다. 예를 들어 크로스핏은 턱걸이 세 개, 100미터 달리기, 팔굽혀 펴기 열 개를 3회 반복하는 식이다. 한 사람은 다양한 정체성을 갖는다. 나는 남성, 학생, 이성애자, 노동자 따위의 정체성을 느끼며 살아간다. 그런 정체성을 느끼며 달려오던 내가, 정당을 만나 선거를 치르게 됐다. 아령을 들게 된 것이다. 아령을 드는 것은 무거웠지만 중독성이 있었다. 비로소 사회의 일원으로서, 시민으로서의 하루를 사는 것 같았다. 사진 출처 - ‘The Identity Issue, 2017’, <WINDMILL> 청년정당을 표방하는 정당이었기에 기존의 춤, 연설 위주의 선거운동을 지양했다. 촛불이 만든 대선인 만큼, 촛불정국에서 등장했던 적폐 내용을 피켓에 담고 물풍선을 던져서 맞추는 퍼포먼스를 기획했다. 내가 속한 경기도의 부천, 의정부, 평택, 수원 등을 돌아다니며 청년 당원들과 ‘물풍선 퍼포먼스’를 진행했다. 어린 아이들이 관심을 보였고, 덩달아 따라온 부모들에게 우리의 정책을 홍보할 수 있었다. 언론사의 취재 요청이 들어올 만큼 반응도 좋았다. 그러나 장미대선을 향해 뜨겁게 달렸던 열정의 순간들이 마냥 행복하기만 했던 건 아니었다. 처음 맡아보는 대표 역할에 좌충우돌하기도 했다. 대표로서 ‘역할’을 배분했어야 했는데 무턱대고 내가 맡아서 모든 걸 하려했던 점이나, 대표로서 처음으로 정당 체계에 적응하고 소통하는 모습이나, 대표성을 가진 기구의 장으로서 감당해야하는 최소한의 희생 등 많은 부분에서 부족했다. 학생으로서, 연인으로서의 모습에서도 충실한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그렇게 생애 첫 선거가 끝났다. 다시, 일상이다. 돌이키면 부족했던 나의 모습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아령을 들고 오랫동안 달린 것만 같은 기분이다. 나의 사회적, 경제적 정체성이 ‘진보’를 추구하기에 부족했음에도, 진보를 추구하는 집단에서 활동했던 것이 내겐 ‘아령’이었던 것도 같다. 아령을 내려놓고 짧지만, 격렬했던 ‘아령 들고 달리기’를 천천히 돌이켜볼 때가 왔음을 느꼈다. 크로스핏에는 ‘테스트 데이(Test Day)’가 있다. 한 달 전 나의 기록과 비교하는 날을 말한다. 부족했던 모습을 부여잡고 있는 대신, 맨몸이 아닌 아령을 들고 달리려했다는 사실을 느끼며 하루를 살아간다면, 다음 테스트 데이에 나는 더 성장해 있지 않을까? 서진석 : 반 제도권적 제도권 수용자. 항상 자퇴와 탈당을 고민하며 살고 있습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3 | 추천: 1
서동기/ 회원 칼럼니스트 촛불의 파도를 떠올린다. 청각 장애를 가진 이들을 위해 함께 손으로 이야기 나누던 광장. 나이, 성별, 지역 등 우리를 가르던 것들이 함께 어우러지며 어둠에 대항하던 작은 불빛들. 서로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각자의 꿈을 나누던 광장. 하지만 과연 촛불이 이겼나? 지난 대선의 장면들을 복기해본다. 대선기간 한 신문사에서 비극적 죽음이 있었다. 우리시대의 상식파를 자처하는 ‘합리적’ 시민들이 죽음을 비웃고 신문사를 증오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자신의 지지후보에 비판적인 논조를 보인다는 것이 그 이유다. 그들의 광기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죽음에 익숙해진 탓일까. 비극 앞에 내뱉어진 그들의 발언들은 끔찍했다. ‘동성애가 싫다, 동성애에 반대한다.’는 1등 후보의 실언에 사과를 요구하는 사람들은 복잡다단한 정치의 현실을 알지 못하는 공상적인 ‘입진보’가 되었다. 시민들의 사과 요구는 지지후보를 흠집 내고 자기 몸집을 키우려는 어떤 세력의 정치 음모가 되었다. 우리시대의 합리적 시민들은 당사자들에게 ‘적폐 혁파의 대의’ 앞에 함부로 끼어든 ‘얼치기’들에게 현실정치의 냉혹함을 가르치고 증오를 퍼부었다. 잠시 상상을 해보자. 성주에서 진행 중인 굴욕에 작은 소설을 하나 더해 생각해보는 것이다. 경찰이 사드배치를 반대하는 시민의 차량 창문을 깨트리고 미군에게 길을 터준다. 그 모습을 트럭에서 비웃으며 촬영하던 미군이 ‘젠틀’하게 대화하는 장면을 떠올리는 것이다. “하하, 동양인들은 참 싫지만, 우리는 동양인에 대한 차별은 반대한다고. 동양인 차별은 반대하지만 동양인과 혼인 합법화는 좀 더 생각해봐야지.” 당시 문제의 발언에 동양인을 대입하여 생각해보면 당사자들의 분노는 충분히 이해된다. 하지만 그들은 분노의 항의에 대꾸하지 않는다. 사진 출처 - 필자 촛불의 핵심 정신은 단순히 박근혜 따위의 탄핵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광장의 함성은 누군가 눈앞의 문제들을 대신 해결해줄 것을 요청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광장에서 자신의 목소리로 자신의 요구를 말했고 시민들은 서로 귀 기울였다. 하지만 광장의 목소리는 인물들의 정치와 선거에 지워졌다. 촛불의 목소리는 구세주에 과도하게 몰입한 광신도들의 부흥회 소리에 가려졌다. 지난 10년의 적폐에 대항해 ‘대의’를 위해 힘을 모아야 하는데 실없는 소리를 던지고 있다고? 그렇다면 감히 말한다. 당신들의 대의 때문에 촛불혁명이 망한 것은 아닐까. 다시 시작이다. 문제 해결의 시작은 문제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제 다른 차원의 어둠에 다시 새로운 촛불을 들어야 한다. 서동기 :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읽고 묻고 공부하는 중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1 | 추천: 2
방효신/ 회원 칼럼니스트 # 일동 침묵. 내년에 사표 쓰고 캐나다로 갈 거예요. 젠더이론을 더 공부하고 싶어요. 교사하는 거 재밌는데, 학교 문화를 버티기 어려워요. 교장의 부당한 지시에 아무도 반대하지 않고, 튀는 행동 하지 말라며 제 팔을 붙잡아요. 학교 운영 계획이나 실행 절차가 불합리한 거 당신들도 아는데, 관행이고 말 해봤자 안 바뀐다며 동료 교사에게 단속당하는 일상을 못 견디겠어요. 생각의 방향이 같은 선배들은 좀 더 싸우면서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관철시켜보라고 해요. 그런데 제가 왜, 혼자, 그래야 돼요? 그러고 나서 후폭풍도 오롯이 혼자 겪고요? 어떤 이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요. 문제라고 느끼는 제가 문제인 것처럼 취급하죠. '탈조선'하는 게 상황을 회피하는 건가요? 행복하게 사는 길이 보이는데, 더 나은 선택을 하는 것은 당연하잖아요. # 왜요? 초등학교 여교사라고 소개하면, 결혼정보회사 신붓감 1위라던데 하며 피드백을 받곤 해요, 아직도. 제 나이가 결혼하기 딱 좋은 20대 후반이라며 소개팅 자주 하냐고 물어보고, "치마도 자주 입고, 예쁘게 하고 다녀." 하면서 외모 평가를 칭찬으로 하는 교사들의 시선이 불쾌합니다. 학교 업무와 전혀 관계없는 제 사생활에 대한 조언과 "딸 같아서 하는 말인데,"로 시작하는 잔소리. 이런 문제에서 50대 전교조 선배들과 교장, 교감 같은 관리자의 다른 점이 뭐죠? 학급 운영, 학교 내 의사 결정 구조의 민주화, 동료 간 감정 소통에 대한 관점과 실천이 다릅니까? 글쎄요. 요새 관리자들은 대화 기술이나 통제 수법이 세련되었어요. 교사 개인의 상황과 성향에 따라 적절히 위로하고 상담해가며 자신들이 원하는 결과를 얻어냅니다. 전 내년에 외국으로 어학연수부터 다녀오려고요. 거기서 내 길을 찾아보겠습니다. 다른 방식의 사람들을 만나야겠어요. # 진짜요? 아니, 그러고 싶은데 다른 직장 잡기는 어려울테고. 교사 때려 쳐도 무엇을 하던지 밥은 먹고 살겠죠? 아유, 모르겠다. 일단 연수휴직을 신청합니다. 요즘 내가 왜 사는지 모르겠어요. 학교가 재밌었는데, 이제는…. 교사 15년 했는데, 출산휴가 3개월 빼고 한 해도 안 쉬었어요. 임계치에 다다른 느낌이에요. 할 일이 하루 종일 들이닥치고, 끝없이 무엇인가 하고 있고, 애들은 말 안 듣고, 학부모들은 아침저녁으로 근무시간 아니어도 연락합니다. 지쳤어요. 사진 출처 - 범페미네트워크 # 그런 말 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아요. 7080 운동권 선배들은 감수성과 갈등해결 방법이 그 시절에 머물러 있어요. 일을 하는 방식이나 인간관계를 맺는 경우에도 일방적입니다. 의견을 제시하면 당신 말만 해요. 제 의견에 대응하고 소통하셔야죠. 대화라는 게 말을 주고받는 건데, 이 분들은 SNS(사회관계망서비스)하니까 젊은이 생각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은 아닐까요? 물어본 적도 없는 자기 경험을 한 시간 내내 말씀하시면 저는 언제 끼어듭니까? 당신 말씀에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지만, 실은 재미없어요. '나이주의'라는 거 들어보셨습니까? # 2 사회생활을 하면, 직장을 그만 두고 싶은 다양한 이유가 수시로, 혹은 때때로 찾아온다. 교사는 그만 두기 아까운 직업이라고들 한다. 정년이 보장되고, 퇴직하면 매달 연금도 나오고, 평소에도 지시에 순응하고 살면 다른 직장에 비하면 '잘릴' 위험이 적다. 정해진 시간에 눈치 안 보고 퇴근할 수 있고, 아침에 눈뜨기 어려운 지경의 체력이 남았을 때 방학이 온다. 학벌에 비해 월급은 적지만 건강관리를 잘하면 평생 벌 수 있다고 계산해보면, 30대에 그만 두기 아깝다. 8~13살 아이들 수업, 학부모 상담, 선후배 교사 및 부장, 교감, 교장과의 인간관계와 업무 지시, 그리고 동시에 벌어지는 감정적, 이성적인 종합 사안을 처리하고 컴퓨터에 입력하고 다음 날 수업할 재료를 준비하다 보면, 내 안의 가치관들이 충돌하면서 빚어지는 순간의 답답함은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라고 착각해도 괜찮다. 그런데, 지난 두 달 동안 만난 2,30대 선생님들의 대화 소재는 '사표', '휴직', 그도 아니면 '병가'였다. # 3 성차별이 만연한 이 나라에서, 거의 유일하게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받는 교육 공무원인 초등학교 여교사는, 눈치 없이 퇴근할 수 있다는 이유로 저녁이 되면 집으로 다시 출근해서 가사와 육아를 전담한다. 그게 당연한 것처럼. 여성이 교사생활 하는 목표가 자아실현이 아니라, 생계유지가 맞는데도, 아이에게 신경 써 주지 못할 때 "내가 얼마나 벌려고 내 자식의 애절한 눈빛을 외면하나" 싶은 현실. 가사노동을 부부가 철저히 분담하거나 남성이 더 하는 경우는 '없다'. 평등하다고 보이는 당신 친구의 사례 말고 객관적인 통계를 보라. 맞벌이 한국 여성은 남편보다 무급가사노동을 4배 이상 하고 있다.(3시간 13분 vs 41분) 불행하게도, 여교사들이 공적인 자신의 직장 생활에 충실할 수 없는 상태로 매일을 견디는 장면을 보았다. 집에 가는 길에 유치원 오후반에서 아이를 픽업해서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치우고, 밤 11시에 컴퓨터를 켜서 학교에서 가져온 업무를 한다. 다음 날 아침에 아이를 깨워서 먹이고 입혀서 같이 집을 나서는데, '집안일과 육아를 매일 해도 보람찬 것'은 '모성 본능이라는 게 엄마가 되면 자동으로 생기기' 때문인가? 결혼을 해도 아이는 낳지 말라는 40대 여교사들의 진심어린 충고를 들었다. 아니, 결혼 같은 거 하지 말고 편하게 살라는 기혼과 미혼의 50대 여교사들을 만났다. 그리고 결혼을 하지 않은 30살 안팎의 여교사들이 직장을 그만 두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을 본다. 자기가 생각했던 직업 생활은 이런 게 아니다. 그들은 고통을 더 겪고 싶지 않다. 지금이 행복하지 않다. # 4 오늘 아침, 결혼했고, 3살 아이가 있고 뱃속에 둘째를 가진 같은 학교 교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선생님, 제 몸이 너무 안 좋아서요. 일주일 병가를 썼어요. 전에 말씀하신 학급 운영 공부를 같이 하고 싶은데, 그 모임에 '이름'만 올려놓아도 돼요? 저는 학교를 퇴근하고 나서 저녁에 사람들을 만날 상황이 안돼요. 주변에 애를 봐줄 데가 없거든요. 혼자 '이걸' 감당해야 돼요." 방효신 : 초등학교 교사, 전교조 조합원, 페미니스트. 세상을 바꿀 생각은 없습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5 | 추천: 2
지영의/ 청년 칼럼니스트 한 할아버님이 카페로 들어섰다. 눌러 쓴 옛스러운 모자 사이로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님은 등장부터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낯선 듯 주변을 한참을 둘러보시다가 머뭇머뭇 카운터로 다가가 짧은 한마디를 툭 꺼내놓으셨다. “커피.. 있소?” 바로 옆에 커피 종류가 수두룩하게 적혀 있는 메뉴판이 무색해지는 말이었지만 젊은 매니저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예. 커피 있습니다.” 주시오. 고맙소. 짧은 말과 함께 할아버지는 카페의 한 구석으로 가 의자에 걸터앉았다. 내 시선은 매니저에게로 향했다. 아직 카운터 앞에 선 그의 표정에 잠시 고민이 어렸다. 포스에 무슨 커피를 찍어야 할지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주문이 아닌 주문을 받았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러나 젊은 매니저는 할아버지에게 무슨 커피를 원하시냐고 다시 묻지 않았다. 그저 난처하게 한 번 웃고는 할아버지에게 말했다. “따뜻하게, 설탕 넣어드릴까요?” 할아버지는 고맙다고 대답하셨다. 매니저는 커피를 들고 할아버지에게 다가가 커피 값을 받았다. 이천오백원입니다. 할아버지가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하나씩 세는 동안, 그는 옆에 서서 기다렸다. 매니저는 돈을 받아들고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자리로 돌아갔다. 할아버지가 카페에 들어서서 낯설게 두리번거리는 것을 처음부터 왠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던 나는, 괜스레 고마웠다. 언젠가의 기억이 떠오른 때문이다.   사진 출처 - 필자   나의 아버지는 연세가 많으신 편이다.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오시는 일도 드물었다. 그러던 아버지가 어느 날 함께 궁궐 구경을 하자고 서울로 올라오셨다. 초여름 뜨거운 햇볕에 궁궐을 다 돌아보고, 잠시 쉴 곳을 찾아 한적한 카페로 아버지를 모시고 들어갔다. 자리를 잡고 회사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으러 잠시 자리를 비웠다 카페로 들어오는데, 카운터 앞에 서신 아버지가 보였고 그 너머로 카페 아르바이트생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그러니까 커피 뭘로 드리냐구요. 똑바로 말씀을 하셔야죠.” 의아한 마음으로 아버지 옆에 다가서자, 짧은 순간 몇 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의 머쓱한 표정과 주문대 앞 테이블에 놓인 메뉴판을 신경질적으로 흔드는 아르바이트생. 상황이 이해가 되는 순간, 화가 치밀었다. 카라멜 마끼아또. 카페라떼. 스트로베리스무디. 넘쳐나는 영어 이름 속에서 딸에게 음료 한잔이라도 사주고 싶었던 나이든 아버지는 그저 무엇을 골라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낯선 것을 어려워하는 것이 타박할 일이란 말인가. 온갖 억울함이 스쳐지나갔지만, 그냥 아버지에게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 우리 나가요. 여기는 마실 걸 안파네요. 돌아가는 길, 아버지는 알바생이 내밀었다는 그 메뉴판에는 종류가 너무 많았다고만 하셨다. 매니저가 묵묵히 웃으며 할아버지에게 건넨 커피가, 그 모습이 나에게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쌀쌀한 가을 날씨에도 카페의 공기가 어딘가 모르게 따뜻해졌다. 아버지와 함께 쫓기듯 나왔던 기억 속의 카페와, 낯선 할아버지가 커피를 홀짝이는 카페 모두 ‘카페’였지만, 달랐다. 이곳에는 소통이 있었다. 매니저가 할아버지에게 전해준 것은 따뜻한 커피이면서, 한잔의 소통이었다. 아버지에게 딱딱한 메뉴판을 내밀었던 알바생에게도 소통하려는 의지만 있었다면, 하나의 주문거리가 아니라, 마른 목을 축일 마실 것을 제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따뜻한 커피를 마시고, 쉬다 나가시는 낯선 할아버지를 보며, 지난 기억이 떠올라 그저 고마웠고, 마음이 따듯해졌다. 의지만 있다면 소통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친절은 복잡한 것이 아니고, 배려 역시 어려운 것은 아니다. 이 카페에는 ‘커피’가, 커피가 있었다. 지영의씨는 KTV 국민방송에서 인턴기자로 활동 중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1 | 추천: 1
박서현/ 청년 칼럼니스트 학창시절 조례 때 태극기 앞에서 한 맹세를 기억할 것이다. 왼쪽 가슴에 오른손을 올리고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라고 외쳤다. 오랜 시간 태극기 앞에서 한 맹세와 같이 애국은 모두에게 있어 중요한 가치이다. 국가는 국민들에게 안전과 자유를 보장한다. 또 우리는 조국, 고향이라는 단어 앞에서 따뜻한 정서와 추억을 떠올린다. 그리고 최근 태극기를 들고 국가수호라는 구호를 외치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애국이 무엇인지, 그 이전에 애국을 위해 지켜야 할 국가란 무엇인지는 깊게 고민해 봐야할 문제이다. 현대 사회정치이론의 근간이 되는 사회계약론에서 루소는 국가가 개인의 자유와 평등, 공동의 이익을 위해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맺는 계약이라고 정의한다. 우리나라 헌법 제1조 역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명시한다. 즉 국가는 특정지도층이나 기존의 사회체계를 의미하지는 않으며, 국가의 본질은 국민이라는 것이다. 사진 출처 - 인천광역시 남동구 블로그 그러나 어떤 이들은 단순히 국가 체제 자체를 국가의 본질로 착각하곤 한다. 그리고 체제유지와 지도층의 편익을 위해 국민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진짜 애국이라 믿는다. 안중근은 그의 자서전에서 ‘만일 백성이 없다면 나라가 어디 있겠소? 더구나 국가란 몇몇 고관들의 것이 아니라 당당한 2000만 민족의 것입니다’라고 했다. 애국이라는 말을 외칠 때, 우리가 국민들을 지키려고 하는 것인지, 혹은 국가라는 허상을 지키려고 하는 것인지 주의해야만 한다. 여러 논란 끝에 2013년 국기에 대한 맹세는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로 바뀌었다. 태극기 앞에서 우리가 충성을 다해야 하는 대상은 조국이나 민족의 무궁한 영광이 아니다. 몸과 마음을 바쳐야 할 국가도 아니다.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위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애국임을 기억하자. 박서현씨는 노동과 정치 경제학에 관심이 있는 경제학과 학생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27 | 추천: 1
: 무분별한 사이다 뚜껑 따기, 김빠진 사이다는 누가 마시나 지영의/ 청년 칼럼니스트 최근 유행하는 신조어인 ‘팩트폭력’의 정의는 사실을 기반으로 상대방의 정곡을 찔러서 반박 불가의 상태로 만든다는 뜻이다. 혼란스러운 사회속에서 온라인 게시판과 댓글란, 그리고 카카오톡 대화방에서 ‘팩트폭력’이라는 말이 넘쳐난다. 사람들은 상대방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혹은 상대가 감추고 있는 비밀을 여지없이 폭로하면서 이 용어를 사용한다. 거침없이 팩트폭력이 담긴 발언을 하는 것은 답답한 사회 문제에 속 시원한 해법을 제시하는 것을 의미하는 ‘사이다’로 묘사된다. 이 현상은 일관, 거짓과 은폐 앞에서 사실을 속 시원하게 드러내는 당연하고도 정당한 행위로 보인다. 그러나 이 팩트폭력이라는 말이 유행하면서, SNS에서 오가는 언어에 논리와 도덕적 성찰이 사라지고 있다. 예컨대 ‘팩트’라면 그 말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비윤리적인지는 상관하지 않고 꺼내게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도를 넘은 발언에 팩트라는 말을 얹어 직관적으로 던진다. 이 중 대다수의 경우가 ‘팩트를 이용한 논리적 제압’과 ‘차마 해선 안 될 말’을 구분하지 못한다. 이 경계가 애매해지는 것은 ‘사실’이 자신이 하는 발언의 정당성을 부여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이기 때문에 말해야 하고, 말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개인의 존엄을 조롱하거나, 약점을 함부로 폭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사회 윤리로서 지켜야하는 선이다. 이 선을 넘는다면 아무리 정당화 하려고 하더라도, 팩트폭력의 본질은 결국 언어폭력이다. 팩트폭력으로 개인을 비판할 때에 사용되는 ‘팩트’들은 피해자의 개인정보, 가정사와 지인 등 사생활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연예인의 성형 사실, 이혼한 개인의 가정사. 당사자가 그 사실이 공공연히 적시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기본적인 사실은 고려되지 않는다. 한참 만에 돌아온 연예인에 대한 기사 댓글에, 공백기동안 어디 어디를 성형했는가를 분석한 댓글이 수만의 공감을 얻었다. 얼굴 사진에 군데군데 붉게 체크를 하고, 과거의 사진과 정확히 비교한 그 댓글은 ‘반박불가’의 팩트폭력으로 인정받았다. 그동안 사회적, 윤리적 약속으로 정해둔 보이지 않는 선을, 사람들은 ‘팩트폭력’이라는 말을 타고 넘어간다. ‘팩트’라는 말 하나로, 그래도 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 팩트폭력에 의해 피해를 입는 사람은 그 명제가 ‘사실’로 제시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방어조차 쉽지 않다. ‘어쨌든 이게 사실이잖아’라는 말은 꽤나 가혹하고도 무섭다. 여기서 더 근본적인 문제는, 대다수의 ‘팩트’가 주관적이라는 점이다. 팩트폭력을 휘두르는 사람들의 팩트는 실은 사실에 기반을 두기보다는, 그 상황과 개인을 대하는 발화자의 가치판단일 뿐인 경우가 많다. 하나의 현상에 서로 다른 가치판단을 하는 사람들이 각자의 판단이 옳다고 다툰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통계가 나와 있는 수치조차 쓰이는 상황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쟁점이 갈리고, 사회적으로 논란이 크게 이는 문제일수록 가치 다툼은 더 심해진다. 서로의 가치관이 팩트라고 다투다가 어느 순간에는 주장이 만연해지고, 무엇이 팩트인지는 희미해진 채 논쟁만이 남는다. 최근 몇 년간 우리 사회를 뒤흔들었던 이슈들이 이렇게 지나갔다. 누군가에게 정답으로 제시하고 휘두를 만큼의 완벽한 팩트는 과연 있는가. 비윤리적 불협화음을 조장하는 소통방식이 사회에서 이기는 화법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많은 경우의 팩트폭력이 이렇게 이루어진다. 무분별한 사이다 뚜껑 따기가 이렇게 일어나는 것이다. 사이다는 뚜껑을 연 즉시 톡 쏘는 청량함과 시원함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 순간뿐이다. 그렇다면 김빠진 사이다는 누가 마시나? 팩트폭력은 사실 우리가 그동안 소통할 때에 지키기로 약속한 ‘질서’를 파기하는 행위다. 모두가 지키기로 합의했던 질서가 사라지면, 피해를 입는 것은 가해자를 제외한 나머지의 사람들만은 아니다. 무질서 속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고정적이지 않다. 결국 모두가 피해자가 된다. 그렇다. 당신이 따놓은, 김이 다 빠져버린 그 사이다를 마시는 것은 결국 당신의 몫이다. 당신이 가볍게 휘두른 말, 그리고 그 말들이 쌓여 만들어지는 언어폭력이 일상적인 사회. 사회속의 모든 행위에는 언제나 책임이 따른다. 결국, 팩트폭력의 피해는 당신 또한 입게 될 것이다. 그래도 당신은 그게 ‘팩트’니까 괜찮을까? 지영의씨는 KTV 국민방송에서 인턴기자로 활동 중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23 | 추천: 1
박꽃/ 청년 칼럼니스트 영화 <레미제라블>(2012)에서 주인공 판틴(앤 해서웨이)을 가장 괴롭힌 사람은 누구일까? 많은 이들이 그녀가 일하는 공장의 작업반장을 떠올릴 것이다. 지독한 입냄새를 풍기며 판틴을 매일같이 성희롱하다가, 그녀에게 숨겨둔 딸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이런 요망한 년, 당장 여길 떠나!”라고 외치는 그 사람 말이다. 진짜 그럴까? 어느 정도 그렇기는 하지만, 결코 그게 전부는 아닐 것이다. 그녀가 생계를 위협받고 결국 매춘까지 하게 된 건 일자리를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작업반장은 판틴을 희롱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녀를 마음대로 해고 할 권리까지 가지고 있지는 않다. 신사적인 태도로 “여기는 서커스장이 아니니 조용히 해결하시오”라는 한 마디를 뱉고 홀연히 제 볼일을 보러 사라진 사장, 장발장(휴 잭맨)의 허락 없이는 말이다. 판틴을 궁지로 몰아넣은 데에는 사장, 작업반장, 노동자로 이어지는 서열 구조가 있다. 작업반장은 사장의 경영철학을 따르는 임금노동자 즉 부역자이며, 서열 구조를 설계한 진짜 범인은 사장 장발장이다. <레미제라블>(2012)의 판틴(앤 해서웨이) 사진 출처 - 무비스트 서열 구조의 가장 아래에 존재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구조가 쉽게 인식되지 않는다. 간단하다. 눈에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조직이 클수록 더 그렇다. 대형 보험사의 설계사로 일하는 나의 엄마는 그래서 얼굴 한 번 보기 어려운 사장보다, 같은 사무공간에서 군림하는 팀장을 더 싫어한다. 매일같이 자기 하루에 침투해 실적 압박을 주고, 내키는 대로 퇴근 시간을 늦춰버리는 그 사람 말이다. 당사자에게는 피부로 느껴지는 자기 현실이 가장 힘이 세게 마련이다. 그러나 당사자 아닌 제3자는 상황을 보다 구조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부의 사실을 보고 상황 전부를 오독하게 된다. 박유하 씨의 저서 <제국의 위안부>가 그런 문제를 안고 있다. 박유하 씨는 위안부 할머니들이 남긴 몇 가지 기록을 근거로 들며 그녀들이 일본군보다 조선인 업주를 더 싫어했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일부 사실일 수 있다. 매일같이 자신의 일과를 감시하고, 성 노동을 강요하며, 임신하면 낙태를 시키는 조선인 업주를 싫어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증명하는 것은 조선인 업주 역시 일본 제국주의라는 구조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점이다. 위안부가 일본군과 ‘동지적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눈길>(2015)의 위안부 소녀 김향기, 김새론 사진 출처 - 무비스트   3월 1일 개봉을 앞둔 영화 <눈길>은 그런 오독 없이 일본군 성 노예의 참상을 전한다. 일본 제국주의, 일본군, 조선인 업주, 위안부로 이어지는 서열 구조를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정제된 화법으로 피해자를 보듬는다. 특히 영화는 일부 일본군도 구조의 피해자로 묘사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피해 받은 위안부의 역사를 오독하지 않는다. 최근 명예훼손 소송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박 하 씨에게 이 영화 관람을 권한다. 박꽃씨는 현재 무비스트 취재기자로 재직 중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27 | 추천: 0
강은진/ 청년 칼럼니스트 최근 소셜미디어에서 한 여자 연예인이 찍었던 화보의 컨셉이 논란이 됐다. 매춘여성, 가난한 집의 어린 딸, 지적장애여성 등 사회적 최약자층과, 무구한 소녀의 이미지를 성적 대상화했다는 이유이다. 화보에 대한 비난에 더해 십대소녀와 성인여성들은 어린 나이에 성희롱, 성폭력을 당한 경험들을 소셜미디어에 털어놓았다. 과거나 현재나 많은 소녀들이 검은손과 눈길에 당해야만 했다. 그녀들이 저항하고 맞서기 힘든 힘을 휘두르는 자들의 논리는 “예뻐서 예뻐해 주겠다는데, 뭐 잘못됐어?”였다. 이런 뻔뻔함으로 그들은 모욕과 수치를 그녀들에게 줬다. 나 또한 십대 때, 대낮의 길 한복판에서 성희롱을 당한 기억이 있다. 소녀들을 향한 성폭력은 문제 있거나 유별난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닌, 여성이라면 혹은 약자였다면 누구나 한 번쯤은 당해본 경험이다. 나는 현재 성매매 피해를 입은 여성을 돕는 기관에서 일하고 있다. 진행하는 일 중 청소녀성매매예방 프로그램이 있는데, 말이 ‘예방’이지 현실은 잔인하다. 우리나라의 청소녀 성매매 최초 피해 연령은 평균 16세로, 가장 큰 계기는 “가출 후 생계비를 마련하기 위함”이다. ‘또래 포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청소년 성매매의 70%는 채팅과 친구의 소개로 이뤄진다. 이 배경에는 요즘 유행하는 인터넷 방송과 스마트폰 어플을 통한 조건만남, 고소득 아르바이트를 가장한 사기처럼 돈만을 좇는 어른들이 만든 문화와 범죄가 있다. 정말 그녀들 스스로 원해서 가출을 한 걸까? 한창 보호받아야 될 소녀들을 가정 밖으로 쫓아낸 것은 누구일까? 길 잃은 그녀들을 “예쁘다.”라는 사탕발림으로 꼬드겨 몸과 성을 돈을 주고 사는 이는 누구인가? 그녀들보다 힘이 있고 돈이 있다는 이유로 유린하고 버리는 그들은 누구인가? 어린 그녀들을 나무라기에 우리 어른들이 저지른 잘못들이 많지 않은가? 과연 소녀들을 손가락질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을까. <나쁜 페미니스트>로 유명한 록산 게이는 “우리는 강간에 관련된 것들을 지나치게 수용하는 문화에 살고 있다”라고 했다. 앞선 화보 문제도 그렇고, 소녀스런 의상을 입고 섹시하게 몸을 흔드는 여자 아이돌, 오디션 프로에서 성적인 가사가 담긴 노래를 부르는 어린 소녀, 판타지로 포장해 미성년자와 아저씨의 사랑을 그린 드라마 등, 미디어에 쉽게 노출되는 것들만으로도 셀 수 없다. 우린 너무 무디다. 여성, 그것도 어리고 저항할 힘이 없는 어린 소녀를 향한 성적판타지를 묵인하고 있다. 판타지란 말도 옳지 않다. 판타지란 마법사나 요정, 몬스터처럼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칭해야 한다. 판타지가 아닌 현실이다. 미디어에 묘사된 모습들을 모르고 동경하는 소녀들이 있고, 그녀들을 향한 부적절한 욕구가 있다. 청소년성매매는 결국 몸과 마음이 찢겨 갈 곳 없이 전전하는 소녀들이 늘어나는 사건이자 범죄이다. 사진 출처 - pixabay 혹자는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한다고 할 수 있겠지만 성인 여성들뿐 아니라 소녀에 장애여성까지 그 피해층이 줄기는 커녕 갈수록 늘어만 가는 것은 확실히 문제가 있다. 현재 세계적 인신매매 규모는 2700만 명에 이른다. 무기, 마약 매매와 더불어 3대 국제범죄 산업이다. 그 중 소녀가 75%, 또 그 중 58%가 성착취의 대상이다. 인신매매의 1차적 원인은 성매매 남성들의 착취이다. 성매매가 마치 성폭력을 줄여주는 필요악처럼 말하는 이도 있지만 한국은 성매매 규모도, 성폭력 범죄도 최상위에 속한다. 여성을 향한 남성의 폭력적인 욕구를 수용할만한 것,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게끔 포장하는 언론이나 우리 사회를, 그것에 무딘 자신을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소녀들의 행실만을 지적할 것이 아니라, 위기의 상황으로 그녀들을 내몰고, 헤어나올 수 없게 돈과 폭력으로 세뇌하는 사회 현실을 바로 볼 필요가 있다. 우리 여린 새싹 같은 소녀들이 봄을 피울 수 있도록 품어줄, 따뜻하고 넓은 들판을 마련하기 위하여. 강은진씨는 책과 영화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쓰는 국문학과 학생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29 | 추천: 1
김정웅/ 청년 칼럼니스트 “... 어느 스터디에 갔더니 장수생이 자기가 공부 좀 많이 했으니까 알려주겠다는 식으로 선배라도 된 마냥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거예요. 그 사람 보니까 장수생 진짜 싫더라고. 장수생이 장수생 된 데는 다 이유가 있지 않겠어요?” 전문직 자격증 시험, 7·9급 공무원시험, 고등고시, 대기업·공기업 공채시험, 의전원·치전원·약전원·로스쿨 입학시험에 수능 시험까지. 우리 사회에서 개인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시험’이라는 좁은 문을 통과해야만 한다. 특히 한국 사회처럼 경쟁이 극에 달한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하지만 넘치는 인력에 비해 만족스런 삶을 영위하게 해줄 수 있는 자리가 턱없이 부족한 이 나라에서는 우수한 재능과 필사의 노력 그리고 약간의 행운이 뒤따라준 소수의 인재만이 극한의 경쟁을 뚫고 살아남을 수 있다. 이 경쟁에서 승자가 되지 못한 사람들은 재수, 삼수의 수험생활을 거쳐 소위 말하는 ‘장수생’이 된다. 일전에 필자가 준비했던 어느 시험도, 이 땅의 시험들이 대체로 그렇듯 응시생에 비해 턱없이 좁은 문으로 인해 장수생이 차고 넘쳐나는 시험이었다. 시험공부를 위해 참여하던 한 스터디에서 비교적 나이가 어렸던 한 수험생은 장수생 이야기를 내게 해주었다. 사실 그녀가 뒤에 덧붙인 “장수생이 장수생 된 데는 다 이유가 있지 않겠어요?”라는 말을 듣고는 깜짝 놀랐다. 그가 잘못된 행동을 한 건 순전히 개인의 인격과 성품, 타인을 대하는 태도 등에 모자람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녀의 말은 시험을 오랜 기간 통과하지 못하는 그의 ‘능력의 부족’까지 함께 비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의 말은 남에게 무익한 설교와 훈계를 일삼는 이에 대한 비판이었을 테고, 뒤의 “장수생이 장수생 된 데는...”이라고 덧붙인 것은 불쾌한 감정으로 인해 나온 다소 과격한 언행이었을 테다. 인격의 부족과 능력의 부족을 혼동한 것도 불쾌감으로 인한 감정의 동요 탓이라고 하면 완전히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함께 듣던 스터디원도 “그래, 장수생들이 좀 그렇다니깐”이라고 맞장구를 치는 모습을 보며, 그리고 그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이 모인 한 커뮤니티 사이트에서도 장수생들에 대해 위와 비슷하게 과격한 견해를 내비치는 글이 게재되는 것을 보며, 이런 식의 혼동이 생각보다 흔히 일어나기도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사회에서 개인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시험’이라는 좁은 문을 통과해야만 한다. 인력에 비해 자리가 부족한 이 나라에서는 소수의 인재만이 경쟁을 뚫고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재수, 삼수를 거쳐 소위 말하는 ‘장수생’이 된다." 사진 출처 - 이투데이 이런 일도 있었다. 얼마 전부터 한 회사에서 일을 시작한 친구의 말이다. “우리 부장은 일도 하나도 안 하는데 잘난 척 엄청 심하고 애들 잡기만 해. 솔직히 우리 부장이 여기서 나가면 어디 가서도 그 월급 못 받아. 그러니까 회사에 매달려서 월급 도둑질 하는 거야” 사실 이것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푸념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이 흔한 푸념 속에도 개인의 인격적 완성도의 결여와 능력의 부재는 혼동되고 있었다. 사실 필자는 그가 실제로 흔히 말하는 ‘월급 루팡’이라 능력에 맞지 않는 자리에서 한 달이라도 더 버티고자 하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 사실이 별도의 비판 사유가 될 수 있는 건지 의문이었다. 개인적으로 그 ‘무능한 부장’(그분의 무능력에 대한 증언이 사실이라면)이란 분은 어떤 마음일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기 어려운 나이. 현업에서 일하는 마지막 공간이 될지 모를 직장에서 한 해, 한 달이라도 더 버텨보려고 애쓰는 그가 시작하는 하루하루는 어떤 기분일까... 그 무엇보다도, 미래의 나는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한 개인이 무능하다는 사실 자체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쉽게 단언하기 어려운 일이다. 개인의 무능력함에 대한 비판이 금지된다면, 오판과 실수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 악영향을 끼친 지도자에 대해서도 너무 많은 면죄부가 주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얼마만큼의 무능이, 혹은 어느 위치의 사람의 무능력함까지가 비판의 대상인지를 규정하는 일은 대단히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서 발견할 수 있는 무능에 대한 비판 중 일부는, 어쩌면 이 글을 쓰는 나에게도 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어딘가 모르게 서글프다. 김정웅씨는 사회와 정치의 소통을 통한 문제 해결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쓰는 청년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21 | 추천: -1
이빛나/ 청년 칼럼니스트 병신년이 끝나간다. 올해 내내 내 손에 들려있던 다이어리를 읽어보니 ‘나름 열심히 살았구나’ 싶었다. 누구는 엄마 전화 한통에 가고 싶은 대학 문이 열리고 누군가는 코너링만 잘 해도 편한 꿀보직을 보장받지만, 나에게 올해는 끊임없이 계획을 세우는 한 해였다. 차근차근 밟아 올라가기 보다는 어떻게 될지 몰라 계속 수정해야하는 계획들이었다. ‘육십 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아직은 젊어서 못 간다고 전해라 칠십 세에 저 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할 일이 아직 남아 못 간다고 전해라…’ 작년 이맘때 유행했던 노래 ‘백세인생’의 가사다. 아직 누가 데려올 나이는 아니건만, 이십 몇세 젊은 나는 뭣이 바쁘지도 모른 채 쫓겨 왔다. 한 해를 시작하는 자세가 희망으로만 가득 차 있으면 좋으련만, 현실은 그렇지만은 않다. “XX, 요즘 어떻게 지내?” “잘 못 지내지 뭐…” “아, 저번에 ㅇㅇ회사 최종에서 떨어졌다고 했지?” “응, 이제 그냥 공무원 준비해야 하는 거 아닌지 고민하는 거 같더라고.” “XX가 몇 살이지? 내년이면 28(스물여덟)인가? 좀 많긴 하네… 한 살만 어렸어도 일 년 더 준비하라고 말할 텐데.” 잠자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속이 답답해졌다. 남 이야기가 아니다. 나 역시 스물 중반을 넘어 확실한 후반기로 접어들었다. 아직도 나를 포함한 내 주변에는 사회 속 자기자리를 찾기 위해 분투하는 (사실 백수인) 친구들이 많다. 아직 무언가를 제대로 시작도 하지 못한 우리는 정말 뒤쳐진 걸까. 자주 방문하는 취업준비생 온라인 카페에도 이런 글들은 심심치 않게 올라온다. ‘29세 여자입니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다시 도전하고 싶습니다. 너무 이상적인 도전일까요? 현실적인 조언 부탁드려요.’ 나라면 당신의 도전을 응원한다고, 한번 사는 인생 하고 싶은 일 하고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고 북돋아주고 싶다. 하지만 댓글의 ‘현실적인’ 조언들은 그렇지만은 않다. 응원하는 댓글만큼 요즘 취업이 쉽지 않으니 회사 그만두지 마시고 병행하라, 그만두시면 후회할 것 같으니 지금 위치에서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찾아보시라는 반응도 많다. 흔히들 말하는 ‘청춘’의 무모함을 즐기기에 20대 후반은 너무 늦어버린 걸까. 사진 출처 - Pixabay 그 나이에 기대되는 일정한 행동을 사회학에서는 ‘생애주기’라고 부른다. 10대에는 학교를 다니고 20대에는 졸업 후 취직을 하고, 30대엔 결혼을 해 가정을 꾸리고 애들을 키우는 것이다. 이 주기에 벗어나는 행동을 하면 주위에서는 불안하게 생각하기 마련이다. 사회 구성원의 다수가 걷는 길에서 벗어나 있다는 의미니까. 물론 생애주기는 사회를 반영해 변화한다. 평균 혼인 연령이 점차 올라가 30대 초반으로 바뀐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사회 현상이 일시적인 것이 아닌 하나의 흐름으로 인정받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이 사이에 문화적 잣대가 현상을 따라가지 못하는 아노미가 발생한다. 요즘 20대는 이 아노미를 지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늦었다고 자책할 필요는 없다. 어깨를 짓누르는 부담감이 느껴질 땐, 잠시 시대 탓을 하는 거다. ‘나는 시기를 잘못 타고 난 것이다’라고. 내가 이러려고 태어났나하는 자괴감은 한사람만으로 족하다. 생애주기를 벗어나 살면 또 어떤가. 육십 세도 젊고 칠십 세에도 할 일이 많다는 데 20대면 아직 병아리다. 노래처럼 백 살까지 산다면 아직 인생의 3분의 1도 안 살았는데, 벌써 어떻게 살지 다 정해뒀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거라 생각한다. 불안해도, 자신의 주기를 만들면서 살면 되는 거다. 아무것도 시작하지 못한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못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멋대로 내 젊음을 폄하하는 말에 수긍하고 싶지 않다. 나는, 우리는 아직 젊으니까! 이빛나씨는 청년과 여성 인권에 관심을 갖고 대학교 학보사에서 편집장으로 활동 중인 학생입니다.
2017-06-28 | hrights | 조회: 30 | 추천: 1